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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와 초청의 예배, 그리고 음악
by 서나영
2024-02-05
우리는 각자 다른 음악에 감동한다. 그래서 ‘어떤 음악으로 예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예배를 준비하는 수뇌부가 거쳐야 하는 유격 훈련과도 같다. 예배학 저서에서 볼 수 있는 ‘예배 전쟁’(Worship War)이라는 용어는 현장에 나와 보니 과장이 아니었다. 때로 예배음악 수업 전에 임하는 나의 태도는 전장에 나가는 채비를 갖추곤 한다. 교회마다의 사정도 비슷하다. 담임목사와 음악목사의 갈등, 찬양팀과 장로님의 갈등, 지휘자와 예배팀의 갈등 등, 그들의 뒷 여담은 꽤나 흥미롭다. 이 전쟁은 예배를 준비하는 최전방 리더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휴전과 침공이 끝나지 않는다.마르틴 루터는 1544년 개신교 예배를 위해 최초로 지어진 교회의 봉헌 예배에서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우리는 응답하는 시간이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조지 플로로브스키도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했다. 후에 수많은 예배신학자들의 매혹적인 정의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정의를 어렵지 않게 읊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자세,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할렐루야로 ‘송축’하는 자세, 즉,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예배라는 사실에 대해 말이다.문제는 ‘참여’라는 단어는 그 본래 의미를 한없이 축소가능한 단어라는 것이다. 나는 강의 현장에서 실제로 수업 내용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출석을 놓치지 않는 학생들을 줄곧 봐왔다. 수업에 관심이 없지만 출석으로 학점을 따고 졸업에 문제가 없게 하겠다는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은 수업에 참여하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참여한 것이 아니다. 수업을 주도하는 교수자는 이런 종류의 인격모독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한다.이와 마찬가지로 주일 예배시간에 참여는 하지만, 몸만 와서 앉아 자신의 죄를 가리는 은신처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 도피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는데,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배 장소를 “도적의 굴혈”로 만든 파렴치한 삶의 유다 백성의 예배(렘 7:22)는 하나님을 비인격적 존재로 치부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그들은 평일에는 강탈을 일삼다가 일말의 양심을 털어낼 때와 장소로 안식일과 성전을 택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범행을 피해 은신의 방법이 더 세밀해지고 다양해진 듯하다. 개신교에서 알맞다고 정해 놓은 예배 순서와 형식에 맞춰 예배를 선포하고, 대표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헌금을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축도까지의 시간을 마치면 복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는 믿음과 함께 예배당에 앉아 있다. 마치 출석의 의무를 끝내 안도하는 학생들처럼, 어딘가에서 보고 계실 하나님 앞에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익한 말씀, 개인의 입맛에 맞는 음악, 눈을 즐겁게 하고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적당한 조명이면 좋은 예배였다고 말한다. 설교자의 신박한 성경해석으로 인해 몰랐던 것을 깨닫거나 삶과 일에 적용할 유용한 통찰력을 얻으면 은혜로운 설교였다고 고백한다. 긴장한 마음이 풀어지고 위로를 얻었으면 성령충만한 예배였다고 확신한다. 물론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인지 여부는 인간이 감히 논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체자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될 때 일어나는 일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해야 한다. 이 일은 너무도 교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남은 물론 자기 자신도 깨어 있지 않으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체가 된다 해도 하나님을 위한 자리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좌에 앉는 것이 자신이 될 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찬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묘한 뒤바뀜의 결과는 끔찍하다. 아무리 하나님을 의식하는 점유율이 높아도 보좌의 주인이 자신인 이상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함이 아니다. 이것은 냉철한 진실이다.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이 가장 중요해진 오늘, 사회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전문인들을 고용한다. 세상에서 원하는 인재는 자신의 전문분야 안에서 일어나는 예외사항과 오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슬픈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통제권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는 현상이다. 내 감정을 위로하는 찬양에는 은혜 받았다고 매일 듣지만, 내 행동을 교정하려는 오래된 신앙교육적 찬송가 가사에는 음악과 가사가 촌스럽다며 부르질 않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를 부르는 것은 원시 그리스도인이 부르던 찬송 문헌으로 남겨지기 직전이다.예배의 임무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예배의 음악에 있어 통제권을 갖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예배음악을 논하고 싶은 자들은 평생에 단 한 번의 예배도 느슨한 선택을 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으로 임해야 한다. 예배에 사용되어야 하는 음악에 대해 수없이 많은 질문을 들어왔다. (대개 질문자들은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시험하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예배학 책을 수십 권을 읽어도 음악 스타일에 대한 구체적 기준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 지문만큼 각기 다 다른 미학을 지닌 곡들에 어떤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단언컨데, 성경에 나온 찬양 용어와 내용을 다 파악하고 외운다 해서 좋은 예배음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교와 좋은 교회음악 대학원을 졸업한다 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음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성경 전체를 밤낮으로 즐겨 읽으며 묵상하고, 매일 기도하며, 예수님의 방식대로 선택하고자 주님께 자문을 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평생에 걸친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온전한 예배자로 서겠다는 갈망함이다.온전한 예배자는 두 단어를 목에 걸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첫 번째는 ‘초청’이라는 단어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최근 한 젊은 과학도가 주일 회중예배에 대한 자신의 의구심에 대해 말했다. 안식일이 아닌 일요일에 다 같이 모여 회중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어디서든 명확하게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예배신학의 인용과 설명은 모두 회중예배의 필요성과 유익성을 설명해 주시만,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당위성을 찾을 수 없다고 말이다. 회중예배 순서 속에 만들어진 형식의 강요가 올바른 것인가라는 의문도 뒤따랐다.논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교회예배의 모든 것이 설명 불분명하다고 교회와 예배를 떠나는 일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별히 코로나 이후 방구석 온라인 예배를 맛본 사람들은, ‘사실은 예배의식이 그저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발적인 참여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심정,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초청에 응하여 참여하는 인격적인 관계에 행복해하시는, 그 파격적인 선물에 관해서 말이다. 예배에 관해서도, 예술에 관해서도,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진리들에 관해서도 명확하게 선을 긋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랑의 신비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청하는 자유로운 초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과 참여를 뼈저리게 기다리고 계시지만 우리를 로보트처럼 취급할 생각은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식을 만날 날만 기다리지만 자식을 사랑해서 강제로 앉혀다 놓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 때문이다. 나는 열두살 난 딸에게 때때로 시를 쓰도록 지도하지만, 한번도 시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유로운 상상력에 방해를 받으면 진짜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로의 초청과도 같다. 구약의 까다로운 제사법이 종료되고 예수님이 명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로 바뀌며, 긴 시간동안 선조들은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예배의 방법이 맞지 않으면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나라가 갈라지기도 했다. 우리는 신약에 듬성듬성 나오는 성찬과 기도와 찬송, 말씀, 구제(헌금) 등의 예전적 요소를 추적할 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확한 예배의 설명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말하기 위해 침묵하신 것일 수도 있다. 예배는 강제로 행해지는 의식이 아니라 초청에 참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온전한 예배자가 품어야 할 단어는 “참여”다. 초청자에게 화답할 때 예배자가 된다. 찬양은 주님을 경외하고 감사하고 감탄한다는 참여의 가장 확실한 표식이다. 성찬이 절기 의식으로 남은 오늘날, 예배 속에서 찬양 외에 우리의 감탄과 감사와 경외함을 소리칠 수 있는 예배 순서가 또 있는가? 그러므로 예배음악이 어떠해야 한다는 안전한 기준은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음악이어야 할 것이다. 밴드음악이든, 클래식이든, 어떤 악기를 사용하든, 어떤 발성법으로 인도하든, 음악은 온 회중을 태워 움직일 수 있는 대형 에스칼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회중이 응답할 마땅한 내용으로, 회중이 부를 수 있는 음역대와 박자와 소리로 울려야 할 것이다. 감각의 폭발을 유도하는 행위가 주된 목적이었던 바알의 제사(왕상 18:26-29)가 되지 않게 늘 주의하고, 음악의 기쁨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응답하며 그 관계 속에 참여할 수 있는 집중력이 필요하다.예배는 하나님의 세계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가 흘러 넘치게 받은 힘과 능력과 기쁨의 잔으로 우리의 나머지 삶을 적시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에 일터과 가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 가운데 사소한 언어 한마디까지도 그 거룩함 속에 잠기는 것이 예배다. 예배는 우리의 종착지인 새 땅과 새 하늘과 새 도시의 건물에서 새 삶을 살며 부를 희락의 노래를 연습을 하는 시간이다(계 21:1-4).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주인의 보좌에 앉지 말자.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그 초청이라는 사랑의 선물을 누리고,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참여하자. Soli Deo gloria!
