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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담아낼 수 없는 소설은 그만 쓰자!
by 김형익
2022-11-15
“소설 쓰시네.” 사실과 다른,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들을 때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소설의 허구성을 빗댄 말일 것이다. 한 번은 한 정치인의 입에서 이 말이 나와서 소설가협회가 성명을 낸 적도 있다. 사실, 소설은 허구(픽션)이지만 인간 내면의 또는 인간 사회의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최근에 류현재의 장편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을 읽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죄가 가져온 비참함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경험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고통의 경험은 ‘어느 정도’ 그리스도인 가정 안에서도 경험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는 것은 피하면서 조금 소개하자면, 한 가정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다음은 각 장의 제목들이다: 김은희, 김현창, 김인경, 김현기, 김영춘과 이정숙. 이렇게 모두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1장부터 4장까지 각 장의 제목은 김영춘과 이정숙의 자녀 이름이다. 노부부가 자녀 모두를 결혼시키고 건강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엄마의 뇌경색은 네 자녀 중 누군가 엄마를 돌봐드려야 하는 상황을 가져왔고 이 와중에 형제들 각자의 상황과 이해관계가 얽혀 빚어지게 된 결말은 슬프디 슬프다.소설의 각 장과 그 제목은 바로 그 사람의 시점(視點)에서 동일한 상황과 가족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해석한 내용이다. 읽다 보면, 어떻게 동일한 상황과 가족들을 이렇게 ‘다르게’ 이해할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상황은 오해에 오해를 거듭하여 사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오해 덩어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삶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니던가? 우리 한국인에게 가족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독특한 단어인가? 어떤 이들에게는 다정한 엄마의 품이나 아빠의 넓은 가슴 혹은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형제들의 따뜻한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에게 그리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고,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어떤 결론을 필요로 하고 그 결론에 따라 행동한다. 작가가 사용한 제목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개념의 부정적이면서 묘한 느낌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 모른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한국의 노령화 현상과 함께, 부모를 직접 돌봐 드려야 한다고 느끼는 다분히 동양적 (혹은 한국적) 사고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자녀들의 사랑과 부담과 고민은 우리 모두에게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 없다.하지만 이런 일이 가족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와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조금의 사실은 존재한다. 하지만, 각자가 자신의 상상력에 따라, 그 조금의 사실에 옷을 입히기 시작하고 칠을 하기 시작하면서, 각자가 내리는 결론은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허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사실, 그 결론에는 일말의 사실이나 진실도 있을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은 어느 정도 그런 결론을 가지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해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은 우리를 결코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오해하고 상황을 자기식대로 해석하다가 죽는다. 자기 시점으로만 파악한 거짓과 허구, 그리고 오해 속에서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타락의 결과로 인간에게 주어진 죄와 비참의 현실을 보고 경험한다. 가족을 만드신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죄로 말미암아 산산이 깨어져 버렸고, 가족은 가장 안전한 사랑의 연합이라기보다는 끊을 수 없는 족쇄로 여겨지게 되었다. 가족 구성원 각자는 다 자기만의 시점에서 서로와 상황을 파악하고 해석하고 바라보니, 사실은 사라지고 진실은 찾을 수 없게 된다. 부부 사이에서,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형제들 사이에서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오해는 쌓이고 그 속에서 소외와 불화와 단절은 깊어진다. 얼마나 많은 가정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인가? 복음은 우리의 시점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시점에서 하나님의 시점으로 보는 시각을 열어준다. 평면에서 움직이고 평면도만 보다가, 갑자기 공간의 시점, 하늘로부터 내려다보는 조감도(bird’s eye view)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그림이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평면도를 보고 내가 내렸던 결론이 틀렸다! 복음은 우리 자신을 상대화하게 한다. 더 이상 내가 우주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고 당신의 주권과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신다. 언제나 나의 시점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라고 인정하게 한다. 결론을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이렇게 복음은 죄와 비참이 빚어내는 인간 사회의 비극을 고치기 시작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심각한 오해를 받았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고린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일어난 일이다. 어쨌든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바울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하고 기분이 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시점에서만 고린도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 조감도는 제3의 존재를 보게 한다. 제3의 존재는 사탄이고, 사탄이 조종하는 거짓 교사들의 존재들이 보인다. 얼마든지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이 오해로 말미암아 끝장이 날 수도 있었지만, 바울은 그 고리를 끊어낸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다. 바울을 향한 고린도 사람들의 오해와 근거 없는 비난이 바울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던 것은 복음 때문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3-5).복음은 사람들의 오해와 시선, 비난과 판단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시점의 판단이 빚어내는 오해와 확신 그리고 소외, 불화와 단절의 고리를 끊어내게 하는 힘이 된다. 복음은, 바울의 고백대로, 자신의 판단과 확신을 지나치게 믿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보호한다.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몫으로 맡길 수 있기에, 우리는 오해와 근거 없는 주관적 확신을 품고 죽지 않을 자유를 누린다. 주님은 교회를 가족에 비유하셨고(막 3:35), 신약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권속)이라고 부르고 가족에 비유한다(엡 2:19; 딤전 5:1-2). 비록 이 세상에서 육신의 가족만큼 질기다고 느끼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혈연 가족 안에서 경험될 만한 오해들이 교회 안에서도 빚어지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지긋지긋해도 끊어낼 수 없는 질긴 족쇄처럼 여기지는 않기에 스스로 족쇄를 끊어내는 슬픈 결정들을 하기도 한다. 죄로 망가지기 전의 가족이라면, 소외, 오해, 불화와 단절 같은 일들 대신, 결속과 사랑, 돌봄과 섬김 만을 즐거이 누릴 수 있었겠지만, 죄성은 주의 자녀들에게도 여전히 잔존하는 세력으로 남아 우리를 지배하려 들며 교회에서 그 영향력을 키우려 들곤 한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이고 영적 가족인 교회에 상흔들이 남는 이유다. 가장 질긴 족쇄, 가장 지긋지긋한 족속, 가족, 이 소설이 들려준 슬픈 이야기가 우리의 가족, 교회에서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저마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아닌가! 조금의 사실, 약간의 진실에 자신이 만들어내고 채색한 허구 덩어리로서의 소설 말이다. 복음이 이 못된 습성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은혜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가진 평면도가 완전한 것이라고 우기면서, 복음 안에서 주어진 조감도를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우리는 늘 이 싸움 속에 던져진다. 때로는 질긴 족쇄, 지긋지긋한 족속으로 여겨질지라도,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어, 교회처럼 질긴 사랑의 연대, 기쁜 족속은 없다고 고백하게 되는 날, 단지 몇 사람만의 고백이 아닌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는 날을 바라본다. 이제 진실을 담아낼 수 없는 그런 소설은 그만 쓰자!
