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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에서 목사는 왜 손을 들어 올릴까요?
by 노승수
2020-08-08
우리가 매주일 만나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는 축도다. 축도에서 항상 목사는 손을 들어서 축도를 행한다. 이 시간 대부분의 성도들은 눈을 감은 채로 기도를 드린다. 기도라면 굳이 손을 들 필요가 있을까? 축도는 성례전적 행위다.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고 보이기 위함이니 당연히 축도 시에는 눈을 뜨고 목사의 들린 손을 바라보는 게 맞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회에는 낯설다는 것을 안다. 같은 이유로 사도신경 역시 기도가 아니라 신앙 고백이며 눈을 뜨고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축도 후 폐회를 알리는 송영의 찬송을 드리는 동안에 그 말씀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좋다.축도에서 왜 눈을 뜨고 목사의 손을 바라보아야 할까? 축도는 성례전적 행위이지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축도의 영어 표현은 “pronounce a benediction”이다. Benediction의 라틴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좋은 것을 말함”이라는 뜻이며 pronounce는 공적 선언 혹은 입장 표명 등을 담은 동사로 판사가 법정에서 판결을 내린다고 할 때 쓰이는 단어다. 즉, 복에 대한 공적 선언 혹은 입장 표명이라는 의미다. 기도를 의미하는 “도”자를 쓰니 기도라 생각하기 쉽지만 토마스 레쉬만(Thomas Leishman)은 “강복은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기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어떤 약속에 의하여 전달하는 것인데, 그것은 목회의 전달 행위일 수밖에 없고, 조건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WPA, 102-103쪽)라고 말한다. 즉, 축도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복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성례전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가 그렇듯이 자격 있는 직분자만 하는 게 맞다. 교회사적 전통에서도 동방 교회에서 사제는 한 손을 들었고 주교는 두 손을 들었는데 이것은 안수례와도 같았다. 특히 그날 선포된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할 것이라는 선포다. G. 판도른(G. VanDooren)도 축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마칠 때 하는 축도는 다음 주일까지 우리의 전 삶을 ‘감싼다’. 이 축도는 하나님의 복과 평화와 은혜와 함께하심이 모든 날들 동안에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과 약속이다. 이 축도는 거룩한 기원도, 예배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도 아니다”라고 말한다(‘언약적 관점에서 본 예배의 아름다움’ 안재경 역, SFC, 68~69쪽).그러므로 축도를 할 때, 지나치게 문자에 얽매여서 고린도후서나 민수기 본문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 그날에 주어진 설교의 말씀을 삼위하나님을 대리해서 그 날의 메시지의 핵심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선포할 필요가 있다. 축도는 그날 선포된 말씀을 그 백성들에게 위탁하며 하나님을 대리해서 공적으로 선포하는 행위다. 신자는 예배의 마지막에 이렇게 선포된 약속이 한 주간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축도는 축원문의 형식, 곧 “~하옵니다”보다는 선포 형식, 곧 “~지어다”로 이뤄지는 게 더 바람직하다.이런 관점에서 축도는 당연히 그날 말씀을 선포한 목사가 직접하는 게 맞다. 준비한 메시지의 본질을 가장 잘 대변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강도권과 축도권을 분리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법은 일종의 파행이다. 강도할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축도할 권리도 있어야 하는 것이 맞겠다. 강도사에게 축도할 권리를 주든지 아니면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강도사 제도를 없애든지 하는 게 맞겠다.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면 장로교회에서 목사 회원의 평등의 원리에 맞게 강도권을 주었다면 축도 역시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장로교회 원리상 맞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정에서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녀를 축복하여 기도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축복하여 기도하는 것은 기도지 ‘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축도’와 가정에서의 ‘축복 기도’는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다. 설교와 성례전, 그리고 축도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격 있는 직원의 대리가 필요한 것이다.그리고 목사가 손을 드는 것에 관한 성경 상의 근거라고 한다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모세가 아말렉의 전투 중에 손을 든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출애굽기 17장 16절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그런데 이 개역개정역은 약간 의역한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이 좀 까다롭고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완전 직역 형태인 YLT로 보면 이렇게 번역해 두었다. “and saith, ‘Because a hand is on the throne of Jah, war is to Jehovah with Amalek from generation-generation.’(Exod. 17:16 YLT)” 사실 16절의 전반부는 의미가 불분명하지만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손 하나가 야훼의 보좌 위로 들리리니 야훼와 아말렉 사이에 대대에 전쟁이 있을 것’이다.”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부림절의 기원이 되는 에스더 사건의 대적이었던 하만이 바로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동안 전투했던 아말렉 족속이다. 왜 하나님은 이 전쟁이 대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셨으며, 단지 전쟁을 하면 될 텐데 모세의 손을 들게 하셨는가? 이것은 구원 계시적 사건이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단지 아말렉 민족이라는 특정 대적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대적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높이 들린 모세의 손이 장차 있을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세상에서의 영적 대적으로부터의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 직접 나섰던 장수가 여호수아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름은 ‘예수’를 의미하기도 한다. 여호수아의 아말렉과의 전투는 하나님 보좌 위로 들린 손이 그 승리를 결정했다. 이 본문을 오늘날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의 대리인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그 대리인이 올린 손을 바라보며 이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신자는 축도에서 목사의 들린 손을 보면서 세상 가운데서 영적 전투를 하면서 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약속받은 것이다.
예배
축도
성례전
동방교회
대리인
아말렉전투
모세의기도
여호수아
영적전투
용서받음, 하나님 경외의 원리
by Michael Reeves
2020-08-07
시편 130편 4절은 당신의 눈을 사로잡는 놀라운 구절이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이 구절은 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리이다”라고 해야 맞지 않은가? 굳이 경외, 그러니까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구절이 “그러나 심판이 당신께 있사오니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라고 해야 맞는 것 아닌가?그런데 시편 구절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더 이상한 것은, 이 시편 저자가 도무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4절을 지나 그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5-6절). 그는 이렇게 확신한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7절).성경의 명령일 뿐 아니라 복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은 사실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정반대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모인다.“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출 20:18–20).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새 언약이 주는 경외C. I. 스코필드(Scofield)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을 “구약의 경건함을 표현하는 구절 중 하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단지 구약의 경건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향한 건전한 경외감은 사실상 새 언약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축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 언약과 관련해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렇게 약속하셨다.“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39–40).예레미야 33장에서 새 언약이 가진 경외감의 특징을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예상을 허물 정도로 충격적인 방식으로 설명한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렘 33:8–9).물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만, 이것은 결코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다. 예레미야 33장에서 주님은 순전한 축복이 무엇인지 하나 하나 풀어놓으셨다. 그는 그의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또 그들에게 위대한 일을 하실 것이다. 바로 이런 모든 좋은 것들 때문에 그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의 반대편에 있는 두려움도 아니다. 오히려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을 통해서 묘사한 경외감의 일종이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이것은 “주님과 그의 선하심을 향해서 가지는” 경외감이다(행 9:31 참조).효심으로서 경외이것은 또한 신학자들이 종종 “종들이 주인을 향해 가지는 두려움”과 비교해 “효심”으로 표현하는 경외감이기도 하다(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마음). 