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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로부터 얻은 세 가지 유익
by 고상섭
2020-07-21
J.I.패커 목사님이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몇 년 전, 그가 시력을 잃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천국을 매일 묵상한다는 인터뷰를 보면서 임종의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의 소식을 듣고 하루종일 힘든 시간을 보냈다. 패커라는 소중한 신학자 겸 목회자가 우리 곁을 떠났다는 슬픔도 있었지만, 영적 거장들이 즐비했던 한 세대가 끝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나는 젊은 시절 신앙적으로 많은 방황을 했다. 조금은 이단같은 기도원에서 신앙을 시작했고, 또 잘못된 선교단체에서 제자훈련을 했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늘 혼란스러웠다. 그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좋은 신앙의 선배들이 쓴 저서들을 만났다. 존 스토트, 달라스 윌라드, 유진 피터슨, 헨리 나우웬, R.C.스프로울과 같은 영적 거장들의 책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동시대를 살고 있던 그분들이 하나 둘씩 떠나는 것을 경험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J.I. 패커의 소식은 그렇게 한 시대를 함께 했던 영적 거장들의 마지막 남은 한 분을 떠나 보내는 것 같아서 더 힘들었다. 패커는 ‘교회를 위한 신학자’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다. 신학을 위한 신학과 목회를 위한 목회가 아닌 신학과 목회에 다리를 놓아주는 저서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그분의 저서들을 통해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세우는 신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패커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저서들이 나의 인생과 목회에서 중요한 세 번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첫 번째, 거룩한 삶에 대한 가르침영적인 체험을 위주로 하는 기도원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선교단체식 제자훈련을 접하게 되었을 때 둘 사이에서 엄청난 혼란이 있었다. 특히 훈련으로 사람이 성장한다는 완전주의 성화론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늘 신앙이란 금욕적인 삶이라 생각했고 자기부인을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라 믿었다. 그때 패커 목사님의 간증을 읽었는데, 그는 옥스퍼드에서 기독교 서클을 다니면서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경험했지만 성화와 거룩에 대해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았고, 오직 믿음으로 평안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영적 진보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때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준 책을 만났는데 그것은 존 라일의 ‘거룩’과 존 오웬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종식’이었다고 말했다.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나에게 패커의 안내는 한줄기 빛이었다. 곧바로 존 라일의 ‘거룩’을 읽고, 거룩은 금욕이 아니며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믿음으로 자동적으로 변화 되는 것도 아니라 은혜와 감사의 반응으로서의 순종과 훈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패커의 ‘거룩의 재발견’을 통해 거룩에 대한 개념을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성화를 추구하는 거룩한 삶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주셨고 지금도 주시며 앞으로 주실 것처럼, 당신도 그분을 위해 전부를 바치라는 뜻이다. 이 철저한 헌신이 그분에 대한 당신의 감사와 애정을 표현하여 결국 그분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 완전한 헌신이야말로 당신이 그분께 드리는,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고 가능케 하시는, 진정한 예배의 본질이다.” (거룩의 재발견, 119)두 번째, 기도에 대한 가르침 제임스 패커와 캐롤린 나이스트롬의 공저인 ‘기도’에서 패커는 기도를 ‘의무를 넘어 기쁨으로 나아 가는 길’ (Finding our way through Duty to Delight) 이라 정의한다. 당시 청년들을 섬기고 있었는데 내가 기도하는 것과 또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일에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다. 나의 기도 생활도 풍성하지 못했고 또 청년들도 바쁜 시대를 살면서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 책은 먼저 기도라는 행위가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에서 ‘의무’(duty)라고 이야기하고, 그것이 ‘기쁨’(delight)으로 변화된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진리를 알려주었다. 일단 기도를 시작하면 쉽게 식어버리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기도할 때 제멋대로 몽상에 빠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무력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기도의 시작이며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나를 알게 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기도의 시작은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런 단계를 통해서 결국 기쁨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나의 기도생활에서 늘 넘지 못했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었고,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도 좋은 기초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초점을 잃어버린다. 멍해져서 생각도 없는 말을 늘어 놓으며 더듬거리고 마침내 침묵에 빠져버린다. 그 침묵을 이용해 기도하려고 하면 제멋대로 몽상에 빠져버린다 … 우리의 말은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 우리 모두 지극히 잘 아는 이런 어리둥절함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우리의 영적 체계 안에 있는 반(反)하나님적 혐오감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모든 교제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죄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 좋은 기도는 의무이자 기쁨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기도가 주로 의무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기도를 알고 실천하는 일에서 자라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을 성화시키실 것이며 그 결과 기쁨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 (기도, 13) 세 번째, 하나님과 교리에 대한 중요성 패커의 저서 중에 가장 유명한 책이 있다면 아마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일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Knowing about God)과 하나님을 아는 것 (Knowing God)의 차이점을 구별하면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무력해진 이유에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 하나님의 도(way)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에 대한 무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 지성이 현대의 풍조를 따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하나님 그분 자체로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해준다. 찰스 스펄전이 “당신 자신의 슬픔을 잊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가장 깊은 바다에 빠뜨려 보라, 그분의 무한하심 속에 빠져보라, 그러면 당신은 휴식의 침상에서 원기를 되찾고 다시 힘이 넘쳐서 일어나게 될 것이다.” 라고 선포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기력하던 나의 신앙에 뿌리부터 변화를 일으키는 힘을 공급해 주었다. 특히 ‘심판자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늘 불편하게 생각하고 설교할 때도 그런 본문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내가 지옥에 가서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행한대로 보응하시는 공의로운 심판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나오는 모든 심판들은 하나님이 너무 과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은 죽어서 지옥불에 들어가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내가 현대의 사조에 물들어서 성경의 표준이 아닌 세상의 합리성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있음을 결국 깨달았다. “만일 우리가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신 구원자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그 일에 침묵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세상과 자신의 문제로부터 해결해주시는 분으로 제시하는 것이므로 그분은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거짓 증인이 되는 것이며 또한 가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된다.”(Puritan papers 1, kindle 3658 location)패커는 ‘복음에 뿌리를 내려라’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교리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고 또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는 성경의 무오성을 확신하면서도 예의를 갖추어 토론하는 것과 인간의 이성이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또 그의 ‘청교도 사상’을 읽으면서는 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옛길’을 ‘선한 길’이라고 말씀했는지를 이해하게 됐다. 패커는 청교도의 깊은 우물로 나를 인도하는 두레박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패커는 다양한 저서들을 통해 희미해진 우리의 신앙에 회초리를 드는 것 같이 정신이 들게 하고, 회개로 이끌며 결국 하나님 그분의 존전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앞으로 이렇게 기독교 교리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신앙적인 기초를 놓아주는 신학자가 또 나올 수 있을까? 내 인생을 참된 복음의 길로 인도해주신 패커를 추모하며 앞으로 패커와 같은 귀한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드린다.
