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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빵으로만은 살 수 없다
by Trevin Wax
2023-09-19
2020년 3월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봉쇄 조치가 시행되자 많은 교회가 발 빠르게 라이브 스트리밍과 비디오로 전환했다. 팬데믹 이전까지 실시간 스트리밍을 하는 교회는 22퍼센트였다. 그러나 몇 주 만에 그 수치는 66퍼센트로 급증했고, 개신교 목사의 92퍼센트가 영상 설교나 예배를 제공했다.팬데믹이 사그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는 교회의 수가 늘어났으며, 이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있지만 온라인 예배라는 관행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게 거의 분명하다. (Pew Research의 새로운 설문 조사는 라이브 스트리밍에 대한 교인들의 관점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한 세대 이전에 대형 교회들은 이미 찬란한 일요일 아침의 텔레비전 방송에 필적할 만큼 응집력 있고 매력적인 예배 방송에 능숙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사역을 하는 모든 교회가 주장하듯, 전문적으로 잘 포장한 교회 콘텐츠는 지역 교회의 영향력을 넓힐 뿐 아니라 설교자와 성경 교사의 영향력까지 확장한다. 보충제는 대체물이 아니다하지만 온라인 예배에는 단점이 있다. 우리는 오늘날 미국인들을 괴롭히는 문화적 질병인 “대체주의”(substitutism)에 취약하다. 이는 조슈아 미첼이 쓴 American Awakening에 나오는 용어이다. 그는 쉬지 않고 쉬운 대안과 지름길을 찾아 헤매는 우리의 열망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또한 보충제를 아예 대체물로 만들기 좋아하는 우리의 경향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미첼의 책에 온라인 교회나 라이브 스트리밍 예배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소셜 미디어와 우정과 같은 다른 영역에서 ‘대체주의’가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 분야에서 대체주의에 대한 그의 진단을 살펴보고, 그의 통찰을 예배에 적용해보자. 소셜 미디어는 고작해야 실생활에서 이미 알고 있는 관계를 향상할 뿐이다. 미첼은 이렇게 설명한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기존 우정에 보충제가 될 수 있다. 악수, 등 토닥이기, 포옹 등을 통해 우리가 진정한 친구인지 확인할 수 없을 때, 오랜 친구와 연락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 이 보충제를 통해서 우리는 친구라는 존재감을 느낀다. 그러나 기존에 만들어진 우정이라는 역량이 없이 단지 보충물만으로는 결코 존재감을 만들어낼 수 없다.(xxiii)즉, 우정은 진짜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보충제에 불과하다. 그러함에도 소셜 미디어가 우정이라는 느낌을 주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이미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온라인에서만 아는 존재를 향해서 “친구”라는 말을 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비타민은 정기적인 식사가 반드시 함께 할 때만 필수 영양소를 제공하는 보충제이다. 사람이 비타민만으로는 살 수 없다. 비타민이 식사를 좋게 만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 그 자체이다. 식사가 핵심이다. 비타민이 도움을 줄 뿐이다. 용기가 넘치는 경험 많은 전사를 상상해보라. 무기를 손에 쥐는 순간, 그의 전투 능력이 향상되고 승리에 대한 열정도 커질 것이다. 그렇다고 무기가 그 사람을 전사로 만드는 건 아니다. 무기가 용기를 주는 것도 아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이라면, 똑같은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우리의 능력을 갉아먹는 지름길이게 문제이다. 진짜를 보충제로 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진짜로 좋은 것을 제공하는 “역량” 그 자체를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미첼은 이렇게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방대하고 겉보기에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유혹들이다. 살면서 당연히 치러야 하는 노력 없이 지름길로도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전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다는 것이 이 유혹 속에 숨은 위험성이다. (xxv)비타민이 식사를 대체할수록, 우리는 점차 훌륭한 음식을 요리하고 잔치를 벌이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단순한 보충제가 아니라 진짜 우정을 대체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얼굴을 보면서 우정을 쌓아가는 능력 자체를 잃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친구”와 더 많이 “연결”된 소셜 미디어 시대에 왜 외롭다는 사람의 비율이 증가했는지 궁금한 적이 없는가? 바로 대체주의 때문이다. 보충제에 너무 매료된 우리는 진짜 식사를 하지 못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점점 더 이상 미덕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풍부하고 깊은 우정을 쌓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진짜 우정이 어떤 것인지도 아예 모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온라인 예배나 텔레비전 설교 시청이 언약 공동체로 모인 신자들의 물리적인 모임을 대체할 수 있는 진짜 대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 아프거나 출장 중일 때야 온라인 예배라는 보충제에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유익은 오로지 진짜로부터만 나온다. 온라인 예배는 진짜 예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진짜 경험의 맛을 보게 할 뿐이다. 진짜 식사에 대한 보충제일 뿐이다. 지름길의 유혹삶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지름길이 주는 매력은 신앙의 문제에서도 항상 존재하는 유혹이다. 우정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함께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리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 생활의 어려운 수고를 피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보충제에 달려가는 사람에게서 거룩함과 의로움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영적인 성장은 오로지 합당한 수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준 높은 온라인 예배 제공이라는 선한 일에 종사하는 교회들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낸다. 단, 이것이 보충제라는 점만은 꼭 기억하자. 단지 보충제일 뿐이다. 교회마저 대체주의에 빠지는 순간, 다음 세대는 영적으로 빈곤하게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교회 생활” 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남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원제: Man Shall Not Live by Online Bread Alo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율법주의 저장 장애
by 김정우
2023-09-08
저장 장애(Hoarding Disorder)라는 게 있다. 물건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여 쌓아 놓은 물건들이 생활공간을 침범해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수집하고 저장하는 성향이다. 왜 끝없이 쌓을까?그렇게 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성향에 ‘장애’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모두 율법주의 성향이 있다. 자기 힘으로,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낸 방식에 따라 ‘자기 의’를 이루려는 성향 말이다. 이런 율법주의 신앙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면, 복음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늘 듣기는 하지만, 결코 누리지는 못한다.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위기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인간의 의와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 신앙에 빠졌기 때문임을 알았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를 다시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러한 율법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갈 6:11)는 말까지 한다. 이 서신의 처음부터 지금까지는 대필자의 도움을 받아서 썼지만, 마지막 부분만큼은 본인이 직접 쓰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이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영적 혼란과 갈등 가운데로 빠뜨린 거짓 교사들이 왜 그토록 할례를 강조하는지 잘 드러낸다(갈 6:11-13). 거짓 교사들의 진짜 관심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공로를 드러내는 것, 또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은 것이었다.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게 바로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이다. 때로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박해와 유혹보다 더 극복하기 힘든 게 율법주의 신앙이다. 이 율법주의 신앙은 바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부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라도 영적 경계심을 늦추게 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율법주의 신앙의 늪에 빠지게 된다. 김정우, 갈라디아서를 처방합니다(두란노)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바벨론이라는 대학을 이겨내는 다니엘의 세 가지 지혜
by Catie Robertson·Andrew M. Selby
