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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이 나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
by Justin Dillehay
2020-03-04
강대상에 서서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이 끝까지 지키십니다. 단 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면 한 번씩 웃음을 삼키곤 한다. “만약에 스물두 살이던 내가 지금 앞에 앉아서 현재의 내가 전하는 이 메시지를 들으면 뭐라고 말할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과거에 나는 칼빈주의자가 아니었다.자유의지 침례교(Free Will Baptist)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는 알미니안으로 자랐다. 십 대 때 리로이 폴라인(F. Leroy Forlines), 매튜 핀슨(J. Matthew Pinson)의 신학뿐 아니라, 좀 더 오래된 제임스 아르미니우스(James Arminius)와 존 웨슬레(John Wesley)의 신학에 심취했다.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구원에 있어서 은혜는 꼭 필요하지만, 그 은혜가 반드시 불가항력적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버릴 수도 있고,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창조되었다. 사랑의 관계 형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유함, 미리 결정되지 않은 자유함이 필요하다. 폴라인을 인용하자면 “영향을 주고, 거기에 반응하는 관계”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역사하는 방식이었지, 결코 칼빈주의자가 생각하듯이 “원인과 효과(effect)의 관계”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정은 인간이 할 수 있도록 함으로 우리의 인간 됨(personhood)을 존중한다. 하나님은 이 방식을 고수한다. 그건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때 정한 방식이기 때문이다.인간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하나님과 원인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차이는 바로 다음 한 단어, 보장(guarantee)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폴라인은 그의 책 ‘진리를 위한 추구’(The Quest for Truth)에서 이렇게 설명했다.칼빈주의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도 상당 부분 영향과 반응이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결과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어떤 경우라도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면 우리는 원인과 효과를 다루는 것이다. 그 보장이 사라지면 칼빈주의도 사라진다.그의 말은 맞다. 그때는 그에게 동의했다. 지금도 그에게 동의한다. 단지 나는 편을 바꿨을 뿐이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짧게 말하면,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를 거꾸로 되짚어 보았다. 열정적인 설교자, 문제의 구절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는 종종 “구원의 황금사슬”이라고 묘사된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예지, 예정, 소명, 칭의 그리고 영화라는 다섯 가지 “고리” 때문이다. 알미니안으로서 나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까지를 문제가 많은 구절로 보았다. 특히 29절은 예지 된 믿음에 근거한 선택(election-based-on-foreseen-faith)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주석가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 해석에 완전히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구절은 그냥 문제가 많은 예외적인 구절로 치부했다. 사실 그 어떤 신학 이론도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거 아니던가? 그러다가 나는 존 파이퍼(John Piper)의 로마서 설교를 듣게 되었다.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2004년,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때까지 어디서도 그런 설교를 들은 적이 없었다. 파이퍼의 흠잡을 데 없는 주해는 그동안 그 구절에 대한 내 해석의 약점을 알게 했고,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설교 때문에 확실한 칼빈주의자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설교로 인해서 최소한 내가 갖고 있던 자신감은 심하게 흔들렸다. 마침내 나는 칼빈주의의 주장대로 바울의 황금 사슬은 상당 부분 보장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슬은 떨어질 수 없는가?한번 29절에서 30절까지 펼쳐서 살펴보도록 하자. (왼쪽 위에서 아래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라. 그리고 이탤릭으로 된 단어와 그 단어 위에 있는 알파벳에 주의를 기울이라)"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A)을….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B)…. 또 미리 정하신(B)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C) 부르신(C)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D)의롭다 하신(D)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E) 하셨느니라"알미니안으로서 조셉 벤슨(Joseph Benson)과 같은 성경주석가의 다음과 같은 해석에 동의했다. “사도는 지금 부름을 받아 의롭게 되고, 그래서 영화롭게 된 사람의 숫자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연구하면 할수록, 바울은 정확하게 서로 일치하는 숫자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슬을 하나씩 살펴보자. (정확하게 하려고 나는 다섯 가지에 각각 알파벳을 붙였다.) 바울은 가장 먼저 하나님이 행한 어떤 특정한 그룹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바로 그 사람에게 추가로 한 무엇인가를 설명한다(“또한….미리 정하셨으니”). 각각의 연결에 등장하는 “또한”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지금 같은 사람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이 바로 그가 미리 정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A=B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각각의 사슬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이제 각각의 구절 사이에 중복되는 것을 살펴보자. 앞에서 두 번째로 사용된 동사가 다음 구절에서는 첫 번째 동사로 사용된다. 바로 이런 동사의 쓰임이 이 다섯 구절을 하나의 사슬로 묶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결국 벤슨과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분명하게 똑같은 숫자의 사람을 말하고 있다. 동일한 사람을 하나님은 예정하고 예지하며, 또 부르시고 의롭게 만들어 영화롭게 하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A = B = C = D = E.알미니안으로서 나는 이 다섯 가지 단계는 단지 믿는 이들이 일반적으로 거치는 일종의 신앙 여정 정도로 이해했다. A그룹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E 그룹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이것은 고리라기보다는 하나의 과녁이라고 생각했다. 가운데 있는 만점짜리 동그라미(bullseye)를 향해 갈수록 동그라미가 점점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바를 자세히 연구할수록 이런 내 생각은 말이 되지 않았다. 마침내 나를 칼빈주의자로 만들었다. 부름을 받은 모두가 다 의롭다 함을 받는다면, 결국 그 부르심은 믿음을 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화보다 앞서기 때문이다(롬 5:1). 의롭다 함을 받은 모두가 다 영광스럽게 된다면 의롭다 함은 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결코 외롭다고 하신 그 선언을 번복하지 않으신다.이런 사실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 상태로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지만, 파이퍼의 설교를 듣기 전까지는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파이퍼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문제를 알게 했다.황금 고리의 보장바울은 왜 이 고리를 만들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답은 28절에 나온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여기서 바울은 단지 어떤 사실 주장(factual claim)을 하고 있지 않다(예를 들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는 지식 주장(knowledge claim)을 하고 있다(예를 들어, “우리가 알거니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바로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한다. “우리가 어떻게 아는데?” 겉으로 보기에 전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주기 위해서 황금 사슬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29절은 “그렇기에”(for)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28절의 내용을 입증하는 논증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역자 주: 우리말 성경에는 for에 해당하는 구절이 없다). 즉 29절부터 시작하는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전에 너를 알았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의롭다 함을 입었고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사슬 안에는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폴라인도 맞았다. 알미니안의 주장, 즉 영향을 주고 반응하는 형태 속에는 결코 보장이 있을 수 없다. 그런 해석은 이 구절이 전하려는 애초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보장은 궁극적으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사슬 속 어디가 되었든지 믿는 자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을지의 여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선을 이룰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궁극적인 결과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 바로 그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부름을 받은 사람 중 상당수는 영화롭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롭다 함도 받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사슬은 결코 끊어질 수 없다. 설교 또는 믿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보장되었으니까 안심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의 가족을 만드는 이 일을 연약한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단지 영향을 주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미리 정하신다. 그렇기에 부름을 받은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롬 8:29).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결과는 확실하다. 형제들이여, 구원은 보장되어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Romans 8 Made Me a Calvinist번역: 무제
신학
신약신학
로마서8장
황금사슬
존파이퍼
칼빈주의자
알미니안
카이퍼 통신 1: 한국 교회의 후배들에게!