리더십
거룩의재발견
기도
하나님을아는지식
교리의중요성
청교도
Knowing_God
찰스스펄전
위대한 신학자 제임스 패커를 추모하며
by 이승구
2020-07-20
개혁신학자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가 하늘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의 사역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하면서 그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조금 정리해 보고자한다.나에게는 패커가 매우 조용한, 그러나 영국 교회(the Church of England, 성공회) 안에서 개혁신학적 목소리를 강력하게 외친 사람의 하나로 여겨진다. 7세 때인 1933년 9월에 당한 큰 사고로 두뇌에 손상을 입어서 항상 수줍어하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언급되는 패커는 될 수 있는 대로 논쟁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대개 성경적이고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때였다. 성공회 안에 함께 있던 복음주의적 학자 겸 목회자인 존 스토트보다 좀 더 온건하고 정통적인 입장을 대변한 패커는 정통파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지를 효과적으로 제시한 신학자였다. 후에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칼리지 신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할 때에는 “리젠트칼리지 말고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는 농담 섞인 조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세상 곳곳에서 강연하고 논문을 발표하곤 했다.기본적으로 패커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초기 책들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주권’에서부터 잘 나타나는 관점이다. 그의 책들은 다 성경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기를 바라면서 쓰였다. 특히 1960년대에 격월로 발간되던 ‘복음주의 잡지’(Evangelical Magazine)에 기독교가 갖춰야할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시리즈를 5년 동안 정기적으로 기고한 것을 모아서 출간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은 150만 부 이상 팔렸다. 사실 이 책에 그의 거의 모든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경을 아주 중요시하면서 성경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시대의 계시라고 하지 않으며, 이 성경에 근거해서 참으로 (그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에게 과거 신앙의 선배들인 청교도들이 좋은 모범이 되어 주었다. 과거의 그들처럼 성경에 근거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 된 것이다.특히,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그는 1978년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에 서명하고 발표했으며, 그 의미를 설명하는 소책자를 내기도 했다. 그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며 그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옹호한 학자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기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그는 기본적으로 성공회 교인(Churchman)이었다. 이는 영국에서 태어난 그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고전을 전공하여 문학사 학위를 한 후(1948), 런던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한 학교인 오크힐신학교(Oak Hill Theological College)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직임(instructor, tutor)을 감당했다(1948-49). 그 후, 영국 성공회 사제를 훈련시키는 기관의 하나인 옥스퍼드의 위클리프홀(Wycliffe Hall)에 입학하여(1949)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하고, 1952년에 부제(deacon)가 된 후, 1953년에 버밍햄 대성당에서 성공회 사제(priest)로 임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버밍햄의 하본(Harborne)에 있는 세인트존스교회에서 부목사직을 수행하면서, 옥스퍼드에서 리처드 벡스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D. Phil., 1954). 조지 너트올(Geoffrey Fillingham Nuttall, 1911–2007)의 지도하에 그가 쓴 논문 “리처드 벡스터 사상에서의 인간의 구속과 회복”(The Redemption and Restoration of Man in the Thought of Richard Baxter)은 40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방대했다.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는 영국 성공회 목사들을 훈련하는 기관에서 가르쳤고, 옥스퍼드 학부 때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인 지질학자 제임스 휴스턴(James Houston)의 초청에 따라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칼리지의 신학 교수로 갔을 때(1979)도 캐나다 성공회에 속한 밴쿠버 소재 세인트존스성공회(St. John's Vancouver Anglican Church)에 속해 있었다. 그는 성공회에 속한 복음주의파를 대변하는 인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성공회를 이끌려고 노력했다. 패커 자신은 영국에 있을 때나 캐나다에서나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성공회가 좀 더 복음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애썼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과적으로 성공회 자체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때 패커는 오래 전인 1966년 10월에 로이드 존스 목사가 복음주의자들의 전국 회의(the 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영국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모여 한 교단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 제안했던 바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때 로이드 존스 목사는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회들로부터 나와서 독립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의 연합체를 형성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 회의의 의장 역할을 하던 존 스토트 목사가 이를 공개적으로 반박함으로 영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패커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그 날 밤에 전화로 이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성공회 안에 남아 싸우면서 영향력을 발휘해 가는 편을 취했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도 성공회 대회(총회와 노회 사이의 의결 조직)에서 일종의 면직을 당할 정도로 성공회는 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말년의 패커는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패커는 대학 때 발견한 청교도에 푹 빠져서 청교도를 연구하고, 청교도를 전하고, 자신이 청교도로 살기를 원했다. 앞서 말한 대로 그는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성공회를 성경적으로 변화시키기 원했던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영국 교회 안에서 영국 교회를 변화시키기 원했던 청교도들을 아주 많이 닮았다. 그는 대학 때, 거의 실명한 은퇴 목사가 옥스퍼드 기독학생회(Oxford ICCU, 현재 IVP의 전신)에 기증한 많은 책들 가운데서 청교도들의 작품들, 특히 오웬의 글을 발견하여 읽고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오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며, 자신이 후대의 청교도(a latter-day Puritan)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흔히 조나단 에드워즈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말하는데, 그 청교도의 유산을 오늘날 새롭게 드러내는 일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의 하나로 패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그는 특히 신론과 구원론에서 개혁신학을 잘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리하여 형벌 받으셨음과 하나님의 주권 및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 신학의 모든 측면에서 개혁신학을 잘 드러낸 그는 참으로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였다. 특히 성령론에서 그가 미친 영향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초기 논문은 케직 사경회가 지향하는 성령 세례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성경적인 입장을 잘 제시한 것이었는데, 이는 후에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더 폭넓게 정리되었다. 패커는 성령님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가르친다. 그는 믿음으로 칭의받은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계속되는 성화를 추구하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함에 이를 수 없음을 성경과 역사로 증명한다. 기본적으로 패커는 성령님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며, 성경을 중심으로 살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의 실제를 제시하고 가르쳐 준다.한편, 패커는 미국 교도소선교회 사역으로 유명한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천주교 신부이자 공적 신학의 선구자인 리처드 노이하우스(Richard J. Neuhaus)와 함께 천주교인들과도 같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설명하는 내용을 편집하여 낸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함께: 공동의 사명 수행을 위하여’(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 ECT: Toward a Common Mission)라는 책에 기고했는데, 이로 인해 굉장한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다. 이 문제가 복잡한 것은 패커가 그가 강조한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에 패커가 개혁파적인 칭의 이해에서 물러섰다면 이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강력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하지만, 칭의 이해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이해가 성경적 입장이라는 것이 아주 확고하기에 이 ‘함께 한다’는 것이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운동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의 연합 운동은 맥아더나 스프로울 또는 케네디도 동의하는 바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아마 이 논쟁이 패커의 삶에서 가장 복잡하게 일어난 논쟁 같다. 이제는 이런 논쟁 밖에서 하나님의 품에서 쉬고 있는 패커는 이 땅에 있을 때보다 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패커가 제시한 성경적인 입장을 우리 시대에 잘 지켜내는 것이다. 패커같이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을 이 시대에 허락해 주셔서 20세기와 21세기에 하나님의 뜻을 잘 붙잡고 갈 수 있게 해주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리더십
제임스패커
하나님을아는지식
성공회
성경무오성
복음주의자
청교도
개혁주의자
제임스 패커, 이 시대의 마지막 청교도
by 신상목
2020-07-19
