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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성범죄와 하나님의 심판
by Collin Hansen
2021-02-23
세계적인 기독교 변증가로서 작년에 타계한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생전에 다수의 성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고 최근 라비 재커라이어스 국제사역본부(RZIM)가 공식 발표했다. 이 글은 그와 관련한 주제를 다룬다. - 편집자주나는 라비 재커라이어스를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더 나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그를 사랑하게 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는 책과 강의를 통해서 수천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만들었고 또한 성경 저자를 신뢰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의 마음을 깨닫도록 돕는, 믿을만한 안내자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가 정말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방식으로 우리의 신뢰를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차마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자세하고 끔찍한 그에 관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쓴 수많은 인터넷 댓글들을 읽었다. 그토록 높은 프로필을 가진 복음주의 지도자가 이렇게 추잡한 형태로 수 년간의 학대 패턴을 지속하는 게 과연 가능한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재커라이어스를 위해서 사역한 많은 사람들은 특히 그를 더 신뢰했기에 그의 혐의가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모든 사실을 부인함으로 이미 끔찍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학대는 신뢰를 배반한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전형적인 성적 착취의 패턴이기에 그 자체로는 별로 놀랍지 않다. 성적 착취에는 단계가 있고, 각각의 단계를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그는 일단 취약한 사람들을 희생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사역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피해자를 위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가 사람들이 상상하는 성범죄자라는 괴물일 리가 없다는 확신을 세상에 심어주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전형적 성적 착취 패턴에 딱 맞는 인간이다.아무도 하나님의 정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2018년 봄, 처음으로 그에 관한 혐의가 제기된 후 그와 나눈 대화를 나는 기억한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그 세계적인 변증가를 협박한 것으로 알려진 어떤 고발자와 맺은 합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게 물어봤다.나는 그의 이야기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합의사항의 내용과 관계없이 조만간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희생자들을 자기 비하와 자해의 고통 속에서 침묵하도록 만든 돈과 권력의 방어벽이 무너지고 마침내 진실이 드러난 것은 결국 그의 죽음 이후였다. 재커라이어스는 결국 이 세상에서는 정의의 심판을 피했다. 그러나 다음 세계에서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심판날 그와 하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은 없다. 그가 과연 자신의 끔찍한 죄를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해 용서를 구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어떤 식으로든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와는 별개로 성적으로 부도덕한 자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고전 6:9-10).하나님 우리 모두를 도우소서.디지털 혁명우리는 진취적인 언론인과 용감한 피해자가 디지털 출판을 통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재커라이어스에 대해 듣고 싶어 하지 않은 사실을 세상에 밝힌 일부 언론인은 그로 인해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재정적 보복에 대한 위협이 너무나 자주 희생자와 조력자들의 입을 막았고 또한 정기 간행물이 그들의 이야기를 출판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미디어는 바뀐 환경에 따라 학대받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다. 이제는 인터넷 어딘가에서 언제라도 공감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사람들의 도움으로 진실이 드러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수백만 달러의 사역 단체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영웅을 사랑하지만, 이제 조금씩이나마 피해자를 믿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이제는 더 많은 피해자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가해자는 동네와 교회를 바꾸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할 수 있지만, 인터넷은 그들이 감시망을 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팬이 나타나 또 다시 잘못된 가르침과 가학적인 행동까지도 숭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터넷은 이제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가 계속해서 침묵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동시에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재커라이어스의 범죄를 도왔다. 사실, 성적인 이미지를 촬영하고 공유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데 스마트폰이 없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누드 셀카를 어떻게 요구하는지 아는 것은 중학교 소년만이 아니다. 한때 빌리 그래함 규칙(Billy Graham Rule, 자신의 부인을 제외한 다른 여성과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는 규칙)과 목사 사무실의 문에 달린 창문이면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문자 메시지를 통해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섹스의 형태는 포르노의 보편화로 인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성적 범죄도 같은 패턴을 따른다. 예방 및 보호를 위한 사역 기관의 정책은 이러한 변화를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나?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기독교 지도자의 성범죄는 두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영웅들에게서 온전함을 찾지 못해 절망하거나, 또는 성범죄를 막기 위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 또는 요구라는 그 어떤 방법도 지속적인 변화로 이끌지는 못한다. 재커라이어스와 그 이전 비슷한 사람들을 생각할 때 믿음을 가진 사람을 존경하는 것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리더를 향해 낮은 기대치를 갖거나 아예 기본적으로 불신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책임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보시는 하나님의 책임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도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수 있다. 지도자는 재커라이어스가 지금 분명히 겪고 있는 것처럼(히 13:17), 우리에게 따라가야 할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그 어떤 지도자도 인간인 이상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변화에 대한 요구가 보장된다. 그러나 노골적인 인터넷 콘텐츠를 필터링하는 방법에 익숙한 기술자라면 그 어떤 필터링도 회피하는 방법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를 짓고 싶은 사람이라면 언제나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필터링은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 의로움을 전달할 수는 없다. 성범죄를 방지하려는 모든 요구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역은 다 좋은 계획과 의도를 갖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재커라이어스는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한 전문적인 도움까지도 받은 게 분명하다. 그러나 최상의 계획도 항상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좋은 계획과 더불어 동시에 그 선한 의도를 회피할 숨은 동기를 함께 갖고 있기 마련이다. 보안 시스템을 프로그래밍한 사람은 모든 허점을 알고 있다. 라비 재커라이어스 국제사역본부(RZIM) 내부에서 누가 언제, 무엇을 알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초기 보고서에는 빈틈이 많다. 앞으로 더 많은 지도자들이 진실을 밝힐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가진 인간 본성을 고려할 때 우리는 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해자를 불신하고 사역 기관의 이름을 보호하려는 모든 세상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수천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면서 또 고위직에 주로 가족을 등용하는 사역 기관의 끝이 좋은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재커라이어스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의 재정적 지원을 원하는 많은 사역 단체의 일반적인 형태가 가족 운영이다. 상속 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 있다. 돈과 가족이 결합한 경우 그 결과는 고통과 신뢰의 상실이다. 오직 한 길만이 있다라비 재커라이어스는 우리의 믿음을 저버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취약하고 노출된 여성의 믿음을 배반함으로써 우리의 신뢰를 깨뜨렸다. 우리는 그들을 대신하여 괴로워하며 그들과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우리는 이 끔찍한 악을 한탄한다. 우리는 불의가 파괴한 것을 다시 고치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한다. 오직 한 길, 우리의 주님이 보여주시는 그 길만이 가능하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지도자들이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종의 모습을 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 성적인 목적으로 또는 재정적인 이득을 위해 타인을 착취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특히 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약한 자들을 돌볼 수 있다. 우리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심령이 짓눌린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한다(시 34:18).과거 또는 현재 성적 학대를 받은 사람들은 확신해야 한다. 언젠가 정의가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원제: Ravi Zacharias and the Judgment of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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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재커라이어스
성적학대
하나님의정의
디지털혁명
신뢰의배반
목회자
성범죄
고난 없는 삶은 비현실적인 기대입니다
by Paul Tripp
2021-02-03
