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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설교가 필요한 이유
by Mack Stiles
2021-05-10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설교자는 주제설교를 선호한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할 때도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한 후 그에 관한 성경구절을 모은다. 물론 우리 교회에서도 주제설교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설교하면, 결국에는 청중에게 묽은 죽을 먹이는 꼴이 된다.주제설교만 고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선 설교자는 말씀 준비에 요구되는 부담을 피해 가게 된다. 난해한 본문과 씨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 부분은 건너뛰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만 이야기해도 된다. 그러나 청중이 난해한 본문을 포함해서 성경의 모든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주제설교로는 그 청중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 권을 전체적으로 설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다루도록 청중을 가르쳐야 한다.강해설교는 교회만이 아니라 설교자의 영혼에도 큰 유익을 준다. 우리는 설교를 준비할 때 깨닫게 된 진리를 모두 다 설교할 수 없다. 그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석 같은 진리는 감사하게도 설교자의 마음에 남게 된다.주제설교만 고집할 때 따라오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수년 동안 내가 확인한 바로는, 성경에서 어려운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고 설명할 때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설교가 전해지곤 하는데, 주제설교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혼의 문제를 두고 씨름하게 만드는 본문, 기독교인으로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게 어떠한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본문, 또는 바울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본문을 연속적으로 설교하게 되면, 청중은 계속해서 성경의 흐름에 사로잡힐 수 있다.그리고 혹 그러한 본문이 다루고 있는 애매한 문제에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설교자가 각 본문을 다루는 자세는 청중 앞에 성경의 난해한 부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모델이 된다.고린도전서를 설교해야 하는 이유그렇다면 왜 고린도전서를 설교해야 하는지 여기에 네 가지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1. 고린도전서는 우리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당신은 성경의 모든 본문이 우리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고린도전서가 현대 사회와는 관련이 없으며 기껏해야 다른 시대를 위해 쓰인 편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내려놓기 바란다. 고린도전서는 복잡하지만, 오늘날과 동떨어진 문제를 다루는 성경이 아니다. 고린도전서가 복잡한 이유는 단일한 주제만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편지에는 수많은 문제가 등장하며 그러한 문제가 서로 엮여서 전체 내용을 구성한다.고린도전서를 읽는 일은 마치 누군가의 통화를 한쪽에서 엿듣는 일과 같다. 편지의 대부분이 고린도 교인들의 물음에 답하는 바울의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의 물음을 직접 들을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편지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는데, 바울이 언뜻 보기에 다소 이상한, 오늘날과는 그리 상관없는 당대의 문화적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현대 사회에서는 우상의 제물로 고기가 바쳐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아가 바울은 이 시대의 독자들이 가볍게 읽어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까지도 언급하고 있다.그러나 우리가 표면을 살펴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금맥과 같은 성경의 원리가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원리는 우리의 설교 준비를 더욱 심도 있게 만든다. G. K. 체스터튼(Chesterton)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린도전서는 아쉬움을 찾을 수 없는 성경, 여전히 어렵고도 아직 다루어진 적이 없는 진리로 가득한 성경이다.나는 고린도전서 시리즈를 마치고 났을 때, 그 내용이 오늘날 교회와 얼마나 관련이 깊은지를 돌아보며 새삼 놀라게 되었다. 그토록 상관성이 깊은 주제 중에는 예상한 내용도 있었다. 가령 교회의 분열이나 성적 순결성 또는 신앙의 존속을 위한 부활의 필연성 등이 그에 속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주제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11장에서 여자의 머리에 덮는 수건을 언급할 때 거론되는) 성 정체성의 문제가 그러했다. 내가 있는 이라크에서는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오는 여성에게 지금도 머리를 가리도록 허용하고 있다.어떤 주제는 내가 있는 지역에서 특별한 관련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 교회는 쿠르디스탄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란과 시리아 그리고 터키에 의해 둘러싸인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바울의 과거사, 즉 이 편지의 저자가 원래는 테러리스트였다는 설명을 하자, 청중은 그 내용을 더욱 주의 깊게 듣게 되었다.이외에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왜냐하면 바울은 결국 인간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우리는 인간으로서 당시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을 삶 가운데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문제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든 적용될 수 있는 주제다.물론 우리는 고린도만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양극화된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다. 실제로 고린도와 같은 도시를 본 적도 없다. 또한 오늘날도 여러 가지 성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1세기 고린도 교회만 직면했던 문제도 있으므로 그 특수성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2.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세속적인 분열을 예방하기 위한 지침을 풍부하게 제시한다고린도전서의 주제는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변화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목사로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떤 종류의 교회를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를테면 복음 중심적이고 십자가 진리를 붙드는 공동체, 즉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공동체를 원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멤버가 진실한 세례 교인으로서 거룩한 생활을 요구하는 언약 관계를 반영하고, 복음의 은혜 가운데 서로를 돌보며 장로들의 리더십에 기쁨으로 순종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체를 원할 것이다.물론 나도 그와 같은 교회를 원한다.그렇다면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면 교회가 그렇게 변화되겠는가? 글쎄, 반드시 그렇게 변화되지 않을 수는 있다.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위한 기초를 놓을 수는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는 교회를 갈라놓는 여러 문제에 대해 정면 공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세속적인 분열을 예방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침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또한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 가운데 퍼져 나가는 정욕적이고 육감적인 성격의 죄악을 멀리하도록 권고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으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3. 고린도전서는 성경적 교리와 목회적 정서 모든 면에서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고린도전서는 건강한 교회를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가령 1장에서 우리는 성경적 회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울의 뚜렷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또한 5장에서는 권징의 원리를 확인할 수 있고, 14장에서는 교회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모습이 어떠한지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전체에 걸쳐서는 교회 멤버십의 필요성과 실제성에 대해 배울 수 있다.나아가 우리는 그토록 까다롭고, 죄악 되며, 다투기 좋아하는 공동체를 바울이 어떻게 사랑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이는 성경적 제자훈련의 정신을 보여 주는 모델이 된다.나는 바울이 그 문제 많던 성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살펴보기 좋아한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를 표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날까지 예수님이 그들을 흠 없는 모습으로 보전하시리라고 이야기한다. 흠 없는 모습으로? 그렇다. 바울은 그 죄인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라고 언급하며 편지의 서두를 연다(고전 1:2). 거룩한 성도 말이다.그러다가 편지의 본론에 가서 고린도 교인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을 거론한다. 그들은 잘난 체하며 불화를 일으켰고, 서로를 법정으로 데려가려 했으며, 음란한 행위를 벗어던지지도 못했다. 게다가 교리적인 이해도 느슨했고, 도덕적인 행동거지도 해이했다. 나아가 사랑의 정신은 없으면서 사소한 신학적인 문제에만 매달렸다. 또한 기꺼이 이혼을 용납하고, 성찬 자리에서는 곧잘 술에 취했다. 그리고 파벌과 다툼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바울의 사도성도 인정하지 않았다.이 모든 사실을 감안한다면, 편지의 결말에 이르러 바울이 이러한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난 이제 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노라!”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4). 바울은 복음의 은혜 가운데 그 문제 많던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했던 것이다.이처럼 고린도 지역에 있던 교회는 실제적인 문제를 안고 있던 실제적인 교회였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청중이 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편지에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여러 가지 교리적인 내용을 그로부터 들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바울이 보여 준 사랑으로 당신이 교회를 사랑하며 양육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듣고 배울 필요가 있다.4. 고린도전서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한다당신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저 사람들만 내보낼 수 있으면, 더 좋은 교회를 이룰 수 있을 텐데.’하지만 바울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해 준다. 또 성경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혹 교회가 엉망진창이더라도 교회의 가능성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준다.바울은 교회에 대해 장기적인 비전을 품었다. 당신도 쉴 새 없이 재현되는 당치도 않은 모든 문제를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진전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도구가 교회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나라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인내와 자비와 긍휼과 관용의 자세가 필요한데, 바울은 바로 그러한 자세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서 역사하여 빌립보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신앙의 완성에 이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빌 1:6). 다시 말해, 교회를 구성하는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신뢰했다.이와 같이 바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모델이 된다.원제: 4 Reasons You Should Preach through 1 Corinthians출처: www.9marks.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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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성격적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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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여, 상상의 문을 열어라
