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예술과 문화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온라인에서 잘못된 정보와 허위 정보를 피하는 법
by Patrick Miller
2022-03-29
그 영상을 보는 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크라이나인 아버지는 나라를 떠나기 위해 버스에 오른 아내와 딸을 보고 울었다. 같이 떠나자는 소리 없는 간절함을 담은 딸의 작은 손은 아버지를 향해 뻗어 있었고, 아내의 눈은 이미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 이런 이별은 우크라이나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영상 속 남자는 우크라이나 군인이 아니었다. 러시아 군인이었다. 이 영상을 보도한 방송사가 틀린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트위터에서 이 영상을 찾아냈을 것이다. 트위터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가 그 영상을 보기 하루 전에 한 친구가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국인이 소아성애 욕망을 경험한다고 주장한 매트 왈쉬(Matt Walsh)의 트위터 스크린샷을 문자로 보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고 매트 왈쉬의 페이지를 방문했다.물론 내가 받은 트위터는 이미 꽤나 입소문이 났고, 매트가 거기에 대한 답을 쓴 상태였다. 그가 대답한 이유는 그 트위터가 진짜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미지가 포토샵 조작이었기 때문이다. 매트 왈쉬 트위터 사건 이틀 전에 엘론 머스크(Elon Musk)는 나를 “NFT & Crypto” 트위터 목록에 추가했다. 그는 1만 5,000 비트코인 획득을 위한 콘테스트에 나를 참가시키겠다고 제안했다. 거기에 참가하려면 머스크 외 목록에 있는 다른 다섯 명에게 트위터를 날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다음 날 내 트위터 피드는 나와 엘론에게 트윗을 날린, 목록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게시물로 넘쳤다. 불행하게도 그 누구도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가짜 트위터 계정이었다. 경품 링크는 피싱 사기였다.일주일 동안 나는 한 건의 잘못된 정보를 접했고, 두 건의 허위 정보를 가까스로 피했다. 내가 느낀 건 자부심이 아니라,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거짓이 넘치는지에 대한 자각이었다. 우리 주변에는 지금도 이런 거짓 정보가 넘친다. 소셜미디어가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아홉 번째 계명(출 20:16)을 아예 지워버리고 있다. 거짓이 뿌리를 내리면 사회적 신뢰가 쇠퇴한다. “무엇이 진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다들 이렇게 말하게 되는 세상에서는 친구가 친구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 10:16). 소셜 인터넷 시대에 이것은 냉소주의의 유혹을 거부하는 동시에 거짓이 퍼지는 방식에 대해 지혜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소셜미디어에는 잘못된 정보(misinformation)와 허위 정보(disinformation)라는 두 가지 종류의 거짓이 만연한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저항을 향한 첫 번째 단계이다. 잘못된 정보 이해하기 잘못된 정보는 (1) 악의 없이 공유되는 의도하지 않은 거짓과 (2) 실제 사건을 탈맥락화하거나 기만적으로 재구성하여 생성된 거짓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정보: 종종 의도하지 않은 거짓말에는 9/11 테러 당시 93편에 탑승한 토드 비머(Todd Beamer)의 조작된 전화 통화 녹취록처럼 마음 훈훈한 이야기도 포함된다. 녹취록 “대본”은 확실히 유통되었고, 그렇기에 이 재구성된 대화의 스크린샷이 지난 9월 기독교 트위터에서 입소문을 탔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리트윗 수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이 진짜라는 데에 확신하도록 했다. 그게 사실이 아닌데도 그럼 왜 그렇게 퍼졌을까?모든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성공적인 게시물(댓글, 좋아요, 또는 공유와 같이 참여를 유도하는 게시물)을 찾아내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게시하도록 설계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플랫폼에 더 오래 머무르게 하여 더 많은 광고 수익을 내도록 한다. 그러니까 감정을 사로잡는 게시물일수록 비즈니스에 도움이 된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그게 뭐가 중요한가? 탈맥락화된 잘못된 정보: 당파적 뉴스 사이트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이야기(narrative)에 힘을 싣기 위해 핵심 맥락을 제거한 인용문이나 비디오 클립을 게시하곤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분노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며, 결과적으로 알고리즘이 작동하면서 그 점을 더 강조한다. 우리는 적에 대해서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적에 관해서만은 표면적으로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나 인용문을 만나더라도 더 넓은 맥락에서 진실 여부를 조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허위 정보 이해하기허위 정보는 분열, 불신, 증오를 조장할 목적으로 사악한 주동자들(agents)이 조작한 거짓 이야기, 사진, 인포그래픽, 또는 인용문이다. 중국, 이란, 러시아가 미국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해 바이러스성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데 필요한 소셜미디어 알고리즘 조작에 능숙하다는 게 이미 입증되었다. 외국에서 만들어진 이런 사례는 아주 많다. 이슬람국가(ISIS)가 루이지애나에서 화학 폭발을 일으키고, 오하이오에서 치명적인 인이 누출되고, 우크라이나 전투기가 상업용 항공기를 격추하고, 알래스카가 연방 탈퇴를 청원하고, 2017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임박한 제3차 세계 대전 발발에 대한 경고를 하다 등등. 대부분 미국인은 2016년 선거 전까지만 해도 이런 디지털 허위 정보 캠페인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 당시 러시아 요원이 두 후보에 대해 넘치는 거짓 이야기를 게시했으며, 양측 후보가 다 그런 거짓 정보를 사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자기네들 사이에서 ‘적극적인 조치’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허위 정보 행동 방식(playbook)은 인터넷보다 훨씬 앞서서 KGB가 개발했다. 뉴욕 타임스는 탁월한 한 다큐 시리즈에서 허위 정보를 뿌리기 위한 KGB의 7단계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1. 균열 찾기: 가장 분열되고 적대적인 사회를 찾아 그곳을 완전히 붕괴시켜라. 2. 큰 거짓말: 차마 거짓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거짓말을 만들어내라.3. 진실 편집(kernel): 신뢰를 주기 위해서라도 거짓 주변에 약간의 진실을 양념으로 섞어주라. 4. 손 숨기기: 거짓의 출처를 쉽게 찾을 수 없도록 하라. 5. 유용한 바보: 적개심에 넘치는, 그래서 어떤 거짓말이라도 쉽게 믿을 사람들을 식별하라. 그들을 거짓을 열심히 퍼 나르는 무식한 돌쇠(mules)로 삼으라. 6. 모든 것을 부인하라: 증거가 무엇이건, 무조건 아니라고, 거짓의 조작에 연루된 모든 것을 부인하라. 7. 장기전: 오랜 시간 동안 뿌린 수많은 거짓 중에서 단지 몇 개만 뿌리를 내린다. 그러므로 되도록 많은 씨를 뿌려라. 그리고 싹이 나오는 것을 보고 가장 가능성 있는 거짓에 더 투자하라. 이것이 바로 피자게이트(Pizzagate, 역주_힐러리 클린턴 전 민주당 대선후보와 그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고 있던 존 포데스타가 워싱턴DC의 한 피자집에서 소아성애 행위를 즐기고 인신매매까지 한다는 찌라시)가 일어난 방식이다. 러시아는 존 포데스타(John Podesta)의 이메일을 해킹하여 위키리크스(WikiLeaks)에 공개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손을 숨기고, 나중에 모든 관여까지 다 부정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빠르게 지나갔고, 포챈(4chan)의 익명 그룹이 포데스타와 코스모 피자(Cosmo Pizza)가 주고받은 이메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 이메일이 바로 ‘진실 편집’에 해당했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큰 거짓말은 클린턴 부부가 식당에서 비밀 아동 성매매 조직을 운영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암호화된 언어가 그 이메일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유용한 바보들이 알아서 그런 거짓말을 믿었다. 그리고 주류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마구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이 더 지난 후, 총을 든 그리스도인이 존재하지도 않는 지하실에서 아이들을 구출하겠다며 코스모 피자 앞에 나타났다.자, 이렇게 불만과 불신이 싹텄다. 더 놀라운 건, 클린턴이 운영하는 성매매 조직에 대한 소문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허위 정보 및 잘못된 정보에 저항하기 위한 여섯 가지 원칙허위 정보와 잘못된 정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거짓에 맞서 무장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다음은 온라인에서 거짓을 현명하게 피하기 위한 여섯 가지 추가 원칙이다. 1. 선정적인 헤드라인을 검증하라. 이야기 또는 인용문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아마도 그건 진짜로 이상해서 그럴 것이다. 우리에게는 적을 악마화하는 헤드라인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싫어하는 사람을 깎아내리는 게시물을 읽을 때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알고리즘은 당신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고 있다. 분노에 불탄 당신을 플랫폼에 일초라도 더 머물게 할 수만 있다면, 알고리즘은 당신의 분노에 불을 붙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2. 클릭, 댓글, 공유, 좋아요를 선택하기 전에 출처부터 확인하라. 포스트에 동의하기 전에, 알고리즘을 향해 이렇게 말하라. “비슷한 내용이 더 있어? 보여줘.” 클릭하기 전에 자료의 출처를 확인하여 자신을 보호하라. 일반적으로 원본 웹 사이트는 그림 아래에 표시된다. 평판이 좋고 잘 알려진 기관이 아닌 경우 참여하기 전에 그 사이트를 먼저 구글에서 검색하라. 그렇게 함으로 알고리즘이 자동으로 생성하는 미래의 허위 정보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3. 보는 것은 꼭 믿는 것은 아니다. 사진도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다. 동영상은 얼마든지 맥락에서 벗어날 수 있다. 딥페이크가 문제이다. 사진을 구글 이미지로 끌어다 놓으면 종종 원본 소스와 콘텍스트를 찾을 수 있다. 유튜브에서 연설을 검색하면 인용에서 왜곡되었을 수도 있는 원래 맥락을 찾을 수 있다.4. 말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외국 세력이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무식한 돌쇠로 삼는 미국 내 세 그룹 중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MIT Technology Review에 따르면, 상위 20개 기독교 페이스북 페이지 중 19개를 외국의 악의적 단체(troll farms)가 운용하고 있다. 그들의 전략은 이것이다. 정상적인 기독교 페이지에서 95퍼센트의 기독교 콘텐츠를 훔친 다음, 거기에 5퍼센트의 미친 정보(insanity)를 살짝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그리스도인을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유용한 바보”로 만드는 데 실로 효과적이다. 5. 헤드라인만 읽고 끝나지 말라. 마케팅 담당자가 좋아하는 것은 클릭 유도(clickbait)이다. 당신의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그들은 헤드라인에 단지 절반의 진실만 넣는다. 많은 사람들이 클릭하지 않고 헤드라인이 사실이라는 가정에 쉽게 빠진다. 아무리 정직한 헤드라인이라도 전체 이야기를 다 요약할 수는 없다. 전체 내용을 다 읽으라. 6. 틀렸을 때, 그 사실을 인정하라. 내 친구 마이클 그라함(Michael Graham)은 내가 앞에서 언급한 9/11 테러 93편기 내용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는 충격적인 일을 했다. “이게 다 내 잘못이요!(mea culpa)”라고 그가 선언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와 정직함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평판보다 진실에 더 관심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우리의 주장에 엄청난 신빙성을 부여한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이러한 냉소주의가 온라인에 넘쳐나는 비진리의 답이 될 수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진리를 사랑해야 한다. 탈맥락화에 직면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맥락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 잘못된 정보에 직면하여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명성을 가져야 한다. 원제: How to Avoid Misinformation and Disinformation Onli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거짓정보
허위정보
진실과허위
가짜뉴스
소셜미디어
돈 룩 업: 산만한 세상 속에서 복음 전하기
by Israel Soong
2022-03-21
