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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삶의 세 단계
by Mike Minter
2023-05-01
은혜롭게 마무리하는 목회자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이건 몇 년 전 내가 “상급”(고전 9:24)을 얻기 위해 경주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깊이 생각하는 중에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목회자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일련의 장애물이 있다는 뜻일까? 회심자 수, 세례자 수, 또는 재정 규모에 따라서 각각의 목회자에게 점수가 부여된다는 말일까?결국 나는 잘 마무리하는 것은 후회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것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의 교회 문을 통해 들어왔는지에 관계없이 목회 기간 내내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끝을 맺는 삶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잘 달리고 있는지 또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목회 과정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에 따라서 이 질문의 답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했건 또는 결승선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건 관계없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부족한 속도를 다시 올리는 데에 너무 늦어버린 때란 없다. 지금부터 목회자 삶의 세 단계를 살펴보자. 1단계: 상상스스로 생각하기에 뛰어난 성경 해석 능력과 비전을 품은 젊은 목사는 미래를 내다보고 폭발하듯 성장할 교회를 꿈꾼다. 나는 이것을 상상의 단계라고 부른다.교회를 개척했거나 기존 교회를 담임할 때 생길 수 있는 함정을 피할 몇 가지 방법이 있다.1.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목회라는 큰 책임을 감당한다고 해서 나 자신이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뿐이고 당신은 그가 아니다. 겸손하게 사역을 시작하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강제로 겸손하게 만드시는 비극을 피할 수 있다.2. 오로지 주님만을 기대하라. 교회는 주님에게 속한 것이지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수천 명, 수백 명, 또는 수십 명에게 설교하도록 부르셨을 수 있다. 당신의 글이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고, 단지 교회 주보에만 실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신다.3. 재능이 아니라 겸손함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라. 이 점을 제대로 깨닫는 데 나는 몇 년이 걸렸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겸손이 부족한 스태프와 직분자는 옆구리의 가시가 될 수 있다. 재능이나 은사를 경시하라는 게 아니다. 단 그것이 교만과 혼합되는 순간, 당신은 잠 못 이루는 밤, 어색한 회의, 사역의 모든 면을 잠식한 긴장감을 겪게 될 것이다. 4. 작은 문제라고 덮어서는 안 된다. 내가 가장 크게 후회하는 부분이다. 나는 가능하면 평화를 위해서 갈등을 피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치른 값이 만만치 않다. 모든 우려 사항을 다 추적할 필요는 없지만, 썩은 냄새를 감지하면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보다 작은 불꽃을 끄는 게 훨씬 쉽다. 내게는 그 점을 증명할 적지 않은 화상 자국이 남아있다. 5.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 일찍 결정하라. 어떤 목회자는 주일 준비에 주당 30-35시간을 사용하고, 어떤 목회자는 병원 방문, 상담 또는 제자훈련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단지 8-10시간만 쓸 수도 있다. 성경이 이 부분과 관련해서 명확하게 알려주는 지침은 없다. 따라서 시간 배분은 당신이 사역하는 장소와 당신의 스타일에 근거해서 내려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치지 못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6. 모든 개인 미팅은 자세하게 기록하라. 이 기록은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다. 나는 뛰어난 기록자가 아니다. 그래서 피해를 본 적도 있다.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기록은 그렇지 않다.7. 리더십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리더십 밖의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만들라. 좋은 관계는 당신의 사역 상태를 인식하는 방식에 균형을 줄 것이다. 일반 성도들은 종종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리더십이 있다고 항상 나무가 아닌 숲만 보는 건 아니고, 일반 성도라고 해서 항상 숲이 아닌 나무만 보는 건 아니다. 시력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두 개의 눈이 다 필요하다. 외눈박이 교회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8. 선배 목사에게 지혜와 방향을 구하라. 그들은 당신이 처한 상황에 이미 몇 번이나 있었고, 또 어디에 느슨한 맨홀 뚜껑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경험에 의지하라. 2단계: 경험목회 사역의 두 번째 단계에는 종종 흔들리는 소명으로 힘들어진다. 당신에게는 어쩌면 사역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이다. 사탄은 당신을 산만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이 교회에서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왜 이렇게 사람들이 힘들지? 지난 시간 내내 나는 그런 척만 하고 사역한 건가? 혹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못 읽은 걸까? 엔지니어가 되어야 했나? 후회하는 대신 나는 빌립보서를 통해서 내 생각을 거르고 정리했다. 빌립보서가 어떤 책인가? 바울이 감옥에서 성도의 기쁨을 위해서 쓴 책이다. 빌립보서야말로 철창 뒤의 아이러니이다.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하나님의 사역에 더 열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다음은 2단계의 사역 기간에 좌초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다. 1. 목회자로서 나의 역사를 점검하라. 내가 잘한 것은 무엇이고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내가 가장 많은 열매를 맺은 분야가 어디인가? 우리 교회에서는 나의 사역 20주년을 맞아 ‘하나님의 신실하신 2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축하 행사를 열었다.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삶이 바뀐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게 결코 나 혼자 힘으로 이룬 게 아니라는 사실을 행사 내내 나는 실감했다. 그 기간에 수백 명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했다. 2. 사역 중간 지점에서 수정되어야 할 점을 고려하라. 몇 년 동안 당신을 지켜본 정직한 친구들을 찾아라. 그들은 당신의 사각지대를 알고 있다. 내게는 내가 잘못할 때 또는 깊이 없는 설교를 할 때 용기를 가지고 지적해 줄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다. 그들은 또한 내가 지쳤을 때 바로 알아차렸다. 누구라도 사역으로 고갈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2000년대 초에 사직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고작 몇 달 만에 근처 대형 교회로 거의 천 명의 교인을 빼앗긴 직후였다. 사역의 트라우마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라! 당시에 나는 실패하고 있다고 느꼈다. 장로님 한 분이 내 사직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외쳤다. “우리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역을 계속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교인을 잃는 상실의 고통은 실로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교회가 쓰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교회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여기에 굳건하게 서 있다. 사역 기간 내내 자신에게 정직하라. 3. 문화의 변화에 주목하라. 도덕적, 윤리적, 기술적 표현은 세대와 종교 배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목회자라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 내러티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먼지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른다. 문화의 변화는 아무런 예고 없이 슬며시 들어올 수 있고, 미처 변화를 깨닫기도 전에 당신의 사역은 시대에 뒤떨어질지도 모른다. 이 말을 기억하라. “뭔가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고, 새롭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문화를 태운 기차를 놓치지 말라. 4. 교회 젊은이와 시간을 보내라. 그들의 인생관을 파악하라. 젊은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당신은 눈을 뜰 것이다. 물론 목회의 어느 단계에서나 이런 과정은 필요하지만, 목회를 시작하고 십 년 또는 이십 년이 지났다면, 반드시 이 작업을 해야 한다. 그들은 당신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실 삼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는 세대 차이가 있다고 해도, 고작해야 몇 인치 정도로만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은 세대 차이를 마일 단위로 벌려놓았다. 나는 십대들과 함께 앉아서 학교생활이 어떤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전투가 무엇인지 묻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장담한다. 그들은 정말로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다. 5. ‘사역’이라고 부르는 이 일에 정말로 마음이 있었는지를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정직하라. 이건 힘든 일이지만, 수십 년의 후회가 되기 전에 꼭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당신 속에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는 불꽃이 타고 있는가? 과거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면, 꺼져버린 그 불꽃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한 조언을 얻자. 사탄은 의심을 일으키고 소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시작한 게 사역이라면, 더 늦기 전에 선배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라. 사임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당신이 부름받지 않았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그 누구보다 당신의 가족에게는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3단계: 백미러3단계는 최소한 25년 이상 사역한 목회자를 위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백미러 단계라고 부르겠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고, 가족과 교회, 그리고 친구들에게 유산을 남기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다. 인생에서 가장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모여 과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지혜와 경험의 렌즈를 통해 인생을 바라보고 웃을 때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단계에 들어서면 후회가 생기고 때로는 우울증이나 깊은 슬픔으로 이끄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런 질문이 생길 수도 있다. 왜 나를 돕던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왜 그들을 더 잘 이끌지 않았을까? 상담을 훨씬 더 잘 할 수도 있었는데…. 질문과 의심의 목록이 바닷물 위로 솟아오르는 고래처럼 계속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과거의 실패를 지울 수는 없다. 죄 때문이건,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건, 또는 지혜의 부족 때문이건 관계없다. 좋은 마무리는 매일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마무리를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행 24:16). 바로 이것이야말로 교회를 핍박한, 자신을 죄인 중에 으뜸이라며(딤전 1:15) 후회에 몸부림친 사도 바울이 가장 갈망하던 것이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을 “자기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3:14)이라고 하시고, 죄가 다윗보다 훨씬 적게 기록된 사울을 배척하셨을까? 다윗이 전심으로 회개하였기 때문이다(시편 32편과 51편). 그러나 사울은 불순종을 변명하며 회개하지 않고 다윗을 미워했다.척 스윈돌은 “올바른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백번 맞는 말이다. 목회자로서 (또는 은퇴한 목사로서) 또 지금 몇 살이건, 당신에게는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있다. 깨끗한 양심은 마무리를 잘하기 위한 핵심 요소이다. 죄책감을 누그러뜨릴 만큼 부드러운 베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잘 마무리하는 것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후회로 끝을 맺는 것이다. 치유가 필요한,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관계가 있는가? 좀 더 마음을 담아서 감사를 표현해야 할, 신실한 성도가 있는가? 미완으로 두지 말고 제대로 마무리하라. 원제: 3 Stages of a Pastor’s Lif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목회소명
사역점검
목회 장수의 핵심 비결
by Daniel Stegeman
2023-04-23
