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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아내의 남편 보고서
by 배경락
2020-02-07
어느 날 남편은 집을 떠났습니다. 계획도 없이. 가정과 일밖에 모르던 남자였습니다. 열심히 일하여 배 한 척 마련했을 때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생생합니다. 물고기를 잡으면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왔던 그였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여 친정어머니를 모시자고 했을 땐 정말 감격이었습니다. 이 남자와 함께 평생을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 그가 변하였습니다.메시아라고 하는 예수를 만난 이후 남편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매일 같이 배를 손질하고 그물을 청소하며 소중하게 여기던 것, 그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모아 놓은 재산도 별로 없는 데 떠나겠다는 남편은 고집불통이었습니다. 이제 생계는 오로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결단하고 가는 길이라면, 기쁨으로 격려하지 못할망정 울고불며 막아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집을 떠난 후 나는 한동안 방황하였습니다. 허무했습니다. 남편 소식은 간간이 풍문으로 들려왔습니다. 예수에게 정신이 팔려 목숨을 내놓고 따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가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찾아와서 동태를 살피고, 험악한 낯으로 눈알을 부라리며 위협하다가 가곤 했습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돈 한 푼 가져다주는 것이 없지만, 베드로는 나의 남편입니다. 그가 비록 위험한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나는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만 나면 회당에 나가 남편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심한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고, 손 쓸 방법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고 있는 그를 번거롭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남편에게 연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안 좋아요. 한 번 오셔서 어머니를 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나 자상하였던 남편은 그 소식을 듣자 예수님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하시더니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의 고열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가버나움 동네는 그야말로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도 마다치 않고, 위하여 기도하고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오랜만에 남편을 보았지만, 기쁨을 나눌 시간도 없었습니다. 허리 펼 시간도 없이 부엌에서 음식 장만을 하였습니다. 열병에서 회복된 어머니도 일을 거들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가고, 남편은 예수님을 따라 다시 집을 떠났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남편이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메시아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그래도 들은 풍월은 있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사 61:1-2)리라 하였더니 예수님이 과연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는 이 일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열병으로 죽어가던 어머니가 일어났고, 우리 집을 찾아왔던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남편의 결정이 얼마나 옳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나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어깨가 축 처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토록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종교인들이 흉악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렇게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할 자이시며 우리의 희망이었습니다. 나는 남편을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할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비칠 때라도 엎드려 기도하면 응답하신다.’숨어 살던 남편은 고기나 잡으러 가겠다고 그물을 정리하여 바닷가로 나갔습니다. 바다로 나가는 남편은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런 상태로 무슨 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남편은 인생의 낙오자 같았습니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는 아침에 남편은 신나서 뛰어 들어왔습니다. 고기를 잔뜩 잡은 것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르던 때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 야망은 순전하기보다 어쩌면 사심이 섞인 야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뭔가 한자리할 것 같은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집을 떠나는 남편은 달랐습니다. 더는 인간적 야심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남편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당당하게 나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도 남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남녀 구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500여 성도에게 보이실 때 나도 주님을 뵈었습니다. 주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나는 복음의 증인이 되어 주를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남편이 가는 길이라면 언제나 동행하면서 함께 사역자로, 복음의 증거자로, 전도자로 살았습니다(고전 9:5). 핍박을 받아도 같이 받았고, 눈물도 같이 흘렸고, 기쁨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주님이 언제나 함께하기에 두려울 것은 없었습니다. 부부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께 죽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로서 남편의 손을 잡고 함께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늘 기도했습니다.1) 나의 기도가 정말 이루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늦게 들어가든, 일찍 들어가든 우리는 함께 만날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모르는 모든 사람도 그 날에는 함께 아름다운 교제를 이룰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남편의 설교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남편에게 착한 아내가 되어, 남편의 필요를 들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이야기에 무관심했던 남편도 여러분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에 감화를 받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모 - 머리 모양, 몸에 걸친 보석, 옷차림 - 가 아니라, 여러분의 내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계발하십시오. 내면을 온화하고 우아하게 가꾸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전에 거룩하게 살았던 여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이 아름다웠고, 남편에게도 착하고 성실한 아내였습니다. 예컨대 사라는 아브라함을 보살피면서 그를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도 걱정과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하면 사라의 참된 딸이 될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권합니다.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십시오. 아내를 존중하고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아내는 여자이기에 여러분보다 연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새로운 삶 안에서는 여러분과 동등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를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벧전 3:1-7, 메시지 성경) -----1)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의 말에 따르면 베드로 부부는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주를 위하여 순교하였다고 전하였다. 클레멘트는 베드로의 가정은 행복하였고, 주를 위하여 헌신하였던 축복받은 가정이라고 하였다.
가정
결혼
눈물
거룩
감화
결단
기도
내적
마음가짐
내면
청소년 사역에 필요한 다섯 리더
by Chelsea Kingston Erickson
2020-02-07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청소년 리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당신 교회의 청소년 리더는 결혼한 젊은 커플이거나 대학생이 십대들과 함께 하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젊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소명이라 여긴다.만약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리더의 신앙을 닮아 간다면 그들에게는 다양한 신앙의 모델이 필요하다. 삶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리더를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청소년 사역팀의 리더로 선호하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1. 학생 부모현재 학생의 부모보다 더 좋은 청소년 리더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부모는 이미 영적으로 아이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아이들의 친구에게 다가갈 준비가 되어있고 효과적으로 연락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개인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 그들의 필요를 파악할 수 있다.청소년 사역자는 부모 참여가 그들의 아이들과 잘 맞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청소년 사역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그분의 아이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파악하라고 물어야 한다. 중등부까지는 부모와 부모의 아이들이 잘 어울릴 수 있다. 고등부에서는 아이들이 믿음에 대한 질문과 갈등으로 고군분투할 수 있다. 