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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대중적’인가?
by 김형익
2022-06-13
복음은 대중적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대중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중적’의 의미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많은 사람의 무리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이 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popular”인데, 국립국어원 한국어-영어학습사전은 ‘대중을 중심으로 한’ 또는 ‘대중의 취향에 맞는’이라고 풀이한다. 이 영단어는 정치의 영역으로 확장되면, 대중주의(populism) 또는 대중주의자(populist)라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용어들은 일부 엘리트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전체를 동등하게 대변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한 가치중립적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인기영합주의라는 부정적 뉘앙스, 즉 오로지 정권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대중의 인기에 기대고 영합하는 정치 행위나 정치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곤 한다. 이렇게 ‘대중적’이라는 말은 얼마든지 가치중립적이면서도 부정적 뉘앙스를 가진 말로 사용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복음은 대중적인가?”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가치중립적 의미로 복음이 대중적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복음은 만인에게 선포되어야 하는(막 16:15) 좋은 소식이기에 대중적이다. 만일 ‘대중적’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용례를 알고 오해될 위험성을 피하려고 한다면, ‘복음은 대중적이다’라는 표현보다는 ‘복음은 보편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추천할 수도 있겠다. 복음은 모든 민족, 모든 죄인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좋은 소식이고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딤전 1: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복음은 보편적이다(딤전 2:4). 설교는 대중적인가?여기서 내가 던지고 싶은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설교는 대중적인가?” 오래 전 일이다. 미국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를 시작하고 두어 달이 지나던 즈음 내게 설교와 관련하여 한 가지 요청을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의 요청은 “대중적인 설교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요청을 한 분은 바로 그 영단어 “popular”를 사용했다. “좀 ‘popular’한 설교를 해주십시오.”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단어 자체는 부정적 가치를 전달하지 않는다. 대중적 설교에 대한 그의 요청은 설교가 대중적일수록 교회가 성장할 테니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설교를 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가 요청한 ‘대중적 설교’는 보다 많은 사람(대중)이 좋아하고 반응할 수 있는 설교였다. 이런 의미를 전제하고 다시 한 번 묻겠다. 설교는 대중적인가? 그저 쉽게 ‘대중적 설교는 틀렸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대중적 설교’는 부정적 가치를 지니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설교는 그 성격상 대중적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는 복음이 대중적인 만큼 (혹은 보편적인 만큼) 대중적이어야 한다. 설교가 교회와 예배의 맥락에서 전해질 때 그 설교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지만, 설교가 언제나 하나님 백성의 예배의 맥락에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18세기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가 기존의 틀을 깨고 들판과 광산에서 설교를 했을 때, 그것은 반제도적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들의 설교는 사도행전 2장에서 보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나 사도행전 17장에서 보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가까운 설교였다. 베드로는 정확한 장소를 누가가 지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의 한 넓은 거리에서 (아마도 성전이 가까운 곳에서) 설교를 했을 것이고, 바울은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설교를 했다. 사실, 설교가 대중적일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을 꼽으라면 우리 시대의 빌리 그래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73년 서구의 기독교 국가도 아닌 대한민국의 여의도 광장에 100만 명을 모을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는 그 ‘대중’에게 설교를 했다. 들려지는 설교를 하는 것은 설교자의 정당한 수고이다 설교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모두를 향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설교가 보편적 (혹은 대중적) 복음을 그 내용(contents)으로 전하는 것이라면 설교는 대중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복음의 진리일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전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설교자의 책임이다. 설교는 그 내용만큼이나 전달(delivery)도 중요하고, 설교자는 내용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전달의 방식을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 나팔 소리로 백성들에게 신호를 보내던 전통에 근거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 14:8). 보편적 복음의 진리는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정교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설교되어야 한다. 나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설교가 대중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의 중요성을 축소하거나 간과하는 사례를 우려한다. 바른 복음은 보편적 복음이고, 그 보편적 복음은 가능한 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설교되어야만 한다. 들려지는 설교를 하기 위해 고민하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은 설교자의 정당한 책임이다.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하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사탄이 설교자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쳐놓은 덫이 있다는 사실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교회 성장의 욕구는 종종 정당함을 넘어 많은 목회자-설교자에게는 유혹의 미끼가 되곤 한다. 교회를 개척하고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의 교인들로 구성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사실 이것은 시간의 문제만도 아니다. 개척교회가 아니더라도 성장이 지연되거나 지체될 때 목사는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을 받는다. 여기서 나는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이라고 말했다. 이 유혹은 설교의 전달 방식이 아니라 설교의 내용인 복음의 진리를 대중영합적으로 비틀고 싶은 마음 속에서 힘을 얻는다. 그렇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복음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진리이고(딤전 1:15),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할 좋은 소식이기에 대중적이다. 그러나 대중주의적 설교의 유혹이 설교자의 내면에서 힘을 얻을 때에는, 불변하는 보편적 복음의 내용을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믿을 만한 복음’으로 비틀고 왜곡하는 일이 일어난다. 교회 성장의 욕구에 못 이겨 이런 방식의 ‘대중적’ 설교를 하게 되는 순간, 목사는 진리의 매춘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진리의 매춘 행위를 통해 성장한 교회의 화대를 받아 누리게 되면, 따라오는 것은 교회가 사탄의 회당으로 변질되는 일이다.복음은 보편적이지만 ‘대중주의적’일 수는 없다실수는 대중적 복음의 성격을 ‘대중주의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일어난다. 보편적 복음은 그 본질상 언제나 대중을 둘로 가르는 역할을 한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 심지어 예수님의 설교는 모두 대중적이었지만, 언제나 대중을 둘로 가르는 결과를 낳았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적 설교가 교회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신화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접근했던 뱀의 거짓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물탄 메시지와 복음을 전했던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과 신약의 거짓 사도들, 거짓 교사들에게 깔려 있는 전제였다.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설교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장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어떤 인물에게는 비범한 설교의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도 안다. 고대 교회에서 황금 입으로 불렸던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나 18세기의 조지 휫필드, 19세기의 찰스 스펄전, 20세기의 마틴 로이드존스와 같은 이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비범한 능력을 지닌 대중적 설교자였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조금도 비틀지 않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대중이 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했다. 우리 시대에는 존 맥아더와 존 파이퍼, 팀 켈러와 같은 분을 들 수도 있겠다. 이들의 교회는 모두 보편적 복음 설교의 결과로 외적 성장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들의 설교는 대중의 취향에 맞추려는 대중주의적 설교는 아니었다. 반면, 우리는 아더 핑크나 윌리엄 스틸 같은 분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더 핑크는 동일한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강단이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었다. 윌리엄 스틸도 동일한 복음을 일평생 한 강단에서 전했지만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다.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타협 없이 전하되, 대중에게 들리는 방식으로 설교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은 설교자의 책임이고 몫이다. 그리고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는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주시는 은혜다.