by Abraham Cho
2021-04-21
“제가 주문을 걸려고 하는 것 같습니까? 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릴 적 듣던 동화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주문은 마법을 걸 때도 쓰지만 깨뜨릴 때도 쓰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사악한 마법에서 깨어나려면, 여러분과 저에게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 필요합니다.” ( C. S. 루이스, ‘영광의 무게’)나는 수시로 자문해 왔다. ‘설교 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설교는 정말로 어떤 행위를 말하는 걸까? 교리를 가르쳐 생각을 변화시키는 행위일까? 아니면 영감을 끼쳐 새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행위? 그도 아니면 도덕적 교훈을 들려줘서 의지를 강화하는 행위?’이런 질문과 함께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치 고속도로에 세워진 이정표를 쌩쌩 지나가듯, 매주일 설교도 그렇게 해 나갔다. 그러다 이러한 물음에 다다랐다. ‘설교란 그 모든 행위를 넘어선 작업이 아닐까? 어느 한 가지 행위에 제한되지 않으면서 그 모든 행위를 수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그러나 뚜렷한 답변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매듭이 풀린 실처럼, 정리되지 않은 물음으로 마음 한편에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가지 상황을 통해 나는 그 실을 의미 있게 매듭지을 수 있는 놀라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흥미롭게도 각각의 상황에서 얻은 통찰은 모두 상상과 관련되어 있었다.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치다첫 번째 통찰은 C. S. 루이스가 1956년 11월 18일자 ‘뉴욕타임스’ 서평란에 기고한 글을 우연히 읽다 얻게 되었다. 당시는 루이스의 기념비적 작품인 ‘나니아 연대기’의 최종편, ‘마지막 전투’가 막 출판된 해였다. 그가 기고한 아티클의 제목은 ‘가끔은 우리가 들어야 할 진리를 동화가 가장 잘 말해 주기도 한다’였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이 왜 동화를 쓰는지 설명했다. 그중 눈에 띄는 대목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동화란 내가 말해야 할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양식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동화를 쓴다. [중략] 어린 시절 내가 품고 있던 신앙을 마비시킨 어떤 금기 사항 따위를 몰래 비켜 갈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실제로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려웠던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주된 이유는 바로 무엇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데 있다. 무엇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당위는 느낌 자체를 얼어붙게 만든다. [중략] 그 모든 당위를 상상의 세계 속에다 던져 버리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뒤덮인 성전과 주일학교 울타리를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그러한 느낌을 생생히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루이스가 보기에는, 상상을 통해서야 기독교 신앙을 억압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든 금기 사항, 다시 말해 '우리를 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칠' 수 있게 된다. 훈계조의 설교를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기는 청중의 마음속엔 파수병이 세워져 있다. 그 파수병의 감시를 피해 갈 수 있는 게 바로 상상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감시하는 용을 지나치고 난 다음 희미해진 진리를 '생생히 되살리기' 위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이러한 루이스의 발상이 옳다면, 어린 시절의 신앙을 잃어버린 청중을 일깨우기 위해 그들의 상상에 호소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지닌 논변이나 정서적으로 깊은 영감을 끼치는 강연이라 할지라도, 용을 정면으로 공격하다가 끔찍한 결과만 초래하곤 한다. 그러나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용을 몰래 지나치게 도와준다. 이러한 발상이 흥미로워 나는 그 통찰을 마음에 잘 담아 두었다.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다두 번째 통찰은 몇 주 후에 찾아왔다. 바로 데이비드 존 실(David John Seel)이 이성은 세계관 ‘안에서’(within) 작동하지만 상상은 세계관 ‘사이에서’(between) 작동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접했을 때였다. 이는 논리가 내적 일관성을 확립하고 그 일관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지만, 그 구성이 얼마나 촘촘하든 사실상 논리 자체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한 가지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이동시키지는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즉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상상은 그렇게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통찰을 제공했다.이러한 통찰이 설교에 끼치는 영향은,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 곧 논변으로는 누군가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데서 드러난다. 우리가 전하는 설교를 통해 비신자가 경험해야 할 일이란, 다름 아닌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에 드리워진 커튼이 잠시라도 걷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보게 되는 일이다.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 들어가 잠깐이라도 그러한 관점을 통해 세상을 살펴보며 그 렌즈가 과연 자신에게 잘 맞는지 확인해 보고, 나아가 그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이 정말 어떠한 세상으로 변화될지를 가늠해 봐야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비신자에게 상상이 일어나야 결국에는 팀 켈러(Tim Keller)가 자주 말하듯, “그 말이 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진리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네요”라고 스스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상상은 한 가지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청중을 이동시킨다.캄캄한 마음속으로 여행하다세 번째 통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찾아왔다. 그 통찰은 평온히 책을 읽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처받기 쉬운 상담 시간에 주어졌다. 당시 나는 수년 간 앓고 있던 우울증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어느 상담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그런데 상담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목사님은 지나온 길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또 그 경험이 현재 자신의 감정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훌륭하고 건강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치유란, 좌뇌의 활동이 아니라 우뇌의 활동에서 일어납니다. 치유는 목사님이 느끼는 감정에 관한 추론이나 지난날 경험한 일에 대한 분석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그 모든 생각이 때로는 치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상처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바로 그 상처를 느끼고 상상하며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때 목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새롭게 일어났는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으로 인해 실제로 모든 게 바뀌었기 때문입니다.”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날 나머지 상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로는 설교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주어진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상처 입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자신을 감시하는 용과 세상의 단편적인 세계관, 그리고 상처 입은 영혼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바로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맞닥뜨리게 하는, 그리하여 인생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상상의 세계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상상은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의 감각적인 경험 세계 속에서 볼 수 있게끔 도와준다. 즉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마법에 걸린 문을 발견하다이러한 통찰 중 그 무엇도 서두에서 언급한 설교 행위에 관한 개념을 평가 절하하지 않는다.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며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청중의 정서에 깊은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복음으로 새로워진 인생에 거룩한 의지를 고양시키는 설교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 정, 의, 이 세 가지 요소가 자리하고 있는 모든 방과 연결된 홀은, 오랫동안 잊혀지고 감추어진 문, 다시 말해 마법에 걸린 상상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마법에서 깨어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무심결에 설교 역시 마법에서 깨어난, 상상이 결여된 행위처럼 여겨 왔을지 모른다.보다 덜 알려진 또 다른 에세이에서 루이스는 상상이 우리의 인식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좀 더 심도 깊게 다루었는데, 거기서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보기에, 이성이 진리의 타고난 기관(the natural organ of truth)이라면, 상상은 의미의 기관(the organ of meaning)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새로운 메타포를 낳거나 옛것을 되살아나게 하는 상상은 진리의 원인은 아니지만 그 조건이 된다.”상상이 진리의 조건이 되는 이유는, 상상이 진리를 생산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개념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살고 죽으신 후 다시 사셨다는 진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살고 죽으신 후 다시 사셨다는 진리가 자리한다.바로 이 진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진리다(벧전 1:12).원제: Stir the Imagination, One Sermon at a Tim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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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루이스
영광의무게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를 위한 격려
by Stephen Witmer
2021-04-16
