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성경과 신학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성령님의 신성을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6-25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따라서 성령님도 믿게 된다.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성령님에 대해서는 “온전히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 일이 많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고대의 성령훼손당과 몬타누스주의 등의 이단들을 생각해 보라.) 유난히 성령님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성향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내어서 과연 성경이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지를 살피고, 우리들의 생각 속에 성령님에 대한 생각이 과연 성경이 가르침과 일치하는지를 살펴보고, 가장 중요한 일로 “그 성경적 성령님과 바르게 관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논의를 해보도록 하겠다.질문 1: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십니까?”성경대로 믿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유대교도나 이슬람교도 같은 타종교인들이나 여호와의증인이나 미국의 ‘크리스천사이언스’(Chrisian Science)라는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크리스천사이언스’라는 이단에서 유행시킨 것 같이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며, 바른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크리스천사이언스는 그 이름과 달리 기독교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1894년 미국 보스턴에서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의 가르침으로 첫 교회가 시작되었고, 1936년경에는 27만 명까지 성장했으나 그 후에는 교세가 약화되어 2009년에는 5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그리고, 이론적으로 성령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실질상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성령님과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성령님께 명령을 한다든지, 자신이 성령님의 사역을 주관하고 통제할 수 있는 듯 하는 것은 결국 성령님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의도는 없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결국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과연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으로 대하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참으로 신실한 사역자들이 늘 그리했듯이 용어도 “성령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다. 물론 심령에서 그렇게 성령님을 온전한 하나님으로 의식하면서 이 용어를 써야 한다. 그저 용어만 성령님이라고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 중에서 표현하듯이 “하나 안에서 삼위가, 또 삼위 안에서 한 하나님이 경배 받으셔야”하기 때문이다(이남규, ‘신조학’ 합신대학원출판부). 성령님을 참으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아뢰고, 경배해야 한다.질문 2: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존숭하는 것 같이 성령님을 존숭하십니까?”마음 깊이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만큼 존숭(尊崇)하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한다. 성령님을 하나님의 능력이나 하나님의 영향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백하게 이교적이거나 이단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성령님이 성부(聖父) 하나님이나 성자(聖子) 하나님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이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 각자가 자신의 심중에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하나님의 경륜상 성자께서 성부에게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해도 그것이 성자께서 성부보다 낮은 위격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듯이, 성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것을 예언하시고(요 15:26) 그 말씀대로 성령님께서 오셨다고 해서 성령님이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보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낮은 위격이 아니다. 위격상의 동등과 경륜상의 복종을 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순종의 형태가 보이지만 그 위격에 있어서 삼위는 동등하시다.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라고 선언한 베드로의 말을 우리들은 잘 들어야 한다. 오순절에 교회 공동체에 임하여 오신 성령님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기때문에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주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고(행 5:9) 하는 것이다. 이 사건 속에서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심이 확연히 드러났고, 그리하여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행 5:11)했다(이승구, ‘성령의 위로와 교회’ 이레서원).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고전 3:16; 고전 12:13; 엡 2:22)은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님을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과 같은 정도로 존숭해야 한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위격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아타나시우스 신경에서는 “이 삼위 안에서 아무도 더 먼저 있거나 더 나중 되지 않으며, 아무도 더 크거나 작지 않다. 다만 세 위격 모두가 서로 동일하게 영원하시며 동등하시다”라고 고백했다. 질문 3: “성령님께 순종하십니까?”이 세 번째 질문이 가장 핵심적 질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과연 성령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일까? 첫째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을 이해하려고 하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여기서 다른 것, 특히 자신의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성령님을 이해하고 성령님과 관계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성령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됨을 생각해야 한다. 성령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대해서 성경에 가르친 것을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해야지, 여기에 다른 것을 더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시고는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 16:14-15)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다. 일차적으로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하신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보존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요 14:26) 방식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려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요 15:26; 요 16:13-14).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님과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알아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것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고 했다(고전 2:13). 둘째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과 성령님을 따르는 것을 동의어로 놓고 논의해 간다(롬 8:4-14).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고 했으니, 중생하여 하나님을 참된 의미에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은 그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롬 8:1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는 것이다(롬 8:16). 이것은 그저 말로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중생하여 영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의 부르짖음의 성격을 그렇게 규정하신 것이며, 그렇게 성령님이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성령님의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가 날마다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나아갈 때 우리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질문 4: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십니까?”우리가 과연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령님에 대해서 배우고 그 배운 것을 표현하는지 아닌지 다음 한 가지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겠다. 우선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읽어보자.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로서는 도무지 말할 수 없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우선 성자께서 아버지, 즉 성부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신다고 했다. 요한복음 14-16장은 성령님이 오실 것을 여러 번 언급하는데 특히 성부로부터 성령님이 보내진다는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더 나아가서,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ceed)는 말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우리는 우리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놀라운 말을 하게 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말의 “나오신다”(proceed), “나오심”(procession)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발출(發出) 등으로 쓰면 안 된다. 특히 고대적 상황에서는 그렇게 쓰면 고대 교회의 대표적 이단인 영지주의(Gnosticism)의 발출설과 혼동되기 때문에 그런 용어를 쓰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현세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령님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서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는 아주 놀라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 성령님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이다. 콘스탄티노플 신조(381)에서는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을 따라서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 의도는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성을 분명히 하면서 성부님과 성령님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계속 쓰다 보니 과거 동방 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이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하시다는 종속설, 즉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하신다는 견해, 즉 성부가 좀더 높으시다는 견해를 자꾸 생각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종속설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 스페인의 톨레도(Toledo)에서 모인 ‘톨레도 제3공의회’(589)에서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고 표현하여 “성자로부터도”라는 어귀를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더 넣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성자가 더 못한 분이라는 종속성을 막고, 성경을 따라 성령님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표현하는 본래의 의도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다. 이것을 흔히 서방 교회의 전통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이러한 성경적 이해를 반영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 제12항에서는 성령님에 대해서 다음 같이 고백하고 있다.“우리들은 또한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믿고 고백합니다.(성령님은) 만들어지신 것도 아니고, 피조된 것도 아니고,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것입니다.질서에 있어서는 성령님이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시지만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시며,권위와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성령님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로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우리들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과연 성경이 가르친 대로 여러 면에서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하는지를 묻고, 더 나아가서 그 성령님께 과연 순종하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문제는 결국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신학
