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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시민의 두 정체성: 소금과 빛
by 이춘성
2020-09-18
1. 하나님 나라와 정체성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의 개념은 18세기 이후에 서구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일종의 시민 구성원들 사이의 계약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의 3대 요소 하면 국민, 영토, 주권이라 한다. 거주지가 있고 주권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 간의 계약 관계 속에서 정부와 국가가 탄생한다. 하지만 고대에는 국가의 개념이 지금과 차이가 있다. 고대의 나라란 국가(Nation)보다는 왕국(Kingdom)에 더 가깝다. 약 2000년 전의 나라는 지금처럼 획일화된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개념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에게 나라는 다윗 왕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의 개념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포로 이후에 메시아의 의미가 더하여져, 국가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메시아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지금도 적용된다. 현재 우리 신자들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 개인의 주권을 굴복시키고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나라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구호로 끝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그것을 필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윤리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산상설교의 시작 부분의 소금과 빛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마 5:13-16)는 이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예수님은 신자의 정체성을 두 단어로 규정하셨다. ‘소금’과 ‘빛’이다.2. 로마의 소금과 하나님 나라의 소금첫 번째는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다.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라는 선언이다.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이다. 땅이란 단어는 세상의 물질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세상을 땅 혹은 흙이라는 물성을 지닌 물질로 이해하고 이 물질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다른 물질이 소금이라는 것이다. 또한 소금의 짠맛은 그 특유의 짠맛 때문에 물질이 변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준다. 구약 성경에서 소금에 대해 언급된 구절을 찾아보면 대부분 변치 않고 원래의 모습을 지키는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런 소금의 기능을 성결하게 하는 기능이라고도 규정한다(출 30:35).당시에 이스라엘과 주변의 사람들은 사해에서 생산된 소금을 사용하였다. 바닷물을 정제하여 소금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로마에서 상용화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로마는 소금을 생산하는 기술 때문에 막대한 부를 얻었고, 그 후에 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의 평화란 뜻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로마의 막대한 군사력을 통한 평화의 시대, 그러나 로마만의 평화의 시대를 견인한 권력은 소금에서 나왔다. 라틴어 ‘sal’은 소금이란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솔져(soldier), 샐러리(salary), 샐러드(salad) 등의 영어 단어들이다. 로마에서 소금을 임금으로 받았던 군인들을 솔져라 불렀으며, 그 군인들의 급여가 샐러리였다. 후에 소금에 절인 채소를 샐러드라고 불렀다. 로마는 소금 생산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 제일의 강국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소금이 지니는 강력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예수님의 소금 정체성의 선언은 하나님 나라는 소금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의 막강한 힘에 대항할 만큼의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정체성에 대한 선언은 우리가 지금 느끼는 충격보다 더 강력하였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넘어서는 더 큰 권위와 힘을 의미하였다. 소금으로 민족과 종교를 지배하고 굴복시키는 로마의 권력과 권위가 아닌 이보다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3. 참된 권위와 거짓 권위만약 소금이 특유의 짠맛이 없다면 그 소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그러한 소금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순도 높은 로마의 소금과 달리 순도가 높지 않고 불순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소금이 짠맛의 기능을 충분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런 소금은 소금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소금처럼 투명하지만, 물에 녹지 않는 알갱이에 불과하며, 단지 쓰레기 덩어리였다. 로마의 권력, 권위에 대항하여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할 제자와 신자들이 세상의 순도 높은 소금 보다 그 순도가 낮고 불순물이 가득해서 정작 소금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상의 웃음거리, 더 나아가 예수님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소금이라는 정체성은 세상의 순도 보다 더 높고 성결한 그 무엇을 요구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위가 세상에 세워지는 것이다.4. 소금의 존재감과 지혜예수님이 제자들을 소금이라 규정하실 때, 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상승했을 것이다. 소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로마의 막강한 소금의 권력에 대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쓸모없는 소금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 중에 소금처럼 생긴 쓸모없는 소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금이란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성경학자들은 소금이 주는 은유가 지혜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당시 랍비 문헌을 연구하면 소금을 지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4장 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는 소금이 말, 더 자세히는 말의 내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말로 표현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프란스(R. T. France)는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가 짠맛을 잃은 소금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감, 자존감은 지혜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자의 존재를 세우는 지혜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제자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앎을 통해 순도 높은 소금의 존재감과 기독교 윤리를 세운다.5. 그리스의 빛과 하나님 나라의 빛두 번째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라고 선언하셨다. 이것도 직역하면 “너희는 질서의 빛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cosmos)는 ‘질서’의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도 구체적인 통치 질서와 법이 있다. 그리고 ‘빛’은 이 질서를 세상에 밝히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 당시 그리스 철학자들도 ‘빛’을 ‘이성’, ‘오성’의 유비로 사용하였다. 이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삶의 원리(윤리)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성인 자유인 중에서도 소수의 철학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질서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빛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능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9:5;요 12:35-36, 46).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밝히는 참 빛이 예수님이다. 만약 어둠 속에서 길을 찾던 어떤 여행자에게 빛이 비치고 그가 가야할 길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이것은 이들에게 복음일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고 복음이다.6. 빛을 본 사람의 삶빛, 바로 복음을 접한 자의 삶이 요한복음 9장에 나와 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떤 사람을 만났다. 이때 난데없이 제자들 사이에서 신학 논쟁이 일어났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자는 왜 시각장애인이 되었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원인을 밝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이들의 대화의 주제를 바꾸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호수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이 사람은 말씀대로 하였고, 그는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다.그런데 이 기적이 일어난 때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빛을 보았다는 놀라운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시 신학 논쟁을 시작하였다. 율법을 어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하였다. 예수님과 시각장애인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들은 기적이 일어나고 진리의 빛이 비취는 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0–33).바리새인은 진리를 말하는 시각장애인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 빛을 본 자들, 빛을 통해 사실을 본 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자신이 본 빛을 증거 한다. 그래서 그들도 그 빛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에게 주신 그들의 정체성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진리를 알리고 그 길로 인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은 신자의 삶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 이유이며 목적이다. 하지만 빛과 소금의 인생을 살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7. 도덕적 우월주의가 아닌 감동을 통해(소금과 빛의 역할)예수님의 삶은 빛이 되어 스스로 빛나고 주목받는 인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빛이라 하면 주목받고 돋보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예수님은 주변을 밝게 하여 빛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을 알게 하는 것이 빛의 역할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종종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주변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덕적인 원리와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그러기에 이들은 빛의 자존감을 자랑하지 않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이 하나님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겸손이다. 교만한 빛은 빛이 아니다. 나만을 따라오라는 것, 주목하라는 것은 기독교의 빛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빛이다. 하나님 나라의 빛은 내가 아닌 타인과 하나님을 빛나게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 주변에 있으면 그 사람은 그가 당연히 가야 할 방향을 찾고 성부 하나님을 만난다.뉴욕 시 한 가운데 위치한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목회하는 팀 켈러(Timothy J. Keller) 목사는 성경의 복음과 세상의 복음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더 나아가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 말하였다. 켈러 목사는 1997년 5월 4일 주일 예배 “Thomas Meets Jesus”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세상의 복음은 ‘나(I)’, ‘자아(ego)’에 대해서 말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그(He)’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설교하였다. 복음은 내가 아닌 나 밖의 존재에 대한 소식이며, 관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을 먹을지, 내가 누구인지 등 인간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정작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벗어나야 함에도 말이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나 밖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기독교의 복음은 나를 벗어나 나 밖의 어떤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나와 우리를 보게 한다. 만약 기독교가 세상과 같이 나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나’라는 유사 복음을 말하는 아류 중의 하나일 뿐, 유일한 ‘그 복음’(The Gospel)이 될 수 없다. 오직 기독교만이 ‘나’가 아닌 ‘나 밖’을 보게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나 밖의 두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과 세상의 타자들이다. 먼저는 하나님을 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타인과 세계를 만난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타인을 마주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다시 어려움에 직면한다. 예수의 눈은 있는데, 예수님의 손과 발은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괴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빛이라는 증거이다. 빛과 소금의 삶을 매진해야 하는 우리 삶의 이유이다. 빛이 눈에서 손과 발로 내려 올 때까지….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말씀처럼 빛과 소금의 정체성은 세상을 감동시킬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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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로 도전받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by 장대선
