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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1926-2020)를 기리며
by Justin Taylor
2021-07-15
제임스 패커(J.I. Packer, 1926-2020) 소천 1주기를 맞이하여, 2020년 7월 17일, 향년 93세로 주님의 품에 안긴 그의 생애를 기리는 특집입니다-편집부 패커는 일생 동안 영국 성공회에 소속되었으며, 생의 전반기는 영국에서, 후반기는 캐나다에서 보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게 신학을 대중화시킨 사람으로 널리 인식되었다.근 70년의 저술과 사역 기간 동안, 패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일과 그분께 기도하는 일, 나아가 그분과 교제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교회를 향해서는 거룩한 길을 가며 회개하라고, 마음을 다해 성령과 동행하며 내재하는 죄와 싸우라고 촉구했다. 또한 성경의 권위를 수호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가르치며 세우는 지상사명의 대의를 추구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이 기독교 신앙의 거목과 같이 여기며 열렬히 사모했던 청교도를 현 세대 앞에 새롭게 소개하기도 했다.그는 스스로를 “진리와 지혜의 옛 길로 돌아오라고 사람들을 부르는 목소리”라고 인식했다. 그래서 전 생애를 바쳐 “새로울수록 진리에 가깝고, 최신의 이론만 올바르며, 기존의 토대를 바꾸기만 하면 진보라는 생각, 다시 말해 가장 최근에 한 말을 마지막 결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맞서 싸웠다.그는 당대에 일어나는 논쟁에 기꺼이 가담하여 의견을 피력했지만, 스스로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푸른 초장을 연상시키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어린 시절패커는 1926년 7월 22일 영국 글로스터셔 북쪽에 있는 트와이닝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제임스와 도로시 패커 부부의 맏이였다. 유일한 동생은 마거릿인데 1929년에 태어났다.패커의 가족은 중산층에 속했으며 성공회 교단에서 명목상의 신앙을 유지했다. 집 근처에 있는 세인트캐더린교회(St. Catharine’s Church)에 열심히 다니긴 했으나,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일절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식사 시간에도 기도하는 법이 없었다.1933년 9월, 일곱 살 때였다. 패커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한테 괴롭힘을 당하며 차도로 쫓겨 나오다가 그만 지나가던 식료품 트럭과 부딪히고 말았다. 그 결과 뇌수술을 받고 3주 동안 입원했으며, 회복을 위해 6개월 간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또한 사고로 인해 이마의 오른쪽 측면 전두부가 깨져 움푹 들어가게 되었는데, 훗날 그는 한쪽 끝을 살짝 깨뜨린 달걀 모양에 자신의 머리를 비교하기도 했다. 그렇게 깨진 뼈 조각은 그가 살던 지역에서 근무하던 한 노련한 의사가 제거해 주었다. 그 의사는 패커에게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검은색 알루미늄 판을 고무줄로 둘러 착용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운동도 하지 말라고 금했다. 그러자 패커는 혼자 지내며 책읽기나 글쓰기 따위에만 점점 더 몰입하게 되었다. 이마에 두르고 있던 알루미늄 판은 이후로 8년 동안이나 착용했고,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더 이상 착용하지 않기로 했다.1937년 열한 번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 아침, 패커는 자전거 선물을 받길 기대하며 잠에서 깼다. 자전거는 그 나이쯤 되면 으레 받는 선물이었는데, 그걸 받고 싶다고 넌지시 말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커의 부모는 오래되고 무거운 타자기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상태는 매우 좋았다. 패커 전기를 쓴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 선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건 패커가 요구한 선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선물임을 곧 알게 되었다. [중략] 그렇게 최고의 선물이 된 타자기는 유년 시절에 누린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1937년 가을, 패커는 초등학교에서 문법학교(The Crypt School)로 진학했다. 거기서 그는 자기 학급에서 유일하게 고전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다. 리랜드 라이큰은 이렇게 기록했다.“그 학교는 헨리 8세가 로마교회와 절교하고 국교회를 세운 시대에 속한 1539년에 설립된 명문이었다. 원래는 지역 교회의 지하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크립트’(Crypt)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당시 패커가 가진 명목적인 기독교 신앙의 관점으로 보면 별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이후 그가 걷게 될 길에 비추어보면, 그 학교 선배 중에 영국이 낳은 위대한 설교자요 전도자인 조지 휫필드가 있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가 있었다.”어느 날 패커는 반 친구와 함께 체스를 하게 되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유니테리언파에 속한 목회자였다. 그래서인지 친구는 패커를 설득하며 유니테리언주의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패커는 왜 신약성경의 일부만 수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부인하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이후 패커는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 이어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읽었다. 그렇게 십대를 보내며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킹제임스 성경도 시간을 내어 읽었고, 그 모든 독서가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비록 그때까지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진 못했지만, 나중에 패커는 그 당시 자신이 구원의 문턱에 절반쯤은 이르렀다고 회고했다.그러나 열네 살이 되도록 그는 회심이라든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세인트캐더린교회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회심열여덟 살에 패커는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대학교에 들어가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고전을 공부하게 되었다. 자신의 묘사에 의하면, 뭔가 어색한 모습에 수줍음을 많이 타던 지적 괴짜로서 여행용 트렁크 하나를 손에 들고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당시 아버지가 철도 회사(The Great Western Railway)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기차로 한 시간가량 되는 거리를 공짜 티켓으로 올 수 있었다.그리고 3주가 지난 1944년 10월 22일, 패커는 세인트알데이트교회(St. Aldate’s Church)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하여 복음 설교를 듣게 되었다. 어느 연로한 성공회 목사가 설교했다. 성경 본문을 해설할 때는 따분하게 들렸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자 설교자가 자신이 어릴 때 수련회에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때 자신이 정말로 그리스도인인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패커는 그 이야기를 열중해 듣다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교가 끝나고 ‘내 모습 이대로’(Just As I Am)를 찬양하며 믿음을 갖도록 초청하는 시간이 되자, 패커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기로 했다. 이는 1735년에 조지 휫필드가 회심한 장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청교도같은 해인 1944년, 이미 은퇴하여 시력을 잃어가고 있던 어느 성공회 목사가 자신의 수많은 장서를 옥스퍼드 내의 기독교 연합 단체인 OICCU(Oxford Inter-Collegiate Christian Union)에 기증했다. OICCU 리더들은 당시 책벌레였던 패커에게 그 장서를 정리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거기에는 16-17세기 고전도 포함되어 있었다.이에 패커는 아직 고스란히 포장되어 있던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작 세트를 만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시험이나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을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책을 열어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그 어떤 신학자보다도 존 오웬에게 큰 빚을 졌다. 그리고 그가 쓴 어떤 책보다도 죄 죽임을 다룬 책에 큰 빚을 졌다.”이후에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현대판 청교도로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대서양 양편에서 사역했던 저 위대한 17세기 리더들과 같이 신학자와 설교자와 목회자의 역할을 자기 안에 다 통합시키는 사람,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또한 그는 청교도가 보여 준 영성을 현대 복음주의자의 영성과 대조하며 후자에게 전자를 본받아야 한다고 요청했다. 특히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흔히 그리스도인이 서로 만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하는 사역이나 자신이 가진 관심사 또는 자신이 아는 교인이나 자신이 속한 교회의 상태 내지는 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매일 경험하는지는 거의 나누지 않는다.”“오늘날 기독교 서적이나 잡지는 기독교 교리와 규범, 그리스도인의 행실에 관한 문제, 교회 예배의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다룬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사귐이 실제로 어떻게 내면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는다.”“우리는 건전한 교리에 관해서는 그토록 많이 설교하지만, 우리의 영혼이 주님과 나누는 대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하는 바가 없다.”“혼자 있을 때든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든, 우리는 하나님과 죄인이 서로 사귀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묵상하는 데 별로 시간이 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사귐을 당연하게 여기며 다른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고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우리에게 얼마나 하찮게 취급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초기 저술과 직책패커는 1952년에 첫 번째 논문을 출판했다. ‘이신칭의에 대한 청교도의 논의’(The Puritan Treatment of Justification by Faith)에 관한 주제였다.그는 1948년에 옥스퍼드 코퍼스크리스티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후로 런던에 소재한 오크힐신학교(Oak Hill Theological College)에서 처음으로 강사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및 철학을 가르쳤다. 바로 이 1948-1949년 학기에 스물두 살이던 패커는 매주일 저녁 웨스트민스터채플(Westminster Chapel)에 가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때 로이드 존스는 오십 세였다. 당시까지 패커는 그러한 설교를 결코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마치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충격을 주었으며, 하나님을 지각하는 마음을 그 누구보다 크게 일깨워 주는 결과를 청중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내가 알던 누구보다도 탁월한 사람이었다. 나를 가르친 어떠한 교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 있음을 확신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었고, 패커는 사람들이 청교도의 식견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정기 모임을 열자고 로이드 존스에게 제안했다. 이에 두 사람은 청교도 컨퍼런스를 공동으로 기획하여 거의 20년 동안 주최하게 된다.이후 3년 동안 패커는 옥스퍼드 위클리프홀(Wycliffe Hall)에서 성직을 받기 위해 공부했고 박사 과정도 함께 진행했다. 그리고 1952년에 성공회 부제로, 1953년에는 버밍엄성당(Birmingham Cathedral)에서 사제로 임명되었다.1952년부터 1954년까지 그는 버밍엄 근교 하본 지역에 있던 세인트존스교회(St. John’s Church)에서 부사역자로 섬겼으며, 그 사이 옥스퍼드에서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에 관한 400쪽 짜리 박사 논문을 마치게 되었다. 그 결과 1954년에 석사 및 박사 학위를 함께 받았다.1954년 7월 17일에 패커는 웨일스 여성인 키트 뮬렛과 결혼했다. 그녀는 패커가 1952년 늦은 봄 서리 지역에서 강연한 후에 만난 젊은 간호사였다. 이후 둘은 세 자녀, 루스, 나오미, 마틴을 입양하게 된다.1955년에 패커 가족은 브리스틀로 이주했다. 그리고 패커는 그곳에 있는 틴데일홀(Tyndale Hall)에서 6년 동안 조교수로 섬기며 두 편의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첫 번째는 ‘케직과 개혁파 성화 교리’(Keswick and the Reformed Doctrine of Sanctification, 1955)라는 제목이 달린 논문이었다. 이 글은 철저한 펠라기우스주의에 기초를 둔 완전 성화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서 패커는 매우 논쟁적인 자세를 드러냈는데, 그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그릇된 경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막기 위한 목회자의 심정도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경건주의로 인해 자기 역시 학생 시절, 거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다. 이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당신이 세부적인 내용을 그리 진지하게 살펴보지도 않고 다만 그 가르침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내 생각으로는 이 경우에 관한 한 우리는 끔찍하게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혹 당신이 그 세부적인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그로 인해 도움을 받기는커녕 파멸될 뿐이라고 말이다.”그의 전기 작가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당시 그 논문이 끼친 영향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패커가 제시한 비판에 대해 케직 분파는 어떠한 답변으로도 반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패커의 논평은 젊은 복음주의자 사이에 확산되던 케직 운동에 종식을 고하는 역할을 했다. [중략] 패커의 비판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신학적 비중을 담고 있는 내용으로 여겨졌다.”두 번째 중요한 저술은 1958년 3월, 패커의 나이 서른한 살에 출판된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이었다. 이는 패커의 첫 번째 저서로서 성경의 권위에 관한 역사적 개신교의 입장을 수호하는 작품이었다. 이에 대해 마이클 리브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이 책은 복음주의자들을 향해 성경에 대한 높은 관점을 견지하라고 외치며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놓았다. 또한 성경에 관한 그들의 지식이 더욱 정교하고 섬세해지도록 도왔다. 이로써 패커는 사실상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는 운동에서 신학적 리더로 우뚝 서게 되었다.”1961년에 패커 가족은 다시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거기서 9년 동안 그는 도서관 책임자로, 또 이어서는 라티머하우스(Latimer House)의 관리자로 섬겼다. 라티머하우스는 패커와 존 스토트가 영국 교회의 신학적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설립한 복음주의 연구 기관이었다.1960년대에 격월로 발행되던 ‘복음주의 매거진’(Evangelical Magazine)의 편집자 엘리자베스 브론드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연속물을 기고해 달라고 패커에게 부탁했다. 이에 패커는 5년 동안 격월로 기고하여 스무 편이 넘는 아티클을 남겼다.1970년에 패커는 다시 틴데일홀에 돌아와 학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틴데일홀은 브리스틀에 새로이 설립된 트리니티칼리지(Trinity College)에 통합되었고, 거기서는 알렉 모티어가 학장으로 임명되고 패커가 부학장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변화로 인해 패커는 저술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1970년대 초 패커는 ‘복음주의 매거진’에 연속으로 기고했던 아티클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고자 IVP에 연락했다. 그러나 IVP는 패커가 요구한 책을 출판하기 전에 당시 영국을 휩쓸고 있던 은사주의 문제에 관한 글부터 써 주기를 부탁했다.