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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by Russell L. Meek
2023-11-10
TGC의 성경 읽기(Read the Bible) 운동에 참여하세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일 년 안에 힘을 합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어렸을 때 나는 암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화학요법으로 서서히 빠졌고, 암에 굴복한 몸은 말라갔으며, 할머니가 숨을 거둔 방 밖에서 쭈그리고 있던 나를 위로하던 간호사의 말까지, 나는 그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한다. 무엇보다 암 투병 내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며 쉬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야기하던 할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할머니가 인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해하는 데에 무려 수십 년이 걸렸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욥기가 알려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나는 답을 숨길 생각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언제나 마음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회복을 원하셨다. 이것이 욥기 전체가 추구하는 주제이다. 욥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욥의 (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무려 마흔한 장에 걸친 빽빽한 시에 이어 욥기의 마지막 여덟 구절[욥 42:10-17]에 도달한 순간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욥기가 고난에 관한 책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욥의 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욥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그리고 나아가서 고통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오랜 투덜거림은 이 책이 전하는 더 큰 신학적 메시지를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오늘날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주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하나님에게는 티끌 같은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고통받을 사람이 아니었다욥 역시 죄인이기는 하지만(롬 3:23), 그러함에도 욥기 서문은 욥이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1)이라고 말한다. 3절은 욥의 막대한 재력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마치 그것이 욥의 정직함의 결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묘사된 순종에 대한 축복과 일치하는 해석이다(신 28:1-14).욥은 자신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나 1장에서 벌어지는 여호와와 대적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른다. 그러나 책 전반에 걸쳐 욥의 주된 불만은 자신이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유발할 죄를 짓지 않았기에 지금 닥친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그가 받는 고통이야말로 그가 지은 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곧 살펴보듯,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핵심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는 욥의 주장과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친구들의 주장 모두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지 저주할지 통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다. 신명기 28장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같은 신약성경에서도 분명히 밝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과 관련된 보상과 징계의 범주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욥기 속 당사자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범위를 가정하고 있다.그들은 고난과 죄, 축복과 순종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바라보았다. 축복은 항상 순종에 대한 보상이고 고통은 항상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서 순종은 항상 축복을 가져오고 죄는 항상 고통을 가져온다고 간주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는 우주의 사탕 자판기로 축소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높이고 하나님을 낮추는 행위이다. 여호와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신 이유이고, 또한 욥이 회개해야만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욥은 회복될 자격이 없었다욥기의 마지막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축복의 분명한 표시인 막대한 부와 많은 자녀를 얻은 이야기로 끝난다(신 28:1-14). 마치 저자가 미소를 지으며 독자들에게 해피 엔딩을 선물하는 것 같다. 아마도 1장 속 욥을 보면서 그가 충분히 복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독자라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욥기를 끝까지 읽고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욥의 시련과 야훼의 놀라운 자기 계시를 읽은 후, 하나님이 그의 무한한 지혜와 공의 안에서 선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욥의 고백에 마침내 우리도 동의하는가? 42장은 하나님이 욥을 회복시키신 내용이 아니다. 욥은 확실히 옳지 않은 말을 한 것에 대해서 회개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그러나 욥기는 여전히 욥에게 행한 악에 대해 여호와께 책임을 묻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욥 42:11). 우리는 다른 성경(예: 창 3장; 요일 1:5; 약 1:13)을 통해 여호와가 악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기 속 구절과 다른 구절(예: 암 3:6)은 하나님이 악을 이기고 악까지도 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주권자이심을 분명하게 한다. 이건 인간이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왜 “욥의 말년을 그의 처음보다 더 복되게”(욥 42:12) 했는지에 대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그렇게 하셨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욥의 상황에 중점을 맞추는 식으로 욥기의 결말을 해석하는 것은 특히 욥이 여호와와의 만남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드러난 앞선 이야기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욥기를 다 읽어도 우리는 고통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가진다. 그럼에도 최소한 축복이나 저주의 경험이 사람의 의를 측정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축복하거나 저주하실 수 있다.원제: Why Does God Restore Job?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를 더 기이하게 만들자
by Darryl Dash
2023-11-09
지난 토요일에 나는 불신자들이 적지 않게 참석한 결혼식에서 설교를 했다. 나는 신랑신부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불신자에게 복음까지 전하는 성경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어려운 구절을 골랐다. 에베소서 5:22-33. 나는 신랑신부에게 주례자로서 하기 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복종과 사랑이다. 동시에 긍정적인 말도 있다고 말했다. 서로 사랑하고 복종할 때,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 사람이 반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 나는 복종에 관해서 말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주제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런 일이 퍽 자주 발생한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설교하다 보면 지금 우리 생각과 모순되고 이상해 보이는 부분을 성경 속에서 꼭 만나곤 한다. 전에는 그런 구절을 부드럽게 하거나 아니면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나는 어려운 구절들로 곧장 달려간다. 나이가 들수록 기독교의 어려운 부분이 지렛대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굳이 어려운 주제를 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어려운 구절을 적극적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더 정직하다어려운 문제를 피하는 교회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실망스럽다. 이건 마치 고객을 유인하는 상술 같다. 성경 속 어려운 주제는 적지 않다. 따라서 교인들이 나중에 그런 부분을 일부러 숨겼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솔직하게 알릴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사도행전의 설교를 보라. 사도들은 적대적인 청중과의 의사소통에 매우 능통했다. 종종 그들은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으로 바로 이동했다. 그런 내용은 피하거나 부드럽게 페달을 밟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공개하는 것이 좋다.더 힘 있다어려운 주제의 공개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우리에게 필요한 대위법을 제공하는 지점이 바로 성경 속 난제가 있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성경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소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따라서 어려운 구절일수록 피하기보다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과 우리가 메시지를 전하는 교인들 사이의 긴장 지점은 무엇인가? 그 지점을 피하지 말라. 적극 끌어안으라. 성경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변화를 어떻게 이뤄내는지를 보여주라. 결국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과 사고방식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 어려운 구절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무엇보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복음의 타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 모두와 모순된다(고전 1:18-25). 우리는 믿기 어려운 많은 내용을 믿는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성육신. 그의 죽음, 장사, 부활이 역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 더불어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이다. 믿지 않는 귀에는 이 모든 게 이상하며, 복음을 타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부드럽게 바꿀 수 없다.내 생각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경향과 기독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응답을 요구한다. 말씀이 현대인의 감성과 모순될 때, 올바른 접근 방식은 모순의 완화가 아니라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더 나은 말씀을 어떻게 제공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을 부드럽게 하지 말라. 정면으로 제대로 이야기하라. 달려가라. 어려운 부분, 이상한 부분, 괴이한 부분은 오히려 하나님 계시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보다 더 나은 말씀을 어떻게 주시는지 더 잘 보여줄 수 있다.원제: Keep Christianity Wei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by 고성제