2023-09-06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삼백 명의 학부생이 있는 강의실에서 아이를 낳지 말라고 말한 교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이어진 웃음 없는 침묵이었다. 수백 명이 일제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는 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올해 가을, 전국에 걸쳐서 부모들은 자녀를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하며 미니 냉장고와 기숙사 액세서리를 차에 싣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학에 진학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기독교 공동체의 불안은 커졌고, 그건 당연하다. 새내기 대학생이 지금 바빌론으로 들어가고 있다. 비록 다니엘이 바빌론으로 들어간 게 자발적인 건 아니었지만(그는 강제로 유배당했다), 그러함에도 그가 거기서 보여준 성경적 신실함의 모범은 학생과 부모 모두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바빌론에 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정치권력 아래에서 세속 동료들과 함께 엄격한 세속 교육을 받았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 대학생에게 바빌론에서 살아남는 방법만이 아니라 번영을 누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지금부터 살펴보자. 1. ‘왕의 식탁’을 피하라.바벨론의 사상은 다니엘을 흔들지 못했다. 오늘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갈데아 문학을 공부할 때 점성술, 점술, 부도덕한 신화 등 기존 이스라엘 신앙에 적대적인 많은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들은 사회적 압력이야말로 강단에 선 교수의 이념적 호언장담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허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로 다니엘과 친구들이 왕의 음식을 먹지 않고 또 왕의 포도주도 마시지 않겠다고 선택했다(단 1:8). 왕이 제공하는 교실은 공유했지만, 그들은 결코 왕의 식사를 공유하지 않았다.후자의 행위는 그들을 같이 훈련받는 다른 현자들로부터 분리했다. 맛있는 음식을 거부하겠다는 대담하고 즉각적인 선택은 그들을 하나로 묶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향하는 반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했다. 왕의 술을 피함으로 그들의 머리는 맑았고 언제라도 지성의 싸움에 돌입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대학생도 왕의 고기와 포도주를 피해야 한다. 그렇다. 이 말은 다름 아니라 신입생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불어서 가장 친밀한 사회적 접촉 지점(예를 들어 정기적인 식사)과 가장 뿌리 깊은 우정의 통로를 오로지 같은 신자들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통합을 포기하는 희생은 상처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니엘과 친구들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기꺼이 대가를 치렀다. 동료 신자들과 함께하는 저항적 교제가 처음부터 우리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한다. 2. 믿는 자들과 함께 식사하라.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한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냐와 미사엘, 아사랴는 어떻게 왕의 맹렬한 진노를 감당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다니엘은 어떻게 죽음의 굴로 당당히 발을 들일 수 있었을까? 그들의 강한 결의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수천 번의 평범한 식사가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하는 정기적인 식사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 학생은 용기 있는 생활 방식에 꼭 필요한 양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기적 식사를 위해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지역 교회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그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함께 식사하는 자리,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이름이 일상적으로 모독받는 현장이기도 한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하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식사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서 영적 전쟁에 필요한 전투력을 쌓는 시간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가 누구인지 정기적으로 상기하지 않는 학생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릴 것이다. 나(케이티)의 대학 시절, 화요일 밤은 자매들과 함께 모여서 저녁으로 수프를 먹는 날이었다. 우리는 그날 겪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세상의 거짓말을 비웃으며, 공허하고 파괴적인 파티의 짠 칼로리를 실질적인 영적 대화와 친교를 제공하는 따뜻하고 풍부한 사우어도우 빵으로 대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다음 날 아침이면 친구들이 떠들어대는 세상의 해로운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진실을 옹호하며 싸우는 나의 이야기가 다음 화요일 밤 저녁에 좋은 화젯거리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3. 바벨론을 축복하라.대학의 “식탁”을 피하는 것이 분리주의적이고, 전투적이며, 또 불신자들에 대해 냉담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세상과 적절하게 전략적 거리를 둘 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바벨론을 축복할 수 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학자를 모두 죽이려고 했다(단 2:12). 지식과 인간 생명을 향한 체계적인 파괴는 현대 바빌론에도 반영되고 있는데, 인문학에서 발생하는 지적 자살과 학생들 사이에서 실제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바로 그 현장이다.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해결의 시작은 교제와 기도였다(단 2:17-19).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연결은 제국에까지 생명을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로 하여금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게 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벨론의 지식을 보존하셨다.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강한 확신을 가진 명철한 그리스도인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들은 강의실을 포함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절한 순간을 만나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와 명확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언제라도 불신자들을 신앙의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불신자를 변화시키는 선포를 제대로 하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준비는 바로 일상적인 캠퍼스 생활 습관에 대한 쉬지 않는 저항과 매일 쌓아가는 깊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에서 시작한다. 믿지 않는 학우들과 진리를 나누기 열망하는 캠퍼스의 그리스도인은 본능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공간에서 어울리고, 그들의 문화적 일상에 동참하고, 또 일종의 전도 이전 활동으로 그들과 함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문화적으로 적대적인 바벨론에서 필요한 것은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이교도들을 확고한 믿음의 교리로 이끌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이교도들이 즐기는 의식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침식하는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불신자들이 달려갈 수 있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저항의 공동체를 만들자나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학생들을 생각할 때, 대학을 바라보면서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의심할 바 없이 오늘날 대학은 바벨론의 짐승이 날뛰는 최첨단의 전선이다. 현대 캠퍼스에서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선택은 간단하다. 바벨론의 방식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저항하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저항의 길을 선택한다면 전략적이고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단지 막연하게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또 불신자와 친해지려고 나름 노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자신의 믿음은 말할 것도 없고 전도라는 장기적인 전략으로서도 효과적이지 않다. 다니엘은 우리에게 제대로 된 전략을 보여준다. 왕에게 맞서고, 정기적으로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고 기도함으로써 그는 어떻게 해야 바벨론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신자들과 함께 저항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대학 전체를 구원할 수도 있다. 형제자매가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신실한 정통을 공부하고 그 정통을 실천하기 위해서 서로 격려한다면, 대학의 지혜가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 마음을 두는 식탁 교제를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풀무불이나 사자굴 앞에서도 굳게 설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시련과 환난, 사회적 칼날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라. 다니엘을 바벨론에 두신 하나님, 그를 사자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풀무불 속에 서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 그들을 바벨론에서 지키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시며 캠퍼스 생활이라는 바벨론에서도 언제까지나 함께 하실 것이다.원제: Daniel’s 3 Tips for Surviving the University of Babyl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짧은 인생이 최선의 인생이 되려면