2020-09-17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헌법적으로 ‘정교분리’(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입장이 너무도 분명하지만, 소위 극우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여러 정책들에 대한 비판과 성명, 그리고 가두시위까지 불사하는 것을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을 스스로 깨뜨리는 모양새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통해 오히려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교회와 국가가 철저히 분리되어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한 논의와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즉 어떤 의미에서 정교분리의 원칙이야말로 현실 가운데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론적인 원칙에 불과하다.사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처음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용인되고 제국의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는 그야말로 ‘황제’의 통제 아래에 기독교가 존재하며 확장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Ⅰ, 재위 306-337)야말로 국가교회의 원형을 만든 가장 대표적 인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국가교회로서의 기독교는 중세시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황제까지도 교회에 복속되는 역전이 이뤄졌는데, 제국을 아우르는 교황의 막강한 위세를 지녔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바로 그러한 역전의 대표적인 체제였을 것이다. ‘세속화’의 본질, ‘이원론’에 있어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흔히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를 ‘신정정치’(theocracy)의 정치체제였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사회는 결코 신정정치의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왕’과 ‘제사장’의 권한이 엄격히 구별되며, 또한 왕과 제사장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체제 가운데 있었다. 특별히 ‘왕’뿐 아니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는 자들이었으며,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서로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구별되는 독특한 체제야말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이르기 까지 지지하게 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진정하고도 바람직한 관계설정과 체제였다.그런데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적인 기초와 19세기의 본격적인 ‘세속화’(secularization) 가운데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철저히 분리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사실 세속화의 본질인 ‘이원론’(dualisme)에 근거한 하나님의 소외와 배제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은 저 멀리 천상으로 축출되고, 지상의 모든 영역들은 철저히 하나님과 무관한 인간의 영역, 즉 ‘세속’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론적 배경 가운데서 급기야 ‘사신신학’(Gott-ist-tot-Theologie)이라는 괴물까지도 세속적 교회들 가운데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즉 일부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국가 외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지지하는 정교분리의 원칙이란, 사실 바로 이러한 세속화를 향한 이론적 디딤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그러나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팬데믹(pandemic)의 상황 가운데서의 방역을 위해 여러 나라들이 시행한 국가적 통제 가운데서, 현실 가운데 정교분리의 원칙이 엄격히 지켜질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되고 말았다. 오히려 방역을 위해 종교적인 모임과 회합들조차도 잠정적으로 통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뜻하지 않게 봉착하면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설정에 있어서의 분별의 문제가 우리 현실상황의 수면 위로 불쑥 떠오르게 된 것이다.그리스도인의 자유 … 강제할 수 없는 자유그런데 교회와 국가의 행정력에 의한 예배의 통제에 있어서 많은 신자들이 용인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국가와 관원들이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비판의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약 4:12; 롬 14:4),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건 예배의 문제이건 어떤 것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행 4:19, 5:29; 고전 7:23; 마 23:8-10; 고후 1:24; 마 15:9).”(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 2항)는 신앙고백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정적 명령을 현재 여러 국가들의 행정부가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해묵은 이데올로기(Ideology)의 문제까지 더해져서, 소위 좌파정권의 기독교 억압을 포석으로 하는 정권 차원의 정책이라고 하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어서, 그 자체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가 결코 콘크리트 장벽과 같은 것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별개일 수가 없음을 암묵적으로 입증하고 있다.하지만 사실 ‘그리스도인의 자유’, 혹은 ‘양심의 자유’라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 대해 국가와 관원들이 결코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얻게 된 심령의 참된 자유로움과 아울러 그 어떤 인위적인 것이나 강제적인 조치에 의해 그 자유를 억제하거나 억압할 수가 없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 2항의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건 예배의 문제이건 어떤 것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고 한 문구는, 곧장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양심의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골 2:20, 22-23; 갈 1:10, 2:4-5, 5:1). 그리고 ‘맹목적인 신앙’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롬 10:17, 14:23; 사 8:20; 행 17:11; 요 4:22; 호 5:11; 계 13:12, 16-17; 렘 8:9).”라는 문구로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문구로 된 신앙고백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독교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근거로 광장에 나가서 반정부적인 시위를 벌였던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이자 양심의 자유를 저버린 행동을 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권위의 강요에 의해서든 금전적인 강요에 의해서든 간에, 별 깊은 사고와 통찰이 없이 군중심리로 따라 나간 자들까지도 모두 ‘맹목적인 신앙’ 혹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양심의 자유를 그 스스로 파괴한 것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성경을 따르고자 하는 장로교회들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판) 제20장은 4항에서 또한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정하심으로 세운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상호간 보존하게 하기 위해 의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의 권세이거나 교회의 권세이거나 간에 어떠한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마 12:25).”라고 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는 것처럼 보이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할 때에도, 혹여 그것이 합법적인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합법적[법률이나 제도로 보장된]이고 정중하게[정식적이고 불필요한 잡음과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지 않게] 이의를 제기해야만 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의 자유 … 스스로 저버리기 쉬워그러나 사실 우리의 신앙에 있어 양심의 자유는 결코 인위적인 법률이나 억지에 의해 제한되거나 속박될 수가 없는 성격을 지닌다.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가운데서 얻게 되는 자유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 곧 원죄(original sin)와 그로 말미암은 죄책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또한 정죄와 그로인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자유이다. 그 뿐 아니라 무엇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로서, 반드시 지켜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으로서의 율법에서 온전히 해방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으로 인해 얻게 되는 자유와 적극적인 율법에의 순종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능동적이고 진정한 자유다.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한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한 바로 그 자유함과 해방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자 양심의 자유인 것이다. 그런 자유를 그 어떤 정권, 그 어떤 이데올로기, 그 어떤 정책이 방해하거나 파괴할 수가 있겠는가?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있어 우리들이 항상 유의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자유를 가장 적극적으로 저버리거나 파괴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무지와 그로 인한 연약함이라는 점이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우리에게 가해진 탄압과 핍박, 그리고 모진 고문과 사형의 박해 가운데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신앙의 자유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속에 있는 욕망과 비겁함으로 말미암아 일본신사에 참배하는 것조차도 배교와는 무관한 국가적 충성이라 변명했던 것,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맞춰서 기독교 스스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온갖 의식들과 미신적인 것들까지 예배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여겼던 역사야말로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저버린 생생한 실례인 것이다.지금,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누구에게 매여 있는가?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심각한 위기와 어려움이 생길 때에, 과연 우리들은 누구를 의지하는가? 당장에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목사를 찾거나, 심지어 도움을 주는 교회의 목사와 그 교회의 규모를 의식하여 맹목적으로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우리의 연약함과 종속됨이야말로 양심의 자유는 물론이고 이성의 자유조차도 저버리고 스스로를 노예와 같이 속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직시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교회 안에서 누군가 마치 독재자와 같이 우뚝 설 때에, 그 자가 목사이거나 장로이거나, 심지어 집사 혹은 회중(flock)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제정된바 합당한 교회의 질서와 상관이 없이 자신의 의사를 투영하고 관철시키는 독재자로서, 교회 안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옭아매는 적그리스도(antichrist)와도 같은 행실을 일삼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유념하고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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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교회가 나를 해고했다. 이제 어떡하지?
by Jeremy Todd
2020-09-16
압도적인 투표로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기로 했다는 그 교회의 전화를 받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와 교인들은 흥분했고,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빛났다.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고 나는 잊을 수 없는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몇 가정이 나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나를 해고했고 나는 사역지를 떠나야만 했다. 목사를 해고할 때 성경적인 바른 이유도 있겠지만, 강제로 쫓겨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선택도 없다고 느끼면서 교회를 떠나는 목사의 경우라면, 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긴 걸까? 그리고 그런 해고를 당하는 경우 어떻게 생각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분명히 잘못된 이유로 교회에서 해고되었다. 그런 해고를 당하고 난 이후 깨닫게 된 다섯 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 싶다.1.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라해고되거나 사임하고 난 이후는 고독의 시간이다. 실패, 후회, 불확실 등의 감정이 당신을 감쌀 것이다. 자존심은 한 순간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인생과 사역에 관해 “당신이” 가졌던 계획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런 어두운 날을 만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찾아야 한다.그런 일은 왜 당신에게만 생기는 거냐고 사탄은 속삭일 것이다. 믿지 마라.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당신이 겪은 일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 그로 인한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해고로 인해 고통과 불확실성을 겪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2. 슬퍼하고 치유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라당신이 겪은 건 일종의 영혼의 트라우마이고 그로 인해 받은 상처는 생각보다 더 깊을 것이다. 조금의 안도감도 주지 않겠지만, 단지 직장을 잃은 것 보다 더 큰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당신은 지금 주님께서 당신을 믿고 맡기셨던 지역교회를 잃은 것이다. 시시비비를 떠나서 이런 자각은 고통스럽다. 고통은 몸이 잘리는 것과 다르지 않고 상처는 결코 빨리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크면 클수록, 당장이라도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그런 충동을 거부해야 한다. 당장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팔다리가 잘린 환자의 상처 부위에 대일밴드를 붙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당신에게도 또 가족과 미래에 만날 교회에게도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자존심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아주 잠시라도 사역 외에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보라. 설교 초청이 온다고 해도, 또 청빙 인터뷰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거절하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공개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좋은 선택이다. 