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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문제로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by Amy Dimarcangelo
2020-04-29
약 1년 전, 남편은 소매업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하는 많은 벤처기업과 마찬가지로, 불확실성과 재정적인 부담이 있고, 일터에서도 오랜 시간 일해야 했다. 다행히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며 꾸준히 성장했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덮쳤다. 처음엔 매출이 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증시가 폭락하자 이미 주문받은 것의 대부분이 취소되었다. 지금은 사업의 미래와 그에 따른 우리의 재정이 암울해 보인다.이 세계적 유행병은 많은 사람에게 재정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직장이 문을 닫은 계약직 직원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서 출근하지 못하는 부모들, 급격한 재정 감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 우리 같은 중소기업의 경영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폭풍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우리는 당장 교회의 보살핌이 필요하다.연락하라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자신의 머릿속에 갇힐 위험이 있다. 미래를 걱정할 때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손을 내밀어 암울한 상황을 벗어나도록 도와주길 바란다. 교회가 사람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돌봐준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아직은 얼굴을 마주 보고 자유롭게 교제할 수 없지만, 전화나 문자, 이메일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중단시키고 다시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도움을 주기 위해 항상 진지한 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혼란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위로의 방법은 혼란스러운 상황의 이야기를 멈추는 것이다. 어떻게 힘든 상황에서 행복을 경험하도록 할 수 있을까? 웃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적절한 유머는 영혼을 즐겁게 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계속 기도하라당신이 도울 방법은 제한적이다. 당신이 건네는 격려의 말이 진실하고 시기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성령님만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도에 귀 기울이신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련을 아뢰며 참된 격려와 평안을 구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행하지 않으시지만, 완벽한 지혜로 우리의 기도에 항상 응답하신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실질적인 도움을 주라교회는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고 도왔던 아름다운 역사가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증인이었던 초기 교회 성도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었다.(행 2:45) 그들은 서로 필요를 채움으로써 값진 사랑을 보여주었다.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이 무엇인지를 구해야 한다. 특히 지금은 그분의 부르심에 주의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성도 중에 아이를 돌봐줘야만 일을 할 수 있는 부모들이 있다. 집세를 걱정하는 월급쟁이 가정들이 있다. 사업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월급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사업주들이 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행동한다면 당신은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자비로운 마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믿음을 세울 것이다. 벌벌 떨면서 자기만 살길을 찾는 대신에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할 것이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혹독한 고난의 시험 속에서 기쁨으로 베풀었다(고후 8:1-2). 마케도니아 교회의 이러한 선례를 따라, 지금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큰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으로 베풀 기회이다.당신의 어려움도 함께 나누자시련과 함께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이 찾아온다. 당신의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가 당한 것과 다를지라도 이를 공유한다면, 혼자만 어려운 상황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할 수 있다. 시련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때로 시련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일 수 있다. 성도 간의 사랑은 양방향이다. 내 짐을 함께 들어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라고 부름을 받았다.몸의 건강을 돌보듯이 우리가 서로 보살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다.더 큰 계획을 기억하라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신실함을 잊곤 한다. 우리는 욥을 깨닫게 하시고, 에스더를 지키시며, 룻에게 공급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그분은 보좌에 앉아 계시며,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그리고 경제 붕괴가 그분의 주권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설령 최악의 시나리오가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 그분의 계획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계시고, 구원하고 계시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일상이 지금 당장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앞으로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근본적인 안전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이야기 중 일부이다. 내일, 다음 달,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이야기가 승리로 끝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elp! Now I’m Financially Stressed번역: 송유희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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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역
재정문제
선하심
팬데믹
유행병
해방 이후, 격변하는 역사 속의 하나님
by 옥성득
2020-04-28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는 1980년대까지 현대사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 1876년 이후 한국 근현대사를 흔히 개항기(1876-1910), 일제 식민지 시대(1910-45), 해방과 건국기(1945-1960), 독재와 경제 개발 시대(1961-87), 민주화 시대(1987-현재)로 구분을 한다. 현재 한국사 연구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1961-79)는 물론 전두환 대통령 시대까지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41년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기 때문에 두 세대가 지난 시점이고, 소위 ‘87년 체제’가 끝난 지도 33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기독교 역사는 아직 일제 강점기 연구도 제대로 안 된 상태이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연구는 초보 단계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여러 문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빨리 해방 이전 시대의 연구에서 60-80년대 연구로 들어서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격변의 연속이다. 10년마다 주요 사건이 발생하고 35년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가 되더니, 최근에는 그 변화에 가속도가 붙어 10년에서 20년마다 대위기가 오고 체제가 변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도 변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 과제를 정리하지 못한 채 새 시대를 맞아야 하기에 발달 지체와 변화 지체라는 중증에 걸려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음과 같이 주요 사건과 위기를 중심으로 변동하는 주기를 그려보았다. 해방 이전에도 위기가 많았으나 해방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1910년의 일제 강점, 1929년의 대공황, 이후 계속된 몇 차례의 전쟁, 1950년 6.25 전쟁으로 정착된 냉전 체제, 그로 인한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 10월 유신 체제의 발전, 1980년 5.18 광주의 비극, 1997년 IMF 경제 위기,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가 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이를 극복하는 저력을 보였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자주독립을 추구했고, 자유민주 진영의 도움으로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맞이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되살린 민주주의 정신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민주화 항쟁, 2017년 촛불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대위기와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민주, 자유, 평등의 정신은 당시를 살았던 세대에게 상징적으로 붙여서 말하기도 한다. 감수성이 강한 20세에 위기를 겪은 세대, 즉 1960년에 4.19 세대, 1980년에 86세대, 1997년에 IMF 세대를 탄생시켰고, 올해 20세는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코로나19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만으로 80세, 60세, 43세, 20세로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네 세대를 대변한다. 