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콜로키움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목양토크
CGN-TV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콜로키움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목양토크
CGN-TV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8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목회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3'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행복한 목사
by C.J. Mahaney
2019-02-22
목자의 길을 걸어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종종 극심한 좌절감을 안겨준다. 아마 목회 분야에 경험이 많은 목사들은 이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설교 준비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피하거나 미룰 수 없고, 또한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과업도 아니다. 여러 시간, 혹은 여러 날을 묵상과 원고 작성에 쏟아붓지만, 마감한 원고를 검수할 때에는 종종 글이 미처 채워지지 않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더욱이 온몸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시키는 이 작업을 당장 다음 주부터, 그것도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신에게 긴장을 넘어 두려움마저 안긴다.말씀을 전하는 현장에서는 어떠한가? 설교 중 느끼는 적막한 공기는 그날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나 담소를 나눌 때에도 설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격려해 주었으면 하는 아내마저도 “오늘 설교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설교 이외에 신앙 상담, 제자 훈련 등의 영역까지 고려한다면, 목사를 낙담케 하는 예는 무수히 많다. 이처럼 반복적이며 교인들의 시선에 매번 노출될 수밖에 없는 직무의 성격을 고려할 때, 목사들이 쉽게 지치고 낙담하는 현상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그러나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목회의 사명을 기쁨으로 수행하기를 바라고 또 요구하신다. 베드로가 목회자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라”라고 강조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벧전 5:2).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없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회 사역을 이룰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즐겁게 섬겨야 한다. 하나님은 행복한 목사를 원하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당신은 행복한 목사인가? 만일 스스로가 지치고 낙담한 목사라는 생각이 든다면, 즐거운 마음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이 글을 통해,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근본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세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당신이 용서받은 사람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십자가 사역을 통해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이를 아는 지식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우리는 무서울 정도로 갈보리의 십자가를 쉽게 잊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망각은 오직 자신과 성도들의 죄만 인식하도록 당신을 이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견지하는 자세는 무척 중요한다. 이를 영적 훈련의 우선 순위로 삼으라. 또한 매일의 훈련이 되게 하라.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알지 않겠노라고 결심하라(고전 2:2). 하나님이 구주의 인격과 십자가 사역을 통해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는 가장 빠른 기쁨의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롬 5:11). 만약 당신이 이를 잊어버린다면, 행복한 목사가 될 수 없다. 둘째, 당신이 섬기고 있는 분야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명확하게 보라. 성경은 교회 안에서 성령의 사역을 확인하는 두 가지의 증거를 제시한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이다(고전 12:4-11, 27-31; 갈 5:22-23; 엡 4:11-16; 벧전 4:10-11). 먼저 성경에서 이 목록을 찾아 주의 깊게 읽으라. 그런 다음, 눈을 들어 당신의 사역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보는 곳곳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 모습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 발견들을 메모하고, 그분의 역사하심에 감사하며, 이를 성도들과 공유하라. 문제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당신이 그 역사하심을 인지하는가의 여부이다. 만약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행복한 목사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당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다시 모인다는 사실에 감사하라.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설교를 들어야 한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중략] 그들은 이내 가인처럼 자신의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겁다고 소리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성도들은 이번 주일에도, 그리고 또 다음 주일에도 모일 것이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를 기억할 때, 당신은 점점 더 즐거운 목사가 될 수 있다. 목회는 쉬운 길이 아니다. 어느 목사이든 그 길에서 기쁨 없는 섬김의 강력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유혹을 뚜렷하게 분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기억하라. 우리는 기쁨을 위해 싸워야만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복한 목사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appy Pastors 번역: 김장복 (개혁된실천사)
목회
난관
기쁨회복
용서받은사람
하나님의역사
감사
찰스스펄전
기쁨없는섬김
강력한유혹
행복한목사
긍휼의 소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by Jeremy Linneman
2019-02-18
누군가를 돕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탈진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진심 어린 긍휼은 이내 바닥을 보이고 만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돕고 싶지만,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의 양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돕다가 결국 희생자가 되기도 한다.긍휼의 소진 (Compassion Burnout)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회자, 상담가, 교회 리더가 어떻게 탈진에 이르는지를 알고 있다. 이미 주변에서 목격했거나 스스로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젊은 사역자는 대개 높은 이상, 폭넓은 훈련, 긍휼이 가득한 마음을 지니고 사역을 시작한다. 하지만 긴 근무 시간을 버티고 감사하다는 반응도 얻지 못한 채 부족한 사례를 수령하면서 여러 해를 보내고 나면, 결국 지치기 마련이다. 일에 대한 동기도 사라지고 긍정적인 결과도 보지 못하면, 이내 좌절이 찾아오고 좌절은 곧 무관심으로 이어진다.연구자들은 타인을 섬기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네 단계로 진행되는 탈진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바로 열정, 침체, 좌절, 무관심이다.솔직히 말해, 나는 목회 사역을 하며 그 네 단계를 하루만에 다 겪은 적도 있다. 아침 7시에 사역을 시작할 때는 긍휼로 충만했다가, 점심 때가 되면 지쳐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가며, 오후 회의 시간에는 좌절을 경험하다가, 집에 오면 완전히 무감각해지고 만다.‘각성’(disillusionment)은 탈진을 묘사하는 임상 용어이다. 우리는 자비로운 사역을 하겠다는 비전을 갖지만, 그것이 실현되기도 전에 각성에 이른다. 그 비전이 착각이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할까?나는 사역의 갱신을 위한 깊고 신선한 자원이 다름 아닌 오래된—그러나 과소평가되어 온—기독교의 한 가르침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가르침이란 곧 타인을 위한 긍휼을 되찾는 방법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맛보는 데 있다는 것이다.왜냐하면 긍휼은 바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고, 구원 역사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수행하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사역의 필수 덕목이기 때문이다.긍휼을 찾아서그렇다면, 긍휼의 의미는 무엇일까?우리가 쓰는 ‘긍휼’(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파티’(pati)와 ‘쿰’(cum)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두 단어가 결합되면 ‘함께 고통 받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긍휼’(Compassion: A Reflection on the Christian Life)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긍휼은 우리에게 아픔이 있는 곳으로 가, 고통의 장소로 들어가서, 단절과 두려움과 혼란과 고뇌를 나누라고 요청한다. 긍휼은 슬픔 속에 있는 사람과 함께 신음하도록, 외로워하는 사람과 함께 외로워하도록, 우는 사람과 함께 울도록 도전한다. 