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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목사로 살아가는 한 주
by Chris Griggs
2021-10-26
화요일 화요일이다. 점심시간에 목사는 오랜 시간 회의를 했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교회에 도착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에 제 아내가 수술을 받았을 때 병원에 오셔서 기도해주신 것 정말 감사드려요. 제 아내는 수술 후에 아직도 회복 중이에요. 사실 최근 몇 주간 저희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 교회에 있는 다른 분들은 아무도 저희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아서 속상하네요. 아무래도 저희가 교회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는 그에게 사과와 위로를 전하며 전화를 끊었다. – 낙심.한 시간쯤 지난 후에 투병 중인 다른 성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 전화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교회가 저희를 돌봐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정말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는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준 후 전화를 끊었다. – 감사.교회에서 퇴근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집사 한 사람이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왔다. “목사님,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지난번 회의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성도 몇 명의 마음이 많이 상한 것 같아요. 자신의 의견이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분들의 마음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목사님께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목사는 이야기를 듣고 힘이 쭉 빠져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걱정.그날 저녁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어떤 집사를 마주치게 되었다. “목사님, 정말 반가워요! 기회가 되면 목사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저희는 목사님의 목회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혹시라도 저희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꼭 알려주세요.” – 용기. 수요일다음 날 아침, 목사는 수요기도회를 준비하기 전에 잠시 앉아서 쉬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오늘 교회에 가서 누군가와 얘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모두가 너무 바쁘시더군요. 아무래도 저는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여기와는 다른 새로운 교회에 가보고 싶습니다.” 목사는 고개를 푹 숙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오후에 목사는 우편으로 온 카드 한 장을 받았다. “목사님,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저희 가정의 믿음이 많이 자란 것 같아요. 말씀을 잘 가르쳐주시는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목사는 언제든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그 카드를 성경책에 넣어두었다. 그날 밤 10시 20분 목사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심장이 뛰었다. “목사님, 지금 어머니가 많이 위중하세요. 병원에서는 어머니가 오래 버티기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제가 지금 빨리 가볼게요.” 목사는 즉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차려입고 나섰다. 목요일목사는 수요일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기에 목요일 아침에는 좀 쉬려고 했다. 그런데 아침 8시 45분에 전화기가 울렸다. 누군가 음성사서함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목사님, 오늘 아침에 잠시 뵙고 싶어서 교회로 찾아갔었는데 안 계셔서요. 혹시 어디에 계세요? 상담을 좀 하고 싶어요. 전화 부탁드립니다.” 목사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 지침.토요일토요일 아침에도 목사는 책상에 앉았다. 목사는 매주 목요일까지 설교 준비를 끝내려고 하는데 토요일 아침에도 설교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매주 힘들게 설교 준비를 하면서 목사는 자기 스스로 무능하기에 그렇다고 실망한다. 그는 아마도 다음 주 토요일에도 여전히 설교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토요일 저녁에 목사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후 10시 반쯤 되어서야 다시 책상에 앉았다. 설교를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쯤 더 씨름한 후에 그는 조용히 침대로 돌아와 기도하면서 잠이 들었다. 주일주일 아침을 깨우는 알람을 듣고 일어나서 목사는 숨 가쁘게 주일을 준비한다. 아침부터 교회에 나온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목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위로에 관하여 설교했다. 예배 후에 성도들과 악수하면서 그들의 기도 제목을 들어주었고, 새로 등록한 분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점심 식사 후 의자에 기대어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저녁에 있는 모임에도 참여했다. 하루를 마치면서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목회자로 불러주신 소명에 감사했다.매우 좋고, 매우 고통스러운목사의 대부분은 이런 일정으로 한 주를 보낼 것이다. 어떤 주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감정이 요동친다. 사도 바울처럼 교회를 위하여서 날마다 눌리고 염려하기도 한다(고후 11:28). 때로는 바울처럼 성도들과 무릎을 맞대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축복할 때도 있다(행 20:36-37).“하나님의 양무리를 칠 때”(벧전 5:2) 목사는 반드시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예수님이 목자장이시고, 목사는 그분의 양을 위임받은 목자이다. 둘째, 목자들은 양과 똑같이 보고 똑같이 냄새를 맡는다. 왜냐면 양과 함께하는 것이 목자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양은 때로는 목사에게 큰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목사를 매우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우리는 양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을 닮은 모습과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득 채우는 것은 목사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목사가 예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이며, 성도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며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발견할 때까지 목사가 그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이다. 매주 주일마다 목사는 성도들을 예수님께 인도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가르치며, 참된 소망을 바라보게 하고, 이 세상은 헛된 것(약 4:14)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가르친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영광의 왕을 기쁨으로 경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모든 수고가 끝이 날 것이다. 천 명 중 한 명 나올 만한 사람천로역정을 보면 해석자의 집에 그림이 하나 있다. 그 그림은 목사를 그린 그림이다. 목사의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목사의 손에는 최고 중의 최고인 책이 있으며, 목사의 입술에는 진리의 법이 새겨져 있다. 목사는 온 세계를 짊어지고 있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으며, 목사의 머리에는 황금 면류관이 씌워져 있다.크리스천이 그림의 의미를 묻자 해석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이 그림에 나온 사람은 천 명 중 한 명 나올만한 사람이다. 그는 영적으로 자녀를 잉태하고, 애를 써서 출산한 후에 자녀들을 정성껏 돌보는 자이다. … 그는 장차 임할 세상에서 큰 영광의 상급을 받을 자이다.”그 천 명 중 한 명이 나올만한 사람이 바로 당신, 목사이다. 당신은 고귀한 사명에 부름을 받았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최선을 다하여 우리 주님께서 정하신 그 날에 그분의 신부를 준비시켜 주님께 올려드려라. 주님은 당신에게 이렇게 칭찬하실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원제: A Week in the Life of an Ordinary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목회
목사
리더십
사명
소명
돌봄
천로역정
고통
양무리
목자장
설교자에게서 기대할 점
by Collin Hansen
2021-10-21
도대체 무슨 권리로 설교자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예를 들어 30분 동안 강대상에 서서 하나님을 대변해서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권위는 미국 대통령조차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수학 교사나 문학 교수에게 이런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요즘 얼마나 다양한 다른 종류의 한 방향 독백이 우리 주변에서 넘치고 있는가? 한때 고대 세계에서나 인기 있었던, 세상을 순회하며 즐거움을 주던 대중 연설이라는 오락은 오늘날 수익성 있는 직업은 고사하고, 그 어떤 도심에서도 군중을 끌어들일 수 없는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설교자는 그들의 권위를 뛰어난 지식, 정치적 권력, 또는 수사적 화려함에서 얻는 게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들이 가진 권위의 유일한 근거다. “말씀을 전파하라”라고 바울은 에베소의 목사인 그의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 말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최신 넷플릭스 시리즈에 관한 지식을 얻고 싶은 사람에게 설교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분야와 관련해서 그들에게는 아무런 권위가 없다. 좋은 식당 추천도 마찬가지다. 페이스북에서 자주 접하는 음모론과 관련해서도, 나름 참고가 되는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별 권위가 없다. 구직 관련해서도 도움이 되는 조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만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하는 특별한 권세와 권위를 가진다. 단지 인간의 지혜로 만족하지 말라교회를 재발견하면서, 우리가 지금 찾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신성한 권위다. 오늘날 인간의 지혜는 차고 넘친다. 요즘처럼 광범위하게 인간의 지식을 누구나 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세상은 일찍이 없었다.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지배한다. 팟캐스트는 더 나은 당신을 약속한다. 인터넷 세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단지 인간의 지혜를 전하는 교회는 치열한 경쟁을 만날 수밖에 없다.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지 않고 굳이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할 이유가 뭘까? 유력 정치인이 등장하는 뉴스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대신, 굳이 주일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매주일 교회와 함께 하는 것은 오로지 교회에서만 거룩한 왕을 만나고 그가 전하는 좋은 소식과 우리 삶에 대한 그의 권고를 듣기 때문이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매주 모임에서 함께 있을 때에도 그 목소리를 듣는다. 함께 모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a people)으로 만들어져간다. 이것이 바로 설교와 가르침, 그리고 교회 모임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는 이유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가 교회 모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분된 백성으로 특징짓는 하늘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분리된 이 세상의 도시와 나라에서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들을 때 신성한 지혜를 알게된다. 그 지혜는 소셜 미디어와 베스트셀러 책에서 흔히 만나는, 오늘날 자칭 서기관이 외치는 인간적인 지혜와는 차원이 다르다. 