교리
성령
삼위일체
바빙크
톨레도공의회
벨직신앙고백
크리스천사이언스
부활이 약속하는 우리의 회복
by Petar Nenadov
2020-06-17
“우리 오늘밤에 나갈 거예요 아빠?” 앞줄에 앉은 여자아이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일단 착륙하면 호텔을 알아보고 저녁을 먹을 거야. 그리고 내일 아침이 되면 디즈니에 갈 거야.” 아빠가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오빠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마침내 디즈니월드에 가게 되었다며 어린애다운 흥분과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나는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애비(Abby)라는 여학생이 떠올랐다. 과연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애비는 자신이 원하는 여행을 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애비는 우리 교회에 다니는 열여섯 살 된 학생인데, 최근에 암 진단을 받았다. 일 년 육 개월 전, 감기 증상인 줄 알고 병원에 갔다가 몸에 백혈병이 있어 화학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결과를 받게 되었다.나는 디즈니에 가 보려고 올랜도에 간 것은 아니었다. 로젠 싱글 크리크(Rosen Shingle Creek)에서 개최되는 TGC 내셔널 컨퍼런스에 참석하려고 그 도시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공항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오하이오에서 올랜도까지 나 같은 사람들이 발길을 옮길 만한 공원이라든가 관광지에 대한 광고조차 접하지 못했다. 그런데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줄곧 강연을 듣는데, 비행기에서 앞줄에 앉아 떠들던 그 아이들의 기쁨과 언젠가 애비도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이 마음속에 수시로 찾아들며 이런 물음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소’라고 불리는 디즈니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은 기쁨과 바람을 가져다주는 것일까?’고통과 위로디즈니는 오래 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Make-A-Wish Foundation)과 제휴를 맺어 왔다(역주: ‘메이크어위시 재단’은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취지 하에 1980년 설립된 미국의 자선 단체로서 두 살 반에서 열여덟 살에 걸친 환자들의 신청을 받는다). 이 재단에 신청되는 소원 가운데 디즈니월드와 같은 리조트에 가는 일은 여전히 인기가 제일 높다. 그런 목적에서 ‘기브 키즈 더 월드 리조트’(Give Kids the World Resort)도 운영되는데, 이곳은 생명에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아이들과 가족들이 환상적인 휴양을 일주일 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70에이커 규모의 비영리 시설이다.애비는 ‘메이크어위시’에 당첨되면 어떤 여행을 할 수 있는지 홀리(Holly)라는 자매를 통해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홀리도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자매로서 암 투병을 하고 있는데, 8년 전 ‘메이크어위시’에 선정되어 디즈니에 가게 되었다. 홀리와 그 가족들은 암이라는 질병과 그 치료 과정이 가져다주는 고통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여행과 같은 바람이 환자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치료를 받는 도중에라도 바라볼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아이들이 ‘메이크어위시’에서 하는 일을 알게 되면, 당연히 흥분되어 가슴이 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꿈에 그리는 여행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말인즉슨 그 아이들이 악몽과 같은 삶을 살아왔음을 뜻한다. 그 여행은 아이들이 겪어 온 아픔과 고통에 대한 위로를 상징한다. 어떤 아이들은 여행을 할 만큼 충분히 회복되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들은 자신의 소원이 이뤄지기 위해 더 많은 후원금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혹 여건이 된다면, 당신도 그 재단을 후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은 그러한 위로보다 어떤 점에서 더 나은 소망을 제시하는 것일까?부활과 회복내가 참석했던 TGC 컨퍼런스의 마지막 시간이 되자 팀 켈러(Tim Keller)가 나와 누가복음 24장을 해설하며 예수님의 부활이 내포하는 독특한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누가복음 24장 40-43절을 다루었는데, 그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40-43).켈러는 다소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이 식사 장면 속에 중요한 포인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육체와 영혼을 지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꿈 속에 나타나거나, 또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 등장하신 게 아니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이 자신의 손과 발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며 그들 앞에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신 일은, 장차 새롭게 될 세상에서 새롭게 될 육체를 가지게 될 부활의 소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활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위로 그 이상을 약속한다. 곧 ‘회복’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부활은 사실상 우리가 상실한 게 아무것도 없음을 말해 준다.”당시 켈러는 독신으로 있는 지체들과 어려운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들에게 이 진리를 적용했지만, 나는 비행기에서 보았던 남매와 지금도 자신만의 ‘메이크어위시’ 여행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우리 아들은 밖에 나가서 놀지 못할 거야’, ‘우리 딸이 병원에 갇혀 고등학교도 못 다니면 어떡하지’라고 걱정하는 모든 부모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므로 그 모든 자들을 위한 진정한 소망이 있음을 확신했다. 곧 새로워질 세상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했다.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믿는다. 우리에게 일어난 그 어떤 좋은 일도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진정으로 좋은 일,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은 끝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들려주는 좋은 소식은 세상이 들려주는 나쁜 소식보다 더 생생한 현실을 보장한다.애비의 몸에는 암이 있지만, 암이 애비를 다스리진 않는다. 예수님이 애비를 다스리신다. 그래서 그녀는 수시로 손을 들어 그분을 찬양한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보며 경배했던 이들처럼 말이다(눅 24:52).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이 들려주는 회복의 약속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없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 약속이 제시하는 기쁨도 이 세상의 어떤 일시적인 위로보다 더 큰 위로를 가져다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storation: the Promise of the Resurrection번역: 장성우
복음
부활
아픔
고통
위로
회복
소망
약속
팀켈러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
by Greg Morse
2020-06-12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킹(king)이다. 퀸(queen)이 제아무리 강하고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해도 퀸 없이 체스 경기를 이기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하지만 킹이 잡히면 경기는 끝난다.그러므로 체스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은 어떤 경우에서든 킹을 보호하기 위해 계산되고 실행된다. 포온(pawn)은 버릴 수 있고 비숍(bishop)이나 나이트(knight), 그리고 이들이 만드는 성(castling) 역시 무너질 수 있다. 킹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퀸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다. 왕관을 쓴 킹은 부하들 뒤에 숨고 성 안에서 보호받는다. 모든 말은 킹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하지만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전혀 다른 왕이신데, ‘호빗’(The Hobbit)에 등장하는 소인들(dwarfs)의 군주인 토린 오큰실드(Thorin Oakenshield)에 그분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다섯 군대의 전투’(Battle of Five Armies) 확장판에서 사악한 오크(orc)들이 소인들과 요정들(elves)의 군대들을 짓밟았다. 상황은 절망적이어서 토린은 적장인 아조그(Azog the Defiler)를 죽이는 것, 즉 “뱀의 머리를 잘라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이 위험한 계획을 자기 사촌에게 알려주었을 때 그 사촌은 “토린, 절대 안 돼요. ‘당신은 우리 왕입니다’”라고 외친다. 이에 토린은 진정한 왕의 품격으로 단호하게 답한다. “왕이니까 ‘더더욱’ 내가 해야 하네.” 왕이 앞서 나가신다오늘날 남성들은 그들의 용맹한 왕이 가장 큰 영광 중에 계신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상응하는 남편, 아버지, 성도, 그리고 시민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왕이신가? 그가 처했던 처절한 상황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자들이 둘러싸고 그를 배신한 자가 제사장들과 군인들을 몰고 그와 그의 제자들에게로 왔을 때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요 18:4) 그들 앞에 서셨다. 지옥의 진노와 천국의 공의가 예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를 따랐으나 곧 그로부터 도망칠 이들 앞에 나아가 그들의 죄가 쏜 포탄 앞에 그 자신을 세우셨다. 대적들에게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라고 하신 후에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고 하셨다(요 18:8). 예수께서는 다가오는 채찍질, 조롱, 십자가, 하나님의 진노, 버려짐, 피 흘림과 수치를 아시면서도 자기 백성 앞에 나아가 서셨다. 이 왕은 자기 백성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신 것이다. 전장의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 군대 뒤에 몸을 숨기고 짖기만 하는 비겁한 개가 아니었다. 그는 가장 끔찍한 운명에도 굴하지 않고 앞서 홀로 나아가 싸우고 정복하시는 유다의 사자였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드리셨다. 그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요 13:1) 사랑하셨다.영광의 왕께서는 역사의 체스판에서 그의 신하들 뒤에 숨지 않으셨다. 자기 백성을 포온으로 쓰지 않으셨고 그의 신부 된 교회를 자기 자신을 위해 희생시키지 않으셨다. 자기 왕관을 지키려 자기 신하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으셨다. 그의 신부가 그의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신부의 십자가를 지셨다. 만일 누군가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주께서는 왕이십니다”라고 하거나, 누군가처럼 정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라고 하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방해하려 한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실까? 진실된 왕처럼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해야 한다!”라고 답하실 것이다. 옛 문이 활짝 열리다십자가를 지지 말라던 사탄의 속삭임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을지 생각해 보라. 하지만 예수님은 그저 다른 이를 위해 죽고자 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셨다. 다른 모든 인간은 예수님과 비교하면 그저 '포온이거나 포온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가장 높으신 왕이요 창조주께서 자신의 피조물을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가? 자기 대적들을 살리기 위해 고통의 길을 가기로 ‘그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그리 하셨다. 자신의 신부를 살리기 위해 그 길을 가신 것이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사 53:8) 그가 독사의 머리를 잘라 내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쏟아 사망에 이르신 후에(사 53:12) 그의 백성에게 복을 부어주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강한 용사시다. 영광의 왕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셔서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셨다.“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 24:9).