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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지닌 한계와 그 너머
by 노승수
2020-02-27
교회는 원리적으로는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공동체여야 하지만, 현실 교회들은 지역적인 색깔이나 계층적인 색깔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목회하는 목사들은 대부분 자신이 목회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현상을 빌렘 벤게메렌(W. A. VanGemeren)은 “현실정치”라고 했다. 선지자의 메시지에 백성 대중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는 현상을 두고 한 표현이다. 예를 들면 가진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목회하면 가진 자의 편으로 더 기울게 되고, 가난한 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목회하면 가난한 자의 편으로 더 기울어지는 사고를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칼 막스(Karl Marx)는 물적 토대가 우리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다. 유물론에서 비롯된 통찰이지만 놀랍지 않은가? 그가 처한 현실이 그의 생각을 지배해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골 3:2). 즉 목사는 가진 자의 편이나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성경의 메시지를 선지자적으로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마저 허무는 공동체가 교회라고 했고(엡 2:14), 실제로 교회는 위의 것을 추구하는 공동체일 때 계층의 갈등이나 양극화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에서 상을 네 개나 받았다.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공감대를 얻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를 잘 다루었다. 그리스어로 기생충(Παράσιτα)은 “남의 식탁에 차린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묘사는 훌륭하다. 영화를 통해서 모두가 느끼고 공감하지만,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현실로 남아 있다. 교회는 이런 문제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기도 한다.이럴 때 목사는 어떤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고 위의 가치를 구함으로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내야 하는 책임이 있다. 그것이 양극화의 문제든지,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문제이든지 말이다. 이런 문제에서 다수의 소리, 회중의 목소리가 목사의 가르침을 오염시키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 벤게메렌이 말하는 현실정치의 구체적인 사례를 성경 속에서 찾는다면 예레미야서에서 볼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까불지 말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라. 이것을 하나님이 정하셨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민족주의를 표방하던 사람들과 거기에 편승했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유다를 버리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외쳐댔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는 여러 가지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메시지로 인하여 혼란이 가중되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듣기 좋았던 거짓 선지자의 목소리를 취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지는 버렸다. 유다 백성의 시각에서 예레미야는 매국노처럼 비쳤고, 거짓 선지자들은 애국주의자이자 참 선지자처럼 이해되었다. 이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상황과도 너무 잘 어울린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예레미야는 마치 일본이나 북한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이며, 나라를 파는 매국노처럼 보인다. 내부적 논리로는 일본을 혐오하는 것이 더 인기 있을지 모르며, 북한에 대한 경험적 반공주의를 부르짖는 태극기 부대의 메시지가 더 정당해 보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상황을 경험적으로 보면 진보 진영은 보수 진영을 향해 “토착 왜구”라는 표현과 친일적 행위에 대한 혐오를 분명하게 보이며, 보수 진영은 “태극기 부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반공 이미지와 기독교가 완전히 결탁한 상황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오늘 우리 사회라면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이 더 인기 있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것은 그들이 듣고 싶던 소리였다. 벤게메렌은 다수의 대중이 듣고 싶은 소리를 “현실정치”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우상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이런 현실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경의 메시지여야 한다. 우리가 물적 토대인 생산수단에 기대어 살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사의 설교가 중요하며 목사가 지닌 태도가 중요하다. 오늘 목사들의 설교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듣고 싶은 소리를 외치는 것으로 현실 정치화한 현상을 두드러지게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기독교인이 촛불집회와 태극기부대로 나누어 같은 성도들끼리 척을 지고 사회와 국가와 교회의 분열에 앞장서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란 단지 설득의 절차만은 아닌 것이다.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목소리는 소수자 문제를 들어서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가 틀렸다고 한다. 지금 자라는 세대의 젠더 교육에 이런 시각이 가득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나 소수자의 권익과 성경이 하나님과의 관계 왜곡에서 비롯된 죄로 인하여 정죄한 동성애는 별개로 다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도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 성경의 메시지는 때로 매국적 상황을 부르기도 하며, 때로 사회적 상식에 반하기도 하며, 다수 대중의 눈높이와 맞지 않기도 한다.목사의 시각은 교회의 양무리를 목양하면서 그들과 시선을 맞추면서도,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간혹 어떤 연로한 목회자들이 자기가 속한 그룹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낼 때면 가슴 아프기도 하다. 그렇다고 젊은 목사들이 무조건 낫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속한 시대의 다수는 대중의 목소리에 휩싸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라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 되고 말 테니까 말이다. 목사는 자신의 속한 그룹의 한계를 넘어 성경에 그 시선을 고정한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
리더십
벤게메렌
교회공동체
핵심감정
동성애
목회자
현실정치
칼막스
진실하고 흠 없는 삶을 위하여!
by John MacArthur
2020-02-18
이십 년 전 읽었던 기사 한 토막이 기억에 생생하다. 1987년 3월 조지아주 코녀스(Conyers)라는 도시에 있는 락데일 카운티 고등학교(Rockdale County High School)의 불독(Bulldogs) 농구팀이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조지아주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학교 역사상 최초의 우승이었다. 18년이나 팀을 지도했지만 한 번도 우승으로 인도하지 못했던 클리블랜드 스트라우드(Cleveland Stroud) 감독에게는 그야말로 믿을 수 없이 기쁜 결과였다. 결승전을 마치고 몇 주 후 스트라우드 감독은 늘 하던 대로 선수들의 성적표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3급 선수 중 한 명이 몇 과목을 통과하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그가 학과 성적 미달로 농구 선수의 자격을 잃었다는 것을 뜻했다.사실 성적이 안 나온 그 학생은 팀의 승리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었다.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오긴 했지만, 시즌 내내 한 번도 경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후보급 선수였다. 준결승전 시합에서 팀이 20점 이상 앞서고 있을 때 스트라우드 감독은 모든 선수에게 참여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바로 그 경기에서 이 학생이 뛰었는데 시간은 45초가 채 되지 않았다. 성적 미달로 선수 자격이 상실되었던 그 학생은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그 경기 결과에 이 선수가 미친 영향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지아주가 정한 자격 기준을 위반한 것이었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봉착했다. 만일 규정을 위반한 사실을 보고하면 자격 상실로 팀의 우승이 취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학교 외부의 사람들은 위반 사실을 알아챌 수가 없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해도 이 일에 연루된 그 선수는 규칙 위반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팀의 다른 선수들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감독이 고의로 선수 자격 기준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스트라우드 감독 자신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일이 공개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는다면 자신이 감독으로서 이룬 최대 성과, 곧 팀의 승리는 유지 되겠지만, 규정 위반을 숨겼다는 죄책감은 영원히 남게 될 것이었다.스트라우드 감독은 그 위반 사실을 깨달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다른 대안은 생각지도 않았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세워두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팀의 ‘승리’보다 선수들의 ‘성품’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믿었다. “사람들은 농구팀의 점수는 잊어버리지만, 그 농구팀이 보여주는 진실한 행동은 절대 잊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그는 위반 사실을 보고했고, 팀은 최초로 거머쥐었던 조지아주 우승컵을 반환해야 했다.하지만 스트라우드 감독과 팀은 그들이 포기했던 우승컵보다 훨씬 더 중요한 명예를 얻었다. 그들은 진실을 지켰고, 주위로부터 엄청난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다. 스트라우드 감독은 ‘올해의 교사상’, ‘올해의 감독상’, ‘올해의 시민상’을 수상했고, 조지아주 의회가 주는 공식적인 상도 받았다. 몇 년 뒤 그는 코녀스 시의원으로 선출되어 여전히 그 위치에서 섬기고 있다. ‘스트라우드 감독이 옳았다.’ 불독팀의 조지아주 우승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지만, 그 팀의 감독이 보여준 진실성은 잊지 않았다.윤리적 진실성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속성이다. 올바른 교리로 무장하고 성경의 진리를 신실하게 가르치는 일 역시 중요하지만,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의 도덕적, 윤리적 원칙들에 일관성 있게 순종하는 것 역시 ‘동일하게’ 중요한 일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내야 하는 도덕적 기준은 보편적인 인간 윤리의 기준보다 훨씬 높다. 산상수훈의 주요 가르침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산상수훈 전체는 율법의 도덕적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율법의 도덕 원칙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논박하는 담화였다.예수께서는 제6계명이 살인 행위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도 금하심을 가르치신다(21–22절). 간음을 금하는 제7계명 역시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조차도 금한다(27–28절).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의 원수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이다(43–44절). 하나님의 율법이 세우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은 얼마나 높을까?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 자신의 온전하심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우리로서는 당연히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은 계속하여 이 목표를 향해 정진해야 한다(빌 3:12–14).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자신의 윤리적 진실성을 희생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어야 한다. 