설교자의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 모두를 포괄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이상은 아니다. 설교자는 너무 많이 또는 너무 적게 말하는 죄를 지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의 기초이면서 동시에 한계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크 데버(Mark Dever)는 종종 설교자의 사역을 우편 배달부와 비교한다. 우편 배달부가 우편물 봉투를 열고 추가로 메모를 하고는 다시 봉인해서 우편함에 넣지 않는다. 우편 배달부는 그냥 우편물을 있는 그대로 배달한다.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말씀은 우리가 그분의 합당한 권위를 분별하도록 도와준다. 그에겐 단지 우편물을 배달할 권한이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듣기 싫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소비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자기 계발 고수는 오로지 당신이 듣고 싶은 말만 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권위가 부족하다. 종종 그런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넘어 자기에게 있지도 않은 권위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단지 성경 말씀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당신의 양심을 구속하려고도 한다. 누구와 데이트를 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는지, 자녀를 어느 학교에 등록시켜야 하는지, 어떤 옷이 경건함을 나타내는지 등등을 당신에게 알려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문제와 관련해 그들이 얼마든지 지혜를 전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좋은 조언을 결코 신령한 권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인간적인 성찰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후렴구를 반복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그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고 선포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선지자가 하는 말이 항상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왕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는 선지자를 벌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교회를 재발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말하는 지도자를 찾는 경향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지도자 역시, 교인들이 원하는 말만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렇게 하는 게 생계 유지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교인이 아닌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가혹하게 말할 때, 마치 대담한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런 말이 용감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과연 설교자가 정작 헌금 내는 교인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설교를 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사실상, 이것은 대부분의 설교자가 직면하는 가장 큰 도전일 것이다. 어떻게 교인의 마음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100%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게 가능할까? 설교자의 생계를 좌지우지할 뿐 아니라 설교자의 가정까지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곤란하게 할 수 있는 교인들에게 어떻게 무겁고 진실한 말을 할 수 있을까?당신 자신에게 말씀을 가르쳐라설교자가 처한 이런 유혹을 감안할 때, 비록 듣기에도 좋지 않고 또 동의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를 재발견하려 할 때, 당신이 설교자를 의존하는 것은 단지 숨겨진 성경적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당신 스스로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방법을 보여줄 설교자까지도 찾고 있다.최고의 설교자는 당신이 설교자의 기술에 놀라도록 만들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당신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될 때, 당신은 설교자로부터 점점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갈망을 갖게 되고, 당신 자신을 위해 말씀을 읽고 적용하려는 열망도 함께 커진다. 그런 다음 선순환의 과정에 들어간다. 당신이 말씀을 알고 더 사랑하도록 설교자가 더 많이 도와줄수록, 말씀을 향한 당신의 취향은 더 많이 개발되며, 그 결과 더 깊이 있는 설교를 향한 당신의 갈망까지 함께 커지게 된다. 적어도 다음 네 가지 모습을 통해 교회에서 일어나는 말씀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 (1) 설교자는 전체 교회를 향해 말씀을 선포한다. (2) 교인들은 찬양와 합심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입과 마음 속으로 받아들임으로 응답한다. (3)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에게 말씀을 가르친다. (4)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 이런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모든 교인이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말씀을 배우는 학생이자 동시에 가르치는 교사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한다. 말씀에 관해 이렇게 생각할 때, 교회는 비로소 오늘날 가장 흔한 문제 중 하나, 다름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스스로 예상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가 견디어 낸 문제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4)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도 이렇게 경고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우리는 말씀에 초점을 맞춘 교회일수록 “자기의 사욕”, 즉 지식의 겉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가르침에 관심을 덜 가질 것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분명 인터넷을 창조한 사탄이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서 끝없는 추측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늘 설교자가 처한 독특한 도전을 생각해보자. 이번 주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설교자는 45분에서 60분 정도, 당신의 집중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집중은 집에서 설교를 들으려고 할 때 쉬지 않고 생기는 아이들의 성화, 문자, 졸음 등 방해 요소가 없을 때 이야기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 비디오 및 팟캐스트는 24시간 쉬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가 이런 인터넷 세상과 경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지금 인터넷 세상과 성경을 같은 선상에 놓고 성경에 우선순위를 두려는 게 아니다. 코로나19 라는 엄청난 여파 이후에도 성장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인터넷과 경쟁해서 이기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발버둥 치는 세상의 수많은 목소리를 오로지 권능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잠재우는 교회일 것이다. 원제: What to Look for in a Preach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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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vid Mathis
2021-10-15
“하나님은 겸손을 좋아하시기에 우리에게 다수(plurality)를 주셨다.” 나는 데이브 하비(Dave Harvey)가 최근에 쓴 글 ‘다수의 원칙(The Plurality Principle)’을 읽었다. 교회 리더십 팀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데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크게 감동했다.단 한 명의 리더와 대비되는 다수의 목사-장로로 구성된 리더십 팀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미덕이 겸손이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내가 진짜로 놀란 이유는 하비가 팀 리더십에 있어서 겸손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고 겸손을 배양하는 것이 리더십 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마치 노래의 후렴처럼 계속해서 반복하며 강조했다. 많은 사람이 듣고 있는 것처럼 하비도 최근 들어 더 자주 들려오는 목회자 타락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평생 들었던 것보다 최근에 들은 소식이 더 많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이런 목회자 중 일부는 교회와 사역의 공식적인 팀 사역자(peer)가 없었지만, 적지 않은 숫자는 팀으로 일하는 목회자와 장로가 있었다. 문제는 그런 팀 사역자들에게는 거의 권한이 없었으며, 아무런 관리 지도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팀으로 얼마든지 함께 책임지고 사역할 수 있는 상황에도 단지 한 사람이 모든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와 교인들 그리고 목사 자신이 팀으로 사역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고통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비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의 겸손을 시험하지만, 리더십 팀의 일원이 되는 것은 마치 변호사 시험에 응시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을 먼저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섬기는 것에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먼저 섬겨야 한다. 그렇기에 겸손은 배워야만 한다.” 먼저 당신 자신을 의심하라. 남을 먼저 섬기라. 이것은 통찰력 있는 가르침이고, 훌륭한 리더십의 기준으로 교회에서 참고 할 만하다. 교회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장로들은 남이 아닌 자신을 먼저 의심하고, 자신이 아닌 남을 먼저 섬기는가? 그리고 목회자들이 가야 할 길을 결정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비는 또 이렇게 말한다. “겸손은 여러 개의 엔진을 부드럽게 움직이게 하는 윤활유다. 훌륭한 팀, 의견 조율이 잘 되는 회의, 사랑이 넘치고 책임감 있는 관계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은 바로 겸손이다.” 팀사역은 어떻게 겸손을 가르치는가자아실현과 특권을 갖기 위해 리더십을 생각하는 세상과는 달리 기독교 리더십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있다. 목사와 장로는 자신감과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더 많은 희생을 통하여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겸손의 필요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수록 커진다. 특히 함께 사역하도록 부르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겸손은 창조주와 관련한 피조물의 미덕이지만, 겸손에 관한 많은 성경 구절은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나온다(빌 1:27-2:5, 엡 4:1-3, 벧전 5:5-7).팀 리더십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다음 네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자. 1. 팀은 이기적인 욕망과 거룩하지 않은 야망을 드러낸다사도들은 “이기적인 야망”(그리스어, 에리테이아eritheia)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야고보는 이렇게 경고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6 또는 약 3:14). 바울은 이기적인 야망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또는 고후 12:20; 빌 1:17; 2:3).“이기적 야망” 또는 “이기적 추구”(롬 2:8)는 모든 인간과 기독교인에게 비극적이며, 기독교 지도자에게는 더욱더 치명적이다. 고독한 레인저에게 그것은 실로 특별한 위협으로 다가온다. 과연 누가 그런 위험을 감지하고 미묘한 형태로라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할 수 있을까? 팀원이다. 