긍휼은 약한 자와 함께 약해지도록, 상처에 노출된 사람과 함께 상처에 노출되도록, 힘이 없는 사람과 함께 힘이 없도록 요구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인간다운 상태에 처하도록 만든다.”긍휼은 흔히 접하는 단어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이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덕목이며, 사역을 위한 메타포가 된다. 앤드류 퍼브스(Andrew Purves)는 이렇게 설명했다.“긍휼을 목회 사역의 핵심으로 여겨야 할 이유가 있다. 긍휼은 누군가를 돌보는 사역을 구체화한다. 이때 긍휼은 그 사역의 근거를 하나님의 존재에 깊이 두어, 근본적으로 다른 마음으로 가지고 타인을 돌보게 한다.”우리는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따라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일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에게 긍휼을 보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긍휼의 소진을 경험할까? 그 이유는 우리가 유한하고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긍휼은 감소하는 자원이다.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으로 시선을 돌릴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만이 무한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긍휼의 주님“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번역본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긍휼’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50회에서 80회 가량 사용되었다.역사서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차원의 긍휼이 자주 묘사된다(왕하 13:23). 시편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아버지와 같은 긍휼을 품으신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찬양한다(시편 103편). 또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을 약속한다(사 54:7).또한 복음서로 가면, 긍휼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긍휼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군중을 돌아보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마 9:36; 14:14; 15:32). 그분의 치유 사역은 망가지고 약하고 빈궁한 사람을 향한 자신의 긍휼로부터 흘러나온다(마 20:34).예수님이 하신 비유들 중에 가장 사랑받는 두 가지 비유가 바로 긍휼과 깊이 관련된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긍휼을 갖고 행동하기를 권면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3). 또한 탕자는 긍휼로 충만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끝으로 서신서들은 주님의 긍휼에 거듭 호소하고(롬 9:15; 고후 1:3; 약 5:11), 신자들이 서로를 향해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고 교훈한다(엡 4:32; 빌 2:1; 골 3:12; 벧전 3:8).결국 창조로부터 이스라엘을 거쳐 그리스도와 교회에 이르기까지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인내와 사랑이라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이유는 바로 그분의 긍휼이 있었기 때문이다.아래의 내용은 소진되는 우리의 긍휼을 다시 새롭게 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다.1. 천천히 가라긍휼은 효율성이 낮다.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는 일에는 더 느린 걸음과 배려, 여유가 요구된다.서두르는 자세는 사역에서 탈진하는 분명한 이유가 된다. 서두르는 일 자체가 유지될 수 없는 속도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나는 교회 개척의 과정에서 열 가지 약속을 제시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는 서두르지 않는다’였다. 긍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이 우리가 세우는 계획의 방향을 재설정하셔야 하고, 우리 자신이 원하는 스케줄을 내려놓고,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의 제안과 필요에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2. 긍휼의 샘을 채우라예술가와 작가들은 나중에 사용하기 위한 창의성을 확보하기 위해 종종 심상, 경험, 독서로 상상력의 ‘샘을 채워 놓으라’는 권면을 듣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긍휼의 사역자는 긍휼의 샘에 매일같이 찾아가 모든 긍휼의 주인 되시는 그분으로부터 신선한 자원을 받아야 한다.우리는 꾸준한 성경 읽기와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통해 긍휼의 샘을 채워 놓을 수 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내게 직접 말씀하시고,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새롭게 하시는 긍휼의 주님을 만난다. 따라서 기도 가운데 우리는 그분 앞에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도움을 구하며 어려운 순간에도 평화를 찾을 수 있다.3. 내면의 지도력을 발휘하라우리는 지치게 되면, 지식(우리가 아는 것)이나, 능력(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나, 평판(다른 사람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이끌어 가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하지만 건강한 사역의 규범은 ‘안으로부터’,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부여 받은 정체성을 가지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 있다.이렇게 생각해보자. 그리스도의 긍휼은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며, 긍휼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한다고 말이다.안으로부터 타인을 지도하는 일은 수시로 우리 자신의 깊은 생각과 감정을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타인과 나누며, 내게 허락된 이들의 마음을 격려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럴 때 우리는 단순히 타인의 행동을 바꾸고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따라 빚어지기를 원하게 된다.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긍휼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긍휼을 받는 ‘내면’의 수용을 포함하고, 나아가 긍휼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외면’의 섬김도 포함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긍휼로 충만할 때, 나아가서 그 긍휼을 드러내게 된다.그래서 퍼브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긍휼은 예수님의 긍휼에 참여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빈궁한 세상을 향한 자신의 긍휼을 확장해 가신다. 즉 우리는 그분의 긍휼을 흘려 보내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유한하고 타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긍휼의 소진은 사역에서의 실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느리게 가고, 긍휼의 샘을 채우며, 내면의 지도력을 발휘한다면, 결국 긍휼로 충만한 인생을 위한 지속적인 갱신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urnout Is Coming-Here’s How to Prevent It번역: 하늘샘
목회
난관
긍휼의소진
헨리나우웬
퍼브스
긍휼의샘
각성
긍휼
Burnout
설교자로서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배우라
by Kevin DeYoung
2019-02-14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가 설교를 가리켜 “개성을 통한 진리 전달”이라고 정의했을 때, 나는 그가 다른 누군가의 개성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의 개성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믿는다. 한 동안의 기간이 지난 후에, 마침내 나는 설교단에서 자기 나름의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운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내 설교가 더 좋아지거나 나빠졌음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의 설교를 한다는 것은 내 설교가 보다 진실하고, 보다 편안하며, 또한 내 설교 자원이 더 풍성해짐을 뜻한다. 비록 설교자로서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음을 스스로 알고 있으며, “당신의 설교가 10년 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어요”라는 어색하지만 참된 칭찬을 10년 후 즈음에나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의 개성을 통해 진리를 설교하고 있다는 느낌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젊은 설교자들처럼, 그리고 적지 않은 연로한 설교자들처럼, 나는 설교자로서 내 “목소리”를 찾기 위해 애써 왔다. 대학 시절에 나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의 느낌은 마치 내가 읽은 글 전부가 수백 년 된 내용이거나 수백 년 전에 번역된 것 같았다. 그 결과, 내 글은(당시에는 내가 설교를 자주 하지 않았다) 라틴어를 곧바로 번역한 듯 어색했고, 문장들은 역시 유난히 길었다. 또 구식 문법과 너무 많은 단어들을 사용했다. 한 교수님이 내게 여러모로 조언해주며 이르기를, 내가 영웅이 되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나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글을 쓰라고 했다. 당시에 그것은 내게 고통스러운 조언이었고, 심지어 그 교수님의 말을 신뢰할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내가 고전적이고 다소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했던 이유는 그것이 경건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서였지만, 사실 그것은 경건의 표현이 아니었다. 나는 청교도적인 분위기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일 필요가 있었다. 