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성경과 신학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예수님이 지옥에서 설교하셨다?
베드로전서 3:19 이해하기
by Guy Waters
2024-04-18
베드로는 바울 서신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안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벧후 3:16). 그럼 베드로 서신서는 쉬울까? 아니다, 베드로 서신서도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신자들을 당황하게 했던 구절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전서 3:18-20)18절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한다. 예수님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즉, 그는 인간으로서는 죽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다. 그런데 여기서 “영”이 무엇일까? 일부 해석자들은 그 말이 예수님의 인간 영혼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이 현재 살아계신 장소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영”을 연결함으로 베드로는 성령을 언급하고 있다(롬 8:4-11 참조). 베드로는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셨다고 말한다.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심베드로가 18절에서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는 19절 시작 부분에서 “성령으로 지옥에 가신 예수님이 거기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해석자는 베드로의 말을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또는 부활 이후에 일련의 전도 활동을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도한 대상자는 누굴까? “전에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 즉 “옥에 있는 영들”이다. 그러면 이 “영들”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들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이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천국으로 데려가신 구약 시대 신자들의 영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소식, 즉 그의 죽음과 부활은 그들에게도 좋은 소식이다. 한편으로 이 “영들”을 수천 년 전에 노아를 거부함으로 정죄받은 영혼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들을 포함한 모든 적들에 대한 승리를 선포함으로써 그들의 정죄받음을 확증하고 있다. (예수님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믿음과 회개를 위한 사후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자들도 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이 모든 해석에는 적어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그러니까 승천하셔서 아예 하늘에서 자리 잡기 전에, 꼭 육체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지역적으로라도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하신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예수님의 활동을 확증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더 명확한 성경적 증거가 없는 이상, 우리는 그런 주장을 전개하는 데에 신중해야 한다. 이런 해석이 내포하는 또 다른 문제는 바로 베드로가 이 “영들”을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 전에 순종하지 아니한 자들”(20절)로 묘사한 데서 비롯한다. 왜 예수님은 구약의 일부 성도들만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키셨을까? (그리고 왜 베드로는 구약의 성도들을 이런 식으로 묘사했을까?) 예수님은 왜 지옥에 있는 특정 세대의 영혼들에게만 정죄를 선포하고 다른 세대에게는 같은 선포를 하지 않았을까? 각각의 해석에는 나름의 문제점이 있다. 구약의 신자들이 죽어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까지 조상들의 고성소(limbus partum, “조상들의 림보”)에 갇혀 있다는 명확한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히려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 신자들의 영혼은 죽는 즉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다(눅 16:22). 그리스도께서 정죄받은 인간 영혼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포하려고 왜 굳이 지옥까지 갔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안한다는 성경적 보증도 없다. 결국 최후 심판에는 개인이 이생에서 행한 것만 고려될 것이고, 내세의 활동은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벧전 1:17; 고후 5:10; 히 9:27).또한 이 “영들”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정복한 악한 천사들로 보는 해석자도 있다. 예수님은 지옥의 포로로 잡혀 있는 영적 세력과 권세에 대한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견해는 보통 지옥에서 이뤄진 승리의 선포와 관련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영적, 마귀적 원수들에 대한 승리이 선언인 것은 사실이지만(22절 참조), 과연 베드로가 19절에서 그러한 승리를 염두에 두었는지의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19절의 “영들”과 관련해서 “노아 시대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20절) 불순종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베드로는 그들을 인간으로 본 거 같다. 더 나은 해석어려움을 피하는 동시에 베드로의 전반적인 주장 내에서 이 구절의 맥락을 해석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19절의 선포를 행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다. 확실히 설교자가 예수님이라는 건 맞다. 그러나 그는 성령 안에서 설교하신다. 그리고 이 선포의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천 사이의 기간이 아니다. 그것은 노아의 생애 동안이다.그러면 지금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방주를 짓는 과정에서 노아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두 번째 편지에서 말했듯이 그는 “의의 선포자”였다(벧후 2:5). 노아는 베드로가 일찍이 “그리스도의 영”(벧전 1:10)이라고 불렀던 성령의 능력으로 전파했다. 그러나 노아 세대의 모든 사람은 심판을 미루는 “하나님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선언을 일축했다. 그들은 “이전의” 불순종 때문에 현재 “지옥에” 있다. 즉, 그들의 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기 위해 지옥에 던져졌다.답변할 준비를 하라이 말씀은 베드로 서신서의 첫 번째 독자들에게 엄청난 목회적 격려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들 중 다수는 무가치하고 악한 삶에서 구원받은 이방인이었다(벧전 1:18, 비교 4:3-4; 참조, 엡 2:12). 이들은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베드로전서 3:8-17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현실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그들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야 했다(벧전 3:15-16).당시 신자들은 어떻게 이 힘든 일을 감당했을까? 베드로전서 3:18-20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번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지적한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옛날 노아처럼 우리를 불신앙으로 조롱하고 멸시하는 세상 앞에서 복음의 소망을 증언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즉 노아의 선포 사역에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 안에서 진리를 선포한다. 우리의 임무는 헛되지 않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리를 거두셨다(벧전 3:21-22). 우리는 결코 두려워해서도 또 절망해서도 안 된다(벧전 3:14). 오히려 불신자에게 그에 대해 담대하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해야 한다(벧전 3:15).우리의 구주가 승리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달콤한가? 베드로는 감각이 말하는 대로 살지 말라고 한다. 대신에 믿음으로 참됨을 깨닫고 그 진리에 따라서 살라고 상기시킨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 오늘도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하며 그를 섬기자. 출처: Does 1 Peter 3:19 Teach That Jesus Preached in Hell?
현대 세대주의를 보여주는 네 장의 스냅숏
by Daniel G. Hummel
2024-04-16
최근에 세대주의가 뉴스에 등장했다. 휴거, 다가오는 적그리스도, 여러 종말의 징조 중에서도 특히 이스라엘과의 거짓 평화 조약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2023년 10월 7일에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담긴 예언적 의미를 저울질했다는 소식이다. 동시에 Robert Jeffress와 Greg Laurie 같은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대형교회 목사들과 그보다 덜 유명한 수백 명의 설교자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중동에 쏠린 관심이 고조되는 시점에, 복음주의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적지 않은 복음주의자에게도) 지정학에 근거한 대중적인 세대주의 관점이 마치 전반적으로는 복음주의 관점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춘 세대주의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세대주의 신학이 미국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의 범위와 한계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최근에 The Rise and Fall of Dispensationalism(세대주의의 발흥과 쇠락)을 출판했고,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해서 할 말이 적지 않다. 특히 책 제목에 있는 “쇠락”이 언뜻 보기에는 최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세대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과 강단에서 자주 들리는 메시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와 관련해서 몇 가지 주요한 정의를 내리고 구분하는 작업은 안 그래도 가뜩이나 유동적이고 복잡한 복음주의 환경이 내포한 혼란스러운 신학적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정의와 구분첫째, 세대주의는 단지 하나의 종말 시나리오가 아니다. 물론 세대주의 신학에서 종말에 관한 부분이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건 사실이다. (언론 보도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세대주의는 교회 생활과 사회의 많은 문제와 관련해서 그 신학을 지지하는 이들의 접근 방식을 형성하는 특정한 성경 해석에 기초한 강력한 신학 체계이다. 그 특유의 종말론이 폭넓은 지지자를 만든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별,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 등 성경 해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는 다른 핵심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다.둘째, 오늘날의 맥락에서 논의할 가치가 있는 적어도 두 가지 주요 세대주의 전통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별개이다. 먼저 일부 신학교, 기독교 대학, 교회에서 논의되고 가르치는 학문적 세대주의가 있다. 하지만 이전 세대에 비해서 지금은 상대적으로 복음주의와의 연속성 및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많이 축소되었다. 다른 하나가 책, 텔레비전, 영화, 음악 및 기타 미디어에 영감을 주는 대중적 세대주의이다. 대형교회를 포함하여 몇몇 교회에서 여전히 가르치고 있으며, 그 목소리는 일부 복음주의 정치계 안에도 존재한다. “팝 세대주의”(pop-dispensationalism)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미국인이 아는 세대주의이다. 소설과 영화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에 등장하고 할리우드 코미디 This is the End에서 패러디된 내용이 다 이 세대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학문적 세대주의와 대중적 세대주의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도 있지만, 스타일, 접근 방식, 신뢰성, 내용 면에서 서로 많이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교리가 미국 복음주의에 미친 영향을 결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Charles Ryrie가 쓴 Dispensationalism Today(오늘날의 세대주의, 1965)는 1960년대 학문적 세대주의를 소개하고 있다. 