넷플릭스 코미디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에서 천문학자 랜들 민디 박사(레오나드로 디카프리오)와 박사과정 학생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는 전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거대 혜성이 지구로 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은 곧장 백악관으로 달려가서 제니 올리언(메릴 스트립)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러나 그들의 긴박한 경고에도 대통령은 조롱 섞인 정치적인 수사로 대응한다. 이에 케이트는 절망하면서 만약 인류가 이 혜성을 막기 위하여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대통령은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당신이 100퍼센트 죽는다고 얘기하면 납득하겠느냐”며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사실, 대통령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사실이 중간선거에서 대통령에게 불리한 이슈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넷플릭스 역사상 두 번째로 큰 흥행을 기록하며 시작한 영화 ‘돈 룩 업’은 제94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도 올랐다. ‘돈 룩 업’은 기후 변화와 과학 부정에 대한 창의적 풍자로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고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무겁고 일방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아담 맥케이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오늘날 소셜미디어와 대중문화로 정신이 산만해져서 정말 중요하고 진지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세태를 잘 보여준다. 영화 제목 ‘돈 룩 업’은 지구를 향해서 다가오는 혜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꼬집는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 사람들의 영적 무관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도무지 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이 영화의 내용이 약간은 조잡하고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이 풍자적인 영화는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에게 교훈을 준다. 오늘날 너무 시끄럽고 복잡하고 산만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전해야 하는 긴박한 소식인 복음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까?죽을 때까지 즐기기 바쁜 사람들‘돈 룩 업’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장면은 랜들과 케이트가 사람들을 웃기려고 하는 연예인들(케이트 블란챗과 타일러 페리)이 진행하는 아침 쇼프로 ‘데일리 립’에 출연하는 장면이다. 이 쇼프로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장면은 대통령 올리언이 대법관으로 지명한 사람의 스캔들이다. 그 다음에는 유명 여가수가 등장하여서 남자친구와 화해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그러고 나서야 랜들과 케이트가 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남아있는 아주 짧은 시간에 임박한 지구의 종말에 대한 경고를 해야 했다. 그들은 이 쇼프로의 밝고 활기찬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 어두운 소식을 전해야 했다. 방송 중에 케이트는 농담이나 하며 지구로 향하고 있는 혜성의 소식을 제대로 받지 않는 진행자에게 절망한다. 그리고 몹시 격분하며 “저희 말이 어렵나요?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말은 지구 전체가 파괴될 것이란 얘기예요”라고 소리친다. 그러자 진행자 블란챗은 “여기선 나쁜 소식도 가볍게 다루는 편”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케이트는 소리친다. “지구 전체가 파괴된다는 소식은 재밌으면 안 되는 거예요. 무섭고 불편해야 할 소식이라고요!”결국 케이트의 이 메시지는 대중에게 그리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중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혜성이나 멸망에 대한 소식보다 연예인의 가십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랜들과 케이트가 외쳤던 긴급하고도 실존적으로 중요한 소식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많은 교훈을 준다. 오늘날 이렇게 복잡하고, 산만하고, 분열된 문화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목회자들과 전도자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 세상의 산만한 문화 속에서 무감각해져서 도무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모든 것을 가볍게 취급해 버리는 문화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영원한 복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미디어는 메시지다‘돈 룩 업’에서 랜들과 케이트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정치나 엔터테인먼트라는 “미디어”(medium)로 그들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중요한 메시지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하는 수단이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에 메시지가 변질되고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다. 이 세상 문화가 가지고 있는 수단과 방법과 형식에 복음을 끼워 맞추려다 보면 복음이 가지고 있는 초월적 진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슈퍼볼 중계방송에 30초 광고를 내보내는 기업이나 선거 유세장의 정치인 같은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메시지와도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이를 꼭 기억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할까?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해 보겠다. •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은 죄를 폭로하고 심판을 외친다. 듣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회개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편안하게 느낄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복음 안에 있는 이 불편한 메시지가 복음의 핵심이다.• 복음은 치료가 우선이 아님을 강조해야 한다. 복음은 주 목적은 자기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이 영생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 대속이 이 생에서의 자기실현이나 만족과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 • 우리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듣는 사람에게 부드럽게 되새겨 주고(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100퍼센트 확실하다), 그들에게 지구에서의 짧은 삶 너머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도록 격려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이 지난 후에도 우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우리를 사랑하실 분은 오직 영원한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뿐이시다.•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여서 복음을 전한다면, 사람들이 주로 올리는 정치적인 메시지나 오락거리와는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릴 때에 자신의 외모나 멋진 광경, 사람들의 이목을 끌 광고를 노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전하려는 메시지 자체에 충실해야 한다. 복음의 영향력은 이 세상의 영향력이 가지고 있는 방식과는 달라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돈 룩 업’의 마지막 장면은 놀라울 정도로 종교적이다. 혜성의 임박한 충돌을 앞두고, 다시 말해서 지구의 모든 생명이 멸절되기 직전에 랜들은 그의 미시간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의 불륜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 랜들은 아내와 화해하고 나서 이 영화의 주요 인물 모두와 마지막 만찬을 한다. 이 때는 어느 누구도 TV를 보지 않는다. 핸드폰에 정신이 팔린 사람도 없다. 혜성이 접근하면서 그들은 덜 중요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접어두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에만 온전하게 집중한다.믿음의 가정에서 양육 받았던 신앙을 버렸다가 다시 찾은 율(티모시 샬라메)이 이 마지막 만찬 앞에서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전능하신 주여, 오만한 저희가 은총을 구합니다. 의심 많은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또한, 주여 이 어두운 시기를 사랑으로 위로하시고 무엇이 닥쳐오든 당신의 담대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율은 이 영화에서 모든 사람이 잊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구의 종말이 올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위로가 되실 수 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절망과 죽음을 마주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줄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이 닥치기 전에 영원을 준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복음은 이 세상의 소셜미디어나 오락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지구의 삶이 언젠가 끝이 난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영화에서 혜성이 다가온다는 소식은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지만,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은 준비할 새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그렇기에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아야 할 용서를 가르치고, 이 땅의 삶과 이 땅 너머의 삶까지 지속될 수 있는 진정한 소망을 선포해야 한다.원제: ‘Don’t Look Up’ and Sharing the Gospel in a Distracted 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문화예술
돈룩업
산만한세상
소셜미디어
영화
한 편의 시가 일깨우는 경이로움
by Leland Ryken
2022-03-03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시를 수업에 소개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를 늘 진행하였다. 먼저 학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시를 이해하고 즐기라고 하신 의도를 여러분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는다. 항상 그렇듯이 학생들은 화성인이라도 만난 듯이 나를 쳐다본다. 그러면 나는 좀 더 강력한 어조로 반복해서 질문한다.누군가가 제일 먼저 정답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함을 느낀다. 정답은 성경의 약 1/3이 시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시에 관해 생각해 보는 여유를 조금 갖는다면 삶이 좀 더 풍성해질 것이라고 설득하려는 것이 나의 취지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금 그렇게 하는 그들의 습관을 지속하는 격려가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시에 관심을 두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시의 세계 비록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시는 이미 우리 삶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시와 함께 찬송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다. 찬송과 노래는 시의 한 형태로, 내가 문학 수업에서 가르치는 시의 모든 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시의 상당 부분이 비교적 복잡하고 어렵지만 찬송과 노래의 시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시이다.게다가, 우리는 모두 평범한 하루 일과 동안 기본적으로 시를 활용하고 있다. 일출을 보며, 또는 획기적 사건을 이야기하거나 시간을 보내야 할 때나 우리의 일정을 조정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등의 경우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모두 은유법을 사용하고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시적 언어에 의지하는가? 왜냐하면 시적 화법이 산문보다 진실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깨닫기 때문이다.