금세기 최고 복음주의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J.I.Packer) 캐나다 리젠트칼리지 명예교수가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그는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등과 함께 20세기 복음주의 대표적 신학자로 꼽히는데, 4년 전 황반변성으로 인한 실명 이후 천국을 향한 여정을 준비해왔다. 패커 교수는 영국 성공회 소속 목회자를 지냈고 이후 캐나다에서 활동했다. 90여 년 생애 중 70년을 저술 활동과 교수로 사역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주된 신학적 주제였다. 그는 교회를 향해서 회개와 거룩을 촉구했으며, 성령 안에서의 동행과 자신의 내밀한 죄와의 투쟁을 강조했다. 또한, 성경적 권위를 지키는 데에도 힘썼다.패커 교수는 자신을 ‘사람들을 진리와 지혜의 오래된 길로 부르는 목소리’로 지칭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것을 중시하며 최신 것은 다 옳다는 식의 현대적 가치관에 대한 의식적인 저항이었다. 1926년 7월 22일 영국 글로체스터시어 북부 트위닝 마을에서 태어난 패커 교수는 성공회 신앙을 가진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 성공회 배경에서 자랐지만 한동안 그는 명목상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7세 때 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그 상처 부위가 눈에 띌 정도로 평생 흉터가 남았다. 1944년 옥스퍼드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에 진학한 그는 기독학생회가 주관한 저녁예배에 참석하면서 그의 인생을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게 된다. 세인트알데이트교회에서 접한 복음적 설교를 통해 그는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도전을 받았다. 그는 찬송가 ‘내 모습 이대로’를 부르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내 모습 이대로’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한 흉터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사고를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고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옥스퍼드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고전학에 심취하게 된다. 그 무렵 패커 교수는 옥스퍼드의 내부 기독인연합회에 기증된 옛날 책을 정리하다가 16, 17세기 기독교 고전을 분류하는 일을 맡았다. 이때 먼지 쌓인 지하실에서 17세기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저작들을 만난다. 그는 거기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와 ‘죄 죽임’을 읽으며 청교도 신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는 신앙인이 됐다. 그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자신을 현대판 청교도로 생각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그가 저술한 ‘청교도 사상’은 청교도 신앙 입문서로서는 최고의 책으로 청교도와 성경, 복음, 성령, 생활, 목회 등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청교도들의 비전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실생활에서 발휘했던 적극적인 능력과 함께, 그들에게 대조적으로 명성은 주어지지 않았음을 서술하고 있다. 패커 교수는 청교도들의 사상과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비전을 잃어버리고 도덕적인 방종 속에 살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치료제’를 제공했다. 패커 교수의 첫 논문은 ‘믿음에 의한 칭의의 청교도적 논의’(1952)였다. 앞서 1948년 옥스퍼드대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그는 런던의 오크힐신학교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사로 강의를 시작했다. 1948-1949년에는 매주일 저녁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당시 50세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들었다. 패커 교수는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탄복하게 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마치 전기쇼크를 당한 것 같았다고 나중에 회고했다. 패커 교수와 존스는 서로 알게 되면서 가까워졌고 패커 교수는 존스에게 청교도적 관점을 이해시키고 적용하는 정기 모임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20년간 지속된 ‘청교도 콘퍼런스’의 시작이었다. 이후 패커 교수는 옥스퍼드대 위클리프홀에서 성직 서임을 연구했고 1952년 성공회 부제로, 1953년 버밍햄성당 사제로 안수를 받았다. 1954년 그는 옥스퍼드대에서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 연구’로 400쪽 짜리 논문을 제출했고 석사 학위와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박사 논문은 너무 길어서 그 이후부터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 논문 글자 수를 제한했다고 한다.패커 교수는 그 해 간호사였던 키트 뮬렛과 결혼하고 루스, 나오미, 마틴 등 세 자녀를 입양했다. 1955년 브리스톨로 이주한 패커는 틴데일홀에서 6년간 강사로 사역했다. 여기서 그는 ‘케직’이란 제목의 개혁주의 칭의 교리 논문을 저술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며 이신칭의 교리를 수호했다. 이는 패커 교수가 격론을 벌인 주제로 개인적 신앙 경험과 목회자의 마음에서 비롯됐다.칭의와 관련해서는 1986년 ‘칭의의 여러 얼굴들’ 등을 펴내고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의 교리를 수호했다. 그는 “끊임없이 이신칭의에 대한 오해가 있고 반대하는 의견이 있으며 형태가 왜곡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에게는 이 교리가 진실로 생명줄이자 송영이며, 찬양의 외침이자 승리의 노래”라고 밝힌 바 있다.그는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을 1958년에 출간했는데 이는 그의 첫 번째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개신교의 역사적 위치를 서술했다. 당시 팽배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답변이자 변증의 성격을 띤 이 책에서 패커 교수는 확고한 성경무오를 설파하는 것을 비롯해, 성경 말씀이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진리임을 힘있게 제시했다.흔히 근본주의라 할 때 좁은 의미로 우파적 기독교제국의 관점으로만 인식되고 있는데, 패커 교수는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 크리스천의 역사와 신학적 유산의 공통점을 서술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균형 잡힌 성경 해석과 합리성, 역사적 맥락 등을 기반으로 설명했다. 이후 펴낸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신다: 계시와 성경’(1965), ‘하나님은 말씀하셨다’(1979) 등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패커 교수는 1960년대 격월간 ‘복음주의 매거진’의 시리즈물로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안내하는 연속 기고문을 썼다. 나중에 이 기고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판됐는데, 이 책이 50만부 이상 팔리며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패커는 이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오늘의 교회를 약화시키는 뿌리가 된다”고 썼다.패커 교수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복음주의와 하나님의 섭리’(1961)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 사이의 긴장을 성경 속에서 반추하도록 했다. 이 문제는 오랜 역사 속에서 신학과 철학이 논쟁을 벌였던 지점이기도 하다. 패커는 이를 명료하게 설명했는데 복음 전파와 기도, 고난 등의 주제를 다루면서 풀어냈다.1977년 패커 교수는 R.C.스프로울, 존 게르스트너, 노먼 가이슬러, 그레그 반센 등과 함께 미국에서 콘퍼런스를 열고 국제성경무오협회를 구성한다. 이는 1978년, 성경은 무오하다는 시카고 선언을 이끌어내는 기초가 됐다. 패커 교수는 1979년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칼리지로 자리를 옮겨 사역하다 1996년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도 명예교수로서 강의와 강연 등을 이어갔다.패커 교수는 종종 자신이 영향을 받은 기독교 고전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추천 목록에는 장 칼뱅의 ‘기독교 강요’, J.C.라일의 ‘거룩’, 존 번연의 ‘천로역정’, 리처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 마르틴 루터의 ‘의지의 노예에 대하여’, 그리고 존 오웬의 저작들이 있다.이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고전은 ‘천로역정’이었다. 패커 교수는 천로역정을 매년 한 번씩 읽었는데 2016년 그가 시력을 잃을 때까지 읽었다. 일반 도서도 즐겨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가장 좋아했고 미스터리물과 탐정 소설류도 자주 읽었다. 특히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패커 교수가 후반기 생애에서 공헌한 사역 가운데 하나는 ESV(the English Standard Version) 성경 편찬이었다. 미국 일리노이주 휘튼 소재 크로스웨이북스 출판사 레인 데니스 박사는 패커를 새로운 성경 번역을 위한 총괄 편집자로 초청했고 패커는 여기에 부응했다. 성경 이름인 ESV도 패커가 직접 제안한 것이다. 이 성경은 현존하는 성경 중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영어로 직역한 최고의 성경으로 꼽힌다. ESV스터디바이블은 칼뱅의 개혁신학을 충실하게 반영한 연구 성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패커 교수의 마지막 사역 여정은 교회가 교리문답을 회복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인 되기: 성공회 교리문답’은 그 정점이었다. 패커 교수는 삶 속에서 구약의 ‘전도서’를 통해 지혜를 얻기도 했다. 젊은 시절 한때 냉소주의에 빠졌던 그는 전도서를 읽고 치유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도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며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지혜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교회에 대해 “개혁교회는 은혜의 교리와 은혜의 삶을 재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교회 안의 개인주의는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하나님의 목적은 주님의 영광을 기념하는 교회 자체에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현대 교회를 향해 네 개의 영어 단어로 권면했다.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시오”(Glorify Christ every way).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D.A.카슨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 수호,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중요성, 청교도 신학의 재발견 등이 패커 교수가 남긴 유산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판 청교도이자 마지막 청교도로서 그가 보여준 보수적 복음주의는 적어도 서구 교회에서는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동성결혼을 반대하면서 캐나다 성공회를 탈퇴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패커 교수는 캐나다성공회(ACC)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ACC는 자유주의 신학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세인트존스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 교회는 교단의 신학 성향과는 전혀 달랐다. ACC는 동성결혼을 찬성했을 뿐 아니라 성직자 수임 후보자도 동성애자를 받아들였다. 이에 세인트존스교회는 토론과 논쟁을 거쳐 ACC를 탈퇴했다. 세인트존스교회가 ACC를 탈퇴했을 당시 교회의 재산은 교단법에 따라 몰수당했다.패커 교수는 2008년 자신의 뉴웨스트민스터 주교 면허를 포기했다.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패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갈채를 보냈다. 카슨 교수는 “패커 교수가 논쟁적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거인들’이란 청교도적 유산에 속하지 않았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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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내면이 설교보다 중요하다
by 고상섭
2020-07-18
존 스토트의 ‘현대 교회와 설교’의 원제는 ‘Between Two Worlds’며, 설교란 두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존 스토트의 책이 나오기 이전 설교학의 관심은 Text, 즉 성경이었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주해하는지가 관심이었다면, 이 책이 출판된 이후에는 또 다른 세계인 Context(청중의 상황)도 고려해야 하는 주제라는 것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팀 켈러는 또 하나의 Text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설교자의 내면의 정서인 Subtext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자는 Text인 성경말씀을 바르게 주해해야 한다. 그리고 Context인 청중의 상황에 맞도록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내면의 정서인 Subtext다. 아무리 주해를 바르게 하고 청중의 상황에 맞는 적용을 하더라도 설교자의 내면에서 사람을 싫어하고, 편을 가르면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연합을 설교할 때 청중들은 은혜를 경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물론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면 가능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Subtext를 이렇게 정의했다. “서브텍스트는 설교자 메시지 저변에 흐르는 메시지다. 그것은 메시지가 의도한 진정한(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의미로서,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보다 깊다. 예를 들어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진술은 ‘저는 관심 없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하세요’라는 서브텍스트를 품고 있을 수 있다.”이 서브텍스트는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어조, 얼굴 표정, 자세, 제스처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숨길 수 없는 그의 내면의 정서다. 1. 내부 강화(Reinforcement)의 서브텍스트설교를 아름다운 말로 하지만 설교자의 내면에서 ‘우리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라는 정서를 품고 설교할 수 있다. 