현재 70-80대가 민주화로 출발하며 산업화를 이룬 세대라면, 50-60대는 산업화를 완성하고 민주화를 심화했으며, 지금의 30-40대는 한국을 세계화하는 주역이었다. 새롭게 맞는 팬데믹 시대에 10대와 20대가 어떻게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지 기대된다.이런 사회와 세대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변동 속에서, 한국 교회는 세대별로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교회론, 선교론, 정치론 등)을 가지고 살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깊이 있게 연구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한국 교회 자체의 문제와 씨름한 역사적 자료를 풍성하게 확보할 수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역사가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한다. 현재 한국 교회 역사 연구 현황을 보면 안타까운 실정이다. 첫째,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신학교에도 전공 교수가 별로 없다. 둘째, 얼마 되지 않는 학자 중 주류는 60대 이상이다. 30대와 40대 학자가 별로 없다. 셋째, 일제 강점기를 연구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넷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한국 교회 역사에 대한 연구물이 별로 없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려면 한국사와 세계 교회사를 공부하고 이어서 해당 시기의 1차 자료를 읽어야 한다. 해방 이전 시대를 연구하려면 한문과 일본어와 국한문이라는 세 가지 외국어를 해야 하므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해방 이후도 여전히 영어 자료와 국한문 자료를 읽어야 하므로 어학 실력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는 다양한 1차 자료와 2차 자료가 넘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을 읽고 소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두루 섭렵하지 않으면 좋은 교회사 학자가 되기 어렵다. 한국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누가 그 어려운 공부를 할 수 있는가? 교회와 독지가는 한국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여러 연구소를 지원하고, 석박사과정의 학생 장학금을 지원하고, 한국교회사 자료집 시리즈 프로젝트에 기부하고, 논문상과 저술상을 만들어 사학자들을 길러야 한다. 교회 건물 하나에 수백억을 투자해도 교인이 없으면 건물은 이단에 매각될 수도 있다. 그 수백억을 한국교회사 연구에 투자한다면, 한국 교회의 활로가 보일 것이다. 향방 없이 달리기보다는 멈추어 서서 반성하고 생각하는 교회라야 살 수 있다. 박물관 자료를 수집하는 교회사 공부가 아니라, 30년, 50년을 내다보며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공부가 되기 위해서 해방 이전 70년(1876-1945)의 역사, 해방 이후 70년(1945-2015) 역사를 신학화하는 기독교 역사 공부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와 세계의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향후 30년의 역사 속에도 인도하실 것이다.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를 살리는 한국 교회 역사 연구에 20대와 30대 신진 학도들이 도전하기를 바란다.
역사
근현대교회
한국기독교역사
근현대사
일제강점기
해방
한반도
교회사
팬데믹시대
혼자여서 좋은 점을 활용하라
by Rusty McKie
2020-04-27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대한 반응이 사람마다 약간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너무 힘들어 하며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기간이 내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시간일 수도 있다. 이들이 SNS에 올린 우스운 사진도 여러 장 보았다. 다른 사람과 관계하며 유지되던 우리의 삶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멈춰졌지만, 대인관계를 부담스러워하던 이들에게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오히려 편안한 시간이 된 것이다. 격리 기간이라 해도 아픈 사람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고 취약 계층에 있는 이들을 보살피겠지만, 집 안에 머물며 그저 넷플릭스를 보게 되어 아주 신이 난 사람들도 있다. 이해는 한다. 목사로서, 어린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내 삶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흔치 않은 시간, 그 아름다운 고독(solitude)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꿈꾸게 된다.하지만 혼자서 누리는 자유의 시간, 그 초반의 흥분이 가시고 나면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들이 그립다. 내 가족, 친구, 그리고 교회처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보고 싶다. 이런 패턴이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계속될지 알 수가 없다.복잡한 사회에서 벗어나 혼자 있게 되면 처음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이 너무도 바쁘게 살아왔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TV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평소에는 결코 사 먹지 않았던 즉석식품을 쌓아 놓고 즐긴다. 고립이라는 햇빛 아래에서 일광욕을 즐긴다.하지만 많은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슬픔, 늘어난 걱정, 우울, 그리고 인간관계를 더 갈망하는 마음으로 힘들게 될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유행병(epidemic)은 벌써 퍼져가기 시작했다. 우리 문화의 외로움이라는 유행병이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대규모 전염병(pandemic)으로 번진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강요된 외로움많은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고문 방식은 그냥 홀로 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거나 보지도 않는 영상을 틀어서 소리가 나도록 한다. 아니면 바삐 움직여서 혼자라는 사실을 잊게 한다. 우리의 일정이 다른 사람과 만남으로 채워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이런 상황에 질병관리본부에서 장기간 서로 격리된 상태로 지내라고 권고한다면 어떻게 될까?사회적 거리 두기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에 대해서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사회적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 침체를 다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 침체”를 다룰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스스로 외로운 곳을 찾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외로운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귀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으로 의도된 것을 기적적인 선으로 바꾸신다(창 50:20; 롬 8:28).혼자만의 자리 만들기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더욱 전심으로, 또한 더욱 희생적으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따랐다(눅 5:16). 우리 영혼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듣기 위해서는 고독과 침묵이 꼭 필요하다. 이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날들에 있어 첫 번째 관문은 우리가 만날 고독의 처소를 시끄러운 곳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시간은 하나님과 차분하고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온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시 46),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잠잠히 기도하며 그가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고, 이것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대규모 전염병 뒤에 숨겨져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난관, 염려, 그리고 외로움으로 인해 우울증이 심해질 수 있는 이들의 어려운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 어려움은 실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세상과는 잠시 담을 쌓을 수 있으나 하나님을 향해 담을 쌓아서는 안 된다. 두려움이나 무감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목소리들을 거부해야 한다. 대신, 선하고 주권적인 왕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고요하게 하자(시 131).영혼의 필요 채우기우리가 외로움을 겪는 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관계에 대한 열망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삶을 부인하고 광야로 들어가 고립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가 겪는 외로움은 애통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기회이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망가진 이 세상을 애통해한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음에 이르는 이 무자비한 상실로 슬퍼한다. 우리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 가득한 두려움과 염려로 애통해한다. 더 이상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어갈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 된 이들과 함께 모일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이 대규모 전염병을 슬퍼하고 이 병이 초래했고, 앞으로도 초래할 끔찍한 결과에 대해 마음 아파한다. ‘주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하며 우리는 울부짖고 애통해한다.이 외로움은 중보하시는 예수님께 동참할 기회이다.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깊어진 우울과 염려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를 간절히 구하고 기도한다.마지막으로, 이 외로움은 다른 이들의 삶에 동참할 기회이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영성과 관계성을 현대 기술이 완전히 제공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 고독의 장소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면 우리 영혼의 필요가 채워지고,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영혼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고후 5:14–20). 