결혼을 준비하는 사람도 이 문제를 경험하고, 직장인도 마찬가지다. 첫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리는 부부에게도 있는 문제고, 친구 관계 안에서도 경험하는 문제다. 목회자 역시 교회 사역에서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이 문제가 과연 뭘까? 바로 비현실적인 기대다. 우리가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이유는, 쉽게 말해, 우리가 이 세상의 현재 상태에 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죄로 인해 이 세상은 문젯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한 연기와 먼지가 성경 전체에 자욱하다. 여기서 탈출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셨던 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말 그대로 탄식 가운데 하나님이 주실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한다(로마서 8장 18절 이하를 보라). 우리는 질병과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이 중 어떤 것도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 아니었다. 또한 이 세상은 속임과 실망으로 가득한데, 이 역시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니었다. 반역과 죄로 가득한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아니었다. 고통과 상실 속에서 신음하는 이 세상 역시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폭력과 전쟁으로 가득한 이 세상은 평화의 왕이 빚어내신 작품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정욕과 탐욕이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그렇게 디자인하지 않으셨다. 이 모든 어려움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사역을 어렵게 만든다. 우리에게 실망을 안기지 않는 관계는 없다. 교회를 포함해서 이 세상 어떤 기관도 죄와 타락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할 수 없다. 어려움이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삶과 사역의 모든 순간은 타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닥치는 어려움이를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할까?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대해 성경이 경고하는 내용을 하찮게 여겨왔다. 어려움을 겪는 목회자들을 상담하며 종종 발견했던 사실은, 하나님을 높이는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나갈 때 그들에게 목회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가 있어서 필연적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내부적인 죄와 외부적 어려움이 그 모습을 드러내어 교회에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목사들은 주의깊게 행동하기보다 그저 사후 대처에만 급급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하는 목회 자체가 주는 어려움으로 인해서도 고난을 당하나, 그 문제를 자신들이 더욱 악화시켰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과 실망으로 인해서도 고통을 당하게 된다. 내가 여러 교회들을 도우면서 발견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닥치면 목회자나 리더가 자신의 강점이 아닌 약점으로 일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지혜의 원칙으로 자기 자신을 연단시키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슬프게도 그들은 정치적인 태도를 취하고 개인적으로는 방어적 입장을 고수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타락한 세상의 실상에 대해 성경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리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모든 것을 완전히 회복시키실 것을 기다리며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더불어 살고 더불어 사역해갈 때, 어려움이 닥칠 것임을 우리가 알고 그에 대해 준비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우리를 돕고자 하심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비현실적인 기대감은 사역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로 하여금 불필요하게 독립적이고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추구하도록 만들어버린다. 사실, 모든 목회자는 매일매일 우리를 구해내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힘을 주시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다. 목회자 역시 성화의 여정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은혜가 필요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목회자 역시 죄의 존재와 그것이 지닌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는, 사역자가 매 순간마다 옛 자아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려움이 닥칠 때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약하여 넘어지는 이들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들을 사랑하라고,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사역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이 더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 119:105)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의 지혜의 빛으로 인도함을 받고 보호받을 때만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제대로 살고 사역할 수 있다. 평생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 또한 이 세상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를 모르는 채 살아갈 수 있다. 이를 잊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 사역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움과 인도하심을 매일 갈구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우리에겐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만 남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미성숙하게 대응함으로써 우리가 섬기는 지역 교회 안의 혼탁한 어려움들은 오히려 악화되고 복잡해지게 된다. 사역할 때 이를 명심하라. 어려움이 닥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홀로 내버려 두신 것은 아니다. 그러한 순간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주신다! 그분이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신다. 시편 27편 5절 말씀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를 기억하라.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다. 그분은 변화시키는 은혜와 자유케 하는 지혜를 가득 들고 당신에게 오신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에 대해 눈과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리하면, 당신은 당신에게 정말로 필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기꺼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실 은혜와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게 될텐데, 이것이 바로 겸손하게 자신의 필요를 인식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다. 현실을 직시하라. 그리고 인생과 사역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허락하시는 모든 현실적인 일마다 그분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원제: Expect Trou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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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교만과 겸손
by Nate Pickowicz
2021-01-27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년생 목회자에 관한 이야기다. 언젠가 그가 지역 목회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모든 인원이 모이자 테이블에 둘러앉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사람이 말했다. “짐 뉴턴, 팔십.” 그러자 모든 목회자가 웃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다. “빌 월터, 백이십오.” 또다시 다들 웃었다. 이번에는 초년생 목회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몰랐기에 이렇게 얼버무렸다. “잭 뷰캐넌, 오백사십일!” 그런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목회자가 모임에서 으레 주고받는 농담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평소 관례대로 자기 이름과 교인 수를 밝히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교회 사이즈를 두고 사역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오늘날의 목회 세태를 조소하는 관례였다.물론 목회자의 교만이 만연해진 오늘날 상황은 결코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슬픈 현실을 반영한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교만의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목회자가 우쭐해지면, 언제나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난다. 때로는 친구의 질책 정도로 미묘한 수준에서 결과가 나타난다. 또는 목회 자격을 상실하고 사역 전체를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그 결과가 끔찍할 때도 있다. 이 아티클을 쓰는 나 역시 먼저는 내 자신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아직 난 젊은 사역자로서 교만하고 건방진 태도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유혹을 쉽게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를 통해 그러한 죄의 유혹과 싸우자고 동료 목회자에게 간청하면서 내가 쓰는 글이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교정하는 데 부드러운 지침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자기 과시에 빠지는 목회자교만은 목회 현장에서 매우 다양한 방식에 따라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중 정말로 포착하기가 어렵지만 그 결과는 불치병처럼 치명적인 방식이 있는데, 바로 목회자의 자기 과시다. ‘자기 과시’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설명해 보면, 자신을 인위적으로 혹은 거짓으로 꾸미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자신을 타인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스스로를 뽐내는 태도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과장되고 그릇된 자기 이미지를 만들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목회자의 자기 과시는, 자신의 영성이나 업적 또는 영향력이나 존재감 따위를 부풀리기 위해 행해진다.이와 같은 자기 과시는, 우리가 그저 다른 사람과 나누는 평범한 대화에서 교회 규모라든가 최근에 이룬 업적을 살짝 언급함으로써 매우 미묘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혹은 지난주 설교에서 몇몇 성도가 ‘아멘’으로 반응했던 문장을 이야기함으로써 순식간에 나타날 수도 있다. 아니면 인터넷에 자신의 선행을 선전하거나 목회 현장에서 얼마나 수고하는지를 아름답게 묘사하여 마치 성도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헌신하는 사람처럼 자기를 드러내려는 모습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의 죄악된 마음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려고 한다. 비록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스스로 행하는 잘못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한지는 충분히 깨닫지 못한 채로 살 수도 있다.교만과 겸손그렇다면 교만이란 대체 무엇일까? 바울이 로마서 12장 3절에서 언급한 말을 빌린다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타인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교만이다. 