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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하나님의 메가폰
by Alistair Begg
2020-06-15
C. S. 루이스가 고통과 아픔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 이래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독자들이 그로부터 지속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를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라는 처방을 통해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처방책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절실해 보인다. 요즘에는 각종 매체를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프지 않기를 원하십니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메시지를 듣게 되면, 휠체어에 몸을 맡긴 장애인들이나 복합적인 만성 질환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격려가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오해하는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순례자로서 겪는 지상의 삶과 본향에 이르러 겪게 될 천상의 삶을 뚜렷이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죽음과 애통, 슬픔과 고통이 더 이상 없는 날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현재 상태를 정직히 돌아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듯, 그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우리 중 대다수는 루이스가 언급한 “지루하리만치 반복되는 비참한 일상에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겪어 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온갖 종류의 시련을 다 피해간 사람은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시련은 때로 적군으로 위장해 우리 앞에 등장할 수 있지만, 그 적군이 사실상 친구로 밝혀지는 경우도 흔하다. 야고보 사도는 독자들을 향해 시련을 당하거든 그 시련을 인생의 침입자로 여기며 분개하지 말고 친구처럼 대하며 맞아들이라고 권한다. 그러한 고통 앞에서 도망치며 숨기보다 그 상황이 우리의 상태를 깨닫게 하여 더욱 성숙된 길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시련을 맞으라는 권면이다. 물론 루이스도 고통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고통이 우리의 구속과 성화를 이루는 데 쓰인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나는 32년의 목회 사역을 통해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는 일이 마침내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 한 예로, 우리 교회에 출석하던 어느 핵물리학자를 들 수 있다. 그는 처음에 아내와 세 딸의 강요에 못 이겨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예의 바른 자세로 앉아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내면에는 차가운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존 스토트(John Stott)가 쓴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도 읽어 보았지만, 자신의 과학적 신념에 갇혀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네 번째 아이인 11개월 된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통의 메가폰이 그의 인생에도 울렸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 그러한 비극과 상실의 경험을 제대로 다루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기존의 세계를 초월하여 스스로 계시는 그분의 손에 붙들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그 끔찍한 시련의 필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반역하는 그의 마음을 정복하시고 평강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셨던 것이다.실제로 그분은 우리가 그럴듯하게 포장된 행복을 맛보는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고통을 사용하신다. 따스한 햇볕 아래서 꾸벅꾸벅 조는 신앙인이 있을진 몰라도, 뜨거운 불길이나 거대한 홍수를 보며 잠에 곯아떨어지는 크리스천이 있을 순 없다. 외관상 모든 일이 잘될 때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잊고 살 수 있는지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그러다가 혹 조직검사로 악성 종양이라도 발견되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근심의 폭풍이 몰아치며 자기만족 따위의 지난 망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이렇게 우리를 일깨우시며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이끄시는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자비로운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우리가 받는 고통의 경험이 성화를 이루는 과정이 될 때, 타인이 직면하는 시련에 대한 의식이 생겨 비로소 온화한 교제도 가능해진다. 고통과 좌절을 통해 부드러운 마음을 얻게 되면, 타인의 연약함을 짊어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자장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으로서(히 4:15)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남기셨다. 특별히 우리 중에 가르치고 지도하는 리더의 자리로 부름 받았으나 약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향해 온유와 긍휼의 마음을 보이는 데 실패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분의 본을 더욱 깊이 새겨야 한다. 나의 경우는 이제 겨우 고통의 바다에 발가락만 담근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밤의 고독한 시간처럼 무거운 인생의 고비를 지날 때에야 화창하고 건강했던 시절에는 결코 배우지 못한 교훈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가 했던 말에 동의해야 한다. “그분은 험상궂은 섭리 뒤로 자신의 미소를 감추신다.”나는 이 자리에서 고통의 주제를 더 깊이 다루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만은 깊이 묵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첫째, 하나님은 얼마나 자주 고통과 아픔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를 훈련하시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자신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히 12:5). 둘째,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고난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삶을 교정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지 또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시 119:67, 71).루이스는 우리의 인생에서 또는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친구나 이웃의 삶 속에서 고통의 메가폰이 울릴 때 우리가 피상적인 낙관주의로 반응하거나 아니면 깊은 비관주의의 심연으로 빠지지 않게 붙들어 준다. 누군가 내면의 절망으로 몸부림치며 자신이 겪는 시련과 고통을 뼈저리게 의식하다가 혹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런 시련을 받지 않고 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아픔과 환난에 대해 정직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이 야기하는 모든 물음에 답변하려 하지 않는다. 감추어진 일은 그분께 속했음을 알기 때문이다(신 29:29).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에워싼 그 미스터리 가운데서도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확고한지는 단언할 수 있다. 이에 우리 자신이 겪는 고통과 슬픔의 현장 속으로 들어오신 그분을 오늘도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Pain: God’s Megaphone번역: 장성우
영성
영적성장
루이스
고통
메가폰
성화
존스토트
꼰대는 절대 모르는 복음 전도법
by 박용기
2020-06-09
2020년 ‘꼰대’라는 단어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표준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꼰대는 꽉 막힌 기성세대를 가리키는 은어다. “나 때는 말이야…. 내가 해봐서 아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말이야…. 너 여기 좀 앉아 봐라…. 이게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꼰대가 자주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성세대의 근면, 성실 그리고 희생적 수고로 대한민국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러한 점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1985년 이후 출생)에게 기성세대가 일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즘 젊은 세대는 건국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추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사람들이 그냥 더 똑똑하다”(Young people are just smarter)고 했다. 기성세대가 이러한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협업하기 위해서 필요한 대화법을 소개하겠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이런 스토리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보다 현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신탁을 듣고 그는 당황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당대 현자로 알려진 정치가, 시인, 공예가를 찾아가서 대화한다. 