또래이자 비슷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지금 당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결정이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 개인의 야망을 위한 이기적인 것임을 알아챌 수 있다.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마음과 유명 지도자의 위치에서 사역하고 싶은 열망은 사실상 백지 한 장 차이이다. 건강한 다수(이름뿐 아니라 기능 면에서 팀을 이루는 경우)는 그러한 이기적인 욕망과 불경건한 야망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기 전에 폭로함으로써 당신이 바른길을 가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하비는 이렇게 썼다. 팀과 함께 하는 사역이 처음이라면 당신은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팀 사역이 사역을 향한 당신의 영웅적인 꿈과 세속적인 욕망을 얼마나 자주 겉으로 드러나게 하고, 그것을 제때 처리하도록 강요하는지 말이다…. 건강한 다수의 지도자(elder) 중 한 사람으로 봉사하기 위해 목사는 자신의 역할을 알아야 하고, 권위에 순종해야 하며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극단적인 흑백 논리를 피해야 하며 내가 가진 은사를 교회에 유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렌즈를 통해 나 자신의 욕망이 아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공동체를 지도하는 것은 우리를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두는 일이다.2. 팀은 건전한 의견 충돌을 일으킨다의견 충돌은 교회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불가피하다. 문제는 의견 충돌의 여부가 아니라 언제, 어떻게 오느냐 하는 것이다. 건강한 팀일수록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기 전인 초기에 발생한다. 성급한 결정을 내림으로 대립하는 상황을 만든 후 통화를 하거나 메일을 보내어 상황을 수습하기보다는 먼저 의견을 듣는 것이 좋다. 사적으로, 당신을 정말 사랑하는 형제와 동료로부터 반대 의견을 미리 듣는 것이 훨씬 낫다. 가까운 형제로부터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것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시각이 근시안적이었고, 틀릴 수 있음을 깨달으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겸손을 배우는 과정이다. 다수의 리더십은 이렇게 적재적소에서 건전한 의견 충돌을 일으킨다. 3. 팀은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기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리더로서, 나도 인간이기에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상 정말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역에 몰두하는 것은 또 다른 측면이다. 팀은 우리의 눈앞에서 내 한계의 겸손한 진실을 보여주고, 우리의 머리와 마음속에서 그 사실이 단지 이론에서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팀 리더십이 더 번창해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비는 말한다. “내게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각자가 믿어야만 한다.” 서로를 필요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공한 사역의 공로가 내게 있다는 가식을 몰아낼 수 있게 된다. 4. 팀은 인내를 시험한다. 그리고 더 나은 결과를 도출한다팀 리더십은 일반적으로 효율적이진 않지만 효과적이다. 효과적인 조직이야말로 주님의 교회가 가기를 원하시는 방식이다. “담임 목사(senior pastor)”가 본질적으로 교회의 CEO일 때 결정과 실행은 매우 빠르게 일어날 수 있다. 반면 팀워크에서는 시간이 걸린다. 일정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제시하고, 반대 의견에 답변하고, 초안을 작성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뉘앙스까지 추가해야 한다. 이처럼 팀 리더십은 일반적으로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지역 교회 리더십의 효율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점은 사회 모든 조직이 정당한 이유 없이도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시대에 신중하게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교회는 효율성이 중요하지 않다. 지역 교회의 다수 리더십에 대한 신약성경의 명확하고 통일된 증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이 되는 교회의 효율성보다 효과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하비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연합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팀으로 부르신다. 교회는 우리가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가 인내해야 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함께 성장할 사람들과 우리를 연합시키신다. 하나님은 인내를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타인의 의견을 겸손하게 경청하는 자세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을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다수이다. 힘들지만 더 나은 사역의 팀워크는 소중한 선물이다. 지금도 전 세계에 흩어진 수천 명의 혈혈단신 목회자가 동료 장로를 갈망하지만,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들의 손을 굳게 붙잡아 주시길 기도한다. 그러나 솔로로 사역하는 부르심에도 은혜가 있기 마련이다. 팀원이라는 차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쉽다. 팀 리더십이 항상 쉬운 게 아니다. 효율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동료 리더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때로는 혼자 인도하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함께 팀으로 앞장설 때 우리 속 교만은 경고와 징계를 받는다. 경고와 징계는 개인적인 안락함과 편리함을 앗아가지만, 그것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당장 불편한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기쁨과 유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원제: Teamwork Humbles Pastors: Four Ways Plurality Challenges Prid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팀사역
솔로사역
팀리더십
겸손
데이브하비
다수의원칙
담임목사
영혼의 감독자가 제대로 보고 행동해야하는 이유
by Joe Rigney
2021-10-05
목사, 장로, 감독(overseer).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직책을 표현하는 세 가지 용어이다. 현대 기독교인이 교회 지도자를 언급할 때, 첫 번째 단어인 목사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두 번째로 장로를 쓰지만, 세 번째 감독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직책과 업무를 이해하는 데 이 세 가지 용어는 모두가 도움을 준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선한 일을 사모하는 감독의 직분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의 끝부분에서 한 가지 대답을 준다. 그곳에서 그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벧전 5:2)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교회의 장로는 하나님의 양 떼를 감독하며 목양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목양의 맥락에서 감독의 의미를 풀 때 모든 장로를 부르신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보는 것, 거기에 더한 책임그럼 목양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실제 목자와 양의 사례를 든다. 목자는 양을 돌본다. 목자는 양 떼를 이끌고 또 양 떼를 먹인다. 목자는 양 떼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곰과 이리와 우는 사자로부터 지키고 보호한다. 그들은 양의 건강과 안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병들 것 같은 양을 위해서는 먹이를 살피고, 진짜로 병에 걸리면 약으로 치료한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해낸다. 공격하는 사자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양 떼를 지킨다. 베드로가 추가한 “감독을 행사하는 것(한글 성경에서는 ‘양무리를 친다’로 번역)”을 고려하면 의미는 더 명확해진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냥 보는 것(sight)과 감독(oversight)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감독에는 당연히 보는 것이 포함된다. 명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감독할 수 없다. 그러나 감독은 단지 보는 것 이상이다. 감독은 거기에 책임까지 더한 것이다. 감독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즉시 조치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제대로 보고 “조치해야 한다.”보는 것에 실패장로가 실패할 수 있는 영역을 생각할 때 그들의 사역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감독이 보는 것과 그에 따라 행동하는 책임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에서 목회자가 실패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을 본다. 첫 번째,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실패하는 경우다. 그들은 언제 무리에게 질병이 퍼졌는지 알지 못했다. 늑대 무리가 언덕 위로 기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고, 양가죽을 입은 늑대에게 속았으며, 진짜 양을 늑대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물이 오염된 사실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실패한 목양을 의미한다.교회 상황으로 보면 장로가 그들의 양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거짓 가르침을 보지 못할 수 있다. 특히나 기만적인 가르침이 남성 사역, 여성 사역, 아동 청소년 사역, 상담 사역과 같은 하위 그룹을 통해 전체 커뮤니티로 퍼져갈 수 있다. 또한 장로가 교인들 사이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파괴적인 행동 패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험담과 중상모략, 믿음 없는 의심, 독선적인 리더십이나 수동적인 리더십 또는 헌신자를 비난하거나 헌신자를 이용하는 것 등 잘못된 믿음과 파괴적인 행동 패턴이 교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것을 제때 보지 못한다면 장로는 감독하지 않은 것이다. 행동하는 데 실패두 번째, 장로가 알면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 퍼지고 있는 질병을 보지만 제대로 약을 바르지 않는다. 늑대를 보지만 도리어 두려움에 움츠린다. 오염된 물을 보고도 양 떼를 다른 목초지로 옮기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보살피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교회 상황으로 보면 장로가 거짓 가르침을 진리로 무장하여 대적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오류를 수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참으면서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는 그와 반대로, 그런 오류가 특정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신학적 갈등만 더 확대할 수도 있다. 그들은 사소한 문제를 너무 자주 일으킬 수도 있고(또는 진짜 중요한 문제를 사소하게 처리할 수도 있고), 조바심이나 게으름으로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파괴적인 행동 패턴에 직면했을 때 장로가 냉정하고 명료한 판단과 진실한 사랑으로 무장하지 못해서 제대로 말을 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들은 교인이 “교회를 떠남으로 의사를 표시(vote with their feet)”하고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두려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다루는 것을 회피할 수도 있다. 