by 김은득
2020-03-03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혹시 손봉호, 강영안, 류호준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이들은 모두 제가 설립한 화란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Amsterdam)에서 공부한 자타가 공인하는 카이퍼리안(Kuyperian)입니다. 한국 이외에 저의 모국인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캐나다, 미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제가 가진 지식과 경험이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들었습니다. 돌아보니 거의 반세기(1870-1920) 동안 네덜란드 정치와 문화 영역의 중심에 서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저는 목회자/신학자로서 출발했지만, 세상의 다양한 공적 영역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기독교-민주주의적(Christian Democrat) 정치인으로서 정통 칼빈주의적 색채를 띠는 민중들(Calvinist Common Folk)을 정치적·문화적 소외로부터 해방하고, 억눌린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서 네덜란드 최초의 현대식 정당을 세웠습니다. 40년을 이끈 정당은 몇 번이나 집권에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가 총리까지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후대의 역사가 제임스 브랫(James D. Bratt)은 인류 역사상 침묵과 압제를 당하는 비주류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성공적으로 각성시킨 사례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의 흑인 인권 운동과 저의 정치적 활동을 제시합니다(James D. Bratt, “Abraham Kuyper’s Public Career,” Reformed Journal 37, 10: 9-12.). 비주류의 해방과 각성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무엇보다 제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세속화되어가는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적인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공적 영역에 참여하면서도 종교가 다른 사람이나 비(혹은 반)종교적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도 충분히 인정하도록 한 점입니다.이런 노력은 현대 네덜란드에서 이념적 기초에 따라 분류하여(verzuiling, pillarization) 정치사회를 구성하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양하게 분열된 정치 구조 속에서도 국가 전체의 공공선(the common good)을 위해서라면 정파간에 상생과 타협을 이루었습니다. - Arend Lijphart, The Politics of Accommodation: Pluralism and Democracy in the Netherlands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5). 이 책은 카이퍼가 구축한 현대 네덜란드의 범주화된 정치사회 구성이 적어도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이 부분은 아마도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가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기보다는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면서도 타자와 공생하고,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세속화되어가는 네덜란드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정치적 영역의 성공이 아이러니하게도 저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1980년대 미국의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제 경우를 보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생겨난 오해들이 상당합니다.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라는 보수적 기독교 단체를 창설해 낙태 및 동성애 반대 운동을 일으켰던 제리 팔웰(Jerry Falwell) 목사는 1980년 대통령 선거 때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on)을 지지하면서 정치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레이건의 당선에 이바지하면서 팔웰 목사와 제가 한 공적 활동의 유사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유사성은 첫째, 저와 팔웰 목사 둘 다 지역교회 목사로 시작했지만, 국가 전체를 성경적 가치에 따라 개혁하기 위해 정치적 영역에 참여했습니다. 둘째, 개인의 경건을 최우선시하고 공적 영성에 무관심한 복음(개혁)주의자들을 각성시켜 동시대의 세속적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항하도록 했습니다. 셋째, 국가 전체를 개조하기 위해 기독교 교육 운동을 전개하고, 풀뿌리 정치적 네트워킹, 기독교 대학(팔웰의 경우 Liberty University)을 설립하는 등 동일한 스텝을 밟았다는 것입니다. 1988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직접 참여한 팻 로버슨(Pat Roberson) 목사 역시 저와 동일한 스텝을 밟았습니다. 그와의 유사성은 첫째, 시대와 문화에 뒤떨어졌다고 무시와 천대를 받으며 공론장의 주변부에 밀려나 있었던 기독교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제가 그런 목소리를 위해 신문(일간De Standaard, 주간De Heraut [The Herald])을 활용했다면, 로버슨 목사는 텔레비전(Christian Broadcasting Network)을 이용했습니다. 둘째,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대학교(로버슨의 경우 Regent University)를 세워 학문적 성과는 물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셋째, 기독교-민족주의적 비전(Christian-Historical Imagination)을 제시함으로 팔로워들이 정치사회적 활동, 특히 기독교적 가치에 합당한 법률 제정 활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John Bolt, “Abraham Kuyper,” The Routledge Companion to Modern Christian Thought, eds. Chad Meister & James Beilby (London: Routledge, 2013), 86-87.). 이런 의미에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는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교회의 지배적인 공적 증거는 정치적 증거였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정치신학의 한계와 가능성, 2014, 31).다원화된 네덜란드의 정치와는 달리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정치가로 전향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이념에 기독교적 가치가 종속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기독교적인 가치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선택한다고 해도, 매우 강력하게 이원화된 미국 정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이 최선이든 차선이든 편향된 정치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팔웰 목사나 로버슨 목사 모두 공화당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행태를 보여주었습니다. 목회자들의 정치적 편향성 문제는 미국보다 한국 교회가 더욱 심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제가 참여한 정치를 그런 편향성의 일례로 치부할까 염려됩니다. 물론 저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기에 그런 편향성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다원화된 정치 영역에서 분명하게 소신을 지키면서도 상생할 수 있는 길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고 행동했습니다. 저와 한국 목회자들의 정치참여가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것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진보정치를 따르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인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메시야처럼 바라보며 정치를 종교화합니다. 반면 보수정치를 따르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이용하여 자신이 혐오하는 정치인에 대한 표적 설교를 하거나 정파 편향적인 발언으로 종교를 정치화합니다. 즉 한국에서 목회자가 정치 무대에 나서면 나설수록 본질을 잊고 복음이 아닌 어느 정파의 대변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우려하는 것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저 역시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지역신문사에서는 저의 기독교-민주주의적(Christian Democrat) 성향 때문에 민주당원으로 표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공화당이나 민주당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에 그 표기를 빼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이런 정치적 편향성뿐만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참여가 실질적으로 미국 사회와 문화를 바꾸지 못했다는 것은 대부분의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인정합니다. 기독교적 가치에 맞는 입법활동에 성공할 때마다 정치적인 승리에 도취하여 미국 기독교의 세속화를 가속했습니다.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작가인 로드 드레허(Rod Dreher) 역시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기독교적 정치인 베네딕트 옵션(The Benedict Option)을 주창했습니다. 베네딕트 옵션은 입법활동이나 이슈 중심적인 정치참여에 주력하는 것은 충분치 않으며, 교회가 베네딕트 수도원과 같은 대항적 문화 공동체로서 변화를 위한 교회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인격과 심성을 배양하기 위해서 베네딕트 규칙을 활용하고, 기독교 교육, 기독교 노동, 기독교 마을 등과 같은 하위문화의 소셜 네트워크를 실질적으로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베네딕트 옵션: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선택, 2017, IVP). 그런데 로드 드레허가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선택”으로 제시하는 베네딕트 옵션을 저는 이미 실행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 저의 정치적 성공을 벤치마킹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 실질적으로 제가 조직한 하위문화의 소셜 네트워킹 부분을 영혼 없이 따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제가 정치적 승리를 쟁취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결성한 기독교적 소셜 네트워킹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은 일종의 해방 운동의 성격이 있습니다. 흑인 해방 운동처럼, 정치적 승리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제가 대변하는 이들이 편견과 무시에서 벗어나 동등한 투표권, 공평한 수업 권리를 획득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이런 면 때문에 자타가 공인하는 카이퍼리안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1981년 암스텔담 자유대학교에서 개최된 기념 강좌에서 저와 해방신학의 유사성까지 주장할 정도였습니다(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The Kuyper Lectures for 1981 Delivered at the Free University of Amsterdam (Grand Rapids: Eerdmans, 1983).). 그리고 저의 공적 활동은 결코 개인적 경건과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학적으로 가장 많이 공격한 부분이 바로 경건과 사회참여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해서 바라보는 루터주의(Lutheran)적 관점입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제가 얼마나 애타게 그리며 목말라 했는지 궁금하다면 미국 칼빈신학교의 총장을 역임했던 제임스 드 용(James De Jong)이 최근 번역한 제 책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Abraham Kuyper, Honey from the Rock: Daily Devotions from Young Kuyper, trans. James De Jong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18).).저와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참여를 올바르게 구분하여 살펴본다면, 이론만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 세계를 변화시켰던 저의 공공신학이 한국 교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세속화의 위협 가운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세상만큼이나 악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심지어 세상이 한국 교회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공공성 회복이 미국 복음주의의 경우처럼 공적인 영역, 특히 정치적 영역에서의 영향력증가로 인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한국 교회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왕권(Kingship) 아래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Pro Rege! (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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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Piper
2020-03-02