대신 교인들을 돌보던 삶에서 잠시 떨어져서 오로지 당신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상처를 치유할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3.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라, 그러나 다시 교회를 시작하지 마라지금 상황을 교회를 개척하는 기회로 바라보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아니, 유혹이 아니라 기회가 맞다며 충동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절대 교회를 개척하면 안 된다.개척을 시작해야 하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당신도 또 당신에게 그런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상처받은 사람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상처를 유발할 수 있다. 대신 건강한 교회를 찾고 조사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또 그런 교회를 찾아 뿌리를 내려 보라.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존재한다. 건강한 공동체를 찾는데 이사까지 해야 한다면, 기꺼이 이사를 가라.치유 과정에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지금 당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랑과 지원 그리고 격려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힘들겠지만, 이런 시간을 하나의 선물로 바라보라. 지역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것이고, 또 당신 속에 남은 쓴 뿌리의 원인을 파악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겪은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소그룹에 참여하는 게 꺼려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당신과 가족이 한 단계 더 도약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사랑과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교회로 하여금 당신을 다시 건강하게 회복시키도록 하라. 그건 결국 미래의 사역에 필요한 능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큰 도움일 될 것이다. 4. 주님을 기다려라기다림은 힘들지만 그 속에는 목적이 있다. 오월에 꽃이 피기 위해서 사월에 비가 와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꽃이 자라고 향기를 내기 위해서는 비가 필요하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준비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 중 하나이다.지금과 같은 시간은 다름 아니라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역을 바라보고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준비한 기회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과거 그토록 불타던 목양 사역에 대한 열정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설혹 그렇다고 해도, 괜찮다. 주님께서는 목양 사역 밖에도 삶과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그와는 반대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양 사역과 지역 교회에 대한 사랑이 더 크게 불타고 있음을 깨달을 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라. 부서지고 상처받은 마음을 주님께서 치유하시도록 기다리라. 가장 큰 소리로 비판하던 사람들로부터라도 배울 수 있도록 주님이 도우신다. 기다리라.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역에 마음이 준비될 수 있도록 주님이 도우신다. 기다리라. 5.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안식하라“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지금 당장은 마음 속에 대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에는 당신이 지금 처한 상황도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 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누가 감히 당신을 대적하겠는가(롬 8:31)? 하나님은 아직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인가?비록 부당한 이유로 해고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건 결코 우연히 생긴 사고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지금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y Church Fired Me as Pastor. Now What?번역: 무제
목회
난관
기다림
청빙
공동체
교회개척
사임
해고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는 여덟 가지
by Matt Smethurst
2020-09-15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다다르는 길은 오로지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 계시 또는 추측,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우리가 추측하는 것이다.그리고 중요한 건,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한 권의 책을 통해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 위해, 달리 말하면 우리와 친구가 되시기 위해 “하나님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포기했다.” 성경은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기 위한 만능 패스이다. 사실상 성경은 그 누구나 인정하듯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다. 성경에 찬성하든지 아니면 반대하든지 간에 성경에 관한 글들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쓰여지고 있다.‘성경을 펴기 전에’(Before You Open Your Bible)에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접근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성경은 성경에 대해서 스스로를 어떻게 증거하고 있을까? 여기 여덟 가지가 있다.1.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성경이 영감을 받았다고 할 때 이건 무슨 의미일까? 영감은 하나님과 성경 저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그렇다고 오늘날 흔히 쓰는 식의 영감을 받은 건 아니다. 바울이 아름다운 석양을 보면서 영감을 받아 갈라디아서를 쓴 게 아니다. 또한 바울이 어떤 최면 비슷한 상태(catatonic state)에서 친구에게 몇 단어를 암송하고는 곧 양피지를 집어들고 “하나님이 뭘 썼는지 보자!”라고 말한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이다. 영감받았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성경 전체는 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성경을 흔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그럼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면, 모세, 다윗 그리고 바울과 요한 같은 사람은 다 뭐란 말인가? 성경을 쓴 저자는 그들이 아니던가? 맞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쓰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했다.“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다른 말로 하면, 인간 저자들이 글을 쓸 때 하나님이 거기에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확실하게 개입하셨다는 것이다. 한 글자를 더 쓰지 않도록 하셨고, 한 글자도 덜 쓰도록 그냥 두시지 않으셨다.그렇다고 이런 저자가 단지 수동적인 로봇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개성 또는 지성을 무시하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들 또한 쓰면서 생각하고 느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독특한 개성과 교육 그리고 배경과 경험을 사용해서 영감을 주셨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쓰도록 하셨다.2. 성경은 진리이다진리이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진리의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성경 속에 있는 “영적인” 개념들을 다 진리로 여기지만 다른 내용들, 예를 들어 역사적 또는 지리적 세부 사항 등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진실하게 말하는 주제의 종류에 대해서 그 어떤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부분에 대해 성경이 정말로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완벽하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부분도 진짜 맞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보면 우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진실성에 대한 많은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예, 시 12:6; 19:7–9; 119:160; 잠 30:5–6; 요 10:35; 17:17). 모든 말씀은 흠이 없고(시 12:6; 잠 30:5), 영원하고(시 119:89; 사 40:8; 마 24:35), 깰 수 없고(요 10:35), 완전함에 경계가 없고(시 119:96), 그리고 완벽하게 믿을 수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벧후 1:19).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이 사실을 확인하셨다. “말씀은 진리이다”(요 17:17). 성경의 진리됨은 워낙 포괄적으로 당연시되고 있기에 어떤 주장을 하는 전체 내용이 한 단어를 어떻게 불렀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는 경우도 있고(마 22:45), 또 특정 명사의 숫자에 달려있는 경우도 있으며(갈 3:16), 심지어 동사의 시제에 달려있는 경우도(마 22:32) 있을 정도이다.그렇기에 성경은 제대로만 해석된다면 결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없다. 성경이 하는 말은 모두 하나님 말씀이다.3. 성경은 권위가 있다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한 이 우주를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그의 사랑의 권위는 그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났다. 하나님은 자신과 말씀을 아예 하나로 간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믿지 않거나 거역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거역하는 것과 같다. 물론 성경이 유일한 권위는 아니다. 부모(엡 6:1–2), 목사(히 13:17; 벧전 5:5), 그리고 정부 관리(롬 13:1–7; 벧전 2:13–14)와 같은 다른 권위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권위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을 수는 없다. 성경은 바로 대법원이다. 이것은 모든 신념, 가치, 의견, 진술 및 설교의 정확성은 오로지 다음 질문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가?” 예수님 자신이 “성경의 모든 부분, 모든 요소는 결코 침범되어서는 안 되는 권위”라고 인정하셨다.왕은 명령하지 충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J. C. 라일(J. C. Ryle)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을 가진 자는 행복하다. 성경을 읽는 자는 더 행복하다. 가장 행복한 자는 단지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성경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라일의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사는 문화 및 사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진정한 생명과 자유를 찾을 수 있다.4. 성경은 명확하다성경은 고대 문서이다. 그래서 생소할 수도 있다. 어떤 부분들은 혼란스럽기도 하다(벧후 3:16). 그럼에도 성경은 충분히 명확하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하나님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신 6:6-7).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은 어린아이가 건너갈 수 있을 정도로 얕지만 또 동시에 코끼리가 수영을 해야 할 정도로 깊다. 이 말은 참으로 심오할 정도로 옳다. 때때로 성경은 복잡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실 그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애초에 성경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성경과 관련해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경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 때문이 아니라 이해하는 부분 때문이다.” 즉, 성경의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아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어렵다는 것이다. 5. 성경은 충분하다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히 믿고, 완벽하게 순종하고 또 풍성하게 즐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말씀을 온전히 포함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마찬가지로 바울도 성경은 너무도 완벽하기 때문에 “모든 선한 일에 완벽하게 충분하다”라고 했다. “모든” 일에, “완벽하게” 충분하지 결코 “일부분”과 “대부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딤후 3:16). 성경 이상으로 더 충분할 수는 없다. 성경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준다. 성경이 알려주는 진리는 100%는 아니다. 그러나 충분하다(신 29:29; 잠 25:2). 성경에는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진리(딤후 3:15; 약 1:18, 21; 벧전 1:23)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에 순종하는데 필요한 모든 진리(딤후 3:16; 벧후 1:3–4)가 다 담겨있다. 그렇기에 성경에 내용을 추가하거나 빼는 것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신 4:2, 12:32; 잠 30:5–6).어느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 기독교의 타락은 언제나 성경의 충분성이라는 원칙에 대한 양보로부터 시작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확립한 기독교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성경에 뭔가를 추가하거나 제거함으로 시작된다. 모든 이탈은 성경에 뭔가를 플러스 하거나 또는 마이너스하는 것이다.”6. 성경은 능력이 있다성경의 궁극적인 저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경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하고(렘 23:29), 또 삶을 바꾼다(요 17:17; 참고. 롬 1:16; 살전 1:4–5).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성경에 능력이 있다는 말은 달리 하면 성경이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성령님은 성경을 사용해서 당신의 계획을 실현해 가신다(사 55:10-11).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있는 팔이 일하실 때 쓰시는 도구이다.하나님께서 단순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당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진 게 아니다. 성경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쓰여졌다.”7.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이시다많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성경은 윤리적 원칙, 도덕적 사례 또는 추상적인 인생 교훈을 모아놓은 모음집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의 소름돋는 스토리이다.그 스토리는 당신과 나에 대한 게 아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부활한 구세주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서 나타났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나중에는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45).