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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관련 설교를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때…
by 고성제
2022-02-28
정치로 나라 전체가 혼란하다. 너무나 혼란해서 모두들 우왕좌왕하고 있다. 나라가 얼마나 쪼개져 있는지, 어디서든 말 한마디 하기도 조심스럽다. 교회의 회중도 둘로 나뉘어 있어서 목사가 현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면 어느 쪽에서든 곧바로 반발한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설교’는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사회가 이렇게 요동치고 있는데 교회는, 목사는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국’만 설교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와도 연관되지 않는 주제’를 ‘아무와도 연관되지 않는 방식’으로 천연덕스럽게 설교만’ 하는 게 가능할까? 그래도 되는 걸까? —고성제,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너는 어느 편’인지 묻는 당신에게’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를 낸 이후 곳곳에서 반응이 있었다. 고맙게도 기독교 언론 매체들이 보도해 주었고, 방송 인터뷰 요청도 여러 차례 받았다. 덕분에 수십 년 만에 고교 동창이 뉴스를 봤노라고 전화해 오기도 했다. 그런 중에는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책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는 초대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 • 아무리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생각해야 할 원리’를 설교해도 교인들은 각자 정치적 자기 색깔에 따라 듣고 싶은 것만 들을 텐데 그런데도 설교해야 할까?• 정치의 ‘정’(政) 자만 들어가도 성도들의 낯빛이 곧바로 변할 텐데, 과연 설교할 수 있을까?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이렇다. 일단 그들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설교자가 좌절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혹시 그 일로 인해 심한 좌절감이 든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내가 설교로서 회중을 지배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투표와 관련하여 자신이 회중의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주려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무엇을 기대하였기에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을까? 만약 자신의 설교를 통해 회중의 정치적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 자체가 무리한 (그리고 무례한) 기대다. 그렇다면 정치 상황 속에서 설교자는 무엇을 설교하고, 또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 행위는 회중의 민주적 의사결정과 모순되지 않아야 할 텐데 과연 정치 관련 설교가 그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필자는 책에서 각 이데올로기에는 그것이 발생한 시대적 배경이 있고, 우리 각자가 그 중 어느 한 편에 서 있는 데에도 이유와 배경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이미 언급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그리고 그 가운데서 겪은 일들과 상처들을 안고 사투를 벌인 끝에 지금 그 자리에 와 있음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설교자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성경적 가치와 원리’를 설교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를 설교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각자는 “자신의 배경과 경험이 남긴 골 깊은 흔적” 위에서, 그 위로 내리는 “성경적 원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자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일지를 분별”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설교로서 그들의 최종적인 선택을 강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조차 하지 않으시는 일을 설교자가 하려는 일이 될 것이다.필자는 설교자가 이런 마음으로 성경적 원리를 설교하고, 결과는 그들의 숙고와 선택에 맡겨두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민주적 관념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들이 그렇게 숙고한 결과 선택한 선택의 총합을 ‘국민적 결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결정하든 그것은 그 때까지 그 사회가 역사적으로 겪어 온 모순이 반영된 결과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결정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그 때까지 겪어 온 모순 속에서 그 사회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비록 아쉬울지 몰라도―최선의 결론이라는 말이다(불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두 번째 질문은 “정치의 ‘정’ 자만 들어가도 성도들의 낯빛이 곧바로 변할 텐데, 과연 설교할 수 있을까?”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그렇지 않은 현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필자의 현장도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교자의 선택은 ‘그러니까 일단 피하자!’가 아니라 ‘그럴지라도 방법을 찾자!’여야 한다. 그래야 고심이 시작되고 기회를 보는 등 대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채택한 대책은 솔직해지자는 것이고,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솔직히 필자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4개월의 연구 기간을 요청했고, 그 기간 동안 성실하게 홀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성도들은 4개월간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고독하게 지내는 담임목사를 보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담임목사가 돌아와서 하는 설교에 대해 존중할 마음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필자는 성급하게 한 번의 설교로 끝내려 하지 않았다. 남들은 정치 관련 설교를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아예 피하거나, 다루어도 설교 중에 5분 정도 슬쩍 화내고 지나가지만 필자는 그런 방식은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고 보고 무려 여덟 번 혹은 열 번의 연속 설교를 했다. (단순히 ‘정치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성경의 원리와 가치를 설교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 설교를 무려 여덟 번이나!?”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서둘지 않고 조금씩 끊어서 먹이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것을 다 이해할 수준이 되는가는 염려하지 마라! 어차피 설교는 모두가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들 가운데 ‘와! 쉽게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네!’라고 느끼는 정도만 해도 무익하지는 않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윽박지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조금씩 끊어 먹이는 설교조차 첫 설교는 양측 모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그 설교를 통해 당신의 입장은 당신이 살아온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과,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생각은 상황이 바뀌면 또 달라질 수 있음을 직시하게 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들의 입장이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님’은 저절로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면 언제나 옳은 입장은 뭘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고,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 주부터 ‘언제나 옳은 하나님의 말씀’ ‘언제나 기준이 되는 그 분의 시각’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인 것이다.대선이 코앞이다. 대선이 끝난 후에도 각종 선거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는 그 때마다 갈등이 심각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는 고심해야 한다.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계속 피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기독교를 현실과 무관한 무익한 종교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이제 그들의 마음을 붙잡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의 책임은 막중하다. 텍스트를 콘텍스트와 연결 지을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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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자녀로서 내가 배운 다섯 가지
by Samuel James
2022-02-22
아버지를 목사로 둔 사람의 삶은 흥미롭다.“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교회 문 앞에 걸린 이 오래된 말은 사실일 뿐 아니라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기도 하다. 목사 자녀(PK)의 눈으로 교회 내부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또한 동시에 목사 자녀처럼 가족과 직업과 사역의 경계가 모호한 삶을 경험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PK의 삶은 놀랍고도 고통스러우며 독특한 여정이다. PK마다 다 이야기가 다르다. 내 아버지의 경우, 십일조 헌금이 없을 때에도 예수님과 가족을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에 항상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전혀 다른 간증거리를 가진 PK 친구들과 또래들을 알고 있다. 사역의 성공을 위한 제단 위에서 희생된 결혼, 외로움을 스승으로 삼고 자란 이야기 등등.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이와 같으시다.PK마다 가진 각각의 이야기는 다 독립된 이야기로 들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PK로 자라면서 배운 다섯 가지 교훈을 이야기하겠다. 1. 목사도 사람이다목회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피로와 유혹과 좌절과 외로움에 덜 취약하다는, 또 다른 사람들보다 회복력에서 더 월등하다는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감정적 긴장 때문에 목회자는 이런 모든 것에 특히 더 취약하다. 우리는 영적 삶과 소명이 목회자처럼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무의식적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모든 복음주의 교회를 향해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목회자에게 아낌없는 휴식의 시간을 주라는 것이다. 목회자가 자리를 비우면 엉망이 되는 교회라면, 이런 사실조차도 목회자의 휴식을 제한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현실이야말로 그 교회의 문화를 진지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이유가 될 뿐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과 가족을 돌보는 것과 교회 사역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느끼는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는 이미 영적 소진 또는 그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길목에 선 것이다. 2. 교회 출석을 잘 한다고 해서 죄와 불신앙에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 출석을 강요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아이들이 반항하는 탕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여기 쉽게 만나는 두 가지 오해가 있다. (1) 아이들이 알아서 정기적으로 교회를 나가면 괜찮지만, (2) 함께 가자고 요구하면 반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오해이다. 이 두 개념 모두 다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는 다양한 교인들이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다 틀렸다.복음주의자들은 복음을 감기 걸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고, 내 처남은 말하곤 한다. 복음이라는 감기에 감염된 교인 주변에 있는 사람은 결국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응급실에 가는 것으로 식이요법과 운동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청소년 사역도 가정 제자훈련을 대신할 수 있다. 만약에 가정에서 기도하기, 성경 읽기,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제자 훈련이 진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보이는 경우, 그건 경계경보가 울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많은 부모들이 열네 살 사춘기 아이가 행여 교회에 반감을 가질까 두려워 교회에 가자며 아침에 억지로 깨우지 않았음을 소심하게 인정한다. 사람의 성숙과 발달이 청소년기에 멈춘다면, 부모의 이런 우려는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십대 시절이 뒤돌아보면 누구나 다 부모가 가정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쉽게 떠올린다. 3. PK가 아버지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다내 아버지가 지금도 후회하는 부분이 바로 이거다. 노련한 성도들은 십대보다 교회 정치와 비즈니스 또는 권징과 같은 실망스러운 사건을 처리하는 데 훨씬 더 능숙하다. 아이들이 교회를 원망하거나 않거나를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아이들이 교회의 아름다움을 미처 맛보기도 전에 교회에서 생기는 각종 사건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를 가진 목회자를 위한 실용적인 팁이 있다. 당신 부부의 갈등을 자녀가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녀가 교회 안의 분쟁과 도덕적 실패를 보고 듣는 것이 그와 비슷하다. 당신 부부가 짓는 모든 죄를 자녀가 모르면 좋겠지만, 전혀 모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이 알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부모는 그 상황을 그냥 방치하기보다는 그 문제를 놓고 자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것이다. 이와 똑같은 논리를 교회 생활의 어두운 면에 적용하라. 될 수 있으면 PK가 교회의 싸움 현장에 근접하지 않도록 노력하라. 일단은 그게 우선이다. 