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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빈센트, 너의 삶은 찬란했어.
by 필립 정
2024-03-18
대학 시절 젊은 작가 한 분과 티 타임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그분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느라 어둑해지는 것을 모를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그런데 끝 무렵에 그가 한 말이 내 마음에 덜컥 얹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체기로 남아버리고 말았다. “한국의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작가가 되기 힘들 거예요.” 다음 말이 궁금해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면 삶의 고통이 다 하나님 뜻이라고 믿잖아요. 분노도, 슬픔도, 괴로움도 다 삭여 은혜로 치환해 버리지 않나요? 그래서 점차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는 상상력의 부재가 생겨요. 그럼 어려워져요. 글쓰기가…”이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글쓰기에 치여 사는 목회자가 되었다. 일주일 내내 설교, 성경 공부 원고를 쓰느라 정신없이 살아야 했다. 그 준비 과정이 너무 힘들어 내가 글쓰기라는 불치병을 앓는 환자 같다는 생각을 수없이 해 봤다. 이런 상상력의 빈곤과 부재에서 오는 펜 끝의 머뭇거림을 벗어나려고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그러다 우연히 난 한 화가의 그림에 빠져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져 그를 상상하기 시작했다.빈센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그림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달리는 기차의 경적 소리, 뭉개 구름의 꿈틀거림, 노란 밀밭의 거친 바람 소리, 새벽녘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빈센트에게 가자고 속삭인다. 그런 그가 그립고 그의 이야기가 너무나 듣고 싶어 두 권의 책을 사고 말았다. Van Gogh The Life (Steven Naifeh, Gregory White Smith)와 The Complete Paintings Van Gogh (Taschen)이다. 냉정과 분노 그리고 열정빈센트의 이야기는 그와 그의 어머니와의 해소되지 못한 관계에서 시작된다. 빈센트는 훗날 그의 어머니를 냉정한 여자라고 단정하였다. 빈센트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던 그녀의 차가움은 어디서 왔을까. 빈센트의 어머니 안나는 유럽의 잔인한 종교 전쟁들, 각지로 퍼진 혁명과 각종 전염병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은 가족의 생존자였다. 게다가 친언니의 간질 병력과 빈센트 사촌들의 정신 병력도 목격하였다. 이 불행은 곧 자기 자녀들에게도 나타났다. 첫아들을 바로 잃고 그 후로 낳은 6형제 중 빈센트를 포함해 4명이 정신질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그녀는 평생 불행이 닥칠 것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처럼 살았다.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안나가 빈센트를 위해 한 최선은 종교적 통제였다. 빈센트가 목사관 (빈센트의 아버지는 개혁 교회의 목사였다) 밖에 나가서 가난하고 거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였고 사소한 일 하나에도 규칙을 정하여 의무화하였다. 그 규칙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자책과 회개의 기도를 하게 하여 용서를 받게 하였다. 이유 없이 평탄한 삶이 불편했는지 자주 빈센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삶이 아무 일 없이 잘되는 것은 신의 가호가 아니야. 그래서 이를 드러내어 기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지나친 염려와 통제로 애정이 결핍된 빈센트에게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도 허락되지 않자, 그는 자기감정을 격렬한 분노로 태워버리는 아이가 되어갔다. 어머니 안나의 차가움과 아들의 뜨거운 분노는 서로 섞이지 못한 채 원색의 강렬함으로 남겨지고 말았다.빈센트를 교양 있는 지성인으로 키우고 싶어 하던 안나는 일곱 살의 어린 그를 가톨릭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예상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집에 보내 달라고 떼를 쓰다가 아이들의 귀를 막아 버리거나 소리를 지르다 퇴학을 당해 버렸다. 빈센트가 열한 살이 되자 빈센트의 부모는 그를 다시 한 개혁 교회의 기숙학교로 보냈다. 이때 빈센트는 자기의 심정을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고 밤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그리스도 같았다고 표현하였다. 역시 심하게 담당 교사에게 저항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빈센트의 호기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이 있었다. 그는 자연이 드러내는 색채에 매료되어 버렸다. 그의 그림에 꽃과 풍경이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관심 또한 어머니 안나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안나는 목사관의 정원에 각종 꽃을 심어 가꾸었고 그 꽃으로 집안을 꾸미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빈센트는 안나에게 배운 정원 가꾸기, 꽃꽂이와 수공예, 실내 장식에 열정을 보였다. 좀처럼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목사관을 벗어나 들로 나가 온갖 풀과 벌레를 관찰하고 기록하여 전문가적 경지에 이르렀다. 주위에서는 빈센트가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가 될 거라고 할 정도까지 발전하였다. 훗날 그가 그림의 모티프를 얻기 위해 계속 따듯한 남부 프랑스를 옮겨 다닌 것도 역시 자연에서 강렬한 빛과 찬란한 색을 찾기 위해서였다. 빈센트는 자연을 보면 행복과 창의력이 샘솟아 먹는 것도 잊는다고 할 정도였다.빈센트는 훗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란색과 푸른색, 붉은색과 초록색의 대비를 통해서 무시무시한 인간의 감정과 정열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거절당하고 돌아올 때마다 느껴지던 안나의 차가운 눈빛, 애정이 결핍된 아이 빈센트의 빈 마음을 따듯하게 채워주던 자연의 빛과 색채들은 훗날 들이 되고 꽃이 되어 작품으로 활짝 피어날 수 있었다. 결핍을 채워준 지성과 신앙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그의 열정은 사실 지나친 집착에 가까운 병적인 것이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좌절과 희망의 끝을 잡고 살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의 열정은 쓰레기처럼 버려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온전치 못한 정신을 달래며 10년 동안 900여 점의 작품과 1,000여 점의 스케치를 남길 수 있었을까. 그의 지성 때문이었다.그는 독서와 글 쓰기에도 광적인 열정을 보였다. 그가 글을 몰랐을 때부터 빈센트의 어머니는 그를 책의 세계로 인도하였다. 이 시절 그의 어머니가 자주 읽히고 외우게 했던 안데르센의 동화 ’‘The Story of Mother’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책의 내용은 이렇다. 한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죽음으로 잃는다. 그 어머니는 죽음이 데리고 간 아이를 찾으러 먼 길을 떠난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고 두 눈을 빼 주고 검은 머리까지 백발로 바꾸는 희생으로 그 아이가 있는 곳을 찾아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아이를 데리고 간 죽음의 신 앞에 선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살려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곧 그녀는 아이 살리기를 포기하고 그 아이의 죽음을 택하고 만다. 죽음의 신이 보여준 아이의 미래가 너무나 비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빈센트를 향한 어머니 안나의 불안한 애착을 그대로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책으로 어머니는 자기 마음을 보여주고 빈센트 역시 그 텍스트를 이해하여 글과 그림으로 해소해 내는 지적인 작업을 할 소양이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빈센트의 글쓰기를 보면 그의 독서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자기의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668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글들은 매우 간결하고 자기만의 창의적 문체로 쓰였다. 이 편지들은 대체로 두세 문장을 넘어서지 않는다. 길게 늘어놔야 할 내용을 새로이 단어를 조합하여 더 이상 가감이 필요 없게 글을 써냈다. 자기 그림에 대한 설명도 간단하다. 자신의 상상력들이 어떻게 색으로 입혀져 붓의 터치로 발현되었는지 시처럼 보여준다. 빠르고 두터운 그의 붓질처럼 그의 편지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것 같다. 이런 그의 글이 담긴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가 한글로 번역되었다고 하니 읽기를 권하고 싶다.그가 지성인이었다는 근거는 분명하다.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작가가 150여명이나 되고 언급한 책도 300권 정도 된다. 책에서 인용한 문학적 표현은 800여개나 된다. 그는 고전에서 당대의 작가들까지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을 읽어 나갔다. 러시아, 유럽, 미국 문학가들의 시와 소설 뿐 아니라 철학과 역사 서적도 탐독하였다 . 따라서 시대의 흐름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에밀 졸라, 볼테르, 빅토르 위고, 모파상, 찰스 디킨즈 등의 근대 문학을 통해 절대적 신 중심의 시대가 끝나고 계몽 시대 조차도 저물어 세속화로 가는 역사적 흐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인상파 화가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흐름도 이론적으로 잘 꿰뚫고 있었다. 당시 자연을 그대로 그리거나 자연이 주는 인상만을 표현하던 기교적인 화가들 너머 화폭에 자기의 감정과 정신을 담아 내려 한 것도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현대적 지성 때문이었다. 그의 단순하고 강렬한 색감과 거친 붓질, 그리고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색과 선을 단순화 시킨 것을 보면 이미 야수파, 입체파 화가들의 설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는 현대 화가들의 선배 화가임이 분명하다.그런데 이런 빈센트의 지성보다 더 압도적으로 그를 지배한 것이 있었다. 신앙이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세월을 앞서 갔지만 신앙만큼은 오히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가 왜 그랬는지 그가 탐독했던 책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가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은 성경이었다. 특히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 속 예수의 삶을 심히 동경하여 따라 살려고 노력하였다. 또 르낭의 예수전,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존 번연의 천로역정 같이 지난하고 원시적인 제자도에 관한 책들을 읽어 나갔다. 결국 주를 향한 지나친 헌신이 그를 사로잡아 그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의 눈에 산업혁명 이후 비참하게 살아가는 런던의 도시 근로자들, 시커먼 탄광의 광부들, 가난한 농부들이 어른거려 사치스런 그림 거래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급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의 이런 점을 단지 무모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가 자연에 자기 마음을 불어 넣어 화폭에 담은 상상력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그는 역시 약자들의 고통을 자기의 마음에 그려 넣을 줄 아는 공감의 신앙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캔버스에 그려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때마다 연민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그의 신앙은 그의 결핍을 채우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밀어주었다.슬픔과 기쁨의 싸움빈센트는 17세 이후 파리와 런던에서 꽤나 잘 나가는 그림 거래 상으로 지냈다. 미술사와 비평에 해박하여 매우 인기있는 상인이었다. 그런 그가 직장에서 쫓겨난 이유는 갑자기 생긴 목회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때부터 간질과 발작, 분노 그 뒤에 찾아오는 참담한 우울증이 더욱 심해져 갔다. 