만약 교회가 나이와 성별에 따라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운영할 수 있다면, 부모는 그들의 아이가 포함되지 않은 그룹을 인도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의 세계에 참여하는 동시에 다른 청소년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우리 교회에 몇몇 아버지들은 중학생이 된 아이들을 계속해서 섬기기로 했다. 사역의 연속성과 함께 더 많은 학생을 섬기는 것이다.2. 집에 있는 부모집에 있는 부모들은 청소년 리더를 양육하기에 좋다. 만약 그들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나이라면 행정 업무, 행사 계획, 그리고 학생들과의 연락을 도울 수 있다. 어린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다른 나이의 그룹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우리 교회에 한 젊은 엄마는 고등부를 섬긴다. 바쁜 엄마지만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종종 그녀의 어린아이들을 데려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도록 한다. 어떤 부모들은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3. 빈 둥지 부모빈 둥지 부모는 능력 있는 청소년 리더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사역의 원동력이 되고 조력자가 된다. 자신의 자녀는 성장해서 독립했기 때문에 양육에 대한 많은 정보와 지식, 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거나, 조직의 리더, 혹은 경영자 등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오전 6시에 만나야 할 수도 있다. 이른 아침에 열리는 회의가 힘들겠지만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이 연령층은 십대들을 만나기 전에 많은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자녀가 이미 성장해서 그동안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사역자는 그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좋은 리더라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용기를 북돋아 주고 함께 한다면 빈 둥지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경험을 배울 수 있다.4. 조부모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잠재력 있는 청소년 리더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신명기 32장 7절은 젊은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어른들로부터 지혜와 경험을 찾으라고 말한다. 나이 든 어른들은 지혜를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해줄 시간이 있다. 만약 그들에게 손주(또는 조카)가 있다면 그들은 이미 젊은 사람들에 관한 전문가일지도 모른다. 어떤 청소년 그룹과 어울려서 게임을 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학생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그들의 능력은 누구보다 앞선다. 우리 중등부에는 종종 하이킹 계획을 세우거나,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고, 야외활동에 대한 애정을 나누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학생에게 삶의 중요한 기술을 가르치고,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 인생의 멘토가 된다. 고등부에 한 나이 든 부부 커플은 최근에 학생들과 건강 문제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이처럼 귀한 커플을 존경한다. 그들과 기도 제목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5. 독신자결혼한 커플이나 양육 경험이 많은 사람들만으로 팀을 꾸리고 싶지만, 독신자를 등한시하지 말아야 한다. 젊은 전문가든 나이 든 어른이든, 싱글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들은 청소년 사역 프로그램 외에 별도로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다. 자연스럽게 교회의 가족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학생들이 아직은 싱글이기에 독신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필요하다. 봉사할 독신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함으로써 우리는 학생들에게 결혼과 독신 모두가 하나님의 좋은 선물임을 보여준다.(고전 7)청소년 사역자들은 독신자들이 함께 사역하는 시간을 고마워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사역자를 대신하여 학생들에게 상당한 에너지를 쏟을 것이고, 사역자는 그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독신 리더들은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역의 필요를 논의하는데 더 많이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력 관계는 사역자에게도 큰 힘을 준다.청소년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을 가르치라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다양한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가 청소년 리더로 재미있는 대학생과 신혼부부만을 고집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고정된 생각을 버리고 넓게 생각하면 청소년 사역이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Leaders Every Youth Ministry Needs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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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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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조부모
다양한 인종의 창조를 어떻게 가르칠까?
by Shai Linne
2020-02-06
인종의 다양성은 어렵게 수용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구속된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잘 드러난다. 보석의 여러 단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복음의 빛이 여러 다양한 그릇을 통해 반사될 때 더 밝게 빛난다. 인종 차별주의, 편견, 민족적 자존심의 죄는 과거에 있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양한 문화 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손을 뻗었을 때, 특정한 민족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민족 전체(people groups)를 생각하고 있었다(계 7:9). 하나님의 아들은 너무나 영광스럽기 때문에 열방들이 그의 선택을 받아 그를 예배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할 특권이 있다. 우리는 또한 자녀들에게 이 왕국의 관점을 가르칠 책임이 있다. 세상 문화에 역행하는 성경적 관점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이 다양한 인종을 창조한 하나님을 깨닫도록 하는 여섯 가지 방법이 있다.1. 성경이 인종의 다양성을 어떻게 말하는지 가르쳐라다양한 인종을 설계하신 하나님에 관해서 성경은 침묵하지 않는다. 복음에 내재 된 진리는 전 세계 모든 민족 집단의 사람들과 화해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여러 가지 빛깔을 가진 아름다운 신부이다. 아이들에게 이러한 진실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다양한 인종이 있는 미래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절이 요한계시록 5장 9절이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각 족속방언백성나라(그리스어로 ethnos)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다. 다양한 민족이 그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 비전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다민족 예배의 목표가 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해야 한다. 다음은 이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는 몇 개의 구절이다. 성령이 어떻게 모든 지파와 나라에서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을 경배하는지에 대해 자녀와 이야기 할 때 이 구절들을 사용하라. 창 17:4; 민 12:1-8; 시 22:27-28; 72:11; 단 7:14; 요 4:9; 행 10:34-35; 13:47; 롬 15:8-12; 갈 3:28; 엡 2:13-16; 약 2:8-9; 계 7:9.2. 성경과 인종의 흔한 오류를 바로잡으라서양의 문학과 영화 속에서는 예수님을 포함한 성경 인물이 백인으로 그려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묘사는 백인만 정상이고 백인이 아닌 인종은 “그 외”라는 개념을 심어준다. 특정 민족을 하나님이 편애한다는 오해를 할 때 영적으로 크게 문제가 된다. 부모는 백인 예수가 나오는 삽화가 중동 사람들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오류를 수정하면 더 많은 대화가 가능해진다. 3. 다른 나라의 문화를 공부하라나는 특히 백인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백인, 특히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유색 인종과 어떠한 관계를 맺지 않고도 얼마든지 평생을 보낼 수 있다. 또한 학교 교과 과정이 서구 문명과 업적에만 초점을 맞추고 "백인 세상"이 당연하다는 개념은 너무 일반적이다. 유색인을 언급할 때 종종 노예 제도와 피지배자로 묘사한다. 다른 문화를 더 잘 이해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정보 검색 시대에 인터넷 검색 후 몇 초 안에 많은 양의 리소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4. 다른 인종과 관계를 맺기 위한 기회를 만들라다양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는 다양한 인종과 접촉할 수 있는 근접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거주 지역에 따라 이러한 관계를 발전시키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 교회는 이런 추구를 위한 이상적인 장소이다. 불행하게도 옛날에는 “일요일 오전 11시는 인종을 가장 분리시키는 시간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 다양한 인종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저녁 식사/ 가족 외출/ 각종 활동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상호 교류가 자녀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 밖에서 이런 노력은 다양한 어린이들과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과외 활동에 자녀를 등록시키는 것이 있다. 스포츠 클럽, 합창단 및 여름 캠프는 그러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을 기획하기 위해서 때때로 좀 더 창의적이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5. 편견의 언어와 행동에 맞서라인종에 편견을 가진 부모는 그런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자녀에게 전파하기 마련이다. 종종 부모가 아닌 인종에 둔감한 다른 가족 일원의 입에서 나온 인종 차별적인 말이 자녀에게 전파되는 경우도 있다. 거기에 대해서 부모가 아무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그런 편견을 주는 건 꼭 가족만이 아닐 수 있다. 텔레비전이 될 수도 있다.