사실상, 이것은 우리 예수님이 가졌던 효심이고, 믿는 자라면 누구나 다 그 효심에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고, 이사야 선지자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사 11:1–3)효심은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가지는 기쁜 공경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안에서 오로지 즐거움 만을 누린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다시 말하지만, 완전히 반대가 된다. 예수님 안에 거한 성령님은 주를 향한 경외감의 성령님이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런 효심은 예수님이 즐거이 가졌던 아버지를 향한 공경심이었다. 이는 참으로 그 경이로움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부분이다. 용서는 경외감이 자라는 토양이다시편 130편 4절은 용서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바른 경외감이 자라도록 하는 비옥한 토양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또한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십자가가 없다면, 하나님은 단지 공포스런 심판자고 우리는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 뿐이다. 하나님을 향한 죄인으로서의 자연적인 두려움이, 사랑받는 자녀들이 가지는 떨리는 경외감으로 바뀌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믿음에 의한 칭의 때문이다. 존 번연(John Bunyan)은 이렇게 썼다. “위대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아무 가치 없는 자에게, 아무 자격 없는 자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일을 하려고만 하는 자에게 좋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떨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Could Forgiveness Possibly Lead to Fear?번역: 무제
구약성경
신학
시편130편
사유하심
두려움
스코필드
예레미아
이사야
호세아
존번연
신학적 비전을 놓고 깊이 고민하는 목회
by 김상일
2020-08-06
“교회 지도자들은 늘 복음을 사람들의 마음과 중심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만 복음이 단순한 신앙 문답이 아니라, 깊고 지속적인 변화의 능력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복음 적용 없이 단지 교육이나 설교, 세례, 훈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센터 처치, 115쪽) 팀 켈러의 ‘중간 지대 신학하기’ 작업을 통해서 성경과 교리를 어떻게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위한 뼈대로 세워갈 수 있는지를 이전의 글에서 살펴보았다. 삶을 흡수하는 성경이 아닌, 삶을 풀어내는 성경, 그리고 삶으로 들어가는 교리와 전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배운 것은 성경 안에, 교리와 전통 안에 이미 실제적인 목회 사역과 프로그램, 방법론에 관한 풍부한 시사점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켈러가 말한 신학적 비전이기도 하다. “그럼 무엇이 신학적 비전인가? 그것은 복음을 충실하게 재서술한 문장으로서, 역사의 현 시점에서, 그리고 한 특정 문화의 삶과 사역과 선교가 어떤 모습을 띠어야 할지에 대한 풍성한 시사점을 포함하는 것이다”(센터 처치, 29-30쪽)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란, 다름 아닌 신학적 비전 세워가기다. 특정 교회 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비전은 여타의 성공하는 교회들의 그것을 그대로 베끼거나 반복해서는 절대로 세울 수가 없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신학적 비전은 오직 그 교회의 상황적, 문화적, 시대적 맥락을 잘 이해하고 있는 목회자와 일꾼들이 한마음으로 자신들이 속한 교회적 전통 속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교회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며 소통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경 읽기와 교리 풀어내기라는 작업 안에 이미 목회와 사역에 관한 고민과 질문이 담겨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때만 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의 방향성을 알고, 또 실제로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그렇다면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은 중간 지대 신학하기의 뼈대 작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어떻게 해야 중간 지대 신학하기에 합당한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세워갈 수 있을까? 일단 먼저 전제하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모든 교회에 잘 맞는 목회 프로그램이나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에서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찾아 나간다는 것은 상당한 정도의 창의성과 목회적 맥락에 대한 고민을 필요로 한다. 이런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은, 많은 경우 성도들의 고민과 질문을 한 축으로, 그리고 성경 해석과 교리가 복음에 대해서 전하는 메시지를 다른 축으로 해서 어떻게 교인들이 복음을 제대로 알아듣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둘째,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의 목적이 혹시 교회 성장은 아닌가? 만약 그것이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고안하는 구체적인 목표라면, 켈러의 이 말을 들어보라.“교회 성장 운동은 사역 현장에 지속적인 공헌을 해왔다. 하지만 기법과 결과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사역자들에게 많은 부담을 안긴 것도 사실이다. 무리한 교회 성장 운동이 경건한 성품과 하나님의 주권의 중요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다.”(센터 처치, 18쪽)교회 성장 운동은 기본적으로 기법과 결과를 강조하는 운동이다. 목표가 교회 성장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심리적, 경영학적 기법을 도입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일이 목표가 되면 저절로 기법이나 결과가 중요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목표는 중간 지대의 신학함과는 전혀 맞지 않다. 그런 기법이나 결과는 복음 메시지가 어떤 얘기를 하는지,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는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복음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특정한 목표 즉, 교회의 양적 성장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성장만을 위한 기법과 결과는 도리어 교회 공동체가 복음에서 유리되어 복음과는 별 상관없는 길을 가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만든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치 고고한 백로처럼 목회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목회자들이 더 낫다는 말도 아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말은 단지 기법이나 결과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로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복음이 자신들의 삶에 들어와서 변화를 일으키면 바로 알아차리게 되어 있고,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지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성장을 경험하게 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목회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는 목회자들을 은근히 깔보면서 자신들은 오직 교단적인 전통과 성경에 대한 “올바른” (즉, 교인들의 삶의 맥락에 대한 관심은 접어둔 채로 오직 성경 본문의 본래적 의미만을 추구하는) 해석을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도 또한 중간 지대에서 신학을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간 지대의 신학함에서 뼈대가 되는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이 상정해야 할 목표는 무엇일까? 팀 켈러는 그것을 복음 부흥이라고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동체적 복음 회복은 종종 ‘부흥’이라고도 불린다. 이것은 신자들 전체가 개인적인 복음 회복을 함께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교회들은 아무리 그들의 신학이 건전하다 하더라도 복음의 고유성을 간과하기 시작하고 다른 종교들에 빠지거나 불신앙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교리 교육은 각각의 교리들이 복음의 메시지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놓치게 되고 윤리 교육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완성된 사역에 근거하지 않게 된다.”(센터 처치, 114-115쪽)만약 수적인 성장 대신 복음 부흥이 교회가 나아가야 할 목표가 된다면, 기법이나 결과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목회자와 사역 리더들은 복음이 무엇인지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이 과연 어떤 메시지인지를 계속해서 묻는 일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성경으로 돌이키도록 이끌고, 교리와 전통 속에서 밝혀진 복음으로 되돌아가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이 있다. 목회자와 사역자는 복음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더불어 그 복음이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한다. 성도들은 특정한 문화적, 지역적, 시대적 맥락 속에서 나름의 질문과 고민, 갈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복음이 어떤 메시지인지에 대한 고민은 반드시 그들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들에 비추어서 하는 고민이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 공동체가 복음을 피부에 와닿게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사역의 조직과 프로그램을 갖추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이런 고민은 조직과 프로그램에 대한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프로그램과 방법론을 세워가는 일은 중간 지대의 신학함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오직 교회를 섬기는 리더들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 성장 대신 정말로 복음 부흥을 놓고 고민하고 기도하기 시작할 때, 켈러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말한다.“복음이 가슴에 깊이 들어올 때—신자들이 더 이상 유능하고 의로운 자기 이미지를 고수하려고 애쓰지 않을 때—사람들과의 관계들을 방해하는 장벽들이 무너지며, 진정한 공동체에 대한 경험을 더 깊이 할 수 있다. 더 이상 핑계나 회피를 할 필요도 없다. 