대중적설교
대중주의적설교
대중영합주의적설교
대중영합주의
대중주의
보편적설교
아이들에게 가르치라, 성경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을
by Sally Lloyd-Jones
2022-05-30
방문하는 교회에서 나는 늘 아이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첫째, 하나님께 사랑 받으려면 착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아이들은 머뭇거리며 손을 든다. 나도 따라 든다. 그리고 두 번째로, 착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 보세요. 아이들은 주변을 살피다가 다시 손을 든다. 이 아이들은 성경 이야기를 알고 있고 또 어떤 게 정답인지도 십중팔구는 다 알고 있는 그런 주일학교 아이들이다. 그런데 이런 주일학교 아이들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놓치고 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이 아이들처럼 나고 그랬다. 어린 시절 (그때도 그리스도인이었다) 나는 성경에는 지켜야 하는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실) 규칙과 모범으로 삼고 따라야 하는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실) 영웅이 넘쳐나는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다.나는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정말 그랬다. 나는 꽤 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규칙을 항상 지킬 수는 없었고, 그럴 때면 하나님이 틀림없이 나를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도저히 다니엘처럼 용감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주일학교 성가대가 “다니엘처럼 되고 싶어요”를 부를 때면 얼마나 괴로웠던지,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다니엘처럼 용감하다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외쳐도, 사자에게 던져져도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아무리 상상해도…. 다니엘처럼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겁에 질려 꼼짝도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나를 사랑하실 수 있겠는가?내가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지 못하실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그 이야기얼마 전 주일이었다. 나는 주일학교 수업시간에 여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스토리 바이블: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The Jesus Storybook Bible) 중에서 “다니엘의 무서웠던 하룻밤” 이야기를 읽어주고 있었다. 여자아이 하나가 내 무릎에 닿다시피 바짝 다가와 앉았다.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그 아이의 낯빛이 빛나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린 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이야기가 끝날 때였는데 다른 선생님들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거의 무심결에 이렇게 질문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니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내가 내뱉은 그 말은 말 그대로 큰 짐을 그 어린아이에게 지운 것이었다. 마치 마법에 걸린 그 여자아이를 내가 깨운 것 같았다. 아이가 내 바로 앞에서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숙였다. 절대 못 잊을 것이다.우리가 이야기를 도덕 교훈으로 바꾸면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깔끔한 작은 상자에 담아 잘 포장하고 모든 질문에 답을 제시할 때, 우리는 신비가 있어야 할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발견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그래서 나는 스토리 바이블: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썼다. 그래서 아이들은 내가 몰랐던 것을 알 수 있도록. 성경은 나에 관한 것이 아님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님을.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것임을. 하나님이 하신 일에 관한 것임을. 성경은 거의 전부가 한 이야기, 곧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고 구원하러 오신 이야기임을.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대가를 치르시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시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놀라운, 결코 멈추지 않는, 포기하지 않는, 깨어지지 않는, 한결 같고 영원한 사랑으로. 성경은, 단언컨대, 하나의 이야기임을, 규칙집이 아님을, 오직 한 분의 영웅만이 있는 이야기임을.나는 스토리 바이블: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을 썼다, 아이들이 그 영웅을 만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분의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규칙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에. 하지만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는 그리 할 수 있기에.원제: Teach Children the Bible Is Not About The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경
성경이야기
어린이성경
성경의주인공
우리는 어떤 이야기에 속해 있는가
by Tom Nelson
2022-04-30
끝없이 빛나는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며 내게 늘 영감을 준다. 어렸을 때 수정처럼 맑은 여름 하늘을 넋을 잃고 바라본 적이 있다. 등을 대고 누워, 아직 땅에 남아 있는 온기를 느끼며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세상을 보면서 문득 커다란 궁금증이 생겼다. 이 모든 것은 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 중에 내 자리는 어디일까? 나는 정말 중요한 존재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목회자의 소명은 확고히 정립하려면 인간으로서 가장 깊은 수준에서 풀어야 하는 근본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을 먼저 던져 보아야 한다. 세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논리적이고 온전한 일관성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자 한다면, 기원이나 운명, 인식, 고통, 의미, 목적에 관한 질문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실존적 질문들에 대한 충분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성실하고 선의에 차 있는 목회자라 하더라도 그의 소명은 모래 위에 세워진 것과 같다. 목회자는 자신의 삶과 사역에 궂은비가 쏟아지기 시작할 때에도 그 어려움을 겨우 견디어 낼 힘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회복하고 부흥하는 힘을 갖기를 원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목회자의 소명은 우리의 참이 되시는 하나님과 복음에서 시작한다. A. W. 토저는 우리의 가장 깊은 실존적 질문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인류의 역사는 아무도 그 인류의 종교를 뛰어넘지 못함을 보여줄 것이며, 인간의 영적 역사는 그 어떤 종교도 하나님에 관한 생각보다는 위대하지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토저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교정해 준다는 것을 제대로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가 모든 현실의 기반이며, 여기에 목회자는 확고한 소명의 닻을 내려야 한다. 목사가 이런 기본적인 수준에서 흔들리게 되면 그의 소명은 의심과 환멸과 절망의 암초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목사의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몸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실재하시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자신을 친히 드러내셨다는 이 명제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이 부인할 수 없는 명제가 세상의 참 진리이다.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창조된 세계를 통해 드러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66권의 정경과 그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드러난다. 이는 우리가 이야기의 사람들임을 의미하며, 동시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 시공간의 위대한 이야기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야 함을 의미한다.우리가 어떤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기억할 때 목회자는 자신뿐 아니라 성도들이 영적으로 부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네 국면의 이야기성경의 복잡성과 그 신비는 헤아리기 매우 어렵지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네 가지의 일정한 틀 안에서 발견하는 것에는 목회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성경 이야기를 바탕으로 최초의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 이렇게 네 국면의 신학적 구분은 인간의 실존적 범주를 재조정한다. 나는 교회에서 이 네 국면의 이야기를, 당위와 현실과 가능과 미래의 차원에서 풀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첫 번째 국면, “최초의 창조”는 이 세상이 마땅히 취해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마땅히”는 하나님의 완벽한 디자인, 그가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허무주의의 세계가 아니라 도덕적 세계라는 진리를 나타낸다.두 번째 국면, “타락”은 지금 세상 그대로의 모습이다. 지금의 상태는 붕괴된 우리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우리의 관계와 현실 정황에서 이러한 죄의 결과와 붕괴의 조각들을 날마다 경험한다. ‘지금의 상태’는 목회자들에게 신정론이라는 어려운 문제에 근본적인 답을 줌으로써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일관성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이 이야기의 틀은 각자의 삶에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에 직면하는 성도들을 목회자들이 돌볼 때 필수적이다. 또한 목회자들은 ‘지금의 상태’를 타락한 인간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로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싫어하여 하나님이 디자인하시고 사랑하신 세상을 속이고 파괴할 궁리를 하는 사탄이 활개 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세 번째 국면, “구속”은 앞으로 실현될 모습을 묘사하며 이 세상에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 이 ‘실현될’ 이야기는 죄 많은 인간을 위해 속죄 제물로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 새로운 창조의 생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이 잘 보여준다. 목회자들은 고통과 불의의 한 가운데서도 영혼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메신저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선하지만 망가져 버린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를 구속하실 것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왕 예수를 통해 당신의 통치를 세상에 가져오실 것이다.네 번째 국면, “새 창조” 또는 “완성”은 성경적 관점에서 마지막 단계이다. 이는 언젠가 이루어질 모습이자, 우리의 지향점이다. 새 창조는 세상에 커다란 소망을 선사한다. 우리는 역사의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악을 심판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함이 온전케 되는 결말로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복음 중심이 네 국면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인격을 중심으로 한다. 즉, 목회자들은 단지 아이디어나 이야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격을 통해서 재조정됨을 의미한다.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도 이 네 국면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셨다고 하는 영혼 깊숙한 소망과 역사적 확신이 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 죄악 가득한 이 땅에 오셔서 죄의 모양을 입고 죄 없는 삶을 사셨다. 하나님 나라를 몸소 보이셨으며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 위에 놓으셨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으며 하늘에 오르셨고 언젠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어떠한 공로가 아닌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지금 여기,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새 창조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목회자의 소명은 이러한 성경적 이야기의 맥락에서 우리에게 찾아와 세상과 그 안의 우리 위치에 대한 일관된 이해, 그리고 우리 삶과 일 한가운데서 복음의 소망을 선사한다. 목회자의 소명의 중심에는 예수님에 대한 이 이야기에서 살고 사랑하며 숨 쉬고 좋은 소식을 나누는 우리의 삶이 있다. 인류와 대속의 역사는 힘차게 행진하며, 목회자의 소명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발맞춰 걷는 것이다. 시간 밖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한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 위해 시간 속에서 당신의 목적을 주권적으로 성취해 가신다. 복음이 사람에 관한 것이라 할 때, 목회자의 소명은 매우 관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굳게 믿고 선포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도덕적 체계나 교리적 신념의 집합이 아니라 이것들만큼이나 중요한 한 사람이다. 최초의 창조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복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친밀함에 대해 말한다. 목회자는 일생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알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친밀하게 여김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 사명이 있다.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져 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갈 4:9). 