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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지에서도 예배를 드리라
by Heidi Carlson
2019-01-29
왕복 티켓, 렌터카, 숙박. 이는 휴가를 위한 준비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이다. 혹시 그 목록에 주일 예배도 포함되어 있는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휴가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 해외 여행 중에는 더욱 그러하다. 물론 낯선 교회에서의 예배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당신이 외부 사람이라는 사실이 단번에 드러나기 때문에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더욱이 게으름이 허락되는 휴가 기간임을 고려한다면, 한 번쯤은 예배 대신 늦잠을 선택하고픈 유혹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해외 여행을 생각 중이라면, 설교를 이해하지 못할 위험성도 보일 것이다. 예배에 참석하는 동안 처음 간 교회에서 아이들은 또 누가 돌본단 말인가? 이러한 이유들로 사람들은 휴가를 계획할 때 주일 예배를 배제하고는 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 문제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휴가 중 그곳의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의 기회로 여긴다. 낯선 그리스도인들과 아름답게 교제하는 기회 말이다. 그동안의 여행 중 기억에 많이 남고 또 영적으로도 재충전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예배를 드리던 장면들이 많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하나님이 세상 곳곳에 퍼진 그분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를 듣고 또 보았다.예를 들면, 나는 오래전 해외의 작은 현지 교회에서 주일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성도는 대략 50여 명 정도였고, 우리 가족 외에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다. 마침 그 주일에는 취약 계층을 돕기 위한 자금 마련의 일환으로 의류 기부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처음 접한 그 구제 행사에 적극 동참하였고, 그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좋은 방법을 배웠다.휴가지에서 교회를 찾는 방법낯선 휴가지에서 교회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당신은 ‘등록’할 교회를 찾는 중이 아니다. 한 번 혹은 두 번의 예배를 위한 곳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교회를 찾는 일이 조금 더 수월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는 주로 다음의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1. 가고자 하는 교회의 웹사이트에서 ‘목회 철학’을 미리 살펴보라많은 경우, 각각의 교회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신앙관과 목회자들의 경력 및 출신 학파 등을 소개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그 교회의 목회 방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특정한 교단에 소속되어 있다면, 같은 교단의 교회를 찾는 것도 검색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다(만약 해외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The Gospel Coalition의 홈페이지가 도움이 된다. 웹사이트의 “church directory” 코너에서 복음 중심적 교회를 찾을 수 있다).2. 숙소 주변의 교회를 찾으라숙소와 가까운 위치의 교회를 선정한다면, 헤매지 않고 예배에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다. 만약 일반적인 휴가보다 장기간 해외에 체류해야 한다면, 이와 같은 선택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머무는 동네의 이웃들과 신앙 안에서 교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3.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와 그분이 목회하는 교회가 있는지 파악하라해외로의 휴가를 준비 중이라면, 당신의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해당 지역에 있는지 알아보라. 이 경우, 우리말 예배를 기대해 볼 수도 있다. 나는 선교사의 딸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아버지는 주일마다 아침에는 현지 언어로, 또 저녁에는 우리말로 설교를 전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일 저녁에는 그 지역의 교포들과 같은 언어로 예배를 드리고는 했다. 우리에게 모국에서 온 성도들은 늘 기쁨이자 환영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방문만으로도 교회는 큰 위로와 힘을 얻기 때문이다. 4. 겸손한 태도로 지역 교회를 존중하라낯선 교회에 가면 보통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부터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렇다. 예를 들면 피아노의 음이 맞지 않거나 주보에서 오타를 발견하면, 마치 그 교회가 사역 전체를 감당하지 못하는 공동체인 양 오만한 정죄를 하고는 한다. 때때로 투박한 설교를 들으며 촌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찬양의 후렴 부분을 수없이 반복하는 상황에서는 은근히 모교회의 절제된 찬양과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교만한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외지에서도 변함없이 믿음의 자녀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을 기뻐해야 한다.5. 아이들과의 동행에 용기를 가지라8세 미만의 자녀를 4명이나 기르는 엄마로서, 휴가지에서 아이들과 함께 낯선 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가장 좋은 선택은 참석하려는 교회에서 돌봄 사역이 진행되는지를 미리 알아보는 것이다. 만약 감사하게도 그런 봉사를 제공하는 곳이라면, 조금 일찍 도착해서 아이들을 주일 학교나 돌봄 교실에 맡겨도 괜찮은지 문의하라. 하지만 교회에 따라 아이들을 위한 예배나 공간이 따로 없는 경우도 있다. 비록 이러한 상황일지라도, 그 교회에 원래 아이들이 여럿 있다면 어느 정도는 안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곳의 성도들은 예배 중 들려오는 꼬마들의 장난 소리에 이미 익숙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의 예배는 어른들 못지 않게 아이들에게도 좋은 기회이다. 자녀들이 그날의 예배를 통하여 교회에 대한 보다 넓고 깊은 이해를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휴가지에서 쌓는 교제의 풍성함여러 해 전, 나는 남편과 함께 꿈에 그리던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Prince Edwafd Island)으로 순례길을 떠났다. 주일이 되어 우리는 현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고, 아침을 먹자마자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따라 운전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푸른 언덕의 꼭대기에 위치한 하얗고 조그마한 교회에 도착했다. 이미 예배가 시작된 터라 우리는 자갈밭에 급히 주차를 하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당시 4개월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도 함께였기에 살금살금 끝 좌석으로 들어가 최대한 조용히 앉았다. 그러나 워낙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그 안의 모든 눈이 전부 우리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기에도 우리는 틀림없는 외지인이었던 셈이다.나의 모교회와는 다르게, 그곳에서는 찬양 시간에 아무런 악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성도들은 인도하는 목사를 따라 오로지 그들의 목소리만으로 하나님을 경배했다. 예배 후에는 우리를 반겨주는 현지 성도들과 낯설면서도 편안한 교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친구와 나는 빈손으로 그곳에 갔지만, 돌아올 때에는 섬김과 환영이라는 풍성한 은혜를 선물 받았다. 그들은 우리가 순례길에 오른 여행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일이 지나면 다시 볼 수 없음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닮은 따스함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때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하나의 분명한 진실을 마음 속에 새기도록 했다. 그 진실은 여행지에서의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축복이라는 사실이다. 이 은혜는 휴가지에서 교회를 찾을 때 수반되는 모든 번거로움을 압도한다.돌아오는 연휴에 먼 곳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곳에서 예배를 통하여 당신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라. 그리고 그들과 함께 교제의 축복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확인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Benefits of Going to Church on Vacation번역: 정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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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통하여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by Tony Merida
2019-01-28
신실한 크리스천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어려움은 극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이겨내도록 우리를 지탱해 주는 동기가 필요하다. 교회 개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기 원하는 핵심 멤버이든지, 혹은 교회 개척 프로젝트의 지도자이든지, 아니면 새로 개척된 교회의 신실한 교인이든지 누구나 소망과 영감이 필요하다.우선은 교회 개척에 대한 기대가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열정을 쉽게 잃을 수 있다.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갈 6:9)? 물론 우리의 마음을 잘 보살펴야 할 것이다. 복음으로 양식을 삼고 성령에 의지하며 열정적인 기도 생활을 하고 성경적 공동체 안에 있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영적 실천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 개척이라는 개념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이 교회 개척을 성경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 낙심할 수도 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 개척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사실, 교회 개척 지도자는 보통 장시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척 멤버들이 이러한 사실을 좀 더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도자가 아닌 당신이 왜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 더 큰 그림교회 개척에는 경이로움을 일으키는 여러 양상들이 있다. 물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가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으며, 그 자체로 우리는 힘을 얻고 지탱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소명만을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소망 또한 주셨다. 스티브 티미스(Steve Timmis)는 “하나님은 항상 그분 자신을 위하여, 그분의 영광을 보여 주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 줄 백성을 가지기 원했다”고 했다. 