복음으로 인해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공감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겸손을 가지게 된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서 교회 안의 모든 관계들은 더 깊어지고 두터워진다. 기존의 문화와 뚜렷이 차별되는 이러한 교회의 특성들은 바깥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센터 처치, 170-171쪽)복음은 메시지를 전하며, 그 메시지는 교회가 운영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교회가 운영되는 방식은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얼마든지 여러가지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면서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문화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며, 고민하는 바가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며, 관계 맺는 방식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체면 문화 속에서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게 하는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이 미국의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게 하는 목회 프로그램이나 방법론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중간 지대의 신학함을 세워가는 목회 프로그램과 방법론은 처음도 그리고 마지막도 복음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하는 일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이 질문을 놓고 고민하는 많은 목회자들과 사역 리더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지혜가 넘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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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펄전과 교회 개척 사역
by Aaron Lumpkin
2020-08-05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보다 더 사랑받는 목사를 찾기는 쉽지 않다. 흔히 “설교의 황제”로 불리는 그는 수천 편의 설교와 수십 권이 넘는 책을 남겼을 뿐 아니라, 신학교를 세웠고 고아원을 돌봤다. 말 그대로 그의 생애는 수많은 사역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실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쉬지 않고 사역했다.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하루에 다 할 수 있습니까?” 스펄전은 대답하기를, “리빙스턴 선교사님, 나 혼자 일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으셨나 보군요.”우리는 스펄전의 이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화적 변화와 끝없는 영적 전쟁 상황에서 목회 사역과 교회 개척은 무엇보다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해나갈 수가 없다. 우리는 늑대 사이로 보내진 양과 같은 존재이기에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만 한다(마 10:16).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상황과 매우 흡사하게 스펄전도 사회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고난의 시대를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일관성 있는 정통 교리와 정확한 행동(orthopraxy)을 고수했다. 스펄전의 놀라운 사역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회 개척과 관련한 그의 열정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상, 그는 1881년에 이렇게 썼다. “새로운 교회가 시작하는 것을 돕는 것은 나의 가장 큰 기쁨이다.” 교회 개척이라는 사역과 관련해서 스펄전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세 가지가 있다. 1. 복음 중심적인 준비의 필요성스펄전은 사역에서 준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교회 개척 사역은 그가 1856년에 세운 목회자 대학(Pastors’ College)을 통해 조직되었다. 이곳은 지역 교회에 기반을 둔 목회 훈련장으로도 활용됐다. 자서전에서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목회자 대학이 제대로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 우리 앞에는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이 있었다. 그것은 복음을 설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다.”비록,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스펄전이었지만, 그는 신학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또한 그 대학에서 학생들을 담대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하는 목사로 무장시키기 위해서 가르쳤다. 1856년과 1892년 사이에 그 학교는 900명 이상의 목사를 훈련시켰다. 그 누구보다 말씀의 능력을 알고 있는 스펄전 덕분에 학생들은 하나같이 다 성경에 깊이 빠졌다. 그들은 “진실한 신자에게 복음은 능력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라는 사실을 배웠다. 복음으로 단단히 무장되지 않은 교회 개척자는 결코 다른 이들을 복음 깊은 곳으로 인도할 수 없다.2. 경건과 복음적 열정의 중요성스펄전은 이미 그리스도께 깊이 헌신한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싶어했다. 그는 설교 능력, 깊은 경건, 그리고 참된 믿음이라는 “거룩한 부르심의 분명한 표식”을 가진 사람들을 찾았다. 그렇다고 믿음이 단순히 지적인 영역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스펄전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많은 교회들이 거창한 장학금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목사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감정이 풍부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종교가 주는 위로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다.” 스펄전은 예수의 복음을 통해 삶이 변화되는 것을 보는 데 자신을 헌신했다. 목회자 대학의 목사 후보생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예수님을 위해 영혼을 구원한 적이 있습니까?” 복음주의를 향한 스펄전의 헌신은 그의 사역 내내 지속되었다. 바로 이런 점이 목회자 대학이 성공하는 데 초석이 되었고 교회 개척의 핵심이 되었다. 개인적 경건과 복음적 열정이 결여된 교회 개척자는 복음 사역에 준비된 사람이 아니라고 스펄전은 확신했다. 3. 신실한 인내의 필요교회 개척을 위해 목회자 대학 졸업생을 사역 현장으로 보내기 전에 스펄전은 그들 앞에 놓여진 사역의 중대성을 강조했다. 스펄전의 한 전기는 그의 호소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우리 대학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여러 시기에 걸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파견된 몇몇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결단을 했습니다.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으십시오. 손에 힘이 빠지면 이로 붙잡으십시오. 이마저 빠지면 속눈썹으로라도 붙잡아야 합니다!'”교회 개척이 결코 편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너무 잘 알았던 스펄전은 학생들이 그 사역을 견딜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리고 목회자 대학을 졸업한 대부분의 목사는 믿음과 실천에 있어서 충성을 다했다. 목회자 대학은 1865년까지 졸업생과 관련한 통계를 기록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1878년에 이르러서 졸업생들이 세례를 준 사람은 무려 3,600명이 넘었다. 졸업생들은 인도, 중국, 일본, 아프리카, 스페인, 이탈리아, 서인도 제도, 남미, 호주, 캐나다 및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섬겼다. 그리고 1889년까지 런던 시내와 주변에 학생들이 개척한 교회의 숫자는 80개가 넘었고, 전 세계를 통틀어서는 200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했다.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회자 대학 졸업생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스펄전의 삶과 사역은 교회 개척에 대한 수많은 지침을 제공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무엇보다 복음에 뿌리를 내리고, 복음에 열정을 품고, 또 복음만을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개척자들은 무엇보다 사역에 충실하고 수확의 열매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속눈썹으로 매달려서 가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경주를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arles Spurgeon and the Ministry of Church Planting번역: 무제
교회개척
찰스스펄전
복음중심
목회자대학
교회개척자
5대 복음주의자 시대 마감되다
by 이재근
2020-08-04
20세기 영미권 대표 복음주의자 중 ‘신학’ 분야를 대표하던 저명한 지도자 제임스 인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2020])가 지난 2020년 7월 17일에 만 93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94세 생일을 5일 앞 둔 날이었다. 이로써 20세기 세계 복음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은 다섯 명이 모두 사망했다. 이들이 이 시기 기독교 세계에 끼친 포괄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는 ‘5인의 복음주의 지도자들’(Five Evangelical Leaders)이라는 제목의 책이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이 책은 영국 역사가 크리스토퍼 캐서우드가 1984년에 출간한 책이다. 그의 책에 등장하는 복음주의 지도자 다섯 명, 즉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빌리 그레이엄, 프랜시스 쉐퍼, 그리고 제임스 패커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어권 복음주의자들로 국내 기독교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학자이자 작가인 캐서우드는 이 다섯 인물과 각각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기때문에 글을 쓰기에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우선 그는 이 다섯 명 중 가장 연장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외손자로서, 빌리 그레이엄 전도팀에 1983년에 합류해서 집필 자료를 구했으며, 런던 올소울즈교회의 스토트의 서재에서 한 학기를 보내기도 했다. 프랜시스 쉐퍼가 있던 스위스 라브리에서도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캐나다에 있던 제임스 패커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나 시간을 보냈다. 저자는 IVF 활동가이기도 했기에 20세기 후반 영국 IVF의 신앙적, 지적 분위기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던 로이드 존스와 스토트, 패커에게서 엄청난 지적,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로이드 존스, 쉐퍼, 스토트, 그레이엄이 각각 사망한 직후, 세계 기독교계는 넘치도록 많고 다양한 추도문과 평가를 내놓았다. 