현자들은 과연 그들의 분야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혜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분야에서 탁월하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저들은 그들이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내가 저들보다 지혜로운 것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꼰대는 자신의 무지를 모른다. 자신의 경험, 지위, 나이에서 오는 우월 의식으로 다른 분야도 다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다. 바울이 1세기 소크라테스의 고향인 아테네에 도착했다. 그는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다(행 17:16). 바울은 꼰대처럼 아테네 사람들에게 “성경에 의하면, 내가 믿는 진리에 의하면, 너희들은 다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야”라고 일방적으로 설교하지 않았다. 바울은 거룩한 분노에 가득차서 광장으로 나가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행 17:17)했다. 바울이 했던 ‘변론’은 헬라어 ‘디아레고마이’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이성적 ‘대화’였다. 바울이 했던 ‘변론’은 상대방의 의견을 먼저 경청하고 공감되는 부분은 공감하면서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진리를 찾는 대화 방법이다. 팀 켈러 목사는 바울이 아테네 광장에서 사용한 대화 방법을 ‘소크라테스 대화법’이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우리는 두 세계관이 전혀 다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세계관으로 다른 사람의 세계관을 바보 같다고 판단하는 대신에 당신은 먼저 다른 세계관에 대해서 공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공감하려고 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비웃으면 안 됩니다. 고함쳐도 안 됩니다. 상대방이 ‘얼마나 멍청한가!’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당신은 상대방 세계관의 전제와 기준으로 그들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기준에 의하면 당신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용한 대화법입니다.”(팀 켈러, 리디머장로교회 주일설교, 2015년 10월) 바울은 제우스 신전과 파르테논 신전 그리고 여러 신전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아테네 도시 한복판에서 격분했다. 그러나 광장으로 나가서 아테네인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경청했다. 바울은 아테네인이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인정해주었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소개하겠다고 했다(행 17:22-23). 아테네인은 범신론, 이신론, 무신론, 자연신론을 믿고 있었다. 아테네의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 세계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을 믿었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입하신다고 소개한다(24, 26, 28절). 아테네인은 웅장한 신전을 건축함으로 신들을 섬겼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신전 안에만 갇혀 계시지 않고 그 백성의 일상 가운데 동행하신다(28절). 아테네인은 물질을 드림으로 신들을 달래고 얼러 안전과 축복을 얻어 내려고 했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을 받으려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온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한다(25절). 바울은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세계관을 가진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했다. 바울은 아테네인들에게 그들이 신을 섬기는 노력으로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최후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복음을 전했다(31절). 2018년 9월에 LG화학 임원 300여 명이 참석하는 워크숍에 신입 사원 여섯 명이 강사로 초빙되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알고 있는 임원들이 신입 사원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경청’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신입 사원들은 임원들에게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부탁했고, 업무와 함께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의 가치도 인정해 줄 것’을 이야기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상대방의 가치와 세계관을 파악한 후, 그 전제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그들의 부족한 점을 드러내어 보여 주고 그 대안으로 복음을 제시함으로써 예수님과 직면하게 해야 한다.
생활
관계
꼰대
플라톤
소크라테스
변론
바울
팀켈러
경청
어려운 때에 웃음이 주는 세 가지 유익
by Rachel Jones
2020-06-08
내가 속한 소그룹의 줌(Zoom) 모임을 하고 있을 때, 육아에 지친 한 아빠가 18개월 된 아들이 유아용 좌석에서 이유 없이 계속 소리를 지르자 “화상회의에서 하는 것처럼 쟤를 음소거(on mute)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라고 농담을 던졌다. 몇 개월 전만 해도 통하지 않을 농담이었지만 격리 기간인 요즘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유머 소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 같다. SNS에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뉴스도 있지만, 정장 드레스를 잘 차려 입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러 나오는 사람들 사진이나 운동 경기가 아닌 자신의 일상을 중계하는 스포츠 아나운서의 동영상 등 우리를 웃게 할 요량으로 올린 것들도 많다. 친구들의 얼굴을 다시 직접 볼 수 있기를 고대하지만 대신 우리는 비공식적인 여섯 번째 사랑의 언어인 인터넷 밈(meme)을 통해 우리의 관심을 계속 표현한다. 은혜가 더할수록 GIF 그림파일들도 넘쳐난다. 사람들이 병들어 죽어 가고, 슬픔에 빠졌거나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도 있는데 내가 웃어도 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당연히 들 것이다. 우리가 만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지 않고 오히려 그들 앞에서 즐거워한다면 확실히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롬 12:15). “웃을 때”가 있는가 하면 “울 때”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전 3:4). 사도 야고보 역시 우리가 우리 죄를 회개할 때에는 우리의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 촉구한다(약 4:9). 이 세상에는 반드시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 이 세상에는 웃기지 않은 일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를 웃게 하는 일들은 여전히 많다. 어려운 때가 닥치면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유머에 기대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재미를 추구할 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유머를 다루는 법은 우리의 성품, 문화, 그리고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웃기는 것이 마치 경건함과 같은 수준의 덕목인 것처럼 유머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겠지만, 유머가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데 우리 모두에게 좋은 성경적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한다. 팬데믹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유머를 즐겨야 할 세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웃음은 우리에게 양약이다많은 연구가 이미 밝혔듯 웃음은 우리의 심신 건강에 매우 이롭다. 웃음이 스트레스를 낮춰주고 혈압을 떨어뜨리며 심지어 면역 체계를 활성화하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성경이 말한 바를 과학이 그저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웃는다고 해서 모든 병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지만 웃음은 우리의 기분을 한결 낫게 해줄 수 있다. 웃음이라는 양약을 좋은 때나 어려운 때 언제든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잠언 15장 15절은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로 시작한다. 그러나 절 후반부에서 잠언 기자는 고난 받는 자들의 어려움을 부자들의 희희낙락과 대조하기보다 일종의 반전을 제공한다.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이 팬데믹 위기는 분명히 비참한 실제적 사건이다. 하지만 마음이 즐거운 자들은 잔치할 수 있는 이유를 여전히 찾을 수 있다.성경은 우리 감정이 마치 단순한 것인 양 다루지 않는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는 말씀처럼 희비가 엇갈리는 복합적인 감정을 누구나 느껴 보았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웃으라 격려하지만 삶의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정죄하지 않는다.2. 웃음은 우리의 확신을 드러낸다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불확실성의 한가운데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잠언 31장은 현숙한 여인에 대해 “후일을 웃으며”(25절)라고 묘사한다. 이 여인은 주권자 여호와를 경외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여인의 그러한 확신은 그의 밝은 심령을 통해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확신은 말로는 쉬워도 실제로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염려에 사로잡히는 때가 오면 우리는 유머를 통해 서로의 두려움을 줄여 나갈 수 있다. 우리 마음 속에 걱정이 바람 가득 든 풍선처럼 커졌을 때는 친구가 해주는 적절한 농담 한 마디가 그 풍선에 꽂아 바람을 뺄 수 있는 바늘 역할을 한다. 