현재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함, 성령의 내주하심은 이후 다가올 삶을 먼저 맛보는 것과 같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묘사한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왜’로 시작하기목회자의 소명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을 명확히 알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있다. 우리의 궁극의 목적(telos)는 재조정되어야 한다. 사이먼 사이넥은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가장 먼저 ‘왜’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의 목적, 명분, 신념은 무엇인가? 당신의 회사는 왜 존재하는가? 당신은 왜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는가? 목회자의 소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왜 우리가 그것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의 소명은 ‘왜’가 흐릿해질 때, 열정은 퇴색하고 사명은 표류하게 된다.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의 첫 질문은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인가?”로 시작한다. 그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데, 목회자의 소명은 그들이 섬기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포함하는 목적의식을 기초로 세워진다. 교회의 목사로서 이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예수와 그의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가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나의 전존재적 믿음이, 목회자로서의 나의 소명을 활기차게 하며 매일 아침 나를 일으키고 맡겨진 일에 매진하게 한다. 나의 목회 기간은 30년이 넘는다. 산꼭대기에 서는 높아진 순간도 있었고 깊은 골짜기까지 낮아진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때에나 영적으로 풍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부르심의 이유를 명확히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우리 시대의 지평선개척 교회 목사로서 처음부터 고려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시작한 교회의 건축 디자인과 사명을 어느 시대 지평선에 가장 부합하게 할 것인가였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지평이었지만 여러 세대에 걸쳐 섬길 수 있고 우리 삶보다 더 오래갈 수 있는 시기적절한 지평이 우선 중요했다.건물을 세우든, 조직을 구성하든, 삶을 꾸리든, 목회자에게 중요한 것은 멀리 보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우리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때 목회자의 소명은 영원을 아우른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시대에 예수께서 다시 오시기를 소망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벧후 3:8). 우리의 직업적 소명을 단순히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성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범위가 비참할 정도로 빈약한 것이다.반면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매우 짧다는 것과 청지기의 삶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시편 기자는 영원한 시간의 지평뿐만 아니라 짧은 시간의 지평 또한 언급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우리 마음속에 영원에 대한 이 힘든 줄다리를 하며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지혜로운 삶을 구현하고자 애쓰는 것이다.우리는 한 분의 청중 앞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시간 속의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가지신다. 우리는 그 계획안에서 우리의 시간 지평을 재조정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다.우리가 속하여 있다고 믿는 이야기에서, 우리의 새로운 시간 지평으로, 나침반이 가리키는 자북(磁北)에서 진북(眞北)으로 목표를 재조정하는 것은 목사인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와 목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모든 실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가장 분명하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 재조정된 목표점에 의해 길 잃은 목자는 마침내 길을 찾게 된다. 이러한 방향 전환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비로소 바르게 따를 수 있다.원제: Pastors, Remember What Story You’re Living I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목회
목사의소명
하나님의시간지평
목사의삶의지평
A.W.토저
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표면적으로는 이상하지만 영광스러울 정도로 좋은
by Hayden Hefner
2022-03-30
나는 초기 오순절주의를 ‘신학을 찾아가는 체험’이라고 표현하는 이를 만난 적 있다. 오늘날 많은 개혁파 은사지속론자(Reformed continuationists)가 체험 추구의 신학을 갖고 있는 현실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은 바른 행동(orthopraxy)을 추구하는 하나의 정통(an orthodoxy, 바른 교리)일 뿐이다. 믿음은 분명하지만, 실천은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야 얼마든지 계시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은사 추구로 인한 혼란을 두려워하여 그들은 은사 추구 자체를 주저한다.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내 말이 당신에게 반향을 일으킨다면, 이 기사는 당신을 위한 것이다. 어느 분별 블로거의 꿈확실히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는 종종 이상하고 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있었던 계시적 은사의 혼란스러움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실수할 가능성 자체를 없애려고 하지 않으신다. 대신 하나님은 조직적 틀(고전 14:26-33)과 더불어 사랑으로 은사를 추구하고 실행하도록 격려했으며(고전 13:1), 지체로서 몸을 세우도록(고전 14:12) 만드는 내적 동기를 제공하셨다. 나는 적지 않은 이론적 은사지속론자가 교회 안에서 계시의 은사를 의도적으로 추구하는 경우에 필연적으로 많은 혼돈을 초래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하는 것을 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33을 인용한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나 문맥을 주목해서 보라. 이 구절을 쓰기 직전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계시의 은사를 어떻게 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설명한다(26-33절). 그렇다면 바울이 33절에서 말하는 화평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39-40).바울이 추구하는 평화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혼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 따르면 은사를 소홀히 한다고 해서 혼란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혼란을 피해야 하는 시점은 계시적인 영적 은사를 열렬히 추구하며 공개적으로 그 은사를 실천하는 시간 동안이다. 그럼 “정직하게” 그리고 “질서대로”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최소한 바울이 39절에서 언급한 예언과 방언의 은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계시적 은사에 대한 추구는 지혜로운 열심보다는 불길하고 부적절한 경고에 의해 더 많이 언급되기에 교회 안에서 종종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두려움을 가지고 아버지가 주시는 선물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피상적 이상함을 두려워함몇 주 전에 경건하고 존경받는 한 여성이 교회 앞에 나가서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부엌에 서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녀는 네 명의 자녀, 그러니까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어요. 그 여성은 오렌지 또는 산호색 어떤 기구를 들고 이렇게 외치고 있어요. ‘하나님, 당신이 진짜라면 날 좀 도와주세요!” 만약에 여러분 중에 이 여인이 있다면, 이 예배가 끝나고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싶습니다.”이 여자의 선언 속에 담긴 피상적인 이상함과 무작위성은 피할 길이 없다. 선언이라는 단어도 표면적으로는 이상하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피상적인 이상함이 꼭 잘못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 성경도 표면적으로는, 그러니까 피상적으로는 이상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맹인의 눈에 침으로 범벅을 만든 진흙 혼합물을 비비는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이상하기 그지없다(요 9:6-7). 다리를 저는 사람에게 일어서서 걸으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요 5:8-9). 우물가에서 무작위로 만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는 것도 문화적으로 이상하고 외적으로는 임의적이다(요 4:7-9). 게다가 그녀가 분명 숨기고 싶었을 비공개 세부 사항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도 낯설기 그지없다(요 4:16-19).이런 식의 피상적으로 이상한 사역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의 지상 사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표면적으로 이상한 방식으로 사역하는 사도들과 더불어 다양한 그리스도인이 벌이는 이상한 예들로 가득 차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 이상한 사역도 얼마든지 “예의바르고 질서 있게” 수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표면적 이상함을 볼썽사나움(indecency) 내지 무질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따라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계시적이라고 주장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이상한 사역의 순간에 교회는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명확성과 식별 가능한 정확성에 비추어 분별한다. 앞에서 언급한 “오렌지색 기구”가 등장하는 예언적 단어의 경우가 그러하다. 첫째로,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에 성경과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는 회중에게 그들의 삶에 비추어 그 예언을 저울질하도록 요청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언의 말씀 후에 기도의 자리로 초대했다. 그날 그 예언이 회중 중에 있던 한 특정 여성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했다. 그날 그 여성은 그리스도의 몸인 다른 지체로부터 기도를 받았고, 이 신령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의 두 부분인 영과 육을 모두 세우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 두 명의 용감한 여성뿐 아니라, 그 예언이 가진 피상적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예언을 분별한 회중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역을 경멸하지 말라깨어진 그릇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멸시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분별 블로그(discernment blogs)와 타락 포르노(failure porn) 등의 분위기를 타고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복음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이 주는 죄악된 관성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시애틀에서 소리치는 설교자는 권위 있는 설교를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 되며, 마법사의 지팡이를 들고 무대에 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는 신자로 하여금 은사 추구를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은사의 남용이라는 위험 때문에 은사를 피하는 것도 아니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에 내재된 위험이 있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두려움은 결코 그분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은사를 마치 우리에게서 나온 척하는 우리의 타락된 경향을 겸손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고전 4:7). 우리는 정당한 은사의 남용과 더불어 은사가 자신의 것인 척하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순종의 길에서조차 쉬지 않고 죄를 짓는 죄성(propensity)을 인식한다고, 그것 때문에 그 길에서 아예 멀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이다. 우리는 설교와 예언의 말씀을 시험하도록 부름을 받았지(살전 5:21), 결코 그것을 피하거나 멸시하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살전 5:19-20).운전대 뒤에 서기피상적인 기이함에 대한 두려움과 이상주의라는 우상숭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계시적 은사를 열렬히 추구하도록 우리는 어떻게 우리 백성을 목양할 수 있을까?내가 존경하는 목사인 샘 스톰즈(Sam Storms)는 종종 이렇게 말을 한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규칙은 이거야. ‘다른 사람이 제대로 못하는 건 아예 시도도 하지 말라.’” 영적인 은사를 추구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쉬운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폐쇄하는 데에는 아무런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카리스마가 그냥 활개 치도록 놔두는 데에도 별 다른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한 지체가 되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가진 본질적인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배를 부두에 묶은 채로 두거나, 배가 파도에 요동치는 동안 해안가에 서서 편하게 지켜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방향타 뒤에 서서 배를 운행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그 자리가 내가 서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원제: Superficially Weird and Gloriously Go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은사주의
성령의은사
은사지속론
은사중지론
계시적은사
바른신학과바른실천
당신의 설교를 상처 입은 여성들이 듣고 있습니다
by Kendra Dahl
2022-03-25