부활하신 이후에만 이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다.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중에도 예수님은 소위 당시 “성경 전문가들”에게 이 놀라운 이야기의 주인공인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39–40, 46).그렇기에 이 말은 옳다. 구약에서 “예수님은 가려졌고,”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드러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구조는 오로지 하나님의 구속자 아들을 기다리며 비추다가 때가 되어 궁극적으로 드러내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이 성경의 드라마 속에 숨은 가장 놀라운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성경의 주인공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8. 성경은 소중하다성경은 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소중하다. 우리의 음식(렘 15:16), 생명(신 32:46–47), 위로(시 119:50), 힘(시 119:28), 인도(시 119:105), 열망(시 119:20), 소망(시 130:5), 사랑(시 119:97), 기쁨(요 15:11), 그리고 보물(시 119:72)이다.레위기와 역대기 그리고 오바댜조차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서 쓰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무엇이든지. 바울은 구약 전체가 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쓰였다고 한다. 우리의 마음을 소망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물론 저자보다 성경을 더 소중하게 하는 '성경 우상주의'(bibliolatry)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사실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시 56:4; 119:48). 그렇기에 성경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눈으로 목도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귀로 듣는 시대”를 살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하나님의 성경을 하나님의 얼굴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우리가 녹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녹는 것이다.” 또 어떤 설교자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이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렇기에 나는 성경의 음성을 들을 때면 언제나 경외감을 느낀다.”성경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무한 보물 상자이다. 성경의 주장은 이것이다. 성경은 영감 받은 말씀이며 진실 되고 권위 있으며, 명확하고, 충분하고, 능력 있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또 소중하다. 하나님께서 성경 스스로가 성경을 증거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8 Things Your Bible Says About Itself번역: 무제
복음
변증
영감받은말씀
성경우상주의
계시
추측
성경의증거
JC라일
진리
실직했지만
by Laura Baxter
2020-09-14
코로나19 여파로 직장을 잃었습니다. 실직했지만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뻔해서인지 점점 더 게으름이 주는 권태감에 지쳐가는 느낌입니다.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오히려 격려가 된다. 먼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라는 질문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평생에 걸쳐 이뤄야 할 최고의 목표이자 최상의 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게다가 게으름이 주는 무게감을 점점 더 느낀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전자기기가 넘치는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게으름을 느끼는 대신 그냥 시간의 흐름 속에서 멍하니 지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게으름과 친해져서는 안 된다(잠 16:26; 살전 5:14). 우리 삶은 생산적이고 열매 맺는 삶이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게으름이라는 죄와 맞서서 싸우고 있고, 그것은 성령님이 당신 안에서 일하신다는 증거이다.동시에 당신은 지금 영적 침체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 일이 없기에” 스스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나 역시 어떤 일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을 때를 생각해 본다. 임신해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을 때, 몇 년을 공들인 사업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가 기억난다. 용기 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특별한 뜻을 가지고 지금 그 자리에 당신이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성장시킨다.지금처럼 별난 시기에 생각해야 할 네 가지 교훈이 여기 있다.1. 실직 상태인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네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일을 하라고 명하고(출 20:9),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열매 맺는 일이 보수를 받는 일이 아님을 기억하라.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 그게 뭔지 모르겠으면 전화를 돌리고 이메일을 보내 물어 보라. 교회가 운영하는 여러 봉사단체도 알아보라. 이웃에, 양로원에, 그리고 커뮤니티 센터에도 알아보라. 이런 기관도 코로나 때문에 달라졌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2. 영성 훈련―기도와 말씀 읽기와 다른 성도들과 대화(이를 위해서는 전자기기가 도움이 된다)―을 쌓으라. 한 시간 또는 그 이상을 따로 떼어 놓고 기도하라. 도움이 되는 말씀을 골라서 암송하거나 묵상의 소재로 삼으라. 참여할 수 있는 성경공부를 찾아서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라. 은혜의 보편적인 방식에 의지하며 당신의 영적 귀를 활짝 열라. 이를 통해 지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은지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3. 꿈꾸는 시간을 가지라.코로나바이러스가 닥치기 전, 한참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에 아마 당신은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몇 가지 꿈을 뒤로 미뤄놨을 것이다. 운동을 한다거나, 취미를 갖는다거나, 집을 고친다거나 하는 계획 말이다. 어쩌면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도 바빠서 시간을 못 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전에 미뤄두었던 그런 목표를 성취할 시간이다. 시작하는 데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면, 친구들에게 결심을 먼저 이야기하고 시작하도록 하라.4.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라.당신의 가치는 직장이나 생산성에서 오는 게 아니다. 진정한 결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고 또 그 은혜가 당신을 통해 흘러넘치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다(요 15:4)). 모든 상황이 느리게 흘러갈 때 스스로 뭔가 더 활발히 움직여서 빈 공간을 채우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을까?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시 130:5-6). 당신의 초조함과 공허함을 모두 다 주님께 맡기라.침대에 누워서 지낼 때 하나님은 나를 엄마라는 바쁜 시간을 위해서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사업이 암담했던 그 시절,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은 내게 기도를 훈련시키셨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지금 그때를 되돌아볼 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이 그토록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서 나를 준비시키셨는지 놀랄 정도다. 하나님이 이와 동일한 역사를 당신의 삶에서도 이루실 것이다.원제: How Can I Glorify God When I Have No Wor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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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
게으름
카이퍼 통신 7: 영역 주권의 역사적 배경
by 김은득
2020-09-13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최근 코로나로 인해 교회와 국가의 관계(the rel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신학적 고민에 대한 반가움은 잠시였고, 그런 이슈와 연관해 영역 주권을 강조했던 저나 바빙크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제가 마르틴 루터,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등처럼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을 질투하거나 여러분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교가 완전히 분리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굳이 크리스텐덤 세계를 살았던 신학자들의 저작을 전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 생길 뿐입니다. 그런 세계의 사람들은 정부가 참된 종교의 예배를 증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정부가 특별히 선호하는 종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지다시피, 가톨릭 국가들은 가톨릭을 참된 종교로, 개신교 국가들은 개신교를 참된 종교로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 개신교 내에서 독일은 루터란을, 네덜란드는 개혁파를,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거의 국가 종교(National Church)로 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정교가 일치된 사회에서 정부의 구성원(magistrates)들은 사실상 국가 종교의 일원들이었기에, 교회와 관련된 국가의 의무, 즉 참된 종교의 예배를 증진시키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전역에 정교분리의 원칙이 적용되기 시작했는데, 네덜란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나폴레옹의 대리 정부였던 화란의 바타비안 공화국(Batavian Republic, 1795-1815)은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에 의거해 화란 개혁 교회(Nederlands Hervormde Kerk, NHK)가 누리던 특권적 지위를 폐지하였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새로운 유럽 질서를 구축한 비엔나 회의(The Congress of Vienna)를 통해 오라녀 왕가(The House of Orange)의 빌렘 1세(King William I)가 네덜란드 왕국의 군주로 복귀하면서, 국가 교회로서 화란 개혁 교회(NHK)의 지위가 회복됩니다. 문제는 빌렘 1세가 민족국가(the nation-state)를 신속히 구축하는 과정에서 바타비안 공화국의 중앙집권정책을 계승하면서 발생했습니다. 바로 1816년 화란 개혁 교회(NHK)를 정부 기관의 감독 아래 두는 일반 조례(Algemeen Reglement)를 제정한 것이었는데, 그 조례에 의하면 교회의 궁극적 존재 목적은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군주에 대한 존경과 애국심을 고양하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당시의 유럽 전체가 민족주의 의식이 서서히 고양되고 있던 터라, 이런 교회의 국가 종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흐로닝언(Groningen) 대학교의 신학자들은 외래적 요소를 제거하고 참다운 화란식 기독교 사회(a genuinely Dutch Christian Society)를 추구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민족주의적 가치 판단에 따라, 흐로닝언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14세기의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Common Life)이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에라스무스(Erasmus), 메노나이트 교단(the Mennonites),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jus)등과 같이 화란 출신들을 칭송하였습니다. 이런 흐로닝언 신학은 군주에 대한 존경와 애국심을 고양시키려는 빌렘 1세의 종교적 이상과 맞아 떨어지면서 화란 개혁 교회(NHK)를 대표하는 공적인 신학이 되었습니다. 1859년 흐로닝언 학파에서 존 칼빈과 얀 라스키(Jan Laski)의 교회론을 비교하는 에세이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바로 그 에세이 대회에서 제가 우승하면서 신학자로서 제 첫걸음을 띄었고, 이 에세이를 확장하여 쓴 글이 제 박사 논문(칼빈과 라스키의 교회론)이 된 것입니다. 그 대회를 개최한 흐로닝언 학파는 라스키가 칼빈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인데, 라스키가 화란 출신인 에라스무스와 친밀했고, 엠덴(Emden)과 런던(London)의 화란 교회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흐로닝언 학파의 문제는 바로 기독교 진리보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더 우선시하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진리가 진리 자체로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민족주의 가치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혹은 버려지기도 합니다. 또한 엄밀히 말해, 이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야 말로 화란 자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빌렘 1세의 종교적 조례로 인해 화란 개혁 교회를 감독하는 장관(Ministry of Public Worship)이 임명되었고, 이로 인해 생겨난 권력과의 밀착 현상을 흐로닝언 신학이 더욱더 강화시켰다는 점입니다. 1834년 국가 권력에 종속된 화란 개혁 교회(NHK)의 부패와 위선을 고발하면서 분리(Afscheiding)로 알려진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헨드릭 드 콕(Hendrik de Cock)이라는 흐로닝언 지역의 한 목회자가 참된 교회로의 회복을 위해 칼빈과 도르트 총회가 고백했던 신조와 예전, 교회 정치로 복귀해야함을 주창했고, 그 지역의 가난한 농부들, 자영업자들, 저학력 민중들이 가세하면서 일종의 계급 투쟁 양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드 콕의 참된 교회에 대한 강조는 빌렘 1세의 화란 개혁 교회(NHK)가 몇몇 소수의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된 거짓 교회(valsche kerk)임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저항 운동은 화란 개혁 교회(NHK)와 정부 모두에게서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 분리 운동에 참여한 모든 교회들의 모임은 금지되었고 그런 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은 법적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리 운동에 참여한 자들은 스스로를 십자가를 지는 교회(churches of the cross)로 지칭하면서 종교의 자유(freedom of religion)를 위해 기꺼이 그런 희생들을 감내하였습니다. 이 분리운동이 주축이 되어 탄생한 교단이 바로 바빙크의 모교단인 기독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 CGK)입니다. 바빙크는 이 분리운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분리 운동의 영예와 영광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바로 자유 교회(a free church)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와 교회 내 엘리트들 간의 결탁을 생각해 볼 때, 예배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모든 권리들(특히 자녀들이 정규 학교를 다닐 수 없었음)을 희생하는 태도야말로 분리운동이 강조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이 분리 운동은 당시 화란의 공적 세계에서 별 볼일 없는 대중들(kleine luyden)을 위한 운동입니다. 