어떤 경우이든, 그런 상황이야말로 부모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 농담은 재미있지 않아,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돼.” 또는 “내가 밥 삼촌을 사랑하지만, 아까 저녁 식사 때 다른 인종에 대해서 삼촌이 말한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거야. 그런 말은 죄야. 우리는 민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여야 해.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야.”이런 단호한 행동은 가족 간에 분열을 일으킬 위험이 있기에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관계의 희생이 따르더라고 자녀가 모든 인종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바로 알도록 하는 행동이다.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말과 행동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6. 성령이 모든 민족의 벽을 허물 그 날을 기대하라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증거 하는 당신의 말, 태도, 그리고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그에게로 부르신다. 또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그들 모두를 하나로 만드실 거라는 사실을 자녀들이 알도록 하라(요 17:20-26). 그렇다.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조력자, 그리고 우리의 힘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고 또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7장을 가지고 자녀와 함께 기도한 다음, 가족이 교회, 학교 및 이웃에서 예수님의 이 기도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6 Ways to Show Your Child God’s Design for Ethnic Diversity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인종의다양성
성경
관계
편견
성령
야고보와 바울의 모순 들여다보기
by Chris Bruno
2020-02-05
성경 속 난제 중 하나는 서로 모순된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이다.- 바울: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롬 3:28).- 야고보: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약 2:24).성경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놓고 한 번쯤은 고민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이 문제를 풀려고 애를 쓴 것도 사실이다. 종교 개혁 논쟁 중에도 일부는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있는 불일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성경이 성령님의 영감과 하나님의 권위로 된 책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두 사도간에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모순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야고보서 2장 24절을 문맥과 상관없이 읽는다면 우리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만약에 야고보가 로마서 3장 28절 또는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로 그 “믿음”을 여기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야고보는 정말로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 중 하나는 모든 구절을 전체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만으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맥락을 먼저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믿음”이 무슨 의미인지 19절에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귀신들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에 불과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고 한다. 귀신들은 일명 쉐마(Shema)로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이 말하는 바를 믿고 있다. 귀신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분이고 진정한 신이며, 그가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무서워서 떨고 있다.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그 진리가 가져다줄 결과 때문에 감정적인 반응까지 보인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아브라함 사례야고보는 아브라함을 이야기하며 의롭다 하시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설명한다. 이 사례야말로 야고보와 바울이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서로 같은 말을 하지만 단지 믿음의 측면에 관해 다른 강조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한다.바울과 야고보 두 사람은 똑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그러나 이 두 저자가 고려하고 있는 아브라함 인생의 시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야고보서 2장에서 우리는 창세기 22장,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하는 그 시점에 서 있다. 이 이야기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든, 이삭을 바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삶에서 가장 궁극적인 순종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 사건은 창세기 15장 시점보다 수십 년이 지나서 발생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불렀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 정도였다(창 12:4). 그리고 창세기 15장은 12장의 사건이 있고 오래지 않아 발생했다. 그 이후 수년간,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기 전까지 이삭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갔을 때 이삭은 아마도 십 대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어떤 히브리 전승에 따르면 창세기 22장은 이삭이 37살이 되었을 때라고 한다. 최소한 우리는 이삭이 제사에 필요한 나무를 지고 산 정상까지 갈 정도로 컸다는 것은 알 수 있다(굳맨Goodman, 130-131).이 모든 것을 다 종합할 때, 우리는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고 수십 년이 지나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야고보는 바로 이런 순종을 가리키고 있다(약 2:23). 믿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한 아브라함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의로운 상태(status)는 믿음만으로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이게 야고보서 2장 21절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즉, 의롭다함을 받는 데에 있어서 행위의 역할은 믿음의 역할과 다르다.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을 때 의롭다함을 받았다, 즉 의로운 상태를 부여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 의로운 상태는 그가 행하는 신실한 행위로 완성되어야 한다. 진정한 칭의를 가져다주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변화(transformation)를 가지고 온다고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 믿음은 단지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거기에 따른 감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 이상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고 그 약속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궁극적으로 선한 행실과 분리될 수 없다. 바울과 다른가?야고보는 소위 말하는 선한 행위를 하지 않는 믿음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로 이런 주장이 바울이 로마서 3-4장과 갈라디아서 2-3장,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믿음과 다른 것인가? 믿음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는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행위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비판한다. “율법의 공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관계없이, 어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들으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어떤 행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의롭다함을 받는 믿음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믿음으로 하는 선한 행함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 한 말을 생각해보자. 그는 거기서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다. 창세기 22장에서부터 창세기 15장으로 되돌아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주목한 야고보와 달리 바울은 창세기 15장에서 시작해 그 이후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고 있다. 아브라함이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 시점 이후 그의 생애를 바라보았을 때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썼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확신이 커갈수록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 견고하여졌다. 이 말은 당연히 거룩함과 선한 행실이 더 많아졌다는 것으로 들린다. 의롭다함을 받은 기독교인이라면 순종은 당연한 것이다(롬 6:1-14 참조). 야고보가 우리의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는 분명히 바울이 로마서 3-4장에서 말하는 믿음, 그러니까 의롭게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바울이 “율법의 공로”와 관계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 했을 때, 그는 결코 야고보가 말한 그런 선한 행실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말씀을 이처럼 적절한 문맥 속에서 이해할 때, 야고보는 결코 바울과 모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며, 강조점을 다르게 하여 적절하게 보완하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es James Really Contradict Paul?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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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약속
변화
건강한 설교를 듣고 있는가?