by John Ensor
2023-09-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 때때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장모 조니는 우리 부부와 함께 산다. 백 살인데도 꽤 건강하다. 그녀가 잘 웃는다. 또 잘 운다. 그리고 종종 농담도 하는데 손자와 증손자들은 그런 그녀를 즐겨 방문한다. 그들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지난주에 조니가 지나가며 한 달이 걸린 다니엘서 연구를 마쳤다고 말했다. “다니엘서를요!” 나는 깜짝 놀랐다. 과연 백 살이 된 내가 그 예언적이고 묵시적인 책을 다루고 싶어 할지, 나는 차마 감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야 할 것 같다.그러나 조니에게는 그녀를 괴롭히는 한 가지 특별한 질문이 있다. 특히 시력이 좋지 않거나 혈압이 높은 날에는 더 그렇다. 왜 아직도 나는 살아 있는 걸까?당신은 왜 사는가? 조니의 남편은 죽었다. 맏아들도 죽었다. 108살까지 살았던 언니가 작년 12월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녀는 관절이 안 좋다. 그녀는 또한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극적인 도덕적 붕괴를 슬퍼한다. 그녀는 이제 천국에 갈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묻는다. “왜 아직도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아마도 항상 숨겨진 이유를 가지고 계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비록 부분적이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1975년, 스무 살 대학생이던 나는 조니의 질문에 답이 되는 소중한 한 문장을 발견했다. 나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감옥에서 보낸 옥중서신, 그리고 그의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쓴 그의 전기를 읽었다. 감옥에서 일 년을 보낸 뒤, 그리고 나치에 의해 처형되기 약 일 년 전, 그는 에버하르트에게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 때때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털어놓았다(136).나는 이 말이 본회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조니에게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나는 본회퍼의 신앙 선언문에 너무나 놀랐고, 처음 읽은 지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말은 여전히 내게 영감을 준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존? 당신에게는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펼쳐지는 복음의 위대한 사업에 일조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악한 날을 잘 사용하기본회퍼는 히틀러 살해 음모 혐의로 체포된 게 아니었다. 체포 당시만 해도 사건의 줄거리와 그의 역할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음모는 실패했고, 핵심 선동자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다음날 처형되었다. 고문 끝에 동지를 배반할 것이 두려웠던 사람들은 자살했다.이때까지만 해도 저항 활동 속 본회퍼의 역할은 사실상 숨겨져 있었는데, 그건 그가 조국을 사랑하고 정부를 지지하는 다소 순진한 목사인 척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문제에 대해 모르는 척하며 자신이 부당하게 체포되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석방될 것이라고 나름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음모에 가담한 그의 역할은 발견은커녕 조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계략이 먹히지 않을 것이며 죽게 될 것을 직감했다. 주요 음모자 중 한 사람의 일기에서 본회퍼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러시아가 베를린으로 몰려들었고, 본회퍼는 그의 형제, 그리고 다른 공모자 다섯과 나란히 교수형을 당했다.본회퍼가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이라며 삶에 관해서 말했을 때, 전체 문맥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에베소서 5:15-16을 묵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에게 시대가 악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윤리학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한 시간을 아끼는 길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본회퍼의 신앙 선언이 나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본회퍼의 선언은 우리 모두 에베소서 2:10을 믿고 거기에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두신 선한 일을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사업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분의 계획은 창조부터 완성까지 쉬지 않고 전개된다. 본회퍼와 조니, 그리고 당신과 나,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의 글로벌하고 거침없는 사역 안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수많은 경험과 수년간의 성경 묵상을 통해 자신으로 하여금 윤리에 관한 책을 쓰도록 준비시키셨다고 생각했다. 악과 죽음이 그를 둘러싸고 또 감방에 갇힌 상황에서 책을 쓰는 것이 그가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시대의 악함을 감안할 때, 그는 우리 모두 오늘날 마땅히 느껴야 하는 것처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는 긴급함을 느꼈다.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본회퍼는 하나님께서 성취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던 일을 마치기도 전에 처형당했다. 조니의 경우,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선행을 하고도 남을 긴 생애를 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본회퍼의 구절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공개적으로, 매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하면서 사는 바로 그 길이다. 성경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라 말한다.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할 만큼 오래 살았다. 조니는 심지어 백 살에도 할 수 있는 훌륭한 일을 가지고 있다. 다름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육신이 너무 약해지고 이 세상에 지쳐도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바로 그 일이다. 솔직히 나는 본회퍼의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미완성으로 마친 윤리학을 읽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느꼈다. 나는 또 제자도의 대가를 읽었다. 나는 그 책이 필요하다고는 느끼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해 공개적으로, 매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살았으며, 무엇보다 삶과 죽음을 통해 “제자도의 대가”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본회퍼가 저자라는 특징이 없는데도 과연 이 책이 오늘날에도 인쇄되어 팔릴 수 있을까에 관해서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본회퍼의 책처럼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건 책 뒤에 있는 사람이다. 악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하필이면 나치즘이 사라지는 상황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도,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어서 사는 것이다. 걷는 자 옆에서 달리기백 살이 된 조니가 여전히 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단지 방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또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녀는 거의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떠들고 다닌다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백 살에 다니엘서 공부를 마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그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니의 몸은 여행을 할 수 없지만, 그녀의 간증은 얼마든지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 나는 중국, 우간다, 쿠바 등지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보행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의 간증은 뛰어다닌다. 조니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다음 세대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권유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낀다. 그것이야말로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다. 원제: The Best Use of Your Short Lif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
by 양혜원
2023-09-01