Podcasts_Ask Pastor John 특별 중계! 긴급 ‘코로나19’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팟캐스트 인터뷰를 아티클로 전합니다.[토니 랭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의 특집 녹음을 위해 존 파이퍼 목사님과 함께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온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는 신문보도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현재 53개국에 걸쳐 확산되고 있습니다. 감염자는 세계적으로 8만3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사망자 수는 거의 3천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몇몇 국가에 확산되던 현상에서 이제 전세계적으로 유행처럼 퍼져가는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부통령에게 미국에서 이 바이러스를 멈추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또 많은 이들은 절망적으로 봅니다. 바이러스 전파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몇 달 동안 계속될 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결국 많은 미국인들이 이 바이러스에 노출될 거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여전히 많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 시장 경제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수출입과 국제 무역 중단으로 다우존스 지수는 이번 주에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헤드라인과 검증되지 않은 뉴스들로 정보에 대한 신뢰를 잃고 두려움에 빠지기 매우 쉽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불확실성이 이제 미국에도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남부아시아에 사는 팟캐스트 경청자들로부터 현지의 최근 정보를 제공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싱가포르에 사는 한 남성이 이런 질문을 보내주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안녕하세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하여 전세계 여러 나라를 감염시키는 양상으로 펼쳐지는 상황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싱가포르에 들어왔을 때, 정부와 시민들은 이에 대처를 잘했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잘 대응하여 국제적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대응은 엇갈렸습니다. 몇몇 교회는 예방 대책을 주지하면서 주일 예배를 지속해서 드렸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예배를 모두 중단했습니다. 몇몇 목회자들은 ‘믿으면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죄악 가득한 도시와 교만한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목사님, 크리스천들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존 파이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라고 물은 질문에 저는 성경에 근거하여 대답해보려 합니다. 우선 답을 하기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의문을 품도록 잘못 말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고통에 대비하도록 돕는 것과 고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을 제가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누군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 신학에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현재 죽어가고 있으며, 수십만의 사람들이 애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그분들의 삶과 시간적으로 잘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 교회의 입장에 서 있다면, 지금 여기서 말할 때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이제 받은 질문으로 돌아가 대답해 봅시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 임상적, 역사적 사실과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사실로 시작합시다. 2004년 12월 26일, 주일에 인도양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인해 2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던 사람들도 예외없이 쓸려내려 갔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크리스천들이 거기에 있었다면, 이러한 일은 크리스천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제 성경적 사실을 봅시다. 마가복음 4장 41절은 “그(예수님)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그래서 이 두 사실-역사적 사실과 성경적 사실-을 함께 연결하면 이러한 진리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자연 재해를 멈출 수도 있었으나 2004년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지혜롭고 옳으며 정의롭고 선한 것을 행하시므로, 그 치명적 재해 속에 지혜롭고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입니다.그러므로 이번 ‘코로나19’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지할 수도, 제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일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죄나 사탄, 질병이나 피해 그 어느 것도 예수님보다 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주도권을 잃어본 적이 없으며, 원치 않는 일을 용인하도록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그러므로 문제는 예수님이 모든 죄악되고 사악한 차원까지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감독하고 제한하며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 그리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성경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입니다.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우리가 토대로 사용할 수 있는 4가지 성경적 근거들이 여기 있습니다.1. 타락의 결과로 탄식하게 된 세상아담과 하와를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인 우리의 몸을 포함하여 창조된 만물들이 타락과 허무를 경험할 것이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죽을 것이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육체적 타락과 허무와 사망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 20-23절의 요점입니다.“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다음 구절은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모든 창조물이 질병과 재해와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자유를 물려받을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크리스천들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우리들도”라고 말합니다-타락과 허무와 질병과 재해와 죽음을 모든 창조물들과 함께 나누며 탄식할 것입니다. 탄식하며 (부활의 때에 일어 날)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에게 다른 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타락한 현실이 정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정화시키기 위함이지 징벌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살전 5:9). 우리는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처럼 질병으로 죽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원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처럼 죽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쏘는 것이 제거되었습니다(고전 15:55). 이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토대로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입니다.2. 은혜로서의 질병하나님은 때로 그분의 백성들을 정화시키고 심판에서 구하시기 위해 질병을 주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은혜 행위입니다. 이 점은 고린도전서 11장 29-32절을 근거로 합니다. 이 본문은 주의 성만찬을 잘못 사용하는 점을 다루고 있지만, 그 원리는 더 폭넓게 적용됩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크리스천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질병과 연약함과 죽음으로]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어린 아이와 같이]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이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합시다. 주 예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통해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거두십니다. 예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치유실 때(마 4:23; 8:17; 14:14)와 그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갈 때를 묘사하기 위해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의 행보를 끊으시고 그것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은 질병으로 죽지만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전 11:32)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고린도에 있는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 몇 명을 그리 하실 수 있다면, 지금도 ‘코로나19’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에게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주의 성만찬을 잘못 사용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종류의 죄악된 행보에 대해서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죽음이 특정한 죄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근거입니다. 3. 심판으로서의 질병하나님은 그분을 거절하고 스스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심판을 내리기 위해 때로 질병을 사용하십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왕은 스스로 높여 신이 되려했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모든 이들에게 그같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한 우리의 많은 통치자들이 매일 바로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는 순전히 일반 은혜와 자비일 뿐입니다.또 다른 예는 동성애적 성교의 죄입니다. 로마서 1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것은 로마서 1장 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것이 세 번째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때로 심판을 내리기 위해 질병을 사용하실 수 있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십니다. 4. 하나님의 천둥소리모든 자연 재해, 즉 홍수, 가뭄, 메뚜기 떼, 쓰나미 혹은 질병 등은 심판을 내리려 하시는 하나님의 천둥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영원한 은혜로 모든 사람들에게 어디 있든지 회개하고 그들의 삶을 바르게 하라고 부르시는 촉구입니다. 이 근거는 누가복음 13장 1-5절에 있습니다. 빌라도는 성전에서 예배자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옆에 서 있던 사람 18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그 이유를 듣기 원합니다. 제가 받은 질문처럼 말이죠. “좋아요. 예수님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 좀 시켜주세요. 이 자연 재해와 그 잔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이 사람들은 그냥 그 옆에 서 있다가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4-5절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이것이 이 순간 ‘코로나19’로 탄식하는 이 세상의 모든 개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저와 경청하고 있는 여러분, 토니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 이에 대해 듣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회개하라”는 천둥소리 메시지를 받고 있는 겁니다. (저는 중국 당국이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 읽은 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최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점점 가혹하게 대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에 맞추기를 바랍니다. * 방송 직접 연결 Podcasts_Ask Pastor John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Do We Make Sense of the Coronavirus?번역: 정은심
재해
질병
회개
코로나19
바이러스
타락
정죄함
성경적
심판
존파이퍼
전염병 앞에 역사적 기독교회는 어떻게 했을까?