매일 교회 친구 한 명,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 한 명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묻는다면 어떨까? 마트에서 사다 줄 것이라도 있는지 물어보는 쪽지를 이웃집 문에 남겨두면 어떨까? 당신이 어떤 이를 위해 그간 어떻게 기도해오고 있었는지를 손으로 직접 쓴 쪽지로 건네준다면 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변화될까?다시 만날 그날까지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소위 “사회적 거리 두기”는 슬프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함께할 수 있는 날을 벌써 고대하고 있다. 우리 앞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길이 놓여 있지만, 나는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어떠한 친구, 형제, 또는 연인보다 가까이 계시다. 이 모든 혼란과 단절 속에서도 그는 우리를 붙드신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다!내가 또한 믿는 것은 교회는 분명히 다시 모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향적인 사람들을 포함해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나서 더 크게 노래하고, 더욱 큰 미소로 인사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더 이상 위험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쉴 것이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고독의 장소 ‘밖으로’ 도망치기보다 그 ‘안으로’ 들어가 거기 계신 예수님을 만나자. 다시 만날 그날까지,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 대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자. 그리고, 이 대규모 전염병은 하나님이 창조 역사에서 쓰셨던 혼돈의 찰나 같은 것이므로, 그날이 오면 이 병은 우리를 더는 위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소망하자.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Leverage Your Lonelines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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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gon Duncan
2020-04-26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뜻밖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예배에 관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주신 이 감동적인 스토리는 예수님이 그녀의 감춰진 죄와 그 내면의 수치심을 드러내시자 그녀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던 예배의 문제에 관해 여쭈는 것으로 전개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0-26)예수님의 이 대답은 그의 공생애를 통한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하시려는 여정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고, 사역과 관련된 중요한 요점들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예배 신학’을 이처럼 잘 설명해 주신 것도 없을 것이다.우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특별한 선언은 성경적 예배의 모든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특정 행위와 삶의 방식 모두를 강조하고 있는데 행위로서의 예배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즉 교회 예배, 가정 예배, 그리고 개인 예배 형태로 나타난다.‘교회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주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특별한 은혜의 기쁨을 누리는 예배이다. 이런 종류의 예배는 때때로 ‘공동체 예배’(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함께 참여한다)로 불린다. 또 ‘모임’, ‘집합’ 그리고 ‘회중’ 예배라고도 불린다. 이 예배의 중요성은 신구약 전반에 걸쳐 모두 강조된다. 시편 110편 2절과 히브리서 10장 25절은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와 “함께 모여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교회 예배’를 일컫고 있다.‘가정 예배’는 아버지 또는 가족의 연장자들이 인도하는 것으로,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세우고 가족 모든 구성원들에게 삶 속에서의 예배를 고취시켜 교회 예배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성경은 가정 예배의 중요성을 여러 곳을 통해 분명히 하고 있다(출 12:3; 신 6:6-8; 수 24:15).‘개인 예배’(때로 “은밀한 예배” 혹은 “사적인 예배”라고도 함)도 성경 전반에 걸쳐, 특히 예수님과 다니엘, 다윗, 베드로 등이 예시로 제시한 예배의 형태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6절을 통해 제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전달하셨고, 마가복음 1장 35절과 누가복음 5장 16절에서도 그 예를 보이셨다. 다윗은 시편 5장 3절에서, 다니엘은 다니엘 6장 10절에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 9절에서 이것을 언급했다. 크리스천 삶의 핵심인 예배는 신구약을 통틀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요나서 1장 9절에서 요나 선지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정한 날에만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의 목적을 특징짓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 역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31).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삶의 전 영역에서의 예배인 것이다.두 번째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성품과 진리를 향해 교회와 가정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한 장소에 묶여있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을 따라 예배해야만 한다(요 1:14; 14:6).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이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해야만 하는 그 자체로 “진리”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요 1:14), 하나님 아버지 성품의 구현(요 14:6), 하나님의 본성과 계획의 완전한 계시(요 1:18; 히 1:1-3)이시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따라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죄인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할 때, 다음 네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모든 예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알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분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영으로 예배해야 하고, 또 그분이 영원하신 실재이시기에 예배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분의 계시에 따라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번역: 송유희
영성
예배
신령
진정
영광
성경적예배
교회예배
가정예배
개인예배
신앙인으로 기꺼이 불편해지기
by 김돈영
2020-04-25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다“입대를 축하합니다”현수막이 걸린 위병소를 지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뀐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새롭고 불편해진다’. 자고 일어나는 것, 밥 먹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 등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던 것, 일상적인 일들도 배워야 한다. 심지어 말하는 것과 쉬는 것까지도 새롭게 배우고 적응해야 한다. 이제 민간인과 구별되는 군인이 된 것이다.처음 교회에 가면 많은 것이 낯설다. 예배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도 호칭이나 물건의 이름, 용어들도 다르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처럼 많은 부분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 거룩하다는 말은 교회에서 너무나 자주 듣는 말이다. 거룩한 땅(출 3:5), 거룩한 모임인 성회(출 12:16), 거룩한 안식일(출 12:23), 거룩한 민족(출 19:6), 거룩한 장소인 성소(출 29:31) 등 많은 것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의 소유는 모두 거룩하다. 나는 누구에게 속했는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인정한다면 나 또한 거룩한 것이다. 나의 어떤 능력이나 노력,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셨기에 신분이 바뀐 것이다. 거룩한 것으로 구별된 것이다.방향을 잡았는가?지금껏 해온 일상적인 생활도 군인이 되면 새롭게 배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모든 생활의 방향성,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군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누구나 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부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군인이 하는 모든 행동은 나라를 지키는 것, 즉 전투력과 관련되어 있다. 훈련하거나 장비를 만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축구나 족구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운동이 아니다. ‘전투 체육’이라 부른다. 운동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운동을 통하여 체력을 기르고 전우애를 다지는 것이다. 운동은 전투력 향상을 위한 도구이자 방법일 뿐이다. 밥을 먹는 것도 그렇다. 군대에서는 다이어트를 위해 밥을 굶을 수 없다. 전투력에 지장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든 행동은 전투력, 더 나아가 국방력과 연관되어 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다르게 말하면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가?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말은 참으로 추상적으로 들린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렇게 인식하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말하지만, 다스림을 받는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이다. 좀 더 압축하면 율법이다. 