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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변증이란 무엇인가?
by Collin Hansen
2023-03-12
몇 년 전 나는 사회학자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에게 당시 정치 캠페인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문화 전쟁”(culture war)이라는 말을 도입한 이 사람보다 내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는데, 그는 손을 흔들며 자기는 일기 예보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그렇다. 그가 연구하는 것은 말하자면 기후학(climatology)이다. 일기 예보가 아니다. 그의 말이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더 많은 문화 기후학자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하루도 빠짐없이 쏟아지는 뉴스(“날씨”)에 습관처럼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작동하는 뿌리 깊은 가치, 이데올로기, 내러티브 및 패턴(“기후”)을 능동적으로 연구하고 평가하는 이가 필요하다. 켈러 센터가 그렇다고 오로지 문화 변증(cultural apologetics)만이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는 유일한 방법, 심지어 시대를 초월한 최선의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문화 변증이야말로 우리를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지혜의 중요한 원천에 연결함으로 세속 시대에 설득력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적용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변증을 사용하건 당신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공감하리라 기대하는 바에 맞춰진 특정 언어로 구성된 특정 규칙을 따라 논쟁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변증은 언제나 해당 문화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은 농업 사회였던 당시의 이웃과 연결되는 일상생활의 예를 수시로 사용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와 바울의 마르스 언덕 설교는 똑같은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그리스 철학자라는 전혀 다른 청중에 맞게 각각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First Apology와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극적으로 다른 순간에 알맞게, 각각 시기적절한 방식으로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선포한다. 마크 앨런과 조쉬 차트러는 곧 출간될 The Augustine Way: Retrieving a Vision for the Church’s Apologetic Witness에서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항상 문화라는 맥락 안에서 변증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대학의 철학과는 동네 술집만큼이나 문화적인 곳”이라고 지적한다.이처럼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사례를 통해서 문화 변증이 전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슨 전략을 쓰더라도 문화를 피할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문화 자체가 종교가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숭배한다”라고 말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는 옳다. 선교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에서 문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문화라는 단어 속에는 인간 집단에 의해 개발되고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 생활 방식의 총체가 담겨있다. 문화의 중심은 언어이다. 한 민족의 언어는 그들이 사물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언어를 중심으로 시각 및 음악 예술, 기술, 법률, 사회 및 정치 조직이 그룹화된다. 거기에 더해서, 모든 문화의 근본으로 포함해야 하는 것은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을 파악하고 표현하려는 일련의 신념, 경험, 관행, 삶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본질상 궁극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중에서도 종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종교는 문화의 하위 영역이 아니다. 문화야말로 의미와 영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필연적 추구의 결과인 종교의 하위 영역이다. 앞서 소개한 뉴비긴의 인용문은 문화 변증의 광범위한 특성을 포착한다. 신학자 케빈 밴후저(Kevin Vanhoozer)가 강의한 “문화 해석학” 과정에서 내가 배운 것처럼 마케팅 슬로건도 사회의 가장 깊은 염원을 전달할 수 있다. 영화와 노래, 스포츠 경기도 문화가 가지고 있는 희망과 두려움의 한 단면을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단지 날씨가 아닌 기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복음에 뿌리를 둔 변증자가 수정하고 연결할 기회를 제공함으로 불신자가 죄와 구주의 필요성을 볼 수 있게 만든다. 희망의 다리기후는 우리가 바라는 바를 형성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 뿌리를 둔 문화 옹호론자는 욕망을 믿음의 주요 동기로 인식한다.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직감과 이성의 관계를 코끼리와 기수로 묘사했다. 이성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지만, 직감은 동기 부여가 있을 때만 작동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머리가 합리화하고 직관은 열망을 따라갈 뿐이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또는 같은 질문을 다른 방식으로 던져보자. 누가 내 동족(tribe)인가? 우리는 자신을 객관적 진실을 신중하게 고려해서 다양한 논쟁을 저울질하는, 매우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훨씬 더 자주, 우리는 동족 본능에 따라서 움직인다. 객관적 진실에 입각한 삶의 변화는 고사하고, 동족 본능은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거르는 필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화를 원할 때까지, 새로운 공동체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결코 내가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문화 변증은 불신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도 복음이 진리이길 원하도록 돕는다. 우리는 세상 정사와 권세의 주재권이 드러내는 추함과 정반대되는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공한다(엡 6:12).“변증의 임무는 소망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테드 터너(Ted Turnau)는 그의 책 Popologetics에서 말한다. 선함, 아름다움, 정의, 희망, 평화, 활력, 자비를 논하며 그는 우리가 믿음을 제시해야 하는 다양한 이유를 열거한다. 그러나 뉴비긴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에서 지적했듯, 교회는 그 자체로 복음이 무엇인지를 풀어쓴 해석(hermeneutic)이다. 교회는 주변 문화의 기상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먹구름에 도전하는, 생명을 주는 대안적 기후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망과 비그리스도인 사이를 잇는 가장 좋은 다리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은혜와 진실로, 또 사랑으로 함께 사는가를 확인함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변증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증언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영적, 도덕적 갱신을 추구한다. 폴 굴드(Paul Gould)는 문화 변증을 “특정 문화 내에서 그리스도인의 목소리와 양심, 상상력을 확립함으로 참되고 만족을 주는 기독교를 세상에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소음으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끌기 위해 무한 경쟁하는 수많은 목소리 속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불신자가 품은 생각을 포착한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23에서 기도하신 내용이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세상은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을 목격한다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곧 다시 오실 것이라고 바로 결론 내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들이 죄를 회개하도록 경고하고 믿음의 길로 초대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복음의 효과를 확인할 때, 그들은 복음을 더 잘 깨달을 것이다. 우리를 대면하여 볼 때, 그들은 복음에 담긴 공격성과 분열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너무나 자주 미치지 못하는 죄인의 공격성을 더 잘 구별할 것이다. 찾기 위해 잃다문화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너무 많은 날씨, 불충분한 기후)는 오늘날 교회의 일치를 위협함으로 결과적으로 선교에 악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서 너무도 멀리 벗어났기에, 오늘날 우리는 더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세상에 순응해서 살면서도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에서 복음은 중산층에게 필요한 액세서리로 전락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정치적 반대자의 악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문화를 구하는” 투표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비주의와 편리함 및 안락함이라는 문화의 포로가 되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행여라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세상 사람들의 귀에 기독교 신앙이 단지 편안함이라는 목적을 향한 또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해석되는 건 아닌지, 나는 종종 두려움을 느낀다.예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우리 모두에게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 10:38-39). 문화 변증은 우리를 사회 구조의 이면으로 인도함으로 내가 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찾기 위해 내가 어떤 희생을 해야 하는지를 보도록 한다. 조쉬 채트러(Josh Chatraw)는 Telling a Better Story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신학적으로는 복음 자체에 뿌리를 내린 성숙한 변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신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 방법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듣는 이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결점과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저지른 실패까지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문화 변증은 기후가 어떻게 변하는지 예측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모색한다. 기독교 국가의 종말은 서구를 혼란에 빠뜨렸다. 서구 문명의 기초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니라 관용, 소수자 권리, 동등한 정의 등의 기독교 가치이다. 그러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세속주의의 “빼기 이야기”(subtraction story)에서, ‘기독교만 빼 버리면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라고 묘사한 것처럼, 기독교는 (잘해야) 잊히고, (최악으로는) 욕을 먹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 없이는 기독교가 주는 유익을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서구는 모든 것이 허용되는 포스트-자유주의 시대에는 기독교의 가치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로 향할 것인가? 문화 변증은 우리 사회가 물어야 할 이 시대의 본질적인 질문이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보도록 돕는다. 뭔가를 숭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인간에게 더 새롭고 더 나은 에덴을 만들 능력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사회학자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가 To Flourish or Destruct에서 설명한 것처럼, 포스트 계몽주의 딜레마는 신성한 선을 추구하는 영적 프로젝트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 과거에서 벗어나는 것, 어떤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것, 최대한의 선택권을 누리는 것,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것,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는 것, 그리고 원하는 대로 인생을 누리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근대성 영적 프로젝트를 이끄는 비전이다. 이 모든 비전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또는 문화적이 아니라) 영적이다. 신성불가침한 것, 궁극적인 관심사, 개인의 삶을 초월하는 의미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비전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개인의 가장 깊은 주관성, 선에 대한 가장 초월적인 비전, 그리고 궁극적 성취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비전을 명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문화 구조의 심층 단계에서 볼 때, 현대 서구에서 근대성이 무너뜨린 전근대 기독교계에서 높이 평가되던 하나님의 구원과 동급 수준(homologous)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적이다. 신성하기에 보호하고, 방어하고, 치안을 유지하고, 싸우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고, 나아가서 타인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지금 세속 시대는 여전히 매우 종교적이다(행 17:22). 문화 변증은 기독교 세계(Christendom)을 계승하려는 영적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내러티브의 근간을 식별할 수 있도록 한다. 이제 우리는 톰 홀랜드의 놀라운 책 도미니언에서 분명하게 확인하듯, 서로 연결하고 또 수정할 점을 식별하기 위해서 성경의 구속 이야기를 문화 속에 투영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대안보다 더 궁극적으로 호소력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발견한 모델이자, 크리스토퍼 왓킨의 새 책 Biblical Critical Theory를 그토록 설득력 있게 만드는 접근 방식이다. 그리고 곧 출간될 조슈아 라이언 버틀러의 Beautiful Union: How God's Vision for Sex Points Us to the Good, Unlocks the True, and (Sort of) Explains Everything 이면에 담긴 정신이기도 하다. 이전 세대를 살았던 뉴비긴은 그리스도인들이 서구 문화에서조차도 선교적 만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했다. 그런 선교적 만남은 우리 시대에도 계속되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선교사의 임무는 문화의 세계관(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그 문화가 전하는 이야기에 도전하고 수정(re-tell)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해피엔딩할 수 있음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이게 바로 우리에게 문화 변증이 필요한 이유이다. 절박한 세상은 지금 일기 예보가 전하는 천둥 같은 어둠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새벽이 올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다가오고 있다. 해피 엔딩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음을 세상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오로지 죄에서 돌이키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만 해당함을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원제: What Is Cultural Apologetic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문화변증
