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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지옥의 절망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다
by 고상섭
2021-05-14
팀 켈러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하면서 “결혼이란 지옥의 절망 가운데 하늘나라를 세우는 것”이라 말했다. 한눈에 반해 사랑하고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은 ‘지옥의 절망’이라고 표현할 만큼 어려운 현실이다. 무엇이 그토록 아름답던 결혼을 지옥의 절망으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 절망 가운데 하늘나라를 세울 수 있을까? 결혼을 지옥의 절망으로 몰아가는 자기중심성 우리는 문화의 아들딸로 살고 있어서 문화라는 공기를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문화를 평가하고 도전하는 방식의 성경적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으면, 분별없이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 가게 된다. 오늘날 문화 내러티브 중의 하나는 개인의 만족과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한 과정으로 결혼을 보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이유도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고 결혼의 목적 또한 개인의 만족을 위한 것이 되었다. 뉴욕 타임즈 칼럼리스트인 타라 패커 포프는 현대인들이 제 각각의 인생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 오직 자신의 목표를 도와줄 동반자를 찾는다고 말했다. 지난날의 결혼은 공익에 이바지하는 공적인 제도였지만, 이제는 개인의 만족을 위한 사사로운 계약이 되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결국 결혼을 ‘지옥의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이다. 지독한 자기중심성이 서로를 연합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의 주장만 하게 하는 것이다.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결혼을 해서 깨닫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팀 켈러는 자신에게 찾아와서 “사랑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애정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하지 않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만 그럴까요? 프로야구 선수가 되려는 이들은 빠른 공을 쳐내기가 이토록 힘든 줄 몰랐다고 푸념하지 않을까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위대한 작품을 쓰고 싶은 소설가가 있다면 소설을 쓰고 스토리를 구상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고 말할 것입니다.”나를 위해 딱 맞는 상대방을 원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사람은 결혼을 하기 전에는 상대방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에게 딱 맞는 짝을 찾는 것은 헛된 꿈이라 말하면서, 결혼이 시작되면 더 이상 전에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중요한 것은 더불어 살게 된 낯선 상대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법을 배우는 것이 결혼이라고 말한다. 결국 결혼이란, 지독한 자기중심성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를 지옥이라는 절망으로 몰아가는 자기중심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지옥의 절망 가운데 하늘나라를 세우는 은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오늘날 문화 내러티브는 남녀평등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이전의 가부장 제도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는 좋아 보이지만, 평등을 강조하는 것으로 세상은 평등해지지 않는다. 평등을 강조하면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완벽한 평등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평등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복종하는 상호복종을 이야기 한다. 연합의 핵심에는 서로 복종하는 것이 있고,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기를 기뻐하는 자기 부인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세상은 사랑에 대해 자기중심적인 감정을 나열하지만, 성경은 사랑을 정의할 때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4~5)라고 말한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고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는 일이다. 결국 결혼이라는 지옥의 절망에서 하늘나라를 세워가려면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를 사랑하는 이타적 지향성을 통해 연합의 행복을 느끼시듯이, 우리의 가정도 서로를 위한 섬김과 희생을 통해 참된 연합이 주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결혼의 목적이 행복이 되면 행복하지 못한 날들이 많아진다. 그러나 결혼의 목적이 거룩이 되면, 행복은 따라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을 섬기는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C. S. 루이스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신경 쓰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그만큼 더 그 사람을 싫어하는 내 모습을 마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싫어도 잘해주면 어느새 싫은 마음이 줄어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친절하게 대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좋아하게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사람들까지 말이지요” 이 말은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척하고, 용감하지도 않은데 용감한 척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선해지는 것은 선을 느껴서가 아니라 선을 실천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용감한 사람은 실제로 용감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는 사람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넘어서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때로는 감정이 행동을 따라간다. 에드먼드 모건이 쓴 ‘미국의 노예제도, 미국의 자유’를 보면 백인들이 처음 흑인을 노예로 삼을 때는 그들에게 전혀 적의를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경제적인 이유로 노예로 부리기 시작하자 점점 흑인들을 경멸하게 됐고, 심한 인종적 멸시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그들을 멸시했기 때문에 노예로 삼은 것이 아니라, 노예로 부렸기 때문에 멸시에 이른 것이다. 사랑도 감정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상대방에게 사랑의 행위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란 말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대로’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조건 없이 자격 없는 나를 용납하고 사랑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쩌면 내 감정이 더 소중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더 소중한가의 문제일 것이다. 팀 켈러는 목회를 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이 끌리고 정이 가는 사람들을 골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되면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늘 친구가 되어주어야 했고, 그들과 대화해야만 했다. 그중에는 다른 일로 왔다면 그다지 사귀고 싶지 않았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목회자였기 때문에 누군가 대화를 하고 싶다고 요청을 하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누군가 병원에 있다고 하면 그곳에 갔고, 어느 집 아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차를 타고 아이를 찾으러 다녔다. 심방도 하고 졸업식도 가고, 그렇게 동네 교회 목회자가 되면서 감정적으로 끌리지 않는 수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해 보이라는 명령을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천의 삶이 그를 변화시켰다. 성격이 고약하기로 소문난 부부를 품고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그 성격 때문에 친구들이 없는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어렵게 낸 여름 휴가를 그 집 식구들과 함께 보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처음엔 감정이 생기지 않았지만, 그들을 사랑하면서 사랑의 감정이 생기게 된 것이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거룩하고 신령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어쩌다 보니 루이스가 설명한 실제적인 원리들을 실천하게 된 덕분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도 꾸준히 사랑했고 그 결과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감정이 행동을 따라잡기에 이른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랑하면 언젠가는 마침내 사랑스러워진다. 현대 문화는 사랑하는 감정이 사랑의 행위의 토대라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행위를 변함없이 계속해 나가면 사랑하는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깝다.”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사랑이지만, 우리의 결혼 생활을 이어주고 지켜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결혼 그 자체가 주는 언약이다. 그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감정을 넘어선 사랑을 실천하게 하고, 지독한 자기중심성을 넘게 한다. 내 감정과 환경에 상관없이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자녀가 18세가 되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부모는 극진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일까? 그것은 성경적 패턴에 이끌려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느낌과 상관없이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해 온 까닭에 이제는 아낄 만한 구석이 있든 없든 자녀들을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은 언약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감정과 행동에 상관없이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부부의 관계는 사랑이 없으면 감정을 거둬들이는 이익 관계로 변질되었다. 개인의 만족이 없으면 더 이상 결혼 관계를 이어가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하실 때, “참으로 네가 매력적이고 너무 선하기 때문에 나의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지만, “저들에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우리의 무지를 긍휼히 생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랑스러워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배우자를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배우자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지옥의 절망 가운데 하늘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몇 년 전 결혼식 주례를 맡으면서 결혼 당사자들에게 결혼 서약서를 써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살아가면서 늘 결혼 서약서를 보면서 다시금 결혼의 본질로 돌아가라고 권면했다. 그들이 쓴 서약서는 다음과 같다. “나는 지옥의 절망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우리의 결혼이 갖는 의미임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이기심이 우리 둘을 지옥으로 몰고 갈 때, 자격 없는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하며 배우자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결혼은 지옥의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격없는 나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다. 결국 결혼이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가장 어렵지만, 또한 영광스러운 과정이다.