그들에게 칼빈주의는 외세에서 도입된 그런 사상이 아니라, 그들의 실제적인 삶에 목적과 의미를 제공하는 생동감있는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다소 종교적 엘리트들이 생각한 민족의식과 달리, 분리 운동에 참여한 일반 대중들에게 칼빈주의는 스페인의 가톨릭 왕조에서 네덜란드를 해방시킨 그런 사상적 원리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빙크는 “칼빈주의는 네덜란드라는 하나의 국민을, 하나의 민족성을, 하나의 공화국을 형성해 왔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리 운동은 그들의 관점에서 거짓 교회와의 분열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번 시작된 분열의 마인드 셋은 계속해서 분리 운동의 내부 분열들을 부추겼고, 거짓 교회와 결탁한 타락한 국가와의 결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네덜란드가 하나님을 등지고,… 만일 타락한 정부가 신실한 성도들을 박해한다면, 거룩한 나라가 아니라면, 적어도 종교의 관용이 있는 나라로 떠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그 자신이 분리 운동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건주의적, 분리주의적, 분파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예배의 자유를 이상적 모토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국을 떠나 미국을 향해 나아가는 이민의 물결에 대해서 “그런 경향성 역시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기독교의 전체 진리를 대변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국가와 사회, 예술과 학문 모든 네덜란드의 공적 영역을 타락의 상태로 내버려두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혁하는 어떤 노력도 행하지 않고 이민을 떠나는 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등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운동은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의 사상적 모체가 된 화란의 문예적-영적 부흥 운동(Reveil)입니다. 시인 빌럼 빌더데이크(Willem Bilderdijk)는 프랑스 혁명으로 대변되는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를 외세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문학, 특히 시적 상상력을 통해 화란의 민족의식(Dutch national soul)을 일깨웠습니다. 또한 그에게 화란의 민족의식은 네덜란드를 이스라엘처럼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빌더다이크의 시적 상상력은 네덜란드의 역사에 근거하는데, 구체적으로 80년 전쟁(the Eighty Years’ War) 동안 가톨릭 스페인 정부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화란 칼빈주의자들의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해방 투쟁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흥(Reveil)운동에 속한 자들은 칼빈주의 민족 국가(a Calvinist national state)와 칼빈주의 국가 교회(a Calvinist national church)를 실현하는 것을 그들의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부흥(Reveil)운동은 칼빈주의를 네덜란드의 민족적 정체성과 연결하는 면에서 분리(Afscheiding) 운동과 일치하지만, 분리 운동의 분열주의(schism)와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부흥(Reveil)운동은 국가 교회(volkskerk)의 신정주의(theocratic)적 이상향을 고수한다는 면에서 정교분리의 현대 사회에 걸맞는 비전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부흥(Reveil)운동을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변환시킨 것이 판 프린스테러(van Prinsterer)와 저의 반혁명당입니다. 지난 카이퍼 통신: 도대체 칼빈주의가 뭐길래에서 언급했듯이, 국가와 교회와 관련된 칼빈주의 교리는 저와 바빙크를 통해 정교분리의 현대 사회에 걸맞게 변화됩니다. 바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의 교리를 통해 교회와 국가 간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영역 주권 교리는 진공 상태에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 회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예정인데, 다소 판 프린스테러가 어렴풋이 구상한 것을 제가 완성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흐로닝언, 분리 운동, 부흥 운동은 제가 영역 주권 교리를 완성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사상적 배경이 됩니다. 저는 위에 언급된 학파와 운동들처럼, 모국에 대한 애정 가운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르트 신조나 부흥 운동이 소망하는 정부와 교회가 연계되는 신정주의적 이상향을 부정합니다. 더욱이 정부와 교회가 결탁하여 타락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저 역시 국가 교회와 결별하여 새로운 교단(Doleantie)을 설립하였습니다. 교회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바로 자유 교회(free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교회가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자체의 권리를 희생함으로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칼빈신학교의 존 볼트(John Bolt) 교수가 쓴 책의 타이틀 ‘자유로운 교회, 거룩한 나라: 아브라함 카이퍼의 미국적 공공신학’(A Free Church, A Holy Nation: Abraham Kuyper’s American Public Theology)이 잘 보여주듯이, 교회는 자유 교회로, 국가는 거룩한 나라로 개혁하는 것이 제가 평생토록 추구한 비전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교회가 국가를 거룩하게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국가와 관계할지 다루는 것이 바로 영역 주권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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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적 선택 교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
by Justin Dillehay
2020-09-12
언젠가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향해서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를 설교한다고 욕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건 아마도 당신이 바울처럼 칭의에 대해서 바르게 설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다음과 같은 식의 반대를 로마서 6장 1절에서 예상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따라서 우리가 설교를 듣는 사람들로부터 이와 똑같은 비난을 받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도 바울처럼 제대로 설교하고 있다는 좋은 지표가 된다.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선택교리와 관련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로마서 9장에 들어와서 바울은 무려 두 번에 걸쳐 선택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 대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반대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롬 9:14, 19). 내가 ‘자연스럽게’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예를 든 반대의 사례가 선택 교리가 전해질 때마다 어디서라도 어떤 형태로든지 나오기 때문이다. 선택 교리는 책에서 또는 설교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사실상 내가 로마서 8장을 만나고 칼빈주의자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에 관해서 바울이 말한 것과 똑같은 두 가지 반대를 하고 있었다.여기에 내가 하고 싶은 주장이 담겨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칼빈주의자가 지키는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를 가르친다. 즉, 하나님이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기로 선택했는데, 그건 그들 속에 있는 믿음 또는 열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목적에 근거해서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증거는 두 단계로 설명된다. 첫 번째로 바울은 동일한 반대 중에서도 두 가지가 여전히 칼빈주의적인 교리에 대항해서 나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그는 결코 알미니안식으로는 대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반대가 무엇인가?1. 무조건적인 선택은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으로 만든다우리는 이런 반대를 14절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은 지금 막 선택과 관련한 두 가지 사례를 구약을 통해서 논하고 있다. 첫 번째가 하나님이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선택하는 것(롬 9:6-9)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에서가 아닌 야곱을 선택하는 것(10-13)이다. 바울은 강조하기를 야곱은 에서를 제치고 선택받고 또 사랑받았는데 그건 무조건적이었다는 것이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11)여기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은 이것이다. “말도 안 돼. 하나님이 성품이나 선과 악, 그런 거 하나도 보지 않고 무조건 선택한다고? 그건 정말로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으로 만드는 소리야.”그렇기에 바울은 바로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반율법주의에 관한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바울이 이런 반발을 예상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가 지금 여기서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앞으로 생길 믿음을 미리 바라보면서 하는 조건적인 선택을 가르치는 알미니안의 경우 과연 얼마나 자주 이런 식의 반응을 불러일으킬까? 물론 이런 식의 논증이, 바울이 지금 여기서 가르치는 것이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라는 사실에 유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 아니다. 아무튼 알미니안도 하나님이 선택에 있어서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건 바울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느 쪽이 옳은지를 결론내리기 전에 먼저 바울이 무슨 근거로 “하나님께는 결코 불의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들어봐야 한다. 아마도 반대하는 사람은 바울을 오해한 거 같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살펴봐야 한다.자, 바울은 선택 교리를 향한 반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그가 이렇게 말하는가? “하나님께는 결코 불의가 있을 수 없어.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를 선택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앞으로 야곱은 신자가 되고 에서는 세속적인 인간이 될 거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렇게 이야기했나? “명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금 여기서 어떤 특정 개인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야. 어떤 민족이 특별한 쓰임을 받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대답은 둘 다 아니다. 알미니안처럼 대답하는 대신 바울은 여기서 대상이 누구라도 관계없이 당신의 자비함과 애정을 주고 싶은 이에게 쏟아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롬 9:15). 물론 성경은 에서가 사악한 인간이고 야곱을 믿는 이로 그리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선지식이 하나님이 내린 결정의 배경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또 태어나서 뭔가 선하고 악한 일을 하기도 전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이 가지는 목적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구절도 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삼하 22:26; cf. 마 5:7). 그러나 그건 로마서 9장 15절이 말하는 포인트가 아니다. 15절은 왜 어떤 사람은 더 자비함을 받는지에 대한 더 깊은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라는 15절의 말씀은 사무엘하 22장 26절의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보다 더 깊은 차원의 진리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가 궁극적으로 예견된 믿음이나 자비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은 로마서 9장 16절과 반대로 선택이 결국은 하나님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한 이유는 야곱이 에서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에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물론 에서가 야곱보다 못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현재 또는 미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가르침은 14절에서 생길 수 있는 반대를 보여주고 15절과 16절에서 그에 대한 설명이 주어진다. 그러면서 이제 두 번째 반대점으로 이어진다. 2.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책임을 훼손한다19절에 이런 반대가 나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또 하나의 사례로 바울은 출애굽기 9장 16절을 예로 든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름을 온 열방에 떨치기 위해서 바로 왕을 들어 사용한 것을 보여준다(17). 바로 거기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완악하게 하시고”라는 단어가 출애굽기 9장 16절에는 나오지 않지만 출애굽 사건을 보다 더 포괄적으로 읽음으로 하나님이 바로를 통해 이스라엘을 독립시킴과 동시에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 이스라엘을 잡고 있는 상황을 함께 설명한 것이다. 반복되는 ‘완악하게 하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결국 바로로 하여금 계속 상황을 질질 끌게 만들게 하여 궁극적으로 바로가 가진 모든 영광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에 전파되게 하기 위함이다(출 14:4; 요 2:8–11).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 결코 바로의 악한 성질로 인한 하나님의 반응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19절 속 반대를 불러일으키는데, 그와 동일한 반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생한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바로가 하나님의 목적을 이뤄드리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바로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냐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라는 무조건적인 선택 교리는 사람의 이성을 공격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완악하게 여길 자를 완악하게 만들고”라는 무조건적인 저버림(unconditional hardening)은 인간의 이성으로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반대가 나온다는 사실은 이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맞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이게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니다. 