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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다
by Liz Wann
2020-03-13
내 자녀들에게 많은 책을 읽어주고, 함께 영화를 보고, 더 많은 디즈니 쇼를 보여 주면 보여 줄수록 “너 자신을 믿어라”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가족에 관한 메시지이다. 어느 연령대를 위한 것이든 오늘날 많은 영화는 가족의 귀중함을 말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일에 중독인 아버지는 마침내 그의 가족의 의미를 발견한다. 자기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워킹맘은 삶의 진정한 가치는 가족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항적인 십대 청소년은 그의 가족 안에서 결국 치유된다. 이러한 가족 이야기는 가족의 행복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가치인 것처럼 인식시키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곳이 가족인 것처럼 말이다.가족을 믿고 귀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화와 TV드라마에 나오는 가족의 가치를 인정한다. 왜냐하면 가족을 만드시고, 복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가족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가족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끔찍한 우상이 될 수 있다.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고 있든지, 아이가 없든지 상관 없다. 결혼하지 않았어도 가족은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 교회도 당연히 가족 지향적이어야 한다. 결혼해서 가족을 가지고 싶은 욕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의 왕좌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가족은 우리에게 필요한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 메시지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모든 소망을 부모와 조부모, 형제자매와 자녀들에게 둔다.인식하고 주의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가족은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기보다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가족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분 안에 있는 사랑을,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한 그 사랑을 반영하도록 설계하셨다. 가족은 반드시 하나님과 복음을 향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가족을 사랑해야 한다.가족은 훨씬 더 중요한 관계와 훨씬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다. 바울이 로마서 11장 36절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고 말하듯이, 가족은 분명히 이 영역 안에 들어간다.분리되지 않는 헌신나는 남편과 아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이 내게 우선적으로 부여하신 일이라고 보며, 내 삶이 가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낀다. 내 삶은 가족과 함께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 32-35절에서 결혼한 여성과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읽을 때, 나는 가슴으로 ‘아멘’이라고 한다. 그렇다, 나는 세상의 것을 염려해야 하기에 하나님과 내 가족 사이에서 분리된 느낌이다(고전 7:34). 이 구절에서 바울은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 그는 홀로 사는 것이 주님을 향한 헌신이 나뉘지 않으므로 유익하지만, 결혼한 남성과 여성은 마음이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떻게 주를 기쁘게 할까 하지만, 결혼한 사람은 세상의 것을 염려하고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한다고 말한다. 가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과 가족으로 나누어지게 한다. 바울이 결혼한 사람과 결혼하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은 명백하다. 흐트러짐 없이 주를 섬기는 것이다(고전 7:35). 그는 결혼한 사람을 편하게 해주지 않고 있다. 사실 몇 구절 위로 가면 그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고전 7:29)라고 말한다.이 구절 전체를 보면 바울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을 공감하며 일상적인 일을 잘 하기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결혼과 가족 구조는 우리가 알듯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마 22:30). 바울은 우리가 가족들과 영원을 향하여 살기 원한다. 그는 우리가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고 하늘에 보화를 쌓기 원한다.잔칫상은 차려졌다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12-24절의 비유에서 큰 잔치를 열고 초청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인들은 청함을 받은 자들에게 잔치가 준비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를 말했다. 한 사람은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눅 14:20)라고 했다. 이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결혼한 사람에 대해 경고한 모습과 똑같다. 그 사람은 영원성보다 일상의 일과 사랑을 선택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에게 넓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가족은 그의 우상이었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았다.결혼하여 자녀를 둔 여성으로서 나는 이 구절들을 가지고 씨름하며, 어떻게 실제로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내 마음은 계속 하늘에 두어야만 한다. 가족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가족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가족이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이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가족으로 인해 그분을 향한 마음이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잔칫상은 준비되어 있다. 이 잔치에 참여하려는가?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Captivating Power of a Good Family번역: 정은심
가족
선물
우상
보화
잔칫상
헌신
가족지향적
교회가 교회를 개척하게 하라!
by Brian Howard
2020-03-12
교회 개척에 참여해본 적이 없는 교회가 다른 교회를 개척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교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일부 교회들은 부목사 중 한 명을 내보내 곧장 분립 개척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 개척자에게 적지 않은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 많은 경우 교회 개척자 본인의 준비가 부족하여 분립 개척이 실패로 이어진다. 이는 모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개척의 부정적인 인식만을 남겨두게 된다. 부목사를 내보내 분립 개척을 시도하는 것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추천할 만한 첫 단계가 아니다. 이 일은 단시간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소망은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로 하룻밤 사이에 변모할 수는 없기에, 서두르지 마라. 아래에서 소개하는 단계를 장기간에 걸쳐 따라가면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교회 개척을 통해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될 것이다.[1년 차]교회의 선교 전략과 철학을 평가하고 다시 정의하라세계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많은가 하면 어떤 교회는 지역 선교를 잘 감당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온 전인적(holistic)인 3단계 모본에 근거하여 선교 전략을 수립하는 교회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가 하는 선교의 국면에는 세 가지가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지역 선교: 예루살렘 - 우리 교회가 속한 도시를 섬기는 사역, 긍휼 사역, 지역 전도- 국내 선교: 유대와 사마리아 - 국내 교회 개척- 세계 선교: 땅 끝까지 - 전 세계로 나아가는 선교이 세 국면 여기저기에 참여하는 교회들은 많지만, 이들 모두를 하나의 전체론적인 전략으로 통합한 교회는 거의 없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는 선교의 이 세 국면을 모두 귀하게 여기는가?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개척이 선교에 필요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직 믿기지 않는가? 팀 켈러(Tim Keller) 역시 교회 개척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 전략임을 주장한 바 있다. 시간을 들여 당신 교회의 선교 전략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온 세 국면을 모두 반영하도록 재조정하라.일 년 예산 중 일부를 교회 개척을 위해 책정하라선교에 있어 이 세 가지를 모두 강조하기로 했다면, 다음 단계는 각 국면에 자원을 할당하는 일이다. 전체 선교를 위한 재정은 얼마인가? 그리고 각 국면 당 어느 정도씩 재정을 배정해야 할 것인가? 내가 소전 네트워크(Sojourn Network) 대표로 사역할 당시, 우리가 돕던 개척 교회들에게 전체 예산의 15퍼센트를 선교비로 배정하고 각 국면당 5퍼센트씩을 할당하라고 주문했다. 어떤 식으로 재정을 배정하든, 이 일을 위해 상당한 재정을 책정하지 않고는 결코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년 차에 이 목표 두 개를 달성했다면 상당한 진보를 이룬 셈이다. 이 두 단계를 마쳤다면 이제 2년 차에서 5년 차 목표로 옮겨가라.[2년 차 ~ 5년 차] 다른 교회와 연합하여 교회 개척자를 후원하라새로 마련된 교회 개척 재정으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현 단계에서는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교회 개척자들을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여 후원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아마 아래와 같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여러 교회가 합심하여 교회 개척자 한 명을 전적으로 후원- 교회 개척자들을 후원하는 연합이나 단체에 참여이 일을 교회 개척 뮤추얼 펀드(mutual fund)로 생각하라. 교회 개척자를 당신 교회 혼자 돕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도와라.이미 교회 개척을 시작한 이들을 입양하고 지원하라3단계 전략과 함께, 나는 이미 교회 개척을 시작한 사역자를 찾아 관계를 맺어가라고 제안하고자 한다. 이 단계는 3단계와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아래는 가능한 방법들이다.