필자의 부친은 메인(Maine)주의 시골 지역에서 삼십 년 간 목회했다. 그 대부분 기간 동안 아버지는 각각 다른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 세 개의 교구에서 목회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전혀 인지도가 없는 곳에서의 목회가 주는 기쁨과 희생이 무엇인지 경험하며 자랐다. 아버지께 듣기로, 몹시도 춥던 어느 겨울 주일 아침, 섬기던 교회 예배에 나이 지긋한 여자분 두 명만 참석했다고 한다. 예정대로 예배를 진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버지가 물었을 때 그분들은 예배를 드리자고 했고, 아버지는 설교를 하고, 찬송과 기도를 인도했으며, 다같이 헌금도 했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셨다. 이후 계속하여 나는 우리가 살았던 작은 마을에서 목회의 기쁨과 산고를 직접적으로 맛보았고,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온 시골 교회 목회자들을 만나보는 특권을 누렸다. 내가 만난 많은 시골 교회 목사들은 모두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비전, 에너지, 열정, 그리고 능력이 있다. 다른 모든 목회자들처럼, 그들 역시 격려가 필요하다. 작은 마을에서의 목회는 힘들다. 사람들이 그다지 감사하는 것 같지도 않고, 소위 더 넓은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격려가 필요한 곳이다. 마가복음 6장 1–6절을 보면 고향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전 세계의 작은 마을과 시골 지역에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역자들을 위한 강력한 격려가 이 짧은 본문에 적어도 세 번 등장한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을 사랑하신다나사렛은 인구가 200명에서 400명 정도에 이르던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9마일 정도 떨어진 더 크고 부유한 마을이었던 가나 출신인 제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을 무시했다(요 1:46; 21:2). 하지만 마가의 묘사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결코 나사렛을 무시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나사렛에 가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도 데리고 가셨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자 하는 완벽한 사역 계획도 있었다. 어디든 갈 수 있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작은 마을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오늘날의 “도시의 한복판을 취하라” 식의 접근법이 아니다. 사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결코 자신이 작은 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레이 오트룬드(Ray Ortlund)의 지적처럼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그 작은 마을 나사렛 출신임을 말씀하셨다(행 22:8).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 6장이 나사렛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이 일탈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나사렛에 대해 특별히 호의를 보이신 것이 아니었다. 나사렛에서 그가 시간을 보내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은 크든 작든 상관 없이 모든 곳을 똑같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6절은 예수님은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라고 말한다. 뒷부분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사역하셨다고 기록한다(막 6:56). ‘마을’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 ‘밭’으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그리 보면 예수님은 심지어 사람들이 일하던 밭으로도 찾아가셨다는 의미다.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이 그런 곳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당신이 사역하는 곳 역시 그가 알고 계시며, 당신이 그 마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 곳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곳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을 초청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알고 계신다예수님은 낙심한 모든 작은 마을 목회자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아주 소상히 알고 계신다. 예수님 자신 역시 어려운 작은 마을 사역을 감당하셨다. 나사렛에서의 사역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교회 지하에서 원탁을 중심으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목회에서의 어려움들을 함께 나누고 있는 한 무리의 목회자들을 한 번 상상해 본다. 예수님도 바로 거기에 계신다. 예수님은 “그래, 나도 나사렛에서 멋진 사역을 할 수 없었단다. 대부분이 나를 거절했지. 아주 ‘척박한’ 땅이었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마주하셨던 문제는 모든 작은 마을 사역에 있어 공통된 문제였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를 너무도 잘 안다는 것이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그들 가운데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에 대해 불편해 했다. 미국에서 소위 기독교왕국(Christendom) 이후 등장한 도시들처럼 진보적이지 않은 시골 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문화들이 여전히 주류를 형성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겉치장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뿐 깊은 내면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곳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교회 출석, 전통 가치, 문화적 기독교 같은 것들이지 예수님의 권능과 임재가 아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남부에 있는 어떤 작은 마을에서 역동적인 교회를 개척했는데 전통적인 지역 교회들의 저항을 받았다. 어떤 가난한 시골 지역에서 학령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다른 친구 한 명은 내게 말하길 그 지역의 비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지만 자기 사역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지역 ‘교회들’이라고 했다. 기독교 전통의 문화적 유산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작은 마을에서 역동적이고도 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경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사렛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은 마을에서의 삶에 있어 바로 그러한 국면들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마을 구성원 사이의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는 외부인을 적대시하는 죄를 조장한다. 지금껏 지켜온 전통을 지키고 현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습성은 변화와 적응을 기피하게 만든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과당 경쟁과 혁신 일변도의 삶을 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역설적이게도 그저 그런 평범함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현상을 초래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은 마을의 그러한 면들이 그곳에서의 우리의 사역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알고 계신다. 그 자신이 그것들을 경험하셨다.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은 당신이 겪는 어려움들을 이해하신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에서도 사람들을 구원하신다예수님의 작은 마을 사역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도 한다. 이 본문에 숨겨진 작지만 위대한 격려는 예수님이 그의 고향 사람들 중에서 믿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이다. 이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네 형제들 중 두 명이 훗날 신약 서신의 저자들이 될 것이었다. 유다와 야고보는 예수님을 형으로 두고 자랐고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자기들의 형이 아니라 그들의 주요, 그리스도요, 주인이심을 깨닫게 되었다(유 1; 약 1:1). 예수님은 작은 마을에서도 그를 따르는 자를 찾으신다. 그 자신이 몸소 그런 곳에 가셨고 제자들 역시 그런 곳에 보내심으로써 이를 보이셨다(마 10:11; 눅 9:6).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바울은 회심한 후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행 26:20)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더베 뿐 아니라 그 근방으로도 가서 복음을 전했다(행 14:6–7).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이 '당신’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그가 당신이 섬기는 그 작은 공동체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웃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찾고 계신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들을 사랑하신다. 그런 곳에서의 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지만 그 자신이 그런 곳에 가시고 그를 따르는 자들 역시 그곳에 보내신다. 담대하라. 당신의 사역지에 그가 구원코자 하는 이들이 있다(행 18:10). 그들을 구하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라. 원제: Small-Town Savior: For Discouraged Pastors in Forgotten Places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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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마을
사랑
구원
격려
나사렛
오트룬드
어려움
설교에서 유머를 사용해도 될까
by Jeff Robinson
2021-04-13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이 사역하던 시대에는 설교와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복음주의자들, 특히 개혁주의적 성향이 있는 이들은 유머 감각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펄전은 자서전에서 제12계명이 있었다면 “주일에는 어두운 표정을 짓지 말지니라”였을 거라고 재치있게 말했다. 스펄전은 유머와 거리가 먼 경향에 저항했다. 그는 위트가 넘치는 이였고 설교에서 유머를 사용했다. 위대한 스펄전은 복음에 대해서는 극도로 진지한 태도를 취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펄전은 설교에 관해 “삼십 분 내내 사람들을 졸게 하느니 차라리 잠시 웃기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스펄전이 설교 중에 했던 어떤 익살맞은 유머에 대해 교인 중 한 명이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할 수 있는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았지만 그것 하나만 한 겁니다. 사실 이의를 제기하실 게 아니라, 이렇게나 많이 절제한 저를 칭찬해주셔야 해요. 자제하지 않으면, 저는 정말 웃기거든요.”스펄전이 유머를 무턱대고 쓴 것일까? 하나님에 관한 깊은 진리를 다룰 때 지나치게 히히덕거리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톰 네틀스(Tom Nettles)가 쓴 전기를 보면 설교자의 황제(Prince of Preachers)라 불리는 스펄전은 유머를 복음이라는 낚시 바늘에 다는 일종의 미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톰 네틀스는 이렇게 썼다.“비록 그의 유머가 저속하다 생각한 이들도 있었지만, 스펄전은 설교 곳곳에서 유머를 사용하는 것은 물고기를 유인하는 '미끼' 같은 것이라 믿었다. 스펄전은 당시 설교자들이 '지루하고 단조롭고 길기만 하고 뭔가 불쾌한 표정으로' 설교를 하기 때문에 회중석이 그렇게 텅 빈 것이라 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스펄전을 따라 해야 할까? 설교를 듣는 이들이 마음 편히 웃을 수 있게 하는 유머를 써도 되는 걸까? 필자의 생각에는 강단에서의 유머 사용에 관한 한 스펄전에게는 매우 균형 잡힌 관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원칙은 “당신의 성향에 맞다면 유머를 사용하라. 하지만 유머가 복음 진리로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빼앗거나 복음 진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였다. 스펄전의 아내인 수지 스펄전(Susie Spurgeon)은 강단에서의 유머 사용에 관한 남편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아주 명확하게 묘사했다. “남편은 유머를 지나치게 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유머 사용을 일부러 피하지도 않았어요.” 내 자녀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나는 유머 감각이 출중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웃는 것이 좋고 진지한 사람들이 적절하게 유머를 사용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나는 적절하게만 사용하면 유머는 설교를 더 호소력 있게 만들 수 있다는 데 대해 스펄전과 생각이 같다. 그의 관점대로, 내가 내 설교에서 유머를 사용함에 있어 도움을 얻었던 가이드라인 네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1. 당신의 성향에 자연스럽게 맞을 때에만 유머를 사용하라안 좋은 예를 먼저 들자면, 뼛속까지 진지함으로 가득한 어떤 설교자가 설교 중에 자기 아내에 대해 농담을 했다고 한다. 시시한 유머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에 대한 아주 고약한 농담이 되고 말았다. 회중석에는 적막만 흘렀고 그 설교자는 망신을 당했다. 내가 그 설교자였다면 엄청난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의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를 보면 그가 유머에 대해 ‘결코’ 반대하는 입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쓴다. “유머는 자연스러운 경우에만 설교에서 허용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저 웃기려고 애쓰는 이는 가증한 사람이며 결코 설교자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 회중의 환심을 사려고 주도면밀하게 유머를 쓰는 이들도 마찬가지다.”자신의 성향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유머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현대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예는 넘쳐난다. 스코틀랜드 억양이 그의 유머를 한껏 고양시켜주는 알리스테어 벡(Alistair Begg)이 있고, 맷 챈들러(Matt Chandler), 케빈 드영(Kevin DeYoung), 러셀 모어(Russell Moore), 트립 리(Trip Lee), 그리고 고(故) R. C. 