그 책이 제시한 시대 정의의 모델을 바탕으로 나는 간략하게 오늘날의 세대주의를 학문적 차원과 대중적 차원 사이에서 일어난 변증법적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 변화가 1965년에는 훨씬 덜 두드러졌다.1. 대중적 세대주의 미디어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다.대중적 세대주의는 다양한 환경과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수백만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영적 삶에 영향을 미친다. 책 출판을 예로 들면, (아마존의 경우) “기독교 종말론” 하위 장르의 베스트셀러 차트는 현대 정치에 대한 세대주의적 영감을 받은 책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David Jeremiah, Amir Tsarfati, Jonathan Cahn의 책이 일상적으로 상위권에 있다. 그리고 이런 맥락의 책은 Thomas Nelson, Baker, Tyndale 같은 대규모 출판사에서 발행된다. 다른 매체에서도 대중적 세대주의자가 여전히 눈에 잘 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설교(Jeffress와 최근 사망한 Charles Stanley)와 라디오(John MacArthur, Chuck Swindoll) 등을 꼽을 수 있다. Left Behind 시리즈는 2023년에도 Kevin Sorbo가 감독한 또 한 편의 영화를 개봉했다. 이런 식의 결과물이 이룬 양과 대중적 영향력은 대단하지만, 문제는 질이다. 질적인 면에서 상황은 그저 그렇다. 베스트셀러 가운데 다수는 끝없이 분석과 예측을 쏟아낸다. 그 결과는 잠재적으로 소비자에게 미치는 기형적인 영적 영향이다. 1970년대의 전임자들(Hal Lindsey의 The Late Great Planet Earth 같은 책과 A Thief in the Night 같은 영화)처럼, 오늘날의 미디어도 종말론을 그 운동의 기초가 되는 신학적 가르침들과 아예 단절된 방식으로 제시한다. 생각이 깊은 세대주의자들이 수십 년 동안 이를 한탄해 왔지만, 그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날의 대중적 세대주의는 이전 세대와 달리 복음주의 문화와 호소력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1970년대 세대주의 선배들은 복음을 비그리스도인에게 전한다고 주장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은 (비록 그들이 전도 도구로 인기에 영합하는 종말론이 가진 대중적 매력을 사용했다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중적 세대주의는 불신자를 향해서 그런 효과를 전혀 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이 마케팅을 펼치며 겨냥한 표적은 기존의 복음주의자들이다. 2. 학문적 세대주의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쇠퇴했다.상업적이고 소비자의 비위를 맞추며 성장한 대중적 세대주의는 점점 더 약점을 드러내며 학문적 신학 전통에서 더욱더 멀어졌다. 1950년대와 1960년대 학문적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에 이 두 전통은 피차 긴장을 겪었지만, 그 뒤로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세대주의 교리가 복음주의 신학과 성경 연구를 주축으로 철저하게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에게서 더욱 정밀한 조사를 받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한때 안정을 누리던 세대주의 기관이 아예 그 신학을 버렸기 때문이다. 세대주의 신학이 근본주의자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유일한 신학적 전통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무천년 칼뱅주의나 George Eldon Ladd의 역사적 전천년주의를 보라), 그럼에도 1950년대에는 지배적인 패러다임 중 하나였다. 여기에는 대규모 성경 연구소와 대학이 있었고 또한 (미국의 세 개의 지리적, 문화적 지역에 소재한) Dallas, Talbot, Grace로 대표되는 신학교를 중심으로 점점 관련 신학교가 늘어났다. 더불어서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자들도 인상적인 리스트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40년대의 Oswald T. Allis와 1950년대의 Ladd 같은 비판자들을 시작으로 이 교리를 반대하는 보수적 신학자들은 지속해서 신학적, 성경적, 지적 비평을 평준화하고 확장했다. 여기에 John Stott부터 N. T. Wright에 이르는 영국 비평가와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발생한 오순절 학계와 남침례교 계열의 세대주의 이탈을 추가하면, 세대주의는 지난 세기에 비해서 오늘날 어느 때보다도 신학계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미약해졌다. 동시에, 한때 안정적이었던 세대주의 신학의 거점이 역사적 영향력에서 멀어졌다. Biola University 사례는 기독교 대학 및 대학계 전반에 걸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한 사례이다. 1908년 Reuben A. Torrey와 William E. Blackstone 같은 세대주의자들이 설립한 Biola University는 현재 세대주의의 가르침에 있어서 분야에 따라서 고작해서 아주 작은 목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대부분 아예 침묵한다. 한마디로 이 학교는 오늘날 세대주의의 현실을 보여준다. 최근에 드러난 또 다른 피해 사례는 Multnomah University이다. 이 대학은 한때 성경 연구소였으며 장수 총장이었던 Willard Aldrich 밑에서 충실하게 세대주의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현재는 위성 학교로 전락해서 Jessup University 산하로 들어갔다. 게다가 일부 교단도 같은 경향을 보인다. (1950년에 확고한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교단으로 합병되었던) Evangelical Free Church of America는 2019년 신앙 선언문에서 “전천년설”을 아예 삭제했다.어쨌든 세대주의 교리의 “쇠락”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적절하다. Michael Vlach, Michael J. Svigel, Cory Marsh를 포함한 전문 세대주의 학자들은 신학, 성경 연구, 역사 분야의 학술 작품을 계속해서 출판하고 있다. 그리고 Paternoster Press 및 SCS Press 같은 중소 출판사는 계속해서 세대주의 관점을 옹호하는 책을 내고 있다. 학문적으로 세대주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복음주의 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에 참여하고 자신만의 소규모 네트워크를 유지한다. 3. 이 두 경향이 복음주의에 미치는 영향은 혼합되어 있다.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 발전, 즉 빈약하고 전혀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대중적 세대주의의 확산과 학문적 세대주의의 쇠퇴가 내가 지난 반세기 동안의 이 교리를 “쇠락”이라고 표현한 이유이다. 그러나 쇠락은 죽음도 또 부재도 아니다. 오늘날 영향력에서 혼재한 세대주의는 여전히 우리와 관련이 있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이 신학을 고수하는 신학교와 학교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목회자를 훈련하는 가장 큰 초교파 기관인 Dallas Theological Seminary와 Liberty University가 포함된다. Southern California Seminary, Master's Seminary, 그리고 Shepherd's Theological Seminary 같이 세대주의 특징을 중요시하는 소규모 신학교도 있다. Moody Bible Institute 같은 학부도 여전히 세대주의 울타리 안에 있는 학교이다. 그러나 이들 각각의 경우에 학생들이 가르치고 받아들인 세대주의의 생생한 현실은 적어도 개개인의 수준에서 볼 때 명확한 확신에서부터 대충 얼기설기 고작해야 “명목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더욱이 세대주의 신학에 몰입한 사람들은 주류 학술 출판사와 저널의 관심을 끄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는 고등 교육 안팎에서 학문적 세대주의의 영향력을 더욱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널리 알려졌던 복음주의 사역의 조직과 확장을 일으킨 운동 속에 세대주의 리더십이 전무했다는 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이 그냥 없기만 한 게 아니었다. 많은 이들은 아예 세대주의를 적대시했다. 이러한 운동이 역사적 복음주의의 신학적 가르침들과의 연속성에서 항상 다양했다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운동이며 복음주의 세계의 조직적 에너지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1990년대로 돌아가 보자. 이머징 교회, “젊고, 불안하고, 개혁된”(Young, Restless, and Reformed) 교회, “제3의 길”의 지지자, 기독교 민족주의자, 붉은 글씨의 그리스도인(Red Letter Christians) 등은 하나같이 자신들만의 이유로 세대주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들을 70년 전과 비교해 보라. 세계 선교 운동, 청년 및 대학 사역 운동, 그리고 (20년 후 일어난) Jesus People 운동과 메시아 유대교(Messianic Judaism) 등은 모두 다 예외 없이 핵심 주장에 있어서 세대주의자와 그 신학의 영향을 받아 활력을 얻었다.더 넓은 복음주의 분야에서 볼 때 세대주의자가 그나마 여전히 리더십을 대표하는 분야 중 하나가 성령의 은사 중지론과 관련해서이다. 대표적인 두 사람, MacArthur와 Justin Peters가 이 전선에서 대중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미국과 전 세계에 걸쳐서 오순절 그리스도인과 비오순절 그리스도인 모두로부터 점점 더 큰 압력을 받고 있다.종합적으로 볼 때, 복잡하기는 하지만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 세대주의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4. 대중적 세대주의는 예전만큼 국가 정치와 관련이 없다.상업 및 소비자 분야에서 대중적 세대주의가 여전히 누리는 행운은 놀랍지만, 과거에 그들이 영향을 미쳤던 핵심 영역 중 하나, 교회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리더십은 시들어 가고 있다. 1920년대에 William Bell Riley와 J. Frank Norris 같은 인물은 진화론과 술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1950년대에 John R. Rice, Billy James Hargis, J. Vernon McGee는 미국에서 공산주의를 공격할 수 있는 가장 큰 발판을 제공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Jerry Falwell과 Tim LaHaye가 세속적 인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개인적으로 볼 때, 그들은 모두 다 세대주의 교리를 믿었거나, 최소한 그 교리에 매우 공감하는 입장이었다. 정치를 중시하는 저명한 세대주의 목사들의 사례가 남아 있지만 (Jeffress와 John Hagee, 그리고 John MacArthur는 코로나 정책에 대해서 그렇다), 보수 복음주의 정치의 무게 중심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 세대주의 교리에 대한 가장 가혹한 비판 세력 중 하나가 오늘날 성장하는 후천년설 민족주의에서 목소리를 찾는, 소위 말하는 후천년설 “재건주의”(reconstructionism)이다. 이 운동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Doug Wilson은 생애 초기만 해도 세대주의자였다. 세대주의 신학으로부터 “탈개종”(deconversion)한 그의 이력은 별로 독특한 것이 아니며, 사실상 태평양 북서부와 다른 지역에서 보수적 개혁주의 후천년설이라는 브랜드로 성장 중인 그는 좀 더 대중성 있는 신학 트렌드를 반영했을 뿐이다. 개혁주의 후천년설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미국에서 기독교 정치 활동이 보다 더 오순절화되었다는 점이다. Paula White와 몇몇은 트럼프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하기는 미국 최대의 친이스라엘 옹호 단체인 Christian United for Israel을 운영하고 있다.Hagee는변형된 세대주의 종말론(그는 이미 수많은 대중적 세대주의 책을 출판했다)과 오순절 신학 및 번영 복음을 적절하게 결합한 다양한 지지층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지원하도록 강력한 호소력을 만들어 낸다. 그런 영향력 덕분에 하기는 압도적 오순절주의이자 (특히 창세기 12:3에 초점을 두어) 번영 지향적이며 더불어서 신학의 핵심 부분에서 반세대주의인 글로벌 기독교 시온주의 네트워크와 미국의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 오늘날 국제 기독교 시온주의의 대부분은 미국의 관점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실질적으로나 또 수사적으로나 세대주의와 정반대이다. 그에 반해서 White는 그리스도인이 사회와 문화에서 권위를 갖도록 요구하는 주권주의 입장에 더 가깝다. 정치계에서 이러한 유리한 위치는,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해서 글로벌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네트워크” 기독교가 점유한 유리한 위치는 세대주의보다는 보수적 개혁주의 후천년설에 더 부합하며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데에 많은 에너지를 공급한다. 세대주의의 미래지금까지 살펴본 네 장의 스냅숏은 오늘날 학문, 문화, 정치 분야를 아우르는 세대주의의 복잡한 그림을 보여준다. 이 교리가 향후 50년 동안 정확하게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행여라도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세대주의의 영향력이 되살아나거나 Z세대 복음주의자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현재 추세를 반영할 때 매우 주목할 만한 반전이 될 것이다. 동시에 대중적 세대주의가 아예 상업적 매력을 잃게 되면, 그 자체로 뉴스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복음주의 문화에 더 광범위한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달리 말해서, 1970년대 이후 복음주의 문화를 지배하던 하나의 세력이 사라지는 것이다. 출처: 4 Snapshots of Dispensationalism Today
불신자에게도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라고 말해도...