여전히 높은 온도와 습도로 연신 땀을 닦으며 걸어야 했던 8월 중순 막바지 주말, 마지막으로 내려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충무로역에 내려서 문학의 집 서울로 향했다. 서울시에서 하는 문학기행 강연 시리즈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작품을 소개하는 강의를 해달라고 해서,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작품을 골랐고, 강의 제목은 “가족은 힘이 될까, 굴레가 될까?”로 정했다.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30명 인원 제한이 있는 강의였는데, 좌석은 거의 다 찼고,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커플, 노부부 커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들으러 왔다. 아마도 ‘가족’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박완서의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박완서 소설을 즐겨 읽는다는 사람도 없었다. 이런 걸 ‘낚글’이라고 해야 하나.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하튼 정원을 채웠으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가족’에 대한 고민이 많구나, 싶었다. 하긴, 출생의 비밀에 얽히고설킨 가족 관계가 여전히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는 것을 보면, 혼인율과 출생률이 역대 최저를 갱신하는 가운데도 가족이 여전한 항간의 화두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누가 엄마고 아빠고 아들이고 딸이고 하는 이런 관계들이 ‘진실’로서 밝혀져야 하는 이유는 그 진실에서부터 ‘바른’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냥 아는 아저씨인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친아빠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나’라는 개인의 서사는 달라진다. 내 탄생의 근원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써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 서사의 핵심을 구성하는 부모 자식 관계의 서사, 그리고 부부 관계의 서사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관계가 개인의 서사에 미치는 영향 또한 달라진다. 그래서 오늘날 가족에 대한 고민이 이전 시대와는 다르게 다가온다면, 아마도 이 변화의 폭이 크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가족 서사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강의 내용의 핵심이었다. 가족의 힘과 굴레를 직접 논한 것은 아니니, 결국 제목이 ‘낚(는) 글’이 되고 말았다고 해야 할까.강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시는 여성 한 분이 같이 내려가면서 질문을 좀 해도 되겠냐고 하시길래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은 힘이 되는 건가요? 굴레가 되는 건가요” 하며 운을 떼시는 것을 보니, 역시나 제목에 끌려 강의에 오신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나의 귀를 청하셨다. 자신은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술 문화가 곧 직장 문화였던 옛날 옛적에, 좀 더 가정적인 문화를 찾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아들이 자신은 다시 한국 가서 살겠노라고 하는 바람에, 캐나다와 한국을 오고 가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 남편의 동의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였다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였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아들이 아직도 장가를 가지 않고 있다며 은근한 우려도 내비치셨다. 두서없이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실 이 안에는 오늘날 한국 가족의 복합적인 서사가 다 들어가 있다.우선 이민 이야기부터 보자면, 아주 오래된 농담을 포함하여 박완서의 소설에서 미국 이민은, 한국 가족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피난처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아들은 아들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의무와 도리의 부담에서 벗어나, 나만의 가족이라는 로망이 가능한 곳이 미국이다. 캐나다 이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만의 가족이라는 로망에서 특히 여성에게 중요한 부분은 남편과 대등한 관계이다. 굳이 남녀평등이나 여성해방까지 내세우지 않더라도, 순종적인 아내라는 고전적 미덕이 아닌, 남편과 친구 같은 관계, 파트너 같은 관계를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기대한다. 물론 이처럼 변화하는 의식에 여성운동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여성운동은 여성을 가족에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 개인으로 내세우고자 했는데, 요약하자면 여성이 (그리고 남성도)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상대와 가족을 이루거나 해체할 수 있는 권리가 여성운동이 내세우는 가족의 새로운 규범이다. 그리고 이 규범을 틀로 하는 서사의 핵심 주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독립적 개인과 그 개인들의 다양성이다.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이셨다는 그 여성분도―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은 여성 단체에서 일하셨다―정작 아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 것을 보면, 독립적 개인과 개인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아직 이념일 뿐, 우리의 피는 여전히 전통과 끈끈히 얽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홀로 헤쳐 나가기에 세상은 너무 팍팍하며, 그러한 팍팍한 세상에서 그래도 의지가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야기가 여전히 운명처럼 사람들의 상상력을 강력하게 유인하는 것이다. 어쩌면 가족은 정말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이상 난 누군가의 자식이고, 그 사실을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우리의 유전자는 마치 낙인처럼 우리 존재의 중심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발가락이라도 닮아버리는 그 유전자 말이다. 그리고 이 유전자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가족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화목한 가정의 서사든, 아니면 그보다 더 현실적인 콩가루 집안의 서사든, ‘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도 이 가족의 서사는 빠질 수가 없다. 그중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원초적인 가족 서사는 아마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일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구의 자식인가 하는 소속은 아버지에 따라 정해지고, 양육은 어머니가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유교 사회의 가족 이야기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규범이 되어서, 아버지가 없는 집안, 어머니가 자식을 양육하지 않은 집안은, 문제 있는 집안이 되고, 역으로 모든 문제는 이것으로 환원되어 설명된다. 다시 말해서 누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 집안에 아버지가 없어서 혹은 어머니가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는 설명이 붙는다. 유교 가족의 서사에서는 아버지가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시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가족 서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것이 더 근본적인 가족이라며 혈육의 중요성을 상대화시킨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가 문제가 있어도,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될 수 있고, 그것이 구원받은 새로운 가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한국 사회에서는,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기독교 서사보다는 여전히 유교 서사가 더 강하다. (어느 영화 대사처럼) ‘너거 아버지 뭐하시노’는 아직도 우리에게 따라붙는 트라우마 같은 질문인 것이다. 물론 가끔, 나의 백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 든든하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허풍에 가까울 때가 많고,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금, 은, 동수저의 아버지들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기 일쑤다. 그래도 기독교의 가족 서사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지지난번 글에서도 썼지만, 기독교 서사에서 가족은 똘똘 뭉치기보다는 떠나고 흩어져야 하는 관계다.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고, 죽은 자들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맡기고 떠나야 한다. 가족을 뭉치는 관계가 아닌 떠나는 관계로 설정한 것은 여성주의 서사와 기독교 서사가 공통으로 가지는 전통적 서사와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여성주의 서사와 기독교 서사의 중요한, 근본적인 차이는, 기독교 서사에서 떠남은 더 큰 자를 따르기 위한 떠남이고, 여성주의 서사에서 떠남은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떠남이라는 것이다. 이 후자의 서사는 떠나는 행위 자체에는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인간은 무엇을 긍정하기보다 부정할 때 더 큰 반작용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가족이 굴레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저항의 서사는 큰 힘을 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누군가와의 애정 관계 없이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벗어난 후에 어떤 서사를 쓸 것인가 하는 단계에서 이 후자의 서사는 맥을 잃는다. 그래서 한국의 엄마들은 남편과의 투쟁에서는 이길지 몰라도 아들과의 투쟁에서는 전통 서사의 맥락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깨끗이 치운 집에 더 강력한 적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처럼, 속박의 관계는 또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는 것이다.일본 가톨릭 여성 작가 중에 소노 아야코라고 하는, 남편을 몇 년 전에 먼저 보내고 지금은 90대의 호호 할머니가 되어 홀로 사는 이 노작가는, 부부가 진짜 가족이 되었다면, 상대를 위해서 그를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는, 좀 특이한 이야기를 했다. 