그러나 그들도 알아야 할 때가 된다면, 그냥 방치하지 말고 그들이 제대로 반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4. PK가 가장 큰 자유를 느낄 때는 부모가 그들을 PK로 보지 않을 때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아버지는 내가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기를 원했고, 그리고 그 부르심이 반드시 사역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자녀에게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는 사역자는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자녀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애초 의도와 관계없이 직업과 진정한 영성이 일치해야 한다는, 그러니까 목회만이 진정한 영성을 추구하는 길이라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다 이런 식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걸까? 한 가지는 단지 아버지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PK에게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경우이다. 물론 그게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 목회가 일반 직장보다 더 천국에 가깝다는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5. PK는 신학자 이상의 아버지를 필요로 한다 내가 자라면서 들은 아버지의 설교 중에서 기억하는 건 몇 개 되지 않지만, 밀크셰이크를 먹으며 또 공놀이를 하면서 아버지와 나눈 수십 번의 대화와 추억은 다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한 가장 좋은 추억의 하나는 십 년에 한 번 올까말까 한다는 눈보라가 치던 날, 인디애나 어느 호텔에서 함께 슈퍼볼을 시청한 것이다. 우리가 나중에 함께 참석한 회의도 괜찮았지만, 그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함께한 그날 밤을 완벽하게 기억한다. 찰스 스펄전은 신학생들에게 한 강의에서 그들에게 별다른 특징 없는 사역 기계가 아닌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고 촉구했다. 나는 오늘날 노동자들이 일반적으로 목사들을 멀리하는 한 가지 이유로 그들이 목사들이 보이는 인위적이고 남자답지 못한 방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강단 위에서나, 강단에서 내려가서나 진짜 남자처럼 행동하고 정직하게 자연스럽게 말하는 우리를 본다면, 그들은 우리 곁으로 올 것입니다. 따라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한 어조와 표현의 부족은 우리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큰 결점으로 작용한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매우 조심스럽게 수정해야 한다.” 사역자의 모습이 복음에 투영될 때, 사역은 해를 끼칩니다. 대중의 마음을 얻으려면 우리에게는 경건성과 함께 인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위적으로 꾸민 말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형제들이여, 죽마를 타고 걷지 말고, 여러분의 두 발로 걸어가십시오.이게 ‘노동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면, 목회자의 자녀에게는 더더욱 해당된다. 가령,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치 분야 책은 안 돼’라는 식으로, 어떤 정해 놓은 경계 안에서만 자녀와 소통하려는 목회자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사랑은 관심이다. 자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목사-아버지가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목사 자녀’에게가 아니라 그냥 ‘자녀’에게. 원제: 5 Things I Learned as a Pastor’s Ki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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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 A. Newton
2022-01-30
목회 청빙을 받고 고민할 때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이 따라다닌다. 저명한 18세기 영국 목회자요 신학자인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는 케터링에서 목회할 때 소함에 있는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고서는 그곳으로 떠나야 할지 3년을 고민했다. 그는 그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결국 그 교회는 그 세대에 가장 중요한 교회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결정이 이처럼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옮기지 않았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후회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청빙을 수락할지 심사숙고할 때, 목사는 그 교회를 진지하게 살펴보기 마련이다. 복음을 믿는 교회인가? 강해설교의 진가를 아는 교회인가? 성경에 기초한 리더십을 원하는가? 영적 성장에 관심이 있는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는가? 목회자 가정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청빙을 수락하기 전에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그 교회를 방문하고 대화를 나누어도 큰 그림을 얻기란 쉽지 않다. 충분한 답을 얻지 못한 채 새 임지로 옮겨온 목사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는 순간을 맞아야 할 수도 있다. 사례비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그 교회에 출석하는 것조차 고민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처럼 성도로서 다니고 싶지 않을 교회에 목회자로 가야 할까? 가야 할 때도 있고 가지 말아야 할 때고 있다. 우선, 건강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는 목회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건강한 교회라면 목회자는 그 교회에 오래 머물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목회자가 처음 그 교회의 설교단 앞에 섰을 때는 그 교회도 십중팔구는 그리 건강하고 호감이 가는 교회가 아니었을 것이다. 청빙 후보자 역시 비슷한 도전에 직면한다. 첫눈에 그 교회가 별로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별나 보이는 점들, 이상한 전통들, 모호한 가르침들이 수두룩할 수도 있다. 같은 지역에 있는 다른 교회가 오히려 더 좋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그 교회를 복음 안에서 목양하고, 말씀에 기초한 교회 공동체로 세우고, 복음을 들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청빙을 수락하는 또는 거절하는 당신의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도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기 심사숙고해야 할 다섯 가지 질문이 있다. 1. 청빙을 수락할지 말지를 결정하려는 내 마음에 개인적인 호불호가 작용하고 있는가? 당신을 청빙하는 그 교회가 현재 당신의 목회지와는 다른 모습이어서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그 교회의 어떤 문화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완고함이 목회에 도움이 된 적이 있었던가? 2. 청빙을 거절할 만한 상당한 교리적 문제가 있는가? 그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복음을 믿는가? 그렇다면 청빙을 거절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 교회의 교리적 문제들이 단순히 전임자가 목회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생긴 것은 아닌가? 교회가 다시 건강해지기까지는 적어도 7년에서 10년은 걸릴 것이다. 그렇게 긴 기간 동안 헌신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리 할 생각이 없다면 가지 말라.3. 어려운 일을 겪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는가? 어려움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결국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목회에는 어려움이 상존한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당신에게 이러한 종류의 목회 책임을 감당할 만한 성숙과 훈련이 모자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당신을 잘 아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당신만이 지닌 은사와 재능을 분별해 보라. 목회 경력이 40년이나 되는 나 같은 사람도 목회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넘쳐난다. 4. 그 교회 성도들이 너무나 훈련이 부족하고 미성숙하고 건강하지 못해, 당신이 이를 감당할 수 없는가? 그 교회를 건강하게 회복시키기까지 당신이 바쳐야 하는 장기간의 헌신이 당신 아내와 자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렇다면, 청빙을 수락하고 나중에 갑작스럽게 개인적인 이유로 사임하는 것보다는 지금 청빙을 거절하는 것이 더욱 신의 있는 결정일 것이다. 당신의 현재 목회지이든 청빙한 그 교회이든, 짧은 기간만 목회하는 것으로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회복시키기가 극히 어렵다. 마지못해 청빙을 수락하기보다 지금 거절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가장 좋은 결정이다. 5.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는가?오랜 기간에 걸쳐 성숙함에 이른 건강한 교회들이 우리 주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신이 그런 교회 중 하나로부터 청빙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목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용을 계산해 보고, 주님께 의지하면서 합당한 결정을 내리라.이 사람을 보라18세기 중반 스물네 살 젊은 목사 로버트 홀(Robert Hall)은 영국 안스비에 위치한 작은 침례교회의 부름을 받았다. “가난하고 수수한 사람들” 스물여섯 명 남짓이 모이는 교회였다. 과연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홀은 그 일에 자신을 드렸다. 권력 투쟁이 곧 뒤따랐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기부를 했는데, 그 기부금의 관리인이 홀 목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기부금 관리인은 6년에 걸쳐 홀 목사와 회중이 본당과 목사관을 쓰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홀 목사와 성도들은 각 가정을 돌며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는데, 홀 목사가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양 떼를 보살폈지만 그들이 모임을 갖는 집 밖에서는 사람들이 조롱과 야유를 퍼붓곤 했다. 마침내 그들은 예배당과 목사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홀은 이후 39년에 걸친 목회에 자신의 남은 삶을 드렸다. 하지만 삶은 쉽지 않았다. 홀은 한해에 15파운드에 불과한 사례비와 18에이커의 땅에서 농사지은 것에서 나오는 먹거리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아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정신질환을 겪었고 열넷이나 되는 자녀를 보살피는 일은 오로지 홀 목사의 몫이었다. 확신 있는 태도로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던 홀 목사는 극단적 칼뱅주의에 빠져있던 동료 침례교 목사들의 비판을 받기 일쑤였다. 그의 전 삶에 걸쳐 홀 목사는 보잘것없는 사례비를 받으며 아무도 모르는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를 목회했다. 그러나 홀 목사는 현대 선교 운동을 이끈 핵심 인물들에게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되었다.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젊은 시절 20마일을 걸어 홀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가곤 했고 그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홀 목사는 앤드류 풀러를 지도했고, 케터링에서 있었던 풀러의 목사 위임식에서 설교했다. 홀 목사의 신학은 풀러의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존 라인랜드 주니어(John Ryland Jr.)는 홀 목사와 존 뉴턴(John Newton)을 자신의 중요한 두 스승으로 불렀다. 홀의 아들인 로버트 홀 주니어(Robert Hall Jr.)는 아버지 곁에서 배운 신학과 목회를 기반으로 케임브리지에서 놀라운 목회를 했다. 분별하고 결정하라로버트 홀 목사가 평신도였다면 안스비의 그 교회에 출석하고 싶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의 삶 말미에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교회에서 목회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무명에 가까운 그의 목회는 결국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그야말로 무명하지 않은 목회가 되었다. 자신이 평신도라면 다니고 싶지 않았을 어떤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는가? 분별력, 겸손, 지혜로운 결단,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분명히 답을 얻게 될 것이다.원제: Should You Attend a Church You Would Never Atte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목회론
목회청빙
건강한교회
로버트홀
청빙수락의기준
교인이 떠날 때, 목회자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것인가
by Phil A. Newton
