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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하나님. 그는 선한 일을 하신다, 우리가 아플 때...
by Garrett Kell
2024-04-26
조지 뮬러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가장 큰 영감을 준, 교회 역사가 자랑하는 성도의 한 사람이다. 고아들을 섬긴 사역과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한 그의 기도는 특히 유명하다. 그의 자서전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기도문과 하나님의 신실한 응답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그는 무려 5만 번이 넘는 기도 응답을 받았다.) 그에 관한 많은 전기가 나왔고 그건 당연하다. 뮬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에 대한 깊은 신뢰로 특징지어진다. 많은 사람이 어리석고 추정에 불과하다며 평가절하하는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었던 뮬러는 결코 자신의 필요를 채움 받지 못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에게 선하셨다. 그렇다고 뮬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를 가슴 아픈 시련에서까지 면제시킨 건 아니다. 그는 자녀 세 명을 잃었고, 끊임없는 육체의 고통을 견뎌야만 했으며, 불신자로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두 명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 모든 고통에 대한 뮬러의 반응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 속에 담긴 소망을 만난다. 고통은 신앙을 단련한다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질병이나 불화, 배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일상적인 위안은 그 빛을 잃는다. 편안한 소파와 잔고가 넘치는 은행 계좌만으로 고통 속에서 경험하는 질병과도 같은 어려움을 보상받을 수 없다. 어두운 시간에 의지할 대상은 오로지 한 분, 전능하신 하나님뿐이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홀로 서 있을 때,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과연 내가 하나님을 진짜로 믿는지 씨름한다. 뮬러가 믿었던 것처럼, 정말로 하나님이 선하시고 주권적이라면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을 허락하실까?평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태양이 빛나고 꽃이 피어날 때 온 세상은 그의 자비로 넘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의 재난이 불어닥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사라진 것만 같다. 어두운 구름은 온통 회색으로 바꾼다. 고통의 찬 바람이 우리를 물고 또 찌른다. 우리의 영혼은 하염없이 무감각해져서 하나님도, 모든 사람도 포기하고 싶어진다. 아예 모두로부터 멀리 물러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의심으로 가득한 그 순간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굳게 붙드신다는 사실이다.누구도 고난에서 면제될 수 없다. 고통은 삶의 일부이다. 내가 견뎌야만 했던 어려운 시기 내내, 뮬러의 삶에서 일어났던 한 가지 특별한 이야기가 내 믿음의 부표가 되어 나를 붙잡아 주었다. 메리 뮬러의 죽음결혼한 지 39년이 되던 해에 뮬러의 첫 부인 메리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알려진 류마티스열에 걸렸다. 아내의 마지막 순간에 뮬러는 그녀에게 시편 84:11을 읽어주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뮬러는 마지막 구절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나는 나 자신이 불쌍하고 쓸모없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나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나에게 정말 좋은 일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아무리 아프더라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녀를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좋지 않은 일입니다.1870년 2월 6일, 메리는 뮬러의 고백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아내가 죽은 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뮬러는 살렘 채플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렸다. 뮬러의 말에 충격을 받은 참석자 한 사람이 그의 말을 기록했다.그리스도 안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던 사랑하는 아내를 당신의 품 안으로 데리고 가신 주님의 자비에 진심 어린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감사와 찬양에 여러분도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나는 이 모든 게 다 아내의 행복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기뻐합니다. 아내가 이 땅에서 알았던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 바로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주님을 바라보는 지금 아내가 얼마나 행복에 겨워 기뻐할지를 생각하며 나도 함께 기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서 이 부족한 종이 그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 유족의 마음이 말할 수 없는 상실감 대신에 그녀가 가져다준 축복으로 가득 차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뮬러의 힘 있는 설교2월 11일에는 약 1,200명의 고아와 수천 명의 슬픔에 잠긴 친구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했다. 뮬러는 고질적인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날 장례식 설교를 했다. 본문은 시편 119:68이었다. “선하신 주님, 당신은 선한 일을 행하십니다.” 그는 설교에서 간단하면서도 감동적인 세 가지 요점을 제시했다. “주님은 선하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다….”1. “내게 아내를 주셨다….” 2.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내 곁에 있게 하셨다….” 3. “그녀를 데리고 가셨다.” 아내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은 평안했고 내 마음은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가능한 이유는 …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선한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가? 당신의 삶에서 말이다. 이생에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들 가운데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바로 이 순간 또는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몰라도, 당신이 고통의 어두운 날을 지날 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진실보다 더 영혼에 안식을 주는 것은 없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선하심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안에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하는 것보다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로마서 8:32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는가”라고 말한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선하시며 선을 행하신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시고 그를 무덤에서 살리심으로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셨다. 도저히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아무런 의도 행하지 않은 우리를 살려주셨다. 영원히 우리 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과 적이 되셨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은 버림받으셨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못 주실 게 뭐가 있겠는가? 뮬러는 상실의 슬픔 중에서도 모든 것이, 심지어 고통까지도 인도하시는 주권적이고 선한 손이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뮬러에게 주신 은혜를 오늘 우리에게도 허락하시길 간절히 바란다. 출처: God Is Good and Does Good-Even in Our Pain
벌레 같은, 그리고 소중한
by Trevin Wax
2024-04-23