문화전쟁
세계관
전도
변증
팀 켈러의 깊고 단순한 복음전도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2-27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현재 전 세계 목회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며, 가장 세속적인 뉴욕의 한복판에서 리디머교회를 개척하여 포스트모던 세대를 복음화하는 사역의 성과를 이룬 팀 켈러, 그는 전도를 어떻게 할까? 그의 목회 철학을 집대성한 Center Church(Zondervan, 2012: 국내 역간본은 팀 켈러의 센터처치; 이 글에서는 영어판에서 인용함)를 보면 그는 “전교인 복음 사역”(every-member gospel ministry)이라는 이름으로 실제 전도의 사례들을 소개한다(282-283). • 제리는 직장 동료 빌에게 지난 주말에 교회 수련회에 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빌은 그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며 더욱 듣고 싶어 한다. • 캐서린은 친구 메간을 위해 몇 달 동안 기도하며 신앙 서적들을 주었는데, 메간이 호의적인 응답을 했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를 알려주는 전도 집회에 메간을 초청했다. • 조는 연주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음악가 피트와 오랜 친구이다. 공감적 경청자인 조는 피트에게 기독교 신앙을 권하며 “너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피트는 기독교 모임에는 가기 싫어해서 둘은 함께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한다. • 케리는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함께 엄마 모임을 만들어서 비그리스도인 친구들을 초청한다. 모임의 대화는 결혼, 육아, 사회 문제, 영성 등을 망라한다. 그들 중 몇 명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3년 후 이 모임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열려 있는 성경공부가 되었다. 여기서 몇 가지 사례만을 요약해서 소개했지만, 사실 이러한 경험과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으며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특별한 이벤트나 프로그램이 아니다. 물론 팀 켈러는 세속적인 현대 문화를 향해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고 복음적 신앙의 타당성을 제시하는 데 유능하다. 그러한 변증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고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깊어지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리라는 것은 그의 사역 열매들이 입증한다. 그렇다고 팀 켈러가 변증전도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로 사람들을 동원한 것은 아니다. 이는 교회에서 더욱 많은 교인이 자기들의 가정, 직장, 이웃의 일상 가운데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복음을 나누는 삶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교인 중 20-25퍼센트가 이러한 유기적이고 관계적인 복음 사역에 참여하며 “강력한 역동성이 생겨서 온 교회를 가득 채우며, 삶을 세우고 전도하는 교회의 능력을 크게 신장시킨다”(283). 전도의 일상성전도라고 하면 으레 사람들을 잘 모으거나 설득할 수 있는 비법(?)을 기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 분위기가 한창 고조된 집회에서 결신자가 속출하거나, 또는 구체적인 전도 대본이 적힌 매뉴얼로 훈련받은 이들이 거리에서 일대일의 만남으로 복음을 제시하는 모습이 전도가 왕성히 일어나는 사역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 조사에서 거듭 확인되는 바에 의하면, 대다수는 일상에서의 관계를 통해서 신앙에 이르게 된다. 한국교회탐구센터의 의뢰로 지앤컴리서치에서 최근 교회를 찾은 새신자 45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들을 전도한 사람은 가족/친척(48%), 친구/선후배(24%), 이웃(16%), 직장 동료(10%)로 나타났고, 교회 출석을 권유받은 상황도, 특별한 계기 없이 교회 가자고 권유함(35%), 교회에 관심을 보이자 출석을 권유함(23%), 고민을 듣더니 교회에 가자고 권유함(20%)이 합쳐서 78퍼센트이고, 새신자 초청행사와 같은 특별한 계기에 참석을 권유한 경우(19%)도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교회에 출석하게 된 상황은 개인적 접촉과 교제를 통해서였다.사실 대부분의 전도는 전도 그 자체를 위해 특별하게 마련된 행사나 개인전도 훈련의 매뉴얼에 따라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 전도는 평범한 때에, 평범한 교회 예배나 모임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이면서도 영적인 교류를 통해 가랑비에 옷 젖 듯이 일어난다. 이같이 평범한 일상에서 가족 및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지배적인 전도 방식(80% 이상)이었음을 마이클 그린은 그의 명저 초대교회의 복음전도(Evangelism in the Early Church)에서 주장했고, 팀 켈러도 그린의 주장에 의존한다. 우리는 전도를 프로그램 중심으로 접근하는 데 익숙하다. 특정 전도 프로그램 자체가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기대하고, 어디선가 성공했다는 전도 무용담을 듣고는 그 프로그램을 복제하려 한다. 교회의 전체 구조보다는 좁은 의미의 전도사역 그 자체에 집중한다. 어떻게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고 어떻게 복음을 대본에 따라 간편하고 효율적으로 전할지에 따라 전도의 성패가 달린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팀 켈러는 이러한 관행적 복음 제시 방식들을 냉정하게 평가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인격적 회심으로 초대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복음 제시는 너무 얄팍하다. 그러한 전도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것과 우리의 죄를 위해 구주께서 죽으셨으며, 그 구주를 믿어야 한다는 요청을 피상적으로 말할 뿐이다. 이러한 소통 방식의 단순성은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죄에 관한 용어에 대해서 전하는 자와 동일한 본질적 이해를 가지고 있으리라고 가정한다(Center Crhuch, 266).하지만 기독교적 용어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지 않는 비서구 문화에서 복음전도는 긴 과정을 수반하며, 사람들은 기독교 진리와 문화 사이에 가교를 놓는 기독교 공동체로 초대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다고 전도를 위한 프로그램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팀 켈러 자신이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변호하는 여러 변증서의 저자일 뿐 아니라, 그가 목회한 리디머 교회도 알파코스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 변증 코스를 활발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복음의 근본적인 메시지와 요청과 마주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먼저 그 복음에 입각해서 대조적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동체에 노출되어야 한다. 이는 더욱 많은 교인이 일상의 관계에서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대화하며 기독교 공동체로 그들을 초대하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전교인 복음사역을 통해 실천되었다. 사영리나 전도폭발과 같이 간략하게 체계화된 복음제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복음의 핵심 내용이 문화를 넘어서 전달되려면 새로운 상황에 대한 고려 속에서 재진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문화적 배경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전도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프로그램은 비서구 사회뿐 아니라 21세기 서구사회에도 효과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선교적 교회와 문화 내러티브2017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은 팀 켈러를 그 해의 아브라함 카이퍼 수상자로 결정했다가 여성안수를 지지하지 않는 보수 교단의 목사에 대한 자격 논란으로 시상은 취소됐다. 대신에 팀 켈러의 카이퍼 강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는데, 그 강연의 제목이 “레슬리 뉴비긴의 물음에 답함”(Answering Lesslie Newbigin)이었다. 뉴비긴은 1984년에 같은 장소에서 열린 워필드 강연에서 복음에 가장 저항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서구사회의 실상을 지적했고, ‘서구사회가 선교적인 대면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팀 켈러의 강연은 뉴비긴의 이러한 질문, 서구사회가 다시 회심하기 위한 선교적 대면에는 어떠한 요소들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시도한 것이다. 뉴비긴의 워필드 강연이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IVP, 2005: Foolishness to the Greeks)로 출판이 되었다면, 팀 켈러의 카이퍼 강연은 탈기독교시대의 전도(두란노, 2022: How To Reach The West Again)라는 책으로 더욱 보강되어 출판되었다. 뉴비긴의 이 책이 오늘날 선교적 교회 운동의 착상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팀 켈러 또한 선교적 교회론의 취지와 방향을 상당 부분 공유하며, 오늘날의 교회가 개인주의, 물질주의, 치료주의, 명예-수치 등으로 채색되는 세속문화와 구별되어 신실하게 현존하는 동시에 변혁적인 삶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탈기독교세계에서의 전도에서는 급증하는 디지털 문화와 사회-정치적 양극화의 문제를 인식하며, 이러한 흐름과 대조되는 정체성과 삶의 가치를 담은 복음적 교리문답(catechism)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줄곧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문화 내러티브를 파악하고, 복음이 그러한 문화 내러티브에 어떻게 응답하고 교정된 해답이 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팀 켈러의 전도를 이루는 중요한 배경은 선교적 교회와 문화 내러티브이다. 선교적 교회론을 통해서 그는 교회가 세속문화에서 공익을 추구하는 반문화가 되어야 하며, 사람들의 열망이 집약된 문화 내러티브를 재해석하고 이에 대한 비평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팀 켈러는 자신이 지향하는 복음전도를 사람들이 불신의 문화에서 대안적 기독교 신앙으로 변화되기까지 작은 결단들을 수반하는 선교적 전도(missional evangelism)의 과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회성 집회나 노방전도를 통해 획기적인 결신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이웃과의 삶에 참여하여 그들에게 복음적인 돌봄과 증언을 통해 점점 더 교회와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작은 결단들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적 전도를 위해서는 평신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1) 관계적 진실성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목회자들은 2) 이들이 믿음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목양적 지원을 해주고, 교회는 3) 평신도들의 선교적 활동이 더욱 안전하고 지속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들은 팀 켈러의 팀 켈러의 센터처치, 587-601쪽을 보라). 복음 중심의 선교적 전도복음 중심적인 대안문화적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팀 켈러는 일반적인 선교적 교회론과 교집합을 이루면서도,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째는 일부 선교적 교회 운동가들은 가정교회나 작은 공동체여야 성육신적으로 이웃을 섬길 수 있다고 보지만, 팀 켈러는 자신의 경험상 전통적, 제도적 교회들도 지역사회와 유기적 관계성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본다. 둘째로 더욱 근본적인 점은 선교적 교회론자들이 개인주의적 복음을 극복하고자 총체적인 메시지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강조하는데, 켈러는 이러한 주장들에서 복음의 예리한 핵심인 속죄와 칭의가 간과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마치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온 인류와 우주를 화목하게 하려고만 하실 뿐, 인간의 죄와 타락은 그분의 일하심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팀 켈러가 복음과 종교의 근본적 차이를 시종일관 강조해왔던 이유로부터 비롯된다. 왜냐하면 선교적 교회 운동가들이 극복하려는 개인주의적 복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스도의 구속적 은혜에 철저하게 기초한 본질적 복음보다는 ‘종교적’ 동기에 기초한 개인주의적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속죄와 칭의의 복음이 인간을 개인적 차원과 공적인 차원 모두에서 급진적으로 변혁시킨다는 이해를 결여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바는 팀 켈러의 복음 중심적 신학이 실제 복음전도의 사역으로 발전된 과정이다. 종교와 대비되는 복음의 깊이와 재발견은 그를 대표하는 주제가 되었다. 또한 현대 문화와 사상을 간파하며, 그 모순과 한계를 지적하면서 복음을 제시하는 그의 변증도 위대한 사역으로 회자된다. 하지만 그가 실제 한 목회자로서 지역사회 속에서 교인들을 선교적으로 목양하며 복음전도에 참여케 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시작부에서 소개한 그가 말하는 전도사역의 실천 사례들이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가 현대 세속문화의 중심지에서 이룬 전도의 열매는 복음의 깊이에 대한 확신이 이웃의 삶에 담대하게 참여하는 선교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는 평범한 신자들의 유기적이며 관계적인 일상을 통해 현실화된 것이다. 구령의 가시적 열매만 따려고 프로그램을 물색하는 성마른 접근으로는 깊이 있는 복음과 치열한 문화적 성육신을 기반으로 체화되는 견고하고 지속적인 전도사역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복음이 우리의 문화적 상황과 기독교 공동체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접목되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을 위해 적실한 전도의 방향을 찾기 위해서도, 복음-도시-운동으로 이어지는 팀 켈러의 사역 패턴은 우리에게 균형 잡힌 배움과 끈기 있는 적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실은 지속가능할 것이다.