두 가지 오해살면서 시를 쓸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가 일반 사람들이 접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시를 다루는 법을 알았겠지만,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교회학교 교사들과 설교자들이 성경의 시는 가까이하기에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단언하는 성도들로부터 성경에 나타난 시에 관한 내용은 건들지 말라는 압력을 받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시를 접하는 데에 관해 시대적인 요소는 없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과거와 비교해 교육을 덜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더구나 시는 압축되어 있으며 이미지(구체적인 대상과 행동을 표현하는 단어)를 기본 언어로 사용한다. 그것의 간략한 소통 단위에 대한 선호와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의존보다 오늘날 더 특징적인 것은 무엇일까?또 다른 오해는 시가 일상생활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된 주장이다. 첫째, 시의 실제 언어는 삶의 일상 경험 가까이에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시인들은 우리를 물과 양(羊)과 빛과 좁은 길의 세계에 뿌리내리게 한다. 둘째, 시의 주제는 보편적인 인간의 경험이다. 소설은 인간 삶의 세계로 가는 창이고, 시 또한 그렇다. 시에 관한 어떤 책의 제목―시와 평범한 삶(Poetry and the Common Life)―만 보더라도, 거기에 시적 언어와 시적 내용의 본질을 모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시를 읽는 데 유익한 도움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시와 가까워지게 되기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라는 제목 아래 시를 접하기 위한 격려의 글을 정리하였다.첫째, 시를 진심으로 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시에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가 담론의 독특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구어체와는 다르다. 우리가 이것을 장점으로 볼지 단점으로 볼지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적용하는가에 달려있고, 나의 목표는 일반 그리스도인이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를 포용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시가 우리의 일상 표현 방법과 다르다고 비판한다면 우리는 시를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대신,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난다면 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성경은 시를 새로운 노래(시 33:3, 40:3, 96:1)로 표현하고 있다. 시의 참신함은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반가운 경험이 될 수 있다. 시인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우리는 그 언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시의 기본 단위는 이미지(그러나 오직 이것만이 시의 요소는 아니다)이며, 구체적인 대상이나 행동을 가리키는 모든 단어를 의미한다. 집과 산이라는 단어는 이미지이고, ‘걷다’나 ‘숨다’라는 단어도 이미지이다.때때로 이 이미지들은 직설적이고 문자로 표현되는 그대로이다. 예를 들어 자연 시인은 전형적으로 물리적인 그림을 우리의 상상 속에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시편 104:16의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라는 구절은 직설적 표현이다. 나무는 문자 그대로의 나무이고, 물은 문자 그대로의 물이다.그러나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해와 방패”(시 84:11)로 선포할 때처럼 시적 이미지는 비교나 비유의 일부일 때가 더 많다.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의 해와 방패는 아니시다. 그러나 이 비유들은 하나님은 해와 방패 같다고 역설한다.언어적 에너지 드링크이미지의 시적 언어와 말의 형태가 갖는 이득은 무엇일까? 시적 언어는 평범하고 지나치게 친숙한 것이 유발하는 단조로움과 진부함을 극복하게 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우리를 주목하게 하고 대화로 끌어들인다.은유나 직유 형태의 비교는 어떤 것이 비교되는 다른 것과 어떻게 유사한지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의 관심을 촉구한다. 시는 수수께끼와 비슷하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5)라는 표현에 대해 우리는 밤의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이 무엇인지, 나아가 그것들이 우리 삶에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이해하여야 한다.물론, 이런 식의 이해를 위해서는 속독이 아니라 천천히 읽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즐겁게 시를 감상하기 위한, 내가 줄 수 있는 중요한 조언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시적 이미지와 비유의 의미를 풀어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자발적 의사만 있다면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내가 여기서 논의하는 시의 형태는 짧은 시를 뜻하는 서정시이다. 서정시는 명상적이거나 성찰적인 경향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감성적이거나 감정적인 경향도 있다. 성찰적 시를 통해 시인은 발표된 주제에 대한 사고 과정을 독자와 공유한다. 감성적 시에서 우리는 시의 중심 주제에 대한 시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시편 1편은 경건한 사람에게 오는 복에 대한 묵상으로서 악인의 비참함과 대조된다. 찬양 시는 경건한 감정의 표현이다.서정시의 짧은 내용은 내가 설명한 사색적이고 분석적인 읽기 방식을 전적으로 가능케 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한다. 시는 긴 설명의 산문보다 한 줄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시를 언어적 에너지 드링크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시를 완벽하게 분석하기 위해 10분에서 15분 정도 시간을 할애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에세이나 책의 한 챕터를 읽는 데 통상 걸리는 시간보다 더 적은 시간이다.마음을 깨우다지금까지 우리는 시의 형식이나 기법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그렇다면 시의 내용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시는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인류와 신앙공동체의 공유된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 시의 목적이다. 서정시는 생각, 감정, 경험을 담고 있으며, 우리가 이것들을 응시하게 한다. 시는 올바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게다가 존 밀턴에 따르면 시의 목적은 “올바른 곡조로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애정은 우리의 감정이라는 단어와 겹치는 오래된 단어이다. 시는 적절한 감정을 깨우치는 정서적 형태의 글쓰기일 때가 많다. 내가 권하는 시는 우리가 경험의 한 측면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험에 대한 올바른 길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 대해 올바른 느낌이 들도록 도울 수 있다.반세기 동안 문학을 가르친 모든 활동 중에서 나에게 가장 즐거움을 주는 것은 짧은 시를 감상하며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Explication(자세한 설명)이란 단어는 자세히 읽거나 본문을 보는 것을 가리키는 문학 용어이다. 나는 당신의 애정을 일깨우고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하고, 바라건대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시를 읽어 볼 것을 권면한다.원제: A Little Poetry Improves a Life: How Verse Awakens Wond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명근
문학
시의언어은유
시적화법
시의참신함
마음의여유
그림언어
시적이미지
언어적에너지
성경과시의관계성
공유된경험의표현
내가 책을 큰소리로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이유
by David Mathis
2022-02-17
열한 살짜리 아들 쌍둥이와 긴 여행을 얼마 전에 마쳤다. 한 달 훨씬 넘게 걸렸지만, 배도 기차도 자동차도 탈 필요 없는 여행이었다. 사실 이 여행을 하려고 집을 떠나지도 않았다. 모닥불 가에 둘러 앉아 있으려고 가을에 딱 한 번 집 밖으로 나가긴 했다. 백만 단어가 넘는, 정확히는 108만 4,170 단어의 여정이다. 우리는 이 여정의 모든 지점, 모든 장, 모든 단어를 함께했다. 코로나 “봉쇄” 조치가 내려진 2020년 봄부터 2021년 9월까지, 18개월에 걸쳐서 나는 쌍둥이에게 일곱 권짜리 해리포터 시리즈를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 우리는 매주 2~3회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 시리즈를 읽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다음 책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잠시 쉬는 시간도 가졌지만, 한번 잡은 책은 한두 단원씩은 꼭 읽어 나갔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이 책을 다 읽기까지 다 합해서 100시간 정도는 들인 것 같다.‘크게 읽기’ 되살리기사실 아빠로서 100만 단어가 넘는 책을 100시간 동안 큰 소리로 아이들에게 읽어 준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나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길! 자녀에게 책을 크게 읽어 주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이다. 사실 이는 몇 주, 몇 달, 단기간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몇 년은 끈질기게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다.먼저 아내가 친구들과 “크게 읽기 되살리기”(Read-Aloud Revival)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듣고서 나를 부추겼다. 그 덕분에 나는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는 습관을 들일 기회와 기쁨을 얻게 되었다. 습관이 되었다는 것은 마지못해 억지로가 아니라 기쁘고 즐겁게 그렇게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선 다른 지출은 줄여서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사 주기로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삶의 속도를 줄이고 여유롭게 아이들과 함께 앉아 큰 소리로 책을 읽기 위해서, 우리는 불필요한 여러 활동―특히 스크린을 쳐다봐야 하는 것!―을 최대한 절제하기로 했다. 사실 10년 전에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큰 소리로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지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길고 지루한 어린이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 주려니 숨이 막힐 노릇이었다. 그 당시 내게는 큰 소리로 아이들에게 꾸준히 책을 읽어줄 수 있는 실력도 끈기도 없었다. 그때까지 나는 규칙적으로, 내가 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책을 큰 소리로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아서 책을 읽는 기쁨을 그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뜻밖의 여정어떤 아빠들은 목소리 흉내 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내 경우에는 아이들이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 재밌는 목소리로 ‘호빗’을 읽어 주면서 특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어설픈 영국식 억양으로 빌보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드워프는 거친 쉰 목소리로, 간달프는 영화에 나온 이안 맥켈렌의 목소리로, 골룸은 앤디 설키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사실 호빗은 얇고 가벼운 책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 내려면 몇 주일의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톨킨의 책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우리 아이들은 굉장히 지루해하기도 했고, 이를 이겨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과하면서 아주 중요한 인생 교훈을 배우기도 했다. 특별히 우리가 이 책을 모두 다 읽었을 때 나는 아들들과 함께 아주 두꺼운 책을 다 읽었다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골룸이 너무 무서워서 아이들이 악몽을 꾸지나 않을지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곁에서 안심시켜 주기도 했고, 두려움에 대해서 함께 대화하기도 했다. 마치 어둠 속 수수께끼처럼 아이들의 두려움을 해소해 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이 열 살쯤 되었을 때, 나는 이 아이들이 해리포터를 읽을 수 있을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한번 아이들과 함께 해리포터를 읽어 보기로 했다. 사실, 아이들이 해리포터를 읽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상황에서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책을 읽어 주거나 또는 오디오북을 들려줄 수도 있었다. 