빈센트의 미친 듯한 열정은 목회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목회자가 되기에 필요한 라틴어, 그리스어 학습 과정을 견디지 못하여 정식 목회자가 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냥 바로 할 수 있는 벨기에의 탄광 지역에 무급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소원한 대로 헌신적인 목회를 하였다. 자기의 사택을 탄광 근로자들에게 내주고 먹을 것조차 나누어 최소한의 식량으로 살았다. 잠을 줄여가며 그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부족한 수면과 영양 탓에 그의 정신은 더 나빠져 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를 파견했던 선교 단체의 감독관은 빈센트를 보고 도저히 선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품위가 훼손되었다고 보고 그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래도 목회자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던 빈센트는 몇 번의 시도를 더 해 보지만 온전치 못한 정신을 가진 그를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렇게 원하던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난 후 빈센트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 그리기밖에 없었다.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화가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자 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을 하며 인정받지 못하고 팔리지 않는 그림을 계속 그려가며 동생에 대한 채무감만 쌓이는 긴 세월을 견디기 힘들어하였다. 이 시절에 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 우울, 고뇌, 무력감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써 그의 심정이 어떤지 잘 보여주고 있다. 독서와 목회에 미친 듯한 열정을 보였던 것처럼, 빈센트는 그림에도 온 힘을 다하였다. 정신이 온전할 때 힘을 내어 집중하여 빠르게 그림을 그려 내었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사랑, 확신, 힘, 격렬함, 열정 같은 단어들을 써서 우울감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단호하게 표현 하였다. 이 좌절과 희망, 슬픔과 기쁨의 교차를 빈센트는 격렬한 고뇌, 적극적 우울 같은 상반된 단어들을 조합하여 창의적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파랑과 노랑을 대비시킨 그의 그림같이 슬픔과 기쁨의 양가 감정이 서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그는 지독한 우울감을 몰아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마치 희망이라는 무기로 좌절을 무찌르는 전사 같았다. 빈센트의 삶의 모토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고후 6:10)였다. 그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찾아오는 근심 속에서 의도적으로 기쁘게 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이런 반복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그림에 몰두하였다. 화가 생활 10년간 이틀에 한 점씩 그렸으니, 그가 얼마나 쉼 없이 전쟁하듯이 그림에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어두운 색을 쓰는데 찬란하게 빛나고, 그 붓질이 거친데 힘찰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찬란한 패배자이 글을 쓰다 오래전 본 영화 Loving Vincent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랐다. “살아봐, 삶은 어떤 강한 사람도 무너뜨려 버려.” 또 가수 Don Mclean의 노래 ‘Vincent’에 이런 노랫말이 있다. “이제 난 이해해요.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을, 당신이 제정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최근에 한 종합 격투기 선수의 은퇴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았다. 그가 이미 패배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싸웠는지 궁금했다. 약자일 수밖에 없는 선수는 종 칠 때까지 몰매를 피할 길이 없다. 그래도 ‘그래, 맘껏 더 때려봐’ 하며 더 투지를 불살라야 비참해지지 않는다. 신앙인은 삶의 고통을 피해 패배에 자신을 쉽게 내어주는 선수가 아니라 맞을수록 삶의 의지를 불태워야 한다. 폭력을 쓸 수 없으니 남은 무기는 신앙, 지성, 의지, 열정, 말, 눈빛 같은 맷집밖에 없다. 내가 본 그 격투기 선수는 사실 두 번이나 챔피언에 도전하여 무참하게 꼬꾸라졌다. 심지어 팔이 빠진 상태로 싸우기까지 하였지만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도 비참하게 끝이 났다. 그러나 그를 감히 누구도 패배자라고 부르지 못했다. 찬란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그의 말년에 더 이상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생 레미 정신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 시절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끝까지 얼마나 잘 싸웠는지 보여준다. 빈센트는 정신 병원에 갇혀 지내는 동안 밤이면 찾아오는 죽음의 충동을 견디고 눌러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 것 같다. 그러다 슬픔이 걷히고 기쁨이 찾아올 때쯤 병원의 창문 너머 비치는 새벽녘의 그 빛나는 별들을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밤의 좌절과 새벽의 희망의 골은 너무나 깊어 그를 지치게 하여 헤어 나올 수 없게 하였을 것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빈센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을 스스로 마감하였다. 별까지 걸어가고 싶어 했던 그의 소망대로 말이다.이제 글쓰기에 지친 나를 불러낸 빈센트에게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은 당신을 큰 실패자라고 부르지. 평생 거절당하고 목회자로도 실패하고 그림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하고(평생 그림 한 점 판매했다) 끝내 그렇게 갔으니. 그런데 빈센트 그대는 원하던 대로 살았어. 근심하는 자였지만 기쁨으로 이겨내려 하였고 가난한 자였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였고 아무것도 없는 자였으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떠났으니 말이야. 그대는 그렇게 살기 위해 다른 것을 다 포기했지.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다 빼앗아 버리셨다고는 하지 않을게. 그리 살면 얼마나 할 얘기도 많고 그릴 것도 많겠어. 나같이 메마른 사람들은 누구나 그대처럼 살아 보기를 꿈꿀 거야. 정말 고마워 빈센트, 어떻게 살아야 어떤 글이 써지는지 알려줘서. 그러고 보니 그대는 참 찬란하게 살았네.
무엇을 할 것인가
by 양혜원
2024-03-11
항암치료 중이신 어머니가 입맛이 뚝 떨어지시고 그나마 찾으시는 게 햄버거이다. 남들은 몸에 안 좋다고 뭐라 하지만, 아무것도 못 드시는 거보다는 낫지 싶어서 그날 저녁도 퇴근길에 버거 사냥을 나섰다. 어머니가 잘 드시는 브랜드의 가게는 너무 멀리 있어서 어디서 사가나 고민하는데 예전에 버스 기다리다가 배가 고파서 들렀던 버거 가게가 생각났다. 큰 기대 없이 시켜서 먹었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었던 기억이 나서 그 버거집으로 갔다.하지만 때는 이미 저녁 7시를 넘었고,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식당이라 벌써 파장 분위기였다. 그래도 주방 안쪽에 사람이 있어서, 아직 영업하시냐고 물었더니, 연세가 좀 있어 보이시는 아주머니가 지금 마지막 버거가 딱 두 개가 남았다고 하신다. 사이드로 감자튀김이랑 치킨 너겟은 튀겨줄 수 있다고 해서 간병하시는 아버지 생각해서 함께 주문하고 잠시 자리에 앉았다. 주방의 아주머니는 그 버거집의 주인이셨는데, 몸의 움직임이나 얼굴로 보아서는 연세가 좀 있어 보이셨지만, 머리카락이 검어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손님은 나 혼자라 너무 조용한 게 오히려 어색해서 소소하게 말을 주고받다가,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하고 물었더니, ‘58년 개띠에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만으로 올해 예순여섯이 되신다는 이야기다. 색은 까만데 두피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숱이 적고 가는 머리카락이 그 나이를 말해주는 듯했다. 지난번에 여기 우연히 와서 먹었는데 버거가 맛있어서 또 왔다고 했더니, 자신이 미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오래 했었다 하신다. 미국에서 38년을 살았다는데, 그곳에서 자리를 잘 잡으신 분이 어쩌다가 늦은 나이에 다시 한국에 와서 버거 가게를 시작했을까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탈북자 선교하러 왔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더 하고 싶으셨던지, 나더러 교회 다니냐고 물어보셨다. 다닌다고 하자 그때부터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는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부름으로 한국에 다시 나와서 어떤 사역을 하고 있는지 길게 풀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의 눈길은 정수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분의 검은 머리에 머물렀다. 흰머리 한 가닥 보이지 않게 새까맣게 물들인 그 머리는 마치 ‘뒤로 물러나 숨기’[隱退]를 거부하는 강한 의지처럼 읽혔다. 내일도 햄버거 백 개를 주문받았다며, 감자와 치킨 너겟을 튀기는 틈틈이 재료 준비를 하는 손이 분주했다. 어쩌면 그는 한국으로 다시 나올 때, 텐트메이커로서 제2의 인생을 산다는 생각에 제법 들떴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들의 선생이라고 불리는 파커 팔머는 곧 벼랑을 넘어갈 인생의 끄트머리(brink)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 일을 어떻게 맞이할지에 대해서는 선택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지만, 해 뜸과 해 짐 사이를 어떻게 걸어갈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묻는다. 해가 진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갈 것인가, 거기에 저항하며 갈 것인가, 아니면 협력하며 갈 것인가.여기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애매하게 마음에 머문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근대 이래로 우리 문화가 선택은 마치 운명이나 주어진 상황을 거스르는 일에만 적용되는 것처럼 말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선택은 치고 나가는 능동성만큼이나 받아들이는 수용성도 필요로 한다. 버거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근 40년을 살던 미국을 떠나, 한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며 선교사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치고 나가는 능동성이었지만, 한국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며 선교사 생활을 하는 데에 따라오는 예상치 못한 수많은 상황은 수용하면서 갈 수밖에 없다. 머리는 까맣게 물들여도, 약해지는 관절과 체력은 수용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용감한 선택을 할 수는 있지만, 해가 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기대 수명이 길어지면서 인생 2막이 아닌 3막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온지도 제법 되었다. 심지어 배우자도 두 번은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미덕일 수 있었던 것도 다 수명이 짧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불평이 반복될 때는, 엄마도 진작에 한 번 갈아타실 걸 그랬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웃자고 하는 소리였지만, 완전 흰소리는 아니었다. 나의 박사 과정 지도 교수는 40대에 이혼을 하고 홀로 십대 입양아를 키우며 종교여성학 과정을 신설했고, 세계 곳곳을 다니며 종교여성학자들과 네트워크를 다지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러다가 일흔이 다 되어갈 무렵 열 살 연하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여지껏 싱글인 제자들에게 부러움과 함께 ‘나도 어쩌면’ 하는 희망도 품게 한 결혼이었다.) 결혼 얼마 후 지도 교수는 은퇴하고 남편과 같이 아프리카 지역 엔지오 활동을 시작했고, 얼마 전에는 블로그도 시작했다. 학술적인 글만 쓰다가 처음으로 대중 독자를 위해서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거스르며 살아온 것 같은 지도 교수도, 아프리카에서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죽다 살았고, 열 살 어린 남편은 원인 모르는 장 질환으로 영양 섭취가 안 되어 한동안 고생을 했다. 능동적인 선택 뒤에 따라오는 불가피한 상황들이다. 