가족
결혼
팀켈러
하늘나라세우기
결혼서약
자기중심성
자기부인
참된연합
복음은 관계 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by 김형익
2021-05-09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관계 속에서 경험될 필요가 있다. 복음의 역동성은 우리 머릿속에, 혹은 신자 개개인의 내면의 변화로 제한될 수 없다. 복음이 신자 안에서 만들어내는 변화는 관계를 통해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복음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관계의 변화를 만든다. 그리고 복음은 음녀 같은 존재를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뿐인가? 십자가의 복음은 원수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어버리고 하나가 된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한다(엡 2:13-19). 복음은 이렇게 관계를 변화시키는 역동성을 가진다.신자가 관계 속에서 복음을 경험하는 일차적 장소는 가정이다.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복음은 가정 안에서 내가 맺는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복음은 그 관계 맺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나는 과거에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교회에 충성 봉사하느라 이후부터는 남편이나 자식들을 소홀하게 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들의 삶이 가정에 매몰되던 시절, 복음은 육아 스트레스와 가정이라는 환경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한 인격체로서의 존재감을 발견하는 경험의 촉매로 작용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이와 함께, 1970년대를 전후한 한국 교회는 성화와 성숙이라는 주제를 균형있게 가르치기보다는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구원에 더 몰두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은 점차 관계 속에서 열매를 맺는 방향으로, 신자가 맺는 모든 관계 속에서 성화와 성숙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21세기의 20년이 지난 지금, 그리고 한국 교회가 선교 150년을 향해 가는 지금도, 여전히 이 영역은 불모지대인 듯 싶다.복음은 먼저 부부 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에서 경험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온전한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율법주의자 아빠와 엄마, 율법주의자 남편과 아내일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복음의 은혜를 드러내는 부모나 배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관계 속에서 경험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복음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부부 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먼저, 복음이 경험되지 않는 관계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편이 좋겠다. 그것은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관계다. 부부 관계든 부모 자녀 관계든 율법주의가 관계의 기초가 되면, 그것은 상대방을 향한 요구와 그 요구를 만족시킨 결과, 그리고 거기에 주어지는 상벌의 개념에 기초하는 조건적 관계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것은 엄격함의 기운과 조건의 문화를 촉진한다. 여기서는 ‘자격’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너는 이 식탁에 앉아 먹을 자격이 있어.” “당신은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같은 것이다.어쩌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대다수 평범한 가정이 경험하는 모습일지 모른다.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나의 태도는 그가 내게 보여준 태도에 대한 결과이고 반응이다. “네가 내 요구대로 해주면, 나도 네게 이것을 줄 수 있어.”라는 말은 율법주의적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대개는 이런 유치한 방식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그런 방식으로 생각과 반응이 작동한다.) 부부 관계도 이런 방식으로 작동될 수 있다. 관계는 조건적이고, 내가 상대방에게 인정을 받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것이 관계적 행동의 동기로 작동한다.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공부하고, 아빠의 인정을 얻기 위해 행동한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아내, 아내의 인정을 구하는 남편의 모습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 아닌가? 이런 관계들 속에서는 설령 자신이 원하는 인정과 사랑을 얻어낸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언제나 나 하기에 달린 것이고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것이기에 늘 불안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관계 속에서 복음이 경험되는 가정이 아니다.복음은 우리가 가정에서 경험하던 이런 관계의 패턴을 완전히 뒤집어놓는다. 가정에서 복음을 경험케 만드는 것은 은혜다. 어제 내가 아내에게 준 선물은 오늘 내가 아내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여기게 하지 않는다. 내가 어제 좋은 성적을 얻었기 때문에, 오늘 나는 부모 앞에서 더 나은 자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우리가 맺는 관계에서 설정하는 모든 조건을 무너뜨린다. 그 은혜가 흘러나오는 원천은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내게 없음을 복음은 알게 해준다. 모든 것이 넘치는 하나님 은혜다. 은혜는 살게 하는 힘이고 조건 없이 사랑하게 하는 동력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언제나 은혜를 주시고 그것을 알게 하시기에, 나는 그 과분한 은혜 안에서 만족하고 내게 주신 소중한 관계들 속에서 은혜를 베푸는 존재로 살고 싶어진다. 복음의 은혜 안에는 이런 힘이 있기에, 그 은혜는 은혜를 받은 신자를 통해서 그의 가까운 관계들 속으로 흘러들어간다.은혜는 소중한 배우자에게, 그리고 부모와 자녀에게 조건 없는 은혜를 베풀게 한다. 내가 부모와 배우자로부터 받은 게 많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내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셨고 내가 그 은혜와 다함없는 사랑에 만족하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복음의 은혜는 배우자의 인정이나 부모의 인정, 자녀의 존경이라는 마음의 우상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어서, 조건에 매여 살거나 행동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성경이 가르치는 관계의 대원리는 이렇다. 먼저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당신의 생명을 주심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엡 5:25-27). 그 기준은 주 예수님이고 그 목표는 무한 사랑, 무한 책임이다. 아내는 어떤가?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그리고 하나님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스스로 낮추사 성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심 같이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을 듣는다(엡 5:22-24; 빌 2:6-8). 성자 하나님이 그 기준이다. 그래서 이것은 복음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 살아갈 수 있는 명령이고 원리다.성경이 가르치는 관계의 대원리는 부모 자녀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행하셨고 또 행하시는 것처럼 부모는 자녀를 대하고 양육해야 한다. 성경은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한다(엡 6:4). 부모된 우리는 자녀를 노엽게 한 적이 몇 번이던가? 성경이 이렇게 명하는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노엽게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복음 안에서 (또는 복음의 렌즈를 통해서) 바르게 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고 본질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할 대상으로 누리지 못하는 신자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흘러갈 수 있는 은혜는 없다. 믿는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을 받는다(엡 6:1-2).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든지 간에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안에서 만족하기에, 자녀된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듯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수 있다.성경의 대원리라고 해서 은혜 받은 신자라면 이 모든 것이 저절로 된다는 말이 아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앙적 자기 부인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서,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부모로서 자녀에게 분노를 쏟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녀로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신자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한다. 신자의 삶은 매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실패의 지점에서 용서라는 복음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신자의 전 생애는 회개”라고 마틴 루터가 말했듯이,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부 관계와 부모 자녀 관계에서 우리는 매일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일을 경험해야 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복음이 관계 속에서 가장 짜릿하게 경험되는 순간이다.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가정에서, 부부 간에 용서를 구하고 받는 것은 그리 익숙한 일이 아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용서를 구할 수는 있더라도, 자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부모를 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복음에는 이 모든 전형적인 관계를 뒤집는 힘이 있다. 복음의 은혜를 드러내는 관계에서 실패했을 때, 신자인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그리고 부모와 자녀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신자는 날마다 가정에서도 그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경험되는 복음의 은혜는 우리의 가정을 복음으로 견고하게 세워가게 될 것이다.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을 들어도 율법주의가 지배하는 관계의 가정에서 살아간다면, 이 환경은 생각보다 복음 안에서의 성장을 심하게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반면, 복음이 경험되는 관계의 가정은 새사람의 성화와 성숙을 더욱 힘있게 결실하게 하는 최적의 환경이 될 수 있다.