나는 스물다섯 살 때 교회로 돌아왔다. 묻어둔 낙태 이야기와 품에 안은 두 살짜리와 함께였다. 내 마음 속 하나님은 지나온 짧은 세월 동안 내가 겪었던 많은 남성들과 비슷했다. 다들 힘에 굶주려 있었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취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그 때문에 생긴 피해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소그룹 모임에서 고백했고, 내 곁에서 여러 남녀가 긍휼과 이해로 나에게 반응해 주었다. 주님은 내가 그 교회에서 복음을 통해 믿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고, 눈물 가득했던 그 순간과 이후 수많은 시간을 통해 나의 회복 과정은 시작되었다. 식을 줄 모르는 뉴스 성 폭력 및 학대 뉴스가 지난 몇 년에 걸쳐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미투 운동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입은 피해 사실을 나눌 수 있게 되었지만, 강간 및 강간미수 피해 여성의 6명에 1명은 아직도 숨어 지내야 한다. 피해 사실이 밝혀질 때 받게 될 가혹한 시선이 가장 큰 이유이다. 몇 주 전[2019년 1월 22일], ‘로 대 웨이드’ 판결[Roe v. Wade, 낙태의 권리를 인정한 미국 연방대법 판례, 1973년 1월 22일에 결정]의 46주년이 되는 날에 뉴욕 주 의회가 [낙태 권리를 확대한] Reproductive Health Act[출산보건법]를 통과시키면서 낙태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많은 이목을 끌었다. 4명 중 1명의 여성이 45세 이전에 낙태를 하는 현실 가운데, 이런 수많은 뉴스는 낙태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들의 아픔을 또다시 건드리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교회에도 이러한 논쟁에 상처를 입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헤드라인과 소셜 미디어 논쟁에서 오르내리는 말들, 곧 아픈 기억과 수치심, 두려움과 역겨움을 되새기게 만드는 단어들과 사진들 때문에 고통 받아야 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매주 교회에서 함께한다. 물론 복음에 치유의 능력이 있지만, 트라우마 경험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양심은 우리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죄하며 우리의 영혼을 지치게 만든다. 우리가 정말 사랑받는 존재인지 의심하게 하고, 우리가 예수님에 속해 있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우리의 피나는 상처를 치유하는 데 복음으로 정말 충분한지 의심하게 한다. 감사하게도 지난 수년을 나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사랑과 돌봄을 받으면서 지낼 수 있었다.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고, 여성을 위한 목회에 지혜와 이해가 깊어 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또한 그들의 놀라운 겸손을 보았다. 이 과정은 항상 완벽하지는 않았다. 때로는 서로를 아프게 하고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교회에서 나와 다른 여성들을 돌보기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1. 말이 가진 힘을 분별하였다트라우마는 사람의 뇌와 몸에 흔적을 남긴다. 특정 단어와 문장이 듣는 이가 아직 준비하지 못한 육체적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뇌의 스트레스 회로를 활성화하면, 사람을 공황 상태에 몰아넣어 더 이상 아무 말도 듣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매춘부’라는 단어가 그 단어로 학대를 받았던 여성에게 가지고 올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자. 또는 성경에 있는 적나라한 성적 표현들이 성범죄 피해 여성들에게 가지고 올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강단에서 낙태를 개탄하는 설교를 할 때,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이 느낄 수치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성경에는 회중을 자극할 수 있는 단어들로 가득하다. 우리 교회 목사님들은 귀에 거슬릴 수 있는 복음의 메시지를 희석하거나, 불쾌할 수도 있는 내용을 그냥 넘겨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안에 있는 여성들에 대해 더 알아가며, 그들의 말이 그 여성들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어느 주일에 우리 교회 한 장로님이 낙태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낙태가 악하다는 것과 우리가 공범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교회가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그는 따뜻한 긍휼과 소망의 말을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는 복음을 선포했고, 복음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조심스럽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 날 예배가 끝 난 후에 그는 나를 불러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 보았고, 앞으로 그가 어떻게 더 긍휼한 설교자로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했다. 줄리어스 김은 그가 쓴 ‘Preaching the Whole Counsel of God’[국내 역간 ‘설교학’]이라는 책에서 남성들에게 더 공감하는 설교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당신의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설교를 통해 드러내십시오. 당연할 수도 있지만, 공감하는 설교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당신은 먼저 목사이고, 그 다음 설교자입니다. … 좋은 설교는 긍휼과 따뜻함과 유연함과 이해심을 언행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159). 이 조언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목회자라고 해도 항상 트라우마로 인해 발생하는 반응을 다 피해가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말이 가진 힘을 분별하기 시작할 때, 회중과 더 깊은 신뢰를 쌓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우리 목사님들의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기 위해 사용하셨던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시 107:20). 2.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별하였다 물론 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들어야 하고 예수님 안에서 용서의 확신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성범죄 피해자들은 가끔 그들에게 벌어진 성범죄에는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거짓말에 빠질 때가 많다. 피해자들이 그들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은 강력하고 필요하다. 그들이 피해자라는 것이 그들의 죄를 없애 주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확신과 함께 그들이 피해 입은 죄에 대해 정의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도 필요하다(살전 4:6, 롬 13:4). 지혜로운 목사는 트라우마와 그 피해자의 복합성을 이해한다. 나는 상담 사역에 집중하시는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 다닐 수 있는 특혜를 누렸었다. 이런 목사님들은 남성과 여성 모두가 겪는 문제에 대해 (예를 들어 ‘이런’ 책이나 ‘이런’ 책을 통해)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3. 진심으로 염려해 주었다나의 교회와 내가 이런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는 내내 나의 목사님들은 진심어린 걱정을 해주었다. 그들이 항상 나의 어려움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의 말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지 못할 때도 있었다. 나는 간혹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고, 올바르게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나의 목사님들은 겸손히 나와 함께 십자가 앞에 서 주셨다. 그들의 돌봄은 강단 위에서 시작되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교회 안 여성들을 자매로 보았고, 우리를 가족으로 환대했다. 어떤 것이 올바른 단어이고 방법인지 모를 때에도, 그들은 이해하고 돌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전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더 잘 파악하고 여성들을 더 잘 돌보기 위하여 교회 안에 지혜로운 여성들의 조언을 구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는 여성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고, 설교를 준비하며 여성들의 필요에 대해 고민하였다. 우리의 가장 크신 목자이신 주님은 당신의 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마 9:36). 그리고 다른 목자들을 세우셔서 당신의 긍휼하심을 이어가게 하셨다. 주님은 당신의 목자들의 말을 통해 나의 마음을 복음으로 향하게 하셨고, 치유를 이어가셨다. 식을 줄 모르는 헤드라인들과 소셜 미디어 논쟁 가운데 있는 요즘, 돌봄이 더욱 절실하다. 하지만 이러한 돌봄이 잘 이루어질 때,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들은 그들의 목자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원제: Pastor, Preach like Hurt Women Are Listening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창호
성폭력
성범죄
미투운동
성범죄피해여성
낙태
설교의힘
말의힘
Z세대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여섯 가지
by Sarah Eekhoff Zylstra
2022-03-20
Z세대의 선두 주자는 올해로 25세가 된다. 이 나이는 이 세대의 선두 집단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아파트를 임대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제 술을 마시고, 투표하고, 차를 렌트하고, 또 교회에 등록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연구에 따르면 Z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성경을 읽을 가능성이 적다. 그들은 또한 대학에 갈 가능성이 더 높고,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또한 틱톡 계정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그들은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세계에 살고 있다. 며칠만 오프라인에서 보내도 그들은 더 이상 친구들이 온라인에서 킥킥거리는 농담을 따라가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Z세대는 이전 세대와 같은 응집력이 없다. 25세의 문화 지표(cultural references)과 성장 경험은 나이가 별 차이 나지 않는 19세의 그것과 현저하게 다르다. 마찬가지로 19세는 14세와 많이 다르다. “Z세대는 기술의 부상과 그로 인한 새로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RUF(Reformed University Fellowship) 사역자 체이스 더즈(Chase Daws)는 말한다.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 훨씬 빨리 온라인 정보로부터 모든 것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도무지 접근할 수 없고 또 따라갈 수 없는 세계를 점유하고 있습니다.”그렇다고 그들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상처투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고 있다. 그들은 삶의 의미나 정의 추구 같은 어려운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동체를 찾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 복음 안에 있다.“항상 효과가 있었던 것은 말씀과 성례전의 사역입니다.” 더즈는 말한다. Z세대도 다르지 않다.그렇다면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이 새로운 세대의 신자들을 환영하고 포용하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할까? TGC는 전국의 캠퍼스 사역자들에게 교회 지도자 모두가 다음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동향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Z세대는 (일종의) 무신론자이다Z세대가 다른 어떤 세대보다 덜 종교적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우리는 그 사실을 일관되게 보고 있습니다.”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교 캠퍼스 아웃리치 지역 책임자 토니 덴트먼(Tony Dentman)이 말한다. “예전에 제가 대학 1학년을 상대할 때는 말이죠. 대부분 학생들이 부모님이, 아니면 부모님 세대 중 누군가가 자신을 교회에 데려갔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2, 3년 동안 시카고의 학생들은 자신에게 신앙의 연결 고리가 되어 준 세대는 부모 세대가 아닌 조부모 세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내 경험에 따르면, 그들 대부분은 자신이 무신론자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이야기하고 내가 그들에게 무신론자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면, 그들은 자신이 불가지론자임을 알게 되지요. 그들은 사실 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관심도 없으며 또 굳이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덴트먼의 말이다. 따라서 Z세대의 성경 읽기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전 세대보다 성경에 익숙하지 않고, 성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성경에 들어 있다고 믿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그들 중 삶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많은 경우에 미디어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공화당이나 보수주의자, 심지어 남부 지역과 관련한 것, 또는 마스크 착용 반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라벨이 매력적이지 않더라도 Z세대는 불의, 정체성, 삶의 의미 같은 깊이 있는 문제에 관해 기꺼이 말하고 싶어 한다. 더즈는 말한다. “어디를 가도 사람은 여전히 사람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 건강한 성공은 어떤 모습인지, 실패를 건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우리가 항상 하던 대화를 그들과도 얼마든지 나눌 수 있습니다.”타락한 세상뿐 아니라 육체, 소명, 창조에 대한 청지기 직분 같은 문제가 가진 심각성에 대한 동의를 포함하는 연결 지점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가리킨다.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에 열려 있습니다.” 텐트먼은 말한다.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이야기할 누군가를 찾고 있다. Z세대는 (더 나은) 공동체를 찾고 있다코로나 이전에도 Z세대는 기록상 가장 외로운 세대였다. 