또는 “아직은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해리포터를 읽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과 함께 천천히 이 책을 도전해 보기로 했고, 아이들이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은 함께 즐기면서 읽었다. 또한 아이들이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나오면 잠시 멈추어서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설명하면서 읽어 나갔다. 또한, 나는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해리포터의 마지막 책에서 복음을 설명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에 수없이 많이 담겨 있는 인생 교훈도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특별히 덤블도어의 독백에서 우리는 정말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세 살이 되고, 여섯 살이 되고, 그리고 열한 살이 되는 동안, 큰 소리로 책을 읽는 아빠의 지구력도 증가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책을 읽는 지구력과 실력이 늘어가면서,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기쁨도 더욱 늘어났다. 하나님의 말씀, 큰 소리로 읽어 주기아내가 큰 소리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면 좋겠다고 내게 권했던 것처럼, 나는 다른 그리스도인 엄마들과 아빠들에게도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라고 권하고 싶다.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는 기쁨을 발견하길 바란다. 사실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는 시간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놀라운 기쁨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지난 2,000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큰 소리로 읽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통로였다. 사실 교회 역사 속에서 인쇄기가 사용된 것은 5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고, 가정마다 성경을 여러 권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난 교회 역사 속에서 예수님은 교회에 모여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경을 큰 소리로 읽어 주는 낭독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읽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고 명했다. 지금처럼 각 가정에 성경이 있고 스마트폰마다 성경이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사도들을 통하여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그 길은 바로 목자들이 큰 소리로 그들에게 말씀을 읽어 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교회에 전달하면서 큰 소리로 읽으라고 했다(엡 3:4; 골 4:16; 살전 5:27). 또한, 사도 요한도 큰 소리로 읽을 것을 기대하면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계 1:3). 특별히 오랜 시간 책의 백성으로 살아 온 1세기 유대인들의 상황에서 이는 굉장히 익숙한 일이었다. 회당에서 성경을 큰 목소리로 읽는 것은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있는 일이었다(행 13:15, 27; 15:21, 31; 고후 3:14-15). 심지어 예수님도 고향 나사렛에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큰 소리로 성경을 읽으셨다(눅 4:16). 아날로그 삶의 기쁨부모로서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실감하는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큰 소리로 책을 읽는 시간을 정말 사랑한다. 큰 소리를 책을 읽음으로써 아이들이 어휘력을 키우고,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배우고, 부모와의 유대와 관계를 다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시간은 결코 멈출 수도 붙잡을 수도 없이 흘러가지만 자녀와 부모 모두에게 정말 소중한 시간이다. 벌써 8차 개정판까지 출간된 “큰 소리로 읽기 핸드북”(The Read-Aloud Handbook)의 저자 짐 트렐리스(Jim Trelease)는 “아들의 독서능력을 키우는 아빠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했다. 1982년에 이 책의 초판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는 “남자들은 책 읽는 데 문제가 있다고만 생각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생각이 달라졌다. [이후 개정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그냥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초판에서는 아빠의 역할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신 개정판에서는 “아빠의 중요성”이라는 별도의 장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너무 늦지 않게아직 자녀와 함께 규칙적으로 큰 소리로 책을 읽는 시간을 보내지 않는 엄마아빠들에게 나는 이를 시작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쉽지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끈질기게 이를 실천해 보라.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큰 소리로 읽는 습관의 효과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또한, 부모도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특별히 이 습관이 만들어 내는 기쁨을 즐기는 법도 배우게 될 것이다.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열정을 가지고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열정을 쏟아 부으면 온 가족이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고된 하루를 마친 후에라도 단조로운 목소리로 억지로 책을 읽지 말고 에너지를 불어 넣어서 책을 읽으라.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열정을 쏟아 부으라. 다양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읽으라. 되도록 여러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읽으라. 지루함을 전염시키지 말고, 책 읽는 기쁨을 전파하라. 당신이 가르치지, 책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책은 당신과 자녀 사이를 연결하는, 또 자녀의 성품과 인격의 성장을 돕는 도구이고, 매개체이며, 환경이다. 가장 빛나는 보석나는 아이들을 그저 즐겁게 해주려고 책을 읽어 주지 않는다. 내가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 주는 가장 큰 목적은 아이들을 제자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책을 읽어 주면서 너무 자주 자녀에게 설교를 하거나 도덕적인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동시에 자녀에게 꼭 필요한 교훈은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기도 해야 한다. 나는 아이들의 마음과 반응, 관심의 정도를 예민하게 살피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이 지루해 하거나, 힘들어 할 때에는 짧은 분량만 읽어 준다. 반대로 아이들이 이야기에 쏙 빠져 있을 때에는 잠시 멈추고 아주 중요한 인생 교훈을 가르치면서 오랫동안 책을 읽어 주려고 한다.또한, 나는 아이들과 함께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책과 아주 진지하게 읽어야 할 책을 모두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아이들은 나이에 맞추어서 다양한 이야기를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중간계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좋아해서, 내가 아이들과 함께 진지하게 읽은 첫 번째 책은 호빗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고, 또 다른 책들을 읽어 나갔다. 그리고 코로나가 왔을 때 나는 아이들과 함께 드디어 해리 포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9월에 긴 여행을 마치고 나서 우리 부부는 열한 살짜리 쌍둥이와는 ‘반지의 제왕’을 읽기 시작했고, 일곱 살짜리 딸과는 호빗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큰 소리로 책 읽기의 가장 빛나는 보석은 톨킨도, 루이스도, 롤링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쉬운 성경,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 성경부터 진짜 성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아이들에게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속에서 참된 기쁨을 얻는 법을 가르치고 훈련해 나갈 것이다. 큰 소리로 책 읽기의 최고의 특권은 성경 읽기에서 누릴 수 있다.원제: Why I Read Aloud to My Childre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박광영
큰소리로책읽기
낭독
큰소리로읽기의힘
해리포터
나니아연대기
호빗
반지의제왕
성경읽기
독서
크게읽기운동
루이스가 프로이트를 만난다면
by 김선일
2022-01-27
요즘 C. S. 루이스와 관련된 영화와 연극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대학로에서는 ‘라스트 세션’이라는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3월 6일까지). 루이스의 회심 여정을 다룬 영화 ‘가장 반항적인 회심자’(The Most Reluctant Convert)를 1월말까지 인터넷으로 (유료로) 볼 수 있다. 또한 북촌나래홀에서는 연극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3월 말까지 공연된다. 필자는 며칠 전 연극 ‘라스트 세션’을 관람했다. 줄곧 종교적인 대화를 담았음에도,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오징어게임’의 배우 오영수씨가 출연해서 화제가 된 연극이다. 10년 전 오프브로드웨이 초연작인 이 연극의 원제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Freud’s Last Session)이다. 무신론자이면서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프로이트가 1939년 9월의 어느 날 죽음을 20일 앞두고 유신론자인 C. S. 루이스를 불러 격정의 대화를 나눈다는 가상의 무대를 설정한 것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살긴 했지만, 실제로 만났다거나 연극에서처럼 심오한 대화를 나눴다는 근거는 없다. 극작가 세인트 저메인의 흥미로운 상상일 뿐이다. 작가가 희곡을 작성하는 데 모태가 되는 작품이 있다. 그것은 하버드 대학교의 정신의학자인 아멘드 니콜라이(Armand Nicholi)가 쓴 ‘루이스 vs. 프로이트’라는 책이다. 니콜라이 박사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하나님에 관한 질문’(The Question of God)이라는 과목으로 30년 동안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 ‘루이스 vs. 프로이트’는 두 사람의 생애와 학문적 주제와 관심, 그리고 그들의 이론과 삶의 경험 등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설명한 책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어릴 때 상처를 안고 전통적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과 유물론에 빠지게 된다. 인간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프로이트는 종교를 나약한 인간의 의존으로 간주하는 무신론적 유물론을 평생 견지한 반면, 루이스는 31세의 젊은 학자였을 때 유신론으로 전향하게 된다. 니콜라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고 기독교 변증의 의도를 갖고 강의와 집필을 했기 때문에, 이 책의 전체 논조는 루이스의 주장과 그의 회심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연극은 ‘루이스 vs. 프로이트’의 주요 내용들을 축약해서 담고 있지만, 원작자인 니콜라이의 변증적 의도를 드러내지는 않고 두 인물의 논쟁을 동일하게 반영하는 중립적 입장을 견지한다. 연극의 시작과 결론이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두 인물의 대화도 프로이트가 말년을 보낸 그의 런던 자택에서 이루어진다. 연극 내내 출연 배역은 프로이트와 루이스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연극 무대도 시종일관 프로이트의 집이다. 연극 제목 또한 프로이트의 마지막 상담 세션을 의미하는 것을 보아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부담 없이 다가갈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 연극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의도로 알려진 것 같지 않다. 골든글로브 수상자인 오영수가 출연한다는 것 외에도 신구, 이상윤, 전박찬 등의 호화캐스팅으로 관심을 얻고 있다. 연극은 화려한 볼거리나 재미있는 대사는 별로 나오지 않고, 오히려 극단에서 사전에 조용한 대화로 진행되는 연극이니 소음을 내지 말아 달라고 당부할 정도다. 그럼에도 공연은 거의 매진 행렬이다. 실제 연극은 어떨까? 대부분의 대사들은 ‘루이스 vs. 프로이트’에 나오는 줄거리와 무대의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예의 없는 스포일러일테니 자제하겠다. 