- 후원할 교회 개척자를 고른다- 그에게 재정 지원을 제안한다- 그와 관계를 형성해간다- 교회 개척자 및 그의 가족을 축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본다 (매월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것을 통해 그들을 지원할 수 있다) - 당신의 교회에서 그 교회 개척자가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설교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이 개척 교회는 당신 교회의 선교 헌신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회중이 늘 알게 하라당신의 교회 안에서 교회 개척 문화를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라교회 개척을 해보지 않았다면, 일 년 안에 교회를 개척하는 교회로 변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성도 중 대부분이 교회 개척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를 바꾸고 교회 개척 문화를 세우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이 그렇게 변화되도록 시간을 주라.- 재정 지원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에게 교회 개척을 이야기할 때도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여기서 제시한 단계들을 약 오 년 정도에 걸쳐 충실히 이행했다면, 교회 개척이 전체 선교 전략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고, 교회 개척자들에 대한 후원을 시작했을 것이다. 교회 개척 자체에 대해 더 배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하나 이상의 교회 개척을 돕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은 교회 개척에 대한 당신의 헌신을 이제 수년간 지켜보았다. 이제 당신은 6년 차, 그리고 그 이상으로 옮겨갈 준비가 된 것이다. [6년 차, 그리고 그 이후]미래의 교회 개척자와 함께 교회 개척 연수를 하라 - 교회 개척자 한 명을 1년에서 1년 6개월 정도 훈련 시킨 후 파송하라.- 교회 개척자는 당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나올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올 수도 있다.3년에서 5년 후에는 그 개척 교회로 보내어 섬길 수 있도록 교회 직원을 선발하라- 보내는 교회로서의 문화를 세워가라.- 이러한 목적의식을 갖고 교회 직원을 선발하라.- 건전한 연합체와 더불어 평가, 훈련, 코칭을 함께 해가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Become a Church-Planting Church번역: 이정훈
선교전략
전략
철학
재정
후원
훈련
지원
교회개척
종교개혁 예배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by Sinclair Ferguson
2020-03-11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후반기의 예배가 일종의 방관자들이 모여 지켜보는 행사로 전락했다는 우려를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다. 회중이 거의 수동적인 자세로 예배에 참여했던 것이다.그러한 회중에 대해서도 예배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 예배자들은 미사가 연출되는 장면을 관찰만 할 따름이었다. 혹은 성가대의 노래를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의 예배 의식에서 회중은, 그처럼 구경꾼의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적극적인 자세로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따라서 예배의 ‘수준’은 그 예배자들이 거룩한 기쁨을 경험했는지가 아니라, 교회 음악이 시대의 기준에 부합했는지, 성가대의 노래가 훌륭했는지, 미사는 인상적으로 연출되었는지에 따라 평가되었다. 이를테면 사제가 입는 의복이나 미사 때 들려오는 종소리 또는 라틴어, 그리고 성당에 피어오르는 향 등이 그러한 연출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실제적인 목적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을 위해서만 드려졌다.종교개혁은 그 모든 관습을 바꾸어 버렸다. 그 결과 각각의 예배자들이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며 말씀을 듣고 직접 성찬을 나누며 자신들의 마음과 영혼을 실어 기도하고 찬양했다.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그러한 종교개혁은 이 시대에 다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교회 예배에 관해 조언하는 전문가들도 ‘주일 예배의 수준’을 가시적인 기준에 따라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사실 예배의 수준은 누군가의 주관을 뛰어넘어 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시선은 수직적인 차원보다 수평적인 측면에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사야나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부복하여 그 입을 가리고 경배를 올리는 참된 예배에 대한 갈망을 이미 상실했는지도 모른다.바울이 바라보았던 예배도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와는 사뭇 달랐다.“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현대 교회가 전통적인 예배에서 부족함을 깨닫고 그 공백을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오늘날 ‘예배의 개혁’은 성경이 위와 같이 제시하는 예배의 비전을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이 씨름했던 질문도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다.‘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기쁨을 예배 가운데 드러내시는가?’‘우리는 어떻게 그 기쁨을 회중 가운데 반영하며 예배의 전 과정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목적을 따라 진행되게 할 수 있는가?만일 우리가 이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도 않고,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 성경을 살펴보지도 않는다면, 예배에 대한 접근,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을 추구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 결과,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뭔가 가시적인 효과만 가져다주는 방식을 따른다든가, 아니면 다른 교회들이 보기에 좀 더 세련된 스타일만 추구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다.한 가지 예를 들면, 과거에는 찬송가를 펴서 거기에 인쇄된 악보를 보며 찬양하다가 이제는 대형 스크린에 가사를 띄워 놓고 한 구절씩 따라 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분명 순수하고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흔히 예상치 못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곧 성도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본래의 목적을 이룬다기보다 오히려 그 신앙에 손해를 입힐 수 있다.말하자면 스크린에 올라온 찬양을 한 구절씩만 따라 하다 보니, 가사 전체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특별히 젊은 세대는 자신이 부르는 찬양이 시편의 고백을 가사로 취한 노래인지도 모르고 따라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앞선 세대와 달리 전체 시편 중 대부분을 암송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편에 나오는 찬송이나 참회의 노래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인용한 가사, 그리고 오늘날 우리와 비교할 때 그 문학적 재능이나 신학적 통찰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작사했던 수백 편의 찬송 역시 모를 수 있다.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흥미를 느끼고 예배에 참석하게 된 오늘날의 어떤 젊은이가 바로 그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되는 사도신경을 몇 주 안에 자연스럽게 암송하겠는가?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고백을 많은 예배에서 생략하고 있는데 말이다.우리는 모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친숙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구약성경이 그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쉽게 망각한다. 다시 말해, 르호보암이 앞선 세대의 지혜를 무시하고 자기 세대의 조언만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재앙에 빠뜨린 잘못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이러한 문화적 상황에서 출간된 ‘종교개혁 예배: 현재를 위한 과거의 예전’(Reformation Worship: Liturgies from the Past for the Present)은 아침에 찬물로 샤워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우리 몸이 활기를 되찾는 데 도움을 주는 냉수 샤워처럼 오늘날 예배를 갱신하는 데 유익을 주는 책이라는 말이다.혹 대중음악만 평생 들어 온 사람은 그러한 노래를 선호할 뿐 아니라 마치 그 노래를 음악의 표준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 채널을 발견하고 바흐와 베토벤, 멘델스존이나 헨델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감성은 더 깊고 풍요로워져서 이전보다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과거의 예전은 우리가 참여하는 예배에 아름다운 질서와 흐름 그리고 리듬을 더해 줄 수 있다.우리 모두 하나님을 예배합시다여기서 나는 경직된 자세로 전통적인 예배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아니면 아무런 독창성도 없이 그저 오래된 예전이면 일단 모방하고 보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이 따른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은 방식을 따라야 한다며 강경하게 주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예배를 질식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유럽에 살지도 않고, 더더구나 16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오늘날도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다름 아닌 성령과 진리를 따라 예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배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의 예전을 참고해 볼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가령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삼위일체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예배의 원리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기 위해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과거의 예전이 보여 주는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거기에는 지혜와 슬기와 깨어 있는 감각, 그리고 예배의 원리와 목적을 주의 깊게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선포되는 가르침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배우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더욱 올바른 방식을 통해 예배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현재 그들의 마음이 시대정신의 영향으로 무뎌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예배의 감각을 깨워 가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우리는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곧 성경을 중심으로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은혜의 경이로움과 믿음의 필요를 인정할 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힘입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을 상실할 때, 우리의 예배는 세련되기만 할 뿐 차갑기 그지없는 죽은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임재가 서린 거룩한 권능으로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내가 어릴 적에는 거의 모든 예배를 시작할 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러한 말이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멘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서로를 향해 인사합시다.” 