가정
가족
복음
교회강단
관계
배우자
가정의달
마틴루터
율법주의
십자가
엄마를 축복하고 기리는 여섯 가지 이유
by David Mathis
2021-05-08
부모님 하면 생각나는 여러 일반적인 미덕 즉, 사랑, 기쁨, 평화, 선함, 친절, 신실함 그리고 자기 조절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편으로 엄마를 엄마로 기리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도대체 엄마를 좋은 아빠가 아닌 좋은 엄마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물론 이 땅에 완전한 엄마는 없다. 그 누구나 다 결점이 있고 그중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엄마의 실패 또는 부재가 주는 피해는 아빠의 부재 또는 실패가 가져다주는 피해보다 조금도 덜 하지 않고, 그 피해를 복구하는 것도 똑같이 어렵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녀의 생애 가장 초기 며칠, 몇 달, 그리고 몇 년 동안 엄마에게만 특별하게 맡겨진 소명 때문이다. 엄마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설계 때문이다.비록 엄마가 우리에게 실망을 줬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엄마에게 감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빠와 겹치는 엄마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엄마라는 여성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자질 때문이다. 올해 당신은 엄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엄마를 기리는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라. 최소한 여섯 가지가 있다. 그중 몇 가지는 당신에게도 적용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이 엄마를 엄마로 기리는 데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 엄마는 여자라서 행복했어요엄마, 난 엄마를 생각하면 자유롭고 행복한 것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아내라서 행복하고 엄마라서 행복하고 또 여자라서 행복하고요. 1980년대의 기운이 여전히 엄마에게는 남아있겠지요. 엄마 주변에도 아이를 낳는 것만 빼고 다른 것은 기를 쓰면서라도 다 하고 싶어하던 친구가 몇 명은 있었을 거에요. 엄마라는 것, 그래서 힘들었던 것, 그 고통은 최소화했음 좋겠어요. 절대로 극대화하진 마세요. 하지만 이건 분명해요. 엄마는 여자라서 또 엄마라서 행복했다는 사실, 그건 극대화하세요. 결혼이 아빠와 추는 춤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아빠가 춤을 리드하고 또 아빠의 강인한 남성됨이 엄마의 여성됨을 영광스럽게 할 때, 엄마는 분명 행복했죠. 아빠가 몇몇 분야에서 남자다운 자신감을 보이는 것을 엄마는 좋아했죠. 아빠가 무거운 박스를 옮기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아했어요. 특히 너무 단단하게 닫힌 피클병 뚜껑을 열어달라며, 아빠한테 피클병을 내밀 때면 언제나 떠오르던 엄마의 미소, 엄마는 행복했죠. 엄마는 아빠가 남자이기에 엄마와 다른 점을 싫어하거나 시기하는 대신 그 차이를 기뻐했어요. 엄마는 여자로서 안정감 있었고, 여자임을 즐길 줄 알았고, 또 아빠 방식에 맞춰 아빠와 경쟁하는 대신 엄마의 방식으로 아빠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했어요.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지 관계없이, 나는 단 한 번도 엄마가 아빠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어요. “그게 뭐가 됐든지 간에, 내가 하면 당신보다는 더 잘 할 수 있어.”엄마는 성숙하고 자족하는 여성의 모델을 보여주었어요. 내 누이들은 그런 엄마를 보면서 정말로 멋지다고 생각했고요. 나의 세 누이들은 그래서 모두 여자이자 아내라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어요. 엄마는 그들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또 아들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히 여성을 통해서 드러내는 영광을 보고 경외하는 눈을 가지도록 가르치셨죠. 2. 엄마는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어요엄마는 우리를 아홉 달 동안 몸속에 품고 있다가 낳고 또 키웠어요. 엄마는 엄마 자신을 우리에게 주었어요. 단지 말이 아니라 엄마의 몸 자체를 말이에요. 희생을 가르치고 싶었던 바울에게 엄마보다 더 좋은 이미지가 과연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7–8).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우리가 달려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엄마였어요. 그리고 그런 우리를 엄마는 언제나 진지하게 대해 주셨죠. 우리를 멸시하거나 단지 어리기에 아직 덜 된 인간인 듯 우리를 대하신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에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우리가 엄마에게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에요. 엄마는 나를 놀리거나, 내게 분노를 쏟은 적도 없어요. 심지어 내가 최악의 불순종을 했을 때조차도 내가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하는 그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셨던 적도 없지요. 무릎을 갉아먹는 인생의 첫 번째 실패를 했을 때 우리가 엄마에게 달려갔던 또 하나의 이유는 엄마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엄마는 정말로 경청의 달인이었죠. 엄마는 야고보서 1장 19절을 실로 경건함으로 삶 속에서 구현했어요. 듣는 데 빠르고 말하는 데 느리고 또 화를 내는 데도 느렸죠.3. 엄마는 지혜의 음성으로 말을 했어요엄마는 단지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잠언 속에 나오는 현숙한 사람의 사례가 여인이라는 게 놀랍지 않나요? 엄마는 지혜로운 목소리로 아빠를 상담했어요. 아빠는 언제 자신이 너무 많은 약속을 하는지, 언제 골프를 너무 많이 치는지를 엄마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죠. 다른 사람과 달리 엄마는 남편을 은혜롭게 이끄는 방법을 알았어요. 아빠에게 언제 예스를, 언제 노라고 대답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어요. 자녀들이었던 우리의 경우, 지금 되돌아보면 내가 가장 잘 했을 때는 엄마의 말을 들었을 때이고 엄마의 말을 무시했을 때 가장 안 좋은 결과를 만났죠. 엄마는 여성으로서 내는 그 목소리를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어요. 엄마의 말은 하와가 아담에게 했던 말(창 3:17)과는 달랐고 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했던 말(창 16:2)과도 달랐어요. 현숙한 여인답게 엄마는 진실을 말했어요(잠 8:6-7). 우리는 반복해서 암송 구절을 들었지요. 엄마는 80년대 복음성가를 자주 불렀어요. 엄마는 우리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찬송가의 세계로 이끌었어요. 그런 가르침을 통해서 엄마는 아빠를 더 나은 남자로 만들었어요. 아빠가 가진 훌륭한 점 중에 단 하나도 엄마와 연결되지 않은 것을 나는 찾을 수 없어요. 엄마 때문에 아빠의 강점은 보완되었고 심지어 더 강화되었어요. 엄마는 진정 아빠의 조력자이자 아빠의 영광이에요. 4. 엄마는 아빠의 리더십을 기뻐했어요불완전하지만 점점 더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가는 남자의 인도를 받는 것은 엄마를 기쁘게 했어요. 많은 부분에서 엄마야말로 우리 집에서 가장 능력 있는 성인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철자, 독서, 그리고 수학은 말할 것도 없죠. 그럼에도 엄마는 아빠의 가장됨을 기뻐했고 또 그 리더십을 기꺼이 보조했어요. 아빠가 안 계실 때 엄마는 겸손한 자신감을 가지고 가정을 이끌었어요. 그러다가 아빠가 돌아오시면 기꺼이 아빠의 리더십에 순종했죠. 여자이기에 아빠로부터 받아야 하는 특별한 보살핌을 엄마는 고마워했고 또 소중하게 여겼어요. 그러면서도 그럴 때면 무슨 보답이라도 해야 하는 양 수선을 떨지도 않았지요. 엄마는 아빠가 주된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여겼고, 그것을 바꾸려고도 또 그 때문에 섭섭해하지도 않았어요. 대신 엄마로서 가진 엄청난 책임을 기꺼이 감당했죠. 엄마는 받은 은사에 따라 아빠의 리더십을 존중하고 아빠를 도왔어요. 남성으로서 주도성을 갖고 아빠가 일을 추진할 때 엄마는 긍정적으로 반응했고 또 때로는 그 일이 더 잘되도록 하기 위해 방향을 조절하거나 후퇴시키기도 했지요. 엄마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아빠의 마음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어요.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1-2).엄마는 순종하는 것이 뭔지 알았지요. 엄마는 모든 일에서 아빠와 뜻이 같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았어요. 대신 문지방을 넘기 전에 생각을 하고,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아빠를 바꾸겠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고 아빠의 의지가 그리스도의 뜻보다 앞서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죠. 응접실 테이블에 있는 펼쳐진 성경책은 엄마의 영적 능력이 아빠로부터 받은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죠. 5. 엄마는 우리 가정의 중심이었어요 우리 집에서 아빠가 머리라면 엄마는 가슴이었어요. 엄마는 우리를 채웠고 또 발전시켰어요. 흔히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 간의 창조 사건을 ‘구성(forming)’과 ‘채움(filling)’으로 표현하곤 하지요. 첫 3일 동안 하나님은 세상을 구성하셨어요. 그리고 나머지 3일 동안 하나님은 그 세상을 생물들로 채우셨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모든 아빠와 엄마는 구성하고 채우라는, 상호 보완적인 소명을 받았어요. 그것이 가정이든, 문화든 아니면 자녀들의 양육 문제가 되었든 말이죠.특별히 엄마는 아빠가 우리를 구성하고 만들었다면 엄마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영향력을 동원해 우리의 정체성을 채우고 개발하는 역할을 했지요. 구성하는 아빠의 역할이 단지 말로만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말로 하는 가르침은 특히 영향력이 있었고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살전 2:12-13). 아빠는 이름을 짓고 엄마는 키운다고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이름을 짓고 또 우리를 구성했고 엄마는 우리를 키우면서 또한 영성을 포함한 우리의 정체성을 채웠어요. 특히 엄마는 아들을 당당한 미래의 남자로, 또 딸들을 미래의 여자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엄마는 내 누이들이 엄마랑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멋진 일이에요. 그 덕에 누이들은 다 엄마로부터 어떻게 남편을 존경하고 또 가정을 양육하는지를 배웠어요. 엄마는 또 아들이 아빠랑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했는데, 그것도 멋진 일이에요. 나는 엄마가 아빠를 돕고 격려하는 모습을 통해 어떻게 아빠가 주도적이면서도 여자를 돌볼 수 있는지를 배웠어요. 6.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소명을 기꺼이 감당했어요우리가 어렸을 때 세상에 나가서 남자와 경쟁해야 한다는 조류에 엄마가 흔들리지 않았던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엄마”는 보잘것없고, 밖에서 일하는 소명보다 하찮은 것이라는 사탄의 속삭임을 엄마는 거부했어요. 엄마의 역량은 실로 대단했어요. 그럼에도 엄마는 결코 엄마 역할(mothering)이 엄마 능력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면이 불안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엄마의 대학 졸업장, 수학 과목 수료증, 그리고 교사로서의 8년은 결코 낭비되지 않았어요. 단 1분도 말이에요. 그 모든 것이 다 엄마를 준비시켜서 인간에게 맡겨진 소명 중에서 가장 위대한 소명, 바로 엄마라는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했으니까요. 원제: You Were Happy to Be Mom: Six Reasons to Arise and Bless H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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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이 어렵다
by Staff
2021-05-07