중요한 이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의 명성(reputation)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지위, 계급, 또는 경제적 위신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어떠한 명성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던(빌 2:7)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가 좋은 명성을 유지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특히 윤리적 진실성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장로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 중 하나는 디모데전서 3장 7절 말씀과 같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윤리적 진실성을 고의적으로 외면한다면 좋은 명성은 단번에 무너진다. 사람들은 부주의 한 실수나 실패와 같은 잘못은 관대하게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윤리적인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재기불능의 상태로 무너뜨릴 수 있다. 수년 전 교구의 한 성도가 목사라면 듣고 싶지 않을 말을 내게 했다. 사업에서 알게 된 사람 한 명을 교회로 초대했는데, 그 사람이 “그 교회 다니세요? 저라면 그런 교회엔 안 갈 겁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부패한 변호사가 그 교회를 다니잖아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게 누굴 가리키는지 몰랐고 지금도 알지 못한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변호사들은 상당히 많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뭔가 착각했거나, 그 부패한 변호사가 우리 교인이 ‘아니었기를’ 바란다. 그다음 주일에 나는 강단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었고 “만일 그 사람이 말한 그 변호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다면, 삭개오의 교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회개하시고, 이 지역에서 당신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십시오. 그리고 당분간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사람들에게 밝히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교회 전체의 명성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잠언 22장 1절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윤리적 진실성이 온전하고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만, 당신에게 명예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우리의 성품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품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도덕법에 대해 강해하실 때,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마음의 정직함에 더 초점을 맞추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진정한 바로미터는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무슨 일을 하는가, 아무도 내 생각을 보지 못할 때 내가 하는 생각들, 그리고 우리 양심의 질문들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이러한 것들이 당신의 도덕적 윤리적 특질에 대한 진정한 측정기이다. 공동체 안에서 좋은 명성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성품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께서 도덕과 윤리 문제를 다루실 때는 우리 마음의 내적 생각들로부터 ‘시작’하신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진실성을 위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지가 당신의 마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승리와 패배는 그곳에서 이루어진다. 거기서 패배했다면 당신의 성품 역시 망가진 것이다. 성품이 오염되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명성 역시 망가지게 되어 있다.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마 7:18).도덕적, 윤리적 진실성을 지키는 일이 왜 그리 중요한가에 대한 세 번째 이유는 우리의 증언(testimony)이다. 당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는가가 당신의 ‘명성’이라면, 당신의 ‘증언’은 당신의 성품과 언행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윤리적 진실성이 없을 때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생각해보라. 쉽게 말해 그 사람은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명백히 진리라 가르치는 것들을 못 믿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8),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 51:6) 등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윤리적 진실성을 무시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자신의 태도로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칭하고 하나님의 자녀라 고백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윤리적 진실성에 관한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윤리적 기준들을 입맛에 맞게 조정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유혹에 빠져서 우리의 명성, 성품, 그리고 증언을 망가뜨리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을 얻기 위해 크고 중요한 것을 잃는 일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bove Reproach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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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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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리더십의 핵심, 진정성
by Matthew Capps
2020-02-13
세계적으로 유명한 은행과 투자 회사의 CEO가 최근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회사의 리더를 선발하는 특이한 방식을 공개했다. 후보자들을 아침 식사에 초대하는데, CEO가 그들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해서는 사람들의 음식 주문이 엉망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후보자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다. 그의 말을 직접 옮기자면 “후보자들의 마음 속을 보고자”하는 것이다. 이 CEO는 자기 회사에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할 이들을 선발할 때 그 사람의 성품과 진정성(integrity)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듯하다.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자격을 갖추고 학위까지 있는 리더들이 많지만, 진정성과 성품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개신교 복음주의 진영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근래 복음주의권 리더들이 하루가 멀다고 뉴스에 등장한다. 간통, 권력 남용, 차별주의적 발언 등에 이르기까지 복음주의권 리더들은 각종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이다. 보수적인 신학을 한다는 우리 역시 윤리적인 문제와 마주하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너무도 자주 일어나는 개인의 진정성 결여는 사회의 부패로 나타난다.도덕적으로 타락한 수많은 리더가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한 사람이라도 결국 사람일 뿐이라는 J.C. 라일(Ryle)의 말을 떠오르게 된다. 우리는 자기 의로 우리 마음을 부풀리려는 성향과 싸워야 한다. 은밀하게 저지른 죄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애통해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성적인 죄로 무너진 동지들을 떠올리며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기만 해도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 선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모범적인 예: 욥의 성품욥기는 처음 구절부터 우리를 멈칫하게 한다. 우리가 갈구해야 할 진정성과 성품을 보여주는 한 사람에 대한 놀라운 요약문이기 때문이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저자가 그의 이름과 출신지를 아주 간략히 소개한 후 욥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그의 성품에 관한 것이다. 그는 완벽한 진정성의 소유자였다. 욥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위선적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욥기 내내 욥 자신도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있다. 욥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고 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권적인 심판의 주에 대한 깊은 경외심만큼 우리 안에 진정성을 진작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욥은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하였다. 이는 욥이 늘 회개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러 면에 있어 욥기 1장 1절이 크리스챤 리더의 비석에 쓸 수 있는 가장 멋진 비문의 예를 보여주는 것 같지 않은가? 성품은 내적 거룩의 외적 표현이다우리가 개인적인 거룩, 진정성, 그리고 성품을 추구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은 투항이지만, 성화는 전투임을 깨달아야 한다. 저절로 거룩하게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룩의 추구는 각 개인의 삶에서 시작된다. 교회를 섬기는 본보기가 되는 리더들의 경우에 이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공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늘 살펴야 한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고 권면했다. 우리의 진정성이 점점 사라져갈 때 이를 계속 못 본 척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져 내려 그 잔해에 깔릴 수도 있다. 에릭 가이거(Eric Geiger)는 자신의 책 ‘당신의 삶은 어떻게 망가지는가?’(How to Ruin Your Life)에서 이를 잘 설명한다. 그는 건물 해체 작업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작업에서는 주로 두 가지 방법을 쓴다는 것을 알 것이라 말한다. 우선 건축물 파괴용 철구를 사용하여 외부로부터 건물을 해체하는 방법이 있다. 이는 밖에 있는 이들에게 훤히 보이는 방법이므로 나중에 건물이 무너져도 놀라지 않는다. 다른 방법은 건물 내부에서 건물의 중심축(integrity)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위치에 폭약을 설치함으로써 건물을 해체하는 방법이 있다. 이 두 번째 방법은 구경꾼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건물의 구조 자체가 폭약에 의해 파괴되면서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내리게 된다. 가이거의 논지를 간단하게 말하면 리더는 무너짐과 그로 인한 잔해를 외부에서 보기도 전에 내부에서 먼저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찬 리더로서 우리는 죄가 우리를 망가뜨리기 전에 먼저 죄를 부지런히 제거해야 한다.진정성의 내부적 파괴가 지닌 잠재적인 힘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준다. 리더로서 우리가 섬기는 이들은 우리의 개인적인 경건과 거룩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리더십에 있어서 진정성은 죄가 하나도 없음(sinles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품과 진정성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덜 짓는(sin less)”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깨닫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가 예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에게 얼마나 회개가 필요한지를 더욱 절실히 인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 죄를 적극적으로 혹은 계속해서 짓지 못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찬 리더는 자신이 먼저 회개를 통해 리더십을 발휘한다. 회개하는 리더는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부정(Denial)과 절망은 성품을 파괴한다 리더의 마음속에서 성품을 계발해가는 성화의 과정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의 대적이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부정(denial)이다. 어느 주일에 목사가 죄에 대한 설교를 전했다. 한 성도가 예배 후 목사에게 다가가서는 “설교 좋았습니다, 목사님. 그런데 저는 오랫동안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목사는 “와, 정말 자랑스러우시겠네요!”라고 했다.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이는 이런 사람과 같다. 