교회 개척이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사역이라는 진리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기억하라. 교회 개척은 어떤 모임 하나를 시작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어떤 행사를 열거나 모금 행사를 하거나 혹은 (이러한 것들만큼 중요한) 건물 하나를 찾는 것 이상이다. 교회 개척은 하나님이 항상 해 오신 일에 참여하는 것이며, 진행되고 있는 교회 개척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향하고 있는 곳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을 모으시는 중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한 역사의 드라마에 참여자가 되는 경이로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분을 위한 백성성경 이야기를 살펴보면, 자신의 백성을 모으려는 하나님의 결심을 놓칠 수 없다(창 12:1-3).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움은 구약성경(느 9:1-37)에 만연해 있으며,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보면,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신약성경에서 더 전개되는 것을 알 수 있다.신약성경에서 보면, 사도들의 복음적 설교를 통해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믿음을 갖게 된다. 이들은 교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행 2:1-47).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이제 형제자매가 되고(엡 2:11-22),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 위하여 성령의 힘을 얻는다. 사도행전 18장에서 보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이 용기를 잃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이 환상중에 나타나서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 9-10)라고 바울을 격려하는 말씀을 하신다.그 약속을 붙잡았는가? 하나님은 바울에게 고린도에 이미 그분의 백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이러한 약속으로 바울이 격려와 담대함을 얻게 된다. 그리고 바울은 그 도시에서 1년 이상 복음 사역을 계속한다. 그래서 이제 생기가 넘치는 두 명의 사도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된다. 용기를 얻으라따라서 사역 중에 혹시 도전 받는 상황이 오면,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웅장한 이야기를 기억하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모으고 있으며, 이 위대한 사명에서 우리를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한다. 당신이 교회를 개척할 때,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당신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당신에게 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지역 모임을 시작하려고 살필 때, 하나님이 이미 그곳에서 전개하고 계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용기를 얻으라. 더 큰 그림의 빛에서 그것을 바라보라. 당신이 한 가게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혹은 그밖의 장소에서나 오래된 교회 건물에서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릴 때, 현재의 이 모임이 앞으로 더 위대하고, 다양하며, 아름답고, 세계적이며, 영광스러운 미래로 그리고 영원히 확장되게 될 어떤 작은 움직임이라는 것을 기억하라.하나님은 항상 그분 자신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원하셨다. 말씀 주위로 모여들어 함께 떡을 떼고 노래하며 웃고 울며 기도하고 꿈꾸며 함께 사역을 하는 실제 사람들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우리에게 그분의 영광을 보이시고,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있다. 교회를 개척할 때, 이러한 경이로움을 놓치지 않기를 소망하며 나아가자.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Wonder of Church Plantin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개척
백성
하나님
용기
스티브티미스
10세기의 교회사, 클뤼니 수도원부터 시므온까지
by Nicholas Needham
2019-01-25
10세기는 어느 위대한 신학자가 등장하여 빛을 발한 시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서방 교회에서는 그랬다. 그러나 10세기는 교회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을 기준으로 보면 교회가 크게 진보한 시기였다. 9세기에는 기독교 문명이 노르만 족(바이킹 족)의 침략으로 서유럽에서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당시의 바이킹 족은 두개골을 쪼개 죽이는 잔인한 전사들이었다. 예배당을 불사르고 성직자와 수도사들을 살육하고 수녀들을 겁탈했다. 그러나 10세기에 이르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노르만 국가들이 하나씩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 변화는 실제로 9세기 말에 잉글랜드에서 시작되었다. 곧 잉글랜드에 진출했던 덴마크의 노르만 족이 기독교 세례를 알프레드 대제(Alfred the Great)와의 평화 조약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을 때가 그 시작점이다. 10세기에는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의 노르만 국가들에서도 이런 변화가 일어났다. 아이슬란드를 제외하고, 모든 노르만 국가는 최상류층이 먼저 기독교로 개종했다. 먼저 군주와 궁정이 회심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오늘날 우리와 더 비슷했다. 870년대부터 노르만 족은 아이슬란드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당시 서양에서 가장 교양 있고 민주적인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새로 회심한 노르웨이 왕 올라프 1세(Olaf Tryggvason)가 파송한 기독교 선교사들이 900년대 말에 아이슬란드에 믿음을 심었다. 이때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기독교인과 이방인으로 양분되었다. 이로 인해 종교 내란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민주주의 전통이 우세한 문화였고, 그래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그들 중에 있는 어떤 현인에게 물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 현인은 오래 동안 숙고한 다음, 결국 그리스도를 믿는 새 믿음이 옛 이방 종교보다 더 낫다고 답했다. 이 판단을 모두가 받아들였고, 1000년에 아이슬란드 의회는 이 판단을 비준했다.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인 아이슬란드에서 왜 두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대답은 중세 시대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둘 이상의 종교를 가진 사회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를 하나로 묶는 끈으로 종교를 이해했다. 그러므로 각 사회는, 심지어는 민주적인 사회까지도 오직 하나의 믿음만 가질 수 있었다. 중세 시대의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종교를 믿도록 허용하는 종교적 관용을 보장하지 않았고, 다만 어느 한 믿음을 전체 사회가 신봉할 수 있는지를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일만을 보장했다. 9세기에 전쟁과 초토화를 거친 후에, 유럽의 기독교는 수도원과 군주의 제휴를 통해 재건되었다. 특히 한 수도원이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를 심는 활동을 주도했다. 그 수도원은 909년에 프랑스 남동부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the monastery of Cluny)이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서방 교회 수도원들의 활력과 청결을 회복시켰고, 서방 기독교가 새롭게 탄생하는 데 큰 도움을 줌으로써 이 운동은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Cluniac revival)으로 불리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여러 수도원장이 연속해서 이끌었다. 배후에서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에 자극을 준 이는 927년부터 942년까지 수도원장을 지낸 오도(Odo)였다. 오도는 클뤼니 수도원을 전신으로 삼는 다른 수도원들을 많이 만들었다. 931년에 교황 요한 11세(Pope John XI)가 이 수도원들을 통제할 권리를 클뤼니 수도원에 주었다. 오도는 클뤼니 수도원 소속 수도원들의 수도원장을 개인적으로 지명할 권한을 가졌고, 이 수도원장들은 클뤼니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에게 복종을 서약했다. 따라서 클뤼니 수도원 소속 수도원들의 방대한 네트워크가 프랑스와 독일 전역으로 펼쳐졌고, 이 수도원들은 모두 클뤼니 수도원의 집중적인 관할 아래 있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이 가졌던 주된 방침은 기존 수도원들을 개혁하고 더 좋은 수도원들을 많이 세우는 데 있었다. 수도원 생활을 개혁하려는 그 방침의 핵심에는 클뤼니 수도원 방식으로 전례를 개혁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클뤼니 수도원 소속 수도사는 거의 온종일 예배드리는 데 헌신했고, 클뤼니 수도원 예배당들은 가능한 한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화려한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느낄 수 있도록 지어지고 여러 장식으로 꾸며졌다. 클뤼니 수도원 소속 개혁자들은 또한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the Benedictine rule)을 따랐다. 9세기 말엽에 대다수 서방 교회 수도원들은 규율이 엉망이었다. 10세기 말엽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이 미친 영향으로 베네딕트 수도회 규칙에 엄격히 순종하는 수도원들이 서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클뤼니 수도원은 설립 당시부터 세속적 간섭이나 정치적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봉건제도가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이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999년에 클뤼니 수도원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5세(Pope Gregory V)에게 주교단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자유도 허락받았다. 그 결과 클뤼니 수도원은 오직 교황에게만 종속되었다. 그러나 11세기 중엽에 교황권이 개혁될 때까지 교황청은 부패하고 무력했다. 그러므로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들은 교황이나 왕들의 간섭 없이 원하는 정책을 자유롭게 펼쳤다. 교황들이 아니라,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들이 서유럽 기독교 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비록 클뤼니 수도원이 정치적 통제에서 벗어나 있기는 했어도, 클뤼니 수도원 소속 수도사들과 세상 통치자들(군주들, 왕자들, 왕들)은 긴밀히 결탁했다. 확실히 클뤼니 수도원의 부흥은 통치 계층에 기독교적 관념을 심는 데 일조했다. 왜냐하면 귀족들의 자녀를 수도원에 데려와 확실하게 기독교 교육을 시키는 일이 클뤼니 수도원의 한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클뤼니 수도원과 서방 기독교 국가의 왕들 간에 강력한 협력 관계가 이루어졌다. 클뤼니 수도원의 원장들은 유럽을 진정한 기독교 사회로 만들려면 강력한 기독교 수도원들을 세워 그 수도원들이 기독교적 관념에 따라 사회를 다스려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처럼 서방 교회는 10세기에 위대한 신학자들의 도움 없이도 일종의 기독교적 ‘사회 부흥’을 일으켰다. 다른 한편, 비잔틴 제국의 형성으로 기독교 사회가 견고하고 찬란하게 꽃을 피운 동방 교회에서는 위대한 신학자가 배출되었다. 새로운 신학자 시므온(Simeon, 949-1022)이 바로 그였다. 시므온은 비잔틴 신비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로 알려졌다. 