팀켈러
복음전도
선교적교회
문화내러티브
전도의일상성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자신감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2-2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선교적 교회론의 교부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선교적 교회는 우리나라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으로 인정받고 있다. 종종 선교적 교회론은 복음전도와 구령사역 일변도에서 벗어나 지역사회를 위한 공동선을 중심 과제로 삼는 교회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라는 선구적 착상을 제공한 뉴비긴이 과연 복음전도가 약해지거나 소거된 교회의 공공적 사역을 추구했을까? 뉴비긴의 생애와 사상을 제대로 공부해보면 복음전도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일관되고 확고하게 토대를 이루고 있는지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얼마나 진지한지는 다른 사람들과 그 믿음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면서 복음전도를 신앙의 진정성과도 연결하였다. 뉴비긴의 생애를 관통하는 복음전도의 열정뉴비긴은 남인도에서 38년간 선교사이자 주교로 사역하는 동시에, 에큐메니컬 운동인 WCC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거의 사라지고 선교를 사회정의와 민권운동으로 채색한 WCC의 정책을 보면서 그는 깊이 가슴 아파하며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래서 WCC에서 일할 때도 뉴비긴은 선교의 세속화 물결에 맞서며 “가장 중요한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명확히 했다(아직 끝나지 않은 길, 390). 일화로, WCC의 선교 저널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편집인을 할 때 해외선교나 복음전파를 의미하는 ‘missions’라는 단어에서 ‘s’를 제거하고 세상을 향한 증언과 활동을 의미하는 총체적 선교로서 ‘mission’으로 바꾸려는 주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s’자를 계속 보존했다. 나중에 그가 WCC를 떠난 뒤에 결국 ‘s’자가 제거되고 인간화로서의 선교를 부각하는 ‘미시오 데이’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뉴비긴의 전 생애와 사역에서 회심과 복음전도는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남인도에서 선교를 할 때도 그는 직접 길거리를 다니며 성경을 반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우리가 진지하게 믿는다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간절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회심에 대한 관심은 이웃에 대한 관심의 증가를 의미한다. “복음을 모든 곳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권하는 것, 복음을 인류의 역사와 개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궁극적 실마리로 증언하는 일은, 아무리 오해받고 무시받고 비난받는다 할지라도, 결코 불필요하게 되거나 도외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62).뉴비긴은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심한 이유를 두 가지로 본다. 첫째,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주관적 감정의 영역으로 몰고 가며 사실상의 공적 영역에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둘째, 대도시는 이미 다종교, 다문화의 상황에서 기독교를 전하는 것은 인종차별적 태도가 될 수 있고, 소수 공동체를 존중하기 위해서 복음전도는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이러한 발상을 뉴비긴은 “신학적 간음”으로 경계한다). 이러한 과학주의적 인식론과 다원주의적 태도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 중대한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난관들 앞에서 그가 제시하는 전도의 해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복음의 역사적 공공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복음의 공적 진리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이와 같은 명료하고 거시적인 신념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확신(proper confidence)을 제공한다.복음 진리의 공공성과 역사의 실마리로서 예수 그리스도 뉴비긴이 거듭 강조하는 바는 복음의 공공성이다. 이는 세상을 개선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라는 공공신학과는 차이가 있다.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 진리는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내면적 가치로 축소되고 공적인 삶을 비롯한 현실 세계와는 무관하게 취급됐다. 뉴비긴은 과학과 종교, 또는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결국 서구사회를 세속화, 심지어는 이교화로 이끄는 근본 인식이라고 본다. 물론 그는 교회의 공적 세계에 대한 책임도 강조하며, 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정립하는 과제도 진지하게 제안한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기독교 복음이 공적이며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은 역사를 뒤집는 유일무이한 사건이라는 데에 맞춰져 있다. 그는 한 힌두교도 친구의 말을 전한다. 내가 성경을 읽어 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75)성경은 처음부터 인생을 우주적, 보편적 역사의 맥락에서 조망한다. 성경은 역사이며 사실이다. 성경의 세계관과 역사는 신뢰의 행위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개인적 믿음이다. 개인적이라고 해서 주관적인 느낌이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를 믿는 것이다. 이는 인류 역사 전체의 의미에 관한 진리를 믿는 것이며, 모든 시대와 장소의 모든 사람과 공유하려는 보편적 의향을 품고 견지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복음전도에는 이와 같은 복음의 역사적, 공적 진리됨에 대한 확신이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복음의 우주적인 이야기 안에서 개인도 참된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선교의 논리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인간 이야기의 참된 의미가 이미 드러났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이기에 보편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이는 사적인 의견일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모든 사람과 나눈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에 관한 진리를 알 기회를 주는 것이다. 즉 그들의 인생이 속한 그 진정한 이야기를 앎으로써 자기가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인간 역사의 의미가 의문으로 제기되기 마련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38).그렇다고 해서 뉴비긴이 전통적인 교회성장적 전도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교회성장학의 창시자 도널드 맥가브란의 열심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그러한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며 거리를 두었다. 그에게서 전도는 단지 개개인의 영혼이 멸망하지 않도록 구원하는 차원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종말에 완성된다는 희망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음의 공적 우위성과 진리됨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나? 그것은 일방적이거나 우월주의적인 선포가 아니라 그 진리대로 살아가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선교적 공동체, 기독교의 진리됨을 증명하는 통로뉴비긴은 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은 바로 지역 교회 회중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인간사의 최종 결론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게 될까? 그것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이자 단 하나뿐인 해답이라는 것이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419). 이 문장은 그의 글과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고, 선교적 교회론의 착상에 결정적 영향을 준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그는 복음이 공적인 영역에서 펼치는 활동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며, 복음전도와 영적 집회, 기독교 저술 등의 중요성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부차적이며, 근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신앙의 공동체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실재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새로운 실재가 위기와 의문, 응답을 일으키고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발생했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실천하고 재연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에게서 복음전도와 공동체의 관계는 항상 긴밀하다. 그가 실제로 참여했던 길거리 전도도 이러한 말과 행동이 같이 간다는 전제 아래서 가능했다. 길거리에서 복음을 듣는 이들은 낯선 순회전도자의 외침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존재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의 섬기는 사역을 경험하는 상태에서 말로 선포된 복음을 접한다는 것이다(아직 끝나지 않은 길, 137). 뉴비긴은 성령의 새로운 실재가 교회를 통해서 흘러넘치고 사람들에게 드러났을 때, 불신자들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 복음전도의 사역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선교의 시작이 우리의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의 현존, 곧 하나님의 영이 능력으로 임재하는 데 있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교회가 그 주인에게 신실한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임하게 되고, 그러면 사람들이 질문을 던질 것이며 우리는 복음으로 그 질문에 응답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의 편지들에는 신실한 삶을 살라는 권면은 아주 많지만 적극적으로 선교하라는 권면은 없는 게 아닌가 추정된다(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28).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이나 공공연한 선교가 금지되는 구 공산국가에서도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경험하는 부흥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복음전도에서 우리의 말보다 앞서 성령의 새로운 질서가 우선이기 때문이다.뉴비긴의 이와 같은 변화된 공동체에 임하는 성령의 실재와 그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전도라는 개념은 베드로전서 3:15-16의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전도가 명령으로 인식될 때 전도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도는 명령이기에 앞서 먼저 초월적 은혜의 사건이라는 맥락에서 의미를 지닌다. 뉴비긴은 전도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설명이 요구될 때 비로소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실재의 도래에 대한 의문에 응답할 때 복음전도가 이루어진다. 바로 이러한 논리가 선교적 교회론을 끌어가야 한다.복음전도에 대한 고유한 확신뉴비긴은 과학주의와 다원주의로 인해서 기독교가 주변부로 밀려나고 위축된 사회 속에서도 이와 같이 복음의 공공성과 역사의 실마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강력하게 변호한다. 그의 이러한 변증적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적절한 확신(Proper Confidence)으로 나아가게 한다. 종종 “적절한”으로 번역되는 영어 형용사 “proper”는 또 다른 뜻으로 “고유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의 실마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에 걸맞은 고유하고 적절한 확신을 품을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고유한 확신은 우선은 공적 진리로서 복음에 대한 자신감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또한 그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성령의 임재를 드러내는 사랑과 겸손의 공동체를 통해서이다. 자신의 옳음을 논리적으로 입증해서 상대를 바꾸려는 펠라기우스적 방식이나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정복주의적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선택 교리의 참된 의미와도 어긋난다고 뉴비긴은 본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역사의 실마리가 풀린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며, 이를 기반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아 성찰과 회개, 새로운 헌신의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확신을 제공한다. 오늘의 다원적 사회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의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 높이와 깊이를 더 많이 배울 수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적절한 자신감을 지닐 수 있다. 이는 또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신뢰함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고유한 확신이다. 전도학을 전공한 필자는 종종 교회들로부터 전도 관련 특강을 요청받을 때가 있다. 어떻게 전도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알려달라는 강의를 부탁받는 경우도 있지만, 교인들에게 전도에 대한 동기부여를 제공해달라는 주문이 의외로 많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복음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위축된 현실을 방증한다. 최근 발표된 한국 교회의 대 사회적 신뢰는 여전히 주요 종교들 가운데 가장 낮게 나온다. 이는 전도에 대한 자신감을 더욱 떨어뜨리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슬리 뉴비긴의 전도에 대한 통찰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실로 복음의 위대한 매력과 전도의 실마리를 찾도록 안내할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뉴비긴에게서 배우는 전도의 교훈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첫째, 그것은 복음의 공공성과 역사성이라는 깊은 차원을 재발견함으로 시작된다. 둘째, 이러한 복음은 세상에 대한 증언과 섬김의 소명을 받은 공동체의 삶을 통해 전파된다.셋째, 복음의 실체를 목격한 사람들은 질문을 품게 되고, 우리는 고유한 확신 속에서 겸손하고 진실하게 질문에 답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뉴비긴
선교
선교적교회론
mission
총체적선교
선교적공동체
복음의공공성