문제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이 자랄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롬 8:35)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롬 5:2)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영원한 미래에 대한 확신을 회복할 때, 우리는 더 웃을 수 있다. 3. 웃음은 우리를 겸손케 한다내가 아는 가장 웃긴 사람들 중 몇몇은 농담을 경건한 겸손함으로 할 줄 아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라도 다른 이들을 웃게 하지만 타인들을 깎아 내리면서까지 사람들을 웃기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경건하게 웃기는 방식이다. 그들의 유머는 그들의 겸손을 드러낸다.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 모두는 최근의 팬데믹 사태로 인해 겸허하게 되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전도서 기자가 인류의 암울한 “일반(적인 숙명)”(9:1–6)에 대해 논할 때, 뒤이어 나오는 적용 부분에서는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중략] 즐겁게 살지어다” (9:7–9)라고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주말을 보내는 것에 대해, 내 친구 한 명이 “소소한 일들을 즐기면서 주말을 최대한 잘 활용해보려고 하고 있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의미다. 이제 SNS에서 뭔가 웃기는 것을 본다면 그저 그대로 즐기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기 때문에, 또한 유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기때문에 우리는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참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최악의 상태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현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래서 웃을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3 Ways Humor Can Help in Hard Times번역: 이정훈
생활
감정
웃음
유머
기쁨
겸손
고난
확신
자존심, 자존감 그리고 하나님의 의
by 노승수
2020-06-06
“자존심을 지켰다”라는 우리말 용례에서 보듯이 자존심이란 자기감정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인정과 시선에 기대어 있다. 즉 ‘자존심’이란 타인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에 대한, 혹은 평가할 것 같은 것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이다. 이 “타인이 평가할 것 같은 자기”는 실제 타인의 평가보다 더 이상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짜내게 되지만 사실 자신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마음속에 비참함과 패배감이 휘몰아치게 된다. 그러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센 척하게 되고 아닌 척하게 되고 경직되고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더 신경질적이 된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자기 의’라고 표현했다.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기 정당성’ 혹은 ‘자기 정체성’을 ‘타인의 시선’에 두게 됨으로 자신은 여기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과도한 자기방어는 적절한 선을 알지 못하게 한다. 예컨대, 불안 때문에 자기 통제 행동이 어느 선이 적절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 그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서 강박적 행동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일어나지 않을 상황에도 불구하고 불안 때문에 특정 행동이나 사고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가령, 감기약을 먹더라도 보통은 몸이 회복되면 약 먹는 것을 잊어서 약이 남게 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인간 행동의 자연스런 패턴이다. 이에 반해 건강에 대한 염려나 불안은 이렇게 몸이 보내는 일련의 신호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하고 강박적으로 약을 복용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의 환경 적응에서의 적정선을 잘 알지 못하게 된다.‘자존심’은 적정선을 알지 못하는 자기 방어의 한 종류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지만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자기를 확장함으로써 가족이 가깝고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더 함부로 대하는 패턴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자존심과 같은 ‘자기 의’는 과장되어 있고 일종의 속박 시스템처럼 작동해서 감시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스스로 감시하는 체계처럼 작동한다.심리학은 ‘자존감’이라는 용어를 통해 자존심과 다른 자기 가치에 대한 긍정적 신호들을 밝혀내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와 신뢰 관계를 맺고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반응하면서 형성하는 사회적 인간의 근간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심리학자 에릭슨이 말한 “신뢰 대 불신”의 시기 동안에 애착 경험이 안정 애착 상태인 아이들은 사람과 세상에 대해 안전하다는 믿음과 호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에 대해서도 긍정적 심상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자존감이다.그러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자존심’이든지 심리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자존감’이든지 그 발생적 기원은 본질적으로 같다. ‘자존심’은 주로 불신을 기초로 해서 생기는 감정이고, ‘자존감’은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생기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이신칭의”를 대신할 수 없다.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사회적으로 좀 더 잘 기능하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고, 자존심이 센 사람은 내면적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역기능적인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불화의 관계 속에 있는 죄 문제에 대해서 어느 편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신자가 갖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은 루터의 표현을 빌자면 "의롭게 된 죄인"이라는 두 국면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런 각성을 이룬 사람은 자신의 심상 이미지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부패를 깊이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죄인인 나를 깊이 사랑하시고 용납해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대한 경험을 내포한다.이렇게 하나님의 의로 무장된 사람과 자존심 또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가지는 결정적 차이는 자기를 용납하는 방식과 타인을 용서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 깊은 부분까지 이해한 채로 용서받은 사람은 그런 형편에 처한 사람을 더 잘 용서할 수 있다. 세상을 더 긍휼히 여길 수 있으며, 자기를 무조건 긍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자신을 용납할 수가 있다. 자존감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와 세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서적 이미지들로 인해 인간이 지닌 현실 곧 고통과 비참에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반대로 자존심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내면의 높은 기준 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기 힘들고 계속된 자기 정죄로 인해 율법주의로 기운다는 데 있다.자신의 죄와 그에 따른 비참함을 심대하게 깨닫지 못하면 결코 나를 사랑하는 타자 곧 삼위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도 깊이 깨달을 수가 없다. 사랑이란 상승을 위한 동경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을 깨달아가는 하강의 힘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가 ‘상승의 힘’이라면 성경의 아가페는 ‘하강의 힘’이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그 자리에서 우리의 의가 획득되고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생활
감정
자존심
자존감
자기의
하나님의의
심리학
이신칭의
팀 켈러가 드리는 매일 기도
by Tim Keller
2020-06-01