자기의 의에 사로잡힌 크리스찬이 교만한 마음에 의해 자기 삶 속에서 자기 죄마저도 보지 못하게 할 수 있음을 보라. 자기의 의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기 전에 다른 이들의 죄를 쉽게 찾아내곤 한다는 것도 이 사실을 드러낸다. 크리스찬 리더인 우리는 다른 이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자신과 비교하며 그들을 업신여기려는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은 자기의 의로 가득한 반(反)은혜의 문화를 세우는 태도라 할 수 있다.리더가 성품을 계발해가는 성화의 과정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의 대적이 쓰는 두 번째 방법은 절망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어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크리스찬 리더들이 절망감에 빠지기 쉽다. 그런 사람은 수치심과 정죄감에 너무 짓눌린 나머지 홀로 동떨어진 채로 자기 죄에 대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다 결국 무너지곤 한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것이다. 내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나이 지긋한 목사 한 분이 초빙 강사로 와서 수업했다. 그분은 “목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려움이나 잘못을 절대로 공개하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분은 어려움을 고백하면 리더로서의 신뢰도에 심각한 손상을 받게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내 생각은 정반대이다. 나는 리더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믿는다. 이런 고백은 오히려 그들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준다.복음이 우리의 성품을 진작시키는 방법죄와의 싸움 속에서 절망과 부정으로 기울어졌던 추가 다시 반대편으로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양쪽 진영 모두에게 복음은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다시 언급하고 싶다.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 자기 죄를 부정하기만 하는 이들에게 복음은 겸손을 알게 한다. 복음이 우리 크리스찬 리더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의 죄성이 너무도 중하였기에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의의 세계에 갇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복음은 소망을 선물한다.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을 만큼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다시 깨닫게 된다. 복음이 주는 겸손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회개해야 할 자들임을 깨닫고, 복음이 주는 자신감으로 인해 우리에게 회개할 용기가 생기게 된다. 이 진리 때문에 우리는 회개를 통해 리더십을 발휘할 용기를 얻게 된다.우리가 리더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상황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가 섬기는 성도들은 우리의 마음속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찔린 상처로부터 진정성이 흘러나오는 것을 봐야 한다. 그것이 진실하고 거룩한 성품이건 겸손한 회개이건 말이다. 개신교 복음주의 진영에 지금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라고 말할 수 있는 위대한 성품을 지닌 남성과 여성들이다. 우리의 지도를 받는 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산 중 하나는 우리의 인생을 다 마쳐갈 때, 우리가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았노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했노라고, 성령의 힘으로 악에서 떠났노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더이기 때문에, 우리의 진정성은 우리의 공적 사역을 반드시 진작시킬 것임을 믿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 원제: Integrity in Christian Leadership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성품
진정성
경건
거룩
성령
부정과절망
복음
욥
건강한 설교를 듣고 있는가?
by David Mathis
2020-02-04
유기농(organic)재배, 방임형(free-range)사육 등 생산되는 먹거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늘고 있다. 호르몬제를 잔뜩 먹인 닭이나 소를 장기간 섭취하면 어떻게 될까? 유전자 조작(GMO) 먹거리를 먹으면 해롭지는 않을까?사람에 따라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의 질문을 쏟아내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문제이다. 특히 자신의 먹거리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다른 사람들의 양식까지 책임지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육체의 건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딤전 4:8), 영적인 양식에 대해서 우리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한주 또 한주,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우리가 취하는 그 양식이 영적 건강에 좋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 영혼의 건강에 대한 장기적 영향은 어떤 것일까? ‘내가 계속 이 설교를 들으면 내 영혼이 성장할까, 아니면 훗날 이 시간을 뒤돌아보며 후회하게 될까?’결정 요인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매주 듣는 설교뿐만 아니라 늘 접하는 묵상집, 기독교 서적, 팟캐스트, SNS 포스팅, 실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대화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 컨텐츠가 모두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경 전체의 내용을 더 잘 숙지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평생에 걸친 과제이지만, 우리가 읽고 공부하는 부분이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어떤 기독교적 교훈이나 교리가 유익한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지표’나 ‘결정 요인’이 있지 않을까? 어떤 교훈이 ‘건전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건강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나 시금석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바울은 포괄적인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디모데전서 1장 10-11절에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제시한다.기준선10절 끝에 나오는 “바른 교훈”은 문자적으로 “건강한 교훈”이라는 뜻으로 ‘목회 서신’인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좋은 교훈과 악한 교훈, 건강한 교훈과 건강하지 못한 교훈, 건강한 영적 삶, 즉 “경건”을 고양하는 교훈과 그리 하지 못하는 교훈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다른 교훈”은 영적인 병을 일으키나(딤전 1:3; 6:3-4), 바른 교훈은 영적 건강을 가능케 한다(딤후 4:3-4; 딛 1:9; 2:1).디모데전서 1장 10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바른 교훈”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른 교훈”이나 “건전한 교리”의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답을 준다는 사실이다. 바른 교훈바울은 “바른 교훈”에 대해 “복음을 따름이니라”라고 말한다. 얼핏 보면 진리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단순해 보이는 말일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의 진수, 핵심, 중심, 그리고 구성 원리는 ‘복음’이다. 15절에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라는 좋은 소식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다. 바른 교훈은 기독교 복음을 설명하고, 받들며, 보완하나 다른 교훈은 복음을 흐리게 하고, 복음을 막고, 복음의 빛을 가린다.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보좌에 앉으신 것은 인류의 모든 시간과 역사의 정점이었다.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라는 복음의 좋은 소식을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며, 모든 삶이 복음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처럼 우리가 좋아하고 우리를 위로하는 진리뿐 아니라, 어둡고 난해하며, 우리가 숨기고 싶은 죄, 하나님의 진노하심, 지옥에서의 영원한 형벌 같은 것까지 모두 복음과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바른 교훈”은 “복음을 따름이니라”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교훈은 모든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 메시지에 의해 좌우된다.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끌어내는 바르고 건강한 교훈은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다. 교훈은 예수님의 인성과 사역을 주제로 하여 그것을 설명하고 드러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구체화한다. 영양소 표시 라벨이 없는 교훈을 만나거든 복음의 리트머스지로 시험해보라. 복음과 영광“바른 교훈”을 ‘복음’으로 끝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바울은 “바른 교훈”은 “복음을 따름이니라”라고 말하지만 ‘복음’에서 멈추지는 않는다. 바울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말 탁월한 선언이다. 뒤에 나오는 말씀으로 인해 좋은 소식이 왜 좋은지를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에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는 말은 그다지 특별한 것처럼 들리지 않지만, 이는 사도 바울이 한 번 쓰고 버리는 말이 아니다. 이 문구에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세 단어, 온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실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듣고 하는 말이지만 그 깊은 의미를 놓치고 있는 세 단어 ‘복음,’ ‘영광,’ 그리고 ‘복되신’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등장한다. ‘복음’은 이미 보았듯이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죄와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그의 아들 안에서 내셨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이다. 우리 믿음의 핵심은 복음이지 율법이 아니다. 좋은 소식이지 좋은 충고가 아니다. ‘영광’이라 함은 하나님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리키거나 무한한 가치의 외적인 표현을 말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위대함을 세상에서 보여주도록 디자인하셨다는 뜻이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말하듯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역사 가운데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에베소서 1장 6절에 의하면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이시는 것의 극치는 “그의 은혜의 영광”이다. 복음은 예수와 그가 행하시는 구원이며,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이 복음 안에서 가장 명료하고 밝게 빛난다. 행복 그 자체‘복되신’은 여기서 가장 어려운 말일 수 있다. “복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복되신’은 하나님은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므로 우리가 그를 찬양함으로 “복되시게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당연히 그는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나 “복되신 하나님”이라 함은 그가 본질적으로 “행복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 붙은 ‘행복한’이란 형용사는 우리가 늘 쓰는 진부한 의미가 아니다. 그는 무한하고, 어떠한 부족함이나 변화도 없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시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15:3). 그는 무한히 행복하시다.최근에 올랜도 개혁 신학교(RTS-Orlando)에서 “하나님의 복되심”에 대해 행한 키스티메이커 강좌(Kistemaker Lectures)에서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는 디모데전서 1장 11절 말씀으로 강의를 시작하며 하나님의 복되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복음이라는 것은 영광 가운데 빛나시고, 복되심 안에서 고요히 거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권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광을 나타내시는 왕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더해 하나님은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극치의 지점에 계시는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복되십니다.