스튜어트 스콧(Stuart Scott)은 교만을 자기 숭배의 한 형태로 정의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선하고 올바르며 칭찬받을 만한 일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라고 (혹은 그런 사람인 게 틀림없다고) 믿는다. 또 자기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성취해내는 사람이며 모든 일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혹은 그런 사람인 게 틀림없다고) 믿는다. 한마디로 모든 일이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통하여,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교만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선한 일의 참된 근원이며 성취자이실 뿐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롬 11:36). 그러므로 교만을 드러내는 일은 하나님 자리에 스스로를 세우려는 죄악에 다름 아니다. 즉 그분을 모독하며 우상 숭배하는 행위일 뿐이다.따라서 성경에는 교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구절들이 많다. 예를 들어 잠언 6장 16-19절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을 열거하는데, 그중에 첫 번째로 '교만한 눈'을 언급한다. 또 하나님은 교만과 거만을 '악한 행실'과 똑같이 취급하시며(잠 8:13), 그 결과가 '치욕'과 '멸망'이라고 경고하신다(잠 11:2; 18:12). 나아가 교만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씀도 기록되어 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16:5).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가 낮아지게 되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 23:12).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그런데 성경은,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미워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약속도 함께 제시한다(약 4:6; 참고 시 138:6; 잠 3:34; 벧전 5:5). ‘겸손’은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에 대해 죽는 상태를 일컫는다(눅 9:23; 갈 2:20).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서로를 대할 때 겸손한 태도를 보이라고 권면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이처럼 바울은 우리 마음의 낮아짐을 겸손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우리를 바닥까지 낮추어 아예 일으키지 않으려는 게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이는 모든 신자, 특히 목회 현장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진리다.목회자의 겸손에 대한 요청겸손히 사역하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다. 그분은 하늘 아버지가 맡기신 모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쉬지 않고 수고하셨다(요 5:30; 12:49; 17:1-5). 그러면서 자신의 사역은 스스로를 내주기 위한 섬김이라고 선언하셨다(막 10:45). 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요 13:14-15). 이처럼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6-8). 바로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회 사역의 모델이시다.하지만 우리는 타락하고 죄악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약하고 불안정하다. 나는 목회자가 자기를 과시하려는 마음속에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간절한 열망이 왜곡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목회는 힘든 일이고, 그에 수반되는 온갖 고초를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만족과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이다(고후 3:4-5). 그러므로 열심히 애써 수고한 후에 사람의 칭찬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베드로가 권하였듯이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야" 한다(벧전 5:5).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기에 이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잠 27:2). 그리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다른 이와 경쟁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기에 이 권면도 새겨야 한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추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을 따라오는 인파에 둘러싸여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자신에게 찾아오는 교만과 싸우며 그에 반응하였는지 다음 이야기가 잘 보여 준다.“다른 데서는 듣기 힘든 아름다운 열변으로 찰스턴 시에서 설교를 마친 휫필드 목사는 강단을 내려와 교회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복도에서 누군가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흔들며 방금 들은 훌륭한 설교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았다. ‘오 휫필드, 너무나 감명 깊은 설교였어요.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휫필드는 우쭐하기는커녕 매우 엄숙하고 진지한 자세로 이렇게 답했다. ‘형제여, 한발 늦었습니다. 강단을 내려오기 전에 마귀가 벌써 그 말을 하더군요.’”친애하는 동료 목회자여, 이제 교만과 가식의 탈을 벗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도록 하자. 그리고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만을 높이도록 하자.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말이다(미 6:8).출처: www.ligonier.org원제: Humility in Ministry번역: 장성우
목회
리더십
교만
자기과시
겸손
휫필드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세 가지 방법
by Peter J. Leithart
2021-01-13
최근 손주들 중 셋이 매년 그랬듯 무더운 여름에 남동부로 우릴 방문했다. 물론 엄마 아빠와 함께 말이다. 손주들이 우리 집에 하루 이상 머물 때면, 나는 항상 연극을 하거나, 아니면 “팝스 박사(Dr. Pops’s)의 여름 성경 학교”를 열곤 한다. 첫째 손녀가 여기 와서 머무는 동안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는데, 남동생들은 각각 2개월과 9개월이다. 너무 어려서 연극으로 리어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팝스 박사의 여름 성경 학교”가 열렸다. 아이들은 손 동작을 사용해서 그룹들(cherubim)의 네 면을 배웠고, 창조 기사의 개요, 창조의 기본적인 구조, 창세기의 요약 내용을 배웠다. 다음에 손주들이 오면 출애굽기를 다룰 계획인데, 짐승을 드리는 제사를 각각 어떻게 했는지 가르칠 생각이다.내 첫 아들이 걷기 시작할 때쯤부터 시작하여 주로 내 자녀들과 손주들을 비롯한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친지 35년 이상이 되었다. 그간 배운 것들 중 세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1.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라하나님은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히 1:1–3). 시내산에서 율법에 대해, 왕들을 통해서는 지혜에 대해, 선지자들을 통해서는 태우고 부수는 말씀들을 주셨으며, 마지막으로는 말씀이신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정경(canon)의 순서는 이스라엘과 온 인류가 성숙해가는 단계를 보여준다. 마치 우리가 노예와 같은 어릴 적 상태로부터 자유라는 성인의 상태로 자라가듯이(갈 4), 또한 제사장에서 왕으로 선지자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듯이 말이다. 성숙에 대한 성경의 역사가 이야기로 가득한 장문의 책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도 이야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말하고, 걷고, 추상적 사고를 하는 법을 배우기 전부터 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야훼께서는 최고의 부모다. 이스라엘이 토라, 회막, 복잡한 제사 제도, 토지나 왕정에 대해 지시받기 전부터 그들은 이야기, 즉 어떤 가족에 대한 아주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거의 매일 저녁 식사 후에 가정 예배를 드렸다. 나는 무릎에 성경을 펴놓고는 성경 이야기를 해주었다.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사도행전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는 창세기에서 다시 시작해서 동일한 프로세스를 반복했다.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계속 아이들이 생겼기 때문에 나는 이를 계속 반복했다. 내 자녀들이 자라면서는 신약의 나머지 부분을 다루었는데, 그 때는 신약 본문들을 함께 읽었다.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던 때, 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흥미를 돋우고자 했다. 우리는 이야기를 건너뛰고 도덕적 교훈의 핵심으로 달려가고자 한다. 상세한 내용을 무시하면서 추상적인 교리적 내용을 다루려고 한다. 성경이 도덕적 교훈을 주고 성경 이야기에 교리적 중요성이 있는 것은 맞다. 그 모든 걸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옳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주셨고,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읽고, 자녀들에게 이야기 해줄 뿐 아니라 그 이야기대로 살고,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신다는 걸 기억하라. 이야기에서 시작하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아이들은 이야기를 기억한다. 2. 예수님을 보여주라부활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간 머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다(눅 2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가르치셨고, 이후 나머지 열한 명도 가르치셨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모세오경, 선지서, 시가서, 즉 구약 전체를 가르치셨다고 기록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성경은 책 중의 책이고 수많은 이야기들로 구성된 거대한 이야기다. 모든 작은 이야기들은 예수님 이야기의 일부이므로 결국 전체 이야기로 연결된다. 이 작은 이야기들은 퍼즐 조각들과 같다. 조각을 다 맞추고 나면, 이레니우스(Irenaeus)의 말처럼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왕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조각들을 찾아나서야 할까? 성경 인물들에서 시작하라.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다는 것을 설명하고, 예수님이 더 나은 아담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라. 아벨이 가인에게 당했고 요셉도 그의 형들에 의해 그리 되었듯, 예수님도 형제들로부터 공격받으셨다는 것을 보여주라. 삼손이 그의 죽음의 순간에 승리했듯,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그리 하셨음을 보여주라.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를 보여주면 자녀들은 예수님께서도 우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사건들에도 주목하라. 마태복음 서두를 보면,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죽이는 왕을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셨다가 다시 돌아와 자라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후에 산상수훈을 주신다. 이는 이집트 종살이, 이스라엘 아이들에 대한 바로의 살해 명령, 출애굽, 광야 방랑 생활, 시내산과 율법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지루해 보이는 레위기라 해도 자녀들과 함께 읽어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레위기를 읽을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아버지와 화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라. 성경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을 다 예수님께로만 연결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노아는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아담이기도 하다. 