2011년, 오랫동안 사랑받던 토크쇼 ‘오프라’의 마지막 편을 보면서 나는 오프라 윈프리라는 진행자의 존재와 그녀가 미국 생활에 끼치는 놀라운 영향력을 목격했다. 그날 가장 강하게 내 인상에 남은 장면은 그녀가 시청자와 팬에게 남긴 권고였다. 당신은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말이었다. 그녀는 청중을 향해 계속해서 이 문장을 주문처럼 반복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이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이며, 인스타그램 현장, TV, 영화, 비공개 및 공개된 대화에 쉬지 않고 등장하며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더 강한 자존감의 추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뿐 아니라, 정신 건강과 정서적 안정에 초점을 맞춘 치료 문화의 일부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말을 반복해서 또 충분하게 들을 때면 아마도 당신은 자신이 받는 축복이 과분하다고 느끼는 부적절함을, 또는 여간해서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까지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소중하거나 아니면 벌레이거나?신학적인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예배와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선언하는 수많은 찬양에 익숙한 신자라면 쉬지 않고 서로의 “소중함”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은혜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자에게 과분한 사랑을 베푸신다는 게 아닌가? 탕자 비유의 핵심은 자신이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눅 15:21)는 탕자의 고백이다. 또 다른 비유는 충실한 사람들을 “자격 없는 종들”로 묘사한다(눅 7:7-10).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전 15:9)고 주장했다. 공동기도서가 드러내는 우리의 역할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님의 식탁에 다가갈 수 있는, “합당치 않은 죄인”이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많은 찬송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 사이의 깊은 협곡을 강조한다. 존 뉴턴은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를 “감미로운 소리”(sweet sound)라 생각했는데, 그건 은혜가 비참한 자기(a wretch)를 구원했기 때문이다. 이삭 와츠(Isaac Watts)도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라며 감격했다. 그리고 찰스 웨슬리의 위대한 삼위일체 찬송인 “아버지, 아들, 성령”은 신자의 고백 (“나 같이 불쌍한 벌레”)과 거룩함의 영광스러운 부르심(“당신의 큰 영광이 살아나기를 원하나이다”)을 병치시킨다. 이 찬송은 시편 기자의 절망(시 22:6)과 빌닷이 욥에게 한 연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인간의 죽음과 유한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벌레와 구더기를 사용했다(욥기 25장).인간 죄성의 파라독스 말씀과 찬양에서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려는 유혹에 대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가치”에 대한 지나친 강조의 수정이 단지 “벌레 신학”이라고 불리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 반대편에 원죄라는 역설 속에서 힘을 잃도록 만드는, 인류를 타락시키는 또 하나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다.성경은 두 가지 진리를 동시에 가르친다. (1) 우리는 내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엄청나게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이다. (2) 우리는 비천한 죄인이고 따라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인간의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은혜는 당연한 결과가 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말 가치 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가면 회개가 불필요하다. 당신처럼 가치 있는 존재를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면에 인간의 타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은혜가 무력해진다. 벌레에 불과한 나는 결코 결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 방향으로 가면 회개가 불가능하다. 나 같은 놈한테 굳이 하나님이 왜 관심을 가지시겠는가? 그러나 성경이 드러내는 인간의 초상화는 훨씬 더 설득력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는 인류의 완전한 죄성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까지 모두 다 발견한다. 본문에 충실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진리,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함과 가치, 그리고 우리를 아예 구원받을 자격이 없도록 만드는 죄의 만연함을 같이 강조해야 한다. 저주받은 그리고 위대한오프라 윈프리 버전의 미국 민속 종교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죄를 조금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거의 신성한 존재, 우주의 중심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신자들 사이에서 그런 실수에 대한 더 극단적인 반응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을 단지 절망적으로 타락한 존재, 그래서 한동안 이 땅에서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하다고 상상하게 만든다. 성경이 그리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이 아닌) 우리를 대단히 가치 있다고 착각하는, 스스로 신격화한 상태에 빠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를 항상 가치 없는 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타락한 상태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둘 다이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동시에 위대하다. 우리는 미녀와 야수이다.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의 비참함이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위대한 영주의 비참함, 쫓겨난 왕의 비참함이다.”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형이상학적으로는 더 나은 존재지만, 도덕적으로는 더 나쁘다.”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한다.나 ‘자신’은 선과 악, 영광과 수치가 복합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 인간이라는 존재(우리 자아 또는 개인의 정체성)는 부분적으로는 창조의 결과(하나님의 형상)이고, 부분적으로는 타락의 결과(훼손된 형상)이다. …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존엄하지만, 타락했고 반항하기에 천성적 죄성을 가진 지킬이요 하이드, 선과 악이 마구 뒤섞인 악동이다. 나는 고귀하면서도 천하고, 아름답지만 추하며, 선하면서도 악하고, 정직하면서도 비뚤어진, 하나님의 형상이자 마귀의 종이다. 나의 진정한 자아는 창조의 형상,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시려고 오신 모습이다. 나의 죄악된 자아는 타락으로 인한, 그리스도께서 멸하러 오신 바로 그 모습이다. 두 가지 경이로움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첫째, 인간의 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인류에 대한 지나친 긍정으로 모두에게 자기사랑의 세례를 주는 오프라 윈프리의 자기애와 자기 가치에 대한 관점을 기독교 용어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는 진술과 말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한 접근 방식은 우리 문화가 드러내는 자존감에 대한 집착을 기독교식 포장으로 위장하는 위험이 있다. 둘째, 첫 번째 거짓에 맞서는 방법이 단지 “벌레 신학”의 지나친 강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인간의 죄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가치와 소중함을 망각시키는 과잉 반응도 함께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 않게 조용히 우리 속에서 고귀함을 향한 열망을 일깨울 것이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통해 죄악된 사슬이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걸맞은 더 높은 소명을 향해서 우리 모두 나아갈 수 있다. 키스와 크리스티 케티(Keith and Kristyn Getty)가 페르난도 오르테가(Fernando Ortega)와 함께 찬양했듯이 말이다. 내가 고백하는 두 놀라움나의 가치와 나의 무가치함내 가치는 고정됐고, 내 몸값은 지불됐어바로 십자가에서.출처: Both Worm and Worthy
모세의 놋뱀
by 전재훈
2024-04-22