스프로울(R. C. Sproul) 박사 같은 이들이 그 예다. 2. 유머는 절제하며 사용하라성경에도 유머가 나온다. 잠언은 현명하지 못한 아내의 어리석음을 재미있게 그려낸다. 또 솔로몬은 무기력에 빠진 이들에게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도 자신만의 풍자를 사용하셔서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에게 이르시기를 다른 이들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빼라 명하신다(마 7:1–5). 성경 안에서 사용된 유머의 예는 더 있을 것이다.하지만 성경은 유머를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진지함을 요구한다. 우리가 하는 설교 역시 이를 반영해야 마땅하다. 3. 유머를 무턱대고 쓰지 말라내가 설교 사역을 시작하던 때 경험 많은 한 목사가 조언을 하길 유머 모음집을 하나 사서 웃긴 일화나 이야기들을 최대한 많이 머리에 넣어두라고 했다. “매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농담을 몇 개 던지면 회중들이 워밍업이 되는 거라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거지.” 감사하게도 나는 에이드리언 로저스(Adrian Rogers)나 우리 가족이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성장했기에, 그 경험 많다던 목사의 말을 흘려들을 수 있었다. 유머는 우리의 설교 전달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지 설교 자체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허튼소리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유머 감각이 있었던 로이드존스나 천성적으로 아주 쾌활했던 스펄전 역시 설교자는 그저 웃기는 것 자체를 위해 웃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 했다. 강단에서의 유머는 천박해져서는 안 된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종은 적용점 없이 진부한 농담이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던지며 회중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연예인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략] 성경 배우는 일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과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히히덕거리며 웃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로이드존스 역시 지혜로운 조언을 준다.“설교에서 절대 유머를 쓰면 안 된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설교 사역의 위상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가르치는 진리의 성격 때문에, 유머 사용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4. 유머가 하나님의 말씀의 중대함으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잘 쓰면, 유머는 회중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틈을 줄 뿐 아니라, 특히 그 유머가 우리 일상 생활에 적용이 될 때는, 진리를 깨닫도록 빛을 비춰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유머는 주의해서 다루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옥에 대해 설교할 때 나는 결코 유머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설명할 때, 죄의 치명성에 대해 가르칠 때나 회개를 촉구할 때 역시 유머를 쓰지 않을 것이다. 지옥에 대해 설교하면서 농담을 연이어 던지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농담 때문에 회중은 주제의 엄숙함으로부터 주의를 빼앗겼고 결국 전체 설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죽음은 우스운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역시 웃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머는 항상 적절한 상황에서만 사용하고 그 표현에 있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풍자와 희화로이드존스는 사람들을 웃기는 설교자들이 비판받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유머 남용에 대한 위험 때문에 유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유머의 남용을 방지한답시고 설교가 지루하고 특색도 생명력도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잊되 우리의 대적이 우리를 노린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설교에서의 유머 사용은 결코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는 그의 진리에 대한 끓어넘치는 열정을 담아냈지만 그의 모든 설교가 항상 그런 식인 것은 아니었다. 스펄전은 교회사를 공부하며 하나님이, 예를 들자면, 마틴 루터(Martin Luther) 같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유머를 통해 어두움에 빛을 비추셨고 당시의 부조리를 풍자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웃음은 종종 어두움과 죄를 일격에 몰아내는 의의 정예 무기가 된다. … 눈물 만큼이나 웃음 속에도 거룩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 우리는 조롱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사탄에게 대항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인간 안에 있는 유머 감각에도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자 한다. 루터의 친구들이 내놓았던 유머로 가득한 풍자와 희화화는 오히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탄하고 무게 있는 논증들보다 더 독일인들의 눈을 열어주었고 사제직의 가증함을 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아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주권자이실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행복하신 분이시다. 그렇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웃을 줄 알고, 다가올 날들에 대해서도 웃는 우리들이 되도록 하자(잠 31:25).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Should We Use Humor in Our Preaching?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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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절제
로이드존스
위트
마틴루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
by 고상섭
2021-03-26
고난 주간이 다가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교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이 있지만, 이 땅의 고통과 악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에서 피터 버거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고통의 해결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모든 문화는 고통과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방법들을 구성원들에게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바로 성육신과 대속의 교리다.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 알베르 카뮈는 “죄 없는 하나님의 희생만이 무고한 이들에게 끝도 없이 쏟아지는 고문을 정당화 한다. 신이 당하는 비참한 시련만이 인간의 고뇌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신약 성경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상할 수 없는 위로들로 가득 차 있다. 절대자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쓴 잔을 경험했다는 것은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그분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 당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을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이라고 가르친다. 자기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을 받으셨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통곡과 눈물을 흘리시는 삶을 사셨다고 말한다. 거절과 배신, 가난과 학대, 낙심과 좌절,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극심한 고통, 그리고 죽음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경험하셨다. 또 십자가에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조차 감당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없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리셨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며 아버지와의 철저한 단절을 경험하셨다. 전능하신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스스로 자신의 힘을 버리고 약함과 어두움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목회자인 존 딕슨은 ‘하나님의 상처’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메시지를 들었던 어느 무슬림 남성은 “우주의 창조주가 자신이 지은 피조물의 세력에 굴복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군요”라고 말했다. 존 딕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무슬림 청년이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던 사실을 크리스천들은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하나님이 상처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신약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주요 종교 가운데 오로지 기독교만이 신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고 가르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악과 고통을 없애주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인간은 세상의 악과 고통이 왜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없는지는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보살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류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안겨 주시려고 더없이 깊은 고난에 스스로 몸을 던지셨다.” 이것은 고난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고난의 이유를 다 알려주신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어린아이와 부모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세 살짜리 아이는 부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안다면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아들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셨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무언가를 과연 아끼실까?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이라면 우리에게 더없이 유익하고 합당한 것들을 은혜로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사실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이미 넘치게 주셨다. 사랑으로 악을 정복하신 하나님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며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6)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면 어째서 이 땅에 가득한 고통과 어둠을 단번에 손보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세상에 있는 비극을 왜 멈추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택하기보다 직접 불의를 산산이 부수고 악을 끝내셨다면 어땠을까? 그 당시 모든 악을 없애주셨어도 계속 시간이 지나면서 악은 이어질 것이고, 지속적으로 악을 무너뜨리는 일을 계속 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악과 어둠은 대부분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악과 고통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손에 쥐고 오셨다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내셨다. 두 손에 칼을 쥐시는 대신 못박히셨다. 오랜 세월 동안 전해온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를 끝내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대신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께는 더 근본적인 회복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시려고 이 땅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악 앞에서도 무기력해지지 않고 과감히 맞서고 견디게 한다. 또한, 우리 마음에 도사린 악을 몰아내는 특별하고 강력한 능력을 가진 신인류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빛이 되신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소망 가운데 고난을 견디며, 마지막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는 소망의 사람들이 된다.