늘 그렇듯이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아버지는 정말로 내게 큰 상처를 주었다. 물론 늘 그렇듯이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어머니도 내 생애 내내 그랬던 것처럼 “그게 네 아버지다”라고 그의 행동을 변명했다.나는 내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고 계속 용서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성인이 되어 세 살이 된 내 아들과 함께 부모님 집에서 한 주간을 보내기 전까지 나는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자랄 때 아버지가 늘 내게 했던 말투로 내 아들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 내 평생 들었던 거친 말과 나를 못마땅해 하며 상처주는 말투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그때 나는 격려하고 사랑으로 양육하는 아버지를 원했지만 얻을 수 없었던 슬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슬픔 이상이 그 주에 시작되었다. 수년 동안 나는 과거의 대화와 비판을 기억해 내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고, 언젠가 미래에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장면을 반복해서 대면했다.어느 날 데니스 레이니(Dennis Rainey)는 내게 자신의 책, ‘부모님께 바치는 글: 모든 부모가 듣고 싶어하는 말’(The Tribute: What Every Parent Longs to Hear)을 한 권 주었다. 이 책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관한 책이다. (현재는 ‘부모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The Best Gift You Can Ever Give Your Parent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나는 거짓말이라도 어서 읽어보고 싶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내 생각에 아마도 그에게 “그런 것에 별로 관심 없어”와 같은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쓰라린 현실얼마 후 나는 출장 중 멋진 호텔에 묵었다. 또다시 나는 한밤중에 깨어났고, 옛날 기억이 떠올라 그 장면을 대면하고 이에 분노를 뿜어냈다. 하지만 그때 성령님께서 내 괴로움을 중단시키셨다. 우리는 그 주 성경공부 시간에 요한복음 16장을 공부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권고하시고 확신을 주기 위해 오신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성령님은 그날 밤 내게 역사하셨다. 성령님은 내게 진리를 말씀하시고 확신의 은총 아래로 인도하여 내 영혼의 병을 보여주셨다. 용서하지 않는 죄와 내가 아버지에게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권리를 요구한 죄를 깨닫게 해주셨다. 성령님은 내게 부모를 공경하는 삶을 살고 그것을 표현함으로 회개의 삶을 실천하라고 조언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없는 용서를 실천하기로 선택하면 함께 따라올 그 감정을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셨다.나는 냉담한 대신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상처를 주는 대화와 상황을 반복해서 재생하려 했던 내 마음속의 녹음기를 끄기로 했다. 나는 예전에 받았던 그 책을 꺼내 읽었다. 그 책은 독자들이 서면으로 부모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이 한 것이 옳았다고 말하도록 도전하는 책이다. 나도 그렇게 했다. 3년이나 걸렸지만 해냈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님에게 큰 의미가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그런데 10년이 지난 후 나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아버지도 그대로 똑같다. 그리고 때로 나는 여전히 아버지의 존재하지 않는 칭찬과 관심과 부드러움을 갈망하는 작은 소녀임을 깨닫는다. 어버이날이다. 내 인생은 그러한 것에 지배받지 않아야 하며 언젠가는 한 해에 하루 이상 부모를 공경하기를 소망해 본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들로부터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잘했다는 말과 사랑하고 감사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다. 어버이날은 우리가 아버지에게 그런 말을 하는 때다. 더 나아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내게 최선의 것임을 안다.추한 진실하지만 추한 진실이 여기 있다. 나는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어렵다. 그래서 많은 영역에서 율법이 나를 계속해서 그리스도께로 이끌고 있음을 발견한다. 인정받을 만한 말로 지상의 부모를 늘 공경한 분의 의가 내게 얼마나 근본적으로 필요한지. 아버지를 공경하고자 하는 소망과 결단을 내 안에 일어나게 하고 힘들었던 긴 생애와 미래에 있을 죄까지 인내하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신 분의 영광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 내 마음의 정원을 가꾸고 내 행동과 반응에서 성장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는 성령님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 내 삶의 모든 실망(내 아버지에 대한 실망을 포함하여)을 사용하여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도록 이끄신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하늘 아버지가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나는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이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요청한다. 다시 한번 내가 무례, 완고함, 냉정, 경멸, 자기의(自己義), 용서하지 않음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한 걸음 나아가므로 하나님께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6).나는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원하여 나의 아버지에게 한 걸음 나아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며 넘어질 때마다 내게 힘을 주실 것을 믿는다.작가는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시키기보다는 공경하고 싶은 마음으로 무명으로 남기를 원했다.원제: I Do Not Want to Honor My Fath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가족
부모공경
아버지가준상처
성령의역사
자기의
아버지
용서
상처받은과거
어버이날
성공적인 양육은 부모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by Jeff Robinson • Chap Bettis
2021-05-06
나는 17년 가까이 아버지로 살아오면서 부모 노릇을 하면 할수록 양육에 관한 조언을 해주기에 부족하다고 느낀다. 부드럽게 말하자면, 육아는 겸손이다. 나는 종종 부모들에게 상담을 해줘야 할 위치에 있는 목사다. 나도 챕 베티스(Chap Bettis, ‘제자 삼는 부모'의 저자)와 같은 친구가 매우 필요하다.양육에 관한 책은 끝도 없이 많을 것이다. 이 중에는 정말 훌륭한 책도 있고 최악인 책도 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그 중간에 있다. ‘제자 삼는 부모’는 훌륭한 책이자 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그 책은 우리가 아이들을 키울 때 흔히 간과하는 두 가지 비판적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 실질적인 양육의 지혜를 담고 있다. 첫째, 하나님만이 아이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드실 수 있고, 둘째, 주님을 향한 두려움과 주님의 양육 안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으로 전도와 복음화에 관한 것이다.베티스의 책은 많은 곤란한 문제를 다루는 양육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예를 들어, 방탕한 아들과 딸의 현실, 세상에 대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방법, 소셜 미디어와 전자제품을 다루는 방법, 위선을 설명하는 등 많은 가시적인 육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베티스는 2012년 아폴로 프로젝트(The Apolo Project)를 설립하기 전에 뉴잉글랜드에서 25년간 목사로 지내면서 성도들에게 제자도와 변증학, 그리고 세계관을 가르쳤고, 교회가 더 가족 중심적이 되도록 도왔다.왜 ‘제자 삼는 부모’를 썼는가?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며 교회에서 복음을 듣는 특권을 가졌다. 나는 여덟 살 무렵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시 성인이 되면서 평탄치 않은 과도기를 경험했다. 내가 교회에서 본 위선은 나 자신의 지적인 질문들과 결합되어 내 신앙을 거의 파탄에 이르게 했다. 감사하게도 일반 대학에서 만난 크리스천들과 다양한 변증학 책들이 내 믿음을 강건하게 했다.나는 목사로서 아내 샤론과 우리 아이들을 가질 때,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의도적으로 결심했다. 육아 문제를 도와줄 많은 좋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떤 것도 직접적이고 성경적으로 아이들을 제자 삼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성경이 충분하다면(물론, 충분하다), 분명히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새로운 개척 교회에 동일한 마음을 가진 부모들을 보내주셨다. 우리는 아이를 기르고 있었기 때문에 양육에 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성경을 살펴보았다. 내가 이런 생각들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다른 부모들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미국이 기독교에 점점 더 적대감을 갖게 되면서 뉴잉글랜드의 가혹한 영적 풍토 속에서 자녀를 키웠다는 사실이 부모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듯했다.내가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깨달았을 때, 이 책이 도전적이지만 죄책감을 유발하지 않으며, 미국인에게뿐만 아니라 세월이 변해도 변치 않는 성경으로 가득한 책이 되고, 어떻게 죄가 상당히 어리석은 법으로서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기를 기도했다. 심지어 다른 교파와 비서구 국가로부터 전해 받은 피드백에 감사한다.왜 아이를 키우는 것과 복음 전도를 연결하는가?죄의 인지적 영향은 가족과 아이들을 보는 올바른 방법을 포함해, 많은 것들에 눈을 멀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저 아이들을 기르라고 주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가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원한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이것이 나의 양육의 전부를 변화 시킨다.부모들에게 자녀 양육을 위해 기초가 되는 성경 말씀은 신명기 6장과 에베소서 6장만이 아니라 그 구절 만큼이나 중요한 마태복음 28장 18-20절이다. 지상명령은 교회의 임무이자 우리 가족의 방향의 근간이 된다. 일단 양육을 안내하는 북극성을 가지게 되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고 많은 방면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 속에서 견고히 설 수 있다.많은 목사와 부모가 교회의 삶과 가정의 삶이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가정이 삼위일체를 보여주고, 제자를 길러내는 곳이 되도록 만드셨다. 이런 진리를 이해하는 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일단 부모가 이 점을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크리스천 부모가 여전히 따르는 근거 없는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많은 좋은 부모들은 완벽한 환경이 자녀들이 주와 함께 사는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비록 우리가 말은 하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은 종종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아이들의 구원은 아이들 또는 부모의 행함에 있지 않다. 아이들을 훈육하는 일은 적절한 재료를 넣고 적당한 시간 동안 적절한 환경에 두면 완벽한 아이들이 나오는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과는 다르다. 우리 아이들은 진짜를 선택해야 한다.위험을 경고받은 우리는 동일한 강도로 다른 점을 중시해야 한다. 하나님은 부모를 사용하실 수 있고 사용하신다. 부모의 의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며, 그 결과를 그분의 손에 맡겨두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성공적인 육아 그 자체가 아니라 신실한 육아다. ‘제자 삼는 부모’, 이 책은 특히 우리에게 맡기신 아이들을 위해 제자도의 참된 성경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만약 부모들에게 조언해 준다면?가정에서 복음적으로 살도록 하라. 아이들이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와 교회 지도자의 위선 때문이다. 자, 보시라. 신약성경에서 영적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첫 번째 방법은 모본을 통해서다. 가정은 아이들이 부모의 삶을 공부하는 장이다. 아이들은 어릴 때, 부모를 따라 한다. 아이들이 나이 들면 부모를 평가한다. 부모와 주님의 진실한 관계를 아이들이 보고 있는가? 바울은 디모데의 가정교육에 대해 말했다.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실천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야기하며 그가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모본 때문이라고 말한다.탕아를 둔 부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당신 아이의 구원은 부모의 행함으로 되지 않는다. 내가 존경하는 우리 교회 부목사는 10대 때 의도적으로 반항하기로 결정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곤 한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의 부모는 훌륭한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탕아를 둔 부모는 잠언 22장 6절의 잘못된 이해 때문에 너무 많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낀다. 우리는 이 말씀 구절을 만약 아이들을 잘 훈련시키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만약 아이들이 떠난다면 부모가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한다.어쩌면 부모가 잘못한 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구원이 우리의 양육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는 새로운 심령을 줄 수 있을 만큼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모든 부모가 영원한 영혼을 만들어가기에 엄청난 특권과 책임을 받았음을 알기를 바란다.원제: Faithful Parenting Is Successful Paren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송유희