2년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일흔 후반에 들어선 시점에서 바라보는 인생은 많이 다르다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눈빛은 마치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가는 길의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선 것 같아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너무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것 같다는 내게 딱 좋은 나이에 시작했다고 말씀해 주신 분이었다. 그때 나는 마흔 초반에 집을 박차고 나가 박사 공부를 시작했다는 서사에 제법 고무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딱 1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박사 학위 하나로 팔자를 고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대학 사회의 온갖 모순 속에서 뼈저리게 느끼며 살고 있다. 능동적 선택 뒤에 따라오는 또 하나의 불가피한 상황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차이는 사십 대의 계단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과 오십 대의 계단에서 바라보는 해지는 풍경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좀 식상하지만 산의 비유를 쓴다면, 산 밑, 산 중턱, 산 정상의 풍경이 다르듯이 그 풍경이 사뭇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지는 해를 향해 가는 이 길에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애초에 이 여정을 시작하게 한 동기이다. 팔머는 자신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혼란스러운 것이 많아서라고 하는데, 나도 비슷하다. 이건 도대체 왜 이런 거야, 하는 의문이 나를 글로 이끌었다. 흔히들 자신이 아는 것을 글로 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글을 쓰면서 알아간다. 어떤 때는 내가 뭐가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정말로 궁금했던 것은 이것이구나 하고 알게 된다.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던 나의 글은 학부 졸업 논문이었는데, 이 글도 이해하기 어려운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그때 나의 의문은 왜 현실은 이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하는 것이었다. 그 논문으로 졸업생 우수 논문상을 받았는데, 이 질문은 그 이후로도 몇 년간 내 글쓰기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여성학 석사 과정에 지원할 때 나의 의문은, 왜 나는 똑같은 나인데 평신도일 때랑 사역자 부인일 때랑 교회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다른가였다. 이 주제로 쓴 나의 연구 계획서로 석사 과정에 합격했고, 이 질문은 훗날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할 때 나의 의문은 여성에 대한 차별은 문화적 문제인가 종교적 문제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여성주의 의식을 가지고도 보수적 신앙관을 수용한 여성 작가들을 연구하고 그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갔다. 연구교수 생활을 거쳐 특임교수 타이틀을 달고 영문 학술지 편집 일을 하는 지금도 나는 궁금한 것들이 많다. 왜 여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공격성은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사회가 여성을 억압한다고만 할까? 왜 한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한때 여성주의에 그렇게 열광했을까? 이런 궁금증들을 풀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하나의 궁금증을 풀다 보면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기고, 세상은 이해 못 할 일을 쉼 없이 던져주기에, 연구 논문도 쓰고, 이렇게 짧은 에세이도 쓰고, 책도 쓴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의 자세를 더 잘 갖추기 위해서 더 열심히 듣고 관찰하려 한다. 내가 선택한 것도 그 선택이 나를 데려간 곳도 모두 이런 관찰을 통해 글이 된다. 이런 선택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을 기독교 전통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소명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가 선택을 마치 운명이나 주어진 상황을 거스르는 일에만 해당하는 것 같은 착각을 심어주었다면, 소명을 마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꾹 참고 위에서 부르는 대로 질질 끌려가는 일처럼 생각하게 만든 것은 교회의 실수다. 소명도 선택과 마찬가지로 치고 나가는 능동성과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있다. 그리고 사실 선택이라고 하는 것도, 어디까지가 내 선택이었는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것처럼, 소명 또한 어디까지가 주어진 것인지 선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다만, 삶이 던져주는 것들에 응답하며 가다 보니 그 길에 나와 함께 자라나는 무엇이 생겼다면, 그런 게 소명 아닐까. 그리고 그 자라난 무엇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내 옷같이 느껴진다면 그 옷을 입고 지는 해를 향해서 가도 좋을 것이다.
능력 있는 기도의 비밀
by David Mitchell
2024-03-07
마태복음 6:5-15에서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모든 기도가 똑같지 않다고 경고하셨다.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전에 세상 사람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먼저 주의를 주었고, 그렇게 함으로 기도의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보여주셨다. 위선자의 기도첫째, 예수님은 위선자, 즉 기도 쇼를 하는 자들을 겨냥하셨다. 기도를 위한 오후 번제 시간(오후 3시경)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 공동체 사람들이 다른 신도들과 함께 번잡한 거리로 나가거나 회당에 나갈 때이다. 따라서 그 시간에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당신이 참으로 얼마나 경건한지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는 정말 좋은 방법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의 열심을 볼 수 있도록 한쪽 눈을 뜨고 큰 소리로 기도하라. 예수님은 5절에서 “그들이 자기 상을 온전히 받았느니라”고 경고한다. 결국 이런 기도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어쨌든지 당신이 정말로 원했던 것, 즉 당신과 비슷한 수준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뿐이다. 예수님의 해결책은 사람의 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향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기도이다. 능력 있는 기도의 첫 번째 비결은 기도를 은밀하게 하는 것이다. 강력한 기도는 다른 어떤 사람도 끼어들지 않고, 오로지 당신과 하늘 아버지 사이에서만 소통이 일어날 때 가능하다. 이방인의 기도둘째, 예수님은 비유대인의 기도를 겨냥하신다. 그들의 기도 방식은 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많은 말을 쏟아붓는 특징이 있다. 이는 존경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결국, 때때로 기도하는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싶다면 신을 경건하게 불러야 한다. 예를 들면, 앤서니 알바니스(Anthony Albanese), MP, 호주 총리시여…. 이런 식으로 말이다. 누구나 내가 하는 기도가 다른 사람 기도 이상으로 능력 있기를 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왜? 왜냐하면 그런 식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단지 기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이 기도하는 하나님에 관해서 잘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요점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으로 돌아간다. 8절에서 예수님은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실제로 만물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강력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동시에 아버지께도 나아간다. 나는 알바니스 총리의 아들이 그를 “총리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에서 그런 호칭이 나올 리가 없다. 이제 당신은 왜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시라면 그런 식으로 장황하게 호칭하는 게 부적절한지 알 것이다. 인간도 아첨과 헛된 말을 간파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아시겠는가? 필요한 것을 기도로 요청하는 제자들이 하나님에게 아부부터 할 이유가 없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필요를 아시며 당신의 아버지이시다. 능력 있는 기도의 원천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위선자들처럼 기도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이방인처럼 기도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친절하시고, 관대하시며, 강력하시고 정의로우시다. 그는 모든 것을 다 듣고 있다. 그분은 이미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능력 있는 기도의 비결은 우리 아버지를 바로 알고 기도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교도들과 위선자들이 저지른 진짜 실수는 기도의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를 몰랐다. 이교도들은 기도의 힘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에게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기도가 필요했던 이유는 마법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주문을 외우다 보면, 어쩌다가 딱 맞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아니면 자신들이 얼마나 존경심 있고 진지한지를 보여줌으로 그들이 섬기는 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조작으로 움직이는 신은 결코 진정한 신 또는 강력한 신이라고 할 수 없다. 술수를 써야 하는 신에게 사랑이 있을 리 없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위선자들은 기도의 힘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것이 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지역 사회에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인정받지 못했다. 기능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기도의 진정한 힘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기도하는 사람으로 보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기도가 주는 유일한 유익은 사교였다. 그들이 기도하는 신은 아마도 기도로 조종되는 이교도 신보다 더 형편없는지도 모르겠다. 하늘 아버지에게 기도하기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들에게 기도의 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게서 나온다. 우리는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믿는다.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허락하시고 듣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 이 세상을 위해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결과를 주신다. 기도는 나와 말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기도 생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진짜 기도, 즉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사랑이 많으시고 이해심이 많으신 아버지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성공적인 기도의 비결이다. 우리는 나의 불안, 어려움, 약점, 죄를 들고 나아간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루고도 남을 만큼 크고 사랑이 넘치신다. 그는 지혜롭고 능력이 넘치며 사랑에 가득하여 우리를 용서하는 분이다. 원제: The Secret of Powerful Pray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도와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신앙을 해체하고 있어요.