프란시스 쉐퍼의 합일적 복음전도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2-13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프란시스 쉐퍼(1912-1984)에 대한 평가는 양가적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위스에 라브리를 세워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서구의 젊은이들에게 인본주의와 실존주의 사상이 인생과 사회를 얼마나 깊이 침식하고 있는지를 치열하게 설명하며 성경적 진리가 우리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고 회복해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의 그리스도인 지성인과 청년들에게도 쉐퍼는 당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도입과 더불어, 사회와 문화를 향한 복음주의적 관심을 일깨워 준 인물이었다. 실제로 쉐퍼는 라브리 사역과 기독교 진리의 실재성에 대한 강연과 저술 외에도 복음주의권에서는 선도적으로 낙태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근 미국 대법원에서 낙태를 허용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도 일찍이 쉐퍼가 복음주의자들에게 사회의 인본주의와 상대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도록 각성시킨 노력이 맹아가 됐으리라 추측한다. 쉐퍼의 사상에 매료된 이들의 스펙트럼은 꽤 넓다. 쉐퍼는 근본주의의 사도라 불릴 정도로 진리의 절대성과 성경의 무오성을 수호하는 데 인생 후반을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쉐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신학적 근본주의나 정치적 우파 기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좀 더 유연한 입장에서 문화와 신학의 관계를 선구적으로 연구한 복음주의 신학자들도 쉐퍼로부터 그와 같은 착상을 얻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William Dyrness, James K. Smith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 일반 인문학뿐 아니라 신학계에서도 환대(hospitality)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쉐퍼의 라브리는 기독교적 환대의 모델로 신학적 진영을 넘어서 언급된다. 필자가 환대라는 개념을 처음 들은 것도 30년 전 한국에서 열린 라브리 수양회에서였다. 아직도 복음주의권은 단순히 친절한 환영이나 접대를 넘어서는 환대라는 고유한 성경적, 기독교적 덕목에 충분히 천착하지 못한 상태이다. 흥미롭게도 쉐퍼의 신학과 삶이 구현된 실체를 보여주는 책 ‘라브리’(L'Abri)를 처음 한글 번역자는 진보적이고 토착화된 신학을 추구하는 감리교 목사였다. 쉐퍼는 복음주의적 사회참여의 실천가로서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 쉐퍼의 사상적 유산은 현대문화와의 예리한 긴장을 강조하는 세계관 운동가들에게로 계승됐지만, 또한 현대문화를 이해하는 가운데 복음을 소통하려는 더욱 유연한 기독교 지성인들에게도 지울 수 없는 영감이 된 것이다. 이처럼 쉐퍼가 다양하게 해석되고 수용됨에도 불구하고, 그를 아는 이들이 공통으로 매력을 느끼는 점은 그가 라브리 공동체로 맞이하고 그들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며 기독교의 진리를 증언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필자는 연구, 대화, 식사, 산책, 예술, 자녀교육과 같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진리를 구현한 라브리 공동체를 건너뛰고 쉐퍼의 변증과 전도를 사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반쪽 이해에 그친다고 본다.쉐퍼의 지성적 변증쉐퍼는 루이스와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빛나는 기독교 변증의 대표주자들이다. 사실 쉐퍼와 루이스는 신학적 전제(루이스의 신화적 성경관 vs. 쉐퍼의 성경무오설)에서는 다른 관점을 가졌지만, 인간과 문화에 대한 접근에서는 가족적이라 할 만큼 유사성을 보인다. 필자가 처음 루이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쉐퍼를 통해서였다. 쉐퍼의 예술적 창의성과 상상력에 영감을 준 이가 C. S. 루이스였고, 그의 책들은 라브리의 서재에서 많은 추천을 받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지성적, 문화적 변증은 이 두 사람의 공통분모가 된다. 쉐퍼는 루이스에 비해서 더욱 명료하게 개혁주의와 복음주의 신앙을 견지했지만, 그렇다고 경직된 교리주의로 흐르지 않고 생동감 있는 영적 실재성(spiritual reality)을 강조한 점에서 루이스와 또 다른 유사성을 갖는다(이에 대해서는 “C. S. 루이스에게 배우는 정감적 전도”를 참고하라). 케빈 포드(Kevin G. Ford)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복음전도의 방향을 논하면서, 쉐퍼의 책(The God Who Is There)은 기독교의 진리 됨을 증명하는 데 역점을 두는 베이비붐 세대의 전형적인 변증 방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세대에게는 경제정의, 인종갈등, 화해, 성문제, 젠더 문제와 같이 현재의 관심사와 연관된 기독교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증명하는 신앙(faith that proves)에서 효능 있는 신앙(faith that works)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대가 관심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믿는 대로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Jesus for a New Generation, IVP, 174). 물론 쉐퍼는 현대인이 진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절대성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지 못함으로 절망의 선 아래로 빠졌다는 사실을 미술, 철학, 문화, 신학 등의 사례를 들며 실증하는 데 주력했다. 게다가 그의 유명한 “지붕 벗기기”(taking roof off)라는 변증 전략은 현대인들이 받아들인 상대주의적, 회의주의적 전제로는 실제 세계와의 긴장과 모순에 놓인다는 점을 직시하도록 압박을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쉐퍼를 지성적 변증의 프레임 안에서 보는 이러한 시각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못하다.쉐퍼는 라브리라는 삶의 공동체적 맥락 안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의 사역이 알려지면서 강연 요청을 받고, 강연 내용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그의 변증적 전제와 전략은 활자를 통해서 관념적으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쉐퍼를 체계적이고 정합성 있는 기독교 변증가로만 이해하는 것은 전후 맥락이 제거된 문장을 보는 것과 같다. 쉐퍼의 지성적 변증은 라브리라고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가족처럼 어울리는 가족적 공동체에 차려진 식탁의 인기 있는 메뉴 중 하나였다. 그 식탁은 인생의 고민과 혼란 속에서 진리를 맛보아 알 수 있도록 섬기는 자리였고, 그 자리에서 정직한 질문과 정직한 대답이 오갔다. 추측건대 시대와 사람의 변화에 따라 맛과 메뉴도 달라질 것이다. 지적인 탐구심보다 관계의 갈망을 안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도 기독교는 여전히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이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형성되는 데 있어서 합리적 체계는 여전히 중요하다. 우리 세대 사람들의 절대 진리에 대한 반론과 애매모호한 의미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주지 않으면서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을 변호할 수 있다는 기대는 비합리적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여는 데 지적인 변증이 항상 최전선에 있는 것은 아니다. 라브리의 공동체적 전도쉐퍼의 아내 이디스(Edith)가 쓴 라브리를 보면 라브리 사역의 목적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삶과 일 속에서 증언’하는 것이라고 하며, 이를 위해 네 가지 구체적 영역에서의 기도를 한다고 한다. • 재정적, 물질적 필요를 기도로 하나님께만 아뢰고 사람에게 요청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역에 동참케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한다. 홍보물을 돌리지 않는다. •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계획대로 인도받기를 기도한다. • 하나님께서 택하신 동역자(간사)만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한다. 이디스는 이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했고, 그가 ‘라브리’라는 책을 쓴 목적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거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거듭 기도에 응답하셔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신 사실의 실체를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한다(21-22). 이러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것은 생각과 마음뿐 아니라 물질적인 경험 세계에서도 일어난다고 그는 믿는다. 이디스가 명토박아둔 라브리의 목적과 원리를 상기한다면, 쉐퍼의 지성적 변증은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말씀하신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의 삶에서 영적 실재로 경험시키고 전달하기 위해서 당시에 사용했던 하나의 유력한 통로로 이해해야 한다. 라브리가 세워지고 사람들이 그곳을 찾던 당시는 전쟁 이후 서구의 많은 청년이 절대적, 객관적 진리와 가치에 대한 상실감 속에서 허무주의적 실존주의로 후퇴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쉐퍼의 변증 3부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과 같은 책은 현대 철학의 인식론에 대한 기독교적 비평을 다루지만, 거기에는 바로 우리와 교통하시고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실재로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해야 한다는 변증적 의도가 선연하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정서적, 관계적, 물질주의적 갈등으로 기독교 진리와 멀어진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방식은 쉐퍼 당대의 지성적 변증이 지녔던 비중은 조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쉐퍼의 사상은 라브리라는 공동체적 삶의 맥락을 주목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을 위한 쉐퍼와 그의 라브리 사역에서 전도의 교훈 두 가지를 찾는다면, 필자는 공동체적 전도와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라고 생각한다. 라브리의 전도 사역 표층에는 공동체가 있고, 기층에는 영적 실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는 소중하다. 특히 전통적 유대관계가 해체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시대에 대안적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화급한 과제다. 하지만 모든 공동체에는 그 내부에 핵심적 가치와 실천이 있다. 기독교 공동체를 가능하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 현실화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이다. 라브리를 통해서 공동체적 전도를 구상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다. 오늘날 복음전도의 주된 과제는 전도의 은사가 있는 소수 개인에게 의존하는 전도가 아니라 대안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매력적인 존재 양식이 곧 복음전도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공동체의 도덕적 덕목과 습관을 강조하는 철학으로부터 착상을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중시하는 전통적 신앙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지난 19-20세기의 전도가 개인 결신을 유도하는 명망가와 이벤트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교회의 역할은 왜소해졌다. 복음에 기반한 교회의 실천과 덕목이 사람들을 초대하고 변화시키고 형성하기보다는, 내세적이고 이원론적 구령주의나 현세적 번영주의가 복음의 참맛을 혼동시키면서 새롭게 지음받은 이들의 독특하고 차별적인 공동체는 피상적인 구호로 전락했다. 기독교의 실재가 자기 계발적 번영주의나 도덕주의적 이신론과 다를 바 없다면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를 깊은 근본에서부터 변혁시키는 성령과 대면하도록 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지 않는 공동체가 어떻게 기독교의 고유한 신념과 가치를 견지할 수 있겠는가? 영적 실재의 현시로서 복음전도이 점은 공동체적 전도에서 주의해야 할 맹점이다. 인간의 선한 상호성을 강조하는 공동체는 매력적일 수는 있어도 전복적이지는 않다. 쉐퍼와 라브리의 사역 또한 공동체적 전도로 볼 수 있다. 세퍼는 “타락했으나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했다. 그는 신앙의 의심을 품는 자에게 55분 동안 듣고 질문하며, 5분 동안 기독교 메시지를 말하겠다며 인간에 대한 연민과 존중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쉐퍼는 기독교의 최종적 변증은 아가페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라브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용납하고 환대하는 공동체였다. 마약중독자, 미혼모, 방황하는 젊은이들, 심지어 귀신 들린 사람들까지 라브리를 찾았고 그곳에서 사랑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쉐퍼 부부는 “그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지니고 온 짐을 함께 짊어진 것이다. … 그들은 각 사람의 문젯거리들을 짊어졌으며, 그러고 나서 복음으로 그 사람의 가장 깊은 심령을 뒤흔들어 놓았다.”(레인 데니스 편, 프란시스 쉐퍼, 그의 삶과 사역, 아가페출판사, 195)여기서 공동체적 전도에서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로 이어진다. 라브리의 사역은 공동체로 사람들을 환대할 뿐 아니라 그들과 나눴던 기독교 진리가 식사와 설거지, 청소, 집안일, 장식, 예술 활동, 육아와 같은 실제 삶에서 생생히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상에서 초월을 접하게 하는 영적 실재로서의 전도였다. 최근 공동체로서의 교회됨과 전도의 관계를 논하는 중요한 연구들이 있다. 필자는 공동체적 전도를 위해서 교회가 화해, 용서, 비폭력, 환대의 습관과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는 데에 깊이 동의한다. 교회라는 독특한 공동체의 아비투스(habitus)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될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이 과연 전존재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근원으로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기독교 공동체의 차별적이고 독특한 덕목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날마다 맛보는 살아계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세워진다. 물론 구원과 하나님의 초월적 임재는 강조하면서 새로운 덕목을 형성하지 않는 공동체는 단순히 믿음과 행함의 격차 문제가 아니라,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진정성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매력적인 존재 양식은 초월적인 영적 실재에 견고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이 주관하시는 지속적인 복음의 증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에서 영적 실재라는 가치는 주관주의, 신비주의, 기복주의 등에 잠식되어왔다. 매일의 일상과 관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보다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초월성에 의존하는 인습이 있다. 이는 영적 실재의 약화를 초래한다. 게다가, 한국 사회 전반에서도 신과 종교에 관한 믿음은 크게 하락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문명과 개인주의의 과잉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개인을 존중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쉐퍼와 라브리의 사역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적실한 전도의 지혜를 제공하리라 본다. 첫째, 인생과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유물론적 설명이 득세하기 때문에 진리의 지성적 변증은 여전히 유효하다. 삶을 형성하는 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간파한 쉐퍼의 틀은 전도를 위한 귀한 자산이다. 다만, 사상과 삶의 양식이 변화되었는데도 쉐퍼의 내용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지 말라는 쉐퍼의 의도와도 어긋난다.둘째, 라브리 사역에서 발견하는 공동체적 전도의 지혜는 오늘날의 상황적 필요에 더욱 부합할 것이다. 복음전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체들의 공통점이 “초대와 환대의 문화”였다는 빌리 그레이엄 센터의 최근 조사는 이를 뒷받침한다(Rick Richardson, You Found Me, IVP). 그러나 공동체 자체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를 떠받치는 영적 실재다.셋째, 따라서 필자는 쉐퍼와 라브리 사역에서 지성적 변증과 공동체적 환대, 그리고 영적 실재라는 삶의 전 차원들이 합일된 전도의 교훈을 발견한다. 그것은 너무 익숙해져서 시들어가고 있는, 하지만 다시 발견해야 할 전도의 생명력일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롬 15:18-19)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쉐퍼