그의 피조물들이 진실로, 깊이, 영속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는 바로 이 복되심이다. 모든 영광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 자신의 행복하심이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흥과 즐거움을 깨고 빼앗아가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낙담해 계시거나 슬픔에 빠져 있지 않으신다. 불평하지도 않고 괴롭히려는 마음을 갖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복되시다.’ 그가 소유한 행복은 무한하다. 그분 자체가 무한한 행복이시기에 자신의 끝없는 행복을 ‘나누어 주신다.’아빠가 행복할 때무한히 행복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적 한계를 뛰어넘는 충만하심으로, 창조와 구속 안에서 그의 무한한 가치와 무게, 즉 영광을 통해 공적인 자리로 나오신 것이다. 그의 영광의 극치는 자기 백성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에서 보인 그의 충만함에서 드러났는데, 이를 복음이라 한다. 본성적으로 불법을 행하는 우리 같은 이들에게 이 얼마나 놀랍고 좋은 소식인가! 하나님이 단순히 죄인을 구하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그는 영광스럽도록 행복하신 분이다. 아빠가 행복하면 그 행복은 온 가족에게 퍼진다. 그런 가정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실수와 아픔을 정직하게 나눌 수 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말씀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이요 가족이다. 이 가족의 아버지께서 행복하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런 교회에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기쁨이 회복되며, 우리 모두의 고통을 변화시키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Am I Sitting Under Healthy Preaching?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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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신임 대표 줄리어스 김이 걸어온 나그네길
by Sarah Eekhoff Zylstra
2020-01-22
- 이 글은 TGC 신임 대표로 선출된 줄리어스 김의 성장 배경과 사역 비전을 설명하는 아티클이다. 여기서는 원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함을 밝힌다.줄리어스 김(Julius Kim)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줄리어스는 미군 부대에 소속된 사립학교를 다니며 한국 문화와 영어를 동시에 익혀 나갔다. 그러다가 열두 살이 되자, 그의 가족은 다시 캘리포니아로 오게 된다.그는 중학교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어딘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느낌이 그때부터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있었을 때부터,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하고 가정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하며 서로 다른 문화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미국에 온 후로는 인종 차별을 겪었다. 그러다가 한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을 때는, 더 이상 그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 “저는 지금도 두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문화권 속에 있긴 하지만,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진 않습니다.”이러한 느낌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보다는 학창 시절에 그러한 느낌이 더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십대 때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듯, 저 역시 제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엄청나게 씨름했습니다. ‘나도 금발에 파란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죠. 그러면서 스스로를 미워했습니다. 제게 있는 놀라운 재능이나 강점 그리고 기회는 보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그렇게 지나온 시절은 마치 유배지에 있는 듯한 기분을 안겨다 주었다. 한 마디로, 분노와 좌절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하지만 줄리어스는 자신의 삶에 주어진 두 가지 이점을 누리게 되었다. 하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이방인처럼 살게 된 한국계 미국인 친구가 많이 있었다는 이점이다. 또 하나는 열두 살 때 집에서 쫓겨나 잔혹한 전쟁 가운데 생존한 후로 두 번이나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아버지가 자신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 주었다는 이점이다. 그래서 줄리어스는 타문화권 속에 살며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즐거운 경험을 하는 가운데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갔다. 그러면서 어떻게 더 깊은 차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지 배우게 되었다.기독교인이 점점 주변부로 밀려나는 나라에 살다 보면, 신자들은 때로 분노와 좌절 그리고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거기다 세속화도 가속화되면, 점차 유배지로 추방되는 기분까지 맛보게 된다.그러나 줄리어스는 바로 그 경험이 자신의 문화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아버지의 회심그처럼 나그네로 살아가는 비결을 줄리어스는 그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원래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난 줄리어스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호의호식하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곧 줄리어스의 할머니)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자,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에게 쫓겨나 다른 집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리고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그가 살고 있는 집에 아버지가 찾아와 불을 지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 근교의 작은 마을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식량을 구하거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다.그러다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해서 철수하게 되자, 그는 정부가 지원하는 무상 교육과 거처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즈음 한 친구의 인도로 마을에 세워진 감리교회에 출석하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명목상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관심을 갖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밤이면 교회에 가는 아들이 집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이후 1950년 6월에 북한군이 쳐들어오며 전쟁이 터지자 학교와 교회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에 두려워진 줄리어스의 아버지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의 간구를 듣고 계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비록 아버지는 자신을 쫓아냈고, 어머니는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궜으며, 나라는 그를 안전히 지켜 주지도 못했지만, 그 모든 시련은 그의 믿음을 좌초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러한 환난 속에서 그의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경건한 생활1959년에 아버지는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약 10년 후 줄리어스가 태어났다.그러다가 줄리어스가 두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한국으로 돌아와 공군 제트기에 장착할 컴퓨터 메모리 시스템을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 회사는 전성기 무렵에 직원을 천 명 가량이나 두었다.당시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이 지나면, 아버지는 지역 교회의 목사를 초대해 복음을 전하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줄리어스의 증언에 의하면 “수년 동안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줄리어스는 아버지가 직원들을 어떻게 돌보는지, 또 지역 교회의 사역을 어떻게 후원하는지, 그리고 교회에서는 평신도 리더로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며 자라게 되었다.“아버지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멘토입니다. 그 경건한 생활이 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남겼죠.”그런데 1980년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줄리어스는 자신의 짙은 피부색과 검은 눈동자가 다른 이들과 달라 두드러져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관심을 두는 문제나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선호하는 집안 장식이나 주말 활동 등도 모두 미국인 친구들의 생활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처럼 줄리어스의 가족은 주류 문화권에 속하진 못했지만, 다른 한국인 가정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다. 1980년에 캘리포니아로 돌아올 당시 그의 가족은 똑같은 바다를 건너온 29만 명이나 되는 이민자 대열에 속하게 되었다.그 이민자 물결은 1965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이민 제한 정책이 해제되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1970년에 3만 9천 명 정도였던 한국인 이민자 수는 1990년에 56만 8천 명으로, 2010년에는 110만 명으로 늘어났다.전쟁이 남긴 상처를 안고 미국으로 넘어와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된 초기 한국인 이민자들은 대체로 야망이 크고 똑똑하다는 등 공통점이 많았다. 그리고 서로 밀접한 관계로 엮어진 커뮤니티를 이루어 한 동네나 교회 혹은 가정에서 자주 모였다.줄리어스는 이렇게 회고한다. “주일 밤이면 3, 40명 정도의 사람들이 늘 저희 집에 모였습니다. 모두 함께 저녁을 먹었죠. 그러고 나서 어른들은 성경공부를 하고,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TV를 보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학교에 가서 백인 친구들과 지내고, 주말이면 이민교회에서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줄리어스의 신학교 동창이자 장로교 목사로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오웬 리(Owen Lee)는 이렇게 말했다. “좀 더 한국인다운 애들이 있었는가 하면, 좀 더 미국인다운 애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애들은 그 중간에 끼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이에 대해 오웬의 동생인 로빈 리(Robin Lee)는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저는 대학에 가서야 제가 누군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혐오감을 지닌 채 오랫동안 살았죠. 백인처럼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말입니다.”오웬은 집에서는 한국 문화에, 밖에서는 미국 문화에 맞춰야 하는 생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실이며, 그 현실의 렌즈를 통해 인생의 모든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두 가지 문화 속에 있지만, 어느 문화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비로소 안심하게 되죠.”혼자가 아닌 삶이처럼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낯선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자신과 함께하는 다른 이들의 존재라 할 수 있다.로빈은 대학 시절에 한인 교회에 다니다가 교회의 권유로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학생회장으로 있던 줄리어스를 만나 개혁신학에 대한 소개를 받으며 그와 깊은 우정을 쌓게 되었다.줄리어스도 개혁주의 전통에서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가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간 이유는 다른 신학교보다 그곳이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는 목사로서 생을 마감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담임 목사와 아버지의 권면으로 결국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그때 저는 너무 어리고 미숙했습니다. 