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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당신에게 힘을 주신다
by David Mathis
2019-10-23
당신은 에너지를 ‘관리’하는가? 점점 더 많은 전문가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관리하는 일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에너지 관리를 주장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토니 슈워츠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과 증가하는 복잡성 사이에 더 많은 정보와 요구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와 달리 인간은 장기간 고속으로 계속 작동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높은 주파수와 낮은 주파수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우리의 심장은 다양한 간격으로 뛴다. 우리의 폐는 수요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한다. 숨을 잘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숨을 깊이 내쉴수록 더 차분해지고 더 유능하게 된다(Tony Schwartz, Manage Your Day-to-Day).슈워츠가 말하는 종교적 책임은 잘 모르지만, 우리가 ‘디자인되었다’라는 것을 인정한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디자인’되었다. 인간은 무한한 창조주에 의해 경이롭게 만들어진 유한의 창조물이다. 지혜는 우리에게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찾아내는 것을 수반한다. 그러나 슈워츠는 계속해서 “하지만 우리는 점진적으로 하루 종일 에너지 저장소를 태워 버리는 전형적인 삶을 산다. 이는 은행 계좌에서 예치금 없이 자금을 인출하는 것과 동일하다. 어느 순간 파산하게 된다.”라고 말한다.초자연적인 일슈워츠의 관찰은 통찰력이 있지만, 그의 해결책은 일천하다. 그리고 ‘우리가 디자인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나의 창조주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우리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에너지를 관리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능숙하게 함으로써, 당신은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더 높은 수준의 퀄리티로, 또한 더 지속 가능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의 더 나은 에너지 관리에 대해 배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영향력, 경영, 큰 생산성보다 훨씬 더 나은 깊고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다.우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닫힌 시스템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에너지 상승과 하강을 전적으로 자연적 힘의 산물이나, 원인과 결과, 휴식과 회복, 영양과 운동의 산물로 여긴 채 체념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적인 요소들은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들을 손상, 심지어 위험으로까지 최소화하고 무시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초자연주의자이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닫힌 시스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평범한 과정에 개입하실 수 있으며 종종 그렇게 하신다. 예수님은 매 순간 능력의 말씀으로 우주를 유지시키신다(히 1:3; 골 1:17). 또한 그분 자신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유지시키고 다시 채우신다. 이는 실제로 바울의 편지에서 반복되는 주제이다.격렬한 직업 윤리골로새서 첫 장의 마지막 부분은 내가 가장 최근에 주목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부분은 바울이 사도로서 행한 사역의 중심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구절이다. 이 내용은 사도직과 구별 없이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 특히 목사 및 장로들과 공유되어야 한다.“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바울은 철저한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성경에서 어느 누구도 사도 바울보다 일에 대해, 특히 열심히 일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특이한 배선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의 독신으로서의 삶이 엄청난 사역들을 이루어낼 수 있도록 그를 자유롭게 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보다 “수고를 넘치도록 했다고”(고후 11:23)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며, “나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라고 말했다(고전 15:10).그러나 계속해서, 바울은 그의 흔하지 않은 에너지와 노력을 존경할 만한 예외의 것이 아니라 따라야 할 본보기로 내세운다. 그는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능력 안에서 생산적인 노동을 위해 모든 크리스천은 성장할 수 있고 또한 스스로의 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공급하시는 그리스도바울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하면서 자신이 지닌 놀라운 에너지의 ‘비밀’과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공유했다(빌 4:12).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 그는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며 ‘어떻게’를 설명한다. 그분은 ‘주님’이시며 10절에서 나오는 그리스도를 의미하는데, 일부 번역은 이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한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그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으로 규정한다.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예수님을 힘의 공급자로 여김을 확신할 수 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이와 유사하게, 에베소서 6장 10절은 신이시자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공급된 인간의 힘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을 ‘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침내, 디모데후서 2장 1절에서 영적 능력과 원천이신 예수님 사이에서 동일한 연결성을 정리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건하여지고.”바울은 이뿐만 아니라 무한히 소중한 신적인 힘으로 강건하기를 주장한다.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는 신적-인간의 능력을 증언하고, 예수님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그의 안에서 일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행해졌음을 증언한다.그분의 힘으로하나님이 우리를 크리스천으로서 강건하게 하실 때,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실 뿐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혜로 닫힌 시스템의 믿을 수 없는 개념을 산산조각 내실 때, 그분은 특별히 우리의 형제와 동료 인간,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우주의 주권자로서 권능의 보좌에 앉으신 왕의 왕, 주의 주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다. 인류는 하늘의 보좌에 앉았다.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한계와 창조된 세상의 유한성의 한계에 맞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그분은 제한된 능력과 시간을 가진다는 것, 끝나지 않는 일들로 하루를 끝마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 그분은 육체적으로 지치고(요 4:6) 휴식이 필요한 것과 휴식을 위해 시간을 따로 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막 6:31). 그분은 완성하라고 주신 일을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요 4:34; 5:36; 17:4). 심지어 안식일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눅 13:14-17; 요 5:16-17; 막 2:27-28) 그분은 쉬지 않고 일하시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계셨다. 그분의 사역을 통해, 인간 에너지의 생산을 통해, 그는 아버지의 증인이자 그가 누구였는지 증명할 뿐 아니라(요 5:36-; 9:3-5) 그분 자신이 공급자이자 우리 믿음의 중심임을 보여 주셨다(요 10:37-38; 14:10-11).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분의 형제로 부르셨을 뿐 아니라 동료 ‘일꾼’(마 9:37-38; 눅 10:7)으로 부르셨고,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가 가진 에너지로 일할 것을 명령하신다(마 5:16). 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리 자신의 에너지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모을 수 있는 활력, 단지 지혜로우며 중요한 에너지 관리를 통해서 생산할 수 있는 것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부르신 일에 대한 그분 자신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 그분은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바울은 강력하게 일하신다고 강조하기도 한다.그분께 에너지를 요청하라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에너지를 식이요법, 운동, 그리고 휴식을 통해 돌보라고 배운 것을 잘 실천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음식과 잠이라는 선물들을 가볍게 다루면서 자연적인 방법 외에 우리에게 힘을 줄 다른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이는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제안을 무시하거나 등한시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가? 하나님이자 인간인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강력한 에너지로 일하실 것이다.우리는 이것을 삶의 규칙적인 리듬으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신실하게 청지기의 역할을 하며,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깨닫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께 그분의 에너지로 우리를 정기적으로 채워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마침내 우리는 우리의 지친 독립 의식을 내려놓고 그분이 공급하는 힘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Will Give You the Energy: Working Hard in Another’s Strength번역: 송유희
생활
직업
슈워츠
초자연
공급자
한계
직업윤리
그리스도
청지기
종교 개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by John Piper
2019-10-22
근본적으로 개신교의 종교 개혁은 죽음과 죄의 상태에 있는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벌인 논쟁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우리를 죽음의 상태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이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고 우리를 위한 완전함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 믿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이 두 가지 기적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결코 그것에 대해 공로를 주장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다시 말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에서 완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거룩’의 기본 의미는 평범한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다. 그 정의를 모든 평범한 것들로부터 무한히 “구별”된 하나님께 적용해 보면, 하나님은 무한히 “독특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가장 완벽한 다이아몬드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본질은, 이렇게 무한히 귀할 뿐 아니라 무한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독특성이 피조계를 통해, 또한 역사 및 구속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셀 수 없는 완전함의 본질적 가치와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밖으로 밝게 퍼져 나가는 것’이다. 필자가 하나님의 “셀 수 없는 완전함”이 지닌 아름다움이 밝게 퍼져 나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권능의 영광과(살후 1:9)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엡 1:6)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다이아몬드를 구성하는 면들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들 중 하나라도 잃으신다면 그분의 영광은 감소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면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즉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가치, 아름다움, 위대함이 밖으로 밝게 퍼져 나와 그분이 구속하신 백성들이 그것을 영적으로 목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2. 왜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가?