연극에서 두 인물이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는 가상의 설정은 프로이트의 요청으로부터 비롯된다. 전쟁의 암운이 드리어지던 1939년 프로이트는 9월에 생을 마치기 전까지 런던에서 살았고 루이스는 옥스퍼드에서 교수로 지냈다. 연극에서 프로이트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을 방문한 루이스는 자신이 당시에 낸 책 ‘순례자의 귀향’(The Pilgrim’s Regress)에서 불신자 프로이트를 패러디한 것을 따지고자 부른 줄로 알았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정작 루이스를 부른 이유는 루이스의 다른 책 ‘실락원 서문’(Preface to Paradise Lost)을 읽고 자신과 같은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변모하게 된 이유를 묻기 위해서였다. (이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실락원서문’은 1941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연극의 배경인 1939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책이다.) 이후 전개되는 두 사람의 불꽃 튀는 논쟁에서 루이스의 유명한 도덕률을 통한 신존재 증명, 욕망충족 논증, 완전한 신화이자 완전한 사실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등이 열거된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루이스의 변증을 그의 어릴 적 어머니를 잃은 경험과 연관시켜 해석을 시도하거나, 인간의 나약한 종교적 의존성향을 지적하며 고통과 악을 방치하는 신에 대한 분노를 표하고, 종교가 세상을 결국 유치원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절규하기도 한다. 루이스는 시종 단호하면서도 단정하고 예의 바른 모습으로 프로이트의 다소 신경증적인 반응에 답을 하지만, 그 또한 사이렌이 울릴 때는 기겁을 하며 탁자 밑으로 숨어 버린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옆의 전우가 포탄에 갈기갈기 찢기는 광경을 목격해서 가끔씩 사이렌 소리가 나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토로한다. 원작에서는 무신론자 프로이트에 비해 유신론자로 회심한 루이스가 한결 자기 사상에 일관되고 건강한 삶을 영위했다고 하지만, 연극에서는 두 인물을 여전히 괴롭히는 신경증적 고통을 공히 드러낸다. 필자는 음악에 대한 프로이트의 태도가 흥미로웠다. 그는 나치가 일으킨 전쟁 상황을 설명하는 공영 라디오 방송을 시간에 맞춰 청취하려 하면서도, 영국 총리나 국왕의 연설 부분만 들으려고 할 뿐 중간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듣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음악이 끝나고 연설이 나오면 자신에게 전화로 알려 달라고 할 정도다. 이는 프로이트가 특정한 음악이 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연관된 신경증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토록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던 프로이트가 루이스와의 치열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논쟁을 거친 뒤 루이스를 배웅한 다음에는, 라디오의 음악을 틀어 놓으며 무언가 상념에 잠긴 모습을 보인 상태에서,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연극은 끝이 난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 신을 부인하며 우주에서 인간이 홀로 자신의 운명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했던 위대한 정신분석학자가 젊은 기독교 유신론 학자와 가졌던 라스트 세션이 그의 생애에 대한 회한을 가져오게 한 단서일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추리일 뿐이다. 이 연극의 매진 행렬을 보면서 기독교 신앙에 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작은 모멘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특히 근래에 비종교인이 급속도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신앙을 중립 지대에서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필요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루이스에게 의존해서 기독교 변증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극에서 궁극적으로 보여 주는 점은 기독교 신앙의 증거를 놓고 벌어지는 팽팽한 대립이라기보다는 두 사상가가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며 걱정해 주는 태도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태도에서 신앙을 소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프로이트와 루이스는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 되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초를 정립한 거성이지만, 루이스는 자신이 대변했던 기독교 신학자가 아니라 중세 궁중 문학을 전공한 영문학자이며 대중의 언어와 논리로 기독교를 제시하는 평신도 변증가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이 계속되는 가운데 BBC 방송을 통해서 울려 퍼진 기독교 신앙과 선악에 대한 그의 설명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런던 시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이 내용은 후일에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는 20세기 기독교 고전으로 자리 잡는다. 루이스와 프로이트가 만나서 대화한다는 연극의 상상에, 나의 아쉬운 상상을 덧붙인다. 만일 프로이트가 2년을 더 살아서 41년까지 살았다면, 그는 생전에 루이스의 기독교 변증을 실제로 들을 기회를 얻지 않았을까?
CS루이스
라스트세션
순례자의귀향
실락원서문
순전한기독교
정신분석
기독교변증
프로이트
루이스vs프로이트
‘반지의 제왕’은 기독교 작품인가: 하나님을 찾기 위한 중...
by Devin Brown
2022-01-23
오늘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1892년 1월 3일은 존 로날드 루얼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생일이다[이 글은 ‘desiringgod’에 2022년 1월 3일에 발표되었다]. 오늘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아예 잊히거나 또는 고작해야 전문 문학 과정의 읽기 목록으로 강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톨킨의 두 위대한 걸작 ‘호빗’(The Hobbit,1937)과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1954-1955)은 책과 영상을 통해서 여전히 전 세계 수백만 독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왜 유달리 톨킨의 작품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출시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인기를 누리고 있는 걸까? 복잡하게 짜인 줄거리, 잊을 수 없는 등장인물, 놀라운 설정, 멋진 묘사를 그 이유로 들 수 있겠지만, 이러한 요소 중 그 어느 것도 톨킨에 열광하는 독자가 흔히 말하는 열정이나 또는 이 긴 이야기를 계속해서 다시 읽고 싶어 하는 열망을 적절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더 나은 대답을 위해 우리는 표면 아래를 살펴보고, 무엇이 중간계(Middle-earth)를 그토록 많은 독자들이 갈망하는 세계로 만드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1953년 12월 2일, 톨킨은 그의 친구 로버트 머레이(Robert Murray) 신부에게 상당히 짧은 다섯 단락의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는 그의 모든 편지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편지가 되었다. 머레이 신부는 ‘반지의 제왕’의 일부를 읽고 논평했으며, 그 글로 인해 “은혜의 질서와 긍정적인 양립성”에 대한 강한 감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The Letters of J.R.R. Tolkien, 171-72).톨킨은 머레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아주 유명해져서 자주 인용되는 말을 덧붙인다. “반지의 제왕은 물론 근본적으로 종교적이고 가톨릭적인 작품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었지만, 나중에 수정을 하면서는 의식적으로 그렇게 구성했다”(172).‘반지의 제왕’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작품이라고? 저자 자신이 그렇게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뜻 보기에 이것은 이상한 주장처럼 들릴 수 있다. ‘하나님’(God)이라는 단어는 ‘호빗’이나 ‘반지의 제왕’에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와 연관시키는 요소도 찾을 수 없다. 톨킨이 머레이 신부에게 한 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근본적으로 단어에 달려 있다. 톨킨의 말을 바꿔서 말하자면, ‘반지의 제왕’은 그 근본에서 또는 그 기초에서 종교적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그렇다면 기독교적 요소를 찾기 위해 ‘호빗’과 ‘반지의 제왕’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톨킨의 또 다른 편지가 단서를 제공한다. 톨킨, 그리스도인‘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편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이 출간되고 삼 년이 지난 1958년 가을, 데보라 웹스터(Deborah Webster)라는 미국 학자가 톨킨에 대한 강연을 요청받았다. 당시 인쇄본에서는 작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고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톨킨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 10월 25일에 톨킨은 답장을 보냈다. 그는 베토벤이 출판사를 속였다는 사실과 같이 예술가의 작품과는 사실상 아무 관련이 없는 사소한 세부 사항이 종종 연구자에게 “특히 소중한” 정보인 양 인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한탄하면서 편지를 시작했다(Letters, 288). 톨킨은 자신과 관련해서, 이탈리아어보다 스페인어를 선호하는 것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이 ‘반지의 제왕’에 영향을 미쳤지만,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톨킨은 몇 가지 기본 사실들, “아무리 교묘하게 표현되었다고 해도” 그것들이 “정말 중요하다”는 점을 계속해서 말했다. 예를 들어, 그는 1892년에 태어났고 따라서 작품의 배경이 되는 샤이어 동네와 매우 유사한, 산업 기계 이전 환경에서 소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어서 “더 중요한 것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며 “그것은 내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여기서 추론된 단어가 핵심이다. 톨킨의 이야기에는 기독교적 요소가 존재하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추론해야 한다. 더불어서 그는 이야기 자체에서 볼 수 있다고 있다고 말한다. 톨킨의 편지와 에세이가 그의 소설이 가진 기독교적 측면에 대한 추가 조명을 제공할 수 있지만, 작품의 표면 아래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외부 출처 없이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신앙에 토대를 두고어느 인터뷰에서 톨킨은 휘튼 대학 교수 클라이드 킬비(Clyde Kilby)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며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바로 그 필수적인(essential) 관점에서 쓰일 것이다”(Myth, Allegory, and Gospel, 141). 여기서 톨킨은 ‘근본’(fundamental)이라는 단어 대신에 ‘필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표면에서가 아니라 본질에서(in essence) 기독교 작품이다. 따라서 일부 톨킨 학자들은 반지 원정대(Fellowship)가 12월 25일에 리번델(Rivendell)에서 출발하고 사우론(Sauron)의 함락이 3월 25일(전통적인 십자가 처형 날짜)에 달성되었다는 사실(부록에서 보고됨)을 기독교적 표현으로 분류하지만, 이러한 세부 사항은 근본적이라기보다는 피상적인 사실에 불과하다. 대신에 우리는 빌보, 프로도, 그리고 반지 원정대의 다른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심오한 목적의식에서 톨킨의 기독교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톨킨의 주인공들이 가장 어려운 결정에 직면할 때에 경험하는 객관적인 옳고 그름 속에서 기독교 요소를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중간계가 드러내는 기독교 기초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우리가 그곳에서 발견하는 신성한 섭리에서 만날 수 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최근 저서 ‘섭리’(Providence)에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섭리라는 단어가 “의도적으로 세상에 제공하거나 세상을 유지하고 다스리는 행위”(30)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의미하는 바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을 이렇게 제안한다. 하나님은 “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일어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신성한 섭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두 가지 방식은 중간계에도 적용된다. 