by Justin Dillehay
2024-04-11
이 글 제목을 보고 의아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일반 속죄(general atonement,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었다는 교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애초에 지금 제기하는 질문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는 정해진 또는 제한된 속죄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한다.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란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의 구원은 아버지께서 미리 그에게 주신, 나라마다 있는 한정된 (그러나 아주 많은) 숫자의 죄인에게만 해당한다(요 6:38-39).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그 누구라도 최후의 심판에서 정죄를 받지 않는다(롬 8:34). 그리스도가 대신해서 죽은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롬 5:10).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주시지 않았다(요 17:9)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결코 모든 사람을 위한 게 아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죽은 건 그의 양을 위해서이고,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양은 아니다(요 10:11, 26). 예수님은 신부를 위해 죽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신부는 아니다(엡 5:25; 계 19:7-8). 구원받는 믿음의 증거 없이는 예수님의 양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지금 불신자에게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여기에 관해서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까다로운 질문솔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제한 속죄를 고수하는 목사이다. 나는 방금 요약한 주장을 믿는다. 더 나아가 나는 설교할 때나 개인적인 대화에서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이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까다로운 질문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하나님의 선택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복음 전파가 가능하겠지만, 믿지 않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예 이야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는 건 쉽지 않다(고전 15:1-3; 딤전 1:15; 벧전 3:18). 그러므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믿지 않는 죄인이 누구인데요?”라는 질문이 나오는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누군가는 “속죄에 당신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걸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런 속죄가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라고 물을 수도 있다.이것이 아마도 내가 읽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제목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해서 단호하게 “안 된다”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보통은 “안 된다. 하지만”(또는 심지어 “괜찮다. 하지만”)과 같은 식으로 대답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도할 때 이 특정 문장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이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를 전도할 때 사용하는 경우먼저, 이 문장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대단하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하라. 예를 들어, 사도행전 속 그 어떤 전도 설교에도 이런 구절이 들어간 사례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었다면, 이 문장을 정통 복음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아서는 안 된다. 둘째, 분명히 회개하고 믿을 때까지는 결코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불신자에게 확실하게 알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대부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비그리스도인도 그렇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는 말 때문에 불신자가 자신의 죄와 불신앙에 대해서까지도 안정감을 느낀다면, 그 결과는 심각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3, 5)라고 상기시키셨다. 마지막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진노까지 느끼도록 도와야 한다. 놀랍게도 나는 어떤 전도하는 사람이 불신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당신에게 진노하지 않으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요한일서 2:2이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 (즉, 진노를 없애는 희생)”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 그리고 그 제물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라고 설명을 이어갔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진노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복음 3:36의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와 완전히 모순된다. 믿기 전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불신자를 향해서 진노하신다. 사실상, 그분의 사랑이 단순한 감상적 사랑으로 그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를 전도할 때 사용하지 않는 경우첫째, 그 말을 하면서 전도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화내지 말라. 비록 그들이 제한 속죄는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건 사실상 이런 의미이다. “예수께서 죽으신 건 당신이 그를 믿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당신도 동의하지 않는가? 둘째, 언어 사용에 있어서 사도들보다 더 조심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성경보다 더 신중하다면, 칼뱅주의야말로 전도를 죽인다는 혹자의 우려를 정당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불신자에게 “예수께서 너희를 위해 죽으셨다”라고 말하지 않은 건 맞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전도를 하면서 그와 비슷한 호소를 아예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 “이 약속은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즉, 성령의 약속과 죄 사함의 약속)(사도행전 2:39).·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주시려고 …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3:26).·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10:43).·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그대가[단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6:31).그러므로 비록 “알미니우스주의”처럼 들리더라도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사실상 찰스 스펄전만큼 제한 속죄를 확고하게 받아들인 설교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를 향해 무척 자유롭게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는 하이퍼 칼뱅주의자들로부터 자주 공격받았다. 그것은 스펄전의 목표가 결코 강성 칼뱅주의자들의 기분을 맞춰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란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사랑까지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라. 복음은 경고인 동시에 구애이다. 젊은 개혁파 설교자들로부터 불신자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해도 괜찮냐는 질문은 받은 D. A. 카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나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이안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그것은 사실이다.) … 성령께서는 진리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 그러나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죄에 대한 확신은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할 뿐, 죄인에게 하나님의 용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 그것을 위해서는 더 많은 진실이 필요하다.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준비와 의지가 있음을 확신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길뿐이다. … 사랑은 큰 매력이다. 복음을 호소하는 데에 있어서 사랑은 가장 중요하다. … 그리고 이 사랑은 누군가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언제나 ‘좋은 소식’으로 선포되어야 한다.구원은 하나님의 능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사람을 회개의 자리로 이끌 수 있다(롬 2:4). 제한 속죄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의 부정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더 분명하게 인식함으로 그 사랑을 더욱 심화시킨다. 남자가 아내를 특별하게 사랑하면서 모든 여자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신부를 독특하게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실 수 있다(막 10:21 참조).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5:25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제한 속죄의 복음은 예수님이 신부를 위해서 특별한 방법으로 죽으셨지만, 그 후 우리를 향해 돌아서서 모든 사람을 그 관계로 초대하신다고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계 22:17). 우리가 그런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는데도 예수님께서 정말로 나를 위해서 죽으셨나 하면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출처: Can I Tell an Unbeliever ‘Jesus Died for You’?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
by 고상섭
2024-04-0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 중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하지 말고 삼위일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설교에서 그리스도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본문에 맞춰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신학적으로 더 균형 있는 말인 것처럼 들리지만 이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이 곧 삼위일체 중심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설교여야 한다는 명제가 증명되려면, 먼저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이 아니다”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적이지 않은가? 프레스 샌더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에서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더욱 삼위일체적이 된다고 설명한다. “만일 성육신이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세 위격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 위격은 계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차이점에 의해 서로를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에서는 하늘에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고, 오직 익명의 셋만 있게 될 것이다.”이 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만 삼위일체의 구분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양자됨으로 우리가 성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부와 성령과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사역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적일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가 더욱 찬란하게 계시된다.센더스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은 성부를 망각하는 것도 성령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 히브리서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는 말씀이 있다면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예수를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가 보내는 성령에 대해 생각한다. 즉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도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모든 설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자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신약의 서신들은 처음에 시작되는 인사말과 끝에 나오는 축도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다. 11개의 신약의 서신서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언급한다. 자세히 보면 성령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 서신이 ‘성령님’을 뺀 잘못된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자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설교한다는 것이고, 설교를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심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리스도 중심 설교야말로 최선의 삼위일체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설교가 존재하는가?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표현은 듣기에는 좋지만 학술적 정의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다양한 신학 근거를 가진 책들과 실용서들이 출판되었지만,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설교학 교과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삼위일체 설교’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가? 모든 설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반드시 다 거론해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본문에서 성부가 나올 때는 성부만, 성자가 나올 때는 성자만, 성령이 나올 때는 성령을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 본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오지 않는 본문을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에서 말하는 것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 중심 설교라면, 삼위일체가 모두 등장하지 않는 본문은 늘 인간의 스토리만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 본문이 포함된 문맥과 각 책, 구약과 신약의 전체 속에서 설교할 본문을 바라보는 숲속의 나무로 본문을 보는 성경신학의 눈이 생길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말은 명확한 실체가 없는 표현이기에 실례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않고 삼위일체적으로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삼위일체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삼위일체 중심 설교인지 구체적인 설교문을 보고 싶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주장은 많지만 정작 삼위일체 설교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학문 근거도 실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일 뿐이다. 삼위일체 설교는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삼위일체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극단적으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는 설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프래드 샌더스도 삼위일체를 깨뜨리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이 유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보내신 성부의 사랑을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의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존재 그대로를 보는 데 실패하게 된다.”결론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 요점을 살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곧 삼위일체 중심 설교이다. 둘째, 삼위일체 중심 설교의 구체적인 예와 원리가 명확하지 않다. 셋째, 그러함에도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고려하지 않는 설교를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삼위일체 중심 설교는 결국 그리스도 중심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의 풍성함이 더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라는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욱 아름답고 찬란하게 드러내어서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이 선포되도록 더욱더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삼위일체 중심이 된다.