복음
제자
가정교육
성실함
가정
양육
육아가 즐겁지 않아도 괜찮다
by Kristen Wetherell
2021-05-05
“모든 순간을 즐기세요.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이 사실을 알기 전에 아이들은 떠나갈 거예요.” 모든 순간을? 아이들이 어렸을 때를 기억하는가? 아이들이 떼쓰고, 카시트에 앉히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똥 기저귀를 갈고, 새벽 5시 반에 일어났던 모든 순간이 즐겁지 않았다. 헌신적이고 보람 있는 순간들이었지만 즐겁다고?시간은 빨리 지나갈지 모르지만 그 시간만큼은 더디게 간다.나는 두 살 된 아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키우는 동안 역시 “모든 순간을 즐기라"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당신도 나처럼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 아이들은 꽤 괜찮아. 이 시간들을 즐기기 위해 애쓰는 내가 뭐가 문제지?”라고 생각할 것이다.떼쓰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싸움에서 이기고, 기저귀를 가는 것과 같이 지금 당면한 순간들을 견디려고 애쓰는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는 불편한 감정을 겪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과 더욱 즐거울 수 있을까?부모의 목표이 질문은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도 같은 아이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은 좋은 목표이며 우리는 대개 그 목적대로 아이들과 즐겁게 지낸다. 아픈 곳을 달래주거나 미끄럼틀을 탈 때 응원하거나 혹은 더 자연스럽게 “해주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라고 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훈련의 열매를 지켜보던 멋진 순간들이 많이 있다.이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이 일에 몰두하기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이 시간을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 있다.하지만, 삶은 수많은 작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많은 순간들은 즐겁지 않다. 결혼과 일, 그리고 교회 생활, 심지어 휴일이나 휴가와 같은 이상적인 순간에도 이는 사실이다.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어쩌면 즐겁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모른다.어쩌면 매 순간마다 즐기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다. 아이들이 코 흘리고, 흙 묻은 발로 돌아다니고, 편식하는 순간을 항상 즐길 수는 없다. 어쩌면 이는 예견된 일이다. 우리가 죄악된 불평에 빠져 있는 그곳에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아이들을 즐거워해야 하는 비현실적인 부담을 스스로 떠맡을 때, 우리의 목표는 길을 잃고, 모든 순간 아이들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부모의 기대결코 아이들이 삶의 가장 즐거운 부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자 상급이다(시 127:3). 맞다. 그러나 하나님, 그분이 바로 유산, 보상, 목표다. 우리 아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가장 진실하고 가장 큰 기쁨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을 계속해서 즐거워하지 못해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때, 삶의 모든 순간을 즐거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기억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의 열망이 그리스도를 즐겁게 하는 것일 때 비로소 자녀 양육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올바른 위치에 놓이게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예견한 맞닥뜨리게 될 고난과 고역을 실패처럼 느끼지 않을 것이다.ㆍ우리는 부모로서의 소명이 죄로 인해 저주받고 좌절되어 왔으며(창 3:16-19), 이 높고 힘든 소명 속에서 인내하시는 하나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ㆍ우리는 고통으로 가득 찬 죄악된 세상에서 살 것을 예상해야 한다(롬 8:20-22). 이는 우리가 내적으로나 이 세상에서의 고통으로 놀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ㆍ우리는 죄인에서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된 존재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성령으로 옷 입는 전쟁을 매일 치러야 한다(롬 7:21-25).ㆍ우리는 하나님의 개입과 구원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잃어버린 죄인을 양육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시 51:5).ㆍ우리의 환경이나 아이들만이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것이 아님을 믿음으로써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영광과 경의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계 5:12).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예배한다.부모의 즐거움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최고의 즐거움을 발견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우리의 기쁨은 배가 되고, 넘쳐흘러 기쁘게 아이들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과 사역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예배할 것이고 이는 우리의 작은 순간들, 특히 즐겁지 않은 순간들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공격 받았을 때세 살짜리 아이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당신의 뺨을 때려 분노로 폭발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히 12:2) 십자가를 견딘 예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과 그분이 악의보다 긍휼과 진리에 점점 더 반응하도록 힘주시는 분임을 기억할 수 있다. 지쳤을 때울고 있는 아이의 방을 셀 수 없이 들어갈 때, 피곤이 당신의 영혼을 짓누르며 위협할 때, 당신은 상황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쉼을 얻을 수 있다. 그분의 선하심은 그 순간 당신에게까지 확장된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섬기시니,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열정과 힘을 우리에게 주시며 끊임없이 우리를 위로하신다. 당신은 아이를 돌보는 동안에도 주 예수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골 3:17, 24).시험받을 때아이가 짜증을 내며 관심을 끌려고 할 때, 그리고 당신이 화가 나서 하던 일을 멈추려고 할 때, 당신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골 3:10)임을 기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일하시고, 현존하시며 당신 아이를 양육하는 데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면 기뻐할 수 있다. 예수님이 모르는 시험은 없다. 그분은 당신과 자녀의 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며, 육신을 벗고 성령을 입도록 힘주신다.부모가 틀렸을 때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고나서 당신이 아이들과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다고 성령의 확신을 따라 깨달았을 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흔들리지 않는 용서의 확신을 한껏 누릴 수 있다. 그분의 눈에 당신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롬 5:1). 죄를 없애시고 그분의 온전한 의로우심으로 당신을 덮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신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아이에게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고, 당신도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임을 나누며 용서를 구할 수 있다.진정한 기쁨은 아이들과 함께한 매 순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깨지고 저주받은 세상에서 죄인들이 죄인들을 양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진정한 즐거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그다음에 아이들과 나눌 수 있다. 심지어 즐겁지 않은 상황에서도 말이다.원제: When Parenting Isn’t Enjoya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송유희
가정
양육
목표
기대
즐거움
성령
그리스도
가족 제도에 대한 오해와 진실
by Joe Carter