우리 왕은 이런 분이시다. 우리 신랑은 이런 분이다.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우리 가정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에 대해 이러한 관점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은 남편 노릇” 같은 말을 할 때, 이런 왕권, 이런 리더십, 이런 머리됨(headship)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에 의하면, 진정한 남편 노릇의 핵심에 있는 것은 남성적인 용기와 힘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이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남편 된 우리는 그저 게으른 태도로 지시하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우리의 안락함을 내려놓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퀸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갖고 있다. 자기 성(城)이 주는 혼자만의 안락함 속에 틀어박혀 아무 문제, 걱정, 상처도 없이 살며 바로 자기들 눈 앞에서 자기 나이트가 목숨을 잃고 비숍이 죽임을 당하며, 나이트와 비숍이 만들어 놓은 성이 무너지고 결국 퀸마저 희생 당하는 걸 보면서도 그들의 충성심에 대해 조롱하는 말이나 던지는 사람은 수치스러운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 ‘은의자’(The Silver Chair)에서 왕자는 “용감한 여자를 대적들의 손 안으로 들여보내고 우리는 이렇게 안전한 곳에 머물렀다는 것, 이게 우리의 최악의 수치고 슬픔이야”라고 말했다. 냉담함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자기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시작한다면, 소위 머리됨과 복종(submission)에 대한 숱한 논쟁들은 사라질 것이다. 이런 남자는 자기 일을 위해 자녀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가정의 머리 역할을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기쁨으로 ‘받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부를 구하기 위해 쓰셨던 그 면류관, 즉 가시 면류관을 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남자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이 세상을 위해 만든 아름다운 설계도에 대한 완벽한 변증이 된다.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에서 킹으로 창조된 이들이 “왕이니까 더더욱 내가 해야 하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가족 앞으로 나아갈 때, 그들은 심지어 강성 페미니스트에게도 영향력을 미쳐 페미니스트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깊은 갈망을 일깨우게 한다. 남자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열정적으로 사모하면서도 그리스도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고귀한 사랑을 실천하는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 오늘날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남녀평등주의자들(egalitarians)의 세력은 곳곳에서 종결을 고하기 시작할 것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 원제: Headship Crowned with Thorns번역: 이정훈
복음
십자가
그리스도의권위
남성
가정
남편
체스
왕
희생
오늘날에도 십계명이 필요하다
by Derek Rishmawy
2020-06-05
진창에 빠진 것 같은 우리 사회는 지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아 여러 격동이 가져다준 역류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한편으로, 우리는 모두 다 개인을 제한하는 규칙과 규율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공개적인 개인주의자다. 또한 0과 1로만 표현되는 디지털 세상(binary systems)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나 자신이 하는 이야기 속에 숨은 다양한 측면조차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도덕주의자의 칼날을 벼리면서 오늘날 중대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도덕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며, 진보와 정의의 길을 방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제거할 준비가 된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불필요한 관습과 불의로부터 구원하기는 커녕, 어떤 때는 오히려 불의가 더 활개치도록 만드는 법률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을 맞고 있다. 한편, 과거에 일찌기 없었던 안락함과 건강 그리고 다양한 놀이에 둘러 쌓인 요즘 아이들은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초조해하고 있다. 지난 20년을 통틀어 지금 가장 높은 십대 자살율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묘사했던 문화적 무질서(anomie, 아노미) 또는 무법 상태에 의하면, 경제와 사회 위기의 시대를 맞아서 공유되던 사회적 규범, 의미 및 응집력의 붕괴는 결국 일반화된 허무감, 절망, 그리고 목적 실종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물론 뒤르켐은 보다 더 광범위한 사회에 관해서 말한 것이지만, 우리가 직장에서 만나는 너무도 많은 근본 없는(rootless) 젊은이들이 세수하라고 잔소리하는 언니 같은 존재, 엉망이 된 삶 속에 질서를 잡으라며 아버지와 같은 조언을 하는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역자 주: 캐나다의 임상심리학자이자 토론토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과 같은 라이프 스타일 또는 자기 계발 코치에게 의존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날 그들이 직장에서 겪는 개인적인 아노미와 심리적 불안을 느낄 수 있다.지금까지 말한 사회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십계명, 즉 그의 “열 개의 말씀(Ten Words)”을 설명한, 피터 레이하르트(Peter Leithart)의 소책자, ‘The Ten Commandments: A Guide to the Perfect Law of Liberty’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것은 전형적인 레이하르트의 작품이다. 모든 페이지는 거미줄 같이 촘촘한 성경 신학과 세밀한 주석, 히브리 문장 구조 분석(키아즘, chiasm), 역사적 사실 복원, 그리고 신학적 단어 놀이로 가득 차 있다. 속이 꽉 차고(Pithy) 실용적이며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이번 레이하르트 책은 단 한 글자도 버릴 게 없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말씀이 책의 구조는 단순명료하다. 첫 두 장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십계명이 지금도 교회에 여전히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그리고 십계명의 순서대로 책을 저술했기에(기본적으로 개혁주의의 순서에 따랐는데, 단지 첫 번째 계명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동방 가톨릭 쪽 서문을 포함했다), 이 책의 본문은 총 열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장에 등장하는 신학적 구조다. 십계명이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기독교인에게도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미국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 있는 ‘테오폴리스연구소’(Theopolis Institute)의 소장인 레이하르트는 십계명을 출애굽기와 성경 전체의 광범위한 이야기라는 맥락 속에서 바라보면서 십계명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시내 산에서 직접 전달해 준 말씀(Words)이라고 주장한다(출 4:23).하나님은 그의 첫 번째 계명을 그의 첫 아들인 아담에게 주었다. 시내 산에서 그는 그의 아들, 새로운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열 개의 말씀은 명령이다. 그러나 이건 단지 명령으로서만 끝나는 게 아니다. 아버지 되신 야훼가 그의 아들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실 때, 그는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분명하게 밝히셨다. 열 개의 말씀은 다름 아닌 ‘개인적인 선언’이고 이것이야말로 야훼가 어떤 분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좋은 아버지고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방향과 목적 그리고 질서를 주셨다. 달리 말해서 그들이 넘어서는 안 되는 자유의 한계를 분명하게 그려 주셨다. 열 개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부자간의 대화”인 셈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 되고 싶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소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열 개의 말씀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열 개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신학적 진술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것은 또한 인류학적 진술, 하나의 정체성,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성을 지니기 위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물론 구약의 내용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열 개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계속 실패함으로써 아버지 야훼를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아담에게 주어진 소명에 응답하지 못하는 이야기다. 감사하게도 또 다른 아들이 등장한다. 바로 마지막 아담, 진정한 이스라엘, 아버지 야훼와 똑같이 생긴 존재, 바로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열 개의 말씀을 성취하고 또한 그 열 개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현했다. 궁극적으로 십계명은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기독교인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십계명 속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십계명은 바로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미리 아신 자들로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한”(롬 8;29) 형상 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진리의 말씀이런 전체적인 구조를 염두에 두고 레이하르트는 각각의 계명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보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계명은 다 그 뿌리를 신구약 말씀,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예수님의 사명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자유(filial freedom)를 상황에 맞게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예를 들어서, 거짓 증언하는 계명에 관한 장에서, 레이하르트는 구약에 등장하는 다양한 법률과 잠언 그리고 선지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인생 전체에 걸쳐서 진실된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말씀 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말들이 다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신다. 진실한 간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향한 폭력을 억제하고(출 23:1; 신19:15-21; 약 3:9) 공정한 사회생활에 필요한 조건을 설정한다. 따라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채로 태어나는 우리는 야훼 아버지처럼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바로 우리의 말을 통해서 생명이 창조될 수 있도록 말이다(창 1장).물론,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 시대에 가십, 거짓 증언, 중상모략 및 치명적인 거짓말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는 위험이다. 우리는 지금 트위터를 통해 명성을 얻을 수도 있고, 가짜 뉴스에 의해 죽음을 다루는 이데올로기가 나타나기도 하며, 또한 디지털 군중(네티즌)에 의해서 한 순간에 명성이 무너질 수도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식의 다이나믹한 세상 움직임은 교회조차 찢어놓을 수 있으며, 또한 믿는 자들조차 중상모략적인 논쟁에 휘말리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랑의 모습으로 가장한 채 죄를 죄라고 부르지 않는 비겁한 침묵의 방법을 선택하는 대신, 레이하르트는 신자들에게 선지자적 순교(prophetic martyrdom)를 실천하라고 독려한다. 이웃과 적을 담대하게 사랑하는 것은 선지자들처럼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짓말의 아비인 사탄에게 포로가 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때로는 생명을 거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참되고 충실한 증인 예수”의 형상에 맞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된다. 독자와 목회자를 위한 말씀이 짧은 글을 통해서 이 책의 가치를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이 책이 정말로 기가 막힌 소책자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만약에 조만간 구약을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소스를 바탕으로 구약을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분량과 다루는 주제 그리고 그리스도에 중점을 둔 주제 의식까지, 이 책은 시리즈 설교를 준비하는 데도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 이제 마무리하는 의미로 설교자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을 해야겠다. 설교를 가르치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은 선지자적인 측면에서 진리를 전달하라고 부름받았음을 의미한다. 이전에 십계명을 가르친 적이 없거나, 가르친 적이 있어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면 내년에 다시 십계명을 다룰 것을 고려해 보라. 성과 돈, 또한 권위에 관한 인기 없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운 시대가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자기표현에만 치중하는 개인주의 시대를 살면서 불필요한 불안을 겪지 않기 위해서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지시가 필요하다.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구조와 복음의 은혜 즉 야훼 아버지께서 시내 산에서 주신 열 개의 말씀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ur Father, Who Art on Sinai: The Ten Commandments Today번역: 무제