성경에 뱀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와를 꼬드겨 선악과를 따 먹게 한 짐승이 뱀이고,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자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물게 하셨고, 심판의 때에 하나님이 멸망시키실 날랜 뱀,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사 27:1)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속에서도 지혜를 상징할 때 뱀이 나오기도 하지요. 뱀은 12간지 60갑자를 논할 때도 나옵니다. 12지는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입니다. 이 중에 뱀은 여섯 번째에 등장하지요. 뱀이란 짐승은 겨울에 땅 밑에서 겨울잠을 자고, 성장하면서 허물을 벗기도 하는데요. 이런 뱀의 특징을 보고 무속신앙에서 뱀은 부활의 상징이고 치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뱀이 치료의 상징으로도 쓰이고, 전령의 상징으로도 등장합니다. 의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는 자기 딸들에게 몸 단장할 때 뱀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군의 의무병들은 지팡이에 한 마리 뱀이 감겨있는 상징을 사용했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뱀이 전령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뱀이 땅 아래와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신과 인간의 사이, 혹은 생명과 죽음의 사이를 왕래하는 것으로 여겨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상징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지요. 헤르메스의 지팡이에는 뱀이 두 마리가 휘감겨 올라가는 모습이고, 좀 더 빨리 다니라고, 지팡이 끝에 날개를 달아놓았지요.그런데 미군 의무병은 영국군 의무병이 쓰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헤르메스의 지팡이와 착각을 하는 바람에 자신들 상징으로 뱀 두 마리가 달려 있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영국보다 미국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누르고 전 세계 의술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한국에 와서는 뜬금없이 그 출처가 모세의 놋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올렸는데 이것을 본 백성들이 살아났다고 해서, 마치 놋뱀이 불뱀병을 치료한 것인 양 여겨진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더니 모세의 놋뱀을 알고 앰뷸런스 마크를 딱 보는 순간 그냥 확신해 버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구슬을 잘못 끼웠지요. 이스라엘에서도 모세의 놋뱀을 분향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히스기야 시대에 부숴버리고 느후스단(놋조각)이라고 명명했지요. 놋뱀은 그냥 놋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 특별한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놋뱀이 한국에서 상징으로 부활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뱀은 4단계로 진화를 합니다. 그냥 뱀이 커서 구렁이가 되고, 구렁이가 이무기로 자랐다가, 여의주를 입에 무는 순간 용으로 변신하지요. 이런 탓에 뱀은 신성시되기가 쉬웠고, 팔레스타인에서도 하늘을 나는 뱀의 신화 비슷한 것이 있었던 탓에 놋뱀이 마치 그런 하늘을 나는 용 취급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뱀은 정력에 참 좋은 짐승이라고들 하지요.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선악과 대신 뱀을 먹었을 거라는 농담이 있던데, 그만큼 한국에서는 뱀이 살기 참 퍽퍽한 곳입니다. 뱀의 허물도 한국에서는 귀한 약재로 쓰인다고 하니, 뱀이 치유의 상징이 되는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친숙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 땅을 지나갈 때 우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에돔 땅에서 맛있는 음식을 좀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졌던 것이지요.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불뱀들을 보내어 물게 하셨지요. 그들은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민 21:7)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놋뱀을 만들게 하셨고 그 놋뱀을 보는 자마다 다 살게 하셨습니다. (보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도, 고열에 시달려 누워있는 자도 다 살리셨을 테니까요.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표현입니다.)이스라엘은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불뱀이 물러가게 해 달라는 거였지요. 이런 기도는 기도하는 순간조차 불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뱀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시는 방법으로 놋뱀을 사용하셨습니다. 에돔 땅의 음식에 빼앗긴 시선을 다시 하늘로 돌리시는 사건이 바로 놋뱀 사건이었지요.예수님은 이 놋뱀 사건을 비유로 들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요 3:16)라고 하셨지요.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불뱀 주고 놋뱀 준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광야 길을 가게 하시려는 사랑의 표현이었지요. 나중에는 그 불뱀에 물려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 친히 그 불뱀에 물려 죽을 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게 하심으로 그 사랑의 크기가 어떠했을지 보여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줄 것을 바라보며 놋뱀을 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헤아리기 힘든 엄청나게 큰 사랑이었습니다. 놋뱀이 앰블런스의 상징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모세의 놋뱀으로 대체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뀌기 전까지는 헤르메스의 지팡이와 모세의 놋뱀은 구분되어야 하고, 놋뱀마저도 치료의 힘이 아니라 사랑의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권리는 무엇인가
by 이춘성
2024-04-17
지난 3월 4일, 프랑스 의회는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에 담는 헌법 수정안을 의결하였다. 프랑스 국민의 85퍼센트가 이를 찬성하였고, 우파의 지도자조차도 반대하지 않았다. 낙태권을 명시한 수정 헌법의 전문은 간단하다.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률로 정한다”(프랑스 헌법 34조). 이는 낙태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 조건을 하위 법률로 정한다고 하지만, 이는 낙태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는 범위에서만 가능한, 명실상부한 낙태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프랑스가 낙태를 권리로 정하게 된 것은 현대인의 권리에 대한 강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 이유는 현대인이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장받고자 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체주의의 지배 아래에서 개인의 철저한 파멸이라는 양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서양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권리는 일종의 국가와 사회의 폭력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를 보호하는 윤리적 가치로 승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시작이 아무리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현재 개인주의는 일종의 개인과 개인, 권리와 권리의 투쟁이 되어 버렸다. 그 중간 지대로, 대화와 타협, 보류 등과 같은 어색한 영역과 지루한 시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자신이 손해 볼 것이고, 현대인에게 손해란 자신이 부정당하는 살인(인격 살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이렇듯 권리 충돌의 시대를 살고 있다. 대화보다는 권리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영역 표시의 동물적인 세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권리는 확대되고 있지만, 권리의 의미와 명예는 그 어느 때보다 가볍다. 프랑스 의회의 낙태권 수정 헌법 통과를 반대한 프랑스 상원 의장인 제라르 라르셰는 프랑스의 헌법이 “사회권의 카탈로그”가 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헌법은 개인의 권리를 전시하고 항목을 선전하는 카탈로그라는 것이다. 이렇듯 권리의 전시장이 되어 버린 현대 사회 속에서 기독교는 어떤 권리를 주장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가 주장하는 권리는 과연 세상에 복음을 변증할 수 있을까? 나는 이십 대 후반에, 바다가 인접한 산골짜기의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인생을 살 것이라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도와 독서로 시작하는 하루와 노동이 어우러진 삶은 이상적으로 보였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의 고통을 들어주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 되는 듯한 착각을 만들어 주었다.그러던 어느 날, 태풍이 찾아왔고, 우리의 터전은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되었다. 