목회
설교
고난주간
알베르카뮈
팀켈러
고통에답하다
십자가
부활
성육신
대속교리
신뢰받지 못하는 리더십은 무너진다
by Matthew J. Hall
2021-03-15
재료 하나가 빠질 때 요리 전체를 다 망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것은 정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을 인도할 때, 신뢰가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신뢰야말로 리더십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면, 그것은 당신을 향한 사람들의 신뢰를 잘 관리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학생은 선생을 믿고 싶어한다. 부부라면 서로를 믿기 원한다. 교인은 담임목사를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종업원은 그들의 관리자를 믿고 싶어한다. 신뢰가 실종될 때, 따르는 자들은 사라진다.나 역시 리더로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나의 역량을 신뢰하길 바란다. 그들이 나의 판단력을 믿기를 바라고, 또 다가올 도전과 기회를 잘 예측해서 우리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혁신적인 역량을 가진 리더로 나를 신뢰하길 바란다. 나는 아내와 자녀들로부터도 그런 신뢰를 받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 역량은 인격에 대한 신뢰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한순간에 완전히 허물어질 수 있다. 만약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인격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된다면, 내가 어떤 역량을 가졌는가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뢰를 쌓고 또 강화할 수 있을까? 네 가지 실질적인 방법이 있다. 1. 진실을 말하라언제나 그래야 한다. 기독교인 리더십이라면,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얼마나 쉽게, 보이지 않게, 서서히, 거짓의 늪으로 빠질 수 있는지, 또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당연히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두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을 반만 말하면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어떤가? 만약에 함께 일하는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글쎄, 저 사람이 말하는 건 10퍼센트 정도만 믿어야해. 너도 알잖아? 저 사람 얼마나 과장이 심한지.” 집, 직장 또는 교회 어디에 있든지 당신이 이끄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신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드러난 하나님은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2. ‘미안하다’고 말하라당신이 리더라면 ‘미안하다’라는 말에 익숙해져야 한다. 당신은 이 말을 자주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 편에서, 판단 실수를 할 수 있다. 플랜 A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틀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화나게 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다르지만, 당신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당신의 판단이 분명히 옳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해야만 하고 때로는 그들의 트라우마까지 자극해야 하는 경우다. 꼭 대단한 일 때문에 누구를 해고하거나 누구를 강등시키는 것은 아니다. 동료에게 또는 가족에게 또는 교회 지체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사과할 일이다. 나 자신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야 한다.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옳을 때,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물론 어떤 리더에게 있어서 “미안하다”라는 말이 가장 힘든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말 자체를 하지 않는 리더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그런 리더라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 말을 빨리 그리고 겸손하게 하는 법을 배워라. 그렇게 할 때, 장기적으로 리더로서 당신의 영혼에 도움이 될 것이다. 3. 실패를 잊지 말고 성공을 나누라혹시나 무엇인가 잘 되면 다 자기가 잘 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또 뭔가가 잘못되는 경우에는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리더를 본 적이 있는가? 왜 매출이 늘었을까? 물론, 리더 때문이다. 왜 매출이 줄었을까? 그것은 절대로 리더 때문이 아니다. 이런 리더는 분명 마케팅 부서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유형의 리더는 세상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세상적인 나르시시즘은 너무도 쉽게 기독교인 리더와 기독교 단체를 오염시킨다. 잘 인도하다는 것은 비난을 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당신이 중요한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비록 당신의 결정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의 책임 하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 리더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리더가 그렇게 할 때, 신뢰가 쌓인다. 충성심은 깊어진다. 그러나 리더가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할 때, 얼마나 빨리 직원들이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내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 원칙은 집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인도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4. 책임감과 독점욕의 차이를 배우라이것은 미묘하지만 아주 위험한 차이다.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신뢰하게 하는 데 아주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인도한다는 것은 어떤 목표, 전략, 그리고 사람 등에 관해서 당신이 일종의 무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그것은 종종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종종 너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잔소리하지 않고, 대신 전체 그림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리더라면 맡은 책임과 관련해서 결코 이런 식의 한가한 소리를 할 수는 없다. “그런 건 신경 안 써.” 왜냐하면 리더는 책임지는 자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책임감과 독점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라는 주어를 사용해서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 특히 당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의 사람 또는 당신의 팀'이 아니다. (그들이 믿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가진 권위와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굴복할 때 누리는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이 더욱 충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훨씬 덜 자기 방어적인 리더가 될 수 있고 또한 아주 작은 일에는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비판받을 때, 독점욕이 강한 리더일수록 자기 방어에 빠져 상대를 공격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는 경우에 독점욕이 강한 리더는 그것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팀원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독점욕이 강한 리더는 그것을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중심적 독점욕이 강한 리더보다 리더를 향한 신뢰를 더 쉽게 깨부수는 것도 없다. 수단으로서의 신뢰신뢰는 정말로 효과적인 리더십의 통화 수단(currency)이다. 그것이 없이는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없다.신뢰가 조직 내 새로운 리더에게 부여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뿐이다. 궁극적으로 리더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신뢰를 쌓는 데는 수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리더로서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당신의 한계와 약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리더로 살다보면 사람들의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 구주는 불완전한 리더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구주에게 완전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쓰러져도 구주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로 좋은 소식이다. 원제: The Non-Negotiable Virtue in Leader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인격
신뢰
진실
책임
미덕
역량
복음중심성은 강단에서 드러난다
by Yancey Arrington
2021-03-13
많은 개척 교회들이 '복음중심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좋은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말이 정확히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교회 개척자가 매 설교마다 예수님을 언급해야 한다는 말인가? 예배마다 구원으로의 초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우리는 던져야 한다. 개척된 교회가 얼마나 복음중심적인지 '테스트' 해보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강단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가 홈페이지에 '복음중심적'이라는 말을 자주 썼더라도, 그 교회가 복음의 중심성을 진정한 가치로 여기는지, 아니면 그저 유행을 따르는 것인지는 주일에 그 교회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왕이 승리하셨다복음중심 설교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다음 예화를 보라.침략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성을 나서는 왕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왕이 패하면 그는 자신의 참모들을 성으로 돌려보내 안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뿐 아니라 참모들은 성 안의 백성들에게 “적군이 진격해오고 있소. 저격수들은 이쪽으로, 전차들은 저쪽으로 배치하시오”라고 말하며 새 전략과 기술을 안내해 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로지 백성들을 준비시켜 적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다. 백성들은 이제 전쟁의 승패가 자신들의 어깨에 달렸음을 직감하고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만일 왕이 적들을 제압한다면, 그는 사자들을 보내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들은 “왕이 적들을 무찔렀소! 우리 주군께서 백성들에게 선사하시는 평강과 복을 누리시오!”라고 외치며 성 안의 광장으로 달려 들어갈 것이다. 이 기쁨의 선언에 백성들은 그들의 일상에서 자유를 다시 만끽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의 왕을 향해서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중심적 교회란, 이를테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사역으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쟁취하셨다는 사실을 설교, 목회, 선교에서 힘써 강조하는 교회를 말한다. 