다윗은 사사 중 하나처럼 싸우며, 히스기야는 새 다윗이고, 예레미야는 모세와 닮아 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다윗과 골리앗 얘기를 해주면서 “우와, 그러니까 ‘이게’ 성경 안에서 일어난 것이 여기가 처음인가? 우리가 ‘이런’ 인물을 성경에서 보는 것이 여기가 처음일까?” 라든지, “우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사람이 죽은 건 지금 이게 처음이지?”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건 여기가 처음인가?” 아니면 “거의 죽을 뻔 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가 처음이지?” 또는 “물 긷는 곳에서 아내가 될 여자를 만난 경우는 이게 처음이지?” 같은 말을 던지면 아이들은 그게 사실은 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아이들은 “아니에요! 머리에 상처를 입고 죽은 사람들은 또 있어요” 하면서 시스라나 아비멜렉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겠지만, 무엇보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이야기를 기억해 낼 것이다. “남자들은 ‘모두’ 아내 될 여자를 물 긷는 곳에서 만나요!” 아이들은 타고난 모형론자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을 억누르면 그 능력이 사라지고 만다. 아이들은 모형론(typology, 마치 틀이나 사본처럼 원형의 그림자로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표시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일명 '예표론'이라고도 한다 - 편집자 주)이라는 말은 모르지만 이 놀이를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그 놀이를 해보라. 3. 성경을 노래로 가르치라몇 년 전 아이다호에서 목회할 때 초등학생들을 위한 교회 여름 성경 학교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성경 신학의 패턴들을 아이들이 잘 배울 수 있도록 노래를 몇 개 만들었다. 음악의 힘을 뒤늦게야 깨달았기에 그만큼 나는 적극적으로 노래를 사용하려고 했다. 노래를 하거나 구호를 외치면 아이들에게 성경이 더욱 감동적이고 리드미컬하게 전해졌다. 노래를 사용하면 성경을 아이들의 두뇌와 몸에 새길 수 있다. 노래를 만들 때는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단지 예쁘거나 귀여운 노래가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갈 때 성경을 읽고 성경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생각의 결을 만드는 데 노래가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소망했다. 한 번 듣고는 유치한 아이들의 노래라며 다시는 부르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랬다. 예를 들어보겠다. 창세기 전반부를 보면 세 가지 타락이 연달아 등장하고 뒤이어 홍수라는 거대한 창조 파괴가 나온다. 홍수와 바벨탑 사건 이후에 성경은 세 명의 족장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들을 통해 앞서 나온 세 가지 타락이 역전되고 세상이 새롭게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이 모든 일을 노래로 불러보면 다음과 같다(굵은 글씨는 강조를 의미). 아담, 가인, 또 하나님의 아들들(세 가지 타락)쏴아아!(홍수를 의미한다. 홍수를 뜻하는 손 동작 사용)바벨아브라함, 야곱, 요셉(세 족장들)아담은 야훼께 불순종함으로 죄를 범하나,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의 목숨을 앗아갈 것임을 알면서도 순종한다. 아벨은 가인에 의해 죽임 당하나, 죽음으로 위협하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간 야곱 또한 아벨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상 딸들과 결혼하며 이 땅을 더럽혔으나 요셉은 유혹을 이겼고 온 세상을 굶주림에서 구해낸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 수준의 성경 가수 중 하나는 캐나다 출신 작곡가인 제이미 솔스(Jamie Soles)다. 그가 낸 많은 앨범을 들으면 아이들이 성경의 기본은 물론이요,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를 구해주는 것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 동일한 내용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민수기 7장 같은 본문마저도 아이들로 하여금 노래하게 한다. 다른 음악가들도 물론 있지만, 성경의 핵심을 솔스만큼 잘 담아내는 이는 드물다. ‘성경’을 가르치라나는 아이들이라 해도 성경을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깨달았다. 이 깨달음이 내가 나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잘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훨씬 재미있게 배울 수도 있다. 내가 성경을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다른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를 잘 가르칠 때, 아이들이 아버지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배웠다. 원제: 3 Ways to Teach Scripture to Children: Tell Stories, Show Them Jesus, and S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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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를 찾는 이를 위한 다섯 가지 조언
by Chris Nye
2021-01-09
나는 21세가 채 되기도 전에 목사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당시 나는 너무 어렸다. 나의 머릿속에는 목사나 교회 지도자에 대한 어떤 순진한 감정과 함께 청년 사역의 필요성에 대한 소망이 늘 들어 있었다.이를 위해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목사님들과 교제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큰 교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담임목사님을 포함한 선배 목사 모두와 만났다. 특히 담임목사님과 적어도 8주에 한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함께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목사님의 계획표에 스케줄을 잡아 달라고 직원에게 미리 이메일로 요청하곤 하였다. 이러한 나의 호기심은 바로 나의 절박함 때문이었다.나는 이 방법을 우리 교회 이외의 지역 교회 지도자와의 만남을 위해서도 적용하였는데, 커피를 함께 나누며 청년 사역, 결혼, 신학교 선택, 재물, 자녀, 제자도, 설교 준비 등 거의 모든 부문에 대한 그들의 경험과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나보다 더 바쁘고 중요한 업무를 하고 있던 사역자들을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굴던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1년 된 애송이 목사였던 나의 옛 모습을 지금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그들은 친절히 나의 이메일에 일일이 답장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와 만나 교제하는 시간을 할애하여 주기도 하였다.그 이후, 목회 사역을 10년 이상 해 온 나에게, 지금은 20대의 청년들이 멘토를 찾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기에 멘토를 찾을 때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의 유의점을 통해 멘토를 찾기 위한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1. 현명한 사람들이 먼저 내게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소리치고 있는 정직한 여인을 찾거나(잠 1:20) 귀한 은을 찾을 때처럼(잠 2:4) 지혜를 찾아야 한다. 현명한 사람을 찾으려면 스스로 주도적으로 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당신이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항상 자신이 먼저 그들에게 접근하여 만남의 시간을 통해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끔, 현명한 조언을 줄 수 있는 멘토들이 다가와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우리는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면서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2. 그들에게 '나의 멘토'가 되어 달라는 요청은 하지 말아야 한다누군가로부터 멘토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는 것은 대단히 긴장이 되는 일이다. 많은 사람은 이러한 포괄적 요구에 대하여 거부 의사를 표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요청을 해 오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 사용하는 언어들을 좀 정리하고, 내가 해 온 것처럼 지금 그들이 '멘토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하면 몇몇 현명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을 통해 도움과 조언을 얻되 굳이 그들이 멘토로 여겨지고 있다고 느끼게 할 필요는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의 멘토가 되어 있을 것이다.나는 내 주위 몇몇 사람을 '나의 멘토'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였을까? 나는 멘토링 관계의 형성이 여러 차례 커피나 식사 등을 함께 하며 관계를 갖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주요 질문들을 주위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계속 묻고 답변을 얻다가 문득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나의 멘토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3.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나서는 안 된다현명한 사람들은 무의미하게 시간 낭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현명한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위해 관심 기울이기를 원하되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원한다. 멘토와의 만남을 위한 대화나 질문에 대하여 사전 준비 없이 그들을 만난다면 아마도 당신은 만남의 첫 몇 분간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화제로 시간을 보내다 대화의 본질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들의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나의 경우, 적어도 몇 가지 질문은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멘토의 전문 분야나 지식을 고려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의 멘토 중 신학이나 학문적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영혼을 돌보는 일이나 감정적인 이슈에 대해 질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 신학적이거나 학문적인 해석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로부터 도움을 얻겠지만, 목회 사역과 가정생활의 균형 등에 대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 멘토들을 통해 조언을 받는다.4. 멘토와의 관계를 너무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내가 맡은 많은 청년들이 멘토링을 매주 몇 시간씩의 만남과 언제나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다고 하여 그때마다 멘토에게 연락하여 질문하는 일은 피하도록 하여야 한다. 궁금한 점들이나 조언을 구하고 싶은 내용을 잘 정리하여 그들과의 다음 만남을 통해 충분히 이야기하고 그 시간을 풍성하게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나는 멘토들을 만났을 때 묻고 싶은 질문이나 주제들에 관한 메모를 핸드폰에 작성하여 보관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보면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도 종종 있을 것이다. 먼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여 보고 고민하는 노력 없이 멘토들을 통해서만 답을 얻고 있다면 결코 자신의 지혜를 발전시키는 계기는 마련하지 못할 것이다.5. '오직 한 사람'의 멘토만을 찾거나 기다리지 말라'유일한 나의 멘토'라는 것은 없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혜는 다양한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개발된다. 