거룩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별되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인 것이다. 주를 위한 것은 무엇인가?“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삶의 방향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주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를 위해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사실 좀 머뭇거린다. 주를 위해 사는 것은 알겠지만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명령, 곧 통치하시는 법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명령과 율법의 핵심, 법이 말하는 방향성은 모두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안경을 주고 있다. 즉 구별된 사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직장 동료와 부하직원은 승진을 위한 발판이 아니다. 전도하는 이유와 전도 왕이 되려는 목적도 달라져야 한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 운동하고, 여행하는 것, 심지어 밥을 먹는 것조차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한다. 병사의 모든 일상이 전투력 향상과 관련된 것처럼 말이다. 구별된 것은 드러난다구별된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드러난다. 말투와 행동, 생각하는 방향 등 독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휴가 중에 있는 군인이 사복을 입고 다닌다고 해도, 짧은 머리를 감추려고 모자를 썼다고 해도 우리는 알아본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금방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가까이에서 그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 군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외모가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군인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왜냐면 모두가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데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친구들 사이에서, 학교나 모임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드러나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조금만 속이면 큰 이익을 볼 수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고 손해나는 편을 선택할 수 있는가? 하기 싫은 뒷정리나 청소,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일, 드러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것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할 수 있는가? ‘아니요’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구별된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거룩한 것, 익숙한 것과 싸움거룩하다는 것, 구별된다는 것은 날마다 익숙한 것과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우리는 입대 하기 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았던 생활에 익숙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내 기준에 맞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하다. 무엇을 배울 필요도 없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을 탈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늘 신경 쓰고 긴장해야 한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거나 긴장이 풀어지면 나도 모르게 예전의 습관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긴장의 끈을 놓치면 대대장님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초유의 사태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을 써야 한다. 긴장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자꾸 되뇌어야 한다. 날마다 자신의 내면과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기준을 버리고,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질지라도, 구별된 사람으로서 말씀의 옷을 입고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마 16:24)하라고 말씀하셨고, 사도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했다. 거룩함에 참여하다우리는 왜 이렇게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히 12:10)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것이다.“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누군가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데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물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신 하나님은 어떻겠는가? 사업이 부도 나는 순간에,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순간에, 몸이 아파 누워있어야 하는 순간에, 밀린 공과금과 부족한 생활비를 걱정하는 순간에, 그리고 요즘 같이 어지러운 팬데믹 상황에 하나님은 가만히 보고 계시겠는가?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하면 무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밥을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행정보급관이 필요한 때 필요한 물품을 전달한다.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행정보급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행정보급관 밑에 있는 것보다 더 불안하고 염려로 가득한 삶을 살고 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구별된 사람,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이라면 염려하지 말자. 불안해하지 말고 내 방법을 찾지 말자. 우리에게 있는 문제쯤은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다. 물론 그 방법이 내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빅픽처’를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주인이신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된다. 그것이 최선이다. 불편함이 익숙해지다구별되어 불편한 삶, 우리가 익숙해져야 하는 삶이다. 세상과 구별된 삶이기에 우리는 언제나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다른 방향을 가는 이 세상에 익숙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룩한 모습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완성되지 못한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한 죄의 찌꺼기가 항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조금씩 비워가는 것이다. 내 몸에 쌓여 있는 죄, 하나님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악한 본성의 찌꺼기를 하나씩 벗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때 완전하게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을 회복하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평생 불편해야 한다. 불편한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불편한 것이 편하게 느껴져야 한다. 그것이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것이 거룩한 삶일 것이다.불편함을 편하게 생각하자!
영성
신앙과소명
거룩
사도바울
자기부인
불편
구별
군생활
루터, 팬데믹에 대해 입을 열다
by Justin Taylor
2020-04-24
2019년 12월 31일, 중국 보건 관계자는 세계 보건 기구(WHO)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폐렴이 우한 지역에 출현했다는 것을 긴급히 알렸다. 2020년 1월 7일, 보건 관계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군에서 새롭게 식별된 ‘2019-nCoV’라는 이름으로 이 바이러스를 명명하고 공포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보편적인 감기 그리고 사스(SARS: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를 포함한다. 이 바이러스들은 감염된 사람과 접촉하거나 그들의 기침 혹은 재채기를 할 때 나오는 침방울을 흡입하는 것으로 전파된다. 침방울이 묻은 표면을 만진 뒤 얼굴이나 코를 만짐으로써 전염되기도 한다. 1월 7일부터 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국가로 번졌다. WHO는 4월 18일 현재 218만 명의 확진자와 15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보고했다. 주식 시장은 무너졌으며, 세계 여행과 무역은 직격탄을 맞았다.크리스천들은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며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오직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인도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과거의 크리스천들은 비슷한 위기를 어떻게 대응했었는지 과거를 돌아보는 것 또한 유익하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유럽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 흑사병과 관련해서 쉽게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흑사병은 1347년부터 1350년 사이에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유럽 인구의 25%가 사망했다. 이후 15세기에도 발병하면서 많은 유럽인에게 정서적으로 깊은 상처와 공포를 남겼다. 이 전염병의 사망률은 30%에서 90% 사이였다. ‘치명적인 재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1527)이 사건은 1527년 마틴 루터가 쓴 “치명적 재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흥미로운 소논문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이 질병은 1527년 8월에 루터의 도시였던 비텐베르크를 강타했으며, 많은 루터의 동료와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당시 군주였던 엘렉토르 존(Elector John)은 루터에게 목숨을 위해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루터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남는 쪽을 선택했다. 