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것이 모든 피조계, 역사, 그리고 구속을 향한 그분의 목적과 디자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창조하심, 만물을 붙들고 다스리심, 그리고 구원하심을 통해 드러난다.시편 기자의 고백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가 보여주듯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피조물들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적용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중략]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렇게도 광활한, 아무도 살지 않는 은하(銀河)들이 셀 수도 없이 존재하는 이 우주에서 점 하나처럼 작은 지구에만 사람이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우주가 사람이나 피조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광대한 우주를 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광대한 분인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완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경건치 못한 ‘솔리 데오 글로리아’들을 창조하셨고, 붙들고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을 의롭다 칭해 주신다. 3. 하나님은 의롭다 칭함 받은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 어떻게 가장 충만하게 영광을 받으시는가?나는 기독교 희락주의자다. 나는 ‘하나님이 의롭다 칭하신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그분이 의롭다 칭하신 백성들로부터 최고의 영광을 받으신다’고 믿는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이라는 종교 개혁 신앙의 위대한 요약본을 만든 목사와 신학자들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썼을 때 내 생각과 똑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우리의 목적이 그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다. 또한 그들은 영화롭게 함과 즐거워함이 독립된 두 목적이 아닌 하나의 목적임을 명시했다. 그들은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라고 한 말의 의미를 깊이 고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최상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가장 밝게 빛날 수 있는 길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고통 중에서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영광 안에서 무한한 만족을 누리길 바라셨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 온 피조계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한히 영광스러운 하나님, 온 우주의 궁극적 가치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지극한 기쁨이 되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분이 우리의 최고의 보화가 되심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면, 우리도 영화롭게 될 것인가?우리가 “솔리 데오 글로리아(하나님께만 영광을)”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영광의 조각을 조금이라도 누릴 때 그 영광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궁극적으로 만물의 원천이요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만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놀랍도록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우리를 당신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왜 그토록 확고한가?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쁨, 즉 하나님이신 그분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도 충만케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목적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5:11; 17:13). 하지만 747 점보제트기 엔진을 자그마한 스마트카(Smart Car: 독일제 2인승 극소형 자동차-역주)에 장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화산(火山)을 아직 영화롭게 되지 못한 내 영혼의 찻잔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한히 영광스러운 기쁨은 영화롭지 못한 사람들 안에 담을 수 없다.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하여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요 17:24–26).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예수님께 이끌리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죄인 된 모습이었든, 그를 믿는 우리 모두는 이제 어떠한 인간적인 공로도 아닌 ‘오직 믿음의 방편을 통해,’ 다른 어떤 희생이나 의를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누릴 자격이 없지만 ‘오직 은혜’로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고, 마침내 하나님 한 분만을 우리 삶의 최고의 보화로 즐거워하게 될 그 날, 그리하여 모든 영광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께만 속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그 날을 고대하는 것이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The Reformation and the Glory of God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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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red S. Oliphint
2019-10-21
우리는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믿을 수 있거나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지식과 다양한 진리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기독교가 더 포괄적인 종교였다면 크리스천의 삶은 훨씬 더 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객관적인 진리들이 거기에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그냥 자연의 주기적 패턴에 의해 점진적으로 진화된 하나의 생물학적 종이 아닌가? 상처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왜 성별 문제를 사회적 산물로서 유동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식당 메뉴에서 음식을 고르듯이 성 정체성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한 문제가 중요한 사항으로 대두될 경우, 보통 갈등이 발생한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그 문제가 중요하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바로 지키려면 주변 문화 및 그 가치와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객관적 진리,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류의 특별한 신분, 그리고 결혼과 가족의 핵심 역할 등과 같은 문제를 중요한 사안으로 본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사안이면, 우리에게도 중요하다.역사를 통해서 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로 하여금 주변 문화와 사상들에 반하여 살게 하셨다. 크리스천들은 자연 과학, 예술과 예능, 사회학, 심리학, 철학 등의 모든 학문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왔다. 이러한 학문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사람 중에는 때로 기독교에 대항하는 복잡하고 구체적인 논쟁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 왔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 우리 편에 계시며, 그분은 우리가 지적으로 어두워지지 않도록 말씀해 주신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주시는 분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인식론적 지식 또한 제공하신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전지전능하고, 주권적이며, 선하고, 편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쓰여졌음을 종종 잊어버린다. 성경 말씀이 기록되고 선별될 때 어느 것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채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모든 단어가 쓰여질 때 그분은 거기에 계셨으며, 우리가 지금 읽는 성경 말씀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도 신성하게 지휘하고 흠이 없도록 안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역사를 전능하게 통치하시며, 그 말씀이 완성된 후에는 그분의 신부인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다. 기독교가 공격을 받으면, 그 공격이 개인에 대한 것이든지 혹은 기독교 전체에 대한 것이든지, 성경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과 증거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우주의 기원이라고 한다. 인간은 그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그 사실은 인간이 모든 다른 피조물로부터 구별됨을 뜻한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여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방대한 피조 세계와 그 세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에 대해서도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신다.그러므로 교회 밖의 사람들(혹은 심지어 내부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 기원과 인간의 지위와 역할, 옳고 그른 것 등에 대해 기독교 신앙과 상반된 신념을 따르면 놀랄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에서 말씀하신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3:15–16).베드로는 이 본문에서 기독교 신앙이 주변 문화와 갈등을 빚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언제 방어를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가? 항상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온유와 존중으로 우리 자신과 하나님을 방어한다. 우리와 그분이 모욕을 당하면 그러한 우리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 된다. 베드로가 원리를 제공했다면 바울은 이를 실행에 옮겼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 양쪽 모두에서 기독교 신앙을 신학적으로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가 자신의 믿음을 방어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성경 말씀으로 그들과 논쟁했다. 베뢰아에서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사실인지 보려고 성경 말씀을 점검한 사람들은 베뢰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덴에서는 바울이 방어하는 모습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과 변론할 때,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을 전함으로 방어했다(행 17:18).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을 당혹하게 하려고 할 때 이 주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문화와 신앙에 대해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그들이 신을 믿고 있지만 그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고 변증한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신 참 하나님은 아담과 그 자손들을 모두 창조하셨고, 모든 이들을 구원한 그리스도가 심판의 날에 다시 오기 전에 회개하라 하셨다고(행 17:30) 역설했다. 바울의 방법은 창조와 타락, 구속과 완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과 변론했다. 그는 아덴의 철학과 예술에 익숙했다. 바울은 상대방의 문화와 신앙을 잘 알고 존중하면서도 기독교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고 신학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균형 있는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삶은 지적으로 쉬운 삶이 아니며, 또한 아니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학문 분야가 끊임없이 도전하는 공격으로 교회를 에워싸려는 것을 보아 오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도전을 주권적으로 통제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러한 도전에 답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 주셨다. 지적인 거물들과 변론할 때,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겠지만, 전지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은 우리 신앙을 항상 강하게 지켜줄 것이다. 상대방과 그 문화를 가능한 한 많이 아는 것은 설득력 있는 전술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를 방어하는 모든 내용은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온유와 존중으로 제대로 방어하면, 도전하는 사람과 도전을 받는 사람 모두를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Defending the Faith번역: 정은심
영성
신안과소명
온유
존중
신앙
변론
베드로
바울
크리스천
예수님, 당신은 알고 계셨나요?