2021-05-04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The Atlantic의 최신 기사에서 '핵가족 제도는 실수'라고 말했다. 브룩스는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문화에서 이상적인 것이라 여겼던 가족 제도는 많은 이들에게 재앙을 초래했다. 함께 살 수 있는 더 좋은 방도를 강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이 기사가 나간 후, 어떤 것이 최선의 가족 제도인지에 대한 실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족연구소(Institute for Family Studies)에서 주최한 심포지엄 같은 것이 한 예다. 가족 제도에 대해 알아야 할 아홉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가족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부모와 그들의 양육을 받는 자녀로 이루어진 조직을 말하거나,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가족과는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이에 준하는 다양한 사회적 단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가족 제도의 대표적인 세 가지 형태에는 부모와 자녀 한두 명이 동거하는 핵가족, 부모/자녀를 비롯해 이모나 고모, 삼촌, 조부모나 사촌 등이 한 집에 살거나 가까운 곳에서 거주하는 대가족, 그리고 한 부모나 보호자가 배우자나 동거인 없이 자녀들을 데리고 사는 편부모 가족이 있다. 2. '핵가족'이라는 용어는 1920년대에 처음 등장했는데 원래는 인류학이나 사회학 같은 학문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옥스포드대사전에 의하면 이 용어는 사회학적 문화인류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Bronisław Malinowski)가 고안했다고 한다. 말리노프스키가 이 용어를 처음 만들었을 때 핵(nuclear)이라는 말은 원자력과는 무관했고 사람들은 그 단어가 '핵심'을 뜻하는 라틴어 누클레우스(nucleus)에서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가족 제도에서 이 말을 쓰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즉 핵심 구성원을 가리킨다. 3.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핵가족은 사실 산업혁명 이후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영국 교회의 교구에 관한 기록과 기타 인구통계학 자료를 기반으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핵가족이 이미 13세기 이후부터 영국에서 대표적인 제도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남녀가 결혼할 준비를 할 즈음이면 양가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에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대가족은 상대적으로 희귀한 제도가 되어갔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그랬듯이 유아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당시 평균수명은 50년에 훨씬 못 미쳤다.) 4. 영국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대가족 제도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산업혁명 ‘후’였다. 1750년에서 1900년 사이에는 중산층이 친척들을 부양할 수 있었고 기대수명이 증가했으며 사람들이 점점 더 젊은 나이에 결혼하기 시작했기에 대가족은 더욱 흔해졌다. (1890년에서 1900년 사이 미국의 평균 결혼 연령은 남성의 경우 26.1세 여성의 경우 22세였다.) 대가족 제도가 흔해지긴 했지만 대가족 제도가 핵가족 제도처럼 지배적인 제도로 자리잡았던 적은 없다. 5. 1920년대에 이르렀을 때에는 남자가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핵가족 형태가 대가족 제도를 제치고 지배적인 가족 형태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에는 원가족에서 독립한 남녀가 혼인하여 이룬 핵가족 안에서 부모의 보살핌 아래 자라는 아이들이 77.5퍼센트에 달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부모/자녀 두 세대로 이루어진 가정의 경우 부모들이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상태인 경우가 46퍼센트고, 이혼, 별거, 또는 사별한 경우가 19퍼센트다. 백인 부모들 중 대가족 형태로 자신들의 부모를 모시는 이들은 41퍼센트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58퍼센트다. 자녀가 있는 유색 인종 가족들의 경우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정의 비율은 백인들의 거의 두 배에 달한다. 6. 미국의 경우, 이혼이 일반화되기 시작하면서 가족 제도가 본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1867년에서 1915년 사이에는 이혼율이 1퍼센트 미만이었고 1940년까지만 해도 2퍼센트를 넘지 않았다. 이혼율이 최초로 3퍼센트를 넘었던 것은 1969년이었는데 이는 캘리포니아가 최초로 합의이혼을 제도화했던 해였다. (부부는 이제 합의이혼라는 제도를 통해 소위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만 입증해도 이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1979년에서 1981년 사이에 이혼율은 5.3퍼센트에 달하며 최고점을 찍었다. 그 이후로는 혼인율 감소와 함께 이혼율도 동반 감소해왔다. 현재 혼인율은 인구 1,000명당 6.9명이고 이혼율은 1,000명당 2.9명이다. 7. 편부모와 거주하는 미국 아이들의 비율은 다른 나라 아이들보다 높다. 대가족 거주율은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더 낮다. Pew Research 그룹의 자료에 따르면 18세 이하 미국 아이들의 경우 거의 4명 중 1명(23퍼센트)이 다른 성인 없이 편부모와만 거주하는데, 이는 세계 평균인 7퍼센트와 비교하면 세 배에 이르는 수치다. 세계적으로는 38퍼센트의 아이들이 이모나 조부모 등의 친척들과 거주하는데 미국 아이들의 경우 8퍼센트에 불과하다. 미국에서는 기독교 가정이나 종교가 없는 가정이 이러한 통계에서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8. 하지만 가장 흔한 가정 형태는 무자녀 가족이다. 출산율 및 유자녀 가족의 비율로 계산해볼 때,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출산율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다른 지표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감소가 미국에서 자녀 중심주의를 약화시켰고 결혼제도의 약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1800년대 중반에는 18세 이하 아이들을 자녀로 둔 가정은 75퍼센트에 달했지만, 백 년 후인 1960년에는 이 수치가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그리고 약 오십 년 후인 2011년에 이르자 자녀가 있는 가정은 불과 32퍼센트 뿐이었다. 이것이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자녀와 동거하는 성인들이 줄었다는 것이고, 동네에서 아이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자녀들이 차지하는 영역이 줄었다는 사실이다. 9. 그리스도인들은 핵가족과 대가족 중 어떤 가족 제도를 장려해야 할까? 몇몇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성경은 둘 모두를 지지하는 것 같다. 먼저 창세기 2장 24절에서는 결혼을 하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한다. 신약에서도 '떠나서 독립하라'는 원칙은 예수님과(마 19:5) 바울에 의해(엡 5:31–32) 다시 한번 확인된다.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존 파이퍼(John Piper)가 말하듯, 원가족의 일원으로 살던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별 지어주는 결혼의 네 가지 특징이 무엇인지 정리해볼 수 있겠다. 남자와 여자가 혼인하는 것은 새로운 성실, 헌신, 사랑, 친밀함과 우선순위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무엇보다 가족의 경제적 필요를 채우고 새롭게 세워진 가정을 지키고 이 새 가정을 위한 리더십을 수행할 이, 즉 남편에게 전혀 새로운 책임감을 주셨다는 것을 뜻한다.존 파이퍼는 말한다. “성실함과 책임감이라는 네 가지 새로운 구조들은 필연적으로 부모를 떠날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성실의 옛 구조, 경제적 필요 공급의 옛 구조, 보호의 옛 구조, 리더십의 옛 구조를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 적어도 신약이 가르치는 혼인의 본질은 그런 것입니다.” 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Family Structur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가족
핵가족
대가족
존파이퍼
무자녀
충실감
책임감
상처입은 치유자
by Joni Eareckson Tada
2021-04-17
8월의 어느 무더운 아침, 에이프릴(April)과 그녀의 남편은 아들들을 SUV 차량에 태우고 시에라네바다(the Sierras) 산맥에서 일주일간 캠핑을 하기 위해 출발했다. 목적지에 반쯤 다다랐을 때 에이프릴은 아이스박스를 열기 위해 안전벨트를 잠시 풀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바로 그 순간 반대편 차선에서 오던 차가 휴게소로 들어가기 위해 갑작스럽게 차선을 변경해서 들어왔다. 미처 브레이크를 밟기도 전에 에이프릴 가족의 SUV는 그 차와 충돌했는데, 그 차를 운전하던 노인은 중상을 입었고 그 차에 함께 탑승했던 이는 사망했다. 에이프릴의 몸은 앞의 대시보드를 강타했고 목이 부러지고 말았다.15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내가 에이프릴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휠체어에 구부정하게 앉아 재활 치료를 받고 있던 사지 마비 환자였고 비참한 모습으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재활치료사의 말은 그녀에게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내 휠체어를 몰아 그녀 옆으로 갔고 함께 울기 시작했다.내 눈물은 함께 고통받는 이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나는 에이프릴이 맞닥뜨린 공포가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저 조용히 ‘오 하나님, 이 젊은 엄마가 어찌 이를 견딜 수 있을까요? 내가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주어야 할까요?’라고 간구했다. 에이프릴은 울 수밖에 없었다. 2년 내로 남편은 그녀를 버릴 것이고 아이들 양육권 다툼이 이어져 그녀의 인생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상처입은 구원자를 담은 상한 그릇들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위로를 다른 이에게 전하라 ‘명하신다.’ 고린도후서 1장 3–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하나님의’ 위로지 우리의 위로가 아님을 주목하라.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힘으로 위로를 전해줘야 한다면, 에이프릴 같은 이들을 볼 때 우린 그저 안타깝게 여기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신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 칭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위로는 자신이 겪은 환난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을 가엾게 여기는 아버지들은 자녀들이 큰 환난을 당할 때 ‘항상’ 함께 아파한다.질고를 아는 분이 에이프릴 같은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찢기고 부서진 생명의 떡이 되셨다. 우리는 그분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주시는 격려를 우리 자신의 깨어짐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도록 하셨다. 다른 이들을 보며 그냥 안타까워하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가 아니다.그리스도는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시는가스코틀랜드의 목회자였던 윌리엄 아놋(William Arnot, 1808-1875)은 “내가 울 때 슬픔이 내 마음에 낸 흠집의 틈바구니 사이로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부드럽게 내 마음을 어루만져 그것을 온전히 당신의 것으로 만드신다”라고 썼다(Roots and Fruits of the Christian Life).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면 우리의 환난은 기쁨이 되고 암울해진 영혼이 살아나고 위축된 마음이 펴지며 미약한 의지가 그리스도의 인내와 소망으로 강해진다. 공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시는 것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위로의 본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벧전 4:13) 오히려 ‘즐거워하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더욱 달콤하고도 친밀한 관계로 이끄신다. 환난 속에서 주와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를 강하고 용감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목뼈가 부러져 절망에 빠진 젊은 엄마에게 다가가는 것도 가능케 한다. 하나님의 대리인 되기하나님이 주시는 아버지의 위로를 ‘받으면’ 우리는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그의 사랑을 전해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도구’가 된다. 더욱 기쁜 것은, 에이프릴 같은 사람을 잘 위로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에이프릴 같은 사지 마비 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직관적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고후 1:4)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난은 어떻게 우리가 상처 입은 이들을 더 잘 위로하도록 하는 것일까?중보함으로‘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함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고난 중에 있는 당신이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하면, 이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시 10:17) 들으시는 하나님의 귀에 대고 그야말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고난을 받는 자로서 환난을 당하는 타인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더욱 큰 통찰과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도하고 더욱 깊은 간절함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귀를 쫑긋 세우고 놀란 표정으로 ‘이 중보자는 정말 진지하다. 