버클리 RUF 캠퍼스 사역자 모건 켄드릭(Morgan Kendrick)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학생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서든 대중문화를 통해서든 관계에 대한 이상주의적인 묘사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레스토랑에서 웃고 있는 친구들 또는 해변에서 춤추는 커플의 이미지를 온라인에 올린다. 켄드릭은 이렇게 말을 잇는다. “댓글을 보면 ‘나, 이거 원해’ 또는 ‘#목표’ 같은 것들로 넘쳐납니다. 이처럼 관계에 대한 깊은 열망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발전시키는지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는 단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교회와 캠퍼스가 바로 이런 단절의 틈을 활용해야 한다. 최근 일리노이 대학교 시카고 캠퍼스의 아웃리치에서는 기독교 색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행사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덴트먼의 말이다. “제 경우, 처음에는 쉽지 않았어요. 이건 뭐, ‘돈을 쓰고 사람을 모으는 데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말이죠.”그러나 아웃리치 사역자들은 팀 켈러가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The Reason for God)의 전편(prequel)을 쓰게 만든 동일한 경향을 보고 있었다. 덴트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전도는 당신도 신이 있음을 가정한다는 사실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 단계가 필요해졌습니다.”이를 위해 캠퍼스 아웃리치는 공동체를 제공했다. 덴트먼을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신입생들이 교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그건 기독교적인 건 아니었지만, 우리가 과거에 했던 그 어떤 사역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기독교에 관한 대화의 문을 열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캠퍼스 아웃리치 담당자나 자원 봉사자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또는 커피 초대를 받아 올 것이다. 말리사 엘리스(Malisa Ellis)는 보스턴에서 크루(Cru)와 함께 똑같은 현상을 보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코로나 이전에 우리는 식사를 선수들이 먹는 장소로 가져갔습니다. 거기에 영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친구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그래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곳은 우리가 사람들을 여행 중에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요즘 그녀는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기꺼이 소그룹에 참여하는 비그리스도인 학생들을 더 많이 만나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 학생들도 온다. 버밍엄에 있는 비교단 리디머 커뮤니티 교회의 대학부 목사인 크레이그 밀라드(Craig Millard)는 이렇게 말한다. “코로나 이전에 우리는 학생들이 소그룹에 참여하도록 하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난해에는 학생들을 모으는 데 문제가 거의 없었습니다. 실제로 코로나 기간 동안 모이는 숫자가 세 배 늘었어요.”Z세대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면 센터에 헌신적인 젊은이들로 구성된 핵심 그룹을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켄드릭은 말한다. 교회 개척과 마찬가지로 신뢰할 수 있는 참여자는 사역에 핵심을 제공하여 사역의 효과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도록 한다. Z세대는 (병적일 정도로) 디지털화되어 있다Z세대에게 오프라인 모임이 없다는 것은 스마트폰의 부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심각한 정신 건강 문제를 야기한다. Z세대는 때때로 아이젠(iGen)이라고도 불리며 항상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세대이다. 엘리스는 말한다. “패닉이 엄청나지요. 모든 것이 다 소셜미디어에 그리고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 대한 이 세대의 의존도가 클수록 불안감은 높아집니다. 그러나 거기서 멀어지면, 세대로부터 이탈된다고 느끼지요. 그들이 지금도 소셜미디어 계정을 삭제했다가 다시 했다가 하면서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문제가 되는 건 모든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일종의 무대와 같다는 점이다. 그 무대에서 Z세대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해체와 관련된 더 깊은 문제의 징후라고 더즈는 말한다.그는 또 말한다. “거기에는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구조(규범, 전통, 또는 기업 정체성)가 아예 없습니다.” 사실상 Z세대가 가진 가장 큰 목표는 선택지의 확장인 것 같다.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에도 노예가 되지 않고 항상 탈출구가 있는 삶입니다.” 더즈의 분석이다. 뒷문이 있다는 게 해방감을 주는 것 같다. 대신 불안정해질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불안해하는 것은 이제 너무도 만연해서, 그렇게 느끼는 사람을 도리어 멋있다고 여긴다. 밀라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괜찮아’라고 말하는 건 이상해요. 그건 마치, ‘네가 지금 불안하거나 화나지도 않는다면, 지금 넌 그럼 뭐하고 있다는 소리야?’라고 말하는 거 같거든요.”밀라드의 분석이다. “젊은이들은 문제가 뭔지 모릅니다. 전사역자가 24시간 금식을 한다고 발표하면, 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소셜미디어 금식이에요.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만 해도 밥을 안 먹는 거에 비하면 온라인 금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그게 그들에게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학생들도 알아요. 끊임없이 온라인에 접속하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지를요. 하지만,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시각과 기준을 만드는 게 온라인입니다.” 최근에 덴트먼의 학생 한 명이 외로움, 길을 잃음, 그리고 자격 없다고 느끼고 있음 등에 관한 성경 구절을 요청했다. 그는 거기가 바로 Z세대가 있는 바로 그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올바른 방향을 찾고 있었다. 기독교가 부적절함, 불안, 우울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최적화” 되었다고 더즈는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굳건히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은 고통과 기쁨 그리고 슬픔과 완전한 실패와 관련해서까지 당신을 준비시킵니다.”그렇다고 기술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술은 동시에 기회도 제공한다. 보스턴에서 크루는 온라인으로 아이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키커트(Kickert)는 온라인에서 사역할 그리스도인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키커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의견 중 많은 부분이 트위터를 통해 형성됩니다. 나이가 더 많고 노련한 사람들이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그 분야에 진출하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그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형성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동시에 그 공간이 주는 독성에서 벗어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사역을 감당하는 건 나이든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학생들은 열성적으로 걸러내는 경향이 있다. 만약에 온라인에서 어느 목사님을 팔로우하는데, 그가 대체로 동의하는 메시지를 작성한다면, 이의를 다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메시지를 본다면, 그건 바로 걸러내는 필터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팔로우를 중단하고 더 이상 듣지 않겠지요. 차라리 그런 온라인에는 발을 담그지 않는 게 나을 지도 모릅니다.” 키커트의 말이다.Z세대는 (열정적으로) 원칙을 따진다 Z세대는 다양성을 환영함, 다른 사람의 신념에 도전하지 않음과 같은 원칙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에 거짓말과 변하는 않는 도덕적 원칙과 같은 원칙에 관해서는 별로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원칙 하나는 말에 행동을 맞추는 것이다. Z세대 다섯 명 중 네 명은 이렇게 말한다. “마초적이거나 인종차별적, 또는 동성애 혐오적이라고 생각되는 회사의 물건을 사지 않고 불매운동을 벌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들의 첫 번째로 꼽는 것은 이것이다. “믿음을 말로 설명하지 말고, 행동으로 말하라.”교회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향한 당신의 봉사 활동은 예수님의 삶을 구현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덴트만의 말이다. “Z세대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에 정말로 민감합니다.”이 사실은 젊은이들이 “옳고 그름에 대해서 자신의 인식과 맞지 않는 것은 더 빨리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키커트는 지적한다. 그들의 기준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으며, 온라인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으로 인해 그 기준은 더 높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데이트 앱을 사용하면 지지 정당, 인종, 지역 및 알코올 소비를 기준으로 잠재적으로 자신과 일치하는 항목을 얼마든지 정렬해서 만날 수 있다. “당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걸러낼 수 있지요. 바로 이런 사실은 그들의 사고방식 다양한 분야로까지 확장됩니다.” 키커트는 말한다.그러나 원칙에 입각한 행동을 하려는 Z세대의 열망은 한편으로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Z세대를 아마도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이 교회로 끌어들이는 촉매제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덴트먼은 말한다. 교회가 대학생들을 초청해 어린이 사역 봉사, 방문자 환대, 홈 그룹 가입, 남자 아침 식사 참석 등의 봉사를 하도록 유도하라는 게 밀라드의 충고이다. “교회가 바른 비전을 제시하고 교회에서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이유를 알려준다면, 그러니까 그런 인사는 외롭고 길을 잃은 사람을 만나 교회가 집과 가족과 같은 장소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Z세대는 기꺼이 자원 봉사 티셔츠를 입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어 합니다.” 덴트먼의 말이다. Z세대는 소통 또는 헌신에 익숙하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긴밀하게 서로 연결된 이 세대가 가장 얼굴 보기가 힘들다. 캠퍼스 사역자들은 Z세대 사역자들에게 명확한 기대치를 설정하라고 조언한다. 그중 하나가 모임 때는 전화기를 끄도록 하는 것이다. 또는 그들에게 연락을 한 경우에 특정 시간 내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라. 그들은 어쩌면 성취하지 못한 일이 초래한 결과를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는 학교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많은 일상을 지워버렸다.밀라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태도를 무례함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당황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Z세대는 탈기독교 사회의 선교사다 바나(Barna)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리스도인 십대의 82퍼센트는 신앙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진지하다. 거의 80퍼센트가 지난 1년 동안 누군가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불신자가 두려움을 느끼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대신 그런 대화는 그들로 하여금 평안함과 고요함을 느끼게 한다. 밀라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정말 흥분되는 일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나누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도전받고, 이전에 금기시되었던 대화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덴트먼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대는 우리의 선교사입니다. 이 학생들은 더 이상 기독교가 주류가 아닌 세상에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전 세대가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성장하고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해외로 갔다면, Z세대는 이제 탈 기독교가 되어가는 미국과 또는 다음 세대를 향해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다가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그게 다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이전 세대가 꿈도 꾸지 못하던 모든 곳으로 다 갈 수 있다. 덴트먼은 말한다. “그들은 지금 가상 세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밖에서 돌아다니는 한 소책자를 나눠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지 않는 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발소에서 전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고요.”그러나 오늘날에는 기독교를 전혀 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웹에서 쉽게 이동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디지털 선교는 이 세대가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에 지금 독특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밀라드는 Z세대 속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왕국 사업을 위한 거대한 기회”를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세대를 정말 사랑합니다. 그들과 함께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볼 때면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습니다.”그는 나이 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그들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심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계속 진리를 말하십시오.”편집자 노트:매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기기의 검색창에 중요한 영적 질문을 입력한다. 그들은 답을 찾고 있다. 희망을 찾고 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진리를 찾고 있다. 우리는 검색창이 중요한 영적 전쟁터라고 믿는다. 당신의 도움으로 우리는 검색하는 사람들이 복음 중심의 희망으로 가득 찬 성경적 답을 온라인에서 무료로 찾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당신, 지금 우리와 함께하겠는가? 원제: 6 Things Christians Should Know About Gen Z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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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기에 에스라에게서 배웁니다