2022-01-04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한 면접을 마치고 내가 속한 노회의 목회자들이 한마디씩 조언을 했다. 항상 말씀을 전하세요. 거룩한 사람이 되세요. 그런데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교인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세요.” 아무도 그의 말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았지만, 순간 성령님이 내 마음에 경종을 울려 주셨다. 그의 말이 드러낸 것은 그의 삶 깊숙이 파고든 원초적 분노와 상처였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목회 사역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어렸고 영적 성숙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담임목사로 섬긴 적도 물론 없었지만, 사람을 마음에 품지 않고는 사람을 보살필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하나의 패러다임이 모든 교회와 목사에게 다 맞을 수는 없다. 교리와 목회 방법과 변화와 맞물려 성격과 관심사와 스타일이 교회 분위기를 불안정하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러나 주님은 각 사람에게 적절한 처방을 내리신다. 우리는 그 처방을 지역 교회에서 조화와 신실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선한 싸움을 상기시키기에 풍부할 정도로 성경 속에서 자주 만나는 단어, “서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신실하게 사랑하고, 받아들이고, 격려하고, 친절히 대하라는 명을 받았다(요 13:35; 롬 15:7; 살전 5:11; 엡 4:32).이런 가운데 마귀는 긴장, 부조화, 무관심, 불만 같은 수많은 불화살을 쏘아 댄다(엡 6:10-20). 게다가 여기에 세상의 영향력을 더해 보자. 차고 넘치는 소셜 미디어 정보는 언제나 다른 교회가 더 좋아보이게 만들고, 교회를 낮추어 보는 태도, 심지어는 목회 사역을 낮추어 보는 태도까지 유발하며, “온라인 교회”라는 위험한 대안을 조장할 뿐 아니라 낙담의 근원이 된다.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자들에게 양 떼를 치라고 명하신다(행 20:28, 벧전 5:2). 그는 “목양”에 대한 어떤 주의 사항을 추가하지 않으셨다. 지난 수년 동안 나는 교인들이 떠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경험했다. 그중 일부는 신학이 달라서, 또 누구는 단순히 친구가 나갔다는 이유로 떠났다. 근처 다른 교회가 좋아서 떠나간 사람도 있다. 직업을 바꾸면서 이사 간 사람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하나같이 그들은 다 내가 사랑해서 섬겼고 교제하며 함께 웃고 울었던 사람들이었다. 어떤 때에는 교인들이 연달아서 떠나는 속도가 너무 빠를 때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떠나기도 했다. 이렇게 얼마나 머물지 모르는 교인을 위해서 어떻게 내 마음을 계속해서 줄 수 있을까?균형 회복교인이 떠날 때, 목사는 원심 분리기 속에서 빙빙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어지럽다. 궁금하다. 아프다. 길을 잃는다. 그래도 예수님은 당신의 피로 사신 양 떼를 치라 하신다(행 20:28). 목자는 양 떼와 긴밀하게 접촉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양 떼에게 노출해야 한다. 가까이 있지 않고서는 양 떼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 그러나 가까이 있다는 것은 또 다시 상처 입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취약성이 목회 사역에 늘 따라다닌다. 그렇다. 당신은 또 다시 상처 입을 것이다. 때로는 당신을 떠나는 사람이 가장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나도 그런 아픔을 겪어 알고 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시다. 어떻게 해야 균형을 되찾을 수 있을까? 사역이 성공해서 기뻐하는 칠십 인에게 예수님은 그 성공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사역에서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기쁨을 찾으라(눅 10:17-20)는 말씀이시다. 당신의 기쁨이 예수님께 고정되어 있기만 하다면 양 떼의 변덕이 아무리 큰 상처를 주더라도 그 상처는 맡은 양 떼를 계속 목양하려는 당신의 용기를 결코 꺾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언제나 뜨겁게 유지하라. 낙심하지 말라우리는 사역에다가 소유격 인칭 대명사 “나의”를 붙일 때가 많다. 하지만 실제로 사역은 우리 주님의 것이다. 이탈과 반대의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사역을 이야기할 때 주님께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사역을 만든 건 바울이 아니다. 예수님이셨다. 그런 이유로 바울은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하노니”(고후 4:1-6)라고 쓸 수 있었다.어려움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았기에, 바울은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바울에게 사역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성과, 심지어는 자신의 위안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것이었다(아마도 바울은 이런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을 것이다). 바울에게 사역이란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전하는 것이었으며, 그 다음에는 당신의 구속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역을 통해서 말씀을 받은 사람이 떠나는 경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의 삶을 투자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이탈을 통해 우리 안에서 성취해야 할 일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언젠가 있었던 생각지 못한 급작스러운 교인의 떠나감은 내가 사실상 주님의 인정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하게 교인들의 인정을 원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목회라는 마라톤을 견디기 위해 내게는 급진적이고 내적인 기질의 변화가 필요했다. 주님은 내가 주님께 더욱 의탁하게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르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주님은 표면 아래 숨어 있는 내가 보지 못하는 교만의 흔적까지도 벗겨낼 수 있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양들에게 더욱 충실하게 공감하는 목자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통을 명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다.사역은 주님의 것이다. 그러니 낙담하지 말라. 선한 목자께서 당신을 아신다. 맡겨진 양 때를 돌보라떠나지 않은 교인에게는 세심한 목양이 필요하다. 떠난 교인들 때문에 쉽게 집중력을 잃을 수도 있다. 마음이 마비되고 떠나간 사람들에게 몰두하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목회자의 기쁨까지 놓칠 수 있다. 교인들도 집중을 잃어버린 목사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 무리가 떠날 때 예수님은 눈도 깜박하지 않으셨다(요한복음 6장). 떠나가는 제자들의 숫자까지 세면서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의 주권적인 목적에만 의지하셨다(요 6:65). 망설임도 불평도 하지 않고 오로지 남은 자들을 보살피셨다.그렇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을 최소화하자고 말하는 건 아니다. 몇 년 전, 삼 년을 사역하는 사이에 약 65퍼센트의 교인이 떠나갔다.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과정에서 좋은 교훈을 얻었고, 남은 교인들과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남은 조각들을 한데 모아 앞으로 나아갔고,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강해졌고, 사역에 대해 겸손해졌고, 주님의 지혜로운 섭리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목회하는 법, 사람들을 섬기는 법,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계속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허물을 용서하라우리가 교인들에게 남의 허물을 빨리 용서하라고 권면하는 것처럼, 우리도 허물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잠 19:11). 의도적이든 아니든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비통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당신은 얼마든지 그들이 당신에게 지은 죄를 덮을 수 있다(벧전 4:8).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기도하라. 저주 섞인 간청이 아니라 은혜의 마음으로 기도하라.나는 교회를 개척한 날 가족과 함께 예배에 참석했던 한 형제와 가까워졌다. 그는 여러 교인들에게 리더이자 격려하는 사람, 친구가 되었다. 우리가 네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가장 먼저 병원을 찾은 교인이기도 했다. 어느 날 그가 교회를 떠나겠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성공하는 사람들 주변에 있고 싶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목회는 성공과 거리가 머네요. 그래서 떠나야겠습니다.” 그게 다였다. 그와 함께한 십 년의 세월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고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그리고 그후로 몇 년에 걸쳐서 그의 가족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도 내게 다가와 용기를 주었다. 사실상 그는 떠났어야 할 성경적 이유가 없었지만, 그는 떠났던 것이었다. 이런 일을 통해 나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은혜와 온유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이러한 일은 그 어떤 것도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가장 깊은 만족을 찾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을 섬김으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지만, 주님이 줄 수 있는 기쁨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된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해야 하는 것을 교인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이다. 양 떼를 목양하라. 양 떼를 마음에 간직하라. 그러는 동안에도 예수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라. 원제: When Members Leave: How Pastors Can Guard Their Hear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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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
교회분열
목회자의기쁨
이탈교인용서하기
성탄 설교에서 피해야 할 여섯 가지
by Steve Mathewson
2021-12-18
설교자들에게는 대림절이나 성탄절이 가장 멋진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선포하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지만, 활용할 만한 설교 본문은 부족하기만 하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성탄 기사가 아예 없다. 더구나 마태가 기록한 성탄 기사들 가운데 적어도 두 개는 독자들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하나는 따분하게만 느껴지고(마 1:1-17), 다른 하나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마 2:16-18). 그런데 또 다른 난관이 설교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성탄 이야기를 전하는 복음서 기사들이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주해들과 전설이 가미된 설명들로 덧씌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R. T. 프랑스(R. T. France)는 이렇게 풍자한다.많은 사람들이 성탄 연극을 통해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인지하게 된다. 수건을 둘둘 말아 쓰고 있는 마가복음의 목자들과 마태복음의 동방박사들(왕으로 신분 상승)이 어깨를 맞댄 채 나란히 서 있고, 무뚝뚝한 여관 주인 부부와 반짝이 후광을 붙인 아기 천사들이 한자리에 있다. 이런 등장인물 칵테일에 한겨울 눈 덮인 풍경과 발갛게 빛나는 마구간과 미소 짓고 있는 황소와 당나귀를 그려 넣은 크리스마스카드까지 보태면, 우리의 감성을 촉촉이 적혀 주는 현대 크리스마스의 주재료는 다 모이게 된다. 그리고 나도 누구 못지않게 이걸 즐긴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설교하는 누군가가 작은 디테일 하나라도 과장하거나, 아니면 그걸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기만 하면 투덜대는 심술쟁이가 아니다. 하지만, R. T. 프랑스가 그랬듯이, 내가 보기에도 복음서의 탄생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위태롭기만 하다. 그런 작은 오해들이 쌓이면서 복음서 기자들이 진짜 강조하는 것들이 왜곡된다. 정반대의 문제도 있다. 설교자들이 수년 동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설교하다 보니 참신한 통찰에 굶주려 있다. 그래서 오래된 오해들 만큼이나 성탄 이야기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새로운 해석들을 덥석 받아들이고 만다. 피해야 할 실수 여섯 가지이러한 우려의 마음을 담아,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설교할 때 피해야 할 여섯 가지 실수를 제시하고자 한다. 모쪼록 이 글이 탄생 이야기를 선포할 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청중의 (그리고 당신의) 사랑과 애정이 드높아지기를 바란다. 1. 마태복음 1장의 계보를 건너뛰는 실수 우리가 예수님의 계보를 건너뛰다시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헨델이 ‘메시아’에서 이 계보를 담아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이 계보를 잠깐 훑어보기만 해도 파악된다. 이름들이 생명 없는 해골처럼 거기 놓여 있지만, 예수님의 계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몇 이름이 지면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르호보암, 아비야, 요람, 아하스, 므낫세,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이 그렇다. 이 인물들이 말하는 진실은 이것이다. 예수님의 가계도에는 역기능 가정이 적지 않다. 이런 가계에서 예수님이 나셨다. 그래서 천사가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고 말할 때, 이 메시지는 명백히 예수님의 계보를 되돌아보게 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성 넷(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포함하면 다섯)이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유대 족보에 여성이 등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구나 이 여성들은 뜻밖의 인물들이다. 사라나 리브가도 아니고, 다말과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라니? 우선 넷 다 성적 부도덕과 관련된 과거가 있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유혹했고, 라합은 창녀였다. 룻은 모압 여자인데, 이 모압 족속은 근친상간에서 기원한다(창 19장).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 왕과 불륜을 저질러 아이까지 낳은 여자였다. 네 여성 모두 이방인과 연결되어 있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사람이었다. 룻은 모압 사람이었다. “우리아의 아내”의 남편 곧 “우리아”는 헷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을 관통하는 주제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마 1:21)의 확장이다. 곧 경건한 유대인의 남은 자들(마 3:9, 8:11, 28:19)에 이방인들이 포함된다는 주제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탄생 이야기를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한다면, 마태복음 1:1-17을 포함해야 한다. 어떻게 은혜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다말(과 유다), 라합, 룻, 밧세바(와 다윗), 그리고 마리아 이야기를 시리즈로 설교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2. 여관에 빈 방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나셨다고 단언하는 실수무엇보다도,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머물면서 겪은 문제는 묵을 ‘여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은 헬라어 카탈뤼마(Katalyma)를 [현대적 의미의 숙박업소를 연상케 하는] “여관”(눅 2:7)으로 번역하지만, 신약성경에서 모두 세 번 등장하는 이 단어가 쓰인 나머지 두 곳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했던 가정집 객실(막 14:14, 눅 22:11)을 가리킨다.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는 이렇게 올바른 질문을 던진다. “누가복음의 끝 부분에서 카탈뤼마라는 단어가 개인 집에 딸린 손님방을 의미한다면(22:11), 같은 복음서의 초반부에서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요셉이 베들레헴에서 지인의 집에 묵을 생각이었는데, 마침 그 방을 다른 손님이 먼저 차지하고 있었다면, 요셉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었을까?