by Alisa Childers·Tim Barnett
2024-02-29
“우리 딸이 믿음을 버리고 있어요. 우리와도 더 이상 말을 안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해를 끼치는 신학을 가지고 있어서 안전하지 않은 존재라는 편지까지 썼어요. 부모로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슬프게도 이건 해체와 관련해서 듣는 아주 흔한 이야기다. 기독교 신앙의 해체와 관련해서 우리는 부모, 형제자매, 배우자, 목회자들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도대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그들은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고, 어떻게든 그들과 다시 소통하고 연결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해체 이해하기오늘날 문화에서 ‘해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정의가 아니다. 정의를 어떻게 하든 관계없이 해체하는 사람이 없으면 해체도 없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 해체는 하나같이 다 독특한 경험을 가진 사람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 해체라는 단어가 없지만, 성경은 신앙 해체에 대해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성경은 우리가 사람으로서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한다. 따라서 지금 해체 과정을 겪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과 더 나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성경이 그들을 묘사하는 다섯 가지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로서 해체자믿음을 해체한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왜냐하면 그건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이, 인종, 성별, 성적 매력, 사회 지위와 관계없이 해체자도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창 1:27).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고 사랑, 존엄,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다.2. 죄인으로서의 해체자죄는 인간의 관계, 욕망, 감정, 심지어 믿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죄성이란 게 우리가 죄를 짓고 싶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 그냥 선반에 앉아서 멍하니 기다리고만 있지 않다. 죄성은 우리 곁을 떠나는 법이 없다. 따라서 해체는 결코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다. 좋든 싫든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행실을 죽이라”(롬 8:13)고 상기시킨다. 3. 구도자로서의 해체자바울은 로마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롬 2:6-8). 바울이 사람들을 자기 추구자와 진리 추구자의 두 그룹으로 분류한 것에 주목하라. 대제사장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하라”고 말했다(막 15:32). 그건 증거를 볼 수만 있다면 예수님을 믿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보증할 만한 많은 증거를 이미 제시하셨다.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 모든 증거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다. 4. 포로로서의 해체자성경은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뜻을 행하게”(딤후 2:26)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사탄이 사용하는 올무 중 하나가 속임수이다. 그래서 바울은 경고했다. “누가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여러분을 노획물로 삼을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골 2:8).안타깝게도 해체주의 온라인 공간에는 잘못된 생각이 많이 전파되고 있다. #deconstruction 및 #exvangelical 태그가 붙은 수십만 개의 게시물을 스크롤해 보라. 예를 들어, 한 해체론자는 “#EvangelicalismIsUnreformable, 이걸 어떤 식으로 파악하든지 어린이 희생이 세상을 구했다는 게 주된 믿음이다”라는 글을 게시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것은 기독교에 관한 완전한 오해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진리로 반응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로 시작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엡 6:11, 14).5. 반역자로서의 해체자해체자 대다수가 거짓 사상의 포로인 반면에 일부는 단순히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롬 1:18)을 묘사한다. 이 사람들은 진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억압한다. 같은 편지 뒷부분에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함이니라”(롬 8:7)고 말한다.많은 사람들에게 해체는 자기 통치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주권자이신 주님께 무릎 꿇기를 거부한다. 하나님을 포함한 그 누구도 그들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말해주지 않는다. 어느 한 솔직한 인스타그램 게시글은 해체를 이렇게 요약한다. 내가 해체를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기대가 내 자존감, 내 선택 또는 내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정의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찾지 않는다. 내게는 하나님도 사람도 필요하지 않다. 나는 그냥 나만 있으면 된다. 해체자를 사랑하자사랑하는 사람 중에 지금 해체의 과정을 겪는 이가 있다면, 일단 분류부터 해야한다. 그게 바로 고속도로에서 큰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응급실에 몰려들 때 병원에서 하는 일이다. 의사는 각 부상을 평가하고 긴급한 순서대로 치료한다. 천공된 폐는 부러진 손목보다 더 먼저 치료를 받는다.증거만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면, 그들이 마음을 바꿀 거라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해체자들에게는 증거가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다. 따라서 해체의 과정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가장 긴급한 상황부터 먼저 대응해야 한다. 해체주의 공간에서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원죄, 형벌적 속죄, 지옥 교리 등)가 유해 것으로 치부된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을 안전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건 당신이 해체자의 삶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매우 짧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가장 긴급한 필요는 관계의 유지일 수도 있다. 일단 소통의 문이 열려 있다면 해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해체자를 묘사하는 다양한 방식, 즉 형상 소유자, 죄인, 구도자, 포로, 반역자를 기억하라. 이 중에서 어떤 측면이 그로 하여금 해체를 주도하도록 하는지 분별하라. 해체자의 관점을 이해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서 그에게 진리를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결코 기도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 어떤 굳은 마음도 열어주실 수 있다. 기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무력하지 않다. 관계를 추구하고, 복음의 아름다움을 실천하며, 기도에 시간을 쏟는 것이야말로 해체자를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그리고 소망을 가지라! 사도행전 16:14은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셨다고 말한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똑같이 하실 것이다. 원제: Help! My Loved One Is Deconstruc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Alisa Childers·Tim Barnett알리사 차일더스는 싱어송라이터 가수이다. 동시에 변증가로 활약하고 있다. 팀 바넷은 강사이자 Stand to Reason(STR) 강사이자 변증가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와 평강
by 전재훈
2024-02-21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과학이라는 문명이 거대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하늘로 쏘아 올린 공은 반드시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입니다. 과학이 떨어지는 공의 원인을 밝혀주었고, 쏘아 올린 모든 공은 예외 없이 모두 떨어지므로 과학의 진정성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만약 쏘아 올린 공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공이 계속 하늘에 머무를지, 아니면 내 머리에 떨어지지는 않을지, 혹시 내 아이가 떨어지는 공에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마음은 과학의 세계로 들어가서 왜 떨어지지 않고 있는지를 규명해 주어야 맘이 편해집니다. 더 나아가 그 공이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를 예측해 주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지요. 내 마음에 평강을 찾아주는 과학은 결정론적 사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은 반드시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집니다. 만약 낮이 너무 짧아서 누군가가 신적인 권능을 가지고 태양을 기브온 위에 잡아둔다면, 혹은 밤이 오지 말라고 달을 아얄론 골짜기에 가둬둔다면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들게 될 것이고, 세상은 종말을 보여주듯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이 준 위대한 평강입니다. 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이 땅은 안전할 것이라고 믿어야 평강이 임합니다. 하지만 뜬금없이 싱크홀이 생기면서 어느 순간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그 평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지요. 우리는 과학자들이 땅꺼짐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고, 땅꺼짐 위험 지도를 완성해 주어야 비로소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게 펴게 됩니다. 인류는 세기말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시한부 종말론 때문에 홍역을 앓아왔습니다. 몇 년 전에는 전쟁설이 등장하여 한반도를 긴장하게 만들었지요. 이런 종말론과 전쟁설 때문에 평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신앙인의 말보다 과학자의 말이 더 옳은 것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목사님을 통해 5년 후 종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한다면 평강을 잃어버릴 사람들은 지옥에 갈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이어서 천국의 상석을 예약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그려주는 장밋빛 미래에 젖어 그날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학의 세계에 복병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시 세계에 있던 양자역학이었지요. 원자 주위의 전자들의 세계가 입자인가 파동인가를 두고 고민하다 밝혀진 것이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규명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워낙 어려운 내용인지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더 잘 알려진 불확정성의 원리는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과학의 산물입니다. 매일 아침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아침 식사를 하던 사람에게 ‘당신은 내일도 아침을 드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일이 100퍼센트 이뤄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확률적으로 아침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일 뿐, 반드시 먹는다고는 할 수 없지요. 사람은 이상하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면 보란 듯이 아침을 굶기도 하겠지만, 그 사람이 사고로 저녁에 죽거나 다칠 수도 있으므로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덕분에 이 시대가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버젓이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틈을 내주었습니다. 물론 그 작은 틈새 사이로 보험도 생존하여 번성할 수 있게 했지요. 뿐만 아니라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와 같은 원효 철학도 가능케 했습니다.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20세기 폭스)는 ‘미래가 예측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거대 담론을 담아내었습니다. 사람의 행동양식을 통해 살인을 예측하고 미리 사전에 통제할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이 영화 속 살인범들은 살인할 뻔한 사람들이지 실제 살인을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런 살인을 할 뻔했던 사람들을 살인 직전에 잡아서 살인범으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문제제기였지요. 범죄 예방 수사국 소속 범죄과 수사반장이었던 존 앤더튼(톰 크루즈)은 과학적 사고관인 ‘결정론적 사고관’의 맹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결론에 다다르자 살인 예측 시스템의 붕괴로 결정론적 사고관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면서 끝이 납니다. 우리의 미래는 확률적으로 예측할 뿐이지, 결코 결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과학과 같은 결정론적 사고관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시한 양자역학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의지’라는 또 하나의 축이 있어서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의지’라는 놈은 결과를 분명하게 만들지 못해서 ‘진인사대천명’ 즉 최선을 다하나 결과는 하늘에 맡기게 되었지요. 여기에 나오는 ‘하늘’이 불교에서는 ‘인연’이고, 기독교에서는 ‘주님의 뜻’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미래는 ‘의지’에 ‘하늘’이 합쳐서 만들어 내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의 평강은 어디에서 올까요? 가장 기본적인 평강은 물리학에 기초한 세계에 있습니다. 여름에 눈이 오면 안 되고, 겨울이 더우면 안 되지요. 낮은 환해야 하고, 밤은 캄캄해야 합니다.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어야 하고요.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으면 차가 나가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서야만 평강이 생기는 법입니다. 인간의 평강은 물리학적인 평강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또 한 부분을 채워줘야 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밤의 잠이 달콤한 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심히 공부해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인내는 쓰고 결과는 달다고 믿는 사람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서 간혹 평강의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긍정의 힘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도 아니라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사업에 실패했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존 그레이는 이혼했습니다. 자기계발서 100권 읽고도 실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도 뿌리 깊게 내려있습니다. 그것도 결정론적 사고관으로 위장해서 말이지요.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된 예를 알고 있습니다. 운전하기 전에 항상 기도하시던 분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것도 봤지요. 십일조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 그렇지 않은 교인들보다 반드시 더 잘 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불확정성의 원리에 갇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 안에 결정론적 사고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와 같이 분명하고도 확고한 절대 진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문제가 현재의 평강을 담보해 주지 않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평강을 주겠지만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지요. 과학의 세계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듯, 신앙의 세계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불안이 깃들고, 낭패와 실망을 겪게 만듭니다.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서 지동설이 진리이듯, 신앙의 세계에서도 분명하고도 확고한 결정론적 진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평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사랑 변함 없으신 거짓 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을 믿을 때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오늘처럼 내일도 나를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신학교 교수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
by Sarah Eekhoff Zylstra·Robert Smith Jr.