구약
십계명
그리스도론
시내산
열개의말씀
피터레이하르트
히브리서 1장이 확증하는 그리스도의 신성
by Justin Dillehay
2020-05-27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성경 본문으로는 보통 요한복음 1장(“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1), 베드로후서 1장(“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 1:1) 정도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설명하는 본문은 히브리서 1장이라고 볼 수도 있다. 히브리서 1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천사와 비교하여 표현한 한 편의 장엄한 묵상이다. 천사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대 복음주의 지성들에게 예수님과 천사가 어떻게 다른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천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도였을 것이다. 히브리서 1장이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기 전에 이 놀라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용한 도구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손(H.A.N.D.S.)로버트 바우만(Robert Bowman)과 에드 커머쇼우스키(Ed Komoszewski)의 탁월한 공저인 ‘Putting Jesus in His Place: The Case for the Deity of Christ’에서 저자들은 H.A.N.D.S.라는 머리글자를 사용하여 성경이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기발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H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영광’(Honors)을 공유하신다. A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Attributes)을 공유하신다. N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이름’(Names)을 공유하신다. D –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사역’(Deeds)을 공유하신다. S – 예수님은 하나님과 영원한 ‘보좌’(Seat)에 함께 앉으신다.놀랍게도 히브리서 1장에는 이 다섯 가지에 해당하는 예들이 모두 등장한다. 위의 순서대로 하나씩 살펴보자. 1. 영광(Honors): 천사들이 경배하는 예수히브리서 1장 6절 “또 그가[하나님이]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는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홀로 경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사탄이 예수님께 자신을 경배하라고 꾀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고 응수하셨다. 경배는 하나님만 취하실 수 있는 영광이다. 성경은 결코 이를 양보하지 않는다. 예수님 역시, 사람들(마 14:33)과 타락한 천사들(빌 2:10) 그리고 거룩한 천사들(계 5:8–14)에 이르는 모든 이성(理性)적인 피조물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심으로 영광을 취하신다. 히브리서 1장 6절에 의하면 자신을 경배하라 명하시는 그 하나님이 천사들에게 예수님을 경배할 것을 명하신다. 천사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는 것을 경계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천사를 경배하려 하자 꾸짖는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온다(계 19:10; 22:8–9). 이를 보면 천사들은 정말로 영광스럽고 강한 존재들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천사를 실제로 보게 된다면 우린 아마 사도 요한처럼 땅에 엎드려 그를 경배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천사는 우리 역시 꾸짖을 것이다. 천사들은 우리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촉구하나(계 19:10; 22:9),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그의 아들을 경배하라 명하신다. 이를 보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 천사들이 예수님을 경배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경배를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라 말씀하시지 않는다. 2. 속성(Attributes): 하나님의 변치 않는 영원한 형상 예수하나님의 속성이라 함은 성경이 말하는 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그 완전성들(perfections)을 가리킨다. 어떤 속성들은 우리 인간과 공유하시나,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속성들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시고, 변치 않으시고, 전지하시며, 전능하시다. 하지만 히브리서 1장 10–12절에 의하면 성자 역시 변치 않으시고 영원하시다. “그것들은[땅과 하늘]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중략]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주 여호와 외에 누가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 3:6)라 하실 수 있을까? 예수님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더욱이 3절은 성자께서 진실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공유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묘사된다. 이러한 진술은 성부가 성자를 영원히 낳으신 바 되었다는 교리(the doctrine of the Son’s eternal generation)의 기반이다. 성자가 하나님이신 이유는 그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낳으신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부는 누구로부터도 낳으신 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자는 성부의 정확한 형상으로 성부를 완벽하게 보여주신다. 성부와 성자는 모든 신적 속성을 공유하신다. 3. 이름(Names): 이스라엘의 주(Lord)요 하나님이신 예수구약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하나님의 이름 두 개가 히브리서 1장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사용된다. 모두 시편 인용에서 나온다. 우선 “하나님”이 있다. 히브리어 구약에서 천사들을 일컬어 “하나님(들)”(gods, elohim)이라 표현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시 8:5; 히 2:7), 히브리서 1장 7–8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쓰인 표현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후략]”(히 1:7–8)하나님에 대한 구약 말씀을 성자에게 적용하여 성자를 분명히 “하나님”이라 칭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인용 구절에서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구별된다. 9절을 참조하라. 두 번째 이름은 “주”(Lord)다. 시편 45편을 인용하여 성자를 “하나님”이라 칭한 후 히브리서 저자는 즉시 시편 102편 25–27절을 인용한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그리스어 텍스트에서는 큐리오스(kurios)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칠십인역(the Septuagint)에서 하나님의 언약명인 히브리어 YHWH(야훼)를 번역할 때 주로 쓰였다. 수가 많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칭하는 구절들만 봐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라 일컫는 숱한 본문들을 볼 때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되는데, “주” (YHWH, 큐리오스)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혹시 “주”라 칭하는 예수님께서 여전히 성부 하나님보다 조금 덜 완전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아래에서 논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생각해 보라. 4. 사역(Deeds): 창조주 예수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홀로 천지를 지으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44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욥 38:4) 그 자리에 있었으나, 창조자들이 아닌 그저 지켜보는 이들로서 또는 노래하는 자들로서(욥 38:7) 있었을 뿐이다.하지만 히브리서 1장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2)고 함으로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 창조 역사를 행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태초에 [중략]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중략] 지으신 바라”(히 1:10)는 바로 성자 하나님의 역사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 1절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창조주가 되신다는 진술은 그분의 이름이 주(Lord)요 하나님이시라는(히 1:8, 10) 것과도 연결되고 그가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다는(히 1:11–12) 그의 속성과도 연결된다. 5. 보좌(Seats):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예수예수님이 천사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밝히는 히브리서 저자의 마지막 논증은 13절에 나오는데, 저자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다.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천사 중 아무에게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자기 우편에 앉으라 명하셨으나 천사 중 누구에게도 동일한 영예를 허락하지 않으셨다(비교: 계 3:21). 보좌로의 이 초청은 성자께서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순종하신 것의 결과로 ‘역사 속에서’ 주어진 것이지만(히 1:4; 비교: 빌 2:9), 창조 이전부터 그분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히 1:2–3).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필자가 말하고자 한 바는 모두 말했다. 예수님의 신성을 성경이 증거하는 다섯 가지 방식을 위에서 외우기 쉬운 머리글자로 정리해 보여주었는데, 그 내용이 히브리서 1장에 모두 나와 있다. 이 장을 마음 속에 담으라. 몰몬교도나 여호와의증인과 대화할 때 히브리서 1장을 사용하라. 당신을 위해 일하는 영(ministering angel, 히 1:14)인 천사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신 분을 경배하고 있다. 그 경배에 동참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Hebrews 1 Hammers Home the Deity of Christ번역: 이정훈
복음
예수그리스도
성부
성자
베드로후서
영광
히브리서
섬기는영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참으로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5-19