다른 많은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매일 아침 경건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지속적인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존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에서 ‘매일 기도’와 관련해 하루에 한 번 기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칼빈의 말을 읽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랬을지 한번 상상해 보라.칼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권고를 지적하며, 뻔한 이야기 같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루 종일, 또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열망해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너무도 약한 우리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고, 또 너무도 게으른 우리는 자극을 필요로 하기에 우리 모두는 이런 훈련(기도)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칼빈은 비록 짧더라도 기도를 위한 시간을 따로 지정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에는 “우리의 마음이 오로지 기도에만 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하루 중에 다음과 같은 다섯 번의 기도를 권고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일터로 나가기 전에점심 식사 때식사 후에(또는 일이 끝나고)잠자리에 들 준비가 끝났을 때그리고는 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기도가 결코 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미신적인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하나님께 진 기도의 빚을 갚자'는 식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도록 강요하겠다는 시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루 기도를 작성하기기도에 관한 칼빈의 이런 권고에 대해서는 몇 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칼빈이 이 다섯 번의 기도를 ‘1542/45 제네바 교리문답’(1542/45 Geneva Catechism)에까지 실제로 포함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개인과 가족 단위로 기도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칼빈의 기도문은 또한 나 자신의 기도문을 작성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내가 칼빈의 도움을 받아 기도문을 작성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기를 권고한다. 내 기도문을 사례로 삼아 당신 자신의 기도문을 만들어 보라. 나의 경우에 기도할 때 참고로 삼기 위해 쓴 일 분 정도 걸리는 기도문 내용은,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성경을 통해서 매일 아침 배우는 진리를 다시 기억하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이 기도문은 하나님 그리고 복음과 더불어 온종일을 살 수 있도록 내 하루 전체를 “미리 형성했다”(frame).다음은 내가 쓴 기도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 자신의 기도문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정도로만 사용하도록 하라.아침에 깨어나서: 사랑을 구하는 기도아버지, 잠에서 깨는 이 순간까지 제 목숨을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오늘 필요한 사랑을 공급해 주십시오. 먼저 당신의 사랑을 알도록 (그래서 내가 하루를 살면서 두려워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또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이 넘치게 (교만하거나 이기적이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냉담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그 사랑을 다른 이에게 전하게 해주십시오. 당신의 영이 내 마음을 비추게 하시고, 그 비춤을 충분히 감당하도록 내 마음을 넓혀주십시오. 지속하지 못하는 좋은 시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당신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한 친교를 이루는 그날까지 나를 향한 당신의 은혜를 하루도 멈추지 말고 더 부어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영광을 계속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도 다 당신의 은혜로 가능하기에, 나로 하여금 오늘 하루도 기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또 나의 의를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기에,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나도 언젠가 내가 마지막으로 잠에서 깨는 날이 있을 것임을, 내가 부활하는 날을 맞을 것임을 기억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인내를 구하는 기도주님, 하루 종일 당신의 임재를, 당신의 약속 속에 담긴 결실과 인내를, 내게 필요한 지혜와 연민을, 그리고 위험과 역경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느끼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 일을 하는 중에 어떤 수준의 성공과 어려움을 맞더라도 다 당신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시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서 생기는 방해라면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루의 중간에: 임재와 기억을 구하는 기도오, 주 하나님, 음식과 피난처를 통해 나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을 통해 내게 새생명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쁜 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좋은 것들을 내게서 빼앗지 않으실 것이라는 평안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최고의 완전한 삶은 아직까지 오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당신의 임재를 즐거이 누리게 해주십시오. 또한 내가 항상 짓는 죄악인 완벽주의적 일 중심주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기 위안에서 자유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 세상의 것들을 향한 강렬한 욕망이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을 오염시키지 않게 하시고, 오로지 내 마음이 저 위에 있는 것들, 나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그곳으로만 향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침 경건의 시간에 깨달은 것을 다시 기억할 것)일을 마치고: 오늘 만나거나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을 위한 기도 주님, 나의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에게 이 땅에서 필요한 축복과 영적인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이들을 축복하시고 또 우리에게 해를 입혔거나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을 용서하시고 또 그들에게는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서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움과 고통에 처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그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이 모든 일들이 오직 선을 행하시며, 애통해 하시는, 당신의 아들이자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잠자리에 들며: 쉼을 위한 기도오, 주님, 오늘 밤 모든 위험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십시오. 몸만 쉬는 게 아니라, 오늘밤 주님이 바라는 모든 부분에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영혼과 양심이 당신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영적인 쉼까지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루도 죄를 짓지 않고 지나는 날이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당신의 긍휼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악을 묻으시고 내가 당신의 임재하심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살든지 죽든지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당신의 소유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하여 나의 이 부족한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아멘.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im Keller Seeks to Pray Without Ceasin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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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교리문답
우리는 자주 합리화에 빠진다
by 정요석
2020-05-30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예언이 실패로 끝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자신의 책 ‘예언이 실패할 때’에서 이를 다룬다. 1954년 미국에서 말세론에 빠진 사람들이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한 곳에 모여 곧 닥칠 대홍수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비행접시를 기다린 적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끝나 버렸다. 예언이 실패로 끝나자 일부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틀렸음을 알고 말세론을 버렸지만, 일부는 자신들의 믿음이 약하였기 때문이라고 회개하며 더욱 광신적 행태로 변해 갔고 일부는 날짜 산정에 오류가 있었다며 새로운 종말 날짜를 산정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한번 갖게 된 믿음과 생각을 버리는 대신, 현실과 사실을 자신의 바람과 생각에 맞추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페스팅거는 이것을 보며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인간은 그 뛰어난 지정의로 자신의 신념과 욕구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정보들을 얼마든 이용하고 가공하는 존재다. 자신의 신념에 맞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어긋나면 옳은 정보일지라도 무시하며 합리화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 발생한다.내 기억에는 매 선거 때마다 부정 선거 시비가 있어 왔다. 이번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도 예외 없이 일부 낙선자들이 부정 선거를 주장하고 있다. 