by 장대선
2020-03-01
일반적으로 교회는 구약시대로부터 항상 있어온 것이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회로서의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하신 바에 따라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형성된 소위 ‘초대교회’(Early Church)로 본다. 그리고 그 때에 사도들과 전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던 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의 ‘비상직원’(Extraordinary Officer)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상적인 교회의 직무를 감당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의 ‘통상직원’(Ordinary Officer)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의 직원들 혹은 사역자들은 통상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며, 그런 직원들에 의해 유지되는 교회는 통상적인 형태로 운영되는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운영과 관련한 치리규정들은 통상적인 운영의 원칙들과 규정들로 정해져 있다.그러나 통상적인 교회의 운영이 항상 통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예컨대 전쟁이나 전염병 혹은 재해와 같은 비상적인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들은 통상적인 교회의 운영을 기록한 여러 치리서들에서 쉽게, 혹은 세세하게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독특하게도 16세기 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에서는 이미 그러한 경우들에 관해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먼저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 제10장에서는 “신실한 모임에서 행해진 신앙 행위에 관하여” 다루는 가운데, 3조에 명시하기를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 내용: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임직을 받을 때, 그리고 전국 총회의 소집에 관하여 의문이 생길 때,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날을 공적 그리고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 그러나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신이 없이 행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섭리의 근거와 명분의 성숙한 고려 하에 행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가능하면 금식을 시행하도록 조언하며, 그들이 만장일치로, 편리하게 그것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면, 가능한 한 많이 행할 수 있다.”고 언급하여 명시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또한 성찬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12장에서도, 10조에서 “성찬이 시행될 때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병자들이 들어올 경우 건강한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잔을 취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므로, 이 경우에 목사와 장로들은 최대한의 신중한 태도로 이 일을 행하며, 경건한 질서가 유지되고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공히 언급된 전염병의 상황에서 교회는 최대한 신중하고 성숙한 고려 가운데 행하도록 권장하되, 아울러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과 같은 특별하고 비상적인 행실 가운데서 그처럼 신중함과 조심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한 비상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프랑스 개혁교회는 신중하고 조심스런 대책 마련뿐 아니라, 오히려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와 금식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로 말미암아 최근 한국의 교회들은 공예배 중지 및 예배당 폐쇄와 같은 초유의 일들을 급작스럽게 겪고 있다. 특별히 예배당에 모이는 집회와 행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던 그동안의 교회 운영으로 볼 때에, 그처럼 공예배 및 각종 모임들을 중지하거나 잠정적으로 폐쇄하는데 따른 대비책 또한 실질적으로 갖추고 있지 못한 실정이기에, 그 충격과 혼란이 상당하다 하겠다.하지만 일찍이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날을 공적 그리고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을 하도록 했는데, “그러나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신이 없이 행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섭리의 근거와 명분의 성숙한 고려 하에 행해야 한다.”고 하여, 그러한 기도와 금식이 결코 신비적으로나 미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렇다면 그처럼 신비적이거나 미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고려 하에 시행하는 비상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것의 실제적인 시행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으로 흔히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가정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으로서, “개인 및 사적 예배와 성도 간의 상호 교화를 위해, 그리고 가정예배를 소홀히 하는 일들을 책망코자 총회는 아래와 같이 지침을 마련하여 준수하도록 결의한다.”고 한 문구를 배경으로 한 개인 및 사적 예배, 그리고 가정예배를 지도하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장로들의 역할이다. 즉 “본 총회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장로들이 개교회에 소속된 각 가정들에서 이 같이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부지런히 살펴보고 돌아보도록 명한다. 만일에 그러한 가정이 발견된다면 그 가정의 가장이 먼저 그 잘못을 시정하도록 사적인 권면이나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려 한다면 지교회의 치리회(혹은 당회)에 의해 엄중한 책망을 받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처럼 책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그와 같이 심각하게 당회의 지침을 위반하는 그 강퍅함으로 인해 성찬을 받기에 합당치 못한 자로 간주되고 이를 뉘우치고 돌이키기까지 성찬참여를 금함이 마땅하다.”고 한 지침과 같은 맥락으로, 평소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적인 예배와 행사 뿐 아니라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그리고 각 가정에서의 예배를 통해서도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고 도모할 수 있는 훈련과 여건이 전제될 때에,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를 제대로 대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안타깝게도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패턴에 있어서 그 동안 간과되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보다 가정예배를 통한 신앙과 경건생활이다. 양적 성장을 위주로 하여 구성된 대부분의 교회들 가운데서 이처럼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건생활, 그리고 가정에서의 경건생활을 유지하는 예가 드물며, 그조차도 지교회의 지도와 치리와는 거의 별개로서 철저히 개인적인 사안으로만 인식되어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 동안 우리들이 드려온 예배와 공적인 모임들이 혹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었기에 공적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으로까지 내몰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재앙과 질병의 때를 극복할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보다 각 가정을 책임지는 영적인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지원이 교회적으로 이루어져 왔었는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일 것이다.