한국에서도 이들을 개인적으로 추억하고,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적지 않았다. 거의 한 세기나 되는 일생을 살면서 엄청나게 방대한 유산을 남기고 간 패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여러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그의 일생과 업적, 사역, 작품을 기억하는 추도의 말과 글을 남기고 있다. 필자는 패커가 범개신교권에 남긴 유산을 그가 가진 세 정체성을 기반으로 회고해 보고자 한다. 패커는 활동의 측면에서는 복음주의자였고, 소속은 성공회였으며, 신학적으로는 개혁파였다. 1. 복음주의자: 활동패커는 무엇보다도 교파를 초월해서 역사적 기독교 전통과 정통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 20세기 복음주의자들을 지속적으로 대변했다. 이는 그가 처음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고 기독교 신자가 된 배경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고전(라틴어, 그리스어)을 공부하기 위해 1944년에 옥스퍼드대학에 들어간 그 해 가을에 그는 복음주의 학생 조직인 IVF/IFES와 연결된 옥스퍼드대 복음주의 학생 선교단체 OICCU를 통해 회심했다. 책을 워낙 좋아한 탓에 회심 후 OICCU에서 보조사서로 지내면서 기증받은 기독교 고전서적들을 탐독할 기회를 얻었는데, 17세기 청교도 존 오웬의 책이 그에게 특히 깊은 감흥을 주었다. 복음주의자로 회심했기 때문에 그가 공부하고 이어서 가르치기 위해 선택한 신학교육기관도 모두 복음주의권 신학교였다. 옥스퍼드에서 고전언어를 잘 공부한 덕에 런던 소재 성공회 복음주의 신학대학인 오크힐 칼리지(Oak Hill College)에서 강사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이 학교의 복음주의 분위기에 매료된 탓에, 1949년에 정식으로 신학공부를 시작한 곳도 옥스퍼드 소재 복음주의 신학대학 위클리프홀(Wycliffe Hall)이었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1950년에는 동료와 함께 조직한 청교도 연구대회(Puritan Studies Conferences)를 런던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개최했다. 그러면서 이 교회 담임목사이자 당대 최고의 설교자라는 평가를 받던 비국교도(비성공회 신자) 복음주의자 마틴 로이드 존스와 교제를 시작했다. 1953년에 성공회 사제로 안수 받은 후에는 역시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교 브리스톨의 틴들 홀(Tyndale Hall)에서 교회사, 종교개혁사, 성경신학 등을 가르쳤다. 복음주의자 교수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IVF와 CU(Christian Union, 영국대학 복음주의 학생조직)의 강사로 자주 초빙 받았다. 패커를 복음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널리 알린 계기는 그가 1958년에 출판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이었다. 계몽된 지성인이라면 성경을 신적 계시로 믿을 수 없다는 자유주의자와 세속학자들의 주장에 맞서 성경무오설을 포함하여 성경에 근거한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논증했다. 이 책으로 패커는 일약 복음주의권의 지적 대변인으로 떠올랐다. 이어서 1961년에 출간한 ‘복음전도란 무엇인가’(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 1961)는 복음주의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복음전도를 다루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이라는 칼뱅주의 요소와 인간의 행동이 강조되는 복음전도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를 명쾌히 설명함으로써 칼뱅주의 신앙을 가진 복음주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보여주었다. 1961년부터 1970년까지는 잉글랜드 성공회 연구소로서 복음주의 대의를 대변하는 옥스퍼드의 라티머 하우스(Latimer House)의 사서와 관장으로 재직했다. 1967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 역사의 획기적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 전국복음주의성공회대회(NEAC, National Evangelical Anglican Congress)를 킬대학(University of Keele)에서 개최했다. 이때부터 그는 존 스토트와 함께 성공회 복음주의 진영을 이끄는 쌍두마차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브리스톨 트리니티에서 부학장으로 일하던 1979년에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패커의 경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영국만큼이나 북미에서도 명성을 떨쳤던 만큼, 캐나다나 미국이 그에게 낯선 환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리젠트 칼리지(Regent College)가 그의 교수 경력 사상 처음으로 성공회 소속 학교가 아니었다는 점은 새로운 모험이었다. 리젠트 칼리지는 주로 평신도를 대상으로 신학과 기독교학을 가르치는 초교파 복음주의 대학이었다. 그러나 북미로 무대를 옮긴 만큼, 더 거대한 복음주의 현장에서 활동한 유익은 컸다. 이때부터 패커는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여러 현장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은퇴가 가까워진 1990년대에는 복음주의권에서 거의 흠 없는 인물로 존경을 한 몸에 받던 패커가 거의 처음으로 동료와 후배들의 공격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의 생각에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서 정통 신앙을 견지한다고 판단된 이들과 연대하여 ‘복음주의자-가톨릭 연대’(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1994)와 ‘구원의 선물’(The Gift of Salvation, 1997)이라는 문서를 공동 작성하고, 서명한 일이었다. 1962년 바티칸 공의회 이래로 구원론을 비롯한 교리의 여러 측면에서 가톨릭교회가 종교개혁 정통에 더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패커는 두 교회의 연대가 신학적, 사회적 진보와 세속화를 막을 수 있는 선하고 유익한 에큐머니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톨릭을 교리적, 사회적으로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더 보수적인 이들에게 패커의 행보는 일종의 변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2. 성공회: 소속보편적인 의미의 범복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패커의 복음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잉글랜드의 국교인 ‘성공회’라는 국적과 소속에 의해 진하게 채색된 복음주의였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이 특징적 유산을 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따라서 그가 특정 사건의 기로에서 판단을 내려야 했을 때, 성공회 신자다운 결정을 자연스럽게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성공회 신자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 1966년에 일어났다. 이 사건은 로이드 존스가 이끄는 비국교도 복음주의와 존 스토트 및 제임스 패커가 주도한 성공회 복음주의의 분화를 알린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6년 10월 18일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센트럴홀에서 복음주의연맹(EA) 주최로 열린 제2차 전국복음주의총회(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개회 연설을 맡은 로이드 존스는 교리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교단에 속한 이들은 그들이 속한 오염된 교단에서 나와서 교리적으로 순수한 다른 교파의 복음주의자들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충격을 받은 당시 현장의 복음주의자들을 대신하여 대회 의장 스토트가 일어났다. 그는 자신이 속한 주류 대교단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영적 쇄신을 일으킬 복음주의자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며 분위기를 무마했다. 로이드 존스의 발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분분하다. 그러나 한마음으로 영국 내 복음주의의 성장을 위해 한 길을 걸었던 ‘분리파’ 비국교도 복음주의자와 ‘잔류파’ 성공회 복음주의자 간의 형제와 같던 관계는 이후로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1966년의 그림자’가 20세기 내내 영국 복음주의 진영을 따라다녔다. 패커와 로이드 존스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스토트와 뜻을 같이한 패커는 복음주의자로서 대의를 공유하는 자들이 서로 다른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훌륭한 연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을 말과 글과 행동으로 널리 대변하는 인물로 활약했다. 실제로 패커는 복음주의자이자 개혁파였지만, “성공회는 모든 기독교 세계 가운데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참되며, 가장 지혜로운 유산을 구현한다”고 주장할 만큼 성공회가 고대교회로부터 연속성을 계승한 사도적 교회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패커가 성공회 소속 성직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고하게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는 캐나다 성공회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1979년에 캐나다로 이주한 이후 성공회에 속한 한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캐나다 성공회는 1970년대까지 신학적으로 대체로 자유주의적이었으며, 교단의 주요 정치지도자들도 친복음주의인 저교회파가 아니라 친가톨릭적인 고교회파나 친자유주의적인 광교회파가 많았다. 패커가 이주한 직후 1980년대부터 캐나다 성공회 내에서 정통 신앙의 쇄신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나바성공회선교회(Banabas Anglican Ministries)와 토론토 위클리프칼리지가 그 중심에 있었다. 초교파신학교인 리젠트칼리지도 이런 복음주의 부흥에 기여했는데, 영어권 세계의 저명 복음주의 신학자 패커가 합류하면서 캐나다 성공회에도 이 영향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특히 1994년 여름에 열린 성공회 복음주의자 대회인 Essentials 1994 대회가 중요했다. 패커와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 마이클 그린이 대회의 주강사로 참여하면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대회가 1967년에 영국에서 패커의 주도로 결성된 전국복음주의성공회대회(NEAC)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조심스럽게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3. 개혁파: 신학 패커를 주목받는 학자로 만든 첫 책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은 20세기 근본주의 성경무오설을 대변한 책이라기보다는, 16세기 이래 종교개혁자들이 신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논증이었다. 특히 그는 19세기 미국 프린스턴의 구학파 개혁신학자 찰스 하지와 B. B. 워필드의 용어를 자기 논증에 빌려와 사용했다. 두 번째 유명저서 ‘복음전도란 무엇인가’는 더 노골적으로 개혁파적인 책이었다. 