가족
시점
편견
〈교회의 재발견〉20선
e북과 오디오북 다운로드(아티클 하단 링크)
by Matt Smethurst · Collin Hansen · Jonathan Leeman
2022-11-09
콜린 핸슨과 조나단 리먼이 함께 쓴 ‘교회의 재발견: 왜 그리스도의 몸은 필수적인가?’(Rediscover Church: Why the Body of Christ Is Essential)에서 내 시선을 특별히 사로잡은 곳, 스무 군데를 소개한다. 교회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곤경에 빠진 그리스도인이다. (11)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초청하시는 것은 그곳이 약간의 정신적 위안과 함께 마음 편안히 지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청하시는 곳은 왕따와 아싸들이 모여 이루는 영적인 가족이다. 그곳은 우리가 원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집과 같은 곳인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곳으로 우리를 맞아들이시는 것이다. (15)교회를 재발견하는 일이 내키지 않는 이유가 많이 있겠지만, 반대로 그래야만 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이는 하나님이 당신이 썩 좋아하지 않는 저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시고자 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병든 이 세상을 갈기갈기 조각내는 권세를 초월하여 참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근본적인 길이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당신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임재하시는 곳이다. 당신과 우리가 속한 교회는 천국이 이 땅에 맞닿아 있는 곳, 즉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다. (21)천국은 교회를 통해 이 땅에 임한다. 그때 당신이 살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은 그 나라가 더 나은 나라가 되리라는 희망을 얻고,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의 시민들은 그 도시가 더 나은 도시가 되리라는 희망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이 미국인이든 아니든, 소수 인종에 속하든 다수 인종에 속하든, 혹은 부자이든 가난하든 간에,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함으로써 당면한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면 이 세상 왕국을 통해 그러한 소망을 이루고자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일을 오직 왕이신 분께 친히 맡겨드려야 한다. 그 왕께서 자신의 하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세우신 것이 바로 지역 교회이다. (30-31)성경의 진리를 가상 공간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으니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저 정보를 주고받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더욱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그저 온라인 상으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진리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실현되는 모습을 느끼거나 경험할 수 없고, 그 증인이 될 수도 없으며, 그로 인해 우리의 믿음도 굳건히 서지 못하게 되고, 형제자매를 묶어주는 사랑의 끈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가상 교회라는 말 자체가 자가당착이다. … 따라서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삶은 다운로드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 보고, 듣고, 참여하고, 함께해야만 하는 것이다. (65-67)물론 교회가 함께 모이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으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는 참 번잡스러울 수 있으며 사랑도 그러하다.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는 대화는 두려운 일이며 사랑도 그러하다. (67-68)심지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깎아내리며 말하는 설교자가 담대한 진리의 수호자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분기탱천한 듯 소리치지만 실상 자신에게 급여(목회 사례금)를 주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도전을 안겨주지 않는다. 사실 그것이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마주하는 가장 큰 시험대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거슬리게 하지 않으면서 오직 성경의 말씀만 설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과 가족의 생계와 주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어렵지만 진실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78-79)교회가 이런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기 어려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 말씀과 다른 것들을 저울질하려 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가 종식됐을 때 가장 강력하게 부상할 교회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온갖 잡다한 말을 늘어놓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능력 있게 설교하는 교회일 것이다. (81)하지만 설교를 듣는 것은 그저 예수님과의 개인적 동행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교회 안에 천국의 문화를 형성하고 천국의 도성을 건설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설교는 함께하는 삶과 관련된다. (85-86)교회 멤버십은 안전한 양 우리를 제공한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목자가 되신다. 교회 멤버십은 영적 자양분의 공급을 제공한다. 이 자양분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데서 비롯한다. 그뿐 아니라 교회 멤버십은 가족을 제공한다. 그곳에서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장자이신 가족의 상속자가 되어 그 가족의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왕이신 거룩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지게 된다. (100)이처럼 교회 멤버십 개념은 신약의 서신서 안의 거의 모든 곳에서 기정 사실로 전제되어 있다. 다만 이를 표현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교회 멤버십은 한 가정의 멤버가 되는 것과 같다. 거기에는 가족으로서의 의무가 따른다. 교회 멤버십은 또한 한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타의 수많은 지체들과 역동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수반한다. 성경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모든 비유는 멤버십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교회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103-104)우선 지금 당장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부분은 교인이 되는 것은 수동적인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신분이 아니다. 그것은 사적인 친목 모임, 소비자 단체, 혹은 고객 보상 프로그램 등에 가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감당해야 할 일정한 직무이다. 당신은 직무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당신은 혼신을 기울여 이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당신은 선한 영향을 미칠 방법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이번 주에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가? 당신은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되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게으름만 피우고 있는가? (106-107)하나님을 거스르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으면 사랑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지 몰라도 실상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122)학대가 악한 것이라면 그것을 묵인한 교회도 적어도 그만큼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가 세상 속의 온갖 불의를(학대와 폭행을 포함하여) 고치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장소가 되도록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촉구가 교회에 유익이 되고 좋은 것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감사하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를 단호하고 신속하게 다루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교회들도 있다. 그런 교회들은 해당 상황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음으로 인해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안 좋은 경우라면 아예 문제 자체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교회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교회를 저버리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로 하여금 성경을 펼쳐, 학대를 미연에 방지하거나(최선책) 혹은 학대 발생시 바르게 대응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인 제자도와 권징의 문화를 꽉 붙잡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서 겸손과 사랑과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권징을 행하는 교회는 애초에 미투 운동이나 처치투 운동 같은 것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126-127)그리스도의 몸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하나 됨의 교제를 누리는 곳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또한 서로를 필요로 한다. … 이런 교회를 지향하면 가장 큰 교회를 가장 빨리 세울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가장 지속가능한 길이다. (142-143)얼핏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투표하고, 또 죄를 짓는 교회를 찾는 것이 더 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교제하는 곳을 떠나지 말고 고수하는 편이 훨씬 더 유익하다. … 세상의 이목을 끄는 교회를 발견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닮은 교회를 찾으라. (143-144)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의 문화를 구속하고(redeeming)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너무 몰두하다 보면, 자기 집안을 바로 세우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의 곳곳에서 힘주어 말했던 것처럼, 교회가 먼저 새로워진 문화, 변화된 천국의 도성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 그들의 사랑, 선행, 정의에 대한 갈망이 온전한 형태로 밖으로 흘러넘치게 된다. 