최근 나온 책 중에서 목회 사역에 관해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은 폴 트립이 쓴 목회, 위험한 소명(Dangerous Calling)이다. 2012년에 출판된 이 책을 나는 여러 번 읽었다. 과거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목회라는 소명이 각종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목회적 신실함을 강조하는 저자에게 나는 큰 영향을 받았다. 얼마 전 트립의 책을 집어 들고 뒷면을 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 다섯 사람이 그 책을 추천했는데, 그중 세 명이 사역에서 떠났다. 굳이 이름을 말하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은 목회 자격이 박탈되었고, 한 사람은 아예 기독교를 부정하고 완전히 버렸다. 목회 사역이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 소명인지 강조하는 트립의 주장을 증명하는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분명하게 짚어야 할 점이 있다. 지금 당신이 그 책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내가 말한 세 명이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초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출판사는 재판을 찍으면서 그 세 사람 이름을 뺐을 것이다. 스펄전 목사는 이제 고전이 된 강의집 ‘나의 학생들에게’(Lectures to My Students/목회 황제 스펄전의 목회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꼭 안 가도 되는 상황이라면, 목회 시작하지 마세요. … 지금 이 강의실에 있는 학생 중에서 신문사 편집인, 식료품점, 농부, 의사, 변호사, 상원의원, 또는 왕이 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길을 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26-27).스펄전이 좀 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지혜를 놓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목회는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직업 중 하나가 아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부름을 받지 않았고, 하나님의 양 떼를 쳐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벧전 5:1-4), 다른 소명을 찾으라고 말하는 게 옳다. 목사가 된 지 이제 십사 년밖에 안 되었지만, 그새 내 주변에는 목회를 떠난 사람이 여럿 있다. 그중에는 애초에 목회에 발을 들이지 않았어야 하는 이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목회를 떠난 모든 사람이 다 실패자인 건 아니다. 목회를 떠난 친구 중에는 목회에서 손을 떼는 것을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높은 봉급을 받는 공직을 맡도록 문을 열어 주셨지만, 그는 그 변화 앞에서도 목회를 놓지 않을 방법을 찾느라 힘겹게 씨름했다.사역은 어렵다! 특히 요즘같이 특히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사역을 계속하는 게 옳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건 당신만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최근에 데이비드 머리가 쓴, 신체적, 정서적 건강을 돌보는 데 도움을 주는 실용적인 지혜로 가득한 리셋하라(Reset)을 읽었다. 정말로 잘 쓴 책이라고 저자를 칭찬하고 싶지만, 그가 조금만 더 강조했으면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개인의 거룩함이다. 목회자가 삶에서 성화와 경건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영적 능력은 크게 저하된다. 자기 영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목회자에게 육체적 건강을 얼마나 잘 돌보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을 살피십시오. 이런 일을 계속하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그대 자신도 구원하고,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것입니다”(딤전 4:16).그리고 조금 지나서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한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생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딤전 6:11-12).우리는 성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복음 사역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탄에게 저항하고 또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Cheyne)이 말했다. “내 백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개인적인 거룩함이다.” 거룩이라는 단어는 21세기 목회자와 지도자에게 특히 더 중요하다. 모든 목회자가 예외 없이 자신만의 고유한 도전과 압박에 대처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대신 다른 것(관리, 상담, 네트워킹, 방문, 심지어 설교)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몇몇 유명 기독교 지도자의 몰락을 목격했다. 거기에 훨씬 더 많은 숫자의, 별로 주목받지 않은 타락한 “보통” 지도자를 포함할 수 있다. 각각 상황은 다르겠지만, 타락한 지도자의 대다수가 주님과 함께 걷는 걸음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음으로 사탄에게 빌미를 제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모든 목회자를 예수님의 예배자로 부르셨다(시 32:11)! 물론 예배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지만, 목회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하는”(딤전 4:12) 부름을 받았다.기독교 지도자여, 매일 몇 분이나 기도하고 있는가?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성경 읽기와 경건한 독서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영적 훈련을 추구하는가? 예수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개인의 경건과 거룩을 소홀히 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양 떼를 돌보는 능력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참으로 목회 사역은 “위험한 소명”이다. 목회에 도움을 주는 건강한 생활 방식과 습관을 기르는 데는 수년이 걸리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데에는 한두 번의 실수로도 충분하다. 전쟁은 격렬하고(엡 6:10-18), 사탄은 실재하며(고후 11:14), 무엇보다 영혼의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있다 (고후 12:15).모든 목회자와 지도자는 오래, 끝까지 목회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거룩함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소홀히 한다면, 우리의 소명과 일치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을까? 목회의 효율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장수하는 목회도 힘들어질 것이다. 히브리서 12:14은 모든 믿는 이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한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거룩함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우리는 목회자로서 거룩함을 위해 매일 싸워야 한다. 그리고 교인에게도 그 싸움에 동참하도록 강권해야 한다!원제: One Key to Ministry Longevity 출처: ca.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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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보이는’ 농촌교회
농어촌 목회가 블루오션이다
by 조성돈
2023-04-22
지난 글에서 농어촌교회의 어려움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교회에서 점점 늘어나는 빈자리를 보며 공황장애까지 겪었던 한 목사를 소개했다. 인구절벽과 고령화의 위기 앞에 놓여 있는 한국 교회에 이 목사의 공황장애는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를 던진다. 아마 이것이 현재 농촌교회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농어촌교회의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는 교회들이 있다. 이번 글에서부터는 그런 성공적 농촌교회의 모델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결성감리교회는 충남 결성에 있다. 결성면은 홍성군에 속해 있는데, 홍성은 홍주와 결성이 합치면서 이루어진 이름이다. 즉 과거에 결성면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데 현재는 인구 2천 명의 작은 마을이 되었다. 이곳에 결성감리교회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교회당은 언덕 위에 아주 당당하게 서 있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교인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현재는 약 70명 정도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 결성감리교회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목회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주로 생각할 수 있는 것과는 구별되는 지점들이 있다. 첫째는 평화기도회이다. 한 달에 한 번 주일 오후 예배에 겸해서 드린다. 이 기도회에는 결성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초청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한다. 면장, 농협조합장, 양돈사업자, 복지사업가, 장애인공동체 운영자, 향토사학자 등등이다. 이분들이 와서 자기들의 사업을 소개하고, 때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초청된 사람들이 모두 신자는 아니어서 교회로서는 주저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런 평화기도회를 통해서 지역사회와 소통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지역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회를 이어가고 있다. 교인들도 이러한 취지를 이해하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초청된 연사들도 아주 의미 있게 생각한다. 심지어 기도회에 참여인원이 30명 정도 되었는데, 연사는 60-70명 정도 모였다고 기억한다. 그만큼 이 자리를 귀하게 본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둘째는 기부봉사단이다. 교인들이 한 달에 1만 원씩 하는 기부금이 한 달이면 약 50만 원 정도가 모인다. 그 돈은 매달 결성 면민이나 교우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는 데 쓰인다. 때론 물품을 사서 드리기도 하고 현금을 지원하기도 한다. 가능하면 매달 이 모인 돈이 쓰이도록 한다. 이 돈을 쓰기 위해서 기부봉사단을 만들고, 위원을 두어서 운영한다. 큰돈은 아니지만 이렇게 써야 할 돈을 세워 놓으니 생각이 바뀌었다. 전에는 누가 교회에 도와달라고 하면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부담이 없어졌다. “지금은 누구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이게 관심사에요. 왜냐면 내가 매달 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누가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예전에는 두려웠는데, 지금은 반가워요. 왜냐하면 내가 도울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매달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다니기가 쉽지 않아서 면사무소의 사회복지 담당팀과도 협조하고 있다. 요즘은 그러한 의도가 닿아서 추천을 잘 해준다. 특히 이런 담당자를 통해서 구체적인 정보가 온다. “이렇게 어렵습니다.” “이분은 쌀과 반찬이 필요합니다.” “이분은 돈이 필요합니다.” “이런 건 이분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다른 지원이 있습니다.” 매우 구체적이다. 이렇게 면사무소와도 협조가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는 공유냉장고이다. 한 번은 마을에 노숙인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왔다. 농촌 마을에 노숙인을 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 마을에서는 처음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가 기거한다는 비닐하우스를 찾아갔다. 그가 있었다. 그냥 흙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기거하고 있고, 낮에는 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지적장애인이었다. 면사무소에 이야기해서 먼저 주거를 해결했다. 농촌지역에는 비어 있는 집들이 있다 보니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먹는 문제가 남았다. 직접 매번 해 드리는 것도 서로 부담일 것 같았다. 그래서 교회에 냉장고를 들였다. 교회와 교인들이 그 냉장고에 먹을 것을 채웠고, 그가 와서 편할 때 꺼내 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이때 홍성군에서 공유냉장고 사업을 시작했다. 같이 갈 마음에 신청을 했고, 홍성군 공유냉장고로 인정받았다. 이 냉장고는 이후 이분만 아니라 마을에 거하는 외국인들에게도 개방했다. 2021년 언론에 인상적인 뉴스 영상이 나왔다. 한 외국인 여성이 현관에서 교회를 향해 깊은 절을 하는 장면이었다. 알고 보니 공유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가져가고 고마운 마음에 아무도 없는 교회를 향해서 절을 하고 간 것이다. 당시는 코로나 상황에서 신천지의 방역 방해와 교회가 방역에 어려움을 가져온다고 해서 사회적 인식이 아주 안 좋던 시기였다. 그런데 뉴스에 이러한 것이 나왔으니 상당히 큰 반향이 일었다. 바로 이 교회가 결성감리교회다. 외국인 여성은 공유냉장고에서 음식을 가져가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로써 이 교회는 절 받는 교회가 되었다. 결성감리교회 목사는 농촌교회가 지속가능하겠냐는 질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농촌교회도 기본적으로 도시교회와 그 기본적인 어떤 영적인 욕구는 똑같아요. 그리고 이제 농촌교회가 비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기 어떤 질문이 또 나올지 모르겠지만 창조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동체 목회는 창조적으로 그래서 어떤 목회자의 은사나 이런 거를 잘 활용하면 오히려 목회자가 충분히 창조적으로 할 수 있는 영역들이 도시보다 많을 거예요. 또한 공동체의 규모가 작으니까 참여의 효과가 훨씬 좋은 것도 있고요.”