한국어판 제목과는 달리, 영어 제목이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인데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칼뱅주의 예정론자였던 패커가 전도와 하나님의 주권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세 개의 실재들(realities), 즉 하나님의 주권, 인간의 책임, 기독교인의 전도 의무 간의 관계에 아무런 모순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록 공식적으로 개혁파 신학을 채택한 장로회나 회중교회 같은 교단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개혁파 기독교가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복음주의”라 믿었고, 제한속죄나 영원한 형벌 같은 논란이 많은 개혁파 신학 주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도 앞장서서 변호했다. 다만, 복음주의자와 성공회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기에 그의 개혁신학은 편협하거나 전투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이고 포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세계 복음주의의 가장 위대한 건설자 중 한 사람이 본향으로 돌아갔다. 패커의 죽음으로 이제 2020년 이후의 복음주의는 이전의 복음주의와는 다를 것이다. 그는 거인이어서 많은 젊은 세대 복음주의자들이 그의 어깨에 서서 성경과 교회와 세상을 바라보았다. 패커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소리’와 같은 거인이었다. 패커 생전 1997년에 그의 전기를 쓴 앨리스터 맥그라스는 패커를 이렇게 평가한다. “패커는 현대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자기과시의 경향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딴 조직으로서 예컨대 ‘J. I. 패커 주식회사’라든지 ‘패커 선교회’와 같이 그의 이름이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한 기구 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패커는 그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다. 곧, 그는 하나의 소리로서만 기억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소리는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한 전례의 모습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패커는 그가 맡은 독특한 역할과 부르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소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때로 그는 인기 없는 소리기도 했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가 말하는 것이 청량제와도 같았다.”(맥그라스, 467)
역사
근현대교회
복음주의자
제임스패커
로이드존스
존스토트
빌리그레이엄
프랜시스쉐퍼
근본주의
개혁파신학
온라인에서 영혼을 지키는 네 가지 방법
by Matt Smethurst
2020-08-03
인터넷이 사람의 진을 다 빼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도 옛날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스크린의 유혹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적으로 피해를 입힌다. “오, 이거 정말 끔찍한데”라고 말하면서 디지털 세상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디지털 세상에 머무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와우, 이제 사는 맛이 나.” 성경은 “뭇 사람을 공경하며”(벧전 2:17)라고 말한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그 어느 때라도 결코 쉽지 않겠지만, 지금같은 SNS 시대라면 더 힘들지 않을까?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침을 준다. 여기 신실한 기독교인이 온라인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 자판으로 치는 말을 심각하게 여겨라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이 말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에 관한 구절은 수도 없을 정도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고, 결코 혼란스럽거나 애매하지 않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잠 18:21)“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행여나 온라인에 쓰는 글은 말로 하는 것 보다 덜 중요하고 덜 직접적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설마, 최후의 심판날에 다루기에 트위터에 쓴 글은 너무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왕 되신 예수님 앞에 우리가 서는 날, “온라인 속 나 자신” 또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실 온라인 속 내가 진짜 나다.2. 상대를 인간으로 받아들이라알란 제이콥(Alan Jacobs)은 그의 책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서로 상충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이드(How to Think: A Survival Guide for a World at Odds)’에서 적으로 인식한 상대와 자신이 다름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점점 더 관계를 멀리하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경향에 대해서 자세히 고찰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상대를 가치 없는 존재(delegitimize)로 몰아가기 위해서 비인격화(depersonalize)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습관에는 높은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 상대는 이제 비단 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제이콥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토론과 논쟁을 전투로 받아들여서 대화하는 상대를 악마로 여김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인간성의 한 측면을 잃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근절하고자 하는 입장을 대표해서 나올 때, 그 상대는 이제 우리 눈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고, 정말로 열의를 다해서 그 상대를 이기고 싶은 마음에 우리 속에 있던 인간을 향한 공감까지 소멸시키고 만다. 나와 다른 사람이 가진 욕망과 원칙 그리고 두려움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제 우리 속에서 찾을 수 없게 된다. 논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너무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기독교 진리까지 가볍게 다루자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기억하자. 한 개인은 그가 잘못 알고 있는 여러 의견들을 모아 놓은 종합체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형상은 결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견만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우리의 생각도 틀릴 수 있다. 그렇기에 겸손해야 한다. 겁을 먹자는 것도, 미지근해지자는 것도, 침묵하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겸손하자는 것이다. 3. 최대한 좋은 쪽으로 이해하라“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익숙해서 쉽게 잊는다. 그러나 이 황금률은 사실상 누군가를 상대하는 모든 순간에 언제나 필요하다. 소셜 미디어로 증폭된 유혹 중 오늘날 가장 교활한 것 가운데 하나는 상대를 비방하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왜 상대를 좋게 생각해야 하지? 왜 더 강하게 치고 나가면 안 되는 거야? 저 사람들이 나를 아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리트윗이라는 방법도 있다. 성경에 34번 나오는 비방이라는 단어는 다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은 엄청난 고소자다. 사탄의 행위를 소셜 미디어에서 따라하는 것은 단지 유감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수도 아니다. 그것은 사탄적 행동이다. 비방은 훼손의 한 형태다. 다름 아니라 지구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분의 신성한 창조물을 훼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무모한 말은 지옥에서 나온다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약 3:6). 그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근거해서 말씀을 이어간다(8-9절).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모든 사람은 무한한 위엄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거기에 맞게 취급되어야 한다. 대충 훑어 내려가면서 읽은 댓글이나 사진 등은 금방 잊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소셜 미디어 속 언어라고 해도 인격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 온라인에서 대화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서로를 격려하라성경은 나누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자신의 권리까지 포기하라는 명령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다음 명령은 서로 간에 선의의 경쟁을 부추긴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우리는 이 경쟁에서 잘 하고 있는가?오늘날 성경적인 격려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격려는 너무도 소중하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최선을 가정하고 최선를 보고 또 최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밖에 모르는 죄인인 우리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자신을 부인하는 노력, 자신을 잊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비록 힘들지만, 그것은 실로 훨씬 더 멋진 방법이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겸손한 기독교인을 “자신의 허물과 다른 이의 탁월함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그 순서를 뒤집어서 나 자신의 탁월함과 다른 이의 허물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아마도 우리는 좀 더 나은 위치를 누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릴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Not to Be a Jerk Online번역: 무제
세계관
황금율
온라인
소셜미디어
SNS
비인격화
리트윗
하나님형상
삶을 다 드려 하나님을 예배할 때
by Jon Bloom
2020-08-02