그래서 패커는 출판사를 바꿔 호더앤스토튼(Hodder & Stoughton)에 아티클을 가져갔고, 거기서는 흔쾌히 출판을 승낙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 미국에 있던 IVP도 북미 지역의 판권을 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1973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150만 부 이상이 팔리며 패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다 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쇠퇴하는 현상의 뿌리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 확신을 가지고 책을 썼다.”성경 무오성1977년 2월, 패커는 캘리포니아 마운트허몬에서 R. C. 스프로울, 존 거스트너, 노먼 가이슬러, 그레고리 반센과 함께 성경의 권위를 논하는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그리고 그 해에 국제성경무오협회(International Council on Biblical Inerrancy)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이 협회는 다시 1년 후 스프로울을 필두로 하여 성경 무오에 대한 시카고 선언(Chicago Statement of Biblical Inerrancy)을 작성하게 되었다.밴쿠버 리젠트칼리지옥스퍼드 학부 시절부터 패커와 친했던 제임스 휴스턴은 1979년에 패커를 불러 밴쿠버에 소재한 리젠트칼리지에 교수로 오라고 청했다. 패커는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행정 업무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도 대서양을 넘어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패커는 생을 마칠 때까지 그 학교에 남게 되었다. 1996년에 풀타임 교수직에서 은퇴한 후로도 파트타임으로 가르치는 일을 지속했기 때문이다.논쟁과 분열패커가 걸어온 길에는 교리적 논쟁과 그로 인한 분열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1966년 10월, 전국복음주의자대회(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로이드 존스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복음주의자들을 향해 영국 성공회처럼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단에서 나와 독립된 복음주의교회의 연합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시 대회 의장을 맡은 존 스토트는 로이드 존스의 연설이 끝나자 불문율을 깨고 그가 선언한 내용을 공적으로 반대하는 의사를 표명했다. 패커는 대회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그날 저녁 전화로 소식을 들은 후 스토트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일어난 균열은 1970년에 큰 분열로 나타나게 되었다. 패커가 성공회 복음주의자인 콜린 뷰캐넌과 다른 두 명의 고교회파 저자들과 함께 ‘연합으로 가는 성장: 영국에서 하나의 연합 교회를 형성하기 위한 제안’(Growing into Union: Proposals for Forming a United Church in England)이라는 책을 출판했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인해 로이드 존스는 패커와 결별하며 ‘복음주의 매거진’ 이사회에서도 그를 제명했고 또한 그들이 공동으로 시작했던 청교도 컨퍼런스도 취소하게 되었다.1994년 3월, 에큐메니컬 운동에 열려 있는 패커의 성향이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몇몇 복음주의자와 가톨릭 진영의 인물들과 더불어 찰스 콜슨과 리처드 노이하우스가 공동으로 작성한 ‘복음주의 및 가톨릭 교인 간의 연대’(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라는 문서에 공동으로 서명했다. 그전에 R. C. 스프로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상대와의 전쟁이 격렬해질 때, 우리 쪽 무기고에 제임스 패커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패커가 그 문서에 서명하자 스프로울과 다른 이들은 어리둥절해졌다. 왜냐하면 그 문서에는 양측 간의 신학적 차이가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동의한다는 식의 모호한 표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프로울과 패커는 둘 다 교리적으로는 칭의에 동의했지만, 스프로울은 그 교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 반면 패커는 그 교리가 중심적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했다. 나중에 패커는 자신이 왜 거기에 서명했는지를 해명하기도 했다.세 번째 분열 행보는 2002년 패커 자신이 속한 교구에서 일어났다. 바로 밴쿠버 뉴웨스트민스터 지역을 관할하는 성공회 회의에서 동성 간 결혼을 축복하며 예배할 수 있는 권한을 주교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날 회의에 참석했던 패커는 결국 항의하는 입장을 표명했는데, 다음과 같이 반대 의사를 밝혀 놓았다.“이 결정은 아무리 현재 상황을 고려해 보더라도 엄연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킬 뿐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정하신 거룩한 진리의 요새이자 보루가 되어야 할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결국 2008년에 패커가 섬긴 교회, 곧 캐나다 성공회 교단(Anglican Church of Canada)에서 가장 큰 세인트존스교회는 투표를 하여 ACC 교단에서 탈퇴하고 아르헨티나에 있는 좀 더 정통성을 가진 교구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패커와 다른 성직자들은 정직되었다. 그리고 서임 시에 부여된 말씀과 성례로 예배를 진행할 수 있는 권한도 철회되었다. 이유는 (1) ACC 교단의 교리와 규율을 공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고 (2) ACC 교단 밖에 있는 다른 교단에 가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패커는 탈퇴를 결정했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지난 수십 년 간 신학의 여정을 걸어오며 매번 방향을 바꿔야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일 바울이었다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갔을까? 그가 내 입장에 있었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나는 그가 지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작가와 독자로서의 패커패커에 관한 전기를 쓴 리랜드 라이큰은 그의 저술 목록을 종합적으로 구성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언급했다.“패커는 강연과 저술 모두에서 자기 앞에 열려 있는 문이라면 모두 다 들어가는 방식을 고수해 왔다. 그의 출판 목록은 표로 다 정리할 수가 없다. 항목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르가 매우 넓어 개인적으로 인쇄한 문서와 달리 어떤 배경에서 출판했는지 모두 다 알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며, 똑같은 책이 미국과 영국에서 종종 다른 제목으로 출판된 경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할 뿐 아니라, 그의 저술 중 많은 작품이 때로는 새로운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하나님을 아는 지식’ 외에 가장 널리 읽히고 영향력을 끼친 책으로는 다음과 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복음주의와 하나님의 주권’(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 1971)과 ‘거룩에 대한 추구: 청교도가 바라본 그리스도인의 삶’(The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1990), 그리고 논문으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원: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에 대한 서문’(Saved by His Precious Blood: An Introduction to John Owen’s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1958)과 ‘십자가에서 무엇이 성취되었는가? 대리 형벌의 논리에 관하여’(What Did the Cross Achieve? The Logic of Penal Substitution, 1974) 등이 있다.저술과 교수 사역 외에도 패커는 신학적 고문이자 상담자로, 그리고 수많은 책의 추천인으로 섬겼다. 1980년대 초에는 일리노이 캐럴스트림에서 발간되던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교수였던 케네스 칸처와 함께 고용되었다. 그리고 패커는 선임편집자 직책을 맡았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사무실에 방문하여 신학적 논평을 제공하며 건전한 신학이나 사회학 및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각종 이슈를 비평하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간행물의 이미지나 컨셉을 구상하는 일까지 포함되었다.패커는 다양한 책을 추천하는 일을 기꺼이 감당했다. 이는 평신도 독자들을 돕기 위한 차원에서 그가 좋아하던 일이었다. 흔히 그는 결점에 대해서도 관대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추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추천서를 꼼꼼히 읽어보라고 권했다. 곧 자신이 말한 내용만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그리고 어떻게 말했는지까지도 주목해 보라고 권했다. 패커의 추천서는 그 자체로 간결한 명문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흔히 패커에게 어떤 책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지 물으면, 주로 다음과 같은 목록을 제시했다.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J. C. 라일의 ‘거룩’(Holiness), 존 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리처드 백스터의 ‘참 목자상’(The Reformed Pastor), 마틴 루터의 ‘노예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 그리고 존 오웬의 작품 가운데 ‘내재하는 죄’(Indwelling Sin), ‘죄 죽임’(The Mortification of Sin), ‘칭의’(Justification), ‘성령’(The Holy Spirit),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 등이었다.그가 좋아한 소설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이 있었고, 재미있게 읽을거리로는 살인 사건을 다루는 미스터리물 내지는 탐정 소설 같은 장르를 선호했다. 그래서 일곱 살 때 처음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탐독하기도 했다. “나는 까다롭게 뒤얽힌 난제를 다루거나 형사가 기막히게 머리를 굴리는 작품, 아니면 결백을 입증하거나 유죄를 드러냄으로써 정의가 실현되는 작품을 즐긴다.”이중에서도 그가 늘상 좋아했던 책은 ‘천로역정’이었다. 패커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말년에 시력을 잃을 때까지 해마다 그 책을 읽었다.패커의 또 다른 취미 생활은 오래된 재즈를 듣는 일이었다. 열세 살 때였다. 어느 날 저녁에 라디오를 들으며 집에서 숙제를 하는데, 진행자가 1920년대 재즈를 들려주었다. 젤리 롤 모턴의 ‘스팀보트 스톰프’(Steamboat Stomp)라는 곡이었다.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디오 앞으로 갔다. 그리고 넋을 잃은 채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정말이지 호흡조차 할 수 없었다.” 옥스퍼드에 있을 땐 ‘도적들’(The Bandits)이라고 불리는 재즈 밴드에서 클라리넷을 불기도 했다. 그러나 토요 모임을 갖는 기독학생회 활동에 방해가 되었고, 게다가 재즈는 사탄이 좋아한다는 말까지 듣게 되어 밴드를 그만두게 되었다. 훗날에는 이렇게 고백했지만 말이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초기 재즈는 20세기에 가장 가치 있는 문화적 산물이었다.”1970년에 로이드 존스는 패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청교도 컨퍼런스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기를 전하며 이렇게 기록했다.“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오랫동안 자네가 가진 훌륭한 지성에 탄복했을 뿐 아니라 자네라는 사람 자체를 깊이 존중하며 살아왔네. 오래 전에는 워필드의 전통을 이어 중요한 작품 하나를 써 주길 바라기도 했지. 그런데 자네는 교회 문제에 더 관여하길 원한다는 뜻을 밝혀 왔다네. 내가 보기에 그러한 뜻은 교회에 커다란 비극이자 실질적인 손실을 가져온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네.”패커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조직신학 서적으로는 ‘콘사이스 신학’(Concise Theology)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아흔네 가지 교리를 항목당 600단어 정도로 설명해 놓고 있다(이 책은 크로스웨이 출판사에서 패커 탄생 94주년을 기념하여 하드커버로 재출간될 예정이다). 패커는 압축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자신만의 문체를 구사하며 이 책이 기획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하나의 활동으로서 신학이란 일종의 실뜨기 놀이와 같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별개의 영역을 이루는 과목들로 구성된다. 곧 성경 본문을 해설하는 과목(주해신학), 본문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 본문 자체가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과목(성경신학), 기독교 신앙이 과거에 어떻게 진술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과목(역사신학), 그러한 신앙의 내용을 오늘날 개념으로 형식화하는 과목(조직신학),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규명하는 과목(윤리학), 기독교가 제시하는 진리와 지혜를 논증하고 변호하는 과목(변증학),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을 밝히는 과목(선교학),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영적 자원을 비축하는 과목(영성학), 공동의 예배를 연구하는 과목(예배학), 그리고 각종 사역을 살펴보는 과목(실천신학)으로 구성된다.”20세기를 거의 끝낼 시점에, 패커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세계 교회를 위해 가장 의미심장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바로 크로스웨이 출판사 대표인 레인 데니스 박사가 패커에게 새로운 성경 번역의 총괄편집자를 맡아 주기를 청한 것이다. 이에 패커는 성경 이름도 제안하게 되는데, 그 이름이 바로 ESV(English Standard Version)이다.이 성경은 2001년에 출판되었고, 패커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ESV 성경의 총괄편집자로 섬긴 일은 큰 특권이었다. 그 성경을 편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을 돌아보니, 그 일은 분명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가 했던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패커의 마지막 사역은 교리 교육을 회복할 수 있도록 교회를 돕는 데 집중되었다. 그래서 말년에는 기독교 신앙의 지침이 되는 교리문답을 갱신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데 헌신했다. 이러한 사역은 북미 성공회 교단을 위한 교리 교육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 성공회 교리문답’(To Be a Christian: An Anglican Catechism)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패커가 최종적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하게 된 일은, 아내가 집에서 큰 소리로 읽어 주는 원고를 들으며 구두로 편집하는 일이었다. 그 원고는 오랫동안 교실에서 가르친 내용을 토대로 마련되었다. 이는 2021년 5월 크로스웨이에서 ‘성공회 신학의 유산’(The Heritage of Anglican Theology)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예정이다.한 사람으로서의 패커지금까지 패커가 이룬 신학이나 사역을 평론하는 이들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그가 지닌 인생의 해학이라든가 생기 있게 반짝이는 눈망울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패커는 자신이 차가운 두뇌만 가진 사람이나 아이디어만 공급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기를 원치 않았다.그의 평생 친구인 티모시 조지는 패커라는 사람을 실제로 바라볼 때 그 모습이 어떠한지를 이렇게 묘사했다.“억누를 수 없는 미소를 소유한 그의 웃음은 가장 어두운 만남 가운데도 빛을 비춰 준다.”“그의 사랑은 따뜻한 인간미가 있는 모든 대상을 향해 환히 빛난다.”“자신이 지닌 탁월한 생각과 그 생각을 표현하는 데 가장 어울리는 말을 찾아내는 그의 능력은 어디에도 비할 데 없다.”“무엇이든 가짜라면 참지 못하는 그는 성도가 지녀야 할 성품과 영성을 깊이 소유했다.”여기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감사하게도 나는 매번 그를 만날 때마다 패커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가 만난 주님이 위대하시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매번 패커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이 아니라 주님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되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패커는 이렇게 설명했다.