물론 우리 각자는 서로를 따뜻하게 환영해야 한다.그러나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다. 그분의 임재는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하며, 또한 내면의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을 갖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자신의 임재 가운데로 초대하셨다는 놀라운 특권을 자각하게 된다. 예배란 무엇보다도 그분이 우리를 환영하심으로써 드릴 수 있는 일이지, 우리가 서로를 환영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는 성경과 종교개혁의 유산을 통해 그와 같은 예배의 관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여러 가지 탁월한 예전을 모아 놓은 앞선 책(‘종교개혁 예배’)은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한 자료를 훌륭하고도 지혜롭게 사용하는 이가 있다면, 그 손길을 통해 얼마나 큰 복이 교회에 전달되겠는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We Can Learn from Reformation Worship and Liturgies번역: 장성우
역사
종교개혁
예배
성령
진리
회복
임재
하나님 선물로서의 몸과 영혼
by Robert Cutillo
2020-03-11
오늘날 교회는 대부분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우리 문화에 얼마나 깊이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고 있다. 몸과 영혼의 분열은 오늘날 교회의 심장부를 흐르는 새로운 단절을 가져오고 있다. 영지주의라는 여전히 매력적인 이단 사상과의 투쟁은 기독교 역사에서 오래 지속되었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몸과 영혼의 친밀한 결합을 잘못 해석하거나 무시하는 일에 교회는 주로 방관했다. 이로 인해 육체는 이 시대의 그릇된 사상의 쉬운 먹잇감이 되어왔다. 육체에 대한 의미는 빠르게 물질적인 의미로 축소되었고, 우리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육체의 질병과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했다. 우리에게 몸과 영혼에 대한 생각을 흐리게 하고,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을 단절시켰다. 몸과 영혼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합 된 것이며,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기독교적인 믿음은 놀랍게도 점차 흐려졌다.인간이 육체의 올바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한 육신에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으며, 삶의 본질적인 본성에서 육체를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다.육체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좋은 것은 무엇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상처받기 쉬운 육체육체를 따로 떼어 생각하려는 것은 신체의 약점을 방어하고 최소화하려는 본능에서 나온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각자의 개성으로 인해 상처 입는 현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그것을 감수하기보다는 회피한다. 우리는 길가에 상처 입고 쓰러진 개인과 직접 교류하기보다 프로그램화된 방식으로 자선활동을 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만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어떤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 내면의 성품이 연약한 관계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면 어떤가? 하나님을 향한 삶의 여정이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영지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다른 이들과 친밀한 교제와 연약함을 보완하는 상호작용이라면 어떤가?성경의 이야기는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만남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라. 찰스 테일러는“아가페 사랑은 배에서 나온다. ‘불쌍히 여기다’를 뜻하는 신약성서 단어(splangnizesthai)는 창자에서 반응한다."라고 언급한다.복음서에서 나타난 몇 가지 예는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성육신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던 순간을 생각해보라.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지쳐서 기운이 빠져있는 그들을 보았을 때(마 9:36) 또는 수천 명이 사흘 동안 먹을 것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마 15:32). 하나뿐인 아들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기는 과부의 눈물을 불쌍히 여기시는 장면도 있다(눅 7:11-15). 예수님 사역 초기에 설교하려고 하실 때(막 1:40-41)도,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도 그러하셨다(마 20:29-34). 낫기를 원하던 문둥병자와 보기를 갈망했던 두 명의 맹인을 위해 예수님은 가던 걸음을 멈추셨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셨다. 깊은 연민(splangnizesthai)을 느끼셨다. 성육신으로 인간의 모든 감정을 가지셨기 때문이다.‘가서 이와 같이 하라’성경의 비유 가운데 잘 알려진 것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연민으로 가득한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먼 곳에서부터 달려가 그를 안아주었다(눅 15:20).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과는 달리 사마리아인은 그를 데리고 가서 보살펴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 10:33)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는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근본적인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시대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을 제시하셨다.세상의 삶으로 익숙한 내가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나의 처음 “본능적 반응”은 돌보는 것뿐이었다.갑자기 토미가 노숙자 클리닉에 왔을 때 나는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랐다. 서른 살인 그는 필로폰에 찌들어 있었다.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샤워도 하지 않아서 더럽고, 냄새가 났다. 그의 모습 중 가장 최악은 싸움으로 다친 손을 그대로 두어 곪아 터진 그의 상처였다. 누가 자신의 몸을 이렇게 학대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한참 후 나는 그의 차트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버려진 그는 위탁가정에서 자랐다. 자신이 믿고 의지할 사람들에게 성적 학대를 받은 토미는 사랑보다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되풀이해서 학대하고 있을 뿐이었다.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책 ‘사랑의 행위’에서 두 예술가의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예술가는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만나 본 사람들은 각각 불완전한 모습이었고, 어딘가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두 번째 예술가는 아무 데도 여행하지 않았지만 그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서 그림을 그릴 만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키에르케고르가 언급하기를 두 번째 예술가는 인간의 만남을 재정의하는 다른 관점, “어떤 무언가”를 그가 마주친 모두에게 발견했다고 했다.토미의 상처를 씻기고 붕대를 감아 준 후에 그의 앞에 앉았을 때, 나는 그에게서 전에는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았다. 자기 자신을 학대한 그의 눈에 비친 슬픔을 보았다. 그 순간 내 안에는 연민의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미래는 달라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다. 치유적 존재로의 육체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대한다면 내가 모르는 치유능력에 놀랄지도 모른다. 수년 전, 시카고 쿡 카운티 병원에서 가정의학과 교육을 받고 있을 때, 멜빈이라는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멜빈의 아내는 2년 동안 멜빈의 치료를 위해 동행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남편의 간암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을 때도 그녀는 함께 있었다. 멜빈이 죽던 날 밤, 멜빈 부부는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듯 나를 집으로 불렀다. 내가 돌본 첫 번째 환자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억에 남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장례식이다. 장례예배가 다 끝났을 때,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내가 함께 있어 준 것에 고마워했다. 그 날 밤, 내가 한 일은 없었다. 젊은 의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그곳에 있어 주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치유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건강을 위해“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기술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후에 육체와 영혼, 지식과 경험, 자연과 초자연과 같이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려고 분열의 악한 영은 열심을 내고 있다.우리의 생각과 행동, 믿음과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이웃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딜레마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사마리아인과 같이 “내가 가까이 가지 않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고민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내가 가까이 간다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하는 것을 걱정한다. 성육신하시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러한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함께 있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Healing Power of Bodily Presence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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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에르케고르