by William Vanderbloemen
2022-03-18
교회와 기독교 그룹을 컨설팅하는 반데어블레멘서치그룹(Vanderbloemen Search Group)의 대표 윌리엄 반데어블레멘(William Vanderbloemen)이 코로나 팬더믹 시기를 보내고 다시 교회의 회복을 기대하는 교회 지도자와 그리스도인을 위해 보내는 격려의 이메일 메시지입니다.William Vanderbloemen <william@vanderbloemen.com>3월 7일 (월) 오전 8:15 안녕하세요.우리가 겪어 온 인생 중 가장 어려운 시기인 지난 몇 년간 교회의 지도자로서 감당하고 있는 사역에 감사드립니다. 이 기간은 확실히 제가 목회하던 그 어떤 때보다도 확실히 더 어려운 시기인 것 같습니다.최근에 저는 “드디어 다시 교회 문을 열게 되니 기쁘군요. 그런데 왜 예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하는 거죠?”라고 말씀하시는 많은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우리와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을 사람들의 한 장면을 저에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에스라서에서 바벨론의 포로들은 마침내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함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차 포로귀환 때 느헤미야와 그의 동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로 돌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렇게 말합니다.그들은 서로 화답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 “주님은 어지시다.” “언제나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주님의 성전 기초가 놓인 것을 본 온 백성도, 목청껏 소리를 높여서 주님을 찬양하였다(스 3:11)그리고 1차 포로귀환의 무리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들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는 예루살렘을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흥분하여 성전을 볼 준비가 되었고 함께 예배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고향에 도착했을 때 에스라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첫 성전을 본 나이 많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가문의 우두머리들은, 성전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크게 통곡하였다. 또 다른 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즐거이 노래하였다(스 3:12).새 성전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옛 성전보다 작았습니다.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도자들은 상처를 받았고 “왜 교회는 예전만큼 크지 않을까? 우리가 예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하나의 작은 장면에 정말 많은 감정이 혼재되어 있지 않습니까?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모일 수 있음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혼돈 이전의 시기와 같지 않다고 흘리는 눈물을 에스라는 이렇게 말합니다.환성과 통곡이 한데 뒤섞여서, 소리가 너무나도 크고 시끄러웠다. 그 소리는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환성인지 통곡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스 3:13).뭔가 익숙하지 않으신가요?저는 그것이 오늘의 우리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에 대한 기쁨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이 뒤섞여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이 이야기와 장면을 묵상해 왔습니다. 최근에야 하나님께서는 제게 정말 특별한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찬양과 눈물은 새 성전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새 성전의 기초 위에 있었습니다. 물론 물리적인 규모는 더 작았습니다. 그러나 새 성전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솔로몬의 성전과 다른 새 성전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곳입니다. 이곳은 성금요일에 휘장이 찢어졌던 곳입니다. 비록 더 작았던 새 성전이었지만 결국 구원 이야기의 핵심이 되었습니다.나는 살아오면서 물건의 기초를 완성품으로 착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현실과 함께 시작하는 새로운 장을 말입니다.지금 낙심하고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초를 놓고 계시며 놀라운 완성품이 곧 나올 것이라는 소식을 여러분이 듣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멀지 않아 성경은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상의 모든 언어로 번역될 것입니다. 대유행의 여파로 세계가 기술을 받아들이게 된 방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의 나라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놀라운 것을 만들고 계시며, 지금 여러분의 수고를 통해 그 일을 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지난 몇 년 동안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저는 우리가 주님 나라의 르네상스 여명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특별한 시대 중 하나로 역사에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것을 위해 견뎌온 것에 대해 박수를 받으실 만합니다. 전염병과 전쟁의 복잡성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제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인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계속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완성품을 위한 토대가 마련되어 가고 있습니다.멋진 일을 기대하며,윌리엄 드림덧붙임_당신의 사역에 위의 구절과 묵상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을 통해 성도들을 격려하는 데 사용해 주십시오. 또 우리가 섬기고 있는 몇몇 교회에서 가져온 자료를 몇 가지 첨부합니다. 에스라의 장면을 통해 기도하면서 마음에 떠올랐던 자료들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당신을 응원하고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Songs of Hope-Mariners Worship, Album▶In Christ, We Overcome-Champion Forest, Sermon ▶Leading At Your Best-Life.Church, Craig Groeschel Leadership Podcast 번역: 장명근
코로나19
교회
교회세우기
전염병
목사님, 슬럼프에 빠지셨나요?
by H.B.Charles Jr.
2022-03-14
슬럼프에 빠진 목회자를 위한 조언: 물에 빠뜨렸지만 다시 떠오른 도끼 이야기의 교훈헌신과 수련의 마음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신참 설교자인 친구에게서 받았다. 이것은 실제적 문제이다. 사역을 하다 보면 영적 생명력이 강할 때가 있지만, 경건 생활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약하며 기도생활이 공허할 때도 있다. 이런 시기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며(잠 4:23) 기독교 사역의 주요 도구이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사역은 헛된 것이다.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지 않으면, 마르다처럼 근심하고 불안하게 될 수 있다(눅 10:38-42). 사역에서 영적 헌신과 수련의 감각을 잃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엘리사에게서 배우는 교훈 열왕기하 6:1-7에서 우리는 엘리사 아래서 공부하는 젊은 설교자들인 “선지자의 아들들”을 만난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새로 세워진 신학교에 합류하여 이제 그 모든 사람을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졌다. 그리하여 엘리사의 허락과 격려로 사람들은 새 기숙사를 짓기 위해 요단강 근처에서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라. 많은 사람들이 숲으로 나가서 사역 훈련을 위한 학교를 짓기 위해 나무를 베고 있었다. 이제 이 건축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 도끼를 빌려 온 한 젊은 선지자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자. 그는 한 그루씩 차례로 내려치며 맹렬히 나무를 베고 있다. 그러다가 도끼를 힘껏 휘두른 다음에 갑자기 손에서 도끼자루가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힘은 그를 거의 넘어뜨릴 정도이다. 그는 그 때 바로 도끼머리가 도끼자루에서 떨어져 강물에 풍덩 빠지는 것을 보게 된다. 강물은 곧 바로 잠잠해졌지만 젊은이의 마음속은 요동하는 바다가 된다. 그는 도끼날, 곧 그를 유능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우리 목회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분명히 일어났던 일이었다. 나에게 영적으로 말라 있어서 먼지만 일어나고 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경고: 이 일이 아직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비웃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12을 암기하십시오.) 그러면 칼날을 잃어버렸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 회복을 위한 다섯 가지 제안이 있다. 1. 정기적으로 자기평가를 하라. 나무를 베고 있던 이 청년은 부주의로 도끼날을 잃었을지 모른다. 나는 도끼머리가 어쩌다가 날아간 버린 것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느슨해졌던 것이다. 조금씩 저절로 느슨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무를 내려치는 데만 바빠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인생이 바로 이런 것이다. 타이어 펑크는 갑작스러운 파열이 원인인 경우는 드물다. 못이 한동안 박혀 있었기에 일어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자기평가를 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확실히 해야 한다. 도끼머리를 제대로 관리한다면 그것을 복구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2. 휴식을 취하라. 이 젊은이가 도끼날을 잃었을 때 그는 내려치기를 멈추었다. 여기서 우리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그가 (도끼날을 잃은 채로) 계속 나무를 내리치고 있었더라면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냥 나무를 두드리기만 했을 것이다. 그냥 소음만 내고,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 진전도 없이 에너지만 허비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내려치기를 멈추었다. 당신도 그리해야 한다. 당신의 도끼날을 잃었다고 느껴진다면 휴식을 취하라. 쉬어라. 기도하라. 하나님과 다시 소통하라. 말씀으로 돌아가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 목적을 다시 확인하라. 첫사랑을 회복하라. 하나님을 위하여 나무 베는 일을 멈추라. 당신이 도끼머리를 잃었다면, 이제부터 실질적인 작업에는 방해만 될 뿐이다. 3. 당신은 청지기일 뿐임을 기억하라.“아이고, 선생님, 이것은 빌려 온 도끼입니다”(왕하 6:5). 이것이 그 선지자 수련생이 자기 도끼날을 잃었을 때 보인 첫 반응이었다. 그는 도끼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자 슬퍼하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빌려온 것이었다. 친절한 이웃이 사용하도록 허락했지만 도끼를 가지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도끼 주인에게 도끼머리를 잃은 것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당신의 은사, 재능, 지위, 관계, 기회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다(고전 6:19-20).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속한 관리자이고 청지기이며 수탁자이다. 그리고 당신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모든 일에 대해 주님께 답해야 할 것이다. 4. 도움을 구하라..“아이고, 선생님!” 도끼를 잃은 것에 대한 그 청년의 탄식은 또한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그가 엘리사가 기적을 행하기를 기대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은 깨달았다. 당신도 그러하다. 당신의 도끼날을 당신 스스로 회복할 수 없다. 주님을 부르라. 당신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을 위해 해달라고 주님께 요청하라. 그리고 주님께서 당신의 삶에 교제와 격려와 책임을 위해 두신 사람들을 부르라. 대적은 당신이 당신 혼자 전투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당신 혼자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삶에 놓아 두셨다. 도움을 구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교만하지 마라. 5. 자신을 점검하라.엘리사는 청년의 외침에 “어디에 빠뜨렸느냐?”(왕하 6:6)라는 질문으로 답했다. 이 질문은 이 젊은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돌아보고, 자신의 발걸음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점검하지 않는 삶은 정말이지 거의 효과가 없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을 점검하라. 당신의 도끼날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그것을 잃어버렸는가? 언제 잃어버렸는가?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도끼머리 이야기는 기적과 함께 끝이 난다. 엘리사가 막대기를 물에 던졌더니, 도끼머리가 떠올랐다. 쇳덩이가 헤엄을 쳤다!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입하셨다.하나님은 당신이 도끼날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똑같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이 글은 저자의 책 On Preaching: Personal and Pastoral Insights for the Preparation and Practice of Preaching(Moody, 2014)의 일부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원제: 5 Tips for the Pastor in a Slump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목회자