by David Mathis
2020-02-04
유기농(organic)재배, 방임형(free-range)사육 등 생산되는 먹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고 있다. 호르몬제를 잔뜩 먹인 닭이나 소를 장기간 섭취하면 어떻게 될까? 유전자 조작(GMO) 먹거리를 먹으면 해롭지는 않을까?사람에 따라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의 질문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문제이다. 특히 자신의 먹거리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의 양식까지 책임지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육체의 건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딤전 4:8), 영적인 양식에 대해서 우리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한주 또 한주,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우리가 취하는 그 양식이 영적 건강에 좋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 영혼의 건강에 대한 장기적 영향은 어떤 것일까? ‘내가 계속 이 설교를 들으면 내 영혼이 성장할까, 아니면 훗날 이 시간을 뒤돌아보며 후회하게 될까?’결정 요인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매주 듣는 설교뿐만 아니라 늘 접하는 묵상집, 기독교 서적, 팟캐스트, SNS 포스팅, 실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대화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 컨텐츠가 모두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경 전체의 내용을 더 잘 숙지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평생에 걸친 과제이지만, 우리가 읽고 공부하는 부분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떤 기독교적 교훈이나 교리가 유익한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지표’나 ‘결정 요인’이 있지 않을까? 어떤 교훈이 ‘건전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건강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나 시금석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바울은 포괄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디모데전서 1장 10-11절에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제시한다.기준선10절 끝에 나오는 “바른 교훈”은 문자적으로 “건강한 교훈”이라는 뜻으로 ‘목회 서신’인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좋은 교훈과 악한 교훈, 건강한 교훈과 건강하지 못한 교훈, 건강한 영적 삶, 즉 “경건”을 고양하는 교훈과 그리 하지 못하는 교훈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다른 교훈”은 영적인 병을 일으키나(딤전 1:3; 6:3-4), 바른 교훈은 영적 건강을 가능케 한다(딤후 4:3-4; 딛 1:9; 2:1).디모데전서 1장 10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바른 교훈”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른 교훈”이나 “건전한 교리”의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답을 준다는 사실이다. 바른 교훈바울은 “바른 교훈”에 대해 “복음을 따름이니라”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진리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단순해 보이는 말일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의 진수, 핵심, 중심, 그리고 구성 원리는 ‘복음’이다. 15절에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라는 좋은 소식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다. 바른 교훈은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고, 받들며, 보완하나 다른 교훈은 복음을 흐리게 하고, 복음을 막고, 복음의 빛을 가린다.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보좌에 앉으신 것은 인류의 모든 시간과 역사의 정점이었다.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라는 복음의 좋은 소식을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며, 모든 삶이 복음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처럼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를 위로하는 진리뿐 아니라, 어둡고 난해하며, 우리가 숨기고 싶은 죄, 하나님의 진노하심,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 같은 것까지 모두 복음과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바른 교훈”은 “복음을 따름이니라”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교훈은 모든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 메시지에 의해 좌우된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끌어내는 바르고 건강한 교훈은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다. 교훈은 예수님의 인성과 사역을 주제로 하여 그것을 설명하고 드러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구체화한다. 영양소 표시 라벨이 없는 교훈을 만나거든 복음의 리트머스지로 시험해보라. 복음과 영광“바른 교훈”을 ‘복음’으로 끝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바울은 “바른 교훈”은 “복음을 따름이니라”라고 말하지만 ‘복음’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바울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말 탁월한 선언이다.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인해 좋은 소식이 왜 좋은지를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말은 그다지 특별한 것처럼 들리지 않지만, 이는 사도 바울이 한 번 쓰고 버리는 말이 아니다. 이 문구에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세 단어, 온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실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듣고 하는 말이지만 그 깊은 의미를 놓치고 있는 세 단어 ‘복음,’ ‘영광,’ 그리고 ‘복되신’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등장한다. ‘복음’은 이미 보았듯이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죄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그의 아들 안에서 내셨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이다. 우리 믿음의 핵심은 복음이지 율법이 아니다. 좋은 소식이지 좋은 충고가 아니다. ‘영광’이라 함은 하나님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리키거나 무한한 가치의 외적인 표현을 말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위대함을 세상에서 보여주도록 디자인하셨다는 뜻이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말하듯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역사 가운데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에베소서 1장 6절에 의하면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이시는 것의 극치는 “그의 은혜의 영광”이다. 복음은 예수와 그가 행하시는 구원이며,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이 복음 안에서 가장 명료하고 밝게 빛난다. 행복 그 자체‘복되신’은 여기서 가장 어려운 말일 수 있다. “복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복되신’은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므로 우리가 그를 찬양함으로 “복되시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당연히 그는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나 “복되신 하나님”이라 함은 그가 본질적으로 “행복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붙은 ‘행복한’이란 형용사는 우리가 늘 쓰는 진부한 의미가 아니다. 그는 무한하고, 어떠한 부족함이나 변화도 없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시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15:3). 그는 무한히 행복하시다.최근에 올랜도 개혁 신학교(RTS-Orlando)에서 “하나님의 복되심”에 대해 행한 키스티메이커 강좌(Kistemaker Lectures)에서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는 디모데전서 1장 11절 말씀으로 강의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복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복음이라는 것은 영광 가운데 빛나시고, 복되심 안에서 고요히 거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권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을 나타내시는 왕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더해 하나님은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극치의 지점에 계시는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복되십니다.그의 피조물들이 진실로, 깊이, 영속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는 바로 이 복되심이다. 모든 영광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 자신의 행복하심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흥과 즐거움을 깨고 빼앗아가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낙담해 계시거나 슬픔에 빠져 있지 않으신다. 불평하지도 않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갖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복되시다.’ 그가 소유한 행복은 무한하다. 그분 자체가 무한한 행복이시기에 자신의 끝없는 행복을 ‘나누어 주신다.’아빠가 행복할 때무한히 행복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적 한계를 뛰어넘는 충만하심으로, 창조와 구속 안에서 그의 무한한 가치와 무게, 즉 영광을 통해 공적인 자리로 나오신 것이다. 그의 영광의 극치는 자기 백성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에서 보인 그의 충만함에서 드러났는데, 이를 복음이라 한다. 본성적으로 불법을 행하는 우리 같은 이들에게 이 얼마나 놀랍고 좋은 소식인가! 하나님이 단순히 죄인을 구하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그는 영광스럽도록 행복하신 분이다. 아빠가 행복하면 그 행복은 온 가족에게 퍼진다. 그런 가정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실수와 아픔을 정직하게 나눌 수 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말씀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이요 가족이다. 이 가족의 아버지께서 행복하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런 교회에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기쁨이 회복되며, 우리 모두의 고통을 변화시키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Am I Sitting Under Healthy Preaching?번역: 이정훈
목회
설교와교육
기준선
교훈
복음
프레드
행복
치유
회복
당신은 어떤 중풍병자인가?