전혀 평화롭지 않은데도 “평화, 평화”라고 포장하고 싶은 충동에 굴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만날 때 장로는 분명한 위험을 알기에 그들 앞에 놓인 문제를 현명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용기가 부족할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은 감독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치명적인 유혹아주 교묘하고 치명적인 유혹에 빠져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목회자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목회자는 분명히 보고 있고, 눈에 보이는 현상과 관련해 용기와 연민으로 행동할 준비까지도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양 떼의 특정한 필요, 염려, 문제, 위험, 유혹 등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눈은 위험을 멀리 그리고 넓게는 볼 수 있지만, 정작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인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베드로의 부름은 구체적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양 떼를 치는 것”이 아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치라”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 교인을 돌보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남의 교인이 아니다. 다른 목자의 양이 아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맡은 자들을 감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스턴트 뉴스와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는 이런 사실의 중요성을 놓치기 아주 쉽다. 목회자가 저쪽에 있는, 도시 반대쪽이나 나라 반대편에 있는 양 떼의 건강을 놓고 걱정하기는 쉽다. 그러나 정작 자기 양 떼가 처한 위험은 무시하고 저 멀리 다른 양 떼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이 사랑이 많은 목자, 더 목자다운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자기 교회에는 홍수가 났는데 다른 동네나 다른 교단에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모습, 온라인에서 차고 넘치는 화재를 진압하겠다며 양손에 소화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목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지혜롭고 신실한 목자는 그들 가운데 있는 양 떼의 필요와 염려, 그들이 처한 문제와 위험 그리고 유혹과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인다. 더 많은 눈과 더 많은 손보지 못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위험에 직면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큰 도움을 주셨다. 첫 번째는 다수의 장로이다.지역 교회 장로에 관한 신약의 모든 언급에서처럼 베드로는 장로를 복수로 말한다. 장로가 여러 명일 때 더 많이 보고 더 잘할 수 있다. 한 명의 양치기가 360도 시야를 확보할 수는 없다. 한 명의 양치기는 거시적 위협과 미시적 위험에 주의를 기울일 수는 없지만, 양치기 팀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떤 목자는 수평선을 동쪽으로 훑어볼 수 있고 또 다른 목자는 지평선을 서쪽으로 훑어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진 위협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늑대 무리가 계곡에 정착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목초지의 상태와 개별 양의 건강 문제가 소홀히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장로가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함께 치면 혼자 보고 행동할 때보다 더 많이 보고 더 큰 지혜와 명철로 행동할 수 있다.감독자를 위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두 번째 도움은 기도이다. 감독을 행사하라는 부름과 잠재적인 두 가지 실패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좋은 방법을 제공한다. 하나는 목회자가 교회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분명히 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현실에 주목해서 자신이 담당한 교인들의 필요와 위험 그리고 그들의 상황과 유혹까지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전국의 많은 교회에서 화재가 발생했지만, 우리 교회는 홍수가 났다면 우리가 원하는 목사는 소방관과 소방 호스가 아니라 모래주머니와 구명 뗏목을 들고 오는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목회자가 양 떼 속에서 봐야 할 것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와 행동할 용기와 동정심을 갖고 말씀을 통해서 양들에게 최선의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보아야 할 것을 본 목회자는 이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행동해야 하는가? 누가 그것을 말해야 하는가? 언제, 얼마나 자주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목회자로서 감독을 잘 하려면 마음과 배짱(nerve), 용기와 연민, 복수의 동역자(plurality)와 책임 그리고 가르침과 기도가 필요하다.원제: Overseers of Souls: Why Elders Must See and Ac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교회
교회사역
감독자
목양
목회사역
장로
목자
목회자
동역자
양치기
코로나로 힘든 와중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은 이유
by Derek Buikema
2021-09-30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다음 날인 11월 4일 수요일, 내 이메일 편지함은 교인들이 보낸 이메일로 가득 찼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나는 우리 교인들이 보낸 이메일 내용에서 목사로서 내가 실패하고 있다는 목소리를 들었다.당신도 어쩌면 내가 받은 것과 같은 비난을 들었을 수도 있다. ‘목사님은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너무 조심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대면 예배에 충분히 신중을 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정의와 인간의 성적 정체성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합니다.’ ‘목사님은 정치적으로 너무 진보적입니다.’ ‘목사님은 너무 보수적입니다.’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회중을 인도하는 사역을 어느 목사라고 잘 할 수 있겠는가? 인종차별주의 논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인종차별에 빠진 국가에서 인종 간의 긴장을 헤쳐 나가고,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이해하고, 기독교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누가 분명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성에 대한 사람들의 관점에 기독교적 견해와 상충되는 방향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서구 세속 문화 속에서 기독교적 관점을 누가 충분히 잘 선포할 수 있겠는가?나는 아니다.팬데믹이 진행되면서 나는 내가 무능력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메시지를 정기적으로 받았다. 나의 무능력에 대한 현주소를 알려주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같은 달에 나의 설교 교수이자 사역의 모범을 보여주신 나의 평생 멘토이셨던 할아버지가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 떠나 가셨다. 나는 할아버지 장례 설교를 했는데 거기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지 모르고 있던 친척으로부터 전염되었다. 몇 달 후, 아내는 임신했고 우리는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임신 8주가 되던 때에 태아의 심장 박동이 멈추었고, 우리는 그 태아를 땅에 묻었다.전염병 관련 문제가 발생하고 개인적 손실이 누적되면서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신적, 육체적, 영적 피로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이곳에서 계속 목회를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원하기나 할지 궁금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실패뿐인 것 같았다.나는 다른 주에 있는 교회로부터 더 많은 휴식과 더 적은 사역을 약속하는 청빙을 받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만료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남기로 했다.내가 머물기로 결정한 다음 주일은 부활절이었다. 우리는 야외에서 마스크 없이 해맞이 예배를 드렸다. 1년여 만에 처음으로,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아내는 “우리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여기에 남기로 해서 너무 좋다”고 말했다.평범한 영광지난 주에 나는 집 건너편 산림 보호 구역에 달리기를 하러 갔다. 날씨가 습해서 빨리 지쳤다. 다리 쪽으로 조금 달려가다가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며 천천히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대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에너지를 모을 때까지 뒷마당에 누워 있었다.다음날 나는 아이들을 같은 다리로 데려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나는 아이들이 엄마를 위해 야생화와 잡초를 따서 튼튼하고 예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도록 유모차에서 내려주었다. 길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연의 각 부분이 함께 상호 작용하며 숭고한 걸작을 만들어 내도록 하신 그 아름다움에 마치 내 모든 자아가 흡수되는 것 같았다.하루 전에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놓쳤는지 궁금했다. 내가 어떻게 그 모든 영광을 놓쳤을까? 대답은 분명했다. 고통과 피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이 평범한 아름다움의 영광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내가 섬기는 회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굉장한 회중은 아니지만, 올랜드파크교회에는 평범한 영광이 있다. 선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 지체들을 숭고한 걸작으로 엮어 놓으셨다. 이 회중은 충성스럽고 충실하며 기꺼이 도우려 한다.몇 년 전에 한 교인은 자동차를 수리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 사역을 통해 이제 천 대가 넘는 자동차를 기부했다. 교회에는 많은 건축업자와 상인이 있으며, 매년 이들이 모여 함께 작업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집을 짓는다. 우리 교회는 20채의 집을 지어 집을 필요로 하는 가정에 나누어 주었다.우리 교인들은 예언자적 순종이 필요한 문제에 대해 기꺼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 그들은 관대하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그들은 서로 감사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카드를 보낸다.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교인들이 보낸 카드는 쌓아 놓으면 두꺼운 사전 두께만큼 되었고, 태아를 잃었을 때도 그랬다.내가 섬기는 교회는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영광스럽다. 그러나 나는 고통과 피로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이례적으로 힘든 1년 반을 보낸 후 같은 종류의 피로를 느끼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내가 자주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교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실패밖에 없는 것처럼 느끼고 있다.피곤함이나 상처로 인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을 다시 하기 어렵다면, 겸손히 눈을 들어 잠시 동안 고통 너머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이 속한 성도들의 모임이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원제: Why I’m Staying at My Church After a Hard Ye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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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
아름다움
팬데믹
대면예배
사회적거리두기
한 때 가장 두려워했던 일, 가족의 장례 설교
by Hershael York
2021-09-25