여러 증거들이 있다 하지만 소속 정당의 당원들마저 무시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부정 선거가 이루어지려면 수천, 수만 명이 합작하여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부정 선거를 주장하는 한 사람은 상대당이 승리를 예측한 출구조사 발표를 보면서 크게 기뻐하지 않은 장면을 부정 선거의 한 증거로 제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당이 기쁨을 절제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해석함에도, 부정 선거라고 확신하는 이는 부정 선거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 장면을 합리화하고 있다.그간 부정 선거 관련 주장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제기되어 왔다. 주장하는 내용과 형태도 거의 비슷하다. 이번에도 평균 득표 비율이 일정한 상수로 나오도록 개표기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있었다. 그때 비슷한 주장을 했던 이들은 이번 총선이 부정 선거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비판하기에 앞서 그때 자신들이 주장한 것에 대해 옳았는지 살펴야 하고, 자신들도 확증편향에 빠져 합리화하는 존재가 아닌지 냉철히 살펴야 한다. 성경에도 확증편향에 빠진 확신범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아합의 400명의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며 전쟁을 부추겼다. 시드기야 선지자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모두 거짓말하는 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이시려고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신 것이다. 선지자 미가야가 이 잘못된 사실을 지적하지만 시드기야는 미가야의 뺨을 치며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라고(왕상 22:24) 다그친다. 이들 400명의 선지자들은 아합의 상에서 함께 밥을 먹는 어용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참된 선지자들이 아니라, 음식과 돈에 팔려 왕이 듣기 원하는 내용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신앙과 양심을 잃으니 당장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합리성을 잃어버린다. 게다가 오직 왕이 듣기 원하는 내용에 맞추어 합리화할 뿐이다. 시드기야는 그 수준을 뛰어넘어 환상까지 들먹인다. 아합에게 승리의 수단이라며 철뿔을 만드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인다.그런데 이런 현상은 성경에나 나오는 일이 아니라 이 시대의 평범한 목사들에게도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좀 무리가 되는 평가일지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이번 총선에서 개신교를 심판한 측면도 있다고 본다.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여러 시각들이 있지만 유일한 기독당으로 총선에 참여한 기독자유통일당은 1.83%, 513,159표를 얻는데 그쳤다. 20대 총선에서는 두 개의 기독당이 각각 2.64%와 0.54%를 기록하였는데, 4년 만에 지지율이 거의 반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그 정당의 관계자들이 자신들이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하여 스스로 합리화 하며 선거에 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나도 자주 합리화에 빠진다. 특히 목사는 교회에서 합리화하기 쉬운 존재다. 목사들은 아무래도 성도들 중 자신을 지지하고 좋아하는 성도들을 더 많이 만나고 대화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목사는 성도들 대다수가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의 설교와 리더십에 만족해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목사는 나르시시즘에서 빠져나와 냉철히 자신을 살펴야 한다. 정당이 자기 당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국민의 소리만 듣고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리라는 예감을 확증하며 합리화 하다가, 결국 엄청난 패배를 경험한 것처럼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지 말고, 다양한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다양한 계층과 지역의 마음의 흐름을 냉철히 살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승리한 정당은 빅데이터를 활용하여 여러 예측결과들을 분석하는 등 여론을 읽으려고 나름 노력했다고 하는데, 목사와 기독교가 어떠한 방법을 활용하든 국민이 목사와 기독교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한국의 목사들과 기독교는 국민의 마음을 얻고 있을까? 이번 코로나19 감염 사태 동안에 기독교는 천주교와 불교보다 잘 대처하여 국민의 마음을 얻고 있는가? 지난 4년 동안 정치와 사회의 현안들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겸손하게 잘 대처하여 지지율이 천주교와 불교보다 올라갔을까? 정치인과 정당은 정기적으로 선거를 통하여 평가받는다. 패배 원인을 분석하고 다시 집권하기 위한 능력을 기르면 다음 선거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스스로를 살피고 평가할 수 있는 수단마저 없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살피려는 의식적 노력이 없으면 목사와 교회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아합과 400명의 거짓선지자들처럼 말이다. 요즘 일이십 년 후 기독교를 많이 걱정하게 된다. 과연 어떤 모습을 갖게 될까? 지금 분위기 그대로라면 그때는 기독교인 숫자도, 신학교 지원율도, 기독당의 지지율도 더욱 내려갈 것이고, 교회당은 소수의 노인들로만 채워질 수 있다. 목사와 기독교는 외부의 전문가를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실제 모습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처방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환상에 빠져 확증편향을 가진 확신범 시드기야의 예언을 받아들인 아합은 전쟁에 나갔다 우연히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고 말았다. 이 시대 자기 합리화를 정당화하는 목회자와 교회에게도 그런 우연한 일이 발생하여 쇠퇴와 비참함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한국 기독교가 자기 사랑을 버림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정확히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영성
영적성장
레온페스팅거
확증편향
합리화
아합
시드기야
미가야
선지자
그리스도인 남편이 꼭 해야 하는 기도
by Bobby Scott
2020-05-26
아내를 더 사랑하고 싶다면, 아내가 당신을 덜 사랑하도록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아내가 당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 10:37). 비록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모든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남편과 아내도 이 내용에 포함시키고 있다.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내에게 2등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결혼 생활 내내 여섯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아내를 보면서, 또 사역에 헌신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나만 뒷전에 밀리는 것 같은 질투심에 힘들어하곤 했다. 말하기 창피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내가 주님과 보내는 경건의 시간을 보면서도 질투심을 느꼈다. 결혼 기간 보다 목사로서 보낸 시간이 더 긴데도 불구하고(무려 26년이다!), 나의 이런 이기심은 왜 내가 아내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고, 당연히 최고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그 이유를 찾아내는 데에 있어서 커다란 능력을 발휘했다. 젊은 남편들이여, 지금부터 말하려는 게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이고 또 지금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아내를 온전히 더 잘 사랑하기를 바라는 경건한 남편이라면, 아내가 당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도와야 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다 부차적일 뿐이다. 그 부차적인 일에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당신의 아내는 당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도 그것을 원해야 한다. 왜 그런지 이유를 살펴보자.예수님은 더 나은 언약을 주신다결혼이라는 기적은 희생적 사랑이라는, 평생 지속되는 언약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한 남자를 한 여자와 묶어서 한 몸을 만드는 것이다(창 2:24).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로 만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신다(마 19:5-6). 그런데 중생한 당신의 아내와 맺은 예수님의 언약은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언약은 영원하다. 그 언약은 당신의 아내에게 훨씬 나은 미래를, 결코 나빠지지 않는 미래를 약속한다(계 21:3-5). 남편으로서 당신은 좋은 말씀을 가지고 아내를 위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내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말씀, 바로 그 자체(the Word)다. 그는 새로운 언약에 기반하여 남편인 당신이 결코 할 수 없는, 아내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곤고하게 하신다(히 8:10). 아내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고리는 남편이 아닌 예수님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아내를 위해서 희생하셨기 때문에, 즉 그분의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셨기 때문이다(눅 22:19-20).예수님은 아내의 필요를 아신다단순하지만 아름다운 결혼 반지를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나는 정말로 열심히 저축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내는 그 반지를 소중하게 여긴다. 