by William Ross
2020-02-03
지붕에서 내려온 중풍병자를 고친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우리는 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들의 사랑이나, “무엇이 더 쉬운가”라는 예수님의 질문 혹은 병이 나은 기적을 떠올리기 쉽다.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의 모습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친구라기보다는 중풍병자와 비슷한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중풍병자와 비슷한 이유 네 가지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치료법을 보자.1. 예수님 주위가 “복잡하면” 우리는 굳이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성경을 읽고 묵상하기에 아침은 너무 바쁠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거나 상담하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가정 예배를 인도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장벽이 놓여있을 때 우리는 굳이 예수님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쉽고 편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씀을 묵상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이나 바쁜 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인해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육신이 주는 게으름에서 벗어나 성령님으로 채우고 동행하도록 부름을 받았다(갈 5:16-18;롬 7:6). 2. 예수님과 함께한 최고의 순간들은 많은 경우 친구 때문이다그의 친구들은 중풍병자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어떤 것도 친구들을 막을 수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지붕까지 수리했을 것이다. “일단 예수님께로 내려보내자. 지붕은 나중에 처리하자.” 그들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죄성으로 가득한 나의 생활을 본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쉬고 있을 때 교회에 나오도록 격려하거나 힘든 일 앞에서 두려워하는 내게 용기를 주는 친구들도 있다.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믿음이 굳건한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힘들 때 곁에 있어 주는 형제자매는 우리가 지역 교회를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때로 우리는 친구들과 언쟁을 하거나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서로의 짐을 나눌 수 있는 형제를 우리에게 주셨다(갈 6:2). 내가 바로 친구들이 들어야 할 짐일 경우도 있다. 그들이 나를 들고 예수님께로 나가기도 한다. 3. 친구들이 나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때 불평한다중풍병자는 아마도 당황하고 절망했을 것이다. 심각한 죄를 지었거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요 9:1-3).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지만(시 146:8; 레 19:14; 예 30:17을 보라)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육체적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중풍병자도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거부 그리고 종교적인 경멸까지 겪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절망에 빠져서 혼자 있기를 더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고집이 센 친구들이 우리를 끌고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화를 낸다,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기도해야 하는 상황이면 우리는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함께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이게 가치 있는 시간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친구들이 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때 우리는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화를 낸다.그럴 때 우리의 영혼은 돌처럼 딱딱해지고, 새롭게 해주신 마음과는 정반대의 상태가 된다(겔 36:26).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모습의 가운데에 멈춰 서 있다. 우리의 약함 때문에 느끼는 수치심과 분노는 죄로 이끄는 덫과 같다. 예수님은 내면의 가장 깊은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만나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킨다(골 3:8-10; 시 51:8).4. 우리는 아직도 상(matt)을 들고 다니고 있다중풍병자가 용서받고 병의 고침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상을 들고 가라고 했다(막 2:11). 아마도 예수님은 상을 들고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다 “상”을 들고 다닌다. 우리의 회심과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상처, 우리가 견딘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간증의 의미로 말이다. 이런 “상”은 우리 구주의 사랑과 능력을 보여준다.우리는 구주의 사랑과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상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할 때도 많다. 우리는 남이 보지 않을 때는 그 상 위에 다시 누울 생각까지 한다. 어떤 경우든 좋은 소식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치고 두려워할 때 우리의 짐을 대신 들어주신다(마 11:28-29). 우리의 약점을 강력한 능력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약점까지도 돌봐 주실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있다(시 55:22; 빌4:5-6). 우리는 구주를 위해 봉사하는 것 외에는 어떤 짐도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마 11:29-30; 롬 6:22).구원받은 중풍병자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중풍병자 이야기는 그냥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다. 그는 심각하게 부서진 사람이었지만 창조주로부터 용서받았고, 치료받았다. 예수님은 자신을 높일 목적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그런 기회를 “사용하는”분이 아니다. 그는 더 많은 일을 한다. 그는 온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도 우리의 죽어버린 부분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 인내하고 기다린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으로 성숙하고 잘 훈련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때때로 중풍병자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피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를 구속하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집으로 보내신다. 그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비된 부분이 그분 안에서 치유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고후 12:9).헌신적인 사람들, 파파라치, 회의론자들로 가득하고, 덥고 냄새나는 좁은 방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은 오늘도 기쁨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우리 속에서 메말라버린 부분을 되살리기 위해 참고 기다린다. 먼지와 지붕 파편이 아래로 떨어지고, 초대받지 않은 우리가 지붕을 통해 절뚝거리며 나아가도 그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한다. 그에게로 가자. 그가 당신을 그의 능력으로 채우게 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Kind of Paralytic Are You?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중풍병자
친구
간증
구원
게으름
동행
예수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by Sam Allberry
2020-02-01
1966년 영국은 풋볼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주장 바비 모어(Bobby Moore)는 웸블리 스타디움 연단으로 올라가 여왕으로부터 트로피를 받는 영예를 누렸다.이후 그 역사적인 순간에 기분이 어땠는지 물었을 때, 모어는 겁에 질렸었노라고 답했다. 여왕은 때 묻지 않은 하얀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모어는 경기로 인해 지저분해진 손으로 여왕과 악수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계단을 오르며 미친 듯이 바지에 손을 비비며 닦으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더러워졌던 경험이 있다. 물론 더러워진다는 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 내면도 더러움을 느낄 수 있다. 더러운 것 같은 느낌마가복음에는 더러움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한 사람이 나온다. 마가복음 1장 40–45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를 만나신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그는 부정한 자였다. 나병은 특히 끔찍한 병이다. 불치병이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병 환자들은, 나병에 걸린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야 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전염병자 취급을 받았다. 당신도 그렇게 느끼고 있는가? 자신에게 독성이 있고 방사능을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당신 자신이 마치 전염병 같은가?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과거에 한 일 때문일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맥베스(Macbeth)에서 맥베스 부인은 던컨(Duncan) 왕을 암살하라고 부추겼다. 그것이 그녀의 양심을 짓눌렀고 자면서도 손을 비비며 핏자국을 지우려 했다. 그녀는 “이 손은 정녕 다시는 깨끗해질 수 없는가!”라며 울부짖었다. 셰익스피어는 죄책감에 눌린 무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성폭력으로 인한 더러움우리 자신의 행위로 인해서만 더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다른 이가 행한 악의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이로 인해 당신은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더럽혀졌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어느 성폭력 피해자 여성이 그 일을 왜 입 밖에 내지 않았는지에 대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다음과 같이 밝혔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내 생각에 그 사건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공격해서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죠. 난 파티에 초대받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여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저 아무도 없는 주차장으로 끌고 가 성폭행이나 할 만한 여자인 것이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봐야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식으로 생각할 게 뻔했어요. 가해자의 범죄를 드러내는 데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말이죠.