2023-11-03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던 중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죽이신다(삼하 6장). 이런 기사를 읽으면 누구나 불평하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낸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느냐!” 그도 그럴 것이 웃사가 무얼 잘못했는지가 썩 잘 이해되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운반한 것부터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법궤는 사람들이 메거나 들고 운반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법궤의 네 귀에 고리를 달라고 명하셨다. 그러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이 큰 잘못인데…. 그럴지라도 그것은 웃사의 잘못이 아니라, 다윗 왕이나 그의 종교 담당 비서관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장대에 꿰어서 나르게 했더라면, 짐승이 날뛰어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은 일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아져 손을 내민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웃사야! 고맙다!”는 음성이 들려야 할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고, 독자의 감정이 좋지 않다.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화내기 전에 다시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무엇을 보게 될까? 우선 그 현장에 ‘웃사의 죽음’만 있는 게 아님을 보게 된다. 거기엔 언약궤도 거기 있고, 그뿐만 아니라 뒤돌아보면 성경에는 그때까지 언약궤에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웃사의 죽음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 마치 펼침막처럼 이 사건 배후에 펼쳐져 있는 그 에피소드들을 함께 살피며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에피소드 1첫 번째 에피소드는 사무엘상 4장에 있다. 엘리 제사장이 다스리던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는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그 지역에 전쟁이 잦았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약 4,000명이 죽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한다. “법궤를 가져오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이기게 해 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그 전쟁터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나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될 것’이라고 믿은 그들의 생각은 미신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단히 모욕적이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들은 하나님을 조작가능한 분으로 본 것이다.하지만 우리의 상황도 이와 똑같다. 사실 오늘 우리도 성경 계시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도 똑같이 흐를 것이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분이라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생각과 다르다는 건 우리로서는 생각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늘 보는 것이 뭔가? 늘 애쓰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분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걸 알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계신 것이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또 거룩한 분! 쉽게 말하면 다르고 다르고 다른 분이다. 너무 다르고 다르고 달라서 어디 견주어 설명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법궤와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가 동일하게 바로 그 점을 가리킨다. “나는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같은 얘기였다. 장로들의 제안은 이제 다시는 패배하지 않게 할 놀라운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조작이 가능한 분이 아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이라, 마음대로 살고, 그러다가 어려운 일 생기면 그냥 하나님을 동원하려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전쟁의 결과도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들은 다시 패배했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더 비참했다. 전사자 수가 이전의 8배에 달했다. 게다가 법궤마저 빼앗겼다.알다시피 이런 상황은 당시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지역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것은 다곤이 여호와보다 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영광스럽지 않은 분인가? 이제 더 이상 만왕의 왕이 아닌가?우리의 하나님 되시기를 거절하고 사임하셨나?블레셋인들도 생각했을 것이다. ‘다곤이 최고란 말인지? 우리의 다곤이 이제 이스라엘 신의 사업을 인수합병한 것이지?’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것이다.에피소드 2-3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블레셋 땅에서 일어난다. 법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인들은 그것을 다곤 신전에 두었다. 그들은 승리에 몹시 들떠 있었고, 법궤는 그들에게 마치 승리의 트로피와 같았다.하지만 다음 날 아침,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아침에 신전에 들러본 그들은 경악했다.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랐지만, 우연이라 생각하고 신상을 다시 원래대로 세워 놓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 그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아예 잘려져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불길하였을까?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온 동네에 갑자기 독한 종기가 돌았다. 그 재앙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기곤 했는데, 어디로 옮기든 피할 길이 없었다. 법궤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재앙이 내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라고 아우성쳤다.에피소드 4얘기는 자연스레 네 번째 에피소드로 이어진다(삼상 6장). 법궤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제 그것을 돌려보낼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가 제안했다. 궤를 보내되, 그 재앙이 그 신으로부터 왔는지 우연이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냐고. 그가 제안한 방법은 간단했다. 새끼를 낳고 아직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준비해서 그것들로 수레를 끌고 가게 하자는 거다. 새끼는 집에 놔두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소들이 새끼를 두고도 이스라엘 쪽으로 간다면, 그건 이 일에 이스라엘의 신이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가져오면 안 되는 법궤를 가져왔다는 뜻이라고 보기로 한 것이다. 나름 논리적으로 치밀한 방법이었는데, 그렇게 시행한 결과는 놀라웠다. 소들이 곧장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끄는 사람도 없는데, 길을 잘못 들지도, 멈추지도, 무얼 먹으려고 곁길로 빠지지도 않았고 새끼에게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이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 틀렸다는 거다. 하나님은 포로였던 적이 한순간도 없으며, 블레셋 땅 다곤 신전에 있을 때도 그곳에서 여전히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포로로 잡기는커녕, 언약적 관계가 없는 그들은 그분의 상징물조차 그들 가운데 두고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법궤를 두고도 저럴 정도니, 그분의 실재(real presence)를 감당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그뿐만 아니라 ‘그런 분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은 젖먹이를 둔 암소의 본능보다도 강렬했다. 그들이 그토록 잘못된 믿음의 미몽 속에 있을 때조차 말이다. 주님은 훗날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결국 이 에피소드들은 무얼 말해 주나?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거룩하신데, 그의 사랑도 자비도 모두 남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신도, 블레셋인들이 생각하는 신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그분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에피소드 5이제 법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궤를 보고 너무 반갑고 궁금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것을 들여다보려고 그만 그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리하여 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언약궤는 고핫 자손만 다룰 수 있고, 그들조차 만지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다.여기서도 하나님은 다시 한번 거룩하심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분은 완전 타자였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있어야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이해할 텐데, 달라도 완전히 달라 알거나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 단지 만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가 불가능한 분이었다. 그분은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순종할 분이지, 분석하고 판단할 “그것”이 아니란 말이다. 놀랍고 위대하기를 상상 자체가 불가할 정도라는 것이다.에피소드 6이제 본문 곧 마지막 법궤 얘기다. 이 일은 다윗이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시는 중에 일어났다. 다윗은 이 일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풍악을 울렸다. 그때까지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다시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궤를 옮기던 중에 갑자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놀란 웃사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지금까지 배후의 법궤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은, 본문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잘못했는데, 왜 웃사가 죽어야 하나…. 설혹 웃사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이렇게 죽는 건 좀 심하지 않나….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얄팍한 감정을 앞세워 성급하게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설교자로서 우리는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비극을 대할 때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이 이런 비참한 비극까지 감수하고도 하시고자 한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을 겸손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평범한 돌도 뒤집어 보고 나뭇잎도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웃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이거나, 다시는 만지지 말라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복음의 복음 됨을 더욱 밝히 보여주고자 하는 계시임을 보게 된다.단순히 “이제 웃사는 지옥 갔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안 된다. 사실 성경 인물들은 우리를 위한 드라마에 등장한 등장인물들이다. 드라마에서의 배역이나 내용을 가지고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드라마에서 배우 아무개 씨가 죽었다고 실제 그가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웃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 말하도록 위임받지 않았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그러면 웃사 사건은 복음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어떤 하나님이 어떤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드러냄으로 그렇게 한다. 사실 복음이 정말 제대로 기쁜 소식이 되려면, ①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분인지를 알아야 하고, ②동시에 인간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③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어떤 위대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깊고 풍성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이 왜 그렇게 기쁜 소식인지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그렇다면 웃사 이야기는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 본문에서 웃사의 죽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웃사의 죽음을 그 이전에 이어져 온 법궤에 얽힌 이야기라는 펼침막 앞에서 법궤와 함께 보아야 한다고 했다. 웃사는 왜 죽었나? 법궤에 손을 대는 바람에 죽었다. 그는 왜 손을 댔나? 소들이 날뛰는 바람에 법궤가 굴러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법궤가 떨어져 더러워질까 염려한 것이다. 길에는 짐승의 배설물을 비롯해 더러운 게 많으니까 말이다. 이 점에서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더러운 것은 길에 떨어진 짐승의 배설물이 아니라 웃사 자신이라는 거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짐승의 배설물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든 것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은 웃사를 포함한 인간인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 17:9). 웃사는 자신이 그렇게 더러운 걸 모르고 손을 뻗어 하나님의 궤를 만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다. (기억할 것은 바로 이때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해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 보라고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말이다!)그 현장에 법궤가 있고, 그 뒤로는 이런 펼침막이 있다. 그 펼침막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거룩하다.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너희가 만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다. 나는 너희가 예배하고 순종해야 할 대상이지, 연구하고 분석하고 이제 ‘알았다!’라고 말할 “그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와 맺어준 언약 없이는 너희는 나의 상징물조차 너희 가운데 두고 누릴 수 없다. 나는 너희에 의해 조종될 수 없으며, 어느 신들보다 뛰어나며 어디서든 다스린다.이렇게 거룩하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죽었을까? 앞에 나온 에피소드들을 보며 생각해 보았나? 그 펼침막 속에서 죽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숫자가 무얼 말해 주나? 