라브리
환대
지성적변증
최고의 전도, 최고의 환대: 교회됨과 성도됨
by 이춘성
2023-02-09
어느 주일 날,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으로 한 달 동안 휴가를 받은 선배 목사님을 대신해서 주일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눅 4:1-13) 사건과 베드로전서 5장을 연결한, 두려움과 믿음에 대해서였습니다. 설교를 끝내고 교회에서 준비한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한 달 동안 담임 목사님을 대신하여 교회 일을 맡고 계신 전도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학대학원 졸업반이었던 전도사님은 자연스럽게 방금 설교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평소에 자신의 고민이라면서 ‘이 시대의 전도’에 대해서 물었습니다.“목사님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앞으로 제가 배고픔, 무명, 질병과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서 그 길을 선택해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두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택하신 그 길을 따라가야겠지요. 그런데 저도 두려운데, 하물며 일반 성도들은 어떨까요?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길을 누가 선택할까요? 과연 현대에 전도할 수 있을까요?”전도는 강요가 아니라 공감이다이 질문을 받고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과거 우리의 전도가 사람을 설득하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신 후에 받으신 세 종류의 시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귀의 시험 방식은 예수님에게 선택을 강요하였습니다. 선택하면 받을 유익을 제시하고 그렇지 않았을 때의 위험을 보여주면서, 둘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마귀의 시험은 현대인들에게는 손익 계산이 분명하기에 매우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와 정반대의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시지요.현대인에게 합리적 선택처럼 보이는 마귀의 시험 방식은 지난 세기 전도의 대표적인 구호였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짧지만 강렬한 구호와 닮았습니다. 이 구호의 내용은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하여서 전도를 위한 성경적 방식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이런 식의 선택을 불신자와 이방인에게 요구한 일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택을 강하게 요구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제자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로 선택되어 따르는 자들에게 그들의 미지근한 모습을 보면서 제자로서의 바른 삶을 촉구하시기 위한 방식으로 선택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신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결코 합리적 선택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처음 만난 자들에게는 한없는 공감과 자비, 측은함으로 다가가셨습니다. 하물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알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는 기적을 경험합니다.예수님은 두려움이나 합리적 선택을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받는 자들과 공감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들의 고통을 측은하고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마 9:36, 20:34; 막 1:41; 요 11:33). 하물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팔아넘긴 원수 가륫 유다를 향해서도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요 13:21). 예수님께서는 가륫 유다의 배신에 괴로워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동사 ‘타라쏘’(ταράσσω)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같은 단어를 두 장 앞에 나오는 요한복음 11:33,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비통하게 울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사건에서 “불쌍히 여기사”로 동일하게 사용합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 11:33). 이전의 한글 성경인 개역한글판에는 이 두 절을 동일하게 “민망히 여기사”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전도는 측은함과 공감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자신의 주된 사역이 병자를 치료하는 사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칠 때까지 자기에게 오는 병자들은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상처 입은 치료자셨습니다.전도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응답이다초대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베드로전서의 교회들도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따랐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5:9-10에서 이렇게 격려합니다.“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5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과 더러운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통해 마귀가 교회를 분열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런 후에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함께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이전까지 베드로 사도는 성도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고난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전서 5:9이 이전과 다른 점은 ‘동일한’(τὰ αὐτὰ), ‘같다’는 단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동일한 고난을 당하면서 서로 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가 주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우리 성도들과 교회도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도는 개인이 헌신하고 고난을 믿음으로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이 ‘함께’라는 연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이 말씀에서 질문의 대상은 그리스도인 한 개인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ὑμᾶς, 너희들)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고난을 당하고 있기에 한목소리로 합창하듯 세상을 향해 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한목소리는 우리의 삶이라는 음악과 이 음악을 기록한 악보인 성경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여 세상을 향해 진실함과 신실함이란 매력적인 새로운 세계를 향한 윤리로 다가갈 것입니다. 전도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환대이다우리는 전도에 대한 다양한 방법을 배워왔습니다. 노방 전도, 편지 전도, 식사 전도, 전단 전도, 붕어빵 전도, 전도 폭발, 알파 코스, 우정 전도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전도의 방법과 전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밥을 먹을 때, 밥그릇과 숟가락이 있어야 하듯 말이지요. 그러나 밥이 없다면 아무리 금과 은으로 만든 비싸고 고급스러운 식기가 있어도 먹을 수 없습니다. 전도의 핵심인 밥은 두려움과 위협이 아닌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진실한 모습과 세상을 향한 측은함과 공감입니다. 교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은 진정한 복음이며, 사람을 감동하게 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밥그릇에 담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상위에 놓고, 밥에 곁들일 반찬과 국을 차려놓는다면,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두려움의 노예로 허둥지둥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환대일 것입니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그럴듯한 말 뒤에서 위험이 아닌 안락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버리라는 마귀의 시험이, 두려움 마케팅이며 실제로는 위협과 강요의 폭력이라는 것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공감과 진실함은 환대이자 가장 확실한 전도일 것입니다.교회됨과 성도됨이 전도의 처음과 끝이다교회의 교회됨은 그 무엇보다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전도입니다. 또한 교회의 교회됨은 전도의 기초이자 전도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전도의 처음과 끝입니다. 전도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도구나 방법이 없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도 일부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방법이란 기본이라고 생각해서 잘 돌아보지 않았던 기초를 다시 점검해 보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르는 복음 중심적인 사람과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 중심적인 선택과 삶이 되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선택과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혹독하였습니다. 그리고 선택을 강요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과 세상의 길 이 두 갈림길에서 어느 편에 설지 선택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매 순간의 선택과 삶이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감동이 되고 위로가 되어 세상을 떠나 전혀 다른 신비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우리 교회의 복음적 선택과 삶이 전도라는 것입니다. 성도됨과 교회됨은 전도의 처음과 끝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에서 극소수와 변두리로 존재했던, 1-3세기의 초대 교회의 전도였듯, 급속도로 교회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우리 시대에도 교회됨과 성도됨이 가장 적절한 전도 전략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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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공감
C. S. 루이스에게 배우는 정감적 전도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2-06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의 길에 들어선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1986년 미국의 기독교 신문과 잡지에 이런 광고가 실렸다. “당신, 혹은 당신이 아는 사람이 C. S. 루이스와 그의 책에 의해 영향을 받아 인생의 큰 변화를 경험했다면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이 광고는 루이스 자료를 소장하고 연구하는 휘튼대학교의 메리온 웨이드(Marion Wade) 센터에서 냈다. 미국과 전 세계에서 많은 “간증들”이 속속 도착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 데 루이스가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들은 넘쳐났으며, 특히 순전한 기독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렀다는 고백이 많았다. 또한 신앙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데에도 루이스가 큰 도움을 주었다는 응답들도 많았다. 한 초등학교 선생님은 해마다 아이들에게 나니아 연대기를 읽어주면서 아이들에게 기독교적 삶의 기쁨을 소개했다. 어릴 때 루이스의 판타지 동화를 접한 아이들이 나중에 기독교 신앙에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 것은 루이스 자신이 의도했던 바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나 되었지만, C. S. 루이스는 여전히 신앙의 지성적 변증과 관련해서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책들은 구도자에게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기꺼이 권할 수 있는 진귀한 가치를 지닌다.루이스, 전도적 관점에서루이스는 스스로 전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전도는 통념적인 전도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낯선 이에게 다가가서 일대일로 복음을 제시하거나, 주변의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도구 삼아 전도하는 전략도 취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관해 말하는 데 조심스러워했다. 루이스 주변의 사람들은 그가 특별히 기독교 신앙인의 티를 내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사람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예비적 복음사역(Preparatio Evangelica)이라고 일컬었다. 루이스는 전형적인 지성적, 논증적 전도자로 간주될 것이다. 그는 설득력 있고 예리한 논리로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을 드러냈다. 그의 도덕률, 소망 충족, 삼자 택일 등의 논증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제시를 위한 길을 예비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루이스의 책을 읽고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오게 됐다. 미국의 게놈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신의 언어에서 기독교 유신론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루이스의 책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다가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찰스 콜슨도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회심하였다. 그는 출소 후에 교도소선교회(Prison Ministry)를 만들어 전 세계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 헌신하였다. 남의 나라 얘기만이 아니다. 얼마 전 필자가 만난 한 남성은 오랫동안 가톨릭의 냉담자로 지내다가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고 교회 생활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 예수를 믿게 된 한 중년 여성도 기독교 신앙에 이르는 데 루이스의 책들이 가장 친밀한 가이드가 되었다고 한다.그렇다면 루이스의 전도적 영향력은 그의 지성적 논증에만 의존할까? 기독교로의 회심 이후 그가 겪은 인생관과 인간관계의 변화는 그의 신선한 변증 논리보다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는 회심 이후 풍성한 인간관계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믿음과 기도의 삶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며 자신의 ‘참된 인격’과 화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의 회심 이후는 겸손과 용서의 삶이라고 평가된다. 루이스 VS 프로이트를 쓴 아맨드 니콜라이는 유물론자인 프로이트와 유신론자인 루이스의 사상과 삶을 비교하다가, 책의 후반부에서 실제로 기독교로 회심한 루이스가 어떻게 전과는 달리 (또한 프로이트와는 대조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가에 집중한다. 