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고 보고하는 것으로 봐서, 예수님은 요셉이 묵으려고 찾아갔던 가정집에 딸린 마구간이나, 아니면 심지어 지하실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대안도 있었다. 손님이 묵을 방이 이미 찼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족 방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있다. 겨울에 가축을 집 안에 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가축이 온기를 제공해 주기도 했고, 또 가축을 도둑맞을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하실이든 마구간이든, 가축도 함께 있는 그런 가족 방이든, 어떤 시나리오든 예수님이 태어나신 누추한 환경을 반영하기는 마찬가지이니, 예수님이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따지는 것이 괜한 헛소동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부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성탄 이야기의 초점이 사실이 아닌 엉뚱한 이야기―거절당한 이야기, 가혹한 여관주인 이야기, 여관방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생각하지 못한 무능한 남편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성탄 이야기는 예수님의 출생의 “정상성”으로도 충분히 놀랍다. 만왕의 왕께서 누추한 환경에서 평범하게 태어나셨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이야기다. 3. 목자들에게 과도한 성격을 부여하는 실수예수님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이 목자들(눅 2:8-20)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법적 소송에서 증언할 자격이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의 멸시와 경멸을 받았다고 목자들을 그리는 것은 정확한 묘사일까? 좋은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죄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까?대럴 보크(Darrell Bock)는 이러한 이해에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 이러한 증인 자격에 대한 랍비 규정은 후대에, 더 정확히는 5세기에 생겼다. 둘째, 성경에 나오는 목자 모티프는 대부분 긍정적이다(시 23; 눅 15:4; 막 6:34; 마 18:12; 요 10; 엡 4:11; 히 13:20; 벧전 2:25).물론 목자들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하층 경제 계급을 대표한다. 따라서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 메시지에 반응하는 낮고 겸손한 사람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다.설교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유월절에 도살될 어린 양들을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진 아이러니를 강조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궁극적인 유월절 어린양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정말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연결을 애써 강조하려고 무리하지 않는다. 어찌됐든,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다른 목자들도 모두 유월절 희생제물로 바쳐지게 될 어린 양을 돌보고 있었을 터였다. 티모시 라니악(Timothy Laniak)은 더 유망한 강조점을 몇 가지 지적한다. 첫째, 목자들을 선택한 것은 미가 5장에 예언된 ‘목자 통치자’로 태어난 갓난아이의 정체성을 세심하게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둘째, “목자들이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눅 2:8)라는 누가의 표현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속의 ‘새벽’을 상징적으로 기다리는”(눅 1:68, 2:38; 사 63:4)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4. 동방박사들을 현자로 표현하는 실수여기서 문제는 동방박사들은 현자라는 의미에서 “현명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왕도 아니었다. 또 꼭 세 명이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 예물이 세 가지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었으리라 가정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우리가 부르는 크리스마스캐럴 목록에서 “동방박사 세 사람”(We Three Kings)을 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동방박사들이 꿈, 점성술, 마술, 미래 예언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게 되면 우리가 동방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이 갖고 있는 아이러니와 경이로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태복음의 독자들은 동방박사들을 부정적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님을 찾을 것이라는 의미로 “현자들은 여전히 그분을 찾습니다” 같은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언어유희는 자제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현자(지혜 학도)가 아니었다. 그들의 지혜가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한 것이 아니었다. 마태복음에 들어 있는 두 부류의 아이러니를 조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마태는 제한된 지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경배하고자 했던 동방박사들의 열심과, 아이러니하게도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무관심이나 적대감으로 일관한 유대 지도자 집단 및 헤롯 왕궁을 대조하고 있다.5. 마태복음 2:16-18이 보고하는 무고한 아이들의 학살 이야기를 회피하는 실수많은 목회자들이 그렇게 하듯이 나도 수년 동안 이 이야기를 설교하지 않고 건너뛰었다. 그러다가 17년 전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설교했다. 그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생각하게 되는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2012년 12월 16일 코네티컷 뉴타운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이틀 뒤에 나는 또 이 설교를 했다. 그렇다, 나는 구주의 영광스러운 탄생으로 인해 베들레헴에서 남자 아기들이 잔인하게 도륙되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기록으로 보면,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를 고려할 때 사상자는 20명 남짓이었을 것이다.)마태는 예레미야 31:15을 인용하면서 베들레헴의 이 유아 살해는 라마에서 여인들이 슬퍼하며 통곡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성취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로써 그는 이 사건을 끔찍한 일로만 대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강조한다. 이것은 훌륭한 전략으로 판명된다. 마태는 예레미야 31:15을 인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예레미야 31:16-17로 나아가서 나머지 이야기를 듣게 한다.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상황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해 내시고 회복해 주실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태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녀를 위하여 울부짖은 어머니들에게 약속해 주신 희망은 곧 자녀를 잃은 베들레헴의 어머니들과 끔찍한 악과 불의에 직면한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희망임을 우리가 이해하길 바라고 있다. 6. 마가복음의 서문은 ‘크리스마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실수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성탄 이야기를 설교한 다음에 요한복음의 장엄한 서문으로 눈을 돌리는 목사들이 있다. 그렇다. 요한복음 1:1-18은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도 그러하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성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마가복음의 서문은 이사야가 예언한 “새 출애굽”을 수행하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오심을 강조한다. 마가복음은 이사야 40:3을 중심으로 시작하는데, 이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앗시리아에서 건져내시도록 대로를 준비하라고 촉구한다. 이 본문에 앞서 이사야 11:15-16은 이러한 대로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실 때 마련해 주셨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이사야의 새로운 출애굽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이 사명의 연속선상에서 사명을 맡으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비추어, 마가복음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으로 서문을 마친다.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속박에서 건져내시고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다(막 1:14-15)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서문에는 성탄과 함께해야 할 모든 의미가 담겨 있다. 설교자의 목표 이 여섯 가지 실수를 피하자는 것은 지적 허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실수를 바로잡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듣는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에서 복음서가 전하는 이 이야기의 경이로움에 더욱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중심에 있는 복음의 영광을 다시금 드러내는 복음서의 본문을 정확하고 분명하며 설득력 있게 주해하여 설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설교는 우리의 설교를 듣는 회중의 애정을 드높이고 그들이 왕이신 예수님을 향한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박차를 가할 것이다. 찬송작가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rentiss, 1818-1878)는 간결하게 이렇게 썼다.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우리가 예수님이 나신 이야기를 선포할 때 우리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가장 멋진 시간이 될 것이다. 원제: 6 Ways Not to Preach the Birth of Jes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마가복음서문
동방박사
예수의계보
성탄
성육신
유아학살
목사-신학자가 필요하다
by Kevin DeYoung
2021-12-17
글을 시작하면서 먼저 주의사항을 하나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목사-신학자(pastor-theologian)는 한 발은 학계에 담그고 또 한 발은 교회에 담그고 있는 절반의 학자, 절반의 목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뉴스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논평하는 목사-전문가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기고하고, 책을 내고,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목사-작가도 아니다. 이들도 목사-신학자의 한 유형이 될 수는 있다. 이들도 귀하고 또 필요하다. 나 자신도 학자로, 전문가로,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목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 글에서 목사-신학자라고 할 때에 내 머리 속에 있는 개념은 더 단순하고 더 성경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내가 교회에 목사-신학자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는 신학적으로 바른 진리를 선포하고, 신학적 오류를 분별하며, 성도들이 바른 진리를 알고 전하도록 가르칠 수 있는 목사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성경적 비전이런 목회 비전은 개혁주의 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몽상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목회자의 리더십이다. 우선 ‘목사’는 ‘목자’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목자는 용기 있는 열정과 부드러운 권위를 가지고 양들을 책임지는 이다. 목자의 일은 양들을 보호하고, 먹이고, 훈련하고,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인도하는 것이다(시 23:1-3, 요 10:1-15). 장로/감독에게 부여된 책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나운 이리 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말씀이 변질되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행 20:17-31). 이것이 바로 목사-신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바울처럼 2년 동안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칠 수 있고(행 19:9), 3년간 매일 밤 교회 지도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할 수 있으려면(행 20:31) 제대로 훈련 받은 깊이 있는 신학적 목사가 되어야 한다.목회서신의 가르침도 이를 말하고 있다. 디모데와 디도를 향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목회란 그저 따뜻한 공감과 도덕적 교훈을 제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목회의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가르친다(딤전 1:5). 이 사랑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사랑은 헛된 말에 빠져서 진리를 떠나 믿음에서 파선하는 사람들을 경고하는 것이다(딤전 1:6, 19). 또한 이 사랑은 가르치기를 잘하는 것이다(딤전 3:2). 이는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훈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딤전 4:6). 그리고 성경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딤전 4:13). 또한 바른 교훈과 바른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진리를 고수하는 일이기도 하다(딤전 6:2-3). 목사-신학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지켜내는 이다(딤전 6:20). 신학적 통찰교회 안에서 목사-신학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나무만 바라보지 않고, 좀 더 높은 관점에서 숲을 바라보면 목회 사역이 필연적으로 신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셨고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계시를 이해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성경에 있는 모든 내용을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게도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다. 