언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몇 번 죽었어야 할지 모르는 자들이라는 거다. 우리는 매일 죽을 수밖에 없고,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성경은 그런 분이 죄인을 사랑하신 얘기다.웃사 얘기는 웃사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웃사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이 “위하여 언약궤를 준비하신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작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대표로 삼아 구체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시내산에서 더욱 구체화하여, 궤에 담아, 손에 쥐어 주신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웃사와 같은 인간 혹은 그보다 못한 인간들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못났고, 그렇게 도덕적으로 망가져서,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더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자신들이 그러한 줄을 모르고, 넋 놓고 행동하는 우리들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런 얘기다.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이 얼마나 무지하고 더러운 인간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셨는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법궤는 오래전부터 바로 그 사랑의 증거로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은 지금까지 그나마 하나님 임재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법궤로 인해 죄인들도 그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 계획 속에서 웃사와 같은 죄인은 배제된 것이 아니라 포함되어 있었다. 기실 그 법궤와 거기에 담긴 언약은 웃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르는 인간을 위해 말이다. 그들이 아직 연약하고 원수되고 죄인되었을 때, 본문의 그림으로는 웃사가 자신이 어느만큼 죄인인지도 모르던 그때에 하나님은 이미 그 언약궤를 주셨고,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을 내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웃사는, 오늘도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이미 수 없이 죽고 또 죽어야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게 한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성제 목사의 설교영상 보러가기
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
교회를 사랑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by Matthew Barrett
2023-10-31
종종 마르틴 루터를 로마 성문을 향해 돌격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격렬한 시위자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캐리커처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루터는 종파주의자도, 분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교회를 분열시키지도 않았다. 더더욱 로마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로마가 마침내 가톨릭(보편) 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드러내는 더욱 현대적인 혁신의 시대로 전환했다고 확신했던 루터의 원래 의도는 내부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의 생각은 그가 내건 95개조 반박문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박문을 제시한 이유가 공개 토론을 위해서였지만, 서두에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밝히려는 열망”이었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밝혔다. 루터의 반박문은 열정, 심지어 심각한 경악까지 드러내고 있지만, 그의 대담한 불만 뒤에 숨은 더 깊은 동기, 곧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다. 면죄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면죄부의 남용은 루터가 이 95개조 반박문을 쓰도록 자극했다.당시에 반박문을 작성하고 게시하는 게 참신한 건 아니었다. 루터가 토론을 위해서 이런 식의 글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관행이 루터의 독점물도 아니었다. 중세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행동을 했다. 아마도 루터는 앞서 살았던 여러 사람을 모방한 것 같다. 이건 루터가 일으킨 자극을 경시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의도한 게 대중의 반란이 아니라 학문 논쟁이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의 면죄부 설교를 주관했던 브란덴부르크 대주교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에게 이 반박문을 보냈다. 그 외에 여러 친구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루터의 궁극적인 목표가 학문 논쟁이 아니라 구원 자체만큼 중요한 어떤 문제에 대한 공개적이고 목회적인 해명이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적 관점을 반영하는 그의 반박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죄에 대한 회개와 형벌루터의 첫 번째 논제는 마태복음 4:17에 대한 로마의 해석에 도전한다. “우리의 주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 되기를 바라셨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죄인에게 “참회하라”(라틴어는 poenitentiam agite 명령했다고 생각했다.루터는 죄에서 돌이키라는 단순한 명령을 면죄부를 포함한 로마의 전체 참회 제도로 독해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회개하라”라는 대체 번역을 선호했다.그는 “이 단어는 성직자가 집전하는 고해성사, 즉 고백과 속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라고 썼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내면의 회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한 경험을 바탕으로 루터는 외적인 열매가 없는 “회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육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외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내적 회개는 무가치하다.”죄에 대한 언급에서 루터는 죄가 주는 자책감과 죄의 형벌에 대한 로마의 구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터는 마치 교황이 그리스도인을 모든 죄의 형벌에서 전부 없애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교황에게 호소하는 것을 반대했다.더욱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라면 결코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모든 면에서 그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의 대리자인 제사장에게 복종하게 하지 않는 한 누구의 죄도 사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했다.1517년까지만 해도 루터는 사제직에 관한 로마의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제들, 특히 연옥의 개념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죽는 사람의 경우에 연옥을 들먹이며 성경의 형벌을 유보하는 사제들은 무지하고 사악하게 행동한다”고 지적했다.루터가 “형벌은 진정한 회개를 시험하기 위해 죄 용서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부과되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통 알려졌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 점은 루터를 끝없이 괴롭힌 문제였다. 아마도 루터는 일단 용서받으면 처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반 교회 신도들에게 비슷한 말을 했을 수는 있다. 연옥과 면죄부루터는 연옥에 대한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은 연옥의 목적을 전달하려고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사용했다. 루터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줄어들고 사랑은 늘어나는 것 같다”라고 썼다.루터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잘못된 인도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교황이 “모든 형벌의 전면적 용서”를 허용했을 때, 그가 “실제로 의미한 건 ‘모든 형벌’이 아니라 교황 자신이 부과한 형벌만을 의미했다.”루터는 한탄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든 형벌에서 면제되고 교황의 면죄부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이 면죄부 구입으로 연옥에서 즉시 석방될 것이라고 약속하며 거짓말을 선포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돈이 상자에 딸깍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탈출한다는 인간의 교리만을 설교한다”라고 썼다.돈 상자가 많아질수록 ‘욕심과 탐욕’은 더욱 커졌다. 자기가 하는 회개가 진짜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면죄부로 인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냐며,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했다. 의분에 불탄 루터가 면죄부 탁자를 뒤집었을 수도 있다. “면죄부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가르친 교사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불타는 언어, 목자의 마음루터의 강한 언어인 ‘저주’는 그의 목회적 혐오감을 전달했다. 면죄부를 살 만큼 충분한 돈만 있다면 회개 여부에 상관 없이 언제라도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인들은 면죄부 테이블을 향해서 달려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강간한 사람도 면죄부만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미쳤다!”라고 루터는 소리쳤다. “이 얼마나 끔찍한 참회 시스템의 남용인가? 진정한 참회와 관계없이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와도 아무런 상관없이 마치 죄에 대한 일시적인 형벌에 대한 속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마음의 진정한 성화를 희생시키는 값싼 은혜라고 확신했기에 루터는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했다.그리고 루터는 테첼 같은 설교자들을 화나게 했을 논제를 내놓았다.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용서받을 권리를 가진다.”“조심하기”를 거부한 “교황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평신도들에게 다른 “사랑의 선행”은 덜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루터는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루터는 면죄부 제도 전체를 뒤흔들었고,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의 동기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가치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루터는 교황이 면죄부 사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처음만 해도 루터는 교황의 선의를 믿었다. 면죄부가 어떻게 남용되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교황이 앞장서서 면죄부 판매와 구매를 중단하리라 생각했다.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를 안다면, 양의 가죽과 살, 뼈로 세워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 대신 그는 차라리 그 성당이 불타서 재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자신이 얼마나 틀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종교개혁 여정 중 이 시점에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완전히 거부한 게 아니었다. 단지 교황의 권위를 분명하게 했는데, 즉 그 권위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남용될 것을 두려워했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일반 주교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한은 모든 주교나 큐레이터가 자신의 교구나 성당에서 신도들에 관해서 갖고 있는 권한과 동일하다.”루터는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받아서 교황에서 물려준다는) 열쇠에 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교황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열쇠의 권능이 아니라 양을 사랑하는 중보의 마음으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사죄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 95개조 반박문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데 있어 아직 초심자였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그가 나중에 포기한 신념도 여전히 담겨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의 핵심 우려는 분명히 담겨있고, 그 반박문이 올바른 손에 쥐어졌을 때 폭발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루터의 진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단지 교회의 진정한 유산을 회복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중세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때가 다다랐을 때, 그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로마에 종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글은 Zondervan Academic과 협력하여 출판되었으며 Matthew Barrett의 The Reformation as Renewal: Retrieving the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Zondervan, 2023년 6월)에서 간추렸다.원제: Catholic, Not Roman: Luther’s Ninety-Five Theses of Love for the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주님을 위해 일할 나이