by D. Blair Smith
2019-10-19
대중적인 크리스마스 노래인 “마리아,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Mary, Did You Know?)는 마이클 잉글리시(Michael English)가 1991년에 처음으로 부른 곡이다. 이 드라마틱한 노래는 발표 이후로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 가사를 보면, 장차 폭풍을 잠잠케 하고 죽은 자도 살리게 될 한 아기의 어머니(곧 마리아)에 대해 우리가 궁금하게 여길 만한 물음들을 다루고 있다. 이 노래에서 연속되는 그 물음들은 결국 한 가지 질문으로 모아진다. “마리아, 당신은 그 아기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었나요?”이 노래에 담긴 신학적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진리일 것이다. 이 곡의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하여 낳게 된 여인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신비를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만든다.마리아는 분명 알지 못했다.천사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전달해 준 소식이 있었지만(눅 1:26-38), 그녀는 자신이 낳을 아기가 감당하게 될 모든 일을 알지 못했다. 이는 마리아를 비하하는 게 아니다. 우리와 같이 그녀는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그녀가 가진 지식은 그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셨을까? 그분은 정말 다 아셨을까?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기 자신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을까? 정말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니케아 신경의 고백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으로서 피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한 본체”이신 그런 분이라면 말이다.그리 간단하지 않은 질문어떻게 보면, 이런 질문은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처럼 여겨진다. 단순한 삼단논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몇몇 본문만 떠올려 봐도,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지식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분은 어느 물고기의 입속에 동전 한 개가 들어있다는 사실(마 17:27)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요 4:1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다른 장소에 계시며 소식을 듣기도 전에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셨다(요 11:14).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보면, 위의 질문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만 하신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성인으로 자라야만 하는 아기이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2장 52절은 예수님이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설명한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육체와 정신의 성장을 이루는 인간의 일반적인 발달 과정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그렇다면 이 사실은, 그분이 알지 못하신 일들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까? 이를테면 목수의 집안에서 크신 분이 낚시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셨을까? 또 1세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장하신 분이 5세기 영국 섬에서 자라는 게 어떤 경험일지를 아셨을까? 나아가 소년이셨던 분이 당시 소녀로 살아가는 게 어떤 과정일지를 아셨을까?모르시는 내용도 있음을 말씀하시다물론 성경은 이런 문제를 간단히 취급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 자신도 모르시는 내용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놀라운 구절을 우리에게 보여 줄 뿐이다. 곧 마태복음 24장 36절과 마가복음 13장 32절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그렇다. 예수님도 알지 못하셨다.이 놀라운 구절에 대해서는 지난 교회 역사 동안 다양한 방법의 접근이 이뤄졌다. 가령 4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이 구절이 함축하는 문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이 선언하신 지식의 한계는 말씀 자체[곧 성자]의 불완전이 아니라 그 특성상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인성(the human nature)에 관한 내용이다.” 이는 단순해도 그 의미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설명이다. 즉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그분이 지치거나 허기지는 모습과 같이 오직 그분이 지니신 인성의 표현으로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좀 더 까다로운 설명을 제시한다. 바로 자신의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요 17:1)에 관해 주석하면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인가를 아시면서도 또한 모르시는 일이 동시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신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독론적 개념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참고로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신학의 분야이다).본성과 위격에 관한 고전적인 기독론우선 주후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회의 진술을 살펴보며 도움을 받도록 하겠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처녀 마리아의 자궁에서 성육신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신성에 인성을 결합하셨다. 이는 새로운 본성을 더하신 일이지, 원래의 본성을 감하신 일이 아니다. 즉 바울의 진술과 같이, 그리스도는 신성을 버리신 게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써 “자기를 비”우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빌 2:7). 칼케돈 신경은 이를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고 부른다. 곧 “혼합이나 변질이나 구분이나 분리 없이” 완전한 두 본성이 하나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칼케돈 공회가 이 진술을 확정한 목적은, 두 본성 중 하나를 감하거나 또는 두 가지를 혼합시키거나 구분하려고 한 당시의 이단 사상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러한 사상과 대조적으로 성자의 한 위격 안에 두 가지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렇다면 이 진술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 즉 예수님도 모르시는 내용이 있다고 말씀하신 문제를 설명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겠는가? 바로 신성만이 아니라 인성도 지니고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줌으로써 우리가 그 문제를 풀 수 있게 도와준다.이 두 가지 본성은, 마치 스위치를 작동하여 켰다가 껐다가 하듯이 예수님의 의식 속에서 조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이신 성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전지성(omniscience)을 상실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인성이 신성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신 성자는 그 몸이 무소부재하지 않듯이 그 지식에도 전지성을 지니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분의 신성이 인성을 변형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가지 본성은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닌 채로 한 사람 안에서 교통하기에, 그분은 두 본성을 따라 동시에 행동하실 수 있는 것이다.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행동을 하는 주체는 본성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성에 따라 행동을 하는 주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도 다른 이들과 동일하신데, 다만 그분은 두 가지 본성을 지니셨다는 사실이 문제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간혹 예수님의 특정 행동을 보면, 어느 한 가지 본성이 다른 본성보다 더 반영될 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에서 주무시는 모습은 그분의 인성을 반영하지만, 물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은 그분의 신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배에서 주무실 때조차도 그분은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며, 또 물위를 걸으실 때조차도 그분은 인간의 발을 사용하시는 사람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행동은 결국 한 동일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된다. 이러한 성경의 묘사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7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그리스도는 중보 사역을 하시며 그 고유한 특성대로 작용하는 두 가지 본성에 따라 행동하신다. 그러나 두 본성은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때로 어느 한 가지 본성에만 해당되는 행동을 보여 준다고 할지라도 다른 본성 역시 지니고 계신 위격에서 비롯되는 행동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눅 1:43; 요 3:13; 행 20:28).신비의 영역 속으로만일 마태복음 24장이나 마가복음 13장처럼 예수님이 자기 지식의 한계를 언급하시는 구절이 성경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진리를 놓치게 되었을까? 아마 예수님의 전지성에 대해서는 매우 정돈된 관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돈된 관점이란 게 사실은 우리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견해일 때가 많다. 믿음은 우리에게 푸아티에의 힐라리오(Hilary of Poitiers)가 한 말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바로 그 존재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마치 그분을 다 파악한 듯 완전히 정의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그분을 경배하는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아시면서도 동시에 모르신다고 말씀하는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순 없지만 여전히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말씀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또한 우리는 우리 모두가 가진 지식의 한계 역시 죄성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완전한 인성조차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그분의 인성으로 인해 우리의 인성이 회복되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알도록 허락되지 않은 사실을 불편하게 여기기보다 오히려 그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신 29:29). 즉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인내로써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이 글에서 나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내용은 다름 아닌 사람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인성을 따라 말씀하신 모습을 보여 준다고 논증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성을 따라서는 동일한 내용을 아신다는 사실도 함께 설명했다. 예수님은 그 무한한 지혜 가운데 자신의 백성이 알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셨던 것이다.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은 알기도 하시고 모르기도 하신다.이는 성육신이 지닌 역설의 신비를 보여 준다. 이 역설은 외견상 드러나는 불합리한 모순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을 좌절시키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즉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Did You Know?번역: 장성우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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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마이클잉글리시