C. S. 루이스를 얌전하게 길들인 이상한 영화
by Brett McCracken
2024-01-16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는 20세기 지적 거물이었고, 그들이 무신론과 기독교 변증분야에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 종교, 성,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생각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두 사람의 토론을 엿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가정이 워낙 설득력이 있어서인지, 300페이지 책, 4시간짜리 PBS 시리즈, 연극, 그리고 현재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나는 아만드 니콜리가 쓴 The Question of God을 읽었고, 몇 년 전에 그 책에서 영감을 받은 연극을 본 적도 있다. 나는 책과 연극 모두를 즐겼기 때문에 탁월한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을, 그리고 매튜 구드(더 크라운, 다운튼 애비)가 루이스 역을 맡은 영화의 각색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그러나 안타깝게도, Freud’s Last Session(맷 브라운 감독, 12월 22일 개봉)은 과거에 나온 다른 형태의 가상 대화를 다룬 작품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고, 루이스 팬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홉킨스가 때때로 흥미롭게 또 대체로 좋은 연기를 펼치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 루이스식보다는 프로이트식을 강조한 실존적 만가이다.표면적으로만 봐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큰 폭발성을 가진 두 가지 전혀 다른 전망을 다루는 영화의 경우, 강렬함과 더불어서 최소한 루이스가 만든 토론 모임인 잉클링(Inklings)에서 있었을 법한 수사적 정력과 활력이 스며나와야만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프로이트 생애의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이상하기만 한 꿈 장면, 루이스가 무어 부인과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식의 암시, 그리고 안나 프로이트(Liv Lisa Fries가 연기)에 대한 과장된 레즈비언 서브플롯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영화는 우뚝 솟은 지성인들 사이의 치열한 지적 전투의 생생한 불꽃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채, 도리어 기이하고 차가운 톤만을 뿜고 있다. 가상 회의니콜리의 책보다는 연극에서 더 많은 내용을 끌어낸 이 영화 (PG-13 등급)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었을 1939년 회의를 상상하지만, 아마도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흔 살의 루이스는 여든세 살이 된 프로이트가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휘감은 끔찍한 나치즘을 피해서 살고 있던 런던의 집으로 찾아간다. 죽기 불과 몇 주 전, 병든 프로이트가 루이스를 맞이한다. 옥스퍼드 수사인 루이스는 순례자의 귀향의 저자이자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악명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프로이드는 그런 루이스와 대화를 하고 싶은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공습 사이렌과 독일에 대한 영국의 전쟁 선포 등으로 강조되지만, 영화 대부분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관이 중간중간 충돌하면서 이어지는, 들쭉날쭉한 대화로 채워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주는 장점이라면 관심 있는 시청자로 하여금 니콜리의 훌륭한 책을 보고 싶도록 자극하는 에퍼타이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책을 통해서 시청자는 진정 풍부한 메인 코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서 독자는 루이스와 프로이트가 가진 차이점의 범위와 규모 및 본질을 영화 스크린 보다 훨씬 더 큰 화면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영화에 흥미로운 순간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나는 기쁨과 갈망에 관한 부분을 즐겼다. 루이스와 프로이드는 갈망(Sehnsucht)에 생각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결코 충족되지 않는, 찬성과 반대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욕망을 서로 비교했다. 나는 프로이트가 가진 커다란 불일치와 모순을 표현한 영화의 전개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던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의 슬픈 아이러니는 내가 믿음과 예배에 집착하는 열정적인 불신자라는 사실이야.” 물론, 프로이트의 이런 논평이 루이스에게는 친숙하게만 들렸을 것이다. 루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같은 무신론자였을 때 느꼈던 “모순의 소용돌이”를 회상한다.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했습니다.” 프로이트가 느낀 다른 불일치와 함께, 영화 속 루이스가 이런 식의 대화를 좀 더 보여주었더라면 하고 아쉬었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에 보고 내가 좌절감을 느낀 이유이다. 프로이트와 루이스 사이의 말다툼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다뤄진다. 악의 문제에 대해 몇 분 그리고 성경이 왜 신화가 아닌지에 대한 잠깐 언급하는 등등. 더욱이, 거의 모든 대화에서 비대칭적 역동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나이가 많은 프로이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반면, 젊은 루이스는 겁에 질려 있다. 프로이드의 의견에 반박하기보다는 경의를 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진짜 루이스는 자신과 반대되는 세계관을 만나는 경우에 정중하게 맞서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실제 대화가 결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프로이트가 유명하고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해도, 루이스가 그 앞에서 주저했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다. 성적 도덕에 관해 탐구되지 않은 차이점일례로, 영화에서 두 남자가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는 영화 전체를 다 차지해도 될 정도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주제이다. 동성애 문제를 제기한 프로이트는 그것이 조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루이스는 설득력 있는 반론을 거의 내놓지 않는다. 그는 단지 “어떤 상황에서도 섹스가 완벽하게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물론 틀린 지적이 아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어서 구약과 신약 전체 흐르는 성경의 성적 규범은, “섹스는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이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과 거의 모순되지 않으며, 만약에 루이스가 지금 살고 있다면, 이 말은 그를 헌신적인 동성 결합을 “확언”한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영화가 섹스처럼 극명한 차이와 거기에 따른 논쟁이라는 좁은 주제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면 훨씬 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니콜리의 책에는 섹스, 쾌락, 그리고 사랑에 대한 루이스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설명하는 두 장(6장과 7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제대로 된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루이스가 욕망 및 성적 활동과 관련된 억압과 억제의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모든 사랑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경향을 가진 프로이트와 달리 다양한 유형의 사랑(스토르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 사이의 미묘한 구별을 강조하는 루이스를 만나고 싶었다. 그랬다면, 루이스와 같은 정통 그리스도인과 프로이트와 같은 유물론자 사이의 성적 도덕성에 대한 확장되고 실질적인 논쟁이 지금처럼 더 시의적절하고 더 설득력을 발휘했을 때도 없었을 테니까. 정복된 루이스 일반적으로 이 영화에서 만나는 루이스는 나니아의 작가로 그를 알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의 편지, 책, 시, 전시 BBC 강연 등에 등장하는 “잭”은 구드가 연기한 것보다 훨씬 더 기발하고 재치 있으며, 확신 뿐 아니라 기쁨에 가득한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구드는 훌륭한 배우지만, 루이스 역을 맡은 그의 연기가 비참할 정도로 차분하다. 그게 내가 영화관을 떠나면서 느낀 감정이다. 그가 진짜 루이스의 통찰력(루이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거나 조금 바꾼 경우에)을 대사로 전달할 때조차도, 그 모든 게 억제된 확신과 거의 숨죽임에 가까운 당혹감으로 표현될 뿐이다. 프로이트가 어떻게 세상의 엄청난 고통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있느냐며 소리칠 때, 루이스는 “쾌락이 하나님의 속삭임이라면 고통은 그의 메가폰입니다”라고 말한다(고통의 문제에서 의역). 루이스는 계속해서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드가 연기하는 루이스는 루이스 자신조차도 자기가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홉킨스가 연기한 프로이트도 중간중간 이 프로이트가 정말로 자기가 하는 말을 믿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순간이 있다. 물론 루이스보다는 프로이트가 항상 더 과장되게 말을 한다. 비록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할에 푹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1993년 섀도우랜드에서 그가 보여준 루이스의 연기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그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든 루이스와 프로이트 역할을 둘 다 연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상호 배타적인 세계관맷 브라운 감독의 요점 중 하나는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주장이 각자의 견해에 관계없이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며,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 절충하면 완전한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브라운은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문화적 양극화 시대에서 이 영화가 차이점을 뛰어넘는 대화의 모델이 되기를 원한다고 언급했다.대화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자 하는 어느 정도의 존경심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누구에게나 다 나름의 제공할 것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 나는 과학과 종교를 믿으며, 그것을 영성이라 부르든, 하나님이라 부르든, 당신이 원하는 무슨 이름이라도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대상이 적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영화의 마지막 순간은 한쪽이 옳고 한쪽이 틀리기보다는 ‘대화’에 대한 강조이다. 옥스포드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루이스는 프로이트가 준 선물을 펼친다. 그건 루이스가 쓴 책, ‘순례자의 귀향’이다. 그리고 책 안에는 비엔나 의사가 직접 쓴 인용문이 적혀 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럼으로 사람은 진실의 실체를 발견한다.” 물론 이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오류가 다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다.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세계관은 정반대이며 상호 배타적이다. 결코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루이스와 프로이트 사이의 대화는 선의의 토론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지 철학적 단결을 표시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쪽의 사고를 더 깊이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봐야할 지 고민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원제: ‘Freud’s Last Session’ Tames C. S. Lew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샬롬! 아름다운 도시여