‘우리는 모두 행복을 찾아 헤맨다. 모두 보물을 찾아 헤맨다. 가롯 유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식탁은 즐거운 대화로 소란스러웠다. 죽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사람들이 쏟아내는 질문들에 대해 나사로가 대답하고, 마르다가 빈 그릇들을 치우고 비어있는 포도주 잔을 채우는 사이, 마리아는 조용히 나와 다른 방으로 갔다. 마리아는 작은 병이 들어 있는 큰 나무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마리아는 그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머리 수건을 풀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으시자 사람들은 대화를 멈추고 숨을 죽였다. 마리아가 뭘 하는지 더 잘 보기 위해 사람들은 곧 목을 꼿꼿이 하고 앉거나 자리에 일어서기도 했다. 그 작은 병을 꺼낸 후에 경건한 자세로 예수님의 발을 그 나무 그릇 안으로 모았다. 그리고는 병을 들고 마개를 연 후 안에 든 것을 천천히 예수님의 발 위에 부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오른손으로 자기의 머리털을 잡아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을 때 방 안에 있던 이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귀하고도 놀라운 향이 식탁 너머로 퍼져나갔고, 손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얼마나 귀한 향유인지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 자신의 발을 닦는 마리아를 보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깊은 사랑이 가득했다. 가롯 유다 역시 마음이 움직였지만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가 난 것이었다. 유다 자신은 가늠할 수도 없는 엄청난 돈을 마리아가 낭비한 것이었다. 그 향유는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벌어야 하는 액수와 맞먹는 값이었다. 예수님과 지낸 지난 3년 중 제자들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많은 액수의 돈을 한 번에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귀한 향유가 나무 그릇에 다 부어져 쓸모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유다의 분노에 찬 음성이 적막을 깼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유다의 이 물음으로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닦기를 멈추고는 슬픈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을 향했다. 유다처럼 마음이 불편했던 제자들은 여럿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돈궤에서 남는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라 명하셨다. “남는” 돈이라 함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날 하루 동안 쓰고 남았다는 뜻이었다. 마리아의 행동은 어느 정도는 자기 멋대로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마리아를 바라보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셨다. 유다가 마리아에게 그리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요 12:6)가고자 함이었던 것도 알고 계셨다. 겉으로는 멋있게 들리는 유다의 항변은 사실 그 자신의 탐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거짓됨에 대해 그리고 그가 마리아의 경배를 어떻게 방해했는지에 대해 슬퍼하셨고 분노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라고 하셨고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유다에게 돌리시며 깊은 슬픔이 묻은 음성으로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요 12:7–8).소중히 여기는 것에 있어 마리아와 유다는 정반대다. 물론 둘 다 기쁨이라는 동기를 가졌다. 그저 감정이 결여된 의무감에서 행동했던 이는 없었다. 둘 다 자신들을 기쁘게 해줄 것이라 믿은 그 보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이 값진 진주였기에(마 13:45)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가장 비싼 것을 기꺼이 소비했다. 값진 진주 되신 예수님은 유다에게는 은전 삼십 개에 불과했다. 기쁨을 추구했다는 것이 유다의 죄가 아니다. 그의 죄는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보다 돈을 소유하는 것이 그를 더 기쁘게 해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 유다여, 가치를 잘못 판단한 그대의 비극이여! 온 우주보다 더 값진 진주가 그대 앞에 앉아 있는데도 그대의 눈은 그릇 안에 담긴 향유만 향하는구나. 일 년치 급료를 낭비했다고 슬퍼하지만, 그대는 무한하고도 영원한 보화를 낭비했도다! 마리아와 유다의 이야기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 우리가 무엇을 정말로 귀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순간들로 우리를 데려가신다. 이러한 순간에 직면할 때 우리는 대가를 계산하게 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이러한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정말로 유익이 될 것이라 믿는 것을 선택하라 촉구한다. 그러한 순간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 그 진주인지, 아니면 그릇에 담긴 향유인지 보여줄 것이다. 진주를 택하고 나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를 유다의 말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세상이 보기에 우리는 귀중한 시간, 지성, 물질, 젊음, 미래를 위한 재정적 보장, 그리고 직업 등을 예수님의 발 위에 쏟아붓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귀한 것들이 교회, 선교지, 고아원, 자녀들을 키우느라 경력이 단절되는 가정에 부어져서 쓸모없게 되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 이는 말도 안 되는 낭비다. 세상은 우리를 나무랄 것이다. 우리를 존경하리라 기대하지 말라. 예수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처럼 당신 역시 당신의 삶을 다 드리길 원하신다. 그것은 낭비가 아니고 참된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려놓는 삶, 세상적인 이익을 포기하는 삶은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드러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를 경멸하는 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유익이며, 이 세상의 향유를 얻고 그로 인해 자신의 영혼을 잃는 것이 진정한 낭비라는 사실을 선포한다(마 16:26). 당신은 당신의 삶을 다 드리고 있는가?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When Wasting Your Life is Worship번역: 이정훈
예배
헌신
보화
예수
마리아
가롯유다
향유옥합
다시 생각해보는 주일성수와 공적 예배
by 정요석
2020-08-01
나는 자녀가 다섯이다. 중학 1년생부터 대학 3년생까지 있다. 우리 집 자녀들은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에는 공부하지 않았고, 저녁에는 온 식구가 모여 가정예배를 드려왔다. 우리 부부는 주일을 거룩하고 즐겁게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토요일에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사두어 주일에는 물건 구입으로 분주하게 보내지 않고, 자녀들이 더 어렸을 때는 토요일에 맛있는 과자와 아이스크림 등을 사두곤 했다. 주일날 자녀들이 그것들을 먹으면서 주일은 즐거운 날이란 느낌이 형성되게 하였다. 나 자신이 먼저 본을 보이려고 주일에는 공부도, 좋아하는 탁구도, 여행도 하지 않았고, 최대한 주일을 즐거워하며 푹 쉬려고 하였다. 주일에는 자녀들을 최대한 혼내지도 않고 잔소리도 하지 않고, 부부싸움도 최대한 주중에 하는 편이다.주일 오후에 자녀들과 같이 산책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자녀들과 재미있는 대화로 웃음꽃을 피우며 하는 산책이 얼마나 즐겁겠는가? 그 후 집으로 돌아와 맛있는 간식을 먹노라면 이보다 큰 즐거움과 행복이 드물다.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붙드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이 주일에 푹 쉬며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람들과 교제하여도 먹고 살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지장이 없음을 자녀들과 공유하고 누리는 것은 실로 기뻤다.이렇게 20여 년 동안 자녀들을 키워왔는데 그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할까?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켰고, 안식일은 유대인을 지켰다.”라는 유대인의 격언처럼 주일성수가 그들을 잘 지켜 반듯한 신앙인으로 자랐을까? “그렇다!”라고 답하고 싶은데, 실상은 그런 면과 그렇지 않은 면이 공존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학교 공부와 주일성수를 잘 하는 자녀도 있고 적당히 하는 자녀도 있다. 자녀들은 기복과 풍파 없이 상승 곡선만 그린 것은 아니고, 굴곡과 회의의 긴 터널도 거쳤고, 현재 진행형인 자녀도 있다. 다들 주일에는 거의 공부를 안 한다. 가끔 월요일에 시험이 있으면 주일에 공부하는 자녀가 있다. 내가 무심코 자녀의 방을 열었는데, 공부를 하던 자녀가 놀라서 공부를 안 하는 척 하는 장면을 몇 번 보았다. 우리 집은 주일날 공부를 하고 싶은데 부모 눈치를 봐가며 공부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가끔 연출된다. 그런데 자주 연출되는 것은 거룩한 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쉼을 취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린 후 집으로 돌아와 침대나 책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스마트폰을 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다. 공부를 안 하는 것은 좋은데, 그 시간에 사적인 오락으로 시간을 보낸다. 가정예배도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들이 주일의 가치와 기쁨을 누리며 보내는 측면도 있지만, 그냥 가정의 규칙과 문화이기에 따라오는 측면도 적지 많다.주일성수는 자녀들만 힘든 것이 아니다. 나 자신도 힘들다. 목사가 직업인지라 토요일은 주일 설교 준비 등으로 바쁘고, 주일에는 몇 번의 설교와 회의와 상담으로 바쁘다. 밖에서 보면 거룩한 행위 같지만 실은 나에게는 일이다. 정작 주일성수는 그 이후 집으로 돌아와서 취하는 나의 행위에 달려있지만 거룩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꽤 힘들다. 개인적으로 힘든 점은 인터넷 서핑을 절제하는 것이다. 주일 하루만이라도 성경 읽기와 기도와 묵상 등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며 보내는 것이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그나마 자녀들의 경건 생활을 위하여 빠뜨리지 않는 가정 예배가 나의 경건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을 다루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제6항에서는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신약 시대에는 예배가 어떤 특정 장소에 의해서 매이지도 않고 더 기쁘게 받아지는 것도 아니라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방법으로 각 가정은 매일 예배하고, 개인은 은밀히 예배하고, 공적 집회는 더 엄숙하게 예배해야 한다고 세 가지로 나열한다. 제6항에 따르면 예배는 공예배만이 아니라, 가정 예배와 개인 예배도 있다. 제7항은 예배의 시간에 대하여 다음처럼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칠 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특별히 지정하시어 자신을 향해 거룩하게 지켜지도록 하셨는데,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을 구속하는 ‘명문화된, 도덕적인, 영구적인 계명’에 의하여 하셨다.” 