지난번에 생각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한 것의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 the divinity, the divine nature)과 성령님의 신성을 확언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의 신성을 좀 더 분명히 생각해 보자. 물론 예수님께서 참된 인성(人性, the humanity, the human nature)을 가지셨다는 것을 전제로 이 논의를 해야 한다. 예수님의 인성이 분명히 확립되지 않은 신성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오해와 이단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간과 공간 가운데 계셨던 예수님께서 분명히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셔서 그 부모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지시고(마 13:55; 눅 1:31; 3:23; 4:22; 요 1:34; 6:42),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몸과 영혼의 온전한 인성을 가지고 지금은 ‘하늘’(heaven)에 계시다고 믿는 것이 예수님의 인성을 믿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던 그때나 하늘에 계신 지금이나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도 “참된 인성”(vere homo, very humanity)을 가지신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동시에 그분이 그저 인간만이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vere deus, very God)이시라는 것도 믿어야 한다.“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에 따라서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른 기독교적 고백이다. 일단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백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기독교 밖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강조해야 할 일은 이 사실을 아주 분명히 천명하는 것이다. 기독교 단체라고 하는 곳이나 심지어 교회라고 하는 곳 중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히 믿지 않는 단체나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 단체나 사람들이 사실은 기독교 밖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는 그리스도 교회(Christian church)가 아니며,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Christian)가 아니다.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해야 교회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성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참된 신성을 가지셨다고 공언한다고 해서 다 기독교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참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창세전에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것도 말할 수 있다. 창세전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매우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정통적 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성자께서는 영원 속에서 “독생하신 분”이라고(요 1:14) 말해야 한다. 이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해서 그가 피조물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표현하면, 또 다른 이단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를 아리우스 이단이라고 한다. 예전에 알렉산드라의 아리우스가 그와 같이 생각하고 주장했던, 그러다가 이단으로 선언되었던 대표적 인물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영원 가운데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영원중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 주께서 친히 이점에 대해서 계시해 주셨기에 우리는 성경에 따라서 이를 말할 수 있고, 또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이는 다음 몇 가지를 함의하는 말이다.첫째로,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가 흔히 영원이라고 부르는 그때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다음에 생각할) 성령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이셨다(the One Triune God)는 사실이다. 창세전에 삼위 하나님(the Triune God)께서 유일하신 존재로 계셨다. 아무 것도 없는[무(無)] 중에 참된 존재가 있었으니,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영원히 기쁜 교제를 나누고 계셨다. 이것을 삼위 안의 영원한 교제, 영원한 교통이라고 한다. 서로가 서로 안에 계시며(perichoresis), 영원히 함께 하시며, 깊은 교제를 나누신다. 성경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것도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둘째로, 그 삼위(三位, three persons) 중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말하자면, 성자는 성부의 “독생자(獨生子)”라고 성경의 묘사를 따라서 표현한다(요 1:14). 성경에 이런 표현이 없었다면 우리는 감히 이런 표현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이 표현을 사용하기에 우리는 이 성경적 표현을 따라서 이렇게 말한다. 이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내 아버지가 나를 낳고 내가 자녀를 낳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다 없애자는 의견은 성경에 주어진 표현을 무시하는 것이고 성경을 온전히 따라가지 않는 것이 된다.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급하신대로, 성경의 표현을 따라서만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사상가와 성경적 신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는 모든 점에서 성경에 얽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시시때때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리하려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극복하고 항상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해야 한다.정통적 신학에 의하면, 영원 중에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는데(eternally begotten), 이 말은 성부께서 성자 없이 계신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성자는 성부와 같이 영원하다는 의미다. 이 일은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일 이전에는 성부만 있었고, 이 일 이후에는 성부와 성자가 있게 되었다고 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이단자인 아리우스(Arius)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Arians)이 주장하던 바였다. 그들은 영원 중에 “성자가 계시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한 것으로 아주 악명이 높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영원 가운데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부께서는 한순간도 성자 없이 계신 적이 없으며, 성자는 한순간도 성부 없이 계신 적이 없다. 성부와 성자는 (그리고 후에 언급할 성령은) 항상 같이 계셨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예전의 교부들은 “성부께서는 항상 말씀하신다”고 표현한 일도 있다. 성자를 가리켜 “말씀”이라고 언급하신 성경 말씀을 따라서(요 1:1),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영원함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 성부와 성자의 관계성은 항상 계속되는 것이니 이는 성부와 성자의 영원한 관계성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려는 오늘날에는 이런 영원 가운데 있는 소위 내신적(內神的) 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다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에 따라서 말해야 한다. 성경은 성자에 대해서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도 표현한다(요 1:18).이와 같이 이 땅에 계셨던 그러나 지금은 하늘에 계시며 장차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그분의 정체성(identity)이 다른 사람들처럼 태중에 있게 된 때부터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다.이때 “아들”이라는 호칭 때문에 또 다른 오해를 해서도 안 된다. 아들[聖子]이니 아버지[聖父]보다는 조금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는 성부께서 사용하신 용어요(마 2:15; 3:17; 막 9:7; 눅 3:22; 9:35, 벧후 1:17), 그의 수태를 알리던 천사가 사용한 언어요(눅 1:32),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요(마 11:27; 28:19; 눅 10:22; 요 5:19, 20, 21, 25, 26; 8:36; 17:2), 예수님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세례 요한의 언어요(요 1:34), 사도들이 사용한 언어이기에(마 14:33; 16:16; 요 1:49; 3:16, 17; 10:36; 11:27; 14:13; 20:31; 행 9:20; 13:33; 롬 1:2, 3, 4, 9; 롬 5:10; 8:3, 32; 고전 1:9; 15:28; 고후 1:19; 갈 1:16; 4:4; 엡 4:13; 살전 1:10; 히 1:2; 히 3:6; 5:8; 6:6; 10:29; 요일 1:7; 2:22, 24; 3:8, 23; 4:10, 15; 5:5, 10, 11, 12; 요이 1:3, 9) 우리들이 이 “계시적 언어”를 받아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아들”이기 때문에 성부보다 조금 못하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셨고, 성부와 같이 영원하시며”(He is one in essence with the Father, coeternal), “모든 면에서 성부와 같으시다”(being like the Father in all things)는 것을 바르게 고백해야 한다. 그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이 모든 것을 요약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 즉 인성을 취하실 때부터가 아니라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Jesus Christ is the Son of God not only from the time he assumed our nature but from all eternity)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그저 추상적으로 그런 관념을 가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첫째로, 우리의 예배와 기도와 찬양에서 이 고백을 참된 것으로 드러내야 한다. 성자께 참으로 신적인 경배를 하지 않고, 그렇게 높여 찬양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해서 바르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매일 가정으로나 개인적으로 그분에게 사적인 예배(private service)를 하는지, 특히 그가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인 매주일에 그분에게 공적인 경배(공예배, public service)에 동참하는지를 점검해보자.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분에게 경배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복음 전하는 일을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의 일차적 목표는 모두 다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둘째로, 우리들의 삶 전반에서, 특히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지금도 그가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인정하여 그분에게 의뢰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속에서도 오직 그분에게 의지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결국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의존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서 섬기는 자들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합당한 섬김”(reasonable service)이어야만 한다(롬 12:1). 우리 주님께서 과연 무엇이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를 살펴서 그런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우리 주변의 모든 것도 할 수 있는 대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는 삶에서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신성을 참으로 인정하는지의 여부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는 그저 추상적인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함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
복음
그리스도
삼위일체
신성
인성
독생자
아리우스
영원
코로나19
고난을 이겨낼 때 필요한 교훈
by Marshall Segal
2020-05-18
고난을 잘 이겨내는 것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돈 카슨(Don Carson) 교수는 “크리스천이 감당 못할 정도로 슬퍼하고 혼돈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의 기대 수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고통과 악의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우리 스스로가 비극에 당면하기 전까지는 결코 제대로 생각할 수 없다”라고도 말했다(‘How Long O Lord?’, 11).이 세상 그 누구도 인내를 가지고 점점 더 집요하게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한 슬픔에 빠져 있으면서 동시에 “항상 기뻐하는”(고후 6:10),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질 수는 없다. 고난을 잘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폭풍이 밀려올 때 어디에 서서, 어디를 봐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리고 고난이 오기 전에 미리 배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왜 내게 고난이 닥치는 건지, 모든 대답을 다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 알고 싶다고 해도 결코 알 수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몇 개 되지 않지만 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고 신앙의 선배 또는 동료가 고난 속에서 걸어갔던, 그래서 이미 그 효과가 증명된 길이다.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필요한 세 가지 교훈베드로 사도는 크리스천이 고난을 잘 이겨내도록 돕기 위해서, 고난 극복에 필요한 여러 교훈을 담은 베드로전서를 썼다. 물론 그들이 당한 고난이 반드시 모든 크리스천에게 다 해당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 사는 많은 크리스천은 이런저런 고난 속에 있고, 또 베드로전서가 담고 있는 지혜와 희망은 오늘날에도 그들에게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 지금부터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능력, 안정감 그리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 가지 길을 알아보도록 하자.1.