루터는 질병과 그 희생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장 틸로 데네(Tilo Dene)의 아내는 루터의 품에 안겨 죽어갔다. 루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 온 많은 독일인은 비텐베르크를 떠나라고 했다. 독일인 목사인 요한 헤쓰는 루터에게 글을 썼다. 이러한 질병을 마주했을 때 목회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질문한 것이다. 이 소논문은 질문에 대한 루터의 답변이다. 그 지혜는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익하다. 누가 떠나는가?루터는 강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향해 전염병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도망가지 말아야 하며, 크리스천들은 겸손히 서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연설했다. 루터는 그러한 견해가 칭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사람의 믿음이 자신과 같이 강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루터는 또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목회자, 시장 판사 혹은 의사들)은 위기가 지나갈 때까지 공동체 안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목회자들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선한 목자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요 10:11). 루터는 부모가 자녀를 버리거나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떠나는 행동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우리 이웃들에게 적용했다. 이를 뛰어넘어, 마치 약을 사용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루터는 결코 숙명론자가 아니었다.죽음에 대한 두려움개인의 태도에 대해서, 루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마귀의 일이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직면하는 상황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두렵지 않도록 한다. 하지만 루터는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있어서 남들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나 도망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의 헌신에 따른 주님의 상급을 기대하며 치명적인 위험의 불구덩이에 담대하게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루터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크리스천들과 죽어가는 자들을 직접 섬기는 사역자들은 종기와 감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플 때 네가 나를 돌보아 주었다”(마 25:36)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고, 우리도 남들을 위해 생명을 내려놓아야만 한다고 기록했다(요일 3:16). 루터는 전염병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하나님께 경박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도 경고했다. 하나님의 말씀루터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떻게 믿음으로 살고 죽는지를 가르침으로써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기를 강력히 촉구했다. 불신앙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하라는 경고를 받아들여야 하며, 기회가 있는 동안 목회자를 불러야 한다. 눈에 띄는 죄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하며, 가능하다면 주님의 성찬을 받아야만 한다. 실천적 단계들루터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단계들을 주장했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세균 이론을 발견한 이후 시대를 살아가며, 의학 연구와 현대 병원의 과학적인 발전의 혜택을 얻고 사는 우리는 루터 시대의 비텐베르크 상황이 어땠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루터는 환자들이 수백 개의 개인 주거공간에 머무르는 것 대신에 특정 공공건물이 환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크리스천들에게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집과 마당, 거리를 소독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루터는 비통에 빠진 이들을 목양하는 의미에서 성경 속 장면들로 꾸며 놓은 벽과 비텐베르크 묘지가 도시 경계 밖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궁극적으로 루터는 각 개인이 떠날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려져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르심에 비추어 이루어져야만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의학 역사책의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에게는 그들의 이웃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기회이다. 그리스도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the Deadly Outbreak Comes: Counsel from Martin Luther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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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의 복음 생태계
by 박용기
2020-04-23
팀 켈러(Tim Keller)목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 생태계’(gospel ecosystem)를 설명한다. 복음 생태계는 복음 DNA를 가진 교회들이 한 도시에서 선교와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5-6년마다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역동적인 교회로 성장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역동적 교회들이 한 도시 인구의 10% 정도에 달하는 임계점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복음 생태계가 형성되고, 복음적 교회들이 개체와 전체로서 함께 성장한다는 주장이다. 실리콘밸리는 세계 최고의 창업 생태계가 형성된 도시이다. HP가 창업된 이래로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세계적인 IT 기업들이 지속해서 창업되고 있는 스타트업 천국이다. 실리콘밸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창업자들이 공생하면서 성장 발전하는 생태계가 형성된 도시이다. D. A 카슨 교수는 “각 문화 안에는 선과 악의 요소들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특정 문화의 요소 가운데 복음적 요소와 비복음적 요소가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배울 수 있는 복음적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20-30대가 스타트업 실리콘밸리 지역에 위치한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생의 평균 16%가 창업을 하는데, 1990년대 이후 약 4만 개의 기업이 스탠퍼드대학교 동문에 의해서 스타트업 되었다. 스탠퍼드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스타트업의 영’으로 충만하다. 반면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20-30대에 바로 교회 개척을 하는 젊은 목회자들은 많지 않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장로교 교단 총회(104회, 2019년)에 참석한 교회 대표들 1,449명 가운데 40대 목회자는 14명으로 1%도 되지 않았다. 20-30대 목회자는 단 한 명도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젊은 목회자들을 통한 교회 개척이라고 믿는다. 20대, 30대, 40대 목회자들이 교회를 대표해서 목회한다면 회중의 나이도 젊어지게 될 것이다. 젊은 세대 목회자에 의해서 시도되는 새로운 목회 방법과 전도 방법이 기존의 교회에 신선함과 개혁의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2. 실패가 평균인 스타트업 네오위즈 창업자 장병규는 ‘스타트업의 평균은 실패다’라고 말한다. 10개 기업이 스타트업하면 평균 1개 정도가 살아남는다. “Fail Fast, Fail Often, Fail Everywhere”(빨리 실패하고, 자주 실패하라, 모든 영역에서 실패를 경험하라). 실리콘밸리 창업가들에게 모토가 되는 문장이다. MIT 대학 기업가정신센터 소장, 빌 올렛 교수가 동양 문화권 창업자들에게 준 조언은 다음과 같다. “미국 문화권에서 실패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실패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울 있다고 생각합니다. 먹음직스러우면서 칼로리가 없는 초콜릿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실패가 없는 혁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세계적인 신생 기업들이 지속해서 나오는 이유는 과감한 시도와 수많은 실패를 통한 배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라고 세 번 물으셨다(요 21:15-17). 베드로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복음은 실패한 인생에 두 번째 기회는 주는 것이다. 실패는 목회자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늘려 주며,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목회를 가르쳐준다. 진정한 목회자는 실패를 복음으로 극복하면서 세워진다. 3.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란 스타트업을 선발하여 시드머니 투자, 인맥 연결, 마케팅, 시장성 있는 기술개발 자문 등 신생 기업에 종합적인 멘토링을 제공하는 기관 혹은 개인을 지칭한다. 실리콘밸리에는 이러한 액셀러레이터 기관들이 넘쳐난다. 드롭박스와 에어비앤비 등이 액셀러레이터 기관의 도움과 지원으로 스타트업 되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에서 분리 개척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회자 개인의 역량으로 개척을 진행한다. 소위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개척한다. 각 교단에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부서들이 있지만 대부분 교회 개척을 심사하고 허가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다. 공격적으로 개척자들을 발굴, 지원, 육성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 개척이 예수님의 대사명(마28:19-20)을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국 남침례교회의 국내선교부(North American Mission Board)에는 샌드 네트워크(Send Network)라는 부서가 있다. 샌드 네크워크는 신학교를 막 졸업한 신학생들을 교회 개척자로 모집하여 수개월 동안 훈련한다. 그리고 복음화율이 낮은 도시로 파송하여 교회 개척을 돕는 액셀러레이터 단체이다. 훈련받은 개척자들에게는 종합적인 교회 개척 훈련과 3년 정도의 재정 지원을 한다. 그리고 개척한 지역에서 존경받는 교회 목회자를 멘토로 연결해 준다. 