가족은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관계이기 때문에, 부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부인을 놓아줄 수도 있어야 한다는, 즉 이혼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교의 피가 진하게 흐르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건 무슨 한밤중에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 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다. 우선 이 이야기는 가족을 서로를 착취하는 관계도 아니고, 자기 가족만 챙기는 이기주의적 관계도 아닌,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관계로 보고 있다. 이혼은 그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를 말하기 위한 하나의 설정이다. 서로 죽도록 사랑하다가 죽이도록 미워질 수도 있는 게 남녀의, 부부의 관계이기에, 격렬한 관계의 대표적인 예가 긍정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화로운 서사를 제시한 것이다. 찐 가족은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며 보내줄 수 있는 관계라는 설정은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다 적용할 수 있다. (부모만 자식을 보내는 게 아니라, 자식도 부모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이 서사가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기독교가 가진 떠남의 서사 때문이다. 유전자의 속박과 법적 구속으로 맺어진 관계들을 떠나 더 큰 존재의 근원을 향해 길을 가는 우리의 관계는 그분의 ‘뜻’이라는 신비 안에서 이어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영혼이 잘되고 또한 범사에 잘되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드리며 지금의 인연들을 환영할 수 있다. 이 큰 서사 앞에서 가족에 대한 이러쿵저러쿵은 어쩐지 조금은 시시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도, 기독교 서사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헛된 꿈을 쫓다 비참하게 끝난 인생
by William Boekestein
2023-08-30
“한 성공한 작가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자살했다.”1961년 7월 초 어느 신문에 이런 헤드라인이 실렸을 수도 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아버지, 형제, 누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손으로 삶을 마감했다. 나는 그가 1935년에 쓴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Green Hills of Africa)을 읽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다. 두 달에 걸친 사냥 사파리 이야기를 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소년 헤밍웨이가 방학을 맞아 사냥을 배웠던 북부 미시간과 같은 지형에서 나도 사냥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책을 다 읽은 나는 많은 비평가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고 홍보된 책이었지만 여행기에 불과한 내용이었다. 시시콜콜하기 이를 데 없는 사냥에 관한 세부 사항, 그리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줄거리.그러나 지금 이건 책이 나오고 거의 90년이 지나서야 쓰는 서평이 아니다. 사실상 그의 인생 리뷰에 가깝다. 헤밍웨이의 삶을 구성한 서사는 과연 무엇이었고,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값비싼 대가를 치른 큰 꿈헤밍웨이와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가 평생 원한 것을 하면서 살았다고 말한다. 그는 꿈을 쫓았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의 첫사랑은 글쓰기였다. 소설 부문 퓰리처상(1953)과 노벨 문학상(1954)을 받은 그는 낭만적이고 장황한 빅토리아 시대 문학을 거칠고 간결한 현대 문학으로 전환하는 데에 독보적인 영향을 미쳤다. 낚시와 사냥을 좋아했고 심해 낚시 기록까지 보유했다. 첫 번째 아프리카 사파리에서 사자 세 마리, 치타 두 마리, 그리고 코뿔소와 표범 등 무려 백세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여자를 “사랑”했다. 네 번 결혼했고, 기혼과 독신을 가리지 않고 여러 명과 연애를 즐긴 그는 말 그대로 남자다운 남자의 전형이었다.그런데 그를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백발이 성성한 그의 셋째 아들은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보며 자신은 단지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을 뿐이라며 울먹였다. 진정한 사랑은 희생이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기쁨과 슬픔을 깊이 나누기 위해서는 꿈까지도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헤밍웨이가 사랑한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볼 때 그의 이야기에 독특한 건 없다. 자랑할 이유가 많았던 그는 자랑이 주된 특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가장 큰 시험에 실패한 것 같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배운 기독교를 거부했다. 물론 어머니가 그리 훌륭한 신앙의 본보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아가서 교회에 헌신할 것을 요구하는 두 번째 아내의 호소에도 단지 건성으로만 반응했다. 무분별한 알코올 남용이 모든 상황을 악화시켰고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게 친구들의 증언이다. 능력과 성공에도 불구하고, 자제력이 없었던 헤밍웨이는 성벽 없는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잠 25:28). 인생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것을 알았던 그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종종 아들들에게 토로하곤 했다. 그렇다. 좋은 사람이 되는 건 힘든 일이다. 하지만 성공을 이루어내는 힘은 자기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른 모든 면에서 헤밍웨이에게 도움을 준 재능이 그를 의롭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몇 가지 좋은 규칙을 따랐다. 처음으로 일한 신문사에서 간결한 단어와 짧은 문장 쓰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인생에서 훨씬 더 중요한 다른 규칙을 무시했다. 나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눅 9:23).더 안전한 야망1930년대 이슬람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가는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다. “신분(caste)을 주는 뭔가, 또 뭔가 믿을만한 것…. 뭔가 당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것, 해마다 조금씩 고통받으라고 신이 주는 무언가.”그러나 그건 예수님을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 안에서 자신의 자연적인 생명까지 잃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무리 쫓아가도 가질 수 없는 진짜 생명을 예수님 안에서 찾는 것이다. 세상을 쫓다 보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잃어버린 영혼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만날 수도 있다(눅 9:24-25).이 세상의 꿈을 쫓다 보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 6:33).원제: Hemingway Chased His Dreams to Their Bitter E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음욕과 분노를 유발하는 소셜미디어, 당장 끊으라.
죽고 사는 문제가 거기에 달렸다.
by Wyatt Graham
2023-08-15
소셜미디어 때문에 음욕이 치솟는다면, 소셜미디어 때문에 분노가 일어난다면, 당장 소셜미디어 앱의 작동 방식을 바꾸라.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아예 앱을 삭제하라.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마 5:30)예수님은 지금 점잖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주님으로서 좁은 길을 걸으라고 명령하신다. 맥락상 여기서 지금 예수님은 간음을 정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 5:28). 요즘같이 섹스가 만연한 시대에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충격을 받아야 한다. 섹스 산업이 잘 되는 건 남자고 여자고 가릴 것 없이 다들 음욕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욕은 결코 게임이 아니다. 그냥 교환 거리가 아니다. 당신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정욕 극복을 위한 5단계 프로그램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는 정욕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생생한 언어로 잔인하게 보여주실 뿐이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마 5:29).왜 몸까지 잘라야 하냐고?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마 5:29).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 5:30). 여기에서 그는 마음이 정욕을 일으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특정 부위인 눈에서 전반적인 형태로 이동한다. 죄를 짓게 하는 게 손이라면, 그 손을 잘라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 손은 종종 우리를 죄로 이끈다. 살짝 클릭하고 또 스크롤 하는 손가락 때문에 파멸이 올 수 있다. 예수님은 음욕을 심각하게 여기신다. 그렇다고 단지 음욕만을 잔인한 용어로 정죄하시는 건 아니다. 예수님은 분노도 정죄하신다. 분노는 내면화된 살인이다(마 5:21-22).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2).분노와 음욕은 열정(분노)과 의지(욕정)를 왜곡한다. 이런 죄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같이 파괴한다. 나 자신으로부터, 또 우리가 저지르는 일탈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죄를 명명하고 또 정죄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돌보신다. 그리고 그는 음욕과 분노가 우리를 파괴한다는 것을 아신다. 