신학교에서 나는 많은 급우들이 설교학 교수들을 흉내내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은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하다. 설교학 교수들은 자신의 복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강의를 할 때가 있는데, 이 비난의 일부는 자신의 설교 방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교수들에게 돌려질 수 있다. 이 같은 강조는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비난의 일부는 학생들에게도 돌려진다. 우리는 자신이 존경하여 모델로 삼는 사람들을(특히 자신에게 설교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마구 복제하려 한다. 고든콘웰신학교에서 나는 작은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들을 많이 보았다. 그 학생들 모두가 나쁜 설교자인 건 아니지만, 그들은 분명 해돈 로빈슨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설교자로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로빈슨의 설교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는 만큼, 다른 설교자들도 본받고 싶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할 무렵에는 가끔씩 존 파이퍼(John Piper) 흉내를 냈다. 파이퍼의 설교를 워낙 많이 들었던 까닭에, 내 기도와 설교 주제, 그리고 심지어 “기쁨!”이라고 외치는 모습까지 파이퍼를 닮았었다. 나는 파이퍼에게서 배우거나 그의 영향을 받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는다. 할 수만 있으면 그와 똑같은 설교를 하고 싶다. 하지만 내게 맨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할 사람이 바로 파이퍼일 것이다. “내가 전하는 복음과 똑같은 복음을 전하세요. 즉 복음의 진리를 변형하거나 훼손하지 마세요. 하지만 당신이 나랑 똑같이 설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해가 걸렸지만, 이제 나는 존 파이퍼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파이퍼와 은사 면에서는 물론이고 성격 면에서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본받기를 원했던 다른 유명한 설교자들도 있었다. 나는 성경 본문을 설명하면서 앨리스테어 벡(Alistair Begg)처럼 유머를(물론 그 특유의 억양까지) 구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팀 켈러(Tim Keller)처럼 생각이 창의적이며 교양이 풍부했으면 좋겠다. C. J. 매허니(C. J. Mahaney)처럼 재미있고 겸손하기를 원한다.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리스콜(Mark Driscoll)의 흉내를 내거나 카슨(D. A. Carson)처럼 재치 있게 행동하고 싶다. 심지어 랍 벨(Rob Bell)처럼 시원시원하게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지난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여러 가지 설교 방법들을 실험해 보았다. 원고 없이, 절반의 내용만 적힌 원고를 가지고, 혹은 전체 내용의 원고를 가지고 설교했다. 내가 좋아하는 설교자들도 이런 여러 방법들 중 하나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중에서 내가 찾은 가장 좋은 방식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원고 전체 내용을 준비해두고서 설교하는 것이다. 설교학 교수들은 이렇게 말하면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우리는 자신에게 유효한 방법을 다양한 접근을 통해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좋은 설교를 규정하는 특정한 원칙들이 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이것이 내게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 많음을 기억해야 한다. 목사 안수를 받은 2002년 이후로, 나는 거의 500회 정도 설교했다(우리 교회에서는 저녁 예배도 드린다). 약 450회의 설교를 하고 나서야 이제 비로소 내 목소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내 목소리를 찾기 전의 설교들이 모두 나쁘거나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지혜로운 고백을 깨닫는 데 이처럼 오랜 시일이 걸렸다. 설교자가(특히 젊은 설교자가) 배우기 가장 힘든 것들 중 하나는 자기 나름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열정이나 유머나 학식을 모방하지 말라. 당신 자신의 개성을 벗어던지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이 본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개성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모범적인 설교자에게서 배우라. 하지만 주일에 당신의 회중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 본받기를 원하는 설교자의 흉내가 아니라 당신의 설교이다.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단히 다듬어지게 하고, 당신 자신의 개성을 통해 그분 말씀의 진리가 빛나게 하라. 자기 나름의 설교를 결코 잊지 말라.출처: www.9marks.org원제: Learning to Be Yourself as a Preacher: From One Still Trying to Do Just That번역: 김태곤 (개혁된실천사)
목회
설교와교육
로빈슨
존파이퍼
내목소리을찾아
하나님의성령
필립브룩스
개성
자비를 베푸는 일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
by Dave Dunham
2019-02-07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목회 사역이 두려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 예상을 깨고 두려움과 긴장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바로 커다란 몸집의 남성이 나를 찾아와 책상을 마주하고 내 앞에 앉아 있을 때 그러했다. 그는 자신이 분노 조절 장애가 있고 전과 기록도 있다고 말하며, 내게 상담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와 상담 중에 일어날 수도 있는 돌발적인 상황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남성이 자신의 분노에 직면하게 하려면, 나는 그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그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켜서 나를 공격하게 할까봐 두려웠다. 그 공격성 때문에 그 남자가 교도소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서 많은 피를 흘리게 되는 일이 생길까봐 몹시 두려웠다. 하지만 그 상처 입은 남성은 여전히 겁을 주며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도움을 요청하며 내 앞에 앉아 있었다.자비를 베푸는 사역에는 위험이 따른다자비를 베푸는 교회가 되는 것은 매우 두려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교회는 이 진리를 알아야 한다. 모든 이들이 자비에 대해서 말하기는 좋아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비를 베풀 때 마주할 수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자비에 대해 말하기는 쉬워도 이를 베풀어야 하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예를 들어 자비를 베푸는 행위에는 학대나 실망이 따를 수 있다. 내가 전에 섬겼던 교회는 ‘한부모 축체’(Single Parent's Fair)를 연례 행사로 열어 한부모와 그 자녀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그 행사에 초대되어 온 사람들 중 몇몇은 물품이 떨어지거나 의료 검진의 줄이 길어지면 화를 내고는 했다. 그 몇몇은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음에도,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서슴지 않고 공격성을 드러냈다. 또 한번은 우리 교인 중의 한 젊은 여성은 지역 매춘부들을 돌보려 하다가 몹시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이처럼 자비를 표현하는 일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우리가 베푼 자비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를 표현하지만, 다른 소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화를 내고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얻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람들을 섬길 의지가 있는가? 그런 의지가 없다면, 당신의 교회는 아직 자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외로운 일이다오하이오주 남부 시골에 모여 사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섬기는 교회를 전혀 안전한 곳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도들 중에는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치료 중인 사람들과 전과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교회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한 여성이 내게 “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에 중독자들이 너무 많아서 무섭고 불안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많은 이들이 우리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돌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지한다고 비난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마약 거래를 돕는 조직으로 오해하며 비난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우리의 사역을 복음 전파의 일환으로는 전혀 인정해 주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방문하지도, 또한 우리 교인들을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결국 그 지역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자비를 베푸는 일은 종종 외로움을 동반한다. 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자비를 베푸는 교회는 단일 프로그램이나 행사에만 의존할 수 없다. 나는 코너스톤침례교회(Cornerstone Baptist Church)에서 함께 사역 중인 자원봉사자들을 좋아한다. 