그러나 수많은 신학 책들과 논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적어도 우리는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알려고 하는 학문이며, 목사는 성도를 그 방향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2) 신약성경은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를 지키라고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진리가 있다. 거짓 가르침을 분별해야 한다. 바른 교훈을 가르치고 보호해야 한다. 이 일은 신학교에 있는 교수들만의 사명이 아니다. 이 일은 사도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열정을 품으셨던 우리 모두의 일이다. 주님은 거짓 교사를 용납하지 않고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다(계 2:2, 6).(3) 신약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은 신학적 토대 위에 있다. 많은 바울서신이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초반부에는 교리를 가르치고, 후반부에서는 순종을 촉구하는 윤리가 제시된다. 둘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로마서 1-11장에 나타나 있는 방대한 신학적 교리는 로마서 12장에서 우리 삶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부르심으로 연결된다. 그렇다. 바른 교리가 바른 윤리로 연결된다. 바른 윤리가 없이는 바른 교리를 가질 수 없다. 제자도는 이러한 바른 교리에 달려 있다. (4) 신학적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더욱 온전하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한다. 진리들은 단순하면서도 경이롭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으로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라고 찬양할 때에 우리 주님은 분명히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왜 이 진리를 믿어야 하는지 알면서 찬양하고 기도하면 주님은 더욱 기뻐하실 것이다.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만 알아도 이렇게 기쁜데,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취를 깨달을 때에는 얼마나 더 기쁨이 충만하겠는가? 또한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앞에 경탄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더 기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신학적 가르침은, 우리의 머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을 키우고 더 나은 시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라보며 그분이 하신 일을 맛보게 한다. 결론당신이 교회의 목사-신학자가 되는 비전을 품었다면, 나는 이렇게 권면하고자 한다. 목사-신학자가 되려고 학위를 받을 필요는 없다(물론, 이러한 전문 신학 훈련도 중요하다). 대중적 지식인이나 존경받는 학자가 될 필요도 없다(물론, 이런 사람도 필요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하다. 그렇지만 실행하기는 말만큼 그리 쉽지 않다. 우리는 (독서를 통하여) 머리의 습관을 함양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성장하고, 기꺼이 나의 잘못을 고치고, 우리가 확신하는 것들에 대하여 용기를 가짐으로써) 가슴의 습관을 함양해야 한다. (최선의 것을 위하여서 현상의 선에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시간의 습관을 함양해야 한다. 모든 교회가 이런 목사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교회에 정말 절실하게 필요한 목사는 바로 이런 목사-신학자이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이런 목사가 되어야 한다. 원제: Why We Need Pastor-Theologians in the Church출처: www.9marks.org 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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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비전
목회서신
미래 목회자 양성은 명령이다
by Steve Meister
2021-12-15
오늘날 그리스도인 열 명에게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열 명 모두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좋은 목회자를 원하지만, 교회가 미래 목회자를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매우 적다. 19세기에 서부 개척 시대가 열리고 전문인을 육성하는 대학원 제도가 발전하면서, 미국 교회들도 이전까지의 사적인 목회 견습생 훈련 방식에서 벗어나 미래 목회자들을 길러내는 신학대학원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성경대학과 신학원은 이후 교회에 셀 수 없이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래 세대의 목회자를 준비하는 일이 지역 교회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오로지 목회자 교육 기관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현실이다. 그런데 성경은 말한다. 미래의 목회자를 길러내는 책임은 현재의 목회자에게 있다고. 성경에서 우리는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두 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다수를 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또한 소수에게 집중하여 그들을 말씀의 사역자로 육성하기도 한다. 구약성경에서 예를 하나만 들자면, 에스라는 광장에서 온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느 8:2-3, 8). 또한 그는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아서 “율법의 말씀”을 가르쳤다(느 8:13). 예수님의 사역도 이 두 대상 모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수님은 모여든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으며, 훗날 당신의 말씀을 모든 민족에게 전할 열두 명의 제자를 훈련하셨다(막 4:1, 10). 바울은 에베소에 오래 머물면서 사역했는데, 여기서도 동일한 유형이 눈에 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의 보여준 본을 기억하라고 권고하면서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또한 유익한 것이면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전하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행 20:20). 바울의 이 증언은 목회자의 소명을 요약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울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배 중에 설교하고 권면한 사역자로, 아니면 가정을 방문하여 교리를 가르친 사역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고 여기에도 바울의 목회 사역의 지혜가 드러나 있지만,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의 에베소 사역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바울은 에베소에서 삼년 간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했는데(행 19:9), 두란노 서원은 바울이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해 임대한 강의실이었던 것 같다. 누가는 바울의 이 집중 제자훈련 기관에서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행 19:10)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할 복음전도자, 교회개척자, 목회자를 길러냈다. 이들 중에 우리가 아는 사람도 몇 사람 있는데, 에베소 동쪽 골로새 교회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에바브라 같은 이다(골 1:6-7, 4:12). 두기고와 드로비모도 에베소 및 아시아 사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행 20:4, 엡 6:21, 골 4:7, 딤후 4:12). 많은 열매를 맺은 바울의 이 제자양성에 대하여 시몬 키스트메이커(Simon Kistemaker)는 이렇게 평했다. “에베소에서 바울은 신학교를 세워서 아시아 지역에 교회를 세울 미래 지도자들을 키웠다.…바울이 훈련한 이 제자들이 목회자가 되어서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들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바울은 사도행전 20:20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떠올려 보라면서, 자신이 그들을 “공중 앞에서”에서 가르쳤고, 또한 “각 집에서”도 훈련했다고 강조했다. 바울 시대에 그들은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예를 들면, 고전 16:19; 롬 16:5, 골 4:15, 몬 1:2도 참고). 이처럼 바울의 사역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을 키우는 것은 분리되지 않았다. 이것을 동일한 말씀의 사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그의 마지막 서신을 디모데에게 보내면서 이것이 가장 우선하여 할 일이라고 가르쳤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에게서 들은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당부했다(딤후 1:13-14). 이것은 흔들리지 말고 말씀을 전하라는 요구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다른 설교자들에게도 이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라는 요구이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특별히 당부한 것은 무엇인가? 디모데는 바울에게 들은 바를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딤후 2:2). “믿음직한 사람들”과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바울의 말에는 디모데전서 3:1-7에 나오는 감독의 자격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처럼 디모데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을 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될 미래 목회자들을 키우는 일이었다. 에스라, 예수님, 믿음의 아버지 바울처럼. 목회 사역에 대한 성경의 비전은 분명히 더 많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이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이 사역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교 중 하나인 남침례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 알버트 몰러(Albert Mohler)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교회가 미래 목회자를 양성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또한 기성 목회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젊은이들을 교회의 목회 사역으로 인도하는 일에 진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목회자로서의 사역과 미래 목회자를 길러내는 일은 성경이 명령하는 동일한 소명이요 오늘 교회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사명이다. 이 사명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목회 사역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미래 목회자를 육성하는 일은 교회마다, 목회자의 사역마다 그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규모가 있고 조직이 잘 갖춰진 교회들에는 체계적인 목회 인턴 과정이 있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체계적인 커리큘럼과 과제를 갖춘 곳도 있다. 다른 많은 교회들의 경우에는 목회자가 재능이 있는 젊은 형제들과 자주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고, 부교역자로 목회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치열한 목회 사역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도 있다. 물론 교회에서 이런 훈련 과정을 한다고 해서 신학교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목회자 멘토링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후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미래 목회자를 훈련하는 방식이 어떤 것이든, 성경이 우리에게 명심하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 훈련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 육성은 목회자에게 내려진 명령이다. 목회자들은 우선순위를 잘 조정해야 한다. 여러 다른 일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새로운 목회자를 키우는 사역에 우선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회자는 다른 전문직처럼 전문대학원에서 양성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오늘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안 돼서 목회의 자리를 떠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목회에 대한 열정 속에서 교육받은 신실한 목회자 후보생들이 지역 교회의 현장 속에서 격려를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한다. 18세기 영국에서 앤드류 풀러(Anrew Fuller)가 목회하던 소함 침례교회(Soham Baptist Church)의 요람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분의 “모판”이다. 이곳에서 사역자들을 육성하고 파송한다. 우리는 그러한 은사를 받은 이들을 발견하고 격려하고 훈련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교회가 목회자를 위한 “모판”임을 인식하게 되면, 성도들이 열정과 재능이 있는 형제들에게 목회의 소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격려할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목회자가 그런 형제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이다. 그래야만 미래 세대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실하게 목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일에 다시금 헌신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신 지상명령의 부흥을 의미한다. 온 세상에 전파해야 할 복음과 이 복음을 전파할 이들을 길러내기 위해서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스스로 제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 끝 날까지 제자를 만들어 내는 그런 제자가 되어야 한다(마 28:19-20). 목회자를 키우는 사명을 회복하라고 우리 교회를 자극하는 가장 큰 동기는 성경이 목회자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는 사실일 것이다. 다른 이유 없다. 목회자 양성은 목회자가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다. 원제: The Necessity of Training Pastors출처: www.ligonier.org번역: 박광영
미래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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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제자훈련
에베소사역
신학교
신학교육
네 존재를 증명하려 들지 마라!