코로나19
가정예배
기도
금식
경건생활
공적예배
성찬
프랑스개혁교회치리서
놀라우신 주, 그리스도를 보라
by Marshall Segal
2020-02-29
세상에 있는 많은 놀라운 것들, 높고 가파른 산과 깊은 협곡, 넓은 대양이라도 하늘에서 보낸 아들과 비교될 수 없다. 그분이 누구신지 온전하게 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분인지 가늠할 수 없다. 여러분은 예수님에 관하여 놀라움과 뜨거운 마음으로 매료되었던 것이 언제인가? 혹시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우리가 더 이상 그분에게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그것은 그분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예수님은 완벽하게 그리고 영원히 무한한 지혜, 정의, 힘, 사랑을 육신으로 드러내시며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보이신다. 그분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만으로도 모든 대륙, 행성, 그리고 은하계를 운행하시고 통치하신다.자신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태평양의 파도까지도 다스리신다. 모든 새와 곤충을 먹이시며 모든 들판에 있는 풀잎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신다. 70억의 인구가 호흡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이 호흡할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다(행 17:25).하지만 우리는 종종 무감각하게 잊곤 한다.당신의 눈을 열어주신다우리가 무감각한 것은 본질의 의미를 잊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영광의 광채조차도 깨닫지 못할 만큼 둔하고 연약한 사람이다(고후 4:4). 사단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창문의 조각을 빠짐없이 막았다. 우리의 망막은 지금 보고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상의 표면을 보지만 실상의 근원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창조주는 우리에게 지혜와 눈을 주셨으며 처음으로 참된 경이로움을 깨닫게 해 주셨다.“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빛이 당신의 마음에 넘쳐흐른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그곳에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행복을 찾는 당신의 고통스러운 탐색을 끝내셨고, 당신의 찢긴 마음을 고쳐주셨다. 그분은 죄와 수치의 커튼을 걷어 주시고,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광채를 보여주시며, 우리의 눈을 점점 더 넓게 열어주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다.당신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성경책을 열 때, 모든 사람이 당신처럼 그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받는 혜택을 안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따분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말씀 안에서 떨며, 기쁨으로 그분을 바라볼 것이다.함께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가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무뎌진 이유는 묵상할 시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당신은 언제 처음으로 그분을 만났는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흥미로움에서 놀라움으로, 경이로움으로, 모든 것으로, 그리고 위대한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깨닫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몇 주간 그분의 말씀을 먹었을 때, 마치 식사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많은 것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가 그분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셨을 때 우리는 숨을 쉴 새도 없이 받아마셨다.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팔았던 사람처럼, 우리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가격의 진주와 보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땐 그분이 정말 멋지지 않았는가?예수님을 바라볼 시간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잃게 된다. 우리가 적은 시간이라도 그분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분을 조금이라도 알게 될 것이다. 그분과 함께한 시간은 그분 없이 보낸 수많은 시간보다 소중하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만일 그것이 실패한다면 우리의 관심을 예수님 외에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그분 안에서 놀라움을 보기 원하면 사탄(그리고 누구든지 혹은 무엇이든지)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매일 저지해야 할 것이다. 놀라우신 분을 응시하라모든 것을 다해 그분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응시하라. 그러면 무뎌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예수님의 사랑에 무감각하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그에게는 모든 대양에 있는 파도보다 더 큰 힘이 있다. 그는 세상에 있는 모든 대학의 학자보다 더 현명하다. 최고의 진주나 다이아몬드보다 더 고귀하고, 순수하며, 가치가 있다. 가장 치열한 전쟁에 출전한 용감한 용사들보다 더 담대한 용기가 있다. 그는 신생아와 함께 있는 엄마보다 더 온화하다. 법정의 어떠한 재판관보다 더 정의롭다. 그의 사랑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느껴왔던 것보다 더 크고 놀랍다. 그 힘, 그 지혜, 그 사랑이, 그 광채가 지구상에 왔고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골 1:20).그분은 놀라우시고 아름다우시며, 정의롭고 강하시며, 경이롭고 거룩하시다. 그렇지 않은가?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e Yawn Because We Forget: uncovering the Wonder of Christ번역: 이현석
무감각
묵상
시간
경외감
사탄
지혜
경이로움
복음
예수그리스도
화목한 가정은 사명을 함께 나눈다
by Harriet Connor
2020-02-28
우리 대부분은 화목하고 건강한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런 가족은 도대체 어떤 모습인 걸까? 우리는 따뜻한 불빛이 비취는 방에 옹기종기 앉은 가족의 모습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현대적이고 도시화된 사회에서 가정은 세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휴양지 같은 의미이다. 낮에는 각자 흩어져서 일하고 공부하다가 저녁이 되면 함께 모여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 즉 “가족 시간”(family time)은 대부분에게 쉬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런 가정의 모습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 전까지만 해도 가족은 하나의 생산 단위였다. 집은 일하는 장소였다. 가족을 하나로 묶는 것은 함께 있으면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게 아니었다. 가족은 노동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다.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때문에 가족이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창조주가 지으신 피조물을 잘 관리함으로 다른 이들을 창조주에게 이끌고, 우리에게 주신 언약을 전하고, 주님이 주신 대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함께 일할 때, 그것은 세상을 향해 예수님과 그의 신부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바로 양육하고 그들과 함께 일할 때, 그 모습은 세상을 향해 아버지와 그의 영적 자녀들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다. 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 가족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도 가치가 있지만, 기독교인 가정은 사명을 공유해야 한다. 함께 일하고 또 함께 예배하는 것은 가족의 유대관계를 강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향한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가족의 모습이 바뀌었다산업화 전까지 가족의 사명은 경제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다. 가족은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을 기반으로 밭이나 농장 그리고 가게를 운영했다. 가정은 자녀를 교육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곳이었다.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는 이런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어떻게 가족의 유대를 강화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남편과 아내에게 이런 가족은 같은 공간 안에 동거하는 것을 의미했고, 또한 서로가 곁에 서서 공통된 사업을 하는 것(비록 반드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을 의미했다. 어머니에게 가정 안에 일터가 있다는 것은 자녀를 키우면서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도 매진하는 것을 의미했다…. 생산적인 노력이 온통 가족에게만 집중되어 있을 때 아버지는…. 자녀를 훈련해서 함께 일하도록 하는 임무를 가졌다.이런 전통적인 가정의 모습은 가정과 일터를 분리해버린 산업혁명과 함께 바뀌었다. 19세기가 지나면서 많은 아버지는 일터로 나갔고 집에는 어머니와 자녀만 남았다.채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현대적인 가정 대부분이 필요한 것을 밖에서 조달했다. 공장, 회사, 수퍼마켓, 학교, 그리고 양로원에 이르기까지 가족은 더 이상 생존에 꼭 필요한 필수품을 조달하기 위해서 함께 일할 필요가 없어졌다.남편과 아내가, 또 부모와 자녀들이 공통된 목표를 향해 함께 일하지 않게 되었을 때 가족은 쉽게 분리되었다. 알라스테어 로버트(Alastair Roberts)는 이렇게 말했다. “가족은 압박을 통해서 더 강해지는 그 무엇이다… 가족 전체에게 주어진 짐의 무게가 거의 사라졌을 때, 가족은 그냥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가질 뿐이다. 그런 가정은 훨씬 더 쉽게 붕괴된다.”가족은 사명을 가지고 있다.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각 개인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사명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피조물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주어졌다(창 1:28).에덴동산을 가꾸고 일하는 것은 아담 혼자 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했고 아담의 동반자가 되게 했다. 그들은 결혼해서 자녀를 낳음으로 “땅을 채워갔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명을 자녀들과 공유했다.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연약도 아브라함의 가족 전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 18:18-19).하나님은 창조 때에 인류에게 준 명령과 언약의 이행을 다음 세대에게 바로 가르쳐야 하는 책임을 부모에게 맡겼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다 안식일에 쉬라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모든 가족이 다 함께 일하고 또 함께 예배해야 하기 때문이다(출 20:9-10).초대 교회 당시 복음을 전파하는 것 역시 가족 전체의 임무였다. 고넬리우스, 리디아, 그리고 빌립보의 간수는 사도의 메시지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족에게 전했다. 그들의 가족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사명을 함께 나누었다. 누가는 두로의 믿는 자들에 관해서 이렇게 썼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행 21:5).