공동체 사람들은 재난을 피해 도망쳤고, 전기는 끊겼으며, 차길 위에는 어느 산에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바위가 피난 길을 막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새벽 6시부터 해가 지는 저녁까지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노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3개월이 지나서야 마당의 흙과 바위를 치우고, 집을 수리했다.그런데 어느 날 저녁, 술에 취한 오토바이를 탄 한 사람이 찾아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돈을 달라고 했다. 그는 마당에서 일을 도와준 고용된 일꾼이었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가 고작 하루치 돈을 받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40만 원도 되지 않는 사례금을 몇 달 동안 받지 못하고 밥만 먹으면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 소리치며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당신은 이렇게 권리만 주장하느냐고 화를 냈다. 나는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문득 그때의 일이 20년이 지난 지금 떠올랐다. 그때의 공기와 온도, 분위기가 모두 생각났다. 아마도 그 이유는 지난 주일, 내가 어느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이 아직도 내 안에 메아리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토요일 오후 갑자기 어떤 목사님이 문자를 보내서, 자신이 코로나에 걸려 주일 설교가 어려우니 주일 1, 2부 설교를 부탁한다고 했다.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으면 나에게까지 연락했을까 하여, 거절하지 않고 수락하고 주일 설교를 준비했다. 그러면서 ‘이 설교는 그 교회 성도들이 아닌 나에게 하는 설교입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에 설교의 내용이 아직도 내 안에 메아리가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20년 전 그날 밤의 일이 후회된다. 나는 낮아지려고 그 산속으로 온 것인데, 그곳에서 나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내가 당신의 고용자라고 소리 높여 나의 높음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모두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그는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렀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내 이름을 포길 할 때만 스스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이름 없는 자의 정체성을 받은 자들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이 없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빌려 쓰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이름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여전히 나는 나의 권리를 중요하게 생각할 때가 많다. 권리의 전쟁터에 참전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고 싶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권리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넓힐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난 할 말이 없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사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육신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권리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권리 아래 폭력에 희생당할 때, 그래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보여주신 복음의 역설이다.“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
본회퍼에게서 배우는 ‘맹점’의 진실
by Devin Maddox
2024-04-09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 - 1945년 4월 9일)에릭 메탁사스의 디트리히 본회퍼가 출간되자 일부 본회퍼 전문가들이 이 책을 비판했지만, 디트리히 본회퍼의 이름을 이보다 더 널리 알린 책이 있는지 따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 독자들은 오랫동안 본회퍼의 Discipleship, Life Togeth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을 읽었지만, 메탁사스의 이 대작은 본회퍼를 다시금 알려주는 전례 없는 영향을 끼쳤다.메탁사스의 많은 독자가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본회퍼의 삶에 대한 세부적인 부분들을 알게 되고서는 놀란다. 에버하르트 베트게의 비길 데 없는 걸작 디트리히 본회퍼가 영어로 번역되어 나오면서 대중이 접할 수 있었던 본회퍼의 삶에는 여전히 모호한 부분이 많았지만, 메탁사스의 책이 본회퍼 학자나 역사가들이나 알 수 있던 그런 것들을 일반 독자들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메탁사스에게 큰 빚을 졌다. 본회퍼가 걸어간 삶의 여정을 읽어 알게 된 독자들은 본회퍼가 미국에 체류하던 시기, 특히 그가 뉴욕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본회퍼가 할렘(Harlem)에 있는 [미국 흑인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상징이 된] 아비시니안 침례교회(Abyssinian Baptist Church)에서 예배하고 청소년 사역에 참여한 경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흥미를 느낀다. 사람들은 또 본회퍼가 프랭크 피셔(Frank Fisher)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과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눴다는 사실에 감명받는다. 프랭크 피셔는 본회퍼를 하워드 대학교(Howard University, 워싱턴 D.C.)에 데려갔었는데, 그 지역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피셔는 입장을 거부당했다(본회퍼는 그곳에서 식사하는 것을 거절했다). 사람들은 본회퍼가 미국 남부 딥 사우스(Deep South) 지역을 방문하고 흑인차별의 실상(Jim Crow)을 그의 두 눈으로 확인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충격을 받는다.본회퍼의 이러한 경험은 그의 삶에서 인종차별에 분명한 확신을 갖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그의 이해력이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본회퍼에게도 맹점이 있었다.예를 들어, 디트리히 본회퍼가 미국에서 박사후과정을 공부하는 동안에 그의 형 카를 프리드리히(Karl Friedrich)와 주고받은 다음 편지를 살펴보자.카를-프리드리히 본회퍼에게:남부 주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기차 여행에는 분리가 아주 사소한 데까지 퍼져 있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로는 흑인들의 자동차가 대체로 다른 자동차들보다 더 깨끗해 보였습니다. 백인들이 객차 안에 붐빌 때도 흑인 전용 객차 안에는 흑인이 단 한 명만 타고 있기도 해서 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남부 사람들이 흑인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면 혐오스럽기만 합니다. 이 점에서 목회자들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건 없습니다. 나는 남부 흑인들의 영가가 아메리카에서 이루어진 가장 위대한 예술적 성취라고 확신합니다. 형제애, 평화 따위를 외치는 구호가 엄청나게 많은 나라에서 아직도 이런 것들이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DWE 10권, 269)디트리히 본회퍼, 1931년 1월 2일본회퍼의 형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답신했다.디트리히 본회퍼에게:네가 흑인 문제를 이렇게 철저하게 탐구할 기회를 얻었다니 기쁘다. 내가 거기에 있었을 때 나는 그것이 적어도 양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하버드 임명 취소 통보를 받았을 때 내가 그곳으로 완전히 이주하기를 꺼린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나 자신도 그런 유산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내 장래의 아이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 문제가 어떻게 바로잡힐 수 있는지 정말로 알 수 없고, 이게 수학에서처럼 실제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는 것만 같다. 어쨌든 우리의 ‘유대인 문제’는 그것에 비하면 농담에 불과하다. 여전히 이곳에서는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적어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그렇지 않다. (DWE 10권, 276)카를 프리드리히 본회퍼, 1931년 1월 21일돌이켜보면 독일의 상황에서 인종차별과 싸우는 데 직접 헌신하게 될 두 사람이,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되기 불과 2년 전에는 어떻게 진실을 보는 데 맹점이 있었는지 놀랍다. 소위 유대인 문제는 사실이지 농담이 아니었다.그러나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은 농담이 아니었다. 