2024-02-14
마스크를 쓴 네 명의 청년이 식당에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직원들은 강도임을 직감했다. 주방에 있는 요리사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도망갔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요리사는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요리사 토니 스미스는 원래 그날 근무가 아니었다. 그날 밤 할머니와 함께 자이언츠와 레인저스의 2010년 월드 시리즈를 볼 계획이었는데, 교대 근무를 해달라는 동료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강도들은 토니를 끌고 가서 금전 등록기의 잠금을 해제하라고 했다. 그러나 뭔가 문제가 있었는지 금전 등록기가 열리지 않았고, 강도 중 하나인 엑스터시에 취한 17살짜리 소년이 토니를 총으로 쐈다.토니의 아버지이자 비슨신학교(Beeson Divinity School) 설교학 교수인 로버트 스미스가 막내아들이 총에 맞았다는 전화를 받은 건 루이지애나 배턴 루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45분 후에 아들이 사망했다는 두 번째 전화를 받았다. 토니는 말 그대로 아무 의미 없는 죽임을 당했다. 그날 밤 강도들은 단돈 일 달러도 훔쳐 가지 못했다. 스미스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주권자라고 고백하는 법을 배우는 거지요. 해가 빛날 때야 쉬운 고백이지만, 해가 지면 말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고백은 이제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 됩니다.” 스미스는 적지 않은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그의 첫 아내는 세 아들이 어렸을 때 루푸스로 사망했다. 15년 동안 암 투병하던 큰아들은 지난해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 또한 2021년에 뇌졸중을 앓았고 이런저런 건강 문제를 갖고 있다. 그는 왜 이런 일이 자기에 일어나는지 모른다. “우리는 미스터리를 풀거나,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해독하거나,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갈보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다치게 하셨습니다. 빌라도와 군인들은 모든 게 자기들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스미스는 하나님의 주권을 붙잡고 토니를 죽인 살인자를 용서했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계속해서 전 세계를 다니며 사역하고, 가르치고, 또 설교한다. 그는 이번에 Crossway에서 새로 나온 ESV 오디오 성경 전체를 낭독했다. 몇 달만 지나면 27년을 보낸 비슨에서 은퇴한다. TGC는 스미스에게 슬픔과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하는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6주에 걸친 성경 전체 낭독에 관해서 물었다.사망한 직계 가족 세 명 중에서 토니는 살해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주는 슬픔은 종류가 다른가요? 모든 이별은 고통스럽고 다 뚜렷합니다. 병으로 죽은 아이들 엄나의 죽음은 꼭 비극적이진 않았어요. 우리에게는 죽음을 준비할 시간이 있었거든요. 아내는 2년 반 동안 아팠습니다. 토니의 형 로버트 3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요. 사실 우리는 로버트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의사가 2-3년 안에 죽을 거라고 했는데, 무려 15년을 살았거든요. 토니는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우리도 통보받은 게 없고 그냥 전화만 받았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토니도 우리 것이 아니다. 토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우리도 기다리고 계신다. 언젠가 우리는 토니를 다시 만나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라고요.이런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봅니까? 나는 토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고, 그 추도사를 바탕으로 The Oasis of God: From Mourning to Morning(하나님의 오아시스: 슬픔에서 아침으로)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결코 쓰고 싶었던 책은 아니었지만, 그 책은 내게 다양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하면서 전 세계를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끌렸고, 나도 다른 이들에게서 매력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비슷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는 깊은 슬픔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할 수 있는 실로 놀라운 기회였습니다.당신은 토니를 죽인 청년에게도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요?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지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내 아들이 그렇게 죽는다는 게요.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지 약 8개월 후, 나는 선교 사업차 케냐 나이로비에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귀에 들린 건 아니지만,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주님이 물으시더군요. 너는 용서를 믿느냐? 예, 믿습니다. 너는 용서를 가르치고 또 설교하느냐? 예, 그렇습니다. 나는 네가 토니의 살인자를 용서하길 원한다.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용서란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한다는 걸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뭔가가 현실이 되려면 가장 먼저 마음속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상황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법정, 수갑을 차고 15년 형을 선고받고 가던 청년, 그리고 내 아들의 죽음. 그 모든 걸 말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악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을 압니다. 나는 계속해서 죄를 저질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깨달았습니다. 토니를 잃었지만, 그건 내가 원했던 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기 바로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칼을 멈추셨습니다. 그러나 성금요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만은 칼을 내리꽂았습니다. 하나님은 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그런 사실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오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체험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만남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내가 하기 싫은 일과 할 수 없는 일까지 다 하도록 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일, 즉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그 젊은 친구에게 용서한다고 말했습니까? 예, 그랬지요. 편지를 써서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를 사랑하며,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통해 용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첫 번째 편지를 보내고도 6-7개월 동안 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편지를 보내고 마침내 답장을 받았습니다. 답장을 안 한 이유가 행여라도 내가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죄수들에게 폭로할까 두려웠다고 하더군요. 또 행여라도 토니를 아는 사람이 같은 감옥에 있는 경우에 보복을 받을까 무서웠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왜 내가 계속해서 자기에게 편지를 보내는지, 왜 자기를 사랑하고, 용서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자기가 다니던 교회 목사와 교회 사진도 보내주었어요. 나는 그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압니다. 그 지역에서 설교한 적도 있습니다. 그는 사건이 있던 날 밤에 같이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과 함께 있었고 마약에 취해 있었다고 말했습니다.친척 중에는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죄의 대가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죄와 잘못에는 반드시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용서가 어려울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용서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용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반복해서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물론입니다. 끝난 건 맞습니다. 이제 그 청년에 대한 악의가 없으니까 다 된 겁니다. 나는 그가 잘되기를 바랍니다. 출소하면, 기꺼이 그와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같이 점심을 먹고 교회도 데려갈 겁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뒷걸음치진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어느 청년의 장례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모든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심장이 미친 듯 뛰더군요. 마치 다리가 부러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한 부분을 고쳐주셨지만 뼈는 여전히 욱신거립니다. 여전히 통증을 느낍니다. 토니의 죽음은 내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토니를 죽인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이 아닌 살인자에게도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암, 교통사고, 치매는 모두 죄로 인한 것이며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슬픔에 잠겨 하나님께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화를 내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들이 아무리 욕을 해도 하나님은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강하시고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원망까지도 다 받아주실 수 있습니다.예레미야(20:7)와 예수님(막 15:34), 그리고 욥(3-37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를 풀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말할 시간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주의 신실하심이 크시도다”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좌절하게 그냥 둡니다. 그냥 다 겪도록 놔둡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일종의 변화, 허물을 벗는 거지요.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듯, 우리도 때로는 상처 없이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너무 큰 슬픔에 빠질 때면 다시는 영원히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기쁨을 회복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걸립니까?시편 30:5에는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어도 아침이면 기쁨이 온다고 써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아침 몇 시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밤은 매우 길 수도 있습니다.언제나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물면서 우리의 마음과 좌절을 그분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다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많은 슬픔과 슬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누리는 기쁨은 슬픔을 능가하고 초월했습니다. 내 슬픔은 내 기쁨 속에 삼켜졌습니다. 내가 지금 신학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을 설파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가 느끼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기쁨 중 하나가 비슨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제 몇 달만 있으면 은퇴하는데요. 이후 계획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가르치고, 설교하고, 강의하고, 글을 쓸 것입니다. 정말로 신이 납니다. 마치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고 봉인된 명령을 하나씩 열어보며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히브리서 11:8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느니라.”모험입니다. 정말로 흥분됩니다. 올봄, Crossway가 당신이 녹음한 ESV의 오디오 버전을 출시할 예정입니다. 그 얘기 좀 해주시죠. 그건 거의 58년에 걸친 사역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동시에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새벽 3시 전에 일어나 바로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리고 오전 3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일주일에 6일, 6주 동안 성경을 읽었습니다. 매일 밤 다음 날 읽을 성경 말씀을 준비하는 데에만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말씀을 검토하면서 어떤 부분에 어떤 감정을 주어야 할지 또 이어지는 이야기와의 연결은 어떻게 만들지 등을 고민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말한 뒤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그가 결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요. 그런 고백을 할 때 도마는 아마도 바닥에 쓰러지지 않았을까요? 좌절과 고통, 환희 속에서 정서적이고 언어적인 표현을 통해서 내가 성경의 인물들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읽기 전에 먼저 느끼는 과정, 그때가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하루에 평균 열여덟, 아홉 시간 성경을 읽었습니다. 심지어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읽는 꿈도 꾸었습니다.성경 낭독은 삶을 변화시키는 일이었습니다. D. L. 무디는 당신이 성경을 몇 번 읽었느냐가 아니라 성경이 당신을 몇 번 읽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마치 모든 성경 말씀을 처음 읽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낭독했습니다. 그러자 성경이 내 속에서 나를 읽어냈습니다.원제: How a Seminary Professor Forgave His Son’s Ki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자율주행과 인공지능, 그리고 십자가