잠언 11장 14절에서도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위에 ‘많은 조언자’가 있다면 이는 참 좋은 일이다. 여러 명의 멘토를 통해 조언을 분산시키다 보면 멘토 각자에게 주어지는 부담도 덜게 될 수 있을 것이다.크리스천이 됨으로써 얻는 아름다움 중 하나는 많은 형제, 자매,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새로운 의미의 가정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헌신을 통해 '많은 조언자'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지 '교회'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에 헌신하라고 조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잠재적인 멘토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깝고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만나게 되는 다양한 경험을 가진 우리의 멘토들은 일반적인 현명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형태의 제자도를 통한 현명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것이다.예수님은 궁극적인 지혜의 음성이다. 아무도 그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내가 이야기를 나누어 본 많은 젊은이들은 예수님을 대체하는 멘토 역할을 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누군가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며, 그러한 대상을 계속해서 찾도록 방관하는 것은 그들에게 버틸 수 없는 짐을 지우며 그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기대를 품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멘토들은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신(고전 1:24) 우리의 주인,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치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Not to Find a Mentor번역: 장명근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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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팀 켈러를 통해 배우는 성탄절 교리설교
by 고상섭
2020-12-10
목회자에게 설교가 늘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지만, 특히 절기설교는 더 어려운 것 같다. 매년 돌아오는 절기마다 어떤 본문을 어떻게 설교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설교자들이 많이 있다. 절기설교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2017년 12월 리디머 교회에서 설교한 ‘성육신의 영광’(The Glory of the Incarnation)이라는 팀 켈러의 설교를 통해 성탄절 교리설교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팀 켈러는 성탄의 의미를 가장 짧은 한 줄로 설명하는 교리가 있다면 아마도 요한복음 1장 14절일 것이라 말한다. 성탄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본문을 벗어나지 않지만, 지나치게 본문에 매이지 않으며 성탄절의 의미를 교리적 진술로 설명한다. 설교의 골격은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이 주는 세 가지 의미이다. 첫째, 성육신의 사건은 고통 가운데서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첫 번째 대지는 팀 켈러의 본문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요 1:14-18).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면 그것은 죄와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교리적 대지로 적절하다. 그러나 첫 번째 대지를 들으면 청중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다고 고통에서 위로가 된다면 왜 나는 지금도 계속 고통 중에 있는가?” “예수님이 고통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는데 왜 세상은 여전히 어려운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여전히 고통은 계속되고, 내 삶에서도 완전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팀 켈러는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않는 이유와 지금도 여전히 고통이 있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인간이 알 수 없지만, 말씀이 육신이 된 이 사건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또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이 시험당하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의 강도가 5라면 3정도의 고통을 당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 사람을 만나면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진노를 감당하신 분이시다. 세상의 어떤 고통도 그분의 고통보다 더 크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벌거벗겨진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면,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 때문에 고난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책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를 보면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니는 어린 시절 다이빙 사고를 통해 사지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그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때 가장 힘든 것은 아무도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예수님은 너의 고통을 이해하고 계셔!” 라는 말을 듣고 처음엔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해서 얼굴에 묻은 것을 닦을 수도 없는 자신과 십자가에서 두 팔이 못 박혀 움직일 수 없는 예수님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예수님께로 다시 헌신하게 된 계기는 바로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태어남에 관하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스러웠지만 또한 기쁨이었다고 말한다. 엄마가 아이를 낳을 때 고통스럽지만 해산한 뒤에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리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기쁨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출산의 기쁨도 너희를 바라보는 내 기쁨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내가 모든 고난과 고문과 죽음을 기꺼이 당한 것은 너희를 구원하고 사랑하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지금 여전히 고난은 없어지지 않지만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 사랑은 오늘의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제공해 준다. 둘째, 성육신의 사건은 고통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도록 내적인 힘을 공급한다출애굽기 3장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가운데 있을 때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이 내려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 3:7-8)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는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해 내려오신 것이다. 강도를 만난 사람들이 있을 때, 누군가 건장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우리는 선뜻 그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가? 참 사랑은 자신의 안락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며, 자신의 안정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고통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위해 내려오셨다. 말로만 사랑을 이야기 하신 분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몸으로 행동하신 것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시지만 자기를 비워서 인간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5-8)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4절에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면한다. 어떻게 자기중심적인 인간이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길 수 있는가? 그 비결이 바로 5-8절에 있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위로 받기를 원하지만 자신이 잘 헌신하지는 않는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기독교 기본진리’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영성에 대해 소파의 쿠션처럼 신앙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헌신이 없는 위로와 안락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중심성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성육신의 의미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성육신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 은혜가 내적인 동기가 되어 은혜받은 우리가 또 다른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하신다. 셋째, 성육신 사건은 고통 속에서도 소망가운데 이 땅을 살아가게 한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에서 ‘거한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장막을 치다’ (tabernacle) 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성막을 의미하며, 지성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연상시킨다. 성막의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서 쉐키나 영광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성막은 언제나 휘장으로 가려져있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절대 거룩의 영역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에게만 허락된 곳이었다.그 휘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찢어졌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이제 우리는 정죄없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결국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다. 그 마지막 날의 완전한 소망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땅을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조엘 비키(Joel Beeke) 목사는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8)을 해설하면서 마지막 날에 주님이 주시는 상이 예비되어 있는데, 그 확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상을 생각하면 이 땅의 어려움 속에서 지속적으로 견딜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고 말했다. 결국 오늘의 어려움을 이기는 힘은 장래의 소망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에게 참된 소망가운데 이 땅을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팀 켈러의 설교는 단순히 은혜로운 한 편의 설교일 뿐 아니라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본과도 같다. ‘그리스도 중심의 교리적 절기설교’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앞으로 절기 설교를 준비할 때, 위의 팀 켈러의 예처럼 절기에 해당하는 본문에서 중요한 교리를 선언하고 몇 가지 교리적 진술을 대지로 삼아 설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편의 좋은 설교는 내용 뿐 아니라, 설교의 방식까지 가르쳐주는 친절한 선생님과 같다.