코로나19
신앙고백서들로 읽는 '코로나19'의 정국
by 장대선
2020-03-10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 특히 신천지 집단의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신앙의 태도에서 발생한 급격한 바이러스의 전파는 급기야 경기도지사의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게 했다. 국회에서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파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안타까운 것은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경기도지사 또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울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국회의원의 상당수도 기독교 신자이다. 즉 기독교 관원이라 할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확립하신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혹은 거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중에도 현 정권에 대한 반대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일부 급진적 성향의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대정부 차원의 반대와 퇴진 운동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과 같은 대책을 신학적인 비평과 국가 권세와 교회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전혀 별개로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와 구성원들이 모두 국가라는 제도적인 영역 안에 포함된 이상,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서로 교차하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 혹은 서로 교차할 수 없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와 규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교회의 문제에 국가의 공권력이 관여해서는 안 되고, 세속정치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철저한 정교분리가 교회의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한다면, 미군정 하에서 교회가 받았던 적산가옥의 활용이나 군사정권 하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역할로 받은 수많은 혜택은 전부 불법이며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사실 장로교회는 교회와 국가권력 사이의 적절한 영역설정에 성경적인 지침을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17세기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시기에 이미 충분한 경험과 신학적 검증 가운데서 적절한 영역을 설정한 것이다. 16세기에 이미 융성한 장로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신앙고백(1559)에서부터 17세기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을 완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이르기까지, 장로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신조와 교회 정치의 원리들을 산출해 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신앙고백 제39조를 보면, 관원의 역할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무질서와 정욕을 억제할 굴레로 세상에 세속정부와 법률을 세우셨다고 믿는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만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 만이 아니라 첫 번째 돌판을 거스르는 범죄까지 억제하시기 위하여 관원들의 손에 검을 쥐어 주신 것이다.”라고 했다. 제40조에서도 관원에 대한 복종에 관하여 “우리는 관원들의 법률과 규칙에 따르며, 세금, 조세, 그 밖의 의무를 수행하고, 비록 그들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침해받지 않는 한 자율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하는 멍에를 메야 한다.”고 했다. 벨기에 신앙고백(1561)에서는 제36조에서 위정자들에 관하여 “그들의 직책은 단지 국가의 복지에 관심을 두고 감시할 뿐 아니라, 거룩한 목회사역을 보호하며,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된 예배를 제거하며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어디서든지 복음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장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존귀와 예배를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서도 제23장 국가의 관원에 관하여 서술하는 과정 중 3항에서 이르기를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에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또한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그리고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도록, 아울러 예배와 권징에서 생기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되도록 적절한 수단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의 의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이처럼 이미 언급한 프랑스 신앙고백과 벨기에 신앙고백,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 하더라도 교회와 국가의 위정자 혹은 관원들에 대한 분명한 역할과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개혁된 교회들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서 동일한 맥락의 문구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교회들은 이미 그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정리했다. 물론 현대사회의 관원들이 모두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다종교국가로 존재하는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의 신자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얼마든지 적절한 실천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의 신앙을 가진 관원들의 경우라면 더더욱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적절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행해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회들에 출석하는 관원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행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현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한 일련의 항목은, 작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정국 가운데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이나 무분별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 일부 단체들에게, 그리고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현 실정에 대해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할 수 있는 지침들을 서술하고 있다. 선동을 주도하는 일부 세속정치 지향의 사역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할 기독교 관원들에게는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을 살펴보아야 한다. 작금의 ‘코로나19’ 정국 가운데 깊이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과 그들에게 빠진 자들에게는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들어야 한다.교회의 사역자들과 신앙인들 가운데 이러한 신앙고백의 문맥을 특정한 시대, 곧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지역의 종교․사회적인 특수성으로 이해하고 고려해야지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견해를 흔히 볼 수 있다. 신앙고백은 단순히 그 시대의 영주들이나 관원들의 견해나 입김을 의식하여 작성한 것이 아니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러한 견해를 결코 섣부르게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중략]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벧전 2:13-16절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한 행 4:19절 말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한 롬 10:17절의 말씀과 그 외의 수많은 성경 구절들에 근거하여 정리하며 고백한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역사적 신조와 신앙고백의 문구들을 그처럼 쉽게 시대적인 산물로 간주할 수가 없을 것이다.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 가운데서, 많은 신앙인이 의외로 간단하게 자신들의 신앙적 밑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 즉 국가 위정자들에 관하여, 이단들에 대하여, 그리고 예배에 관하여 너무도 쉽게 자신들의 오류와 불신앙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결코 간단하고 짧은 생각 가운데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과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이 시대의 변화가 제시하고 있는 질문에 대하여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지를 스스로 통찰하는 의미로서, 이미 역사를 통해 충분히 논의되고 검증되었던 신앙고백서와 신조들을 깊이 있게 탐구해 보는 차분하고 건전한 열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섣부른 답변을 남발하기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행 17:11-12)았던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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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land Ryken
2020-03-09