“만일 누군가가 기독교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평가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과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시는 일을 그가 얼마나 깊이 생각하는지 확인해 보면 된다.”“혹 이러한 생각이 그로 하여금 예배하게 만들고 기도하도록 일깨우며 그의 인생관 전체를 좌우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그는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패커는 지혜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사람이었지만(고전 14:20),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 있어서는 일생 동안 어린아이와 같았다(마 18:4). 나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과 동행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이감을 잃지 않았다.2015년에 크로스웨이는 패커에 관한 짧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때 패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바로 카메라가 없는 장소에서 그에게 개인적으로 물었다. 자신이 떠나고 난 다음에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말이다.그는 아무리 평범한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기 전에는 잠시 멈추곤 했는데 그날도 그랬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하나의 목소리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권위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대속 사건의 놀라움을 전달하는 목소리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또 그리스도인을 향해 거룩한 길로 돌아오라고 외친 목소리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일탈에 대해서는 강하게 도전한 목소리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나아가 논쟁에 휘말릴 때는 공손히 임하려고 노력하면서 타협은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좋겠습니다.”“이제 하나님이 저를 인도해 오신 길을 생각하며 함께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할 때, 그분의 뚜렷한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누렸던 그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말입니다.”원제: J. I. Packer (1926-2020)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리더십
청교도
존오웬
CS루이스
로이드존스
케직
하나님을아는지식
천로역정
콘사이스신학
ESV성경
목회를 위한 비밀 무기 7가지
by David ‘Gunner’ Gundersen
2021-07-09
어떻게 하면 사역을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성도들이 변화할까?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전사(戰史)를 읽어보면 탁월한 리더들과 탱크, 폭격기, 전쟁 물자와 같은 그들의 전략 무기들이 등장한다. 승리한 장군들은 훈장이 수여될 뿐 아니라 후대에 오래도록 기억될 위대한 희생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다. 성경 이야기도 그런 면이 있다. 노아는 방주를 짓고,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며,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고, 베드로는 오순절 역사의 한복판에 선다. 바울은 지중해를 항해하며, 아볼로는 유대인들을 논박한다. 고대 방주 제작자, 거인을 쓰러뜨린 소년, 하늘을 가르는 선지자, 부흥 설교자, 순교 당한 선교사, 그리스-로마시대 웅변가들이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한 사역 박물관을 빛내고 있다.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자리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쓰셨고,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 하지만 강력한 무기와 전략 중 어떤 것들은 강력한 동시에 가장 섬세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무기고에는 육지를 울리는 탱크, 공중을 지배하는 전투기, 그리고 벙커버스터 미사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이 드러나지 않는 작은 퍼즐 조각들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천천히 움직이는 물자 보급 경로, 소총 어깨끈을 설계하는 이들, 수색대와 지형학자들, 무선 통신을 가능케 하는 보이지 않는 음파들이 바로 이런 작은 조각들이다.하나님의 무기 중 많은 것들이 빠르지 않고, 섬세하며,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빵 안에 들어있는 효모나 끓는점에 도달하는 물처럼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역하려면 큰 믿음, 그리고 영적인 통찰에서 오는 지혜가 필요한데, 사역에 필요한 일곱 가지 비밀 무기는 다음과 같다.1. 기도-강력한 무기우리가 지닌 보이지 않는 무기 중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하늘을 열어 땅에 씨를 뿌리게 한다. 엘리야는 단순한 기도로 숱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역을 했다(왕상 17:1; 18:41–46; 약 5:17–18). 갈릴리 지역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도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마 14:23; 눅 6:12; 9:28). 우리 사역의 열매 역시 골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무릎 꿇고 울부짖음으로 하늘의 잔이 채워져 은혜가 넘쳐날 때 풍성해지는 것이다.신학교를 졸업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정주부들의 모임이 있다. 이를 통해 역사의 궤적이 바뀔 수도 있다. 방탕한 자녀들로 인해 지쳐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부모들이 있다. 오랜 세월 뒤 그 자녀들이 보이지 않는 기도의 끈에 이끌리어 지친 걸음으로 돌아올 때, 이 부모들은 자녀를 부둥켜안고 울 수 있게 된다. 중년의 목사가 여전히 엉성하고 부족한 설교 원고를 앞에 놓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주일 아침 메마른 듯한 사람들의 마음을 풍성한 강물처럼 바꾸시는 역사를 행하신다.한나가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했을 때(삼상 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사사시대를 마무리하는 사무엘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주셨다. 자기 사환의 믿음을 위해 엘리사가 기도했을 때 그 산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한 것을 보게 하셨다(왕하 6:17). 느헤미야가 귀환을 위해 기도한 후(느 1:4–1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재건되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방편이다. 사역을 위한 비밀 병기가 있다면, 그것은 기도이다. 2. 본보기-경청하게 하는 힘기도의 골방을 잘 감당하고 있다면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소통해야 우리의 사역이 성공할 수 있을까? 흔히들 생각하는 것은 설교, 찬양, 책, 블로그, 수련회, 컨퍼런스, 팟캐스트, 동영상, 다양한 사역 위원회, 회의 등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본보기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부부싸움 후에 남편과 아내가 매번 아이들 앞에서 화해한다면, 아이들은 죄와 은혜에 대해 일주일간의 가정 예배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다. 대학 기숙사 방에서 나누는 대화가 남의 험담으로 흘러가기 시작할 때, 대화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는 사람은 공동체의 낡고 해어진 부분을 다시 바느질하여 깁는 사람이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솔직히 고백할 수 있는 교수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바로 이러한 이유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딤전 4:12) 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가 섬길 교인들이 디모데의 언행을 자세히 지켜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행실로 모범을 보이는 이들의 말을 경청한다. 우리가 본보기가 되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본보기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처한 곳에서, 말을 하지 않고도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3. 일관성-완성의 원료당신에게 일관성이 있을수록 사람들의 이목을 덜 끌게 된다. 잘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의 사역은 당연한 듯, 늘 그렇듯 여겨지고, 보이지 않게 된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잡초를 솎아내는 일은 뭔가 굉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과수원이 세워지고 과일이 익어가는 것은 그런 단조로움에서 시작된다. 내 마음대로 만든 은유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 밭에 왕국 메시지의 씨를 뿌리셨다(막 4:1–20). 그가 우리에게 맡기신 사도적 활동은 밭일 같은 것이었다(고전 3:6–9). 모든 목사는 수고하는 농부가 되어야 한다(딤후 2:6). 농부의 일처럼, 사역에서도 반복이 매우 중요하다. 지속적으로 모이고, 설교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일, 다시 말해 지속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목회의 비밀 병기이다. 지혜가 기반이 된 반복은 완성의 원료가 된다.추수하는 그 순간까지는, 일관성은 지루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4. 시스템-효율성의 증대건강한 활동을 반복하는 것만 일관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역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시스템을 만들어 두는 것도 중요하다. 건물을 구성하는 들보처럼, 시스템은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들보처럼 시스템은 중요한 것들을 지탱해준다. 시스템은 완벽할수록 밖에서 식별이 어렵다. 아주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진리에, 상황에, 사람들에, 필요에 잘 들어맞는다. 아주 잘 들어맞기에 알아볼 수 없다. 아주 잘 비추는 조명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아름다운 것이 돋보이게 한다. 자기 역할을 잘 아는 신부 들러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게 하지 않고, 그날의 주인공인 신부를 향하도록 한다. 좋은 격자 받침처럼 포도나무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해준다.작은 규모의 목회를 하는 경우 시스템, 시간 계획, 각종 절차를 마련하는 일은 너무도 쉽게 무시된다. 하지만 회중의 규모가 크든 작든, 좋은 시스템을 만들면 효율성이 증대된다. 각종 필요에 잘 맞는 시스템을 원칙에 맞게 잘 만들면, 사람들이 중요한 일은 중요한 일답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 5. 준비-기회를 위한어떤 일에서든, 준비가 잘 안 된 사람은 금방 표가 난다. 하지만 준비가 잘 된 사람을 알아보는 데에는 경험과 안목이 필요하다. 준비를 잘 하면 할수록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와,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준비했네?’라고 생각하게끔 한 행사, 파티, 또는 사업체에 가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일에는 반드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준비를 과하게 한 나머지, 어떤 행사를 판에 박은 듯 진행하고, 건강한 자발성을 눌러버리거나 성령의 바람조차도 조절하려 드는 일이 생길 수는 있다. 숨이 막히는 프로그램과 융통성 없는 계획으로 사람들의 은사를 속박하는 일도 일어난다. 하지만 지나친 준비는 건강하지 않은 것이라며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곤란하다. 겸손하게 하나님께 집중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융통성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 대안이 되어야 한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거는 이들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이 그 자리에 아주 쉽게 올라간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들은 즉흥적 운동 신경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쉬지 않는 육체적 훈련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룬 것이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 온다. 6. 어조-경기의 심판어떤 관계에서든 좋은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다양한 배경에서 온 구성원들이 이룬 공동체, 위계적인 기관, 여러 부서로 이루어진 조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정확하고 분명하며 시의적절한 말을 쓴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걸맞은 어조가 중요하다. 어떤 특정 상황에 꼭 맞는 어조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당신의 어조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상대의 감정을 잘 배려하는 어조로 말을 하면, 상대는 의식적으로 인지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당신의 메시지를 잘 다듬어 상대방의 마음에 닿도록 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하지만 ‘잘못된’ 어조로 말하면 당신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한다고 해도 당신의 메시지의 효과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당신 말의 내용이 아닌 어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어조는 운동 경기의 심판과도 같다. 심판이 일을 제대로 하면 아무도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심판이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질서가 무너진다. 운동 경기가 부드럽게 진행되고, 질서를 유지하며, 선수, 감독, 팬들 모두 즐기기 위해서는 심판이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심판으로서의 일을 잘 해내야 한다.어조는 현대 처세술에서만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다. 영적, 국가적, 행정적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리더로서 솔로몬과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왕위를 이어갈 아들들에게 신뢰를 구축하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말, 설득력 있는 언어, 상황에 맞는 지혜로운 어조에 대해 교훈한다.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스스로를 자제하며, 그 주어진 순간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감지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4) 효율적인 사역에는 성경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성경적인 의사소통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뿐 아니라 그 말을 어떻게 하는지도 포함된다.7. 쉼-사역의 비밀 무기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쉬셨다는 것(막 4:37–38; 요 4:6),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사역의 분주함으로부터 떠나 안식하도록 하셨다는 것(막 6:31)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쉬셨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병자를 고치고, 악한 영을 내쫓고, 물 위를 걸으실 수 있는 분이 왜 쉬시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쉬는 것이 필요하다고는 해도 어찌 그것이 목회 사역의 일부가 될 수 있겠는가?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무한한 힘을 지닌 것은 없다. 오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만 다함이 없는 힘이 있다. 하지만 성자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자신의 그러한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피곤하셨고, 쉬셨다.예수님은 바쁜 사역에서 정체성을 찾지 않으셨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메시아로서의 일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그는 일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일에만 자신을 드렸다. 이로 인해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그의 육신이 쉬어야 할 때 자유롭게 쉬셨다.쉼은 사역의 비밀 무기이다. 하지만 쉼은 너무 자주 무시되고, 어리석음, 뿌리 깊은 불안감, 야심 가득한 교만 등으로 인해 심지어 안 좋은 것으로 치부된다. 잊지 말라. 예수님의 공생애는 삼 년뿐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상당한 시간을 안식에 쓰셨다. 눈에 띄지 않아도 능력이 있는 것사역의 전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많은 경우 밖으로 드러나거나 사람들이 잘 기억하는 것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단순한 도구들은 눈에 잘 띄지는 않을지라도 능력이 있다.사실, 우리에게 잘 인지되지 않는 것일수록 더 강력한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롭다면, 위에서 언급한 분명하고도 주목할 만한 사역의 방도들을 그저 사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섬세한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고자 할 것이다.원제: 7 Effective Weapons for Effective Minist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기도