by 서나영
2024-01-11
나는 매일 아침 도시 안 오래된 아파트숲 속 좁은 공간에서 눈을 뜬다. 이 도시는 한민족이 역사를 지나며 일군 ‘한강의 기적’을 자랑하는 땅이자, 기술 산업의 눈부신 발전과 문화강국의 주역을 이룬 공간이다.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인터넷 속도로 손가락 터치 한 번에 음식과 생필품이 배달되고, 식료품은 신선함을 위해 새벽 배송을 고집하는 편리한 도시다. 저명한 미국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의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이 세계가 낳은 가장 중요한 불행과 불의 세 가지 중에 “추한 도시”를 언급했다. 그는 공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세대에 탄식하며 “도시의 미학”에 무관심한 세대를 불행한 세대로 보았다. 물리적 실재, 즉 이 땅과 자연과 우리의 실재 공간 속에 내재한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는 것인데, 온전한 샬롬을 위해서는 “기쁨과 희락”의 요소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쁨”은 감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데, 그 감각은 오늘날 모던한 세련미나 최첨단 기술로부터 느껴지는 편리한 느낌이 아닌, 칼뱅이 말했던 절제된 우아함이 있던 인간 생활 방식과 장소의 아름다움이라고 독자들을 설득한다.그러나 과연 이 시대는 말과 마차가 다니던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을 그리워하는 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말의 배설물이 풍기는 냄새와 여러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대단했다고, 강철과 유리로 지어진 현대 건축술과 자동차 중심의 도시 건설로 인해 도시가 한껏 추해졌다고 확신하는 위대한 철학자의 미학관에 대해 말이다.현재 몸담고 있는 도시의 추함에 대해 묵상하자면 끝이 없이 써내려갈 수 있다. 홍수 때마다 사상자가 나오는 반지하의 가난한 삶들, 배달의 민족이라는 훈장 뒤에 하루가 멀다하고 듣는 배달기사들의 불의한 사고들,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가족이 생을 마감하는 뉴스들, 믿지 못할 청년 실업률 및 자살률, 그로 인한 미혼율과 저출산 문제, 세계 최고를 찍은 노인 불행 지수와 자살률 등등, 이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도시의 아픈 자식들이다.고도로 발달된 이 도시에서 이런 추함의 현상을 미학과 연결해 본다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살게 하는 형식과 관련 있을 것이다. 도시가 가진 형식과 인간의 삶은 직결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남긴 말을 재해석하자면, 도시의 미학이 중요한 이유는 거주민들이 잘 살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생활방식을 표현하는 방식을 넘어, 생활방식을 이끌고 가며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월터스토프가 말한 “도시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지각할 수 있는 재료에 심겨진 가치”이며 하나의 예술적 건축물처럼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도시의 샬롬을 미학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어떤 기준의 미학관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샬롬을 ‘기쁘고 행복하며 질서정연함 속에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이해할 때, 내가 밟고 있는 공간의 미학을 어떻게 기준할 것인가? 그 기준을 탁월한 예술과 일치되는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둘 것인가? 이미 많은 도시가 심미적 즐거움을 위해 설치예술을 통해 환경예술, 대지예술 등등의 새로운 용어가 생긴 지 오래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추함으로 인해 도시의 아름다움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계몽주의 이전 시대, 즉 기계화 되기 전의 자연과 친밀하고 자동차가 아닌 인간 중심으로 설계된 좁은 도로에서 볼 수 있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둘 것인가? 성경 속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려 입성하신 예루살렘은 기술의 발전을 찾아볼 수 없는 말과 나귀가 다니는 자연과 친밀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도시를 보시자 마자 통탄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재가 도시의 불행임을 암시하신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도시가 눈에 들어오자, 예수께서 그 도시를 보고 우셨다. “네게 유익한 모든 것을 오는 네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앞으로 네 원수들이 포병대를 몰고 와서 너를 포위하고 사방에서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들이 너와 네 아이들을 바닥에 메어칠 것이다. 돌 하나도 그대로 남지 않을 것이다. 이 모두가, 너를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을 네가 알아보지도 않고 맞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눅 19:41-44).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도시와 연관된 공간미학의 고민은 정확히 성경적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목적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도시 속에서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운명은 에덴동산과 같이 대자연과의 화합과 일치를 고집하는 무릉도원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꿈꾸게 되는 “새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삶이다(계 3:12, 21:10). 이는 타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완전하고 새로운 기쁨의 도시에 사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새예루살렘 도시는 그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을” 뿐 아니라 벽옥으로 된 성곽으로 둘러싸였고, 정금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에서 새 몸을 가지고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그의 백성으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요한계시록 21장). 성경은 주의 백성이 마침내 아름다움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원래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으로 진짜 삶을 살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그곳이 ‘샬롬의 도시 그 자체’일 수 있는 이유는 보석과 정금 때문이 아니다. 인격적 생활방식 때문만도 아니다. 샬롬의 진짜 이유는 보좌에 앉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의 왕 되시고 그의 백성과 친히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복할 뿐 아니라 찬양하고 감탄하며 경외하는 삶의 연속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의 역작 센터처치에서 강조하는 ‘도시 사역’에 관한 설명은, 철저하게 도시의 샬롬을 이루는 사역적 비전을 세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 샬롬의 기준은 ‘복음’이며, 이 ‘복음’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부터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는 능력의 이름이며, 모든 추함을 구원할 유일한 이름이다. 모든 문화와 언어의 상상력으로 끊임없이 재발견 되어야 하는 이름이며, 끝도 없이 아름답고 정확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이름이다.신이 없이도 잘살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인 도시에서, 하나님을 뺀 온갖 인본주의적 선과 정의를 부르짖는 도시에서, 인간을 이용하고 등급을 매겨 비인격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세련됨이라고 착각하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추함을 예언한 학자들의 미학관을 답습하고 다음세대에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도시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회피하고 숨어서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만 하는가?나의 경우에는,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도무지 칼뱅의 주장대로 평생 시편가만을 부르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시편가는 음악 안의 클라이막스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고 그로 인한 감정의 고양을 방지한 밋밋한 선율 위에 부르는 다윗의 시편이다. 칼뱅이 그렇게 경계하고 금지했던 수많은 신앙고백의 찬송과 아름다운 음악들이 귀에 즐겁고 마음에 감동을 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어도 나는 이미 칼뱅의 예배음악관에 동의할 수 있는 정서를 갖기엔 글렀다. 그렇지만 칼뱅이 삶으로 말했던 미학관 이면의 진지하고 엄격했던 자세는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마음을 다해 배우고 싶다. 편리함이라는 우상, 화려함과 인기를 갈망하는 우상, 많음과 큰 것에 최고가치를 두는 온갖 우상으로부터 미혹되고 싶지 않다. 날아가는 새를 포착해 정교하게 그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말씀 안에 진지했던 그 미학관으로 세상을 포착해 정확하게 분별해서 읽고 싶다. 그것이 팀켈러 목사가 말한 ‘문화적 상황화’의 이상이자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최근 신도시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지인을 만나 나눈 대화 중 중요했던 주제는 다름아닌 “교회의 주차장 크기”였다. 한 대형교회가 그 신도시에 지교회를 세우며 범접할 수 없는 크기의 편리한 주차장을 건설했고, 많은 사람들이 단시간에 몰려 수적으로 부흥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흥의 이유가 단지 최고시설의 주차장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실제로 교회를 정할 때 주차장의 편리함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는 소문이 실재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율법 속 제사를 폐하시고 “영과 진리로”(요 4:23) 예배하라고 새롭게 명하셨지만, 한번도 편리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적이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도시가 주는 형식 안에서 그저 도시가 추구하는 기준대로 살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심각성은 크다. 오늘의 도시가 섬기는 신은 힘과 권력이고, 돈과 개인의 이기적 안위이며, 화려함과 인기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말한, 땅에서 올라온 미혹하게 하는 짐승(계 13:11)과 같이 새끼양처럼 두 뿔을 가져 어린양 그리스도와 비슷한 선한 차림을 한 ‘거짓의 영’일 것이다. 미혹 당하는 자는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잘살아 보자는 도시의 슬로건에서, ‘오직 예수’라고 외치면 무식하고도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아름다운 도시에 대한 꿈을 꿔야 한다. 도시에 기쁨과 샬롬이 임하는 비전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각자의 도시에서 그렇게 살도록 연습해야 한다. 절대적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도시 속에서 그 기준을 고집하는 것이 힘들어도 반드시 최우선으로 바꿔야 하며, 매일매일 흐트러져도 그 아름다움의 기준을 재정렬해야 한다.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불행이며 빈곤일 수밖에 없다”는 월터스토프의 말은 교회가 꼭 기억해야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각자 밟고 서 있는 도시 속 한 평이라도 변혁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방향은, 단지 평화와 공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왕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미리 닦고 예비하며 보수하는 일이다. 복음의 길을 닦는 일이다. ‘복음의 도시’를 이룩할 그날까지, 용기 내며 걷는 작은 한 걸음의 2024년이 되기를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당신 안에서 책이 나오고 싶다고 꿈틀거리지 않는가?