우리는 특정 생물이 계속해서 멸종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루에 약 200종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다고 하니 충분히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멸종이 지금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찬송가를 다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찬송가가 사라지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일어나기도 하고, 순식간에 벌어질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많은 교회에서 찬송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고, 이미 사라진 곳도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찬송가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찬송가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찬송가를 경건을 위한 시편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이런 제안은 혁명적인 게 아니다. 경건 묵상을 위한 찬송가 선집(anthology of hymns)을 위해 조사하는 중 ‘찬송가: 독서의 역사’(The Hymnal: A Reading History)라는 책을 만났다(이 책에 관해 내가 TGC에 쓴 리뷰를 읽어보라). 이 책에 의하면 1870년대까지 전통적인 찬송집은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로 세로 13센티에 가로 8센티로 된 시 모음집이었다. 거기에는 악보가 없다.이런 찬송시 모음집은 주일날 예배시간에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일 삶 속에서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다. 찬송가 속의 시는 개인 또는 가족 경건의 시간에 사용되었다. 교인들은 사무실, 학교, 들판 그리고 시장으로 갈 때도 항상 들고 다녔다. 찬송시 모음집은 아이들의 교육, 특히 글을 읽도록 가르치는 데에도 널리 활용되었다. 아이들은 찬송시를 외웠고, 또 선물로 찬송시 모음집을 받기도 했다. 부모는 가족의 추억을 거기에 기록했고, 그 속에 열차표에서 사업상 편지까지 끼워두고 보관했다. 전통 찬송가를 부르는 교회든지 아니면 전통 찬송가를 더 이상 부르지 않는 교회든지 찬송가의 가사를 읽고, 그것을 시로 묵상하는 것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라.찬송은 시다찬송가는 노래로 불리기 전에 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 작사가가 노래로 불릴 것을 고려해서 썼다고 해도 그들은 찬송가를 먼저 시로 만들었다. 찬송가를 오직 노래의 가사로만 생각할 때 우리는 찬송가가 가진 시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몇 가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한 가지 한계는 이것이다. 음악이라는 것이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시선을 가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노래하면서 가사 속에 숨은 이미지와 은유, 그리고 뉘앙스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찬송시를 부를 때 생기는 또 하나의 한계는 다음 절의 가사가 앞 절의 가사 바로 아래, 그리고 같은 흐름의 멜로디 안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다음 절의 시작은 앞 절의 시작과 동일하다. 그 결과 절마다 같은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이다. 가사에 담긴 의미,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의미의 선형적 전개(linear unfolding of the text)는 크게 손상되고, 같은 구역만 반복적으로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게 된다. 애초에 찬송가 가사는 반복되는 사이클이 아니라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라는 선형적 전개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찬송가를 시로 경험하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제 접근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찬송을 시로 읽기일반적인 시를 읽을 때 쓰는 방식을 적용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시인은 자기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서 시를 쓴다. 약 50년 전 내가 대학원생이었을 때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Language That Poets Use)라는 책은 많은 인기가 있었다. 시인들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를 시적 관용구(poetic idiom)라고 표현한다. 간단히 말해서 시인들은 은유와 직유라고 부르는 언어의 이미지와 형체를 통해서 생각한다. 이런 시적 관용구는 읽는 사람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첫 번째로 빨리 읽는 게 정상인 우리의 삶에서, 또한 교회에서 멈추지 않는 음악을 계속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천천히 읽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천히 읽게 될 때 시 속에 숨은 이미지와 형체를 찾아내어 펼치게 되고, A가 B와 같다고 말하는 시의 은유와 직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는 단어와 구절이 주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서 잠시 멈추는 것이다. 시인의 시적 능력이 만든 효과를 누리고 감상하는 것이다. 시가 가진 두 번째 중요한 요소는 시인의 사고가 선형적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찬송가 선집에서 찬송시를 설명할 때 말했듯이 위대한 찬송가 속에 들어있는 순차적 전개(sequential progression)가 중요하다. 찬송가를 모든 시가 다 나올 수 있도록 절에 따라 순차적으로 프린트해 보라. 찬송시가 이런 식으로 프린트된 것으로 알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위대한 찬송시의 작사가가 절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얼마나 깊이 있게 실었는가이다. 대부분의 경우 각 절은 전체 흐름 속에서 달성해야 하는 고유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고, 각각의 절마다 그 자체의 이미지와 단어 패턴이 있었다. 각각의 절을 하나의 독립된 작은 세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다음 절이 앞선 절 속의 사고 또는 느낌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알 수 있다.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때까지 전개된 각각의 절의 일관성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고, 한눈에 각각의 절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 시가 말하고자 하는 통일된 주제를 제대로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시의 세 번째 요소는 장르이다. 우리가 쓰는 모든 찬송가를 하나의 장르, 즉 “찬양”이라는 한 장르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찬송시 모음을 우리가 영국 문학 모음집처럼 접근할 때 여러 가지 사실들이 드러난다. 우리는 먼저 문학과 성경 장르라는 익숙한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찬송가 속 다양한 장르가 발견된다. 개인의 체험을 담은 시, 승리의 노래를 담은 시, 대관시, 자신을 고백하는 시, 특정 상황의 시(시인의 삶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일을 당했을 때 지은 시) 그리고 그리스도 찬양시 이다.찬송시를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시의 카테고리 속에 놓고 볼 때, 우리는 언어의 이미지와 형태라는 시적 질감(poetic texture)의 측면에서 유익을 얻는다. 특별히 중요한 예를 하나 들자면, 우리가 익숙한 찬양은 정말로 많은 경우 성경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찬송시를 설명할 때 “성경적 참조의 모자이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찬송시를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는 경우에만 우리는 비로소 시인들이 성경적 암시라는 네트워크를 얼마나 신중하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찬송시의 유익위대한 찬송가의 멸종이라는 위기를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찬송가를 경건을 위한 시로 간주하고 읽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기독교 문화(기독교 문학 작품과 그 외에도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다양한 예술형태)의 중요한 요소인 찬송가의 완전히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경건을 위한 시라는 측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향해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새로운 발견의 여정이었다. 그것은 문학과 경건의 승리라는 보석 상자를 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여태 아무도 몰랐던 찬송가를 알게 된 것 같은 감정을 반복해서 느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로 발견한 이 보물을 우리 개인과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경건에 도움을 주는 찬송시를 교회 게시판과 웹 사이트에 올릴 수 있다. 목회자와 성경공부 리더는 설교와 연구에 포함 시킬 수 있다. 더 이상 부르지 않기 때문에 찬송가를 포기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회중들이 내가 제안한 이런 형태로 찬송가를 들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 찬송가를 부르자고 먼저 요청할지도 모른다. 이런 공동체적인 찬송가 사용은 얼마든지 개인적인 사용으로 더 확장될 수 있다. 어떤 시리얼 제품의 TV 광고가 생각난다. “먹어보세요. 당신은 좋아하게 될 겁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내가 제안한 것을 한번 해 보라고. 그렇게만 하면 반드시 좋아하게 될 것을 장담한다고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Hymns Be Saved from Extinction?번역: 무제
영성
예배
송시
찬송가
멸종
경건
장르
이 때, 참된 영적 기도가 절실한 때
by 이승구
2020-03-08