루이스는 인생 전반기에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 매우 적었으나, 회심 후에 풍성하고 친밀한 우정을 즐겼다고 한다. 그 자신의 표현처럼 그의 “외향성은 믿고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흔한 표현대로 ‘나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비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보이게 되는 가장 큰 요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타인에 대한 돌봄과 관심이고, 그다음으로는 신앙으로 인한 행복감이라고 한다. 루이스가 회심 이후 경험한 다른 이들과의 유의미한 관계나 새로운 행복은 그의 전인적인 복음사역을 위한 토대가 된다. 정감적 복음제시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변화가 담긴 루이스의 예비적 복음 사역을 필자는 정감(affection)이라는 용어로 이해하고자 한다. 정감이라는 단어는 조나단 에드워즈도 사용하였는데, 그는 이를 시편 기자가 고백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사모하는 것”(시 27:4)에서 빌려왔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에 대한 발견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필수 요소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관념적 활동의 산물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 마음으로 느끼는 변덕스러운 감정적 충동도 아니다. 따라서 정감은 감정(emotion)과는 구분된다. 정감이란 마음 깊은 곳에서 애정으로 느끼고 사랑으로 끌어안으려는 성향이다. 정감은 인간의 생각뿐 아니라 가슴과 몸에 감동을 준다. 우리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정감은 전인적으로 사랑하고 깨닫고 행동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스의 기독교 변증은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갈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성을 지녔으며, 이를 논리와 설명뿐 아니라 이미지, 상징, 내러티브, 그림 언어로 전달한다. 진리와 행복을 찾아가는 그의 치열한 경험은 이와 같은 복음 변증의 추진력이 됐다. 그는 어린 시절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갈망(Sehnsucht)이 충족되는 경험을 했다. 형 워렌이 양철통 뚜껑을 이끼로 덮고 잔가지와 꽃들로 장식한 장난감 숲을 보여줬을 때 그는 마치 천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듯했다. 또한 그는 마을의 초록빛 언덕의 능선을 보며 아득히 닿을 수 없는 곳을 동경하기도 했다. 루이스 자신은 어릴 때 종교적 경험을 거의 못 했지만 이처럼 장난감 정원과 초록빛 동산을 통해서 지고한 삶을 향한 미적 경험을 한 셈이다.루이스의 정감적 호소는 그의 회심 경험과도 연관성이 있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그는 사이드카를 타고 런던 북쪽 윕스네이드의 동물원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인격적 구주로 영접했다고 한다. 그 상황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어느 화장한 아침, 윕스네이드로 가는 중이었다. 출발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동물원에 도착했을 때는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는 길에 생각에 잠겼던 것도 아니었다. 격정에 휘말려 있지도 않았다.” 이 중대한 회심의 순간, 그는 무엇을 경험했을까? 루이스 자신이 특별한 분석을 내놓진 않았지만, 그다음 대목은 사소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웹스네이드 동물원으로 가는 길의 풍경에 주목한다. “그 후에 윕스네이드는 망가져 버렸다. 그때는 머리 위에서 새들이 노래하고 발밑에는 보랏빛 초롱꽃이 만발해 있으며 왈라비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왈라비 숲이 마치 돌아온 에덴동산 같았는데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예수를 영접하던 순간에 보았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마치 에덴동산 같았던 (그래서 그에게도 감응을 유발했을?) 그 풍경을 나중에는 볼 수 없어서 실망스러웠다는 것이다. 그의 신앙고백과 미적 경험 사이에 무언가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면 단순한 억측일까? 기독교적 구원 서사가 가장 잘 나타나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도 그의 정감적 묘사는 줄곧 등장한다. 페벤시의 아이들이 아슬란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여러분보다 더 아슬란이 누군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다. … 다들 아주 색다른 느낌에 사로잡혔다. … 에드먼드는 까닭 모를 공포를 느꼈고, 피터는 갑자기 솟구치는 용기와 모험심을 느꼈다. 수잔은 뭔가 달콤한 향기나 감미로운 선물이 자기 곁으로 확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루시는 아침에 일어나 그날이 방학 첫날이라거나 여름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느끼는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또한 아슬란이 나니아를 구하러 오는 과정도 풍경의 변화로 그 의미를 표현한다. “이제 안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늘은 점점 더 파래졌고, 가끔씩 흰 구름이 바쁘게 흘러갔다. 숲속의 넓은 빈터에는 앵초꽃들이 피어 있었다. 산들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지나가는 그들의 얼굴에 시원하고 달콤한 앵초꽂 향기를 실어다 주었다. 나무들은 이제 힘차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낙엽송과 자작나무는 초록으로 물들었고, 금련화는 황금빛을 띠어 갔다. 너도밤나무에서도 곧 투명하고 여린 이파리들이 돋아났다. 그들이 그 아래로 걸어가니 햇살도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슬란이라는 존재를 루이스는 느낌과 분위기를 통해 정감적으로 전달한다. 독자들은 아슬란의 대사나 활동뿐 아니라, 그로부터 발휘되는 아우라를 통해서 영적 감수성을 자극받는다. 이를 위해서 스토리, 비유, 이미지, 감각의 활용은 필수적이며, 그러한 장치들이 루이스의 저술에서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복음전도의 풍성함과 아름다움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새신자들을 교육시킬 때 처음부터 교리학습을 시키지 않고,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 신앙의 덕목을 나누고, 학습자들이 변화된 삶을 시도하고 경험하게 하는 데 집중했다. 초기 교회는 인간의 생각이 변화되어서 행동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먼저 변화된 생각의 삶을 경험하고 체득해야, 그들의 생각도 변화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새신자 교육에 어떠한 교훈을 줄까? 루이스의 복음사역이 상상과 내러티브를 동원한 정감적이었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입하고 설명해서 설득하려고 하기보다, 기독교 신앙의 미적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전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계기들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명제화된 복음제시만이 아니라, 숲속에서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고, 음악과 미술을 통해서 (CCM이나 성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재능을 음미하고, 영화나 문학을 통해서 삶에 대한 통찰을 나누고, 대화와 즐거움의 식탁을 통한 용납과 환대가 복음을 더 깊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고대 아일랜드에서 복음을 전했던 성 패트릭(St. Patrick)은 야만인 취급 받던 켈트인들에게 자연, 이미지, 이야기, 상징, 시, 노래, 동물 친화적인 태도 등을 통해서 기독교의 예술적이고 생태적인 영성을 제공함으로 대대적인 복음화를 이루었다. 오늘날 유럽에서 기독교는 계속해서 쇠퇴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성장하는 대표적인 교파는 정교회와 오순절이라고 한다. 이 두 교단의 차별성은 신앙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상징과 경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복음전도를 내용과 교리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데 익숙하다. 혹은 관계를 도구화해서 복음을 전하는 프로그램들에 솔깃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전적이고 미래적인 전도의 방식은 복음을 전인적, 다감각적으로 접하게 하는 것이었다. 관계가 중요한 이유는 전도의 효과적인 도구여서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변화된 성품은 타인을 향해서 성의와 진정성 있는 태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루이스도 회심 이후 주위 사람들과의 일상적 관계에서 더욱 겸손하고 진실해졌다. 기독교 신앙의 매력을 제시하는 그의 방식은 지성적 변증과 더불어 정감적 접근이라는 두 바퀴로 이루어졌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고 강력하게 권유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긍정적인 삶과 문학적 상상의 표현을 통해서 복음이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가게 했다. 신앙으로의 귀의가 종교적 클리셰와 관습에 갇히는 삶이 아니라, 예술적이고 생태적인 감수성이 더욱 풍성해지고 진실하고 유연한 인간관계를 누리는 삶으로의 초대라면 그것이야말로 긴 호흡의 견고한 복음전도가 될 것이다.
복음전도
전도자
복음제시
정감
C.S.루이스
신에 관한 소문
심플리 미셔널 | Simply Missional
by 김선일
2023-01-30
심플리 미셔널Simply Missional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무신론자가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첫 관문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회심이 있고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하지만 유신론적 신앙으로의 전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밑그림이 되기도 한다. 최근 이른바 “가나안” 성도와 탈교회 현상이 심각한 이슈로 제기됐는데, 그 배경에는 일반인들의 비종교화라는 흐름이 있고, 비종교화의 중심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약화가 있다.2022년 12월에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리서치에서는 “별난 리서치”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는 한국인들의 “신의 존재, 그리고 신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하의 조사였는데(이런 주제를 별나다고 보는 인식이 좀 별나기는 하다),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신은 존재한다고 보는 응답은 48퍼센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33퍼센트, 그리고 모르겠다는 응답은 19퍼센트이다. 일단 이 결과는 2021년 5월에 발표된 한국갤럽의 종교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이 39퍼센트였고, 존재하지 않는다가 47퍼센트였던 것과는 다소 상반된 수치다. 다른 기관의 조사이지만,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는 신을 믿는다는 응답이 갤럽의 조사보다 9퍼센트가 올라간 것이다. 갤럽은 1,500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를 벌였고 정기적으로 해오던 연구이지만, 한국리서치는 1,000명에게 문자와 이메일을 수반한 웹 조사여서 양쪽의 결과를 대등하게 비교, 평가하기는 힘들다. 다만 필자가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응답한 이들이 더 높게 이유를 추측하다가, 한 가지 흥미롭게 발견한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응답 자체가 두 갈래였다는 점이다. 즉, 신은 존재한다는 응답은 총 48퍼센트였지만, “단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21퍼센트이고, “하나가 아닌,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26퍼센트로 나왔다. 갤럽의 2021년 조사에서는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응답 항목은 나타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나의 신이 존재할 가능성, 여러 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모두 감안해서 물었을 때, 절대자로서의 신이 존재하느냐(갤럽 방식)는 질문에 대한 응답보다 더 높게 나왔으리라는 짐작이다. 필자의 추측이긴 하지만, 이 문항이 흥미로운 이유는 한국인에게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 세계를 기반에 두고 있는 서구사회와는 다를 수 있고, 이는 신과 인생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른 기대와 전망을 품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묻는 조사들이 있다. 저명한 조사기관인 퓨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에서 2014년에 실시한 조사의 첫 질문은 신(God), 또는 보편적 영(universal spirit)의 존재를 믿느냐는 것이다. 그다음 질문에서는 어느 정도로 신, 또는 보편적 영을 믿느냐고 묻는다. 절대적으로 확신한다(absolutely certain), 상당히 확신한다(fairly certain), 그다지 확신하지는 않는다(not too certain), 전혀 확신하지 않는다(not at all certain)로 응답이 구성되어 있다.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신한다가 63퍼센트, 상당히 확신한다가 20퍼센트이며, 그다지, 혹은 전혀 확신하지 않는다가 합쳐서 5퍼센트이다. 절대적 확신과 상당한 확신을 합치면 83퍼센트이고, 미국갤럽의 2022년 조사에서 81퍼센트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과 큰 차이 없는 수치다. 흥미로운 차이점은 미국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정도를 묻는데, 반면 한국의 조사에서는 어떤 신을 믿느냐, 더 구체적으로 유일신이냐, 여러 신을 믿느냐로 나눠서 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조사들에서도 신, 보편적 영, 더 높은 존재(higher being) 등으로 선택지를 넓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러 신이 공존한다는 인식은 아니다. 더군다나, 한국리서치의 조사에서는 유일신을 믿는다는 응답이 21퍼센트이지만,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응답은 26퍼센트로 더 높게 나왔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점은 한국인들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신에 대한 인식의 토양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년 전에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암살당했는데, 먼저 화면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나온다. 그다음 장면에서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극락보전’이라고 써 있는 절에 가서 보살에게 그 선교사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건네주며 그를 위해 초를 밝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이이가 하나님을 믿는 분이긴 한데…”라며 말을 흐리자, 보살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을 가리키며) “저기 계신 분들이야 서로 잘 알고 지내시겠지요. 부처님께서 하나님 품으로 잘 인도해 주실 겁니다.” 드라마의 한 대사이지만, 필자는 이와 같은 신들의 공존 사상이 한국인의 종교적 의식을 상당히 반영한다고 본다. 종교들이 혼합하고 공존하는 현상은 한국의 종교문화에 특유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 간 갈등과 분쟁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종종 결혼하면서 가족의 화목을 위해 상대방의 종교로 개종한다든지, 여전히 부모의 종교에 자녀들이 큰 고민 없이 순응하는 현상은 단지 가족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특정 종교에 배타적으로 헌신하는 문화가 고착되지 않아서 일 수 있다. 그것은 기존 종교보다 사람들의 관습 속에 깊이 스며든 더 큰 종교가 있다는 의미다. 철학자 탁석산은 그것을 한국인들의 현세 구복주의라고 지적하며, 한국인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이분법이나 절대적 유일 신앙이 약하다고 주장한다(탁석산,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래서 신학자 김기현은 한국 문화와 기독교 세계관의 관계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이원론보다 혼합주의의 극복이 한국 교회가 직시해야 할 주된 사안이라고 한다(김기현, “이원론 대 혼합주의: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재구성을 위한 제안”). 