시편 92편 묵상
by 고명환
2023-10-26
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광고나 강연에서 듣던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나이는 숫자 정도로 여겨지는가? ‘아니다’ 단언해도 무리가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고정관념을 깨자’는 취지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는 몰라도, 현실은 그 숫자가 가지는 위력 앞에 쉽게 굴복하고 만다. 여전히 나이를 따져 효율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잣대이다. 개척하여 섬기던 한인교회 가까이에 한참 떨어져 있던 한인교회가 이사를 왔다. 한인들이 희소한 매사추세츠주와 뉴햄프셔주의 경계에 자리한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한인교회 둘이 오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할 곳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개척을 결심할 때 마음으로 정한 원칙이 둘 있었다.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빼내어 시작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미 한인교회가 있는 곳에 터를 잡지 않는다.’ 한인교회가 가까이에 없는 지역에, 주님을 모르거나 낙심한 영혼들을 찾아내어 개척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기도하며 시작했다. 주님의 도움으로, 더디었지만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장소에서, 새롭게 주님을 알아가는 분들과 함께,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져 가는 중이었다. 한데, 적지 않은 역사를 가진 교회가 무슨 사정인지 지척에 들어온 것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체 상태였던 교회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도에 의욕적인 젊은 목사님을 맞아들였고, 교회 자리도 옮겨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젊은 한인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 서로 협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점점 바뀌었다. 그래서 연락해 오면 기꺼이 만나 인사도 나누고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 목사님과 만나 식사하는 자리는 수개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같이 식사하자고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마련한 기회였다. 만난 자리에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 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 분의 헌신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비교하니 나의 활동은 게으른 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계속된 이야기 가운데, 그 열정의 젊은 목사님은 한국의 유수한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서울의 대형교회 부목사로 일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주의 종’임을 듣게 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경력에 젊음과 열정마저 갖춘 그 분에 비하면 나의 것은 조촐했지만, 차례가 된 것 같아 나름 소상하게 풀어 놓기 시작했다. “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십오 년 동안 하며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위해 전 시간을 드려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교에 마흔이 넘는 늦은 나이에 들어가서 겨우 졸업한 뒤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개에 이어 교회 개척 동기와 진행, 현재의 모습에 이르도록 나름대로 성의 있게 설명해 주었다. “난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런 그 분의 말에 짐짓 당황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갔다고 말한 사람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하다니?’ ‘그의 앞에 있는 나이배기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했었다는 말 아닌가?’혼란스러웠다. 즉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공격적인 질문 대신에 상투적인 변호를 늘어놓았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팔십세가 되어 부름을 받았고, 갈렙은 팔십이 넘는 나이에도 주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성경에 보면 나이가 많아도 주님의 일꾼으로 귀하게 일한 분들은 많은데요.”이에, 그는 입술을 약간 떨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응대했다. “어쨌든 전 나이 든 사람들이 신학교 가는 것에 반대합니다.”얼굴을 붉히며 내보이는 단단한 고집을 확인하고 나니, 더 이상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하여, 애써 불쾌한 마음을 추스른 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어설프게 마무리해야만 했다.왜 그분은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것을 싫어했을까? 왜 목사는 자신처럼 젊은 나이에만 헌신해서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믿었을까? 자신은 제때 신학교를 거치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데, 늦게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세상에서 더럽혀진 사람들이 나중에 ‘성직자’가 되는 것은 자격이 없다고 믿은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이 든 사람들은 목회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듣고 싶지 않은 대답에 대한 질문을 지금도 해 본다. 2.시편 92편1-3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4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5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6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7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8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9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10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11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12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13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14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15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시이다. 시인이 노래하고 싶어한 주님의 사랑, 성실하심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것으로 밝히 입증된다. 곧, 악인들과 의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악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잠시 그들의 악행이 세상에 만연한다 해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도록 심판하신다. 반면에, 의인들은 악인들로부터 온전하게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크게 번성하는 복을 누리게 하신다. 시에서 악인은 풀(잡초)에, 의인은 나무(종려, 백향목)에 비유된다(7, 12절). 풀과 나무는 수명과 유용성에 있어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풀은 아무리 쑥쑥 자라 무성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말라 그 생명을 다해 쓸모없어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나무는 그 생명이 길고 여러 쓰임새로 인해 큰 가치를 지닌다. 의인은 우거지고 높이 치솟는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크게 번성하고 뻗어 나간다. 수령이 오래되어도 생기를 잃지 않고 푸르며 열매를 맺는다. 오래된 나무라도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며 풍성한 결실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이 늙으나 젊음을 유지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젊거나 늙거나 나이에 상관없이, 활기차고 열매 맺는 의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관건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밀착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3.나이란 하나님께는 숫자에 불과하다. 주님의 선발기준에 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주님의 쓰임을 받는데 나이의 커트라인이란 없다. 주님은, 자원하는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어리다고 돌려보내시지 않는다. 누구든지 쓰임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선택의 대상이 된다.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님께서 그 어떤 조건의 사람이라도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진 특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재능을 가졌든 못 가졌든, 나이가 어리든 어리지 않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쓰임에 합당한 열매를 반드시 맺는다. 관건은 나이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이다. 주님께 뿌리를 두어야 푸르름을 유지하고 열매 맺을 수 있다. 홍안의 소년이라도 주님께 뿌리를 두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한다. 백발의 노인이지만 주님께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그 잎은 푸르며 열매는 풍성하다. 시편 1편의 시절을 따라 열매 맺는 나무가 생명의 시냇가에 천착하였듯이, 진액이 넘치고 푸르르며 늘 열매를 맺는 나무는 생명의 근원인 주님께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다. 예수님은 가지인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려면 포도나무인 그분께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요한복음 15장). 주님 앞에 나이를 따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를 크게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작게 보는 사람이다. 어렸으나 주님의 쓰임에 적합한 다윗을 무시했던 사람들의 일원이며, 사무엘이 늙었다고 강제 은퇴시키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동조하는 부류 중 하나이다. 강력한 주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초라한 사람의 능력을 크게 보는 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고린도전서 1:27)이시라는 사실에 무지한 사람이다.아직 어리다고 뒤로 물러나지 말기를 바란다. 이제는 늙었다며 조기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님 안에 뿌리를 두기만 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것도 숨이 멎는 그날까지.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삶을 꿈꾸어야 마땅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이 가능함을 보장해 준다. 얼마나 힘이 되고 소망을 주는 말씀인가!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레바논의 백향목처럼높이 치솟을 것이다.주님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우리 하나님의 뜰에서크게 번성할 것이다.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12-14절, 새번역)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무시하지 말라
지옥 교리를 선포해야 하는 이유
by Bradley Bell
2023-10-25