그저 아버지와 목사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한번 해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이전에는 알지 못한 방식으로 성경을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열어 주었다. “새롭게 개혁신학을 알게 된 후로 성경을 보는 눈이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그러자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계획하지 않았던 길당시 PCA에 소속된 한인 교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영어를 사용하는 2세 사역자를 늘 필요로 했다. 이에 줄리어스는 목회학 석사 과정을 하며 어느 한인 교회에서 청장년부 사역을 담당하게 되었다.그렇게 주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금요일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인도했고, 또 토요일이 되면 리더십 훈련이나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상담했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다시 설교를 한 후 온종일 교회를 섬겼다.그 시절 줄리어스와 그의 아내는 해외 선교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교수들은 그에게 박사 과정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그에 대해 줄리어스는 이렇게 답변했다. “목회학 석사 과정도 충분히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울 만한 도구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교수들은 한번 기도해 보라며 권면했다.결국 그는 트리니티신학교에 가서 존 우드브리지(John Woodbridge) 교수의 지도하에 역사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줄리어스와 그의 아내는 이 과정만 끝나면 해외로 나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자며 서로를 다독였다.그러다 박사 논문 제안서를 준비하는 중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교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학교에서 가르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는 전화였다.하지만 그는 일단 20년 정도는 해외에 나가 선교 사역을 해야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그에게, 최소한 학교에서 기도를 한 후에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줄리어스는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이 학교가 보여 준 배려에 깊이 감사합니다. 바로 그 초창기 수년 동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를 용납해 주었습니다.”그는 지난 20여 년 동안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설교학과 타문화권 선교, 그리고 목회 사역과 설교사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설교학 교과서를 포함한 저술 사역과 일 년 동안 한국에서 가르친 경험을 포함한 교수 사역을 감당하며 캘리포니아 에스콘디도에 있는 뉴라이프 장로교회에서 협동 목사로도 섬겼다.그러면서도 그는 좀 더 광범위한 선교 사역에 대한 갈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세월줄리어스가 트리니티신학교에 있을 때 돈 카슨(Don Carson)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딱 10년 후 카슨과 팀 켈러(Tim Keller)는 TGC를 설립하기 위해 이사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이 시대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회를 갱신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는 복음주의 리더들의 연합을 이루는 게 당시 TGC의 목표였다.이러한 프로젝트는 누구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그 성과를 드러내었다.그래서 현재 TGC는 미국과 캐나다에서만 스물한 개 지역의 대표단을 구성하게 되었고, 세계적으로는 열두 개가 넘는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웹사이트 방문자 수만 1백만 명에서 3천 2백만 명으로 늘었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웹사이트가 되었다.그리고 지금까지 TGC 대표를 역임해 온 카슨은 다가오는 6월에 TGC 신학자로서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다. 그렇게 되면 줄리어스가 본격적으로 대표직을 수행하게 된다. 줄리어스는 기독교를 잃어버린 현대 문화 속에 복음을 구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목사들을 목양하고 교사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전 세계에 걸쳐 수행하게 될 것이다.“TGC가 이미 감당하고 있는 사역에 맞아떨어지는 온갖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해 오신 주님의 섭리가 불가사의할 따름이죠.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저를 준비시키려고 지난 세월 그 많은 일들을 허락하신 주님이 그저 놀랍습니다.”세상 문화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오랫동안 미국은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선택받은 땅처럼 여겨졌다. 공립학교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진리를 배울 수 있었고, 법정에서는 판사가 성경을 인용했으며, 지역 의회에서는 의장이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했다. 나아가 토마스 제퍼슨과 에이브러햄 링컨을 제외한 모든 대통령은 개신교에, 그리고 존 에프 케네디는 가톨릭에 속했다.그러나 상황이 바뀌고 있다. 2007년부터 2018년을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밝히는 미국인의 비율은 78퍼센트에서 65퍼센트로 떨어졌다. 이에 반해 스스로 어떤 종교도 갖지 않았다고 밝히는 비율은 16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증가했다. 또 낙태와 동성 결혼은 합법화된 반면에 교회 출석과 기도 생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모두 다 쇠퇴하고 있다.이에 정통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유배지에 온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인 조엘 킴(Joel Kim)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우리가 들고 다니는 여권이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혹은 우리 이름에 뒤따르는 직함이 아닌 다른 데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곳은 일시적인 집,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 있는 무언가를 꽉 붙들고 살아가지 않습니다.”물론 세상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러한 삶이 큰 유익을 준다고 줄리어스는 말한다. “그와 같은 삶은 저로 하여금 소외된 이들에게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또 장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결국 두 문화 사이에서 살아온 여정은 줄리어스를 두려움에 위축된 사람이 아니라 그 담임목사인 테드 해밀턴(Ted Hamilton)의 표현처럼 “겁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또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라 그 아내의 고백처럼 “매력적이고 사려 깊으면서 희망차고도 열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그러한 나그네길이 줄리어스 자신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생의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TGC가 우리의 본향이 이곳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다른 분에게 그리고 다른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를 기대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우리의 인생과 관계, 우리의 꿈과 목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Unlikely Pilgrimage of TGC’s New President번역: 장성우
목회
리더십
문화권
정체성
아버지
멘토
이방인
소속
나그네
줄리어스
지속 가능한 설교를 위하여!
by Dan Doriani
2020-01-21
목요일 오후 두 시, 젊은 교회 개척자인 마이클(Michael)은 마냥 늘어져 있다. 마이클 생각에 자기 교회는 살아남아도 자신은 그렇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지쳐있었다. 수요일은 밤늦게까지 이메일 답장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남자 제자훈련 모임을 인도해야 했다. 늘 같은 방문자와 커피를 마시고는 교회 재정에 관한 점심 회의를 준비하느라 오전을 다 보냈다. 회의는 길었고 녹초가 된 마이클은 주보 자료를 늦게 보내주었다. 설교 본문과 다소 진부한 제목은 있었지만 개요도 없고, 인용할 다른 본문과 설교의 대지도 없었다. 한숨만 나왔다. 예배 기획을 담당하는 사람은 찬양, 기도, 간증을 설교 내용과 맞춰 달라는 그의 요청을 이미 오랫동안 무시해왔다. 어떻게 매주 이런 식으로 온 것일까? 매주 월요일 오전 8시부터 11시까지는 “설교 준비”에만 쓰겠노라고 달력에 표시는 해두었지만, 아침에는 늦잠을 잤고, 뉴스, 스포츠, SNS를 훑어보느라고 “중요한 책”인 성경을 읽을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신학교 마지막 학기 생각이 났다. 당시 교수님에게 과제 하나에 대해 기한 연장 요청을 했는데 “자네는 지금 과제물이 여러 개라서 이런 요청을 하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는가 본데, 목회 현장에 가면 주일 아침은 놀라울 정도로 정기적으로 돌아온다네. 주중에 무슨 일이 있었든, 교인들이 기한 연장을 해줄 것 같은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더 안 좋은 것은, 마이클이 자신이 영적으로 메말라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교 졸업생들처럼 마이클도 한때는 설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신학교에 간 것도 그가 학부 시절에 존경했던 설교자들 때문이었다. 마이클에게는 살고 있는 도시를 섬기고자 하는 부담감, 이 땅의 문화와 적극적으로 교감하고자 하는 열정 등 많은 것이 그에게 있었다. 하지만 이 년 만에 열정은 소진되었고, 괜찮은 예화는 바닥났다. 신학교 시절 썼던 주해 노트를 재활용해야 했다. ‘아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설교 준비를 자꾸 미루는 걸까?’ 마이클의 고민이 깊어갔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사막에 있는 것처럼 영적인 메마름을 경험한다. 마이클이 정말로 자기에게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결단을 내릴 수도 있다. 일단, 매주 설교하지 않아도 되는 사역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매번 다른 이들이 해놓은 말씀 연구를 가져와서 설교를 작성할 수도 있다. 했던 설교를 다시 하는 방법도 있다. 그럼 교인들은 매 주일 모든 본문에서 거룩하라, 신실하라, 사람들과 교감하라, 성경을 공부하라, 교회 사역에 헌신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내용의 설교만 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이클이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중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설교는 지루한 것으로 여겨지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게 싫다면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설교를 향한 길 말이다.가장 좋은 길지속 가능한 설교에 관한 짧은 시리즈 중 첫 번째인 이 글에서, 나는 강해 설교의 밑바탕이 될 뿐 아니라 강해 설교를 풍성하게 해주는 성경 읽기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지속 가능한 설교를 위한 가장 쉽고도 좋은 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해 설교는 주어진 성경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것의 적용을 시도하는 설교를 말한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강해 설교자가 신구약 성경전서를 정기적으로 읽는 것이다. 짧은 본문은 더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하며 읽는다. 설교를 풍성케 할 것을 자신의 성경 읽기에서 끌어오는 것이다. 메시지는 원문을 번역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 구조를 분석하고, 문학적이고, 문화적인 문맥을 고려하여 본문이 저자와 원독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신자들과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말하고 있는지를 찾아내어 전달해주는 작업이다. 하지만 설교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강해 설교를 기피한다. 일단 시작하면 너무도 길게 이어지는 시리즈를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본문 강해와 실제 적용이 서로 대립적 관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강해의 기교를 잊어버렸거나 본문과 교리를 깊이 다루는 설교에 대한 열정을 잃은 이들도 있다. 모두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마태복음, 또는 로마서 같이 긴 책들은 여러 시리즈로 나눠 설교하면 된다. 잠언의 경우 십 수가지 주제들을 선별하여 충실하게 설교하면 되고, 시편에서는 열 편에서 스무 편 정도의 대표적인 시를 강해하면 될 일이다. 덧붙여 말하지만, 아주 짧은 본문을 극도로 자세히 강해했던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 식의 설교를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성경 본문 자체가 주는 단락을 따라가라.