이 어려운 때, 기도할만한 때에 열심히 기도에 힘쓰면서 기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점검해 보는 것이 좋다. 기독교적 기도는 구속받은 사람들이 우리를 구속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근거해서 말씀을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영적인 교제이다. 이 말씀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 보도록 하자.1. 구속받은 사람들의 기도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속 사건을 통해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해서 감사하고, 그 감사의 최고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은혜를 받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사람들만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라고 말할 수 있다. 구속함을 입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고 약속하셨다. 시편 기자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구속받은 사람들로서 우리들의 구속자에게 감사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니 구속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기도는 그저 참된 기도와 유사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 유사한 기도로 보이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성령님께서 이미 마음속에 역사하여 이루어지는 진짜 기도일 수도 있다. 그것은 후에 자신들이 참으로 믿게 되고, 성경의 가르침을 받으면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미 역사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참된 기도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지 않는 기도와 모든 이교적 기도는 다 참된 기도의 유사물로 인간들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었음에 감사하면서 참으로 기도에 힘써야 한다).2.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는 기도참된 기도는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께 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제대로 반응하면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대상이 오직 성부, 성자, 성령 – 삼위로 계시는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진정으로 구속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그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한다.(그러므로 성자에게는 기도할 수 없다는 아리우스주의가 이단이라고 교회는 선언했었고, 성부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성자께도 기도하는 것이며, 성령 하나님께도 기도하는 것이니 - 성부, 성자, 성령 각 위에게 성경에서 돌려진 일을 언급하면서 기도할 수도 있고 -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성부에게만 기도하고 예배하는 유니테리안(unitarian)은 이단이다).따라서 그저 말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면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성경으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 배워 가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날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 이것도 기도의 성숙의 한 측면이다. 점점 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맛보아 알아 가는 것이다.3. 구속 사건에 근거한 기도우리가 무엇을 주께 구하는데 주께서 그것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어떤 것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기도 행위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하느냐, 얼마나 열정적으로 기도하느냐, 얼마나 고난 받으며 기도하느냐 하는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구속받은 사람들인지를 물어야 한다. 위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참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부지런히, 힘써서, 열정적으로(fervently), 그리고 모든 것을 다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도하는 시간, 열정, 헌신에 의존하지 않는다).우리의 기도가 응답 되고, 성립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그 놀라운 구속 때문에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롬 4:25). 그러므로 이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서 우리의 예배도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이고, 찬양도 받으시고, 기도도 받으시는 것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었다(벧전 1:18-19). 우리의 대속자이신(마 20:28//막 10:45; 딤전 2:6)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기에(갈 1:4) 대속함을 받은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우리가 중생하였다(벧전 1:3).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리(代理) 구속(救贖)”, 즉 대속(代贖)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하나님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히 9:14). 그러므로 구속받지 못한 자가 아무리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이 주께 상달될 수 없다. 오직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사람들의 간구만이 주께 상달 되는 것이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구속만이 우리의 기도가 성립할 수 있는 근거이다.4.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인 기도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땅에 있는 인간인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전 5:2)과 날마다 영적인 교제를 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런 실재를 표현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고 했다. 우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라고 했다(요 14:16). 또한 성자께서도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실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그 날에는 ...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했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했으니, 이것을 참으로 믿어야 한다. 성부께서도 그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한다고 했다(요 14:23). 그러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비한 교제를 표현한다.우리 존재에 구현된 이 신비를 나타내는 것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는 기도이다. 먼저,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생각을 주께 아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깨달은 바와 이 세상의 모든 정황, 특히 우리의 모든 정황을 우리가 생각한 대로 아뢴다. 그런데 우리가 정녕 하나님의 구속함을 입은 사람이면 그저 자기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주신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아뢴 말들을 점점 받게 된다. 주께 아뢰다가도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의 생각과 표현을 교정해서 아뢰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다.기도가 참된 것이라면 (1) 하루 종일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의식이 점증해 가면서, 동시에 (2) 일정한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다. 특히 이와 같은 때에 더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고, 혹 금식하면서 기도하게 된다. 이렇게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는지를 드러내는 기본적인 시금석이다. 이것을 외적인 시금석(outer criterion)이라고 해보자.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기도하는 것이 참된 교제인지를 드러내는 몇 가지 내적인 시금석들(inner criteria)이 있다. 첫째는 성경의 가르침에 더 주의하고, 그 가르침에 의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우리의 모든 것, 심지어 기도의 내용까지도 교정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점점 더 성경이 가르치는 것에 가까워진다면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시간은 있고, 열심히 기도한다고는 하는데 점점 더 성경의 가르침과 부합하지 않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는 사람이다(시 1:2; 수 1:8; 시 19:14).둘째로, 그 결과 우리가 점점 더 명확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경륜 전체”(the whole council of God)를 깨닫는 데 나아가게 된다. 기독교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광대한 사상을 형성하는 데 나아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고,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사상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승구,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서울: SFC, 2018], 특히 제 3장을 보라).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 세상 속에서 진정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회적 제자도를 실천하며, 바른 실천(orto-praxis)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성경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바른 실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뜻에서 『묵상과 기도 생각과 실천』 (서울: 나눔과 실천, 2015)이라는 책 제목을 생각하게 되었다.셋째로, 그와 동시에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잘 표현하는 데 나아가게 되어 있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여 점점 더 성화되어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그의 인격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실현하여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셨으니,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형상이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수고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의 형상이니,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면 하나님의 참 형상이 잘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 우리가 제대로 된 하나님 형상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이런 시금석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점검하자. 그리하여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이 어려운 시기에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요나의 선상 기도회와 같은 어리석은 기도를 반복하지 아니하려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가 아니라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 참 하나님 백성들이 여기 제시한 시금석을 잘 드러내는 참 하나님 백성의 기도를 할 수 있기 바란다.