그런 죄는 실로 무자비한 폭군이다. 음욕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을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묶어야 한다(마 6:23). 화를 이기려면 우리는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나 자신을 온전히 드려야만 한다(마 5:43-48).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이 짐을 가져가서 완전히 제거하실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가? 약하고 지친 우리를 향한 주 예수님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약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신다. 할렐루야!“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28-30). 예수님은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음욕을 파괴하고 분노를 분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신다. 그러나 그는 결코 죄를 가볍게 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단지 제안을 하는 게 아니다. 명령하고 계신다. 좁은 길을 걸으라고, 주님으로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과 애통의 짐까지 다 짊어지셨던 그분이 지금 우리의 지치고 연약한 모습도 다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음욕과 분노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는 십자가를 지셨다. 또한 죄와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지금 그는 우리를 향해서 손짓하신다. 어서, 어서 내게 오라고. 소셜미디어가 당신의 영혼을 망치게 놔두지 말라. 음욕 또는 분노를 일으킨다면, 당장 잘라버리라. 당신의 죽고 사는 문제가 거기에 달렸다. 원제: If Social Media Causes you to lust or Incites Anger, cut it off. Your life Depends on it.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책이 사라지는 시대
by 박혜영
2023-08-14
지난 3월 말로 제가 지금까지 30년 동안 단골로 다니던 신학 전문 서점이 폐업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라비블’이라는 곳인데, 주로 영국이나 미국에서 출판된 신학 및 경건 서적을 판매했으며, 주문 대행도 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작은 사무실 정도였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강남 사거리 그럴듯한 건물에서 판매 공간도 널찍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이사도 다니고 했지만, 판매 공간만큼은 그럭저럭 유지했는데, 2-3년 전부터 다시 작은 사무실로 규모를 축소했고, 그러다 이제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30년, 한 달에 평균 일십만 원만 잡아도 삼천육백만 원, 그중 지난 10년간은 한 달에 이십만 원 넘게 구매한 적도 부지기수니 그동안 그곳에서 책을 산 액수를 다 합하면 아마 오천만 원 정도는 될 겁니다. 그렇게 애정을 쏟은 곳이라, 문을 닫는다는 공지를 보았을 때 아쉬움은 정말 컸습니다. 이제 기분 전환하러 어디로 가야 할지….저는 계속 이런 일을 겪고 있습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는 서점인지 잡화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변하더니, 이제는 서점 안에 유명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매장에서 책을 찾아 검색하면, 직원에게 문의하라는 안내가 뜨며, 그렇게 문의하면 직원은 한참 지나 창고에서 책을 찾아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래전에 자주 찾던 ‘아이브이피’ 서점도 그랬습니다. 선배를 통해 그곳을 알게 된 후로, 한때는 미국인 문서선교사가 직수입해 놓은 영어 경건 서적을 살펴보는 데만 오후를 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책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영국이나 미국 복음주의자의 책을 직접 대면했으며, 신학교 입학 후부터는 신학 서적도 금방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영어 원서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날엔 서가에서 사라지고, 모퉁이에 몇 권 있다가, 또 얼마 후에는 그마저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국내 기독교 서적도 대폭 줄이더니, 이제는 책꽂이를 장식용처럼 세워 둔 카페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갈 곳을 한 군데 잃은 저는 라비블에 집중했는데, 이젠 그곳마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직원보다 잘 알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건, 자신의 영역이 축소되는 것 같아 서글프며, 앞으로 외출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멍할 뿐입니다. 잔가지를 열심히 입에 물고 만들던 둥지를 한전 직원들에게 갑자기 빼앗긴 까치들 심정이 이럴까요?이렇게 계속 서점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책의 시대는 이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비블이 문을 닫는 건 기독교 쇠퇴와도 연관되지만요.) 물론 책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라디오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그 증거로 들겠지요. 무엇이든 과거의 것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니, 책도 그렇기야 하겠지요. 그러나 풍경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책이 위태롭게 된 정도가 아니라, 지식의 가치 자체가 위태롭지 않습니까? 거짓말이 지식을 대체하고 있으며, 지식을 조롱하는 분위기도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젠 생각조차 필요 없는 그런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생성 인공지능’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생성해 내고, 대화도 생성해 낸다니…. 이제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을 통해 생각이란 걸 하게 될까요?어떤 분들은 이제야말로 질문의 중요성이 더 커졌고, 문해력이 더 필요해졌다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인공지능에 맡겨 버리고, 그 대답에 의존하는 형편이라면, 과연 문해력을 키울 수나 있을까요? 생각의 도구인 책이 하찮아지고 있는데, 과연 문해력은 어디서 키워야 할까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날 때, 낙관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잘 쓰는 인간의 능력을 계속 신뢰하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도 생각할 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생각 자체를 인공지능에게 외주로 주는데, 과연 인간의 능력에 대해 낙관만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 어떤 통제도 없이 너무 빨리 개발되다 보니, 태슬라 사장과 몇몇 사람은 인공지능 연구를 6개월 동안만이라도 중지시키자고 제안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선도하는 자들도 이런 변화의 속도는 두려운가 봅니다. 이런 시대가 한 사람의 취미만 끝장내는 거라면 별문제 아니지만, 생각이 사라지는 시대의 징표라면 인간 전체의 문제가 됩니다. 생각이 필요 없는 인간은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요? 이제 신학 책을 검색하고 사러 다니던 저의 시간은 강제 종료를 당했으니, 그 시간에 자리에 앉아 루이스의 인간 폐지나 읽고, 열심히 사둔 책이나 읽으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진보’ 기독교는 내가 떠났던 복음주의보다 더 얄팍하다
by Ian Harber
2023-08-12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떠난다. 그리고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묻는다(요 6:67). 그러자 내가 추측하기로 많은 사람이 자기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을 떠나는 데에 마음이 상하고 민망했던 베드로가 대답한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요 6:68-69).이게 바로 내 이야기이다. 나는 두 가지 신발을 신고 걸었다.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의 신발과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베드로의 신발. 나는 ‘진보 기독교’를 위해 젊은 시절의 신앙을 버린 경험이 있는, 소위 말하는 전직 복음주의자(#exvangelical)였다. 그런 다음에 다시 돌아왔다. 다음은 다시 재복음주의자(#revangelical)가 된 나의 이야기이다. 내 신앙이 어떻게 무너졌는가내가 자라고 배운 기독교 전통은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하는 우리 세대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온라인에서 발견한 성경 비평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세상이 달라졌고 복음주의 거품 속에서 자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손끝에 모든 정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구글 검색이나 유튜브 영상에서 만나는 진지한 비판에 비해서 교회가 주는 답은 얄팍하게만 보였다. • 특정 성경 이야기에서 발견하는 모순과 비과학적 내용은 어떻게 된 것인가? •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원수와 자녀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는 하나님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는 단지 어깨만 으쓱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는가? •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사랑하는 피조물을 영원한 고통으로 정죄할 수 있는가? 다른 종교는 어떤가? 그들도 따지고 보면 모두 다 기본적으로 같은 소리가 아닌가? 