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승리로 설교 한 편을 구성하거나(삼상 17:1–58), 팔 복 본문으로 설교 두어 편 정도를 쓰거나(마 5:1–1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를 본문으로 하여(마 23:13–36) 설교 한두 편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긴 본문을 다루면서도 강해 설교자는 본문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 드러나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한 번에 몇 절씩만 다루면서 천천히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다양한 장점들강해 설교의 강점은 여러 가지다. 강해 설교는 지속 가능한 강단 사역을 다음과 같은 면에서 돕는다.1. 혼자 하든지 교회 직원들이나 동료 목회자와 함께 하든지 간에 강해 설교는 설교자가 수개월 전부터 설교를 쉽게 계획할 수 있게 해준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선 설교자가 신구약 중 책 하나를 골라 여러 번에 걸쳐 읽고, 좋은 개요서를 한두 권 정도 읽는다. 그리고 해당 성경을 10회, 20회, 또는 그 이상에 나눠 설교할 수 있는 본문들로 나눈다. 해당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깊어졌다면, 이제 시간을 정해 집중할 계획을 세우면 된다. 정해진 설교 본문 하나마다 문서를 하나씩 만들어 열 개에서 스무 개 정도의 문서를 만드는데, 각각의 문서마다 대주제, 핵심 질문, 본문의 개요, 가능한 적용 내용을 기록해 놓는다. 설교자가 각 본문을 충분히 연구할수록 예화, 적용, 신학적 묵상, 그리고 병행 본문들을 발견하고 저장해 두기가 쉬울 것이다.2. 강해 설교는 좋은 연구 자세를 확립하게 해준다. 연구 결과가 여러 주에 걸쳐 열매를 맺을 것을 알기에 설교자는 본문 배경 연구에 더 진력할 수 있게 된다. 설교하는 본문의 문법과 어휘에 점점 더 익숙해짐에 따라 번역 능력도 자라게 된다.3.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강해 설교를 통해 더 수월하게 다룰 수 있다. 또한 민감한 주제들에 대한 두려움을 경감시켜준다. 성 윤리나 돈 같은 주제를 다뤘다가 괜한 논란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목사가 있다고 가정해보라. 성경이 성과 돈 문제에 대해 정말 많이 언급하기 때문에 제아무리 과묵한 설교자라 해도 그 주제를 피해갈 수는 없다. 교인들이 “목사님이 왜 저 주제로 설교하지?”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가 좋아하는 주제만 반복적으로 설교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4. 강해 설교는 설교 시리즈와 연관된 주석 등의 자료들을 많이 모을 수 있도록 이끈다. 동역자들이 강단 사역이 향후 몇 달간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예배를 기획할 때 예측할 수 있고 - 설교자가 열려있는 사람이라면 - 예배 및 설교 메시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 강해 설교는 ‘벌써 목요일인데 설교 준비를 시작도 못했네’하는 끔찍한 느낌을 회피할 수 있게 해준다. 지혜로운 목회자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폭넓은 독서를 통하여 청중들의 상상력과 교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효과적으로 적용되도록 한다. 말씀 읽기와 설교 계획 세우기를 실천하면 사실과 사건,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사를 교회의 말씀 사역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더 쉽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지속 가능한 설교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폭넓게 읽기(wide reading)와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를 병행하는 것부터 시작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Sustainable Preaching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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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균형있게 복음을 제시하라
by 고상섭
2020-01-16
팀 켈러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두 가지 방법으로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이 세상은 어떤 소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첫째 질문이 복음을 개인주의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창조, 타락, 구속, 회복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설명한 것이다. 균형 잡힌 복음을 제시하라 쉽게 말해서 개인 구원을 향한 복음 제시를 ‘죄 사함의 복음’이라 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 제시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둘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죄 사함의 복음만을 복음으로 고집하게 되면 복음은 단지 개인 구원의 차원에 머물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선함이나 물질세계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마치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인 것처럼 들리게 된다. 하나님 나라 복음만을 강조하게 되면 복음이 이 세상을 갱신하는 이야기로만 이해되는 위험성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거대담론에는 가슴이 뜨거워지지만 정작 나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구원에 동참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게 된다. J.I 패커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개인 구원이 없는 하나님 나라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근년에 성경신학과 현대적 성경 주해에 큰 발전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는 성경의 큰 틀과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어떻게 절정에 이르는지에 관한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발전은 우리의 시야를 거대담론으로 채움으로써 루터가 개인적인 관점에서 던진 질문을 다루지 못하도록 우리를 산만하게 한다. 이는 복음의 이해를 돕는 것만큼이나 방해하고 있다.” 개인의 구원에 대한 복음이 사라진 공동체적 구원은 위험한 복음이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이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구약은 공동체가 가난한 약자들을 돌보지 않은 것을 심각한 범죄로 묘사한다. 복음의 공공성을 상실하고 개인주의 구원에 몰두해 있는 교회를 깨우기 위해 또한 한쪽의 복음만을 강조하게 되면 하나님과 개인이 가지는 바른 관계에 대한 이해없이 공동체적 구원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극단이며 오류이다. 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개인 구원과 공동체적 구원을 나눠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개인 구원에 관심이 있고 복음의 공공성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부족한 한 쪽을 강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를 새롭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개인 구원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세상에 대해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이렇게 묘사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까닭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 즉 참된 죄사함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복음의 명제를 이야기 속에서 표현하라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두 가지 답이 서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한 폭의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것은 복음 진리들이 단순한 명제의 집합이 아니라 여러 장으로 구성된 이야기 속에서 표현되게 하는 것이다. 이야기식 접근 방식은 질문을 제시하며 명제적 접근 방식은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Q1.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A :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은 홀로 계시지 않고 연합으로 존재하신다. 그 연합은 완전하다. 무엇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충만한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시고자 우리를 지으셨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있는 기쁨과 사랑에 동참시키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당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채우셨다. 곧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알고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 Q2. 어디서 잘못되었는가?A: 인간의 죄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교만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늘 다른 우상들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영적 속박과 정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Q3.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가? A: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이 성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또한 온 세상의 어그러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고 최종적으로 세상을 갱신하고 회복하며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몸까지 모두 구속하신다.Q4. 나는 어떻게 바르게 되는가?A: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바르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용서받았다. 또한 그리스도처럼 죽음에서 일어나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많은 노력을 통해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다. 또 믿음의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구원의 믿음은 심리적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그분을 신뢰하겠다는 의지의 행동이다. 이렇게 우리는 죄사함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모두 균형 있게 전해야 한다.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명제적 진리를 선포하는 것은 균형 있는 복음 제시의 좋은 예이다. 죄사함의 복음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연결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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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오늘날 요구되는 남성적 리더십
by Greg Morse
2020-01-07