설교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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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
팀켈러
독생자
필립얀시
조니타다
존스토트
조엘비키
목회자여, 복음을 머금고 성도를 대하자!
by 김형익
2020-12-01
성경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가르치는가? 일단 이 대답은 뒤로 하자. 내 기억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나는 신학교에서 이 주제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배운 적이 없다. 교육전도사로 2년을 사역하는 동안에도 나는 담임목사님이나 선배 목회자들을 통해서 이 주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주제는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터득해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문제를 목회의 현장에서 잘못 배우게 될 때, 경험적으로 잘못 배운 지식은 그 목회자의 목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특히 목회자의 설교 방식에서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나타나는 나쁜 양상은 이런 것들이다. “나는 목자이고 너희는 양이니 내 말을 들어라” 하는 식의 태도, 또는 연장자 교인들을 향하여 정확하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 설교에서 교인들을 무시하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목회자와 교인의 성경적 관계를 아는데서 시작한다. 그 관계의 원형은 주님께서 당신의 양들과 가지시는 목자와 양의 관계일 것이고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이 주제를 깊이 다루신 바 있다. 주님은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시다(요 10:11,15). 같은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을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요 21:15-17), 목자와 양의 관계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로 확장 될 수 있음을 암시하셨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목회자인 장로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고 말할 수 있었다.그러나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자신을 아버지에 비유했고(고전 4:15; 살전 2:11)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대하여는 어머니(자기 자녀를 기르는 유모)에 비유했는데(살전 2:7) 이것은 많은 목회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곤 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목회자는 단순히 스승(로마 귀족의 자제가 성장하기까지 훈육을 담당하는 선생, 갈 3:25에서는 ‘초등교사’)에 머무르지 않는다(고전 4:15).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를 쓰면서 내내 ‘자녀들아’라는 호칭으로 성도들을 불렀다는 사실은 사도 요한이 자신을 목양의 정황에서 회중의 영적 아버지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들의 이런 표현들을 우리의 목양에 적용해본다면, 목회자는 단순히 지식이나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역할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목회자에게 성도란 자기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내어줄 수 있는 영적 자녀들이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목양의 관계에서 성도들을 어느 정도 수준의 자녀들로 보았을까? 사도 바울이 자신을 아버지에 비유했을 때, 그는 자신이 복음으로 고린도 교인을 낳았다고 말했으니 필시 이들을 막 낳은 자녀들도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고전 4:15), 자기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에 비유했을 때에도 그는 사실상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아직 젖을 먹여야 하는 어린아이들로 보았던 것 같다(살전 2:7). 또 사도 요한이 성도들을 ‘자녀들(τεκνίον)’이라고 불렀을 때, 그 단어는 부모가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말이므로, 그도 성도들을 어린 자녀들로 여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이 시간이 많이 흘러 벌써 선생이 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단한 음식을 못 먹고 젖먹이 유아에 머물고 있다고 탄식하는데, 이 탄식도 성도들이 영적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음을 암시한다(히 5:12). 그렇다면 사도들은 성도를 젖먹이 유아로만 보았던 것일까? 요한일서에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성도들을 아비와 청년과 아이로 구분해서 부른 것을 볼 수 있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요일 2:13-14).”내용을 보면, 사도는 연령에 따라 아비와 청년과 아이를 구분했다기 보다 회중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 구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영적 성숙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사도들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이해했을지라도, 반드시 젖먹이나 걸음마 수준의 아이들로만 여기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제 바울 사도가 영적 아들이요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주는 실제적 권면을 들어보자.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디모데전서 5:1–3).”바울 사도는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방식을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말했었다! 연로한 남성은 아버지처럼, 젊은 남성은 형제처럼, 연로한 여성은 어머니처럼, 젊은 여성은 사심없이 참 자매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참 과부인 과부는 존대하라고 말씀했는데, ‘존대한다(τιμάω)’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할 때(마 15:8; 막 7:6; 요 5:23)와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명령에서(마 15:4; 19:19; 막 7:10; 10:19; 눅 18:20; 엡 6:2) 사용된 단어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이 권면은, 영적으로는 어린 신자일지라도 그가 나이가 든 성인이라면 목회자인 디모데는 부모나 연장자처럼 그를 대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심지어 공경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서 말이다. 목회자만 성도의 부모가 되는 게 아니라, 성도들도 목회자의 부모일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원리를 덧붙이고 싶다. 성경은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한다(벧전 2: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보시는 관점을 보여주는 말이다. 목회자가 설교와 모든 권면을 통해서 이 관점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확신하게 하는 일은 복음 사역의 핵심에 속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려면, 성도를 보는 목회자 자신의 관점이 정확하게 이 복음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관점은 그가 전하는 설교의 내용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관점이 복음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내용을 아무리 정확하게 전달하는 설교일지라도 힘을 잃을 것이다.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를 바라보시는 관점을 강력하고 명확하게 제공한다. 그래서 복음에 견고히 서있는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영광스럽게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주일마다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말씀과 함께, 성도를 실제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대하는 목회자의 태도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대하는 방식이 복음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성도들을 존경하는가?” 나 자신을 포함하여 나의 동료 목회자들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다.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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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도
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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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공예배
작은 교회 목회를 고려해 보라
by Tim Keller
2020-11-21
젊은 목사나 신학생들은 초기 목회사역에서 목회자로서 지혜를 얻기 위해 어떤 경험을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 내게 종종 조언을 구한다. 그들은 내가 ‘작은 시골 교회 목회자,’ 다시 말하면, 교회의 거의 모든 것들이 도시와는 다른 상황인 작은 교회를 홀로 담당해야 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고려해 보라고 하면 놀라곤 한다.‘고려하다’라는 단어를 잠간 언급해 보자면, 나는 모든 목회자가 이 길을 가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내게는 큰 경험이었다.행함으로 배우기젊은 목회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첫 부임지로 그들에게 멘토가 되어 줄 수 있으며, 나이가 지긋하고 성숙한 목회자가 있는 큰 교회의 부교역자로 가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여긴다. 이 모델에는 여러 가지 한계점이 있다. 젊은 목회자들에게 실제로 하지 않는 일에 대해 가르침이 이루어질 수 없다. 큰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들이 ①담임 목사의 짐을 지고 있지 않으며, ②당회를 인도하지 않고, ③목회에 필요한 헌금을 모금하는 일을 하거나 책임을 지지 않으며, ④상담, 목양, 교육, 설교 사역 전체를 모두 다 하지는 않는다.목사 한 명이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하는 작은 교회에서는, 오직 당신만 노인들을 심방하고, 모든 결혼식과 장례식을 집도해야 하며, 죽어가고 있는 교인의 임종을 지켜보아야 하고, 모든 결혼 상담을 하며, 치리를 하고, 교회 음악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고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 남성들을 위한 수련회, 여성들을 위한 수련회, 청년들을 위한 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해야 하고, 모든 성경공부 교재를 써야 하며, 종종 주일학교 커리큘럼도 짜야 하고, 소그룹 리더들을 훈련시켜야 하며, 양로원을 방문하여 위로의 말도 전해야 하고, 교회의 구제와 복음 전도 그리고 새신자를 환영하는 집사들과 함께 일해야 하며, 봉사자들을 훈련시켜 이 모든 과제들을 조금 나누어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관계적이거나 재정적인 위기를 처리해야 한다. 