농촌교회
농촌목회
결성감리교회
농촌목회, 절망에서 희망으로
농어촌 목회가 블루오션이다_시작하며
by 조성돈
2023-04-13
농어촌교회가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어려움은 무엇보다 인구의 문제이다. 벌써 10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농촌교회 목사가 수업 시간에 자기 교회를 소개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우리 교회는 20년이면 없어집니다”였다. 현재 어르신들이 주로 나오고 있는데, 이분들의 수명을 생각해 보았을 때 20년이면 모두 자연스럽게 사라지실 분들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그 마을에 주민들이 모두 이 연령대에 있으니 마을도 없어지고, 당연히 교회도 없어질 거라는 전망이었다. 정말 암담한 이야기였다. 얼마 전 감리교 본부의 의뢰를 받아서 감리교 농산어촌교회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여기서도 상황은 비슷하게 나왔다. ‘지난 주일 출석 교인 수’를 물었는데 30명 미만이 70퍼센트가량 나왔다. 그중 60대 이상 고령인구가 65퍼센트를 넘어서고 있다. 교회가 이런 상황이니 미래를 생각할 수가 없다. 현재도 어렵고, 미래는 더 어렵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조사 가운데 농촌목회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중 전라북도 있는 한 목사님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농촌목회자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겠냐는 질문에 그는 정신건강 돌봄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이 공황장애를 몇 년간 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연을 내놓는다. 그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는 전형적인 농촌교회였다. 15년 전 부임을 했는데, 그때만 해도 교인이 8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후로 교인이 점점 줄어들고, 특히 코로나 여파로 이제는 20명 정도 모인다고 했다. 이렇게 교인이 줄어든 것은 농촌 마을에 사람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교인들이 돌아가셔서 그렇다. 최근 이 교회의 교인감소 원인은 ‘사망’이다. 한때 부흥했던 시기에 지어놓은 커다란 예배당에 빈자리가 하나씩 늘어난다. 한 자리, 한 자리 다 이야기가 있고, 평생 그 자리를 지켰던 그분들의 삶이 있는데, 이렇게 빈자리가 된 것이다. 그걸 보다가 어느 날 강대상에서 마음이 무너졌다. 제가 한 5년 전에 공황장애가 왔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은 성도님들… 갑자기 권사님 혈액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떤 권사님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또 우리 장로님 한 분은 또 가정적인 문제로 교회를 쉬고, 또 잘 나오신 권사님 내외가 갑자기 그분도 병으로 돌아가시고. 이삼 년 사이에 어 딱 강대상 올라가면 자리가 다 비잖아요. 그럼 목회자들은 그렇죠. 신학적으로는 천국 갔잖아요. 다들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강단에 설 때마다, 볼 때마다 뭐가 보여요. 빈자리가 보이고 이게 몸에 충격을 받더라고요. 나는 괜찮겠다 했는데, 어느 날 강단에 섰는데 너무 이게 가운이 무거운 거예요. 숨을 못 쉬겠는 거예요. 이게 뭐지? 도대체… 한번은 그래서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다가 예배를 중단했어요. “잠깐 쉬었다 합시다.” 앉아 가만히 있었어요. 숨을 못 쉬겠는 거야 막 뛰쳐나가고 싶은 거예요. 막….” 농어촌교회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다. 들어오는 교인은 없고, 교인들은 점점 돌아가시고, 마을도 없어질 위기에 교회가 새롭게 부흥할 길도 없다. 어르신 몇 명, 많아야 이십 명인데 이분들을 통해서 교회를 유지한다는 것도, 목사의 사례를 기대한다는 것도 어렵다. 정말 사방이 막힌 것 같다. 인터뷰를 진행한 이 목사가 겪고 있다는 공황장애는 농촌목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단어인 것 같다. 하지만 농어촌교회가 이렇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고,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고 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농어촌교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아마 농어촌교회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몇 차례 이어질 이 이야기의 큰 주제를 그래서 ‘농어촌 목회가 블루오션이다’라고 불러도 좋을 듯싶다. 그 길을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농촌목회
농어촌교회
설교자들이 표현하는 네 가지 정서
설교자의 정서_2
by 이정규
2023-03-27
설교자들은 어떠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선 우리는 설교자들이 보통 어떠한 정서를 뿜어낼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 분류법의 아이디어를 팀 켈러의 ‘설교’에서 얻었다.[1] 설교자들이 표현하는 네 가지 정서첫째, 설교자 자신을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나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달되는 형태는 자랑일 수도 있고 훈계일 수도 있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설교의 중심에 자신이 행했던 선행 또는 순종으로 인한 간증이 있는 형태• 설교자 자신의 지식이 설교의 핵심 메시지에 기여하지 않고, 쓸모없이 등장하는 형태• 설교자와 청중을 우리/그들의 구조로 나누고, 무작정 훈계하기만 하는 형태• 설교자가 자신을 다른 설교자와 다르게 우월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형태설교자가 이러한 정서를 드러낼 때, 청중은 설교자를 예배하거나 혐오하게 된다. 또는 설교자의 인격을 혐오하며 비판하는 자기 자신의 지성 또는 정서를 예배하게 된다. 청중은 설교자와만 대화하게 되고, 그 결과 예배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둘째, 공동체를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우리 교회 (또는 부서)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번째 정서보다는 훨씬 나아 보이며, 또한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긍정적 기여를 하는 측면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속한 공동체가 얼마나 큰 성과를 이루었는지, 또는 무엇을 이루고 있는지에 집중되는 형태• 공동체의 당면 과제와 향후 목표가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는 형태 (절대로 당면 과제와 향후 목표를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설교 시간은 가장 효과적인 광고시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목표여서는 안 된다)• 해당 교회와 다른 교회(또는 공동체)를 우리/그들의 구조로 나누고, 우월감을 강조하는 형태• 다른 집단의 교리/치리구조/집단정서를 신학적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며 피하라고 경고하는 형태(이러한 형태에서 청중들은 암묵적으로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우월감을 느낀다)설교자가 이러한 정서를 드러낼 때, 청중은 소속된 공동체를 예배하거나 혐오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공동체를 향한 헌신도가 높고 강한 사람과 낮고 비판적인 사람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기가 쉽고, 양쪽 모두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그 결과는 공교회성의 파괴이며, 이러한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신앙 수준과 자신의 신앙 수준을 동일시하는 우를 범한다. 따라서 신앙 성장에 치명적이다.셋째, 본문과 교리를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 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이 본문의 의미는 대단하지 않나요? 이런 해석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이러한 교리는 처음 배워보지 않나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형태는 다음과 같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모든 형태가 그 자체만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모든 형태가 네 번째 정서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아주 유익할 수 있다.• 청중이 지금까지 이해한 본문과 실제 본문이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를 강조하는 형태• 청중이 암시적으로 가지고 있던 선입견과 기독교 교리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강조하는 형태• 교리적/주해적 오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비판의 분량이 설교 시간 전체의 1/4이 넘어가는 형태. 이때 청중은 설교라기보다는 교리강좌(또는 성경강좌)를 듣는 상황이 된다.사실상 이 정서는 앞의 두 정서보다는 훨씬 더 성도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러한 정서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성경과 교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하지만 삶과 지식에 괴리가 생길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 과정 중 첫째나 둘째 정서로 타락하게 될 가능성을 늘 내포한다. 설교자는 아주 신중하게 자기 설교의 목표를 재조정하고, 마음을 살펴야 한다.넷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이끄는 정서가 있다.이러한 방식의 설교는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우리 하나님 정말 위대하지 않나요? 그분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보세요! 당신이 가진 모든 문제가 이분 안에서 해결될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결국 이러한 정서를 지속적으로 전달할 때 청중은 진리를 사랑하며, 공동체를 기뻐하고, 설교자를 존경심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의 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설교자의 목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있다. 설교자는 교육하기도 하고, 훈계와 권면을 하기도 하며, 여러 예화와 증명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 때 설교자는 더 이상 설교자로만 남지 않고 예배자가 된다. 이때 설교자가 하는 말들은 찬양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청중은 예배의 진정한 목표.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일을 시작한다. 설교자와 청중 모두가 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삶의 문제를 그분께 드리게 된다.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설교문을 완성한 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 설교문이 정말로 높이고 싶어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설교문의 내용에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내가 설교를 통해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설교 직전의 내 마음에서, 내 입술에서 찬양이 흘러나오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높이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가?• 내 마음은 낮아져 있는가? 나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나 자신 역시 이 설교를 들어야 하는 청중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가? 혹시 스스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하나님을 유용한 분으로만 제시하는가? 아니면 아름다운 분으로도 제시하는가?설교자의 정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마음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관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흉내만 낸다면, 그것은 진정한 방식이 아닐 것이다. 설교자들은 다음과 같은 싱클레어 퍼거슨의 충고를 새겨들어야 한다.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설교자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책보다 설교하는 법에 관한 책(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하는 법과 같은 책도 마찬가지)을 더 많이 소장하고 있지는 않을까? 정말로 그렇다면(조사를 해보면 알 수 있을 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설교할 때 (혹은 설교를 들을 때) 나의 최대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 이를테면 죄를 극복하거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법 혹은 복음을 통해 받는 혜택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이런 것이 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중심 무대는 이런 주제를 위한 것이 아니다. … 설교를 들을 때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오래 남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2]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주된 관심사를 말하기를 좋아한다. 