by 전재훈
2024-02-01
저는 오래된 중고차를 타고 다닙니다. 17년만 해도 고급차였던 제 차가 이제는 여기저기 부식되고 힘도 딸려 고장 나면 폐차시켜야 할 수준이지요. 하지만 살살 달래가며 잘 타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통풍 시트가 안 돼서 여름이면 엉땀, 등땀으로 촉촉해지는 것 정도입니다.최근 나오는 차량들 보면 부러운 기능들이 있습니다. 후측방 경고 시스템, 어라운드 뷰 모니터, 하이패스내장형 룸미러, 추돌 방지 시스템,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 스탑 앤 고 기능, 스마트 하이빔, 자동 라이트, 스마트 트렁크, 차선 유지 시스템, 전동조절의자,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 전자식 사륜구동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요. 이런 기능들이 달린 차를 구매하기에는 제가 가진 재정의 심히 연약함 때문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기능들입니다.제가 고급 승용차를 사지는 못해도 다양한 방법으로 그런 기능들을 제 차에 붙일 수는 있습니다. 통풍 시트를 대신해 주는 쿨링 시트가 오픈 마켓에 있고, 후방 카메라나 센서도 붙일 수 있습니다. 신호 대기 중일 때 인위적으로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면서 스탑 앤 고 흉내도 낼 수 있지요. 하지만 제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자율주행은 오픈 마켓을 통해서 시도해 볼 수가 없습니다.자율주행의 기본은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과 차선 유지 기능, 그리고 추돌 방지 시스템입니다.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은 차가 설정된 속도로 일정하게 앞 차를 따라서 스스로 주행하는 기능입니다. 멈추기도 하고 다시 출발하기도 하지요. 차가 밀리는 정체구간에서 브레이크와 악셀레이터에 발을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고속도로에서도 자기가 알아서 속도를 내기 때문에 운전하기가 정말 편합니다. 수동미션이 달린 차를 몰 때 오토미션 달린 차를 보면서 왼발에 쥐가 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어뎁티브 스마트 컨트롤 달린 차를 보면서 오른발에 쥐가 나기 시작하더군요.차선 유지 기능은 차 앞에 달린 센서가 차선을 인식해서 차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운전대를 조정해 주는 기능입니다. 두 손 놓고 운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돌 방지 시스템은 말 그대로 추돌 위험이 있을 때 급제동을 걸어 주는 시스템입니다. 이 기능을 달고 외제차 한번 박을 일 막아주면 충분히 제값을 하는 기능입니다.차선 유지 기능이 가능하려면 운전대가 유압식 운전대가 아닌 전자식 운전대여야 합니다. 그래야 컴퓨터가 전자신호로 운전대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 차는 유압식 운전대라서 이게 오픈마켓을 이용한다고 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꿈의 기능인 셈입니다.자동차들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운전자의 조작없이 스스로 운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 법이 마련되지 않았고, 대중화를 이루지 못해서 완벽한 형태의 자율주행이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기술들은 이미 자율주행을 할 수 있는 시점까지 와 있습니다. 스스로 주차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목적지만 입력하면 알아서 데려다줍니다. 문도 열어 주고, 실내 온도도 맞춰 주고, 운전자의 기분에 따라 음악도 틀어 줍니다.이런 자율주행이 가능해진 것은 인공지능의 발달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스스로 학습하는 딥 러닝 기술이 개발된 지 수년이 흘렀기 때문에 컴퓨터는 이미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중 한 예가 이세돌 9단과 겨룬 알파고이지요. 앞으로의 시대는 이런 인공지능이 인간 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원해 줌으로 삶의 편의성을 극대화해 줄 날이 올 것입니다.하지만 이미 다 되어 있는 기술들이라고 해도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의 경우 운전자의 의도를 벗어나는 운전이 되면 이건 생명을 위협하는 폭탄이 되고 말지요. 차가 스스로 판단하고 운전한다고 해도 그 기능을 부여해 주는 인간의 명령을 벗어나 버리면 그 차는 쓸모없는 차가 되고 맙니다. 이것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만약 통제를 벗어나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그것을 어떻게 제지할 것인지 불분명한 상태입니다.인공지능은 분명 인간에게 유익한 기능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선한 통제 아래서 운영될 때만 유익한 기술입니다. 악한 사람이 인공지능을 개발해서 나쁜 의도로 이용하게 되면 인공지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말지요. 더 나아가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움직인다면 인간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게 중론입니다.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과연 인공지능을 선하게 통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하는 차량이 갑자기 앞에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탑승자를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주인인 탑승자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다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지요. 설문조사에 의하면 탑승자를 희생시켜서라도 보행자를 지켜야 한다고 답하지만, 그런 기능이 달린 차를 자신이 타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인간이 상상하는 가장 수준 높은 인공지능보다 훨씬 뛰어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배신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지요. 우리가 가진 지능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과 원칙 아래서 그분의 통제를 받으며 사용될 때 가장 바람직하게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와 지능을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 사용하므로 죄와 죽음의 굴레를 덮어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타락한 인간은 신의 존재를 부정해 버렸고,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인간이 인공지능을 개발할 때 부딪치는 문제가 스스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제재할 것인지의 문제이고, 이것은 아직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문제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지능을 부여하실 때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같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지능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라는 큰 벽에 부딪히게 해 두셨고, 그 능력의 한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심으로 다시금 하나님의 통제 아래로 들어오게 하셨지요.인간의 한계 덕분에 인간은 인간을 창조하신 이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가 바로 그 인간 능력의 한계를 과학의 발전으로 점점 없애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더 오래 살 수 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며,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신이 점점 필요 없어지고, 더 나아가 신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하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이며, 죽음 너머의 세계이고, 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는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살아갈 때 겪는 죄의 문제는 긍정심리학이나 철학 같은 학문이 일정 부분 죄책감을 해결해 주지만 죽음을 앞에 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 대답이 되었지요.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겪는 감사한 불행은 죽음이 시간의 흐름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 사고의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0년을 넘게 살 수 있는 시대임이 분명하지만, 오늘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시대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쀼’의 세계
by 양혜원
2024-01-30
커플 걱정하는 거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헤어진다느니, 더는 같이 못 살겠다느니, 남친이나 남편에 대한 불평과 하소연을 잔뜩 늘어놓던 친구의 말을 기껏 들어주고 위로해 줬더니, 불과 며칠 후 헤헤거리며 다시 짝꿍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본 싱글들이 만들어 낸 말이지 싶다. 자식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 흉을 잔뜩 보는 어머니에게 맞장구를 칠라 하면 이내 아버지 두둔을 하고 나서는 어머니를 보며, 그들의 세계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다 하는 어느 작가의 감상을 읽은 적이 있다. 문득, 지난 12월, 선배 언니 아들의 결혼식에서 본 광경이 떠오른다. 16년 전, 유방암 4기 진단을 받고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이 대학 가는 거까지라도 보고 싶다고 하던 언니가, 계속 항암 치료를 받으며 암과 동거하는 생활을 해오던 중에 그 아들이 대학도 가고,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가지 않을 수 없는 결혼식이었다. 곱게 한복을 입고 혼주 차림을 한 언니를 보고 괜한 감동에 울컥 눈물이 나서 급하게 인사를 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감정을 추스르고 식장에 들어갔다. 이 뜻깊은 결혼식을 제대로 보고 싶어 가장 잘 보이는 좌석을 찾는데, 마침 혼주 하객 테이블이 단상 바로 가까이라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테이블에는 혼주 중에서도 아버지 쪽, 그러니까 선배 언니 남편의 지인들이 나머지 자리를 채우는 바람에 실로 오랜만에 홍일점으로 앉아 식사를 하며 식을 지켜보았다. 육칠십 대는 되어 보이는 이 혼주 쪽 지인들은 서로들도 아는 사이인 듯,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그중 한 사람이 “저는 오늘 김장하는 날이라 좀 일찍 들어가 봐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귀가 쫑긋해졌다. 김장은 여자들의 일이고, 남자는 집에 있어봤자 걸리적거리는 존재라 집을 비워주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되는 게 오랜 가부장제 문화의 패턴인 줄 알았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 김장 때문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니 신선했다. 그러자 그 옆에 앉은 분이, “우리는 어제 했어요. 거기도 절인 배추 사서 하세요? 그걸로 하니까 훨씬 편해요.” 이런다. 아,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은퇴한 중산층 남자들의 대화란 말인가. 부부 관계의 신풍속도를 보는 듯했다.선배 언니의 남편은 운동권 출신이라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 지인들의 대화 중에 누가 옛날에 감옥 갔다 와서 어쨌고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강남의 부잣집 딸이었던 언니는 가진 거 하나 없는 시골 출신 운동권 남자에게 반해서 결혼을 했고, 그 후에 적잖이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언니가 덜컥 암에 걸리자, 집안일 한번 안 해본 남편이 살림과 간병에 뛰어들었고,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앞서는 마음과 서투른 일처리에 못 따라오는 몸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도 있었다고 들었다.