그때 세상에서 갈 곳을 잃은 시민들과 거기서 혁명을 일으키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 피난처를 찾아 우리의 대사관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158-159)정직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의 유익을 구하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가르침이나 교정은 훨씬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반대로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의 말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모든 말을 의심할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에는 신뢰받기에 합당한 장로들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기꺼이 신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175)그곳을 떠나 당신이 충분히 신뢰할 수있는 목사가 사역하는 교회를 찾아가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당신은 목사가 당신에게 도전이 되는 조언을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확인시켜주기만 하는 교회를 찾으려 하지는 말라. (177-178)나는(콜린) 새로 교인이 된 분들과 이야기할 때 한 가지 큰 약속을 한다. 아직까지 내가 거짓말했다고 불평하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내가 한 약속은 이것이다. 만일 그들이 주일 예배와 수요 가정 모임에 꾸준히 참석하여 서로를 돌보는 일을 한다면, 교회로부터 얻고자 하는 것은 전부 다 얻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성장이요, 우정이요, 성경적 지식이면서, 또한 실제적인 도움일 것이다. 이 두 가지 단순한 과제를 이행함으로써 그들은 교회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된다. (193-194)당신은 생각보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존재다.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에게 그들이 얼마나 필요했었는지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이다. (194)원제: 20 Quotes from ‘Rediscover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개혁된실천사■ 여기를 클릭하시면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
교회의재발견
가정이 무너진 시대에 교회는
by 김형익
2022-10-17
우리나라의 심각한 저출산율에 대한 글을 쓰면서, 우리 사회의 그늘진 사각지대를 보여주는 여러 지표를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다. 전체 자살률은 2003년 이래 줄곧 1위 자리를 수성하고 있다.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살다가 임종을 맞고 한참 지나서야 주검이 발견되는 고독사 문제도 심각하다. (고독사는 1990년대 일본에서 나 홀로 죽음이 급증하면서 생긴 신조어다.) 우리나라의 독거노인 비율은 지난 7년 동안 매해 20퍼센트 선을 유지하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인구 중 혼자 사는 사람이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는 말이다. 독거하는 사람은 비단 노인만이 아니다. 다양한 이유로 사회 진입에 어려움을 겪거나 장기불황 등 상황적 이유로 원치 않게 홀로 살게 된 2, 30대 인구도 지속해서 늘고 있고, 그만큼 2, 30대 청년 고독사 비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가정이 필요한 사람들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 일반 자살률, 독거노인 비율, 1인 가구 비율, 고독사 등의 통계들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그 원인으로 저출산에 따른 외동 자녀 증가, 장기간의 경제 침체와 실직률 증가, 개인주의 문화 확산, 독신(비혼) 및 이혼 증가 등을 꼽는다. 그러나 나에게 이 통계가 보여주는 것 하나를 말하라면, 그것은 가족의 붕괴다.여기에 더해, 보육원에서 성인이 되어 자립하게 된 청년들을 주목하고 싶다. 다양한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부모를 떠나 보육원에서 자라게 된 아동, 청소년들이 있다. 그들은 만 18세가 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보육원에서 나와야 한다. 그나마 지난해(2021년) 개인 의사에 따라 보육원에서 만 24세까지 머물 수 있도록 기간을 연장하는 법안이 통과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통계를 보면, 해마다 보육원을 나와 자립하는 청년은 2,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지자체별로 상이하지만, 이 청년들은 자립지원금 명목으로 최소 500만 원에서 1,500만 원을 받고 홀로서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보육원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가 갑자기 홀로 사회 속으로 뛰어들게 된 앳된 청년들이 느끼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은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최저임금에 못 미치고, 이들 중 2/3는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여 살아야 한다. 이들에게 대학 진학은 꿈같은 이야기다. 정착금으로는 한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그러다 보니 보육원에서 자립한 청년 10명 중 8명은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고, 자살을 생각해 본 청년의 비율은 50퍼센트에 달해, 그 연령대의 일반 청년들이 14퍼센트인 것과는 격차가 크다. 두 달 전 내가 살고 있는 광주의 보육원에서 자립한 두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18살, 19살이었다. 한 청년은 자립지원금 대부분을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로 지출했고,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보육원 관계자에게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마음이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가족처럼 기댈 수 있는 공동체였다. 고독 사회우리 사회는 개인적으로는 고독의 병리적 현상을, 사회적으로는 가정 붕괴의 참혹함을 경험하는 고독 사회다. 성경을 믿는 신자로서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볼 때 아프고 슬프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한 결과 아담의 모든 후손이 예외 없이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7). 하나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창조한 것이 아니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평가하신 것은 아담의 독거였다(창 2:18). 지금도 죄와 저주로 말미암아 인간이 극도의 고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실 리 없다. 아담을 위해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두 사람을 부부라는 가족 공동체로 묶어 주셨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주심으로써(창 1:28), 가정을 통한 번식과 공동체의 형성을 의도하셨다. 영원히 공동체로 존재하시며 세 위격 안에서 최고의 기쁨을 누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기쁨을 주어 누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공동체로 창조하셨다.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고독과 외로움을 모든 인간의 실존 속에 가져왔고,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겪고 살아가는 죄와 비참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고독사, 노인 빈곤율, 노인 자살률, 보육원 자립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모두 고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인간 실존과 연결된다. 본질상 타락한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는 고독 사회이고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개인주의라는 시대 정신과 문화적 흐름은 외로움을 증폭할 뿐이고, 어떤 정부도 현상에 대한 후속 조치를 넘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독거노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을 개발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이것은 기술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세상이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례다. 고독과 외로움의 문제는 인간의 죄와 관련된, 영적 근원을 가진 문제이기에 고도로 발달한 세상이라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정직하고 깊숙하게 우리가 사는 고독 사회를 바라본다면, 절망 외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가정, 교회하지만 희망이 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죄와 죄책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성령 안에서 결속하는 새로운 가정으로 만드셨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단순히 개개인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깨어진 관계와 무너진 가정을 구속하셨다. 그것이 교회다. 주님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는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했다(엡 2:19). 