우리 구주께서도 사람들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셨다(마 12:34). 우리는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한다. 기술적으로 설교문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쓴다고 해서, 설교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예수님을 넣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 깊이 그분을 사랑하고 찬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인위적으로 되지 않는다.무엇보다도, 설교자의 가치가 설교자의 능력/청중의 규모/사역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에 있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충분히 맛보고 누리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그분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하며, 만족해야 한다. 설교자의 가치는 설교자 자신의 성취와 능력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정에 있다. 우리의 위치는 그리스도 안이며, 우리의 가치는 그리스도만큼이다! 우리가 왜 설교를 통해서 스스로를 입증할 필요가 있는가!이러한 주장들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렇듯 자신의 정서를 끊임없이 점검할 때, 설교 시간을 행복하게 보냈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 은혜를 누렸으면 좋겠다.[주]1. 팀 켈러, 설교, 채경락 옮김 (서울: 두란노, 2016), 7장을 보라. 여기서 켈러는 설교자 내면에 숨겨진 정서를 ‘서브텍스트’라는 말로 표현한다. “서브텍스트는 우리 메시지 저변에 흐르는 메시지다. 그것은 그 메시지가 의도한 진정한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의미로서, 단어의 표면적인 의미보다 깊다. 예를 들어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진술은 ‘저는 관심 없어요. 당신 원하는 대로 하세요’라는 서브텍스트를 품고 있을 수 있다. 또는 ‘관심은 있지만 직접 대놓고 말하고 싶지는 않네요’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설교자의 어조, 얼굴 표정, 자세, 제스처가 청중을 향한 설교의 실질적인 목표에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고, 선포된 메시지와 상관없이 그 목표가 커뮤니케이션을 장악할 수 있다.” p. 269.2. 싱클레어 B.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p. 63.이 글은 이정규 목사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설교
설교자
정서표현
설교자의 정서 표현, 왜 중요한가?
설교자의 정서_1
by 이정규
2023-03-26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신이 듣는 설교의 성격과 결부하려는 심리적 경향이 있다. 설교의 내용만이 아니라 정신과 분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가늠한다. 설교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개적이고도 주된 통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설교자의 시각이 왜곡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 편협한 마음이 성부의 마음을 설명하는 분위기를 오염하고 있다면? 죄로 망가지고 수치심으로 가득하며 무력감을 느끼고 잘못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앙 고백의 교리만 강해할 뿐 복음의 은혜와 죄인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성부를 보여주지 못하는 설교는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기 원하는 것은 은혜와 사랑이 가득한 하늘 아버지다.[1] 남침례교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였던 에드윈 C. 다간은 윗필드의 설교를 가리켜 “사도 시대 이후 설교의 역사에 조지 윗필드보다 더 위대하거나 더 가치 있는 이름은 없다”고 말한다.[2] 하지만 신광은 목사는 윗필드의 설교 방식을 지적하면서 심하게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에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말만 해도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윗필드가 ‘숫자’와 ‘규모’를 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 …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사역했던 대중 운동가다. 대중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알았던 근대 거인주의의 시조로, 카리스마적 종교 지도자의 모범이요, 미국 대통령 리더십의 원천이다.[3]이는 좋은 논쟁거리이다. 우리는 모두 설교자의 정서 표현이 설교에 영향을 어느 정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여기에는 연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윗필드는 어렸을 때 연기 수업을 받은 적이 있었고, 연기력 역시 꽤나 좋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 그렇다면 그의 설교는 연기일 뿐이었을까? 또는, 설교자의 감정 표현은 연기일 수 있으니 그저 자제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윗필드 본인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버터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배우의 대화를 언급한다.어느 날 대주교는 버터톤 씨에게 물었습니다. “버터톤 씨, 어떻게 무대에 선 당신 같은 배우들은 상상 속에 있는 것들을 말하면서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좀 말씀해 주십시오. 교회에서 우리 설교자들이 실재하는 것들을 전하는데도 회중은 그것이 상상 속에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말입니다.” 버터톤 씨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주교님,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대에 선 우리 배우들은 상상 속에 있는 것들을 실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설교재단에 선 설교자들은 실재하는 것들을 상상 속에 있는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지요.”[5]그리고 이어서 윗필드가 말한다. “그러므로 저는 소리쳐 외칠 것입니다. 입만 번지르르한 설교자는 되지 않겠습니다.” 즉, 윗필드의 대답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배우들조차도 실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처럼 힘과 감정을 쏟아붓는데, 실재하는 것을 말하는 설교자가 어떻게 가상의 것을 말하듯 냉담하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이 말을 주의 깊게 숙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감정을 속이는 연기를 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진리를 다루고 있는지를 잊어서도 안 된다. 윗필드의 대답에 대해 존 파이퍼는 이렇게 언급한다.이는 결국 윗필드의 “연기”가 결국 연극적인 의미에서의 연기가 아님을 의미한다. 한 여성이 어느 영화에서 한 역할을 맡는다면, 카메라들이 그녀에게 집중되고 그녀가 소방관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2층 창문을 가리킬 때 우리는 모두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일 당신의 이웃집에 불이 나고 어머니가 소방관들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2층 창문을 가리키고 있다면, 아무도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들이 정확히 똑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거기에 아이가 불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 여성은 아이의 엄마다. 아이가 죽을 수 있는 위험이 정말로 존재한다. 모든 것이 정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윗필드에게 해당하는 방식이다. 거듭남은 그의 눈을 열어 실재하는 것과 그 실재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게 했다. 하나님, 창조, 인류, 죄, 사탄,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 천국, 지옥, 성육신, 그리스도의 온전함, 그분의 죽으심, 속죄, 구속, 화목, 부활, 성령, 구원하는 은혜, 죄 사함, 칭의, 하나님과의 화해, 평각, 성화, 사랑, 그리스도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즐거움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실재하는 것이었다. 윗필드에게는 그를 압도할 정도로 실재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무한히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는 거듭났고,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6]설교자의 정서는 중요하다. 설교자가 설교 중 드러내는 정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훨씬 더 생생하고 마음에 와닿는 방식으로 전하는 것을 도울 수도 있고, 반대로 설교의 몰입을 방해하거나 불쾌감과 거부감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다. 설교자들은 사실상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오만하고 죄악된 정서를 파악하지 못한 채 “내가 바르고 분명한 진리를 전달했기 때문에 성도들이 내 설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구나”하며 자위할 수도 있다. 이는 성도들과 설교자 모두에게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정서를 표현해야 하는가? (내일, 3월 27일, “설교자들이 표현하는 네 가지 정서”에서 계속)[주]1. 싱클레어 B.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정성묵 옮김(서울: 디모데, 2018), p. 94. 강조는 필자. 2. E. C.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2nd ed, Vol 2(Grand Rapids: Baker, 1954), p. 307. 아놀드 A. 댈리모어, 조지 윗필드: 18세기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오현미 옮김(서울: 복 있는 사람, 2015), p. 23에서 재인용.3. 신광은, 메가처치 논박(서울: 정연, 2009), p. 56. 다만 신광은 목사의 비판은 과한 측면이 있다.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어디인지 그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4. 아놀드 A. 댈리모어, 조지 윗필드, pp. 64-65 참조.5. Harry S. Stout, Divine Dramatist, pp. 239-240.6. 존 파이퍼, 언어의 영웅들, 이심주 옮김(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 pp.143-144.이 글은 이정규 목사 블로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설교
설교자
정서표현
사역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by Trevin Wax
2023-03-19