동방 교회 사람들은 시므온 이전에는 사도 요한과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에게만 ‘신학자’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과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두 사람의 가르침이 가장 탁월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동방 교회 사람들은 시므온을 요한과 그레고리우스와 동등한 수준으로 올림으로써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시므온은 흑해 남쪽 연안 갈라디아 마을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깊은 갈망으로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그의 영적 스승인 콘스탄티노플의 큰 대학수도원의 한 수도사가 젊은 시므온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성숙해져 수도사가 되겠다는 결정을 온전하게 내릴 수 있을 때까지 관리를 그만 두지 말 것을 조언했다. 그 스승의 이름 역시 시므온이었다. 그는 그보다 더 유명한 제자와 구별되어 ‘존경받는 시므온’(Simeon the Reverent)이라고 불렸다. 젊은 시므온은 결국 그 대학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영적 열정이 너무 강해 다른 많은 수도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그들이 젊은 시므온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일이 벌어졌다. 존경받는 시므온은 젊은 시므온을 보호하려고 그를 콘스탄티노플의 성 마마스 수도원(Saint Mamas monastery)으로 보냈다. 젊은 시므온은 성 마마스 수도원에서 980년에 수도사가 되었다. 시므온은 꾸준히 영적 생활에 관한 설교와 찬송과 논문들을 썼다. 그 결과, 시므온은 동방 교회의 선생들 가운데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시므온의 명성에 대한 비판이 없지 않았다.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 반발을 주도한 이는 스테파노(Stephen)였다. 스테파노는 니코메디아(Nicomedia)의 전(前) 주교로서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직책(동방 교회에서 가장 높은 주교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스테파노는 끊임없이 시므온을 공격했고, 시므온의 글들이 천박하고 무식하다고 비판했다. 어떤 차원에서 이 두 사람의 갈등은 (스테파노와 같이) 제도화된 공적 교회 및 그 교회의 권위를 강조한 자와 (시므온과 같이) 사람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동성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 자 사이에 벌어진 충돌이었다. 시므온에 관한 이런 의견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분열이 일어났고, 결국 1009년에 총대주교 세르기우스 2세(Sergius II)는 시므온에게 교회의 평화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도록 요구했다.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시므온은 콘스탄티노플 외곽에 정착했다. 한 부유한 친구가 시므온을 위하여 그곳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고, 그곳에서 시므온은 소란한 비잔틴 제국의 수도를 떠나 평강을 누렸다. 시므온은 확실히 비범하고 특출한 인물이었다. 시므온이 예배에서 수도사들을 이끌 때마다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시므온은 종종 개인들에 관해 (확실히 실제로 이루어지는) 예언을 해주었고, 기도를 통해 치유의 역사도 행했다. ‘눈물의 은사’(the gift of tears)는 동방 교회의 신비 사상에서 특히 소중히 여겼던 신령한 은혜이다. 곧 눈물의 은사를 받으면, 자신의 죄에 대해 통곡하며 울 때 그 마음속에서 간절한 회개의 감정이 용솟음쳤다. 시므온은 눈물의 은사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시므온이 홀로 앉아 있을 때 눈물로 뒤범벅이 된 모습을 자주 보았다. 시므온의 믿음은 또한 격식에 구애 받지 않았다. 다른 비잔틴 신비가들과 달리 시므온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말했다. 그리고 명목적인 기독교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변화된 삶으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세례와 교회 출석은 영적으로 아무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곳에서, 곧 도시에서, 시골에서, 수도원에서, 그리고 산 위에서 불리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펴본다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말과 행동에 있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거의 하나도 찾지 못할 것이다.” 시므온은 설교, 저술, 상담을 통해 온갖 의식과 규례에 얽매인 종교를 버리고 마음속에 내적 영성을 갖도록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데 한평생 심혈을 기울였다. 시므온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교리만을 통해서는 얻지 못하고, 헌신적인 영혼의 활동, 특히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곧 기도할 때 신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시므온은 한평생 논란 속에 있었으나, 동방 정교회는 사후에 시므온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고, 결국 시므온은 동방 교회의 가장 사랑받는 성도 가운데 하나가 되어 지금도 그렇게 기억되고 있다. 시므온이 남긴 위대한 영적 자취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10세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Revival & Repentance: From Cluny to Simeon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역사
중세교회
클뤼니
시므온
수도사
수도원
10세기교회사
기도
목회자의 아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
by Shari Thomas
2019-01-24
루카스와 미아는 트라이베카(Tribeca)에 있는 어느 작지만 성장하는 교회를 위해 준비된 사역자들이었다. 그 교회의 모든 교인은 그들의 활기찬 성품을 좋아했다. 거기서 루카스는 탁월한 리더쉽을 발휘했다. 미아 역시 냉소적인 사람들과 지식인들을 애교 있게 대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뉴욕에 사는 엘리트 사업가들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잘 성장하도록 큰 도움도 주었다.그렇게 그 부부가 교회에 온 지 24개월 동안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런데 루카스와 미아의 삶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8개월 후에 루카스는 교회를 떠난다고 선언했고, 그 후 5일 만에 아파트를 비우고 말았다.왜 이 부부는 그렇게 사역을 접고 떠났을까? 목회자가 교회를 떠나는 수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목회 사역이 그 목회자의 아내와 결혼 생활에 주는 어려움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건강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면 결혼한 당사자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교회 생활도 장기적인 면에서 건강한 생명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목회자 부부가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하고 만다.목회자와 결혼한 여성은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독특한 도전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차원에서 만일 (목회자의 아내와 그녀의 결혼 생활을 위해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는 일과 더불어) 다음 열 가지 사실을 마음에 간직한다면, 당신이 속한 교회는 더욱더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1. 목회자의 아내도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지닌 사람이다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의 부속물이 아니다. 그녀는 목회자와 다른 정치적, 사회적, 성경적 견해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의 아내는 자신의 그런 견해를 공적으로 드러낼 때, 남편의 사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가 지닌 고유한 모습을 헤아려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의 생각과 다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을 알아가는 놀라움과 기쁨도 함께 경험하게 된다.2. 목회자의 아내도 소명을 가지고 있다이 사실은 당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목회자의 아내는 현재 자신의 소명을 확실히 알지 못해서 그 소명을 확인해 가는 과정에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모들은 남편이 목회자의 소명을 받아 사역하는 과정에 참여할 때 남편과 함께 공동의 소명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모들도 있다. 또 어떤 사모들은 누군가가 목회자의 아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이야기해줘서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목회자의 아내는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심지어 오랫동안 목회 사역에 헌신해 온 사모들도 그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절망스럽게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사모들이 교회 안에서 그들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열심히 섬기느라고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모들은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소명을 따라 사느라고 교회 일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기도 한다.3. 목회자의 아내도 재정 문제로 힘들어 할 수 있다언젠가 한 사모 모임에서 재정적인 고충을 서로 나누며, 1달러를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기발한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함께 웃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사례금이 적어서 무료 식품권을 받아가며 살아 본 사모가 있으면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참석한 사람 중에 절반이 손을 들었다. 거기서 나는 목회자의 아내가 재정적으로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4.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을 모든 교인들과 공유해야 한다교회의 규모나 사역자의 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목회자는 하루 24시간을 대기하며 살아간다. 목회자는 어떤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가족 모임을 하고 있든, 그날이 공휴일이든 휴가 중이든 상관없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가야 한다. 물론 이 가운데 어떤 일은 교인들의 무례한 요구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흔히 목회 사역은 이런 위기 상황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특별히 어려운 지역에서 목회할 때는 목회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생기고 교도소에 투옥되는 사람이 생길 때, 그리고 가정에서 학대를 당하는 교인이 있거나 이혼하려는 부부가 생길 때, 제일 먼저 그들을 만나야 하는 사람은 목회자이다. 거기다가 결혼, 체육 활동, 세례식과 같은 행사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는 그런 식으로 교인들의 삶에 개입해서 헌신하는 일을 영광으로 알고 살아간다. 따라서 그와 같은 여러 사역들을 위해 목회자의 아내는 부부 생활에서, 가족 생활에서 남편과 함께 누려야 할 많은 시간을 희생한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알아야 한다.5. 