이런 오해가 행여 바울을 오해한 것은 아닌지 우리는 다시 바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그리고 여기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다시 한 번 설득력을 가진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는가? “그러나 이 사실을 기억해. 일단 바로가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고 난 이후에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거야.”그렇지 않다. 대신 바울은 감히 하나님에게 누가 이런 반대를 할 수 있는지 여부에 관해 반대자의 권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롬 9:20). 그리고 그는 그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20-21). 그 용도가 “불명예,” “진노,” 그리고 “파괴”(21-22)를 위한 것이든지 아니면 “명예,” “긍휼,” 그리고 “영광”을 위한 것이든지 간에(23) 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토기를 마구잡이로 만든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선택은 결코 토기 자체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세와 바로도 또 야곱과 에서가 한 사람으로부터 나와서 같은 자궁 안에서 살았던 것처럼(10), 다 “똑같은 토기 한 덩어리”에서 나왔다(롬 9:21). 토기가 궁극적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는 토기의 의지 또는 노력에 달린 게 아니라 오로지 “그의 진노를 보이고 열방에 그의 능력을 알리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23) 하심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코 그 누구도 그분의 긍휼이 가져다주는 영광의 풍성함을 바로 볼 수 없다.선택 교리를 바울처럼 설교하기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다. “로마서 9장에 있는 신학적 주제가 가진 중요성은 사실상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의 핵심에 이르고 있다. … 문법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증거가 요구하는 경우에 바울이 우리로 하여금 애초에 선호하는 방식과 다르게 말하도록 힘쓰게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로마서 9장을 읽을 때 당신의 생각은 바울에 가까운가 아니면 그 교리를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에 가까운가? 로마서 9장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신학적 지점을 스스로 테스트하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아주 드문 본문이다. 성경 안에서 어떤 특정한 교리에 대한 일반적인 반대가 그토록 노골적으로 묘사된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그런 반대에 대한 대답은 더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교리가 타락한 인간의 이성이 받아들이기에 얼마나 힘든 지를 생각하면 바울이 그런 드문 방식으로 성경을 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이처럼 귀한 본문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자. 스스로를 점검하라. 행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만든다는 비난 또는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어쩌면 선택 교리에 관한 설교를 바울처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제: How Romans 9 Anticipates Objections to Unconditional Elect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리
선택교리
로마서9장
칼빈주의
토기장이비유
무조건적선택
알미니안주의
반율법주의
마틴로이드존스
세속적 정의와 비판 이론에 대한 성경적 비평
by Tim Keller
2020-09-11
당면한 문제 정의라니? 도대체 무슨 정의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요즘처럼 정의에 대한 요구가 드센 적도 없다. 그러나 정의에 관해서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있다. 정의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이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경적인 정의이다. 성경 속에 실로 오래되고 풍성하고 또 포괄적이며 매력적인 정의에 대한 개념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성경적인 정의는 여러 면에서 세속적인 정의와 다르다. 그럼에도 성경 안에 풍성하게 드러난 성경적인 정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기독교인이 별로 없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현실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첫 번째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예외없이 ‘정의를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소명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결과 정의와 한 발 떨어진 교회에 실망한 젊은 기독교인은 결국 세속적인 측면에서 정의를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을 왜곡시키게 된다.정의의 역사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그의 책 ‘누구의 정의? 어떤 합리성?’(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에서 정의와 관련해 우리가 지금 처한 어려움을 잘 설명했다. 정의에 관한 모든 이해 뒤에는 언제나 다음 세 가지에 대한 철학적 믿음이 있다. 그것은 ① 인간의 본성과 목적, ② 도덕 그리고 ③ 실제적인 이성 - 즉 사물이 무엇인지 또 진정한 믿음을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인류에게는 다음 네 가지 기본이 되는 정의에 대한 역사가 있다. 전통 개념(호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성경적 개념(어거스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통합한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특히 로크, 칸트 그리고 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자유주의적 접근법이다. 초창기 계몽주의 사상가는 도덕과 정의에 대한 근본을 하나님 또는 종교에서 찾는 대신 오로지 인간의 이성에서만 찾았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우리의 사고와 느낌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도덕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도덕적인 결정은 굳이 이성보다는 감정에 충실할 때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오늘날에는 그런 흄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사고를 더 논리적인 결론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즉, 모든 도덕적인 주장은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근본을 두는 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 뿐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선호도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명한 손목시계 예화를 통해 그는 애초의 목적이 무엇인지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계가 ‘좋은 시계’인지 ‘나쁜 시계’인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시계의 목적이 무엇인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인가 아니면 못을 박는 것인가? 후자라면 시간은 틀려도 튼튼하기만 한 시계가 ‘좋은 시계’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목적이 무엇인지 규명되지 않는다면 결코 무엇이 선이고 악이라고 말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정의를 제대로 논할 수도 없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은 그냥 우연히 생긴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 중에서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인간이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인간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근거로 당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흄의 후계자들이 만든 정의에 관한 현대 이론에 따르면 대답은 이것 뿐이다. “우리가 그렇다니까 그런 거야.” 근본의 문제매킨타이어에게 많은 세속적 학자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인간에게 굳이 어떤 근본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권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니까.” 성경적 정의에 대한 간략한 요약1. 공동체 : 다른 사람들도 내가 가진 부에 대해서 권리를 가진다. 그렇기에 나는 자진해서 부를 나눠야 한다성경은 인간 세계를 상호간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구약학자 부르스 왈트케(Bruce Waltke)는 잠언이 말하는 ‘의로운 자’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의로운 자는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공동체에 유익이 있도록 하는 사람이고, 악인은 공동체에 해를 입히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다.”2. 평등 : 모든 사람은 다 고귀함을 가진 존재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4:22). 뇌물이 부정한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돈을 얼마만큼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더 우월하게 취급받게 하는 시스템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일이다. 레위기 19장 13절과 신명기 24장 14-15절도 불평등한 임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3. 공동 책임 : 나는 다른 사람이 지은 죄에도 책임이 있고 또 때로는 그 죄와 관련이 있다하나님은 종종 한 개인의 죄를 가족 또는 그가 속한 집단에게도 물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그의 조상이 지은 죄까지 회개했다(단 9). 이런 사례는 사무엘하 21장, 여호수아 7장, 그리고 민수기 16장에도 잘 드러난다. 특히 사무엘상 15장 2절과 민수기 23장 3-8절을 보면 하나님은 과거 조상의 죄를 현재의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왜 그런가?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① 집단적인 책임 : 아간의 가족(수 7)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지만 아간이 범죄하는 인간으로 자라는 데에 일조했다. 성경은 가족이 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책임을 가지는지를 여러 번 강조한다. 그렇기에 개인의 잘못은 단지 그 개인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는다. ② 집단적인 참여 : 죄악된 행동은 단지 자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모두에게,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대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출애굽기 20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죄의 책임을 후손에게도 물으신다. ③ 제도화된 죄 : 사회적인 제도는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을 더 우대하는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형사 제도에서(레 19:15), 상거래에서 생기는 고금리에서(출 22:25-27; 예 22:13) 그리고 턱 없이 적거나 지연되는 임금에서(약 5:4; 신 24:14-15) 얼마든지 불공정한 사례들이 발생한다. 일단 이런 시스템이 제도화되면 일개 개인이 저지르는 것 보다 더 큰 악이 일어난다.4. 개인적인 책임: 나는 내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로 인한 모든 결과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① 나의 결과 : 성경은 결코 누군가의 성공 또는 실패를 단지 그 사람 개인이 취한 선택의 결과로 바라보지 않는다. 가난은 개인의 실패로 인해서 오기도 하지만 환경적인 이유로 발생하기도 한다(잠 6:6-7; 23:21; 잠 13:23; cf. 출 22:21-27).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② 나의 죄 : 집단적인 죄와 악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구원을 좌우하는 궁극적인 책임은 다 개인에게 있다고 강조한다(겔 18). 신명기 24장 16절은 이 점을 분명하게 한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런 면에서 에스겔 18장은 집단적인 책임에 너무 많은 강조를 할 때 빠질지도 모르는 운명론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집단적인 죄라는 현실이 결코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도덕적인 책임까지 면죄하는 것은 아니다.5. 옹호 :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특히 관심을 쏟아야 한다어느 누구라도 차별해서 안 되지만(신 19:15), 그럼에도 특히 더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쏟아야 한다(사 1:17; 시 41:1).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가난한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특히 더 그들을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예레미아 선지자는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약한 계층을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고 있다.정의 이론의 스펙트럼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정의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 크게 다음 네 가지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이론은 다 세속적인 이론인데 다음 두 가지 가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생각과 달리 이 이론은 하나같이 이 세상에는 정의가 뿌리를 내릴 초월적이고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고 간주한다. 이 이론은 예외없이 다 테일러가 주장한 “내적 기초(immanent frame)”에 그 근거를 두는데, 한 마디로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고 또한 정의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다 인간이 생각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② 이 모든 이론은 인간 본성을 백지 상태로 바라본다. 애초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초를 가진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기에, 나중에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1.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 – ‘자유’ 공정한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킨다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부가 통제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장을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는 극도의 개인주의를 지향하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그렇기에 개인에게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온전히 다 개인의 선택 또는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기본적인 확신 때문이다.성경적 분석 :가장 먼저 자유지상주의는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개인은 단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닐 뿐더러 게다가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다. 