중간계 속의 섭리‘호빗’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간달프의 마지막 말에서 톨킨은 이야기 속 소위 운이 좋은 모든 사건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빌보가 백 엔드(Bag End)로 돌아온 지 몇 년 후, 어느 날 저녁 간달프와 발린이 예상치 못한 방문을 한다. 레이크타운에 번영이 찾아왔고 사람들은 강에 금물이 흐른다고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관련해서 빌보는 오래된 예언이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그러자 간달프가 묻는다. “빌보, 네가 지금의 풍요를 가져오는 데에 간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예언을 부정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설마 너의 그 모든 모험과 탈출이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고, 단지 네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한 운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272). 간달프의 이 질문에서 톨킨이 제공한 여러 직접적인 제안 중 첫 번째를 만날 수 있다. 그러니까 중간계의 배후에서는 운이나 우연 이상의 무엇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지 제작자 이상의 능력‘반지 원정대’(The Fellowship of the Ring)의 두 번째 장에서 톨킨은 빌보의 모험, 특히 그의 반지 찾기의 배후에 누구 또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주제로 돌아간다. 그 오랜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간달프는 빌보의 도착과 더불어 적시에 어둠 속에서 맹목적으로 반지에 손을 댄다. 그런 다음 톨킨은 간달프가 프로도에게 이전에 했던 말, 빌보가 반지를 주운 것이 단지 운이나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 사실의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반지 제작자의 설계도를 넘어서는 하나 이상의 어떤 힘이 분명히 작용했기 때문이다”(56).우리가 사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중간계에서도 일반적으로 섭리의 작용은 베일에 가려져 있기에 뒤늦게야 식별할 수 있다. 이 베일을 간단히 젖혀버리는 말로 간달프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빌보는 단지 반지를 찾기 위해 예정되었을 뿐이야. 그건 반지 만든 사람에 의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바로 그 경우에 너는 반지를 가지도록 예정되었어”(56). 여기서 간달프는 이러한 모든 사건이 일어나도록 의도한 주체가 무엇인지 또는 누구인지를 명시하지 않고 수동태를 사용한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함축한다. “하나님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우리는 그 계획을 이루도록 예정되었다.”단지 우연이 아닌 그 이상아홉 장이 더 지나고, 리벤델(Rivendell)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엘론드(Elrond)는 섭리의 손길을 암시하는 비슷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참석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우론이 좋아하는 반지, 반지 중에서도 가장 작은, 그 하찮은 반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242). 그런 다음 중간계에서 움직이는 자비로운 힘에 대해 언급하면서 설명을 이어간다. “그게 네가 여기까지 부름 받은 목적이야. 부르심을 받은 자여, 내가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나 너희는 먼 땅에서 온 이방인이로다”(242). 여기서 다시 톨킨은 독자들이 삶에서 섭리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한다. 때때로 우리도 어떤 일을 하거나 특정한 장소에 가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곤 한다. 우리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간계 속 신성한 섭리도 일반적으로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뒤에서 작동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섭리가 아니라 우연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엘론드는 평의회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이 찰나의 순간에, 우연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겠지만, 그렇지 않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기에 앉아 있는 우리가 이제 세상이 처한 위험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242). 톨킨의 요점은 이것이다. 섭리가 인도한 행위에는 분명한 의도와 목적이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순전히 우연의 일치로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램프로부터 나오는 불빛톨킨의 작품을 감상하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까? 그렇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 점은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지 않고도 톨킨의 소설을 즐겼던 수백만 독자들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사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이 가진 가장 놀라운 측면 중 하나는 배경과 관련 없이 모든 독자를 작품에 빠지게 하고 영감을 느끼게 하는 독특한 능력이다. 동시에 조셉 피어스(Joseph Pearce)는 학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톨킨의 소설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어 하는 진지한 독자라면 “중간계와 그 안에서의 투쟁이라는 톨킨이 지향하는 전체 개념의 중심인 그의 철학적, 신학적 신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Tolkien, Man and Myth, 100).1892년 1월 3일에 태어난 톨킨은 그로부터 여든한 해가 지난 1973년에 사망했다. 죽기 이 년 전에 톨킨은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당신은 보이지 않는 램프에서 나오는 불빛처럼,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모든 곳에도 어떤 믿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듭니다”(Letters, 413). 톨킨은 어떤 신성함이 작가의 작품에 내재하거나 또는 어떤 놀라운 빛이 작품을 비추는 경우에, 그런 신성함은 “작가로부터가 아니라 작가를 통해서 온다”라고 대답했다. 오늘날, 톨킨의 소설에 스며든 이 강렬한 빛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삶과 그의 놀라운 업적을 축하하는 데 다 같이 동참한다. 원제: Is ‘Lord of the Rings’ Christian?: Searching Middle-Earth For Go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J.R.R.톨킨
반지의제왕
호빗
중간계
하나님의섭리
존파이퍼
섭리
도시와 도시, 그 역사와 의미
by 이춘성
2022-01-13
역사관의 문제점20세기 초기 역사관은 논리 실증주의에 영향을 받아 실증주의 사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역사 실증주의는 기록된 역사가 실제 사실이었느냐를 증명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후 20세기 중후반의 역사관은 모든 역사 기록이란 당대의 관점으로 해석된 역사라는 주장이 더 힘을 얻게 됩니다. 사실을 찾는 것보다는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를 주관주의 사관, 혹은 역사 수정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즘 “역사는 승자의 역사” 또는 “역사란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라는 주장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결국,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과 남은 자들이 만든 주류적 의미가 역사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이러한 현대의 역사관은 증명 불가능한 수 백 년, 수 천 년 전의 역사를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기능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여러 면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행동에 대해서 이들의 친일 행위는 당시의 상황에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주장과, 지금 우리도 그러한 상황이었다면 이들과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수정주의적 역사 해석이 가능해지지 때문입니다. 또한,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역사적 사실도 얼마든지 왜곡 가능합니다. 이러한 일본과 친일적 역사학자들의 역사 해석에 우리가 불편해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우리가 이러한 수정주의적 역사 해석에 얼마나 익숙한지 생각해 본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 실증주의가 주장하는 것 같이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주관적으로 보는 관점도 만만치 않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기록들을 볼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보아야 할까요?성경의 역사관그리스도인들의 역사관도 앞에서 언급한 두 문제점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실증 가능한 역사로만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적에 대한 기록은 실증과 증명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또한, 성경을 우리의 주관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더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바른 해석이 필요한 책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고대의 역사 서술 방식을 이용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사진과 영상 기록과 같은 방식이 아니기에 현대적 사실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부족하나 당시의 사실 기록 방식에 따르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개인의 사적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의 가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 해석의 방향과 의미를 읽은 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이 해석의 틀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것이 사실을 바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가이드는 여러 영역에 걸쳐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성경적 역사관과 그 의미에 대한 것입니다.도시(עִיר, ir)의 역사창세기의 전반부는 인류의 탄생과 타락의 과정을 다루는 원 역사에 관한 서술입니다. 주로 창세기 1~11장이 이 내용을 포함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고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를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거절하십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가인은 저주를 받아 에덴 동쪽 ‘쉼 없는 땅’이란 뜻의 ‘놋’에 거주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땅의 이름처럼 쉼 없이 일했습니다. 쉼 없는 땅이라는 이름의 뜻이 의미하듯 가인이 거주한 땅, 놋은 가인이 지닌 근본적인 두려움과 불안에 기인합니다. 가인은 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최초의 도시를 만듭니다(4:17).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도시이자 성인 ‘에녹 성’입니다. 이후 이 도시를 거점으로 가인의 자손인 야발은 목축의 기술, 유발은 음악, 두발가인은 금속 세공과 기계를 만드는 기술, 그리고 라맥은 전쟁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렇게 도시와 도시 속에서 발전시킨 문명과 기술을 통해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불안을 해결하고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얻었던 평안과 안정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도시는 이들 속에 있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발명품이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도시는 가인의 후손들에게는 새로운 에덴의 건설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에덴이 바로 가인이 세운 최초의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이와 대비되어 하나님의 이름은 도시 밖에서 불립니다. 이것이 창세기 4:25-2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리고 5장에서 가인을 제외한 아담의 새로운 족보가 시작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족보가 서로 나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에는 도시라는 인간이 만든 가짜 에덴이 있었습니다. 