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가지고 있다. 번성함으로 세상을 채워야 하고, 또 하나님의 언약을 계속 상기하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을 삶과 행동으로 전하는 사명이다. 친밀하고 결속력이 강한 가족은 그 자체로 만족해야 하는 게 아니다. 경건한 가족이 되어 이 세상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뭔가를 하는 가족이 되어야 한다. 사명을 공유함으로 가족 간의 관계는 더 견고해지고, 가족에서 시작한 복음에 대한 사명을 이 세상 전체로 전파할 수 있다. 어떤 가족이 되어야 하는가현대 가족을 위한 하나의 접근법은 농장, 무역 그리고 소규모 사업을 통해서 가족이 다시금 하나의 생산 단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의 경제 활동 모습을 기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얼마든지 사명을 공유하는 가족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가족 전체가 모여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에서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새 힘을 얻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N.D. 윌슨(N.D. Wilson)의 말을 인용하자면, 가족이 모여서 얼굴과 얼굴을 보는 시간은 풋볼 경기에서 다음 플레이를 하기 전에 쿼터백을 중심으로 모여서 작전을 짜는 시간(huddle)과 다르지 않다.우리는 가족들과 함께 이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정원에서 무언가를 기르기손으로 유용한 무언가를 것을 만들기음식을 요리하기집안일 하기, 세차하고 잡초를 제거하기누군가를 초대해서 대접하기나이 많은 이웃을 방문하기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을 치우고 동네일에 참여하기쉼터 또는 선교 사역에 자원하기매주 함께 예배드리기교회에서 가족의 이름을 봉사자 명단에 올리기화목하고 친밀한 가족을 만드는 것은 단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에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함께 뭔가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을 따라서 온 가족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살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진정한 가정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엡 3:15).출전: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trong Families Share Mission번역: 무제
가족
창조주
영광
복음
기도
예배
낸시
사명
목사가 지닌 한계와 그 너머
by 노승수
2020-02-27
교회는 원리적으로는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공동체여야 하지만, 현실 교회들은 지역적인 색깔이나 계층적인 색깔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목회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자신이 목회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빌렘 벤게메렌(W. A. VanGemeren)은 “현실정치”라고 했다. 선지자의 메시지에 백성 대중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는 현상을 두고 한 표현이다. 예를 들면 가진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목회하면 가진 자의 편으로 더 기울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목회하면 가난한 자의 편으로 더 기울어지는 사고를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칼 막스(Karl Marx)는 물적 토대가 우리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다. 유물론에서 비롯된 통찰이지만 놀랍지 않은가? 그가 처한 현실이 그의 생각을 지배해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골 3:2). 즉 목사는 가진 자의 편이나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선지자적으로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마저 허무는 공동체가 교회라고 했고(엡 2:14), 실제로 교회는 위의 것을 추구하는 공동체일 때 계층의 갈등이나 양극화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상을 네 개나 받았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공감대를 얻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를 잘 다루었다. 그리스어로 기생충(Παράσιτα)은 “남의 식탁에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묘사는 훌륭하다. 영화를 통해서 모두가 느끼고 공감하지만,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현실로 남아 있다. 교회는 이런 문제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기도 한다.이럴 때 목사는 어떤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고 위의 가치를 구함으로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양극화의 문제든지,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문제이든지 말이다. 이런 문제에서 다수의 소리, 회중의 목소리가 목사의 가르침을 오염시키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 벤게메렌이 말하는 현실정치의 구체적인 사례를 성경 속에서 찾는다면 예레미야서에서 볼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까불지 말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라. 이것을 하나님이 정하셨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민족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과 거기에 편승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유다를 버리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외쳐댔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는 여러 가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메시지로 인하여 혼란이 가중되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듣기 좋았던 거짓 선지자의 목소리를 취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버렸다. 유다 백성의 시각에서 예레미야는 매국노처럼 비쳤고, 거짓 선지자들은 애국주의자이자 참 선지자처럼 이해되었다. 이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상황과도 너무 잘 어울린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예레미야는 마치 일본이나 북한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며, 나라를 파는 매국노처럼 보인다. 내부적 논리로는 일본을 혐오하는 것이 더 인기 있을지 모르며, 북한에 대한 경험적 반공주의를 부르짖는 태극기 부대의 메시지가 더 정당해 보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상황을 경험적으로 보면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을 향해 “토착 왜구”라는 표현과 친일적 행위에 대한 혐오를 분명하게 보이며, 보수 진영은 “태극기 부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반공 이미지와 기독교가 완전히 결탁한 상황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오늘 우리 사회라면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이 더 인기 있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것은 그들이 듣고 싶던 소리였다. 벤게메렌은 다수의 대중이 듣고 싶은 소리를 “현실정치”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우상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이런 현실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경의 메시지여야 한다. 우리가 물적 토대인 생산수단에 기대어 살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사의 설교가 중요하며 목사가 지닌 태도가 중요하다. 오늘 목사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듣고 싶은 소리를 외치는 것으로 현실 정치화한 현상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기독교인이 촛불집회와 태극기부대로 나누어 같은 성도들끼리 척을 지고 사회와 국가와 교회의 분열에 앞장서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란 단지 설득의 절차만은 아닌 것이다.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목소리는 소수자 문제를 들어서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가 틀렸다고 한다. 지금 자라는 세대의 젠더 교육에 이런 시각이 가득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나 소수자의 권익과 성경이 하나님과의 관계 왜곡에서 비롯된 죄로 인하여 정죄한 동성애는 별개로 다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도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 성경의 메시지는 때로 매국적 상황을 부르기도 하며, 때로 사회적 상식에 반하기도 하며, 다수 대중의 눈높이와 맞지 않기도 한다.목사의 시각은 교회의 양무리를 목양하면서 그들과 시선을 맞추면서도,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간혹 어떤 연로한 목회자들이 자기가 속한 그룹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낼 때면 가슴 아프기도 하다. 그렇다고 젊은 목사들이 무조건 낫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속한 시대의 다수는 대중의 목소리에 휩싸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라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 되고 말 테니까 말이다. 목사는 자신의 속한 그룹의 한계를 넘어 성경에 그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
리더십
벤게메렌
교회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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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목회자
현실정치
칼막스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을 돕는 네 가지 팁
by Dominique McKay
2020-02-26