교회가 위치한 그 도시는 우리가 도와야 할 일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도 없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 공동체가 자비를 베푸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필요가 생기면 달려가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방식은 다양하다. 법원에서 내린 시행명령에 따라 매일 오후 5시까지 학업 대신 일터로 향하는 청소년과 상담하는 일, 병으로 몇 주 동안이나 회복을 못하는 남성에게 안부 전화를 하는 일, 그리고 만약 전화를 받지 않으면 왜 그런가 살피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하는 일 등이 그 예이다. 때로는 우리가 그동안 돕고 있던 노숙자가 거의 죽어가며 누군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 봉사자들은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에게 향하기도 한다. 강간 피해자를 상담하는 일, 부모가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 등은 절대로 봉사자의 일정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 자비를 베푸는 일이 사역자의 편리를 봐준 적은 한 번도 없다. 자비로운 교회가 되는 과정에는 몇몇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나누어 줄 음식 창고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많은 사역이 포함된다. 더 나아가 교회나 개인은 때때로 자비를 베풂으로써 발생하는 불편 자체를 감당하기 힘겨울 수도 있다.물론 우리가 자비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이를 베푸는 행위는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비의 최고봉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곧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희생이고, 하나님이 아버지의 사랑에서 그 아들을 잠시 분리시킨 행위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자비를 명하는 복음은 자비에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모범으로 보여 준다. 교회가 자비를 베푸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려면 이 진리를 명심해야 한다. 당신의 도움으로 매춘 생활을 접고 스스로 살아가게 된 여인이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그녀를 계속 섬길 수 있겠는가? 그동안 당신이 멘토링으로 섬겨 왔던 젊은이가 중독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조차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를 계속 돌볼 수 있겠는가?인내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보여 주신 사랑에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람들이 자비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혹은 그것을 먼저 찾아 나섰기 때문에 자비를 얻은 것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자비를 베풀면서 실망을 느낄 때에는 이와 같은 복음의 진리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러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낙심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자비를 베푸는 사역은 진정으로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불편함이 따르는 사역이다. 하지만 자비의 하나님을 안다면, 그 두려움은 진정되고, 외로운 마음은 위로받을 수 있으며, 불편함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cary Mercy번역: 정은심
목회
리더십
위험한일
외로운일
불편을감수
자비를베푸는사역
복음의진리
사랑
자비의하나님
약함을 사용하시는 하나님
by Dave Furman
2019-01-23
나와 아내는 오랜 시간 중동에서의 교회 개척을 꿈꾸어 왔다. 그곳은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 중의 하나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번화한 지역이었다. 동료 목회자도 그곳에 반드시 복음 중심의 교회가 필요하다며 우리를 격려했다. 그렇게 주변의 독려에 힘입어, 나와 아내는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렸다.수년간의 준비 끝에 우리는 드디어 그 꿈의 여정을 시작했다. 2008년 8월 23일, 끈적이는 여름 밤의 습기가 두바이에 도착한 나와 아내, 그리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들을 맞이했다. 우리 가족은 그 땅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을 바꿀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었다.하지만 그 후로 겨우 한 달,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예상치 못한 고통이 찾아오다이 모든 일이 시작된 그날, 나는 쇼핑몰에서 주차를 하던 중이었다. 왼쪽으로 차를 돌리기 위해 핸들을 꺾는 순간, 양쪽 어깨에서 깊은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타는 듯한 따가움이 손가락 끝마다 자리를 잡았고, 결국 팔의 상당 부분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도, 문을 열거나 악수를 하는 것도, 심지어 혼자서 옷을 입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사실 이러한 통증이 처음 겪는 고통은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기 한참 전, 어깨에 발생한 신경 장애를 치료하고자 이미 한차례의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그 이후 우리 부부는 나의 신경 질환이 완치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과 두려움을 몰고 왔다.그러나 이는 암흑의 시작에 불과했다. 곧 나의 영혼은 우울증으로 급격히 피폐해졌고, 언어 학교도 그만둔 채 온종일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나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파괴하기 위하여 이 사막의 한가운데로 부르셨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다. ‘만약에 두 팔이 건강했다면 정말 행복했을텐데…’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 동안 이 생각을 무수히 반복했다. 하지만 나의 끝없는 소원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극단적인 생각이 마치 도돌이표처럼 머릿속에서 맴돌고 또 맴돌았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동화 같은 결말은 찾아오지 않았다그 후로 1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동화처럼 환호가 터지는 반전을 들려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 이는 아프기 전에 누리던 모든 평범한 것들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야구를 하거나, 아내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거나, 혹은 내 스스로 안전벨트를 매는 사소한 일상을 이제는 꿈꿀 수 없다. 물컵 하나 집는 것도, 작은 책을 꺼내는 것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힘겨운 일이 되었다. 극도의 절망감을 느끼던 그 고통의 시간이 여전히 내 삶에서 지속되는 중이기에 나는 매일, 아니 매시간마다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와 싸워야 한다. 양팔의 회복을 위해서 수도 없는 치료를 시도했다. 네 번의 큰 수술, 셀 수 없을 만큼의 재활 치료, 그리고 한 움큼의 알약들과 각양각색의 천연 약재까지. 그러나 그 중 눈에 띌 만한 효과를 안겨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는 그렇게 여전히 연약하고 깨진 상태로 남아 있다. 나의 몸은 아마도 하나님 나라로 가기 전까지 지금의 상태로 남아 있을 듯 하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통하여 그분의 교회를 개척하셨다. 2010년 2월,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곳에 두바이 리디머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자 찾아오고 있다.우리는 이 교회에 도움의 손길과 재정을 채워주는 신실한 협력 교회를 만났고, 복음 전파에 앞장서는 강력한 믿음의 성도들과 함께하고 있다. 또한 이 도시의 중심부, 그 안에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선물을 받았으며,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고 있다. 두바이 리디머교회를 시작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의 주변에 더 많은 교회를 세워 가시는 중이다. 또한 필리핀이나 레바논처럼 이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의 교회 개척에도 주님은 우리를 쓰고 계신다. 더불어 그분의 계획에 따라 신학 교육 센터의 문을 열었고, 이곳에서 수학한 많은 제자들이 영적 리더로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이 모든 역사를 통해 내가 배운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오직 하나님만이 그분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사실이다. 약함은 언제나 그렇듯 주님께 쓰임받는 통로이다사도 바울에게도 약함이 있었다. 그는 ‘육체의 가시’를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그 질병을 거두어 가지 않으셨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건강했다면 이루었을 더 많은 선교적 성취를 상상하며 아쉬웠을 것이다.그러나 바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고쳐주는 방법이 아니라 그 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셨다는 사실이다(고후 12:9). 즉, 미약함까지도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이다. 그 예로 모세는 거친 애굽에서 주님의 백성을 탈출시켰고,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은 그 웅장한 성벽을 무너뜨려 가나안을 정복하였다. 모세는 사십여 년의 광야 생활로 연약해진 상태였고,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으며, 여호수아는 두려움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패커(J. I. Packer)가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그 자녀의 약함을 통하여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언젠가 킨츠키라고 불리는 고대 일본 예술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킨츠키란 ‘금수리’라고 불리는 공예 기술인데, 깨진 사기 조각을 금이나 다른 귀한 금속 재료와 함께 모자이크처럼 붙여 나가는 기법이다. 