또한, 도시의 문명과 기술은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에덴에서 인간들에게 은혜로 주어진 동산의 실과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가인의 도시와 도시가 만든 문명이 하나님을 제거한 가짜 에덴이며, 그곳은 인간이 주인이 되고자 하는 헛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시란 에덴을 빼앗긴 인간이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세운 대체 장치라는 것입니다. 세속 도시와 문명이란 결국 인간의 불안의 상징인 것입니다.이러한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기술은 이어지는 창세기 본문에도 계속됩니다. 셋으로 이어지는 아담의 새로운 계보는 노아에 이르러(6장) 강력하고 지배적인 도시 문화에 잠식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그 결과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향해 높은 탑을 건설합니다. 하나님은 바벨이란 도시를 흩으시지요. 인간 안에는 홍수로도 씻기지 않은 가인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죄인의 불안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암덩이같다고 가르칩니다. 이 불안은 하나님이 만드신 진짜 에덴에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만든 가짜 에덴으로 출발한 도시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일까요?도시 속의 도시창세기는 바벨탑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도시의 부정적인 측면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돔, 고모라 등의 도시들이 나오며, 이와 대조적으로 아브라함은 도시 밖에 거주하면서 땅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도적으로 도시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삭의 아내를 찾는 사건을 계기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찾기 위해 도시로 떠납니다. 종은 ‘나홀의 도시(성)’에서 도시 여자인 리브가를 찾습니다. 이삭의 아내는 도시 출신 여자였습니다(창 24). 그리고 야곱에 이르러 도시의 이미지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합니다.야곱은 형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도둑질해서 도망합니다. 이때 야곱은 마치 동생을 죽이고 도망하던 가인처럼 불안에 떠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극도의 불안 속에서 가나안의 어느 도시에서 노숙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던 중에 놀라운 꿈을 꾸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야곱에게 들려주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창 28:12-15). 깨어난 야곱은 이곳이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벧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섞이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던 가나안 지역의 루스라는 도시였습니다. 가인의 도시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집을 찾은 것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야곱이 루스에서 발견한 것은 그곳에 하나님의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도시가 가인의 도시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후에 야곱이 한 행동은 자신이 노숙하면서 베개로 삼은 돌 하나를 그 땅 위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첫 벽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제거한 인간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도시 한 가운데에서, 야곱이 돌 하나를 세우고 여기가 하나님의 도시라고 선언한 것, 그것이 하나님의 도시의 출발이었다는 것이지요.하나님의 도시하나님의 도시는 강력한 세상의 도시 속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되었고, 다시 세계로 흩어져서 하나님을 믿는 무수한 사람들과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계속됩니다. 이 하나님의 도시의 특징은 첫째로 문명과 시스템으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도시는 문명과 시스템으로 견고하게 디자인된 기계적 안전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시는 그 출발인 벧엘이 의미하는 것처럼 도시이기 전에 집이었습니다. 그 정체성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시는 시스템이기 전에 인격이며, 기계적 결합이 아닌 유기적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 도시에 속한 모든 자들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우는 모든 공동체에 적용됩니다. 인격의 공동체, 유기적 영적 연합의 공동체가 교회이며, 그리스도인의 모임입니다.하나님의 도시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도시를 하나님의 도시로 바꾸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시는 하나님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역사의 진행입니다. 세상의 도시는 그 특성상 하나님을 그들의 도시에서 철저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불안의 근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자멸하는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다만 여전히 우리가 강력한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야곱처럼 작디작은 돌 하나를 세우고 하나님의 도시를 짓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큰 도시와 더 위대한 문명과 기술을 추구하는 근원에는 인간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진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도시를 건설하는 이유는 마치 노아가 방주를 지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창 6:8) 하나님의 가족들의 정체성이며,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시가 나약한 모습으로 세상의 도시 한 가운데 서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외에는 어떤 것도 인간을 불안에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는 방법에 나약함,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약함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관
역사관
창세기
최초도시
바벨탑
하나님의집
하나님의도시
공동체
벧엘
마블의 멀티버스, 틱톡의 타임라인 전환, 그리고 하나님 나...
by Patrick Miller
2022-01-07
케이디 록스(Kady Rox)는 파리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칠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아직 탑승 중이라는 문자를 친구로부터 받은 케이디는 서둘러 공항으로 달려왔고, 다행히도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에 터미널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 두 명은 앞쪽 자리에 앉아 있었고, 케이디는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비행기 한참 뒷좌석에 배정되었다. 미국에 도착했을 때 세 친구가 해변으로 가자고 문자를 보냈지만, 시차 때문에 힘들었던 케이디는 그냥 그 문자를 무시했다. 그리고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이틀 후, 케이디는 같은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들이 기억하는 미국행 비행기는 완전히 달랐다. 케이디는 비행기 앞좌석에 앉아 있던 두 친구를 보았는데, 이 친구들은 자기네는 비행기를 놓쳤다고 한다. 또 세 친구 중 누구도 자기에게 해변에 가자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한다. 시차 때문에 기억이 헝클어졌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케이디는 하나의 급진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케이디는 타임라인을 바꿨다! 케이디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평행현실(parallel realities) 속에서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무한한 타임라인이 있는 다중우주에 살고 있다. 케이디의 원래 타임라인에서 그날 사건은 케이디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비행 후 어느 시점에서 케이디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타임라인으로 가는 포털에 들어갔는데, 거기는 바로 케이디의 친구들이 비행기를 놓친 평행현실이었던 것이다. 케이디는 틱톡에 이 이야기를 공유했고, 이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다. 케이디는 전환(shift) 이후 자신의 삶이 어떻게 좋아졌는지 계속 설명했다. 케이디는 인생의 대부분을 앞뒤가 맞지 않고 되는 일이 없는 잘못된 타임라인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지금 케이디는 올바른 타임라인에서 최고의 삶을 살고 있다.케이디는 타임라인을 변경하는 간단한 방법을 제공하는 틱톡의 영향력 있는 그룹에 합류했다. 그 방법은 샤워를 하는 것이다. 먼저 뜨거운 물로 스스로를 제한하는 믿음에서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찬물로 긍정적인 생각을 주입함으로 올바른 타임라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외부인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내부자에게 이 방법은 삶의 완전한 변화를 약속하는 새로운 복음이다. 이건 내게 질문을 던지게 한다. 도대체 이런 새로운 유형의 새로운 사고(New Thought)는 어디에서 왔으며, 왜 그렇게 매력적인 걸까?마블의 멀티버스 상상틱톡 유명인사가 다중우주의 개념을 발명한 게 아니다. 이 개념은 이론물리학에서 나왔다. 다중우주 이론은 우리가 아는 우주가 단순히 많은 평행우주 중 하나라고 가정한다. 현실은 평생 동안 미세 조정되는 건 아니다. 단지 확률법칙 덕분에 우리 우주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그러나 이것은 이론이 운을 띄우고 상상력이 나래를 펼치는 곳이다. 만약에 다중우주가 있다면 그 우주 속으로 무한대로 나를 만들어서 공급할 수 있다는 창의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TV 쇼, 책, 비디오 게임, 심지어 어린이 영화까지 생산하는 가내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만큼 이 아이디어를 주류 속으로 받아들인 프랜차이즈는 없다. 디즈니 플러스(Disney+)의 ‘로키’(Loki)에서 안티 히어로는 자신이 수많은 로키 중 하나일 뿐임을 알게 된다. TVA(Time Variance Authority)라고 불리는 레트로 기술관료 조직은 스스로에게 진실함으로 TVA가 미리 정해 놓은 스크립트에 균열을 일으키는 “변종”(variants)을 제거함으로, 다중우주의 모든 타임라인이 계획에 따라 진행되도록 관리한다. 주권적 능력을 가진 관료들이 마음대로 세상을 휘두른다는 사실에 반기를 든 로키는 TVA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이 최고의 로키가 될 수 있는 새로운 타임라인을 만든다.이번에 나온 ‘스파이더맨’은 다중우주 싸움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반응은 폭발적이다. 관람권이 판매된 날, 이어지는 다중우주에 대한 온라인 수요는 디지털 박스 오피스를 붕괴시킬 정도였다. 마블과 케이디 록스는 둘 다 비슷한 이야기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지금의 현실은 우리 삶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으며, 다른 현실로 뚫고 들어가는 것만이 우리 삶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이런 이야기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디즈니와 틱톡의 타임라인 시프터는 이 기도를 기괴하고, 환멸을 일으키며, 나 중심적이고, 인간의 능력과 사이비 과학에 근거한 대안 복음으로 변형시킨다. 나 중심의 멀티버스가톨릭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에 따르면, 근대 사회 이전에는 사람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할애한 시간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건 내부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의미로 가득한 매혹적인 우주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인 것이다. 과거에 수도사의 존재 목적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대표하여 거룩해지는 것이었다. 농민인 경우, 삶의 의미는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와 식량생산에 있었다. 영주의 목적은 사회를 질서 있게 만들고, 모든 사람을 부양하고,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었다. 당신의 목적은 매혹적이고 의미로 가득한 우주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위치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그러나 현대인은 우주마저 무의미하고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환멸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 밖을 봄으로써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발견한다. 