지난 7월 27일, 나는 장인 장례식에서 설교했다.결혼 생활 32년 내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장인을 바라보며 나는 언젠가 일어날 이 끔찍한 일을 두려워했다. 그는 그리스도나 그의 복음의 어떤 부분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했고, 직접 전도했고, 또 다른 사람들을 보내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5년 전에는 투쿠나레(공작농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브라질 마나우스로까지 모시고 가서 전도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그의 영혼을 위해 발버둥쳤다.그의 영혼을 위한 노력마나우스에 머무는 내내 우리는 숙식을 제공한 절친한 친구인 데이비드와 페니가 섬기는 노바 바티스타 교회(Nova Igreja Batista)에 참석했다. 데이비드 부부와 노바 교회의 모든 교인이 장인을 향한 우리의 구원 계획에 공모자가 되었다.나는 구세주를 숭배하고 찬양하는 수천 명의 브라질 사람들로 가득한 거대한 성소의 맨 앞줄에 앉아 있던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장인은 그들이 계속해서 노래하는 찬양의 가사 속 한 단어, 한 단어에서 바로 예수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내 아내를 바라보며 이렇게까지 말했다. “얘야, 이 사람들, 자신이 노래하는 가사를 정말로 믿고 있구나.” 그녀는 그 순간을 십분 활용해 예수님이 지금 찬양하는 모든 이의 삶을 바꿨고, 바로 그것이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찬양하는 이유라고 증거했다. 우리가 켄터키로 돌아왔을 때, 공항에 나온 조카가 할아버지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조카가 나중에 말하길, 할아버지는 집에 가는 내내 노바 교회와 데이비드 그리고 페니에 대한 이야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루마 강에서 보낸 삼 일 간의 낚시, 그리고 민물 돌고래, 카이만, 고함 원숭이 등등 장인이 브라질에서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것들은 정작 장인의 머리에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 복음을 향한 명백하고도 깊이 있는 믿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몇 달 후, 장인은 쓰러졌다. 어느 날 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다시는 걷지 못했다.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든 병시중이었고, 결국 한 때 드넓은 대자연도 좁은 공간인 양 활개치며 살던 장인은 네 면의 벽으로 제한된 요양원 작은 방에 등을 대고 누워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처음 사오 일 동안 우리는 장인 방에 텔레비전을 들여놓기 위해 각종 행정 절차를 거쳐야만 했지만, 결과적으로 난청 때문에 텔레비전도 그에겐 우리가 없을 때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가 그를 강권했고, 결국 그는 가장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곳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요양원의 조용한 방에서 누군가 그에게 복음을 전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예수님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반복해서 생각나게 하셨다. 그는 마침내 복음이 자녀들과 손주들, 그리고 사망한 아내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도무지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위, 자네가 내게 설교해줘’요양원에 들어간 바로 다음날 장인을 다시 만난 아내와 나는 그의 태도에 놀랐다. 솔직히 우리가 예상한 것은 요양원을 퍽이나 싫어하는 장인의 비협조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긍정적이었고 뭔가에 집중한 듯 보였다. 그는 분명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그를 살아남도록 만든 동일한 투쟁심으로 현재의 도전에 대처하고 있었다. 우리는 적잖이 놀랐다. 우리가 가려고 일어났을 때, 장인이 손을 들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했다. “사위, 자네가 내게 설교해줘.”그는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가 혼란스러운 상태이거나 아니면 나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너무 이례적이어서 그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지난 32년 동안, 그러니까 그 때 그 순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자기를 위해 또는 함께 기도하자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며칠 전에 그가 했던 말은, “날 위해 좋은 말 좀 해줘.”였고, 나는 그게 기도해달라는 말로 받아들여 기도를 했었다. 이제 나는 “설교해달라”는 말을 해석해야 했고, 그건 분명히 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는 장인의 손을 하나씩 잡고 기도했다. 하나님께 그의 뜻대로 그를 강하게 하시고 낫게 해 달라고 간구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임을 그가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다. 나는 장인이 너무 오랫동안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음을 하나님께 고백했고, 장인이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에 압도되어 완고한 마음을 회개하고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이 자라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내가 “아멘”하고 기도를 마쳤을 때, 장인은 내 손을 두드리고 나를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나, 이미 그렇게 했다네.”“나, 이미 그렇게 했다네”우리 부부는 회의적이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와 비슷한 말 조차도 과거에 한 적이 없는 장인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너무 쉽게 구원을 확신한 게 아닐까 걱정했다. “뭐라고요?”“이미 그렇게 했다니까.”“그러니까 죄를 회개했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거예요?”“그렇다니까. 나 이미 다 회개했어.”“저기, 장인어른, 이거 정말로 중요하거든요.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장인어른하고 함께 영원을 보내고 싶어서 그래요.”“그렇게 될 거야. 나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니까.”그 누구도 바라지 않을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날로부터 시작된 장인의 마지막 삼 년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제대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도 역사한 은혜였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장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래서 7월 27일 장례식 설교는 결코 내가 두려워하던 내용이 아니었다. 그날 내가 한 설교는 라합이나 룻 또는 마지막에 구원받은 십자가의 도적의 장례식에서나 했음직한 내용이었다. 그것은 구속의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손조차 닿을 수 없을 것이라 보았던 한 사람에게까지 확장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였다. 새벽부터 일한 자와 똑같은 상을 받은, 오후 다섯 시에 도착한 일꾼의 이야기였다(마 20:1-16). 그것은 은혜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원제: Preaching the Funeral Sermon I Once Most Dread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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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을 설교하라(2)
by 고상섭
2021-09-17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을 설교하라의 첫 번째 아티클은 2020년 6월 16일자에 올라와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설교의 적용이다. 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적용이 없는 설교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 교수로부터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배운 팀 켈러도 목회를 하면서 다양한 적용의 필요성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 교수를 추모하면서 그 제자들이 만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책에서 팀 켈러는 적용에 대한 고민을 언급했다. “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다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해석학적 측면에서는 건전하고 고무적으로 하지만 그 본문이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 팀 켈러도 본문에서 예수님을 선명하게 드러내었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팀 켈러가 찾은 자신만의 방법은 무엇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에드먼드 클라우니와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이 말하는 구속사적 설교에서 적용부분이 강화된 것을 알 수 있다.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적용의 원리는 “The Gospel changes everything!”(복음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이라는 구호로 요약될 수 있다. 1. The Gospel : 은혜와 순종의 순서를 기억하라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신학에서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을 분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이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 당시에 율법주의와 복음을 구분한 표현으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이 원리를 설교에 적용해보면, 구체적인 행위의 변화를 적용하기 전에 반드시 칭의 즉 구원의 은혜를 먼저 언급하라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법을 살펴보면 인간이 명령에 순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먼저 행하신 구원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실 때는 단순히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근거해서 그 은혜가 자발적인 순종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다.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의무적인 율법이 아니다. 만약 지키지 않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순종한다면 자발적인 순종이라할 수 없다. 출애굽기 20장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러한 명령을 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은혜를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2) 하나님은 자신을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한 여호와라고 소개한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에 앞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신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구원받았다. 바로 유월절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구원얻은 것이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구체적인 명령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선포한다. 이것은 설교의 구체적인 적용을 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적용은 단순한 인간의 의지를 자극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은혜의 반응으로서의 순종인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적용을 하기 전에 먼저 The Gospel 즉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설교할 필요가 있다. 2. Changes everything : 은혜의 동기로 순종을 강조하라그러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적용이 끝난 것이 아니다. 단지 복음의 은혜를 드러냈을 뿐이다. 이제 그 은혜를 삶으로 적용하여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적용이란 다른 일반 설교의 적용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은혜와 순종의 순서를 지키는 것이다. 은혜가 동기가 되어 삶의 모든 영역(everything)에 적용될 수 있도록 복음이 어떻게 삶에서 역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팀 켈러는 다양한 삶의 주제들을 복음과 연결해서 설교한다. 마가복음 14장 46-49절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 중에서 제사장의 귀를 칼로 자르는 장면이 나온다. 팀 켈러는 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주를 따르겠다고 큰 소리 치는 사람이지만 정작 위기가 오면 세상의 방식 즉 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지 않은가? 말로는 정의와 평화와 공평의 편이라고 외치면서 막상 시험이 닥치면 검 자루에 손이 간다. 