개척된 지역의 주총회와 로컬 지방회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서 교회 개척자를 돕고 지원한다. 4. 교회 생명주기로 본 스타트업 코닥, 노키아, GM은 한때 세계적인 기업이었지만 현재는 쇠퇴한 기업들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 686개 기업의 평균수명은 약 33년이다. 기업이 쇠퇴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혁신 없이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통계적으로 “출생기-성장기-부흥기-쇠퇴기-죽음”이라는 생명주기를 가진다. 한 지역 교회가 쇠퇴기를 거쳐서 죽음을 맞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회중의 고령화이다. 유럽교회들이 쇠퇴하는 이유는 교회를 지키고 있는 회중의 평균 연령이 60-70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교회도 그 생명이 다하게 되는 것이다. 2020년 한국교회는 부흥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 생명주기 통계로 볼 때 현재 교회 회중의 평균 연령이 50-60대이고, 성도 유입에 큰 변화가 없다면 그 교회는 30-40년 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쇠퇴기 상황을 개혁할 수 있을까? 팀 켈러 목사는 ”오래된 교회들을 갱신하는 열쇠는 새 교회를 도시에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복음적 교회는 대략 7-10년마다 새로운 교회를 개척함으로 젊어진다고 했다. 기존 교회가 교회 개척을 하게 되면 인력과 재정을 흘려보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기존 교회는 건강한 자극과 도전을 받게 된다. 새롭게 개척된 교회는 교회 내부사역보다는 교회 밖 전도에 힘을 쏟는 교회가 된다. 이러한 모습은 모교회와 주변교회에 도전을 준다. 교회 개척을 대형교회만 할 수 있다는 것은 물량주의적 사고방식이다. 200명 되는 교회가 50명 정도 분리하여 개척한 후 3-4년 사이에 다시 200명으로 회복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개척된 교회도 부흥하면서 두 교회의 생명주기는 모두 젊어진다. 오래된 교회들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함으로 한 도시에서 복음 운동(gospel movement)을 일으킬 수 있고, 건강하고 강력하게 자생하는 복음 생태계(gospel ecosystem)가 만들어질 수 있다. 복음적 교회 개척 생태계 팀 켈러가 ‘생태계’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생태계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잘 가꿀 수는 있지만, 햇빛, 비, 바람과 같은 날씨와 토양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복음적 교회 개척 생태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복음적 교회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 한국에는 많은 복음적 교회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어떤 도시는 이미 10% 임계점을 넘어 건강한 복음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성령님께서 복음적 교회들을 연결하시고 하나 되게 하셔서 개척 교회와 기존 교회 모두가 개체와 전체로 유기적으로 결합 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통해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개척 생태계가 모든 도시에 형성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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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직시하라
by Paul Tripp
2020-04-22
결혼을 앞둔 커플이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우정과 관련해서, 또는 이직을 생각할 때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목회를 생각하는 목사가 만나게 되는 문제도 있다. 이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현실성 없는 높은 기대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대한 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죄는 이 세상을 문제 속으로 던져넣었다. 성경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문제 많은 세상이 일으키는 먼지와 오염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세상은 애초에 창조되었던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한다. 지금 우리는 말 그대로 신음하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바로 그 세상(롬 8:18)에서 살고 있다고 말이다. 이 세상이 창조될 때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병과 죽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속임수와 실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좋았더라”에 포함되지 않은 반역과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도 먼 고통과 상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평화의 왕자가 창조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도 안 되는 폭력과 전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만들 때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음욕과 욕심이 마음을 채우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삶을 자극하고 또 사역까지 복잡하게 만드는 바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해도 완전한 만족은 없다. 기대와 다른 실상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교회를 포함한 어떤 기관도 죄로 타락한 세상 밖에서 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 또는 우리의 사역도 에덴동산의 타락이 끼친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부족한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이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종종 갈등하는 목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발견한 몇 가지가 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사역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들은 건강한 공동체, 하나님만을 높이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에 대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안에서는 죄가 또 밖에서는 어려움이 공격할 때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타락한 세상에서 만나는 사역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온 어려움 때문에도 고통을 당한다. 여러 교회와 일하면서 사역자들이 서로의 강점을 중심으로 사역하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약점을 자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지혜로운 원칙에 따라 스스로 준비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능력을 힘입는 대신 그들은 정치적인 방법을 택한다. 타인을 공격할 전략을 짜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되는 데에 더 능숙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한다. 성경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세상 속에서 잘 준비되어 ‘이미 도래한 그러나 아직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돕고 사역함으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될 그 날을 고대하며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현실적이지 않은 기대는 오로지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한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매일 매일 구조의 손길이, 용서의 손길이, 그리고 은혜와 위로가 주는 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목회자도 성화의 과정에 있는 인간일 뿐이며, 죄의 굴레를 벗어나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역 현장에 있는 우리가 매 순간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동역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약하고 실패하는 사람들,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거기에는 또 다른 게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 119:105)이다.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바로 살고 또 바로 사역하는 길은 오로지 성경의 지혜가 주는 빛으로 보호받고 인도받는 길밖에는 없다. 자신은 평생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우리의 필요가 얼마나 심오한지, 또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사역 현장에서 매일 매일 경험해야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갈망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사역을 힘들게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이미 혼란한 상황을 더 심각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사역자에게 반드시 힘든 날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을 홀로 두지 않는다. 당신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그분이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바로 ‘그것’이다. 시편 27편 5절 위로의 말씀을 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그는 가까이 계신다. 그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은혜와 자유롭게 하는 지혜로 무장해서 당신에게로 오신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다. 성경이 당신에게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에 하시는 말씀에 눈과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 하나님이 주기 원하는 겸손함과 갈급함, 그리고 은혜와 지혜를 갈망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당신의 삶과 사역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현실적인 일은 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xpect Trouble번역: 무제
목회
난관
고난
어려움
은혜
지혜
겸손함
갈급함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가?