나는 이 방식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방법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킨츠키 기법을 사용하는 공예가들은 사기 그릇의 쪼개진 조각을 섞어 붙이며 그 그릇이 지녔던 본래의 모습을 복원시킨다. 깨진 그릇의 결점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균열을 금으로 메워 그 부분을 더욱 빛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결함은 더 이상 흠이 아닌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거듭난다. 즉, 킨츠키 예술은 '깨짐'의 작품이 온전한 다른 그릇보다 오히려 더욱 돋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강하고 준비된 자녀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의 방식은 우리의 예상이나 방법과는 다르다. 그분의 완전한 계획 안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깨진 자녀를 통하여 원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다시 말해,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께서 이미 나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세우신 그 구상의 한 부분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미약함을 사용하신다이 글의 앞머리에서 밝혔듯이 나는 교회 개척을 위하여 수많은 해 동안 준비해 왔다. 신학교를 졸업했고, 다양한 인턴십을 거쳤으며, 교회 개척 기관에서 훈련을 쌓기도 했다. 두바이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기 위해 장기간의 학습 과정을 밟았음은 물론이다. 또한 나와 아내는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후원을 구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함께 일할 팀도 꾸렸다. 우리는 그렇게 철저하리 만큼 많은 준비를 했다.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는 그분이 세우신다’는 진리를 정말이지 확실하게 증명하셨다.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자 이곳 중동에 왔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바꾸기 시작하셨다. 그분은 내 안의 자만심을 무너뜨리고, 내가 온전히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역사하셨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 부부와 또 우리를 지켜볼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바는, 바로 모든 영광은 오직 그분의 아들을 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세우는 일의 모든 영광은 사람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받으셔야 한다. 약하고 깨진 상태의 리더들이여, 나아가서 교회를 세우라. 돕는 손들을 기대하고 구하라.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 질병과 고통은 종종 교회 사역을 주저하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당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함을 사용하는 분이시므로(고전 1:27), 나와 당신을 통하여 그분의 일을 시작하고, 또 우리의 약함과는 반대인 강한 교회를 세워 가실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rokenness Is Not a Barrier번역: 정새롬
목회
난관
패커
킨츠키
고통
우울증
사도바울
미약함
설교자여, 불편한 주제를 피하지 말라
by Brett McCracken
2019-01-21
성(性)에 관하여 설교하겠다고 냉큼 달려들 목회자는 거의 없다.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설교일정표에 계획된 “잠언 5-6장에 나타난 성(sexuality)에 대한 지혜”라는 주제 옆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일단 그 순서를 피하고 싶었다. ‘좀 더 성숙한 장로가 이 문제를 다룰 순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하지만 나는 그 주제를 피하지 않았다. 결국 설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다루며 설교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내가 인간의 성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의도를 설명하는 40분 동안 예배당은 남극만큼이나 차가웠지도 모른다. 상호 보완적인 성과 성적 타락의 문제, 그리고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라는 구절을 다루며, 내 목은 사하라 사막처럼 건조해졌다.하지만 설교를 마친 뒤에 따라오는 청중의 반응은 놀라웠다. “이런 주제에 대해 들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을 피하지 않고 담대히 전해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설교를 더 듣고 싶습니다.”청중은 우리가 이런 주제에 대하여 다루기를 원한다. 그들은 오늘날 문화에서 직면하는 여러 이슈들에 대해 분명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성경적인 가르침을 받기 간절히 원한다. 성, 남녀 및 인종 차별, 지옥, 하나님의 진노, 전쟁과 폭력, 성령의 은사,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같은 주제가 다뤄지기를 원한다.성경에는 이 모든 주제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설교자 역시도 이를 다루어야 한다.하나님의 모든 뜻하나님의 모든 뜻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언급했던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라는 말은 간혹 어떤 주제들의 경우 꺼리지 않고 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루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여러 문화적 맥락에서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줄 정도로 그 뜻의 일부는 무섭다. 많은 부분은 직접적이라서 두렵고, 또 다른 부분은 단순히 ‘세 가지 포인트로 구성된 설교’에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에 두렵다.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계시된 모든 뜻은 설교하기가 쉽지 않다.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모든 뜻을 설교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행 20:26).구도자 중심의 예배는 진정성이 없는 예배를 말하는가?비신자를 고려하여 구도자 중심으로 교회의 공적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일 아침 강단에서 불편한 주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설교만을 듣고 싶어한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청중은 우리가 어려운 주제에 대해 설교하면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가 다시는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과연 그러한가?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주일학교 시절, 거리낄 내용이 없는 설교만을 듣고 어려운 질문은 하지 못하는 중고등부 모임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밀레니엄 세대의 복음주의자로서 나는 이제 교회들이 어려운 주제도 다루고 곤란한 질문도 던지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아마도 내 또래들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동일하게 느낄 것이다.내가 요즘 만나서 훈련하는 대학생들은 그저 친절하고, 쉽고, 거리낄 게 없으며, 편안한 기독교를 찾고 있지 않다. 이런 기독교는 인공적이며 진정성이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런 기독교는 실제로 진정한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기독교는 불가피하게 큰 대가를 요구할 뿐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는 불편한 종교이다. 이 신앙은 잔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이는 대중의 심기를 건드릴까 염려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불편한 내용을 숨기지 말라우리는 기독교의 여러 불편한 내용을 숨기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찰스 스펄전이 말한 것처럼, 위험 부담을 안더라도 불편한 내용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십자가의 효력을 없애 버리지 않도록, 그 십자가의 불편함을 숨기지 말라. 복음의 날카로운 측면에서 그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복음의 불편한 부위를 잘라내는 일은 그 능력을 없애는 일이다. 복음을 순하게 만들면, 그 능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라져 버린다.”우리는 성경을 순하게 만들 필요도 없고, 복음을 길들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용감하게 설교해야 한다.청중석에 앉은 이들은 불쾌한 부분을 제거한 거짓된 기독교,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지지해 주고, 자신들을 성장시켜 주지도 않으며, 자신들에게 도전하지도 않는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그들은 진리를 원한다. 아무리 듣기 어려운 내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Don’t Avoid Uncomfortable Topics번역: 하늘샘
목회
설교와교육
하나님의모든뜻
불편한주제
구도자중심의예배
찰스스펄전
진리
당신은 지옥에 관해 어떻게 설교하는가?
by Peter Gurry
2019-01-16