모본
일관성
능력
어조
쉼
구조
비밀병기
설교가 중심이 되는 주일을 위하여
by Jeff Robinson
2021-07-04
나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설교(preaching)를 왜 “미련한 것”이라 칭했는지 늘 궁금했다. 설교는 성령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성화시키시는 영광스러운 수단이며, 주께서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도이다. 그런데 왜 바울은 그것을 일컬어 미련하다 했을까? 근 이십 년 설교를 해온 지금에야 설교에 대한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바울이 “전도(preaching)의 미련한 것”이라 한 것은 세상이 설교를 정확하게 그런 식으로 보기 때문인데, 이는 놀랄 일이 아니다. 정작 놀랄 일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설교를 그런 식으로, 즉 외면하고 싶은 미련한 것으로 생각해왔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 제도에 대한 수 세기에 걸친 싸움 이후에 설교를 기독교 예배의 핵심적 위치로 회복시켰다. 그런데 요즘은 드라마, 스토리텔링, 음악, 인터뷰, 예술, 영상이나 기타 테크놀로지, 심지어 성만찬 등으로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대신하려는 움직임들이 있다. 왜일까?‘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서 스크루테이프(Screwtape)가 조카 웜우드(Wormwood)에게 어떻게 하면 신자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기가 막힌 방법을 말해주는 부분을 보면, 작가인 C. S. 루이스(C. S. Lewis)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 방법은 ‘지루함에 대한 사람들의 경향을 이용해 그들을 조종하는 것’이다. “늘 똑같은 것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이용해라. 똑같은 것을 싫어하는 경향은 우리가 인간들의 마음에 심어놓은 가장 쓸만한 감정 중의 하나지. 바로 이것 때문에 이단적인 종교들이 출현하고, 결혼한 사람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우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거란다 … 우리가 먹는 즐거움을 집어내어 과장시키면 사람들이 폭식을 시작하듯이, 변화가 주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을 우리가 골라내어 그걸 왜곡시키면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만 갈구하게 되어있지.”그리스도인들은 싫증을 잘 낸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사는, 어떤 면에 있어, 신학이나 방법론에서 ‘새로운 것’만 추구하려고 하는 움직임과 ‘정통주의’가 신자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쟁투하는 것에 관한 내러티브이다. 그리고 너무도 자주, 이같은 사악한 사단의 장난은 선포된 말씀을 방해한다. 사람들은 매주 삼십 분에서 한 시간 가량, 한 사람이 회중 앞에 서서 성경을 강해하는 것으로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안에 바울이 말한 미련함이 숨어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에 푹 잠긴 강해 설교를 지속적으로 섭취하는 것은 죄인들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전부이다. 설교가 주일 예배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1. 성경은 설교와 설교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난다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이며, 성경을 과감하게 증거하는 행위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믿어왔듯, 교회를 규정하는 원칙이 성경이라면, 이것만으로도 주일 오전이 설교 중심적이 되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이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긴 두 편의 권면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느헤미야 8장에서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펴고 그것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였다(느 8:8). 에스라가 모인 회중 앞에서 말씀을 읽고 가르쳤을 때 그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느 8:6). 하나님의 말씀은 경배를 일으킨다. 예수께서 행하신 마태복음 5–7장 말씀도 설교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토해 낸 사자후 같은 설교 역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2장은 교회가 복음의 선포를 통해 태어났음을 기록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설교자들을 향한 시대를 초월하는 권면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였다(딤후 4:2).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교회와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설교의 중요성을 잘 요약했다. 성경은 설교와 설교자들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교회가 다뤄야 할 진짜 질문은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이다. 2. 선포된 말씀은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제정하신 도구이다 선포된 말씀은 성령의 일하심과 연합하여 능력을 나타내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육체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양자로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물은 후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17절) 답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가? 연약한 질그릇인 설교자의 입술을 통한 설교라는 미련함을 통해서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행해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에스겔 37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생기를 돋우는’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에게 대언하여 그들을 살리라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 37:4). 그리고 그 뼈들은 즉각 서로 연결된다. 여전히 생기가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자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전에는 죽음 뿐이었던 곳에 생명을 살리고 거룩케 하는 생기를 가져온다.또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부흥의 도구였다. 종교개혁은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라는 것을 ‘회복’한 것이지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초대 교회는 크리소스톰(Chrysostom), 제롬(Jerome), 어거스틴(Augustine),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같은 걸출한 설교자들을 배출했다. 이후에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존 웨슬리(John Wesley)를 위시하여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다른 많은 설교자들을 사용하셔서 두 번에 걸친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하셨다.기술 발전에 의해, 다른 것들로 설교를 대신하려는 시도는 계속 증가해가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기술은 복음 선포를 보조하는 역할이었지 그것을 대체했던 적은 없었다. 구텐베르그(Gutenberg)의 인쇄기는 선포된 말씀에 대한 대규모 부흥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라디오의 등장으로 많은 이들이 이를 통해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텔레비전은 설교를 우리의 거실로까지 가지고 왔다. 인터넷에는 각종 설교와 교육 자료들이 넘쳐난다. 하나님께서 이 자료들을 통해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건강한 교리에 대한 열정을 일으키시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설교는 여전히 기독교 예배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기술은 언제나 변화한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맞춰가기 위해” 설교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우리의 예배 역시 필연적으로 언제나 변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변하는 것을 금한다.3. 교회의 내세적 본질은 설교를 통해 분명히 볼 수 있다하나님은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은 결코 교회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주일마다 교회에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 인종, 지역, 국가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든다. 흑인, 백인, 아시아인, 남미인, 부자, 빈자, 몸집이 큰 이, 작은 이, 운동을 잘 하는 이, 못하는 이, 도시 출신, 시골 출신, 도시 근교 출신 등이 수천 년 전에 쓰여진 책의 내용이 선포되는 것을 듣기 위해 교회에 모인다. 하나님의 모든 “통상적인” 은혜의 수단은 이 시대 문화에 대항적이다. 설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설교 역시 대항(對抗)문화적으로 디자인하셨다.드라마, 동영상, 토론, 음악 등의 것으로 설교를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교회와 교회가 하는 일의 본질을 오해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우리를 그의 교회로 부르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신다. 통계를 보면 미국 성인은 평균적으로 하루 열 시간 미디어를 사용한다. 교회까지 이런 일에 뛰어들어야 할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일주 168시간 중 주일 두 시간이라도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강권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 아닐까?진정한 예배는, 그것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든 간에, 인간이 만든 어떠한 것으로도 흉내내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적인 문화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언어적이다. 시각이 언어를 지배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말씀을 전하라설교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는 이들 역시 좋은 뜻으로 그리 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그런 주장은 말씀 중심적이라기보다 회중 중심적으로 들린다. 설교는 구식이라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진실로 필요로 하는 것, 즉, 죄와 옛 자아로부터의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나 선호하는 것을 더 우선시 하는 것이다. 그저 그런 설교자를 더 매끈하게 말하고 최신 기술과 유행에도 민감한 의사소통 전문가들로 바꿔야 한다거나, 아니면 더 괜찮고 더 카리스마 있는 설교자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약함이라는 예상치 못한 통로를 통해 흘러나온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고후 12:10).스크루테이프가 조카에게 말했듯, 우리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늘 똑같이 반복되는 것들을 지나치게 싫어한다. 바울이 살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표식을 구했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었다."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죄인들에게는 정직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변화가 언제나 필요하다. 성경 역시 이것이 회집된 교회를 위해 가장 우선되는 것이라 가르친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왜 다른 것을 주려 하는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ase for Sermon-Centric Sundays번역: 이정훈
목회
설교와교육
주일
스크루테이프
말씀
본질
CS루이스
설교자
마틴로이드존스
목회는 그냥 일이 아니다
by Ray Ortlund
2021-06-16
몇 년 전 이제 막 사역에 들어선 한 젊은 목사가 내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어떤 목사라도 목회 사역이라는 긴 여정에 들어설 때 힘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차원에서 헌신하는 사역자의 모습을 제안했다.소명을 받은 사람첫 번째로, 소명을 받아야 한다. 사역은 단지 직업이 아니다.교회는 목사를 채용하는 게 아니라 청빙한다. 기독교 사역은 단지 어떤 조직이 제안하는 일거리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을 받는 것이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 1:15).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받은 자를 바로 분별하고 그런 사람을 목사로 청빙한다. 바로 여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있다. 목사가 받은 소명은 단지 교인을 섬기기 위한 게 아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소명은 바로 교인들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슬프게도 어떤 목사들은 어리석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신실한 목사라면 필연적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를 입히게 되어있다. 사도 바울은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고전 10:33)라고 했고, 실제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도였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는 사실 주님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도였다. 그는 용감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 바울의 경우,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다른 사람과 주님 사이였다면, 그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이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유익이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진실한 목사는 주님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섬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그러나 그는 결코 목사라는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창기처럼 팔지 않는다. 진실한 목사는 주님의 영광이 생명을 살리는 능력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고 설교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거룩한 소명을 받고 신실하게 사역하는 목사를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사람두 번째로, 모든 사람은 성경을 필요로 한다. 단지 도움이 되는 팁 정도로는 안 된다. 인터넷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게 뭐가 되었든지 매일 새롭게 쏟아져나오는 소식과 의견에 함몰되기 쉽다. 그러나 목사라면 존 웨슬리(John Wesley)가 말했듯이 ‘성경의 사람’으로 자신을 세상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목사라면, 나는 당신이 평생을 책 읽는 사람으로 살면 좋겠다. 가능하면 소설, 위인전, 시, 그리고 그 외에도 최대한 다양한 글을 읽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성경의 전문가가 되면 좋겠다. 그래서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발견하면 좋겠다. 짐 엘리엇(Jim Elliot)이 말했듯이 성경은 ‘인쇄된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당신이 단지 성경 말씀으로 설교하는 것 이상을 하길 원한다. 