‘영적 예배’의 참 의미는
by 최창국
2024-03-29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롬 12:1)는 기독교 예배의 정신과 목적에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로마서 12:1의 ‘영적’이라는 단어는 ‘로기코스’(λογικός)를 번역한 것이다. ‘로기코스’는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합리적’(개역판), ‘영적’(RSV, 개역 한글판, 새번역), ‘마음과 심성으로 드린’(표준새번역, 표준 신약성서)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또한 여러 번역서가 ‘이성적’(KJV, STV, NBG)으로 번역하고 있다. ‘로기코스’는 동사 ‘생각하다’와 명사 ‘말씀’과 관계가 있는 단어로 어떤 것의 참되고 핵심적인 본질에 부합한다는 의미의 ‘진정한’을 뜻하기도 한다. NEB 성경은 그 형용사의 다중적인 의미를 담아 ‘지성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로 번역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로기코스’를 이성적으로 번역하여 ‘영적 예배’가 아니라 ‘이성적 예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더라도, 여기서 이성적이란 의미는 이성 그 이상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예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는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어떤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고 갱신된 정신을 가진 이들이 드리는 믿음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즉, 영적 예배는 이 시대의 가치, 태도, 행동, 삶의 방식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삶과 관련된다(롬 12:2).분명히 ‘로기코스’는 단순히 ‘이성적’으로만 번역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로기코스’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비유적’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에서 몸(σώμα)을 비유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로기코스’도 비유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몸을 전인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듯이, ‘로기코스‘도 ’영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바울은 영적 예배를 우리의 몸, 즉 전인을 드리는 예배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명사 ‘예배’는 ‘섬김’(service)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의식(儀式)과 의무라는 뜻 모두를 내포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배란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예배 의식이나 행위만이 아니라 삶과도 관계된다. 이 단어의 이중적 의미는 우리의 예배 의식과 일상의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뿐 아니라 삶의 행동과 봉사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응답하는 형태들임을 상기시켜 준다.바울은 영적 예배를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과 잇는다. 필립스 의역본은 그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변 세상이 당신을 틀에 박지 못하게 하라”(롬 12:2). 따라서 영적 예배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즉 이 세대의 문화와 가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를 추구하는 삶이다. 영적 예배는 이 세대의 물질주의와 부도덕성과 잘못된 사고방식과 수단을 거부하는 삶과 관계된다. 중요한 것은 바울 시대를 전후한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그 시대의 물질주의와 부도덕한 삶을 거부하고 거룩한 또는 건전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로마 사회의 종교는 신과 관계된 의례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윤리적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다. 그 당시 사회에서 종교는 “신전과 제단, 사당에서 거행되는 제사와 제의적 활동, 그리고 특정한 축일을 준수하는 책무가 대부분이었다”(래리 허타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200).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 사상의 발전과 함께 윤리적인 삶을 종교와 결부시켰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고 가르치며 실천했다. 2세기 말에 이교도와 기독교도 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기독교의 대변인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 하면서, 그 원인이 건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87에서 인용). 초기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사회 안에서 건건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옥타비아누스의 고백이 증명해 준다. 예배와 사회적 실천은 상호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배의 실천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적은 종교적인 신뢰를 갖게 하는 본질적인 요인이었다. 실제로 램지 맥멀른은 “눈에 보이는 신적 역사”가 엄청난 개종의 이유가 되었다고 하였다(Ramsay MacMullen, Paganism in Roman Empire, 126). 그리스-로마 사회의 이러한 종교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어느 종교 공동체보다 그리스도인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존율이 높았던 것을 기적으로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당시 다른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은 전염병 환자를 멀리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환자를 적극적으로 간호하며 보살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병자를 낳게 한 것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환자를 위해 올린 기도 덕분만이 아니라 참을성 있게 떠다 먹인 수프 덕분이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42). 이처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영적 예배로서 거룩한 삶을 일상에서 신실하게 실천하는 공동체였다.로마서에서 영적 예배를 강조한 바울도 거룩한 삶의 실천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관계시킨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특히 남성들에게 그들의 색욕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다스리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행동하지 말라고 권면한다(살전 4:4-5). 당시 이교도 문화에서 ‘포르네이아’ 즉 간음은 여성이 몸을 파는 행위인 매춘을 의미했지만, 바울은 포르네이아를 혼외정사로 이해하고 가르쳤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아내에게는 보통 결혼 생활 중에 정조를 지킬 것을 엄격히 요구하였지만, 남편들은 상당히 자유로웠다. 남편들은 유부녀나 자유민 출신의 처녀와 성관계를 맺는 일은 용인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성행위는 구애받지 않았고 심지어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사회에서 여성, 특히 아내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함과 존귀함”의 기준을 남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 당시 지배적인 이중 잣대의 성문화에 도전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남편들에게 성관계의 대상을 아내로 한정하고 아내를 명예롭게 대할 것을 요구했다(살전 4:4-5). 이 구절에서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신을 섬기는 용도로 준비된, 이를테면 제단이나 제의 용구 같은 신물이라든가 사제를 수식하는 용어다“(래리 허타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204-05). 이는 거룩한 삶과 신을 섬기는 제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바울에게 남자들의 거룩한 성생활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표지 중의 하나였다. 즉, 바울이 가르치는 핵심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바른 성적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거룩한 삶과 거룩한 제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깊은 차원에서 거룩한 삶이 거룩한 제사, 즉 영적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예배는 거룩한 삶의 형성과 관계된다. 영적 예배는 어느 한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다. 영적 예배는 십자가를 아름답게 장식해 놓은 공간이나, 화려한 현대식 시설을 갖춘 건물이나, 찬송이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기도원 같은 특별한 장소나 행동이 있는 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주일 예배도 영적 예배에 포함된다. 따라서 영적 예배가 거룩한 삶과 관계된다는 의미가 주일마다 함께 드리는 공동체 예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매주 드리는 주일 예배와 영적 예배는 서로 순환 관계 안에 있을 때 서로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의 부활은 더더욱 ...
by Steve Bateman
2024-03-28
마크 트웨인이 믿음(faith)을 설명한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believe) 것.” 그는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그런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럼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그들은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믿는 걸까, 아니면 증거 때문에 믿는 걸까? 오늘 그 점을 살펴보자. 게다가 지금 이 시점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주장에 대한 몇 가지 증거를 고려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3월의 이데스(Ides of March, 3월 가운뎃날—에 수십 명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그날로부터 거의 77년 후인 서기 33년 4월 5일 일요일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역사가가 과거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는 네 가지 관행을 따르면 우리는 두 사건 모두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1. 두 가지 방법의 구분과학적 방법은 관찰을 기록하고, 가설을 세우고, 예측하고, 반복 가능한 실험을 수행하고, 결과를 분석한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한 반복 실험이 불가능하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1월에 루비콘 강을 건넜다거나, 조지 워싱턴이 1776년 12월 25일에 델라웨어 강을 건넜다거나,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에 영국 해협을 건넜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합리적인 사람은 이러한 사건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역사적 방법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다.역사가 루이스 고트샬크(Louis Gottschalk)는 역사적 방법을 “과거의 기록과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양심적인 역사가’는 개인적인 편견을 버리고, 문서를 연구하고, 유물을 조사하고, 사실을 수집하고, 증거를 따른다. 귀추법(Abductive reasoning)을 통해 역사가는 사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설명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주장이 있다. 과학에 호소하여 이 주장을 거부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다”(고전 15:14)라고 인정했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역사적 방법을 통해 검증과 반증이 가능하다. 2. 두 간격의 조사먼저,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이를 보고하는 원본 원고 사이의 간격을 조사한다. 이 간격이 짧을수록 작성자는 실제 사건에 더 가깝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암살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과거 사건을 믿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 사실을 믿는다. 목격자들은 눈으로 본 사실을 썼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많은 사람이 카이사르의 암살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고등학교 때 1599년에 초연된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를 읽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출처는 토마스 노스(Thomas North)가 1579년에 영어로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Parallel Lives)이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암살 후 약 160년이 지난 서기 2세기 초에 가서야 그 책을 썼기 때문에 목격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출처는 누구였을까?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기(Gallic Wars)를 일부 자료의 출처로 사용했다. 카이사르야 당연히 당사자로서 암살의 목격자였지만, 그가 거기에 관해서 글을 쓰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마도 키케로가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운명적인 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채 일 년 후에 죽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사건의 살아 있는 목격자를 접할 수 없었지만, 로마 사회의 저명한 구성원으로서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는 없는 여러 문서와 구전 전통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카이사르의 암살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본 문서 사이의 간격은 약 160년이다. 이에 비해 신약성경은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과 그 가까운 동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죽은 지 160년 후에 글을 쓴 반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빈 무덤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두 가지 핵심 주장을 확인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목격자들의 생애 동안에 글을 썼다.서기 50년에 이미 바울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기록했다(갈 1:1). 예수께서 서기 33년에 죽었다면, 부활과 이를 보고하는 최초의 원본 사본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20년 미만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대 역사의 표준이 되는 플루타르코스나 신약성경 작가가 쓴 원본이 없다. 그래서 두 번째 간격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원본 원고와 현존하는 원고 사이의 간격이다. 