우리를 검을 위시해서, 돈, 권력, 성공, 명예로 이어지는 이 세상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왕의 십자가, 279쪽)그리고 그리스도는 세상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 즉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분이라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면 우리도 늘 세상의 방식으로 칼을 잡는 삶에서 변화될 수 있다고 적용한다. “스스로 구원하려는 사람들, 자손심을 세우려는 사람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 돈과 권력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두 가지 극단 중의 하나다. 너무 사랑하던가 너무 미워하던가, 첫째 돈을 미워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돈과 권력을 멀리하면 스스로 고결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행위이다. 그런가 하면 돈과 지위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도 역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태도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돈과 권력이 있든 없든 연연하지 않는다. 돈과 권력이 생기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서 좋다. 돈이나 권력이 사라져도 하나님이 또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실 테니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런 사람은 일을 하지만 일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왕의 십자가, 284쪽)팀 켈러 설교에서의 적용은 구체적인 행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그 행위의 동기가 되는 마음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변화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의 결과가 나오는지를 설명한다. 일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일에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먼저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일과 영성>이란 책에서도 타락한 세상 속에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이 땅에서의 일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동참하는 과정임을 이야기 하면서 구원을 통해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된다고 일의 동기를 복음으로 바꾸어준다며 다음과 같이 적용한다.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주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능숙한 사역이다. 하나님이 일을 주신 목적이 인간 공동체를 섬기게 하는 데 있다면, 그 뜻을 받드는 으뜸가는 길은 주어진 과업을 끝낼 뿐만 아니라 제대로 해내는 것이다.”(일과 영성, 94쪽)그리고 도리시 세어어즈(Dorothy Leigh Sayers)의 문장을 인용한다. “교회가 목수에게 신앙을 좇아 살려면 무엇보다 훌륭한 테이블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가르쳐야 한다.”구원의 은혜가 일상의 직장 생활에서 탁월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웃 사랑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구원의 은혜에 있다는 것이다. 은혜가 순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애국심을 심어주지 않고서 전쟁에 군대를 내보내는 것과 비슷해진다. 단순한 순종과 구체적인 적용을 강조하면 율법주의로 치우칠 위험성이 있다. 복음은 은혜의 반응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팀 켈러의 <센터처치>에서 복음 신학을 보면 ‘The gospel changes everything’(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소제목이 나온다. 여기서 팀 켈러는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급과정이 아니라 시작부터 완성까지 관통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통해 다양한 주제들을 연결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낙망과 우울, 사랑과 인간관계, 성(性), 가정, 자기 관리, 인종과 문화, 전도, 인간의 권위, 죄책감과 자아상, 기쁨과 유머, 다른 계층에 대한 태도 등을 소개하고 있다.팀 켈러의 설교에서 적용은 칭의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구체적인 삶의 순종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팀 켈러 설교에서 적용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말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이해부족이라 할 수 있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드러냄으로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은혜의 동기가 순종으로 이어지는 인격적 순종의 과정을 추구한다. 이런 복음 중심적 적용만이 은혜를 강조하지 않는 순종이라는 율법주의와 은혜만을 강조하는 반율법주의의 오류에서부터 벗어나 제 3의 길을 제시할 수 있다. “The Gospel changes everything!”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구호 그대로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으로 인해 모든 영역이 변화되는 것이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의 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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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사역자를 구하기 어려운 일곱 가지 이유
by Griffin Gulledge
2021-09-16
6개월 전, 아내와 나는 새로운 목회를 시작하면서 삶을 정리하고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 집을 찾아보면서 우리는 주택 시장에 집이 거의 나와 있지 않으며 거의 모든 집이 요구하는 가격보다 훨씬 높게 팔리며 선택의 폭이 매우 좁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아주 어려운 주택 시장 상황에서 집을 구하고 있었다.빡빡한 주택 시장은 청소년 사역자가 없는 오늘의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듣는 고민거리는 “청소년 사역자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청소년 사역자가 부족한 이유 일곱 가지를 살펴보자.1. 청소년 사역자 공포 이야기목회자들은 자기들의 사역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는 새어 나오게 되어 있다. 청소년 사역을 시작하고나서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임을 발견한 사람들의 악몽 같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진짜' 목회자가 아니라 성스러운 베이비시터 취급을 받고, 부당한 대우와 저임금을 받으며, 존중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부모는 자기 자녀를 신앙으로 교육시키는 일을 청소년 사역자에게 떠넘긴 다음에 자기 자녀가 어려움에 처하면 그에게 책임을 돌린다. 탈진은 현실이고, 청소년 사역은 너무 많은 젊은 사역자들을 집어 삼킨 후 내뱉는 것 같다.2. 교회 개척의 매력교회 개척은 사역에 부름받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훨씬 더 인기를 얻고 있다. 한 세대 전에는 목사가 25세나 30세에 교회 개척이라는 힘든 사역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대신, 청소년 사역자로 시작하여 봉사하며 사역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신학교 졸업생들이 청소년 사역의 어려움을 감내하기보다는 커피숍에서 일하며 교회 개척을 돕는 쪽으로 가고 있다.3. 돈에 대한 불경건한 동기청소년 사역은 다른 일보다 수입이 적다. 그게 잘못된 것인가? 그렇다. 그것이 현실인가? 그 또한 그렇다. 한때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족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을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름을 받고 목회자가 된 일부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했던 것처럼 차나 휴대폰을 파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로 인해 급여를 삭감 당하기보다는 말이다.너무 많은 사람들이 (칭찬받을 만한 이유인) 가족을 부양한다는 명목으로 사역의 기회를 거부하지만, 실제로는 안락한 삶에 대한 세상의 표준을 따르고 싶어하는 것이다. 젊은 신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가족을 부양할 수 없는 교회나 비상 사태로 인해 무너지는 교회에 가지 말라. 교회에 가려면 경차가 아니라 중형차를 운전하는 교회를 선택하라.4. 상향 이동에 대한 욕구큰 교회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큰 연못에서는 상향 이동을 더 빨리 할 수 있다. 잘 배치된 인턴십, 전임 또는 펠로우십 프로그램에 남아 있기 위해 사역의 자리를 거절하는 것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그 자체는 비판받을 일이 아니다. 나는 전임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그중 일부는 매우 유익한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현 시대에는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작은 마을이나 작은 교회에서 청소년 사역자가 되기보다는 큰 교회에서 일하면서 봉급을 모으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5. 장소와 사람의 우상화많은 신학생들에게 도시를 떠나는 것은 요나가 니느웨로 부름을 받는 것과 같다. 작은 마을이나 작은 교회의 사역은 특권이 아니라 형벌로 여겨져 왔다.또는 사모가 다음과 같이 선을 그을 수 있다. “나의 부모(가족 혹은 친구 등)를 떠나 그렇게 멀리 이사가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편안한 곳에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분의 부르심을 제한된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부르심을 대놓고 거부하는 방법이다.6. 사역에 대한 열망이러한 경향에 기여하는 몇 가지 좋은 동기가 있다. 많은 잠재적인 청소년 사역자들은 학생들을 위한 사역에 특별히 열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 자리를 디딤돌처럼 취급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고귀한 것이다. 이력서를 작성하고 6개월 만에 그만두고 싶다면 지원하지 말라.하지만 제자를 삼는 일에 열정이 있다면 학생들보다 더 비옥한 땅은 없다. 담임목사, 제자훈련목사, 선교사로서 미래의 기회를 열어 두고, 한동안 이 사역에 열정을 쏟아보는 것은 좌천당한 것이 아니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그 사역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 놓치지 말라.7. 깨진 약속청소년 지도자들은 종종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그들을 지원한 적이 없는 담임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더 나쁜 것은 채용 단계에서 제자훈련과 청소년 사역에 대한 지원, 설교 기회 등을 약속하지만 채용 후에는 그런 지원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화되지 않으면 절망감이 생길 수 있다. 고립되고 무시당하고 아무것도 못한 채 막혀 있으려고 사역의 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설상가상으로 수많은 청년 사역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짓밟히거나 변호를 받지 못하고 사역을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종종 그들을 채용하여 그 직분을 맡긴 담임목사에 의해 이런 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청소년 사역에 대해 지원하지 않고, 더 심한 경우, 직접적으로 그들을 부당하게 대함으로써 교회에 상처를 입히고 다음 세대를 위한 청소년 사역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린다. 목회자들은 청소년 사역자들을 지원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제자 삼는 일을 할 수 있다.청소년 사역은 목회자 양성을 위한 인큐베이터가 될 수 있다. 청소년 사역자들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일하고, 시스템을 구축하고, 말씀을 전파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물론 담임목사의 투자와 지원이 중요하다. 또는 이를 통해 학생들을 섬기라는 평생의 소명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청소년 사역은 진정한 사역이고, 청소년을 위한 목회자는 진정한 목회자다. 바나(Barna) 연구소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사람들의 64퍼센트가 18세 이전에 그런 결단을 한다고 추산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문화적 시기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선교지는 문화적 변화의 가장자리에 있는 고등학생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원제: 7 Reasons It’s Hard to Find a Youth Minist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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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사역자