어렵지만 아름다운 교리(Difficult but Beautiful Doctrines)탈 기독교 시대에 접어든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학적 진리의 깊은 의미와 필요성을 느끼고자 하는 시리즈입니다. “죽기 30초 전.”이것은 판타지 작가 브랜던 샌더슨이 피할 수 없는 일을 불길하게 예시하는, 등장인물이 죽기 전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통찰력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어쩌면 판타지 소설이 주는 불멸의 매력을 찾는 독자에게 이런 식의 표현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의 Stormlight Archive 시리즈에 매혹된 수백만 명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말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 영혼에 깊은 의미를 던진다. 나는 누구라도 이와 비슷하게 죽음 직전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그 사람의 남은 수명에 대해 당신의 귀에 속삭인다고 상상해 보라. 정말로 기이하고 끔찍한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당신이 그 사람과 맺으려는 관계의 방식을 근본부터 바꿀 것이다. 엄중한 현실은 차원이 다른 긴급성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그 이상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적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는 별개로 지옥, 즉 악인들이 의식적으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실제 장소가 무자비한 입을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소중하다. 그들이 모르는 지식을 안다는 이 짐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을 주는가? 선교사의 짐아마도 선교사만큼 그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요삼 1:7) 나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천하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할 만한 유일한 이름” (행 4:12)이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는 것이다(유 1:23). 많은 선교사가 그들의 부르심 뒤에 숨은 중심 동기가 다른 게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즉시 인정한다. 선교사의 삶과 소명이 가진 부담은 지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이 얼마 남았는지 알려주는 내레이터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겪어봐서 잘 안다. 동아프리카 선교사로서 우리는 종종 먼 거리를 운전하며 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을 위해서 기도하곤 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장소에 멈췄는지, 우리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동안 수백 곳에서 수천 명을 만났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신자들을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내 머리를 떠난 적이 없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누군가가 막 죽었다는 의미였다.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 봤을까? 최근에 내가 시장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일까? 내가 복음을 전한 사람일까? 이것은 마치 비명을 지르듯 세레나데를 부르는 청년처럼 내게 쏟아지는 나 자신을 정죄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죽음이라는 장막 바로 너머에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한 번 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선교사가 받는 유혹이런 부담과 함께 따라오는 유혹이 있다. 지옥의 교리를 잠시 제쳐두면 어떨까? 그건 전혀 어렵지 않다. 쉬운 방법이 여러 가지 있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장될 것이라고 믿는 보편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영원한 저주는 불필요하며 성경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죽는 즉시 바로 사라지거나 지옥에서 잠시 고통은 받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없어진다는 영혼 소멸론(annihilationism)도 나름 좋은 방식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불신자는 아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영원한 심판의 장소인 지옥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지옥을 제쳐두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예 거기에 관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남았다고 해도 부담은 없다. 영혼에 대한 긴급성은 함께 줄어든다. 한때 선교사를 감동시켰던 지옥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무관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밤에 들리는 통곡 소리, 사방에 쌓인 장작더미, 죽음이 31초 남았던 이웃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동정이 부른 피로감 또는 문화 충격이라고 치부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에 관한 걱정과 부담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의 포기를 어떤 사람은 “사랑이 이긴다”라고 표현한다. 밀라드 에릭슨이 관찰한 바와 같이,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며 종종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먼저 비신화화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러면 왜 선교사는 그 주제가 가져다주는 끊임없는 고뇌를 고집해야 하는 걸까? 에릭슨이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옥의 교리를 고려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지옥의 교리를 포기한 선교사가 갑자기 더 자유로워지고 더 도덕적인 선교사가 되는 건 아니다. 교리의 상실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욱더 제한된 신앙과 협소한 사역이다. 선교사의 확신성경 속 지옥에 관한 가장 분명한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나온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관한 긴 설교를 한다. 물론 사역 내내 그의 가르침 대부분이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정죄를 암시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울며 이를 갈며”(마 24:51; 25:30)라는 문구를 반복한 후, 그는 그러한 고통이 일어나는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다. 의로운 “양”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나라로 맞아들일 것이며, 저주받은 “염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마25:33, 41). 이런 심판의 범위를 반복하면서 예수님은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 25:46)라고 결론 내린다. 마태복음 25장이 그리는 지옥의 모습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옥이라는 이 중요한 교리가 단지 한 장의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지옥이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며 “그들의 벌레가 죽지 않는 곳”(막 9:48)으로 묘사된 것을 본다.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인용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부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렇게 외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눅 16:23-24). 요한계시록은 또한 끝없는 고통의 연기가 나고 유황이 많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한다(계 9:1-2, 11; 14:9-11; 19:3; 21:8).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옥에 관해서 성경은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을 정도로 분명하다. 카운트다운을 향한 위로지옥에 관한 너무나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 때문에 선교사는 이 교리가 가진 진리뿐 아니라 그 선함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의식적으로 영원한 고통을 겪는다는 이 교리의 어떤 점이 좋을 수 있을까? 이 교리가 영혼의 교화에 도움을 주는가? 사역에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는가?다음부터 밤에 통곡 소리가 들리거나 내레이터가 속삭일 때 이 교리가 주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유익을 기억하라. 3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민족 가운데 잃어버린 그의 친족을 생각하며 바울이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롬 9:2)라고 썼을 때, 그가 지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지옥이 사실이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면, 그분의 자비에 대한 말씀도 우리는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다.성경의 신뢰성을 확신하는 것보다 선교사의 사역에 유익을 주는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고후 4:5).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기록된 말씀을 통한 살아 있는 말씀이다. 지옥의 짐이 엄습할 때, 선교사는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며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라는 말씀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다.2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지옥 교리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의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인간의 악에 대해서 어떻게 영원한 심판을 행하실 수 있다는 건가? 선교사는 웨인 그루뎀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처벌받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악을 징벌하시고 악을 이기실 때 그의 공의와 의와 모든 대적을 이기시는 능력의 영광이 나타난다.”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고 또 겸손하게 지옥에 대해서 경고하는 선교사는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며 공의로우시고 또 전능하신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듣는 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복음은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한 사람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2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를 키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선교 현장에서 탄생했다. 어느 날, 우리 팀장이 나를 산꼭대기의 탁 트인 전망 앞으로 데려갔다. 접근할 수 없는 마을이 수 마일에 걸쳐 수천 개의 양철 지붕의 모습으로 반짝였다. 그날 밤, 나는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살 뻔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오로지 나의 힘에 달려 있었다면, 나는 절망에 빠져 그만두었을 것이다.감사하게도 나는 당시 로마서를 읽고 있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롬 9:18)라는 바울의 선언을 접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혼의 선택이 나를 선교 현장에 머물게 한 위로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그 자유로움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안식을 준다. 15초 전… 지옥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한다.내가 말하는 안식은 선도 활동에서 한 발 떨어진 안식이 아니라 내 영혼을 위한 안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주는 힘으로 우리는 더욱더 노력한다(히 4:11). 이것이 어쩌면 지옥 교리가 주는 가장 분명한 이로움일 수도 있다. 지옥이 실재하고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몇 초 후에 죽는다면, 선교사는 복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바울의 긴박감을 들어보자.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롬 10:14-15)이 얼마나 대단한 동기 부여인가!10 초 전…. 지옥은 우리로 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숨이 막히게 한다.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지옥 교리를 묵상하라고 권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옥의 중요성과 분명히 일치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교리만은 깊이 성찰할 것을 촉구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 같이 하늘의 휘장이 열렸을 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여호와여” (사 6:3, 계 4:8) 외치는 피조물을 묘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셨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 영광을 훼손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시는 하나님은 옳으시다. 의식적인 고통을 영원히 겪는 지옥을 항상 생각하는 선교사는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에서(살후 1:9) 오로지 하나님의 진노만이 있는 지옥에서(계 14:10) 영혼이 영원히 슬퍼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렇다. 지옥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척도일 수 있다. 시편 기자와 함께 선교사도 얼마든지 감동에 차서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소리쳐야 한다(시 99:9).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한다. 선교사로 사역하는 것은 힘들다. 수백만 명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동시에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있음을 의미한다. 선교사가 인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는 것이다. 지옥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또한 그분의 자비의 깊이에 대한 기념비도 제공한다. 감사는 어려운 시기에 위안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길 바라신다(요 15:11). 우리가 지옥(자비)을 피하고 영생(은혜)을 상속받도록, 실로 놀라운 사랑으로 선택되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얼마나 큰 감사와 기쁨을 주시는가.결국, 선교사 자신도 몇 초 후면 죽는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언제 내가 죽을지 내 귀에 속삭이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사의 미래는 지옥이 아니다. 오직 천국만이 있고 그다음에는 새로운 창조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왕의 길이다. 오로지 하나님께 감사한다!원제: Don’t Ignore the Countdown to Damnation: Why Missionaries Need a Doctrine of Hel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어린이 질문: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여기 함...