역사적 방법은 텍스트 비평을 사용하여 (손으로 쓰인) 현재의 사본을 검토하여 원본을 재구성한다. 이 간격은 짧을수록 좋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본 원고와 우리 손에 들린 가장 초기 원고 사이의 간격은 무려 800년 이상이다. 거기에 비해서 요한복음의 원본 사본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요한복음 사본 조각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50년이다. 신약학자 대럴 복(Darrell Bock)의 결론이다. “복음서는 예수와 카이사르에 관해 출처 간격의 증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른 어떤 고대 기록과 비교해도 뛰어나다. 고전과 카이사르 연구에 효과가 있는 연구 방식을 예수의 기록에 적용한다면, 예수의 기록은 신뢰성이 탁월하다.” 3. 두 숫자의 비교법정에서 믿을 만한 증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처럼, 사본도 많을수록 좋다. 아무리 신실한 증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보지 못한 세부 사항을 생략할 수 있고 또 봤다고 착각하는 세부 사항을 추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증언을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주변적인 세부 사항에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의 요지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 사본의 수를 다른 고대 문서와 비교하면 신약성경이 가진 역사적 증거의 우월성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은 다양한 부분을 망라하는 23,986개의 사본을 가진 것에 비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경우에는 사본이 채 열 개가 되지 않는다. 이건 엄청난 숫자의 차이이다.신약성서 학자 댄 월리스(Dan Wallace)는 현존하는 신약성서 사본들을 모두 합쳐서 쌓으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4개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조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고대 그리스 작품의 경우에 모든 사본을 다 쌓아도 높이가 1미터를 조금 넘을 뿐이다. 4. 두 동기의 검토원본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재생산 기록이 많더라도 작성자가 진실을 보고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날조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또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플루타르코스 시대에 카이사르 암살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평판이나 사회적 지위에 해를 끼칠지 모를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글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사회 엘리트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였을 뿐이다. 그는 역사적 주장을 글로 써서 당시에 오늘날의 베스트셀러 계약에 버금가는 이익을 얻었다. 그는 잃을 것이 거의 없었고 얻을 것이 많았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진실 아니면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굳이 그들이 왜 거짓말을 할까? 그들의 대담한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정치적으로 위험했다. 목격자의 증언(행 1:22)으로 인해 그들은 지위와 부, 자유를 잃었고 어떤 사람은 생명까지 잃었다.역사가는 그러한 고통을 문서의 신뢰성에 대한 논거로 간주한다. 고트샬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술이 증인, 그의 사랑하는 사람 또는 그의 대의명분에 해를 끼치는 경우 그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과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큰 해를 끼쳤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그들의 증언을 가장 설명하는 방법은 그들이 진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광신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해서 죽을 사람은 있어도 거짓임을 알면서 죽을 사람은 없다. 그들은 부활이 이익을 준다는 이유로 증언한 게 아니다. 부활이 사실이었기에 증언했다. 3월의 이데스를 기념하는 역사학자가 몇 명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은행조차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부활절에 모든 대륙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할 것이다. 카이사르는 세상에 율리우스력을 주었지만, 1세기에 목수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우리에게는 연수를 계산하는 새로운 방식이 생겼다. 그건 랍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다. 그의 죽음 때문도 아니다. 예수 외에도 로마가 십자가에서 죽인 적의 숫자는 적지 않다. 2068년 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계는 이를 하나의 역사적 각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로부터 불과 77년 후,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세상은 그날을 기점으로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원제: I Believe in the Death of Julius Caesar and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작은 자로 살아가기
시편 131편 묵상
by 고명환
2024-03-25
1 미국의 한 주립대학에서 가르치던 젊은 한국인 체육 교수가 점심을 먹던 자리에서 각진 자세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는 한국 체육계에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위인전의 끝을 장식할 만한 문어적 수사를 써서 밝힌 포부였다. 사람이 운집한 공식 석상에서 들을 법한 선언과도 같은 말을 몇이 둘러앉은 조촐한 식사 자리에서 듣게 되니 머릿속이 다소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말이 의미하듯 그 젊은 교수는 성공하여 큰 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두 나라를 오가며 인맥을 만들기에 부지런히 움직였고 자신의 이름을 여러 방면으로 알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젊은 교수처럼 큰 자가 되어 보겠다는 사람을 탓할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칭찬할 마음은 더욱 없다. 다만, 왜 큰 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는 알고 싶다. 그 동기와 목적을 알고 싶은 것이다.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서, 아니면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여기에 더해, 누구를 위해 큰 자가 되려고 하는지도 묻고 싶다. 자신인가, 아니면 그 누구인가.사람을 줄곧 영향권 아래 두어 왔던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이 시대에도 큰 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곧,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것을 가지거나, 유명해지라고 부추긴다. 그래야, 후회 없는 만족한 인생이라고 속삭인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대우해 준다고 강조한다. 큰 자로 살라는 세상의 가르침은 일찍이 교회의 울타리도 수월하게 뚫고 진입했다. 사람의 욕망을 숙주 삼아 성경적 가치인 양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각 분야의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교회 안에도 큰 자가 있으니 큰 자로 쓰임 받기를 사모하라고. 장로, 권사가 되어 권위를 가지라고. 교회를 부흥시켜 큰 목회를 하라고, 아니면 자신을 확대해서 큰 교회의 담임이 되라고. 그런데, 교회의 머리시요 심판 날의 재판장이신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문화와 제도가 인정하는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의 나라에서 인정받는 큰 자와 다를 뿐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큰 자가 되려면 작은 자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앞서간 진실한 성도들 역시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그릇이 되고자 힘썼을 뿐이다. 오히려, 큰 자가 되어 세상의 영화와 사람의 영광을 얻는 길을 경계했다. 2 다윗은 큰일을 이룬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겸손한 마음을 시편 131편은 잘 보여준다.시편 131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1주님, 이제 내가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나서지 않으며,분에 넘치는놀라운 일을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2오히려, 내 마음은고요하고 평온합니다.젖뗀 아이가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3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새번역)1절에서 다윗은 교만한 마음, 오만한 길, 그리고 큰 것을 이루려는 욕망을 버렸다고 고백한다. 모두 마음의 평안을 빼앗는 신앙의 독소들이다. 경험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며, 눈을 높은 곳에 두고 자기를 중심에 두고 살 때 영혼은 피곤하다. 즉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기준으로 살면, 영혼은 안식하지 못하고 평안은 모두 빼앗기게 된다. 더불어, 커다란 것을 계획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영혼은 쉴 새가 없고 피폐해져 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위해 가지는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아마도 1절에서 언급한 마음과 태도로 인해 영혼의 전쟁터를 분명히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져다준 것은 명성이나 부였지 영혼의 안식과 평화는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더더욱,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것이다. 오로지, 평화와 안정은 주님 안에서만 영혼이 자리잡을 때 주어지는 것이며, 높아진 마음이나 분에 넘치는 야망과 함께 그분이 계시는 평강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에게서 떠나 주님의 영역으로 간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영혼의 평화와 안정이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고요하고 평안했다(2절). 젖뗀 아이에게 여전히 어머니의 품은 필요하다. 어머니의 품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안전하고 포근한 안식처이다. 다윗에게 주님의 품이야말로 진정으로 안전한 쉼의 장소였다. 그 어떤 것이 줄 수 없는 영혼의 안식과 완전한 안전을 보장해 주는 안식처인 것이다. 이 시는 여러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중 하나로 불리며 사랑받았을 것이다. 주님이 계신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무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찬양이 아닐 수 없다. 영광의 하나님을 뵈러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정리하지 않은 부정한 마음과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안고 다가갈 수는 없다.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길로 집약되는 주님께서 대적하는 마음은 물론, 욕심과 후회 원망 분노 등의 격정을 모두 비워내야 한다. 다윗의 본 시는 순례길에 오른 성도들이 읊조리고 노래하며 올라갈 때 충분히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갈망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짐작한다. 3열왕기하 4장에 한 부유한 여인이 등장한다. 수넴에 살고 있던 그 여인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성심껏 섬기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음식을 대접했고 거처를 마련해서 머물러 편히 쉴 수 있도록 특별한 편의를 제공했다. 어느 날, 엘리사는수넴 여인의 남다른 정성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왕이나 군사령관 같은 권력자도 그의 말이라면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며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했다. 그때, 그 여인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열왕기하 4:13, 개정개역). (새번역은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습니다”로 풀어서 번역했다.) 여인의 대답은 하나님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 아쉬울 것 없이 만족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구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수넴 여인은 부유한 환경에서 남편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삶에 허전한 구석 없이 완벽하게 채워졌기 때문에 엘리사의 호의를 에둘러 사양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쩌면 가장 큰 것을 갖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대를 이어줄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여자였다. 당시의 관점에서 수넴 여인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받은(복 받지 못한) 여자라는 사회적 편견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그늘 아래 보통의 여자 같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눈을 피해 고립된 삶으로 자신을 몰아가기 쉽다. 하지만, 대답에서 보여주듯 그녀는 동족과 어울리며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엘리사가 여인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알아내고는 딱하게 여겨 아들을 낳게 해 준다. (수넴 여인은 열왕기하 8장에 다시 등장하며, 성경은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한 여인과 관련한 이야기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수넴 여인은 마음을 높여 백성을 분리하고 멀리하며 충분히 특권 의식 속에 살 만한 위치에 있었다. 왕의 마음까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엘리사라는 큰 인물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력한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백성 중에 있었다. 백성의 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사는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또 그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수넴 여인의 낮고 겸손한 눈 높이가 더 가질 수 있고 더 높아질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엘리사의 호의도 정중하게 거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로, 평범한 여인 같으나 비범한 인물이었고, 작은 자인 것 같으나 큰 자였다. 복음서는 드문 경우이지만 제자들 사이에 빚어진 다툼을 기록했다. 다툼의 원인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냐 하는 논쟁이었다. 그들이 다툰 이슈는 서열이 필요하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누가 더 크냐’였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 간에 그래도 서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 그들은 부름을 받은 순서나, 배운 정도, 혹은 가문, 아니면 다른 어떤 기준을 대면서 각자의 상위를 주장했을 것 같다.