고전적인기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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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신비의영역
위격적연합
교회 개척을 망치는 5가지 위험 요소
by Phil Newton
2019-10-18
당신 안에 잠복하고 있는 위험 요소를 알아차리기 전에는 교회 개척을 하지 마라.왜 새로운 교회가 요청되는 이때에 위험 요소부터 거론할까? 그 이유는,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가 단지 개척 사역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경건한 삶을 사는 데 실패했을 경우, 그리하여 그 사역을 잘 마무리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다시 영화롭게 하기 위한 걸음을 떼지도 않고 머뭇거릴 경우, 그로부터 주어지는 슬픔이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물론 어느 목회 사역에나 위험 요소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자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스스로의 생각을 의지하며 특별한 지인들을 곁에 두기 쉬운 교회 개척자들에게서 더 크게 나타난다.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모아 그룹을 짓고 세부적인 일까지 함께 하며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현장에는 늘 그런 위험 요소가 잠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 개척은 위대한 일이면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개척을 잘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격려하고 충고하며 사역의 과정에서 책임감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 개척자라면,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리고 인생을 몰락시킬 수 있는 다섯 가지 위험 요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1. 교만듣는 사람마다 칭찬하는 설교, 열기가 식지 않는 선교,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담, 그리고 새로운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비전 제시 등 그 모든 활동은 목회 사역에 엄청난 유익을 주면서도 교만에 빠져들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설교를 형편없이 하거나 전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선교에 동참하거나 아무런 비전도 없이 목회를 지속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여기서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설교나 상담을 성공적으로 하였다면, 그 이유는 당연히 하나님이 그 사역에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교회를 개척한 사람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찾아드는 교만에 특별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 그 결과,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힘써 투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사역을 얼마나 잘하든, 이 고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의 죄악이 너무도 막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그 값을 치르기 위해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삶에는 교만이 발붙일 곳이 없다.2. 권력32년 전 교회를 개척했을 때, 나는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대개 그 문제들은 너무나 큰 권력이 나에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당시 우리 교회에는 행정 조직이나 당회와 같은 공식적인 의사 결정 모임이 전혀 없었다. 그저 어떤 일을 수행할 때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나 혼자서 그 모든 과정을 주관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일은 내 머릿속에 있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게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권력이 넘치면, 이런 생각이 유혹으로 찾아올 수 있다. ‘나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다 할 수 있어.’ 그러면서 교회가 마치 나를 섬기며 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한다는 비뚤어진 개념을 갖게 된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멸에 이르는 길을 간다.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으신 예수님과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교회에서 권력은 흔히 담임 목사에게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경건한 장로들 여럿이 모여 그 문제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담임 목사는 그와 같은 장로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그들이 지혜를 모아 전달하는 뜻에 복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교회를 돌보라고 세우신 장로들을 겸손한 태도로 섬겨야 한다.3. 책임 의식의 결여큰 권력은 책임 의식의 결여를 가져온다. 즉 스스로 책임을 질 만한 목회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담임 목사의 동기나 행동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장로들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도 독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전혀 통제받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실패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떠한지 여러 소식을 통해 자주 접한다. 그들은 오직 자기 명예에 대해서만 책임 의식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머지않아 넘어지고 만다.왜 우리는 흔히 심각한 책임 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는 죄악으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성향에 대해서는 너무 적게 생각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죄악에 저항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여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에 기여했다는 성취감을 느끼면서 다른 이들이 빠지는 함정에 자신은 걸려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런데 그게 바로 사탄의 전략이다. 우리 모두는 철저한 죄인이다. 오직 은혜로만 살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 올바로 행하고 목사로 제대로 지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조력자로 두신 모든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경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약점을 대면하며 정직하게 인정하는 책임 의식을 갖춰야만 이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다.4. 이상주의마음에 큰 뜻을 품고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교회 개척에 관한 신학교 수업을 듣고, 교회 개척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교회 개척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깊은 감명까지 받게 된다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바로 이상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는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여기저기서 제안하는 A, B, C의 사역을 하게 된다면, X, Y, Z의 결과가 나타나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교회 개척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고생이나 실패를 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려는 사역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만을 한다. 또 어쩌면 자신이 관심을 갖는 몇 가지 분야에 대해서는 박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 개척이란, 목회 사역이다. 따라서 목회 세계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고 이상적인 생각만 가지고 개척하게 된다면, 뜻밖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내가 기억하는 어떤 유능한 청년이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 교회 개척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 후에 갖가지 이상적인 생각을 하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지역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 되고 말았다. 이내 탈진해서 그만두게 되었으니 말이다. 만일 그가 개척하기 전에 다른 교회에 가서 일정 기간만이라도 사역하며 훈련을 받았다면, 교회 개척에 대한 이상주의를 버리고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서서히 사역을 익혀 가도록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바울도 동일한 방법을 따랐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열두 명을 파송하신 후에 (누가복음 10장에서) 다시 칠십 명을 파송하셨다. 그리고 그 칠십 명이 돌아와 귀신들을 쫓아냈던 일로 한껏 들떠 있을 때, 마치 세상을 정복한 듯한 그 마음을 이렇게 가라앉히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우리도 이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5. 