목회자의 아내도 험담 때문에 상처받는다험담은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일들에 대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소문을 퍼뜨리는 행위이다. 이런 행위가 악의적인 성격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단순하고도 중요한 원칙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내용이 계속해서 회자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완곡한 표현을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 예를 들면, “당신도 알다시피, 그 사람은 자기이 직접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만약 악의적인 험담을 듣는 경우라면, 더욱 단호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었든 간에, 저는 이런 험담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이 험담을 시작한 사람에게 가서 더 이상 그 말을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할까 하는데, 저와 함께 가서 도와주실래요?” 지금은 나도 한때 듣게 되었던 험담에 대해 웃어넘길 수 있지만, 과거에는 내 자신조차 모르는 문제에 대한 험담이 교회에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힘들어하기도 했다.6. 목회자의 아내는 타인으로부터 비현실적인 요구를 받고 산다물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요구를 받고 산다. 누군가의 엄마이든, 자녀이든, 상사이든, 이웃이든 간에, 모든 사람은 타인의 기대가 주는 부담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늘 교회와 교인들 그리고 목회와 관계된 일들을 마음에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런 부담감과는 다르다. 목회자의 아내는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한다는 간섭까지 받고 산다. 목회자의 자녀들도 마땅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목회자는 사례비를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그리고 자기 집에 교인을 초청해 자주 식사 대접을 해야 한다는 요구도 받는다. 그러면서도 목회자와 그 아내는 이러한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며 살지 못한다는 질책과 비난을 받기도 한다.목회자의 아내는 끊임없이 일을 한다. 예를 들면, 각종 사역에 참여하고,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를 만나서 목회적인 상담도 하며, 지역사회의 행사에도 참여한다. 말 그대로, 사역으로 꽉 채워진 삶을 산다. 그러나 목회자의 아내에게도 필요한 일이 있다. 교회 안팎의 다른 요구들에 부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늘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7. 목회자의 아내가 교인과 친구 관계를 이루기는 매우 어렵다목회자의 아내가 교회에서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나누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남편이 교회의 목회자라는 이유로 사모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과는 더욱 그렇다. 그런 경우에 남편이 그 교회를 떠나게 되면, 지금까지 친구처럼 지냈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친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동안 그들에게서 크리스마스카드를 받거나 그들의 모임에 초대되거나 또는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해변으로 놀러간 일들이 모두 친구 관계에서 일어났다고 목회자의 아내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이 더 이상 그 교회의 목회자가 아닐 때, 그들과 가졌던 관계는 참된 친구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서 충격을 받기도 한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교인들도 목회자 부부와 함께 사역하면서 자신들이 그 부부와 친한 친구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교인들 역시 목회자 가정이 떠난 후, 그 부부와 진정한 친구 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픔과 충격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아픔이 목회 사역과 교회에서 일어난다. 물론 어디서든 풍성한 친구 관계를 누릴 수는 있겠지만, 그런 관계가 지속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성숙된 태도 역시 필요할 것이다.8. 목회자의 아내는 남편이 비판받을 때 상처를 받는다목회자는 가끔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거나, 잘 가르치지 않는다거나, 설교를 못한다거나, 교인 심방을 잘 안한다는 내용의 비판을 듣곤 한다. 보통 목회자가 부임할 때면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대한 목록을 교회에서 제공받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목회자는 자신의 일에 대한 교회의 기대치에 온전히 부응할 수 없다. 목회자의 근무 시간은 일주일에 과연 몇 시간이어야 하는가? 50시간? 아니면, 80시간? 실제로 목회는 일이 너무 많아서 멈추기 힘들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를 멈추어 쉬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 아내뿐이다. 그런데 남편이 충분히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내가 알게 될 때, 그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건강을 생각하며 쉬면서 일해야 한다고 말한 일에 자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종종 목회자는 불만을 품은 교회 중직자들의 말이나 어떤 논쟁적인 회의에서 언급된 내용을 무심결에 자기 아내와 공유하게 된다. 대부분 그런 상황들은 시간이 지나며 해결된다. 하지만 목회자의 아내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회의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그 문제와 상황이 해결되었는지를 모른 채 답답한 마음으로 지낼 때가 많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상황과 부담을 혼자 짊어지고 해결하며 살도록 방치되기도 한다.다른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배우자와는 달리, 목회자의 아내는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어울려 지내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참으로 현명하고 꾸밈없는 모습으로 당신을 대하며 친절하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목회자의 아내를 만난다면, 그녀는 고난을 통과해서 연단되고 성숙해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단순한 관찰을 통해서라도, 그녀로부터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기를 권한다.9. 목회자의 아내는 스트레스와 모호함을 느끼며 산다모호함(ambiguity)은 사역에 있어 고질적인 문제이다. 가령, 교회 조직 안에서 목회자 가족들의 위치는 모호하다.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의 가족 구성원들은 직간접적으로 교회의 일에 다 참여하게 된다. 이때 교인들은 그 구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모범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다. 이렇듯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그 아내와 자녀들은 그들대로 각자의 자리에서 요구 받는 기대가 있다. 그런데 목회자의 가족들은 교인들이 요구하는 기대의 수준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이런 역할이나 기대 수준에 대한 모호성은 목회자의 아내에게 고도의 스트레스를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당신이 만일 최근에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었다면, 그런 긍휼을 목회자의 아내에게도 보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개의 사모는 그런 어려움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슬픔을 당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아픔을 나눌 대상조차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고통을 교회에서 처리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목회자의 아내는 신뢰했던 일꾼이 교회를 떠난다는 소식을 들을 때도, 교회의 핵심리더가 바람을 피웠다는 소식을 들을 때도, 교회가 세금을 탈세했다는 소문을 들을 때도, 자기 남편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교회를 그만 나오겠다는 말을 들을 때도, 그 모든 아픔을 혼자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하지만 목회자와 결혼한 모든 여성이 이런 일들을 다 떠안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모들이 목회자 부부를 잘 돌아보는 훌륭한 교회 공동체 속에서 즐겁게 사역하기도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모들도 자기 남편들과 동역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그들이 사는 도시에서 확장되는 열매를 맛보며 즐겁게 사역하고 있다.이처럼 목회자의 아내가 겪는 처지는 서로 다르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열거할 열 번째 항목은 그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요소이다.10. 목회자의 아내를 의롭다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목회자의 아내는 사람의 판단을 통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의롭게 하는 것은 얼마나 교회에서 열심이 일하며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목회자의 아내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면, 그녀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미 선언되었다. 그녀가 가진 결점, 실수, 부족과 죄악은 모두 그리스도가 담당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목회자의 아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그녀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주셨다. 바로 ‘나의 사랑하는 의로운 딸’이라고 하나님이 법정 판결을 내리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Things the Woman Married to Your Pastor Wants You to Know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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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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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
예배의 기원과 미래
by Jonathan Gibson