그리스도께서 가정이 무너진 세상에 오셔서 가정을 구속하셨다는 소식은 외로움에 사무친 인간과 고독 사회에게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고 깨어진 모든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고 깊은 결속을 통해 교회의 하나됨을 경험하게 하신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 그 저녁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실 구속이 가져올 교회의 본질을 보여준다(요 13:34-35). 교회는 신자들이 단지 예배를 위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느슨한 클럽이 아니다. 교회는 외로움을 가속하는 세상 문화를 거슬러, 결속을 만들어내고 관계의 깊이를 추구하며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를 돌보는 가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초기 교회와 21세기 교회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에서 초기 기독교가 박해 속에서도 고속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 2세기 중반과 3세기 중반에 약 15년 동안씩 로마제국에 창궐했던 역병의 상황을 지적했다. 두 차례의 역병은 때마다 제국 인구의 25-35퍼센트를 앗아가는 가공할 역병이었다. 접촉을 통해 병이 전염된다는 사실 때문에, 부자와 의사들은 모두 도시를 떠났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병에 걸린 가족을 돌보지 않고 떠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버려진 병자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감염되어 죽기도 했지만, 감염병으로 인한 그리스도인의 사망률은 비그리스도인의 1/3에 불과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돌봄으로써 죽음 대신 회복을 경험했던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병자들을 돌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은 로마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이 일로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코로나 팬데믹에서 경험했듯이, 고대 세계와 달리 현대의 전염병은 정부와 의료기관이 감당하고 있어서 초기 교회와 같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두드러진 역할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 같이 관계와 가정이 무너진 고독 사회에서 교회가 주님이 구속하신 가정으로서의 교회를 회복하고 그렇게 존재한다면, 외로운 이들을 두 팔 벌려 환대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결속을 보여준다면, 21세기의 세상에 교회보다 더 충격적인 메시지가 있을까? 보육원에서 자립한 청년들을 돕는 한 사역자의 말이다. “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보니 매주 한두 번이라도 꾸준히 연락하며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이들에게는 ‘사회적 가족’을 만들어줘야 한다.” 환대의 전통 속에서 교회는 외로운 노인과 외로운 청년들의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까?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희생한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우리가 현세에서 누릴 백 배의 가족은 교회다. 가정이 무너진 세상에서 서로 사랑하는 하나님의 가정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세상이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복음이다. 두 달 전 내가 사는 도시 광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청년이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고독
고독사
가정
고독사회
외로움
강화를 신앙의 섬으로 만든 시루뫼 공동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강화교산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2-10-15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조선을 넘보는 제국주의 열강이 조정을 향해 오다가 맞닥뜨리는 곳, 그곳은 강화도이다.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강화도, 이 섬은 조선 정부의 최전(最前)의 보루였다. 이 길목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을 넘지 못하고서는 조선의 심부(深部)로 향할 수 없었기에 미국의 함선도, 프랑스의 함선도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과 결전을 벌여야만 했다. 프랑스가 침략한 병인양요(1866)도, 미국이 도발한 신미양요(1871)도 모두 강화도가 그 치열한 전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강화 도민들에게 양인은 모두 오랑캐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미 더 이상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두 양요를 통해서 확인하게 되면서 조미통상수호조약(1882)과 조영통상조약(1883)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이듬해인 1884년 알렌 선교사를 필두로 양인 선교사들이 연이어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의식에는 서양 오랑캐로 각인되었기에 선교사들이 들어왔어도 그들의 여정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강화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1893년에 처음 찾아와 문을 두드렸던 존스 선교사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1893년이면 이미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여행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시점이지만, 그래도 강화도 입도(入島)는 불가능했다. 강화유수와 도민들이 양인들이 섬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의 은혜를 깨달은 강화도 출신의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승환이 그였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자마자, 그는 일거리를 찾아서 인천으로 나왔다. 인천에서 새로운 세상 물정을 경험하였고, 인천 번화가에서 주점을 열어 큰돈도 벌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하면 더 불릴까 궁리하다가 선교사가 시작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돈을 불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갔지만, 오히려 교회에서 곗돈을 잃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게 돈은 잃었지만, 그는 교회에서 존스 선교사를 만났고, 이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으며,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것은 한사코 거부했다. 자신이 주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고,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하나님을 모르는데 혼자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죄스럽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이승환은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되었다. 이승환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점을 처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게 했다. 하지만 세례를 받게 할 길이 없었다. 하여, 이승환은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인천과 황해도 지방의 선교를 책임지고 있는 존스 선교사에게 어머니의 세례를 요청했다. 하지만 강화도에는 양인이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승환은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과 구원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존스 선교사를 전세 낸 배에 태우고 고향마을인 시루뫼(甑山)로 향했다. 하지만 향리에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토호인 초시 김상임이 있었다. 그는 결코 자기 마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소리쳤다. 당시 김상임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방의 유생들과 함께 사실상 어른 노릇을 하면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게다가 시루뫼 마을 대부분이 그의 땅이기에 마을에서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하는 수 없이 이승환은 묘책을 생각해 냈다. 존스 선교사를 태운 배를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 앞산 너머 갯벌에 정박해 놓고 마을로 들어와 물때를 기다려 밤이 깊었을 때 어머니를 모시고 앞산을 넘었다. 그리고 바닷가에 이르렀을 어머니를 등에 업고 멀리 갯벌에 정박한 배로 향했다. 쉽지 않은 발걸음이다. 혼자 걷기도 어려운 갯벌을 어머니를 등에 업은 채 걷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환의 열정은 기어코 어머니를 뱃전에 앉혔다.존스 선교사는 뱃머리에 선 채 멀리 어머니를 업고 배를 향해 다가오는 이승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비록 입도는 할 수 없었지만, 이승환의 모습을 보면서 훗날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당장은 외세와 양인들을 배척하지만, 복음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을 때 한국 교회는 분명 그 은혜를 담아내는 교회가 될 것을 확인하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간절한 마음으로 확인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이 그 복음에 담긴 영원한 소망을 보았기에 혼자만 그 소망의 길을 갈 수 없어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갯벌을 걷고 있는 이승환의 모습에서 존스 선교사는 분명 한국인과 한국 교회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마침내 뱃전에 앉은 이승환의 어머니는 문답을 거쳐 어렴풋한 달빛 아래에서 선상 세례를 받았다. 존스 선교사의 평생 사역에서 시루뫼 마을 앞 갯벌에서 행한 세례식만큼이나 극적인 순간이 또 있었을까? 이것은 강화도 최초의 세례식이었으며, 오늘의 강화도가 복음의 섬이 되는 시작이었다.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한 선상 세례를 시점으로 강화도 복음화를 위한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존스의 능력도, 이승환의 효심 때문도 아닌 성령님의 역사가 드러난 것이리라. 철저하게 양인들을 배척하는 땅 강화도, 그중에서도 가장 소외된 북쪽의 한 촌락 시루뫼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시루뫼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는 동과 서로 강화도 해안도로를 따라서 전역을 퍼져나갔고, 강화도는 복음의 섬이 되었다. 