필자는 비종교화 시대의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담론을 제시할 것인가의 의도를 갖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선, 한국 문화에는 오랜 기독교 문명을 배경으로 하는 서구사회와 같이 우주를 통치하고 섭리하는 절대 신에 대한 전제가 없었다. 근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서구사회는 이성과 과학으로 세계에 대한 설명체계를 구축하며 세상을 경영하는 신의 은총과 질서를 배제하였고, 그것이 인본주의 세속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비록 20세기 중반 이후로 폭발적이고 압축적인 교회 성장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와 같은 유신론적 세계관이 한국 사회의 습속을 형성하긴 힘들었다. 따라서 한국 문화의 고유한 현세지향적이고 혼합종교적인 성향이 여전히 강한 기제로 작동한다고 본다. 그러한 마음의 틀은 복음의 변증을 위해서 마주하고 돌파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모든 결핍에는 그 배후에 갈급한 열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하나님과 유일하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신앙은 오히려 그와 같은 신앙에 저항하는 마음의 틀을 근본에서 변혁시키는 해답이 된다. 팀 켈러가 말한 것처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은 거대한 바위를 깨뜨리기 위해서 중심부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과 같다.최근 큰 인기를 얻는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 피해자가 성인이 돼서 가해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서도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악의 결속체인 가해자들이 각각 다른 종교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폭력 주동자의 어머니는 무속신앙 신봉자이고, 가해 동조자는 중견 교회 목사의 딸이며, 또 다른 가해자의 예비 시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다. 이러한 설정이 얼마나 현실적이냐를 떠나서, 사실상 이 드라마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종교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아플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 질문은 기독교 전통에서 고통의 문제와 신의 섭리에 관한 고전적 물음이다. 또한 이 질문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서 인간의 본성적인 탐구이기도 하며, 특히 비종교화/탈교회화되어가는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에 관한 신앙을 제시하려 할 때도 관련지어서 고민하게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나의 가정, 경제 문제, 일과 경력, 건강, 인간관계 등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이다.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바로 그 땅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곳이다. 선교학자 폴 히버트는 비서구 문화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실제의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인 “중간영역”에서 신앙의 가치와 효능이 입증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 서구 기독교는 하나님과 신앙을 초월과 내세의 형이상학적 영역에 가두었고, 이것이 곧 실제 삶의 문제들이 중첩한 중간영역을 배제했다고 지적한다(폴 히버트,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생한 고통과 슬픔, 고민과 희망이 교차하는 일상에서 경험하며, 그 일상을 변혁시키는 차원의 문제이다.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현안과 필요를 해결하셔야만 존재 입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시는 하나님은 더더욱 성경적 신앙과 무관하다. 그러나 그 어떤 삶의 고민과 관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세지향적이고 혼합주의적인 한국 문화에서 기독교 신앙을 제시하려면 때로 복음의 현실적 효능과 선택으로서의 신앙이라는 가치를 제시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문화적 접촉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에 대한 돌봄으로부터 절대 주권자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진정한 필요가 채워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 되어야 한다. 신의 존재에 관한 믿음을 묻는 조사에서 항상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유일성, 그리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확고하게 믿는 집단이다. 견고한 복음적 기초는 모든 사역의 전제다. 그래야 세속적 문화의 한복판에서 복음을 현실적으로 전달하면서도 복음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무신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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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론
이슬람은 가장 빨리 성장하는 종교다?
by A.S.Ibrahim
2022-12-08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가 이슬람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한두 번 들어 보았을 것이다. 현재 추세면 2050년이면 무슬림 인구가 전 세계 그리스도인 인구와 거의 같아질 것이라고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는 예측한다. 누군가에게 이 통계가 주는 의미는 이슬람이 매년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있고 따라서 신자가 계속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석 앞에서 낙담하는 그리스도인도 생길 수 있다. 특히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던 사람이 신앙을 버린 통계와 비교할 때 더 실망스럽다. 이처럼 기독교가 쇠퇴하는 사이에 이슬람이 그 틈을 타고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통계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슬람이 아니던 사람이 개종해서 증가한 숫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통계에는 신앙을 떠나는 무슬림이 똑같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현실 이해무슬림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새로운 개종자가 아니라 무슬림 가정의 높은 출생률 때문이다. 무슬림 남성은 최대 네 명의 여성과 결혼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많은 자녀로 이어진다. 또한 많은 무슬림 집단에서 여성이 집 밖에서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여자가 집에만 있는 가정환경은 자연스럽게 평균적인 비무슬림 가족보다 더 많은 자녀의 출산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슬람 사회가 여성을 주로 출산 기계(child bearers) 정도로 볼 정도로 그들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일부 무슬림이 있을 정도이다. 전통적인 무슬림에게 많은 자녀를 갖는 것을 무함마드의 움마(공동체) 확장이라는 사명을 성취하는, 무함마드를 향한 헌신의 표시가 된다. 태어난 아이들은 당연히 무슬림으로 간주되고 자동으로 이슬람의 전체 숫자에 추가된다. 출생으로 신자 수를 늘리는 동시에 이슬람은 배교자를 사형시킨다. 따라서 이슬람을 포기하는 사람은 드물 수밖에 없다.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명목상 “무슬림”으로 남는 배교자도 있다. 이슬람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라는 말 앞에서 실망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은 먼저 이런 현실을 제대로 고려해야 한다. 증가하는 무슬림의 수가 반드시 이슬람이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통계 읽기최근 몇 년 사이에 적지 않은 연구를 통해 무슬림들 사이에 만연한 배교의 물결이 드러났다. 2017년 퓨 리서치 센터 연구 분석에 따르면 미국에서 이슬람과 관련해서 개종한 사람과 배교한 사람의 숫자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그러니까 신도 수의 순 증가치(net gain)는 사실상 0인 셈이다. 미국에서 자란 성인 무슬림 중 거의 4분의 1이 자신을 더 이상 무슬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연구자는 주의를 기울인다. 내가 이런 통계를 제시하는 이유는 이슬람에 문제가 많다는 식으로 놀리고 싶어서가 아니다. 단지 이슬람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이다. 이란의 무슬림을 살펴보자. 2020년 9월, 이란의 세속적 변화를 조사한 학술연구 결과가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기재되었다. 수많은 이란인이 이슬람을 버리고 있다. 이란의 공식 인구 조사에 따르면 무려 인구의 99.5퍼센트가 무슬림이지만,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건 고작 4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란은 더 이상 무슬림이 다수인 이슬람 국가가 아닐 수도 있다. 전 세계 무슬림은 어떨까? 2019년 9월 텔레그래프 온라인(The Telegraph Online)에 실린 “젊은 무슬림이 이슬람을 떠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슬람의 근본적인 주장에 대해 감히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비단 미국뿐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의 무슬림의 모습을 강조했다. 기사는 불신앙(unbelief)의 위기에 처한 젊은 무슬림이 이슬람을 버리는 물결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서구 자유주의 사회에서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심지어 수단, 이란, 파키스탄 같은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들 국가에서는 배교 금지법이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다.)그럼 아랍 세계의 무슬림은 어떨까? 2019년 6월 24일, 영국 뉴스 매체 가디언(The Guardian)은 프린스턴 대학교에 기반을 둔 한 리서치 그룹이 수행한 연구를 보도했다. 그 연구는 아랍의 무슬림들이 어떻게 종교를 버리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아랍은 말 그대로 이슬람의 심장부이다. 대략 2014년과 2019년 사이에 자신을 “비종교적”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11퍼센트에서 18퍼센트로 증가했다. 2015년 4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의 기사도 비슷한 보도를 했다. 아랍 세계에서도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불신앙이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종교를 포함해서 특히 이슬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5년 사이에 고작 7퍼센트 증가하는 정도를 주요 지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이러한 변화가 어디서 발생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신성한 텍스트, 꾸란을 가르치고 그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이슬람의 본거지인 아랍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이 숫자가 반영하는 것은 비종교적인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사람에 국한해서이다. 진심을 드러내는 것은 무슬림이 대다수인 나라에서 위험한 행동이다. 따라서 실제 숫자는 훨씬 더 클 가능성이 있다. 이런 데이터가 이슬람이 사람을 움직이는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배교할 경우 사형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슬람을 버릴 준비가 된 무슬림이 천지에 깔렸다. 기독교의 반응확실히, 무종교자(nones)의 부상은 서구만의 현상이 아니다. 불신앙과 비종교의 증가는 이슬람에게도 심각한 문제이다.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세계적인 현상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가장 먼저 주님께 겸손하게 기도해야 한다. 무슬림들 사이에서 우리를 주님의 일꾼으로 사용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우리 중에는 이슬람 국가를 포함하여 지구 끝까지 가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도 있고 또 주변에 무슬림 이웃을 가진 사람도 있다. 성령께서 무슬림 가운데에서 활발하게 역사하시는 지금이야말로 무슬림에게 복음을 선포할 적기이다. 성령의 역사를 증언하는 우리는 힘을 내야 한다. 주로 세속 매체에 기재된 지금까지의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에 찬성하여 이슬람을 포기하는 무슬림이다. 그러나 전 세계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 사역자들로부터 들어오는 소식이 있다. 지금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속속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과 달리 예수의 복음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고, 영혼을 구원하는 강력한 능력까지 있음을 증언한다. 더 힘을 내어 무슬림에게로 나아가자. 이 글은 저자가 쓴 Reaching Your Muslim Neighbor with the Gospel(복음으로 무슬림 이웃에게 다가가기)에서 간추린 것이다. 원제: Is Islam the World’s Fastest-Growing Relig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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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구통계
선교에 왜 도시가 중요한가
by Aaron M. Renn
2022-10-19