이런 메시지를 은연중에 퍼뜨리면서 소속감을 증진시키고 내부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들은 신학에 집착하여 '우리 교회'의 설교와 신학만이 최고의 신학이라는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다. 어떤 설교자는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말보다 ‘우리 교회’라는 말을 더 많이 하는 경우도 있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강화될지 모르지만 대체로 교만해질 위험성이 있다. 좋은 설교를 계속 듣는데 왜 사람들이 교만해질까를 고민하고 있다면 설교자 자신의 내면에 ‘내부 강화’의 서브텍스트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2. 과시(Performance)의 서브텍스트과시의 서브텍스트는 ‘나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다. 자의식이 강한 설교자는 Text와 Context보다 설교하는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 설교하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청중들의 관심을 그리스도가 아닌 설교자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열정적으로 설교를 하지만 그렇게 좋은 설교를 통해 자신이 환심을 사고 싶은 것이다. 과시의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으면 설교자 자신은 유명해지고 높아지지만 청중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리스도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오직 설교자에게 집중하는 영적 교주의 형태로 변화되어 간다.3. 훈련(Training)의 서브텍스트훈련의 서브텍스트는 ‘이 진리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다. 목표는 듣는 이들의 지식을 키워서 그들이 바람직한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이런 서브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설교자는 다른 사람과의 차별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전에 듣지 못한 새로운 것’을 설교하고 싶어한다. 새신자나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신학과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단단한 음식’을 지속적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탁월하고 새로운 가르침에 집착하기 때문에 때로는 신학적으로 오류가 있어 보이는 해석들도 새롭기만 하면 과감하게 설교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서브텍스트를 가진 설교자의 교회는 주로 엘리트 중심의 지성적인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복음을 통해 연합되는 교회가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로 고립되어 끝없이 어려운 신학적 주제들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이 복음을 거부한 이유는 그들이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훈련의 서브텍스트를 가진 설교자의 내면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4. 예배(Worship)의 서브텍스트설교자가 가져야 하는 바람직한 서브텍스트가 바로 ‘예배의 서브텍스트’다. 이 서브텍스트의 본질은 ‘그리스도 정말 위대하지 않아요?’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얼마나 더 경이로운 분인지를 보세요! 당신의 모든 문제가 결국 이 진실을 직시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겠나요?”팀 켈러는 이것이 진정한 설교의 심장이라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핵심은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그 전에 설교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싶은 간절한 열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는가?’ 설교하는 바로 그 순간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께로 침잠하고 있는가? 입을 열어 그분이 찬양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진심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있는가? 이런 일들이 실제 우리 설교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단지 설교 준비만 하는 게 아니라 매일 기도와 묵상을 통해 정기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들이 깊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높이고 싶은 간절한 열망은 설교단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설교자로서 나의 간절한 소원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싶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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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 은총의 길 따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by 정현구
2020-07-08
사회적 거리두기가 수개월 째 계속되면서 사람과의 마음의 거리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고, 영상 예배를 계속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마저도 멀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될수록 정작 더 필요한 것은 사람과의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이고, 특히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좁히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 사태는 주일 예배를 이전처럼 드리지 못하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거리를 점점 멀게 만드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 거리를 좁힐 수도 있다. 알다시피 인간은 그동안 첨단 기술 문명을 만들면서 하늘까지 잔뜩 높아졌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고 자연까지 조종할 수 있는 신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신의 자리까지 올라감으로 스스로 호모데우스가 된 인간들이 코로나 사태를 통해 바이러스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게 되었다. 우주를 정복하는 존재라고 자랑했던 인간이 우주의 먼지와 같이 연약한 존재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인간이 흙이요 먼지라는 점을 얼마나 잊고 살았는지 모른다. 구약성경의 ‘아담’이란 이름이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인간에 관한 학명인 ‘호모 사피엔스’의 ‘호모’도 ‘흙’을 뜻하는 라틴어 ‘후무스’에서 나왔듯이 인간이 지혜롭다고 해도 결국 흙임을 벗어날 수 없는데 그 기본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것이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인간의 본질을 코로나 사태가 다시 자각하게 해준 것이다. 사람과의 거리두기로 인해 이전보다 혼자 길을 걸으면서 흙을 보고 밟게 되었다. 이전까지 저 흙을 내가 아닌 타자요 물체요 이용의 대상일 뿐이라고 여겼는데, 사실상 저 흙이 인간의 본질이며 사실상 나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이 각종 화려한 색의 옷을 입고 있지만, 인간은 흙의 색인 갈색을 결코 떠날 수 없음을 자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흙과 먼지임을 알고 낮은 자리에 앉으면 비로소 그 낮은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파스칼은 31세에 끔찍한 마차 사고를 당했다. 그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는데, 그 사건을 통해서 그는 죽음이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자기 곁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았다.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위대한 존재지만, 한 방울 물로도 죽을 수 있는 매우 연약한 갈대임을 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그의 깊은 자각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만든 것이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는 파스칼의 마차 사고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스칼이 마차 사고를 통해 인간의 유한함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갔던 것과 달리, 현대인들은 코로나 사태를 통해 그런 성찰을 갖지 못하고 있다. 모르기는 해도, 코로나 백신을 발견하면 인간은 다시 자신이 흙임을 망각하고 신의 자리로 올라가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교만의 높은 꼭대기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길을 결코 찾을 수 없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아무것도 없는 광야의 낮은 자리에 앉았을 때 그 위로 하늘의 문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왔다. 야곱이 얍복강의 낮은 자리에 앉아 자아가 깨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던 것이다. 갈색의 땅 위로 파란 색의 하늘이 펼쳐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예배당에 모일 수 없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이 막힌 것 같지만, 이 사태를 통해 우리가 흙임을 깊이 자각하며 낮아진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이 펼쳐진다. 이런 갈색 은총의 길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가 도시 문명 속에서 살면서 잃어버린 또 하나의 색깔이 있다. 그 색은 도심의 화려한 색깔에 도취되고,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 눈이 팔려 보지 못했던 자연의 색깔인 녹색이다. 우리는 건물로 된 성전에 매우 익숙하다. 그 성전에 매주 올 수 없어서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또 하나의 성전이 있다. 바로 자연이다. 자연은 인간이 만든 건물 성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장엄한 성전이다. 그 속에는 인간만이 아닌 수많은 종류의 피조물들이 있고, 인간의 언어만이 아닌 다양한 피조물들의 언어들이 들린다. 그 속에는 파도 소리,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들이 거대한 합창단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속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과 나무 잎새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미한다. 자연을 단순한 물체나 이윤의 도구로만 봤던 현대인의 눈에는 이런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필립 얀시의 말처럼 “우리의 시야는 잔뜩 흐려져서 물질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필립 얀시, ‘기도’ 32쪽). 그러나 자연을 또 하나의 성전으로 깨닫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대한 우주적 예배에 참여한다면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구약의 시편 기자가 그랬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편 19:1-4). 시인은 거대한 우주 속에 창조주를 향하여 노래하는 수많은 언어들이 만드는 거대한 합창을 듣고, 자신도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우주적 예배에 찬양하면서 참여한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시 98:4) 거대한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지만, 도심에서 만나는 소박한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콘크리트 길가에 핀 작은 꽃, 계절마다 변하는 나뭇잎 색을 보면서, 도심에 찾아와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면서 창조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공중의 새와 들의 꽃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영적 오솔길을 매일 걸으셨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코로나 사태 이후 자연이 더욱 생기를 얻게 되면서 그 속으로 열린 영적 오솔길들이 더 많아졌다. 이전처럼 자연을 사물로만 보지 말고 또 하나의 성전으로 보면서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녹색 은총의 길이다. 우리는 창조 세계를 보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지만, 녹색 은총의 길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해주는 곳까지는 인도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는 곳까지 이끌어가지는 못한다. 창조의 장엄함을 보게는 하지만, 파괴된 창조 세계와 그 속에서 죄로 병든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지는 보여주지 못한다. 훼손된 자연 세계의 탄식과 고통을 해결하시는 구원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지는 못하기에 또 다른 길이 필요하다. 그 길은 갈보리 언덕에서 시작된, 그곳에서 흘린 십자가 보혈이 만든 새로운 길이다. 그 길은 자연이 우리를 인도하는 성전의 뜰의 한계를 넘어 성전 휘장을 가르고 지성소 안까지 인도한다. 그 길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감탄을 넘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이끌어간다. 녹색 은총의 길이 피조물 된 우리들을 창조주 하나님께 인도한다면, 적색 은총의 길은 죄인 된 우리들을 구주 하나님께로 이끌어간다. 십자가 보혈이 만든 길은 우리를 구원의 은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한다. 매일 말씀을 펼치면 그 속에 십자가의 은혜의 길이 열려 있다. 그 길을 따라 회개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매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적색은총의 길이다. 우리는 다양한 상황에 처하며 산다. 어떤 때는 길이 열리고 어떤 때는 길이 막힌다.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아 버린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언제나 어디서나 열려 있다. 우리의 눈이 감겨 있을 뿐이다. 지금도 갈색, 녹색, 적색, 삼색 은총의 길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삼색 은총의 길을 찾기를, 그 길을 통해 모든 때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체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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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 신앙 교육을 위한 예기치 않은 선물