영적슬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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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점검
휴식
청지기
도끼머리이야기
자기평가
양 떼를 감독하는 세 가지 원칙
by David Mathis
2022-03-07
Sing! Global 2021 Conference | Nashville성경: 베드로전서 5:1-5주제: 성경적 리더십[“교회의 지도자로 부름 받은 이들은”에서 이어집니다] 다시 베드로전서 5장으로 돌아가서, “목양하다”(shepherd)를 보강하는 동사는 “감독하다”(exercising oversight)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0:28과 신약성경의 다른 네 본문(빌 1:1, 딤전 3:2, 딛 1:7, 벧전 2:25)에서 사용된 명사 “감독”(overseer)의 동사 형태입니다. 이 문맥에서 “감독하다”(Oversee)는 단지 감시하고 관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 떼에 대한 중요한 관찰과 더불어 양 떼에게 위협이 감지될 때 교회가 가시적 주도권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이 바로 이 “살피다” 또는 “감독하다”의 의미입니다. 제 동료 목사 조 리그니(Joe Rigney)는 최근 감독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목사는 양 떼 속에서 봐야 할 것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이제 양 떼를 위해 지혜와 행동하는 용기와 동정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역은 가르침을 통해서 일어나야 한다.”이제 이 구절, 베드로전서 5장의 핵심에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하지 말고 저렇게 하라”며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2∼3절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십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이제 이 명령을 역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지배하려 하지 말고, 모범이 되십시오.우리는 “포악으로” 통치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죄를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 “주인노릇 하지 말라”(not lording it over)로 번역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또 다른 문맥에서는 예수님의 주되심(Lordship)을 의미하는 강력한 동사이기도 합니다(롬 14:9; 딤전 6:15). 또는 한때 죄가 우리에게 행사했던, 따라서 더 이상은 그래서는 안 되는 그런 종류의 주인노릇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롬 6:9, 14, 7:1). 따라서 사도 베드로는 지금 그리스도인 지도자라면 결코 그들이 맡고 있는 사람들 위에서 행사해서는 안 되는 그런 종류의 주인노릇(lordship)을 이 동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눅 22:25).가장 우선하고 가장 중요한 양 떼지배하지 말라는 이러한 금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사도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고후 1:24).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베드로전서 5장에 있는 동사의 강화된 형태는 예수께서 마가복음 10:42에서 사용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성도의 기쁨을 위한 일꾼인 그리스도인 지도자는 그들을 지배하거나 압제하고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양 떼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두 번에 걸쳐서 그들이 양 떼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권면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십시오”(벧전 5:1-2). 위도 아니고, 옆도 아니고, 그렇다고 멀리도 아니고,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목회자는 무엇보다 양 떼가 언제나 가장 먼저입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받아들입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지성과 웅변 또는 실행 기술에서 굳이 월드클래스일 필요는 없습니다. 평균적인 지적 수준에 정상적 사고를 하며,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양 떼에게 본이 되고, 지혜로운 팀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양 떼를 인도하고 먹이면 됩니다. 좋은 목회자라면 누가복음 10:20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르기 마련입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들에게 가장 크고 근본적인 기쁨은 목회자인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인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신 (그리고 하고 계시는) 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목회자는 안정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굳이 남을 감동시키거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으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단지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회중보다 더 수준 높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성숙하고 건강하며 정상적인 기독교의 믿을 만한 모델일 뿐입니다. 겸손해서 행복한이런 그들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은 그들이 겸손하거나 또는 겸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장로와 회중에게 동시에 “모두가 서로서로 겸손의 옷을 입으십시오”(벧전 5:5)라고 촉구합니다. 교회를 위해 겸손으로 옷을 입는 데 앞장서는 목회자를 가진 건강한 교회의 교인은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겸손으로 옷을 입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한 목회자는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에서도 겸손하며 교인이 언제라도 원할 때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양 떼를 초대하고 환영하며 그들의 의견을 경청합니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온 세상 모든 양 떼를 책임지는 게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 있는”(2절) 양 떼, 즉 그들의 책임으로 할당된 특정한 이름과 얼굴에 초점을 맞추며, 그 어떤 교인도 멀리 떨어져 있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인 가운데 함께 거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2. 부끄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부끄러운 이익은 양떼의 이익이 아닌 다른 이익입니다. 돈이 그런 원동력이 될 수도 있고, 권력, 존경, 위안, 또는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쁜 마음”이라는 표현과 관련하여, 히브리서가 양 떼의 기쁨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인 리더십의 역동성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하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히 13:17).이 구절에는 교회와 지도자 사이의 보완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마치 결혼과 같은 비전이 들어 있습니다. 지도자는 교회의 이익을 위해 수고합니다. (그들은 열심히 사역하고, 그건 많은 비용이 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목회자의 기쁨이 교회의 유익이 되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고생하지 않고 열심히 사역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행복하게 사역하기를 원합니다. 교인들도 지도자가 자신을 위해 사역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들이 즐겁게 사역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기쁨을 위해 지도자들을 주십니다. 바로 이 사실이 리더십에 대한 이 세상의 패러다임과 의심을 뒤집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함께 일하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에 튼튼히 서 있습니다.”성도의 유익을 위해서리더십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면, 주님이 주신 지도자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열심을 내겠습니까? 지도자가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성도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때, 그러니까 성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성도에게 가장 깊고 지속적인 기쁨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지도자의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지도자를 향한 성도의 복종은 그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성도와 관계없는 기쁨, 성도가 아닌 다른 기쁨이 아니라, 오로지 성도를 통해서 자신의 기쁨을 찾게 됩니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많은 분야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제시한 목양과 감독과 목회라는 비전의 맥락에서 볼 때 5절에서 말하는 “복종” 그러니까 “장로들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요? 2∼4절에서 말하는, 자원하고 열심이며 또한 모범이 되는 지도자가 “양 떼의 기쁨을 위해서 일한다”는 맥락이 확립되기 전까지, 5절에서 말하는 복종이라는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복종하라는 지도자는 자신이 아니라 양 떼를 먹입니다.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양 떼의 필요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뭔가를 얻는 것은 다 양 떼와 함께 얻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양 떼는 잃고 자신만 얻는, 그런 일은 생길 수 없습니다. 복종하라는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감독과 목사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선결조건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남편 된 이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골 3:19).■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엡 6:4).■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은 여러분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롬 13:1; 벧전 2:13).■ 목회자는 공적 가르침으로 양을 먹이고(고전 14:34),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행 20:28), 양 떼를 돌봅니다(딤전 4:16).목회자는 양 떼의 기쁨을 위해 자기 자신과 시간, 에너지와 관심을 바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도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7에서 하나님은 소극적으로는 목회자에게 책임을 묻고 있으며, 적극적으로는 목회자가 신음이 아니라 기쁨으로, 양 떼의 기쁨을 위하여 사역하게 되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여러분에게 유익과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해지지 않는 기쁨일반적으로 지도자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에게 한마디 하자면, 지도자들이,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지도하는”(살전 5:12) 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 그러니까 그들의 사역이 자신의 이기심을 높이고, 이기적인 특권을 얻으며, 남을 다스리려는 욕망 때문이 아니라, 실상은 오히려 자기 권리와 사사로운 안락함을 제쳐놓고 불편한 일을 도맡아 할 뿐 아니라, 제한된 에너지를 사용하면서까지 여러분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교회나 가정에서 또는 직장에서 공식적인 지도자인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만약에 여러분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아래서) 여러분이 가진 상대적 권위가 자기과시나 자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자기희생의 결과이며,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로 순수하게 그들을 위해서 사역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리더십에서 여러분이 찾는 기쁨은 결코 이기적인 추구나 부끄러운 이득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이 이끄는 사람들의 기쁨에서 찾은 거룩한 만족이란 것을 그들이 확신하게 된다면 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양 떼의 기쁨을 위해서 애쓰는 일꾼으로 보일 때, 그들은 기꺼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가장 큰 희생을 치르는 위대한 목자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합니다. 그런 지도자는 그 과정에서 결코 자신의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그는 다름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기쁨 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히 12:2). 목회자는 교회의 기쁨을 위한 일꾼으로서, 부끄러운 이득이 아니라 부끄러움이 조금도 없는 이득을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교회의 유익 안에서 기쁨이라는 이득을 추구합니다. 지금 당장 누리는 기쁨이자 다가오는 심판 날 부끄러움이 없는 보상에 대한 기쁨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벧전 5:4).3. 억지로 하지 말고, 자진하여 하십시오.교회는 행복한 목회자를 원합니다. 의무감에 사역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음하는 목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목회자는 우리의 기쁨을 위해 기쁨으로 사역하는 목자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벧전 5:2) 섬기는 목회자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수고하는 목회자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사역을 열망하고(딤전 3:1),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히 13:17). 의무감이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열심히,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하게,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나님에 따라”(그리스어: kata theon) 사역하는 목사를 원하십니다.이런 구절은 하나님도 분명히 이런 식으로 사역하고 계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행동하시는, 무한히도 행복한 “복되신 하나님”(딤전 1:11)이십니다. 