게다가 자유지상주의는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발생하는 가난이라는 현실도 경시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자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죄악된 세상이 만들어가는 불평등한 사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두 번째로 자유지상주의는 죄가 얼마나 이 세상에 만연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인간이 만든 자유 시장이 정부보다 더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은 경시하고 있다.세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얼마든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이 단지 자기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이 사상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지 스스로에게 속하지 않았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2. 자유주의- ‘공정성’ 정의로운 사회는 모든 구성원에게 공정성을 증진시킨다언론, 재산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지상주의와 달리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교육과 의료복지에까지 확대한다. 자유주의가 자유지상주의와 특히 다른 점은 정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인데, 정부가 세금 부과 뿐 아니라 시장 관여를 통해서 부를 훨씬 더 잘 분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관점 또한 기본적으로는 자유 시장을 가장 선호한다. 자유주의는 평등한 결과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모든 개인이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지향한다. 그렇기에 개인마다 다른 결과는 결국 개인의 노력 및 노동 윤리에 따른 것이라고 바라본다.성경적 분석 :많은 학자들이 이미 밝혔듯이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인간 권리에 대한 믿음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다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자유주의 관점은 오로지 성경과 기독교가 들어간 사회에서만 만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이 관점에 얼마든지 찬성할 수 있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자유주의는 진화에 바탕을 둔 현대 사상과 결합함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 해체의 위기까지 불러오고 있다. 그렇기에 혹자는 자유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에 종교적 영향력이 큰 사회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종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로 정의가 단지 개인의 권리만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높은 도덕적인 절대성은 없다는 것이고, 그 결과 권리와 주장(rights-claims)이 충돌할 때 해결할 길이 막막해진다.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가 충돌할 때, 누가 이기는 게 맞는 걸까? 그리고 어느 한쪽의 승리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다는 것인가? 단지 숫자? 아니면 돈? 세 번째로 인간의 합리성은 결코 공정한 사회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합리성에 근거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오히려 인간의 합리성은 가난한 사람을 더 착취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3. 공리주의 – ‘행복’ 공정한 사회는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한다세 번째 이론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관련이 있는데, 오늘날 세속적인 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가진 기본 생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정의의 핵심은 최대의 숫자가 최대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결국 이 이론 또한 ‘도덕적인 절대성’이 아닌 ‘실질적인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 즉, 뭔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등장한다면, 그게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물론 공리주의는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에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는, 일종의 제한을 두는 “피해 원칙(harm principle)”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공리주의는 다수결주의이다.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늘날 투표라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리주의는 앞서 살펴본 개인을 중시하는 두 가지 사상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공리주의는 오히려 개인의 권리를 다수의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본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있다. “개인의 권리를 믿는 사람은 아마도 공리주의자가 아닐 것이다.”성경적 분석 :첫 번째로 공리주의는 창조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개인의 존엄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극소수가 감옥에 들어감으로 대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될 게 없다.두 번째로 죄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대다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악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리석고 악한 일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이는 단지 육체를 즐겁게 하는 거짓도 얼마든지 행복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피해 원칙(harm principle)”도 얼마든지 소수에게 악용될 수 있다. 대다수가 소수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면 말이다. “이건 피해가 아니야.” 과거에 인종차별이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흑인을 위한 ‘보호 조치’라고 주장했던 이들이 있다. 그게 말이 되는가? 도덕적인 절대성이 없는 상태에서 소수의 행복에 대한 보장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4. 포스트모던 – ‘권력’ 공정한 사회는 압제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배 그룹의 권력을 전복시킨다칼 막스(Karl Marx)의 가르침에서 시작한 네 번째 정의 이론은 포스트모던 비판 이론이라고 불린다. 포스트모던 비판 이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첫 번째로 사회의 모든 불평등은 불공정한 사회 구조와 시스템 때문이다. 해결책은 사회 정책 자체를 바꾸는 것이지 결코 개인적 차원에서 가능하지 않다.두 번째로 모든 예술, 종교, 철학, 도덕, 법, 미디어, 교육 등등은 다 이성 또는 진리에 의해서 형성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사회적 압력(social forces)에 의한 결과이다. 모든 것은 다 당신이 가진 계급의식과 사회적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종교적 교리도 다른 것들과 결부해서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획득하게 한다.세 번째로, 그렇기에 모든 현실은 언제나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계급은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만약에 당신이 백인이고 남자, 또 이성애자라면 당신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 반대라면 당신은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고 그 중간에는 실로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힘없는 계층에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가장 위대한 도덕적 권위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권력을 가진 계층은 어차피 그 권력으로 눈이 먼 상태이고,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 권력을 포기해야만 한다.네 번째로 권력을 가진 계층은 ‘진리 주장(truth-claim)’이라는 그들만의 언어를 통해서 지배력을 더 강화한다. 학계는 “학문의 자유”를, 기업계는 “자유 기업”을, 과학계는 “경험적 객관성”을 그리고 종교계는 “신성한 진리”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이런 가면을 벗겨야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지배 계층이 장악하고 있는 이런 언어를 전복해야 한다. 다섯 번째로 문화도 사람들처럼 상호교차성으로 인해 구성될 수 있다. 다른 문화보다 더 뛰어나거나 뒤떨어진 문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문화조차도 얼마든지 더 나은 문화와 뒤떨어진 문화로 간주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정체성은 핵심이 아니다. 부와 권력을 나누는 사회로 개편하는 데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방해가 될 뿐이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개인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집단 정체성과 집단 권리만이 진짜 중요한 것이다. 성경적 분석 :첫 번째로 전반적인 주장이 다 말이 안 된다. 다른 거 떠나서 한 가지만 보자. 가장 취약한 계급이 사회를 재편성해서 가장 권력있는 계급이 된다면, 그 계급은 왜 계속 거기 있어야 하는가? 그 계급 또한 다시 축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두 번째로, 너무 단순하다. 이 관점은 인간을 내재적으로 선하거나 또는 백지 상태로 본다. 그렇기에 인간 속 모든 악은 다 사회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단순한가?세 번째로, 이런 주장은 인간성 자체를 훼손한다. 포스트모던은 인류 전체를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고 대신 인종과 어떤 민족에 속했는가를 더 중시한다. 네 번째로, 그렇기에 이 사상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진 죄성을 부정한다. 성경은 만연한 죄가 이 세상 전체를 뒤덮고 있다고 한다. 어떤 민족이 또 어떤 문화가 죄를 더 짓거나 덜 짓는 게 아니다. 죄성에 오염된 모든 문화는 예외없이 자신만의 우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이런 성경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정 인종 또는 민족에게 더 죄가 있다는 식의 생각은 얼마든지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을 초래한다.다섯 번째로 포스트모던은 특정 그룹 간의 용서와 평화 그리고 화해가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런 시각은 지배(domination)에 치중하게 된다. 언론의 자유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같은 자유주의 가치를 단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장치로만 파악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은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불의한 상황을 인간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보고 인간을 악마화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자로 간주하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가 가져다줄 정의로운 사회를 기다리지 않는다. 성경적 정의를 다른 대안들과 비교하기첫 번째로, 오로지 성경적인 정의만이 다른 모든 사고 체계 속에서 발견되는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고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속적인 이론은 앞서 살펴본 성경적인 정의가 가진 다섯 가지 측면의 일부만을 해결할 뿐이다. 그 어떤 이론도 다섯 가지를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두 번째로 성경적 정의는 다른 대안들을 무시하거나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대안적 견해와 모순된다. (a) 성경적 정의는 다른 대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초가 탄탄하다. 왜냐하면 도적적인 절대성을 가진 하나님의 성품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대안이 기초로 삼는 것은 바람처럼 흔들리는 인간이다. (b) 성경적 정의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훨씬 더 심도 깊은 분석을 제시한다. 그 결과 불의가 다른 이론들과는 달리 훨씬 더 복잡한 상황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c) 성경적 정의는 현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범주에 맞지 않는 부와 소유권의 특성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제공한다.세 번째로, 성경적 정의에는 지배에 대한 보호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정의가 구현되려면 무엇보다 모든 개인과 모든 문화에 적용되는 도덕적 절대성이 필요하다. 사회가 만들어낸 진리와 도덕성에 의존할 때 지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기독교만이 특정 세력의 지배를 전복시킬 수 있는 진리 주장을 제시한다. (a) 기독교는 모든 답을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미스테리가 존재한다. 이 세상과 인간은 복잡하고 근본적으로 여전히 신비의 대상이다. (b) 기독교는 결코 우리의 주장을 따르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 싸우지만 궁극적으로 정의를 가져다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c) 성경의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약자의 하나님이다. 네 번째로 오로지 성경적이 정의만이 권력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급진적으로 파괴적인 사고를 가져다준다. 자유주의자까지도 포스트모던이 맹목적으로 지향하는 권력 형성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성경적인 정의만이 권력에 대한 바른 이해를 줄 뿐 아니라, 권력의 부패에 대해서도 경계하도록 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가난한 자로 왔다. 그는 사회적 권력을 가진 엘리트층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모든 능력과 특권을 포기한, 자신의 “영광”까지 포기한 하나님을 만난다. 왜? 그는 그런 모습으로 약하고 힘없는 인간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빌 2:5-8). 그리고 그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다시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영광을 받으셨다(빌 2:5:9-11).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모든 능력을 기꺼이 포기했기에 예수님은 다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성경적 권위는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독교는 결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이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킨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능력을 다 포기하고 오셨듯이, 우리도 권력에 관해 변화된 태도를 가지게 된다. 이 세상에 성경적 정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기독교인은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기독교인은 자신의 장자권을 높이 들고 정의를 행하여야 한다. 긍휼함을 사랑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미 6:8). 출처: https://quarterly.gospelinlife.com원제: A Biblical Critique of Secular Justice and Critical Theor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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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경을 읽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울까?