이런 질문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랐던 성경의 권위를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문제는 단지 성경에 대한 질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 신앙이 추구하는 정치 문화와 성경을 어떻게 일치시켜야 하는가에 관한 과제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정책이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사회에 특히 더 불이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 내가 자란 텍사스 마을에서 더 잘 살겠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면서 동시에 이민자들의 삶을 더 악화시키는 사례가 그토록 많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출산 후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도 낙태에 신경 쓰는 것만큼 마음을 쏟는 게 당연하겠지?나는 성경이 알려주는 이야기보다 이 세상의 현실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을 완전히 버렸다. 예수님 또는 교회와 아무 상관 없이 살고 싶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이 다시 내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나와 소원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슬퍼하던 즈음이었다. 그러나 내가 익숙한 복음주의 환경에서는 고난에 대한 실질적인 신학이 빠져 있었다. 고통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피하거나 억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처럼 성경, 정치, 그리고 고통에 관한 삼각형 질문은 내가 진보 기독교를 탐구하도록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재건 없는 해체나는 랍 벨이 쓴 Velvet Elvis와 사랑이 이긴다를 읽었다. 도널드 밀러의 재즈처럼 하나님은도 읽었다. 아직도 나는 전에 경험하지 못한 은혜의 세계만이 아니라 정통 교리에서 자유로운 세계로 나를 인도한 재즈처럼 하나님은의 한 단락을 기억한다. 마이클 겅거의 팬으로서 나는 그가 새로 시작한 팟캐스트 The Liturgists를 듣기 시작했다.내가 새롭게 만난 광경은 감동적이었다. 성경 때문에 굳이 과학을 버리지 않아도 되었다! 기도가 동전 던지기처럼 느껴졌을 때, 신비주의는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했다! 믿음은 소외된 집단까지 돌보도록 정치에까지 영감을 줄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겅거와 “Science Mike” 맥하그(McHargue)의 해체 이야기에 나의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마침내 믿음을 해체하고 다시 처음부터 재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찾아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들으면 들을수록, 내게는 재건에 필요한 도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가진 모든 신념이 정밀한 조사를 위해 깔끔하게 분해되어 바닥에 노출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어떻게 조립하면 된다는 지침은 전무했다. 재건이 결여된 신앙 해체는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위험하고 고립시키는 일이었다. 해체의 목표가 단순한 자기 발견이나 미덕 과시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언제나 예수님을 향한 더 큰 신실함이 되어야만 한다. The Liturgists의 여정이 진행됨에 따라, 그들은 정치적 좌파가 추구하는 진보 플랫폼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내 눈에 공화당이 말하는 것은 무조건 믿으라고 소리치던 보수 그리스도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16년 대선이 끝났을 때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국가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우려를 공유했지만, 그들이 손에 들고 흔드는 것은 어린 시절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리트머스 종이였다. 단지 반대편 통로에 서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당신이 역사적인 기독교 성 윤리를 고수한다면, 이제 당신은 시대에 역행하는 편협한 사람이다. 낙태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당신은 반여성적인 사람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경멸하는 근본주의자들만큼이나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단지 리트머스 종이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이 전통적인 가치에서 깨어남(wokeness)의 여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진보 정통주의의 정당 노선을 정확하게 밟지 않는다면, 이제 당신은 버림받은 사람이다. 바로 이단자 말이다.‘진보라는’ 브랜드, 똑같이 얄팍한 외침이제는 미국인에게 일종의 기본 신앙이 되어버린 도덕적 치료 이신론(moralistic therapeutic deism, MTD)의 위험성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슬픔 없는 품위 있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진보 기독교를 향해서 달려간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런 식의 천박한 믿음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가 찾은 것은 몇몇 용어만 다를 뿐 MTD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깨어남은 새로운 도덕이 되었다. 치료는 행복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고, 취소 문화(Cancel culture)는 새로운 교회 규율이 되었다. MTD와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삶에 어떤 것을 요구하는 개인적인 하나님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나 편리한가? 이런 식의 “진보적” MTD에서 남은 것은 이제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비유뿐이다. “하나님도 이제 당신과 마찬가지로 당신 안에 거한다.” 나 자신과 하나님을 구별할 방법이 사라졌다. 이 패러다임에서 우리는 이제 신이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반-깨어남(anti-woke) 또는 반-치료주의자(anti-therapy)라는 건 아니다. 구조적 불의는 현실이며 깨어남이 가져다주는 대화는 필요하다. 나는 대학에서 거의 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치료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사랑을 깨어남과 치료로 대체할 수는 없다. 마크 세이어즈는 세계의 진보적 비전을 “왕 없는 왕국”으로 묘사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과 통치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받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진보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가 실종된 정의를 원한다. 우리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 화해 없는, 사회를 위한 복음의 수평적 혜택을 원한다. 우리는 개인의 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 없이 이 사회가 도덕적 순결에 대한 우리의 표준에 순응하기를 원한다. 정통 기독교로의 복귀2016년 선거 이후 나는 신앙을 재건해야 할 때임을 확신했다. 몇 달 후,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시작했고, 나를 키워주신 할아버지를 비극적인 사고로 잃었다. 그 죽음은 다시 한번 나를 극심한 고통에 빠뜨렸지만, 이번에는 또 다른 의미가 추가되었다. 신학적으로 그 고통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다. 내 스승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빛 속에서 신학을 한다. 그래야 어둠을 만났을 때 신학이라는 발판 위에 설 수 있다.” 나는 처음으로 삼위일체 교리와 통일된 이야기로서의 성경, 그리고 성경을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책으로 읽는 방법을 배웠다. 형벌 대속과 승리자 그리스도와 같이 상호 모순된다고 생각했던 교리들이 온전하고 아름다운 성경적 그림을 형성하기 위해 실제로 어떻게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모든 축복에 관해서 배웠다. 영적 훈련과 훈련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추구할 때 흘러나오는 생명을 주는 자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내 눈 앞에는 역사적인 기독교 정통이 가져다주는 넓고도 풍부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내 이야기는 특별한 게 아니다. 사실 이런 간증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목회자를 향한 나의 간청은 다음과 같다. 1. 유다는 “의심을 하는 사람들을 동정하십시오”(1:22)라고 말한다. 거친 대답이나 무시 또는 얕은 수준의 답변으로 의심이나 질문 또는 고민을 처리하려고 하지 말라. 어려운 질문일수록 인내심을 갖고 다른 형제들과 협력하여 포괄적이고 분명한 답을 주기 위해서 노력하라. 2. 기독교 전통의 풍요로움을 가르쳐라. 더 나은 삶을 위한 지침으로 기분 좋게하는 MTD 수준의 진부함에 안주하지 말라. 복잡한 질문에는 복잡한 답변을 제공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분인 예수님이 연민과 사랑과 은혜로 삶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어떻게 대응하셨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라. 우리 교회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신학, 뉘앙스, 은혜, 연민,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정통 교리 때문에 어려워진 게 아니라 도리어 더 가능해졌다. 의심과 질문이 반드시 믿음에서 불신앙으로 진행하는 추진력에 의해서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다. 건강하고 사려 깊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의심과 질문이 참 포도나무(요한복음 15장)이신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연결되어 제대로만 다뤄진다면, 도리어 믿음을 더 깊게 하고 신앙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어 열매 맺는 삶을 생산할 뿐 아니라 세속적인 세상의 맹렬한 바람까지도 견딜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모든 사람의 신앙 여정은 굴곡지고 복잡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의 길은 우리가 한동안 그 길에서 벗어났을 때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세상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길이 있다. 이 세상은 다양한 영적 “깨달음” 또는 스스로의 믿음을 큐레이팅하도록 돕는 다양한 옵션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오직 예수”라는 길 외에는 참된 행복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 없다(요 14:6). 그 길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좁지만(마 7:13)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만족을 가져다준다(시 16:11).믿음의 여행 중에 내가 베드로와 함께 발견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벧후 1: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생명을 찾기 위해 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유 1:3) 믿음의 경계를 떠나야 하는가? 예수님에게는 생명의 말씀이 있다. 그는 생명이시다. 진리이시다. 그리고 길이시다. 그분 외에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원제: ‘Progressive’ Christianity: Even Shallower Than the Evangelical Faith I Lef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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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는 개구리