“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누가복음 9:46-48).먼저, 제자들이 왜 서로 간의 서열 문제로 다투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찾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제자들이 살았던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계급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거대한 제국의 일원이었던 유대 사람들 역시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사회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함께 모이거나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서로가 가지는 사회적인 위치를 묻고 거기에 맞는 예우를 해 주어야 했다. 당연히,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우선 사회적인 위치를 물어보아야 했다. 이에 따라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위치나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낮은 자세를 보여야 했다. 바로 제자들의 다툼은 이런 문화 사회적인 배경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초기에는 관심이 없었던 이슈를 부각시키고 논쟁을 벌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간단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그들 사이의 서열을 정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으면 열두 명이 효과적으로 조직되고 움직이기 위해 적어도 팀장 정도는 세웠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웬일인지 그들 사이에 서열을 정해 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제자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고 그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제자들의 계산은 저마다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서열 문제는 그들 안에 크게 떠올랐다. 서열에 의해 미래에 차지할 지분이 각각 달라질 거라는 공통의 계산이 충돌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의 권세를 정복하고, 기대하는 강력한 왕국이 세워지면 그들이 얻게 될 지위와 영예에는 분명 차등이 있을 것이다. 이때 더 큰 자리와 권세를 꿰차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앉게 되느냐’는 단순한 논쟁 같아 보이나 그 안에는 영예와 권세와 대접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속된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기존의 관행과 질서를 뒤집는 방법으로 대처하신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 곁에 세우셨다. 예수님이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와 그분 가까이에 세운 일은 그 시대의 관행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보통은 어린아이를 직접 지적하여 이리 오라 명령하면 될 일이었다. 어린아이는 신분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장 아래층에 속하는 부류 중 하나였고, 종처럼 대우해도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사회였다. 가정에서조차 소유물로 취급했고 심지어는 팔기까지 했으니 예수님께서 손수 데려다 곁에 세우신 행동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저자인 마가는 그 어린아이를 껴안아 주셨다고 기록한다(마가복음 9:36).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우하셨는지 직접 본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어린아이들을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꾸짖다가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되는 잘못을 범한다(마태복음 19:13-15).)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신 뒤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어린이 주일 설교 본문의 주제로 적합하지 않다.) 어린아이처럼 세상에서 작은 자여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주님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이고 친절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는 엄격한 신분 사회에 던지는 혁명적인 말씀이었다. 우월한 위치의 사람이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을 영접하는 일은 없었다. 최소 나와 지위가 같거나 높을 경우에만 영접할 대상이었다. 어린아이들이나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손님이 오면 때론 손님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헌데, 주님은 작은 자가 되어 그들을 환영하여 영접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 일은 나를 보내신 분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논쟁을 종식하는 역설로 말씀을 마무리하신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된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겠다. 같은 문제를 다룬 마가의 복음서를 따라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작은 자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마태가 기록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자’라는 말씀에 따라 이중적 의미를 갖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다.주님 나라의 가치와 원리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그것을 땅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늘 나라의 큰 자들은 세상에서 작은 자로 사는 사람들이고(마태복음 18:4), 아울러 작은 자가 되어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다(마가복음 9:35). 그러므로, 유한한 세상의 가치와 제도 아래에서 권세와 영화를 얻겠다고 큰 자가 되려 하기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을 남을 섬기는 작은 자로 살아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사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 원리대로 사셨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45).말씀처럼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자신을 낮추어 작은 자로 섬기며 사셨다. 어린아이, 종, 여인들과 동등한 사회적 위치에서 그들을 영접하고 친근하게 대하셨다. 스승이 제자보다 낮을 수 없는데도 제자들보다 자신을 낮추어 그들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셨다. 고난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큰 자냐는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이때도 주님은 그들을 꾸짖는 대신 타이르듯이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누가복음 22:26).이어서 말씀하신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22:27).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셨던 것이다. 다만,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분은 나사렛의 평범한 목수로 사시다 메시아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신 이후, 일관되게 작은 자들을 섬기는 작은 사람으로 사셨다. 4제자들의 예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한 작은 자로 겸손하게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작은 자를 영접하고 대접하며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지닌 육신(flesh)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큰 자가 되어 영접받고 대우받기를 원한다. 사람이 가진 본능과 의지로 체질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 쉬운 덕목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실패를 거듭하다 아예 포기하는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 미국 남부의 한 한인교회를 방문했다. 선교관이란 이름의 조그만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어 하룻밤 신세를 질 요량으로 찾게 되었다. 저녁 시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젊은 부목사가 반갑게 맞아 주며 소소한 안내를 해 주었다. 잠시 거실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 그 부목사는 내게 어느 나라에서 일하는 선교사인지 물어 왔다. 선교관에 묵게 되니 당연히 선교사인줄 알았나 보다. 이에 나는 선교사가 아니라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부목사는 기대가 무너졌는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에서 고압적이고 가르치려는 태도로 변해 갔다. 이후 성의 없는 몇 마디 하고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 부목사에겐 선교사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큰 사람이고 나 같이 공부하는 신학생은 별 볼 일 없는 작은 자라 그리 환대할 존재가 아니라고 여겼던 모양이다.‘나이로 따지면 내가 그 부목사보다 십년은 족히 넘을 텐데…’ 푸대접을 넘어 훈계를 받았으니 한동안 그때를 기억하면 울화가 치밀었고, 지금도 그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작은 자로 살아가는 데 실패하고 있나 보다. 작은 자로서 받아야 할 어쩌면 당연한 대우를 받고도 그 정도보다는 큰 자라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 그런가 보다. 그 젊은 목사 역시 작은 자가 되어 섬기는 일에 실패했다. 자신은 작은 자보다는 큰 자라고 여겼을 터이고 이로 인해 작은 자가 되어 영접하고 섬기는 일에 실패했던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잊는 길 밖에 작은 자로 살 방법은 없다. 우리의 타고난 자아를 가지고는 작은 자가 될 수도 작은 자로 살 수도 없다. 흉내를 낼 수 있지만 그도 오래 가지 못한다. 수양과 훈련이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실패를 피하지 못한다. 삼 년 동안 스승을 따라 다니며 그분을 배웠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누가 큰 자냐는 갈등으로 마음이 분열되어 있었다(마태복음 20:20-28). 여전히, 권세를 즐기고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의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육신의 자아를 처리하지 못한 채 헛된 기대를 안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 작은 자로 살기 위해서는 시편의 다윗이 육신의 소욕을 모두 뒤로하고 주님께 오듯이,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으로 오셔서 평생을 그렇게 사셨던 분, 섬기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으나 그들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기 전까지는 작은 자로 살아가기란 요원할 뿐이다. 5우리 중에 작은 자로 살겠다고 세상의 권세와 지위를 일부러 피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큰 자, 작은 자는 세상에서 일컫는 지위의 고하 혹은 성취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작은 자로 살 수 있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큰 자로 살 수 있다. 나는 세상에서 힘없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도 능력 없는 자라고 스스로 비하하며 주님을 섬기는 일에 물러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언자로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예언자를 알아주고 섬기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는다고, 의인을 알아보고 의인으로 맞아들이면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뿐인가? 주님의 제자라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 이를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다(마태복음 10:42). 작은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이다. 주님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일으켰던 대 예언자 엘리야나 그를 정성으로 섬겼던 사르밧 여인이 한 일을 동일하게 큰일로 여겨 주시고, 기적의 예언자 엘리사가 행한 일이나 그를 알아주고 섬겼던 수넴 여인이 한 일을 다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말씀을 따라 작은 자로 살아가는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주님 나라의 사람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우리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일하다 거기에서 내려온 뒤에는 작업복으로 손수 망치를 들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 짓는 일에 참여하고, 주일이면 주일학교 교사로 평범한 사람들을 섬겼던 하나님 나라의 큰 자를 익히 들어 안다. 어느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잊고 사람이 닿기 힘든 오지나 음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작은 자로 일하는 드러나지 않은 무명의 주님 나라 일꾼들은 얼마나 많은가. 세상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도덕적 표준으로 삼으라 하고, 보편적인 종교는 넉넉하면 적선을 실천하라는 수준의 가르침에 그친다. 헌데,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며 살라고 가르치셨다.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도덕률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상식과 관행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라고 하셨다. 이렇게 사는 것은 단지 높은 수준의 도덕을 실천하는 것을 지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교훈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곳곳에 많아질 때 주님의 나라는 점점 확장되고 그곳에 천국의 삶이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우리는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행하신 분을 믿고 따른다. “나를 본 받으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도의 본에 감동하며 마음을 다진다. 주님과 사도들은 가르침대로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가 되어 희생하고 섬기며 살았다.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따랐던 앞서간 분들 역시 그 길을 그대로 밟았다. 이제는 우리에게 바통이 넘겨져 왔다. 주님과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본으로 가르쳐 왔던 천국 시민의 도덕률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때이다. 낮은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는 작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과 사람이 알아주고 말고에 상관없이 자신을 잊고 묵묵히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러면, 그날에, 자신은 몰랐지만 작은 섬김 하나라도 기억해 주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분이 반드시 고마워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다(마태복음 25:31-46).