by 정갑신
2021-11-29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인생을 바꾸어 지속적인 지침으로 삼게 된 구절이라기에는 다소 괴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어떤 격려와 위로의 말씀보다 강력히, 삶의 목적과 추구의 향방을 바꾼 말씀인 게 분명하니 어쩌랴. 기대 없이 펼친 성경, 비수처럼 꽂힌 말씀28년 전 신학대학원 졸업을 두어 달 앞두고, 참으로 진지한 표정을 한 동료에게서 들은 한마디. 그때 그는, 준비가 거의 끝나 가던 유학길과 대형 교회 부교역자 임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에게 말했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고자 하는 건지, 하나님의 필요에 답하려는 건지 깊이 물어 보세요.” 그의 표정만큼이나 말 또한 선지자적이었다. 내가 공부와 교육에 소명을 받았다기보다 박사와 교수라는 타이틀을 탐하는 건 아닐까, 막연히 자문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목회와 복음전도와 양육에 삶을 던지기보다는 대형 교회에 속하여 안전과 명분을 확보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바르고 합당했다는 것을, 그리하여 속히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어간에 옆집에 거주하던 중국 선교회 간사로부터 전임간사직을 제안받았다. 나는 그것을 나의 야심에서 힘을 빼시려는 주님의 이끄심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4년간의 사역을 시작했다. 석박사 과정이나 대형 교회에서도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겠으나, 이 시기에 배운 지혜와 맺은 관계는 선교행정 현장에서만 익힐 수 있는 각별한 것이었다. 또한 그 모든 지혜와 관계는 이후 나의 목회 여정에 폭넓고도 확연하게 스며들어 적절하게 작동했다.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6년 1월, 부교역자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C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꽤 많은 동료 선후배가 부러워했을 법한 중견 교회 담임목사 자리가, 버려진 신발 한 짝같이 가련한 존재의 자리로 탈바꿈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년간 고요하던 일흔 살 교회 저수지에 무언가 의미 있는 돌을 던진 것 같았던 자부심이, 실패를 받아들이며 죽음을 희구하는 절망으로 뒤바뀌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항우울제 및 항불안제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처절한 무기력으로 버티는 동안, 희망은 눈을 씻고 찾아 봐도 찾을 길이 없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인내도 완전한 한계에 이르렀다. 그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설교 준비를 위해 아무런 기대 없이 펼친 말씀이, 비상한 깊이로 나를 깨웠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처음엔, 오래전부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 게 분명한, 나만 몰랐던 예리한 시선이 느껴졌다. 은밀한 간음의 현장 문이 활짝 열리며 내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알몸으로 받아 내는 듯한,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이 소름 돋듯 일어났다. 그 후에는 마지못해 자수한 자에게도 송구스레 주어지는 보상, 자유와 평안이 나를 온전히 감쌌다. 그러고는 다시 비수처럼 심장에 꽂혀, 복잡하게 얽힌 내면의 실체를 통찰하고 반추하도록 자극하고 독려했다. 말씀을 온전히 먹고 체화하기 위한 묵상과 함께, 운동장을 걷고 뛰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몸과 마음이 눈에 띄게 회복되어 갔고, 드디어 더 이상 병원을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울러 현실적 안전을 보장해 주는 환경을 떠날 용기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하여 ‘목회 성공의 가능성’보다는 ‘복음적 필요’가 더 분명하게 보이는 지역으로, 교회 개척을 위해 떠날 수 있었다. 이렇게 누가복음 6장 26절은 겹겹이 엉켜 복잡했던 내면을 예리하고 잔인한 거룩으로 적나라하게 들추어내어, 수술과 회복의 시간을 거쳐 새길로 향하게 한 인생의 말씀이 되었다. 야망과 주님 뜻 사이돌아보면, 인생의 말씀은 이런 과정으로 주어졌다. 2005년 5월, 당시 안산동산교회 담임 김인중 목사는 과분한 지원이 보장된 분립개척을 내게 제안하였다. 마음이 다소 흔들렸으나 이미 그해를 끝으로 서울 지역으로 떠나기로 아내와 약속한 터라 결과적으로 그분의 마음을 크게 서운하게 했다. 정해진 사역지가 없었음에도, 그해 연말까지만 사역하는 것으로 말씀드리자고 아내와 얘기한 터였다. 애써 담담하려 했지만 안정적인 개척에 대한 미련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던 중, 서울 서초구의 C교회로부터 세 분의 청빙위원 장로들이 찾아왔다. 담임목사 후보자군에 이미 10여 명의 목회자를 추려 놓은 상태지만, 두세 교회를 대상으로 몇 사람을 더 추천받은 후 선발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김인중 목사는 즉시 나를 호출했고, ‘선발되지 않으면 분립개척한다’는 조건으로 나를 추천하겠다고 했다. 나는, 배부른 선택의 기회와 손해 볼 것 없는 현실에 기대어 급하게 서류를 준비했다. 그리고 담임목사가 되었다. C교회 부임 후 확인한 결과, 대부분이 박사, 교수, 담임목사인 다른 후보들에 비해 객관적 조건이 상당히 뒤처지는데도 내가 청빙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계시적 ‘간택’을 받은 것인지, 어떤 중대한 사태에 휘말리게 된 것인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빨리 흥분했고, 낙관적인 꿈만 꾸기에도 정신이 없었다.부임 직후, 18명의 시무장로들이 원로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는 소수의 무리(‘원무리’)와 원로목사를 최대한 배제하려는 다수의 무리(‘배무리’)로 갈라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적으로는 우세한 15명의 배무리를 통해 청빙된 나로서는, 이미 시작부터 몇몇 예상되는 위험을 감지해야만 했다. 원무리는 기본적으로 나에 대해 호의적일 수 없었다.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기 전의 상황도 그랬지만, 나의 온몸에 배어 있는 캐주얼하고 자유분방한 스타일도 그들에게는 경박하게 느껴졌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배무리 중에서도 소소한 목회적 갈등을 빌미로 원무리에 합류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 갔다. 어떤 이는 복음송과 드럼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어떤 이는 새 담임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기 힘들다는 뒷말로, 다른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임이 부당하다는 불평으로, 또 다른 이는 정서적으로 그들에게 동조하는 묵인으로 하나둘 원무리 쪽으로 돌아서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사이 나는 “다음세대와 젊은이세대의 부흥을 위해 모든 것을 지원할 테니 마음껏 사역하라”는 배무리 최초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서, 열정을 다해 행동에 옮기는 ‘순진하고 천진하고 미련한’ 초짜 담임목사 역할을 힘껏 감당하는 중이었다. ‘다음세대의 부흥’을 위해 ‘마음껏 사역하라’는 주문에 충실하고자, 고리타분한 교회의 상징처럼 보이던 장로석을 없앴고, 강단 뒤 묵직하고 어두운 휘장을 단숨에 치워 버렸다. 그와 함께 이웃에게 경계심을 안겨주기에 충분해 보이던 높고 답답한 붉은 벽돌 담장을, 제직회 여론몰이를 통해 하루아침에 허물었다. 더 나아가 30대 부부공동체를 세우고, 청년부를 전담할 전임사역자를 선발하고, 대대적인 전도집회를 기획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였는지 부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일예배에 출석하는 성도들이 확연히 늘어 주일마다 예배당은 북적거렸고, 늘어난 성도들은 다수가 30-40대 젊은 층이었다. 그런데 ‘어떤 장로가 우리 교회를 남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노골적으로 불편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배무리 중 일부도 서서히 냉랭해지고 있음을 어느 정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담임목사를 지지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10여 명 되는 장로들과의 연대감에 의지해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것 같은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보잘것없는 성과로 들뜬 마음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고도 남을 ‘강력한 태풍’이 시시각각 형태를 갖추어 가는 중이었다. 닥쳐올 위기를 감지하기에는 내 앞엔 여전히 할 일도, 계획도 너무 많았다.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상황을 반추할 겨를 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하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죽음의 터널에 갇혀 지낸 나날그 시기를 돌아보면, 유쾌하지 않다. 아니, 유쾌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 심히 불쾌해진다. 노골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는 강력한 잽과 스트레이트가 의식의 수면 위아래에서 나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던 사실에 너무 무지하였던 걸, 다시 생생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한 장로는 여러 불만과 충고를 뒤섞어, 결국에는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 했던 게 분명한, 여러 장의 경고성 쪽지를 보냈다. 몇 주간 그 쪽지를 묵상(?)하며 분노와 조소를 오가던 중, 기억에서 씻어 버리고자 폐기처분했지만, 외려 뇌리에 더 깊이 박혔다. 드럼과 복음송에 극단적 거부감이 있던 한 장로는 식당에서 여러 성도를 모아 놓고 “정 목사의 신학이 의심된다”고 크게 떠벌리며 웃었다. 다른 장로는, 타 교회 설교 테이프를 건네주며 “우리 목사님도 이 목사님처럼 이렇게 은혜로운 설교를 할 수 있기를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다”는 말로 염장을 질렀다. 그들도 자신에게 익숙했던 것을 상실할까 두려워 그리했던 것을 모른 채, 감정처리에 능숙하지 못했던 나는 직접적인 ‘치리 카드’를 꺼내 들기도 했지만 분란만 일으켰을 뿐 그저 무기력하고 지혜롭지 못한 몸부림만 중첩시키는 중이었다. 나는 막연한 자신감 위에 살짝 얹어 놓은 친절과, 정서적 공감에 호소하는 설교로 버텨 보려 했다. 하지만 겨우 지탱하던 불안한 마음의 터전에서는 이미 붕괴의 지진이 시작되고 있었다. 부임 후 11개월여가 지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두어 시간씩 뒤척이는 밤이 시작되었다. 숙면은 옛말이 되었고, 서너 시간 잠을 자는 것도 무척 어려워졌다. 동시에 불안을 동반한 기분 나쁜 기운이 서서히 전 존재를 거머쥐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불안과 우울은 어느새 나의 하루 24시간 전부를 지배하는 강력한 족쇄가 되었다. 견딜 수 없어서 병원을 찾았지만, 처방약의 효력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약으로는 불안과 우울을 잠재우는 게 불가능해진 시점에 나는 당회원들에게 연락하여 입원을 요청했다. 병원에서는 강한 수면제로 거의 일주일을 재웠고, 퇴원하는 날 항불안제와 항우울제를 동시 처방했다. 신경정신과를 정기적으로 찾는 날들이 계속되는 중에도, 도무지 가시지 않는 불안과 우울, 손발 저림과 강력한 무기력증에 사로잡힌 나는, 끝없는 죽음의 터널에 갇힌 것을 알게 되었다. 10개월 넘도록 이어지던 그 시기, 자살 충동은 일상이 되었고, 아내는 ‘정신질환’ 남편을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24시간 쉬지 않고 보살펴야 했다.사랑의 환대가 만든 영혼의 여백평소 나는 사교적인 관계망을 넓게 펼쳐 많은 이들의 전화번호를 확보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고통의 심연에 이르러서야 내가 얼마나 ‘진실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회피해 온 사람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피상적 관계에 익숙해진 존재의 실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간, 내가 꽤 괜찮은 존재라는 걸 알아줄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설정에 주로 유능함을 발휘했던 거였다. 참으로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고 고독하고 외로웠지만, 내 고통을 나눌 만한 친구들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내 심연의 문제에 관해 대화하기 위해 찾아온, 가까이 지내 온 형님 목사 부부와의 대화를 통해 ‘진실과 정직한 나눔을 공유하는 작은 공동체’에 대한 절대적 필요가 느껴졌다. 아울러 내 형편을 듣게 된 대학 동창 두 명이 비교적 자주, 일부러 나를 찾아왔다. 자신들의 일정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을 그들은, 움직이기 어렵다고 스스로 단정 짓고 옴짝달싹하지 않으려는 나를 설득하여 우면산 정상까지 천천히 함께 올라 주었고, 식사 교제를 통해 자신들도 지극히 연약했던 지난 시간을 펼쳐 놓음으로 내 문제를 상대화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그런 기회를 반복적으로 만들었는데, 아내는 내가 그 시기에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기억한다. 기억할수록 고맙고 들여다볼수록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더불어 C교회 성도 중에도 내가 겉으로 드러내기도 전에, 나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먼저 직감한 부부가 있었다. 이강우 집사 부부는 설교하는 내 모습에서 어떤 이상증세를 발견했다며 목양실을 찾아와 몸 상태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묻고 구체적인 진단을 해 주었다. 그에 더해 내 몸의 분비물을 미국으로 보내어 호르몬 검사 결과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바닥난 감정조절 호르몬을 보충해 주는 약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었다.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했던 나의 자기중심적 분주함과 부주의 탓에 오랜 시간 기억하지 못했던 그들의 이름과 고마운 마음,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들의 환대로 인해 지독하게 좁아져 있던 내 영혼에 틈새와 여백이 생길 수 있었고, 그 틈으로 생명의 말씀이 가늘지만 선명하고 날카로운 섬광처럼 파고 들어왔다.인생의 말씀이 일깨운 진실내면의 질서와 인생의 향방을 바꾼 그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매우 의아하지만, 2007년 5월 어느 날이었던 건 분명하다. 사랑의 환대로 인해 형성된 여백이 분명 큰 도움을 주었다. 도무지 펼쳐지지 않는 말씀, 펼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말씀을 억지로 내 안으로 욱여넣기 위해 소리 내어 읽었던 시편 말씀도 그랬던 것 같다. 진이 빠지고 근육이 사라져 걸을 수 없었던 두 다리로 이를 악문 채 힘주어 걷고 조금씩 뛰기 시작한 사투의 날들도 분명 도움이 되었을 게다. 하지만 우울과 불안 사이를 널뛰듯 오가고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증상은 동일했고,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갈망은 여전히 강력했다. 