분주사역은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더군다나 교회 개척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기에 더욱 힘들다. 교회 개척자는 모임을 조직하고 계획을 세워 장소를 모색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자리를 청소하며 예배를 준비하고 설교와 상담과 심방 등 지속되는 목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일을 해야 한다. 이는 교회 개척과 목회 사역에 수반되는 일상생활이다.또 교회 개척자는 자신을 도와줄 아무 사역팀도 갖추지 못할 수 있다. 그저 자신과 대화하기 원하는 새로운 사람들만 곁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심방하고 연락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에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매주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체력만 허락된다면, 그야말로 하루 24시간을 교회 사역에 쏟을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결국 주님과 가족과 교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잘못을 범하게 된다. 만일 교회 개척자가 다섯 사람을 더 심방하기 위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또한 더 많은 모임을 구성하고 소그룹을 인도하려다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일은 소홀히 하게 된다면? 그리고 열 명의 방문자를 교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정작 기존의 성도를 목양하는 일에는 관심을 잃게 된다면? 더 나아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참석할 수 있는 모든 컨퍼런스와 미팅을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추구해야 할 신앙의 성장은 이루지 못한다면?물론 교회를 개척한 목사는 힘을 다해 오랜 시간 일해야 한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기반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교회는 흔들리는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열심히 노력하며 부지런히 수고하되 모든 일이 주님의 사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또한 그 사역이 확장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더불어 계획을 세울 때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곁에 있는 가족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를 반드시 살펴야 한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없다. 결코 그런 마음으로 애쓰지 말기를 바란다. 그 대신 오직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는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며, 날마다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고 현명하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Dangers That Can Wreck Church Plants (and Planters)번역: 장성우
교회개척
교만
권력
책임의식
이상주의
분주
저축과 투자에 대한 성경적 원리
by Chris Cagle
2019-10-17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은퇴나 장애를 대비하여 저축과 투자를 해야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돈을 관리하는 일에 신학을 적용하기 어려워한다. 특히 멀리 있고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하고 투자하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주제에 관하여는 기독교 안에서도 너무 많은 관점들이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이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어떤 관점은 사치스러운 삶을 부인하며 천국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관점은 생의 후기에 더 큰 부를 누리고 쓰기 위하여 예산을 세우고, 빚을 지지 말며, 정기적으로 저축하라고 제안한다. 좀 더 극적인 관점 안에서는, 40세 이전에 은퇴할 수 있도록 극도로 절약하고 저축을 강조하는 재정 독립과 조기 은퇴(FIRE, Financial Independence/Retire Early)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있다.그러면 미래를 위해 실제로 저축하고 투자하는 면에서 성경적 정통 신학과 균형을 이루는 개인적 차원의 돈의 신학을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이를 위해 7가지 성경적 원리를 나누고자 한다.1. 미래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일은 성경적이다어떤 크리스천들은 은퇴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일을 (보통 마태복음 6장 19-20절을 인용하면서) 불순종이라고 믿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보다 다른 곳에 돈을 두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저축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하나님이 은퇴 후의 삶도 돌보실 것이므로(사 46:4) 나중을 위한 저축은 필요치 않다고 믿는다. 그리고 저축하고는 싶지만 벌어들인 돈을 모두 다 써 버리기 때문에 저축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잠 13:18). 놀라겠지만, 성경은 실제로 저축을 장려하고 있다. 성경은 미래에 발생할 필요가 알려지고 예상되는 경우 저축하는 일을 용납한다(창 41; 잠 6:6–11; 21:5, 20).성경은 미래를 대비하여 지혜롭게 저축하고 투자하면서도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일”로 “하나님께 부요[해]지는”(눅 12:21; 마 6:19-21)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2. 저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저축하는 일은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활동으로 여겨지기 쉽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저축을 하면서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지 않아도 된다. 저축하는 일은 돈을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바르게 평가하는 일이므로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다(약 1:16-17). 돈을 무계획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어리석게 써 버리기보다는, 지혜롭게 저축하는 일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더 잘 관리하는 일이다(눅 12:47-48). 청지기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일은, 중요하게 돈을 필요로 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저축을 해 놓고 있으면, 그때 당신이 더 잘 도울 수 있는 입장이 되게 하는 것이다(엡 4:28). 그러면 당신은 더 빨리 그리고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잠 3:27). 저축은 유산을 남길 수 있게 하고, 당신의 후손들을 축복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될 수 있게 한다(잠 13:22). 3. 지체하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다우리는 모두 일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찍 저축하지 않으면, 비과세 혹은 복리 이자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재정적 힘을 잃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축을 미루는 이유는 저축하는 일보다 더 우선적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가처분 소득을 기대하기 때문에 저축을 미루고 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당장의 부채를 청산해야 하거나 저임금으로 인해 수입이 적기 때문이다. 즉 의료 비용 및 자녀 교육비 등 더 긴급한 필요를 먼저 채워야 하기 때문에 저축은 나중으로 미룬다. 하지만 처리해야 할 우선순위가 바뀌더라도 저축은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퇴를 대비하며 저축하는 일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돈이 쌓일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마 25:27). 그 의미는 당신이 오늘 저축을 시작하면서 들어가는 돈에 비하여, 저축을 늦게 시작하면 결국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만큼으로 바로 저축을 시작하라. 그러면 그 금액은 시간이 지나면서 추진력을 얻어 조금씩 늘어난다. 4. 부채는 가정 경제를 쇠약하게 한다성경은 빚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 예수님 시대에는 신용 카드나 자동차 구입 자금 대출은 없었지만,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이 흔히 있었다. 성경은 빚을 엄격하게 금하지는 않지만, 빚진 상태를 종으로 구속되는 한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잠 22:7). 그 밖에도, 과잉 지출과 너무 많은 부채 및 낮은 저축률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 부채에는 대가가 따른다. 부채를 청산할 때 지불하는 돈은 빌려준 사람에게 가기 때문에, 이는 그 외의 것을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는 돈이다. 이것을 부채의 ‘기회비용’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천만 원을 빌리고 12%의 이자(120만원)를 지불하는 경우와 천만 원을 저축하여 그것으로 6%(60만원)의 수익을 거두는 경우를 비교해 보라. 실제 경제적 차이는 18%(180만원)이다. 5. 지혜로운 투자는 바르고 좋은 일이다 투자는 주식 거래가 아니다. 건전한 투자는 처남이 알려 준 비밀 정보로 집을 담보하여 무리하게 돈을 집어 넣고 요행을 바라는 식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추측하여 요행을 노리고 돈을 투자하는 일은 대부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잠 28:19; 딤전 6:10).지혜롭게만 하면 투자를 통해 실제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투자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제품을 내놓거나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실제 사업에 돈을 넣는 것을 말한다. 바른 투자는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이 잘 경영하여 투자한 금액에 상응하는 만큼의 돈을 돌려주기를 소망하는 것이다(잠31:10–31; 전 11:1–6).투자에 대해 잘 모르는 평범한 개인은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기보다는, 비용이 적게 들고 간접 운용되는, 뮤추얼 펀드 및 상장 지수 펀드(ETFs)에 투자하는 것이 좋다. 또한 수익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높은 수수료와 비용이 드는 투자 상품은 피하고, 가능한 다각적으로 투자하며, 충동적으로 매매 타이밍을 결정하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 투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므로 모르는 투자 상품은 사지 말아야 한다. 6. 유혹에 의해 저축할 수도 있다두려움이나 탐욕으로 혹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갈망 등과 같은 잘못된 이유로 저축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저축하는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된다(딤전 6:17). 