그렇게 시루뫼에 믿음의 씨앗이 떨어진 다음에도 걱정은 이어졌다. 예배를 할 수 있어야 했지만, 마을에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환은 묘책을 찾아야 했다. 당장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니 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존스와 함께 사역하고 있던 전도부인 이명숙과 백헬렌을 이 마을로 오게 해서 어머니의 신앙을 양육하면서 마을에 복음을 전하게 했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이 더해지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또한 선교사 입도를 결사반대했던 초시 영감 김상임도 존스 선교사를 만나면서 개종하게 되었고 끝내는 시루뫼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스 선교사는 김상임을 인천 우각동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개설한 신학회에 참석하게 하여, 훗날 시루뫼 공동체의 전도사가 되어 평생을 이 공동체를 섬기게 했다. 그렇게 세워진 것이 시루뫼의 역사를 잇고 있는 교산(橋山)교회이다. 시루뫼에서 시작한 작은 공동체는 강화도의 모교회가 되어 200여 교회와 강화도를 신앙의 섬으로 만드는 산파 역할을 했다.예배당 이야기교산교회는 선교 초기인 1896년에는 초가를 한 채 매입해서 예배 처소로 사용하다가 1915년에 처음으로 초가 예배당을 지었다. 이때 지은 예배당에서 시루뫼 공동체는 일제 강점기까지 이겨내고 해방을 맞았다. 6.25사변이 휴전을 맞으면서 강화도 지역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원조가 감리교 본부로부터 전달되면서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해야겠다는 의지가 낙후된 지역인 이곳에서도 예배당을 짓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958년 4월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30평 규모의 석조 예배당이다. 해방 이후에 지어진 예배당들이 주로 석조건물인 것을 생각하면 시대적 특징을 잘 간직한 건물이기도 하다.이 예배당이 지어지기까지는 큰 희생이 있었다. 김봉일 성도의 딸이며 김예기 목사의 어머니인 김리브가 권사가 옥답 1,000여 평을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드렸고, 김용기 탁사부장은 예배당 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가능했다. 또한 예배당 완공과 함께 문순만 권사가 부흥회를 통해서 온 가족이 인가귀도(引家歸道) 됨을 기뻐하면서 풍금 한 대를 헌물로 드렸다. 이때까지 이 교회에는 풍금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온 교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봉헌감사 예배를 1962년 2월 20일에 드렸다. 그리고 이 건물은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110주년 존스기념예배당이 2003년 봉헌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강화교산교회
시루뫼공동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by 복음과도시
2022-10-15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조선 유교의 중심을 흔들다안동교회형과 아우, 아버지와 아들이 지켜낸 교회여수 장천교회선교사의 희생이 맺은 열매순천중앙교회“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목포양동교회호남 선교, 태동하다군산구암교회전주를 깨운 종(鐘)전주서문교회내륙 선교의 길목을 트다춘천중앙교회무심천변 아픈 역사는 비(碑)가 되어청주제일교회역사와 지리의 단절을 견뎌내다철원제일교회작고 외진 교회, 복음과 계몽의 첨병 되다무지내교회서해의 복음 등대백령도 중화동교회성도들의 귀감으로 세운 충청권 선교의 교두보공주제일교회민족 지도자의 산실로 서다새문안교회 아름답다, 고도孤島의 예배당서도중앙교회 근대사를 품다승동교회“눈 덮인 작은 예배당”정동제일교회 강화를 신앙의 섬으로 만든 시루뫼 공동체강화교산교회
우리 교회의 역사를 온전히 남기려면
by Caleb Morell
2022-09-25
워싱턴 DC에 있는 캐피톨 힐 침례교회는 갈등의 수렁에서 빠져버렸다. 53 대 52로 갈라진 채 몇 달째 계속된 교인 투표에 다들 지쳤고 담임 목사도 한계에 다다랐다.언제? 1884년.무슨 문제로? 두 번째 교회 건물의 위치와 차입금 규모.담임 목사가 다수의견에 거부하자 교인 60명이 그의 사임을 촉구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1884년 10월 23일, 담임 목사는 곧장 그렇게 했고, 다른 교인 33명를 데리고 나가 겨우 한 블록 반 떨어진 곳에 라이벌 교회를 시작했다.교회 설립 6년 만에 캐피톨 힐 침례교회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되었고, 채무에 시달렸고, 교인 수는 60명 선을 넘지 못했다. 교회의 앞날에 실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그러나 14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주님께서 이 교회에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음을 알고 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르는 내내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보존하시는 일을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해 오신 이 일을 알 수 있는 건 오로지 이 교회의 초기 이야기가 세심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충실한 기록당신이 지역 교회 목사나 교회 행정가라면, 당신은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비범한 일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그 이야기를 전하는 일차 자료의 금광에 앉아 있다고 할 수 있다.그렇지만 당신의 교회의 역사가 5개월이든, 5년이든, 50년이든 상관없이 지금 문서를 어떻게 보존하고 정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미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해 하신 일을 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 나는 최근에 캐피톨 힐 침례교회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수천 페이지의 메모, 회의록, 기사, 및 편지를 일차 자료로 하여 이 작업을 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이러한 문서를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실감했다.교회가 그들의 과거에 접근할 수 없다면, 그 교회는 집단 기억 상실에 빠진다. 교회의 기록을 추적하는 것은 미래 세대가 우리의 실패로부터 배우고,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도록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어떻게 보관할 것인가?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지역 교회의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실행에 옮겨야 할 일은 무엇일까? 여기 그 일곱 가지 핵심 사항이다.1. 회의록 보관에 주의를 기울이라.당신이 새로운 교회 개척자이든 100년 역사의 교회이든 상관없이 교회의 모든 리더십 모임에 대한 의사록을 작성해야 한다. 당신 교회가 어느 교단에 속해 있든, 모든 교회에는 결정을 내리는 심의 기구가 있다. 그 회의의 의사록은 교회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창이 된다.2. 교인 인터뷰 기록을 축적하라.일반적으로 교회에는 교인이 되는 절차가 있다. 종종 여기에는 신청자가 간증과 이전 교회 경험을 나누는 인터뷰도 포함된다. 새 회원의 허락을 받아 주의 깊게 기록하고 사본을 보관하라. 이 인터뷰는 미래 세대가 그 교회를 이룬 교인들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3. 설교 원고와 녹음을 보관하라.많은 목회자가 자신의 설교 노트와 녹음을 보관하고 있지만, 그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다른 교회로 옮길 때 그 원고는 가족이 보관하고 교회에 넘겨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은 교회 기록 보관소에 보관할 설교 원고와 녹음을 추가로 복사하여 그 교회의 역사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그 목사가 떠난 뒤에도 미래의 성도들은 복음이 어떻게 충실히 전해졌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4. 회원 명부를 꾸준히 갱신하라.많은 교회에서 교인 명부를 목회 및 회중 기도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회원의 연락처 정보를 보관한다. 교인 명부는 미래의 역사가들이 연구에 유용한 교인 이름, 가족, 주소 및 회중에 대한 기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5. 원로 교인을 인터뷰하라.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회중의 연로한 성도들을 정기적으로 인터뷰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그 어르신들의 삶의 이야기와 교회 경험을 청취하라.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교회 지도자와 그 이야기를 듣게 된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가 될 것이다. 나이 든 교인에게 그의 이야기가 회중을 격려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미래에 그 교회 역사의 기록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목적을 위해 인터뷰 양식을 만들고 메모를 작성하고 녹음하고 인터뷰 내용을 복사하여 보관하라.6. 종이 사본을 보관하라.대부분의 기록이 디지털화되고 있지만, 중요한 문서의 인쇄본도 교회 사무실에 보관하라. 직원이나 목회자가 바뀔 때 디지털 문서는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직원이 인수인계할 때 물리적 문서는 그 건물 밖을 벗어날 가능성이 매우 적다.7. 수정을 삼가라.마지막으로, 교회의 결점을 드러내는 기록이라 할지라도 가감을 삼갈 것을 권장한다. 복음은 우리 자신을 위선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는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보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구속의 드라마처럼 당신의 교회 이야기에는 영웅과 악당, 실수와 실패가 있을 것이다.회의록과 교인 이야기를 기록할 때 불편하거나 불행한 장을 숨겨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 미래 세대는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델라웨어 침례회(Delaware Baptist Association)의 역사를 저술한 챔프 손턴이 얼마 전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목표가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이라면, 어두웠던 시기의 이야기도 해야 주님께서 하신 그 일이 더욱 돋보일 것이다.”당신은 그 열매를 결코 볼 수 없을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를 문서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간단한 단계를 따르면 미래의 지도자와 지역 교회의 교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역사 보존이라는 선한 일은 희망의 행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계속 사명을 맡겨 주실 것이라는 희망, 미래 세대가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희망,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변화된 공동체를 보존하셔서 수십 년 또는 수 세기 후에도 함께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일인 것이다. 시편 기자가 말했듯이,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원제: 7 Simple Steps to Preserve Your Local Church’s Histo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지역교회역사