2019-01-24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이다. 선교는 예배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 선교가 아니라 예배가 궁극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궁극적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가 끝나고 셀 수 없이 많은 구속된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릴 때, 선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선교는 일시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가 선교의 연료이자 목적이다.”인류 역사의 이야기는 예배의 이야기이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이자 왕으로 예배하도록 아담을 부르셨는데, 그 예배의 방법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이자 왕으로 예배하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셨는데, 그 예배의 방법은 그분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이자 왕으로 예배하도록 다윗(과 그 자손들)을 부르셨는데, 그 예배의 방법은 온 마음을 다해 그분 앞에서 신실하게 사는 것이었다.하지만 아담, 이스라엘, 다윗과 그의 자손들은 모두 예배하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을 거절했다. 그들은 창조주 대신에 창조된 피조물들을 예배하기로 선택했다. 그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여인들을 통해 타락했다. 아담은 하와를 통해, 이스라엘은 이방 여인들과 혼인함으로써, 솔로몬은 수많은 아내를 두어서 그렇게 되었다. 구약성경은 장차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서 자신을 바쳐 한 여인을 이끌어 하나님 앞에 순전한 예배를 드리게 하리라는 사실을 대망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전망은 (마지막 아담이자 진정한 이스라엘이고 다윗의 더 큰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완전한 예배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부는 예수님을 향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하셨다. 하지만 이 선언은 시험을 통해 검증되어야 했다.그래서 성령은 성자를 광야로 데리고 가셨다. 과거에 뱀으로 나타났던 사탄은 이제 예수님을 시험하여 그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즉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이자 왕으로 계속해서 예배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시험을 했다.아담, 이스라엘, 다윗의 자손들이 모두 실패한 그 시험에서 하나님의 마지막 아들이 승리했다. 첫 아담이 침묵한 채 뱀에게 복종했던 그곳에서 마지막 아담이 뱀을 꾸짖고 경배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참고, 신 6:13). 이스라엘과 다윗의 자손들이 온 마음과 영혼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하지 못했던 그곳에서 진정한 이스라엘이자 다윗의 더 큰 자손이신 예수님은 전심으로 예배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참고, 시 69:9). 예수님은 우상 숭배자도 위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분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참 아들이었다.이제 그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부였다.하나님의 아들이 천국을 떠난 이유는 그 아버지께 경배할 신부를 얻어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이 목적을 예수님의 사역에서 엿볼 수 있다. 사마리아 우물에서 예수님은 평생 제대로 된 남편을 찾을 수 없었던 한 여인을 만나서 영과 진리로 성부를 예배하도록 부르셨다. 하지만 이 여인은 그런 예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여인은 먼저 예수님의 신부가 될 다른 모든 사람과 더불어 정결해져야 했다.예수님은 자기 앞에 신부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죽으셨다(엡 5:25-26). 그러고 나서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높은 곳에 있는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은 예배 사역자로서(히 8:1-2), 신부의 예배가 아버지께 받아들여지도록 하신다.미래의 예배오늘날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죄인들에게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맞이하는 신부가 되라고 그들을 부르신다. 언젠가 신부의 복음 전도는 그치겠지만, 신부의 예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선언하게 될 것이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10).이처럼 신부가 준비되고, 결혼식이 거행되며, 함께 행진하면서 찬송을 부르게 될 날이 우리 앞에 남아있다.“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enesis and Future of Worship번역: 이주일
영성
예배
존파이퍼
완전한예배
예배사역자
어린양
하나님의아들
목사와 장례식
by Harry Reeder
2019-01-23
이 글의 주제는 내가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가장 두려워했던 사역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즉 목사로서 장례식을 인도하는 사역을 나는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사역을 가장 큰 특권으로 여긴다. 왜 그럴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승리의 부활이 지닌 역사성, 그리고 그 모든 사건에서 울려 퍼지는 영광스러운 메시지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누군가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인이 된 성도의 가족과 친구들을 위로하고 비신자 조문객들에게 은혜의 구원을 제시하면서, 신자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위엄과 복음의 영광을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그러나 비신자의 장례식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행사 또한 복음을 적절하게, 진실하게, 그러면서도 열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기회로 여긴다. 나는 비신자의 장례식 때 효과적인 복음을 전할 문이 얼마나 넓게 열려 있는지를 보면서 끊임없이 놀란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 누군가를 천국에 보내거나 거짓된 확신을 줄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의 관심을 영원한 실재로, 그리고 구주의 필요성으로 조심스럽게 돌리게 할 수 있는 길은 있다. 비신자의 장례식에 수반되는 과제를 생각해보자. 먼저, 비신자의 장례식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당신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할 때, 동정심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복음에 대하여 사려 깊게 또한 분명하게 이야기하면, 그 메시지를 듣는 사람은 거기에 함축된 의미를 분명히 접하게 될 것이다. 비신자의 영원한 상태는 복음의 진리에 의해 드러난다. 좀 더 명확히 말해보자. 우리는 한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해 분명한 선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서도 거짓된 확신을 주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알고 또한 그의 영원한 목적지에 대해 선언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전에 믿음이 없던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회심을 경험했는지의 여부를 잘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며,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빛 가운데 계신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은 비신자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오’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각 개인이 그리스도를 죽기 직전까지 믿지 않았는지 그 여부는 정확하게 모른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사람의 마음 상태와 그의 영원한 목적지를 밝히 드러낼 능력을 가지셨고, 그렇게 할 위치에 계신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설교자가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감상적이고 진부한 표현으로 시작해야 하는 장례식 예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다. 장례식에서도, 목사는 여느 설교와 마찬가지로 설교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한다(엡 4:15). 어느 청교도의 말을 바꿔 말하자면, “사랑 없는 진리는 야만적이고, 진리 없는 사랑은 잔인하다.” 이 경우에 도움이 될 만한 실용적인 제안을 하자면 이렇다. 고인을 잘 알고 그의 기독교 신앙과 그의 일생 동안의 공헌을 증언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간략한 추도사를 부탁하게 하라. 적절한 추도사가 끝나면, 설교자는 복음에,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소개하는 영광스러운 죄 사함의 진리에 부담 없이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를 통해 설교자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신자들을 격려하며, 비신자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있다.물론 설교에서 사적인 언급도 필요하고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참되고 오래 지속되는 위로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복음의 약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본향’에 있는 것이다. 장례식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제기할 질문은 ‘여러분은 어디서 영원을 보낼 것입니까?’이다. 또 하나의 실천적인 제안이 있다. 나는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생전에 보던 성경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 성경을 찾고, 거기에 있는 메모들을 확인하고, 그가 밑줄을 그었거나 자신의 생각을 쓴 곳을 살펴보기를 즐긴다. 나는 장례식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고인의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하관예배를 축도로 끝낸 다음에, 나는 항상 그 성경을 고인의 배우자나 가장 가까운 친척의 손에 들려주면서, 개인적인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넨다.우리의 구속주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부활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지닌 복음의 진리를 단순하게, 사려 깊게, 그리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참석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패러다임 전환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 설교자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당신의 설교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인이 된 그 사람이 ‘산 자의 땅’에서 ‘죽은 자의 땅’으로 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이와 반대의 내용이 사실임을 선포해야 한다. 그들은 ‘산 자의 땅’을 떠나 ‘죽은 자의 땅’으로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땅’을 떠나 ‘산 자의 땅’으로 갔다. D. L. 무디(Moody)는 복음의 진리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하여 뉴욕의 저널리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젠가 당신은 신문에서 이스트 노스필드의 D. L.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을 것입니다.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의 저는 지금의 저보다 더 생생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Pastor and the Funeral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교회
교회사역
목사
장례식
목회
신자
구속주
그리스도
DL무디
복음
존 칼빈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
by Joe Carter
2019-01-21