로마서 8:28이 없다면
by Tim Challies
2024-03-21
나는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제시하기에 로마서 8:28이 적절하지 않다는, 그 구절이 진리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기 전까지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나와 관련해서 고백할 수 있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나는 로마서 8:28을 먹고 살았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 목마른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난 듯, 나는 이 구절을 의지해서 살았다는 게 나의 분명한 고백이다. 나에게는 로마서 8:28이 필요했고 그 말씀은 내 영혼을 위로하고 슬픔을 덜어주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친숙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고 많은 사람이 암기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당신이 혹시라도 로마서 8:28이 없는 세상이 어떨지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로마서 8:28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경험을 놓고 “선을 이룬다”고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경험 중 일부가 해를 끼치며, 사탄과 하나님이 우주적으로 내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다. 또 우리의 경험 중 어떤 건 아예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삶에는 그 어떤 목적도, 의미도, 또 구원도 없는 마구 일어나는 자의적인 요소로만 가득하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슬픔과 고통을 바라보며 “여기에는 그 어떤 선함도 없어. 여기서는 아예 선함이 나올 수도 없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로마서 8:28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을 갖지 못할 것이다.이 구절이 없다면, 우리의 경험 중 어떤 것은 결국 선을 이룰 것이지만, 또 어떤 것은 결국 해를 끼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혹은 어떤 건 선을 이루지만, 어떤 건 공허하고 무의미한, 하나님 섭리의 블랙홀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로마서 8:28이 없다면 우리는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없을 것이다.“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곳에는 그 일을 이루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일하려면 일꾼이 필요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우리도 우주와 같은 비인격적인 힘이 궁극적으로 모든 상황의 배후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 우주에 자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신이나 지적인 존재는 없고 단지 냉담하고 비인격적인 운명이 있을 뿐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로마서 8:28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이 없다면, 우리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이 없다면, 우리가 시련을 겪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건 하나님께 그런 시련을 통하여 성취하실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그리고 우리가 모든 시련을 강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통과한다면 우리가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제대로 숙고하지 못할 것이다.로마서 8:28이 없다면, 고통은 참을 수 없고 모든 슬픔이 무의미하다고 내리는 결론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로마서 8:28이 있다.하나님은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이 구절을 주셨다. 고통을 겪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려면 올바른 판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상황에 맞는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 과거 많은 이들이 범했던 오류, 이 구절에 대해 가혹하거나 부정확한 해석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내게 이 구절보다 더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말씀은 거의 없다. 로마서 8:28이 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그분이 삶의 모든 환경을 통해 일하셔서 악에서 선을, 어둠에서 빛을, 슬픔에서 기쁨을 가져오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이 상황을 조종하는 데 능숙한 일종의 우주 PR맨처럼 특별히 민첩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목적만큼이나 수단을 중시하는 계획자, 엔지니어, 그리고 설계자이시다. 하나님은 고요와 폭풍, 어둠과 새벽, 기근과 절기를 정하신다. 그러므로 의미 없는 사건은 없고, 목적 없는 상황은 없고, 궁극적으로 절망적인 조건은 있을 수 없다. 어두운 날, 어려운 시련, 상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한 뜻을 이루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이루신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모든 상황은 그분이 자신의 좋은 계획, 즉 완전한 목적을 형성하고 구체화하는 데 사용하시는 원재료일 뿐이다. 하나님의 특기는 선에서 선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로마서 8:28은 내가 눈물 가운데에서도 그를 신뢰하면 내게 반드시 웃을 이유를 주실 것이라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고통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한다면, 그분은 내 입술에 찬양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슬픔 중에도 그분을 신뢰한다면, 그분은 나중에 그 슬픔과 괴로움을 통해서 얻은 게 결국에는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메마른 사막에 핀 귀한 꽃, 날카로운 가시에 맞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그리고 폭풍우 속에서도 건재한 부드러운 꽃잎을 보여 주실 것이다. 모든 검은 구름 뒤에는 노란 해가 있고, 모든 어두운 밤 뒤에는 밝은 낮이 있으며, 눈살을 찌푸리는 모든 섭리 뒤에는 웃는 얼굴이 숨어있다. 누구일까? 자기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을 선을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의 웃는 얼굴이다. 원제: Life Without Romans 8:28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진정한 ‘내 소유’는 무엇인가
by 박혜영
2024-03-08
시편 119를 읽는 데 아주 익숙한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소유는…”(56절). 사유재산, 소유권, 소유주…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 역사는 ‘소유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소유한다’는 말에는 단지 ‘필요가 있기에 갖고 있다’라는 뜻 그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가 많을수록 존재감을 얻으며, 소유가 많을수록 대접받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지하고 저울에 올라서면 무게가 더 나가는 것처럼, 많이 소유할수록 무게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 여겨, 우리는 ‘내 소유’라는 말에서 안심, 안전, 보호라는 말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남을 수 있는 것만 무게 있는 실체가 됩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사 57:13). 이사야 본문에 나온 자들은 위기에 대비하여 의지가 될 만한 우상을 착실히 모아 둔 듯합니다. 재물의 우상, 학업의 우상, 연애의 우상을 모아왔습니다. 우상은 돌이나 나무, 또는 청동으로 만들었을 테니 제법 묵직합니다.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람에 떠가고, 기운에도 날아가는 연기와 같았습니다. 무게가 나갈 만한 그 어떤 실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내 소유”라 할 수 있을까요? 진정 “내 소유”라면 내 손에 끝까지 남아 나에게 존재감을 부여해야 할 텐데, 사라진 걸 보면 “내 소유”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평생 모으고, 평생 애쓴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충격일까요?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2-15). 사람들은 다 자신이 쌓은 공력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자신의 공력이 불에 타 없어질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만든 것이라 여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 타버렸다면, 그 순간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충격! 반면 “그 날 …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그대로 남아 있고, 불에 태워도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공력만이 “내 소유”입니다.여기서 시편 119:56이 중요해집니다. 그대로 남을 만한 진짜 “내 소유”가 무엇인지 귀띔해 주고 있으니까요. 무엇입니까?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진정한 “내 소유”란 재산이나 부동산이 아닙니다. 책에서 얻은 지식도 아니고, 인생 경험도 “내 소유”는 아닙니다. 그런 것에는 하나님 앞에 남을 수 있는 무게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그것만입니다. 그것만 내 이름으로 남습니다. 이는 위에 인용한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는 말과 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자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만 ‘하나님의 산’을 얻고, ‘하나님의 산’에만 요동치 않을 무게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 본문을 “…하면서 내 삶을 보냈으니”라고 번역한 영어성경(NLT)은 “내 소유”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를 간파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한평생 보냈는지 묻기 위한 번역처럼 보였습니다.사람이 죽으면 갖고 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사실 피상적입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면서 재산보다는 자신의 이름이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인생을 살라는 조언도 최고의 지혜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 갖고 가는 게 있노라고. 죽을 때 다 두고 가는 건 아니라고. “내 소유”라 할 만한 것은 갖고 간다고.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재산도 명예도 다 두고 가지만, 진정한 “내 소유”는 갖고 갑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 곧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무게를 순종을 통해 내 무게로 전환시킨 그것은 진정한 “내 소유”가 되어 우리에게 존재감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울 뿐’입니다.