by Brandon D. Smith
2023-10-20
어린이 질문(Kids Ask): 목사, 성경 교사 및 신학자가 성경에 관한 어린이들의 질문에 답하다 질문이 많은 어린이는 때때로 하나님에 관해서 중요한 질문을 한다. 최근에 나온 질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모든 곳에 동시에 계실 수 있지요?”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면, 그럼 지금 제 코와 입 안에도 계시나요? 많은 사람과 동시에 함께 계시는 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러기에는 세상에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요!”어떻게 답변하면 좋을까?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우리에게는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누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천둥 번개로 무섭거나 멀리 이사 간 친구로 슬퍼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돌봐주길 원한다. 이건 좋은 바램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며, 누구보다 우리를 잘 돌봐주실 능력이 있으시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 계시며 그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또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에 계신 분이 동시에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오랜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늘로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성인이었지만, 예수님이 함께 있지 않을 때 만날 어려운 일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걱정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떠날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슬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6:6). 그들은 예수님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돌봐주시며 심지어 하늘에 올라가시고도 그들 가까이에 계실 것을 확신하길 원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걱정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돕는 자” 곧 예수님을 돕는 이를 그들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7절).예수님은 누구인가? 돕는 자가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다. 두 명의 예수님이 아니라 한 명의 예수님이다. 그 한 명이 하나님이면서 또 사람이다. 어떻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게 들리겠지만,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성경은 하나님은 세 가지 형태로, 즉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예수라고 불림), 그리고 하나님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세 분의 하나님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는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을 수 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기도 하기에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완벽한 삶을 살고 완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이 큰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넘치시는예수님은 하나님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크고 강력하다고 말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을 한곳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강아지처럼 줄에 묶어둘 수 없다. 하나님을 물고기처럼 어항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에게 하듯 매트에 누르고 못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조차도 하나님을 가두지 못한다!하나님은 너무나 강력하시기에 어디서든 언제든 원하는 곳에 계실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있었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분은 불타는 덤불에서 모세를 만났다. 그분은 또한 모세와 산에서 만났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그의 백성을 광야에서 길고 긴 유랑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분은 심지어 그들과 성전(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던 건물)에서도 함께 계신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무엇도 그를 억제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을 수 없다. 그분은 너무나 강력해서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다.돕는 자를 보내주시기에 충분할 정도로 친절하신예수님은 인간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이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한 완벽한 인간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완벽한 속죄의 죽음을 치르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죄와 사망을 이기기 위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성경은 말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주의 왕으로서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제 우리로부터 멀리 떠난 걸까? 아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은 항상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로 하나님 성령이 바로 예수님이 약속한 돕는 자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좋은 소식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지구에 계시면서 우리가 아프거나 슬플 때 곁에 오시길 바란다. 우리 집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얘기하기를 원한다. 그게 바로 제자들이 바랬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가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게 그들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요 16:7).왜냐하면 예수님이 지구에 계실 때는 한 번에 단지 몇몇 사람들하고만 가깝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의 영을 보내준 뒤로,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가까이 계신다. 성령님이 오셨기에,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그들의 영을 살려서 예수님을 믿도록 돕는다(8-11절). 그리고 성령님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지까지도 알 수 있다(13-15절).성경은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한다고 말한다(롬 8:26-27).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또 다른 예수님의 제자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님이 부활한 직후에 예수님을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그녀는 무척 행복했고 그를 감싸 안아서 다시는 떠나지 못 하게 하려고 했다.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그녀 곁에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마리아 막달라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에 예수님은 앞으로 그가 전보다 더 그녀와 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와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요 20:17).예수님은 돕는 자를 보내셨기에 하나님은 이제 항상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이 바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너무 멀리 있어서 당신을 못 보거나 기도를 듣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당신은 언제나 예수님께 대화를 요청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돕는 자로 보내셨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은 재림하는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요 17:24; 마 28:20).원제: Kids Ask: How Can Jesus Be in Heaven and with 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믿음의 출현
by 박혜영
2023-10-06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믿는 자란 서 있는 자이며, 흔들리지 않는 자입니다. 믿음은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선 믿는 자의 의지와 태도를 강조하는 느낌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지와 버티는 태도가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처음에 서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당신은 처음 어떻게 서 있게 되었습니까?’ 그 질문도 중요합니다.“아브람[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본문의 중요성은 “믿음에 대하여 성경이 명백하게 언급하는 최초의 것”(게할더스 보스)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 전에 이미 아벨, 에녹, 노아를 믿음의 인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창세기는 그들이 등장하는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키지 않다가, 15장 6절에서 비로소 처음 등장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출현을 “명백하게”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냥 믿은 것일까요? 무조건 믿었을까요? “믿으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만’ 동사의 ‘히필’ 형태입니다. 히브리어 ‘아만’에는 ‘충성, 성실, 진실’이라는 기본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쓰는 ‘아멘’이 바로 이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파생어입니다. 그런데 이 ‘아만’ 동사가 ‘히필’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는 ‘능동사역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인이 제공되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아만’의 히필 형태가 두 번 더 나오는데 이렇습니다. “너희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창 42:20),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창 45:26). 믿기 위해서는 저쪽에서 뭔가 신실함을 제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평소에 믿음직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아비 야곱을 믿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중요한 특징은 무조건 믿는 게 아니라, 어떤 소식이 나에게 와서 ‘진실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이 점은 히브리어 문법 형태로 한 번 더 강조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보여주기 위하여 히브리어 “여호와”에 ‘어디에서’라는 의미를 담은 히브리어 전치사 ‘베’가 붙어 있습니다. “그 전치사는 이 확신이 생겨난 곳이 다름 아닌 인격적 여호와임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게할더스 보스는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 믿거나 열심히 믿기 전에 이 믿음을 촉발하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라는 말이 나오기 전, 먼저 하나님에게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이 처음 등장하는 창세기 12장이 아니라, 15장에 가서야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12-14장까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먼저 ‘믿음’이 와야 합니다(참고. 갈 3:23, 25).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는 하나님이 먼저 주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걸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니…”(창 24:27).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성실하게 대하셨기 때문에, 그걸 보는 종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본 것을 말하였지, 그저 믿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야곱도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성실]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창 32:10). 아브라함의 믿음이 등장하기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직스러운 분임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멘’으로 응답하였으며,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그러한 ‘아멘’의 반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수 24:14).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자기가 믿는 대상을 향한 “성실과 진정”이 있습니다. 믿음직스러운 모든 사람은 다 그렇게 합니다.
전능자에 대한 좌절과 감격
by 전재훈
2023-10-02
출애굽기 6:3에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관주가 붙어있어요.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전능의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엘로힘’이 아니라는 거예요. ‘엘로힘’의 뜻은 전능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지요. 하지만 이 용어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 주시기보다 하나님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은 엘로힘이시다’라고 부른 것이지요. ‘엘’은 강한 자, 능력 있는 자를 뜻하는 말이고, ‘엘로힘’은 ‘엘’의 장엄복수형으로 ‘가장 강한 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른 것은 당시는 신들이 각자의 고유영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신론이 지배적이던 때였습니다. 신들은 자신의 지역이 있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특정 영역이 있습니다. 풍요를 다스리는 ‘바알’과 다산을 상징하는 ‘아세라’가 대표적이지요. 우리 개념으로 하면 바다에는 ‘용왕’이 다스리고, 산에는 ‘산신령’이 임신과 출산에는 ‘삼신할매’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역을 넘어서서 어디에나 계시고 전쟁에도 능하시고 양식도 주시며 자녀의 복도 주시는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 신이었기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신’의 개념으로 ‘엘로힘’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엘샤다이’도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이 말은 ‘엘로힘’과 뜻이 조금 다릅니다. ‘엘샤다이’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100퍼센트 이룰 능력과 의지가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하고자 마음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신다는 신의 주권적 의지가 강조된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6장에서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관주에 ‘엘샤다이’라고 토를 달아 둔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알까 봐 더 정확하게 해 주느라고 관주를 단 것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속성상 3무(無)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실수, 실패, 포기’가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속성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왜냐하면 ‘실수, 실패, 포기’는 일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변수를 알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반해, ‘전지’하신 하나님은 모든 변수까지도 알고 계시며 심지어 그 변수마저 통제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엘로힘’과 달리 계시적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을 ‘엘샤다이’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로 계시하신 것과 같습니다. ‘엘로힘’은 대부분 하나님을 지칭하기는 하나 부분적으로 다른 신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즉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도 쓰인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했던 말 중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라고 했었는데, 이때 사용된 단어가 엘로힘입니다. 