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상상하라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제대로 경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천국에서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비춰서 이 땅에서 만나는 고난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베드로전서 1장 6절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고난받는 이들의 고난에 공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고난받는 이들이 이 땅이 아닌 천국을 바라보게 한다. 고난은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우리가 여기서 겪는 모든 고통이 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또 우리 존재가 겪는 모든 경험이 다 이 고난의 순간 속에서 농축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고난은 결코 이 세상의 전부(ultimate)가 아님도 알고 있다. 고난은 여간해서 죽는 날까지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찾는 사람이라면, 고통이라는 놈이 언젠가는 순식간에 종말을 맞게 될 것을 알고 있다. 즉, 천국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고난을 전혀 다른 태도로 맞을 수 있게 된다. 랜디 알콘(Randy Alcorn)도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최근에는 암에 걸린 부인과 함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 중에서도 천국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함으로 그 부부는 지금 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고 있다. 천국을 바라본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고통을 경감시키고 또 고통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한다. 천국에 관해 명상하는 것은 고통을 이겨내는 위대한 진통제다. 천국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이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리의 존재는 고통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통과 죽음은 단지 끝없는 즐거움으로 가득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관문일 뿐이다(‘헤븐-천국은 이런 곳이다’, 46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벧전 5:10–11).천국은 당신이 잃은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당신은 더이상 아무 것도 잃지 않을 것이다. 천국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 땅에서 당신을 통해서 시작하고 또 만들어 가신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똑바로 알게 할 것이다. 천국에서 당신은 약하다고 느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될 것이다. 천국은 당신을 온전히 세울 뿐 아니라 아무런 고통 없이, 오로지 전율만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히 죄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모든 게 다 당신이 이 땅에서 아주 잠깐 고난을 겪은 후에 만날 현실이다. 2. 연단의 소중함을 깨달으라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슬퍼하지만 그럼에도 기뻐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난 속에 감춰놓은 선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 한, 이렇게 고백하는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연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면서 과연 고난이 주는 진정한 기쁨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고난은 다른 축복을 앗아감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볼 수 있도록 한다. 교묘하게 하나님 대신 피난처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이 무엇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육신의 소욕과 타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자주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길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는가(마 7:13-14)? 그런 가운데서 고난의 그림자는 그 어떤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성화로 가는 긴 길에 빛을 비춘다.사탄은 고난이 안개와 같이 걷히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맴돌기를 원한다. 사탄은 고난이라는 안개가 우리 눈을 어둡게 함으로 거룩을 향한 우리의 싸움 가운데 지속적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죄악을 보지 못하길 원한다. 사탄은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고난이라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이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또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단의 불이 되길 원한다. 3. 그럴수록 서로에게 더 의지하라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고, 오늘이 우리 삶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또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로부터 고립되게 만들어 점점 더 나는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벧전 4:8). 고난을 당하면 약하다고 느끼기 쉽다. 고립은 그럴듯하게 보여도 결코 자기 보호가 아니다. 고난 속에서는 할 수 있는 것도 거의 없고 봉사하기도 힘들다고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만약에 고난이 당신을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든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누구나 다 도망치고 싶고 또 자기 자신의 슬픔과 치유에만 집중하고 싶은 충동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강하게 하고, 또 치유하신다. 그것도 모퉁이 조각이 아니라 몸 전체의 일부로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을 의지하도록 하라. 스스로가 약하고 지쳤다고 느낄수록 더더욱 그래야 한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베드로 사도의 편지를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이다.“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 4:9).고난이 찾아올 때 누구나 다 기운이 빠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는 힘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랑한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내 힘을 의지하는 사랑은, 약할수록 우리를 더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결코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고후 12:9). 고난이 찾아올 때, 그래서 당신이 약해지고 완전히 지쳤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함으로써 새롭고 더 의미있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기를 기대하라.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그리스도 안에 거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난을 받는 것 같아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1세기에 베드로는 이렇게 썼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베드로가 이런 글을 쓴 이후에 지금 당신처럼 고난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중국에서는 갑자기 교회가 문을 닫고, 믿는 이들이 매를 맞는다. 또 이라크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절연을 당하며, 케냐에서는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크리스천이 죽임을 당한다. 베드로는 우리가 성도들의 군대를 바라봄으로, 바다 건너 또 수 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겪는 고난 보다 더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항상 함께 하는 하나님을 믿고 인내했던 그들을 바라봄으로, 우리도 넉넉히 고난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당신은 단지 고난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이들이 고백하는 간증뿐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사 당신을 위해서 대신 고난받게 한 하나님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1, 24). 그는 당신을 고치기 위해 상함을 입었다. 그를 십자가에 박은 못은 이제 천국에서 당신의 위치를 보장하는 증표가 되었다. 당신을 위해 흘린 그의 눈물은 이제 당신이 받고 있는 고난 속에서 의미를, 희망을, 아니 심지어 기쁨까지도 찾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의 피는 당신에게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족을 가져다주었고, 결코 잴 수 없는 놀라운 사랑으로 그 모든 이를 하나로 묶었다. 그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넉넉히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고난을 당했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to Suffer Well: Three Ways to Prepare Now번역: 무제
베드로전서
랜디알콘
돈카슨
신학
신약성경
고난
예수님, 쉐마, 그리고 영광스런 삼위일체
by Scott Redd
2020-05-15
흔히 쉐마로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5절(4절의 첫 히브리어의 뜻은 “들으라!”다)은 모세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어진 과거의 언약(old covenant)을 설명하는 텍스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이 본문은 신약 시대에도 중요하게 취급되었는데, 다른 이들과 나눈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그 중요성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마 22:36-40; 막 12:28-34; 눅 10:25-28).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쉐마를 향해 귀를 열어 놓고 신약을 읽는 사람이라면, 신약 성경 다른 곳에서도 이 쉐마를 언급하는 곳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6절에서 바로 이 쉐마의 의미를 발전시킨다. 다름 아니라, 그는 신명기가 쉐마를 통해서 분명하게 선포하는 사실, “하나님이 한 분이다”라는 메시지는 삼위일체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God)과 “주”(Lord)를 사용함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두 위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신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성령님까지 이 쉐마의 공식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되심 안에서 성령님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바울은 지금 쉐마가 기독교 복음에 의해 쓸모 없게 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늘나라에서 삼위일체로 아버지와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령님의 충만이라는 측면까지 고려하여 바로 이 쉐마의 가르침을 지키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쉐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신약 성경에서 쉐마에 관한 가장 광범위한 신학적 읽기와 설명은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대제사장 기도(요 17:20-26)의 피날레에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는 그의 백성과 관련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로 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바라본 그의 백성의 정체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쉐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된 그의 백성들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1절에서 요약된, 이 구절 전체를 관통하는 논리에 주목하라.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삼위일체의 제1위격과 제2위격의 단일성은 실제로 하나됨에 필요한 근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심지어 모든 인간의 온전함(wholeness)에 대한 근거까지 제공한다. 그리스도는 지금 당신의 백성들이 그분 자신과 실질적으로 연합함으로 삼위일체가 누리는 사랑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나중에 우리는 성령님의 내주에 의해 이런 연합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됨에 관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이 기도가 말하는 하나됨과 온전하게 됨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신약 학자인 리차드 보컴(Richard Bauckham)의 설명은 이 질문에 도움을 준다. 그는 요한복음이 다루고 있는 ‘하나됨’이라는 주제는 ‘하나’라는 의미 속에 두 가지의 다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하나’는 고유성 또는 독특성(uniqueness)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것은 쉐마의 가르침에서 첫 부분이 바로 여기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신 6:4-9).