이 글에서는 프랑스 신학자이면서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John Calvin)의 생애를 보여 주는 아홉 가지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1. 이른 나이부터 칼빈은 라틴어와 철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학생이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오를레앙대학교(the University of Orleans)에서 좋아하지도 않는 법학을 공부하며 5년을 보냈다.2. 칼빈은 그의 대작인 ‘기독교강요’(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스물일곱 살에 저술했다(그는 평생에 걸쳐 이 작품을 증보하며 새로운 버전으로 출판했다). 이 작품은 복음적인 신앙을 알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입문서로 제작되었다(칼빈은 그 내용을 “경건과 구원의 교리를 아는 데 필요한 지식의 총체”라고 제시했다).3. 칼빈은 원래 목사가 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가기 위해 제네바(Geneva)를 거쳤다. 거기서 그 지역 교회의 지도자인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을 만나게 되었다. 칼빈은 단지 하룻밤을 그곳에 머물렀는데, 파렐은 그에게 그 도시에 남아 목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칼빈은 자신은 학자이지, 설교자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파렐은 만일 칼빈이 제네바에 남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의 모든 학문을 저주하시리라고 선언했다. 이후에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마치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권능의 손을 내밀어 나를 붙잡아 세우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나는 그 여정을 지속할 수 없었다.”4. 미망인 이들레뜨(Idelette)와 결혼한 칼빈은 그녀의 두 자녀들에게 새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낳은 자식은 그의 생애에 생존하지 못했다. 그의 유일한 아들 자크(Jacques)는 예정보다 일찍 태어났고 조금밖에 살지 못했다. 그리고 아내까지 죽자, 칼빈은 동료 비레(Viret)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네. 만일 하나님의 뜻이 허락되었다면, 그녀는 나의 가난만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기꺼이 나누어 가질 사람이었어. 일생 동안 그녀는 내 사역을 돕는 신실한 조력자였으니까. 게다가 조금도 내 사역을 방해한 적이 없었다네.”5.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 칼빈은 2천번 이상 설교를 했다. 그는 일요일에는 두 차례 설교했고 주중에도 거의 매일 설교했다. 그는 한 시간 이상씩 설교했으며 노트는 사용하지 않았다.6. 1553년 경에 칼빈은 스페인의 신학자이자 의사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와 서신 교환을 시작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상반되는 작품을 몇 차례 저술했고, 칼빈은 그에 대한 답변으로 자신의 기독교강요 한 권을 보냈다. 이에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비판적인 관찰을 담은 주석을 칼빈이 보낸 기독교강요에 기록한 후에 신속하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칼빈은 세르베투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않고 경멸하지도 않으며 핍박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바른 교리를 그토록 심히 교만한 태도로 모욕하는 당신을 바라볼 때는 강철과 같이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서신 교환은 칼빈이 그만두기까지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7. 1500년대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일은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으로 유럽 전역에서 여겨졌다. 당시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책들을 저술했다. 그로 인해 프랑스 가톨릭 종교재판소(the French Catholic Inquisition)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세르베투스는 비엔(Vienne)에 있는 감옥에서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망명하는 길에 제네바에서 발을 멈추었다. 거기서 그는 칼빈이 설교하는 예배에 참석한 후, 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프랑스 종교재판소의 심문자들은 처형을 위해 그를 넘겨 주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제네바의 공직자들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이단 재판소로 그를 데리고 왔다. 이때 칼빈은 일전에 그 자신이 ‘혐오스러운 신성모독’이라고 명명한 세르베투스의 문제에 근거하여 그가 사형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지기보다 반역자로서 참수형에 처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제네바 의회는 칼빈의 바람을 거절하고, 세르베투스의 마지막 저서라고 간주되던 책 한권을 그의 다리에 사슬로 매달아 화형에 처했다.8. 제네바에 있는 동안 칼빈의 주된 관심은 어린이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데 있었다. 그 학교는 하나의 독립적인 기관이었지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즉 콜레주(Collège)라고 불린 문법 학교와 아카데미(Académie)라고 불린 상급 학교로 이루어져 있었다. 5년이 채 되기 전에 문법 학교에 1천 2백 명, 그리고 상급 학교에 3백 명의 학생이 생겼다. 결국 콜레주는 제네바에서 대학 예비 학교들 가운데 하나인 제네바콜레주(the Collège de Genève)가 되었고, 아카데미는 제네바대학교(the University of Geneva)가 되었다.9. 칼빈은 죽기 직전까지 사역했다. 교회사의 기록에 의하면, 교회까지 가는 약 200야드를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의자에 실려와서 설교했다. 또 겨울의 찬 공기를 피하도록 강의실까지 가지 말라고 의사가 금하자, 그는 자신의 청중을 침실에 모이게 한 후에 강의를 했다. 자신을 향해 좀 쉬라고 재촉하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되물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내가 주님이 오실 때 게으른 자라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좋겠습니까?”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John Calvin번역: 장성우
역사
종교개혁
존칼빈
생애
스케치
기독교강요
경건
아직 교회에 정착하지 못한 젊은이에게
by Steve Bang Lee
2019-01-17
이 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분의 몸인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며 죄책감을 주려는 내용이 아니다. 물론 교회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명제는 진리이지만 말이다.또한 이 글은 당신에게 교회가 필요한 ‘현실적’ 이유를 강조하는 연설문 역시 아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많고, 그 이유를 분석하는 것 역시 충분히 의미있지만 말이다.단지 나는 이 글에서 지금 당신이 교회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지가 미래의 교회뿐 아니라 미래의 ‘당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일지 고려해 보자는 것이다.당신에게도 교회에 정착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아직 딱 맞는 교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진지하게 탐색 작업에 착수해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구매자의 후회’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어쩌면 개인적으로 교회에 실망한 적이 있을 수도 있다. 교회가 당신을 몸만 자란 어린이로 대우하는 일에 지쳤을 수도 있다. 혹은 젊은 세대를 공격하는 설교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고, 어린이를 돌보거나 의자를 치우는 자원봉사 인력으로만 사용되지 않기로 결심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일상이나 사회와 관계없어 보이는 교회, 자기가 중시하는 문제에는 집착하면서 중요한 사회 이슈는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에 질렸을 수도 있다.당신이 보고 싶은 그 변화가 되어라나도 이런 염려들에 공감한다. 이해한다. 알아듣겠다. 정말 무슨 말인지 알겠다.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청년기”는 지나갈 것이다. 당신은 경력을 쌓기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결혼도 하고 자녀도 낳을 것이다. 당신이 복잡한 삶을 헤쳐나갈 때, 지역 교회는 당신과 당신 가족을 기다리며 거기에 있을 것이다.언젠가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갔다가 이전에 지역 교회에서 느낀 문제 중 많은 문제가 여전히 있다고 느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묻고 싶은 유혹도 들 것이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도 왜 교회는 바뀐 게 없을까?”지역 교회 한 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고 하자. 누군가 그 교회 안에서 지도자 역할을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고 하자.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그 순간, 당신은 교회만 많이 바뀌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신 자신도 많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미래 교회는 바로 당신이 지금 투자하는 방식에 따라 형성될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당신’ 역시 오늘 교회의 현장에 참여하는 방식에 따라 형성될 것이다.만약 당신이 이 책임을 상실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어느 교회에도 정착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면, 내일의 교회와 내일의 당신은 어떻게 될까?책임 의식을 가질 시간나는 어느 세대든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일어나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나는 불완전하지만 이 교회를 내 교회로 삼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가 있으리라고 확신한다.그때가 교회에 대해 책임 의식을 가지고 행동할 시점이다.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 시기를 놓친다면, 헌신하고 참여하고 견디고 섬기면서 교회에 투자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우리가 심지 않은 바로 그 사실의 결과대로 교회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자녀들에게 왜 교회가 그 모양인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은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가 ‘그 시기’를 놓쳤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교제, 교회의 권위, 책임, 공적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오늘 기여하는 그런 투자가 내일 엄청난 열매를 맺을 것이다.교회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소리를 잘 듣고 일을 제대로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가 더 낮은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만들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따라서 우리 세대가 일어나야 한다.미래의 교회를 형성하라좋은 소식은, 대학 목사인 내가 청년들이 일어나는 광경을 이미 목격하고 있다는 점이다.교회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 지역 교회에서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은 출석하고, 헌금하고, 섬기며, 지쳐 있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교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한다. 그들은 교회에 의해 형성되면서 동시에 교회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나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당신이 속한 세대가 할 일을 기대한다. 당신이 한 교회에 정착하여 거기서 섬기기로 결심한다면, 비록 그 대가가 크고 마음을 힘들게 하거나 불편하게 할 때도 있겠지만, 당신은 다가오는 세대를 위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강하고 새롭게 만드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o the Young Christian Who Hasn’t Committed to a Church역자: 하늘샘