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어도, 언니는 그런대로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고, 아픈 와중에도 정말 같이 못 살겠다 싶은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부부로 지내고 있다. (언니는 아직도 항암 중이다.) 2023년이 이런 이야기로 그럭저럭 훈훈하게 마무리 되어가던 무렵 또 다른 선배 언니가 암에 걸린 것 같다며 전화를 해 왔다. 기침이 생각보다 오래가서 병원을 찾았다가 덜컥 폐암 4기일지도 모르니 얼른 검사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마침 언니랑 아는 후배 하나랑 같이 셋이서 여행을 가기로 한 바로 전날이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 서둘러 예약한 숙소와 기차를 취소하려는데, 언니가 호기롭게, 어차피 지금 아픈 거도 아니고 검사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약 일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냥 여행을 가자고 고집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하면서도 같이 길을 나섰다. 정말 암이라면 치료하는 동안 여행은 힘들 테니 갈 수 있을 때 가자는 심산도 있었던 것 같다. 푸짐한 저녁과 뜨끈한 온천으로 몸과 마음이 노곤해진 우리는 언니로부터 평소 듣지 못했던 이야기도 들으면서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 그 후 언니는 다행히 폐암은 아니지만 역시 암은 암인 것이 밝혀져 항암 치료를 시작했고, 커플이 아니었기에 남편 대신 요양병원의 간호를 받으며 나한테 전화해서, 여기 아주 편하고 좋다, 라면서 만족스러워했다. (이 언니도 계속 항암 중이다.) 그리고 해를 넘겨 2024년 첫 주에, 어머니도 갑자기 암 진단을 받으셨다. 예후가 아주 좋지 않은 뇌 쪽의 림프종으로, 진단이 나왔을 때는 이미 종양과 부종이 오른쪽 뇌를 가득 채운 후였다. 그렇게 갑자기 발현되고 확산이 매우 빠른 암이라 일주일 전과 후의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어머니는 기저 질환이 없으셔서, 몸에 이상이 생겨도 혈압약을 드시는 아버지 쪽일 거라 생각했지, 어머니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괜히 항암으로 고생만 하시다 가는 것 아닐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대로면 일주일 안으로 돌아가신다는 의사의 말에 급하게 항암이 시작되었다. 뇌에 종양이 생긴 어머니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시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도 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착잡했고,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힘들어하셨다. 아버지는 자상하고는 거리가 먼 분이었고, 어머니가 한 번씩 나랑 길게 통화할 때는 주로 아버지에 대한 불평일 때가 많았다. 정말 이제는 같이 못살겠다는 말씀도 제법 진심을 담아 여러 번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지하게 들어드렸고, 정말 심각한 갈등이면 그냥 헤어지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도 해 보았다. 40대 때만 해도 부모님이 헤어지시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50대가 되고 나니, 뭐, 그리 큰일도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쓸데없는 커플 걱정이었다. 코로나 이후의 병원 규정 때문에, 어머니 옆에는 한 명의 지정 간병인만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간병을 고집하셨다. 그러나 돌봄 노동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간병이 서툴렀고, 그로 인해 하룻밤 새에 어머니가 세 차례나 낙상하는 바람에 골절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엑스레이까지 찍으셔야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처음 하는 일이라 그랬다고, 이제는 잘할 수 있다며 계속 간병을 고집하며 병실 안에서 버티셔서 우리는, 도대체 엄마가 몇 번을 더 낙상해야 포기하시려나 하는 심정으로 물러섰는데, 결국 밤새 간병하며 힘이 드셨던지 간병인을 부르라 하고는 시골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서투름으로 낙상하여 눈가가 시퍼렇게 멍든 어머니가 되려 아버지를 계속 찾아댔다. 간병인 돌려보내고 대신 아버지를 오라 하라고 하시는데, 이분들이 이렇게 서로 애틋한 사이였던가, 그동안 내가 들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불평불만은 다 뭐였단 말인가, 싶었다. 결국 아버지는 하루 만에 서울의 병원으로 돌아오셨고, 마침 간병인의 학대 정황도 잡히는 바람에 아버지의 간병 주장은 더욱 힘을 얻어 본격적인 아버지의 간병인 생활이 시작되었다.하지만 올해 만으로 여든이신 데다가, 최근에는 정신도 오락가락하시는 아버지가 간병을 하게 되면서 자식들은 환자와 간병인 모두를 살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더욱 정신이 없었다. 간병인 이외의 출입을 금지하는 병원 규정 때문에, 이리저리 눈치 보며 두 분의 상태 확인하고 필요한 것 나르고 하느라 동생과 나는 멘탈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병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아버지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사랑이었던가. 처음에는 간병이 서툴렀던 아버지는 이내 요령을 익히셨고, 일주일쯤 지나자 우리도 조금 마음을 놓게 제법 간병을 잘하셨다. 다른 일은 다 정신이 없으신데도 간병은 그런대로 잘 해내시니 그게 신기하기도 했고, 어머니도 심리적 안정을 얻으면서 만족스러워하셨다.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어머니의 뜻에 다 맞추었고, 전 같으면 언짢아하실 만한 일도 그냥 다 받아주셨다. 어머니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 부지런히 사다 나르고, 뒷일 처리며 부축이며 제법 능숙해지셨다. 다행히 항암이 잘 들어 최근에 2차 항암을 위해서 다시 입원을 하셨는데, 이제는 병원이 편하다며, 어머니랑 같이 있어서 좋으시단다. 잠시 쉬시게 하루라도 교대해 드린다 해도 다 괜찮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랑꾼의 모습이다. 정말이지 부부에게는 부부만의 신비로운 세계가 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친척 중에 평생을 남편에게 맞고 살았고, 나중에는 접근 금지 명령까지 내려놓고도, 결국 이혼을 안 하고 한집에서 (각방 쓰며) 같이 사는 부부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친척은, 부인이 외국에서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남편은 은퇴 후에도 홀로 한국에서 인스턴트 음식이나 배달 음식으로 매 끼니를 이어가며 몇십 년을 떨어져 사는 부부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내가 공부한 상식이나 경험으로는 부부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는데도, 이들은 부부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가톨릭 작가 소노 아야코는 부부 관계를 “불가사의한” (혹은 “알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이런 부부 관계의 속성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남이 개입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문제라는 뜻이다. 사실, 남이 개입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관계란, 비단 부부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소노 아야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선택한 원칙이고 “하나의 성역이어서 어떤 사람도 침범할 수 없다”라고 했다(남들처럼 결혼하지 않습니다, 218쪽). 그러니 당사자들 이외의 사람이 개입하기 힘들다. 그런데, 심지어 부모 자식 관계도 서로를 떠나는 시기가 있다면, 부부란 중간에 헤어지거나 일찍 사별하지 않는 한, 그 누구보다는 긴 시간을 꾸준히 서로를 상대하며 지내야 하는 사이이다. 그렇게 쌓인 시간 때문에 부부는 정말로 굵은 물줄기처럼 아무리 잘라도 잘리지 않는 무엇으로 묶이게 되는 것 아닐까. 몸으로 안다는 것은 비단 섹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몸이 내 몸인 양 만져도 아무런 설렘이 없는 그런 시간의 물리적 축적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이런 관계는 밋밋한 관계라고, 부부간의 로맨스를 살리라는 조언들이 넘쳐나는 것 같은데, 사실 이게 딱히 성경적인 말 같지는 않다. 바울은 정욕을 위해서 각자 한 명의 배우자를 두라고 했는데, 정욕은 로맨스와는 별개의 문제이고, 정욕이란 게 평생 있는 것도 아니고, 성별과 나이와 개인 성향에 따라 다 다르고, 한 대상에게만 느끼는 것도 아니라, 사실 이 규범은 그냥 혼자 살라는 대원칙을 따르지 못하는 대다수 사람을 위한 위안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오늘날에도 소수의 독신 수도자를 다수의 결혼한 평신도보다 우위에 둔다). 성경에서 일상적 부부 생활의 사례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든데, 그나마 오랜 세월 부부로 살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성경의 커플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떠오른다. 남편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지를 않나, 아내가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넘기지를 않나, 그러면서도 백세가 다 되도록 후손을 얻기 위해 성생활을 이어가는 이 부부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관계이다. 그렇게 보면, 부부는 사명으로 이어질 때 가장 단단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로맨스 운운하는 것은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C. S. 루이스가 그랬던가, 로맨스란 결혼이라는 차를 힘차게 출발시키는 엔진과 같은 것이라고. 아마도 그렇게 강력한 엔진의 발동이 없다면 결혼이라는 차는 제대로 출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로맨스의 역할은 거기까지. 그러나 오랜 세월 그 차를 계속 같이 타고 가다 보면, 로맨스라는 말로는 담기 부족한, 불가사의한 “쀼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 그것이 곧 결혼의 신비가 아닐까. 오늘도 아버지는 항암 치료하는 어머니 곁에서 행복하게 간병을 하고 계신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자기 위로의 위험
by Trevin Wax
2024-01-24
얼마 전 나는 Wired 인쇄판에서 “크라우드소싱 치료”를 통해 소셜 미디어에서 “자기 위로”(self-soothing)을 선호하는 우리 세대에 관한 통찰력 있는 칼럼 하나를 접했다. 검증을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온라인 “커뮤니티”로 전환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점점 더 “치료 말하기”를 의존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런 흐름이 실제로 치료를 담당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인해서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런 추세가 온라인에서 점점 더 많은 청중을 확보하는 일종의 치료의 대체 역할을 한다는 데에 있다. 대충 증세를 확인하고 의료 잡지 WebMD를 정독함으로, 자신이나 가족의 병명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잘못된 자신감처럼, 우리는 다양한 심리적 질병에 대해 조언을 제공하는 온라인 자기 계발 전문가와 자칭 치료사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 The Atlantic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이 시장에는 확실한 청중이 있다. “수많은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불안, 트라우마, 고통에 대해 더 잘 인식하라고 말하는 영향력 있는 치료사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인스타그램에는 불안한 고백과 치료 이야기로 차고 넘친다. TikTok 해시태그 #Trauma의 조회수는 60억 회 이상이다. … 5,500개 이상의 팟캐스트 제목에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들어있다.”우리 사회에 트라우마, 학대, 우울증, 불안, 그리고 독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단어를 초래하는 다양한 사회적이고 또 심리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된 전문가로부터 받는 치료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정신 건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방송하는 비전문가로 가득 찬 생태계, The Atlantic이 “치료 미디어”라고 부르는 세계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형성한다.”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불안 장애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접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겪는 문제까지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로 받아들이고” 있다.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각종 멍청한 진단과 단순한 해결책을 고려할 때, 틀린 말이 아니다.자기 위로와 관계 붕괴온라인 치료를 실제 관계에 적용하려는 시도보다 이 문제가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다. Wired 칼럼은 당신이 소셜 미디어의 세계가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공동체라는 환상에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설명한다. 