by Trevin Wax
2024-01-03
나는 적지 않은 야심만만한 작가들로부터 자신 안에서 책이 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대체로 그건 한 장(chapter) 정도이다. 그게 아니면 블로그에 올릴 정도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책을 써야 한다고 말할 때도 있다. 누군가가 괜찮은 집필 아이디어를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게 당신일 수도 있다. 글쓰기 아이디어 또는 실제 글쓰기에는 뭔가 매력적인 면이 있다. 내 속에 과연 책을 낼 정도로 통찰력 있는 내용이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글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주제로 여러 번 대화를 가졌다. 작가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때로는 출판사 모자를, 또 때로는 작가의 모자를 쓴다. 상황에 따라서 양쪽에 다 참여하기도 하고 또 둘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는 데에 무슨 과정이 필요한지를 알려준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디어가 책으로 가능할지, 아니면 좋은 칼럼이나 에세이, 블로그 게시물로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돕는다. 쓰기는 읽기에서 시작한다책을 쓰고 출판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시작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세상은 훌륭한 제안서를 작성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좋은 제안서는 다른 책을 읽는 데에서 시작한다.글쓰기는 읽기에서 시작한다.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의 말이다. “작가의 시간 중 가장 많은 부분은 글을 쓰기 위해 읽는 데 소비된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서 작가라면 도서관의 절반을 뒤집을 것이다.”관심 있는 주제를 충분히 읽고 나면, 책의 개요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안서에 그 내용이 정확하게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책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충분한 콘텐츠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많은 경우에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제안서를 만드는 단계에서 사라진다. 어느 지점에선가 아직 내가 책을 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제안서를 작성하면서 쌓은 경험과 역량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계속 읽고 계속 고민하라. 플랫폼 질문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책을 쓰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쓰고 싶어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는 사람, 그러니까 전작이 없는 초보 작가의 책을 집어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특히 요즘 들어서 작가들은 대체로 출판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플랫폼 구축이나 신뢰도 구축 등의 노력을 거쳐야 한다. 좋든 싫든 출판사는 수요가 많은 주제를 다루는 플랫폼을 찾기 마련이다. 이것은 초보 작가에게는 가장 낙담스러운 측면일 수 있지만, 글쓰기의 리듬을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좋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글쓰기 습관을 들이는 데에 도움을 주는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에 작품을 게시하기 시작하면서 소규모 청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작가와 연결을 맺거나 다른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당신의 동기가 단지 출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여야 한다. 시작하라: 계속하라열망에 찬 작가 지망생들과 대화할 때, 나는 그들의 글쓰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무슨 주제를 파고 드는지 알고 싶다. 그들 속에 과연 좋은 책을 낼 아이디어가 있는지 아니면 최소한 기사거리라도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돕고 싶다. 나는 또한 책을 쓰는 데에 필요한 체력도 알려주고 싶다. 작가 지망생이 내게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시작하는 방법이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간단한 생각을 게시하는 방법에 대해 물으면, 나는 다음과 같은 조언으로 대답한다. 시작하기 전 첫 달을 계획하라. 일주일에 세 번 글을 쓰고 싶다면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라. 블로그의 경우 매주 2-3편의 글을 써서 첫 달에 9-12편의 게시물을 만든다. 웹사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게시물을 작성하고 일단 초안을 준비해 놓으라. 다른 사이트의 경우 장기적으로 하고 쓰고 싶은 주제와 관련해서 최소한 15-20편의 글을 준비하라. 그러나 실제로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사람의 수는 한 손에 꼽힐 정도이다. 대부분은 첫 달에 10-12편이 아니라 괜찮은 글 두어 편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싣는 정도이다. 종종 작가들은 큰 프로젝트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블로그를 작성하고 싶어 한다. 아니면 심지어 몇 달 안에 책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1-2 마일 달리기를 시도하기도 전에 마라톤을 뛰겠다는 목표를 세운 초보 주자들처럼 일을 시작한다. 글쓰기도 똑같다. 뛰기 전에 먼저 걸어야 한다. 잘 쓰려면 먼저 못 쓴 글이 쌓여야 한다. 그리고 많이 써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글쓰기의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현실을 직시하자. 대부분의 경우에 글쓰기는 힘든 일이다. 게시물에 별 다른 반응이 없으면 낙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하라.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요점은 청중의 반응이 아니라 훈련 내지 규율이라는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작가로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어떤 습관을 들이는가이다. 요점은 입소문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잘못된 글도 그럴 수 있음), 기술을 키우는 것이다. 이는 마라톤 뛰는 것과 같다. 여러 개의 작은 목표를 먼저 달성하지 않고는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더 많이 연습하고 더 나은 기술을 향상시켜야 한다. 노력할수록 더 나은 작가가 될 것이다. 배움을 활용하라아무도 당신에게 글쓰기 속도를 지정할 수는 없다. 글을 빨리 쓰는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항상 더 나은 사람을 찾아서 비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글쓰기 빈도 또는 길이에서 동일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규격화하지 말라. 어떤 작가는 알렉산더 해밀턴(“왜 항상 시간이 부족한 것처럼 글을 쓰는가?”)과 같은 반면, 또 다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작해야 한두 가지를 기여하는 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꾸준히 글을 씀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작가가 되기를 갈망하는가? 내 충고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관심 갖고 있는 주제에 관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읽으라. (2) 당신의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도 자주 쓰라. (3) 각 장의 개요와 요약, 같은 분야의 다른 책에 대한 소개를 포함하여 완전한 제안서를 만들라. 당신이 발견한 내용이 당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한번 지켜보라. 계속해서 기술을 연마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글쓰기는 학습이다. 멈추면 안 된다. 원제: Is There a Book in You?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화 Past Lives: 가벼운 로맨스 세상에서 발견하는...
by Brett McCracken
2023-12-21
셀린 송의 Past Lives는 미묘하고 아름다우며 탁월한 영화로 올해 최고작 중 하나이다. 이 영화는 반대가 종종 권장되거나 적어도 반대하는 모습이 더 “진정성이 있다”라고 단정하는 세상에서 도덕적 자제와 자기 부인, 헌신의 고수라는 가치를 일깨우는 상쾌함을 준다. 이 영화는 오랫동안 로맨틱 서사를 지배해 온 예측 가능한 대본(“당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따라가라”)을 180도 뒤집는, 매우 할리우드답지 않은 러브스토리이다. 이십사 년에 걸친 세 번의 연결영화는 어린 시절을 서울에서 보냈지만 열두 살 때 가족과 함께 북미로 이주한 여성 노라(그레타 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 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노라의 생애 중 세 시기를 다룬다. 첫 번째는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다. 노라(당시에는 나영)는 같은 반 남학생 해성과 절친한 사이로, 두 사람은 로맨스의 정점에 다다른 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로맨스가 결실하기는 힘들어 보이는데, 노라의 가족이 한국을 떠나고 이 두 사람은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이 장면은 프레임 오른쪽 상단에서 한 세트의 계단을 올라가는 노라와 프레임 왼쪽 하단에서 골목길의 다른 계단으로 내려가는 해성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려졌다.)십이 년이 흘렀고, 노라는 이제 뉴욕에 사는 이십 대의 극작가 지망생이 되었다. 한국에서 사는 해성(성인 역할은 유태오가 연기)은 최근에 군 복무를 마쳤다. 두 사람은 페이스북과 스카이프를 통해 재회하고 장거리 로맨스가 꽃피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화상 통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연결(이건 결국 2011년경의 인터넷 기술과도 관련이 있다)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먼 거리도 피할 수 없었다. 미국에서 꿈꾸는 미래에 “올인”하고 싶었던 노라는 온라인 관계를 청산한다. (해성과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노라는 자꾸 한국에서의 과거에 집중하는 거 같아서 불편해 한다.) 두 사람은 또다시 각자의 길을 걷는다. 다시 십이 년이 흘렀고, 노라는 이제 아서(존 마가로)라는 유대인 작가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한편 여전히 서울에서 살던 해성이 처음으로 뉴욕을 방문하고, 이십사 년 만에 노라를 직접 만나자,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잊혔던 감정이 되살아난다. 이 시점에서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라면 영화는 자연스럽게 삼각관계 플롯으로 바뀌기 마련이며, 노라는 결혼한 미국 남자와 그녀의 “소울메이트”가 될 수도 있는 한국 남자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전형적인 할리우드 로맨스가 아니다. ‘이게 내 삶이야’(스포일러 주의) Past Lives를 보면서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 (1995년 비포 선라이즈, 2004년 비포 선셋, 2013년 비포 미드나잇)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삶이 대략 십 년 간격으로 서로 다른 세 가지 삶의 지점에서 해성과 노라를 만나는 것처럼, 링클레이터의 비포 영화도 대략 십 년 간격으로 세 가지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을 관찰한다.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과 셀린 송의 Past Lives는 둘 다 별(star)이 교차하는 로맨스[결코 맺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로맨스를 의미_번역 주]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그럼에도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운명”이 가능하도록 한 것만 같다. 그러나 비포에서는 주인공이 “소울 메이트”(심지어 그 과정에서 이혼까지 감행하더라도)의 자석 같은 매력에 빠지지만, Past Lives는 “소울 메이트”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장을 던진다. 해성이 뉴욕을 방문하고, 노라는 불안감을 느끼는 남편 아서를 안심시킨다. “이게 내 삶이야. 내가 같이 사는 사람은 당신이야.” 그리고 그녀는 덧붙인다. “바로 여기가,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해성을 향한 노라의 복잡한 감정이 진심일지라도, 또 ‘만약에 해성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면?’ 등의 물음이 그녀의 마음을 스쳤다고 해도, 그것은 추상적이고 소용돌이치는 감정일 뿐 “이게 내 삶이야…. 바로 여기가,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다. 그녀는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인생이 주는 “만약에…”라는 낭만보다 현재의 삶과 약속이라는 현실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에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마냥 낭만적이며 모든 게 가능한 세상이 아니다. 바로 그녀가 사는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주도하는 정신은 그 반대를 외친다. 모든 선택의 여지를 열어 두고 또 모든 가능성을 즐기라고 한다. 약속은 언제라도 지울 수 있는 연필로 쓰지 결코 잉크로 쓰지 않는다. 놀랍게도 노라의 여정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저항한다. 관객이 이십사 년 전 그녀의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 “뒤에 무언가를 남겨두면 얻는 것도 있다”라는 지혜에 노라가 귀를 기울인 게 분명하다. 한국에서 살았던 노라의 ‘지나간 삶’은 실제였고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러나 뒤에 남긴 상실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녀는 지금 손에 쥔 현실이라는 ‘얻음’에 감사하기로 선택한다. 어떤 면에서, 이런 식의 과거와 현재의 긴장은 친숙한 위안과 매력을 지닌 우리의 “옛 자아”와 비록 원하지만, 종종 거슬리고 불편하며 생소하기까지 한 성령 안에 있는 “새 자아”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익숙한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거 같다. 영화는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사는 삶이 가질 수밖에 없는 후회와 고통, 향수라는 진짜 감정을 결코 축소하지 않는다. 노라는 해성이 자신의 삶에서 가진 과거의 의미, 현재의 가치 그리고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꿈을 가지고 씨름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 영화를 뛰어난 작품으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복잡한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주인공은 단지 달콤한 로맨스를 위해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감정을 성숙한 지혜에 복종시킨다. Past Lives는 때때로 가장 스릴 있고 낭만적인 선택이 가장 “지루한” 일이 될 수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바로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헌신하라. 그리고 신실하라. ‘인연’ 그리고 인도함을 갈망함 Past Lives는 사랑과 로맨스 이야기인 동시에 떠남과 다른 문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민이 가진 “중간” 성격에 대한 반자서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민자는 동시에 두 문화와 연결되고 두 문화로부터 함께 형성되는 느낌을 받는다. 