만에 하나 이 고통의 여정이 멈추면 누가복음을 설교하리라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하루에 서너 구절씩 읽어 내려가던 어느 날, 그 말씀이 예리하고 깊고 무겁게 내 눈과 가슴을 파고들었다. 매우 충격적이었고, 몹시 아팠고, 한없이 따뜻했지만, 또다시 통렬하게 내 온 영혼을 사로잡았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누가복음 6:26). 무엇보다 이 말씀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가짜’였음을 고발했다. 내가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은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부터였고, 분노로 잠을 못 이룬 것은 나를 분노케 한 자들의 무례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진정한 문제가 그들의 무례함이 아니라, 그것을 헤아리거나 견뎌낼 수 없었던 나의 ‘자기 존재 증명 욕구’였다는 걸 선명하게 알려 주었다. 마음이 거기에 이르니 그간 일어났던 모든 현상이 논리적으로 정밀하게 꿰어졌다. 모든 성도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고 박수받는 목사가 되려는 존재 증명의 욕구로 인해 나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마음을 잃었던 거였다. 그로 인해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사용’하려는 모든 자 앞에 넓고 깊게 펼쳐진 함정에 빠졌던 거였다. 나는, 도를 넘어 감당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멸시와 수치와 사람들의 잔혹한 뒷담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향해 곧게 걸으셨던 주님보다 더 나은 대접을 기대하고 누리려 한 목회자였던 거다. 수개월을 이어 가는 격한 회개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나 같은 존재가 대체 뭐라고 주님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자 했던 걸까? 주님은 단지 내 존재를 증명해 주어야 하는 도구였다는 말인가? 나는 주님의 목회, 주님의 나라가 아니라, 내 목회를 통해 나의 나라를 건설하려 한 또 다른 니므롯이 아니었던가? 영광을 향한 열망 뒤의 지독한 초라함을 좇아가는 미련함에 너무 오래 방치되었던 게 아닌가? 결국,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라는 그 말씀은 스스로 화를 자처하는 길을 내가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진실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자기 존재감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였다는 걸 고백하는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졌고, 수개월이 지나는 동안 확연한 회복이 이뤄졌다. 마침내 나는 약을 버려도 될 정도까지 회복될 수 있었다.회복과 새날말씀 앞에 엎드리고 몸을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힘을 쓰는 날들이 지속되면서, 우울과 불안은 확연히 가라앉았다. 동시에, 과거에 나를 채우고 있던 ‘존재 증명을 위한 자신감’은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자신의 초라한 실체를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누리는 자유의 맛을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했다. 아울러 내가 아무리 확연한 변화를 이룬다 해도, 이후에 다가오는 시간들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자가 못 된다는 사실도 실감 나게 깨달았다. 그에 따라, 이미 주변 교회들 사이에서 떠도는 상대적 비교와 거부할 수 없는 경쟁적 분위기에 익숙해진 현실에서, 성장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진 분위기에서, 전통에 대한 계승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대립하고 각을 세우는 문화 속에서, 여전히 자기중심성으로 신속히 돌아갈 가능성이 현저한 내가 이 교회에서 건강한 공동체를 실현하려고 분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여기서 계속 자리를 지키려면, 철옹성 같은 자기 확신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면서 독재적 목회가 가능한 환경을 만들든지, 아니면 철저하게 침묵하고 견디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맡긴다는 빌미로 흐르는 세월에 의탁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둘 중 어느 쪽에도 익숙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또다시 작은 성취에 존재 증명의 욕망을 걸게 될 미천한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 주님의 뜻을 묻던 중 나는 기쁨과 희열 속에서 ‘개척’의 소명을 받았고, 아내의 적극적인 동의를 통해 그것이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인 것을 확인했다. 내가 추구하는 목회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고발하고, ‘나’라는 존재가 별것 아니라는 걸 뼛속 깊이 인정하게 해 준 누가복음 6장 26절 말씀은, 주님의 이끄심과 주권적 은혜를 더 깊이 신뢰하는 담대함을 선물해 주었다. 그에 따라 아내와 더불어, 교회에는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말고 소박하게 사임하는 게 옳다는 결정을 했다. 그저 퇴직금이면 족했다. 퇴직금에 전세대출을 합쳐서 어디가 되었든 전세아파트에서 교회를 시작하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하늘을 날 것 같은 기쁨으로 서로 부둥켜안았다. 끝까지 배무리로 남은 10여 명의 장로들은 나의 사임을 완강히 반대했다. 그리고 내가 교회에서 계속 시무하는 조건으로 여러 건의 환상적인 제안을 해 왔다. 그 제안을 위해 오랜 시간 토론하고 의논했을 모습이 눈에 그려지고 그 제안에 담긴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 미안함과 뭉클함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이게 네 사직서다’라는 깨달음을 주셨다. ‘그 조건을 따라 시무를 계속한다면, 그 순간부터 너는 성도들이 절대 존경할 수 없는, 조건을 따라 눌러앉은 목사가 되는 거다’라는 각성이었다. 그리하여 한 구절 말씀을 통해 ‘존재 증명 욕구’의 수위가 큰 폭으로 낮아진 상황에서, 나는 어떤 마무리가 필요한지를 찬찬히 생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C교회에 부임해야 했던 ‘나를 위한 이유’는 확실해졌다. 내 실체가 고발되는 것, 그에 따라 내 중심이 자기 존재 증명의 우상에서 벗어나는 것, 그리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착각 속에서 외려 그분을 사용하는 우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그분의 아름다우심을 증명하려는 갈망으로도 충분히 배부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나의 전 생애에 걸쳐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C교회에 부임해야 했던 ‘C교회를 위한 이유’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수주를 고민하던 중, 후임 목회자와 남은 성도들을 위해 당회를 새롭게 하는 것이 그 이유임을 깨닫게 되었고, 배무리 장로들도 내 생각에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결국, 담임목사와 더불어 원무리와 배무리 양편에서 다섯 명의 장로가 동시 사임하는 것으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당회와 성도들은 사임한 담임목사를 교회 개척을 위해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과분한 지원으로 파송식을 열어 주었다. 결국 누가복음 6장 26절은 내 안으로 파고들어 존재의 실체를 자각하게 하고 한 목회자의 향방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한 전통 교회가 새 교회를 낳는 헌신을 불러일으켜, ‘살인의 추억’ 화성시의 한 마을에 예수향남교회를 세우는 ‘창조주의 말씀’이었던 셈이다. 이 글은 ‘내 인생의 한 구절’(잉클링즈, 2021)에 실린 정갑신 목사의 글 “세우시는 창조주의 말씀”을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목회
인생지침
청빙
목회성공
교회개척
공동체
감정조절
뒷담화
야망
생명의말씀
그는 선한 목자와 잘 알고 지냈다
by Ligon Duncan
2021-11-08
‘양은 기억한다’(A Sheep Remembers)는 진실한 그리스도의 양으로 살았던 한 목사의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은 깊이 있는 성경적 주해와, 신학적인 분석 위에, 삶의 경험과 영성이 배어 있는 시편 23편의 묵상집이다. 또한 이 책은 한 평생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며 살다가, 지금은 선한 목자가 계신 본향으로 돌아간 경건한 목사이자, 신학자의 신실한 고백이다. 데이비드 칼훈은 우리 시대 위대한 교회사학자이자, 목회자이며, 선교사였다. 사실 그는 삶의 업적에 비하여서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칼훈을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깊이 사랑하였고, 그에게 감사하였다. 그는 탁월하였지만 겸손하였고, 경건하면서도 신실하였으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는 진실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였다. 양은 기억한다(A Sheep Remembers)David B. Calhoun시편 23편은 많은 사람들이 친숙하게 잘 알고 있는 말씀일 것이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암송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이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시편 23편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이비드 칼훈은 깊이 있는 주해와 자신의 삶의 간증들을 통해 시편 23편에 담겨있는 은혜로운 말씀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특별히 그의 삶이 담긴 묵상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선한 목자의 양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양은 기억한다’는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칼훈은 각 장마다 서로 다른 번역의 시편 23편 말씀과 시편찬송을 제시한다. 또한 그는 다양한 주석과 자료를 제시하는데, 양의 특성을 알려주는 ‘목자로부터 온 편지’, 여러 종류의 기도문, 다양한 예화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며, 마지막에는 저자의 개인적인 간증이 담겨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영적인 지혜를 제시한다.BANNER OF TRUTH칼훈의 유산 데이비드 칼훈은 나의 신앙의 아버지이자, 멘토이며 친구였다. 그는 커버넌트 신학교에서 30년간(1978-2008)간 교회사를 가르쳤으며, 또한 그는 40년간(1987-2021) 고통스러운 암투병을 하며 살았다. 이 책은 그의 삶의 마지막 책이었다. 이 책을 집필하여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 출판사에 원고를 전달한 후에 그는 하나님께 소천을 받았다. 나는 신학교에 다닐 때 그의 수업을 거의 다 들었다. 나는 그에게 고대교회사, 중세교회사, 종교개혁사, 근대교회사, 칼빈의 기독교 강요, 개혁파 전통의 역사, 남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을 배웠다. 또한 내가 에든버러에서 공부를 할 때에는 그와 함께(그의 아들 알랜과도 함께)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언제나 내게 친절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신학의 여정에서 그분만큼 내 삶과 신학, 목회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은 없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리폼드 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내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신 분이다. 데이비드는 치열하게 늘 새로운 것을 배우는 성실한 학자였다. 학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에 그는 신약과 구약을 각각 공부하여 2개의 신학석사(Th.M.)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리고 교회사를 공부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취득하였다(그의 논문은 “1812-62년 기간에 프린스톤 신학교와 선교의 역사”였다). 그는 존 칼빈의 신학을 사랑하였고, 초기 개혁자인 헨리 불링거를 연구한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특별히 나는 리처드 멀러의 ‘그리스도와 율법’(Christ and the decree)을 읽기도 전에 그에게서 먼저 “멀러 테제”의 담론을 배울 수 있었다. (“멀러 테제“는 종교개혁(Reformation)과 종교개혁 이후(Post-Reformation)의 개혁신학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20세기 칼 바르트 주의자들이 주장하였던 “칼빈과 칼빈주의자”의 대립을 반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자신의 연구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연구를 공유하였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데이비드는 켄터키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나처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자라났다. 우리는 모두 역사, 특별히 교회사를 사랑했다. 내가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제일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에 데이비드에게 우리 교회의 역사를 저술해줄 것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2012년에 교회의 175주년을 기념하여 역사집을 편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그는 이미 여러 교회들의 역사를 책으로 저술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콜롬비아의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조지아 사바나의 독립장로교회(Independent Presbyterian Church), 조지아 아우구스타의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의 역사가 그의 손으로 집필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미국 남부지역의 또 다른 유서 깊은 교회인 우리 교회의 역사를 집필하기에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암이 재발하였고,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우리 교회의 역사를 집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의사가 그에게 책을 저술하기 위한 여행을 말렸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교회의 역사 집필을 내려놓으며 내게 이런 말을 적어주었다. “내게 오직 하나의 불치병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주님이 최선의 것을 아시리라 믿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이 책에서 그의 이 믿음의 고백을 확인할 수 있다).