진실로 왕이 승리하신 것이다. ‘훌륭한 충고’ 와 같은 설교이런 식의 접근이 설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먼저 큰 그림을 그려보자면, 전형적인 요즘 교회는 자기 설교가 실제 삶과 '연관성'이 있고 '실용적'이라고 홍보한다. 많은 교회 홈페이지에는 “우리 교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성경적 원리를 통해 여러분의 매일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켜 주는지 오셔서 확인하세요”와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다. 이에 더해, 소위 교회 성장 '전문가'들은 교회를 개척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해야 많은 교인들을 유입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이제 막 시작한 개척 교회가 역동적으로 자랄 수 있는 탄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 결과, 회중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재정, 가정, 결혼 등에 관한 주제 설교의 불균형적인 반복뿐이다. 너무도 자주, 그런 설교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적용에 오히려 더 초점을 맞춘다. 요약하자면, 사람들이 얻어가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일련의 '괜찮은' 충고 정도라 하겠다. 사실, 그 적용이라는 것은 최신 자기 계발서나 토크쇼 출연자들이 하는 말들로부터 건질 수 있는 것들과 거의 흡사하다. 그런 설교가 바라는 바는 사람들이 실제적인 '할 일'을 깨알같이 적은 설교 노트를 가지고 교회를 나서서 그것들을 가정, 직장, 학교, 그리고 삶의 기타 국면에서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설교들이 성경을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충고'와 같은 설교를 하는 이들이 설교 결론부에 예수님을 슬쩍 끼워넣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도문을 따라하거나, 강대상 앞으로 나오거나, 방문카드를 작성하거나 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식의 설교 전략은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에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출석한 이들이 설교가 아주 통찰력 있고 실용적이라고 칭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설교 내용이 교인들의 관심사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들은 인생에서 '성공'을 원하기에 그 성공을 쟁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조언이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설교의 잠재적인 문제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훌륭한 충고식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성경의 초점을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예수님이 성경의 전체요 본질이 아닌 성경 이야기의 ‘일부’로 전락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이런 종류의 설교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에는 예수님이 필요하지만 그 외의 영적 성숙은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자기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훌륭한 충고식 설교는, 듣는 이들을 은혜가 아닌 율법에 뿌리 내리게 하기 때문에 얼마나 선한 의도로 했는가에 상관 없이 실상 복음으로부터 분리된 설교다.그런 설교들이 문제가 있는 이유는, 진정한 복음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나의 성장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성장을 강화하고 유지시키기까지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문 같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들어가 살아가는 방 자체다. 복음중심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이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사역과 성령의 신실한 권능에 의해 시작되고 뿌리를 내리는 것임을 늘 반복해서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설교바울은 “훌륭한 충고”식 설교에 대해 뭐라 말할까?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의 사역과 설교를 세워간다. 예수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십자가에서의 그의 사역으로 곧장 나아간다. 다시 말해, 바울 역시 '실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가르쳤지만, 그는 그렇게 함에 있어 예수님이 또 하나의 좋은 인생 코치, 자기 계발 전문가, 문제 해결사, 혹은 성공에 관한 구루(guru)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다른 선택지가 없고 다른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중심적 교회들이 매일의 삶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다루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교회들은 행함(doing)을 의도적으로 존재(being)와 연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우리의 모든 행함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 즉 그 결정적인 “다 이루었다”(요 19:30)에서 흘러나온다는 뜻이다.그래서 복음중심적인 개척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에서는, 복음의 좋은 소식이 설교의 결론 뿐 아니라 본론 역시 규정한다. 궁극적으로 설교자는 자문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선포자이기 때문이다.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이들은 (단순히) 훌륭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복음을 깊이 이해하는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에 중심을 두는 설교를 행하는 교회다. 이러한 설교는 회중의 '행함'이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 위에 세워질 수 있게 한다. 원제: How Can You Tell if a Church Is Gospel-Centered? Start with the Pulpi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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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교회 지도자의 리더십 회복
by Don Carson
2021-03-02
넘어진 기독교 지도자들이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회복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회복의 조건은 무엇인가?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죄, 특히 성적인 죄에 빠져들고 그것이 백일하에 드러남에 따라 이 질문이 주는 긴급성이 심화되고 있다. 이 주제를 다룬 책들도 이미 많이 나왔기에, 필자의 이 짧은 글의 의도는 모든 관련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우리가 고려해야 할 중요한 바가 무엇인지 네 가지 면에 있어 제시해보고자 한다. 1. 구체적으로 질문하라우리가 던지는 질문 자체가 때로는 애매모호하거나 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기독교 지도자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질문하면 당연히 “무엇이 회복되는 걸 말하세요?”라는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성적인 죄라고 가정할 때, 회복이라는 것이 '가족 관계의 회복'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해당 배우자에게 달린 것이고, 그 배우자의 반응에 따라 우리가 고려해야 할 많은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주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렇다”이다. 그 성적인 죄악이 얼마나 비통한 것이든 상관없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니다. 하지만 주님과 관계를 회복했고, 출교에 해당하는 징계를 받았지만 이제는 교회 회원으로서의 지위도 회복되어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교회에서의 리더십까지 자동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정회원이라고 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이유로 누군가가 어떤 직분으로부터 제명되었다면, 그가 그 직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제 그 사람이 해당 직분에 대해 성경이 요구하는 자격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 여부로 귀결된다. 2. 그 직분에 대한 성경적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가그 사람이 그 직분에 대해 성경이 요구하는 자격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관련 문제가 있다. 좀 더 실제적인 교훈을 배우기 위해, 간음의 죄로 징계를 받은 이전 목회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목사는 회개했고, 교회 장로와 목회자들의 감독을 받기로 동의했으며, 박탈당했던 교회 회원 자격도 다시 회복했다. 이제 문제는 이 사람이 목회자의 직분을 다시 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생각해 볼 문제 두 가지는 아래와 같다. (가) 혹시 같은 죄를 다시 범할 위험은 없는가? 이에 답할 수 있으려면 그가 얼마나 깊이 회개했는지, 영적인 회복은 어느 정도인지, 그가 합의를 보았다면 그 합의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가 앞으로 어떠한 책무를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목회적 판단이 필요하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목회자를 포함하여 성적인 부분에서 죄를 범한 사람들이 다시 동일한 죄를 범할 확률은 지극히 높다. 장로들에게는 성적 범죄 경력이 있는 목사로부터 양 떼를 보호해야 할 윤리적 의무가 있는데, 미국처럼 소송이 빈번한 사회에서는 장로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의무를 실천한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죄를 범한 목회자가 같은 죄를 다시 범하지 않을 만큼의 도덕적 결단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목회적 결정을 내려야 할 의무도 있다. 성경적인 용어를 쓰자면, 장로들은 이 목회자가 이제 진실로 '절제'(딤전 3:2)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또한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딤전 3:4) 사람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가 간음함으로 감독, 즉 목회자가 되기에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 바로 이러한 영역들이기 때문이다. (나) 신자들 뿐 아니라 불신자들 사이에서도 그의 도덕적 죄가 그 목사의 신뢰성을 얼마나 망가뜨렸는가?3. 신뢰도 측정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만일 타락한 그 목회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간음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목회자의 지위를 회복시키지 않는 것은 장로들이나 교회가 사랑이 부족하고 용서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항변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본질을 흐리는 논리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공적인 신뢰성이다. 