제8항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구체적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음을 적절하게 준비하고 자신들의 일상사를 미리 정돈한 후에, 자신들의 세속적인 고용에 관한 자신들의 일과 말과 생각으로부터 그리고 오락으로부터 온 종일 거룩한 휴식을 지킬 뿐만 아니라, 전체 시간을 하나님의 예배를 공적으로 사적으로 시행하는 것에, 그리고 불가피한 일과 긍휼을 행하는 것에 써야 한다.” 제8항에 따르면 주일성수는 단순히 주일 공예배를 드리는 것에 있지 않다. 요사이 주일 공예배만 드리면 주일을 잘 지킨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있다. 예를 들면 주일날 이른 아침에 공예배를 드린 후 골프 치는 것을 주일성수 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어떤 성도는 공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골프장에서 골프공이 머리로 날아 올 것 같아서 공예배를 드린다고 말한다. 그렇게라도 공예배를 드리는 마음에 기특한 면이 있지만, 이것은 온전한 주일성수가 아니다.온전한 주일성수는 제8항에 따르면 공예배를 드린 이후에도 가정 예배와 개인의 경건 시간이 있어야 하고, 남은 시간에는 공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성도나 병원에 입원한 성도를 찾아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주일 공예배를 드린 후에는 바로 교회당을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은 주일성수를 주일 공예배와 일치시키는 잘못된 개념이다. 제7항에서는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 시간의 적절한 분량을 따로 마련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본성의 법인데, 신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특별히 칠 일 중 하루를 온 종일 내내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앞으로도 코로나19 대감염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나 이동금지에 의하여 주일 공예배를 현장에서 드리는 것이 제한되거나 금지될 수 있다. 신자들이 주일 공예배를 통하여 누리는 은혜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평상시 가정 예배와 개인 예배 그리고 주일 성수가 몸에 배어 있다면 그 은혜와 기쁨을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다. 더욱이 건강한 자들이 드리는 현장 예배가 영상으로 송출됨으로써 자신의 처소에서 영상 예배에 참여하는 자는 그 은혜와 기쁨을 더 크게 대체할 수 있다. 주일 공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으로부터 그리고 갈수록 성경의 가르침이 경시되고 부패한 본성의 법에 따라 사회의 법과 문화가 형성되는 상황으로부터 교회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가정 예배와 개인 예배 그리고 주일 성수에 더욱 힘써야 한다. 이것들은 절대로 우리를 옭아매는 올무가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고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패와 날개다. 주일 하루 동안 일로부터 쉼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정서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정에 맞춤으로써, 세상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며 우리를 살피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우리를 세상의 악과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향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교회
교회생활
주일성수
안식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공예배
코로나19
사회적거리두기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나오는가?
by Scott Swain
2020-07-31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나올까?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성부, 성자, 성령이시기에 성경의 어디를 펴든 성삼위일체가 등장한다. 창세기 1장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삼위일체가 나온다고 단언하는 것은 쉬워도, 성경 안의 다양한 본문에서 삼위일체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분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옛 성도들이 창세기 1장을 읽으며 과대 해석, 즉 해당 본문이 보여주는 것 이상의 삼위일체를 보는 오류에 빠지곤 했다면, 현대 독자들은 과소 해석, 다시 말해 그 본문이 보여주는 것보다 삼위일체를 덜 보는 오류에 빠질 때가 많다. 구약 안에 숨겨져 있는 삼위일체포괄적인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구약에서 삼위일체가 어떻게 등장하는가? 루터교 신학자인 요한 게하르트(Johann Gerhard)에 의하면 창세기 1장에서 삼위일체는 “그 당시에 꼭 맞는 계시의 방법으로” 나타난다. 성경 안에서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는 두 가지 경륜에 의해 나타난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구약에서의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가 있고,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후 신약에서의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가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즉 구약에서는 삼위일체가 ‘없었고’ 신약에서는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차이는 상대적이다. 신구약 모두 삼위일체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구약에서 삼위일체는 “숨겨져 있고” 신약에서는 “드러나 있다.” 구약에서의 삼위일체는 말하자면 밭에 숨겨진 보화처럼(마 13:44; 골 2:2–3) “숨겨진 존재”여서,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드러난 존재”의 빛에 비추어볼 때에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 1장 안에 숨겨져 있는 삼위일체지금까지 정리한 대로 삼위일체가 창세기 1장에서 어떻게 “그 당시에 꼭 맞는 계시의 방법으로” 등장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다. 창세기 1장에는 숨겨진 삼위일체의 존재를 보여주는 단서가 적어도 세 개 등장한다. 이 흔적들은 신약에서 보게 될 완전한 삼위일체의 계시의 구조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들이다. 1. 창세기 1장에는 주어-동사가 불일치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창세기 1장 1절에서 복수 명사인 “엘로힘(Elohim)”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으로 번역되는데 이에 대응하는 동사인 “창조하시니라”는 단수 동사다. “태초에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27절에서도 같은 형식이 등장한다. “[엘로힘]이 자기 형상 곧 [엘로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주어-동사 ‘불일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강조하려 한 것일까? 천지 창조는 하나님 한 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천상 존재들의 위원회 같은 것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누구의 지도나(사 40:13–14) 도움도 받지 않았다(사 44:24; 렘 10:12; 27:5). 이 점을 강조하면서 창세기 1장에서는 삼위일체 신학의 첫 번째 근본적 구성 요소인 일신론(monotheism)이 등장한다. 하나님 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만물을 그에게로 인도하신다. 일신론을 무시하면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은 다신론(polytheism)의 형태로 가게 된다. 삼위일체 신앙은 일신론 안에서 이해해야 한 분 하나님, 세 위격에 대한 신앙이 될 수 있다. 2.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 한 분의 천지 창조 안에서 등장한다앞서 살펴본 예들을 통해 하나님이 홀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배웠다. 그 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 지닌 위치를 깨달을 수도 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영은 하나님이 만물을 생성하시고, 빚으시며, 채우시는 수단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다(창 1:3, 6, 9, 11, 14, 20, 24, 26). 하나님은 지으신 만물에게 ‘이름을 주신다’(창 1:5, 8, 10). 또한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신다’(창 1:22, 28).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 또한 창조의 역사에 참여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아직은 혼돈하고 공허한 세상 위를 어미새처럼 운행하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생명, 에너지, 지성, 그리고 풍족함을 세상에 공급하신다(창 1:2; 비교: 신 32:11). 하나님이 만물을 생성하시고, 빚으시고, 채우시는 수단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보여줌에 있어,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이 한 분 하나님의 창조 역사 안에 포함되어 등장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과 영으로 창조하신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홀로 창조하시며 다른 이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시 33:6–9; 요 1:3; 롬 11:36; 고전 8:6; 골 1:16; 히 1:2). 창세기 1장에서는 여전히 “말씀”이나 “영”이라는 말이 삼위일체 신학에서 갖게 될 위상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이 단어들의 중요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에야 전적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하나님 한 분의 창조 역사 안에 포함시켜 보여줌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중요한 한 부분을 가르친다. 성경이 나중에 엘로힘, 그의 말씀, 그의 영에 대해 어떤 구분을 하든지, 그것들이 마치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과의 구별인 것처럼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 어떤 구별들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3. 그렇다면 그 복수 명사(plurals)는 무엇인가?위에서 다루었듯,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을 지칭할 때 계속 복수 명사인 “엘로힘”을 사용한다. 일부 성경 주석가들은 이 복수 명사가 하나님의 삼위적(三位的) 충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복수(plural)로 표현하시는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가 창조는 한 하나님 그러나 세 위격의 작품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이 복수 명사가 창세기 1장 안에 숨겨진 삼위일체를 보여주는 표식이 될 수 있을까? 창세기 1장 26절을 살펴보자. 창세기 1장 26절에서 자신을 복수 형태로 표현하신 이 부분은 종종 소위 말하는 “장엄복수(莊嚴複數, royal we)”의 한 예로 설명되곤 한다. 왕이 자기 자신을 복수 형태로 표현하는 관용적인 표현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천사들의 천상 모임을 가리키시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욥 1:6; 2:1). 