하나님이 몸소 그렇게 일하시기에 하나님은 목회자도 기쁨으로 사역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활동의 근원은 충만한 기쁨입니다. 의무가 아닌 열심과 즐거움으로 이뤄지는 일을 통해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또한 기꺼이 열심을 다해, 그리고 행복하게 당신의 백성을 돌보십니다. 교회는 이런 사실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신음하는 장로가 아니라 행복한 목회자가 교회를 행복하게 만들고 구주께 영광을 돌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일을 즐기며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유익이 됩니다(히 13:17).모두가 원하는 대표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원하는 목회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나 어떤 팀도 이런 꿈을 완벽하게 구현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완전성으로 인한 마비와 체념이라는 유혹까지도 이겨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무거운 짐을 넓은 어깨에 짊어진, 온전하고 위대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기쁘게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벧전 5:7). 또한 성령이 그들 안에서 살아 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용감하고도 겸손한 다음 발걸음을 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행여나 그것이 잘못된 길이라면 언제라도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목회자가 성령에 의해 진정한 진보를 이뤄가는 현실적인 꿈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울 때, 우리 시대 망가진 리더십 문화의 일부는 우리를 통해서 치유 받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교회만은 의심을 떨쳐 버리고 훌륭한 목사와 교사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결코 일반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 선물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원제: Workers for Your Joy: The Call of Christ to Christian Leade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목회리더십
사역자의자세
성경적리더십
감독
올바른리더십
섬김의리더십
목회자
교회의 지도자로 부름 받은 이들은
by David Mathis
2022-03-06
Sing! Global 2021 Conference | Nashville성경: 베드로전서 5:1-5주제: 성경적 리더십우리는 지금 리더십에 대해서만큼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냉소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단순히 우리 시대의 분위기 탓입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동안, 그리고 아마도 지난 18개월 동안 그 분위기가 더 강해지고 더 선명해진 것은 분명합니다. 리더십의 남용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으며, 특히 실망스러운 그런 이야기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나쁜 지도자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그리고 더 빨리 접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는 신뢰했던 지도자에게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고통과 혼란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로 인한 상처가 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미래의 실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냉소주의는 그런 면에서 아주 현명한 방패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목을 끄는 리더십의 큰 실패는 우리가 가진 불만의 진정한 근원을 숨길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가 내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이 갈망을 리더십에 관한 우리 세대의 왜곡된 인식과 결합해 보십시오. 리더십이 지위와 성취와 특권의 상징이 될 때 (많은 사람들이 리더십을 그렇게 바라보는데) 다른 사람을 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축복하고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지도자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 결과 너무도 당연하게 나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나에 관한 권한을 가지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그러한 혼란 속에서 기독교 신앙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합니다. 리더십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 지도자의 인도를 받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그러니까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인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은 이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아버지 오른편에서 모든 권위를 행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다 인도함을 받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과 몸이 결코 자율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합당한 지도자의 지혜와 공급과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 주셔서 당신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종교개혁을 맞이하기 전까지만 해도 근본적으로 반문화적이었던 진리, 실로 놀라운 진리인 만인제사장직은 오늘날 지역 교회에서 리더십의 본질과 선함을 조명하기 위해서라도 새롭게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진리 속에는 매우 중요한 은혜로운 불평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다스리시고 축복하시는 한 가지 방법은 교회 안에 당신의 지도를 받는 지도자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엡 4:11-12). “목사와 교사”에 대한 언급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에게 매우 개인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에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의 특정 지역 교회의 목사들이 포함됩니다. (목사들이 복수형이라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도들을 만난 적은 물론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목사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신실한 목사는 오늘날 주님의 몸인 교회를 인도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목사들에게 결함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죄는? 유감스럽게도 똑같은 죄인입니다.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심각한 죄를 짓기도 하며, 양 떼를 버리고 떠나기도 하고, 보호해야 할 교인에게 도리어 처참한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슬프게도 그런 목사들이 일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의 이러한 실패를 가지고 예수님이 의도하신 진정한 기독교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지도자는 결코 예수님이 꿈꾸신 리더십 비전의 성취가 아닙니다. 그러한 실패는 하나님의 비전에 미치지 못하거나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사실상 그런 실패를 통해 우리는 교회 내에서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초점을 맞추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지도자, 특히 “지도자 직분” 또는 “교사 직분”을 “목사” 또는 “장로” 또는 “감독자”로 부르셨는데, 신약성경은 이 세 가지 용어를 동일한 직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회중과 지도자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그리스도께서 지역 교회의 리더십에 대해 어떤 비전을 제시했는지 살펴볼 때 이 글이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팀워크: 좋은 친구들이 있는 좋은 사람들저는 목사들이 복수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양 사역에 대해 연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목양 사역은 팀워크라는 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에서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지역교회 목사와 장로가 언급되는 모든 문맥에서 그 명칭은 복수형입니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님으로 홀로 통치하십니다. 그는 머리이시며(엡 1:22; 5:23; 골 1:18), 홀로 대장이십니다. 단일 리더십의 영광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주님의 종인 목사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 팀으로 일하고 번성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바라는 목사는 좋은 친구가 있는 좋은 사람입니다. 좋은 친구란 어떤 사람입니까? 힘들어도 친구에게 틀렸을 때 틀렸다고 말해 주고, 또한 친구가 가진 책임감의 불에 더 불을 붙이고, 사역의 삶을 더 힘들지만 더 가치 있게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독려하는 사람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목자들베드로전서 5:1-5의 주요 동사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고 명령합니다. 동사 ‘목양하다/[양을] 치다’(shepherd)에는 아주 풍부한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목자들(shepherds)이 하는 모든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먹이를 줍니다. 물을 먹입니다. 돌봅니다. 무리를 모읍니다. 보호합니다. 이끕니다. 목초지로 인도합니다. 관리합니다. 기릅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목자의 선이 양의 선과 결부되는, “지배하는 것”와 반대되는, “선한 지휘”라고 부를 수 있는 이미지입니다.길을 준비함목양이라는 개념은 단지 족장 시대, 이집트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왕이 된 양치기 소년이자 장차 오실 위대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예표한 다윗 왕을 포함해서 아주 풍부한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결부된 양을 친다는 개념에는 메시아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물론, 다윗조차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실패를 겪기도 했지만, 다윗 이후로 왕들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5세기가 지나고 선지자 에스겔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양을 먹이지 않고 “스스로를 먹이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에스겔 34:2-4)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백성을 먹였어야 했습니다. 백성을 강하게 하고, 치료하고, 결박하고, 다시 데려오고, 찾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포악으로”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백성은 자신들을 원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드러운 힘과 권함과 자비와 오래 참음과 은혜로 다스리는 그런 목자 또는 왕을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가 내 양 떼를 구하겠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위에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도록 하겠다. 그 목자는 내 종 다윗이다. 그가 친히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겔 34:22-23). 양을 치는 목자에게 먹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목해 보십시오. 선한 목자와 그의 도움 미가는 다윗의 성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가 5:2; 막 2:6)고 예언했습니다. 일생 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1). 주님은 양들에게서 뭔가를 빼앗는 게 아니라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는 선한 목자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복음 말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5, 16, 17). 여기서 “먹이다”(feeding)와 “목양하다”(pastoring)는 동의어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지만 곧 떠나실 것이며,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양을 베드로와 다른 여러 목자들, 곧 사도들뿐 아니라 지역 교회의 장로들, 감독들, 목사들을 통해 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사도행전 20:28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장로들은 또한 감독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아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해야” 합니다(장로=감독=목자).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에서 목자이신 예수님의 두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이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계 7:17)이며, 다른 세 구절에서, “철장을 가지고” 다스릴 것입니다(계 2:27; 12:5; 19:15).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강압적이시거나 가혹하시다는 뜻이 아니라, 쇠막대기로 그들을 대적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양 떼를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이처럼 목양(shepherding)의 이미지와, 먹이고 물을 주며(“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시편 23:2), 보호한다는 행동에는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목양이란 곧 양을 돌보고 온유와 친절과 설득과 오래 참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동시에 보호의 막대기를 들어 양 떼를 여러 가지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 떼를 감독하는 세 가지 원칙”으로 이어집니다]원제: Workers for Your Joy: The Call of Christ to Christian Leade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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