by 김형익
2020-06-27
코로나 사태는 교회에 적어도 두 가지 강제적 변화를 직면하게 했다. 첫째는 예배당이라는 ‘거룩한’ 장소로부터 벗어나라는 요구였고, 둘째는 ‘전문 목회자’에게 의존하는 신앙 생활에서 벗어나라는 요구였다. 우리가 보통 교회라고 부르는 예배당을 벗어난 예배, 신앙 교육, 그리고 교제를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는 우리는 정말 당황했고 지금도 놀라고 있는 중이다. 또 목사로부터 독립된 신앙 교육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런 변화는 코로나 사태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받고 싶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 선물들이다.영국의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 1920-1983)는 아프리카 소년들의 성인식을 관찰하면서 경계성(liminality)과 공동체성(communitas)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 개념들은 현재 우리 교회가 겪고 있는 변화를 잘 설명해주며, 심지어 긍정적인 면들을 전망하게 한다. 경계성은 이전의 안락함이 깨지고 위험을 무릅쓰며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위기의 상황을 말하는데, 사람들은 이런 경계성 상황에 이르게 될 때 새로운 의미의 공동체 정신 혹은 공동체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최근에 도서출판 아르카에서 번역 출간한 앨런 허쉬의 ‘잊혀진 교회의 길’ 7장은 이 개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을 통해, 지금 이런 경계성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소위 초유(初有)의 경험들이다. 주일 공예배를 각자의 집에서 영상으로 드리는 경험, 주일에 다수의 교인들이 예배당에 가지 않는 경험, 영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경험들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리더들의 마음에 발생하는 것은 염려다. 교회의 예산에는 문제가 없을까? 교인들이 이탈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존재할 수 있을까? 등등 수많은 염려거리가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사실 우리는 이런 과정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진짜 신학 작업을 하게 된다. 위의 질문들은 본질적으로 신학적 질문들이고, 이런 신학적 질문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왔으며,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 책상 위의 신학이 아닌 살아있는 신학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이런 진지한 고민과 질문과 신학함은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든다. 신약 교회가 세워졌던 처음 300 여년의 시대로 돌아가보자. 그들에게 우리가 말하는 소위 건물로서의 교회가 존재했는가? 그 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메가처치들이 존재했었던가? 그들은 개인의 집에서 수용 가능한 소수의 가정들이 모이는 형식으로 소위 공예배를 드렸다. 또 하나 생각해보자. 그 시대에 과연 오늘날과 같이 소위 신학교를 나와 석사 학위는 기본이고 박사 학위를 소지한 전문 목회자들이 넘쳐났는가? 그렇지 않았다. 소수의 사도들로부터 시작한 신앙 교육은 사도들에 의해 길러진 디모데나 디도 혹은 마가나 누가와 같은 제자들, 그리고 다시 그들로부터 충성된 사람들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계승될 수 있었다(딤후 2:2). 그들 다수는 사실 무면허 설교자들이었다!초기 300년의 신약 교회를 생각해보니, 이것이 코로나 사태로 당황하고 있는 지금 교회에 뭔가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것 같지 않은가? 혹시 우리는 교회의 본질로 더 가까이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은 아닐까? 지금의 코로나 위기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참된 공동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경계성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그런데 이런 희망적인 전망을 가지려는 우리를 막아서는 게 하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하고 나아가던 방향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방향 수정 없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은 지나칠 정도로 예배당이라는 건물에 예속되어 있었고 전문 목회자들에게 의존적이었다. 많은 지역 교회에는 경건한 어른들이 거의 없고 몇몇 전문 목회자들이 쉴 새 없이 돌봐야 하는 영적 유아들이 가득하다. 이렇게 많은 지역 교회가 육아(babysitting) 목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와중에도 그 많은 유아들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식 건물들은 끊임없이 쌓아올려야 했다.나는 목사 직분의 사역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신약 성경은 분명하게 목사의 직분을 말씀하고 있고 그 직분이 감당해야 하는 말씀 사역의 중심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와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는 더더욱 그 말씀 사역의 능력이 필요하고 요구되는 시기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가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부모와 가정에게 있습니다. 교회가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일차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점에서 우리 교회는 상대적으로 불친절한(?) 교회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원리다(신 6:1-9; 엡 6:4). 교회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일 때, 자녀들에게 교리 문답을 가르치며 설명해주고 자녀들은 일주일 동안 그 내용을 가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있는 대로 매일 복습하고 예습해야만 한다. 이렇게 할 때, 그 신앙 교육은 삶 속에서 배우는 말씀이 되고 삶 속에서 형성되는 신앙이 된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자녀들에게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가르치는 부모들의 영적 실력이다(딤전 1:5). 지금까지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여 많은 교인들을 모으려는 지역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자녀들을 위한 신앙 교육 프로그램들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자녀들을 주일에 교회의 교육 부서에 맡기기만 하면 자녀들의 신앙 교육은 저절로 되는 줄 알았던 부모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는 이 모든 것들을 멈춰 세우고 말았다. 이것은 가정이 교회로부터, 부모가 전문 목회자로부터 자녀들의 신앙 교육의 책임을 되찾아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따라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부모들의 모범을 따라 신앙이 형성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우리가 ‘경건한 어른’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때고, ‘경건한 어른’이 되어야 할 소명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나는 지난 아티클 [그라운드 안의 사람, 그라운드 밖의 사람]에서 내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막상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려다 보니 너무나 준비되지 않은, 너무나 함량미달(含量未達)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성경과 교리의 지식도 지식이려니와, 거짓이 없는 신앙의 모범이야말로 갑자기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지 않은가?그러나 낙심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절감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이미 멋진 시작을 한 셈이니까 말이다. 이제 당신은 물러서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경건한 어른’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한 셈이다. 당신은 전과는 다른 태도로, 주의 말씀에 천착하고 이전에 배웠던 교리들을 묵상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라. 우리가 기억하고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은, 믿는 당신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기가 막힌 진리의 교사고 주의 말씀을 통해 영혼을 낳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전능자라는 사실이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봉사를 하지만 집에서는 신앙의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부모를 통해서 ‘기독교는 코미디’라는 사실을 점점 확신하게 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주일에 교회에서 들었던 단편적 이야기들이 전부인 자녀들이 대학에 가면서 교회를 떠나게 되는 현상은 우리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부모의 가르침과 신앙적 모범을 보면서 형성되는 자녀들의 신앙은 위선적이거나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변질되기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노출되고 숨길 수 없는 가정에서 신앙이 가르쳐지고 형성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모데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우고 신앙이 형성됨으로써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을 사도 바울이 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딤후 1:5). 가정의 가장들이 영적 가장 역할을 회복하고, 부모들이 영적 교사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의 자녀들이 진짜 최고의 신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우리 앞에 열려있다.여전히 통제할 수 없이 퍼져가는 코로나 팬데믹 현상 속에서 당황하고 있는 세상에서, 이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할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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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가 말하는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
by Matt Smethurst
2020-06-24