당신이 선물한 다른 많은 물건들과 더불어 당신의 아내도 결혼 반지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엄청난 희생을 하고 또 비싼 돈을 들여서 산 선물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선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은 도저히 잴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축복을 아내에게 가져다 준다. 당신의 아내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요 10:27-28). 당신의 아내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댓가를 지불하셨다(골 1:14). 당신 아내의 영생을 보장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전 15:20-21). 예수님은 자신의 완전한 의를 당신의 아내에게 은혜로 부어주심으로, 그녀가 거룩한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다(고후 5:18,21). 예수님은 당신 아내의 굶주림을 채워주는 진정한 영생의 빵을 주신다(요 6:35). 당신 아내의 목마름을 해결하는 영생의 물을 주신다(요 4:13-15). 예수님은 자신이 상속받으신 모든 것을 당신의 아내와 함께 나누신다(엡 1:11). 남편인 당신이 주는 선물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물은 더 좋고, 그 선물이야말로 당신의 아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그는 대제사장이시다나는 아내를 위해 기도하기를 즐기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아내를 위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기에 기뻐한다(요 14:13-14).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더 뛰어나다.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고 영원하신 예수님은(골 1:16)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다(요 1:1, 14; 히 2:14). 하나님이자 인간으로서(골 2:9),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당신보다 더 정확하게 아신다. 예수님은 당신 아내의 약점을 이해하시고, 또 당신이나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으로 아내의 약한 부분에 대해서 더 깊이 공감하신다(히 4:14-16).예수님은 당신 아내의 곁을 떠난 적이 없으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를 위해서 당신이 결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죽음까지 맛보는 놀라운 희생을 하셨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는 당신의 아내를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셨다. 50년이 지나도 아니, 셀 수 없는 영원의 시간이 지나도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의 아내를 위해서 존재할 것이다(히 7:28).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에게 당신보다 훨씬 더 나은 대제사장이다. 그렇기에 당신의 아내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그녀의 참된 대제사장 안에서 기쁨을 누릴 때에만 진정으로 만족을 맛볼 수 있다. 그는 당신의 아내를 더 잘 사랑하고 더 잘 이끄신다하나님이 당신과 아내를 하나로 묶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을 가정의 머리로 만드셨다(엡 5:23; 출 18:25). 그렇기에 좋은 남편은 군림하는 태도가 아니라 희생하는 자세로, 또 아내의 필요를 자신의 필요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자세로 가정을 잘 지도해야 한다(마 20:25-27).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희생하는 리더다(요 13:14). 그는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는 리더다. 그는 푸른 초장과 풍성한 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아는 선한 목자다(시 23; 요 10:11).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존재다(요일 3:16).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를 당신보다 먼저 사랑하셨고 또 당신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신다(요 15:13). 당신은 예수님이 주시는 넘치는 사랑 안에서 풍족함을 맛볼 때에만 아내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다(요 15:5). 예수님은 더 뛰어난 리더다. 그의 희생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의 지혜는 끝이 없고, 그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의 리더십은 사탄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지옥으로부터 당신의 아내를 구원했다. 그렇기에 당신의 아내가 예수님을 진정 더 뛰어난 신랑으로 예배하도록 도우라.남편의 기도아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질투를 느낄 때, 당신이 아내로부터 뺏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아내가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점점 더 사랑할 때, 당신보다 예수님을 더 간절히 원할 때 아내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 당신의 아내에게 필요한 존재는 오직 예수님이다.형제들이여, 여기에 축복이 있다. 당신의 아내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윈-윈을 이루는 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아내를 더 나은 부인으로 만드실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아내를 보면서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라(골 3:19).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질투하지 말라. 아내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도록 격려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함께 즐거워하는, 진정한 선물을 아내에게 베풀도록 하라. 우리 모두 다 아내가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도록 함께 기도하도록 하자(시73:25–28).[아내가] 천국에서 당신 외에 누구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그녀가 당신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하소서. 아내의 육체와 마음은 쇠하여질지라도, 그녀의 영혼은 강하게 하여 주시고주님이 그녀의 영원한 유업이 되게 하소서.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신실하지 않은 모든 이를 멸하셨습니다.하지만 당신에 대한 그녀의 친밀함이 그녀에게 선이 되게 하소서. 아내가 주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게 하소서. 그래서 아내가 당신의 모든 역사하심을 증거하게 하소서. 주님, 아내가 당신을 더 사랑하도록 복을 내려 주소서.그렇습니다. 남편인 나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May She Always Love Him More: The Prayer of Every Christian Husband번역: 무제
결혼
가정
부부관계
아내를위한기도
진정한남편
헛된질투
신랑되신예수님
가정에서 자녀와 함께 성경 읽는 법
by 박용기
2020-05-25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행 15:40-18:22)의 특징은 한 가정을 통한 복음 전파다. 바울의 선교팀이 한 도시에 가면 먼저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한 가정, 한 가정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의 집(행 17:5, 롬 16:21), 고린도에서는 디도 유스도의 집(행 18:7)이 회당에서 전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가정들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전한 복음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는데(행 17:11), 이는 주중에 가정에서 구약성경을 통해서 확인했다는 의미다. 바울이 어떻게 구약 성경을 읽고 복음을 전했는지 데살로니가 회당(행 17:2-4)에서 사용한 네 단어, ‘강론하며’, ‘뜻을 풀어’, ‘증언하고’, ‘권함’을 통해서 알아보자. ‘강론’(reason, converse, discuss)은 대화식 성경 읽기다.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강론했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함께 대화했다는 의미다. 이런 대화가 발전하면서 토론과 전문적 논쟁으로 이어진다. 신명기 6장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가정에서 “말씀을 강론”(신 6:7)해야 하는데 여기서 ‘강론’ 역시 성경 말씀을 주제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대화한다는 의미다. 자녀와 성경을 읽고 본문을 주제로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대화 자체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제자훈련이다. 성경을 읽고 강론할 때 브라이언 채플 목사가 소개한 창조, 타락, 구속, 회복(Creation, Fall, Redemption, and Restoration)이라는 큰 주제를 염두에 두고 대화하면 도움이 된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하심에 대해서 자녀와 대화할 수 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인간의 타락에서 왔으며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자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성경은 자기 계발을 통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용서, 은혜를 보여 주는 책이다.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용서,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뜻을 풀어’(explain, open, interpret)와 ‘증언하고’(prove, demonstrate, point out)는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3). 