바울은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딤전 3:2)라 말하며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딤전 3:7)라 가르친다. “책망할 것이 없으며”라는 말은 죄를 짓지 않는 완벽성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될 자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책망하는' 도덕적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이 목회자가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어떤 교회는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묶여 있어, 그가 비통한 죄를 범했을지라도 그가 회개했다는 표시만 보여준다면 교회 안의 많은 이들이, 심지어 대다수가, 그가 계속 목회를 하도록 해준다. 하지만 외인들은 어찌 할 것인가? 외인들이 그 목회자의 간음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능글거리는 웃음을 지어도 괜찮은 일인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이 조롱을 받는 것은, 목사 자신이 간음의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교회가 자기 정욕도 주체하지 못하는 목사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아도 상관 없다고 말하기 떄문일지도 모른다. 이 목회자가 신뢰성을 심각하게 무너뜨렸기 때문에 그가 도덕이나 신뢰성에 관해서는 어떤 설교를 하건, 신자들이나 불신자들 할 것 없이 그의 설교를 결코 마음으로 받지 않고 듣는 척만 하게 될 수도 있다. 4. 어려운 질문을 던지라이 점에 비추어 봤을 때, 장로들은 이 넘어진 목회자가 개인적인 수준에서 잘 회복되고 있는지 뿐 아니라, 교회 및 외인들이 이제 그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해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전자의 영역에서 목회자가 잘 해내고 있다고 해도 후자의 영역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시점에 이르면, 한때 넘어졌다가 현재 회복되고 있는 이 목사가 다시 목회 리더십을 수행할 수 있는지는 그가 공적인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나는 이 부분에 있어, 공적 신뢰도 손상은 영구적이므로 타락한 목회자는 결코 다시 목회 리더십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강경론자들과는 생각을 달리 한다. 이 강경론자들의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자기 마음대로 정한 세 달 근신 후에 이제는 사역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했던 1980년대의 유명 사역자 지미 스웨거트(Jimmy Swaggart) 같은 경우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바닥에서부터 작은 일들을 다시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재기하는 것을 통해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건물 청소, 연로하신 분들을 위한 교회 주차 봉사, 또는 기도회 참석 등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어떤 구역 모임에 수년간 겸손하고 탁월한 자세로 참여하고 나면 종종 그 모임을 인도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신실한 집사 같은 이가 되고, 더 많은 시간이 가면 그의 신실한 가정 생활과 그의 깊은 성경 지식이 합쳐져 더욱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게 할 것이다. 이제 가끔씩은 설교를 하기 시작할 것이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자신감을 공적으로 회복하고 영적인 리더십을 수행할 수 있는 지위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목회직이 회복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암시되어 있다. 첫째, 타락 전에 가졌던 목회적 권위를 그대로 회복하지는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그 일을 완전히 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상당한 신뢰성을 회복했음을 모두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그의 타락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거나 가르칠 때면 사람들은 항상 그 목회자의 끔찍한 잘못을 기억해낼 것이다. 둘째, 타락 전에 유명했던 목사일수록 공적으로 완전히 회복되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넘어짐으로 인해 더욱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완전한 신뢰성 회복은 더욱 어렵기 마련이고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원제: Can a Fallen Christian Leader Ever Be Restor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목회
신뢰성
타락
회복
목사
회개
직분
권위
리더십
코로나 시대, 교회의 위기 대응법
by Ken Bohney • Mark Strand
2021-02-27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는 단지 교회의 권위와 리더십 문제를 뛰어넘어 복음주의 교회가 현재 당면한 도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강제적인 마스크 착용과 비대면 예배를 요구하는 국가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런 문제에 관한 최종 결정은 교회의 누가 해야하는 걸까?보통의 경우 복음주의 교회는 교단과 매우 느슨하게 연결된 상태에서 사실상 담임 목사 또는 소수의 리더들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형태를 가진다.2020년 3월 15일, 내가 시무하는 살렘복음주의자유교회(Salem Evangelical Free Church)는 코로나 전염병이 미국 중서부 북부 지역에 산불처럼 퍼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급하게 소집된 교역자와 직원 및 장로들 간의 긴급 회의에서, 당회는 코로나 사태가 주는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할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 가진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5인 COVID 대응팀을 구성했다.그날 이후, 목회자와 장로들이 함께 동역하는 대응팀의 리더십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찢어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대응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고 몇 가정은 갈등 속에 교회를 떠나기도 했지만, 대응팀은 교회 내 갈등을 최소화했다. 대응팀은 장로들의 감독하에 교회를 위한 결정을 내리고 지침을 제공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우리의 목적은 교회가 제자를 만드는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코로나 확산을 최대한 늦추는 데 필요한 확실한 행동 지침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위기를 만났을 때, 다양한 달란트와 영적 은사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팀을 만드는 것은 개인의 독단과 영웅주의를 막을 수 있다(롬 12:4-5).여기 우리가 코로나 위기를 맞아 대응한 몇 가지 방법과 더불어 그 과정에서 배운 교훈이 있다.1. 믿음과 과학을 기반으로 대화하라복음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소망이지만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정확하고 유용한 정보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생물학적 문제에 기반을 둔 전염병으로 인한 새로운 신앙 문제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함으로써 분열에 저항했다.대응팀은 감염자 숫자와 그로 인한 우리 교회의 위험 수준에 따라 3단계의 유행병 대응 방침을 만들었다. 추정컨대, 2021년 1월 현재, 코로나 발병 이전 교인의 75퍼센트가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중 절반은 대면 예배로 나머지 절반은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우리는 또한 재정적으로도 건강하게 한 해를 마쳤는데, 이는 2019년 재정이 좋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주 놀라운 일이다. 2. 정부 당국의 지침을 존중하라“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정부의 제한 조치에 반대하는 용도로 쓰는 교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 말씀에 근거해서 대응 방향을 잡기로 결정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3월 22일부터 6월 21일까지 우리는 대면 예배를 중단했다. 모든 교역자와 직원들은 재택근무를 했고 또 모든 사역은 온라인으로 진행하였다. 우리는 주 정부의 방침을 따라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고, 그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했다.강압적이지 않은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우리의 이런 결정과 그 이유를 최대한 확실하게 공지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누가 옳고 그른가의 의견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지도자를 존중하고, 전염병의 확산을 늦추기 위해 교회 가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을 수행하는 문제라고 인식했다. 반대 의견에 관해서도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은혜롭게 말하려고 주의를 기울였으며, 무엇보다 과학적 요소와 신앙적 요소 모두를 포함하는 진리로 전염병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높은 기준을 설정했을 때, 대부분의 교인은 교회의 가르침에 잘 따라주었다. 3. 자주 의사소통하라전염병이 시작되고 소셜 미디어에 관련한 정보가 넘쳐나면서 우리는 교회 가족에게도 신앙과 과학에 대한 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확신했다. 첫 번째 비대면 예배에서 우리는 온라인 커뮤니티, 전화 통화, 기도 요청 및 재정적 필요 충족에 대한 계획을 공유했다. 규칙이 변경될 때면, 우리는 다음 주일부터 달라질 것에 대해서 즉시 알려주었다. 비디오, 이메일, 전화 통화 및 웹 사이트를 활용한 의사소통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디오를 자주 사용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공감과 연민을 표현하는 데 비디오가 적절한 수단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 교회 모든 교역자들은 비디오 사용에 전문가가 되었다. 마스크 착용이 예민한 문제가 되었던 시절, 5월 13일 교회는 마스크 착용과 관련해 재미있고 유익한 비디오를 제작해서 공유하기도 했다.4. 공동체를 육성하라온라인 활동, 전화 통화 및 줌(zoom) 이벤트를 통해 최대한 서로 소통하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전염병이 거의 일 년이 되어가는 지금, 인간 관계라는 측면에서 우리 모두는 다 갈증을 느끼고 있다. 일부 소그룹은 아예 유명무실해졌다. 또 어떤 소그룹은 줌으로 하는 것에 지쳐갔다. 교회에 새로 등록한 가족은 기존 교인들과 어떻게 소통할지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자, 그럼 우리 교회는 잘 하고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코로나 이후 사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 힘든 시간 동안 우리 주님이 우리 교회를 하나로 지켜주고 계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그룹 공동체를 어떻게 건강하게 양육할지를 놓고 분투 중이다.더 광범위한 적용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사용한 접근 방식과 그로 인해 배운 교훈은 교회 리더십이 처한 도전이라는 문제에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 2020년 말과 올해 초에 미국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나 대통령 선거 불복종 등과 같은 전혀 다른 종류의 위기를 만나는 경우다. 또는 종말론이나 영적 은사와 같은 2차 또는 3차적 교리 문제와 관련된 도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교회 정치 문제 또는 어떤 성경을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모든 갈등은 교회 지도자들의 결단을 시험하고 연합을 위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와 도전에 상호 공감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또한 강력하고 통일된 리더십으로 교인들의 은사와 재능을 최대한 활용할 뿐 아니라 그들과 끊임없는 의사소통을 한다면, 교회는 그 어떤 도전에도 분열없이 대처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교회는 외형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분열되는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 8장 31절에서 한 말씀을 기억하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원제: Learning to Respond to Church Cris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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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문화 내러티브에 도전하라