정체성 그리고 당신의 느낌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과도한 자기만족에 빠지기 마련이며, 그건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까지 해를 끼친다.그러므로 대중 수준으로 격하된 치료의 결과로 일어나는 관계 붕괴를 목격하는 건 놀랍지 않다. 나아가서 대인 관계에서 긴장도를 높이고 모든 상호 작용에서 위기를 초래한다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녀가 하는 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신을 지금 가스라이팅하고 있어요.”“단지 사람만 틀린 게 아니에요. 그의 견해가 해로운 겁니다.”“당신이 굳이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건, 그가 틀림없이 여성혐오자이기 때문이지요.”“그녀가 당신하고 어울리지 않는 건 인종차별주의자이기 때문이에요.”“상사가 ‘당신은 함께 일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사실상 ‘당신은 우려먹기가 힘들다’라는 뜻입니다.” 내게 안정감을 주는 온라인 세계에만 갇혀서 끊임없이 자신의 관점을 검증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왜곡되고 해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기 쉽다. 갈등이 생기거나 힘든 대화를 해야 할 경우를 만나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을 비난부터 하기 쉽다. 상대가 당신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만을 옹호하는 경우에 그 태도는 당신 눈에 자기애에 빠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상대로부터 아무런 반발이 없어야, 당신이 옳았다는 의미가 된다. 자기 위로와 의심이러한 조건에서 관계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모든 불일치나 갈등이 누군가가 권력을 행사하거나 통제력을 유지하는 방법의 결과라는 의심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인간관계와 상호작용이 이뤄질 리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숨은 동기를 갖고 있다고?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더 나은 무언가를 열망하는 당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이와 같은 진단은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광범위하다. 물론, 분석이 사실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당신을 덮치려는 상사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사나 밈, 소셜 미디어 전문가가 어떻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을까? 모든 상황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치료 언어는 도움은커녕 해로울 뿐이다. 모든 경우를 똑같이 평면화해버린다. 더 나쁜 것은, 소셜 미디어 자체 검증은 나쁜 행동마저도 선의의 표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될 수도 있는 태도나 행동, 그래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할 대상이 도리어 당신의 선함을 드러내는 증거로 둔갑한다. 당신은 완고하고 고집이 센가? 전혀 아니다. 단지 당신은 당신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앞에서 굳건하게 버텼을 뿐이다. 당신은 교활하고 음흉한가? 아니다. 관계 탐색에 있어서 당신은 누구보다 영리하기에, 누구도 당신을 가지고 놀 수 없다. 당신은 너무 예민하고 항상 불안한가? 무슨 소리인가? 전혀 아니다. 당신은 단지 개인적인 모욕과 주변의 불공정한 분위기에 올바르게 적응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온라인 치료 크라우드소싱의 가장 큰 문제이다.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다 타인의 불의와 죄, 그리고 이기심 탓으로 돌리며, 그것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아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당신을 위로한다. 같은 비판에 괴로움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감을 느낄수록, 당신은 공동체에 참여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을 뿐이다. 자기 위로와 외로움의 감옥Wired는 또한 내가 작년에 언급했던 문제, 즉 “트라우마”와 “학대”와 같은 언어에 일어나는 희석 현상을 지적했다. 한때 정신 건강 커뮤니티에서 쓰이던 단어가 이제는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직원과 어려운 대화를 나누는 상사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직원이 ‘나는 지금 힘듭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건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내 감정이 상했기에 상사는 내게 학대자인 것이다. 또는 스트레스를 느끼기에 내 직업은 나를 “자극”하는 유해 장소가 되는 것이다. Wired는 이렇게 말한다. 정상적인 인간 갈등과 불일치를 훨씬 더 복잡한 것, 즉 학대, 정신병, 임상적 나르시시즘으로 병리화하기 쉽다. 이런 식의 단어를 씀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을 저주하는 건 매우 쉽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갈등을 해결하거나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대신 결국 벽을 쌓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은 전보다 더 외로워질 것이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킨다는 생각에 벽을 쌓았지만, 실제로는 나를 지켜주는 그곳이 감옥인 셈이다.이 모든 것이 진짜 커뮤니티를 죽인다. 갈등 없는 긴밀한 공동체란 불가능하다. 그 어떤 불일치나 갈등 없이 유지되는 공동체는 사실상 가장 천박하고 피상적인 우정으로 이뤄진 곳이다. 자기 위로와 교회이 모든 이야기는 그럼 교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더불어 사는 삶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형제자매들의 짐을 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때때로 형제자매, 그들의 존재가 짐이 되기도 한다. 그때야말로 당신은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다. 형제가 당신의 짐이 되어도 여전히 당신은 그 곁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단순히 조종당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를 참으셨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치료 대화로 이어지는 디지털의 특성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대화와 갈등 속에서 드러나는 디지털의 함정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참된 기독교 공동체는 누군가의 감정이 항상 옳아야 한다거나, 무언가가 항상 객관적인 진실로 여겨져야 한다는 생각과 공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체험 또는 개인의 특성과 동의어인 “나의 진실” 또는 “당신의 진실”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결코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호소하지 않는 한, 다른 신자들의 지혜와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오늘날의 치료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로 나아갈 방법을 찾지 않는 한, 그리고 죄와 회개, 용서와 화해, 수용과 열망을 추구하지 않는 한, 교회가 아무리 살아있는 공동체를 약속하더라도 사람들은 결국에 고립을 초래하는 피상적인 온라인 세계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제: The Danger of Self-Soothing Through Social Medi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읽지 않는 시대에 성경은?
by 박혜영
2024-01-23
전철을 타고 앉으면 전 아직도 책을 읽습니다. 후줄근한 면바지에 남방, 운동화, 거의 하얗게 센 숱 많은 머리, 안경을 코에 건 모습으로 책을 꺼내 들면 나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시대에 안 맞는 건 아닌지, 어떤 때는 살짝 위축됩니다. 그럼 나도 전자책 단말기를 사서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볼지 고려한 적도 있습니다. 이내 접었습니다. 종이 질감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봅니다. 책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전부 화면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뭘 보는지 궁금해서 다른 사람들 화면을 슬쩍 쳐다봅니다. 드라마나 게임과 같이 한 곳을 계속 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손가락을 밀면서 여기저기, 이곳저곳 화면을 휙휙 바꾸고 있습니다. 집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재미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세상입니까? 책은 널려 있고, 얼마든지 살 수 있고, 누구라도 글을 읽을 수 있지만, 점점 고루한 물건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증상, 또는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학생이지만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일이 있답니다. 읽기는 읽지요, 한글이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수능 시험에서 국어가 극히 어렵게 출제된 적이 있습니다. 문제 자체가 복합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었기에 국어 시험인지 과학 시험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다른 진단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문제 자체가 어렵기도 했지만, 예시된 지문이 아주 길어서 디지털 문장에 익숙한 학생들은 줄거리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분석이었습니다. 뉴스에서 그 국어 시험을 다룰 때 저도 얼핏 본 기억이 있는데, 정말 긴 지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한 번 읽고 파악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건 극단적인 경우라 치고, 읽은 내용을 이해 못 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생활하면서 아예 읽을 일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만은 사실 아닌가요? 여러분은 최근 호흡을 길게 하여 30분 정도 한자리에서 무엇이든 읽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 지금 이 글이라도 읽고 있습니까? 읽지 않아도, 서로 길게 대화를 이어가지 못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습니다. 일상에서는 무언가 물어보거나 처리하는 데 필요한 정도로만 말하고 쓰면 되지, 길게 대화하거나 길게 뭘 쓸 일이 없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대방을 보면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일도 어려워지고 있다는 겁니다. 요즘은 주로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전달하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인간관계도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무슨 단어를 써서 자기 느낌을 전달해야 할지 모르고, 자기 뜻을 전달하기 위해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데, 만나서 말하라고 하면 서로 오해만 쌓일 겁니다. 청소년들은 거의 헐, 대박, 빡쳐 뭐 이런 말로만 자신을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까? 청소년 남자아이 셋이 제 뒤에 걸어오면서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화는 아니고, 잡담 같기는 한데 말할 때마다 욕을 하니 ‘담(談)’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그냥 ‘떠들기’였습니다.역시 저는 구시대인가요? 교회와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뇌의 읽기 회로에 변형이 생겨, 주의집중과 깊은 생각이 불가능하며, 난독증이 늘어날 거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런 책(다시, 책으로)을 살펴보다가 “위기에 처한 깊이 읽기”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깊이 읽어야 깊이 생각할 텐데, 읽지 않아도 아무 지장 없고 답답하지도 않은 세상이 되었으니 개념을 모르는 사람은 늘어날 테고….“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는 성경 말씀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믿는 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믿는 도리”를 담은 책을 읽지 못하고, “믿는 도리”에 대한 설교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과연 ‘신자’ 곧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는 도리”를 읽지 않는 시대에 ‘믿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유튜브 세대에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요구는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지금도 그런데! 옛날에는 글을 모르고, 책이 없어 스테인드글라스에 성경 장면을 그렸다면, 너도나도 읽을 수 있고 여기저기 성경책이 있는 데도 다시 스테인드글라스에 성경 장면을 그려야 하는 시대로 되돌아갈 것만 같습니다. 돌아다니는 일은 확 줄이고, 화면은 멀리하고, 차분히 자리에 앉아 영원한 말씀을 읽으며,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신자와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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