노라에게 있어 해성과 아서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은 한국 출신과 미국이라는 미래 사이의 긴장과 유사하다. 이야기 속의 두 남자가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두 개의 “집” 사이에서 느끼는 긴장을 강조한다. 인연(영어에는 딱 맞는 단어가 없다)이라는 한국어 개념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노라가 아서에게 설명하듯이 인연은 환생을 수반하는 불교적 개념으로 사람 사이의 운명적인 만남과 운명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낯선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옷이 스치는 것도 인연이야. 왜냐하면 전생에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이거든. 두 사람이 결혼하는 건 팔천 생애 동안 팔천 겹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래.”영화 제목은 환생과 인연이 만들어 냈을 수많은 ‘지나간 삶’에 대한 생각을 상기시키며,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 노라, 해성, 그리고 아서 사이의 연결을 알리는 지점까지 울려 퍼진다. 노라와 해성이 브루클린의 회전목마 앞에 앉아 있는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회전목마의 돌고 도는 움직임은 아마도 서양의 선형적 시간 개념과 반대되는 순환을 중시하는 동양적 시간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거 같다. 노라가 실제로 환생과 인연을 믿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비록 이 영화가 인간보다 더 큰 무언가(인연이든 신의 섭리든)가 인간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생각의 아름다움과 위안을 전한다고 해서 어떤 신비적인 색채를 띄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신비는 다름 아니라 만물을 하나로 묶으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역사이다(골 1:16-17). 비록 기독교 세계관보다는 불교의 세계관을 더 많이 반영하지만, 무언가 가치를 주는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갈망을 이 영화가 어떻게 포착하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의 삶은 더 장엄한 “계획” 안에서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우리의 관계는 단순한 무작위의 충돌 그 이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갈망을 다중 우주 추세와 “정경 사건”(canon eventt) 및 “필연적 교차점”이라는 가짜 영적 개념을 포함하여 대중문화의 모든 곳에서 발견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 무엇이든, 노라는 자신이 단지 삶에서 수동적인 플레이어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녀가 사랑하기로 맹세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녀가 누리고 있지 않은 “만약에 그러면 어떨까”의 삶이 아니라 그녀가 실제로 사는 “내가 직면한 삶”(비록 불완전하더라도)을 포용하는 바로 그 선택이다. 바로 그 선택에서 그녀는 드물고도 신선한 지혜의 모습을 제시한다. 원제: ‘Past Lives’: Mature Wisdom in an Indie Roman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C. S. 루이스의 마지막 날들
by Trevin Wax
2023-12-09
C. S. 루이스는 예순다섯 생일을 며칠 앞둔 1963년 11월 22일에 사망했다.비교적 일찍 죽은 그의 죽음을 비극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십 년을 더 살았던 그의 형 워렌(와니)를 생각하면 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고 있음을 잘 알았던 루이스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비극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았다. 그가 보낸 마지막 몇 달은 영원한 행복을 기대하며 죽음을 맞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 쇠약평생 건강 문제로 고통한 루이스는 1961년 6월 신장염을 앓았고, 이로 인해 패혈증이 발생해서 그해 케임브리지 가을 학기를 쉬었다. 1962년 봄에 다시 학교로 복귀했지만 건강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는 학생 중 한 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심장과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전까지는 전립선 수술이 불가능하고, 전립선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심장과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병원과 나는 이상한 “악순환”에 빠진 상태이다. 전기 작가 A. N. 윌슨은 루이스의 친구이자 의사인 로버트 하바드가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며, 루이스의 이른 죽음의 탓을 그에게 돌렸다. 그러나 다른 전기 작가들은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1950년대 내내 하바드가 권장했던 음식 제한(루이스는 한번도 장기간 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을 제외하고, 당시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루이스는 홍차를 과도하게 마셨다. 당시는 카페인 섭취와 고혈압 사이의 상관관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때였다. 오늘날 일반적인 전립선 비대 치료법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개발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일부 보고서를 통해서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은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3년 여름루이스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다가오는 죽음을 볼 만큼 현명하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 현명하지는 않은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이다.” 1963년 여름, 루이스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는 6월 17일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의지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메리 윌리스에게 썼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죽을 때 우리는 후회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가 뒤에 놓고 떠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편지에 “끝나가는 여행에 피곤을 느끼는 여행자”라고 서명했다. 그달 말에 루이스는 메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당신을 이 지구에서 인내심을 갖고 싹을 틔우길 기다리는 씨앗과 같다고 생각해 봐. 정원사가 정한 가장 좋은 타이밍에, 저기 진짜 세상에서, 진짜 깨어나서 꽃을 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야. 그곳에서 돌이켜보면 우리가 사는 여기 생활은 아마도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고 반쯤 조는 상태로 보일 거야.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꿈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거지. 그런데 닭까마귀가 오고 있어. 그날은 이제 내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어. 루이스의 건강은 여름 동안 더 악화되었다. 그의 신장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수혈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투석 치료가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피로와 집중력 저하에 놀란 그는 7월 15일 다시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바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거의 죽기 직전이라는 판단에, 그는 죽기 전 신자에게 행하는 종부성사를 받았다.하지만 루이스는 그날 오후 2시에 깨어났고,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때때로 오락가락했지만, 그는 천천히 회복했다. 무어 부인의 딸이자 그의 친구 패디의 여동생인 모린 블레이크가 병원에 있는 루이스를 방문했다. 루이스는 그녀를 어릴 때부터 잘 알았고, 그녀는 한동안 루이스의 집(Kilns)에서 같이 살았다. 그런데 모린이 스코틀랜드 Caithness에 있는 Hempriggs의 Baron Dunbar의 George Cospatrick Duff-Sutherland-Dunbar 경의 재산을 상속받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루이스는 모린을 알아보지 못했다. 조용히 병실로 들어온 모린이 “잭, 나 모린이에요”라고 말하자, 루이스는 “아니지요. Hempriggs가의 Lady Dunbar가 맞지요”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란 모린이 말했다. “아니, 잭,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해요?”그러나 루이스가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기억하다니? 어떻게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다시 집으로퇴원한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왔다. 계단 사용이 금지된 그는 침실과 서재로부터 차단되었다. 거실에 침대가 설치되었고, 루이스가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남자 간호사가 육 주 동안 집에서 같이 살았다. 다시 가르치는 건 루이스에게 벅찬 일이었다. 결국 그는 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에 사직서를 냈다. 평생 친구인 아서 그리브즈에게 9월에 쓴 편지에서 그는 형의 부재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했다. “형은 나를 완전히 버렸어. 아마도 어디선가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을 “병자”라고 표현했지만, 동시에 “아주 편안하고 쾌활하다”라고도 썼다.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은 외침으로 끝난다. “아서, 오 내 친구야,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겠구나!”여름이 가을로 바뀌면서 루이스는 이런저런 편지에서 자신을 “사화산이기는 하지만 나름 여전히 활발한 상태”라고 묘사하곤 했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다가 문턱을 넘지 않고 되돌아온 그였다. 그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래봐야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슬픔을 느꼈다. 그는 그 경험을 언제가 자신이 두 번 죽어야 했던 원형 순교자 (protomartyr)라고 묘사했던 나사로의 경험과 연결 지었다. 당시 루이스의 서신을 살펴보면, 그는 끊임없이 “명랑하고” “자족한” 상태를 선언하고 있지만, 동시에 나빠진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루이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의 세력을 상상했다. 한 악마가 다른 악마에게 이렇게 썼다.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훈련한 대로 거짓말하는 의사, 거짓말하는 간호사, 거짓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모든 인간이 값비싼 요양원에서 죽어간다면,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약속하고, 질병으로 인해 모든 죄(indulgence)가 다 사해진다는 믿음을 주입하고, 거기에 행여라도 사제가 진실을 말해서 환자가 자기의 진짜 상태를 알아채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의 일꾼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만 해준다면, 우리 일이 얼마나 편해질까?” 그러나 루이스에게는 그런 얄팍한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나약함과 죽음을 직면했다.와니는 10월에 돌아왔고, 동생의 삶에 남은 마지막 몇 주를 책임졌다. 종종 친구들이 방문했고, 또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달 어느 시원하고 화창한 날, 친구 조지 세이어가 가을빛으로 물든 너도밤나무를 보여 주겠다며, 루이스를 런던 로드 자락에 있는 비콘 힐로 데리고 갔다. 루이스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올해에 누릴 마지막 정취 속에 빠져든(soak) 거 같아.” ‘soak’는 시골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가며 창조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는 기쁨을 표현할 때 그가 쓰는 단어였다.대기실로서의 집지상 생활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루이스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고(“나는 정원 산책보다 더 멀리 나가는 모험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라고 썼다), 편지에 답장을 보내거나 개인 도서관을 다시 방문했다. 10월 29일에는 “내가 과연 다시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썼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조금 전 일리아드를 다시 읽었는데, 이번만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만끽하고 있다.” 다음 주에 그는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과 테니슨의 ‘In Memoriam’을 다시 읽었다.집은 루이스가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며 쉼을 누리는 조용한 피난처이자 대기실이 되었다. 10월 31일에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편지를 썼는데, 동정녀 탄생,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 속죄 이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질문에 답했다.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이르는 몇 주 동안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나중에 팀 켈러가 아내가 된) 젊은 캐씨 크리스티에게는 일주일에 두 번씩 편지를 보냈다. 마지막 주루이스의 생애 마지막 주는 조용했다. 11월 15일에는 Lamb and Flag(Eagle and Child 길 건너편에 있는 펍)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Roger Lancelyn Green은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루이스의 집을 찾았다. 루이스는 Saturday Evening Post에 실린 그의 마지막 에세이가 될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 원고를 수정하느라 바빴다. 이 글은 무엇보다 ‘성적인 행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사회를 향한 놀랍도록 예지력 있는 분석이다. 그 주 후반에 방문한 J.R.R. 톨킨과 그의 아들 존은 루이스의 건강 이야기 대신 토마스 말로리(Thomas Malory)가 쓴 ‘아서왕의 죽음’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11월 18일 마지막으로 Lamb and Flag에 간 루이스는 콜린 하디를 만났다. 대부분의 시간을 루이스는 집에 머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형과의 시간을 즐겼다. 와니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바퀴가 완전히 한 바퀴 돌아서 원을 이루었다.” 어머니를 잃은 고통스러운 슬픔을 겪으며 형제들끼리 서로 의지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한 번 더 우리는 작은 방에 함께 있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너무도 뻔한 이야기는 우리의 대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대신 알 수 없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새 학기가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잭은 용감하고 침착하게 새로운 시작을 직면했다. “형, 나는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했고, 이제는 떠날 준비가 되었어.” 