성경을 어떻게 설교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책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에 관한 책들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런데 '팀 켈러의 설교’(두란노, 2016년)는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팀 켈러는 “설교란 단지 텍스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움직이는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설교자들이 첫 번째 목표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두 번째 목표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과 창의력을 쓸만한 여력이 없는 것을 너무도 자주 봤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 책은 미주가 무려 234개에 달하며, 신실한 설교의 기본인 강해, 예화, 적용을 설명하고 있으며, 우리가 처한 오늘날의 문화가 주는 도전과 기회가 무엇인지 논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설교에서 예수님을 왜 구원의 핵심으로 선포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논증한다. 후기 현대를 살아가는 현재 서구인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토록 방대한 통찰과 실제적 조언을 주는 설교 서적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설교 매뉴얼'이라기 보다 '선언문'에 가까운 이 책은 설교자들뿐 아니라 후기 기독교 사회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신실하고도 효과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TGC의 공동 설립자며 뉴욕시에 위치한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섬겼던 팀 켈러 목사와 만나 위대한 설교의 요소, 상상력을 포착하는 법, 상황화 전문가로서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등 많은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Q. 좋은 설교와 위대한 설교의 차이가 뭡니까? 그 차이가 중요한 것일까요?A. 좋은 설교란 성령이 함께 하시는 설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55번을 보면 설교에서의 성령의 역할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성령은 조명하시고, 확신시키시고, 겸손케 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 밖으로 나오게 하셔서 그리스도께로 이끄시지요.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케 하시며, 사람들을 강건케 하셔서 유혹을 이기게 하시며, 은혜 안에 그들을 세우셔서, 믿음을 통해 오는 거룩과 위로 안에 그들의 마음을 세우십니다. 그럼 ‘위대한’ 설교란 뭘까요? 하나님의 영이 기쁘신 뜻 안에서 방금 말한 이 모든 작용을 증진시키고, 일으키시고, 강화시키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설교를 말합니다. 설교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비상하게 느껴지고, 참된 회심이 일어나며, 영구히 변화되는 삶들이 일어나는 것 등이 바로 위대한 설교의 가시적 표지들입니다. 우리 힘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설교 준비에 시간을 두 배로 쓰면 성령이 두 배로 역사할 것이라 지레짐작해선 안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으로도 이를 통제하거나 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철저히 준비하고 기도도 많이 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가능성도 커지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설교’는 설교자 자신의 노력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지만, ‘위대한 설교’는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Q. 본문을 설교하되 그리스도는 선포하지 않는 설교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리스도는 선포하되 본문은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양극단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 있을까요?A.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설교에서 너무 일찍 그리스도를 다루지 말라. 하지만 꼭 그리스도를 다루라' 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선지서 본문으로 설교를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정점에 이르는 어떤 지칭이나 주제가 보일 때 너무 빨리 그쪽으로 달려가지 말라는 뜻이지요. 저자가 그의 첫 번째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원래 메시지가 무엇인지 밝혀내고 연구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인 후에야 신구약을 관통하는 주제를 잡아내고 어떻게 그리스도만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Q. 많은 이들이 상황화(contextualization)는 단순히 수용하는 것(accommodation)이라 생각하는 데 반해, 목사님은 상황화는 궁극적으로 상대와 대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clarity)이라 주장하시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이런 건강한 상황화의 모본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드신 이유도 설명해 주십시오. A. 상대방의 오류를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첫째,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와 예화를 써서 상대방이 나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한 후, 둘째, 그때 가서야 그들의 신념과 확신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내재된 지식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이 믿는 전제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딜레마와 자기모순 안에 갇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오직 예수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빈곤에 허덕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조나단 에드워즈가 했던 설교들, 그리고 그가 교육 받고 부유했던 유럽인들에게 했던 설교들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납니다. 에드워즈는 각 설교에서 다른 단어, 다른 개요, 다른 논증법, 다른 은유와 심상을 사용했습니다. 정말 놀랍지요. 그게 바로 상황화입니다. Q. 동시대인들과 대화하기 위해 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주눅이 들어있는 설교자가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어디서부터 독서를 시작해야 합니까?A. 설교자는 자신이 속해 있는 문화를 매일 유심히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두껍고 어려운 책으로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회 수가 수십만에서 수백만에 이르는 유튜브 뮤직 비디오를 보면 그 비디오들의 대부분이 결국은 우리의 뿌리를 형성하는 정체성, 자유 등에 관해 우리 문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 찬찬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 메시지들이 선명해집니다. 먼저 읽을 책으로는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의 'How (Not) to Be Secular'나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A Secular Age'를 추천합니다. Q. 목사님은 사람들의 지성에 새로운 논증을 제시해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상상력에 새로운 아름다움을 먹여줄 때에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셨지요. 예들 들어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논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설교를 위해 상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나 습관들이 있는지요? 이 부분에 도움이 될 만한 추천 자료들이 있습니까?A. 아주 오래된 것들을 읽으세요. 동화, 신화, 전설, 모험담,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그중 많은 것들의 뿌리가 비기독교적이긴 합니다. 하지만 선과 악, 죽음, 희망, 그리고 사랑에 관한 것들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는 심오할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하지요. 시를 읽으세요. 옛 찬송가를 부르세요. 찬송가 역시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고전 영화를 보세요. 너무 많아서 말씀 드리기가 좀 어려운데, 정말 훌륭한 작품들이 최소 수백편에 이릅니다. 영화 자체는 그저 그래도 정말 멋진 장면들이 나오는 영화들은 더 많습니다. 이런 영화들이 우리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지요. 그리고 기도 중에 당신에게 감동을 주었던 생각들을 설교에서 언급하세요. Q. 목사님은 목회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 자체가 영적 성품을 증폭시킨다고 하셨어요. 또한 목회 사역은 사람들을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더 안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도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설교자들은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A. 설교자는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보다도 매우 풍성한 기도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럼 평신도는 목회자만큼 영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그건 이중 잣대가 아닌가요?'라는 반발이 나올 수 있겠지요.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엄청난 기도 생활 없이 설교자가 되려고 하면, 다른 직업들과는 달리, 필연적으로 그 목회자는 위선, 표리부동, 마음의 완악해짐으로 치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Keller Helps Preachers Reach the Heart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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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을 설교하라(1)
by 고상섭
2020-06-16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일어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정작 실제 설교에서 적용하려고 하면 여러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설교의 적용 부분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에 급급해서 제대로 된 적용을 선포하지 못할 때도 있다. 브라이언 채플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나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라는 좋은 교재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팀 켈러는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수를 추모하며 만든 책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배우면서 어려웠던 점과 그것을 극복했던 소감을 나누었다. “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다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해석학적 측면에서는 건전하고 고무적으로 하지만 그 본문이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의 적용팀 켈러도 우리와 동일하게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고 나름의 해답을 찾았다고 말한다. 처음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은 본문 안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이 문제는 단순히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많이 연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신학과 조직 신학의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을 오고가는 연속성에 대한 성경 신학적 이해가 깊을수록 본문 안에서 복음 조각을 발견해 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또 브라이언 채플이 말하는 FCF(The Fallen Condition Focus: 인간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 맞추기)를 드러내야 한다. 모든 본문에서 일대일로 그리스도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 속에 나오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 주고,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팀 켈러가 말하는 고민은 좀 더 근원적인 고민이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주제를 어떻게 성취했는지를 이해하고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도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는 적용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적용이 풍성하지 못하고 매번 ‘그리스도께로 나오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기 쉽다. 팀 켈러는 그런 적용의 문제에 있어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팀 켈러 설교의 적용원리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에드먼드 클라우니나 브라이언 채플과 조금 다른 면이 있다. 2006년 4월 고든코넬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한 ‘Preaching To the Heart’(마음에 닿게 설교하기)에서 Unintentional Preaching Models (의도하지 않는 설교 모델)을 강의했다(Tim keller, Ockenga Institute Pastor’s Forum 강의안 4쪽). 팀 켈러는 위의 도표를 통해 오늘날 시행되는 설교를 일곱 가지 타입으로 나누었다. 1. A-B : 정보 전달식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의 메시지) 2. A-C : 알레고리적 설교 (성경 텍스트–그리스도의 성취) 성경 주해가 없다. 3. A-D : 교훈적 설교 (성경 텍스트-적용) 4. A-B-D : 조직 신학적 주해 설교 (청교도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 메세지-적용)5. A-B-C : 구속사적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그리스도의 성취)6. A-B-C-D: 구속사적 적용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그리스도의 성취-적용) 7. A-B-D-C : 마음에 닿게 설교하기 (Preaching to the Heart)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팀 켈러가 말하는 6번에 해당한다. 