남성성(masculinity)에 관해 가르치는 목록에 힘, 주도성, 열정, 용기와 같은 자질이 포함되는가? 우리가 교회 사무실에서 일할 남자를 평가할 때, 그리고 소그룹 지도자와 경건한 멘토를 찾을 때,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융통성있는 남자, 양을 보호하고 기꺼이 늑대와 싸울 수 있는 선한 목자와 같은 사람을 원하는가?무언가를 지키고, 보호하고, 정복하고, 인도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남성의 힘, 용기, 열심 및 주도성을 높이 평가하는가? 그럼 강하기 때문에 온화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고양이가 아닌 호랑이는 강하기 때문에 온화함을 보일 수 있다.지금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 것”이라는 아슬란의 설명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남성성(masculinity)이라는 종(species)이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생각은 남자를 안전하게 하는 데에 선함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은 선함과 상관없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로 중생한 남자는 상대가 불편해할 말은 하지 않고, 공격하지도 않으며, 주도적인 모습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강요가 없다면 신념 없고, 열정 없고, 심지어는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이러한 이미지는 남자를 만든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다. 중생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의로움으로 훈련받은 남자의 경건함은 그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변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남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본성을 잃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더함으로써 성숙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친절, 자제심, 동정심은 그의 힘, 용기, 결단력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남자는 어디로 갔는가? 온화하고 강한 남자는 세상에 역설을 제시한다. 그의 손은 집을 짓고, 아들과 씨름하고, 딸들과는 차를 마신다. 그리고 칼자루를 들고 어둠의 세력에 대항해서 싸운다(엡 6:10-20). 그는 갑옷을 입고 잠을 자는 경건한 전사이다. 용기 있으면서 온유하고 선한 사람이다. 다음에 나오는 남자에 대한 묘사도 성령의 도움으로 얼마든지 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당신은 홀에서 여자들에 둘러싸여 음식을 먹었던 가장 온유한 남자였다. 당신은 모두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람으로 적에게는 가장 무서운 장수이자 가장 용감한 기사였다.”_‘아서왕의 죽음’(Le Morte D’Arthur)우리는 남자의 성품을 강인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나눌 때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 사회는 점차 부드러운 남자를 선택한다. 그렇다면 강인한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우리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남자를 특별한 인종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3-34).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적극적으로 찾는 남자. 자신보다 나라를 생각하는 믿음의 남자. 위험을 감수하고 많은 것을 잃을지라도 더 높은 가치를 얻기 위해 전진하는 남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살았던 남자.잊지 말자. 미지근한 종교는 미지근한 남성상을 만든다. 그리고 미지근한 남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교회를 지나쳐서 이슬람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또는 단순히 ESPN(미국 스포츠 방송-역주)을 지나 파괴의 길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죽어가는 남성의 불꽃경건한 남자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조차 나타나는 남성의 여성화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불편함을 느낄지가 궁금했다. 성경에서 나오는 오래전 남자의 모습을 버려야 할 것인가? 방황하는 아브라함, 씨름하는 야곱, 싸우는 여호수아, 이방의 선지자를 조롱하는 엘리야, 융통성 없는 다니엘, 거칠게 말하는 세례 요한, 주도적인 바울과 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엎는 하나님의 아들을 잘 못 되었다고 꾸짖어야 하는가?우리는 경건이 주는 불편함보다 친절함이 주는 편리함을 선택한 것일까? “여기 아버지, 남편, 교회 가는 사람, 정말 좋은 사람이었던 한 남자가 잠들어있다”라는 비석 아래에 언젠가 내가 누워있지 않을까 두렵다. “나이스하다는 것”은 아픈 허리에 대해서, 거슬리는 것에 대해서, 용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의로움과 바른 것에 대해서 할 말이 없다. 나이스하기 위해서 굳이 용기를 낼 필요도 없고, 특별한 신념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악한 자를 상대로 굳이 원수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냥 있으면 된다. 예수님은 적당하게 맞춰주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 경고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이제 우리는 길을 벗어난 것 같은 오류를 과도하게 바로잡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오히려 또 다른 도랑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 만족하며 남자다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거룩한 힘과 자기희생을 통해 더 나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 불길이 타오르는 남자회복을 위한 한 단계는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타협하지 않는 특징을 회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질투심이다. 우리는 거룩한 남자의 행동만이 아니라 내면의 마음과 확신을 다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다(출 20:5). 그는 자신의 영광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다. 그는 그와 같은 거룩한 질투심으로 붙 타오르도록 남자를 창조했다. 이런 남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남자, 건강한 교회를 향한 열정에 불타는 남자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 불타는 남자는 반드시 현재의 고착상태를 부수어 버릴 것이다. 문화적인 수용과 세속적인 민감함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은 성경이 말하는 남성다움을 연마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거룩한 질투심은 남자를 변하게 만든다. 이 세상을 향해, 육체의 정욕을 향해 그리고 사탄을 향해서 투쟁하게 한다.모세를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민 12:3). 그는 백성의 우상숭배에 분노해 십계명 돌판을 부쉈고, 황금송아지를 녹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마시도록 했다(출 32:20). 그의 백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은 우상숭배에 대하여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했다. 할례를 받지 않은 블레셋 거인이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무시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시를 쓰는 목자 다윗은 또 어떤가(삼상 17:26).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흑인”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졌던 아프리카인 비느하스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졌던 그는 심각한 죄를 짓고 있던 두 명을 창으로 꿰뚫어서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켰다(민 25:6-13).엘리야를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불신을 보며 그는 괴로워했다. 바알의 선지자들과 정면 대결을 요구했고, 우상에게 절하는 그들을 몇 시간에 걸쳐서 조롱했다(왕상 18:20-40).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오직 하나님만 따르는 것을 원했다.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은 어떤가? 그는 예수님을 섬기는 대신 온 도시가 우상을 섬기는 모습에 자극을 받았고,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서 아테네의 위대한 철학자와 지도자들에게 도전했다(행 17:16). 그는 사람들이 놀리고 반대하고 때려도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 사역을 위해서 살았다. 왕의 모든 남자들예수님을 생각해보자. 그는 채찍을 들었고 거칠게 말했으며, 무기를 손에 들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품에 안고 함께 노는 유다의 사자이다(막 10:14). 또한 그의 분노를 만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산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헛된 소망을 할 정도로 무서운 어린 양이기도 하다(계 6:16).그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고후 10:5), 용의 대가리를 부수지만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사 42:3). 그는 갈보리로 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도둑과 쓰레기들과 함께 죽으려는 나이스한 마음으로 간 게 아니라 그의 신부, 그의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그 자신의 영광을 향한 불타는 정열 때문에 갈보리로 갔다(요 17:4; 롬 3:25-26; 벧전 3:18). 스펄전 목사가 강단에서 한 마지막 말은 이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예수]는 대장 중의 대장이다. 선택한 왕자 중에 그분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를 발견할 수 있다. 바람이 부는 언덕의 가장 황량한 쪽에서 우리는 그를 찾을 수 있다. 십자가의 가장 무거운 끝은 그의 어깨에 있다. 그가 우리에게 짐을 지라고 명령할 때 자신도 함께 짐을 진다. 자애롭고 관대하며 친절하고 부드러우며 사랑에 화려하고 풍성한 것이 있다면, 그건 항상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스펄전: 설교의 황태자')"왕의 남자는 전투가 가장 치열한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발견될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모험도 하지 않음으로, 어떤 것에도 열정을 키우지 않음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 누구의 편을 들지 않음으로, 믿음의 요새를 세우지 않음으로, 어떤 영적 전투에도 참여하지 않음으로, 짐을 지지 않음으로, 정복하지 않은 언덕 위에 깃발을 꽂지 않음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을 것이다. 왕의 남자는 악의 세력에 맞서 거품 칼을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치열한 전투를 통해 여성과 아이들에게 가장 안전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나님 안에서 위험한 남자는 주위를 향한 책임을 지고, 내가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질 때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곰이 공격할지라도 가만히 서 있지 않을 것이다. 온유하지만 치열하다. 거칠지만 부드럽다. 리더지만 섬긴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다.바로 예수님과 같은 남자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Not Safe, But Good: The Men We Desperately Need Today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성령의열매
남성의불꽃
거룩한힘
자기희생
스펄전
예수님같은남자
거룩한질투심
성탄에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by 이승구
2019-12-19
성육신에 대해서 가르칠 때 제일 먼저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모든 사실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성과 독특성에 대해서 강조해야 한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성육신이 다른 역사적 사실들과 같이 일어난 것으로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마리아에게 수태된 것의 역사성, 그 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어머니 자궁 속에서 10개월 동안 자라나신 일의 자연스러움, 그리고 베들레헴에서의 출산 등을 모두 역사적인 사실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 때 이와 함께 잘못된 정보가 같이 전달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매우 애를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부모님과 교사들이 가르친 것 가운데 잘못된 요소가 있는 것을 알고 제대로 가르친 것까지를 의문시하도록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위 “경건한 허구”를 섞어 가르치게 되면 후에 의심이 몰려 올 때 모든 것이 거부되기 쉽기 때문이다.이 때 유의해야 할 대표적인 것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예수님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 우리는 정확한 연대를 모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수님께 탄생하신 것을 중심으로 온 세상의 연대를 새롭게 기록해 보려던 소 스키디아(Scythia Minor) 출신의 수도사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Dionysius Exiguus)가 로마에서 525년에 시작한 계산법에 착오가 부가되어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난 연도를 BC 4년을 생각하지만, BC 6년, BC 7년, BC 12년이나 심지어 18년까지를 생각하는 분들도 있으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출생하신 정확한 연대도 모른다. 성경은 대강의 기간을 제시하고 있지 정확한 연대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2) 더구나 우리는 주께서 어느 날 탄생하셨는지 모른다. 