이 두 가지 모두 타당성이 부족하다. 전자의 경우 이것이 고대 근동에서 정말 관용적인 표현이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없다. 후자는 창세기 1장 전체의 메시지와 대치되고, 더 나아가 성경 전체와도 대치된다. 창조 역사를 위해 하나님은 천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천사들은 기껏해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존재일 뿐이다(욥 38:7). 하나님은 그 자신만의 주권적인 권능을 통해 홀로 행하신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사 44:24). 그렇다면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복수 형태로 말씀하신 수수께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이 어디에선가 말했듯,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온 복수(plural) 형태로서의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가장 강력한 후보는 창세기 1장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다. 하지만 여전히, 결론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계시는 구약적 경륜과 신약적 경륜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구약 계시가 삼위일체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해석할 때 최종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려울 수 밖에 없고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 계시의 수수께끼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약 계시를 통해서만 풀린다. 창세기 1장은 무대를 설정해준다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자취들은 신약에서 계시되는 완전한 삼위일체 계시의 구조를 위한 중요한 구성 요소를 제공해준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의 주연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분은 만물을 자신의 말씀과 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를 설정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이 생성되고, 빚어지고, 채워진 것이다. 창세기 1장은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기 헌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자신의 형상으로 빚어진 피조물, 즉 인간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이 증거하는 성경의 주목적은 성삼위일체, 그리고 하나님 한 분을 위해 피조되고 구속되고 완전케 된 인간 사이의 연합과 교제를 증진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Is the Trinity in Genesis 1?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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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설교 듣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by 김형익
2020-07-30
얼마 전, 한 기관에서 ‘설교 듣는 법’에 대해서 강의를 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 이 주제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주제였고,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시리즈로 설교를 하기도 했었다. 내가 이 주제를 오래 생각해 온 이유는, 그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무시되어온 주제도 많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 좋은 편이다. 겉으로 들릴 정도로 ‘아멘’을 외치는 것이 일상화된 교회도 그렇지만, 조용한 교회에서도 회중은 말씀을 잘 듣는 편이다. 한 번은 말씀사경회에 청함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중에 너무나 말씀을 잘 듣는 회중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어떤 목사가 와서 무슨 말을 하든지 다 이렇게 듣는 것은 아닐까?” 단지 목사가 말을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이것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다. 목사는 복음의 사역자 또는 말씀의 사역자라고 불린다. 목사 직분이 갖는 가장 중요하고 우선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그래서 모든 목사는 예외없이 신학교에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바르게 전하는 훈련을 받는다. 성경과 신학, 그리고 교회 역사를 이해하는 과목들 뿐 아니라 아예 설교학이라는 구별된 분야의 훈련도 받는다. 내 서재에도 설교와 설교학에 관련된 책들이 정말 많다. (그렇게 신학교에서 배우고 훈련받고 수십 년 동안 설교를 해왔고 설교에 대한 책들을 그렇게 읽고 보면서도 왜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을 하면 정말 부끄럽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목사가 된다. 그리고 적어도 30년 이상(너무 늦게 시작하지 않았다면) 매주일 두 번에서 많게는 여덟 아홉 번의 설교를 한다. 그렇다면, 회중석에 있는 교인들은 어떤가?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 만큼이나, 교인 한 사람이 일평생에 듣는 설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자신이 속한 교회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 외에, 팟캐스트나 유튜브로 설교를 찾아 듣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영광스러운 수단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 듣는 것은 신앙의 성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하지만, 설교를 많이 듣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목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설교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잘 하는 것이 아닌가! 이점에서 설교를 잘 듣는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잘 하는’ 설교를 전제로 한다. 평생 그토록 많은 설교를 듣고 있고, 설교를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면, 교인은 과연 설교를 잘 듣는 법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었던가? 목사가 설교하는 법을 배우듯이 설교 듣는 법을 배운 교인은 거의 없다. 말했듯이, 나는 설교와 설교학에 대한 책들은 그 제목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설교 듣는 법에 관련한 책은 단 두 권 뿐이다. 단 두 권 말이다! 이것은 너무 목사 중심적인 것 아닌가!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성경이 말씀을 듣는 주제를 직간접적으로 얼마나 많이 다루고 있는지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잘 알려진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네 밭의 비유(마 13:1-23; 막 4:1-20; 눅 8:4-18)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설교를 하는 것에 대해 다루는가 아니면 설교를 듣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는가? 누가복음에서 이 비유는 이렇게 마친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눅 8:18).”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고 권면할 때, 설교를 잘 듣는 것이 우리 신앙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도 말씀을 듣는 것에 관한 교훈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신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설교를 잘 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맥체인 캘린더에 따라 오늘 아침에 읽은 예레미야서에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렘 25:3–4).”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설교를 듣지 않아서 망한 이야기다. 사실 그들의 행과 불행은 설교를 잘 듣는 것에 달려 있었다. 다음은 모세의 설교 일부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3).”주님께서 네 밭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바, 설교를 잘 듣는 법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눅 8:15).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 것은 몇 가지를 전제로 한다. 1. 믿음 설교를 잘 듣는 것은 믿음으로 듣는 것이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설교를 많이 들은 사람들도 없을 것 같다. 그것도 모세의 설교를 말이다. 하지만 그들 다수는 그 설교의 유익을 누리지 못했다. 믿음으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분별력설교를 잘 듣는 것은 분별력을 가지고 듣는 것이다. 목사가 말한다고 해서 다 ‘아멘’할 일이 아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태도가 중요하다(행 17:11). 이렇게 할 때, 가짜 목사들이 걸러지고 형편 없는 설교들이 강단에서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비판과 분별은 다르다. 분별은 설교에 흠을 잡으려는 의도나 내가 말씀을 전하는 목사보다 낫다는 교만함이 전제되는 비판과는 다르다. 도리어 ‘간절한 마음으로’(이것이 착하고 좋은 마음이고 믿음으로 듣는 것이다!) 듣지만,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확증(confirm)하려는 태도다. 3. 순종설교를 잘 듣는 것은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들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4,26).” 회중석에서 귀를 막고 있지 않다면 설교는 다 들릴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의 문제일 뿐이라면 주님께서 굳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눅 8:8)라는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회중석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 들을 귀가 있는 것은 아니다.4. 자기 기만을 피할 것예루살렘이 멸망한 뒤에 남은 자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청했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렘 42:3).” 그들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렘 42:5–6).” 결론은,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기만을 피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목사가 설교를 잘 하는 것만큼, 교인이 설교를 잘 듣는 것은 중요하다. 인터넷 설교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설교 듣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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