하지만 ‘엘샤다이’는 고유명사로서 오직 ‘여호와’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른 어떤 신이든 능력만 있으면 되는 신일 때는 ‘엘로힘’이지만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할 때는 ‘엘샤다이’라는 것입니다. ‘엘샤다이’의 전능자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제가 전능자에게 느끼는 좌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자신이 뜻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저를 포함 우리 가족 모두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혹은 그분의 뜻을 이루는데 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는 형태의 기도로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써 주옵소서’ ‘주여 당신의 뜻을 내게 알리소서. 저를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정도입니다. ‘엘로힘’은 기도할 때 참 편한 신입니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까 무엇이든 요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면 됩니다.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든지, 40일 금식기도나 절벽에서 기도하듯이 하나님을 적당히 위협하면 됩니다. ‘엘로힘’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의 정서와도 딱 맞아떨어집니다.‘엘로힘’에게는 예배도 무당의 굿판과 비슷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정성껏 굿을 준비하여 무당으로 하여금 춤추게 하고 나는 그 앞에서 손을 싹싹 빌기만 하면 귀신의 능력을 빌려와 다른 귀신도 내쫓고 질병도 고치고 액운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예배도 정성껏 준비하여 바른 자세로 예물을 힘껏 준비하여 드리고 손을 모아 기도하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축복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예배를 아무리 잘 드리고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하고 기도를 아무리 세게 해도 꿈쩍도 안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이 정해진 이상, 나는 아무리 애써도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시련과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대중적 인기’ 혹은 ‘유명세’에서 엘로힘에게 엄첨 밀렸습니다.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은 엘샤다이가 아닌 엘로힘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국식 기도원에는 ‘엘샤다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무조건 ‘엘로힘’이어야 합니다. ‘엘샤다이’는 수도원에서만 간간히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수도원보다 기도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을 말할 때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걸핏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주의 보혈을 뿌리노라’ ‘믿는 대로 될지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주여 믿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등의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엘로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나의 ‘원함’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하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사람들은 ‘엘샤다이’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질병 앞에 치유를 구하지 않고 겸손과 지혜와 깨달음을 구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고난 앞에 해결을 기도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믿음을 구하거나 고난이나 환란이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깨닫게 되면 도리어 고난 앞에 즐거워합니다. 이들은 종종 ‘엘로힘’을 섬기시는 분들에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구원의 문제에 대면했을 때입니다. 뜻을 정하기만 하셔도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100퍼센트이신데 뜻을 정하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 걸었다면 이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며 실패하지 않으시고 도중에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요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떤 변수도 없고 어떤 훼방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런 엘샤다이께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뜻을 정하셨다면 나는 그 앞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차에서 뒤돌아 앉아도 천국까지 가고 전봇대를 붙잡고 늘어져도 전봇대 채 뽑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때문에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 부르고 타력 종교라 부르며 고등 종교라 부릅니다. ‘엘로힘’은 이 세 가지 모두를 흐릿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구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선포에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수단입니다. 다시 말해, 엘샤다이께서 나를 사랑하시기로 뜻을 정하셨으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까지 거셨으니 나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앞에서 엎드려지게 될 것입니다.‘엘샤다이’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예배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시며 내 입술에서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내가 비록 사는 것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 있는 것은 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엘샤다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 주님께 즐거이 예배하고 싶다
시편 95편 묵상: 진정한 예배
by 고명환
2023-09-25
1 미국 보스턴 지역에는 이름난 두 교회가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파크스트릿 교회와 외곽에 자리한 그레이스 채플이다. 파크스트릿 교회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유서 깊은 보스턴 다운타운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적 특성과 함께 교회가 지닌 역사적 유산 역시 만만치 않아서 보스턴을 방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들러 예배하고 싶어 하는 교회이다.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라는 인상을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받는다. 미국의 교회들이 점점 젊은이들을 잃어가고 노령화되는 추세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래된 긴 나무 의자의 곳곳을 차지하고 진지하게 예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속으로 그 이유를 묻게 된다. 물론 보스턴은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명문대학들이 즐비해선지 인구의 상당 부분은 학생들이 차지하는 젊은 도시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전통적인 파크스트릿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보스턴 시내에는 그들이 찾을 만한 교회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쉽게 다닐 교회를 찾아낼 수 있다. 예배의 형식이 젊은이들을 불러들이는 것 같지도 않다. 그 교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을 듯한 전통 예배를 드린다. 사회자 한 사람이 인도하는 긴 예배 순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풍스러운 오르간 반주가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것 같지도 않다. 전통 성가를 부르는 찬양대나, 가운을 입고 성경을 한 줄 한 줄 풀이해 나가는 설교 방식도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찾는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바를 채워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교회인 그레이스 채플은 보스턴 시내를 한참 벗어나 한적한 타운에 있다. 담임 목사가 주장하듯 현시대의 사람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꾼 교회이다.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통만을 고수하면 문을 닫게 된다는 철학을 가진 목사 아래 여전히 그 교회는 끊임없이 참신한 시도를 한다. 다른 많은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처럼 이 교회 또한 설립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통 교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종탑이 뾰족하게 올라간 전형적인 외관은 해체되었고, 내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전면에 무대가 배치된 극장식 예배실을 비롯한, 카페, 체육관, 기도실 등 여러 부대 시설을 갖춘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성도는, 정장을 차려입은 이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캐주얼 복장이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나 찬양단, 설교자까지 티셔츠나 스포츠 셔츠를 입고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웅장한 오르간 대신 일렉트릭 밴드의 리드미컬한 연주에 맞춰 최근의 찬양 메들리를 부르는 것으로 예배는 시작된다. 예배를 위해 주보가 제작되지도 않는다. 찬양, 광고, 기도, 설교가 전부인 단순한 순서의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아이러니하게도, 현시대의 조류에 맞게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 이 교회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찾기 어렵다. 일어선 채 컨템포러리 찬양을 행복한 얼굴로 부르는 지긋한 나이의 성도들에게 드럼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같다. 간략하지만 마음을 담아 참여할 수 있는 예배 순서, 삶과 밀착된 설교, 종교적인 엄숙함이 줄 수 없는 인도자와 참여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오는 에너지가 연령을 막론하고 성도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2시편 95편1오너라,우리가 주님께즐거이 노래하자.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소리 높여 외치자.2찬송을 부르며그의 앞으로 나아가서,노래 가락에 맞추어,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3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4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5바다도 그의 것이며,그가 지으신 것이다.마른 땅도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6오너라,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무릎을 꿇자.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그가 손수 이끄시는 양 떼다.오늘,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8므리바에서처럼,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너희의 마음을완고하게 하지 말아라.9너희의 조상들은 그 때에,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나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10사십 년을 지나면서,나는 그 세대를 보고 싫증이 나서‘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나의 길을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하였고,11내가 화가 나서‘그들은 나의 안식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 95편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예배는 오직 만물의 창조주이며 소유주이신 하나님만을 높이는 최상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분은 땅과 바다를 지으셨고 해 아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4, 5절).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왕들 혹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이다(3절). 이 위대한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다.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삼으셨고 손수 기르시고 이끌어 주신다(7절). 더욱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반석이다(1절).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마땅히 최고의 경배를 올려야 한다. 여기에는 합당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 경외와 감사의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능력과 권세를 가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복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며 엎드려 경배함이 마땅하다(6절). 믿음이 없이 나아가는 참된 예배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임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현재의 삶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여정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하다. 시는 므리바에서 믿음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는지 들려준다(8-11절). 양인 우리가 목자를 신뢰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즉 믿음 없는 예배는 그분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다. 무의미한 요식행위 이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크신 하나님의 실존과 찾는 사람에게 보응하시는 인격임을 믿어야 한다(히브리서 11:6).예배에 합당한 마음가짐이 먼저 준비되고, 이 바탕 위에 그분을 높여 드리는 예배 행위가 얹어져야 한다. 음악은 예배자의 마음을 잘 담아내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오래된 매체이다. 목소리로 찬양하며 악기로 연주하여 주님을 높여 드릴 수 있다(1, 2절). 춤 역시 주님의 백성으로 왕께 기쁨을 표현하고 영광 돌리는 예배 행위이다(사무엘하 6:13-14; 시편 149:3). 이외에도, 오늘날에는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예배는 즐거운 일이다(1, 2절).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 자유와 절제와 완급이 있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믿음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우울하거나 무덤덤한 일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잊은 채 밝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기뻐하며 경배해야 한다. 3다니던 신학교에선 일주일에 세 번, 열한 시에 공식적인 예배가 열렸다. 주중의 가운데 날인 수요일에는 화려한 오르간 반주가 울려 퍼지고 전통적인 예배 순서에 따라 드리는 격식을 갖춘 채플이었고, 다른 두 번은 일렉트릭 밴드를 따라 찬양하는 시간과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간결하게 짜인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였다. 