by 이승구
2020-04-21
“그리스도인입니까?”라는 질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의 매우 중요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별다른 느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땅하다.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이다. 오늘날 삼위일체에 대한 생각이 많은 부분 모호해져 있다. 세상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교회 성도들조차도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그저 모호하게 이해할 뿐이다. 이것은 신약교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나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들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려고 하던 때와는 상당히 다른 현상이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잘 의식하였다. 그런데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을 때는 몽롱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그 결과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배도(背道)의 길로 가기도 했다.그러므로 아주 모호한 상태에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 모호한 상태에 계속 있지 않기 위해서, 결국 배도의 길로 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정확히 알려고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바른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이신 분이다(신 6:4; 고전 8: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만난 분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아주 명백히 밝히고 있다(요 1:1, 14, 18, 3:16, 18, 5:18-25, 10:36, 20:28; 롬 9:5; 고후 4:4; 갈 4:4.; 빌 2:6; 골 1:15; 딤전 3:16; 딛 2:13; 히 1:1-4; 요일 4:9, 5:20 등). 예수님을 그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동시에 참된 신성을 가진 분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를 바르게 믿는 것이다.이렇게 예수님을 바르게 믿을 때,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성령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부로부터 보내실 성령을 말씀하셨으니(요 15:26), 성자와는 구별된 성령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 성령도 온전한 신성을 가지셨음을 성경이 증언한다(마 28:19; 행 5:3, 4; 롬 8:11, 9:1, 15:19; 고전 2:10, 11, 3:16, 12:11; 고후 13:13; 딤후 3:16; 딛 3:5; 히 9:14). 여기까지 내용을 인정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바로 믿기만 하면 여기까지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다.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잘못 생각하면 이단이 된다. 우선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즉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이거나 16세기에 시작된 소시니안주의(Socinianism), 19세기에 시작된 성부 단일주의(Unitarianism)와 같은 이단이다. 예수님은 인간이신데 로고스가 그 안에 역사했다고 말하던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sm)도 역시 이단이다.성부, 성자, 성령을 믿되, 하나님은 세 분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삼신론 또한 명백한 이단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명확한 삼신론은 아니지만 삼신론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도 해서는 안 된다.성자의 온전한 하나님 되심을 생각하지 않고, 성자는 조금 못하신 하나님, 심지어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4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아리우스(Arius)를 따르던 아리우스주의(Arianism)도 역시 이단이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자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아주 이상한 생각도 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구약 시대의 성부께서 성육신하신 분이 성자이고, 그가 하늘로 오르면서 다시 오신 분이 성령이라는,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고, 성자가 성령이라는 양태론(Modalism)도 이단이다. 215년경에 리비야와 로마에서도 융성하게 활동했던 사벨리우스(Sabellius)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를 쉽게 설명한다고 하면서 양태론적인 설명을 하는 일이 주변에 많다. 한 사람이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학교에서는 교수이며, 가정에서는 아버지인 것과 같이, 하나님이 성부이시고, 성자이시고, 성령이시라는 설명이 그런 예이다. 또한, 물과 얼음, 수증기의 세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다 같은 분자 구조를 가지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다르게 나타나지만 다 같은 본질을 가졌다고 설명하는 것도 양태론적인 설명이다. 이것이 이단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면 교회에서 이런 예를 들지 않을 것이다.이런 이단적 생각들을 다 배제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1) 한 본질(one and the same essence)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심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동시에 (2)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distinction)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분명히 하려면, 성부와 성령은 성육신하지 않으셨고, 오직 성자만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유념하는 것이 좋다. 성자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계실 때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는 정황을 생각하면 도움이 된다. 이 한 장면에 이 땅에 계신 성자와 그 위에 임하신 성령, 말씀하시는 성부가 나타나고 있다. 성부가 곧 성자이고, 그가 곧 성령이라고 말하려는 양태론의 주장이 옳지 않음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본질을 지니신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되심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가 아니다.이 삼위(三位)는 합해서 하나가 되시거나(fused), 혼합될 수(mixed together) 있는 것도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영원히 구별되는 존재들(subsistence)이시나, 하나의 동일 본질을 가지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하거나, 성령이 성자에게 종속하지 않고 영원히 동등하시다.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나 그것은 성자가 본질상 성부에게 종속적이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동등하신 성자께서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겸손히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그래서 “위격상의 동등하심과 사역상의 순종”이라는 말을 기억해 놓으면 좋다. 여기 참된 겸손이 드러난다. 성부와 동등하신 분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야말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인 요구를 하는가? 다음 세 가지를 제대로 해야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첫째로,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하고, 누구를 찬양하는가? 이때 아주 명확히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물론 계속해서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해 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모호하게 “하나님, 주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명시하던 이전 시대의 찬양을 많이 하는 것이 좋고, 오늘날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찬양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둘째로,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러 기도할 수도 있고, 성부나 성자나 성령께 기도할 수도 있다. 성자나 성령께 기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나, 그런 가르침은 이단적인 것이다. 항상 기도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해야 한다.셋째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있는가? 우리에게 오신 성령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요 14:16) 이를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고 했으니(마 28:20) 이것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고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성부께서도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추상적 교리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함께 사는 역동적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부디 우리가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바른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란다.