인권의 자리는 어디인가
피터슨, 하라리, 홀랜드의 ‘인권’
by Derek Rishmawy
2024-03-05
THE KELLER CENTER 학부 때 수강한 인권의 도덕성에 관한 강좌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대부분의 철학 강좌와 마찬가지로 그 강좌도 명백하고 복잡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강좌 전반부는 인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왜 인권이 규범적이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를 칸트, 공리주의, 실증주의, 사회적 구성주의 등으로 설명한다. (신학적 이유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예 시작점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21세기에 들어서 더 이상해진 서구인 대부분이 인권이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여긴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권리는 “양도할 수 없으며” “자명”하다. 하지만 인권에 관한 공부가 다 끝나고도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사실은 딱 하나에 불과했다. 그 어떤 세속 철학도 인권의 근거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주장은 서로를 향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들이밀었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도 현대 도덕 담론과 국제법에서 인권이라는 중요한 개념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철학 수업에서야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도 어깨를 으쓱하고 얼마든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누구나 당연시하는 국제 도덕 질서 전체의 기초가 사실은 벌거벗은 임금님에 불과하다는 게 알려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거기에 실상은 “거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이 질문은 대학 강의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개 포럼에서도 논의된다. 공공 지식인이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역사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의 인권 논평을 둘러싼 최근 논란을 한번 살펴보자. X(과거 트위터)를 통해서 유포되는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인권은 천국, 신이랑 비슷하다. 인권도 우리가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주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다. 믿고 싶은 매력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현실이 아니다. 해파리, 딱따구리, 타조에게 권리가 없듯이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인권이란 없다. 인간의 배를 가르고 속을 살펴보라. 거기에 피, 심장, 폐와 신장은 있겠지만, 인권은 없다. 인권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에만 존재한다. 정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라는 것도 인권, 신, 그리고 천국처럼 이야기일 뿐이다. 진짜는 무엇인가? 산이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심지어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매우 강력한 이야기. 그래서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은 실제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이런 주장과 관련한 논란을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탈 기독교 문화의 도덕적 의식에 발생하는 몇 가지 중요한 균열을 만난다. 그 속에는 창조의 하나님을 모르기에 구원의 하나님은 아예 알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훈이 들어있다. 그냥 이야기라고? 하라리가 무신론자이자 자연주의자인 점을 감안할 때, 그가 비교적 표준적이고 철학적으로 정교하지 않은 형태의 과학주의, 즉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비과학적 신념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에게 유일한 “실제”는 산, 벌레, 피와 같은 생물학적 현실이다. 즉, 테스트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물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 천국, 지옥, 국가, 심지어 ‘인권’조차도 진짜가 아니다. 그냥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멋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결코 사물을 만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췌장 왼쪽이나 DNA나 염색체 구조와 같은 물리적 존재에는 인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관된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를 관찰할 뿐이다. 세상은 거기 있으니까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있기를 바란다고 해도,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어떤 절대적인 의무가 기록된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런 식의 주장이 마치 만화 속 악당이 자신의 마스터플랜(기후 변화 등을 피하기 위해 지구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폭로하기 위한 전주곡처럼 들린다는 사실이 하라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 같다. 상황이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합리적으로 대하려면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거기’에 있는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진실이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역사가 톰 홀랜드의 획기적인 책, 도미니언에서 언급한 요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권의 개념은 특정 시대와 장소(12세기 이탈리아), 특정 인물(교회법 변호사), 특정 교리(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특정 이야기(창조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 서사)를 기반으로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 인권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기독교 개념이 세속화한 결과이다. 홀랜드가 단언했듯이, 인권은 “가령 삼위일체보다도 객관적인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이 두 가지 다 기독교 신학의 작용에서 파생되었다. 이 둘을 다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홀랜드는 인권과 그 원천이 진리임을 확인함으로 그 “도약”을 이룬 것 같다.)어떤 측면에서 홀랜드와 하라리는 서로 동의한다. 예를 들어서, 인권에 관해서는 준수해야 할 목표가 없다. 그냥 단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홀랜드가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하라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홀랜드는 하라리의 경험론적 전제, 즉 “객관적”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것은 맛보고, 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권과 관련해서는 진짜로 ‘그게’ 있다고, 인권이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이야기와 관계없이 거기에는 ‘그게’ 있다주목할 만한 답변이 하나 더 있다. 홀랜드와의 부분적인 의견 차이를 보이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은 인권에 관한 한 거기에는 “객관성”이 없다는 공유된 전제에 이의를 제기했다.인권에 관한 교리는 의미 네트워크가 파생시킨 의미론적 냉혹한 결과임이 곧 드러날 것이다. 즉 인권은 단지 단어와 언어적 개념뿐만 아니라 이야기와 행동 패턴 사이의 관계에 걸쳐서 암묵적으로 인코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인간 존재의 구조 아니, 인간의 존재 자체에도 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즉, “인권”은 지속 가능하고 상향 지향적이며 상호 이타적인 인간 상호 작용을 특징짓는 전형적인 현실의 의미론적 표현이다. 전혀 임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피터슨의 언어는 확실히 비잔틴적이고 복잡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감각이 사물, 존재 또는 존재 자체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존재는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나아가서 아무런 사회적 구성이나 뿌리도 없이 서구의 양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이데올로기적 괴물이 아니다.물론, 피터슨이 지향하는 형이상학과 신학의 모호함을 고려할 때(그의 견해는 발전하는 진화 심리학 분야의 일부 발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추가한 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비유신론적 그리고 준종교적 혼합처럼 보인다), 그가 그 가치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건 별로 놀랍지 않다. 단지 이 진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든 검증이 가능해지고, 정량화가 될 거라는 일종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합리적인 정당성이나 설명이 없는 단순한 신념으로 보인다.자연법, 자연권, 양심: 억압인가, 지지인가?이런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이야기”는 지금과 같은 혼란에 어떤 빛을 비출 수 있을까? 기독교 인류학의 기본 형태를 이해하면 옳고 그름의 다양한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 및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제시할 수 있다.우리 마음에 새겨진 법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지식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한다(1:18-23). ‘자연신학’과 ‘자연법’이다. 우리의 도덕적, 인지적 특성이 올바르게 기능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숭배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라는 피조물에 적합한 요구를 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요구 중 하나가 다른 피조물을 존엄성과 존경심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즉, 학대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성관계를 가지거나 살해하거나 비방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24-32절).더 나아가서, 존중해야 할 대상이 단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방인, 즉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계시를 모르고 받지도 못한 비유대인도 포함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이 이방인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율법이 없어도 그들 자신에게 율법처럼 행하며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2:14).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5절).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감각, 즉 모든 시대, 문화,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 존재에는 법의 개념이 심겨 있다. 이것이 바로 C. S. 루이스가 “도”(Tao)라고 불렀던 것인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준수해야 하는 명령이 있음을 안다. 따라서 비록 창세기 1장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명확한 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성경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며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올바로 대하지 않는 경우에 거기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이성과 이데올로기사회 내부와 사회 간의 도덕적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한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영웅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무질서하고 부당하다고 반대할 수 있을까?비도덕적인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회는 자신이 가르치고 뿌리내리고 질서를 정하는 포괄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 사실은 세상에 타고난 보편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인류의 자연적 지식이 죄로 인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질서의 특징을 분별하는 인간이 능력이 하나님과의 소외된 관계로 인해 깨졌다. 인간의 도덕적 나침반은 더 이상 정북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점을 드러낸다. 거짓 신을 만들어 창조의 특징을 우상화하고 도덕법을 우리 자신의 왜곡된 형상으로 개조한다. 하라리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연주의는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으로 인해서 받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만들어 낸, 스스로를 속이는 멋진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보유한 진실 억압 무기고에서도 이데올로기는 가장 정교한 도구 중 하나이다. 일관성, 물질주의, 진리 파악이것이 바로 합리화되고 진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인 하라리의 기술생물학적 자연주의의 정체이다. 그래도 거기에는 최소한 일관성이라는 가치는 있다. 실제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자, 진화 심리학자, 자연주의 철학자는 도덕성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규범적 설명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는 데에는 다 동의한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와 폴 네델리스키가 쓴 Science and the Good’을 참고하라.)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의 진정한 가치를 부인하는 죄로 물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점점 악화시키는 현실에 대해서 일관되게 잘못된 해석만을 계속해서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피터슨은 한동안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놓고 씨름했다. 자연법과 자연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리를 명령하고 부여하는 하나님, “원형적 현실”을 저술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존엄성과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결과 또한 타락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모순 덩어리일 뿐이다. 신앙의 도약?홀랜드의 반응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인권 교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지만, 자연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견해는 매우 신앙주의(fideistic)와 역사주의에 치우쳐 있다. 홀랜드에게 있어서 “인권”에 대한 논의가 복음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특별한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권”이 “객관적인” 현실로서 자연에 내재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대부분의 윤리가 올바른 이야기를 믿기로 선택하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맞서 신학자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다음과 같이 썼다.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수 없다. 역사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은 정반대의 점을 지적하기 마련이다. 역사가 모든 의미와 가치에 대한 범주적 매트릭스로 만들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이야기라면,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다. 오도노반의 주장은 복음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바깥쪽에 있는 현실에 관한 서사라는 것이다. 현실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특정한 방식에 의거해 특정한 모양으로 만든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법과 자연권은 자연의 현실에 종속되거나 부과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에도 불구하고 확증하고, 명확히 하고, 정화하고, 또 중요한 경우에 확인시키는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계시는 자연계시에 대한 인간의 타락하고 죄악된 인식을 바로잡는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제공함으로써 계시를 완성시킨다.자연적 도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 피터슨은 옳다. 그 부분을 자연 너머로부터 오는 확증과 명확한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인식한 홀랜드로 마찬가지로 옳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이런 측면에서 사실일 때에만 그 이야기는 인간 존엄성을 확증함으로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도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우리가 뼈속 깊이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이해하고, 확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실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감자,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도 없고 복음도 없다면 하라리가 어느 정도 옳은지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단지 고기이며, 그 속에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주장할 합리적 근거는 없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만큼이나 오래된 주장이지만, 아무리 하라리가 이 문제에 관해서 틀렸고 대부분의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주장을 지금 현실과 관련이 없고 또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본성의 존엄성에 대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꺼려한다. 극도로 세속적인 사람이라도 피터슨과 같은 본능을 갖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기독교는 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 이성적 힘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한 그에 관한 정당화를 제공한다. 성경의 진리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에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확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복음과 함께 오는 더 큰 존엄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죽으시고, 같은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와 죄, 불의의 대가까지 치르시고, 그들을 예정된 영광으로 회복시키셨다. 할렐루야!둘째, 이 결과에는 반직관적인 부분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와 진리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기적이 진짜냐의 여부가 아니라 도덕성과 관련이 있다. 즉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자연 질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 특히 결혼과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독교의 믿음과 이해에 관한 반대 때문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은 뒷걸음질 치며 후방을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기독교의 관점이 사랑과 정의라며 스스로를 옹호하기에만 바쁜 모습처럼 보인다.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덕적 질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진리를 위해 변증적 이점을 강조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다. 세속적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서기에 점점 더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럴수록 기독교는 세상과 비교해서 더 확고하게 대조를 이루며 다른 이데올로기가 고작해야 희미하게 제시하는 소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우리가 항상 믿어왔던 것을 단순히 확증하는 역할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우리 양심의 진실을 억압해 온 모든 세상의 방식에 대한 시정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위로와 격려를 주는 말씀뿐만 아니라 심판을 약속하는 말씀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대량 학살, 강간, 인종 차별, 편견 등 이웃에 대한 인류의 폭력적인 범죄와 죄악,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다른 영역의 진실까지도 억압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성생활, 성적 취향, 성 정체성에 관해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하신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릴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강조할 때,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로서 다른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에게 말한다. 그렇기에 겸손하고 자신감 있게 말해야 한다. 불의로 진리를 억압하는 모든 방식에 대해 정기적으로 말씀으로부터 교정 받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나아간다. 그렇다고 겸손이 나태함이나 절망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만이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접근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증거를 남겨 두셨다. 율법은 그들의 마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들도 지금 양심을 누르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사모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심판으로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있다(롬 2:16).원제: Is There a ‘There’ There? Peterson, Harari, and Holland on Human Righ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열린
1
페이지
2
페이지
3
페이지
4
페이지
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