번아웃
목회자양성
사역자소명
인큐베이터
우상화
교회개척
상향이동
비난을 견디게 하는 로마서 8장의 질문 두 가지
by Dan Doriani
2021-09-14
비난은 리더의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을 괴롭게 한다. 정치인은 자신의 재선에만 신경을 쓴다는 비난을 받는다. 기업의 경영자는 통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인해 파산하는 것을 막고자 노동자를 해고하더라도 이기적인 행위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상담사는 고객이 결혼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얻지 못하거나, 불안감을 극복하지 못할 때 비난을 받는다. 아이의 부모님은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극성스러운 아이로 인해 비난을 받는다.바울이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라고 말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딤전 5:19). —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인기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하므로 불가피하게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 된다. 물론 리더 역시 완벽할 수 없다. “두세 증인”이 혐의를 확인하면 죄를 범한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음을 받게 함으로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여야 한다”(딤전 5:20). 우리가 만약 고발당한다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기만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비난한 책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을 실망하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실망하게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편 139편 23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나를 살피시고 나를 시험하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라고 기도해야만 한다.리더의 자리에 있든 아니든, 남들이 진실로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그 비난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가 있다. 성경에는 악의적인 중상모략을 당한 여러 인물이 있다(마 5:11–12; 시 35:11–16; 41:5–7; 창 39:13–18; 벧전 3:16). 우리는 이런 어려움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이런 어려움에 있는 사람을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나는 바울을 말씀을 떠올린다.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속량해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묵상하며 로마서 8장에서 던진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본다.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로마서 8장 31절은 우리가 어떤 원수를 만나도 그것은 하나님보다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해석한다. 이 번역은 독자들에게 믿는 자에게는 대적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실제로 바울은 박해와 칼로부터의 위협을 나중에 언급한다(롬 8:35).여기서 칼은 바울 서신을 읽는 사람들에게 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그들의 칼은 입을 막거나 힘으로 짓누르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고 위협하는 폭군들에게 대항하던 제자들을 향하고 있다. 폭군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우리를 반대한다. 직장에도 경쟁자가 있고, 까다로운 이웃과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에게는 또한 죄, 죽음, 육신 그리고 마귀와 같은 영적인 적들도 있다. 여기에 사고와 질병을 더할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만성적이든 간헐적이든 우리 자신을 상하게 하는 사각지대와 죄악이 있다.만약 이 모든 것의 경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길로 행한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뜻에 반대하여 행하신다. 바벨론과 앗수르에게 “나는 너를 대적한다”라고 말씀하셨다(렘 50:31). 그는 또한 반항적인 이스라엘과 거짓 목자들에게 “나는 네 대적이라”라고 말씀하셨다(렘 21:13, 겔 13:8-20).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는 너를 위해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은혜롭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면 앞에 나열한 적들은 감히 우리를 대적할 수가 없다.누가 고발하리요?바울의 다음 질문은 더 길다.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사람들이 우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비난하고 책망한다. “고발한다”로 번역된 εγκαλεο(egkaleo)는 바울을 고발(행 19:38–40; 23:28–29; 26:2–7)하는 묘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 누구나 비난받는 것을 경험한다. 기독교의 대적들은 기독교인들을 오만하고 율법주의적이며 총으로 무장한 반환경주의자라고 부른다. 특히 성적 윤리에 있어서 우리는 사람들의 결정에 찬성할 수 없으므로 편협한 자로 낙인찍혀있다. 그러면서 우리 내부의 잘못에는 관대하기에 위선자라는 비난도 함께 받는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비난은 일부 타당한 것도 사실이다.이사야 50장 6절부터 9절에는 하나님의 종이 학대와 중상모략을 받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예고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육체적 고통을 넘어 하나님의 종이 수치를 당하고 거짓 혐의를 받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대답한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사 50:8-9).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했고,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를 저질렀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그를 회복시키셨다.근거 없는 비난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의 주요 전략으로 남아있다. 스가랴 3장은 제사장 여호수아가 성전에 서 있는 환상을 보여준다. 제사장에게 어울리는 의복을 입고 희생 제물을 바치는 대신 그는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사탄은 그런 상황에서 제물을 바칠 자격이 없는 그를 비난한다. 그러나 주님은 사탄의 입을 막으시고 천사에게 이르시기를,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3-5)라고 말씀하신다.믿는 자들에게 가장 무거운 비난이 있다. 사탄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잃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하여 죄로 가득한 존재임을 아시지만, 더러운 옷과 같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옷을 입히신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부터 11절에 따르면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다.”라고 말씀하신다.우리에게 남은 무기력한 참소자들이제 예수님께서 우리를 참소하는 자들을 침묵하게 하셨으니 누가 감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탄은 계속 지껄이고 있고, 우리는 자신을 책망한다. 세상은 우리를 비난하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공격을 당한다. 정치인, 의사, 목사 또는 참을성이 없는 운전자들로부터 일부러 타이밍이 맞지 않게 신호등을 설계했다고 비난받는 도시계획가 등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비판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울의 시대에 문서검열관들은 고발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을 파멸시키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믿는 자들을 실족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많은 사람이 비난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비난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롬 4:25). 이제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의 일을 완성하신다. 하나님의 오른편은 권위의 자리이고(시 110:1) 그 핵심은 심판자로서의 자리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신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하나님께 우리를 대신하여 변론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변하여 주심으로 심판의 날에 우리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나 비난을 받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 비난이 사실이라면 참회하고 정당한 의로움을 선물로 받자.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라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우리의 대변자를 믿자. 그가 우리의 영혼에 더 큰 은혜를 베풀기를, 그의 음성이 우리의 귀와 가슴에 울려 퍼져서 그의 공의 가운데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자.원제: If God Is for Us: Standing Accused with Romans 8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목회
리더십
비난
대적
칭의
함께하심
로마서8장
난관
심판의날
참소자들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들
by 고상섭
2021-07-21
최근 팀 켈러의 책들이 번역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관심이 높아진 만큼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도 함께 있는 것 같다. 특히 팀 켈러의 설교가 극단적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비판하는 논문들도 등장하고, 행동이 강조되지 않아 적용이 없는 설교라는 비판들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필자가 팀 켈러는 아니지만, 팀 켈러를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그 비판이 팀 켈러의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 번째 오해: 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삼위일체 중심 설교를 해야 한다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성경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할 때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일원론 설교’란 삼위 하나님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만을 별도로 강조하는 설교를 말한다. 그렇게 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분리가 되어서 청중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대체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극단적 그리스도 일원론적 설교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만을 따로 떼어서 설교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Sidney Greidanus)는 그의 책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이레서원)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가장 많이 혼동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설교함’이라는 의미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하게 말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구속사의 전 영역이라는 문맥에서 전파하는 것을 의미했다. … 바울에게 있어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모든 설교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만을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 그 이상의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큼이나 광범위하다. …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나사렛 예수님의 인성과 사역, 그리고 그의 가르침의 여러 국면들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를 믿고, 신뢰하고, 사랑하며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그리스도 일원론’으로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한 결과일 것이다.