나는 최근에 지옥에 관한 교리를 두 번 가르쳤고, 그 두 번을 다 눈물로 끝마쳤다.지금도 두 번째 강의 때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업이 끝났을 때, 하나님을 오랫동안 섬겨 온 나이가 많은 한 부인이 침울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분은 울면서 자기 어머니에 대해 질문했다. 혹시 현재 지옥에 있지는 않은지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나는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답하는 상투적인 대답을 했다. 우리는 개인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어머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실제로 나는 몰랐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또 다른 말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어머니가 지옥에 있다면, 그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만일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지옥에 보내신다면,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옳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옥 심판은 죄를 지은 우리에게 마땅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인은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진지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부둥켜안고 서로의 죄와 지옥의 무게를 느끼며 함께 울었다.지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우리가 가진 지옥에 대한 견해는 우리가 죄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 지옥에 관해 생각할 때 흔히 저지르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한 가지 잘못은 지옥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옥을 자신과는 생각이 다르고,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른 사람들이 가야 할 장소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복음의 은혜는 물론 우리와 같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관심을 가져온다.조나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이런 문제점을 잘 파악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지옥을 인정하면서도 그곳이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라고 믿을 때, 오직 나 아닌 타인들만 가게 될 장소라고 확신할 때, 그런 사람은 오히려 지옥을 부정하는 상대에게 강력한 반대 의견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믿으면서도 그 장소가 결코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곳이라고 여기며 우월감을 느낀다고 한다. 오늘날 계속해서 주장되는 지옥 교리는 대개 이 교리를 반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신약학자인 데일 알리슨(Dale Allison)은 그가 젊은 시절에 가졌던 지옥 교리에 대한 반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 관한 소책자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소책자는 모든 유대인, 무슬림, 힌두교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을 당한다는 교리를 분명히 가르친다. 그 소책자의 저자는 성경 본문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나는 그때 이런 주장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다. 나는 그 글을 읽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픈 마음으로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후에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개념은 내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나기 오래 전부터 혐오스럽게 다가왔다.”나는 이런 지옥 개념이 혐오스럽다는 견해를 인정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지옥 개념을 반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가야 하는 장소로 지옥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이 나와 상관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판단할 때 거짓된 것으로 드러난다.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당신과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누구도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 역시 당신과 똑같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지옥에 관한 충격적인 진리이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진리는 우리도 다른 사람도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선언하는 성경의 말씀은 외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는 우리의 오만을 깨뜨린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옥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우리처럼 되셨기 때문이다(고후 5:21).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어떤 방법으로 지옥을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가 지옥에 관한 설교와 교육을 실천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1.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이유를 설명할 때,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역사 속에 악명 높은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사람을 예로 들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죄악이 우리 속에도 실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강력한 증오, 깊게 뿌리박힌 자기중심적 아집,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우선적으로 지옥 교리를 적용할 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리가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과 그 결과로 우리가 지옥의 실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보고 알게 될 것이다.2. 지옥을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입술로는 부인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옥 형벌을 강하게 믿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지옥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지옥을 말할 때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기가 먼저 공적인 대화에서 지옥에 대해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관해 설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지옥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고, 또 영원한 고통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싫어한다. 나도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지옥 형벌의 엄중한 무게를 숨기면, 예수님이 죄로 인해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복음의 위대한 가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결국,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눅 7:47). 3 지옥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복음 선포에 필수적이다우리가 지옥을 우리가 마땅히 가야하는 곳으로 여기지 않고 설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설교하게 된다.이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움은 늘 함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과 복음이 어우러질 때 나타나는 엄중함과 절박함, 그리고 경외감을 가지고, 그 둘을 함께 설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바울처럼 이렇게 외치게 될 것이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re We Proclaiming a Hell We Don’t Deserve—and a Christ We Do?번역: 김재덕
목회
설교와교육
죄와그리스도
조나난에드워즈
지옥교리
데일알리슨
복음선포에필수적
지옥과복음
목회자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by Dan Steel
2018-12-31
간혹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006년 여름이었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가진 모든 소유를 뒤로하고 영국 버밍엄에 있는 파송 교회로 돌아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2년 전에 떠나온 곳에 돌아가서 그곳의 교회 개척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회 개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모든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분주히 움직이며, 2006년 가을까지 숨 가쁘게 준비했다. 핵심 팀을 만들고 꿈을 꾸며 계획하고 기도하는 인내의 시간을 거쳐, 우리는 드디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감격스러운 첫 부활절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의 삶을 바꾼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는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아픈 순간들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였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섭리나는 버밍엄과 옥스포드를 수없이 오갔고, 8주 후에 아버지의 장례식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활동적이었고 건강하셨다. 그래서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헌신적인 신앙인이었지만 그분의 죽음은 나를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교회 개척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좋은 질문이다. 