교회
교회생활
정착
젊은이
변화
책임의식
현실적
이유
청년기
‘오직 그리스도’에 기독교의 사활이 걸려 있다
by Stephen Wellum
2019-01-10
만일 우리가 종교개혁자에게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다섯 가지 솔라(the five solas)를 잘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솔라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첫째, 모든 솔라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다섯 가지 솔라 중 어느 한 솔라만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다섯 가지 솔라는 종교개혁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도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사실이다.그런데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솔라의 상호 의존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그 가운데 유독 한 가지 솔라가 다른 모든 솔라를 연결하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보도록 이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한 가지 솔라는 바로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인데, 이는 다른 네 가지 솔라의 중심에서 모든 솔라를 연결시켜 일관된 신학 체계를 이루도록 하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 존 칼빈(John Calvin)의 설명을 들어보자.“우리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는 일(히 13:9)이 일어나지 않는가? ‘오직 그리스도’(Christ alone) 앞에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은 그 자취를 감춘다. 우리의 시야에서 그리스도를 흐릿하게 만들기만 하면 사탄은 다른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는데,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온갖 종류의 거짓된 교훈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그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는 순수한 교리를 회복하고 보존하게 하는 유일한 방편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여 그분의 탁월하심을 진정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축복의 수단이다.”우리는 두 가지 교리에 집중함으로써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진 기본적인 통찰을 이 시대에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가지 교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정체성(Christ’s exclusive identity)과 충족한 사역(sufficient work)에 대한 가르침이다. 기독론의 그 두 가지 측면은 종교개혁 신학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이들에 의해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교회가 만일 종교개혁자들이 선포한 그리스도를 그들과 같이 선포하고자 한다면, 솔루스 크리스투스에 대해 그들이 가진 명료한 이해와 확신과 사명감, 그리고 넘치는 기쁨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이를 위해 여기서는 ‘오직 그리스도’가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솔라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다.1. ‘오직 그리스도’는 종교개혁 교리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다다섯 가지 솔라는 다음과 같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먼저 우리는 성경의 기록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알게 된다(솔라 스크립투라).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를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하신다. 이때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데(솔라 피데), 그 구원받게 하는 믿음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이다(솔루스 크리스투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오직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로 보존된다(솔라 그라티아). 그런데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가 지향하는 목적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분의 양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그분 자신의 영광을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으며, 이 목적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 그 영광을 반영하는 자가 됨으로써 성취된다(솔리 데오 글로리아).바로 여기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내는 광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발견된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말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은혜, 그리고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영광은 모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과 분리되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2.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오직 그리스도’를 교리의 중심에 두었다성경은 다양한 인간 저자들이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또한 창조에서부터 새 창조에 이르는 전체 구속 역사를 계시하시는 통일된 의사 전달 행위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 통일된 하나님의 말씀은 한 가지 주요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바로 무한한 지혜와 능력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삼위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과 계획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성취되도록 정하셨다는 내용이다.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성은 성부와 성령의 인격이나 사역이 가지는 중요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성부의 사역이 성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성령의 사역도 성자를 증언하고 그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마이클 리브스(Michael Reeves)가 “진정으로 삼위일체적이기 위해서는 한결같이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라고 설명한 내용에 동의하게 된다.3. 종교개혁의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자기 증언(the self-witness of Christ himself)을 반영한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는 사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계시가 바로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6-27).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 안에서 영생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그리고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종말에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고 평강을 잃지 않으셨다.“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요 5:22-23).바로 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라가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역사의 중심이며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모든 사역의 초점이 된다고 고백했다.4.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받아들였다히브리서의 시작 구절은 성자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갖는 최종성과 우월성을 강조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중략]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1-3).바울은 만물보다 먼저 계신 그리스도의 우월하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또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엡 1:9-10)는 것이라고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을 북돋운다. 결국 천지 창조 후 에덴동산에서 상실한 복을 회복시킬 뿐 아니라 그 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이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과 땅을 새롭게 구속하고 회복시키신다고 가르친다.5. ‘오직 그리스도’는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솔라만이 아니라 전체 기독교 신학의 구심점이다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가 그의 역작인 ‘개혁교의학’(Reformed Dogmatics)을 저술한지는 한 세기가 넘었는데, 바로 이 기독교 교리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대작에서 바빙크는 전체 교의에 일관성을 가져다 주는 열쇠가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기독론은 교의학 전체 체계의 출발점이 아니라 중심점이다. 다른 모든 교리는 기독론을 예비하는 가르침이거나, 아니면 기독론으로부터 도출되는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 기독론은 교의학의 심장으로서 기독교의 윤리적 삶 전체가 박동하도록 만든다.”20세기 말에 제임스 패커(James Packer)는 바퀴살을 가운데서 연결하는 중심축을 예로 들어 유익한 비유를 제시한 적이 있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기독론은 신학이라는 바퀴가 굴러가도록 하는 중심축과 같아서, 만일 전체 바퀴가 휘어지지 않으려면 각각의 바퀴살들이 올바르게 그 중심축에 박혀 있어야 한다.”그리고 최근에는 리브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통합적인 기능을 재인식하고 있다. 리브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기독교의 중심이자 주춧돌이며 왕관에 박힌 보석이라 할 만한 것은 어떤 사상이나 체계나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복음’과 같은 메시지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신학에서 기울이는 모든 노력은 ‘오직 그리스도’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이 기독교 신학을 큰 확신 가운데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다‘오직 그리스도’는 슬로건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솔라의 중심으로서 종교개혁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그분의 영광을 선포하도록 만든 성경의 가르침이다. 더 나아가 ‘오직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하시고 우리가 신학적으로 묘사하는 그분의 목적과 계획을 통합하는 실재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단순히 학문적인 관심사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가르침을 통해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ose Christ Alone, Lose Christianity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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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증언