시편 23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데이비드의 교회사 강의는 언제나 풍성하고 깊이가 있었다. 그는 은혜로운 기도문과 글들을 학생들에게 제시하였다. 나는 그의 마지막 책인 ‘양은 기억한다’를 읽으면서 마치 신학교에서 그의 수업을 듣던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면서 수업을 듣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 책은 데이비드 칼훈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또한 이 책은 스펄전의 시편주석(Treasury of David)과도 많이 닮아 있다. 그는 이 책의 각 장에서 시편 23편의 다양한 번역을 제시하였고, 깊이 있는 주석을 덧붙였으며, 많은 기도들, 예화들을 통하여 더욱 풍성한 교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그의 간증은 더욱 은혜를 더하였다. 그의 간증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교훈을 주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에게 영적으로 유익할 것이다. 짧은 분량의 이 책을 독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읽어 내려갈 수도 있다. 또한 설교자들이 시편 23편을 강해하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이 책을 옆에 두고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매일 조금씩 분량을 정해서 묵상을 하면서 읽어가는 것도 좋다. 하루에 1장씩 10일 동안 이 책을 읽어 나갈 수도 있다(그래서 칼훈이 시편 23편을 10개의 주제로 나누어서 묵상하였는지 모른다). 만약 천천히 묵상하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간다면 이 책의 부록에 실려 있는 다양한 번역의 시편 23편을 읽어가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참고도서들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방대한 분량의 참고도서와 그에 대한 저자의 요약을 통하여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영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책에서 소개한 ‘시편의 기도들’(Prayers on the Psalms)은 그가 편집한 책이기도 하다. ‘시편의 기도들’에는 프랑스 위그노 목사이자 순교자인 오귀스탱 말로라(Augustin Marlorat)의 기도들이 담겨 있는데,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서 1595년 스코틀랜드 시편 찬송집에 수록되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말로라의 시편 23편의 기도는 다음과 같다.만복의 근원이신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아버지, 모든 원수에게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우리의 목자, 우리의 보호자이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사 모든 두려움과 사망의 위협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진리를 믿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오직 주님의 진리만이 우리 주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데이비드 칼훈은 거의 인생의 절반 가까이의 시간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암투병을 하며 보냈다. 그는 이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서 본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양은 기억하고 있다’는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게 하며, 그분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다(히 13:20). 아마도 칼훈은 지금 선하신 목자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원제: He Knew the Good Shepherd: The Last Book of David B. Calhou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박광영
목회
리더십
시편23편
선한목자
데이비드칼훈
죽음
항암치료
섭리
기독교강요
위선자들과 맞서되 단절하지 말라
by Will Anderson
2021-11-05
디지털 시대에는 실족한 목회자들의 이야기가 소셜 미디어, 유튜브, 팟캐스트 및 온라인 매체를 통해 기사화되고 대중에게 빠른 속도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촉망받던 지도자일수록 그를 향한 더 큰 분노의 외침이 들린다. 죄악이 심각할수록 청중은 더 늘어나게 마련이다.종교의 탈을 쓴 거짓 목회자에 관해 알리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것은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나쁜 리더들에게 책임을 지게 하며, 섬김이 아닌 명성을 지향하는 데에 뿌리를 둔 잘못된 리더십 모델에 경고를 한다. 하지만 치욕스러운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 정의를 향해 접근하는 확실한 단계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라 중요한 첫 단계에 불과하다.위선은 마주치는 영혼을 상하게 하며 방향을 잃은 성도에게 배신이란 자갈밭에서 비틀거리도록 만드는 방해물이다. 가짜 목자들은 양들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든다. 이에 실망한 어떤 이들은 기독교와 결별하겠다면서 회심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신들만의 방법을 고민한다. 교회 밖이 아닌 내부에서 치유를 찾기로 하고 머무는 사람들에게도 분노, 불신, 그리고 자기 의심은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는다. ‘어떻게 목사를 다시 신뢰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이다.지침은 정의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을 탈진하게 한다. 영적 학대자들을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응급 구조요원도 되어야 한다. 상처 입은 형제자매들을 붕대로 싸매어주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게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맹렬히 꾸짖으시는 예수님을 기록한 마태복음 23장을 내가 사랑하는 이유이다.몇 가지 중요한 방향으로 마태복음 23장은 세 가지 교훈을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위선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법을 가르쳐 준다.1. 지도자의 위선으로 우리의 복종을 무력화하지 않는다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을 “지옥 자식”과 “맹인 된 인도자”라 부르시며 신랄하게 비판하시지만, 놀랍게도 그의 첫마디를 듣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라고 가르치신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2-3).예수님의 말씀은 반문화적이긴 하지만 분명하다. 모든 제자는 누가 가르치든 성경의 진리에 따라야 한다. 당혹스럽게도, 잘못된 목회자들이 종종 좋은 내용으로 가르칠 때도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짓 목회자에 관해 관심을 갖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신랄한 비평은 나중에 그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목욕시킨 아기(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진리)를 목욕물(믿음을 궤멸시키는 위선)과 함께 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알고 계신다. 죄가 누군가의 목회를 무력화시킬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무효화 되어서는 안 된다(사 55:9~11). 주석가 마이클 J. 윌킨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성경에 대한 모든 정확한 해석은 우리가 따라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좋은 말을 많이 했고, 그들의 교리는 다른 집단들보다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가까웠다. 예수님은 정의의 추구 자체를 비난하지 않으셨다. 그는 정의로워지려는 노력 안에서 표출되는 특정한 태도나 관습만을 비판하신다.영적인 권위가 사람들을 속일 때,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르친 모든 것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멀리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영적 권위에 대해 욕하며 순종에 대한 요구를 율법주의로 받아들이는 냉소주의자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압제자들에게는 엄격하여야 하지만 성경 말씀에 대하여는 온순하여지기를 원하신다. 진리를 포기하는 것은 악에 대항하여 싸울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우리는 늘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2. 하나님은 위선을 우리가 싫어하는 것보다 더 싫어하신다마태복음 23장은 대부분의 성경(겔 34장 참조)의 내용에서 보여주듯 영적 지도자들이 그의 백성을 오도하고 학대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훼손하거나 자신의 신부를 괴롭히는 악행을 은폐하거나 최소화하려는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동정심을 품지 않으신다. 그의 거룩한 진노는 그저 그런 모호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구체적이다. 마태복음 23장 4절에서 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 비난, 즉 외식하는 자, 지옥 자식, 눈먼 인도자, 어리석은 맹인, 맹인, 탐욕과 방탕, 회칠한 무덤, 불법, 뱀, 독사라는 단어로 꾸짖으신다. 이는 과도한 비난이 아닌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해치려는 누군가를 꾸짖는 것처럼, 그 꾸짖음의 강렬함은 사랑을 나타낸다.사랑은 또한 예수님의 진노의 구체성에서도 명료하게 보인다. 윌킨스가 이 구절에 대한 논평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고(4절),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며(5절), 자신들의 위치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고(6~12절), 종교를 빙자하여 왜곡하며(15~22절),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며(23~34절), 전통을 하나님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25~28절) 그리고 자신들 스스로 의로운 목소리를 억누른다(29~32절)는 예리한 지적을 통해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신다: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웃을 희생하며,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자들이여,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그렇게 하라. 언젠가 정의가 찾아올 것이다.3. 하나님께서는 위선자들의 치유를 갈망하신다그의 핏줄에 의로운 진노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마태복음 23장에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충격적이다.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37절)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시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고쳐주려 하신다. 그들이 종종 그렇듯 그의 은혜를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탄식하신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예수님의 진노와 연민을 본받고 싶은 의향이 있는가? 모든 기독교인은 같은 변화를 경험한다: 하나님의 원수는 그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이 우리 안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뿌리내리는 것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위선자들과 단절하기위선자들과 맞서는 예수님의 접근 방식은 확실히 우리 시대의 정신과 상충한다. 그분의 급진적인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는 양극단의 경우는 피할 필요가 있다.첫 번째 극단은 비하에서 비롯된 분노인 오만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위선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정의로운” 분노는 정의보다는 자존심에 의해 자극되어 빠르게 정의롭지 못한 분노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안다. 거룩한 분노는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는 절제를 수반한다. 그러한 절제는 취소문화(기존에 맺은 SNS 관계나 팔로우를 취소하는 것과 같은 단절)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희생자들을 보호하고 위선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을 취하면서 우리의 분노는 무모하지 않은 정의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한다.두 번째 극단은 잘못된 겸손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는 모두 위선자이기 때문에” 위선을 위선이라 부르길 거부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판단을 회피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은 교회에 규율이 필요하다는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을 무시한다(마 18:15~19).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칭하면서도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것을 거부한 것을 책망하기도 하였다(갈 2:11~21).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분노가 우리에게 무언가 교훈을 준다면,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위선에 대하여는 목청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때에 꾸짖기를 거부한다면(눅 17:3) 우리의 침묵은 겸손이 아니라 비겁함이다.내가 좋아하는 신학 교수 중 한 분은 마태복음 23장을 매년 읽자고 우리에게 권면했고, 나는 그와 함께 이를 실행하여 왔다. 우리는 모두 이기적으로 리더십을 활용하고 싶어 한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우리는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원제: Confront Hypocrites, But Don’t Cancel The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목회
리더십
위선
정의
관계
취소문화
관계단절
분노
진노
책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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