어느 날 저녁 동생이 내게 말했다.11월 21일, 그는 한 어린이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편지를 썼다. 그 아이의 편지를 “놀랍게도 좋은 편지”라고 칭찬함과 동시에 나니아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데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더불어서 재판에서 발견한 오타를 알려주겠다는 데에도 고맙다고 썼다. 11월 22일1963년 11월 22일 금요일은 정해진 루틴 그대로 흘러갔다. 루이스와 형은 아침 식사를 즐겼고, 후원자들에게 몇 통의 편지를 보낸 다음에 매일 나오는 십자말 풀이를 했다.점심 식사 후 루이스가 의자에서 잠이 들었고, 와니는 침대가 더 편할 거라고 말했다. 거실 건너편 “음악실”은 루이스가 더 이상 위층에 올라갈 수 없게 되자 침실로 바뀌었다. 오후 4시, 루이스에게 차를 가져다준 와니의 눈에 루이스는 졸려보였지만, 한편 편안해 보였다. 5시 30분에 와니는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발견한 건 침대 옆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루이스였다. “약 3-4분 후에 루이스가 숨을 거두었다”라고 와니는 썼다.그날 오후 루이스의 사망 소식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 즉 텍사스 달라스에서 발생한 존 F. 케네디의 암살로 인해 가려졌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도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이 이상한 세 죽음의 합류는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가 쓴, 세 가지 서로 다른 세계관을 대변하는 세 남자가 천국 외곽에서 나누는 가상의 대화를 담은 C. S. 루이스 천국에 가다의 배경이 되었다.죽음을 앞둔 루이스가 남긴 유산1963년 11월 26일, 루이스의 장례식이 그가 가장 자주 참석했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교회 마당에 묻혔다. 십 년 후 와니는 동생 옆에 함께 묻혔다.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이야기꾼 루이스의 마지막 몇 달은 그가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소망, 즉 하나님의 품에 안긴 영생의 약속에 대한 가슴 아픈 그림을 보여 준다. 마치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쪽배를 타고 파도 위로 향하는 리피칩이 그랬듯이, 루이스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 때문에 슬퍼하면서.” 그러는 동시에 “행복에 떨면서.” 그의 시와 산문에 생기를 불어넣은, 위로할 수 없는 그리움의 찌름과 같은 기쁨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조용하게 보낸 생애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는 육체의 고통을 인내와 뛰어난 유머로 이겨냈다. 그는 이 세상이 단지 더 큰 이야기로 이어지는 서막에 불과하며 신성한 사랑의 깊은 마법으로 가득 찬 새롭고 경이로운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원제: The Last Days of C. S. Lew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by 서나영
2023-12-06
크리스마스는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그 장엄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감탄사’와도 같다. 대서사시 서막의 커튼이 올라가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작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비록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복음의 소망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기뻐하며 이 축제에 집중한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크리스마스에 관한 추억과 이미지를 쉽게 떠올린다. 타오르는 양초, 포인세티아의 싱그러운 붉은 잎사귀, 청아한 핸드벨 소리, 수많은 색색의 리본과 배너, 성가대의 칸타타, 어린이들의 캐럴, 성탄절 연극, 쏟아지는 음악들, 화려한 불빛과 전구 장식, 트리와 갖가지 장식, 주일학교마다 열리는 파티와 쏟아지는 선물, 교회마다 가장 큰 파티를 연다. 그 행복한 파티에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구제 헌금과 선물 나눔도 빠지지 않는다.그뿐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교회 담을 넘은 축하 문화가 되었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한 축제로 한창이며, 카페나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으며, 자선모금과 기부를 통해 크리스마스에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이 크리스마스의 화려함과 기쁨을 되짚어 본 계기가 있다. 십여 년 전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이자 문화신학자 마크 카펜저(Mart Coppenger)의 주도 아래 기독교 윤리, 변증학, 철학, 미학을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함께 모여 길고 긴 크리스마스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 교회에서 겪은 무분별한 크리스마스 문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에 관한 증언들이 쏟아졌다. 재정이 파산하기 직전인 상태지만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거대한 크리스마스 공연과 파티를 한 교회 이야기, 조용한 크리스마스 예배와 행사를 원하던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쫓겨난 이야기, 복음의 진수는 참회와 회개인데 그런 언급은 절대로 하지 않게 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크리스마스 시즌 상권의 이치를 설명하며 자본주의와 결탁한 타락한 교회 행사들 이야기, 부활절의 깊은 복음의 진리에 비해 크리스마스는 복음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이야기, 복음 전파를 위해 믿지 않는 마을주민에게 성대한 음식과 공연과 파티를 준비하지만 크리스마스로 인한 실제 결신자는 희박한 통계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기독교 예술학 전공인 나에게는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헤치는 화려함과 장식성의 자본주의 예술에 대한 비판처럼 들렸다. 그 누구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학생으로 나는 한국의 크리스마스 문화를 떠올렸다. 오래전 한국의 어느 대형 교회가 미국의 한 크리스마스 공연을 카피해서 실제 낙타를 성탄 예배 무대에 세운 적이 있었다. 아기 예수의 해산을 앞둔 동정녀 마리아를 태운 낙타의 등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결국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 탄생극에서 낙타나 배설물을 분출하는 바람에 모두 코를 막고 애를 먹었다는 뒷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신학교 토론에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례들도 생각이 났다. 서울 근교 지방의 한 교회는 크리스마스 정기 음악회에 초청된 한 기독교 대학 여성합창단이 마지막에 단체로 치마를 걷어 올려 다리 노출 서비스를 보였고 회중을 소리 지르게 하는 깜짝쇼를 펼쳤다. 서울의 한 교회 크리스마스 연말 음악회에서는 한 여성 솔리스트가 가슴의 반이 보이는 노출 심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했지만, 목사들을 비롯해 그 누구도 복장을 문제 삼지 않는 기독교 문화를 만들었다고 말이다.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토론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진귀하고 값진 결론을 얻었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아름답게 표현할 유일한 매개체이자 타락의 원흉이기도 한 예술에 대해 말이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 기독교학자들, 교회 리더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서 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술을 즐길 때, 교회에서 예술에 대해 예산편성을 할 때, 예배 예술의 올바른 모습에 대해 그리스도인이자 예술가로의 삶을 살 때, 그 예술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냐?”고 말이다. 나의 답은 이렇다.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하라.” 크리스마스와 같은 예술은 ‘예수 그리스도로 중심을 잡는 예술’을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그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명제는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 그리스도인이 그 길고 긴 순례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속해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매력적인 상징들과 주제들이 많기 때문에 숙련된 영성으로 집중을 다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감상하거나 만들어질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독교 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을 크리스마스처럼 하라”는 문장은 두 가지 상충하는 흐름이 만나는 지점이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끊임없는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예술의 세계는 인간의 내면과 세상의 세계만큼 복잡하고 넓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끊임없이 집중하기란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때로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견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예술작품은 성경이다.) 어제 읽은 욥기와 욥이 친구들 사이에 오간 길고 긴 대화를 읽으며, 나는 상담자의 자세와 타인의 고통의 문제를 묵상했다. 욥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을 묵상하는 것에는 상당한 집중력과 시간이 소모됐다. 죄성으로 인한 개인의 약함뿐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강력하게 방해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개인의 안위와 자율적 선택에 젖어 있는 문화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삶의 많은 주제와 생각의 틀을 들여다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완전히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가정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모던하고 편리하게 디자인된 교회 건물 안에서 정숙해 보이는 회중이 부르는 웅장한 찬양 속에 세련된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을 잃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충분한 예산을 들여 수준 높은 각종 크리스마스 기념행사에 온 교회가 전력투구해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위험들을 인지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는 초인간적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하심과 도우심이며,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지식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가 되게 하고 찬양이 되게 하는 관계적 영성 말이다. 이 영성 없이 기독교 예술을 누리고 영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을 크리스마스처럼 하라”는 두 번째 숨은 의미는 예술이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가를 기억하며 진정성을 가지고 임하라는 말이다. 때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어렵고도 두려운 일이다. 오늘날은 너무 많은 기독교학자와 리더들이 진리를 그저 냉정한 객관적 진리이기를 추구한다. 마치 과학적 진리를 보존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토론한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는 참된 증인은 다르다. 증인은 먼저 자기가 말하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경험하고 체험하여 온몸에 체화된 상태에서 나올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설명하고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진 피터슨은 이 명령의 목적이 우리 몸에 흡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신경 조직과 근육에 흡수되는 것처럼 그가 입을 벌려 말할 때 그것이 문장 속에 자연스럽게 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을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시는 길이자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이란 것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때로는 그 진리를 나르는 도구를 넘어 완전한 하나가 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자. 크리스마스에는 그 어떤 교회도 그저 언어적 설명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는다. 교회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촛불과 색색의 전구로 꾸민 빛의 예술의 장으로 변한다. 천사들이 노래했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외침은 헨델의 메시아로 울려 퍼지고 갖가지 악기들이 그날의 찬송을 재현한다. 온 교회는 크리스마스의 영광이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그 영광의 광대함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에서 천사가 찬송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계시록에서 회중이 찬송을 부리는 동안 일곱 천사의 심판이 준비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다(계시록 8-12). 성막과 성전의 수많은 상징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예표되고, 음악과 이미지의 환상 속에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구원을 예언했다. 예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불가결한 중심 행위다. 크리스마스처럼, 예배와 일상의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시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건물과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여 정돈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다듬으며 전하고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한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중심을 올려드리는 예술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많은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야 하는지 고민한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매일 대하는 문화예술에 대해 고민한다. 이 아름다운 12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예술’처럼 “용기 있게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예술을 추구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찾아 경청하고 응시하자고,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예술을 갈망하자고 외치고 싶다. 매일이 크리스마스처럼 기뻐야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하자. Soli Deo gloria!