성폭력으로 인해 이 여성은 그 가해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더러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그래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예수님과 나병 환자의 만남에 주목해야 한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막 1:40)다시 말하지만 이 사람의 나병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율법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회복시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하시면”이라 한 것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치유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고침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경험한 어려움을 예수님은 아신다. 예수님은 그에게 무관심하거나 기피 하여 뒷걸음질 치지 않으신다. 그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며 그를 만지신다. 아마도 십수 년 넘게 아무도 그에게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예수님은 이 나병 환자처럼 그에게 나오는 자들의 부정함을 어떻게 해결하실까? 혐오감을 느끼며 뒤로 물러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까이 다가오신다. 우리로부터 멀리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오신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예수께서 ‘원하신다.’ 그리고 그 결과는 즉각적이고 놀랍기까지 하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막 1:42). 그리스도 안의 풍성한 은혜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위험한 존재이거나 전염시키는 요인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격리시켰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병 환자가 아닌 나병을 문제의 요인으로 보셨다. 아무리 더러운 흙이 묻은 채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해도 예수님의 정결함은 훨씬 더 강력하다. 예수님 안에는 우리의 불의를 능가하는 의가 있고, 우리의 범죄를 능가하는 은혜가 있으며, 우리의 죄를 넘어서는 용서가 있다. 우리의 최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최선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더럽힐 수 없다. 그분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뿐이다. 우리의 더러움의 농도가 아무리 진하다고 해도 그분의 거룩함은 그보다 더 진하고 강력하다. 그분이 지우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그냥 쉽게 믿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내 악함이 너무 커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자조(自嘲)적인 생각을 사람들은 겸손이라 착각한다. 사실 그것은 교만이다. ‘내가 너무도 대단한 사람이어서 예수님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보는 것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나병 환자를 고치신 후, 예수님은 그에게 엄히 경고하시며 아무에게도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제사장에게만 보여서 깨끗해졌음을 입증하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신다. 아직은 예수께서 본격적인 공생애를 시작할 단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명령과는 반대로 행동하여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을까?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예수님과 그 나병 환자가 서로 자리를 바꾼 것이다. 이전에는 나병 환자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 외진 곳에서만 살았다. 이제는 사람들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바깥 한적한 곳으로 가셔야 했다.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병이 예수님께로 옮아간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예수께서 어떻게 더러움을 제거하시는가?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깨끗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와 당신의 더러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옮기셨기 때문이다. 모든 죄, 모든 상처, 모든 깨어짐과 더러움을 그가 짊어지셨다.예수님은 완전히 버림당하셨다. 사람들로부터 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말이다 (막 15:34). 그는 독한 냄새를 풍기게 되었고, 나는 향기를 내게 되었다. 그가 밖으로 쫓겨났기에 내가 안으로 초대를 받았다. 내가 앞으로는 더러움을 ‘느끼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를 참소하는 자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할 것이다. 사단은 영원히 사단이다. 하지만 죄와 더러움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갈 때 내가 피할 곳이 있다.바비 모어는 바지에 손을 계속 문질렀지만 더러운 손을 완전히 깨끗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더러운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신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The Stains That No One Sees: How Jesus Removes Our Shame번역: 이정훈
바비모어
셰익스피어
죄
상처
깨어짐
아웃사이더
인사이더
복음
예수그리스도
배우자와 성에 대해 대화하라
by David White
2020-01-31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할 때였다. 대화가 무르익자 친구는 자기 결혼 생활, 특히 성생활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점점 열변을 토하다가 “결혼 생활이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성생활이 어려울 줄은 몰랐다니까!”하고 말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식당 안에 다 들릴 정도였다.나는 불쾌한 듯 우리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친구가 한 말을 되짚어 보았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친구는 결혼 전까지 “순결을 유지”했다면 결혼 후 성생활은 아주 멋질 것이라 배웠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달랐다.부부의 성생활은 쉬운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외형적인 차이를 포함하여 많은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성(sex)은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는 신비로운 것이다. 남녀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물론 서로의 욕구, 기대, 그리고 특별한 기호 등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부부들과 교제하면서 계속 발견되는 것은 그들의 성생활에 불만이 있다는 사실이다. 남녀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되면 부부간의 만족스러운 성생활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 의지, 그리고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부부의 성생활이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바르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배우자 간의 열린 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성생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부부의 성생활에 대한 논의는 성경이 성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성경이 결혼 후 성생활에 대해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의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단지 섬김과 사랑의 행위로서의 성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가르친다. 사실 부부의 성생활에 관한 구체적 가르침을 주는 본문은 한 군데뿐이다.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 7:3–5)나의 몸은 상대 배우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성생활의 주목적은 상대를 섬기는 것이다. 신약을 관통하는 윤리는 결혼의 성생활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이기심 없이 섬기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서로를 섬기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부부는 자신들의 성행위에 대해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이 대화를 위해 생각해봐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각자가 선호하는 것이 무엇인가?남녀가 아주 다르게 지어졌기 때문에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이 안 좋은지, 어떤 행위가 흥분을 주고, 어떤 것이 어색함을 느끼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신의 몸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배우자는 결코 알 수 없다. 성행위 전이나 도중에, 그리고 후에도 부부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신혼 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이러한 대화를 멈춰서는 안 된다.횟수에 대해서도 솔직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헌신적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각자의 기대감을 조정하고 두 사람의 차이점을 극복해나갈 수 있다. 배우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성적 희열에 대한 내 욕구를 내려놓아야 하는 때는 언제인가? 반대로 나는 전혀 욕구가 없을지라도 내 배우자를 위해 섬겨야 하는 때는 언제인가?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억지로 상황을 만들거나 투덜거리며 화를 내기보다는 사랑의 섬김으로 배우길 원하신다.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내 의견과 욕구를 무조건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직한 의사소통은 인간관계의 실수를 최소화한다. 배우자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혹은 육체적으로 어떤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지 이해한다면 자신의 욕구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어떻게 상대를 섬길 수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성경은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부부의 모든 성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을 내어주는 태도에 대해서는 가르친다. 배우자와 대화를 나눌 때 당신이 가진 욕구를 다음 질문에 비추어 생각해보라. 이 행위를 통해 배우자가 사랑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가?성적 표현들이 사랑의 행위 속에서 위로와 안정감을 증진 시키는가?이 행위가 배우자에게 기쁨과 풍요로움을 선사하는가?2.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인류의 타락이 우리의 성적관심(sexuality)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결혼 전 다른 사람과의 성관계로 인한 죄책감이나 과거 혹은 현재의 포르노 탐닉은 현재 부부의 성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주거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과거에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받은 성적인 고통도 현재 결혼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성적 학대를 경험한 이들도 결혼 후 성생활을 어렵게 느낀다.많은 이들이 과거의 성생활에 대해 자신의 배우자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부간의 대화가 열려있다면 과거의 상처와 죄악을 고백함으로 죄책감과 수치를 이겨낼 수 있다. 