보통 총장과 교직원들이 참석하는 수요일 전통 예배에는 학생들이 채플실의 좌석을 채워서 성황을 이루었지만, 월요일과 금요일의 약식 예배에는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아 다소 썰렁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자주 참석하던 학생들마저 그 시간에 도서관에 머물렀다. 좋은 학점을 받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예배의 형태가 어떠하든 또 시험 기간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고, 오전 열한 시 채플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늘 앉는 자리를 찾았다. 그 시간만큼은 가정사나 힘겨운 공부, 낯선 나라에서 받는 압박감을 뒤로하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하며 힘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귀에 익숙지 않았던 전자 기타 소리에 따라하던 컨템포러리 찬양이나 오르간 반주에 섞여 힘차게 부르던 전통 찬양은 언제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황을 이룬 자리에서 듣던 설교는 물론, 듬성듬성 학생들이 앉아 있는 한적한 공간에서 경청한 교수님들의 설교는 한 번도 지루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때 4년간 참석했던 채플 시간은 고스란히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문제를 모두 잊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주님께 다가갔던 그 시간들은 몇몇 단편적인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 여러 과목의 강의보다도 오래 남을 가르침의 시간들이었다. 귀국 후, 주일이면 고민이 생겼다. 예배를 드리러 오늘은 어느 교회를 방문할지 고민이다. 목사로 섬기는 교회가 없으니 어디든 찾아가 회중 속에 섞여 예배해야 하는데, 마땅히 갈 만한 교회가 없다. 주변에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다. 군중 속에 앉아 있다가 떠날 때 붙잡히지 않을 커다란 교회들이 즐비하건만 마음 편하게 다음에 또 찾을 만한 교회가 없는 것이다. 기대를 안고 찾는 교회마다 실망하게 되고 주일이면 다른 교회를 찾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찾아오는 영혼의 뿌듯함이나 감격보다는 고민과 회의를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일에 찾은 굵직한 교단의 큰 교회들은 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찬양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순서가 단출한 예배를 하건, 교독문과 사도신경을 넣은 긴 순서의 예배를 하건 상관없이 생동감을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순서를 이끄는 사회자나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앞에 도열한 찬양팀, 또 말씀을 전하는 담임목사는 심각한 얼굴로 주어진 순서를 능숙하게 수행한다. 여기에, 대표기도를 맡은 분은 한참 시간을 들여 작성한 듯한 기도문을 들고 올라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회중석의 성도들은 이런 의식의 진행에 익숙해서 어느 부분에서 앉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움직이면서 동요 없이 예배의 흐름에 자신들을 맡기는 것 같다. 그러다가, 목사가 두 손을 올리고 엄숙하게 기도하는 의식이 끝나기 무섭게 주섬주섬 물건을 챙긴 후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자리를 뜬다. 좋게 말하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의식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계적으로 치르는 제사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제단을 쌓는다’는 표현을 쓴다.) 기계적이고 의례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주님이 예배의 주제와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보다 교회가 때로는 더 강조되고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다. 예배 중 교회의 다채로운 행사가 대형 스크린에 뜨고 화려한 미디어로 제작된 각 부서의 활동이나 앞으로 이루어질 프로그램에 대한 선전이 예배자의 마음에 적잖은 잔상을 남긴다. 한술 더 떠서 설교자가 앞서 광고한 내용을 부연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말씀을 전해야 할 시간에 설교자가 교회의 사업을 위해 재단한 선동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청중의 마음을 빼앗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물론 설교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명분도 잊지 않고 주입한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회중의 영혼에 역사해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님의 이름을 빌린 사업 설명회가 회중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것이다. 늘 찾던 교회가 코로나 시기에 한시적으로 문을 닫은 탓에 가족과 함께 한국의 이름난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화면 앞에 앉아 들은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은 중간에 끄고 싶은 내용이었다. 그분은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교육관을 지을 자금이 필요하다며 설교의 처음과 끝을 일관되게 헌금을 유도하는 내용으로 시간을 채웠다. 내용 중에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어떤 성도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말씀을 잘한다고 소문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청년인 아들이 도전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자리였는데, 기대와 달리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평소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을 가진 아들이 그분의 설교로 인해 불신의 마음을 더 갖는 데 일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이 좋은 환경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양질의 콘텐츠를 통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첨단 건물이 필요하고 마음을 써서 헌금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시간에 하면 틀린 말이 된다. 좋은 꼴인 주님의 말씀 대신 양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이면 교회를 뒤로하고 돌아가는 예배자들에게 자주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을 예배하고 왔는지, 예배를 통해 예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는지, 좋으신 그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지. 당신이 드린 찬양은 나를 잊고 주님만을 높여 드린 찬양이었는지. 아니면 나에게 몰입했던 찬양이었는지. 4‘참으로 예배하고 싶다.’ 예배학을 공부한 어떤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제목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어 한다. 예배의 자리에 가기를 기뻐하고, 예배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예배는 그분의 백성과 하나님이 만나 상호 교류하는 더없이 소중한 의식이다. 주님은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이고 사망에서 건져 주신 구원자이다. 그분은 예배를 통해 자기를 찾는 영혼들을 기뻐하시며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사람들에게 주님은 삶의 목적이고 의미이며 일관된 추구의 대상이다. 당연히, 마음을 다해 감사와 찬양으로 높여 드리고 싶어 한다. 예배는 이런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과 주님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이 교류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이 땅에서 예배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는 집회들은 그 의미에 부합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마음으로 예배자가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지…. 그렇지 않다면, 속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정형화된 형식을 되찾고, 모범적인 예배를 만들어 내자는 뜻은 아니다. 이미, 예배의 틀은 세대의 흐름과 함께 중요성을 상실했고 지금 와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예배의 정신이 있다. 혹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거나 경시했다면 원래의 모습을 찾아 위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예배자)는 절대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온전한 마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인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시고(로마서 1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그분을 추구하기 기대하신다(마가복음 12:30). 그렇기에 예배자는 최상의 심령을 가지고 와야 한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열망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권세가 많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늘 만나는 사람을 대면하러 가듯 성의 없이 예배의 자리로 향할 수는 없다. 예배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회자, 찬양팀, 기도자, 설교자 역시 예배자들이며, 그들도 예외 없이, 준비된 최상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고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심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모든 예배자가 흠 없는 완전한 상태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되, 오로지 주님을 향하는 열망과 그분의 은총을 기대하는 가난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배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모여 하나님을 높이는 배타적인 의식이 아니다. 그런 예배는 변화된 몸을 입은 성도들이 드릴 천상의 예배에서나 실현될 것이다. 지상의 예배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시간이다. 예배에 모인 성도 중에는 큰 죄를 범해 가책을 느끼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육체나 정신의 연약함으로 지친 성도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짐이나 복잡한 심령을 가졌든지 최상의 심령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동기로 참여해야 한다. 그럴 때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용서와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소원해졌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영혼이 힘을 얻고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육체와 정신의 치유를 얻는 놀라운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8). 사랑의 주님은 상하고 찢긴 마음이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녀들을 가엽게 여기시어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다음으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 예배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일꾼들의 인식과 역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참여자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모아지도록 최선으로 섬기는 한편, 각자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일하시도록 자신들을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중요한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가져야 할 인식과 마음의 자세를 늘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예배를 꾸미고 준비하는 일꾼들이 예배의 본질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질 필요가 있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누구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가? 초보 신자라도 답할 수 있는 쉬운 물음이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종종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예배의 대상에 사람이 혹은 교회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만족이 목표인 듯한 예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서비스하기보다 무언가를 얻으려 예배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서비스하려는 듯한 예배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님이 예배의 대상이며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비자가 된 듯한 참여자들을 만족시키고 교회에 계속 붙들어 놓기 위한 방편으로 예배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 중에 사람을 칭송하거나 교회 행사를 선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예배는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만을 높이고, 기뻐하며, 그분만이 전해지고, 성령님만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든 순서와 활동이 그 분께 모아져야 한다. 하여, 교회가 참여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예배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 이상 예배를 위한 콘텐츠 개발에 몰두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려한 콘서트 같은 예배를 통해 참석자들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주는 감동은 진정 영혼이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 세상의 잘된 공연에 취할 때 얻는 생명이 짧은 가벼운 감동 정도를 줄 뿐이다. 진정, 예배자가 주님을 경험하고 영혼의 빛을 얻는 것은 화려한 예배 음악이나 잘 짜인 순서 때문이 아니다. 기도할 때 크게 연주되는 반주나 설교의 말미에 은은하게 곁들이는 음악 효과에 달려있지 않다. 예배 과정 하나하나가 각자에게 의미로 다가오고 거기에 영혼이 실려질 때 성령에 의한 감동은 주어진다. 이는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지는 좋은 감정과 달리 잘 박힌 못과 같이 심령에 오래 살아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 것이다.그러므로, 인위적인 분위기 조성으로 예배자에게 감동을 주입하려 하기보다 오롯이 성령님께서 일하시게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 참여자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골몰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주님께 이끌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돕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5예배를 강조하지 않는 한국 교회는 없어 보인다. 교회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마다 크게 장식된 “살아 있는 예배” 혹은 “감동이 있는 예배” 등의 문구가 말해 준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예배를 찾고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교회들은 뭔가 그들만의 차별화된 예배 콘텐츠를 가진 것처럼 어필하고 있다. 바라기는, 예배를 자랑하고 최고의 예배를 추구한다는 교회들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분히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 행여라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사람을 위한 서비스는 아닐까 하는 우려가 쓸데없는 기우가 되기를 바란다.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이런 엄연한 관계를 잊은 채, 스스로의 만족과 감동을 얻기 위해 예배가 연출된다면 실로 무례한 불경이 아닐 수 없다. 예배자로서 가져야 할 합당한 마음가짐 위에 다채로운 내용이 실려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예배의 주인이심을 인식하면서, 소박하더라도 기쁨으로 찬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기도하며, 주님이 증거되는 생생한 능력의 말씀이 선포될 때, 진정한 예배는 드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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