도시는 선교에 중요하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기 때문이다. 아주 최근까지 인류는 거의 다 시골에서 살았다. 1910년까지만 해도 세계 인구의 10퍼센트만 도시에 살았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 인구는 50퍼센트 이상이며, 이번 세기 중반이 되면 75퍼센트까지 늘어날 수 있다. 폴 로머(Paul Romer)는 늑대처럼 무리를 지어 생활하던 인간이 개미나 흰개미처럼 살게 되어서라며, 도시화라는 인간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설명한다. 도시화의 변화는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난다. 아프리카는 이제 다른 어떤 대륙보다 빠르게 도시화하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2050년까지 세계 인구 증가의 절반인 약 12억 명이 아프리카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2050년까지 세계 인구의 21퍼센트가 아프리카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다. 중국과 인도도 도시화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이 넘는 인구가 도시 빈민가에 살고 있으며, 이는 미국과 유럽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 선교학자 레이 바키(Ray Bakke)는 말한다 “더 이상 정글의 초가지붕이 아니다. 도시는 이제 6대륙 모두에게 열린 미래의 새로운 선교지이다.”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우리가 지구상 모든 종족 그룹과 위치에 도달하도록 강조하지만, 인구 통계는 도시 선교에 더 치중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1억 명의 새로운 도시 거주자에 대해 1만 명당 교회가 하나가 되는 비율을 달성하려면, 1만 개의 새로운 도시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 이것은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수만 개의 새로운 도시 교회를 개척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럼 미국은 어떤가?미국과 관련해서는 도시화가 다르게 보인다. 인구 조사국의 분류를 따르면, 미국은 1920년에 이미 도시 인구 50퍼센트에 이르렀고, 오늘날에는 약 80퍼센트에 이르는 사람이 도시 거주자이다. 그러나 “80퍼센트 도시 인구”라는 수치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관계 기관은 2,500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모든 곳이 도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가수 존 멜렌캠프(John Mellencamp)가 부른 “작은 마을”(small town)의 전형인 인디애나주 세이모어에 사는 누군가는 이제 기술적으로 도시 거주자가 되었다. 또한 “도시”라는 단어에 대부분 사람은 다가구 주택 및 복합 용도 개발이 이뤄지는 고밀도 지역을 생각한다. 또한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격자 형태의 도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도로가 배치된 곳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대부분의 미국인이 거주하는 지역의 특징이 아니다. 뉴욕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보스턴, 시애틀, 워싱턴, 볼티모어, 마이애미 등 전통적으로 도시화된 곳의 2020년 인구를 다 합해도 약 2천만 명에 불과하다. 내가 사는 인디애나폴리스 같은 도시에 대학 도시까지 합쳐야 미국의 도시 인구는 3, 4천만 정도로 늘어난다. 그러나 그건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0-15퍼센트에 불과하다. 자동차를 타는 대부분 미국인은 거대한 패턴으로 성장한 교외에서 산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미국에서도 선교를 위해 전통적인 도시 지역이 여전히 중요한가? 그렇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1.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도시에 사는 3천만에서 4천만 명의 사람들도 복음을 들어야 한다. 루이빌이나 버밍엄 같은 작은 도시든, 보스턴이나 시애틀 같은 큰 도시이든, 도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2. 도시에 핵심 기관들이 있다.미국의 경제, 산업, 정부를 통제하는 주요 도심은 핵심 거점이다. 모든 미국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관이 그곳에 있다. 베이 지역의 기술, 뉴욕의 금융, LA의 엔터테인먼트, 보스턴의 생명 공학 및 엘리트 고등 교육, 워싱턴의 연방 정부는 이러한 해안 센터를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위치 중 하나로 만든다. 구글, 디즈니, 뉴욕타임스, 국방부, 하버드 같은 기관에서 내린 결정은 우리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이유로 도시는 전략적이다. 복음이 핵심 기관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싶다면, 교회가 도시에 존재하고 또 견고해야만 한다. 3. 변화는 도시에서 시작한다.국가의 문화 형성 기관이 모두 다 주요 도시 중심에 있으므로, 일반적으로 문화적 변화는 도시에서 먼저 발생한다. 펜실베이니아 역이 뉴욕시에서 철거되었을 때, 전국에서 역사 보존 운동이 촉발했다. 현대 LGBT+인권 운동은 1969년 뉴욕의 스톤월 폭동으로 시작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일어나는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비밀을 지키라는 말이 있지만, 뉴욕, 샌프란시스코 또는 LA에서 일어나는 일은 결국 우리의 삶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도시 교회는 일찍부터 문화적 변화에 노출된다. 이런 이유로 도시 교회는 종종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개발해낸다. 도시 교회가 문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또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굴복하더라도) 그들은 많은 교회에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공화당이 우세한 주(red-state)의 교외나 또는 작은 마을의 안락함에 빠져서 도시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비판보다는 그들이 어떤 압력을 받으면서 사역하고 있는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하는 힘이 곧 모든 곳에서 똑같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도시 사역이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하다. 인구 통계학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이유로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 21세기 선교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원제: Why Cities Are Important to the Church’s Missio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도시선교
지상명령
도시
도시화
팀 켈러는 왜 ‘도시 선교’를 말하는가?
by 고상섭
2022-07-20
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복음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키는 연합운동으로 복음 생태계를 만들어 도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팀 켈러를 언급할 때 지금까지 가장 많이 대두된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복음’과 ‘복음설교’일 것이다. 복음의 재발견은 너무 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반드시 도시로 그리고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 도시인가? 도시선교라는 단어는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도시를 선교해야 한다면 농촌은 선교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팀 켈러가 말하는 ‘도시’는 단순히 농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도시가 아니고 또 농촌선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팀 켈러가 도시에 집중하는 이유는 도시는 단위면적당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몰려서 살고 있고,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문화와 사회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도시의 변화는 한 개인의 변화를 넘어 도시 속에 창출된 경제, 정치. 법질서, 문화의 변화를 촉진한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도시의 개념에 눈을 뜨지 못하면 복음은 단지 개인의 구원에만 집중하게 되고 구조적인 사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도시를 선교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한다는 뜻이 된다. 도시의 긴장도시는 사람들이 몰려 밀집된 곳이라 도시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면 선교적 확장성을 가질 수 있지만 또한 죄의 온상지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모여 있는 도시에는 안정과 안정, 다양성, 생산성과 창조성이라는 일반은총의 긍정적 요소도 있지만 죄와 타락이라는 부정적인 모습도 가득하다. 그래서 교회는 도시에 빛을 비추어서 선한 영향력을 통해 문화를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소금이 되어 도시의 부패를 지연시켜야 하는 책임을 함께 가지고 있다. 도시의 긴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시를 변화시키겠다는 기독교 승리주의식 사역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도시는 교회가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이지만 교회의 힘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곳임을 인식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도시의 완전한 변화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날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 나침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8).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곳임을 이해하라고 권면한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노력한 만큼 열매가 거두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노력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밭의 채소’의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세상 속에 있지만(도시가 완전히 변화되지 않지만) 우리가 먹을 밭의 채소를 통해(하나님이 주시는 변화의 예고편과 맛보기) 우리는 소망 가운데 실망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라고.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서는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고 여건만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팀 켈러,일과 영성, 111쪽).본래 의도된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노력은 여전히 얼마쯤 열매를 맺는다. 도시는 교회가 원하는 만큼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로, 천국의 시민권자로 이 땅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임을 선포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는 나침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도시와 구원 구약 시대의 선교는 구심적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상 가운데 이방의 빛이 되어서 많은 이방 민족들이 유입되는 중심을 향해 바깥에서 모여드는 흐름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시바의 여왕이 와서 감탄하는 형태의 선교적 모델이었다. 신약 시대 선교는 원심적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향해 움직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천국을 약속하셨지만 또한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파송의 사명을 함께 주셨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예수님이 교회를 향해 주신 소명은 세상으로 파송이며 이것은 곧 도시를 변화시키라는 부름이다. 도시목회와 선교의 저자인 하비 칸 교수는 선교신학적으로 ‘도시선교’를 단순히 선교라는 개념에 도시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시선교를 새로운 선교학작 장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도시를 선교하는 것은 기존 선교의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1) 접근 가능한 미전도 종족 이전엔 선교지로 나가서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이 많았지만 요즘 도시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국가에서 복지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있고, 이주자들과 이민자들은 여러 가지로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에 가장 효과적인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선교의 불모지에서 선교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선교적 환경이 훨씬 좋은 곳에서 새로운 이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할 때 미전도 종족에 대해 쉽고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게 된다. 2) 젊은 세대도시에는 젊은 세대들이 몰려 있다.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18세에서 34세 사이의 미국인 중에 55퍼센트가 뉴욕 시에 살고 싶어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직장이나 학교 주변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더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주로 삶과 환경에 변화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직장을 가거나, 결혼과 출산을 했을 때이다. 삶의 변화가 있는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한다면 새롭게 직장을 구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귀한 자원들이 된다. 3) 문화적 엘리트도시는 출판, 미디어, 학문, 예술의 영역이 모두 종합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시대정신이 된다. 제임스 헌터는 문화가 변화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이 변방에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의 네트워크라고 말했다. 문화적 엘리트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그것을 수용해서 활용하는 교양인들이 많아질 때 문화는 운동이 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세계에 있는 젊은 세대들은 비슷한 문화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문화를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헝가리에 사는 청소년들이 뉴욕에 사는 청소년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맨해튼과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문화 생산물이 세계에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는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이 복음의 가치를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복음과 연결할 때 도시의 문화는 복음의 가치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4) 빈곤층 도시는 명암이 확실한 곳이다. 화려한 면이 있지만 어두운 면도 있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쇼핑몰 뒤에 보이지 않는 빈곤층과 노숙자들이 함께 있는 곳이 도시이다. 급성장하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1/3이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세계 빈곤층의 대다수는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에서 엘리트를 전도하는 것과 빈곤층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빈곤층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타당성에 중요한 표시가 된다. 그리고 빈곤층을 섬길 때 필요한 돈과 자원은 엘리트들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빈곤층과 도시의 필요를 위해 엘리트들의 돈과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도시 교회는 빈곤층에 대한 사역과 엘리트에 대한 사역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빈곤층을 돕기 위해서 엘리트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빈곤층에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메시지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문화 엘리트층에 대한 전도가 된다”(센터처치, 345쪽).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 싶어 했다. 아마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기 때문일 것이며, 로마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처럼 오늘날 세계의 도시들은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도시 사역을 강조하고 지원하는 것보다 선교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성도들의 선교적 삶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는 길이 바로 도시를 복음으로 품는 것이다. 사람들을 전도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다음 세대를 전도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세상의 문화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조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려면 우리는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센터처치,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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