개교회사
통합적 문화관을 섞어서 적용하라
by 고상섭
2022-09-23
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교회의 문화참여에 대해 두 개의 ‘아니요’(No)와 하나의 ‘예’(Yes)를 말한다.“첫째, 전적인 변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니요’이다. 둘째, 문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니요’이다. 셋째, 문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이다.”볼프가 말하는 변혁과 적응이 아닌 ‘참여’라는 말은 문화를 지배하는 것(변혁)과 문화를 버리는 것(적응) 사이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안에 머물면서 다르게 사는 삶”을 말한다. 즉 세상 문화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통해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센터처치, 493).사도 바울은 신약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가지는 이중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엡 1:1)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에베소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말하면서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라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교회라는 두 영역을 어떻게 조화시키는 것이 문화에 참여하는 길일까? 팀 켈러는 세상과 교회의 네 가지 관계를 통해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문화참여를 해야 할지를 소개하고 있다. 1.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의 모델이 아니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네 가지 모델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다. 각 모델은 저마다 성경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모든 성경의 진리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교단이나 성격에 맞는 한 가지의 모델을 중심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모델 각각의 장단점을 모두 이해할 때 비로소 세상과 올바른 소통을 이룰 수 있다.그러나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서 통용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의 가르침은 네 모델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 하나 ‘변혁주의 모델’을 기독교 세계관이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바른 세상과 소통을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의 내용을 정의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변혁주의 모델과 동의어가 아니다. 변혁주의는 기독교 세계관 중 하나의 모델일 뿐이다. 2. 각 모델은 모두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D. A. 카슨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모델을 연구하고 나서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아우르는 통시적이고 동시적인 지배 모델은 없다”라고 말했다. 즉 네 모델은 전부 성경적이지만, 성경 전부를 다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은 아니라는 것이다. 각 모델은 그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1) 변혁주의 모델변혁주의 모델(Transformation Model)은 한국의 복음주의권 교회에서 가장 많은 모델이며,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정적으로 사역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세계관이라는 지적인 개념에 너무 치우친 단점이 있고, 교회와 공동체가 배제된 개인의 비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구호에 매몰되어 승리주의, 자기의(self-righteous), 그리고 과도한 확신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양산한다. 2) 적절성 모델변혁주의 모델과 마찬가지로 적절성 모델(Relevance Model) 안에도 서로 다른 그룹들이 혼재하고 있다. 이 모델의 장점은 일반은총을 극대화하는 공공선을 추구함으로 세상과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다. 그러나 공공선을 복음의 영역까지 확대하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과 영혼 구원을 동일선상에 놓기도 한다. 복음이 분명하지 않은 교회들도 많기 때문에 NGO 단체와 교회의 차별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3) 반문화주의 모델반문화주의 모델(Counterculturalist Model)은 세상과 다른 구별된 대조 사회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교회의 순결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교회 밖의 문화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에 제국과 권력, 자본주의 시장 등은 모두 사람들을 억압한다고 간주한다. 이런 관점은 정치와 비즈니스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하고, 주변 문화의 영향에 대해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4) 두 왕국 모델하나님이 전 세계를 통치하시지만 두 왕국을 별개의 방법으로 통치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왕국 모델(Two Kingdom Model)은 하나님은 세상을 일반은총을 따라 통치하시고 교회를 특별은총에 따라 통치하신다고 믿으며, 기독교적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성도로 교회 밖에서는 건전한 시민으로 사는 삶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은총의 타락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단점이 있고, 사회의 선은 모두 자연 계시로 생긴 것으로 판단한다. 또 중립적인 기초 위에서 신앙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률, 정부, 예술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3. 계절에 맞게 각 영역의 장점을 섞어서 활용하라 도표의 가운데 있는 원은 각 모델의 중요한 키워드가 제공되어 있다. 그 키워드를 모두 섞어서 자신의 영역에 맞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우리말 역간 ‘센터처치’에는 그림 안에 따로 표기가 없지만, 원서에는 “blended Insights”라고 기록되어 있다. 각 모델의 장점을 섞어서 활용하라는 것이다.네 가지 모델은 모두 성경적이지만 모든 환경에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의 계절을 살펴보고 그 상황에 맞는 세계관을 추구해야 하고 그것을 상황화라고 말한다. 교회가 적대적일 때는 교회의 순결을 강조하는 반문화주의 모델이 적절해 보인다. 또 핍박을 받지만 성장하는 시기에는 변혁주의가 어울린다. 교회와 세상의 가치가 비슷한 시기에는 두 왕국모델이 필요하다. 교회가 매력을 잃어가는 시기에는 적절성 모델을 통해 공공선에 이바지함으로 문화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계절 상황 적절한 모델 겨울 교회와 세상이 적대적일 뿐 아니라 교회가 매력이 없고 영적으로 약해진 시대 반문화주의 봄 교회가 핍박을 받지만 성장하고 있는 시기 변혁주의 여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시기 두 왕국 가울 교회가 매력을 점점 읽어가는 시기 적절성어떤 모델이 좋은가를 따지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 교회와 현실은 어느 시대에 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모델들을 섞어서 활용하면 된다. 4. 자세와 몸짓을 가지라 팀 켈러는 네 가지 문화관 중 자신에게 익숙한 한 가지를 중심으로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문화관을 활용하라고 권면한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하나의 모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계절에 맞춰 세 가지의 다른 문화관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앤디 클라우치는 이것을 자세(Posture)와 몸짓(Gesture)으로 설명했다. 문화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세’라고 하고, 다른 모델로부터 나오는 즉흥적인 움직임을 ‘몸짓’으로 설명했다. 문화에 대한 하나의 입장은 움직이지 않는 자세이지만, 몇 가지 다른 모델들을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몸짓이다. 세상과 교회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러나 각 세상 속에 흐르는 문화관을 분석하고, 그 문화에 맞는 교회의 모델들을 접목해 가는 상황화의 과정을 통해 복음은 더욱 세상 속에서 아름답게 역사하게 될 것이다. 네 가지 문화관을 모두 섞어서, 계절에 맞는 적절한 방법들을 생각해 낼 때 복음은 이 시대 속에서도 역동적으로 역사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사계
기독교세계관
변혁주의
반문화주의
두왕국
적절성
교회와 SQ
by 최창국