TGC Advent Concert
by TGC
2023-12-01
TGC Advent Concert '소망의 찬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찬양사역자들의 출연으로 크리스마스 찬양과 성구들이 매우 잘 구성된 콘서트입니다. 찬양과 시와 말씀을 통해 평안을 누리고 소망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Songs of Hope: A TGC Advent Concert].1. 오 거룩한 밤(쉐인 앤 쉐인)2. 황량한 한 겨울에(키스 & 크리스틴 게티)3. 엘리사벳의 기쁨(푸어 비숍 후퍼)_말씀(누가복음 1:39-42)4. 임마누엘(테니엘 네다, 존 구에라)_말씀(이사야 7:14)5. 마침표!(퀴나 아라곤)_말씀(이사야 11:1)6. 엘리사벳을 위로하는 마리아(산드라 맥크라켄)_말씀(마태복음 1:21)7. 저 들 밖에 한밤중에(솔버린 그레이스 뮤직)_말씀(누가복음 2:10-12)8. 누우실 곳 없는 왕(리즈 바이스, 매디슨 커닝햄)_말씀(마태복음 2:13-14)9. 그날이 오면(캐롤라인 콥)_말씀(이사야 2:4)10. 어두운 곳의 크리스마스(글렌 스크리브너)_말씀(이사야 9:2)11. 참 반가운 신도여(솔버린 그레이스 뮤직)_말씀(갈라디아서 4:4-5)12. 그리스도(푸어 비숍 후퍼)_말씀(마태복음 1:17)13. 얼마나 아름다운지(퓨처 오브 포레스트리)_말씀(히브리서 2:14-15)14. 마리아의 송가(블레어 린)_말씀(누가복음 1:46-19)15. 산 위에 올라가서(쉐인 앤 쉐인)_말씀(이사야 52:7)16. 기쁘다 구주 오셨네(산드라 맥크라켄)_말씀(시편 98:2-4)17. 곧 오소서 임마누엘(조쉬 게럴스)_말씀(이사야 35:10)18. 깨어 있으라(캐롤라인 콥)_말씀(마태복음 25:13)19. 기쁨이 충만하기를(키스 & 크리스틴 게티)_말씀(요한복음 1:9)20. 오 거룩한 밤(퓨처 오브 포레스트리)_말씀(요한복음 1:14)
그는 현대판 ‘하나님의 도성’을 쓰고 싶을 것이다
by Chris Watkin
2023-10-30
기독교 고전 재발견C. S. 루이스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불고 있는 깨끗한 바닷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오로지 “오래된 책을 읽어야만 가능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잊고 지낸 기독교 고전을 재발견하는 시리즈(Rediscovering Forgotten Classics series)를 시작한다.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움을 주는,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기독교 고전을 하나씩 찾아나갈 것이다. 이와 닮은 주제를 크리스 왓킨은 그의 신간 Biblical Critical Theory: How the Bible’s Unfolding Story Makes Sense of Modern Life and Culture(성서 비평 이론: 성서 속 이야기를 통해 현대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에서 탐구한다. TGC 편집장 콜린 핸슨은 이 책을 “내가 읽은 최고의 책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자, 다음과 같은 사회를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무런 논리도 없이 오로지 상대를 향해 소리만 지르는 완강한 파벌로 쪼개진 사회. 자유와 개방성에 대한 자축에 가까운 수사학으로 시대가 숭상하는 우상을 향한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 압박을 교묘하게 가리는 사회. 엘리트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 및 경제 세력의 공모가 판을 치는 사회. 그리고 미신을 따르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역사의 올바른 편”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정작 수많은 기괴한 미신과 오래된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 이런 사회,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지 않은가?5세기 로마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유명한 사회 및 정치 이론서 하나님의 도성을 집필할 당시의 로마는 말 그대로 복잡하고, 비틀거리고, 분열되고, 자기모순에 가득 찬 사회였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이 책은 당시 로마 상황을 반영하는 현대 사회를 향한 문화적 비평에 필요한 강력한 틀을 제공한다. 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걸작에서 뽑은, 그리스도인이 현대 문화에 참여하는 방식을 심화하고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여섯 가지 도구이다. 1. 안에 머무는 아웃사이더가 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후기 로마 문화에 대한 이런저런 목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로마 문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의 글은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수사학을 강의했고, 진심을 담은 경외감으로 키케로를 인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 책을 쓴 건 단지 당시 쇠퇴하던 로마 문화를 부당하게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로마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화가 왜 그토록 찬란했던 건지,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에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현대 알제리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신인 그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무엇보다 그를 로마 문화의 외부에 두는 요소는 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참여라고 할 때 보통 “민감한 인사이더” 또는 “용감한 아웃사이더” 중에서 선택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일반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2. 문화 전체를 다루라아우구스티누스는 후기 로마 문화 내에서도 고립된 경향만을 따로 떼어내서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심오한 구조와 근본적인 가정을 탐구했다. 즉 문화의 악덕만 아니라 미덕까지, 철학만 아니라 경건까지, 그리고 대중적 오락만이 아니라 정치적 환경까지 고찰했다. 하나님의 도성은 어떤 특정한 문화 도깨비를 박멸하기 위해서 뛰어든 특수기동대가 아니다. 이 책은 로마 사회 전체의 길이와 폭을 다 아우르는 경찰 전체의 감시망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자 찰스 매튜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도성은 특정 사회 환경 속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성찰하지 않는 현실을 대상으로 누군가 오늘날 비판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포괄적인 모든 사회이론과 비판이론의 뿌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3. 성경 전체를 다루라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몇 구절과 애용하는 기독교 교리 몇 가지를 가지고 로마 문화를 다루지 않았다. 하나님의 도성 11-20권에서 그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개관한다. 그리고 성경이 어떻게 로마가 가진 각종 해괴망측한 믿음을 대체할 수 있는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지 보여준다. 성경은 문화적 범주에 끼어들지 않고 성경만의 방식으로, 성경만의 강조점을 제시하며 독창성 있게 스스로를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은 일부 현대 패러다임과는 달리 창조, 죄, 심지어 구속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의 문화 비평은 일관되게 성경적 균형을 유지한다. 4. 표면 아래를 살펴보라아우구스티누스의 문화 비평은 전혀 얄팍하지 않다. 그는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분석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표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밝히기 위해 지각판을 파헤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구조 분석의 핵심은 사랑이다. 두 도시가 두 가지 사랑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실제로 사랑은 사상보다 더 깊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움직이는 건 사랑이고, 몸을 움직이는 건 무게이다.” 문화 사상과 행동 또는 태도를 접할 때 그의 반사적인 반응은 “이것이 드러내는 건 어떤 사랑인가?”라는 질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문화를 고찰할 때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예리한 질문이다!5. 대립과 성취 사이의 잘못된 선택을 거부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도시 사이의 대립만을 보는 그리고 하나님의 도시가 지상 도시의 가장 깊은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키는지만 보는, 쌍둥이처럼 닮은 두 가지 함정을 피한다. 더불어서 대립과 성취 차이를 애매하게 가로지르는 미지근한 타협도 피한다.그의 독특한 전략은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를 통해서 놀랍도록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영광”은 로마를 특징짓는 가치였다. 로마가 적을 어떻게 정복하고 멸망시켰는지를 보면 로마의 영광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로마의 영광은 결코 기독교의 미덕이 아니었다. 만약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날 책을 쓴다면, 그 책은 현대인에게 가장 감각적으로 다가갈 단어를 써서 이런 식으로 시작할 것이다.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해방된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또는 “나의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깨어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언어는 선을 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은 지금 현대 문화의 상징인 Kool-Aid를 마신 거요[Drink the Kool-Aid: 무언가를 심각할 정도로 믿는다는 뜻의 은어_편주].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불필요하게 도발적이고 잠재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로마인과 어울리다가 같이 망하지 말고 그들로부터 탈출하세요!”그러나 이런 식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영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가 로마가 말하는 영광의 정의와 정반대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광은 자신을 높이고 노예를 거느리는 가이사의 영광이 아니다. 자신을 비우고 남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영광에 대한 호소는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화려한 시발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로마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영광을 가장 깊고 진실하게 실현하는 형태로서 설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광에 대한 로마의 이해는 한낱 뒤틀린 환상에 불과하며 로마 안에는 진짜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성경의 패턴을 따른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함을 세상 지혜와 철저한 대조(20-23절)인 동시에 세상 지혜가 추구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25, 30-31절)로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 선포를 대조 또는 성취 중에서 선택할 이유가 없다. 복음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6. 교회와 문화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라아우구스티누스가 주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가 현시대에는 서로 얽혀서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최종 심판의 날 완전히 분리될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대조를 강조하는 문화 비평의 접근 방식은 두 도시를 완전히 별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문화가 형성하는 여러 방식에 무지하기 쉽다. 