아무리 멘토링이 다양하더라도 이러한 모든 일을 직접 수행하면서 배운 것들을 실제적으로 가르쳐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어떤 이들은 내가 도시 목회를 강조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놀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복음적 교회가 도시를 간과해왔다고 굳게 믿는다. 크리스천과 기독교 리더들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 희생을 치르게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도시 지역에서 받는 무시는 작은 도시와 작은 교회에서 받는 업신여기는 태도와 비교하여도 조금도 덜하지 않다. 젊은 목회자들은 작은 교회에 갈 때, 그들이 큰 교회에서 배울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목회 과제와 기술에 대한 전 영역을 배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 말아야 한다. 작은 공동체에 갈 때, 그 목적이 오직 경력을 쌓기 위한 것이라면 가지 말아야 한다. 왜? 주변 사람들의 삶에 투자하는 것 보다 더 큰 것만 열망하면, 초기 목회 경험은 당신이 ‘큰 일’을 하도록 준비시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뿌리내리기어느 곳에서 섬기든지,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며,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해 사역을 수행하라. 하나님이 다른 곳으로 갈 기회를 주시면 좋다. 하지만 그곳을 ‘실제 목회’를 위한 훈련 기지로 여기며 가지는 말라. 나는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의 목회자로서 9년을 사역하면서 개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걸었다. 이 경험은 뉴욕시에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나를 잘 훈련시켜 주었다. 왜냐하면 교회를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목회자가 필요한 것이지 큰 교회가 만든 전문가가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다시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는 모든 이들이 같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가 되는 것은 모든 이들에게 적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알맞을 수 있다.원제: The Country Pars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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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교회
감사가 넘치는 교회를 세우는 8가지 방법
by Dustin Crowe
2020-11-14
힘든 한 해를 보내고 있는가?교인들이 화평하기보다는 갈등을 만들고, 제자도보다는 정치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며, 당신이 열심히 준비한 설교보다는 전문가의 한마디에 더 비중을 두고, 성경말씀보다는 죄에 빠져 있고, 우상 추구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하면 받아들이지 않으며, 학교의 프로그램과 스포츠 행사에는 참석하지만 교회 예배는 빠지고, 최근에 결정한 사항에 대해 당신의 리더십을 비판한다면, 당신은 그러한 불만사항과 짐 때문에 신음하는 게 당연하다.이러한 일은 당신만 겪는 일은 아니다. 성도들이 교회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모든 목회자와 교역자들의 성품과 인내를 테스트한다. 하지만 거기에 갇히지는 말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짜증을 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모세의 사례모세는 목회자로 섬긴 적은 없으나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지도자였다. 당신과 같이 그는 깨물고 차버리고 길을 잃고 헤매고 다니는 양을 인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때로 실망하여 체념하거나 돌판을 부순 이유를 당신은 아마도 알 것이다. 당신은 모세가 한 것처럼 말하거나 행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민수기 11장에 보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이미 불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기적으로 모세의 공급과 지시와 능력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결국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광야에서 고된 시험을 당하는 동안, 한 무리가 불평을 하고 암처럼 분열을 일으켰다. 그들은 다른 지도자 밑에 있을 때가 훨씬 더 나았다고 투덜거렸다. 하나님이 모세를 분명히 선호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그만두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유롭게 되어 모세를 따르는 것보다도 애굽 땅에서 종으로서 바로를 섬기길 원했다. (다행히도 모세 때에는 이메일이나 온라인 탄원이나 소셜미디어가 없었다).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불평하자 결국 모세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백성들에게 짜증을 냈다(민 11:11-14). 왜 그들을 그에게 맡겨서 짐을 지게 했냐고 물었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괴로움의 골은 깊었다. 지도자와 따르는 자들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리고 사역에서 리더십이라는 짐은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목회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문제들에 집중하고 싶은 유혹을 익히 알고 있다. 어려운 사람들과 실망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불평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기 쉽다. 그렇게 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시들해 진다. 은혜로 하기 보다는 불평하며 목회하다 보면 얼마가지 않아 우리는 탈진하거나 관계를 끊고 싶어진다. 바울의 사례바울은 힘든 상황이나 도전하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는 거짓 선생들과 정면으로 맞서고 배도와 배신을 경험하고 중상모략과 가십을 듣고 갈등과 분열의 상황을 겪었다. 사람들은 그의 사도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보다 다른 리더들을 선호했으며 그의 권위와 은사를 비방했다.하지만 바울서신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불평하기 보다는 계속 감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죄악 가득한 회중과 불완전한 교인들을 감독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한 사역이 빛을 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선한 은사와 성장에 맞춰져 있어 늘 감사할 이유를 찾았다.골로새서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교회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골 1:3). 당신도 당신이 섬기는 교회를 향해 그런 마음이기를 원치 않는가?바울은 골로새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잘못된 가르침이나 교회 내의 파벌이나 건강하지 못한 금욕적 실천에 대해 서둘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는 이 이슈들에 대해 나중에 언급을 함으로 그가 그러한 것들을 모른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서신은 먼저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그는 교회에 대해 불평보다는 칭송으로 자연스럽게 반응한다.그는 성령의 열매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골 1:4-5). 예수님의 복음이 낯선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하고(1:2) 그들에게 영원한 유산을 주며(1:5), 세계에 말씀을 전파하여 열매를 맺게 한다(1:6)고 감사한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의 사역도 아니고 바울의 사역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하나님이 그들 중에 이루신 크고 작은 일들에 감사한다.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완전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를 취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교회를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걸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해야 할 역할이 있었다. 그는 교회를 격려하고 훈계하며 가르치고 경고해야 했다(1:28).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들 안에서 시작된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실 것이었다(빌 1:6).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성장과 건강과 인내의 문제를 자신의 짐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교회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느끼고 그들을 돌볼 수 있었으나 그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이 그 짐을 지게 한다.감사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대상을 멀리서 조망해보도록 돕는다. 잘못이나 실패나 불만에 집중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은 우리를 실망에 이르게 한다. 반면, 감사하게 되면 우리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 우선 감사하라. 이것은 단순히 낙관하거나 긍정적 사고를 이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간과하고 있을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평안을 얻는 것을 말한다.감사드리는 실제적 방법들하나님이 당신에게 사역하도록 인도하신 교회로 인해 감사가 일어날 수 있는 8가지 실제적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ㆍ내가 섬기는 교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내 함께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상기해보라.ㆍ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통해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열매를 당장보기 어렵더라도, 복음은 항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ㆍ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살펴보라. 소소한 축복들, 성숙의 발자국들, 소폭의 성장을 경시하지 말라.ㆍ교회에 대한 감사를 기도로, 간증으로 그리고 장로 및 교역자들과의 대화로 발전시켜라. 불평이 확산되는 것처럼 감사도 퍼져 나갈 것이다.ㆍ성도들이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혹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는지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라. 때로 성도들이 이러한 것들을 나눌 기회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모를 수도 있다.ㆍ감사로 기도하며 믿음으로 살라. 성도들의 열매를 보기 전이라 하여도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하실 일에 대해 미리 감사함으로 교회를 섬기며 설교하고 기도하며 가르치고 심방하며 돌보고 훈육하며 목회 사역을 수행하라. ㆍ새신자들과 이야기하라. 그들은 종종 교회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온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혹은 그들이 교회에 왜 감사하는지를 신속히 나누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은 가장 신선한다.ㆍ교회에 대해 생각할 때 괴롭거나 좌절을 느낀다면, 불평을 멀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이키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세어보아라. 그리고 교회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이 사랑과 지혜로 교회를 돌보실 것임을 감사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Choose Gratitude Over Grumbling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감사