자기 관리와 테라피를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재밌는 조크 영상을 최근에 봤다. 옛날: 테라피 받고 있다고? 무슨 문제 있어?현재: 테라피 안 받고 있다고? 무슨 문제 있어? 이런 농담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정신 건강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상당히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과 심리학이 인간이 갈등과 트라우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어느 정도 밝혀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치료 사회(therapeutic society)로 통칭되는 문화적 경향이 가져온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는 이런 경향을 유약함(“죽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과 감정적 추론(“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이 빚어낸 “대단한 비진실(Great Untruths)”이라고 표현한다.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도 이런 변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관리(self-care)를 중시하는 문화적 변화가 이제 막 목회에 발을 들이는 사역자에게 잘못된 가정을 하도록 만드는 건 아닌지 우려할 정도이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자기 관리에 신경을 쓰라며 주변에서 먼저 나서서 권고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진액을 쏟아 사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게 나보다 나이 많은 세대였다. 그러나 나보다 젊은 세대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싶다. 지금 세대는 아예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힘들더라도 좀 더 자신을 바쳐서 사역하라는 소리가 나올 지경에 이르기까지, 알아서 미리미리 자기 관리에 치중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세대 연결하기종종 나는 나 자신을 “시니어 밀레니엄 세대”라고 부르곤 한다. 내가 태어난 연도가 이 인구집단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기 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십 년 뒤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는 나와 확연히 다르다. 문화 환경이 워낙 빠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온라인은 한 때 주변 장치(모뎀 전화 접속을 기억하는가?)를 활용해야 사용이 가능하던 기기에서 아예 삶 전체를 관통하는 연결과 소통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와중에 테라피와 자기 관리에 대한 추세는 특히 Z세대와 함께 가속화되었다.스트레스와 과로, 사역 압박과 갈등을 견디지 못해 죄에 빠지거나 탈진해버린, 나보다 고작해야 몇 살 더 많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를 나는 여러 명 목격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항상 몸과 영혼의 건강을 강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교회는 건강한 교인, 특히 건강한 목회자를 길러내 새로운 모델로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경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습관을 실행하고, 지속가능한 일과 휴식의 리듬을 찾고, 자기 몸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리고 과도한 확장이 초래하는 경고 신호를 유심히 살피는 행동은 건강한 가정과 교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끊임없이 효율성과 효과로 자신을 판단하고 움직임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과도함이 주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필요하다. 더 나은 습관이 필요하고, 영혼을 보살피기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정서 건강, 안식일의 휴식, 가족과의 시간, 마음을 챙기는 기도, 그리고 조급함의 제거에 중점을 둔 최근에 나온 다양한 책들이 생각난다. 나는 그것들을 다 읽었다. 하나같이 다 좋은 책이고 기꺼이 추천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우리의 사명을 왜곡하여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과로로 자기를 망치는 사람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관리라는 선물을 자기도취, 심지어 게으름으로 왜곡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힘든 일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고통스럽거나 지치게 하는 일을 만날 때면 이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일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 사역에서의 불편함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목회에도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에서 갈등과 불일치, 불편함을 경험하는 건 당연하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자.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고전 9:27), 사도로서의 수고(고전 15:10), 자기 백성을 위한 고난(골 1:24; 고후 11:24-29), 그리고 힘을 다해 분투함(골 1:29)으로 자신을 “희생하는”(고후 12:15) 사역을 말하고 있다. 그는 “나의 피를 붓는 일”(빌 2:17)이라고까지 묘사했다.리더십은 때때로 갈등을 수반한다.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다 안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불편함이 다 트라우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불편함이 없는 사역은 없다. 진짜 사역에는 어느 정도 불편함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뿐이다. 사랑에는 방해가 따라온다. 마찬가지로 사역에는 일, 그것도 힘든 일이 따라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하며 그 어떤 뛰어난 마음을 챙기는 앱이나 명상 수련도 타락이 가져다준 모든 악영향을 제거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너무 힘든 나머지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게을러서 죄를 짓기도 하지만, 두 가지 다 하나님이 주신 노동이라는 좋은 선물에 대한 타락한 인간의 반응이다. 한 가지 죄에 대한 답이 다른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대마다 다른 생각중년에 접어든 목회자 중에는 자기 관리, 더 건강한 습관, 그리고 지속가능한 리듬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너무 쉽게 무시함으로 스스로를 해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사람들을 향한 나의 걱정은 전혀 다르다. 사역의 본질과 자아실현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에 매달림으로 자기를 해칠까 봐 두렵다. 자기 관리의 중요성이 떠오르는 최근 추세는 오랜 근무 시간, 고된 일, 과도한 확장, 그리고 과중한 사역의 부담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대로 인해서 발생한 결과이다. 자신을 소진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한 게 그 세대였다. 그런데 상황이 뒤집히면 어떻게 될까? 자기를 돌보는 노력이야말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까지 포함해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 자기를 돌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사역 현장에 각종 어려움이 산적해도 상관하지 않게 된다면? 자기 관리와 같은 좋은 일이 과도한 자기 집중으로 인해 왜곡되었다. 그 결과 사역이라는 큰 소명 안에서 영적 건강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요소였던 자기 관리가 아예 소명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소명은 나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고, 사역은 단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전 세대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다고 그 해결책이 다음 세대의 덜 일하기(underwork)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전 세대가 자기 관리에 소홀했다고, 그 해결책이 다음 세대의 자기도취가 될 수는 없다. (영광스러운 포부가 가져다준) 조급함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겠다는 욕심으로 사역 속 불편함 자체를 무자비하게 거부할 수는 없다. (사역을 고작 몇 달 한 사람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서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할 때, 나는 “뭐? 탈진이라고? 당신은 아예 시작도 안 했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그러니까 조심하자. 우리는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역 현장에 들어간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비판받아야 하고 수정해야 할 불건전하고 불균형한 접근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전 세대가 애쓴 것들을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원제: Ministry Is Tough: When Self-Care Becomes Self-Absorp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사역과탈진
안식
자기관라
테라피
치료사회
은혜로운 회중 찬양을 위한 여섯 단계
by Alex DiPrima
2023-03-14
회중 찬양에서 바라는 만큼 은혜를 받지 못할 때가 많다. 너무 큰 소음과 찬양 인도자의 지나친 “무대 위” 활동이 회중을 압도하거나 소외시키기도 한다. 때때로 음역이 너무 높아서 남자들이 따라부르지 못하고 그냥 서 있을 때도 있다. 적지 않은 찬양이 기독교 방송에 나와서 공연하는 솔로를 위해 작곡되었기에 똑같은 찬양을 훈련받지 않은 성도가 주님께 즐겁게 소리 내어 부르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다 이런 경험이 있다. 어쩌면 지금 내가 말한 게 당신 교회 상황일 수도 있다. 찬양 예배에서 낙담하고 실망하곤 하는가? 좋은 소식이 있다. 회중 찬양은 얼마든지 더 좋아질 수 있다!다음은 은혜롭고 활기찬 회중 찬양에 도움을 주는, 특히 목회자가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용적인 조언이다. 예산과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교회가 다 다음 단계를 실천할 수 있다. 나는 평균 수준의 음악적 재능과 항상 쪼들리는 예산으로 운영되는,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중간 규모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이런 제한적인 요인이 은혜로운 회중 찬양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 교회를 방문한 사람은 모두가 함께 찬양하는 시간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자주 언급한다. 물론 찬양에 은혜가 넘치는 건 다 성령의 역사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교회에서 더 은혜롭게 함께 찬양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여섯 가지 실용적인 방법을 알아보자. 1. 선곡을 잘해야 한다.회중 찬양에 적합한 찬송은 수백 개가 넘는다. 따라서 선곡에 실패해서 은혜가 되지 않는 찬양을 부르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좋은 찬양을 선택하라. 모두가 함께 부른다는 점을 기억하라. Spotify에서 제공하는 다섯 개의 ‘Together for the Gospel’ 앨범은 좋은 선곡의 출발점이 된다. 2. 무반주로 자주 부르라.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찬양이든지 적어도 한 소절 또는 후렴구를 다 함께 아카펠라로 부른다. 종종 한 곡 전체를 아카펠라로 부르기도 한다. 사실, 우리 교회는 얼마 전에 모든 찬양을 아카펠라로만 부르는 비정기 예배를 시작했다.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모든 교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예배이다. 그중 십 대와 이삼십 대가 특히 더 좋아한다. 교인들이 옆 사람의 찬양 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한두 곡은 악기 연주를 아예 중단하고 교인들이 온전히 목소리만으로 찬양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3. 악기 소리를 낮추라.악기 소리가 클수록 찬양 소리는 줄어든다. 악기 소리가 줄어들수록 찬양 소리가 커진다. 이건 하나의 법칙이다. 우리는 지금 앨범 녹음을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찬양하도록 돕고 있다. 그러니 악기 소리를 줄이고 찬양 소리를 높이자! 회중 예배에서 악기는 찬송을 섬기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외에 다른 역할이 있을 수 없다. 교인들이 악기를 단지 회중 찬양이라는 근사한 음식을 섬기는 웨이터로만 바라보도록 그들을 제자화하라. 4. 모두가 다 찬양할 수 있는 적절한 음역을 선택하라.가스펠 가수 크리스 톰린(Chris Tomlin)처럼 고음을 뽑아낼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다. 키를 한두 단계 내려도 괜찮다. 좋은 찬송가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래 훈련을 받은 적 없는 모든 회중이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 찬양이라는 큰 무대에서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쉽게 만들라.5. 더 크게 찬양하도록 격려하라.회중이 더 크게 찬양할 수 있도록 최대한 격려하라. 등록 교인 모임에서만이 아니라 나는 정식 예배 중간에도 종종 더 크게 찬양하자고 부드럽게 격려한다. “형제자매님, 우리가 지금보다는 더 크게 부를 수 있습니다.” 또는 “다음 찬양은 그리스도인답게 더 크게 부릅시다.”6. 주도하라.음악을 포함하여 예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 물론 찬양 인도자를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 어쩌면 당신이 직접 하는 거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단 교회 비전을 공유하는 찬양 인도자를 써야 한다. 찬양 인도자의 중요한 책임은 음악과 찬양에 대한 담임 목사의 비전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가 회중 예배를 통해서 성경적 이상을 성취할 수 있도록, 담임 목사로서 실천할 수 있는 피드백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이 외에도 회중 찬양을 향상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다. 행여라도 당신이 지금 출석 교회의 찬양 시간에 실망했더라도 포기하지 말라. 찬양 시간은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구원받은 사람은 찬양하는 사람이다. 원제: 6 Steps to Improve Your Church’s Sing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회중찬양
찬송
찬송가
‘동성애는 죄’라 하지 않는다고 다음 세대가 교회에 오는 ...