반대로 지나치게 성취를 강조하는 접근 방식은 두 도시를 근본 가치에서 동일한 대안의 표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복음 외에는 세상을 향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선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주는 성경의 틀은 우리가 굳이 감당하기 힘든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도 두 도시는 여전히 얽혀 있다. 세상 “문화”는 결코 문밖에 서서 교회가 문을 열어주기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좋든 싫든 세상 문화는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형성한다. 동시에 전혀 다른 운명을 가진 두 도시의 운명은 후기 현대적 사고방식이 아무리 편안하게 느껴지더라도 이 세상은 결코 본향이 아니고 우리는 세상을 비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행여라도 우리가 후기 현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우리 시대에 성경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민감함을 잃지 않고 현대 문화 속에 참여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청사진을 제공한다. 지난 세월, 이 책이 가진 광채를 모방하려는 작가가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능가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도성아우구스티누스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도성은 가장 위대한 신학 저서 중 하나이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직전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쓴 이 책은 로마의 고대 이교,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 그리고 성경의 계시를 고찰한다. 로마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정치 경험을 뛰어넘어 영원히 지속될 시민권을 제공하는 하나님 나라 시민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도성은 기독교 발전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저작 중 하나이다. 원제: Augustine Could’ve Written ‘City of God’ in 2022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도성
아우구스티누스
음악, 또 하나의 복음 언어
by 서나영
2023-10-11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진리를 알리고자 한다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문화 속에서 복음전도에 관한 언어적 고민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다음 세대가 시각적, 청각적, 문학적 언어를 선택하는 양상이 짙어지고 있는 오늘날, 제프 밴더스텔트(Jeff Vanderstelt)가 말했던 “복음의 언어”는 단순히 언어의 개념을 넘어 유창해질 필요가 있다. 음악은 바울이 고백했던 “여러 모양” 중 하나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주의 백성들은 언제나 음악의 아름다움을 가장 숭고한 사명인 복음에 옷 입히길 원했다. 문학신학자 리랜드 라이켄(Leland Ryken)은 “예술의 유용함이란 언제나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는데,[1] 이는 예술이 진리를 전달할 때 가장 숭고한 역할을 수행하게 됨을 뜻한다. 특별히 ‘음악’은 ‘시’라는 거대한 문학 장르와 합쳐져서 진리를 함양할 수 있는 광대한 세계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타라 웨스트오버(Tara Westoiver)는 자신이 겪은 삶의 이야기를 엮어 2018년에 출간한 배움의 발견(Educated)에서 16년간 학교에 다녀본 적 없는 한 소녀가 배움에 대한 갈망이 생기게 된 계기를 정확하게 나타낸다. 그것은 음악이었다. 그녀는 처음 정교한 합창음악 음반을 들으며 질서 없는 모든 공기가 조화롭고 균형을 잡으며 질서가 생기는 환상을 보았다. 매일 음악을 들으며 그녀는 꿈을 키웠다. 당시에는 그 꿈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후에 그 꿈은 한 인간으로 정돈되고 교육되고 꿈꾸는 삶 그 자체였다. 후에 음악이 아닌 지성사에 대한 연구로 케임브리지 대학 박사가 되지만, 그녀가 이룬 결과는 음악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음악은 혼돈 속에 떠다니는 공기 중의 파장을 모으고, 적합하고 아름답게 재배열하고, 비례와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 낸다. 피타고라스에서 플라톤을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음악과 우주의 원리에 대한 밀접한 관계에 주목했다. 이들의 음악적 소리, 특히 화성과 리듬의 조화가 우주의 질서와 일치함을 보고, 우주의 질서를 표현하고 반영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당시 음악은 교양 과목 중 하나로 소리들 사이의 측정 된 관계(특히 시적인 음)와 관련된 지적 분야였고, 지금 시대의 음악의 실용성보다 훨씬 뛰어난 개념이었다. 당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음악신학적 연구를 보면 인간은 음악의 아름다움을 통해 일시적인 타락한 영혼이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2] 유진 피터슨 목사 또한 그의 저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성경 속 다윗이 연주한 수금 음악이 사울의 영혼을 정돈하는 역할을 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음악의 신학적 아우라는 시문학과 결합하여 놀랍도록 아름다운 언어로 변신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에 들어 있는, 그가 사형집행 직전 쓴 음악들은 진정한 기독교의 언어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진리를 나르는 아름다운 시, 선율, 그리고 운율의 언어다. 때로는 ‘복음’의 비유로, 때로는 ‘계시’의 비유로, 진리의 증인의 역할을 진귀한 예들은 역사 속에 넘치도록 충만하다. 특히 시라는 문학예술 장르를 생각해 보면 복음 언어로의 음악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어떤 복음의 텍스트의 ‘의미’가 필요한 것이라면, 만일 그 복음의 자세한 내용만이 중요하다면, 복음을 나타나는 텍스트 이외의 다른 요소는 불필요하지 않겠는가? 시는 일반 텍스트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별히 음악에 포함되어 있는 시(운율)의 텍스트는 일반 에세이나 연설문에 비해서는 턱없이 그 양이 적다. 그렇지만 시는 일반 텍스트가 가지지 않은 놀라운 설득의 힘을 가지고 있다. 클랜스 브룩스(Cleanth Brooks)와 로버트 워렌(Robert Penn Warren)은 그들의 저서 Understanding Poetry에서 롱펠로(Longfellow)의 시 “인생의 시편(a Psalm of Life)”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가 우리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이 단지 ‘말의 조언’이라면, 이 좋은 조언에 대한 짧은 산문 진술이 시 자체만큼 좋지 않거나 그보다 더 나은 이유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메시지’ 때문에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대개, 평범한 산문 진술보다 시를 선호할 것이다.”[3] 즉,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이나 시, 또는 스토리 기반의 영화나 드라마 장르를 “일반 설명”으로 바꾼 것으로 대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예술은 인간에게 실제로 경험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성경 또한 그 자체로 예술적 문학의 방법이 다양하게 구사되어 있다. 특별히 시편과 애가, 아가서와 묵시들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놀라운 진리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4).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시편”이라는 책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대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각 성경의 책들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역사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할을 통해 이루셨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시편은 다른 어떤 책보다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시편 2편에서는 메시아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22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예표하는 통탄의 표현이 있으며(1절), 특히 25편에서는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된 다윗의 영원한 통치의 약속을 강조한다(6절). 시편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한두 구절 때문에 복음과 관련된 것이라 보기에는 훨씬 더 “그리스도 중심적”(Christ-centered)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내면과 감정을 통한 마음의 소리는 (1)그들의 사하심을 구하며(시 32, 51, 130), (2)애통하며(시 12, 13), (3)감사하며(시 9, 106, 138), (4) 하나님의 법에 감탄하며(시 19, 119), 구속을 확신한다(시 23).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고 선포하신 시편의 복음성은 복음의 시와 합쳐진 음악이 복음을 전하는 독특하고 신비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지지한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총 404구절 중에 계시록을 제외한 다양한 성경책들의 내용을 인용하는데 그 내용이 518번이 언급된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그의 저서 요한계시록: 현실을 새롭게 하는 상상력에서 사도 요한의 묵시 속의 성경 언급은 인용이 아니라 “성경에 완전히 동화되어 … 성경의 이미지들과 개념들이 살아 있는 몸 안에 얽히고설켜 살아 있는 조직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 시들은 성경의 내용들과 분리할 수 없는 새로운 개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계시록은 그 자체로 복음을 노래하며 어린양을 찬양하는 놀라운 시다.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는 “음악이나 시, 한 예술 작품을 진지하게 깊이 본다면, 그 안에 있는 세상을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4] 특히 음악은, 시와 함께 경험적 진실뿐 아니라 그 진실에 대한 인간 감정의 내면을 그리고 표현하고 이끄는 데 능숙하다. 그리고 복음은 비유의 스토리와 시와 다양한 표현을 포함한다. 오늘날 교회와 신학은 음악에 대해 충분히 관대하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k)가 말했던 “신학의 시녀”로 말이다.[5] 음악은 복음전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다. ‘메시지를 떠난 음악(악기 음악)’ 또한 감정과 경험을 전달하는 데 매우 강력한 도구로 사람의 마음을 열고, 진리의 따뜻함을 선사하고, 복음의 능력을 기대하게 하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촉매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음악은 ‘복음의 또 다른 언어’다. 음악은 때로 예술의 한 분야에 갇혀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다. 음악은 우주적 조화와 질서를 가지고 ‘시’라는 문학을 장착해 복음과 진리의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다. 실제로 수많은 음악은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교회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복음의 언어’로의 역할을 감당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다. 음악이 ‘오직 말씀’을 돕는 시녀가 아니라, ‘오직 말씀’을 울려 퍼트리는 ‘아름다운 언어’로 승격됨을 고대하며, Sola deo gloria!1. Ryken, The Liberated Imagination, 125.2. Harrison, “Augustine and the Art of Music,” 40-45.3. Cleanth Brooks and Robert Penn Warren, Understanding Poetry, 3d ed.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60), 10.4. Flannery O’Connor, Mystery and Manners, ed. Sally and Robert Fitzgerald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roux, 1957), 73.5. Bavink, Gereformeerde Dogmatiek, 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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