나는 당신이 평생 매일매일 성경에 푹 빠져서 살기를 제안한다.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목회자라면, 일 년에 한 번씩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이십 년을 읽어야 한다. 그럴 때, 당신은 변하게 될 것이다. 흘러넘치는 성경 속 드라마를 목격하게 될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단편적 현실이 아닌 전체적인 차원에서 현실을 보게 될 것이다. 또 하나, 구약에서 한 권, 그리고 신약에서 한 권을 선택해서 완전히 깊이 파들어가길 제안한다. 이 두 권의 성경을 당신 인생의 특별한 프로젝트로 삼아보라. 내게는 이사야서와 로마서가 이 두 권에 해당한다. 이 두 권의 책은 참으로 중독성이 있다. 나는 이 두 권의 성경을 영어로 수도 없이 읽었고 또 원어로도 읽었다. 또한 적지 않은 주석과 논문들도 모으고 있다. 나는 이 두 권의 성경을 깊이 파고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 기쁘게 생각한다. 이사야서와 로마서는 둘 다 성경 안에서 일종의 신학적 교차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교차로에서 성경적 사고의 교통 흐름이 오고 간다. 이 두 권의 책은 다른 성경을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아무튼 당신만의 두 권을 선택해서 확실하게 당신의 것으로 만들라.또 하나, 가능하다면 히브리어로 구약을 다 읽고 또 그리스어로 신약을 다 읽기를 바란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모른다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영어 성경 중에서도 ESV(English Standard Version)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원어를 가장 일반적으로 쉽게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성경 원어를 공부했다면, 공부한 것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라. 지난 이천 년을 통틀어 과연 몇 퍼센트의 기독교인이 성경을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읽는 특권을 가졌을까? 서기 420년, 제롬(Jerome)이 죽은 이후 천 년이 흐르는 동안 서구 사회에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이 두 가지 언어를 다 알고 있었던 기독교인의 숫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오늘날 혹시 당신이 그런 특별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은 아닌가? 무릎꿇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리고 당신의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라. 이 세상에 죽음을 앞두고 성경을 너무 많이 알아서 후회하는 목사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교회 목사가 성경을 너무 많이 알아서 불평하는 성도를 나는 여태껏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한 교회의 목사가 들려준 다음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번은 그 교회를 방문한 이슬람교 신자들이 그 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당신 교회 신자들은 성경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형제여, 그게 당신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계획을 세우라. 그리고 그 계획대로 실행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은 수없이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사람들 사이의 사람세 번째로, 누구나 단지 안면이 있는 사람이 아닌 형제가 필요하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잘라서 이스라엘 군대 진영으로 그 머리통을 던지는 장면은 실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그런 행동하는 신앙을 본 후에 요나단은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게”(삼상 18:1) 되었다. 요나단은 다윗 안에서 자신에게 설렘을 주는 용기 있는 신앙과 더불어 용기 있는 남자다움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거인을 죽이는 저 거룩한 자를 갖고 싶다.” 요나단과 다윗은 그 이후 형제가 되었고, 평생 동안 친구관계를 지속했고, 용감한 동지가 되었다. 목사라면 누구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고자 하는 갈급함과 신실함으로 영감을 주는 친구, 또한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는 신실한 친구, 그 무엇보다 담대히 헌신하려는 영혼을 가진 친구를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치러야 할 값이 있다. 바로 주님이 그 관계 안에 있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삼상 20:42). 이런 관계를 가진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그리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헌신했는가? 형제애의 순수한 기쁨으로 인해 자기 중심적인 계산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성한 유대감을 그들과 형성하고 있는가? 이런 대담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당신의 사역은 열매 맺지 못할 것이다. 아니, 당신의 사역은 열매를 맺을 자격도 없다. 사역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현실을 당신은 똑똑하게 목격하게 될 것이다. 다윗과 요다단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한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삼상 23:16). 다윗은 지금 절체절명 위기의 상황이었다. 요나단은 힘써 그를 도왔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요나단이 다윗에게 한 신성한 약속이 있다.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삼상 23:17). 요나단은 자신의 왕좌를 포기했고 그것을 다윗에게 넘겼다. 그리고 다윗 곁에서 그를 돕기로 약속했다. 나중에 요나단이 죽고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과연 다윗은 얼마나 자주 “요나단, 네가 지금 여기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너는 지금 내 기억 속에 있어,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안에서 내 손을 강하게 만들고 있어”라면서 요나단을 그리워했을까? 또한 시편 속 얼마나 많은 시가 오래 전 요나단이 던진 격려의 음성을 담고 있는 것일까? “다윗아, 주님은 너의 목자야, 그러니까 너는 부족함이 하나도 없어.” 시편 23편도 어쩌면 요나단의 말을 다윗이 기억하고 적은 게 아닐까? 또는 “다윗아, 하나님이 너를 지금 살펴보시고 너를 다 아신다. 하나님이 너를 버리지 않아”라는 시편 139편도 요나단이 다윗에게 했던 격려의 말이 아니었을까? 당신도 요나단과 같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서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당신이 했던 말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울림으로 남을 수 있다. 그 비결이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다른 형제에게 이기심을 버리고 헌신하라. 내가 지금 책임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책임감은 얼마든지 강압적이고 강제적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것은 책임감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당신이 깊이 존경하는 기독교인, 그리고 기꺼이 형제가 될 용기를 가진 기독교인을 모으라. 그리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에게 당신의 인생을 헌신하라. 그리고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들의 인생을 당신에게 헌신하도록 하라. 아주 오래 전에도 그랬듯이 ‘피로 맺은 형제’가 되는 것은 당신들을 서로 멀어지게 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대와 다음 세대에 필요한, 선을 위한 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가! 마지막으로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내 아버지의 말을 인용하자. “약간 위험하게 살아라, 그리고 모든 마음을 다 바쳐라!”원제: Ministry Is Never Just a Job, Advice for Young Pasto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다윗과요나단
소명
헌신
목회자
책임감
은혜를 설교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
by 김형익
2021-06-08
“젊은이, 자네가 성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은혜를 꼭 설교해야 하네.”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가 홀리트리니티교회의 젊은 후임 설교자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에게 한 말이다. 목사로 수련을 받는 신학생들은 설교학을 배울 때,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말하라든가, 구속사적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그런데 정작 강단 사역을 시작하게 되면,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말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하기 시작하고, 또 구속사적 흐름을 분명하게 짚어내는 것 같지만 정작 구속의 은혜를 충분히 보여주는 일에서 실패를 경험하곤 한다. 이것은 나의 경험이기도 하고 또 많은 동료 목사들의 경험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말이나 구속사적 설교를 하라는 말의 요지는 리처드 십스의 말을 빌리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케 하는 은혜’를 드러내라는 말이 아닐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한다거나 구속사적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넌센스가 아닌가? 리처드 십스가 토마스 굿윈에게 한 말을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은혜를 설교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를 말해야 한다.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분리되셨고 당신의 영광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지만,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이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는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출 19:6). 타락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가져왔지만, 하나님의 구속은 당신의 영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시킨다. 엄격하게 구별된 영역인 광야의 성막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의 회복을 현시하는 상징이었다. 물론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지만, 특별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본문은 율법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당신의 거룩하심을 온전하게 계시하셨다. 그래서 율법을 설교하는 것은 중요하다. “복음의 은혜를 드러내라고 하면서 율법을 설교하라고?” 그렇다! 율법을 설교하지 않고 은혜를 드러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율법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기준을 타협없이 드러내는 것은 중요하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 수준의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하).” 하지만 거룩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갈 3:11).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이렇게 재진술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리고 구체적인 예시까지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율법은 타협없이 이 기준을 고수한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한다. 그렇기에 성경 본문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님에도,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하고 슬픈 일이다. 둘째로, 은혜를 설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성을 충분히 드러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사람의 죄성도 밝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부름을 받는 장면을 생각해보라(사 6). 환상 중에 이사야가 성전 안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섰을 때, 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다. 높이 들린 보좌, 성전에 가득한 그의 옷자락, 하나님을 모시고 서 있는 스랍들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준다.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창화하자, 성전의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찬다. 이것이 이사야가 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들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한 이사야는 즉각적으로 자신은 죽어야만 한다고 느꼈다. 이사야의 반응은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할 때, 자신의 죄성을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자신의 죄성을 제대로 마주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칼빈이 말한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 우리 자신을 알 수 없고, 우리 자신을 알지 못하고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설교는 이 두 가지 지식을 정확하게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좋은 친구쯤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설교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하다. 이사야가 본 것과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하지 않는 한,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죄의 개념과 죄인됨에 대한 인식은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설교자는 피상성을 넘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그 말씀으로써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부패성을 드러내야 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설교자는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회중이 이것을 경험하고 인정하게 하는 사람이다. 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성, 이 두 가지 요소를 선명하고 충분하게 말했는가? 그렇다면, 이제 십자가와 복음의 은혜를 말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성 사이의 간극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게 만드는 죄인의 딜레마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 간극은 십자가의 복음이 채워야 할 영역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성 사이의 간극은 오직 십자가 복음의 은혜로만 채워질 수 있다. 회심은 이 두 요소를 처음으로 인식하는 순간이다. 성화는, 회심한 신자가 설교를 통해 점점 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고 자신의 죄성의 심각함을 깊이 봄으로써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과정이다. 이 인식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십자가의 은혜가 채워야 할 영역은 점점 더 커지게 되고 이것은 결국 그가 경험하는 은혜의 풍성함과 깊이를 반영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나의 죄성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진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복음의 은혜 안에서 자라가고 있다는 믿을만한 표지다. 만일, 신자가 은혜를 드러내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성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 간극은 우리의 익숙함 속에서 점점 더 좁아지게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거의 수렴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 은혜가 채울 수 있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랜 세월, 복음의 은혜를 받아 누리지 않고 살아간다면, 종교인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20세기의 탁월한 복음 설교자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험의 특징은 경외감(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과 무가치성(인간의 죄성)이 동반되는 것이라고 계속해서 설교했다”라고 싱클레어 퍼거슨은 증언한다. 목사인 우리는 매주일 이것을 설교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리처드 십스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케 하는 은혜를 설교하라고 젊은 사역자인 토마스 굿윈에게 했던 조언을 주의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성, 이 두 요소를 충분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말하지 않고 은혜를 말할 수 있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구속사적 설교 다 좋다. 그러나 설교자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케 하는 은혜’를 설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성을 선명하고 충분하게 말함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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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목사도 사람과 돈 때문에 낙심한다