by 고상섭
2021-02-25
“우리는 세속 문화의 내러티브들을 평가하면서 동시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그에 상응하는 성경 주제와 교리와 진리들을 제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팀 켈러, 설교, 155쪽) 팀 켈러는 세속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설교를 할 때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복음으로 나아가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라 말하며 그 중심에는 문화 내러티브를 평가하고 도전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문화 내러티브란, 성경의 진리와는 배치되지만 일반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공리를 말한다. 한번 더 생각하면, 모순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모순을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청중들이 모순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문화 내러티브의 분석은 설교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문화 내러티브를 평가하고 도전하기 위해 팀 켈러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권위 있는 사람들의 말을 활용해 논지에 힘을 실으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청중들이 신뢰하는 근거 자료를 통해 성경본문에서 얻은 가르침을 강화할 때 사람들은 더 설득력있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2021년 현대 사회를 이끄는 문화 내러티브는 어떤 것일까? 다양한 문화 내러티브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능력주의 사회’며, 그것의 한계를 다양한 책들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z) 교수의 ‘엘리트 세습’과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다. 이 두 책은 모두 오늘날 능력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 내러티브를 도전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내용이 많다. 1. 능력주의 문화 내러티브의 평가와 도전 현대 이전의 시대는 세습의 시대였다. 재산을 세습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부정이 일어났고 평등하지 못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불평등이 많이 해소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능력’이라는 것이 동일하게 세습되고 있음을 두 책은 지적하고 있다. 특히 세 가지 측면에서 양극화 현상을 낳았는데 교육과 직업과 정치 영역이다. 미국에서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사람들 중에 2/3는 소득 분포가 상위 5%의 가정 출신이다. 예전에는 교육을 통해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자주 거론되었지만 이제는 ‘금수저’, ‘흙수저’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능력이 세습이 되는 사회에서 교육을 통해 신분이 바뀌는 경우는 많지 않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돈을 자녀 교육에 투자함으로써 이제는 자녀에게 돈이 아니라 능력을 물려주는 엘리트 세습의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극대화 될 것이다. 또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세습된 능력으로 엘리트가 된 사람들은 자신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얻은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교만이 자리잡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소위 ‘갑질 사건’도 능력주의의 또 다른 면이며, 엘리트들이 능력으로 많은 것을 독식하기 때문에 중산층이 사라지고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가 더 두드러지는 사회현상을 낳게 된다. 이런 사회현상은 엘리트들에게는 무한 경쟁이 주는 압박으로 스스로 쉬지 못하는 올무가 되고, 또 중산층의 붕괴는 일반 서민들에게 엘리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불어넣어준다. 바로 이로부터 사회적 갈등과 계층 갈등의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정교육도 인격 함양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능력주의적인 입시와 취업용 교육으로 변하면서 자녀들이 인격이 아닌 능력주의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이로 인해 바른 인성교육을 받지 못한 사회적 엘리트를 양산하는 사회가 되고 그 경향은 나날이 더욱 비인격적으로 강화된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런 능력주의 사회의 모순과 어려움에 대해서 ‘신 없는 섭리론’ 이라고 말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모든 성취를 은혜의 결과가 아닌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엘리트주의가 만연할수록 더욱 불평등이 가속된다고 말한다. ‘엘리트 세습’과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라는 오늘날 현대 문화 내러티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해주지만, 그 대안은 명확하지 않다. 팀 켈러는 권위있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오늘날 문화 내러티브를 분석하기도 하지만 도전하기도 한다. 그 도전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잘못된 문화적 생각의 모순을 드러낸 후 복음이 능력주의 사회의 해답이 됨을 제시하는 것이다.2. 능력주의 사회를 향한 복음적 대안 첫째. 행위가 아닌 은혜의 복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능력주의가 가지는 가장 큰 착각은 ‘공정하다는 확신'이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 아닌 은혜의 결과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행한 것의 결과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만이 싹트고 다른 사람을 향한 멸시로 이어진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때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하게 되고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내어줄 수 있게 된다. 1-3세기 동안 초기 기독교는 심한 박해 가운데서도 크게 성장했는데 그 원동력이 바로 ‘은혜로 인한 구원 교리’에 있었다고 신약학자 래리 허타도(Larry Weir Hurtado)는 분석한다. 다른 종교는 제사의식이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대신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더 많은 성취라는 우상을 제거해야 한다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는 달라스 윌라드(Dallas Albert Willard)를 만났을 때, “내가 원하는 미래를 위해 나는 현재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그때 달라스 윌라드는 “당신의 삶의 급하고 바쁜 것을 가차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바쁨은 우리 시대 영적인 삶에서 가장 큰 적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오늘날 능력주의는 바쁘게 사는 것이 멋있는 삶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바쁜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으로 치명적인 질병 중의 하나다. ‘미친 듯이 바쁜’의 저자 케빈 드영(Kevin DeYoung)도 영적으로 퇴보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현상은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는 것이라 말했다. 능력주의라는 문화 내러티브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라는 트랙 위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는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영원한 것이 아닌 영원하지 않은 가치에 쏟아 부어야 한다. ‘영끌’(영혼을 끌어 모으는 것)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 시대의 능력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게으른 삶과 너무 바쁜 삶이라는 두 가지 오류를 벗어나는 균형있는 삶을 소개한다.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전 4:5~6) 전도서는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두 가지 극단을 피하라고 말한다. 첫째는, 두 팔을 사용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있는 우매자다. 우리는 능력주의 사회의 피말리는 경쟁을 피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둘째는, 두 손 가득 일하면서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것이다. 두 손 가득 일하며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남는 것은 헛되이 바람을 잡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 쉬지 못하고 두 손 가득 일하는지를 돌아보게 되면 결국 내 안에 있는 욕망과 결핍 때문이다. 복음이 주는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성취와 일이라는 외부적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손만 일하고 한 손은 쉬는 삶의 균형이다. 능력주의 사회를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크리스천인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일하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 그러나 능력주의 사회에서 엘리트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속에 직장과 가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복음이며, 은혜로 얻은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많은 노력을 행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은 존재들이다. 그 사랑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건강하고 균형있는 열심을 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우리는 일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균형있는 열심으로 살아가게 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하는 힘은 결핍이나 성취라는 목표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능력주의라는 트랙 위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달려가는 것을 멈추게 한다. 또한 게으른 삶으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살도록 하게 하지도 않는다. 양극단의 오류에서 벗어나 은혜로 인한 건강하고 균형있는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한다. 결국 복음만이 능력주의라는 문화 내러티브의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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