묵상과기도
영적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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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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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
무슬림은 이해 못하는 십자가 의미
by Matt Bennett
2020-03-07
지난 1,400년간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대화 주제는 “예수가 정말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라는 역사적인 질문에 대한 논쟁에 집중되었다. 코란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반면(수라 알-니사 [4]:157),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을 복음과 직접 연결한다(고전 15:3-5).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하기에 이야기한다.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질문이 중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논쟁의 중점이 되었을 때 “예수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가?”라는 근본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히브리서 저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속죄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은 구약의 레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구약의 제물에 관한 제도를 알지 못하면, 무슬림 친구들은 대속하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세 가지 부분에서 오해하게 될지도 모른다.1. 속죄의 의미첫 번째 오해는 언어에서 온다. 코란은 “카파라”(Kaffāra)라는 단어를 사용해 죄에 대한 보상을 말한다. 이 단어는 아랍 성경에도 “속죄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키퍼”(유대교의 대속죄일, 욤 키푸르가 여기서 나옴)를 번역했다. 성경에서 속죄가 포함하는 것은 대표 역할을 하는 제사장과 대체 제물,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바쳐진 생명을 상징하는 피이다. 속죄의 결과는 죄에 대한 용서와 불결함의 정화이다.코란에서는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이 속죄의 대리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경건함, 선행, 혹은 잘못된 행동에 대한 뉘우침을 보고 죄를 덮거나 없앤다. 이슬람에는 용서를 받거나 정결해지기 위한 제사장, 우리를 대신하는 희생물이 없다. “카파라”라는 단어는 이슬람의 코란과 기독교의 성경 모두에 쓰였지만, 그 뜻은 매우 다르다.2. 제사의 목적코란에도 제사가 등장한다. 세계 곳곳에 있는 무슬림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한 것(수라 알-사파 [37]:99-111)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이것을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기 위한 하나의 행사로 생각하지만, 코란은 이 제사를 각 신앙의 공동체가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린 의식으로 보고 있다(수라 알-하지 [22]:34-67). 그렇다면 이슬람에게 있어 매년의 희생 의식은 유대교와 기독교보다 먼저 있었다는 주장과도 같다. 이 주장은 코란의 한 부분(수라 알-임란 [3]:67)에 나타나는데,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유대인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닌 무슬림이었다고 말한다. 희생 제사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기보다는 어떤 사람을 이슬람 전통에 속하는 무슬림으로 확인하고, 이슬람교 신앙을 종교의 최종적인 은혜 베풂으로 확립하는 역할을 한다. 3. 같은 인물, 다른 이야기속죄와 제사가 이렇게 다른 견해를 가진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무슬림에게 설명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려움의 가장 큰 이유는 피조물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속죄와 제사가 완전히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코란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복종할 것인지, 그의 지도를 따를 것인지, 그의 방식을 기억할 것인지를 알아보는 시험으로 삶을 제시한다. 피조물이 조물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초연하고 냉담하다. 코란은 자신을 정결케 하는 방법과 악행의 용서를 구하는 방법을 규정한다. 사람은 사는 동안 그들이 한 행동을 기준으로 마지막 날에 심판받을 것이다. 무슬림에게는 1세기의 어느 한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슬람의 속죄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세 가지 장벽은 이슬람 추종자들에게 기독교의 속죄에 대한 이해를 전달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이 세 가지 문제, 즉 속죄와 희생, 그리고 양쪽 모두 관련된 성경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피조물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 세계를 창조했다.하나님은 한 민족을 부르시고 이끄시며, 그 사이에서 함께 하시기 원하신다. 레위기(특히 16-17장)는 거룩하고, 정결하며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 많고 불순하며 의롭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만든 계명을 목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레위기의 가르침에 익숙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레위기의 대제사장, 그리고 그 이전의 제사와 다른 단번에 드려진 제사로 여긴다.이 세 가지에 비추어 볼 때, 히브리서는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희생과 제사장직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두는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히브리서는 성육신 훨씬 이전부터 그의 사람들과 함께 거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무슬림 친구를 초대해서 히브리서를 공부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의미와 용서, 그리고 정화를 담은 제사의 목적을 보여줄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신학적인 부분에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나는 속죄를 정의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성경적 제사가 올바르게 자리 잡기를 기도한다. 성령님께서 일하시기를 구하면서 말이다. 그 구원의 이야기는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큰 감사와 기쁨을 주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to Help Muslims Understand the Cross번역: 허예송
속죄
희생
무슬림
이슬람
히브리서
코란
카파라
복음
십자가
성경의 권위가 살아있는 교회
by Reuben Hunter
2020-03-06
더미(Dummies)를 위한 책들은 엄청난 성공을 했다.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프랑스 와인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을 위해 복잡한 내용을 쉽게 엮은 책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이러한 책이 성공하는 이유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쉽고, 단순한 방식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에도 “더미를 위한” 안내서가 많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기독교 출판사들이 “성공적인 교회 개척을 위한 쉬운 5가지 단계”라는 책을 출판했다.우리는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하기에 이러한 책은 유용하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들은 성경적 가르침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개척하기 원하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모습이어야 한다. 교회 개척은 성경에 따라 설립되어야만 한다.교회를 개척할 때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사역의 모든 측면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말씀 중심 사역바울의 사역을 간단히 살펴보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은 다음과 같다.“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2:2).“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2:4).“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2:9).“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2:13).바울의 사역은 하나님 말씀이 가장 우선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이 중심이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성화의 자리로 이끄신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말씀으로 가르치셨다.바울이 디모데에게 사역의 지휘봉을 넘겨줄 때 복음 선포를 우선시하라고 촉구하는 이유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이것은 우리가 교회를 개척할 때 시작해야 할 부분이다.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우선성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야만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교회 공동체에 특별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런 교회는 세상의 조직에서 제공할 수 없는 것, 즉 교회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없이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중심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씀이 없다면 다른 기능적인 것을 우선시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선한 일이고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말씀보다 앞선다면 심각하게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성경 말씀을 개척하는 교회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분명한 규칙을 세우고,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며, 믿음을 키워야 한다.1. 