by Christopher Hemmerich
2021-06-02
10년 넘게 풀타임 사역을 하면서 만났던 어려움은 내가 미리 예상했던 게 아니었다. 만약에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 미리 예상할 수 있었더라면, 나는 좀 더 잘 이겨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관리하는 인턴 목회자들에게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항상 들려주는데, 그것은 그들이 나보다는 좀 더 쉽게 그런 어려움에 대처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안에서 오는 공격어쩌면 내가 너무 순진했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목양 사역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정도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려움이 외부에서 닥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결코 내부에서 올 수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를 물어뜯을 양을 미리 계산하지 못했다. 어쩌다보니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을 받았던 바울에 관해서 아예 까맣게 잊어버렸던 거 같다(딤후 4:9-18). 동료 기독교인은 바울이 가장 힘들 때 그를 버렸다. 알렉산더는 그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 바울을 향한 비난이 빗발칠 때, 그를 변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아는 원로 목회자의 대부분은 목회를 하면서 바울과 같은 일이 자신들에게도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경험했다. “당신은 좋은 목회자가 아니에요”, “당신하고 교회는 맞지 않아요”, 또는 “전임 목회자가 더 좋은 비전을 가지고 있었어요” 등의 악의에 찬 이메일을 교인으로부터 처음 받았을 때 느꼈을 목회자의 충격을 생각해보라. 나는 풀타임 목회에 들어서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목회자를 인신공격하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비밀을 누설하고 또 심지어 반대 운동까지 하는 이들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저녁식사에 초대하고, 커피를 함께 마시고, 또 은밀한 비밀까지 나누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목회자는 그들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의 법정에 그들을 세울 때 상호간에 애정으로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그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도 기도해야 한다. 목회자라면 또한 겸손하게 그런 과정에서 자신들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나의 허물이라고 주장하는 내용 속에 아주 조금이라도 사실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공격이 들어올 때 만나는 가장 자연스런 유혹은 빙빙 돌면서 수세적인 자세만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당신을 공격하는 상대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픈 상처만 핥고 있는 당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양떼 마저 너무도 쉽게 떠나게 만들수도 있다. 사역의 본질대학 시절 내내 나는 육체 노동을 했다. 밤에 탈진해서 자리에 누우면 팔다리가 쑤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런 육체 노동에도 아주 좋은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집에까지 일을 들고 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다른 많은 일들과 마찬가지로 목양 사역은 그렇지 않다. 언제나 신경써야 할 사람이 또 생기기 마련이다. 연구와 묵상 그리고 기도에 다섯 시간을 더 투자해서 설교를 준비했을 때 나는 언제나 더 좋은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언제나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과거 육체 노동을 하던 당시 잡목을 심으면서 언젠가는 제자훈련을 하면서 돈을 버는 날을 꿈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건 선물이야”라고 말하면서 잡목을 심는 내 기술을 이용해서 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이었다. 목회는 팔다리가 쭉쭉 늘어나는 검비 인형(Gumby doll, 미국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초록색 클레이 휴머노이드 캐릭터 - 편집자 주) 같다. 사방에서 당신을 당기기 때문에 어떤 때는 진짜로 팔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격려 카드를 써야 하고, 환자를 방문해야 하고, 리더들을 세워야 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고, 스태프를 가르쳐야 하고, 부부상담을 해야하고, 중보기도를 해야 하고,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신경을 써야 하는 등… 끝이 없다.목회자 부부가 사역에서 버틸려면 바로 이런 사역의 본질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불평하게 될 것이고, 소명받은 것에 회의를 가지게 되고 결국 지쳐서 나가 떨어지게 될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언제나 더 할 게 남아 있다는, 사역의 본질을 빨리 받아들일수록 당신은 더 빨리 당신 자신과 가족에게 꼭 필요한 건강한 기대 수준을 정립할 수 있게 된다. 선배들과 함께 사역과 삶의 조화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라. 당신의 양떼가 손을 내밀 때 진짜 위기와 표면적 위기를 구분할 수 있는 눈을 키우도록 노력하라. 정말로 당장 안 만나면 안 된다고 절박하게 간청을 하는 사람도 만나서 보면 굳이 당장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문제가 아닌 경우가 정말로 많다. 그러나 동시에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특징을 가진 사역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축복받은 기회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렇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작은 것을 들어서 크게 쓰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이 모자랄 때나는 사역하는 내내 돈에 쪼들렸다. 그리고 종종 부족한 돈 때문에 기쁨을 빼앗겼고, 소명을 수행하는 중에도 낙담했다. 물론 내가 돈을 벌려고 사역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심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말을 들었던가? “하나님이 이끄시는 한 하나님이 다 공급하신다.” 재정적인 안정감을 포기하고 하나님만을 따를 때 얻는 신실한 기쁨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지혜로움을 포기하게 만드는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내가 아는 낙담한 목사들의 대부분은 다 돈 문제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십대 사역을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동시에 장년 사역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했다. 왜냐하면 장년을 맡는 목회자가 더 많은 사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 목사들은 자녀를 좋은 과외 활동에 참여시킬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언제나 나쁜 아버지라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고 힘든 이들도 있었다. 사탄은 돈을 무기로 당신의 기쁨을 빼앗고 또한 당신이 소명에서 눈을 딴 곳으로 돌리도록 만든다. 사탄이 주는 이런 식의 유혹은 가족과 관련해서 가장 자주 일어난다.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라면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나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다 부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데도 그럴 수 있을까? 아내가 있는데도? 연로한 부모님이 계신데도?목회를 잘 감당하려면 좋은 청지기가 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고 그 목표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목회자로서 부자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게 계획을 세워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잘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신학교를 학자금 대출 없이 졸업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라. 설혹 졸업이 늦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사역지에서 인터뷰를 할 때, 당신의 가족에게 얼마가 필요한지를 겸손하고 또 솔직하게 말하라. 특히 처음 인터뷰라면 결코 부끄럽다는 이유로 진실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일단 어떤 액수에 당신이 동의한 이상 나중에 바꾸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사역의 길을 걷기 때문에 가족에게 충분한 부양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당신은 결코 행복한 목회자가 될 수 없다. 통계는 하나같이 대부분의 목회자가 풀타임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장기적으로는 끝까지 사역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 역시도 어디에서 펀치가 날아올지 몰랐기 때문에 거의 KO 당할 뻔 했다.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 주님을 섬기는 것은 왕관을 쓰는 것이다. 장로가 되는 것도 소명이다. 양떼를 맡아서 양육하는 것은 은사고 또한 은혜다. 위험을 내다보고 기도로 이겨내도록 하라. 은혜가 완성의 단계에 이를 때까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항상 위험에 대비하라.원제: The Punches I Never Saw Com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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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수사(修辭)가 더 필요하다
by A. Trevor Sutton
2021-05-29
세상에는 수사(修辭)가 더 있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건대, 정치도, 언론도, SNS도, 그리고 우리의 일상 대화 역시 수사가 필요하다.하지만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도 물론 있다. 요즘 세상에서는 수사가 오히려 ‘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오늘날의 무례한 문화가 도래한 이유 중 하나가 수사라 생각하여 수사는 이제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욕보이기 위해 당신이 휘두르는 것이 바로 수사라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들을 그저 지껄이기만 하는 것이 바로 수사라 여긴다. 사람들은 또한 수사가 폭력과 증오에 불을 붙이는 등유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도 왜 필자는 우리 사회에 그것이 더 필요하다 주장하는 것일까?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는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좋은 수사가 메시지에 차별성을 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수사에 능한 이들이, 그들의 의도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간에, 소음 속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 수사: 설득인가 아첨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인류는 수천 년에 걸쳐 수사를 사용해왔지만 이 단어의 정의는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다. 어떤 이들은 수사를 ‘설득’으로 본다. 다시 말해, 당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적절한 청중에게 적절한 방법으로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이 수사라는 것이다. 이런 정의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수사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용한 설득 수단을 가려내는 능력이라 정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에 능한 이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광고 제작자들은 소비자들을 납득시키고, 엄선된 어휘로 쓰인 보도자료들은 언어의 섬세한 현(絃)을 튕겨 독자들에게 호소한다.하지만 수사를 단순한 설득 정도로 이해하면 수사가 마치 속임수, 이단, 또는 허위의 도구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그래서 수사에 능한 이들이 거짓말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남용을 경계했다. 그는 수사를 요리에 비유했다. 요리사와 수사가는 모두 재료를 섞어 뭔가를 만들어내어 사람들이 맛있게 먹기를 바라는 이들이다. 역한 냄새가 나는 고기라도 소스만 충분하다면 요리사는 사람들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먹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수사가도 말도 안 되는 논리라 해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하나인 ‘고르기아스’(Gorgias)를 보면 소크라테스가 수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먼저, 그저 아첨하는 류의 불명예스러운 웅변이 있는가 하면, 고귀한 수사, 즉 시민들의 영혼을 단련하여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사가 있지. 청중이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최선의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수사라네.” 그리고서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Callicles)에게 “그런 수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들어보았다면, 그런 연설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라고 묻는다. 칼리클레스는 “사실, 지금 살아있는 연설가들 중에 그런 수사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도 칼리클레스도 이상적인 형태의 수사를 사용하는 사람을 한 명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박수갈채 받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것만 말함으로 다른 이들을 향상시키기를 추구하던 수사가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다. 분명, 그들은 바로 그분을 못 만났던 것이다.최선의 것을 말함소크라테스가 묘사한 이상적인 수사가상(像)에 정확히 들어맞는 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공적인 가르치심은 설득력과 권위가 있었다. 그는 분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쓰셨다. 그의 가르침은 실제적이었고 심오했다. 예수님은 언제 아브라함을 언급하셔야 할지, 언제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어휘를 써야 할지, 그리고 언제 논리적인 주장을 펼쳐야 할지 잘 아셨다. 그렇지만 그의 수사는 달콤한 연설이나 설득력 있는 설교 이상의 것이었다. 예수님의 주 관심은 그의 말씀을 청중의 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하나님의 진리에 맞추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심으로써(눅 8:1) 최선의 것을 말씀하셨고, 청중들을 성장시키신 것이다. 