by J. D. Greear
2023-02-17
교회 지도자와 동성애에 대해서 앤디 스탠리(Andy Stanley)가 언급한 내용, 다음 세대에 복음을 전하려면 교회가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조언이 최근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2022년 노스포인트 교회(Northpoint Church)에서 열린 드라이브 콘퍼런스(Drive Conference)에서 처음 나온 말인데, 이후 그 교회의 오프라인을 통해서도 알려졌다. 그러나 유튜브와 이곳저곳에 게시된 내용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그 메시지의 요지를 접할 수 있다. 이것[동성애]이 다음 세대와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모든 부분에서 관련이 있습니다. … 다음 세대의 눈에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 교회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나가고 싶어 하는 동성애자…. 나는 지금 당신에게 말합니다. … 동성애자들은 나보다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당신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목사입니다. 목사와 선지자는 전혀 다릅니다. 예언자가 하는 일은 아무 데나 들어가서 진실 폭탄을 투하하고, 마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가서 또 진실을 투하하면 됩니다. … 그러나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이끕니다. 우리는 속도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는 방향을 설정하고 속도를 모니터합니다. 목사는 속도를 설정하지 않습니다.나도 “동성애 정죄 구절”(clobber passages)을 잘 압니다. 알겠지요? 우리는 그 구절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 다음 세대 전도는 물 건너가는 겁니다. 동성애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목사는 누군가로부터 불필요하게 교회를 빼앗는 것입니다.노스포인트 교회도 또 스탠리 목사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건 아니라고, 그들을 취재한 누군가가 보도했다. 그러나 노스포인트도 스탠리 목사도, 수많은 요구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인 기독교의 전통적인 결혼과 성윤리를 지지한다는 공식 성명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드라이브 콘퍼런스에서 있었던 스탠리 목사의 말을 볼 때, 그들의 침묵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스탠리 목사가 뭐라고 했던가? 목사 개인이 또는 교회가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를 교회로부터 소외시킬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노스포인트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음”이 아니라, 단지 사실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을 뿐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무엇인 진실인지는 스탠리 목사만 알고 있으며, 나는 그가 조만간 입장을 밝히길 바란다. 노스포인트에서 지도자를 뽑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후보자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정도는 당연히 확인하지 않을까? 행여라도 동성애자로 확인되는 경우라면 지도자로 뽑지 않을 건 자명하지 않은가? 논증을 위해, 그 교회가 정말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간주하자. 즉, 성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계획은 결혼이라는 맥락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존재하며 다른 모든 형태의 성은 다 죄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교회가 이런 믿음을 주저하면서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하나님을 찾고 있는 LGBT+에게 장애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스탠리의 사역이 내게 미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는 것이다. 거의 십오 년 전에 사도행전 15:19을 설명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에 있는 모든 교회의 출입문에 이 글을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이방인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말에 깊이 감명받은 나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내가 담임하는 서미트교회(The Summit Church)에서 나는 그 말을 자주 반복한다.스탠리에게 동성애는 단지 이겨야 할 문화적 논쟁거리가 아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에 관한 것이다. 관계가 진리보다 우선한다고 그는 종종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곤 하는데, 진리를 희생하자는 게 아니라 단지 관계를 진리 앞에 놓자는 의미라고 말이다. 어려운 대화일수록 커피 테이블에서 이루어져야지 결코 독단적인 문서를 통해서나 또는 거만하게 무대에서 울려 퍼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경건하고 성경을 믿으며 신실한 우리 교회 교인 중에는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성인 자녀가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복음이 전파되는 다른 교회로 떠난 부모들도 있지만, 거기서도 그 주제는 결코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스탠리가 강조하는 것과 비슷한 교회였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우리 아이들이 복음을 믿고 계속 교회를 다닐 수만 있다면, 동성애 문제는 차라리 얼마 간은 거론되지 않는 게 좋아요.”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동성애 문제를 경시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유익할까? 동성애 문제를 무시하면서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충실할 수 있을까? 그게 과연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일까? 좋은 부분: 선교사처럼 생각하기좋은 것부터 시작하자. 첫째,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가르침의 어려운 부분을 소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굳이 처음부터 꺼낼 필요는 없다. 때때로 회의론자나 구도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독교 도덕의 특정 부분에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지금은 그리스도의 주장, 정말로 그가 주님이신지, 정말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는지에 관한 문제만 씨름하도록 합시다. 그런 다음 그리스도에 관해서 확신하게 되면 그때 가서 그분의 가르침을 하나씩 다루도록 하지요.” 우리에게 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경시하거나, 또는 모호하게 말할 자유가 없다. 그러나 심지어 예수님도 모든 가르침을 한꺼번에 제시하지는 않으셨다(요 16:12).둘째, 21세기 미국에서 목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단번에 전달된 신앙의 수호자일 뿐 아니라 점점 더 이교적으로 변질해가는 문화를 다루는 선교사로서 책임까지 짊어져야 한다. 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초대 교회의 복음전도)에서 기독교 변증가인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선교사”와 “정통의 옹호자”를 구분한다. “진정한 기독교와 그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탈 사이의 격차를 최대화하려고 애쓰는 정통의 옹호자에 비해서, 변증가(선교사)는 자신과 잠재적 개종자 사이의 격차를 최소화하는 데 관심이 있다. 따라서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그린이 설명하듯, 교회에는 이 두 역할이 다 필요하다. 동남아시아에서 무슬림 선교사로 사역할 때 나는 끊임없이 두 개의 모자를 번갈아 써야 했다. 복음이 이슬람과 얼마나 다른지를 강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슬람이 제기하는 질문을 복음의 다리로 활용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도 모자를 벗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대화에서 어떤 모자를 써야 하는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의 유명한 주장처럼 오늘날 서양의 목사는 선교사의 기술을 다시 배워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 문화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단순히 교리만 수호하면 되는 교구 담당자가 아니다. 목사 겸 선교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가르침이 단지 부도덕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초대로 들려야 한다. 나쁜 부분: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문제지금까지만 보면 내가 스탠리의 접근 방식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공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실제적인 문제와 두 가지 성경적인 문제를 제시하겠다.1. 실제적인 문제동성애에 대해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접근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1990년대라면 “당신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한, 나도 입 다물고 있겠다”라는 태도로 교회에 오는 구도자가 가능했다. 그것이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군대 내 동성애에 대한 빌 클린턴 대통령의 접근 방식을 상징하는 슬로건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래전 이야기이다. 교회에 오는 모든 불신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로 자신들이 동성애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첫째, 전 세계 그리스도인은 2,000년 동안 이성애 결혼의 신성함을 일관되게 믿어왔다 (돈 포트슨 및 롤링 그람의 설문 조사 참조). 둘째, 복음주의자는 성경의 사람들로 알려져 있으며, 설혹 성경을 건성으로 읽는 사람이라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성경의 입장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셋째, 기독교인을 편협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데 혈안이 된 미디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내용을 대중에게 상기시킨다. 교회에 오는 대학생과 젊은 전문직 종사자가 우리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유이다. 성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그들이 차차 알게 될 더러운 작은 국가의 비밀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는 바를 이미 알고 있고, 따라서 미디어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동성애를 증오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눈에 나는 도덕적 우위가 없는 상태로 시작한다. 어떤 영감을 기대하며 내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나는 복종을 요구할 수준의 권위자는 결코 될 수 없다. 그리고 정말로 미디어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토록 혐오스럽고 편협한 존재라면, 그들은 우리가 하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팀 켈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패배자 믿음”이다. 그들이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주장을 고려조차 하지 않도록 하는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전략적인 조치는 우리가 진짜로 무엇을 믿는지 명확히 하는 것이다. 비록 상대의 확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과 존엄과 명예로 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방 안에 있는 이 동성애라는 어색한 코끼리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따라올까? 동성애 문제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구도자마저 역사적인 교회와의 의미 있는 연합을 고려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침묵하는 “패배자” 역할을 할 것이다. 왜 그들이 굳이 혐오스럽고 편협한 사람이 되는 걸 고려하겠는가? 얼마 동안은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가르침, 실생활 수업,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에 계속 참여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성경 읽기, 소그룹 모임 또는 심방을 통해 이 주제가 반드시 떠오를 것이다.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당신이 목사로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분명히 혼란 속에 상처받고 화를 내며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우리 교회에 다니는 동성애자와 첫 커피 타임을 가질 때, 성윤리 선언문부터 꺼내 들고 그 모든 조항에 사인하라고 요구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처음 시간에 그 문제를 꺼내지 않는 것과 앞으로도 아예 꺼내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맨해튼에서 삼십 년을 목회하며 수천 명의 세속적 회의론자와 접촉한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비생산적이다. 역사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가진, 완전히 다른 왕국에서 온, 또 완전히 다른 권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아예 인정하는 게 좋다. 미국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미친 우유 몇 잔을 마시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미친 암소를 사서 키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바빌론에서 다니엘이 취한 접근 방식이었고 아테네에서 만나는 바울의 접근 방식이다. 다니엘은 “그러나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니”(단 2:28)라는 말로 변증을 시작했다. 아테네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는 “너희 조상들이 믿던 신에게로 돌아가서 너희가 양육받은 도덕성을 다시 받아들이라”가 아니었다. 바울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이것이었다. “당신이 지금까지 믿었던 것 대부분이 틀렸다. 그러나 나는 저기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적힌 제단을 보았다. 나는 오늘 그가 누구인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한다”(행 17:23).2. 성경적 문제(1) 십자가의 거슬림을 제거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빼앗는 일이다기독교 선교사가 믿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묵살 내지 부인하거나 또는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대사명을 통해서 예수님은 (동성에 이끌리는 사람도 다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 그는 또한 결혼의 신성함을 포함하여 자신이 가르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마 19:3-12).