그러나 팀 켈러는 A(성경의 텍스트)에서 B(저자의 메시지)를 아는 주해의 과정을 거치고, D(적용)로 나아간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선포하고 나서, 그러나 인간은 그 기준에 따라 살지 못한다는 FCF를 드러낸다. 말씀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직면하게 해주고 그 대안으로 우리는 할 수 없지만 그 일을 성취하신 분이 계신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즉 C(그리스도의 성취)를 드러낸다. 그리고 팀 켈러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A-B-D-C-D의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 성경의 메시지(A)에서 주해의 과정(B)을 거치고,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D)을 드러내 주고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들(C)을 통해서 그 은혜로 인간이 순종할 수 있다(D)고 결론을 내린다. 단순히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설교를 끝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함으로써 그 은혜로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배제한 도덕적 설교와 다르고 그리스도만을 선포하는 구속사적 설교와도 다르다. 인간의 마음의 중심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 줌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사랑의 우선 순위를 바꾸어 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런 방식은 좀 더 풍성하고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준다. 본문을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윤리적인 적용이 되어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인간이 할 수 없다는 FCF를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성취와 은혜를 설교한 후에 적용으로 이끌어 가면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의 선포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영역이 바로 적용 부분인데, 팀 켈러는 본인의 방식으로 그것을 해결한 것이다. 팀 켈러 설교의 예 마가복음 10장에는 부자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 영생에 대해 질문한다. 예수님은 그의 진정한 주인이 재물임을 아시고, 그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 정도로 안다면 자신의 것을 버리지 않고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만약 도덕적 설교를 한다면 부자 청년은 재물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버려야 한다고 선포할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돈이 가진 힘이 상당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돈이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돈 앞에 늘 연약한 존재다. 주님을 위해 사는지 돈을 위해 사는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재물을 하나님의 영역으로 올려놓기도 한다. 그런 재물의 힘과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팀 켈러는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시면서 부유하시지만 가난한 인생을 사셨다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예수님의 인생은 우리를 위해 가난한 인생이 되셨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희생하신 삶이었다. 이 복음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그동안 돈을 나누지 못했던 두려움과 교만에서부터 자유하게 된다. 돈을 나누지 못한 이유는 그 돈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이다. 내가 일해서 받은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누기가 아까운 것이다. 또한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나서 내가 돈이 필요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이 또한 나누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이 두 가지 장애물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복음 안에서 해결된다.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분이 나를 지키실 것이라는 안정감과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복음 안에서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은 재물이 많아서 고민하는 부자 청년이 아니라, 진정한 부자 청년이었다. 하늘의 모든 보화를 가지신,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진정한 부자 청년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서 가난해지셨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마지막 적용에서 이렇게 선포한다. “돈의 부정적인 힘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전부를 내주신 진정한 부자 청년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능력은 권력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 나처럼 권력과 돈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간다. 너는 어떻게 살려느냐?'” 팀 켈러는 재물을 나누는 삶을 살라고 분명하게 선포하며 적용한다. 그러나 단순한 적용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이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는 적용이 된다. 우리의 모든 순종은 은혜의 반응이며 감사의 고백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팀 켈러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단순한 설교의 방법론만은 아닐 것이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위해 고민하며 답을 찾아가는 그의 태도를 닮아가야 할 것이다. 설교자들이여! 이제는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을 설교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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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설교의 일곱 가지 특징
by 전재훈
2020-06-13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팀 켈러는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마음은 이야기를 원료로 사용하여 성장한다. 어떤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세계관과 가치관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팀 켈러의 설교는 창조, 타락, 구속, 회복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인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인간은 타락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하여 주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이야기의 흐름이다. ‘자유’에 대해서 설교한다고 가정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있었는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자유의지가 사라지고 죄의 노예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는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죽음을 넘어 부활을 소망하게 되었고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진짜 선을 행할 능력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식이다. 긴장을 활용하기팀 켈러는 율법과 은혜를 모두 설교한다. 율법의 빛 아래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밝혀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한다. 그 두려움에 은혜를 선포하여 안도할 수 있게 만든다. 율법과 은혜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런 긴장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거룩과 자비, 공의와 사랑, 심판과 용서 등으로 나타낼 수 있다. 거룩하심 앞에서 두려워 떠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떠는 자에게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며, 심판자 앞에서 사형 언도를 기다리는 자에게 무조건적인 용서를 선포함으로 감동에 이르게 한다. 팀 켈러는 이런 긴장을 크게 만들려고 인간의 죄악을 깊이 있게 다룬다. 대표적인 방법이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우상을 건드리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안정, 인정, 통제, 권력의 우상이 존재한다. 이것이 겉으로는 상당히 좋은 것들로 나타난다. 가정, 자녀, 명예, 선함, 건강, 아름다움, 성공 등이다. 하지만 이런 겉으로 드러난 표면적 우상이 인간에게는 궁극적인 목표가 되기 싶다. 인간의 마음에 근원적인 우상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을 건드림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결코 피할 길 없는 죄인임을 인식시킨다. 팀 켈러는 또 다른 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선명하고, 특별하고, 탁월하며,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어 낸다. 인간이 가진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사랑, 인간의 역사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완벽한 성품으로 묘사한다. 그는 복음을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고, 인간의 갈망을 극단적으로 완성한 결과물로 설명함으로써 누구나 경이로운 마음으로 그 복음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의 죄악과 복음의 격차를 하늘과 땅 만큼 크게 벌려 놓음으로써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해 주고, 오직 은혜로만 받을 수 있는 값진 선물임을 깨닫게 만든다. 상황화된 언어 사용하기인간의 죄악을 드러내는 데 종교가 가진 언어들로는 한계가 있다. 전혀 내 이야기로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기 위해 현대 문화를 파헤치고, 그들의 언어와 예화로 설명한다. 팀 켈러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현대 문화가 추구하는 이상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자유, 정체성, 행복, 도덕, 인권 등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도전을 주는 형태를 띤다. 팀 켈러는 설교를 하거나 책을 쓸 때 인간의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시작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지향점과 문제점을 설명할 때 사람들의 마음은 팀 켈러의 이야기에 사로잡힌다. 이상향이 가지는 난제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는 하나 인류 역사가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했어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리 좋은 이론과 방법이 나와도 그것을 실행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결국 일을 잘못된 결과로 이끌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바로 그 지점, 이루고자 해도 이뤄지지 않는 간극 사이에 서서 그 원인을 파헤치고 복음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서 자아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큰 공감대를 얻어내고 있다. 마음을 겨냥하기인간의 마음에는 지정의가 모두 들어있다.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마음에 어떤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행동이 결정된다. 팀 켈러는 이런 인간의 마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팀 켈러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마음에 소원하던 궁극적인 욕구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다. 가장 깊은 안정감,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 내면의 깊은 곳까지 만지는 사랑, 연약함까지 모두 감싸 안는 인정, 깊은 갈망을 이뤄주는 천국 등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값없이 주어진 것임을 알게 함으로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한 몸부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그로 인해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한다.복음을 뜨겁게 제시하기팀 켈러는 인간의 마음을 구부리는 정도의 따뜻한 복음이 아니라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운 복음을 제시한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심에도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와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았던 예수를 소개한다. 