당신의 숨겨진 내면을 이야기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의 배우자이지만, 안내자로서 목회자나 상담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필요하다. 과거의 죄나 트라우마만이 결혼 생활에서의 육체적 친밀감을 방해하는 문제는 아니다. 결혼한 부부도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꼭 기억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싫어하거나 아주 불쾌하게 여기는 행위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적 표현을 타자 중심적으로 디자인하셨다. 동의를 구하지 않은 성적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배우자와 어떤 행위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3. 이제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우리는 삶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만난다. 결혼 생활 동안 부부의 성생활은 변화를 겪는다. 어떤 면에서 성숙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결혼 후에 경험하는 여러 가지 일들 역시 성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의 각 단계마다 성생활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부부가 성에 대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서로의 기대감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이 아닌 상대방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된다.위에서 언급했던 내 친구가 힘들게 깨달았듯 성생활은 쉬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평생 대화를 지속하는 것은 분명하게 도움이 된다. 대화를 시작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onversation About Sex You Need to Have with Your Spouse번역: 이정훈
가정
결혼
성생활
섬김
의사소통
동의
지속적대화
선교의 전략을 바꾼 세 단어
by Darren Carlson ㆍ Elliot Clark
2020-01-30
1974년 서방의 거의 모든 선교 단체가 채택한 전략은 다음 세 개의 그리스 단어 때문에 바뀌었다. 그것은 판타 타 에스네(panta ta ethne)이다. 이 단어는 특히 마태복음 24장 14절과 28장 19절에 등장해서 유명해졌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panta ta ethne)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1974년 로잔 회의(Lausanne Conference)에서 랄프 윈터(Ralph Winter)와 도날드 맥가번(Donald MacGavern)은 “숨겨진 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윈터는 언어적인 이유와 문화적인 장벽으로 인해 선교 사역에서 제외된 약 만 육천 개의 숨겨진 민족이(나중에 그는 만 칠천으로 바꾸었다) 있다고 추산했다. 그는 세계를 국가의 개념이 아니라 “민족 그룹”(people groups)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천 개의 독특한 민족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라며 참석자들의 생각에 도전장에 내밀었다. 랄프는 이렇게 썼다.예수님이 “모든 민족”이라는 구절을 썼을 때 그는 국가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단어 (그리스어 ethne)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지구의 모든 인류를 구성하는 확장된 가족을 가리킨다. 그래서 현대 선교 운동이 변화되었다. 최근에 존 파이퍼(John Piper)와 데이비드 플래트 (David Platt)와 같은 사람들의 사역은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그를 위한 신학적 근거로 모든 민족(panta ta ethne)을 제시한다. 언어가 다른 모든 민족(ethnolinguistic people)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선교의 전략적 우선순위가 이제는 복음주의 글로벌 선교 사업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선교적인 이해와 함께 이 땅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모든 민족이 다 복음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러한 기대는 다른 언어를 쓰는 모든 민족을 다 구분하고 그들에게 빠짐없이 복음을 전하여 “임무를 완수하라”는 독특한 선교 명령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해석으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도록 하는 곳이거나 최소한 예수님의 재림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이러한 이해는 각각의 민족에게 언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까지 정의하도록 했다. 크리스챠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최근 기사는 많은 선교 단체들이 취하고 있는 이런 식의 선교 접근이 내포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에 대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런 해석에 전혀 신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모든 민족(pasin tois ethnesin)을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쓰는 개별 민족”으로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단순한 데 있다. 그건 성경 신학적 정의보다 현대 인류학적 정의를 더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50년 전, 맥가번과 윈터와 같은 선교 학자들은 민족(ethne)이라는 단어에 대한 순전히 지리학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이해로만 접근했다. 그러므로 현대에 들어와서 사용하게 된 사회과학적 정의로 성경의 단어를 이해하고 정의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성경 저자들이 민족을 지리적, 문화적, 또는 언어적 범주의 국가들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민족(ethne)을 20세기에 들어서나 도입한 국가 또는 민족 그룹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1세기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 추종자들은 주로 성경에 언급된 민족, 즉 성경 신학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이방 나라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1세기 유대인들과 다른 동시대인들도 얼마든지 사회학적이고 지정학적인 구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민족이라는 단어는 무엇보다 종교적인 범주를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민족은 그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그래서 언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비유대민족이었다(엡 2:11-12; 막 11:17절에 나오는 만민(pasin tois ethne)은 비 유대민족을 의미한다). 예수가 그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그는 언어학적 또는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인구 통계를 놓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구절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이 구절은 구약이 말하는 이방인에 대한 범주와 기대를 다시 상기시키고 있다(사 66:18-19참고).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사역 내내 많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와서 아브라함의 유업에 동참할 것이라고 약속했다(마 8:11). 그의 말을 들었던 일부 유대인에게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예수의 이런 약속은 그의 사역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울도 나중에 같은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다. 모든 나라들(갈 3:8의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 창 12:3도 참조)이 그를 통해서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이방인일지라도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하심으로 성취되었다.그러므로 모든 나라에 관한 예수의 약속(마 24:14)과 사명(마 28:19)에 대한 마태복음 기록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민족에 관해서는 예언서, 특히 이사야서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구약이 가지고 있던 모든 민족에 관한 것을 더 많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를 포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최초의 약속에 등장하는 모든 민족은 성경 신학적인 배경을 제공한다. 창세기 10장에서 11장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와 오순절에 등장한 민족들 사이에서 문학적 연관성을 보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다(행 2:1-11).오순절 사건에 관한 누가의 기록은 모든 민족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 또 다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은 “천하각국”(pantos ethnous)에서 온 유대인들로 예루살렘이 넘쳤다고 말한다(행 2:5). 이러한 보편적인 언어(다른 사람도 아닌 주의 깊은 의사였던 누가가 이런 용어를 썼다는 점은 중요하다)는 용어에 대한 현대적 정의와 성경 기록의 차이를 강조한다. 우리는 오순절 그날 예루살렘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왔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 저자들은 진실하게 글을 쓰지만, 반드시 사실 묘사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과장하여 기록할 수 있다. 바울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말했다(골 1:23). 그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어떻게 일하셨는지, 어떻게 모든 이방인(panta ta ethne)이 복음을 듣도록 하셨는지에 대하여 썼다(딤후 4:17).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성경 구절을 해석하면서 과학적이고 세밀하게 그리고 인류학적인 정의만 가지고 접근할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수나 사도들이 모든 민족이라는 말을 썼을 때 그것이 당시에 존재하거나, 그 후에 존재하게 될 고유의 언어를 쓰는 모든 민족 집단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증거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모든 민족에 관한 예수의 말씀이 현재 존재하는 고유한 언어를 쓰는 민족 집단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적지 않은 민족은 복음이 도달하기도 전에 이미 멸종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금 통용되는 모든 민족의 정의에 따르면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충족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생각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도 하기 전에 죽은 모든 아기는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며, 그들이야말로 미전도 종족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미전도 종족을 대표하는 아기들이 천국에 있기 때문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은 필요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사의 선포가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계 14:6). 그런 주장은 선교에 대한 동기 부여를 약화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태복음 24장 14절이 말하는 모든 민족은 이 시대가 끝날 때 존재하는 모든 민족으로 제한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비약적인 주장으로 보인다.