바울은 우리의 메시지가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를 풍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그는 거슬림을 극복하기 위해 얼버무리라고 권고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듣는 이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님을 의지했다. 아무리 복음을 매력적으로 포장해도 육에 속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고전 2:14). 바울이 만약에 그 시대의 인기 있는 지혜와 웅변으로 복음을 더 듣기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면(우리 시대에는 개성을 찬양하고 동성애의 죄성을 경시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는 훨씬 더 많은 열렬 청중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선포하는 십자가의 능력은 사라졌을 것이다(고전 2:4).십자가 설교의 중심에는 회개가 있다. 그리고 제대로 이해한 회개는 참으로 공격적이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무리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거기에는 그 어떤 조건도 붙을 수 없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당신의 삶에서 예수님과 경쟁하는 모든 것에서 기꺼이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할리우드의 연예계에서 일하던 동성애자 베켓 쿡은 (앤디 스탠리가 내게 추천한 책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요구가 그의 영혼에 얼마나 상처를 입혔는지를 설명한다. “내가 평생 들었던 교훈은 나 자신에게 진실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그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았다. [자아가] 이미 죄로 부패했는데 왜 거기에 진실해야 합니까? [섹슈얼리티 선택에 관한] 모든 생각은 자아를 높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를 나의 신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와 나의 욕망을 올려놓고 숭배합니다. 그렇기에 내게 진실하다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회개는 단지 대체 성(alternate sexualities)의 배후에 있는 전제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전체 정신을 뒷받침하는 전제인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무엇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 압니다”라는 전제의 부인을 의미한다.뉴욕의 시러큐스 대학교에서 문학 및 여성학 교수로 일하던 중에 복음을 처음 접한 레즈비언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회개의 진정한 초점은 동성애 또는 다른 특정한 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핵심은 교만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독립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원할 때 원하는 것을 할 자격이 있다고 느낍니다.”회개하라는 외침은 단지 동성애자에게만 불쾌감을 주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를 불쾌하게 하는 공격이다. 이 세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우리는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따르고 있는가?”는 그리 시급한 질문이 아니다. 진짜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는 정말로 제대로 된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단한 사람이라면, 어떤 특정 사안을 놓고 포기하는가의 문제는 훨씬 덜 중요해진다. 섹슈얼리티, 성 문제를 이슈에서 제외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가 교회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고민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교회에 와서 앉아있는 다음 세대이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잃었다. 교회는 차고 넘치는데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가 예수님으로부터 듣게 될 말이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나를 떠나가라”(마 7:23)가 된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다(마 7:13-14)는 말씀은 참으로 진리이다. 생명의 문은 그리스도의 배타적인 주장만큼이나 좁고, 자기 부인만큼 어렵고, 또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 힘들다. 일단 당신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나서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중에 만나는 모든 어려움은 훨씬 덜 중요해진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게 음란물에 대한 욕망, 명성을 갈구하는 마음 또는 선교사가 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건 관계없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에 온전히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온전히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이는 말 그대로 내 의지에 대한 완전한 죽음을 필요로 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선언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6:9-10).동성애라는 죄가 바울이 나열한 유일한 죄는 아니지만 그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건 단지 “동성애 정죄 구절”이 아니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고의 말씀이다. 그렇기에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지금 세대에 가할 수 있는 가장 큰 불친절이 될 것이다(겔 33:8).바리새인이 모세의 율법을 오용하여 사람들을 잘못 인도한 것처럼 이 구절도 오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잘못은 말씀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다. 모세가 말했듯이, “율법은 단지 빈 말이 아니라, 바로 당신들의 생명입니다”(신 32:47).이 문제에 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게 친절이 아니다. 진짜 친절함은 명확함이다.선교사와 옹호자를 구분한 그린의 말로 돌아가서, 교회는 선교사와 정통 옹호자 모두가 다 필요하다. 모든 교회는 이 두 가지를 다 동일하게 강조해야 한다. 리차드 러벌리스(Richard Lovelace)는 이것을 우리 몸의 적혈구와 백혈구 숫자와 비교했다. 백혈구가 너무 많아도(백혈구 증가증) 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적혈구가 너무 많아도(적혈구 증가증) 죽는다. “적혈구”(전도 열정)로만 충만한 교회가 되려는 것은 “백혈구”(교리적 충실도) 중심의 교회가 되려는 것만큼이나 건강하지 않다.그러나 놀랍게도 교리적 충실도와 전도 열정은 서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이다. 성경에 충실할수록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겠다는 열망이 커지기에 교리적 충실성은 자연스럽게 전도 열정을 낳는다. 출석 교회가 추구하는 교리적 충실도가 전도하려는 당신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면, 당신은 지금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올바른 교리를 배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성경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넘치게 되고, 무엇보다 긴급한 전도 열정에 불타게 된다. (2)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어두움이 이기지 못한 빛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요 1:5, 14). 요한은 진리 앞에 은혜를 두었는데,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스탠리가 상기시켜 주듯 예수님은 은혜로 인도하신다. 진리를 말씀하실 때도 먼저 은혜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가까이 끌어주신다. 예수님은 실로 은혜로 충만하여 불신자가 그의 주위에 쉬지 않고 모여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닮으려는 우리 교회 주변에는 왜 불신자들이 모이지 않는 건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예수님은 진리로 가득하셨기에 모든 종류의 죄인이 하나가 되어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일제히 외쳤다. 예수님은 겉멋에 빠진 구도자(would-be seekers)라면 외면할 수밖에 만드는 어려운 말씀을 하셨으며, 심지어 제자들조차 그분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시는지에 관해서 어리둥절하게 만드셨다(마 19:25).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능력의 원천은 충만한 은혜와 진리였다. 예수님만이 유일무이하게 완전히 진리로 가득한 사람, 또 완전히 은혜로운 사람이었다. 진리와 은혜라는 개념은 “균형”을 이루기 위해 그분의 본질 안에서 다투기는커녕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서로 완벽하게 일치했다. 예수님이 완벽하게 진리로 가득하지 않았다면, 은혜롭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완전히 은혜롭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완벽하게 진리로 가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자는 은혜 없는 진리를 좋아한다. 자유주의자는 진리 없는 은혜를 좋아한다. (비록 복음적 의미에서 은혜는 율법의 설교를 필요로 한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자가 되려면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갖춰야 한다. 근본주의자보다 더 진리로 충만해야 하고, 자유주의자보다 더 너그러워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고, 그럴 때만 그분처럼 세상을 이기기 위해 그들을 다시 세상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이기는 건 교묘하며 애매모호하게, 유행에 따라서 포장한 복음을 통해서가 아니라고(물론 상황화가 중요하긴 하다) 요한은 상기시킨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 생명도 아끼지 않을 정도의 사랑으로 극복한다(계 12:11). 즉, 우리가 메시지와 삶을 통해서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권세, 그분보다 더 가치 있는 소유물이 없다는 사실을 온전히 드러낼 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이 멈출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헤롯 앞에 선 세례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동침하는 죄, 즉 왕족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는 성적 난잡함을 지적했다. 헤롯은 요한의 머리를 잘랐고, 마태는 요한의 지적이 처형 명령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목회자 중에는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세례 요한, 이 사람아, 좀 살살 말하지 그랬어. 왜 그렇게 딱 까놓고 말을 해? 개방 결혼에 관해서도 확실하게 “인정한다” 또는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딱 잘라서 말하는 건 지혜롭지 않아. 그러지만 않았다면, 자네 사역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도 날아가지 않았을 거 아니야? 게다가 누가 알아? 헤롯하고 궁정 사람들의 마음도 다 사로잡았을 수도 있잖아? 결국 성적인 죄를 설교하겠다는 당신 고집 때문에 전도의 기회를 놓친 거야. 헤롯하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 영혼을 당신이 어떻게 책임질 건데?” 그런데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판결은 뭘까?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 11:11).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다니엘은 다리오 왕 외에 누구라도 기도하면 처형당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다니엘 6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바로 그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을까? “오, 다니엘, 창문 열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어! 성경에 꼭 창문을 열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없어.” 그러나 다니엘은 지금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창문을 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Godship)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문화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보다 더 구속력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니엘은 창문을 열고 예전처럼 기도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순간을 사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셨다.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의 후퇴가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관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가? 물론 그 문제를 굳이 꺼내지 않고 또 전혀 설교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은 얼마든지 일관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 창문을 모두 닫고 방안에서 조용히 순종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결코 사자의 입을 막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LGBT+ 커뮤니티의 선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런 주제에 관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다면 반드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그 어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빛이 숨어있다고 나는 믿는다.이야기 하나로 마무리하자. 몇 년 전, 한 레즈비언 커플이 우리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두 사람 중 한 명이 나와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조언이 필요합니다. 몇 달 전 예배가 끝날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목사님과 같이 기도했는데요. 지금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교회를 출석하면서 매주 만나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아내까지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내가 목사님에 관해서 조사를 했고, 이 교회가 동성애가 죄라고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나는 그 교회 안 갈 거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원한다면, 그래 좋아. 하지만 다른 교회를 찾자고. 우리를 받아주는 교회 말이야.’ 