본회퍼 형제는 자기 나라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의 심각성은 과소평가했지만, 미국의 심각한 문제는 분명하게 보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두 나라 상황 모두에서 인종 편견은 끔찍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다. 우리는 다른 상황에서는 맹점을 쉽게 식별해 내면서도 우리 자신의 맹점은 키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맹점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이게 바로 맹점이라는 적절한 이름이 붙은 이유이다).맹점을 극복하는 방법을 본회퍼에게서 배울 수 있는 세 가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1. 나에게 맹점이 있다고 가정하라.그가 감옥에서 쓴 글로 보자면 본회퍼는 평균 이상의 자기 인식 수준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 중 가장 자기 인식이 강한 사람조차도 맹점을 키운다. 맹점을 극복하는 첫 단계는 이렇게 가정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볼 수 없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래야 우리는 회개의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2. 외부인을 초대하여 나의 맹점을 진단하라.그리스도인들은 외부 책무성(external accountability)을 원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이것이 맹점을 극복하는 데 고통스러운 부분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에 (그리고 교리에) 맹점이 있는지 검토해 달라고 청해야 한다.3. 자기 인식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하라.마지막으로, 본회퍼와 같은 삶을 이어가려면 자기 인식의 성장에 높은 가치를 두어야 한다. 자기 평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로부터 배움을 통해 우리가 자신과 이웃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함께하는 삶(Life Together)의 복을 누릴 수 있다.출처: Bonhoeffer and Blind Spots번역: 김은홍
성찬식과 우상숭배
by 박혜영
2024-04-08
고난주간 수요일 저녁에 모이는 성찬식(주의 만찬) 참석을 위해 매번 성도들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시간을 내는 일도, 가장 붐비는 퇴근 시간에 모임 시간에 맞추어 안양에 도착하는 일도, 동네를 돌고 돌면서 차 댈 데를 찾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가 수요일 저녁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찬식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을 얻고자 하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귀한 것을 얻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살펴보니 제가 성찬식에 대한 글을 다섯 편이나 썼습니다. 여러 번 강조한 셈입니다. 20년 전 분립개척을 시작하면서 성찬식에 대한 저의 질문은 이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성찬식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면, 신자들은 성찬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적이 있는가? 애조 띤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음이 좀 짠해지는 그런 순간 말고, 진정 믿음이 견고해지고,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용기를 얻고,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고, 심지어 몸과 마음에 치유가 일어나는 그런 은혜의 경험이 있는가? 성찬식이 진정 은혜의 방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그렇다면 교회의 성도라면 질문해야 합니다. 성찬식에서 “참된 양식” “참된 음료”를 먹고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린도 교회가 하나의 반면교사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 11:20). 좀 더 정확한 번역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먹은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니”(ESV). 그들은 주의 만찬이라고 하여 먹었습니다. 그런데 참된 주의 만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원하는 신자들끼리 모여 먹고 마신 일에 불과했습니다. 성찬 신학이 빠져 있고, 성찬 신앙이 빠져 있는 주의 만찬은 그냥 음식을 먹고 마신 시간에 불과합니다.고린도 교회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우상숭배 문제, 곧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고전 10:21)하는 것인데, 저들은 겸하여 참여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내에 분쟁이 있었고, 차별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 11:22).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성찬식은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찬의 말씀으로 그 첫 번째 문제,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거나,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는 문제를 살짝 다루었습니다.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식을 자랑하며 강한 척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참고. 고전 8:1). 그러면서 이방신의 신전에서 열리는 연회나 친목 모임에 참석하여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친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 다음 교회로 모여서는 주의 잔을 마시고 주의 상에서 받아먹었습니다. ‘뭐, 어때!’ 하면서…. 오늘날 교회 신자들 가운데 다른 신전에 가서 절하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취직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 월급을 받고,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 먹고 마시면서 그렇게 해야만 만나주는 거래처가 주는 돈으로 먹고산다면, 그 신자의 주인은 과연 누구입니까? 우상숭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직접 규명했습니다.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나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마음과 관심은 어느 것 하나를 중히 여기거나 경히 여기기 마련이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소득이 많아지면 생활 규모를 늘리고, 생활 규모를 늘리면 유지하거나 더 늘리기 위해 더 많은 소득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더 바쁘게 더 많이 일해야 하고, 그러면서 신앙은 점점 경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냐고. 우리가 그런 상승기류에 사로잡혀 있다면, 성찬식이 은혜의 방편이라는 말은 아마 경험하기 힘들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진리를 가려버리는 그 알약
by Peter Gurry
2024-04-04
2016년 여름, 한 과학자 그룹이 새로운 세계 지도책을 출판했다. 그 지도는 새로운 운송 경로에 관한 것도 또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심해 지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의 빛 공해 지도였다. 끔찍한 소식이었다. 그 지도에 따르면 미국인의 80퍼센트는 인공조명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은하수를 볼 수 없다. 인공조명은 여러 측면에서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이상 은하수를 볼 수 없게 된 우리는 뭔가를 잃어버렸다. 그 지도를 만든 수석연구원의 말이다. “문학, 종교, 철학, 과학은 물론 모든 예술도 하나같이 밤하늘을 보면서 고민하던 인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제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볼 가능성이 없이 자란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그리스도인에게 문제는 더 심각하다. 다윗이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밤하늘이었다(시 8:3-8).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곳도 하늘이었다(시 19:1). 별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보편성 때문에 오히려 특별하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별을 볼 수 있다(3절; 롬 10:18). 산이나 바다, 동물을 누구나 다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빛 공해가 이런 현실을 바꾼다. 그렇다고 실수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다윗이 들었던 것과 똑같은 메시지를 보내신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우리가 과학기술로 가려버렸다. 