자기 자신 역시 고난을 당하고 있기에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이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상상해본다.“우리의 씨름은 [비극적인 사고, 사지 마비, 이혼 같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중략]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라는 에베소서 6장 12절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불로 담금질한 기도가 고난 당하는 다른 이들을 위한 간구에 어떤 도움이 될까? 에이프릴 같은 사람들은 우리의 대적 마귀가 하는 거짓말에 취약할 수 있다. 하지만 고난 받는 성도의 중보 기도로 그런 거짓말들을 막아줄 수 있다(눅 22:31–32). 그의 말씀으로‘우리는 그의 말씀을 통해 다른 이들을 위로한다.’ 내가 목에 골절상을 입었을 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셨던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역시 고난을 겪고 있었음에도 나의 초점을 온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맞출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약속들이 그를 지탱해주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기에, 나 역시 그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그의 도움으로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약속들을 하나하나 살펴가는 것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의 고난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를 얻었다. 에이프릴에게도 동일한 것을 전해주었다. 하지만 “이 환난을 친구로 여겨요. 힘 좀 내요, 고난 중에도 즐거워해야죠!”라는 식으로 결코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것은 혈액 한 팩을 테이블 위에 툭 던져놓고는 “자 여기요. 이걸 믿으세요.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한마디 던지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그의 혈관에 나의 혈관을 연결하여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나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함께함을 통해 그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더 큰 그림을 보여줌으로써‘우리는 더 큰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이들을 위로한다.’ 배신, 노예 생활, 투옥으로 고난을 당했던 요셉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았기에 그의 악한 형들을 만났을 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당신 자신이 고난을 통과했던 때를 기억해 보라. 고난을 견딘 당신의 인내를 통해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깨닫게 되지 않았던가? 고린도후서 1장 6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에이프릴은 자신의 삶은 하나님이 은혜를 펼쳐가시는 무대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에이프릴을 주위에서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 역시 이 무대를 주목하는 관객임을 알게 되었다(엡 3:10). 자신의 고난이 단순히 자기 개인의 일이 아닌 우주적인 사건임을 알게 되자 에이프릴의 신앙이 되살아났다.용감해질 수 있도록 도우라같이 고난 당하는 이들을 통해 에이프릴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이들 역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에이프릴을 위해 하는 기도와 말에 신뢰감을 더해주었다.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당신은 하나님이 다른 이들을 회복하는 일에 쓰시는 최고의 통로가 된다. 미국의 장로교 목사였던 J.R. 밀러(J.R. Miller 1840-1912)가 쓴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위로하시는 방식이다. 그는 고난 받는 이들 옆에 그저 앉아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공감하신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주신다”(‘Things to Live For’). 이 글을 쓰기 2주 전 에이프릴이 장애에 의한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서 내가 말할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휠체어를 굴려 앞으로 나가 눈물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매일 아침 휠체어에 단순히 앉는 것만 하려 해도 에이프릴이 겪어야 했던 그 많은 고통들을 잘 압니다. [중략] 저도 고난을 겪는 사람이기에, 에이프릴이 이제 고통이 없는 곳에 있다는 사실이 제게 위로를 줍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자 했던 그녀의 단순한 자세는 제게도 그렇게 행하라는 영감을 줍니다”라고 말했다. 감히 말하건대, 그날 아침 내가 정말 어렵게 고민하고 말한 그 고백이 그날 모인 ‘많은’ 사람들을 위로했을 것이다. 고난 중에 받은 위로는 바로 그렇게 전해진다. 당신이 경험한 고난이 무엇이든, 당신이 어려울 때에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속으로 묵상하기만 하며 그저 방관자로 남아있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하나님은 당신에게 사명을 주셨다. 고통에 대한 당신의 다음 한 판 승부는 하나님이 당신을 따뜻하게 격려하시며 당신보다 더 큰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라 보내시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그들 자신의’ 질고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용감해질 수 있도록 도우라.이것이 바로 주님의 상한 몸을 통해 위로 받은 상한 자가 하는 일이다. 원제: Broken to Comfort the Broken: How Quadriplegia Prepared Me to Carry Others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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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
by Phil Anderas
2021-03-19
친애하는 형제에게이번에 특별히 네가 중요한 생일을 맞이한다고 하면서 너의 아버지가 내게 한 가지 요청을 하셨어. 누구나 어렸을 때 알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때는 알 수 없는, 인생에 관한 교훈을 담은 편지를 네게 써주면 좋겠다고 말야. 아주 좋은 생각이라 여겨지기에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쓴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솔직하게, 성화된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힘든 삶의 여정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있는 인생 학교라는 사실부터 말하고 싶구나. 십자가의 길에는 지름길이 없단다. 오로지 고통만이 있을 뿐이지. 네가 부름받은 이유도 힘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고, 때로는 두렵겠지. 그러나 하나님이 네 곁에 계시니 조금도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복음이 약속한대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데, 이 세상이 어떻게 감히 너와 대적할 수 있겠니?자, 나는 이제 의인이 된 죄인(sinner-saint)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는 순례자라면 거쳐야 할 세 가지 단계를 너에게 알려주고 싶구나. 덕(virtue)에 관해서첫 번째로, 젊은이라면 어떤 동기에서든지 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단다. 내 경우에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책을 통해서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덕을 의미하는 ‘Virtue’는 '힘'을 의미하는 오래된 라틴어 ‘virtus’에서 온 것인데, 이 단어는 또한 사람을 의미하는 ‘vir’와도 연결된다. 즉, 진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덕을 많이 쌓아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지. 돈, 성적 매력, 스포츠, 성공 중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없단다. 오로지 덕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렴. 그리고 네가 꼭 얻어야 할 네 가지 기본 덕(목)은 지혜, 정의, 용기, 그리고 자기 통제란다. 지혜는 겉모습에 가려진, 숨겨진 진짜를 볼 수 있는 능력이으로 지혜를 가진 사람은 그 누구보다 건전한 판단을 하게 된단다. 성경은 또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어. 그 이유는 하나님이 가장 확실한 실재이기 때문이지. 주님되신 하나님의 완전한 실재를 체험함과 동시에 너무도 형편없는 나 자신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허물어질 때, 사람이라면 겪는 가장 자연스런 반응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을 사모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너는 그 누구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거야. 다음은 정의다. 정의는 인간됨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바탕으로 타인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하는 데 나 자신을 아끼지 않는 능력이지. 세상이 갖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네가 해를 입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굴하지 않으며 의롭고, 옳고, 선하고, 충실하고, 진실하고, 또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야. 세상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심지어 생명까지 앗아간다고 해도 정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세 번째는 용기다. 용기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는 능력을 말하지. 오해하지 마라, 그것은 두려움이 실종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야. 어리석은 인간은 아예 두려움 자체를 느끼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는데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또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를 잘 알기 때문이지. 그러나 세상보다 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고, 그렇기에 용기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정의의 길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단다. 그런 지혜를 바탕으로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 부귀, 심지어 생명보다도 정의를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이고, 그 결과 선을 위해 기꺼이 손해까지 감수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마지막 덕목은 자기 통제다. 자기 통제가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떠나버린, 벽이 무너진 도시와 다를 바 없음을 기억해라. 자신을 지배하고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힘, 이 덕목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음식이나 술, 이성 또는 복수심과 같은 욕망이 너를 지배하게 놔둬선 안 된다. 그것들은 네가 허락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주인이 되어 너를 노예로 부릴테니까. 대신 너는 그것들을 지배해야 한다. 기억해라, 자제력을 가져야만 진정한 자아를 소유하게 되고, 네 자신을 온전히 소유할 때만 진정한 자유 속에서 바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덕에서 은혜로두 번째 단계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말했듯이, 덕에서 은혜로 '전환'하는 것이다. 해 아래에 덕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에 덕을 쌓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결코 네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 덕이란다. 