2022-09-03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녀가 살던 시대 속에서 ‘영적이지 않아도’ 충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영적이지만’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더 나은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영성이 없는 지도자보다 지성이 없는 지도자가 더 위험하다는 그녀의 말은 그 시대를 향한 예언자적 진술이었다. 그녀의 말은 영성이 있다고 하면서 지성을 외면하는 사람들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녀가 영적 지도자들의 지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역으로 지성의 홍수 속에서 영성을 갈망하는 시대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요즈음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리 스트로벨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1) 교회 다니는 그리스도인들(Churched Christians). (2) 교회 다니는 비그리스도인들(Churched Non-Christians). (3) 교회 다니지 않는 그리스도인들(Unchurched Christians). (4) 교회 다니지 않는 비그리스도인들(Unchurched Non-Christians)이다(Lee Strobel, Inside the Mind of Unchurched Harry and Mary 참조).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보다 영적 의미와 가치에 더욱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님은 진, 선, 미의 궁극적 실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생동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의 길, 선함의 길, 그리고 아름다움의 길을 추구하는 데 더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헨드릭스는 교회가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서 성장을 가져오도록 안내하기보다는 많은 프로그램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하였다. 영적으로 굶주린 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이 교회 밖에서 하나님을 찾기 위해 떠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William Hendricks, Exist Interviews: Revealing Stories of Why People Are Leaving the Church, 9). 요즈음 한국 교회의 본질적 문제는 SQ(Spiritual Quotient, 영성 지능)의 문제와 깊게 관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SQ는 우리로 하여금 선과 악을 질문하게 하고, IQ와 EQ를 통합하며, 제한된 조건을 초월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게 하는 인격이다. IQ가 낮으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EQ가 낮으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이방인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SQ가 낮으면 존재 자체가 불구가 된다. SQ가 빈약하면 권력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인습에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물질주의와 편협한 자기중심성에 빠져 버리게 된다. 한국 교회가 깊이 던져야 할 질문은 교인 수도, 예배당 크기도, 현란한 설교도, 권력도 아니다. 교회가 깊이 성찰하며 던져야 할 질문은 SQ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어느 목회자가 감옥에 가보니 믿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자신의 독자 외아들만 믿을 수 있다고 외치면서 세상보다 못한 방식으로 세습을 주장하고, 성도들을 무기 삼아 교회 부동산에 대한 과도한 재개발 비용을 받아내어 사회의 혐오 대상이 되어도 성령의 역사라고 외치고 있다. 교회를 정치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도 하다. 교회는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보수적이어야 하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에는 개혁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교회는 복음으로 세상을 끊임없이 개혁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영적 의미와 삶을 추구하다 소천하신 목사님도 있다. 바로 엄두섭 목사님이다. 엄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졸업 후 나주 공산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엄 목사님이 목회를 시작했을 때, 당시 산중파 지도자였던 이현필 선생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교회 내에 팽배했다. 이 무렵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던 대부분의 성도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끝까지 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다가 죽음의 위험에 처한 미국 여선교사가 있었다. 이때 어려움에 처한 여선교사를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이 구출하였다. 산중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삼십 리 길을 맨발로 오가면서 궤짝에 여선교사를 숨겨서 지게에 지고 번갈아 가면서 구출하였다. 엄 목사님은 가장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삶 속에서는 이기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고민하게 된다. 그 후 서울에서 목회하시면서도 나주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여정 속에서 엄 목사님은 목회자로서 먼저 자신의 영적 성숙과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찰을 위한 장으로 한국 개신교 최초로 경기도 포천에 은성수도원을 설립한다. 평생 청빈의 삶과 기도와 순전한 영적 삶을 실천하다가 소천하였다. 엄 목사님은 은성수도원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신학생들의 영성 훈련을 위해 모 신학대학원에 기증하셨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소개된 두 목사의 본질적인 문제는 신학적 지식이나 종교의 정치 이데올로기화도 아니다. 바로 SQ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SQ가 결여된 종교적 행위는 오만, 야망, 지적 교만 등과 같은 무신론의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 이러한 무신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우상화하고 섬기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날처럼 어떤 신상을 만들어 놓지는 않지만, 우상 숭배 자체는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신상 대신 돈, 권력, 지위, 지식, 종교 등에서 신을 만들어 낸다. 하나같이 다 우리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것들이지만, 이는 흔히 관계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깊은 차원에서 신앙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SQ와 관계된다고도 할 수 있다. SQ는 삶의 의미를 깊이 인식하게 하는 지능과 인격을 말한다. SQ는 종교와 우리의 삶의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의미와 본질적 영혼과 깊이 관계된 지능과 인격과 관계된다. SQ가 높은 사람은 종교 생활과 삶에서 편협함, 배타성, 아집, 편견에 메이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SQ가 높은 사람이 종교적이지 않으면서 영적인 속성을 가질 수 있다. 오스 기니스가 설명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신자’와 ‘비신자’의 구별이 아니다. 진짜 구별해야 할 것은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신경을 쓰는 사람이냐, 아니면 그런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이냐다”(Os Guiness, Long Journey Home: A Guide to Your Search for the Meaning of Life, 24).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간다는 뜻인가? 하나님에 대해 입술로 노래를 하는 것인가? 정규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인가? 성경을 읽는 것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뜻인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신앙이 일상의 생활 방식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을 변화시키기까지 한다는 의미인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단순히 신학적 IQ나 EQ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떤 종교적인 행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SQ가 필요하다. SQ는 의미 추구와 관계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지음을 받았다. 영적인 것은 어떤 세련된 교리 체계나 종교적인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가치와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영적으로 둔하다는 것은 근본적인 가치, 즉 지구와 사계절, 하루 24시간, 우리 생활의 수단과 일상의 의례들, 몸과 그 변화, 성, 노동과 그 열매, 삶의 여러 단계, 죽음 등에 결부된 근본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도나 조하·이안 마셜, SQ, 44). 한국 교회는 그동안 영적인 의미를 예배, 기도, 말씀 묵상과 같은 행위와만 관계시켜 온 경향이 있다. 영적인 것은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관계된다는 것을 간과해 왔다. 깊은 차원에서 보면, 성경에서 가르치는 영적인 의미도 어떤 종교적인 행위와 관련되기보다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방향과 관계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에서 영적 의미도 삶과 관계된다(롬 12:1-2). 영적 예배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 행위와 관계되기보다는 마음 또는 의식의 변화(renewing of the mind)와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마음의 변화는 사고(thinking), 가치(value), 동기(motive), 삶의 방법(method)과 관련이 있다. 바울이 언급한 ‘변화’는, 폴 와쯜라위크(Paul Watzlawick)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차 변화와 비견될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연구했다. 이들은 사람들이 두 가지 변화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일차 변화(first order change)와 이차 변화(second order change)다. 일차 변화에서 사람들은 현 상황에 맞게 기능하거나 적응한다. 즉, 상황에 더 잘 기능하는 것을 배우지만 삶의 의미, 가치, 믿음, 태도, 행동은 변화하지 않는다. 이차 변화는 삶의 의미, 가치, 믿음, 태도, 행동 전체가 바뀐다(Paul Watzlawick·John Weakland·Richard Fisch, Change: Principles of Problem Formation and Problem Resolution, 10). 영적으로 건강해지면 삶의 근본적인 의미, 믿음, 가치, 태도, 행동이 변화되고 성숙해진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장 시급하게 추구해야 할 것은 교회의 IQ나 EQ가 아니라 SQ라고 할 수 있다. SQ가 결여되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불구로 되어 버릴 수 있다. 교회의 SQ가 낮을 때 교회는 자신을 희화화하고 존재 자체가 제한되고 분열될 수 있다.
영성지능
SQ
지성과영성
영성
하나 되기가 왜 이리 힘든가?