우리의 차이를 가려버리는 소음하늘과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우리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이다. 그리고 하늘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하나님에 관해서 증언한다. 몸은 우리 자신에 대해(잠 19:13-14; 벧전 3:7),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서(창 1:27; 시 8), 그리고 우리의 구속에 대해서(엡 5:31-32)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성-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전등이라는 기술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모호하게 만든 것처럼, 인간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인간의 성적 차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주요 기술은 1960년 FDA의 승인을 받은 경구 피임법이다.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경구피임약이 수많은 약 중에서 우리가 단순히 “알약”(the Pill)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약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기술은 여성에게 전례 없는 독립의 시대를 열었고, 따라서 출산을 연기하고 교육을 추구하며 정규직 고용을 추구하는 여성의 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세대의 머릿속에 있던 섹스와 출산 사이의 연관성을 단절시켰다. 경구 피임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무과실 이혼, 동성결혼, 그리고 오늘날의 트랜스젠더 운동의 초석이 놓였다. 더불어서 ‘임산부’ ‘수유’ ‘생리하는 사람’ 등의 용어에도 새로운 뉘앙스가 더해졌다. 피임약이 이를 가능하게 한 이유는 Mary Harrington이 쓴 것처럼 “남녀 간에 가장 줄일 수 없는 차이, 즉 임신 여부라는 차이를 사라지도록 약속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어떤 의미에서 교육학이며, 피임약은 여성의 출산 능력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출산을 고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성관계를 하고 싶은 남성의 욕구에 더 적합한 환경을 만들었다. 이런 역사는 광범위한 피임법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예상치 못한 결과의 하나인 혼외 출산의 극적인 증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George Akerlof와 Janet Yellen은 거의 삼십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다소 갑작스럽게 낙태와 피임의 증가가 목격되고 있다. 이를 생식 기술의 충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혼외 출산의 증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낙태와 피임으로 인해 미혼모가 줄어들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기가 생겨도 굳이 결혼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2014년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무려 40퍼센트가 결혼이라는 보호의 테두리 바깥에서 태어났다. 1960년에는 그 비율이 고작 5퍼센트에 불과했다. 과거에는 남자가 임신시킨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느꼈지만, 그런 의무감은 피임약의 보급과 함께 줄어들었다. 아니, 여자가 피임약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생식 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남자가 임신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초기 많은 여성 권리 운동가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남자는 이제 섹스에 대한 책임감에서 점점 더 해방감을 느낀다. 피임이 실패하는 경우, 남자는 조용히 낙태를 설득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얼마든지 아기 아버지의 동의 없이, 심지어 알리지도 않은 채 낙태가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낙태에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피임약이 초래하는 다른 효과에도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빛 공해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피임은 성적 차이의 찬란함을 보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때로는 욕망을) 흐리게 한다. 어느 때보다도 남자와 여자의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거기에 동의한다. 일에서든, 생활에서든, 교회에서든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여자의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 딸들이 어렸을 때 나도 이런 사고방식의 피해자였다. 나는 가끔 딸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고, 그런 다음 교사, 작가, 의사 등 온갖 멋진 직업을 제시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곧 엄마를 제외한 모든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를 깨끗하게 하자기술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무기력하거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건 아니다. 하늘의 경이로움을 보고 감상할 방법이 여전히 있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놀라운 차이를 보고 감상할 방법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1. 주의를 기울이자피임이 남자와 여자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한 내 이야기를 듣는 그리스도인은 하나같이 놀란다. 처음에는 피임이라는 게 그토록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못한다. 바로 그 사실, 피임에 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피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가르쳐야 한다. 오랫동안 개신교인은 피임이 가톨릭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로해 왔다. 순진한 착각이다. 피임약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봐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이다. 우리는 사실상 위험하다고 할 정도로까지 피임의 위력을 무시한다. 피임약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견해(책임감 있게 사용할지, 아니면 아예 쓰지 않을지)가 무엇이든, 이 작은 알약이 가져온 변화를 이해하지 않고서 현재의 문화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는 마셜 맥루한이 신기술에 대해 제기한 네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이 증진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이 쓸모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로 인해서 우리가 찾게 된 것은 무엇인가? 그 기술이 극단적으로 사용될 때 반전되거나 뒤집히는 것은 무엇인가?피임을 포함한 모든 기술의 사용이 우리의 가치를 어떻게 반영하고 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에게 피임이 필수품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 자율성과 자급자족이 그토록 높은 지위로 높아진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가 되는 것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 인생의 방해가 된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인 젊은이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 모든 질문은 가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피임약 사용은 내가 가진 어떤 가치를 드러내는가? 인간의 기술이 가려버린 창조의 선함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가치는 어디에서 수정되어야 할까?2. 경외로움으로 다시 바라보자그렇다고 피임약이 임신의 기적이나 출산의 고통스러운 승리를 바꾼 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아기는 언제나 그래왔듯 여전히 잠재력으로 가득 찬 눈을 깜빡이며 세상에 나온다. 로맨스 또한 그 깊은 매력을 잃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서로에게 끌리고 또 불꽃을 튀긴다. 매우 다른 두 피조물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매력, 고통, 희극은 여전히 훌륭한 이야깃거리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부활이 필요하다면, 그건 좋은 러브스토리가 주는 마음졸임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진부해졌기 때문이다.성경은 우리에게 창조의 이러한 측면에 경탄하라고 요구한다.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기이한 일이 셋,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넷이 있으니, 곧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와, 뱀이 바위 위로 지나간 자취와,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하였던 자취이다.” (잠 30:18-19).