그리스도인에게 직장은 부담스러운 곳일 수 있다. 능력을 인정받는 직장인이 되어야 하고, 동료들의 개인적, 영적 필요를 돌보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주어진 업무를 성실히 감당하고자 하나 일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이웃에게, 좀 더 정확히 말해 직장 동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주신 업무도 성실하게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시도해 볼 만한 방법 네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정시에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도록 힘쓰라성숙한 어른이라면 시간을 잘 지켜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다. 맞는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시에 출근하는 것은 맡은 직책, 그리고 일하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도 정시에 출근하지 않는 직장에 다닐 경우도 있다. 그럴 때 정시에 출근하면 상사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라고 동료들이 장난삼아 놀려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당신은 일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자리매김해 가는 것이다(골 3:23–24).오늘날 많은 직장인은 일 중독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일하며 사무실의 불을 마지막으로 끄고 퇴근하는 이가 되려고 한다. ‘절대 그러지 말라.’항상 정시에 퇴근하라. 그리고 필요하다면 더 일찍 퇴근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당신이 업무 시간에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 혹은 동료들과 잡담하지 않고,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정한 시간이 되면 일을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일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이 최우선순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업무가 아닌 삶의 영역에서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2. 함께 즐거워하라삶은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생일, 기념일, 진급, 또는 약혼 등 기쁜 일들이 있을 때도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직장 동료들과 기쁨의 순간을 함께 나누는 것이 당신의 우선순위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롬 12:15). 어떤 직장이든 동료들의 진급, 생일 축하 등에 앞장서는 직원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직접 ‘그 일을 담당하거나,’ 그런 직원을 적극적으로 돕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왜일까? 어느 직장이든 소외감을 느끼거나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은 인기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이들의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축하해주면 그들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직장 밖에서 하는 동료들과의 식사 등 사교 모임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하여 주선하는 것이 좋다. 사무실의 스트레스나 각 개인의 가정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편하고 부담 없는 모임에 참석하고자 하는 동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당신이 주선한 모임에 참석하든 참석하지 않든,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을 생각해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열릴 것이다. 자신을 초대하고 잊지 않았으니 말이다. 3.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라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마 5:43–45). 동료들이 겪는 어려움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 자신의 어려움을 나누면 처음에는 동정하는 마음을 갖지만 금방 잊어버리기가 쉽다.이런 경우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방법이 있다. 누군가 어려움을 나누었다면 마음속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하라. 만일 충분히 가까운 사이라면 그 사람 앞에서 함께 기도하라. 그렇게 할 수 없는 장소라면 포스트잇이나 스마트폰 메모장에 그 사람의 이름과 날짜를 적어두고 나중에 꼭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하라. 2012년 미국 대선 기간에 들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하나는 당시 후보였던 릭 샌터룸(Rick Santorum)과 릭 페리(Rick Perry)에 대한 것이었다. TV 토론 테이블에 둘러앉은 두 후보는 대통령이 된 후에 펼칠 정책들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토론을 하고 있었다. 보통 그런 토론에서는 나중에 다시 살펴봐야 할 내용에 대해서는 후보들이 직접 메모를 하곤 한다. 샌터룸이 토론 주제를 의료보험에 대한 것으로 돌리며 본인의 딸인 벨라(Bella)가 겪는 건강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토론은 끝났고, 후보들은 서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샌터룸이 페리가 앉았던 토론석 옆을 지나갈 때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는데, 페리가 적은 노트에 “벨라 위해서 기도하기”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기도는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에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가까워지게 하기도 한다. 심지어 적이라도 가까워지게 한다. 매일 혹은 매주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들을 미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할수록 당신은 더욱 진실하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4. 퇴사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라“일을 정말 그만두기 전에 미리 그만두지 마라”(Don’t leave before you leave)는 2013년에 나온 인기 서적인 ‘린 인’(Lean In, 안기순 역, 와이즈베리)에서 쉐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가 한 말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여자들에게 자신의 미래 목표가 무엇이든 현재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라고 주문한다. 이 원칙은 현재 직장 생활 중인 그리스도인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해당한다. 퇴사를 생각하고 있는 직장인은 업무 생산성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그들은 동료들이 자신이 못한 일을 해줄 거라 기대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만일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당신의 동료들과 상사들은 당신이 직장을 위해 한 것은 없다고 여길 것이다. 오히려 직장이 당신을 지금까지 보호해 주었다고 생각할 것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라고 부르셨는데 이에 반하는 삶의 방식이다(빌 2:3–4). 퇴사가 결정되었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업무에 임하고, 회사가 인수인계 과정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후임으로 올 사람이 업무에 빨리 적응하도록 정리된 업무 인계 서류도 준비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퇴사하는가는 직장 생활을 어떻게 했는가만큼 중요하다. 당신은 퇴사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일함으로 그리스도인이 지닐 수 있는 섬기는 청지기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도미니크 맥케이(Dominique McKay)는 미상원(U.S. Senate)에서 공보관으로 일하고 있다. 2012년 Liberty University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로 줄곧 의회에서 일해왔다. 제임스 인호프(James Inhofe) 상원의원 사무실, Committee on Education, Workforce in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등에서 일했다. McLean Presbyterian Church에 출석하며 그 교회에서는 여성 사역에 관한 이사회에서 섬기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4 Practical Tips for Faithful Workplace Witness번역: 이정훈
생활
직업
일중독
동료
기도
정시
퇴사
희생
청지기
어려움
‘교회개혁’은 목사를 ‘엄선’하는 것부터
by 장대선
2020-02-25
우리의 신학 현실을 보면, 의외로 교회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즉 교회라 할 때 ‘개별 교회’로서만 이해를 할 뿐,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처럼 부정확한 교회에 대한 이해를 보완(혹은 극복)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부터 대안을 모색하는데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온전하게 대처할 수 없다.사실 참된 교회는 오직 천상의 교회이며, 그런 교회가 이 지상에서 구현되는 것은 예배당이나 회중들의 규모, 혹은 조직과 같은 형태로서가 아니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가시적 교회’라고 명시하고 있다. 가시적 교회는 한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와, 그 자녀들로 구성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2항)고 했다. 그처럼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으며 전 세계적으로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로 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서, 그것은 ‘유형적인 교회’(A tangible church)가 아니라 ‘가시적 교회’로서 이해할 때 비로소 교회의 바른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상의 교회, 즉 가시적 교회는 항상 교회의 표지(sign)에 의해 분별이 되니, 잘 알고 있는바 말씀 선포와 가르침, 그리고 성례의 올바른(성경의 규정적 원리에 따른) 시행, 또한 (성경에 근거한 규정적 원리로서의) 권징의 시행이라는 세 표지에 의해서다. 따라서 그런 표지에 연계되는 직분들, 특히 치리회를 구성하는 목사와 치리장로의 직분은 교회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직무를 수행하는 아주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것이다.일찍이 개혁된 교회로서 장로교회 정치를 광범위하게 구현했었던 프랑스 신앙고백(1559)은 교회에 관한 고백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교회의 직원에 대한 고백을 제시한다. 즉 제29조에서 “우리는 참된 교회에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확립된 규율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하면서, 곧장 이르기를 “그러한 교회에 목사, 장로, 집사가 있는 까닭은 순전한 교리를 전수하고, 악덕을 개혁하고 억제하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구제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거룩한 집회에서 성인과 아이 모두 교화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바로 이 같은 고백의 기초로부터 교회에 대한 모든 신앙고백이 시작하고 있다.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 또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바로 교회 직원에 대한 규정(canon)인데, 특별히 목사에 관하여는 무려 57개의 규정으로 목사에 관한 전반을 다루고 있다.그 가운데 1조를 보면 “성직의 조건을 갖추고서 목사로 선택될 사람은 사도들의 규정(Canon of the Apostle)을 지켜야 하므로, 가능한 한 모든 성실함으로 그들이 교리를 잘 숙지하고 있는지 점검을 하며, 또한 [그것을] 가르칠 수준이 되는지, 아울러 그들의 행실 또한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2조에서는 이르기를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초신자인 경우, 특히 사제와 수도사는 오랫동안 그리고 성실한 질의가 없거나, 교리와 생활면에서 증명이 없거나, 개종한 지 적어도 2년이 지나고 그들이 속한 삶의 자리에서 선한 증언으로 확인된바 없이는 성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 또한 지방 대회와 전국 대회의 조언 없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과 다름이 없는 자에게 안수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마디로 신앙과 인격에 있어 확실한 자가 아니면 목사가 될 수 없도록 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제네바로 피신한 영어권 회중들로 구성된 제네바 피난민 교회의 예배와 치리에 관해 규정한 제네바 치리서(1556) 역시 치리에 관해 규정하면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목사에 관한 것인데, “1. 목사들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기를 “교회가 선출될 사역자를 부지런히 숙고하게 하여 사도 바울이 그 소명을 가진 사람에 대해 꾸짖은 그러한 과실을 발견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장점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책임을 맡을 수가 있었고 부지런히 이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라고 한 디모데전서 3장 2-7절 말씀을 목사에게 직접 적용하고 있다.