by Megan Hill
2020-09-10
3월 이후부터 나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패턴을 유지하는 데 고군분투하고 있다. 어떤 날은 그 해에 세운 성경읽기 일정표에서 다음 장으로 그냥 넘어간다. 간혹 남편에게 읽어 달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그게 옳지 않은 것 같아서 그날 읽어야 할 성경 말씀을 열심히 살펴 읽는다. 하지만 어떤 날은 이 모든 걸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때도 있다.살펴보니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최근 바나 그룹의 연구와 미국성서공회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인 중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수가 이번 팬데믹 기간 중에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2019년에는 성경을 매일 펼쳐서 읽는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13.7%였는데, 올해에는 8.5%로 줄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재조정된 일정과 이에 상응하는 도미노 현상의 영향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조사 결과는 예배 참석과 개인 성경읽기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점도 시사하고 있다.사람들이 교회 활동에 덜 참여하게 되면, 개인 성경읽기도 더 줄어든다.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러 해 동안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목소리들은 지역 교회와 상관없이 역동적으로 개별적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교회와는 거리를 둔 채 신앙생활을 추구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어가는 것 같지 않다.교회 모임이 금지되거나 제한되면서 환대가 줄어들고, 기도모임과 소그룹 모임이 줌(Zoom)으로 옮겨가면서 우리는 진정한 교회 생활의 모습들을 놓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성경을 펼쳐 읽는 일도 잘 하고 있지 못하다.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평생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연합된 예배에 관해 글을 써 온 나로서는 최근의 연구 결과가 그리 놀랍지 않다. 우리가 영적으로 충만하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필요하다.성경의 중심성지난 몇 달 동안 흡족하지 못한 성경읽기 패턴을 회개하면서, 내게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시간 부족이나 쌓인 스트레스, 늘어나는 피로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재택근무를 하며 자녀들의 인터넷 수업을 감독하는 것이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이 내가 레위기를 읽는 걸 못하게 하는 건 아니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내가 성경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이다. 무흠하고 무오하며 권위 있고 충만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금은보화와 꿀처럼 소중히 여겨야만 한다. 하지만 나 혼자로서는 성경을 그냥 다른 책처럼 여기며 소홀히 하기 쉽다. 좋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닌 듯 말이다.감사하게도, 주님은 우리가 고독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교회 안에 세우셨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교회에서 함께 드리는 예배는 크리스천의 삶에서 성경의 중심성을 더욱 확증하고 있다. 교회에서 우리는 낭독되고 선포되는 말씀을 함께 듣는다. 말씀으로 노래하고 언약의 말씀을 기반으로 기도를 한다. 그리고 성찬예식에서는 가시적이고 가현적인 말씀을 받는다.교회에서는 우리가 소선지서와 같이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본문도 낭독되는 것을 들으며, 그 구절들이 설명될 때 그 말씀이 명확하며 우리의 영혼에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마다 만찬을 고대하는 우리의 입맛처럼 갈급함이 있다.개인이나 가족 성경읽기 시간이 주중에 흔들렸다면, 주일에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말씀의 빛(시 119:105)과 양식(마 4:4)과 지혜(시 19:7)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구름 같은 증인들물론 규칙적이고 개인적인 성경읽기 시간이 즉각적으로 효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며칠이고 복음서들을 읽고, 몇 주 동안 시편을 읽고, 몇 달 동안 구약의 이야기들을 읽어도 내 삶에 극적으로 어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폭넓은 관점이 필요하다.주님께서 우리를 교회 안에 두시고 도움을 얻도록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로 모인 회중은 구름 같은 증인으로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의 능력을 고백하게 된다.교회에서 사람들과 교류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깊이 변화된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그들은 하나님을 싫어했고 그분의 율법을 거역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비웃고 그분의 백성들에게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들과 함께 성경을 펼치자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성령이 역사하시는 순간부터 그들의 삶은 하나님 말씀으로 구체화된다. 그들의 행동과 감정과 갈망은 그들 자신의 사악한 성향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선포하신 뜻에 기반을 두게 된다. 그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르치신 대로 그분께 순종하여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한다. 조금씩 그들은 말씀을 묵상하며 점점 더 그리스도처럼 되어 간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을 항상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이들의 빛에서 그 변화를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여러 해를 거치면서 그리고 여러 상황 가운데, 교회 성도들은 성경이 고통 중에 위로가 되며, 어려움 중에 도움이 되고, 불확실성 가운데 방향성을 제시하며, 괴로움 중에 소망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큰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로 다짐한다.그들은 궁극적으로 성경말씀을 통해 그 영혼을 가장 부요하게 할 분을 찾아 간다. 그리고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분을 더욱 기뻐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 기쁘게 성경읽기를 할 수 있도록 격려 받는다. 성경을 읽으러 교회로 가라성경을 읽는 것에 고군분투하고 있는가? 교회로 가라. 안전하게 그리고 방역 지침을 잘 지키면서 교회로 모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그럴 수 없다면, 실시간 온라인 예배를 우선시하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그러므로 주중에 성경말씀을 통해 세워져가는 성도들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을 찾아보라. 어떻게든 2m 거리두기를 하고 마스크를 쓰고 외부에서 그들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들을 어떻게 지탱하게 해 주시는지 살펴보라. 당신도 말씀으로 지탱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라. 개별적 성경읽기 시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의존하게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Is It So Hard to Read My Bible These Day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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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전문가가 좋은 목사가 되는 건 아니다
by Chase Replogle
2020-09-09
‘목사’라는 타이틀을 좋아한 적이 없다. 원래 나의 계획은 법률 쪽 일을 하다가 정치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일찍부터 리더십에 매료되었고, 그동안 진로와 관련된 모든 테스트의 결과들은 내가 리더십을 행사하는 분야에 꽤 소질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고등학교 3학년 교회 수련회에서 나는 목사가 되라는 강한 부르심을 받았다. 고등학교 토론 클럽 교사에게 더 이상 대학교에서 주는 토론대회 우수 장학금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중서부에 있는 작은 신학교에 갈 거라고 말했을 때, 교사 중 한 사람은 내게 이렇게 호소했다. “왜 하나님이 네게 준 소질을 갖다버리려는 거니?” 그 말을 했던 교사처럼 나도 목사가 되는 길은 지루하고 아웃사이더 같은 일, 그러니까 나의 잠재력과 애초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리더십에 두는 희망21세기 후반은 기독교 사역 전반에 걸쳐 리더십 테크닉과 그 잠재력이 각광을 받고 있다. 요즘은 ‘담임 목사’(senior)라는 타이틀 대신 좀 더 리더십과 연관이 있는 ‘리더 목사’(lead pastor)라는 호칭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목사는 서재 대신 ‘사무실’ 또는 ‘회의실’을 가지고 있다. 이런 흐름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신학교는 ‘목회 신학’(pastoral theology)이라는 학위를 ‘교회 리더십’(church leadership) 학위로 이름을 바꾸었다. 리더십과 관련한 전문용어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리더십 컨퍼런스, 리더십 도서, 리더십 팟캐스트, 리더십 잡지, 그리고 리더십 개발 과정 등등 … 우리는 리더십이라는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대부분의 목사들이 리더십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더 좋은 목사가 되고 또 더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순수한 열망 때문이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목사라는 일은 힘들고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광범위한 일들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좀 더 나은 리더가 되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라면 어느 목사가 리더십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처음 교회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다이어리 맨 뒷장에 이렇게 썼다. “리더십 교훈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거기에 리더십과 관련한 소소한 지혜를 적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적어놓은 이 내용들이 담임 목사가 되어 교회를 이끌게 될 나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리더십은 영향력이다.”“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실패하려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리더는 독서하는 사람이다.”“위대한 리더는 만들어지지 태어나지 않는다.”“모든 것은 리더십에 따라서 번성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런 나의 열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모든 교훈들이 내가 이전에 꿈꾸던 리더로 나를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말하는 대로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리더십에 대한 나의 욕망이 영혼을 돌보겠다는 바람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목사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깊은 고민도 없이 목사로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이것이야 말로 리더십에 집착한 목사가 치르는 대가가 아닐까? 결국 리더십에 대한 나의 낭만적인 관심이 사실은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내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안감을 감춰주던 싸구려 금박 포장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더가 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사실은 평범한 일개 목사로 끝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의 표출은 아니었을까?물론 목사라면 누구나 다 리더로서의 책임을 가진다. 나는 지금 리더십 자체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사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피할 수 없고 또 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더 좋은 리더가 된다고 더 좋은 목사가 되는 건 아니다. 목회 사역은 결코 리더십 개발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영향력과 테크닉을 발휘하는 것 이상을 위해 부름 받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교인들의 리더가 되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사가 되라고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이 차이를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새로운 방식으로 ‘목사’ 이해하기언제부터인가 나는 리더십과 관련한 그 어떤 책도 더 이상 읽지 않았다. 그것을 거창하게 엄청난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게 있어서 “목사”라는 타이틀의 의미를 좀 더 제대로 받아들여야겠다고 결심했던 중요한 순간이었다.교회를 개척한 첫 해 어느 날, 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멕시코 식당에 있었다. 처음 본 번호로 전화가 울렸고 나는 식당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전화한 사람은 교인이었지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내게 전화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지금 막 병원으로부터 자기 동생에 대한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는 말을 그가 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동안 준비했던 리더십 교훈 중에서 이 상황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단지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아픔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렇게 긴 대화도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계속 상황을 알려달라고 말했고 무엇보다 계속해서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화를 끊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목사님.” 그 순간 그가 나를 부른 “목사님”이라는 호칭은 내 타이틀도 아니었고 또 교회 내에서 내 직책도 아니었다. 그건 내 소명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신 이유였다. 멕시코 식당이 제공해주는 아주 맛깔난 음식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시간을 들여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그 사람과 함께 하라고 나를 ‘목사’로 부르신 것이었다. 나는 이제 목사가 되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자주 자주 느끼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사실 그날 그 순간까지 목사가 되었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낀 적이 없었다. 그날의 경험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목회 정체성(pastoral identity)과 복음의 능력목회적 리더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독특한 목회 정체성을 세워온 역사가 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목사의 소명을 단지 그때그때 완수해야 하는 과제(task)가 아니라 무의식의 단계까지 포함한 삶 전체를 관통하는 소명(habitus)으로 이해하고 있는 목사들과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그들은 목회적 기질 또는 습관을 개인적으로 훈련받아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1세기에는 리더십이 가진 잠재력이라는 면에서 좋은 롤 모델이 있었다. 위대한 왕 헤롯은 조직을 이끌고 건물을 짓는 면에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한 혁명을 일으킨 마카비 가문도 리더십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게다가 정치적 권력이라는 면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런 리더십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이 소유한 독특한 리더십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리더를 따랐고, 그랬기에 그들은 스스로 양들을 이끌도록 부름 받은 겸손한 목자로 인식했다. 그들 중에서 초대 교회를 이끄는 직업적인 성취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까? 기도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또 양들을 위로하는 목사로서의 이미지가 중요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목회적 소명이 주는 특별함은 결코 조직의 리더라는 값싼 이미지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여 그렇게 된다고 할 때, 우리의 경력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다름 아니라 복음의 능력,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능력을 잃을 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애초에 부름 받은 고유한 소명을 재발견하고 그 소명을 더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결코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훌륭한 리더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eadership Savvy Doesn’t Make a Pastor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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