초기 기독교 역사가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c. 180-c. 250)에 의해서 221년에 처음으로 (부정확하게) 예수 탄생 기념일로 언급된 12월 25일은 로마 교회에서 이교 시절에 로마인들이 “패할 수 없는 태양의 탄생일”(Dies Natalis Solis Invicti, the birthday of the undefeated sun)이라고 부르며 기념하던 태양신 축제(solar festival)를 대신하여 “의의 태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그렇게 정하여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 온 것의 연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 어린 아이들에게라도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인 것과 같은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3) 또한 마리아에게 수태 고지를 한 천사 가브리엘(눅 1:26-38)과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한 ‘주의 사자’(눅 2:9), 그리고 그 후에 그 천사와 같이 있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찬양한 수많은 천군들은(눅 2:13-14) 결국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며, 가브리엘의 이름이나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남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을 것임이 확실하다는 것과 특히 조각을 할 때나 이상(vision) 중에 나타난 경우가 아니라 천사가 직접 나타난 경우에는 천사가 날개를 달고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에 유의해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칼빈은 왜 천사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답하면서 이것은 우리의 이해력 정도에 맞추어 표현하면서 신속히 도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잘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건전한 해석들에 근거한 사유를 하고 그런 가르침을 베풀어야 한다.(4) 또한 천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나심에 대한 선언을 듣고서 목자들이 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눅 2:15-20)과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집으로 찾아와 예물 드린 사건(마 2:1-12)은 시간적 거리를 지닌 사건임을 분명히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또한 동방 박사가 몇 명이 온 것인지를 성경이 명확히 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 숫자를 셋으로 강조하여 말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6세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서방에서는 8세기에 상당 보편적으로 그들에게 부가된 이름인 카스파르(Caspar), 멜키오르(Melchior), 발타자르(Barthasar) 등의 이름을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이렇게 어릴 때부터 성육신과 관련된 명확한 사실성을 분명히 하면서 가르치다가 초등부 고학년부터는 그 시기나 앞으로 다가오는 역사적 회의주의를 극복시킬 수 있는 교육을 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중고등부 시절, 그리고 대학 시절에 올려 올 수 있는 회의를 미리 극복하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예방주사를 놓으며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그런 회의적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한 발자국 앞서 가면서 그 역사성과 독특성을 미리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목회
설교와교육
성육신
성탄
마리아
가브리엘
역사성
독특성
영원을 바라보는 눈을 간직하라
by Adam Ramsey
2019-12-10
강한 불빛이 비치면 잠시 앞을 보지 못하기도 하지만, 자칫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 교회를 개척하는 목회자들이 당면하는 상황들이 때로는 강렬한 빛처럼 다가와서 현실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직면한 난관으로 인해 현실 속에 빠진 나머지,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조차 잃어버리기 쉽다.개척한 교회가 건강하게 안정되고 질적 양적으로 성장할 때, 우리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놓치고,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몰입될 수 있다(참조, 고후 4:16-18).이러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 목회 사역을 위한 방법과 전략, 자원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방안 때문에 우리는 늘 혼란과 긴장 속에 있다. 이러한 방안들에는 당장 사용하여 가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론 적인 것이 많다. 필요한 것 같지만 실상은 본질에서 벗어난 방법들로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필요 없는 것들이다. 이러한 정보가 온라인에 홍수처럼 넘쳐나기에 필요한 것을 검색하다가 지쳐버릴 지경이다.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눈을 포함하여 매우 많은 목회자의 눈을 들여다보곤 한다. 본질에서 벗어난 방법론적인 내용을 담은 수많은 문자와 이메일을 접할 때마다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머뭇거리는 목회자의 눈을 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반응하기에는 우리의 미래가 너무 먼 것처럼 보인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놓여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함없이 인도하고 계시는데도 말이다.조나단 에드워즈가 “주님, 내 눈에 영원을 각인시켜 주소서!”라고 기도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소망에 가득 찬 기대우리도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구속의 은혜로 시작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고 있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소망으로 인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막연하게 낙관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고한 기대를 하는 것이다.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 전에 밀려오는 설렘의 순간처럼.노래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울리는 강렬한 박자처럼. 떠오르는 태양처럼.성경 말씀의 마지막 장은 우리의 장래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낙심하지 않음’과 ‘영원을 생각하는 것’을 연결한 것은 의미가 있다(고후 4:16-18).교회 개척의 초기에 있든지 오랜 시간 교회 사역을 하고 이제는 마무리를 향하여 가고 있든지, 우리는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사역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목회를 하고 어떤 전략을 사용하든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여 복음을 전하기로 한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몇 가지가 있다.피곤함에서 생기를 되찾기까지예수님을 섬길 때, 우리의 겉사람은 점점 낡아지지만,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후 4:16).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한다(벧전 5:1-4). 다시 말하면,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되면 우리는 피곤하게 될 것이다.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친절함으로 대하는 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우리의 자녀를 제자로 삼아 가르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한 시험이다.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좌절은 우리 몸을 상하게 한다.매주 새로운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일은 많은 힘을 쏟게 한다.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기에 필연적으로 피곤함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따라서 올바르게 목회하기 위한 피곤함은 성령의 부재를 알리는 표시가 아니다. 은혜의 보좌에 때를 따라 나아가며(히 4:16) 매주 안식할 수 있는 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유가 있다.성령님을 의지하여 신실하고 복음적인 목회를 하면서도 피곤함은 경험될 수 있다. 피곤하다는 그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목회에서 느끼는 피곤함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패한 자아를 의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목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길로 달려가는데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피곤함이다. 우리의 소망을 자신의 경험과 이상에 두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둘 때 진정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피조물과 그분의 백성들이 나눌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의미만은 아니다(롬 8: 19:22), 일상의 어려움 중에서도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지속적인 힘을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죽음도 이기신 그분의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기억하고 살기를 원하신다.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인 만큼, 내일 당신이 겪을 어려움도 이겨내도록 돌보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려두지 않으신다.상함에서 치유받기까지우리가 지금 당하는 환란은 미래에 비교할 수 없는 영광(고후 4:17)을 예비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확신으로 우리는 현재 당하는 어려움에 정직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목회의 어려움을 축소하지 않고 있다. 다만, 우리의 소망을 최대화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큰 소망을 갖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모든 것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배신과 비방의 말들과 실망스럽고 비열한 짓들, 실패와 함께 찾아오는 불안 등으로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극복할 때 영광의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에게 어두운 날이 다가올지라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날은 아니다. 영원성의 시각으로 볼 때 어려움은 우리를 괴롭힐 힘을 잃는다.현재의 어려운 순간을 보장된 미래를 기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불안은 기도로 바뀌고, 지친 마음은 용기로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어려움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꺼리지 않는다. 우리는 말씀 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며 굳게 서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당당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가장 선하신 방향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어려움 하나하나가 태양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리는 구름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질 것이다. 구름이 아무리 가려도 태양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겪는 어려움과 고통은 순간적인 것일 뿐이지”하고 말이다.영원을 보는 시각우리는 잠시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후 4:18).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현재의 어려움을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영광의 날을 기대하고,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들이 기뻐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그러니 우리에게 다가올 확정된 순간에 대해 생각해 보라. 영광의 기념일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을 뵙게 될 그 날을 상상해 보라.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고전 13:12). 그 순간에 당신은 그분의 사랑을 느낄 것이다. 압도적으로 사로잡는 찬란한 영광을 그분 안에서 경험할 것이다. 만일 그 순간 당신이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서 경험했던 최악의 순간이 떠올랐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떻게 이 둘을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이다. 우리는 확실한 기대를 품고 다가올 날을 맞이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어디로 나아갈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더라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준비시키는 그분의 신실한 약속을 알고 있다. 그 약속으로 우리가 걸어가게 될 그곳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영광스러울 것이다.가는 길에 우리가 넘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의 약속을 믿는 한 지금의 고난을 기쁘게 수용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보다도 더 빨리 영예로운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날이 올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Your Future Is Brighter Than You Think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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