그의 말씀은 실로 설득력과 권위가 있었고, 마음에 담아 둘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말씀은 선하고 진실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적 수사의 필요성바울, 저스틴 마터, 터툴리안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적대적인 문화 안에서 청중을 얻기 위해 수사학의 도구를 사용했다. ‘변증서’(First Apology)에서 저스틴 마터는 “우리가 이 책에서 쓴 것은 아첨의 말이나 독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독자들이 엄격하고도 정확한 연구를 통해 각자 판단을 내리기를 원합니다”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생각했던 바, 아첨의 말이 아닌 진실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수사학에서 도망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구속(redeem)해야 한다. 이는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점차 적대적으로 변해가는 이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수사가 사용되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해 고려해보아야 한다. 1. 진실성 > 설득력수사의 주된 목적이 진실된 것을 말함으로써 최선을 말하는 것이라면, 우리 일상 언어에서 수사를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세상에 수사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이런 때가 곧 오면 좋겠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대면하여 말하든 SNS에 글을 쓰든,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이 진실된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추해야 한다. 2. 설득력 ≠ 거짓말남을 설득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물론 설득이 정욕, 탐욕, 그리고 권력 관계에 의해 조종될 수 있지만,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설득할 수도 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4).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자 의도하는 것 자체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설득하고자 애쓰는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이어야지 권력이나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3. 청중 + 상황바울은 특정한 청중과 상황에 따라 그의 접근법을 달리 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효과적인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서두르지 말아야 하고 특정한 수사학적 상황과 청중이 주는 미묘한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청중에게는 어떤 사람이, 또는 무엇이 설득력을 지니는가? 이 상황에서 청중이 내 말을 듣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상황에서 예수의 복음을 어떻게 하면 최선의 방법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 대화든, 이러한 질문을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허위를 그저 번지르르한 말로 포장하는 것이 수사학이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수사학은 필요 없다. 하지만 수사학이 최선의 것과 진실된 것을 설득력 있게 말하는 방법을 다루는 것이라면 이렇게 소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사학을 이용할 수 있고, 또한 이용해야 한다. 원제: Our Noisy Age Needs More Rhetoric, Not L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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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목회한 분으로부터 배운 세 가지
by David Schirock
2021-05-16
버논 라이온즈(Vernon Lyons) 목사는 내 아내의 할아버지다. 1951년에 그는 시카고 남쪽에 있는 애쉬번(Ashburn)이라는 곳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올해 초까지, 무려 7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는 신실하게 그 교회에서 목회했다. 내 세대 사람들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올해부터 그는 이제 그 어떤 컨퍼런스의 헤드라인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 또 트위터를 하지 않는 그를 팔로우 하는 사람도 없다. 그가 자기 돈을 들여서 출판한 적지 않은 책과 팜플렛 중에서 아마존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딱 한 권이다. 그가 개척한 교회 홈페이지에도 그의 이름은 더 이상 올라가 있지 않고, 지금은 새로운 담임목사가 사역을 하고 있다.버논 목사가 여러 상황에서 드러나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배울 건 너무도 많다. 히브리서 13장 7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맺은 열매를 잘 보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했다. 물론 그 누구도 예수님처럼 완벽한 모범이 되는 분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과 목회의 여정 속에서 바라보고 배울 수 있는 신실한 선배들을 보내주셨다. 나는 아내의 할아버지를 통해서, 또 이제는 나의 가족이기도 한 그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목회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무려 13명의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이 땅에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도덕적 변화가 밀어닥친 기간 내내 목회를 했던 그분의 사역 마지막 장을 지난 15년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배운 것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니라 디모데가 인내하며 사역할 수 있도록 바울이 갖추게 했던 세 가지 자질, 바로 그것이다(딤후 2:1-7). 1. 일편단심바울이 그의 사역 말년에 다다라서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말했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바울은 마가 요한처럼 사역을 등졌던 사람이(행 15:38) 나중에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딤후 4:11). 그는 또한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버린 데마 같은 사람도 보았다(딤후 4:10). 바울은 끝까지 경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마음이 쏠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서 멀어지게 하는 그 어떤 습관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버논 목사의 경우, 그는 오로지 주님의 사역에만 평생을 바쳤다. 그는 사역을 출세를 위한 디딤돌로 여기지 않았다. 더 큰 교회를 만들고자 또 다른 개척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는 사역의 영역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하려고도 애쓰지 않았다. 그는 70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시카고 남부 지역을 위해, 오로지 한 교회에 바쳤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느끼곤 한다. 버논 목사는 그의 교회를 사랑했고 또 모든 교회를 사랑했다. 그는 종종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 관해서, 또 내 설교에 관해서 묻곤 했다. 그는 생각하고, 기도하고 또 교회를 섬기는 것을 결코 지겨워 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1968년, 전도지를 길에 뿌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벌금 25달러를 물기도 했다. 그는 또한 엄청난 독서광이기도 하다. 여든 후반이 될 때까지도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각종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물론 매년 1월을 안식월로 갖는 그는 언제 쉬어야 할지를 알았지만, 주님과 교회를 향한 열정은 쉬는 동안에도 식지 않았다. 헛된 것들로부터 마음을 지키고 또한 마음이 언제나 복음만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에게 꼭 맞는 자기훈련 방법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2. 성품디모데후서 2장 5절에서 바울은 선언한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바울의 포인트는 이것이다. 목사는 규칙에 따라서 섬겨야 한다. 목사의 삶이란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좋은 평판을 가져다주는 데 꼭 필요한 마음의 습관을 키우는 것과 더불어 신실함을 가졌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판가름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든 토대가 아닌 그 어떤 다른 토대 위에서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고전 3:10-15). 말씀을 성실하지 않게 또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전달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고후 2:17), 목사 자신이 은혜 안에서 진보를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해서도 안 된다(딤전 4:11-16). 실로, 목사에게 있어서 성품이야말로 사역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다. 그런 면에서 버논 목사의 삶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정직함, 온유함 그리고 겸손함이다. 최근 들어서, 도덕적 타락, 개인의 일탈, 그리고 사역적 야망이라는 독에 물든 리더 목회자 때문에 몇몇 큰 사역 단체가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런 단체가 성장했던 이유는 지도자의 진짜 정체가 커튼 뒤에 숨겨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체가 드러났을 때, 사역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버논 목사라고 어떻게 잘못이 없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를 더 잘 알게 될수록,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말을 더 많이 들을수록, 그를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교회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그는 매일 기도와 성경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버논 목사는 항상 그가 돌보는 양 떼로 바쁘다. 교회에 있던 서재가 집으로 옮겨졌지만, 그는 여전히 주님과 교인을 섬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COVID-19의 시대를 맞은 지금, 92세인 그는 심지어 유투브 채널을 개설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은 그의 열망과 또한 그리스도를 더 알리고 싶은 그의 헌신은 끝이 없을 정도다. 3. 열심바울은 노력을 강조함으로 디모데에게 주는 메시지의 결론을 맺는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6). 바울에게 은혜란, 하나님의 주권을 알면 알수록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고전 15:10). 버논 목사가 바로 이렇다. 70년 동안 그는 수도 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수천 번의 심방과 병원 방문, 또 수천 번이 넘는 복음 설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지역 봉사, 공개적인 복음 변론, 선교사 격려를 위한 해외 여행, 성경학교 건립, 리더 양성 등 그의 사역은 끝이 없다.그는 정말로 열심히 사역했다. 구세대 목사답게 그는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심방에, 상담에, 장례식에, 세례식에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데 보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사역은 부흥했고, 한 번 이상 교회가 나뉘어지는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수많은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 사역에 매진하도록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다 SNS가 생기기 전의 일이다. 원로 목사님들을 우러러보며버논 목사의 사역을 살펴보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교리와 목회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도 나의 사역을 보면서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차이 중 어떤 것은 신학적 견해에서 또 어떤 것은 말 그대로 세대 차이에서 오는 것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그의 삶이 내 삶에 가장 가치 있는 영향력을 끼친 곳이다. C. S. 루이스가 오래된 책을 몰래 엿보는 것의 위험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나이 많은 사람 그리고 목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이 무조건 더 좋은 것이라고 너무도 쉽게 단정하는 젊은 사역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런 젊은 사역자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우리 앞에서 걸어간 이들이 가졌던 시각이다.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버논 목사와 같은 이가 오랜 시간 동안 보여주었던 성품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가 가진 마음과 체력은, 즉각적이고 풍부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단기간에 사역을 만들어내는 데만 그치게 하는 표현적 개인주의에 대한 놀라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은 내 사역에 꼭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했다. 목자로 산다는 것은 낙담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나는 그를 통해 목회적 인내의 살아있는 모범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한다. 원제: 3 Things I Learned from a Pastor Who Endured for 70 Yea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끈기
버논라이온즈목사
디모데전후서
바울의목회충고
성품의능력
노익장목회
섬기는 리더의 다섯 가지 표지
by Jon Bloom
2021-05-15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인 리더는 섬기는 리더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 주어진 각 상황에서 섬기는 리더십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떤 경우 섬기는 리더는 다른 이들의 발을 씻기는 자일 수 있겠지만(요 13:1–17), 어떨 때는 꾸짖기도 해야 하고(마 16:23), 징계도 해야 한다(마 18:15–20). 자기 비용을 들이면서 섬겨야 할 때도 있고(고전 9:7), 강한 명령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고전 5:2, 11:16). 흙탕물 속에 들어서기이미 흐려진 물을 더 흐리게 하는 요인들은 부지기수다. 우선, 내면의 죄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리더는 아무도 없다. 이는 그들의 성숙도가 최고에 달해 있을 때조차도 그들은 여전히 결함투성이의 종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리더들의 성숙도는 내가 말한 그 최고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또한, 그들의 지도를 받는 그리스도인 역시 내면의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그들의 성숙함도 최고에 이르지 못했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 리더들과 그들의 리더십 아래 있는 이들 모두 각기 다른 성향, 경험, 은사, 그리고 부르심이 있어서, 이로 인해 리더들이 리더십을 수행하는 방식, 그리고 사람들이 리더십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지도자가 진실된 마음으로 섬기고자 해도 진실된 마음으로 리더십을 따르고자 하는 이에게조차 그것이 자기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고후 1:24)처럼 보여질 수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속이는, 자기밖에 모르는 늑대 같은 리더들도 한동안은 섬기는 리더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리더의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은 섬김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려면 관대함, 인내심, 겸손한 마음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섬기는 리더가 누구인지에 대한 일률적인 정의 같은 것은 없다. 많은 교회들의 필요와 상황들은 실로 광대하고 다양하므로 다양한 종류의 리더와 은사들이 필요하다. 리더의 마음의 동기를 평가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특정한 종류의 리더에게 끌리게 마련이지만, 우리의 선호도는 믿을 만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무자비한 기준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섬기는 리더의 표지신약 성경은 여전히 우리에게 기독교 리더를 선택할 때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가르친다(딤전 3:1–13). 