그 예수가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분이셨는지를 소개하고, 질병과, 귀신과, 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위대한 하나님으로 나타낸다. 특히 인간이 저질렀던 수많은 죄악들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얼마나 많은 유혹들을 견뎌 내셨으며, 강한 자 앞에서 담대하고, 죄인들 앞에서 온유하며, 부정과 불의 앞에서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 주셨음을 알게 한다.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지녔으며 가장 위대한 존재임에도 가장 큰 저주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분임을 보여 준다. 주님이 그런 완벽하게 선한 삶을 살다가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선한 삶의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고 악한 삶의 결과를 주님이 담당하셨음을 보여준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다시 오실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과거의 한 시점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이야기로 들려준다. 팀 켈러는 위에서 아래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밖으로 (십자가 죽으심으로 죄인의 내면이 변화하여 삶으로 드러남), 그리고 미래에서 현재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신자의 앞날을 기대하게 됨) 그 복음을 실체적으로 적용시킨다. 특히 고난과 악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난과 악에 맞서는 데 동참하신 분임을 알려줌으로써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절대자이심을 깨닫게 해준다. 팀 켈러가 소개하는 주님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서 주님의 마음으로 새롭게 빚어지도록 만든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여줌으로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고 더불어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는 존재인가를 보여줌으로 우리의 마음을 담대하게 만들어 준다. 이기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인간의 마음이 겸손함과 담대함으로 바뀔 수 있게 한다. 설득적으로 변증하기코넬리우스 반틸은 하나님께 의존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선악과를 두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유혹 사이에서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판단함으로써 타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 결과 자기중심적이며 독립적인 사고 체계를 갖게 된 인간은 자연 속에서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지식체계를 형성해 가게 된다. 하지만 문화는 자연 속에서 연구하고 관찰한 결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도덕의 당위성, 사랑과 헌신, 인권의 문제, 정체성, 아름다움, 논리적 이성, 자유 등 과학적 결과물로는 도저히 답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팀 켈러는 인간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근거한 가치판단 체계를 흔드는 전제주의 변증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전제주의 변증은 그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상대방이 가진 토대가 잘못된 것임을 확인시켜 준 뒤에 복음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모든 주장에는 자신들만의 신념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신념의 근거를 들여다보면 비기독교인들은 내세울만한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성경이라는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확실하게 주장하고 설득할 수 있게 된다. 팀 켈러는 전제주의 변증법만이 아니라 증거주의 변증법도 함께 사용함으로써 기독교가 훨씬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임을 보여주는 실마리들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문화가 가진 모순을 드러내고 복음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망을 이해하고 이루지 못한 꿈을 위로하며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로 그들을 복음 가운데 초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팀 켈러는 삶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 시킨다’는 주제를 그의 설교에서 탁월하게 증명해 내고 있다. 성경과 청중을 사랑하기팀 켈러는 성경 본문을 깊이 연구한다. 단어 하나, 문맥의 흐름, 전체 이야기 속에서 본문이 가지는 위치 등 그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다 살펴보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해 내는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 또한 팀 켈러는 청중의 삶을 가장 잘 이해하는 설교자다. 청중의 직업, 갈망, 어려움, 소망 등을 알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그런 노력으로 불신자가 회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이 어려워하는 용어가 무엇인지도 잘 안다. 그는 언제나 불신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어법과 예화로 설교한다. 그가 선택한 본문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고 결국 청중이 살고 있는 바로 그 현장에 적용된다.
목회
설교
팀켈러
반틸
세계관
생각하는 신자로 양육하기
by 장대선
2020-06-02
과거 한국의 기독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신앙심의 패턴은, 목회자에 대한 존경과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꼽을 수 있다. 특별히 그것은 구한말(舊韓末)의 혼란 가운데 민족 계몽에 지대한 역할을 한 기독교 교역자들의 헌신 덕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계몽 운동은 일제식민지 시대에 일본제국의 승인을 받은 교역자들 즉 조선신학교 출신들과 신사참배에 찬동한 자들이 아닌 해외에서 들어온 선교사들과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민족지도자들을 통해 이뤄졌다.조선총독부를 통해 식민지인 조선을 다스리던 일제(日帝)는 개화파 조선민족주의 계열의 애국 계몽 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적극 탄압했으며,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내의 신앙 계몽 운동에 대해서도 핍박과 탄압을 가했다. 아울러 조선에 대한 우민화 정책(愚民化政策)을 통해 민족정기와 계몽 의식을 말살하고자 했으며, 조선 민중의 역사의식과 계몽 의지를 철저히 박탈하여 조선에 대한 장기적인 지배를 꾀했다. 비슷한 시기 독일의 나치도 제국주의 정책으로 유럽을 지배하려 했는데, 일본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나치도 대중 선동에 의한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 핵심 역할을 한 이가 바로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였다.) 독일의 대중 선동 역시 일본 제국주의처럼 단일한 가치관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우민화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 수립 후 쿠데타로 집권했던 정권들이 그대로 답습했던 특징이기도 하다.제2차 세계대전 무렵의 독일과 일본은 공통적으로 사이비 종교와 유사한 특색을 보였다. 일본의 경우는 쇼와 천황(昭和天皇), 독일의 경우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제국 주의 종교의 특징은 로마 가톨릭이 오래전부터 갖고 있는 형태를 답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살아있는 신적 존재인 교황을 중심으로 단일화 된 지배력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은 로마 가톨릭의 장구한 전통이며, 그러한 형태는 기독교 외 대부분의 이방 종교들이 갖고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이에 반해,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은 자신들을 추앙하는 많은 신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세력을 형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사역이 아니라, 성도들이 복음을 깊이 깨닫고 자발적으로 견인(堅忍)할 수 있는 신앙을 갖도록 만드는 일에 최우선 관심을 기울였다.물론, 세력과 집권에 연연하지 않은 가장 대표적인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낮아짐의 본을 보이셨고, 공생애를 통해 비움의 본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러한 낮아짐과 비움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다. 그와 함께 했던 제자들은 스승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영적인 양육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받은 그대로 믿음의 후배들을 양육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신자를 양육했던 원리와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다른 어떤 원리나 근거를 밝히기에 앞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제자들과 신자들을 자신에게 구속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들은 신자들이 독립적으로 교회를 형성하고 모일 수 있는 신앙의 깊이를 갖도록 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질문이나 군중의 물음에 대해 항상 간단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비유(analogy or metaphor)를 들어 그들 스스로 깊이 숙고해 볼 수 있도록 하셨다.비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아리송하게 만들려는 의도의 답변 방식이 아니라, 그 본질이나 실체에 더욱 근접하게 설명하기 위한 답변 방식이다. 그러므로 비유에 대해 숙고한다는 것은 그 생각의 심도를 말함이지 난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러한 비유에 대한 숙고가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성경의 기록을 신약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사도들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한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빌립 집사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와의 대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성경의 기록 방식과 같이 특정 시간이나 장소까지 언급하는 파피루스는 일반적으로 당대에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성경이 유일하다고 한다.) 특별히 35절에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사 53:7 이하)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는 구절을 보면, 빌립이 결코 간단한 답변이 아니라 구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길게 변증한 것을 알 수 있다.한편, 1세기 기독교 안에서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회중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본문이 또한 사도행전에 있는데, 사도행전 17장의 베뢰아 사람들에 대한 본문이 바로 그것이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하므로”라고 적힌 11절을 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성경을 기꺼이 받아들이되 그것을 면밀히 조사하여 받아들이는 점에서 데살로니가인들보다 훨씬 고상하더라고 평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성경의 본문을 통해 사도들 당시의 1세기 교회가 얼마나 깊이 사고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도들과 직분자들은 신자들을 결코 감정에 휩쓸리도록 이끌지 않았고,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 성경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시키는 일에 복종하는 교인들로 양육하지 않았던 것이다.요즈음 한국의 기독교는 심각한 위기 국면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외형적인 면에서만 아니라 본질적인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참된 믿음이 없는 신자 즉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s)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듯하다. 교회에 출석하지만 결코 사고하지 않으며 믿음과 실천이 별개인 신앙인은 이 시대의 우민화된 군중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은 사도행전 8장의 빌립과 같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들을 “가르쳐 지키게(마 28:20)” 할 사역자들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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