지난 12년 동안 나는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교회의 개척 사역에 협력하는 특권을 누렸다. 내가 아는 한, 교회를 개척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는 교회를 개척하기 바로 전이나 혹은 바로 후에 내적으로 겪는 고난이 있다는 점이다.“하나님은 자주 교회 개척 목회자들에게 특유의 고난을 겪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그것이 관계나 건강 문제일 수도 있고, 외적 핍박일 수도 있고, 내적 갈등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교회 개척 목회자들에게 나름의 고난을 겪게 하신다. 하나님은 한이 없는 지혜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 한다. 반직관적 수단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그 말은 이상한 소리로 들린다. 우리가 원했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훌륭한 정원사라면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화분에 나눠 심으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받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싹이 나기 시작했을 때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겨울에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에서 자랄 수 있도록 화분을 온실에 넣어야 한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또한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비바람에 노출하여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사 55:8-9). 하나님의 경륜에서 고통과 고난은 우리를 겸손으로 성숙시키는 열쇠이다. 목적이 있는 고통도대체 왜 고통을 주실까? 각각의 상황과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고통의 문제로 자신을 의지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게 하기 때문이다(고후 12:10). 스펄전이 “파도에 의해 이리저리 던져지더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듯이 인생의 파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한다.때때로 우리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 통화를 받거나, 또 다른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혹은 애통하는 성도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순간에도 스스로를 성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교회 개척 안내서에서도 이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을 수 없다.우리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폭풍과 파도를 만나는 때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정말 피하고 싶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모르실까? 하나님은 오직 능력이 있으신 그분만을 보배롭게 여기도록 우리의 연약함을 부드럽게 나타내신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 개척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둘째, 문제와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더 나은 목자로 세워 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을 겪게 하신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러 교회 개척자들은 에너지로 가득하고 용기가 있으며 대담하다. 그들은 열정으로 임한다.하지만 병상에서 죽어 가는 사람 옆에 앉아 있거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로 씨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많은 목회자들은 알게 모르게 힘들어 한다.아마도 주님은 우리를 일부러 고난의 ‘온실’에 넣어 두신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고후 1:4) 할 수 있게 하신다.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가장 잘 배우고 진실한 내 모습을 살피게 된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지만 이를 이루시는 이는 주님이시다.아버지의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관점이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생명, 사역, 교회 개척, 설교, 목양을 새로운 렌즈로 보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나와 다른 사람의 삶에 복음을 더 잘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정말로 나를 아프게 했다. 여전히 아프다.왜 주님은 시험을 주실까?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사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죽음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심은 아닐까. 아마도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현실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복음의 필요성, 그리고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상기시켜 주려 하시는 것은 아닐까.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를 서서히 그분이 원하는 모습의 목회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닐까.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Your Pain has a Purpose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성숙
주님의은혜
섭리
고통
복음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40년 목회에 대한 반성
by Steve Timmis
2018-12-27
이 글을 쓰게 된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첫째, 새로운 해의 시작이다. 이는 주님이 이루신 모든 것을 돌아보고 나를 반성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둘째, 이것이 아마 더 중요한 이유가 될 텐데, 나는 최근에 60번째 생일을 기념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원숙한 나이에 도달했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지난 40년 동안의 목회에서 나를 자비로 붙들어 주셨다.지난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교회 개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혹은 많은 책임을 담당했다. 성공적인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상황도 있었다. 이제 내가 배운 교훈을 정의하기에 적절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바라건대, 이 정리 중 일부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교회 개척의 세계에 새롭게 뛰어든 자들뿐만 아니라 경험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유익이 되었으면 한다.1. 개척의 착수보다 삶에 초점을 맞추라첫 개척을 시도할 때는 경험이나 이와 관련된 지식이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첫 모임은 꽤 성공적이어서 오래되고 비좁은 예배당에 약 30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하지만 일주일 후, 교외로 차를 몰고 나와야만 하는 그 교회에는 아무도 다시 오지 않았다.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인데, 이는 좋은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해 아내와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정말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지역 사회에 참여했으며, 복이 되는 삶, 즉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는 모든 일에 힘썼다.개척에 관한 강연과 자료의 대부분은 ‘착수’에 초점을 맞추며, 이것이 교회 개척의 처음과 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착수는 교회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할 때에 실행할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교회는 그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시에 모여 노래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것에 그치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교회 개척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찰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매일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알리려고 힘쓰며, 서로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고찰 이후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교회를 위해 움직여라. 개척의 방식은 곧 당신이 목표하는 교회를 표현하는 방식이 되어야 하며,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통상적인 혹은 동떨어진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개척 이후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더라도, 당신의 교회는 여전히 깨지기 쉽고 목표를 이루기에 비효율적인 상태로 남을 수 있다. 모임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은혜를 얻고, 그분의 영광에 기뻐하며, 서로와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날마다 그분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때 비로소 ‘개척 착수’를 고려하라.2. 핵심 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마라핵심 팀은 개척을 성공시키거나 반대로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핵심 그룹을 구성할 때에는 각별히 주의하라. 