탐욕으로 하면 저축의 모든 이점을 놓치게 된다(잠 1:19; 막 8:36; 눅 12:15). 그리고 어느 정도 부를 획득하고 난 다음, 전도서 5장 13절의 구두쇠나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그들이 저축한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에게만 집중한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보다 부요함을 신뢰한 것이 문제였다. 부를 단지 쌓아 놓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는 위험을 감당하기보다는, 부를 보존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혀 그들의 삶을 소모하게 된다. 그것은 저주(잠 11:26)와 심판(눅 12:16–21; 약 5:3; 시 39:6; 전 5:13; 슥 9:3)을 초래한다. 7. 균형이 핵심이다적절한 균형을 찾는 일이 핵심이다.따라서 미래를 대비하여 지혜롭게 투자해야 하면서도, 너그럽게 나누어 주고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공급의 원천이며 우리의 미래를 지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어떤 결정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은혜와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이다(시 107:8-9). 또한 성경이 말하는 지혜에 근거하여 저축과 투자를 해 나갈 필요가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7 Biblical Principles for Saving and Investing Your Money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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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균형
선택 교리에 대한 세 가지 의문
by Tim Keller
2019-10-16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신 사람들만 그분께로 나아가게 된다는 선택 교리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을 이해하기는 쉬워도 받아들이기는 어려워서, 사려 깊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교리는 오랫동안 어려운 주제로 여겨졌으며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그렇다면 선택 교리가 불러일으키는 가장 일반적인 의문은 무엇일까? 여기에 그 세 가지 예를 소개하도록 하겠다.1. 만일 선택 교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이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이 의문은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에게도 동일한 문제가 된다. 선택 교리 자체가 이 문제를 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교리는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이끌 뿐이다. 다시 말해 선택 교리를 부정한다고 해서 이 문제를 피할 수는 없다. 즉 모든 기독교인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거기에 호소하여 선택 교리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선택 교리를 믿지 않는 기독교인도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다.(3)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이는 결국 미스터리이다. 단순히 선택 교리에 반대한다고 해서 그에 답변할 수 있는 게 아니다.이에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어떤 사람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이 선택하는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한다.” 하지만 이렇게 묻고 싶다. 왜 선택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어야 하는가? 가령 내 아들이 가진 선택의 자유를 내가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잘못된 선택으로 죽게 된다면 그때는 자유를 존중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잠시간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여 영원히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결국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든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든, 우리 모두는 이 문제를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는 난해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가 선택 교리에 대한 반론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선택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가정해 보자. 이를테면 하나님이 창세 전에 다음의 논리에 근거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고 가정해 보자.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겪게 될 죽음과 부활의 소식이 복음을 통해 제시될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한테 동일하게 주어져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면, 그 계획을 세우시는 순간 누구는 구원에 이르고 또 누구는 심판에 이르는지를 정확히 아셨을 것이다(그분은 전지하시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구원 계획을 세우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사실상 누구를 선택하시고 또 누구를 선택하지 않으시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동일한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이에 대해 오직 두 가지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첫째로 이 문제는 그분의 완전한 성품과 관련되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공의를 함께 지니신 분이고, 그중 어느 성품도 다른 성품보다 우선할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즉 어느 한 성품이 다른 성품에 비해 완전하지 않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이 문제는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보다 더 자비로운 방법으로 성취되는 구원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수준보다 절대적으로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완성하실 전체 그림을 우리가 보게 되는 날에야, 그 안에 어떤 오류도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 만일 누군가의 구원 여부가 확실히 정해져 있다면,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우선 이 의문은 근시안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만일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구원 여부를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일조차 두려워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별 생각 없이 이뤄지는 우리의 행동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정말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누군가의 구원이 계획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도할 때 어마어마한 부담을 지게 된다. 우리의 어눌한 말 한마디로 인해 상대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견해인가!다음으로 우리가 전도하며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우리 각자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느 아버지가 벽난로에 땔 장작을 마련하기 위해 혼자서 나무를 자를 수도 있지만, 장작을 패고 불을 피우는 법도 가르칠 겸 아들한테 같이 하자고 요구했다고 치자. 이때 그 아들이 이렇게 반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무를 자른다고 특별히 얻는 것도 없잖아요. 제가 땔감을 굳이 만들지 않아도, 아버지가 그 일을 다 하실 걸요. 저를 얼어 죽게 놔두진 않으실 테니까요.” 이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일은 나 혼자서 할 수도 있단다. 하지만 너와 함께 일을 했으면 좋겠구나.” 당연히 하늘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특권과 권위에는 매우 큰 축복이 뒤따른다. 그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추측해서는 안 된다. 즉 누가 선택되었는지를 예측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전도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선택 교리는 우리에게 큰 소망을 안겨다 준다. 왜냐하면 그 누구에 대해서도 소망이 없다고 함부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수많은 이들이 너무나 완고하여 마치 선택받지 않은 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상 반드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죽은 자를 살리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하지 절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사도행전 18장에 가면,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9절)고 격려하셨다. 곧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10절).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와 보호 및 ‘선택’에 대해 바울이 확신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11절)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요점은 이것이다. 곧 우리 각자가 기도하며 복음을 나누게 될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 중 한 명일 수 있으며,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시는 과정에서 쓰임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3. 나는 성경을 믿고 선택에 관한 모든 가르침도 이해하는데, 왜 마음으로는 그 교리를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힘든 것인가?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의 성격은 초자연적이어서(supernatural) 우리의 자연적 이성이나 문화로는 통합할 수 없는 내용들을 서로 결합시킨다. 예를 들어 칭의 교리는 복음을 바라보는 한 가지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관점에서 율법과 사랑은 그 누구도 생각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서로 결합된다. 그 결과 우리는 율법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아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복음 외에 다른 모든 철학 사상은, 율법이 최상의 가치가 되는 율법주의나 율법이 결여되어 있는 반율법주의로 기울어질 뿐이다. 칭의와 마찬가지로 선택 교리도 복음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서로 결합된다. 다시 말해 이 교리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문화나 철학이 통합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두 가지 사실이 결합되어 있음을 본다.우리가 누구이든, 우리 각자는 한 문화 속에서 성장하며 그 문화가 제공하는 견해를 깊이 받아들인 상태이다. 그리고 그런 견해는 편향되어 있기에, 우리는 선택 교리를 실제보다 더욱 단순하고 극단적인 내용으로 바라보게 된다. 예를 들어 동양의 철학이나 종교는 언제나 숙명론에 가까운 시각을 견지한다. 이런 시각에서 개인의 자율성이란 일종의 착각일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개인주의적인’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와 달리, 서양의 세속주의는 스스로 진로와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개인의 권리와 능력을 강하게 신뢰한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내용을 ‘숙명론적인’ 메시지로 생각하게 된다.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문화에서 어떠한 입장이나 성향을 가지고 성장했든지 간에, 선택이나 칭의로 표현되는 복음이 아주 미묘하게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우리의 관점이 균형을 갖출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Objections to the Doctrine of Election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선택