바울은 구약 성경을 사용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제시하고, 그 증거 말씀의 뜻을 풀어 주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눅 24:27)하셨는데, 이는 예수님도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팀 켈러 목사도 구약의 이야기들이 진정으로 말하는 것은 구원자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나는(예수님) 진정한 요셉이다. 감옥에 갇혔고 돈 받고 팔렸지만, 다시 일어나서 배반한 사람들을 구원한 진짜 요셉이다. 나는 진정한 다윗이다. 위기의 순간에서만 구원한 자가 아니라 인생의 값을 치르고 인생 전체를 구원한 자다. 나는 진정한 모세다. 나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완벽한 중재자다. 나는 진정한 요나다. 나는 신적 진노의 바다, 죄의 바다에 던져져서 구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팀 켈러의 변증설교, 174쪽). 테드 트립(Tedd Tripp)도 자녀와 성경 읽기를 할 때 나누어야 하는 핵심은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 성경책 페이지마다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말해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Instructing a Child’s Heart, 26쪽). 자녀에게 성경의 모든 본문이 예수님을 가리키고(point out), 보여주고(demonstrate) 있음을 알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는,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된다는 복음적 성경 읽기를 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를 통해서 자녀에게 복음을 반복적으로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권함’(persuade)은 삶에 적용하는 성경 읽기다. 바울이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고 ‘뜻을 풀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목적은 성경 지식을 자랑하거나 지적 토론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라는 ‘권함’을 위해서다. 성경은 교리적으로 완벽한 구원의 길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오늘 나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줄 수 있는 충분한 책이다. 노년의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성경 읽기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딤후 3:17)고 했다. 어떻게 예수님이 오늘 우리 가정에서, 나의 삶에서 주인 되시고 왕이 되시는지를 자녀와 함께 나누고 적용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모던 시대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내가 어릴 때는 말이야 … 나 때는 말이야 ….”라고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중요시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교육을 받은 세대는 “너의 느낌이 중요해!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중요해”라고 하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한다. 그러나 필자는 가정에서 부모와 함께 성경을 읽으며 자란 자녀는 시대를 초월해서 “성경에 따르면”, “오늘 본 성경에 의하면”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믿는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주어야 하는 진리는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해라”, “고액 연봉을 받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은혜의 구원이다. 성경 읽기를 통해서 자녀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전적인 공로로 받게 되는 은혜의 구원을 깨닫게 된다면 평생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가정
양육
강론
브라이언채플
테드트립
팀켈러
가정예배
성경읽기
설교
병상 침대에서 부활을 묵상하며
by Ravi Zacharias
2020-05-21
텍사스에 있는 병원에서 암치료를 받으며 이 글을 쓴다. 두 달 전 척추 수술 후에 나는 내 몸에 희귀암의 일종인 악성 종양이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현재 치료받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나는 그동안 건강한 삶을 살아왔기에 이 소식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나는 늘 부활절 메시지가 매우 강력한 힘이 있다고 믿어왔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게 마음에 와닿는다. 부활은 모든 소망 중에서도 궁극적인 소망이며, 부활이야말로 소망의 궁극적 근거가 된다.병상에 누워서 육체적 차원이 영적 진리의 차원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문자적으로 암은 문제가 되는 하나의 세포가 스스로 복제하여 생명을 주는 정상 세포를 하루하루 조금씩 더 점령해가며 죽음으로 몰고 가는 병이다. 이 현상이 창세기에 나오는 원죄의 이야기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 영혼의 대적이 ‘하나님이 참으로 그리 말씀하시더냐?”라고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갖게 만든 이야기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불순종과 반역이라는 암과 같은 세포가 온 인류를 점령하여 전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이제, 우리는 문제가 있는 세포와 싸우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문제를 일으키는 세포를 겨냥하여 방사선을 쏘는 치료법이며, 다른 하나는 화학요법으로, 캄캄한 곳에서 무차별 사격하듯이 나쁜 세포뿐만 아니라 좋은 세포까지도 죽이는 식의 약물 투여를 포함하는 융합적 치료법이다. 이 치료법들은 아마도 승리자가 패배자보다 더 많은 희생을 한 전투처럼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얻는 치료법이 될 수 있다.완전하신 하나님과 구세주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했을 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인간을 죄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구세주가 필요했다. 흠이 없는 완전한 구세주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 그 완전한 구세주로 삼으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한 생명 한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알게 해준다. 구속자가 올 것이며, 그는 영적 암의 운명을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승리자가 진정으로 승리를 했다. 하나님의 생명의 숨이 우리를 회복시켰다.바울 사도의 말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고 우리는 외칠 수 있다. 죄는 우리 안에서 암세포처럼 문제를 일으키지만, 예수님의 생명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를 회복시켰다. 따라서 이번 부활절에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고, 죽음 가운데서 생명을 찾으려 하지 말자. 무덤은 승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원죄를 궁극적으로 되돌려 놓는 궁극적 치유다. 예일대학교 교수 니콜라스 울터스토르프(Nicholas Wolterstorff)는 등반 사고로 아들을 잃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전화 통화도 할 수 없고 서로 얼굴을 볼 수도 없다는 상실감과 지속적으로 솟구치는 그리움과 깊은 슬픔을 견뎌내고 나면, 우리가 이 모든 것들과 그 밖에 수많은 것들을 견디고 나면, 그 다음에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두 가지가 남는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악함과 죽음이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치료의 광선을 발하셔서 불순종이라는 죽음의 세포를 다루시고 살아 있는 세포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얼마나 위대한 소망의 메시지인가! 부활절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십자가를 묵상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뻐할 때 놀람과 경배로 나아가길 소망한다. 도시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하다.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향기가 필요하다.세계적 변증가, 라비 재커라이어스 별세인도 출신의 세계적 기독교 변증가인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19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74세. 재커라이어스는 지난 2월 척추 수술을 받은 뒤 엉치뼈에 악성 종양이 발견돼 치료를 받았다. 최근 병이 악화돼 지난 주 미국 애틀란타 자택으로 돌아와 마지막 삶을 준비해왔다.재커라이어스는 비교종교학과 컬트, 철학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기독교계의 석학으로, C. S. 루이스 이후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다. 자신이 설립한 라비재커라이어스국제사역센터(RZIM)를 통해 전세계 70여개 국에서 기독교 변증 강연을 해왔으며 페이스북 등 SNS로 활발하게 정보와 메시지를 공유했다.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인 ‘내 백성이여 생각하라(Let my people think)’는 전세계 1500개 방송국에서 방송됐다. 대표작 ‘진리를 갈망하다’를 비롯해 ‘위대한 장인’ ‘오직 예수’ ‘믿음의 이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을까’ ‘이성의 끝에서 믿음을 찾다’ 등의 저서가 있다. 그는 2016년과 2019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해 강연회를 가진 바 있다.본 아티클은 그가 병마와 싸우던 지난 부활절에 병상에서 쓴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avi Zacharias: Easter Reflections from My Hospital Bed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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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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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
부활절
교회와 가족, 무엇이 먼저인가?