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렇기에 그는 고유하고 독특하다. 그는 다른 어떤 것과도 달리 오로지 홀로 계신 존재다. 하나님의 독창성에 관한 이런 가르침은 신약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쉐마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그럼 세 위격이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이 한 분일 수 있는가? 보컴은 요한복음 17장 주석에서 그 부분을 다루고 있다. 주석가들은 여기서 쉐마가 암시하는 바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하나’라는 단어 때문에 쉐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교제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신의 독특함은 다름 아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뤄지는 교통에 있다고 예수님은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식의 하나됨에 대한 주장, 하나님 안에서 형성된 공동체로 인한 하나됨의 주장은 초기 유대교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Richard Bauckham, ‘Gospel of Glory’ in Richard Hays, ‘Reading Backwards’를 참조하라).그러나 하나됨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하나는 사물이나 사람의 통일된 특성을 나타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쉐마의 두 번째 부분에서 하나님 백성의 통일된 온전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의미인 것 같다. 그들의 마음과 영혼과 힘은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하나가 되었다. 보컴은 이런 식으로 하나가 된 백성의 사례가 구약 성경 속에는 여러 번 등장한다고 지적한다(사 45:20; 겔 34:23; 37:15-24; 미 2:12; 호 1:11). 그러한 하나됨의 개념은 쿰란과 그 주변의 유대 사막 종파 공동체에도 존재했으며, 이들은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됨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인 예하드(yehad)라고 불렸다(미 2:12). 예하드는 종종 ‘커뮤니티’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되는데, 그 어원 역시 하나됨 또는 단일성이라는 개념을 반영한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기도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통일된 공동체가 회복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 백성들과의 연합이야말로 그의 백성들이 앞으로 경험하게 될 현실, 서로 사랑할 때에만 가능한 통일됨의 기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일부로서 그의 위치와 또한 그의 백성과의 연합으로 인해,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세 위격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더 나은 일치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모세의 언약보다 더 크고 더 나은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는 대제사장 기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모세의 쉐마를 역방향(read backwards)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신명기 6장에 등장하는 온전함과 사랑에 대한 부르심은 그 자체로는 실패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부르심은 새 언약을 통해서 더 개선되고 더 명확해진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분과 우리의 연합을 이루었고 또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하는 하나됨 속에 참여하게 하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신명기의 쉐마가 언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엇이 부족한지를 보게 된다. 그렇다.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하나님이자 또한 우리와 하나된 주님의 성품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으로 흘러넘친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충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성품이 요구하는 수준에 맞게 우리 주님을 바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서 말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고전 12:3),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주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천명한 목표를 명심해야 한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 17:22–23).우리가 사랑의 목표, 즉 텔로스(telos, 헬라어로 ‘목표’를 의미)를 생각할 때, 우리는 사랑의 기원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목표도 삼위일체라는 것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통일되어 그들의 사랑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를 기도했다. 쉐마에서도 하나님 백성의 사랑은 개인적인 노력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해 선포되는 선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우리의 목표는 성령님 안에서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이 알도록 하는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Jesus, the Shema, and the Glorious Trinity번역: 무제
삼위일체
쉐마
리차드보컴
새언약
복음
예수그리스도
대제사장
요한복음
연합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과 복음
by 노승수
2020-05-12
개혁주의는 항상 율법주의라는 부작용에 노출되어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속 교리도 형벌적 대속 교리를 취하고 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했다는 것이 이 교리의 근간이며 받아야 할 이 형벌에는 율법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율법 이해와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개혁파 교리의 근간이다. 그러다 보니 율법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언제라도 율법주의가 나타나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복음의 핵심을 전달받은 갈라디아 교회도 쉽게 복음의 정수로부터 벗어나 율법주의에 미혹된 것을 보면 아마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겪는 피할 수 없는 함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렇게 빗겨가기 힘든 함정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신자의 삶을 파고들까?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순종하길 멈추는 바로 그 순간부터 자라기 시작한다. 더 정확하게는 율법의 기준을 낮추거나 변화시켜서 적절하게 타협하는 순간부터 발생한다. 그럼 이런 종류의 타협은 왜 발생할까? 신자가 처음 예수를 믿고 기쁨에 젖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복적인 죄에 노출되면서 몇 가지 의심이 일어나게 된다. 자신이 쓰레기 같다는 느낌이 들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자신을 주님이 용서하지 않을 거 같고 그렇게 주님 앞에 서기에 자신이 너무 염치가 없어 보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자기 상황을 정당화해 줄 어떤 해석이나 방식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이제 막 예수를 믿고 감격해하는 십 대 청소년이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말씀을 듣고 피 끓는 십대 청소년은 자위행위에 죄책감을 깊이 느끼고 있다. 사실 그 전에도 자위행위를 하고 밀려오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오랜 기간 말 못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예수 믿는 기쁨도 잠시 이 반복되는 죄 때문에 고통을 받기 시작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줄 합리적인 답들을 인터넷을 뒤지면서 찾기 시작한다. “자위는 해도 괜찮다.” “자위는 죄다.” 등의 조언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그중에 더러는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자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답으로 선택한다. 이것을 답으로 취하고 자위를 정당화하지만 여전히 자위행위 후에 밀려오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당황스럽다. 여기서 문제는 자위행위 자체에 있지 않다. 그 후에 밀려드는 죄책감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밀려드는 죄책감은 율법을 의식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율법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즉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의 문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너무 쉽사리 조언한다. 예수를 믿고 은혜 받았다면 어떻게 참 신자에게 그런 게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설교라도 듣는 날에는 내 신자 됨의 정체성이 송두리째 흔들리기도 한다.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의 문제란 율법이 본질적으로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몇 개 깔려 있는데 율법의 죄를 드러낼 때,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이유는 “내가 그래도 괜찮은 사람 혹은 구원을 위해서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전적 부패 교리’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그런 죄가 드러난 상황에 이것을 예수께 가지고 가기보다 자기 안에 촉발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의 행위’다. 할례와 같은 의식적 제의를 다 함으로 자기 죄를 덮고 그것을 자기 긍지나 자부심으로 가지고 오는 심리적 태도가 나타난다. 바울은 이것을 로마서에서 ‘자기 의’라고 표현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고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다. 이런 심리적 욕구들은 자연스러운 욕구다. 이것은 아주 어렸을 때, 아이가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시기부터 있어 온 것이다. 어른이 된 후에도 이 기제는 계속 반복된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명품가방을, 남성들이 좋은 차를 선호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부럽게 쳐다보며 인정의 눈길을 주는 것을 통해서 그런 명품과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따면, 마치 내가 뭔가를 해낸 것처럼 내 긍지가 올라가는 것과 같다. 흔히 ‘국뽕’이라는 높은 가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성령을 받았는데 자기는 뭔가 딱히 한 것이 없었다. 그럴 때 거짓 선생들이 와서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런 높은 가치와의 동일시를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로 율법의 행위를 취함으로 ‘자기 의’를 얻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동일시는 자기 위안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신칭의라는 근본적 믿음의 도리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행동들은 율법을 한갓 의식적 제례로 전락시켜버린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더 강화시키는 해석을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첫째, 원래 율법이 그런 요구를 하며 하나님의 통치는 도덕적 통치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 율법의 그와 같은 요구를 명백히 드러냄으로 우리가 거기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달리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순종하길 멈출 때, 우리는 스스로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순종하려고 할 때만 우리가 스스로 순종할 수 없는 무능력과 전적 부패를 자각할 수 있다. 순종이 멈추면 외식이 시작되고 외식은 자기를 성찰케 하는 성령의 조명을 무디게 만든다. 그 결과 외식뿐만 아니라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의 행위를 자기 의로 가지고 오는 행동에서 비롯된다. 율법이 드러내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어서 자기 정당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인 셈이다. 오히려 어떤 행위에서 비롯된 죄책감과 수치심은 드러날수록 그리고 그것이 심각하다고 느낄수록 우리가 더 간절히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만든다. 자기 병이 중할수록 더 필사적이 되듯이 율법은 내 죄의 병이 중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죄를 혐오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사모하는 힘이 내면에 자리 잡아야 ‘자기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내 정당성으로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대충 통과하려는 자는 모두 ‘자기 의’라는 율법주의나 ‘자기기만’이라는 반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고 만다.