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부흥과개혁사)라는 책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와 삼위일체 중심적 설교는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동시에 삼위일체 중심적인 좋은 소식에 대한 단일한 선포가 존재한다. 삼위일체 교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동일한 하나의 실제를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중심적이 될수록 그만큼 그리스도 중심적이 된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은 성부를 방각하는 것도, 성령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를 할 때 성자와 성부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말은 성경을 문맥에 맞게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이다.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3~24)사도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말하지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마무리한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결코 하나님과 분리된 설교가 아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이단들의 논란이 있었을 때 니사의 그레고리우스(Saint Gregorius of Nyssa)가 말한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삼위일체의 바깥으로 사역은 나눠지지 않는다.” 삼위일체를 공부할 때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누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공부하는 이유는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이지 사실 삼위일체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도 독자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시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3~15) 신구약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성령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깨달을 수 있다. 결국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그리스도 일원론적 설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적 설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반대해서 극단적으로 ‘삼위일체적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일침한다. “모든 설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자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신약의 서신들은 처음에 시작되는 인사말과 끝에 나오는 축도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11개의 신약의 서신서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언급한다. 이런 신약의 언급이 ‘성령님’을 뺀 잘못된 설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오해 : 은혜를 적용함으로 실천과 행위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단순히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강조하지 못하게 되는 약점이 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지적들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아닌 제3의 길인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는 팀 켈러의 메시지를 잘못 이해할 때 생기는 오해들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하게 되면 “~을 하지 말라” 또는 “~을 하라”는 적용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팀 켈러의 설교를 비평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팀 켈러의 설교를 처음 배워서 적용하려는 사람들에게서도 많이 제기되는 의문이다. 팀 켈러는 그의 책 ‘설교’(두란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설교의 마지막을 ‘이렇게 살라’는 문장으로 끝내지 마라, 대신 ‘우리는 이렇게 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신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도 이런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로 마무리하라.”이 말은 인간의 의지를 말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렇게 살라’라는 말을 절대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할 경우 의지적 행위를 촉구하지 않는 형태의 설교라고 오해할 수 있다. 박현신 교수는 ‘가스펠 프리칭’에서 팀 켈러 설교에 대한 비평을 하면서 “성화의 열매인 율법의 제3용법과 언약적 충성의 차원에서 은혜언약에 근거한 윤리적 적용과 실천에 대한 강조가 약화된 측면은 없는가?” 라고 물었다. 김창훈 교수는 위의 팀 켈러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브라이언 채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팀 켈러와 브라이언 채플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면 ‘비구속적 메시지’가 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팀 켈러의 변증설교’의 저자인 박용기 목사도 팀 켈러의 설교의 약점 중의 하나는 ‘의지적 훈련을 약화시키는 설교’라고 지적하면서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자기 의지적 훈련이 결여되었다고 평가했다. 자기부인이라는 의지적 결단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행위와 의지를 약화시키는 잘못된 은혜 중심적 설교인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팀 켈러가 ‘센터처치’(두란노)에서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의 책을 언급한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제임스 스미스는 ‘습관이 영성이다’와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라는 책등을 통해 인간의 몸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팀 켈러는 전반적으로 제임스 스미스의 주장을 인정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한 가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점은 지나치게 마음을 주장하거나, 지나치게 행동을 강조하는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제임스 스미스가 지나치게 몸과 습관을 강조한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라고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는 행동하는 대로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각이나 행동을 열쇠로 숭상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적 견해는 강의나 설교가 삶을 바꾸는 주요 통로라고 본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는 예전과 성찬을 주된 방법으로 본다. 그러나 열쇠는 마음에 있다. 마음의 헌신은 회개를 통해 바뀌게 된다.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기도를 가르칠 때 ‘우리의 마음과 옹 몸이 세상적이고 육적인 모든 욕망들에 대해 죽게 하시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서 당신의 복된 뜻에 순종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팀 켈러는 은혜를 강조하면서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 것을 플라톤적 견해라고 말한다. 또 행위를 먼저 강조하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라고 비판한다. 그럼 팀 켈러의 견해는 무엇인가? 토마스 크랜머의 기도처럼 마음의 회개가 일어난 뒤 하나님의 복된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의 핵심과도 같은 부분인데 ’복음과 복음의 결과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은혜만을 강조하는 것도 행위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닌 순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은혜만을 강조하면 반율법주의자가 된다. 또 행위만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자가 된다. 이 둘을 피하면서 복음을 제시하는 제3의 길은 바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혜택을 분리하지 않는 즉,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팀 켈러는 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지 말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기 전에,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선포하기 전에 바로 의지적 적용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타락한 상황을 드러내는 것(FCF, The Fallen condition focus)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자기절망을 경험한 후에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우리 대신 행하셨다는 복음을 듣고 나서 그 은혜를 동기로 해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Buchanan Ferguson)은 ‘온전한 그리스도’(디모데)에서 팀 켈러가 말한 ’복음과 복음의 결과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 받은 혜택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다시 말해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될 때 “~하라”, “~하지 말라”라는 메시지는 인간의 의지적 행위만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율법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지 않을 때 “~하라”, “~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그리스도가 대신 행해주셨다는 그 은혜의 동기로서 순종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공로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감사일뿐이다. 만약 은혜와 선행이 분리된다면 그 선행은 결국 자기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팀 켈러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성화를 강조하지 않는 설교가 아니다. 칭의의 은혜를 먼저 선포한 후에 성화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팀 켈러는 좋은 설교자지만 완벽한 설교자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팀 켈러의 설교에 어떤 오류도 없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팀 켈러의 설교를 비평할 때 정확한 사실에 기초한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계몽주의 이후의 학문은 통합하기 보다는 분석하고 나누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이다. 그리고 논문이나 서평을 쓸 때도 반드시 아쉬운 점을 쓰는 것이 더 비평적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아쉬운 점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삼위일체적이지 않다거나, 의지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지적은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부분에 대한 오해이기에 팀 켈러의 설교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선입견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적 설교를 반영하려고 노력하는 설교이다. 또한 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은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이기에 인간의 회개와 은혜의 반응으로서의 순종을 더욱 극대화 시키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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