순진함을 피하고 예민하게 판단하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는 사람들, 재정이나 역량으로 도와줄 사람들, 또 당신이 약해져 있을 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반드시 기도하며 신중하게 팀을 구성하라. 나도 늘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간혹 나는 당장의 시급함이나 하고자 하는 열정, 또는 사역을 도울 누군가가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팀을 꾸렸다.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선택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했으나, 좋지 않은 모습으로 끝나기도 했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계획과 무관하게 그분의 교회를 세우신다. 하지만 이 당연한 진리를 믿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곧 사려 깊은 생각의 불필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3. 여성들도 복음 사역자다나는 보완주의(곧 남녀가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여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결혼과 가정 및 신앙 생활 등을 이루어 간다는 입장)를 지지하는 사람이기에 여성 역시 복음 사역자로서 자신의 부르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나 부가적인 유익이 아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과업을 함께할 파트너인 여성이 필요하다. 그들은 뛰어난 복음 전도자, 성경 교사, 제자 훈련 지도자, 조직 운영자, 일꾼,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다른 역할만큼이나 교회 개척에도 반드시 필요하다.목회 사역의 큰 기쁨 중 하나는 여성들이 성장하고, 기회를 제공받고, 훈련되며, 파송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교회에 속해 있는 여성들을 격려하고 또 강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단지 어린이 사역만 섬기게 하지 말라. 여성들은 조직을 구성하고, 영향을 끼치며, 문화를 이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여성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4. 비난받을 정도로 복음에 정통하라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청년이었던 나는 바울이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하면서, 반대로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게 하는 상반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두 상황 모두가 복음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바울은 상황에 맞게 행동하려 한 것이지, 그 행위에 있어서 불일치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원칙에 따랐고, 실용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울을 변덕스러운 자라고 비난했다.내가 교회 개척을 통해 깨달은 점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들로 마음이 분산되거나 심지어 그 방향성을 잃거나, 혹은 주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겁먹지 않으려면 복음에 정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복음은 함부로 수정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여러 상황 속에서 다양한 적용점을 갖고 있을 뿐인데, 그 지점에 다다르려면 복음에 정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알고, 복음을 사랑하며, 복음을 기뻐하고, 복음이 비난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5. 교회의 성장을 곧 복음의 확장으로 오해하지 말라‘교회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 주변에 다른 교회들이 있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 원동력이 되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경쟁’이라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옳은 논리일 수도 있다. 주변 다른 교회보다 최신 유행을 더 잘 알고, 최근 경향을 더 잘 따르고, 더 화려하고, 더 크고, 더 큰 소리를 냄으로써 교회가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성장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의사들이 종양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주변 교회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개척하지 말라. 차라리 복음의 증인이 없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분명 성장은 느리겠지만, 복음이 확장될 가능성은 훨씬 높다.나의 지난 경험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숫자적으로 회중을 성장시키는 일은 고되었지만 최고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만 더욱 아름다운 사역은 무엇일까? 바로 회복된 죄인들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복음이 드러나도록 이끄는 일이다. 이런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분명 이러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 위대하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ings I Wish I’d Known: Reflections on 40 Years in Ministry번역: 주영식
목회
리더십
개척착수
핵심그룹
교회성장
상호보완주의
여성사역자
공동체
목회의 고통이 알려 주는 최고의 가치
by Ray Ortlund
2018-12-11
오늘날 젊은 목회자들 중에는 멋있고, 영향력이 있으며, 대중적 인기가 있는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지난 수 세기 동안 영원한 삶을 위해 애써 온 앞선 목회자들의 사역은,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깊이가 있고, 웅장했으며, 그 생명력이 뛰어났다고 말하고 싶다. 그 예로 사도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골1:24)라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목회 사역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거룩한 힘인 ‘고통’과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겪는 고통은 아마 바울의 고난만큼 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을 보면서 자기 연민, 분노, 불평 없이 고난을 통과해야 함을 배워야 한다. 더불어 바울을 통해 기쁨으로 고난을 이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고통(혹은 고난)에 반응하는 자세가 어떠한지에 따라 우리는 비로소 복음을 전파하는 단계로 뛰어오르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힘은 바로 우리가 성취하게 될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참으신 그리스도(히12:2)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나는 젊은 목사로서 고통이 아닌 기쁨을 꿈꾸며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혼동들과 서러움이 찾아왔을 때, 특히 거부당하는 경험을 할 때마다, 나는 이 사역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아마 당신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낙심이 비록 타당할지라도,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면 할수록,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아래의 구절이 나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주님이 우리를 목회자로 부르실 때 결코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진실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의 고난은 은혜이고, 특권이며, 곧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명류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값비싼 피로 물든 고난의 길을 걸으며 그분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또 다른 진리를 알게 될 준비가 된 것이다. 그 진리란 내가 이 고난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진실이며, 우리를 고난 중에도 기쁨으로 이끄는 힘이다. 목회 사역의 특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된다. 즉,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을 위해 존재하며, 그분을 대리하고, 그분을 위하여 나의 삶을 내려놓는 모든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특권이다. 내가 본 최고의 목사인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날 이렇게 당부하셨다. “목회가 전부가 아니란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임을 기억하거라.” '열두 명의 신실한 제자들: 용기와 인내의 목회 사역'(In 12 Faithful Men: Portraits of Courageous Endurance in Pastoral Ministry)이라는 책에서, 콜린 한센(Collin Hansen)과 제프 로빈슨(Jeff Robinson)은 목양의 고통과 열매가 주는 영원한 기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이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불평하지 말자.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목회자들은 지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 모든 고난을 뛰어넘는 최고의 가치이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붙드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기쁨으로 충만케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 Wasn’t Ready for in Pastoral Ministry번역: 고갑균
목회
리더십
고난
은혜
특권
영광의면류관
가치
콜린한센
제프로빈슨
그리스도
처음
이전
11
페이지
12
페이지
13
페이지
14
페이지
열린
1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