젊은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하는 방식은 날아다니는 독수리나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움직임만큼이나 경이롭고 설명하기 어렵다. Lindsay Wilson은 “인생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탐험할 수 있는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라고 쓰면서 이 잠언 구절의 역동성을 포착한다. 우리는 인생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우리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기뻐해야 한다. 성적 차이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면 어떨까? 남자와 여자의 특성을 모은 목록이 환원주의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 차이가 단순한 목록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오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성적 차이에 이렇게 접근할 때, 우리는 누군가 자신이 “잘못된 몸”으로 태어났다고 말할 때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다. 더 나은 이야기현대 문화는 종종 젠더에 대한 서사를 억압의 형태, 버려야 할 부담, 기술(피임 기술은 물론이고 호르몬, 성전환 수술 등)로 극복해야 할 자연의 장애로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훨씬 더 나은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사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하셨다는 이야기이다. 결혼이 무엇인가? 서로 대조되는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서 우주의 중심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고유한 축복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현대 기술이 우리의 비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그림은 여전히 우리가 보고, 기뻐하고, 또 선포할 수 있도록 남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출처: How the Pill Obscures God’s Truth in Creation
비극의 소비자가 되지 말라
by Caroline Stoltzfus
2024-04-02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쟁, 무차별 총격 사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연예인, 정치극, 그리고 재판받는 첨단 기술 관련 억만장자들 등등. 오늘날 사회에는 끊임없이 뉴스가 쏟아지고, 그 모든 뉴스를 챙겨봐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보를 얻는다는 건 사회와 연결되었음을 확인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 및 역량을 강조하는 현대 문화의 미덕을 발휘하는 모습이다. 물론 탄탄한 저널리즘을 기반으로 한 역사적이고 시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건 가치가 있다. 창작자가 정직하게 이야기를 전할 때 정의가 구현되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를 대변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뉴스를 통해서 각 세대가 이웃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자원을 사용하도록 영감을 받는다. 개인과 공동체로서 서로 배우고, 연결하고, 또 성장하는 데에 뉴스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나쁜 뉴스에 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둠스크롤링(doomscrolling: 뉴스 스크롤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과 더불어 쉬지 않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또 속보가 뜰 때마다 오는 알림을 강박적으로 클릭하는 게 과연 그리스도의 왕국을 잘 섬기는 데에 도움이 될까? 우리는 정말로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쏟는 걸까? 아니면 비극이 우리의 오락이 되었기 때문일까?참여냐 도피냐?솔직하게 말해서, 쉬지 않고 새로운 소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나와 이웃의 고통을 피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비난하는 게 바로 앞 모퉁이에 있는 노숙자를 돕는 거보다 훨씬 쉽다. 리얼 범죄 팟캐스트에 몇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가상 작업의 단조로움에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는 아드레날린 해독제이다. 가족과 함께 가치 있는 대화를 나누는 대신 인스타그램 릴(Reel)이 제공하는 정치 드라마의 토끼 굴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치 내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정신 건강과 내 공동체에 초래하는 피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정보 소비 행태는 주로 혼자 이뤄진다. 둠스크롤링은 굳이 육체를 갖춘 인간과 구원의 관계를 맺는 복잡하고 헌신적인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애초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벗어나게 된 과거의 절망에 다시 빠지고,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그 절망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 시청에서 행동으로무력하게 멀리서 지켜보는 대신, 이사야 58:10-11에 귀를 기울이자.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라고 하신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우리가 부름 받은 건 단지 배고픈 사람들을 돕자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포스팅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바램을 보며 답답하다며 고개를 흔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을 쏟아부음으로 궁핍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름받았다. 타인의 불행을 보다 보면 종종 두려움과 우울함이 생기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때 주님은 모든 우울함을 밝게 하시고, 계속해서 인도하시며,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까지 만족시켜 주신다. 우리가 만족을 찾아야 할 행동은 스크롤링이 아니라 진짜 봉사이다. 하나님이 끊임없는 주시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흐름 이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이야기로 초대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의 필요에 부응할 때 우리에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복지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육체적 필요를 채우며 고통과 싸울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감정적, 영적 어려움을 만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시고 우리가 기쁨의 증언을 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결코 뉴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취약계층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비극은 결코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극은 단지 인간의 죄가 모든 개인과 사회에게 어떤 끔찍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주변 고통에 대한 정보를 알라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그 고통 속으로 발을 디디라고 부르신다. 성령의 열매를 고려하라어떻게 해야 주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돕는 방식으로 정보를 접할 수 있을까? 일단 뉴스 소비가 우리 삶에 어떤 열매를 맺는지 생각해야 한다. 게시물을 스크롤하고, 기사를 읽고, 또 팟캐스트를 들을 때 당신 속에 일어나는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라. 거기에 성령의 열매라는 특징이 있는가(갈 5:22-26)?• 이웃 사랑•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 당신의 삶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여부에 달린 평화• 학습 과정에서 필요한 인내심• 행동에서 드러나는 친절• 의롭고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함• 봉사하는 데서 드러나는 신실함• 마음과 몸의 한계를 향한 너그러움•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에 대한 자제력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도리어 두려움, 불안, 죄로 특징지어진 반응이 주로 나타난다면, 당신의 뉴스 소비 습관은 재고되어야 한다. 