우리는 중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by Gavin Ortlund
2019-01-09
현대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은 중세 교회의 가치를 잘 모른다. 솔직히 말해, 정말로 잘 모르는 듯하다. 우리가 가끔 교부들을 살펴보기도 하지만, 주로 최근(개신교)의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많다. 여러 복음주의자들이 조나단 에드워드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를 연구하는 복음주의자들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휘튼 대학의 교수이며 오푸스(Opus: The Art of Work) 설립자인 크리스 암스트롱(Chris Armstrong)은 “신앙에 있어서 중세 크리스천들과 우리의 차이는 그 시대 크리스천들의 독특함에 있다기 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전제들과 더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의 새 저서 '현대 크리스천들을 위한 중세의 지혜: C. S. 루이스와 함께 잊혀진 시대의 신앙 발견하기'(Medieval Wisdom for Modern Christians: Finding Authentic Faith in a Forgotten Age with C. S. Lewis)는 중세 교회를 좀 더 잘 평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의 다양한 문제점과 결점을 바로 잡기 위하여 중세 교회의 지혜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C. S. 루이스를 중세 교회의 세계로 들어가는 진입로로 사용하고 있다. 중세 기독교 평가하기암스트롱은 전통에 대한 중세의 관점, 중세 신학과 윤리학, 중세의 병원 창설, 마음과 정서에 대한 중세의 관점 그리고 자연 신학과 성육신에 대한 중세의 관점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거나 악령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라고 여겼다와 같은 중세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오해들을 하나씩 해체한다. 그는 중세 크리스천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배울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전염병이 있을 때 병자들을 돕는 그들의 용기에서, 그들의 신앙적 글들에서, 그들의 금욕적 실천에서, 그들의 예술에서, 그리고 영적 성장에 대한 그들의 통전적 접근에서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이 모든 영역들 중에서도 중세 사람들이 이해한 성육신 교리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암스트롱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핵심 진리는 중세 기독교의 핵심이다. 이것은 중세 크리스천들을 더 체화되고 통전적인 '지상의' 기독교로 이끌었다. 중세 기독교는 믿음과 이성, 머리와 가슴, 육체성과 영성, 말씀과 성례, 수도원적 묵상과 학술적 추론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다루었다. 암스트롱은 “이 책 전체는 우리가 성육신 교리를 놓치고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루이스는 중세의 다양한 신앙과 실천을 소개하는 가이드로 봉사하고 있다. 2장은 루이스가 그의 직감적 상상력으로, 그 자신의 신학으로 중세를 철저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장들은 루이스가 특정한 주제들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논의하면서 시작한다. 암스트롱은 루이스의 저술들뿐 아니라 중세 신학과 문헌들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루이스는 저자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 책이 전체적으로 폭넓게 제기하는 여러 논점들을 독자들이 더 명확하게 공감할 수 있게 한다.현대 기독교 비평에 중세 기독교 사용하기암스트롱은 중세 기독교 탐구를 단순히 학술적 활동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현대 개신교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사용하기를 원한다. '현대 크리스천들을 위한 중세의 지혜'는 중세 시대를 방어하는 동시에 우리 시대를 공정하게 엄격히 비평한다. 암스트롱은 현대 기독교를 ‘즉시주의’(immediatism)라고 부르며 꼬집는다. '즉시주의'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현대 사상의 세 가지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1) 새로움 추구(‘연대기적 속물근성’) (2) 즉각적인 결과 갈망(‘압박된 실용주의’) (3) 본 그대로 이해하는 식의 앎에 대한 단순한 견해(그는 이것을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상식적 현실주의와 연관시키면서 ‘상식적 인식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현대 ‘즉시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다른 차원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예배에 다양한 형태의 매체를 사용하는 점에 대하여 현대 크리스천들이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예전적 표현들, 성직자의 중보와 리더십, 성례에 대한 확고한 견해, 예배에 예술을 활용하는 것 등에 관하여 편견이 있다는 말이다.암스트롱은 현대의 ‘즉시주의’와 비교하여 중세의 ‘성례중시주의’를 강조한다. 성례중시주의는 “외적으로 보이는 것은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우주에 대한 현대의 견해가 척박하고 기계적인 것과는 달리 중세 사람들은 생명과 물질 세계에 통전적으로 접근했다고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창조 전반에 주입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음식과 성과 감정조차도 영적 존재인 우리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평가될 수 있다는 말이다.현대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중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인간성에 내포된 중요한 의미를 간과해 왔다. 우리의 일, 문화 형성, 고난,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 등이 중요하게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균형적으로 ‘비평’하기중세 신학에 관심이 있고 최근에 성 안셈(St. Anselm, 1033–1109)에 대한 학위논문을 마친 복음주의자로서, 나는 현대 크리스천들이 중세 교회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암스트롱의 입장에 공감한다. 이 경우는 특히 훌륭하게 기술하는 능력이 있는 저자에게서 나온 것이어야 했다. '현대 크리스천들을 위한 중세의 지혜'는 전달력이 있고 통찰적이며 인상적인 책이다. 현대 크리스천들이 중세 교회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들을 여러 방식으로 훌륭하게 구성하고 있다. 중세 신학을 연구하면서 나는 균형적인 ‘비평’이 어떤 것인가를 놓고 여러 번 씨름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평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때로 균형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방치되었다고 여겨진 것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기 쉬울 수 있다. 또한 바르게 잡아야겠다고 하면서 너무 지나치게 부풀려서 말하기가 쉽다. 한쪽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너무 상반된 쪽으로 가기가 쉽다. 학문의 세계는 특히 이러한 경향이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장이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에서 배울 이유가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는 형편없고 그들은 훌륭하니까 그들이 우리를 바르게 잡을 수 있다”와 같은 생각마져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암스트롱의 저서는 이러한 면에 민감성을 보인다. 그는 과거에 빠지거나 과거를 현재를 먹이는 ‘카페 양식’으로 적용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독자들은 특히 개신교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중세 교회가 많은 결점이 있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타당성이 어떤 면에서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암스트롱이 복음주의의 사상이나 경건과 다른 중세의 지혜들을 비교연구하여 서술할 때 여러 지점에서 내게도 의문이 들었다. 그 예로 암스트롱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부분, 연옥, 화체설을 언급하는데, 주로 이 교리들을 지지하면서 이것이 희화되는 것을 반대하는 듯 보였다. 그가 그 교리들을 믿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게 했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재편성했다고 비평한다. 그는 또한 중세 사람들의 마리아 숭배 신앙은 “구원 역사에서 핵심인 성육신에 대한 최초의 신앙”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로마 가톨릭의 열정적인 마리아 숭배 신앙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영역에서 암스트롱은 개신교 독자들이 로마 가톨릭 신학을 따르지 않으면서 중세 교회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더 확실하게 분별하도록 도왔어야 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종교개혁이 중세 기독교보다 실제로 더 진보된 영역이 어디인지가 불명확해졌다.겸허함과 관대함으로 중세 신학자들을 연구한 암스트롱의 의도는 훌륭하다. 하지만 좀 너무 관대한 것처럼 보이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는 노리치의 줄리앙(Julian of Norwich)이 그리스도의 여성성을 표현한 점을 “정서적 신앙의 자연적 발현”이라고 방어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줄리앙의 원죄 교리에 대한 그의 비평은 너무 빈약했다고 본다. 암스트롱은 “줄리앙은 죄를 현실적이지 않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말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빈약한 비평을 내놓고 있다. 중세 지혜가 도움이 된다고 분별없이 무조건 받아들이기 보다는 괴이한 부분을 식별해 낼 수 있는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과거로 말하기'현대 크리스천을 위한 중세의 지혜'는 전반적으로 믿을 만하며 주장이 잘 제기되었다. 개신교의 방향성이 중세 역사에 대한 ‘비평적 평가’가 목적이라면 이 책은 ‘평가’ 부분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비평’ 부분에는 좀 약하거나 모호할 것이다. 우리는 중세 선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교훈을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또한 그 외의 여러 시대의 교회 역사에 비추어 그것들을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결국 성경 말씀에 비추어서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 Can Learn from Medieval Christian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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