공의
초자연적
구원
전도
기도
문화
거짓 선생의 일곱 가지 특징
by Colin Smith
2019-10-15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 2:1). 베드로는 “만일,” “그러니까” 또는 “하지만” 같은 말을 쓰지 않는다. 베드로의 표현은 언제나 분명하고 명확하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들은 끊임없는 문제를 야기했다. 거짓으로 하나님의 선지자 행세를 하는 이들을 돌로 쳐야 했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럴 배짱이 없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삶에 재앙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도”라는 말에 주목하라. 교회에게 쓰는 이 편지에서 베드로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텔레비전에 나와 소위 뉴에이지 운동을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지역 교회 안에 있는 이들, 지역 교회 회중에 속해 있는 교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순수한 교회는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게 되어 있다. 워렌 워스비(Warren Wiersb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단은 위조품 제작자이다 [중략] 그는 거짓 사도(고후 11:13)가 가르치는 거짓 복음(갈 1:6-9)을 통해 거짓 그리스도인들을(고후 11:26) 만들어낸다 [중략] 하나님께서 진실된 신자들을 심으시는 곳마다(마 13:38) 사단은 자신의 위조품들을 심는다.”진품인가 위조품인가?가짜 기독교를 어떻게 분별해 낼 수 있을까?베드로후서 1장은 진품 신자들에 대해, 2장은 위조품 신자들에 대해 논한다. 이 두 장을 맞대어 놓고 읽으면, 진품 신자와 위조품 신자들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1. 근원이 다르다—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어디서 오는가?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1:16)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지어낸 말을 가지고”(2:3) 너희로 이득을 삼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진실된 선생은 그의 가르침의 근원을 성경에 두나, 거짓 교사는 자기 자신의 재능에 의지한다. 거짓 선생은 자기 메시지를 임의로 지어낸다. 2. 메시지가 다르다—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가? 진실된 선생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 베드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1:3)라고 말한다. 거짓 선생들에게 예수는 그저 가장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2:1)한다. ‘가만히’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예수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그리스도의 중심되심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은 포착하기 매우 어렵게끔 일어난다. 거짓 선생은 당신의 삶을 바꿔줄 만한 사람들을 소개해 주지만 그들의 말을 주의하여 들어 보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없어도 그만인 것임을 알 수 있다. 3. 위치가 다르다—당신이 듣는 그 메시지가 당신을 어떤 곳으로 데려가는가? 진실된 그리스도인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1:4) 피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가짜 그리스도인을 묘사하길,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2:19)고 한다. 진실된 신자는 썩어질 것을 피하나 위조품 신자는 그것의 종이 된다. 4. 성품이 다르다—그 메시지가 어떤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가? 참된 신자는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그리고 사랑을 추구하는 반면(1:5) 거짓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긍과 타인에 대한 비방으로 특징지어진다(2:10). 이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지닌 이들이다(2:14). 그들은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2:10)이기도 하다. 이것이 위조품 신자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5. 다르게 호소한다—그 메시지를 왜 들어야 하는가? 진실된 선생은 성경에 호소한다.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중략]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1:19).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진실된 선생은 그분의 말씀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 선생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2:18). 그러므로 진실된 선생은 “하나님 말씀이 무엇이라 말하는가?”라고 묻지만 거짓 선생은 “사람들이 뭘 듣기 원하는가? 육신의 정욕에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라고 묻는다. 6. 열매가 다르다—그 메시지가 사람들의 삶에서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가? 진실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앎에 있어 부지런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1:8). 위조품은 “물 없는 샘”(2:17)이라 했는데 이는 정말 황당한 그림이다. 그들은 많은 열매를 맺겠다고 장담하나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7. 결과가 다르다—그 메시지가 당신을 인도하는 그 궁극적 지점이 어디인가? 가장 충격적인 차이가 바로 이것인데, 진실된 신자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1:11) 받으나 거짓 신자에게는 “임박한 멸망”(2:1)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2:3). 예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사역을 했다고 하는 ‘많은’ 이들이 나올 것인데,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중략]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씀하실 것이라 하셨다. 이들이 누구일까? 베드로가 이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현실을 알라베드로의 경고인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2:1)를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이를 적용해야 할까? 첫째, 베드로의 명확한 선언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매년 교회 안으로 많은 멋진 사람들이 들어오지만 그중 일부는 교회에 유익이 아니라 해를 끼칠 수 있다. 이들은 정말 좋은 사람으로 보일 수는 있으나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물론 이들에게도 우리만큼이나 그리스도가 필요하므로 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환영하지만, 이들이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둘째, 불신자들은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교회 안의 위선과 모순을 지적하는 일에 매우 능하다.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기 위해 그들은 흔히 “교회 안에서 위선자들을 많이 봤어요” 같은 이유를 내세우곤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 중 일부가 위선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위조품 때문에 진품을 못 믿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베드로의 말 역시 본질적으로는 이런 것이다. “당연히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합니다. 교회에 유익이 아닌 해를 끼치는 선생들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이렇게 타락한 세상에서 도대체 무얼 기대합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지나치게 순진하시군요. 위조품 때문에 진품을 못 믿겠다니 말입니다.” 다음 번에 그런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면 베드로후서 2장 1절을 보여 주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7 Traits of False Teachers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진품
워렌워스비
성품
참스승
거짓스승
위조품
축복 기도의 목적
by Aaron L. Garriott
2019-10-14