by Jon Bloom
2022-08-31
교회 안에서 하나 되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 당신이 내 마음과 같다면, 이 질문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굳이 눈물을 언급한 것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게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교회 내 불화에 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불화는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또 나는 지금 (기독교를 정의하는) 일차적 기독교 교리나 (교단을 구분하는) 이차적 교리 같은 수준 높은 주제에 관한 불일치가 불러오는 분열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불일치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온 교회를 분열시키는 훨씬 더 일반적이지만 또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갈등이다. 왜 이런 갈등이 생기는 걸까? 진지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겸손하고 온화하며 참을성 있게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엡 4:1-3) 당신도 나와 같다면, 이런 분열을 보면서 가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는 “왜 교회 안에서 하나 되는 게 이렇게 힘들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당신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잘못된 가정을 드러낸다. 이 질문 뒤에 숨어 있는 가정은 이것이다(나는 이런 가정을 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하며, 신학적으로 대체로 동의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일치는 결코 어렵지 않아야 한다.’ 이런 가정은 겉보기에는 꽤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꼭 바른 건 아니다. 특히 성경이 이런 가정을 지지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일치는 언제나 어렵다오해하지 말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얼마든지 하나 될 수 있다. 성경은 일치의 경험을 “아름답고 즐거운”(시 133:1) 것으로 묘사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이 되십시오”(빌 2:2).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우리 안에 내재한 죄와의 싸움이 결코 과거보다 쉬워질 거라고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인생의 고통이 견딜 만해질 거라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일치도 이런 사랑의 일부이다)이 과거와 달리 별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인간적으로도 쉬워질 거라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하고 뜨거운 그리스도인들 사이라고 해도 그들 사이의 일치가 결코 과거보다 더 쉬워질 거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어쨌든, 신약성경 안에도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이 서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투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일치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바울의 편지를 읽어야 한다. 다음 사례는 바울이 하나 됨에 관해서 얼마나 자주 언급하는지에 대한 작은 예시이다. · 그는 고린도 성도들의 “분열”과 “분쟁”을 책망한다(고전 1:10-11).·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분쟁과 분열과 파당”의 위험을 경고한다(갈 5:20).· 그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라고 권면한다(빌 4:2).· 그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가르친다(골 3:13). · 그리고 그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라고 권면한다(엡 4:29-31).맘만 먹으면 나는 얼마든지 더 많은 구절을 인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어렵지 않아야 한다는 우리의 가정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일치는 교회 초창기 때부터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치가 어려운 이유일치가 쉬울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없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일치가 항상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교회의 일치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거기에는 수많은 요인이 있다. 심각한 영적 공격을 받는 교회(엡 6:12), 양의 탈을 쓴 이리에게 침투당한 교회(행 20:29),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불신자의 선동에 휩쓸려 “분쟁과 분열과 파당”에 시달리는 교회(갈 5:19-21), 미성숙한 신자들이 당파적 다툼에 유혹받는 교회(고전 3:1-4) 등등을 생각해보라.그러나 수많은 요인 중에서도 왜 교회의 일치가 그토록 어려운지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상위 수준의 요인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향후 누릴 궁극적인 기쁨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 굳이 우리의 하나 됨을 그렇게 힘들게 만드신 걸까? 일치는 우리를 단련한다성경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벧전 2:24).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에게 용서의 선물(그는 “우리 죄를 담당하셨음”)과 거룩함의 선물(“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을 주신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다 큰 선물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하는 선물은 종종 고통이라는 포장에 쌓여서 오는 경향이 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삶을 배우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종종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엡 4:3)을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엡 4:22-24).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따라서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 더 많이 죽고, 다른 사람의 죄를 더 많이 참는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다. 일치는 그리스도를 높인다“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나는 이 구절을 들을 때면 목가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상상하곤 한다. 성경 속, 심지어 사도행전의 첫 장에서도 본 적 없는 낭만적인 기독교 공동체 말이다. 그럼 예수님은 과연 어떤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걸까? 바로 이전 구절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고 하시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꿈꾼 것은 십자가를 품은 공동체, 서로를 향한 희생적인 사랑이 자신을 “종의 모습”을 취하게 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빌 2:3, 7). 일치의 추구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 무엇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또 절정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듯,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처럼 세상을 향해 공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 3:16).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 말자지역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수준 높은 소명이다. 그것은 성화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수단이며, 사랑에 굶주린 세상에서 이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 이 세상이 갈망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 소명에서 실패하는지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그러나 길게 또 종합적으로 보도록 하자. 너무나 자주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것(요 15:4), 거룩함을 위해 애쓰지 않는 것(히 12:14),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것(살전 5:17),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눅 6:27),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지 않는 것(롬 12:14),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을 겪을 때 그것을 온전히 기뻐하지 않는 것(약 1:2)을 생각할 때,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너무 자주 지키지 못하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실패가 불순종의 핑계 또는 변명이 되면 안 된다. 우리 죄를 자백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과 다른 형제의 용서함을 받아 요한일서 1:9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자.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할 수 있는 대로”(롬 12:18)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겠다고 결심함으로, 항상 인내하시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 나타내자.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높은 소명이며, 그렇기에 어려운 소명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빌 1:19)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하지만 그게 정상이다. 하나 됨이란 우리가 품은 목가적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를 세상 속에 나타내는 거룩한 소명이기 때문이다.원제: Why Is Christian Unity So Har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일치
분열과일치
하나됨
교회에 “올인”하는 다섯 가지 이유
by Thom S. Rainer
2022-08-28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데이터가 많다. 출석률이 떨어지고 있다. 새 신자가 줄어들고 있다. 문을 닫는 교회가 늘어나고 있고, 많은 교회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다. Church Answers에서는 지난 2006년부터 Know Your Church라는 설문 조사 도구로 여러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우리는 수백만 건의 데이터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며 그중 많은 것이 정말이지 우리를 실망에 빠트리기도 한다.그러나 교회의 미래가 어둡고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핵심 교인들 사이에서는 더 높은 헌신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높은 헌신 수준이 궁극적으로는 핵심 교인을 넘어 모든 교인으로 확장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헌신적인 교인들이 다른 교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낙관한다.그래서 우리 연구의 일부 역량을 이러한 핵심 교인에게 쏟아 보았다. 왜 그들은 꾸준히 헌신할까? 왜 그들은 더욱더 헌신하고 싶어 할까? 그들의 응답이 우리 모두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 인터뷰에서 그들은 교회에 “올인”하는 다섯 가지 주요 이유를 말했다.1. 교회에 대한 헌신은 철저히 성경적이다.우리가 인터뷰한 핵심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리스도에게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에서 나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직관적으로 그들은 사도행전 2장부터 요한계시록 3장까지의 신약 성경이 지역 교회에 관한 기록이거나 적어도 지역 교회의 맥락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명목상 교인, 곧 헌신 없는 교인으로서는 그리스도께 기쁘게 순종할 수 없다.2. 교회에 대한 헌신은 책임을 낳는다.예루살렘에서 첫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누가는 그들의 첫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행 2:42). 초기 교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 홀로 행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교제”에 힘썼다. 이 교제는 각자 음식을 준비해 와서 함께 나누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이 교제는 서로를 돌보고 서로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적대적인 문화 속에서 살았으며, 그래서 영적 전쟁을 치르면서 살았다(엡 6:10-17). 그들은 서로가 필요했다.헌신적인 핵심 교인들과 인터뷰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똑같은 생각을 그들에게서 들었습니다. 헌신은 일관된 책임감에서 나오면, 그러한 책임감은 꾸준한 교제에서 나온다. 3. 교회에 대한 헌신은 충실하고 깊은 성경 공부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인터뷰한 헌신적인 핵심 교인들은 성경 공부에 대한 헌신을 통해 헌신된 교인으로 성장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세 가지 공통된 성경 공부 방법을 들었다. 첫째, 그들은 개인 연구와 경건의 시간을 가진다. 1년 안에 성경을 통독한다는 계획이 가지고 있다. 둘째, 교회 안의 성경 공부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셋째, 매주 설교에서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우리는 이 핵심 교인 중 다수에게서 팬데믹 기간의 디지털 교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공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을 이구동성으로 성경 공부는 대면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4. 교회에 대한 헌신은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전도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교회가 쇠퇴의 길에 들어서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그러나 헌신된 교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일관된 열정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순종은 혼자서 하면 산발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온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기로 약속할 때 힘 있는 전도가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계획과 책임이 체계를 갖추게 된다. 우리의 연구는 교회에서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성장하고 있는 전도 운동을 확인했는데, 하나님은 헌신된 교인들을 그 운동에서 촉매로 활용하고 계신다.5. 교회에 대한 헌신은 가족들에게도 유익하다.우리는 핵심 교인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가족에 대한 얘기를 꺼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들은 건강한 교회는 결혼생활과 자녀에게 유익하다고 말했다. 일부는 헌신적인 교인일수록 건강한 가정생활을 한다는 기사를 언급하기도 했다.우리는 교회에 대한 헌신과 가정생활 사이의 상호 이로운 상관관계를 계속 연구하면 더욱 희망적인 데이터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연구의 방향을 잡았다.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우리가 아는 가장 기쁨이 넘치고 사심 없는 사람들은 지역 교회에 헌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이다.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이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퍼트릴 것이라 우리는 확신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들이 있다.원제: 5 Reasons to Be ‘All In’ at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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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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