by 필립 정
2023-08-09
내가 사는 이곳 텍사스 댈러스는 최고 기온이 요즘 42도까지 치솟는다. 밤 7시가 넘은 현재 기온이 40도다. 이 기온이 앞으로 열흘은 더 지속된다는 예보다. 밖에서 잠깐 일하다가 손바닥에 화상을 입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거인국으로 끌려와 위험과 공포에 시달리며 사는 걸리버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런 환경을 개선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며칠째 시달리고 있다. 이 무력감이 어디서 왔는지 찾아보려고 지금까지의 나를 있게 한 교회와 신학을 따라가 보아야 했다. 그리고 내 무력감이 역설적으로 내가 의지해 왔던 교회의 자기 생존 본능에서 왔다는 근거들을 찾게 되었다. 결국 그 공동체에 속한 나 자신도 내 문제를 벗어나 세상을 바꿀 힘이 없이 무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내가 사는 이곳에는 Southern Baptist Seminary, Dallas Baptist University, Dallas Theological Seminary 같은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교들이 있다. 또 이곳은 ‘바이블 벨트’라고 불릴 정도로 교회가 많은데, 매우 보수적인 남침례교 교회들이 대다수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다양한 달란트와 은사로 사역하는 초교파 교회라 그 개방성이 마음이 들어 줄곧 다녀왔다. 복음적이면서도 매우 활발하게 선교, 봉사, 구제 사역을 펼치는 교회다.그러나 팬데믹 당시부터 전형적인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갖는 한계를 이 교회뿐 아니라 주변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설교와 기도 제목이 ‘교회가 어떻게 이 위기를 견뎌낼 것인가’ 하는 생존의 문제였다. ‘복음 전파’도 교회 생존의 연장선에 있어 보였고 지역 사회와 인류의 안녕은 주요 기도 제목에 들어가지 않았다. 옆집 구경하듯 한다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당시 중국 탓을 하거나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을 음모론으로 가볍게 취급하였고 백신 주사 거부는 물론 마스크 쓰는 것조차도 격렬히 저항하는 교인이 너무 많았다. 교회 청소하는 한인이 마스크 쓰며 청소한다는 이유로 쫓겨날 뻔한 적도 있다.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 변화와 지구 열대화가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들다운 모습 더도 덜도 아니었다.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신학교나 다른 보수 교단 신학교 역시 별다르지 않다. 내가 속했던 교단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위기를 피하는 방법은 일관되게 동일하다. 일제의 핍박과 폐교 위기를 1938년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 가결로 피해 버렸고,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정권을 교회 지도자들이 지지했고, 보수주의 교회 지도자 242명은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지지하여 정부로부터 안정된 지원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사회 혼란기를 회피하며 교회는 안정을 얻어냈다. 그리고 1980년 전두환을 위한 국가조찬기도회 주요 참석자들 역시 박정희 3선 개헌 지지자들이었다. 이에 대한 주요 보수 교단들의 변명은 일관되게 “교회 생존을 위협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공산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였다. 이 대답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모순이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겠다. 왜냐면 이 대답 자체가 교회가 스스로 무력하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쇠락한 원인은 자유주의 신학, 교회 세속화, 성직자들의 타락, 교회 성장주의라고 박용규 총신대학원 교회사 교수는 말한다. 적극적으로 동감한다. 여기에 비판 없이 교회 안으로 스며 들어온 좌우/젠더 이데올로기, 경제 발전으로 인한 사회 변화 같은 여러 요인이 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예측할 수 없는 경제와 기후 문제를 겪는 뉴노멀 시대 위기에도 여전히 교회는 예전과 같이 ‘보신주의’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기의 앞가림만 하는 교회는 세상을 향한 빛을 비출 수 없기 때문이다. 잠시 희망을 찾았던 교회1980년대 한국 교회의 역동성은 청년들에게서 나타났다. 이 시대에 청년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신앙 서적의 핵심 주제는 헤르만 리델보스, 조지 래드, 게할더스 보스 같은 학자들의 ‘하나님 나라’였다.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런 책들이 읽히면서 하나님 나라 신학은 그 세대를 지배하던 마르크스 자본론이나 주체사상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신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전에 우리가 알던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영적 천국이었는데, 새로운 하나님 나라 신학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이며 인간의 역사 가운데 실현하시는 이미 임한 그러나 앞으로 임할 완전한 통치”라고 하여 사회 정치 현안에 참여하는 길을 열어 숨통을 틔워 주었다.그 이후 민주화 운동이 정점을 찍어가던 1986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비롯한 보수 교단들이 호헌 철폐, 직선 개헌 문제에 조금씩 직간접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이 스스로 시국 문제에 침묵을 지켜왔다고 말하며 앞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뒤에서 따라가는 형국이었다. 이미 민주화 운동은 천주교회나 사회단체, 대학이 끌고 가고 복음주의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모양새였다.2010년 복음주의자들의 제3차 로잔 대회에서 인류의 자원 낭비와 지구 오염을 죄악이라고 명시하는 의미 있는 선언이 있었다. 케이프타운 선언 제8항이 그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은 우리가 지구상의 자원을 허비하고 오염시키는 데 일조하며 소비주의에 대한 해악적 숭배에 공조하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잔 언약과 그 운동의 영향력은 한국 보수 교회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이전부터 경제 안정을 바탕으로 소비문화가 정착되어 가는 시대에 들어섰고 경제 주체인 교인들에게 “과한 소비는 죄”라고 말하는 목회자가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이것뿐일까. 빈부 양극화를 초래하는 부동산 문제를 복음주의 교회는 언급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부동산 투기는 이웃의 땅을 빼앗는 죄악”이라고 할 목회자 또한 버텨 낼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 그렇게 돈 버는 시대에 교회는 위험한 발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교회가 무력한지 알 수 있게 할 근거가 될 뿐이었다.이곳은 연일 타들어 간다. 텍사스 보건국(Texas State Health Department) 조사에 따르면 “더위나 더위와 관련된 질환으로 306명이 2022년에 생명을 잃었다.” 미국 전역에서는 700여 명이 같은 원인으로 해마다 생명을 잃는다. 민승기 포항공대 환경학과 교수에 의하면 “지금처럼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2030년대에 북극의 빙하가 모두 녹게 되고 저 배출 정책을 쓰더라도 2050년대에는 북극의 빙하가 다 사라져 홍수 화재, 폭염, 폭풍, 같은 기후 변화가 급증할 것이다.” 이 이상 더 끔찍한 인류의 종말의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처음부터 뜨거운 물에 넣은 개구리는 뛰어나오지만, 서서히 온도를 올린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결국 죽었다는 미국 코넬 대학의 실험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인류는 삶겨지는 위기에 처한 개구리와 다를 것 없다. 그렇게 죽어 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오늘도 어제처럼 산다. 교회도 지금까지 생존 본능을 발하며 버텨 왔지만, 이 위기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최근에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고 지구 열대화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과학자가 지구 열대화를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한다. 인류가 처한 재앙을 돌이키기에는 늦었다는 것이다. 영화 ‘투모로우’가 생각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누구나 자연재해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재앙을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추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경고하고 움직여야 한다. 이 무력함이 교회의 나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마지막 희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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