신학
교리
삼위일체
기독교유신론
신성
인성
아리우스주의
양태론
폭력적인 영화를 즐겨도 되는가
by Kathryn Butler
2020-04-20
난 영화를 추천한 친구를 믿었다. 그런데 영화는 처음부터 아주 끔찍한 살인 장면으로 시작했다. 나는 이내 친구를 째려보았다. 이어서 추격 장면이 나왔는데 길에 서 있던 무고한 사람을 난자하고 몽둥이로 때렸다. 영화의 마지막,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은 악당을 펜치로 고문했다.내 친구는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스크린을 향해 몸까지 기울이며 완전히 영화에 빠져 있었다. 반대로 나는 소파에 파고드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감독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도록 자극적인 복수의 언어를 사용하여 해설했다. 잔혹함을 엔터테인먼트로 위장한 영화를 보며 복수와 잔혹함 속에서 승자의 통쾌함을 맛보고, 피에 물든 손가락을 흔들면서 사람들은 환호한다. “이제 좀 끄지,” 난 쏘아붙였다.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친구는 웃었지만, 이내 농담이 아닌 걸 알고는 친구의 눈이 커졌다.“아니, 외상 수술(trauma surgeon)을 하는 사람이 왜 그래? 이거랑은 비교도 안 되는 더 끔찍한 걸 다 봤으면서” 친구가 말했다.나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현실에서 이보다 끔찍한 것을 더 많이 보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처럼 끔찍한 것을 본 적은 없으니까. 사실 피가 튀고 내장이 보이는 이런 영화는 비극이 가져다주는 진짜 후유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슬픔에 젖은 부인과 고아가 된 아들들에게 칼날과 파편, 그리고 박살 난 자동차 유리창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 이런 영화는 절대로 상처의 흔적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폭발로 인해 엉망이 된 피부 조직이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수술도 표현하지 못한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흉터가 어떻게 사형 선고를 대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흘린 피를 깨끗하게 닦은 후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상처받은 영혼의 고통을 외상 치료 센터에서 일하는 내내 보았다. 생명을 앗아가는 방아쇠의 위력을 몇 번이고 목격했다.“나는 저런 거 많이 봤어, 그러니까 제발 좀 꺼 줘” 나는 말했다.폭력적인 미디어는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가?폭력적인 미디어에 대한 논쟁은 반세기 이상 과학계에서 뜨겁게 불타올랐다. 10년 전,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부모와 소아과 의사에게 경고하기 위해 폭력적인 미디어와 공격적인 사고 사이의 연관성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로 이뤄진 연구는 그 성명서의 내용을 더 보강했는데, 폭력적인 영화와 비디오 게임에 노출된 젊은이들 속에 잠재한 분노, 실제 폭력에 대한 무감각, 그리고 공감 능력 약화 등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 주제는 아직도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일부 비평가들은 AAP와 같은 조직이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공포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 연구는 미디어 노출이 실제로 삶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실험실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볼 때 생긴 생각과 느낌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잔인하고 참혹한 영화(gory movies)가 공격적인 생각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것이 실제로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한 연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회의론자의 입장에서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는 상황의 경고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의료계의 논쟁은 공공 부문으로 흘러 들어간다. 작년에 있었던 유명한 총격 사건이 전국적으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인들은 영화와 비디오 게임을 잠재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거기에 대한 반발은 신속하고도 격렬했다. 인터넷에는 그런 비난에 대항하는 네티즌으로 넘쳐났다. 총격 사건 이후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유가족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서 공포 영화 ‘The Hunt’의 개봉을 취소했다. 몇 달 후, 영화 ‘조커’(Joker)는 잠재적으로 주인공을 모방한 살인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논쟁이 가열될수록 양측에서는 감정의 불꽃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엔터테인먼트가 사랑에 해를 입힐 때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런 논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크린에서 끔찍한 장면이 벌어질 때, 우리는 봐야 할까 아니면 고개를 돌려야 할까?폭력적인 미디어와 실제 끔찍한 행동을 연결하는 데이터는 없지만, 현실에서 드러나는 증거는 우리의 숨을 멈추게 한다.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폭력적인 미디어는 사람이 폭력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타인이 받는 고통과 괴로움에 덜 민감하게 만든다.” 비록 영화 속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당장 나가서 폭력을 저지르게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장면이 우리의 공감 능력을 둔감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런 사실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을 내적 가치와 존엄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죄의 짐을 지고 도움을 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요 13:34–35).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1 3:16-17).화면 속 무의미한 폭력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이 겪고 있는 곤경을 외면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이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컴퓨터 그래픽이 주는 스릴을 만끽하기 위해서 우리의 열린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화면이 꺼진 후에 느끼는 고통미디어 속의 모든 폭력이 다 타락한 건 아니다.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폭력이 쓰일 때, 영화적 사실주의를 통해서 우리는 타락한 자신을 한 번 더 만나게 된다. 몸과 영혼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우리를 더 깊은 묵상으로 이끌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구세주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무모함이 아니라 정직하고 예민한 태도로 폭력에 접근할 때, 사실적인 영화는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영화는 폭력을 정죄하기보다 폭력 그 자체의 묘사를 추구한다. 많은 영화는 폭력을 마치 금단의 열매처럼, 즉 고삐 풀린 죄가 아닌 화려하고 멋있게 묘사한다. 그래픽 기술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살과 사방에 튀는 피를 묘사하지만, 그러한 폭력적인 장면이 내면에 남기는 영향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응급실의 임상의가 알고 있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폭력은 아이들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또 부모가 없는 고아로 만든다는 사실 말이다. 순간적으로 쉽게 당기는 방아쇠는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끔찍한 슬픔을 가져온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분노는 사랑하고, 꿈꾸고, 희망에 찬 수많은 생명을 사라지게 한다. 그로 인한 고통은 순간이 아니라 몇 세대를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은 결코 흥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악이 남긴 표식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몸은 찢어지고, 살과 피로 물든 사탄의 솜씨가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무엇을 봐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영화가 되었든, 비디오 게임이 되었든, 또는 인쇄물이 되었든 어떤 미디어를 봐야 할 것인지 그 가이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빌립보서 4장 8절을 보아야 한다. 분별에 관한 실로 아름다운 주석을 통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폭력적인 영화가 참되며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런 영화가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또 칭찬받을 만한 마음을 일깨우는가? 우리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옳은 것을 분별할 수 있지 않은가? 폭력적인 이미지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길로 이끄는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키워주는가? 대답이 “그렇다”라고 한다면,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과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영화를 시청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약에 대답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근거로 해서 화면을 끄도록 하라. 대신 참되고 사랑스러운 것, 즉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을 통하여 눈을 즐겁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Let Not Violence Entertain You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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