규칙 세우기교회를 새로 시작할 때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수도 없이 많다.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해야 한다. 모금하기, 사람들과 만나기, 홈페이지 만들기, 주보 만들기, 주일학교 커리큘럼 만들기, 예배 후 다과 제공하기, 그리고 교회 위치 홍보하기 등 끝이 없다.이 모든 것이 중요 하겠지만 체크리스트의 가장 우선순위는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우선시하는 것은 다른 일들에 “NO”라고 말하는 훈련이 포함된다.2. 겸손교회 개척을 할 때 많은 일을 감당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좋아하고 칭찬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드러나게 하거나 멋진 모습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 연구에 마음을 두고 매주 성경 가르치기에 몰두한다면 당신이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은 화려한 것이 아니다. 칭찬받고 우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을 우리로부터 제거하는 것이다. 교회 개척을 위해 많은 활동과 노력은 좋은 것이지만 겸손이 필요하다.3. 믿음그리스도는 그분의 교회를 스스로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어야만 한다. 이것은 오늘날 유럽과 같이 생명을 살리고, 성화시키는 말씀 사역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지역에서 특히 그렇다. 하나님 말씀을 당신 사역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당신의 이웃과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원하고 있는가? 말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마이크 맥킨리(Mike McKinley)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 말씀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라. 사람들을 제자 삼으라. 그리고 공적 예배를 시작하면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라.계속 설교하라끝으로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 중에서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회복하려는 열망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일부 사람들은 지루하고 힘들게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를 나타내는 설교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가르치라”(딤후 4:2)고 했고, 교회는 오랫동안 이것을 실천해오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모여 그분의 뜻을 올바르게 전하는 메시지를 겸손히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 뜻을 깨닫게 하신다.모든 교회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바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ive the Bible Functional Authority in Your Church번역: 정은심
교회개척
말씀중심사역
설교
성령사역
성경의권위
제자
Dummies
빚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
by Paul Tripp
2020-03-05
수많은 사람이 심각한 빚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다. 빚 해결과 재정적 독립으로 가는 길이 급여 인상과 예산 수립, 그리고 투자라고 믿는다. 돈의 흐름을 아는 것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예산 수립으로 실천적인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돈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시작점은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린 소년에게 축구공 던지는 것은 가르치면서 축구 경기의 기본규칙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돈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빚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빚 문제도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하여 빚을 지는 행동과 소비 패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비추어 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돈, 빚, 재정 운용 등의 이해와 실천 방식이 교정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돈의 소유권 포기빚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는 일은 돈의 교육과 예산 수립, 정보 제공 등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돈에 대한 소유권 포기로부터 시작한다. 삶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돈을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재난과 같은 돈 사용 습관을 결코 멈추지 못할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설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고, 그분의 뜻을 수행할 임무를 받았다. 돈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내거나 일련의 규칙을 마음대로 정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우리의 개인적 행복을 실현하는 공간이 아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돈을 만든 것도 아니다. 우리가 돈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빚은 없더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돈을 사용할 수 없다.우리 대부분은 돈의 문제를 안고 있다. 자신이 번 돈을 사용하는 것이라면 무엇을 하든지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 문제는 우리가 돈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서 야기되므로 우리는 괜찮지 않다. 돈을 다루는 건강한 생각은 돈을 창조하신 이와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데 있다.자족하는 소비빚은 근본적으로 과다지출의 문제가 아니다. 자족의 문제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돈에 대한 사랑은 돈보다 더 큰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6-10).바울은 돈의 문제를 자족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돈과 관련된 문제의 뿌리는 거기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안에 진정으로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만 우리는 이기적 욕망을 따르지 않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오해하지 말라. 가족을 위해서 혹은 자녀를 잘 먹이기 위해서 사용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휴식을 위해 좋은 곳에서 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들을 사랑의 마음으로 하라고 하신다. 당신이 돈을 소비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욕심이 이를 주도하고 있는지 말이다.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 자족하게 된다. 자족하면, 소비를 통해 만족해하는 습관을 버리고, 과다지출로 발생하는 빚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개인을 위한 과다지출은 결코 행복을 지속시키지 않는다. 빚을 늘리고, 정서적이고 영적인 스트레스를 초래할 뿐이다.복음적 소망 빚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나는 신용카드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특별히 사려고 하는 것이 없음에도 내 마음은 뭔가를 찾는다. 내가 필요치 않은 것에 여전히 마음을 빼앗긴다. 필요하지 않은 지출을 정당하게 포장하는 것에 능숙하다. 여전히 내가 돈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에 돈 지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것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달리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새로운 시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받는 사람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지배하는 자가 굴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빚을 딛고 올라갈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돈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 준다. 선하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력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은혜만이 재정 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준다. 빚이 아무리 산더미 같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크지는 않다. 돈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심오하지는 않다.우리가 돈 문제에 당면하면 두려움에 빠질 필요가 없다. 무엇인가를 탓하며 우리의 불안을 풀어낼 필요가 없고, 소망을 버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소망으로 돈 문제를 대면할 수 있다. 현명하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속하여 변화시키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Debt Is Not a Money Problem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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