by 김선일
2020-05-16
“교회가 가족보다 우선입니다.” 필자가 수업이나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면 당황해 하는 표정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곧바로 해명을 한다. “제 말은 옛날처럼 교회 일에 열심을 내다 가족을 뒷전으로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혈연 가족보다 더 큰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입니다.” 이 정도론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중산층 도시 문화에서 가정 사역은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족은 각별하다. 이는 유교 가족주의 영향도 있지만 험난한 현대사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은 대부분 가족 밖에 없었다. 교회는 가족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가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구원의 매개체도 아니다. 이 사실이 바로 정립되어야 교회는 가족을 위한 희망의 공간이 된다. 육신 가족의 위기피붙이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성경은 일관되게 육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정성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을 금하셨으며 혼인의 신비를 재확인하셨다(마 19:6-9). 사도들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복음을 적용하였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은 곧 믿음의 증명이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되었다. 육신의 가족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비하고 각별한 관계 가운데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며, 교회로 모인 우리에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가족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 최근 시대의 풍조 가운데 하나가 혈연 가족의 지위가 흔들리며, 대체 가족들이 모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독교적으로 비판해야 할 점과 수용할 점이 모두 존재한다. 혈연이라는 연결감은 인간의 원초적 감각이다. 자신이 입양 부모였던 작가 낸시 베리어는 ‘원초적 상처’(뿌리의집, 2013)라는 책에서 아기들은 40주 동안 엄마 뱃속에서의 교감을 기억하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입양이 되더라도 심리적, 정서적, 영적 단절의 경험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9.11 테러가 난 후, 많은 이들의 눈물을 적신 사연들 중에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이 나눈 마지막 사랑의 교신들이 있었다. 그때 생각 깊은 사람들이 의문을 던졌다. ‘왜 인간은 저렇게 가족에 연연하는가?’ 진화론적 과학에 의하면, 그건 자기 유전자를 보호하고 번식시키려는 태고적 본능에 기인한단다. 약간 허무하지 않은가? 가장 순수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가족의 친밀하고 희생적인 관계가 유전자 복제와 증식의 행동 패턴이라니 말이다. 내게 과학적 가설과 설명을 평가할 전문성은 없다. 그러나 두 개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가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치는 절대적 사랑의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근거하거나, 아니면 이기적 유전자의 본능적 속성에 근거할 것이다. 가족을 향한 문화전쟁 인간이 동물과 달리 특별한 문화 역량이 있다는 점을 누구나 동의한다. 인간은 본능의 패턴으로만 움직이지 않고, 공공의 선을 위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혈연 가족으로 인한 문제들은 너무도 많다. 가부장적 권위주의로 인해서 부모가 자녀의 삶을 지나치게 간섭하고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친권에 의한 학대가 자주 일어난다. 또한 남성 중심의 문화가 결혼 생활에서 여성들에게 너무도 큰 피해와 희생을 요구했던 것도 사실이다. 요즘은 독립된 자기를 찾으려는 욕구가 유행이다. 혼인과 출산도 나의 자유와 선택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심지어 비혼이 주류로 자리 잡는다고 한다. 외로움은 동거 등의 방법으로, 출산은 입양이나 시험관 아기로 해결할 수 있다. 유전자의 복제와 전파라는 본능적 욕구가 비생식적, 비혈연적 방법으로 대체 가능해졌다. 이는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중시하는 문화에 안성맞춤 아닌가? 자기의 선택과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에서 남자와 여자의 결합만을 혼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촌스럽게 보인다(이상의 현상에 대해서는 김용섭의 ‘라이프트렌드 2020:느슨한 연대’(부키, 2019) 27-64쪽을 보라). 본래부터 자연스러운 것은 없고, 인간이 만들어 갈 뿐이라는 것이다. 섬뜩한 미래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우리 눈앞에 현재 진행형으로 펼쳐지는 가족 해체의 서사다. 문제는 이러한 내러티브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동조하고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교회와 복음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기독교를 파괴하려는 음모라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야 할까? 물론 이는 문화 전쟁의 영역이라 할 만하다. 우리는 싸워야 할 적과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를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죄성에 대해서는 분별과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만, 성령의 열매로 육체의 소욕을 물리쳐야 한다(갈 5:16-17).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비복음적 가족관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가부장주의와 위계주의였고, 최근에는 자기중심주의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가부장주의 하에서 여성은 종속적 존재로 차별받아 왔고, 위계주의 하에서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 내지 욕구 대리인이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5:21-6:9)와 골로새서(3:18-4:1)에서 복음을 가족 관계에 적용하는 지침을 알려준다. 이 지침들은 고대 로마인들의 가족 관계를 규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 규범 틀을 빌려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 ‘정치학’을 보면 가족 관계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의 3중 관계로 구성되었다고 보며, 남편과 아버지의 지배권을 정당화한다. 성인 남성만이 성숙하고 권위 있는 지배자가 되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상황의 틀에서 성경은 달리 말한다. “무엇을 하든지 …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 3:17),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더이상 지배, 두려움,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경외하며 서로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는 가부장주의와 위계주의를 거부한다. 이는 예수께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마 23:9)고 하신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11절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는 명령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가부장제는 지속될 수 없다. 또한 피차 복종하라는 가르침은 자기의 선택과 권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기중심주의와 어긋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는 자기를 부인함”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강요' 3권 7장을 시작한다. 복음은 순종과 자기부인을 통한 삶의 행복을 가리킨다. 일차적 가족으로서의 교회 ‘신자의 어머니’인 교회는 복음을 가르칠 뿐 아니라 복음적 삶의 실체를 양육하는 곳이다. 교회는 신자의 참된 정체성과 소속을 확인시켜 준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더 알고 사랑하는 삶을 누리는 것이다. 오스 기니스는 ‘소명’(IVP, 2019)에서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차적 부르심이라고 말한다. 가족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일차적 부르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이차적 부르심일 뿐이다. 한국계 크리스천 저널리스트인 헬렌 리(Helen Rhee)는 창의적인 제목의 책 ‘미셔널 맘’(Missional Mom, Moody, 2011)에서, 이러한 소명 개념을 가족에 적용한다. “우리의 아빠, 엄마, 남편, 아내로서의 소명이 먼저가 아니다.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차적 소명이다. 그러나 순서가 바뀌면 안 된다. 순서의 역전은 가족에게 역효과를 주며,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서 잘못된 메시지를 줄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이 우리 인생의 일차적 소명이다. 내가 교회가 가족보다 우선한다고 말할 때의 교회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을 담은(엡1;23) 본질적, 보편적 교회를 말하며, 이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차적 소명의 준거점이다. 예수께서는 가족 됨을 완전히 새롭게 규정하셨다. 혈연이 아니라 예수께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가 그의 가족이 된다(마12:50, 막3:35).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모으시는 곳으로서 일차적 가족이다(Rodney Clapp, Families at the Crossroads, IVP, 1994). 종종 우리는 이 순서를 바꾼다. 가족을 하나님의 목적에서 중심 위치에 놓기도 하며, 가족 친화적인 교회를 매우 건강한 이상적 교회로 여기기도 한다. 복음주의 윤리학자 러셀 무어는 ‘폭풍 속의 가족’(두란노, 2019)에서 “교회는 가족 친화적이거나 가족들의 모임이 아니라, 가족 그 자체”라고 단언한다. 그는 더 나아가 가족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수단일 뿐이기에, 가족을 더 우선시하면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할 능력도 잃게 된다고 경고한다.교회가 가족이라는 복음하나님 백성의 교회가 일차적 가족이라는 사실은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다. 첫째, 혈연 가족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자들이다. 무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에게 해롭거나 당신을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두운 가족의 전통을 꼭 이어받을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가족 됨을 반영하는 교회는 불완전한 가족으로부터 고통과 상처를 당한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회복하는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는 전통적 가정 사역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전통적 가족의 범주가 해체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혼자 살고 혼자 죽지 않는다. 1인 그리스도인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육신 가족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가족을 확대하는 선교적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신약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는가?’(분도, 1985)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가정은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더 솔선적이고 더 개방적인 가정들이 된다. 자기네 친족끼리만 유유상종하지 않는다. 기꺼이 예수와 예수의 사자들을 환대한다. 가정들 서로서로가 관계를 맺는다.”가족과 교회는 서로 긴장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다. 교회는 가족적 특성을 반영하고, 가족은 하나님의 더 큰 가족, 하나님 가족의 이야기에 참여함으로 참된 정체성과 사명을 찾는다. 예배와 교회생활을 통해 더 많은 하나님의 가족과 만나고, 선교적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풍성한 가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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