이처럼 16세기 개혁된 신앙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목사에 대한 것, 그리고 그와 더불어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에 대한 바른 이해였다. 그것 없이는 그 어떤 지엽적인 개혁이나 개선도 아무런 실효성이 없으며, 특별히 가르치는 사역과 다스리는 사역에 공히 참여하는 목사 직분이야말로 아무나 세울 수 없는, 그리고 함부로 여길 수 없는 절대적이고도 중요한 직분이였던 것이다.오늘날 대부분의 교단 현실에서는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 2조에서 말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과 다름이 없는 자”들에게 안수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목사의 경우에 그 어떤 스캔들에 연루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면직의 사유가 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권계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16세기 개혁된 교회들의 치리규정 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을 얼마든지 묵인하며 숨기고서 직분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야말로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형국이다. 더구나 그런 자에 의해 개혁이 언급되고 개혁신학이 논의되는 일까지도 일어나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치리 혹은 권징의 수준이다. 더디다 할지라도 목사들을 엄선하여 세우는 것이야말로 참된 교회개혁의 시작이자 정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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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심될 때를 준비하라
by Lindsey Carlson
2020-02-24
남편이 목회 사역 이 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내가 과연 목사의 부인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회의감에 빠졌다. 쉬지 않고 닥치는 시험을 거치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에, 동역자들 사이의 갈등에, 또 나의 죄성 때문에 생긴 회의감과 낙심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깨지고 상하고 또 아팠다. 그 누구도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이런 낙심의 상황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기에 나는 정말로 포기 직전까지 갔다. 낙심하여 절망 가운데 허덕이는 중에 목사 부인들을 위한 어느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곳의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한 여자와 마주쳤다. 그 여자는 나를 몰라도 나는 그가 누군지 알았다. 그녀의 남편은 존경받는 유명한 사람으로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다. 그녀라면 낙심에 빠진 내게 적절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박한 상황에 있던 나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에게 위안의 말 또는 격려의 말을 간절하게 요청했다. “목사 부인이라는 게 항상 이렇게 힘든 건가요?”그녀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는 목사 부인인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한 번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요.” 너무도 큰 충격에 부끄러워진 나는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나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단지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상 내가 컨퍼런스에서 만났던 그 목사 부인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대부분의 사역자 부인은 엄청난 장애물을 만나고 그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경험한다. 목사의 부인으로 한 달, 일 년, 십 년, 오십 년을 살았더라도 언젠가는 어둠의 시간을 만날 것이다. 당신은 그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당신이 상처를 받았든지, 누군가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이 죄 많은 세상 때문에 절망했든지 간에 그것을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속성으로 치유하는 빠른 치유법은 없다. 당신이 낙심한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가장 좋은 길을 인도해주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지쳐버린 목사의 아내로서 당신이 회복되려면 불평으로 가득한 입술과 절망의 말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 은혜 그리고 상처를 싸매 줄 구원이다.현실을 인정하라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남편이 목사로 사역하는 한 가정이나 공동체 간의 문제,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 등 생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또 쌀쌀맞기 이를 데 없는 행동에 고통을 느낄 것이다. 남편이 가졌던 사역의 꿈이 허물어질지도 모른다. 남편의 인격이 공격받고 놀림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또 남편의 사역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신실하게 사역하려고 발버둥치는 당신을 버리고 떠나는 친구의 배신을 경험할지도 모른다.이런 힘든 환경은 당신과 당신의 남편, 심지어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사역자의 삶에는 교인들이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낙심하게 만드는 일이 언제라도 생길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 속에 하나님이 당신을 데려다 놓으셨다고 해도 목사의 부인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평강의 하나님이 아픈 경험을 통해 당신을 성화시킬 것과(살전 5:23) 미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지금 당신을 강하게 준비시키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롬 16:25). 도움을 구하라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아마도 낙심했거나 아니면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하는 중일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셨는지가 궁금하다면, 하나님이 언제 응답하실지 그 시기가 궁금하다면, 또 도와 달라는 당신의 절규에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지가 궁금하다면, 이런 생각 자체가 바로 낙심한 사람의 증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런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라. 개인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을 무시하지 말라. 당신의 짐을 고백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도움이 필요하다고 겸손하게 인정하라.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인 하나님을 바라보라. 믿을 수 있는 친구와 가족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또 필요하다면 성경적인 상담을 받으라.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서 믿는 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21). 인내하고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낙심의 시간에도 남편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 당신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당신이 더 배우고 당당히 서도록 도울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낙심의 시간 속을 지난다고 해도 당신은 생각하는 만큼 고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리스도가 함께 있다. 그는 낙심한 당신을 가장 불쌍하게 여긴다. 하나님, 당신의 아버지가 신실하게 당신의 절규를 듣고 있고 고난의 시간에 도와주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다. 그는 전능한 조언자이며 당신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 줄 최고의 경청자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힘을 주신다.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인도하신다. 당신이 고통을 그리스도와 나눌 때 하나님은 당신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세우고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자비함으로 위로하신다. 고통은 영원한 게 아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하나님은 거기에 응답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은 구원한다. 낙심한 마음이 밤사이에 계속될지 몰라도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거기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바로 그가 정한 그 시간에, 아침과 함께 기쁨이 당신을 찾아올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일지 아니면 죽은 후 영광 속에서 그와 연합할 그때일지는 몰라도, 당신의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찾기 바란다. 함께 할 사람을 찾으라목사의 부인은 격려가 필요하다. 목사 부인으로 십오 년 차에 들어서는 나는 이제야 목사 부인들과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서로 이해하고, 사역의 짐을 함께 질 수 있는 목사 부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로 놀라운 축복이다. 하나님께 이런 동역자 목사 부인을 달라고 기도하라.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학적으로 깨어있으면서 또 많은 경험을 가진 목사의 부인을 만나야 한다.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바로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믿음의 사역을 지속할 수 있는 인내심을 위해서는 당신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 때로는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동역자의 모임을 만들라. 낙담하는 시간뿐 아니라 즐거울 때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겠다고 결심하라.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 될 것이다. 당신이 목사 부인이라면, 낙심의 계절이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에 맞는 전략을 준비하고, 또 낙심의 계절에도 자신을 격려할 방법을 찾아내라. 낙심의 계절을 맞아 이미 쓰러졌다고 해도 아직 격려를 찾는 데에 늦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당신은 그의 도움과 격려를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찾을 것이다. 목사의 부인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견딜 힘을 주실 것이고, 당신은 얼마든지 기쁨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명을 잃지 않고 그를 닮아가며 성장할 수 있다. 만약 당신에게 포옹이 필요하다면, 나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Wife, Prepare for Seasons of Discouragement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낙심될때
준비하라
현실인정
도움을구하라
혼자가아니다
할사람을찾으라
믿음의사역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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