우리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1세기 당시에는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언어는 어떻게 되는가? 아니면 그때는 없었는데 지금 새로게 생긴 새로운 언어는 어떤가?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는 언어도 고려해야 하는가? 보좌 앞에서 고백하는 모든 언어는 중세 영어와 현대 영어를 동시에 다 포함해야 하는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그룹은 한 번으로 계산해야 하나 아니면 두 번으로 계산해야 하나? 복잡한 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모든 선교사와 연구 그룹이 세계에 존재하는 민족을 정의하고 계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성서 신학적으로 모든 민족을 바라보면 바로 해결될 수 있다.선교적으로 중요하다열방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복음이 선포된 적 없는 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가?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직접 선교사로 가거나 아니면 보내야 하는 책임이 있는가? 그렇다! 지리적 또는 민족 언어 범주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이 적절한가? 당연하다! 사도들 자신도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특정 국가(스페인) 또는 민족 그룹(스구디아)을 고려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민족 그룹에 중점을 두는 과정에서 우리는 선교 방법을 수정하느라 선교 사명 자체를 희생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복음전파, 세례, 교육, 교회 설립 및 지도자 양성)에 집중하지 않고 대신 사명을 마무리하는 것(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마태복음 24장이 마태복음 28장을 잡아먹어 버렸다.그 결과는 무엇인가? 전략적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선교에 필요한 자재 및 인력, 자원이 빠져나갔다. 복음이 일단 “도달한” 국가에는 신학교 하나 세우고는 그냥 방치했다. 가장 힘들고 많은 손이 가는 일, 유능한 지도자를 키우는 사역은 그냥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졌다. 선교 연구는 이제 민족을 식별하고 분류하는 데에만 중점을 두게 되었다. 선교 보고는 이제 전도를 강조하고 우리의 방법은 속도에만 중점을 둔다. 빠르게 교회를 증식하는 접근 방식이 발전함으로 서구의 선교 방식을 장악했고 동시에 세계 교회를 약화시켰다.이 모든 것이 다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슬픈 것은 복음이 도달했다고 여겨지는 선교 지역은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으로 그 지역에 사는 민족이 다시 미전도 상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선교 사명을 완수하는 데 충실했는가? 핵심은 무엇인가?당연히 우리는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야 한다. 맥가번과 윈터가 제기했던 선교에 대한 수정은 여러 면에서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 미전도 종족을 위해 삶과 사역을 다 바친 사람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또한 인류학을 선교 사역과 연구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는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이런 학문은 사탄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그러나 핵심은 우리가 세상과 세상 속 민족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선교 목표를 정해야지 성경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선교 노력을 하고, 선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복음을 들어 본 적 없는 곳으로 선교사를 파송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후에도 오래 머무르도록 격려하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민족으로 분류하고,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선교를 정의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사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예수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만들어 그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우리를 보내신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3 Words That Changed Missions Strategy—and Why We Might Be Wrong번역: 무제
선교전략
윈터
미전도
맥가번
핵심
이방인
아브라함
언약
사명
진정한 기쁨의 근원
by Matt Smethurst
2020-01-29
아버지로서 자녀들의 순종이 항상 기쁜 건 아니다. 올바른 순종은 기쁨과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데, 항상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억지로 순종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보고 싶다. 성경 전체에 기뻐하라는 명령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무언가 이상하다. 기쁨은 행동이 아니라 감정이 아닌가? 느낌을 어떻게 명령할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닌데… 이런 경우가 많지 않을까?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주 생각하지 않는 문제를 한번 다뤄보자.창조의 기쁨으로다소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행복하다.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행복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 기쁨은 있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세 위격이 한 하나님 안에서 영원토록 교제하며 신성한 기쁨을 나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왜 우주를 창조했을까? 뭔가가 부족해서 보충할 피조물이 필요했던 걸까? 아니다. 천지 창조는 기쁨의 폭발이고 넘쳐남이었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게 아니었다. 이 점을 잠시 생각해보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놀라운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당신과 나도 하나님의 넘치는 기쁨의 결과이다. 삼위일체 세 위격의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피조물과 무한한 기쁨을 나누기로 결정했다.이러한 신학 정보가 성경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쓰인 책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행복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부수적인 게 아니다창세기 1-2장의 모습처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시간은 짧다. 지금 우리는 어둠과 죄가 만연한,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한 창세기 3장 속에서 살고 있다. (아직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면 계속 살아보면 알게 될 것이다.)성경이 왜 그렇게 긴지 궁금한 적이 있는가? 그 이유 중 하나가 하나님이 오래 참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오래 참음에 대한 긴 이야기이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오래 참으실까? 그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계획된 일을 신중하게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 구원받은 사람들과 자신의 끝없는 기쁨을 나누는 바로 그 계획이다(계 7:9).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며, 힘든 일을 이겨낸 성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도 아니다. 기쁨은 인내하는 것이다. 기쁨은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기쁨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기쁨은 인생의 거친 물결이 우리를 위협할 때 꼭 필요한 것이다. 내가 탄 배의 복원력이고, 폭풍 속에서 붙잡는 닻이며,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이다. 기쁨은 성경 속의 사소한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핵심이다. 우리의 작은 이야기도 그 구원을 만들어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기쁨이 얼마나 중요한지 잠시 살펴보자.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눅 2:10).죽음이 무엇인가?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교제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2 12).성경을 읽는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예 15:16).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음속의 진짜 기쁨이 요란한 잔치와 관계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현대 문화가 주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기쁨은 내 자신이 기준이 되어 나의 말을 듣는 것에 있지 않다. 주의를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 진짜 기쁨이 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할 때”(시 1:2), 눈에 보이는 상황이 아니라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그리고 말씀 속에서 퍼내고 퍼내도 모자라지 않는 것을 찾을 때 진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똑같은 주제를 좀 더 발전시킨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했는가?“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여기 그가 아버지에게 기도한 내용이 있다.“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요한의 말도 살펴보자.“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 1:4).계속해서 구절 속에 나오는 후렴구를 알아차리겠는가? 이것, 이것, 이것 - 바로 말씀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또는 요한의 글을 통해서 나오지만, 이 모두는 다 하나님의 호흡이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기쁨과 그 생명이 말씀 속에 들어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한 말씀의 목적, 그러니까 성경의 목적은 당신의 마음에 기쁨의 홍수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기쁨이 말라갈 때성경적인 기쁨은 겉모습으로 활기차게 보이고, 긍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수준이 아니라고 이미 말했다. 지옥은 그런 사람으로 가득하다. 진정한 기쁨은 훨씬 더 좋고, 훨씬 더 대단한 것이다. 나는 성경을 읽는 기쁨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의무처럼 느껴진다. 훈련이 필요하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운동을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기쁨이 된다. 그것이 훈련의 본질이다. 매번 그런 것도 아니고, 또 단번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기쁨은 우리가 왕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고, 그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그 날까지, 그래서 영원한 기쁨으로 가득해질 그 날까지 멈추지 않고 조금씩 더 커지고 있다(사 33:17; 고전 13:12).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al Joy Has an Addres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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