영화가 끝날 때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영화가 끝나면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올 때까지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 체증을 피하려고 영화관을 일찍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교회들이 영화관과 같이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며, ‘중요한 부분’이 끝나면 편할 때 떠나도 되는 교회 문화를 인정하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모습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예배가 끝나지 않았는데 일찍 떠나게 되면, 영적인 영양실조의 상태에 놓인다. 왜냐하면 예배의 정점인 축복받는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축도를 말하는 것인가? 목회자가 손을 들고 드리는 마감 ‘기도’ 말이다. 그것은 영화 끝에 올라오는 자막과 같은 것 아닌가?" 만일 이런 생각이 든다면, 아마도 우리가 축도의 특성과 목적을, 가장 좋게 말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이별 인사쯤으로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적으로 축도는 교회 예배의 가장 핵심 요소였다. 초대 교회에서 중세를 거치고, 청교도들을 거쳐 종교 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목회자가 손을 들고 회중에게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 예전적 전통이었다. 축도는 탄원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예배 의식의 양 끝을 세우는 전통이었다. 이 관행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공적 예배의 모범에 성문화되어, 목사는 “엄숙한 축복으로 회중을 해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관행은 어디에서 왔고 어떤 목적이 있는가?하나님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을 출범시킨 후에 아론과 그의 아들을 축복함으로 이 절차를 시작하셨다.“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3-27).이러한 선언으로, 새로 형성된 회중은 소유물을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주님이 그들에게 그것을 약속하셨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초기의 사례에서 보면, 축복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며, 목사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말씀이고, 신앙을 지탱하고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첫째, 축복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좋은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통해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기도나 찬가와는 다르다. 기도나 찬가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 반면,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와 찬가가 북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축복 기도는 남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 둘 다 크리스천의 경건 생활에 중요한 요소이지만, 교회의 예배에서는 구분되어야 한다. 존 오웬(John Owen)은 아론의 축복 기도에 대해 논하면서, “제사장에게 이르는 이 말은 제대로 된 기도는 아니었지만, 권위를 가진 축복 기도였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복을 내리려 제정하신 하나의 표시였다”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축도할 때 눈을 뜨고 손을 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언을 받는 식의 자세로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축복 기도를 선언하는 사람이 양손을 든 자세로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론(레 9:22)과 그리스도(눅 24:50)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둘째, 축복 기도는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맡겨진 사람에 의해 선언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사역은 주로 아론의 후손에게 주어졌다(대하 30:27; 히 5:1-5). 신약성경에서 이 책무는 장로로 임명받은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 기도를 선언하는 권위는 (올바른 상황과 올바른 형식으로) 목회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임명받은 장로들은 위임받은 권위로, 이미 사실인 것, 즉 그분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 회중에게 이미 사실이라면, 그들은 왜 그 축복 기도를 받아야 하는가?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며, 기도의 형식을 담아 축복을 선언하는 세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에게 복을 내린다고 확증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져야 한다. 주님은 축복의 선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축복의 말씀은 목회자들의 선언을 통해 우리 머리 위에 내려 주심으로 전달된다. 즉, 축복 기도는 하나님의 복 주심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방편이고 형식이다. 주님은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목회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 주심을 실질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아론의 축복에서 제사장은 “불분명한 속삭임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 기도의 형태로 크게 소리를 내어 선언하도록 명함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했고, 백성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이해했다고 알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계속해서 축복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제사장들에게 두어, 그들이 그것을 그분의 선한 뜻과 그때부터 진행되는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매일 제시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 축복 기도는 믿음으로 이해되고 감사와 확증으로 받아지는 것이다.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약속으로 보증된 곳을 기다리고 있다(요 14:3; 엡 1:14). 우리 지친 순례자들은 항해하는 중에 우리를 밀어 줄 바람이 불도록 정기적으로 이러한 선언이 필요하다. 아름답게도, 아론의 축복 기도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며(계 21:3) 그분의 이름이 우리 위에 놓이는(계 14:1) 곳에서 완전해진 새 언약으로 절정에 이른다. 정기적인 선언을 통해 우리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가 영원히 우리의 운명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에게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우리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계 22:4).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enediction of God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축복기도
목적
축도
하나님
레위지파
존칼빈
아론
웨스트민스터총회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놀라운 사랑
by John Piper
2019-10-12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사랑은 그 고난을 스스로 받기로 의도적으로(intentionally) 선택하신 매우 의식적인(conscious) 행위였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 그리스도가 자신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버리셨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를 위함이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갈보리 길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모두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기 위하여서는, 그것이 얼마나 완전히 의도적인 선택이었는지를 알면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죽임 당하셨음을 알 수 있는 5 가지 증거들을 살펴보자.첫째,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에게 칼을 휘둘러 그 귀를 떨어뜨린 바로 다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그분의 죽음이 얼마나 의도적인 선택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마 26:52–54).이 말씀을 통해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성경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선택을 정확하게 그것에 맞추셨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고통을 피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한 성경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의 의미가 이것이다. “나는 성경말씀을 알기 때문에 내가 이를 피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선택은 하나님 말씀에 나의 죽음에 관하여 예언하는 모든 것을 이루고자 함이다.”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나는 두 번째 증거는 사지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 하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2-24).예수님에게는 자신의 죽음이 어떠해야 한다고 정해진 한 가지 방식이 있었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따라서 죽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때가 이르렀을 때 담대하게 자신의 길을 가야 함을 알았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세 번째 증거는 이사야 선지자의 입으로 하신 말씀에 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만일 내가 이러한 고난과 고통에 맞닥뜨릴 상황이라면, 나는 모든 상상력을 총 동원하여 나를 보호하고 방어할 강력한 대책을 생각할 것이다. 인간은 고통이 올 것 같으면 움찔하고 뒷걸음질 친다. 불의하고 험악하게 남을 괴롭히며, 야비하고 오만한 사람들이 내게 고통을 주려고 한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과 수모의 순간마다, 자신이 당하는 일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하셨다. 그분은 세차게 내려치는 사람에게 자신의 등을 맡기셨다. 자신의 뺨을 철석 때리는 사람에게 얼굴을 내어 주셨다. 수염이 뽑히도록 내어 맡기셨다. 침 뱉음을 당하도록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러한 고통을 당하기로 스스로 선택하셨다.예수님이 스스로 고난 받으시기로 선택하신 네 번째 의도는 베드로의 설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라고 말했다.예수님은 “불의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다만,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심으로 불의를 다루셨다. 하나님은 정의가 이루어진 것을 보셔야 했다. 예수님을 갈보리의 그 길을 가게 한 부르심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었다.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셨음을 가장 명백하게 서술하고 있는 다섯 번째 증거는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여기에서 예수님의 요점은 자신이 완전히 자발적으로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못하며, 어느 상황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순간적으로라도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휩쓸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지고 계셨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라고 말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고난 받고 죽으신 행위의 정도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를 느껴야만 한다. 나는 당신이 그것을 온전하게 느끼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온전한 경험이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영향을 미치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중략]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출처: www.ligonier.org원제: Amazing Love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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