교회
불평
괴로움
절망
바울
베드로
태어남과 결혼, 죽음 그리고 설교
by 고상섭
2020-11-05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특징은 변증적 설교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변증적 설교의 예를 (10월 13일 변증적 설교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라) 살펴보았고, 이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팀 켈러 목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단순히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취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이 특징이다. 본문 안에서 발견한 성경적 명령을, 인간은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내주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그 은혜를 통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는 패턴으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적용한다. 그의 최근 저서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어떻게 본문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하고 적용하는지를 예를 살펴보자. 1. 태어남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현대인들은 자녀를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희생하고 싶지 않은 오늘날의 개인주의를 반영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양육하는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 2:35) 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을 양육하는 기쁨이 있지만 또한 마음에 칼이 찔리는 듯한 아픔도 경험한다는 말이다. 부모가 마음의 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녀의 새 생명으로 세상을 복되게 할 수 없다. 성경은 생명을 양육하려면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희생의 모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실제로 못과 가시에 찔리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가를 치르셨다. 이것이 기독교가 부모들에게 주는 위대한 자원이다(‘태어남에 관하여’ 44쪽). 결국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마음은 복음의 은혜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연된 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부모마저도 자식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기를 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 안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희생하지 않은 문화 속에서, 복음은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그 은혜로 내 삶의 정체성을 삼고, 그 은혜로 사람들에게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2. 결혼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 오늘날 결혼에 대한 두 가지 오해는 결혼자체를 자신의 구원으로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과 결혼을 통해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큰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에 대한 환멸이다. 순진무구한 연애 감정에 젖어서 배우자를 맹목적으로 받들어 모셔도 안되지만, 한편으로 너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고역이라고 분노해서도 안된다. 배우자를 우상으로 삼는 것도 위험하고, 배우자를 환멸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은 결혼관이다.이 두 가지 오해를 피하려면 복음으로 결혼을 재조정해야 한다.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관계로 묘사한다. 배우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하게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부정한 배우자인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또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부정한 배우자를 되찾기 위해 그녀를 소유하고 있던 남자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사 오시는 남편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부정한 배우자를 사랑하기 위해 값비싼 희생을 치르는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우리는 신랑되신 예수님을 배신하는 최악의 배우자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대속적 희생을 통해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면서 우리의 죄와 악의 문제를 대신지시고 해결해주신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신랑되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너는 나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다.” 이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결혼생활이 힘들어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예수님은 자기 땅에 왔지만 그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랑하심으로 우리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다. 까다로운 배우자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나는 최고의 배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계속 나를 덮어 주시며 용서하십니다. 이렇게 그분께 받은 사랑이 족하기에 나도 당신에게 똑같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그리스도를 배신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 죄인을 은혜로 품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의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혼이 우상이 되는 것을 막는 힘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된 배우자임을 인식하는 것이고 또한 불행한 결혼생활의 해답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결혼에 관하여’ 69~75쪽)3. 죽음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예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 죽음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경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이는 소망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고 말한다. 즉 소망가운데 슬퍼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분노하셨다. 그 분노는 결국 죽음이라는 것이 잘못된 침입자임을 말해준다.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인데 인간의 타락이 죽음을 가져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그분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자신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승리를 주시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만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장래의 은혜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마가복음 5장에 죽은 소녀에게 예수님은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얘야, 일어날 시간이다.”라고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이다. 학교를 가야 하는 아이를 깨우는 어머니의 음성과 같다. 예수님은 죽음 저편에 있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손을 잡으면, 네가 믿음 안에서 나를 알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도 간밤에 단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내 손을 붙들고 있다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그러니 안심하라” 죽음 앞에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실수는 너무 죽음을 크게 생각해서 슬퍼하기만 하거나, 죽음을 너무 작게 생각해서 무시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유익하지 않다. 성경은 소망 가운데 슬퍼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이다. 조지 허버트의 말처럼 “죽음은 한 때 사형집행인이었으나 복음 앞에서 한낱 정원사로 전락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지막 날에 모든 눈물을 다 씻어질 것이다. 우리가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행하신 일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문제의 해답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죽음에 관하여’ 54~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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