어떤 리더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그리스도를 닮은 섬김이라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 완전하진 않지만, 필자는 섬기는 리더의 다섯 가지 근본적인 표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섬기는 리더는 자기 주인의 영광을 구한다자기 명성이나 자신이 목회하는 교인들이 그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의 주인이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닮은 리더는 그리스도의 ‘종’(엡 6:6)이며, 시간이 갈수록, 대외적인 칭찬, 지위, 또는 경제적 안정이 아닌 그리스도께만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리더의 충성 속에서는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시 15:4)라는 시편 말씀이 실천된다.2. 섬기는 리더는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이 섬기는 이들이 최고의 기쁨을 누리도록 한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 주인의 영광을 구하는 일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중략]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 2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질, 받은 은사들, 능력, 그리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섬기는 리더는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빌 1:25; 2:9–11) 요구되는 희생을 기꺼이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돌아가게 한다. 3. 섬기는 리더는 복음을 방해하는 것보다 자기 권리를 포기할 것을 택한다바울이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바울이 어떤 음식이나 음료를 스스로 금하고, 그가 섬기던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고 손수 일하여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굶주리고, 헐벗고, 매를 맞고, 노숙을 하거나, 교회 안팎에서 수모를 당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고전 4:11–13; 9:4–7). 그는 아내를 얻을 권리도 내려놓았다(고전 9:5). 이는 모두 그가 순교 당하기 오래 전에 했던 결심이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바울이 세운 기준은 실로 높다. 하지만 섬기는 리더들은, 자기 권리 포기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기꺼이 그리 할 것이다. 4. 섬기는 리더는 자기가 얼마나 알려지고 유명해지는지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는다세례 요한처럼, 섬기는 리더는 자기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요 3:29)로 여기기에, 자기가 맡은 일이 얼마나 지명도가 있느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지명도 없는 역할을 맡은 이들을 얕잡아보지도 않고 지명도가 높은 일만 중요한 것으로 여겨 그런 일들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고전 12:12–26). 그는 자신이 받은 역할을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해 잘 감당하고자 할 뿐, 역할을 선택하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임을 기쁘게 인정한다(요 3:27). 5. 섬기는 리더는 자신이 쇠하여야 할 때를 알고 그 때가 오면 묵묵히 받아들인다모든 리더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만 섬기는 법이다. 어떤 기간은 길고 어떤 기간은 짧다. 어떤 기간은 풍성하고 어떤 기간은 빈약하다. 어떤 기간은 기록도 되고 추억에도 남지만 대부분의 기간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모든 기간은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라고 말했다. 리더 자신이 자신의 기간이 끝났음을 먼저 인식할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이 먼저 이를 알게 될 수도 있다. 때로는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어떤 리더의 기간이 부당하게 끝나버리게 하시기도 한다. 하지만 섬기는 리더는 그가 맡은 역할을 그리스도를 위해 묵묵히 내어드린다. 자신의 정체성과 신뢰의 근거가 자신의 부르심이 아니라 그가 섬기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리더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라섬기는 리더의 다섯 가지 특징을 모두 완벽하게 체화한 기독교 리더는 이 땅에 없다. 그런 리더는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우리를 이끄는 리더들의 대부분은 그저 신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불완전한 종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 리더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들은, 첫째, 위에서 말한 표지들 중 하나라도 그들에게서 보인다면 우리의 입을 열어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격려하는 것, 둘째, 그들이 넘어질 때는 우리의 입을 닫고 조용히 인내해주는 것, 셋째, 리더들이 우려할만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것을 평가하고 은혜로운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리더들과 ‘대면하여’ 이야기할 때도 이 세 가지를 적용하고, 리더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이를 적용하라. 만일 리더가 자기 기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면,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을 통해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고, 부드럽고, 인내심 있는 격려를 통해 이를 알려주도록 하고 필요하다면 책망을 하도록 하라. 하지만 디오드레베처럼(요삼 9) 종종 리더의 죄악된 결함이 큰 해를 끼치기도 한다. 또는 가룟 유다처럼(눅 6:16) 늑대 같은 리더로 차후에 드러나는 이들이 있다. 그런 경우, 은혜롭게 반응한다는 것은 타당하고 경건하며 성숙한 제자들이 종으로서 먼저 꾸짖고(마 16:23) 심지어 징계하기까지(마 18:15–20) 하는 모습일 것이다. 어떠한 리더에게 이렇게 반응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정 기간 관찰을 해보면 그에게서 이 다섯 가지 표지들이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원제: Five Marks of a Servant Leader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희생
성숙
책망
긍휼
겸손
섬김
설교할 수 있는 용기
by Chris Castaldo
2021-05-11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 나는 강대상 앞에 서서 회중석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크리스, 오늘 네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고, 이들을 멍에로부터 구원하고, 하나님을 찬양케 할 것 같니? 너 정신 나갔구나. 대담하고, 뻔뻔스럽고,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어쩌겠어? 이제 설교를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한다.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의 그 짧은 순간, 의심의 화살이 온갖 방향으로부터 날아들 때, 내게도 반격용 무기가 있다. 사도신경에 기반한 스펄전(Spurgeon)의 말 “성령을 믿나이다”를 되뇌는 것이다. 이 말이야말로 내 말의 무력함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때 내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인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를 반복하여 선포한다. 성경의 말씀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권위가 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설교할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안으로 끌려 들어올 수 있는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권위에 대한 반감회중석에 앉아 있는 이들 중 일부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 반감이 있을 것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계몽주의 이후 세속화 시대에 점차 가속화되었지만, 사실 이는 우리 인류에게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선악과를 먹었던 때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거부해왔다. 이러한 저항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됐고, 옛날에는 권위를 위임 받은 사람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점점 더 사람들은 이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가정, 교육, 법, 교회 할 것 없이 말이다. 이 모두가 이 세상의 최종적인 권위이신 하나님을 인류가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는 주요 방식 중 하나인 설교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나한테 설교하지 마”는 타락 이후 우리가 주장해온 윤리적 독립성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설교한다”는 말은 원치 않는 요구들을 가지고 하는 지루한 연설과 동일시 된다.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이런 식의 태도를 떠벌리며 말하지는 않지만, 교회에 다니는 이들에게도 그런 식의 태도가 이미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 내용을 다루지는 않고 그저 듣기에 좋은 설교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무지하다는 사실도 이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조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는 전혀 없을 것이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자들이 스스로 잘 하고 있다는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지기 전에, 설교자 역시도 권위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성경 강해 워크숍에 참석하거나 서재에 존 칼빈(John Calvin)의 그림을 걸어두거나 스스로를 진리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이들 역시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듯 고통스런 순간들이 있다. 결국 다른 죄인들을 향해 설교하는 설교자 역시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인해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있는 진리를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설교하는 자세는 겸손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설교자 모두는 성경에 대한 진지한 확신과 자신에 대한 냉정한 회의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균형을 잡는 네 가지 방법은 기대, 강해, 관련성, 그리고 기름 부으심이다.기대교리 공부를 통해 성경의 권위, 영감, 그리고 충족성에 대해 적절히 배울 수 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익하다(effective)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딤후 3:14–16).성경이 영감(inspiration)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에게는 언제나 성경을 전하는 것이 유익하리라는 것에 대한 깊고 심오한 기대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알듯 바울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라고 권면한 것은 바로 이 근거 때문이다. 이는 설교자들을 위한 복음이기도 한데, 설교자가 하는 선포의 유익성은 설득력 있는 웅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설교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하게 되도록 만들기 위한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으로 인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렇기에 말씀은 그 자체로 유익하다. 그러한 기대감으로 말씀을 전하자. 강해설교 준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들은 종종 성실한 말씀 연구에 꼭 필요한 시간과 동기를 찾지 못해 쉬운 지름길 같은 것을 찾아보고자 하는 유혹에 맞닥뜨린다. 그러한 순간에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 본문의 권위, 다시 말해 하나님은 바로 자기 자신의 권위로 성경 기록자들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 자신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벧후 1:21). 성경 본문에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의미가 있다는 이 전제야말로 설교자들로 하여금 매주 설교 준비에 충실히 임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하나님이 성경 본문에 영감을 불어넣으실 때 특정한 상황 속에서 하셨듯이 설교자도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각 본문의 특정한 배경이 무엇인지를 연구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메시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 지닌 권위다. 이로 인해 설교자의 말씀 연구는 가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 된다. 관련성설교의 근간은 신중한 석의여야 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바를 보면 설교는 또한 우리 삶에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교는 우리를 권면해야 하고 우리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설교에 인간적인 요소를 더한다는 말이 아니다. 권면과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원래 의도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설교는 우리의 지성을 깨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설교는 또한 우리 마음을 격려하고 꾸짖기도 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를 행하는지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바울처럼 설교자도 보살피는 양 떼를 잘 먹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기름 부으심성경은 자기 자신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후에 열정적으로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각자 같은 이들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말씀 선포에 관하여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고 고백했다. 이런 불붙음이 신약에서 오순절 날에 임했는데, 예수께서는 이 날에 대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중략]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다. 이 은사의 열쇠는 청교도들이 말했던 바 기름 부으심이다. 기름 부으심은 어떻게 임하는가? 기름 부으심은 설교자가 성경 본문의 권위와 하나님의 보좌를 이어주는 권위는 무엇인가 같은 주제를 묵상할 때 받는 것이다. 기름 부으심은 설교자로서의 부르심이 갖는 권위를 묵상할 때 주어진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그 신적인 순간이 바로 기름 부으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아름다움이 듣는 이들의 마음을 꿰뚫는 그 순간이 바로 기름 부으심이다. 천상의 힘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이 하늘에서 주시는 권위로 뒷받침된다는 확신을 되살리지 않으면 성경적인 설교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이 명제 안에는 결국 영감된 본문의 성격, 그것이 지닌 유익성에 대한 기대, 통찰력을 주는 강해, 회중의 삶에 대한 깊은 관련성, 그리고 그 말씀이 선포될 때 임하시는 기름 부으심이 모두 들어가 있다. 설교자로서 입을 열기 직전에 불화살들이 날아들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말씀을 맡은 종을 통해 신적 권위가 역사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 그리고 그가 주시는 권능의 은혜에 힘입어 부름 받은 설교자들이 설교할 수 있는 것이다.원제: Courage to Preach출처: www.ligonier.org 번역: 이정훈
목회
설교와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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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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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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