그래서 아내가 랄리에서 자유주의 교회를 하나 찾았고, 우리는 같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한 달 정도 참석하고 나는 아내에게 이 교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서미트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신 게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만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서미트교회로 가거나, 우리를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이 없는 이 자유주의 교회를 계속 다니거나. 나는 아내한테 말했어요. ‘당신도 원하는 대로 해. 난 하나님이 계신 교회로 갈래.’” 그녀는 세례를 요청했고 결혼 관계를 끊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시작했다. 얼마 후 우리는 그녀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반년이 조금 더 지났다. 그녀의 전 아내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전 아내가 말했다.아내가 세례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가 집을 비운 어느 주말에 용기를 내서 당신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당신이 동성애 주제를 꺼냈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맞아. 바로 이런 게 이 편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소리지. 동성애에 집착한 사람들, 한 십 분만 듣자. 저 인간이 말하는 온갖 혐오스러운 말을 잘 정리해서 아내한테 말하자. 이 교회는 결코 우리가 다닐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자.’지난 오 년 중에 아마도 내가 동성애라는 주제 하나만을 놓고 확실한 메시지를 전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던 거 같다. 그녀가 온 바로 그 주일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한 십 분쯤 지나니까, 내가 ‘혐오’라고 제목을 붙인 난에 쓸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날 설교는 내가 살면서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사랑에 넘치는 반동성애 메시지였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매주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어요.”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게 다 진리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삶 속에 모시고 싶어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몇 주 후, 우리는 그녀가 세례의 물가에 서서 외치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을 목격하는 특권을 누렸다. 그녀가 말했다. “나 때문에 메시지를 바꾸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나와 내 파트너에게는 항상 분명했습니다.”이제는 창문을 활짝 열고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들어야 할 때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사자의 입을 막으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움츠리지 말자내기 이 글을 쓰는 건 앤디 스탠리의 사역을 자세하게 분석하거나 최종 평결을 내리기 위한 게 아니다. 스탠리와 나는 둘 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최종 판결은 그날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의도는 이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가 불신앙으로 물러서지 말자는 것이다. 믿음으로 전진하여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시대에 외친 말씀을 우리는 우리 세대에 외치자는 것이다. 바울이 뭐라고 했는가? 우리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노라(행 20:27). 우리가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모든 사람을 훈계하였노라(행 20:31).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며, 마침내 믿음의 경주를 마쳤노라(딤후 4:7).원제: Downplaying the Sin of Homosexuality Won’t Win the Next Gener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동성애
다음세대
전도
설교자를 위한 세 가지 경고
by Kenneth Mbugua
2023-02-01
타락한 세상에서 설교라는 특권을 능가하는 소명은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에 기름 부으심으로 죄로 어두워진 영혼에 그의 영광의 빛이 비취도록 정하셨다. 정기적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의 백성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던 거짓말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굴복하도록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거룩한 지식이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설교는 실로 위대한 소명이다. 그러나 강단 안팎에는 영혼을 저주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당신과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도 강단의 함정에 빠졌다. 사역을 완수하고자 하는 설교자로서 내 영혼을 위협하는 세 가지 위험을 이 글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나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를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설교라는 높고 거룩한 부르심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1. 진리를 아는 것을 진리를 믿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강해 설교자로서 우리의 의무이다. 설교 강단에 무지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우리의 임무는 성경의 진리를 발굴하여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또 열정적으로 교인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슬프게도 강단에서 선포되는 진리가 흔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분명한 진리를 바로 배우고자 하는 최소한의 소망을 가진 적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바로 외쳐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위험이 있다. 신학적으로 건전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얼마든지 지옥에 갈 수 있다. 성경이 무어라고 가르치는가?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약 2:19).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우상에 빠진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외칠 수 있다.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교하면서 정작 그 설교 속에서 의를 찾는 것,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내가 살을 붙이는 건 쉽다. 말씀은 참으로 옳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롬 7:18-19). 속아서는 안 된다. 약을 팔아서는 아무도 고칠 수 없다. “의사여, 너 자신을 치유하라”는 모욕은 참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어야 한다. 강단에서 교인을 향해서 처방하는 동일한 치료법에 우리도 환자로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첫 소명은 강해 설교자가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주일 사역의 목표가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원고를 들고 강단에 오르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양심, 비길 데 없는 그의 사랑을 찬양하는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강단에 오르기 전과 후에 믿음과 회개의 마음으로 내 설교에 나부터 응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내가 목격한 좋은 예가 있다. 설교가 끝나고 교인들과 간담회를 가지면서 자신의 설교 내용 중에서도 특히 자기에게 영향을 끼쳤던 부분을 얘기하는 어느 목사의 모습이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 말씀의 통치 아래 자신을 위치시키는 좋은 모델의 한 사례이다.형제여, 교인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지 말라. 정작 교인을 위한 말씀을 준비하는 당신이 예배를 마치고 매주 굶주린 상태로 집에 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말씀을 연구하는 당신이 먼저 그 말씀의 열매에 먼저 참여하도록, 설교자에게 필요한 겸손과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2. 설교 사역의 열매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열매를 혼동할 수 있다이 위험을 나는 팀 켈러의 설교 덕에 알게 되었다. 2016년 비슨 신학교(Beeson Divinity School) 졸업식에 참석한 그는 좀 기이하고 작은 강단에서 이 점에 관해서 설교했다. 이 간교한 거짓말을 폭로한 켈러에게 나는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사탄 원수가 말씀 사역자를 죄에 안주하도록 유인하는 데에 있어서, 과연 이것보다 더 기만적인 방법이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사역의 성공이라는 목표에 눈이 멀어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력 질주하다가 결국 믿음의 난파라는 결과를 맞는 설교자가 얼마나 많은가? 사역 내내 그들은 “추종자들”에게서 격려를 받는다. 사역의 열매가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며, 더불어서 자신에게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규칙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랑스럽게 믿기까지 한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배반한 바로 그 유다가 귀신도 쫓아냈다는 사실을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설교의 은사를 경건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시대에 사역하고 있다. 설교의 은사는 있지만 성숙하지 못한 설교자를 선택하는 교회는 많지만 경건하지만 평범한 설교자를 선택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오늘날 교회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족한 경건의 모습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부족한 설교를 눈감아주는 데에는 그리 너그럽지 않다. 형제여, 이런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현재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안에서는,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 밖으로는, 우리의 설교를 듣는 청중의 판단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교훈이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딤후 4:1-2). 강단에 선 우리를 보는 교인들처럼 내가 나를 본다면, 설교의 반응을 성령의 열매로 혼동하는 유혹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후의 그날에 눈을 떼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탄의 치명적인 거짓말에 빠지지 않고, 나의 영혼만이 아니라 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영혼까지 구원하는 삶과 사역을 갖춘 설교자로서 자격을 얻을 것이다. 3. 모든 사역(설교도 포함)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려운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할 때. 내 기도는 정확한 의미를 알려달라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으로 충족하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이단적인 말을 하지 않고 설교를 잘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나름 중요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종종 설교 준비를 하면서 생기는 염려를 보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두려움의 이유가 하나님이 나쁘게 보일까가 아니라 내 명성에 흠이 갈까이다. 가끔 설교를 망치고 절망한 마음에 앞자리에 내려와 앉을 때 나를 채우는 괴로움은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높이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내가 대단한 설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설교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붙잡아주는, 그래도 설교가 괜찮았다는 교인들의 격려가 아니다. 내게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속한 영광을 도둑질하려고 했던 내 마음을 뉘우치는 상한 마음이 필요하다.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참된 신학은 송영(doxology)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주장하면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고전 1:31)라는 훈계로 끝맺는다. 나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실제로 나 자신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기쁨의 본질로 바로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율법”은 제대로 선포하는지 몰라도,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는 정신은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교자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복음의 목적을 왜곡한다면, 그들도 복음의 내용을 왜곡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에서 돌아서게 하는 번영 복음 설교자들과 하나 다르지 않다.형제여, 영광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으로 우리까지도 지키실 것이다. 내 영광을 추구하는 자존심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자. 내 영광만을 바라는 비열한 죄까지도 용서하는 큰 자비가 십자가에는 있다. 내가 전하는 바로 그 복음이 교만한 설교에 대항하는 최고의 무기가 되도록 하자. 내 영혼과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하자. 내가 자랑하고 싶은 모든 것, 심지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조차도 죄 없는 진공 상태가 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러나 나 자신과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음을 찬송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간 다시 한번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의 자비로 인해 주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우리가 정작 나중에 주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원제: Three Warnings for Those Who Preach the Wor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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