복음
예수그리스도
개혁주의
율법
죄책감
자기의
자기기만
반율법주의
기독교는 분별의 종교다
by 김형익
2020-05-07
요즘처럼 많은 영역에서 혼란스러운 시대가 있을까 싶다. 정치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적으로도 온갖 이단과 사이비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린 시절이 있었던가. 가짜 뉴스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요즘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분별은 필수 덕목이다. 세상에서야 우리가 무얼 그리 기대하겠는가? 정말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들을 들을 때 이게 같은 기독교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프로테스탄트가 해석의 개별성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종교적으로 치우친, 진리가 아닌 메시지에 휘둘리는 교인들을 보고, 주님의 몸이 이리저리 찢어지는 것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무너진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어제 오늘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일은 이미 에덴동산에도 있었고, 성경이 기록되던 대부분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진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를 가장한 거짓도 존재하고, 진리가 있는 그 곳에 유사 진리도 자리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행하는 일이다. 아합이 다스리던 북왕국 이스라엘에는 시드기야처럼 악한 거짓 선지자들이 넘쳐났고(왕상 22), 멸망하기 전 남왕국 유다에는 하나냐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했다(렘 28). 거짓 선지자들은 영적으로 중병이 든 나라와 백성에게 ‘샬롬!’의 거짓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길을 막아섰다(렘 6:14; 8:11). 이들에게 현혹된 왕과 백성들은 참 선지자였던 미가야와 예레미야를 거절하고 핍박했다.사도들이 살아있던 초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울 사도는 왜 저주를 언급하면서까지 강한 어조로 갈라디아서를 시작해야 했을까?(갈 1:6-9) 고린도 교회는 왜 그들의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그토록 거부했던 것일까? 거짓 사도,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경험해야 했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라지인 독보리는, 성장 초기에는 그 외형이 밀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잘 때 가만히 와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 마귀는 이 일을 쉬지 않고 지금까지 행한다.제자들이 예수님께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과 세상 끝에 대해서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었다(마 24:4). 많은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와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라고 주님이 친히 경고하셨고(마 24:5), 요한 사도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말씀하였다(요일 4:1). 성경 시대에 이러하였다면, 교회 역사에서 나타났던 유사 복음-거짓 진리의 문제는 다 헤아릴 수도 없다. 2천 년의 교회 역사에서는 진리의 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다. 그리고 이 진리의 싸움에서 중요한 무기는 성경의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 근거한 분별력이었다. 다신론이나 미신적 신앙들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하는 신이고 그 신이 어떤 존재이든 나에게 유익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진리와 유사 진리, 참과 거짓을 분별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상상과 필요와 목적으로 만들어 낸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을 분별하여 섬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이것이 먹히는가?(Does it work?)’가 아니라, ‘이것이 진리인가?(Is this the truth?)’ 또는 ‘이것이 성경적인가?(Is this biblical?)’를 물어야 한다.나는 오늘날 분별력 향상을 위한 진리의 훈련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다는 점을 우려한다.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주의를 주셨고, 그토록 많은 거짓 선지자와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교회가 큰 위기들을 경험한 사례들을 성경에 기록하여 경고하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진리를 분별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구비시키는 것 같지 않다. 진리의 교육과 훈련을 통한 분별력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 교회 안에는 모호함의 영역이 확장되고, 모호함의 영역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고 만다.그 결과를 우리 한국 교회는 고스란히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신천지의 기승이 그 한 사례다. 단순히 교회 문 앞에 “신천지 출입금지”라고 쓰인 포스터를 붙여 놓는 것이 교회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신천지와 같은 이단, 사이비의 가르침을 분별할 줄 아는 견고한 신자들을 길러내는 진리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일평생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현실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분별을 하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분별을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몫으로 돌리게 되었다. 주님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만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또, 요한 사도는 “영들을 분별하라”는 메시지를 목사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었다. 모든 성도들이 진리와 유사 진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신학의 실종이고 교리의 실종이다.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가 ‘신학실종’(부흥과개혁사, 2006)에서 오늘날의 복음주의 교회가 현대 세속주의 앞에 굴복하게 된 원인을 진리가 설 자리를 잃어버린 현상, 즉 신학의 실종이라고 분석한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를 지적하여 한 말이지만,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지난 삼사십 년의 한국 교회는 교회 성장을 지상 목표처럼 강조하는 동안, 너무나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목회와 설교에서는 신학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고, 신학과 진리의 자리를 ‘꿩 잡는 게 매’라는 실용주의가 대체해버렸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에서 교리 교육은 실종되었고 그 자리를 다양하고 세련된 프로그램들이 대체하고 말았다.이런 상황에서 지난 십 년 어간에 한국 교회에서 교리에 대한 관심이 일부 목회자들과 교회들에서 급증했다는 것은 정말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신학교를 다니던 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우리말로 번역되거나 한국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교리 교육에 대한 자료들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리 교육 서적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교리 교육 서적들이 우리말로 번역이 될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체적으로 보자면, 기본적인 교리 교육이 시행되는 교회들은 미미하기만 하고, 혹 교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삶에서 유리된 딱딱한 이론처럼 가르치는 미숙함도 많이 보이지만, 현재의 흐름으로 보자면 희망적이다. 교회의 목회에서 실종되었던 교리 교육이 오래 입어 왔던 옷처럼 교회에 잘 어울리도록 정착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하지 않겠는가?한국 교회의 한구석에서 섬기는 한 사람의 목사로서, 내가 한국 교회에 바라는 것은 단순히 이단과 사이비에 휘둘리지 않는 기독교가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하나님으로부터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하나님을 분별하고, 율법으로부터 복음을 분별하며, 번영 신학과 같은 유사 복음으로부터 복음을 분별하는 성도들이 가득한 한국 교회를 보는 것이다.
신학
교리
분별
사이비
신천지
데이비드웰스
신학실종
신학무용론
번영신학
처음
이전
31
페이지
32
페이지
33
페이지
열린
34
페이지
3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