사실,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내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절실하게 깨달을 뿐이지.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흐르고 있는 죄성으로 인해 너의 죄는 실로 엄청나게 중하다는 걸 알고 있니? 도무지 혼자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니까. 아무리 고대 지혜와 각종 기법을 동원해도 죄 문제만은 해결할 수 없지. 게다가 문제는 죄만이 아니다. 네가 자랑하는 도덕적 미덕조차도 그 안에는 영적 암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네 선함조차도 교만의 악으로 인해 이미 손상된 상태고, 네가 자랑하는 최고의 업적 또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자아라는 심각한 병에 걸린 상태를 드러낼 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네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이야. 사람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한 아담은 다름 아니라 덕을 포기했고, 결과적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거지. 나 또한 아담의 자손으로 그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게는 덕보다 더 나은 게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다. 너는 세례를 받았고 또 복음의 약속도 받았어. 하나님은 너를 너무 사랑하셔서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까지 내어주셨으니까. - 스스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라. 그는 너의 지혜다. - 네 자신의 불의를 인식할 때면,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라. 그는 너의 의가 되신다. - 네 자신의 비겁함을 알아차릴 때면,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라. 오로지 그분만이 네게 용기를 주신다. - 정욕의 노예가 되었음을 알아차릴 때면,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라. 그의 피는 너의 모든 죄를 속하시며 또 그가 주시는 성령은 육신을 이기고 너를 거룩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하니까. 네가 어느 날 정말로 크게 잘못을 범하고, 덕을 추구하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에 굴복했을 때도 실망하지 말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높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은 두 번째 아담이자 또한 최후의 인간으로서 너와 나 같은 죄인의 친구가 되시는 분이다. 네 자신의 무력함을 더 빨리 깨달을수록, 너는 더 강해질 수 있는데 그건 네 힘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또한 그리스도는 진정한 인간(the Vir)이 되신다. 우리의 진정한 아담인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에까지 순종함으로 첫 번째 아담이 초래한 재앙을 마침내 해결하던 바로 그날,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을 보라”라고 말했지.가장 위대한 것첫 번째 아담에서 떨어져 나와 은혜로 인해 그리스도에게로 접붙여진 우리는 이제 예술 중의 예술인 사랑을 배우기 시작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다.왜 그럴까? 그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요일 4:8) 때문이란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진정한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 언젠가 너도 직업을 선택할 날이 오겠지. 그건 너무도 중요한 일이야. 좋은 직업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취미도 좋고, 사냥은 재미있고, 책을 읽는 것은 즐거움과 지혜도 함께 가져다주지. 그러나 결국에 인생에서 남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이다. 사람, 그리고 그들과 나눈 사랑.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삼위 일체로 존재하시는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이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셔서 다시금 자신의 형상을, 곧 사랑을 회복하게 하셨다. 사랑이 무엇일까?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고 아담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해,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 위해 왕 중의 왕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신부를 위해 목숨을 내어줌으로써 그 신부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또 희생의 길을 배우게 되면, 너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게 될 것이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3-14). 너는 이미 좋은 출발을 했고 아주 잘 살고 있다. 그 길에서 절대 벗어나지 말고, 또한 믿음의 길을 함께 가는 내게도 도움을 나눠주길 바란다.너의 형제, 필 목사가원제: Letter to a Young Christian 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덕의중요성
신앙훈련
첫번째아담
자기통제
사랑의의미
덕에서은혜로
용기
정의
신앙은 씨름하는 것이다
by Guy M. Richard
2021-03-10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선택한 이름들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택하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창세기 32장에서 이 이름이 주어진 정황은 다른 모든 가능성들 중에서 “그가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창 32:22–32; 호 12:3–4). 하나님이 무한하신 지혜 가운데 자신의 백성들 즉, ‘씨름하는 자들’을 부르기로 선택하신 듯하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시간들 사이에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려해 본다면, 하나님의 진정한 이스라엘로서(롬 2:28–29; 4:11–12; 갈 6:12–16) 크리스천은 원래 야곱에게 주어진 이름의 의미처럼 상속자이며 바로 ‘씨름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들 사이를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관점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야곱처럼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씨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씨름해야 하며 극복해야한다(호 12:2–6).하지만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 물든 세상, 즉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은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긴장감 속에 있다. 죄로 인한 아픔, 질병, 기근 그리고 자연재해 등은 ‘아직’ 새롭게 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결과들이다. 무법, 폭력, 테러 그리고 전쟁도 ‘아직’ 새롭게 되지 않았거나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죄인들이 거주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삶의 결과들이다.시간들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이러한 결과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씨름은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분의 섭리가 아무리 어둡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여 다투거나 혹은 그분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서도 안된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많이 있다. 왜 나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궁금한 순간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이혼의 순간에 크리스천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자녀가 도망가거나, 가정을 등지고 떠나거나,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할 때는 어찌해야 할까? 한 번의 사건으로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상실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범국가적인 자연재해나 전염병이 누군가의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의 기능을 파멸시켜 버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크리스천은 이러한 때에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욥이 씨름했던 것 아닌가? 욥은 하나님이 그의 삶을 섭리하신 그 어둠의 순간들로 고군분투했으며 야곱처럼 그냥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씨름했고 비록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승리했다.우리도 마찬가지다. 삶의 여정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머리를 덮고 있는 구름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우리는 욥처럼 전심을 다해 노력해야만 하며 끝나는 날까지 인내해야만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어둠이 물러갈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야곱처럼 고백하며 씨름해야만 한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까지 당신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한다는 의미다. 기쁨없이 모든 것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어둠이 제거될 때까지 고통없이 참아내야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께서 진정으로 모든 것을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 삶의 여정 가운데 보내주셨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잘 씨름하는 것이다.둘째로,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긴장감은 크리스천이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비록 우리의 현재 모습이 과거의 모습과는 다를지라도, 분명 아직은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는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롭게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이것은 크리스천의 삶이 필수적으로 자신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임을 의미한다(롬 7:15–25). 크리스천은 반드시 죄를 억누르며 거룩과 의로움을 추구하도록 노력해야만 하되 이를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한다(롬 8:12–14; 빌 2:12–13).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힘써 행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죄와 악한 영들을 대항하며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생이 끝나는 날과 그림자가 물러가는 날까지 인내해야만 한다. 야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밤새 씨름하고 승리해야 한다.시간들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씨름을 예상해야 한다. 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과 함께 죄와 악한 영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씨름하는 것은 씨름하지 않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시간들 사이를 살아간다는 말은 우리가 씨름하게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리는 잘 싸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주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원제: Our Blessed Struggle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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