보니 크리스티안은 Untrustworthy에서 단지 정보를 얻는 것보다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공부하는 자세를 갖는다는 건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이 모든 걸 다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굳이 모든 헤드라인을 다 읽으려고 하지 말고, 적은 수의 기사를 깊이 신중하게 읽으라는 충고이다. TV 뉴스, 앱 알림, 일일 뉴스 요약 이메일의 단식부터 시작하라. 적어도 몇 주 동안 소음을 제거하고 이런 변화가 당신의 관계, 기분 및 불안 수준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읽으라. 일기를 쓰고, 기도하고, 또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며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 보라. 혹시라도 더 개선하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라. 이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와 돕는 손길과 재정을 어떻게 바치라고 요구하시는지를 고민하라. 그런 다음에 뉴스 피드를 새롭게 구성하라. 당신은 이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새롭게 정보를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주제에 대한 온갖 정보를 다 얻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오늘 터지는 뉴스와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영원한 구원 스토리의 일부가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원제: Tragedy Isn’t for Consump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파괴되기 전에, 다시 세워야 한다
by 전재훈
2024-04-01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보게 되는 표지판이 ‘아시안 하이웨이’다.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는 아시안 하이웨이 1번 도로이며 6번 도로의 경우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릉-원산-청진으로 북상해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모스크바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지만 북으로는 철책이 놓여 있어 일본처럼 섬이나 다름없는 형국이다. 자연스레 이 땅의 젊은이들은 세계관이 다른 나라에 견주어 좁은 편이다. 하지만 이 하이웨이가 개통되고 오토바이 타고 유럽을 갈 수 있게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젊은 친구들이 꿀 수 있는 꿈의 크기가 달라지고 세계관의 스케일이 달라진다. 미국은 50년 동안 달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달에 깃발 꽂고 사진 한 장 찍은 것이 전부였다. 이것마저도 사기라며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개의치 않고 달 탐사에서 한 발 더 나가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달 탐사 프로젝트가 가져온 결과는 비단 사진 한 장만이 아니다. 달에 가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무수히 많은 기술적 진보를 이뤄냈고, 그 혜택을 우리가 누리며 살고 있다.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혔고, 이는 다양한 문화적 확장을 이뤄냈다. 스타워즈의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인식의 한계를 지닌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는 세계는 매우 좁다.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너무 멀리 있거나 혹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의 귀는 20~2만 헤르츠 사이의 주파수대에서 소리를 듣고, 우리의 시야는 120도를 넘지 못한다. 0.03초 이내의 순간은 전혀 볼 수도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우리의 한계 속에서 규정된 세계였다. 하지만 과학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매우 넓어진다. 광학 현미경으로 나노 크기의 원자를 보고, 천체 망원경과 우주탐사선으로 도움으로 화성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소리는 키워서, 큰 소리는 줄여서 들을 수 있는 기계들도 많다. 야간에는 적외선 탐지기로 어둠 속을 보고, 엑스레이나 MRI로 몸속을 볼 수도 있다. 배 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손가락을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 더 확장된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SNS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앞집 아저씨의 근황은 몰라도, 인도에서 선교하는 친구의 근황은 잘 안다.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무한대로 넓어졌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선물도 받았다. 페이스북의 친구들을 파도타기 하면 불과 다섯 번 만에 전 세계인을 다 만날 수 있는 시대다. 번역기는 언어의 한계를, 구글은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준다. 지금까지의 과학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앞으로 수년 내에 펼쳐질 미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지금 상용화를 앞둔 다양한 기술들은 불과 1, 2년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술들이다. 과학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이는 삶의 편의성만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사고의 변화를 일으킬 것이고,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게 되며, 가치관의 혼돈도 생겨날 것이다. 과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신학과 철학이 인간의 생각을 주도해 왔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철학적 사고보다 과학적 사고가 더 환영받는다. 어떤 신이 참 신인가에 대한 논쟁은 신이 있기는 한 것인가의 논쟁으로 바뀌었고, 진부한 싸움은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신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되었다. 이런 생각들은 다시 한번 변화의 기회를 맞고 있다. 화성탐사프로젝트로 빅뱅이론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원자 단위로 물체를 분리 추출하는 기술은 물체 에너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를 정리하고 데이터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선도하는 기술은 이미 가동 중이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자동차는 양산을 앞두고 있다. 3D 프린터는 가정용으로 만들어 판매되고 있다. 화상캠을 통하여 집에서 교회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제어하며, 미국 출장 가서 한국 집에 있는 보일러를 조작할 수 있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대화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공간과 시간 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생각들은 무한의 세계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4차원’이라는 말이 더 이상 바보를 뜻하는 말이 아닌 진보적이며 창조적인 의미로 바뀌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은 더 이상 설 곳을 잃어가고, 엉뚱한 상상은 인류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가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로 종교의 울타리가 무너졌듯, 다가올 미래는 신학의 파괴를 부채질할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종교적 마인드로는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설득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AI가 인간을 대체하기 전에 재림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묶어 두었던 종교적 세계관, 가치관, 인간관, 신관을 모두 재정립해야 한다.
성 주간을 위한 묵상과 기도
by Scotty Smith
2024-03-25
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 요한복음 12:27-32 화: 예수께서 우시었다 - 누가복음 19:41-42수: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 마태복음 22:41-42목: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요한복음 13:1, 34-35금: 다 이루었다 - 누가복음 23:34, 마태복음 27:46, 요한복음 19:30토: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 마태복음 27:62-64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 베드로전서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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