나를 중심으로 도는 이 우주는 자유를 약속한다. 마침내 스스로를 정의하고, 스스로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아(selfhood)란 그 가능성이 무한하기에, 그런 발견은 오로지 더 큰 불안만 줄 뿐이다. 나를 정의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없이, 되어야 할 바른 나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잘못 선택한 경우라면?초신성이 하나의 별을 수조 개의 성운 입자로 폭발시키는 것처럼, 환멸의 세계는 인간의 마음을 끝없는 불안을 유발하는 대안적 자아의 성운으로 폭발시킨다. 다중우주를 제안하기 위해 굳이 이론물리학자가 필요하지 않다. 현대인의 마음은 이미 다중우주 중 하나에 살고 있다. 마블의 멀티버스는 단지 현대적 자아에 CGI 의상을 입힌 것이다. ‘스파이더맨’과 ‘로키’는 우리 시대의 실존적 곤경에 직면해 있다. 스파이더맨은 가능한 많은 스파이더맨 중에서 올바른 스파이더맨을 선택해야 한다. 로키는 가능한 많은 버전 중에서 올바른 로키를 선택해야 한다. 모든 서사 속 드라마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불안에 중점을 둔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잘못 선택하면 어떻게 될까? 누가 우리를 정의하는가?그러나 진리는 이것이다. 실존주의적 불안은 결코 내면을 들여다보아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우리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고 부서진 현실을 깨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에서 오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천국을 이 땅에 가져오려면 예수님이 필요하다(계 21:2).현재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외부를 통해 우리의 목적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공동체(교회)를 주셨다(엡 2:8-22). 자기발견이든 자기표현이든, 그게 뭐가 되었든 내면화된 인간의 노력은 결코 내가 진짜 ‘나’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롬 1:22-23).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자유를 줄 수 있다. 그 결과 마침내 나는 애초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요 8:31-38).원제: Marvel’s Multiverse, TikTok Timeline Shifters, and the Kingdom of Go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마블
로키
자기발견
인생의목적
자아확장
다중우주
멀티버스
디즈니+
스파이더맨
‘듄’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by Jaclyn S. Parrish
2021-11-26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걸작이다.” “압도적이다.” 영화 홍보에 남용되기 일쑤인 이 단어들이 드뉘 빌뇌브의 영화 ‘듄’(Dune)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소설은 “부드러운” SF와 복잡하고 난해한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 낸 걸작이다. 그리고 빌뇌브는 놀랍게도 이러한 원본 소설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원작 소설과 비교해서 떨어지기 마련인 디테일을 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촬영시와 상연시의 화면 비율 조정 기법]로 보완한다. 그리고 허버트가 그린 세계의 미세한 부분 중 일부가 지나치게 넓은 획으로 그려졌다면, 빌뇌브는 스토리의 방대한 규모를 아름답게 포착함으로 그 부분을 해결했다. 인류 미래의 수천 년을 배경으로 한 ‘듄’은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삭)과 아내 레이디 제시카(레베카 퍼거슨)의 외아들인 젊은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의 이야기이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파디샤 제국과 이 제국을 형성하고 있는 복잡한 행성간 봉건 체제 속에서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이다. 이 때문에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표적이 된다. 아트레이데스 가문에게서 위협을 느낀 파디샤 제국의 황제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천적인 하코넨 가문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민다. 결국 폴은 이 배반의 잿더미를 뚫고 빠져나와야 한다. 허버트가 그린 세계는 인상적인 인물과 배경으로 가득 차 있지만, ‘듄’은 우주를 (정치적, 경제적, 영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세력들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이나 그 우주에서 살아가는 개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돈을 따라가라‘듄’을 움직이는, 마치 돈과 같은 힘은 스파이스에서 나온다. 인류에게 가장 귀중한 상품인 스파이스는 사막 행성 아라키스에서만 나온다. 스파이스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고, 더 많은 먹으면 어느 정도의 예지력까지 생기게 해준다. 스파이스가 없으면, 성간 여행이 불가능해지고, 그러면 결국 그렇게 우주를 지배하는 제국도 붕괴될 것이다. 스파이스 거래를 서로 나눠 쥐고 있기 때문에, 성간항행길드(Spacing Guild)는 성간 여행을 독점하고 , 파디샤 제국 황제 샤담 4세는 봉건제의 최상위 지위를 유지하고, 하코넨 가문 일족들은 듄(아라키스)의 군주로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금권의 발판을 유지하고, 수많은 유력자들은 막대한 돈을 번다.허버트의 의도는 거의 확실하다. 그는 듄의 스파이스 거래를 화석 연료에 대한 서구의 착취 무역에 대한 은유로 사용했으며, 이 비유가 드러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수천 년이 흐른 미래에도, 우리의 본거지인 이 지구가 오래 전에 시간과 재앙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난 뒤에도, 인류는 여전히 이 지루한 게임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에 유럽의 왕과 교황은 정치적 경쟁을 성전(holy war)으로 위장했다. 18세기에 미국 남부의 번영은 노예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 21세기에 사람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에 노출된 채 일하는 저임금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만든 값싼 서양식 옷을 입고 산다. 수천 년 후에 파디샤 제국도 사막 행성 하나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 바뀌는 건 없다. 신화와 조작‘듄’을 움직이는 금권의 역학은 상당히 단순하지만, 사실 더 미묘하고 교활한 다른 세력이 뒤에서 작동하고 있다. 착취로 금권을 장악하는 세력에게 가하는 허버트의 비판이 예리하다면, 교묘한 종교에 취하는 그의 태도는 신랄하다. ‘베네 게세리트’는 기나긴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막후에서 인류의 정치를 움직이고 있는 여성들로만 이뤄진 유사 종교 집단이다. 신중하게 계획된 혼인, 유전자 조작, 때로는 전략적 유혹을 통해, 이 집단은 가장 유력한 가계의 혈통을 조작하여 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 ‘퀴사츠 헤더락’을 창조해 내려 한다. 그렇게 선택적 번식을 통해 태어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메시아는 시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강력한 정신을 소유할 것이며,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에도 인류를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통치할 것이다. 이 집단은 심지어 수 세대에 걸쳐 퀴사츠 헤더락이 도래할 것이라는 소식을 온 우주에 퍼트렸고, 그 메시아 강림의 예언을 수많은 사회의 문화적 기억 깊숙한 곳에 심었다. 사막 행성 아라키스의 모래 언덕(듄)에서, 폴은 이 행성의 선주민 프레멘 부족이 자신을 ‘리산 알 가이브’라고 부르며 메시아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라키스 부족은 리산 알 가이브가 자신들을 압제자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고, 더 나아가 아라키스 사막을 파라다이스로 바꿀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지만, 폴은 자신의 태생에 환멸을 느낀다. “이 사람들은 보도록 세뇌된 것만 볼 뿐이에요” 프레멘 순례자들이 자신에게 모여 들자, 폴은 어미니 레이디 제시카에게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신화의 불행한 운반자이다. 폴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젊은 아트레이데스에게는 누군가의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동료들에게 배신당하고, 적들에게 쫓기고, 사막에 버려진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트레이데스 동맹군이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거나, 탈주한 상태에서 폴과 그의 어머니가 의지할 데라고는 프레멘 부족뿐이다. 그리고 이 젊은 아트레이데스 공작이 이 유목민으로 군대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리산 알 가이브가 필요하다. 폴이 프레멘 부족에게 합류할 수 있게 된 결투에서, 이 젊은 공작은 이미 자신의 미래에 놓인 끔찍한 목적을 감지한다. 결투가 시작되자 폴은 시간의 바람 속에서 “퀴사츠 헤더락이 일어나려면 폴 아트레이데스가 죽어야 한다”라는 말을 듣는다. 젊은 아트레이데스는 위대할 것이고, 실수 같은 것은 하지 않겠지만, 베네 게세리트가 그를 위해 고안한 역할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의 인간성 중 상당 부분은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두려워하고 심지어 끔찍해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영화 ‘듄’의 개별 캐릭터들은 그들의 문화, 유전 또는 상속된 종교에 의해 정해진 궤도에서 제대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엄청난 특권을 누릴 뿐 아니라 자신을 움직이는 힘의 존재까지 충분히 알고 있는 폴조차도 다른 길을 선택하지 못한다. 빌뇌브가 결정론(determinism)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빌뇌브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주인공 루이스 뱅크(에이미 아담스)는 외계인 종족과의 만남을 통해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만나 키스를 나눈다. 뱅크는 자신의 어떤 (영광과 비극이 모두 있는) 미래를 보고 자유롭게 선택한다. 그렇지만 영화 ‘듄’에서는 사람들이 인간 종족의 주기적이고 진부한 패턴 안에 갇혀 있다. 익숙한 세계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 우리 시대의 공동의 죄와 조직적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두 손 들고 감사하기는 쉬울 것이다. 폴, 제시카, 레토,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자연주의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더 나은 방법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그런데 정말 우리가 그런 자유를 선택할까? 허버트의 우주를 진정한 구원자가 없는 세계에 대한 황량하고 우울한 묘사에 불과한 것으로 특징짓기란 전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버트가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하는 악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십자군은 이교도가 아닌 사제들이 주도했다. 남북전쟁 전 노예제를 지지한 남쪽은 대다수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고 내 옷장을 뒤져 보면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Made in Bangladesh) 태그가 적어도 두 개 이상은 있을 것이다. 커리큘럼, 정치, 인프라, 교단, 그리고 공급망을 탐욕과 권력 남용이라는 영원한 죄에서 풀어 내는 과정은 쉽지도 또 간단하지도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정도로 내가 그 속에 숨어 있는 역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속에 심각한 질병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변화를 향한 운동은 시작될 수 있다. 이것만은 자신 있게 주장하고 싶다. 허버트의 이야기는 특별히 행복하지도 않고, 또 그가 그리는 세계가 대단히 희망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 세계는 아름답고, 고통스러우며, 도저히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정직하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 원제: ‘Dune’ Is About All of 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듄
기독교세계관
메시아
사회정의
복음의능력
C. S. 루이스의 삶을 다룬 영화 한 편, 그리고 기적을...
by Brett Mccracken
2021-11-22
최근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의 회의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제기하는 주된 쟁점은, 기독교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가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시대에 득세하는 윤리 의식은 (특히 성과 젠더 문제에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변증법이 기독교의 논리(‘이것은 사실인가?’)를 논증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으로는 회의론자들에게 충분한 답을 줄 수 없을 것 같다. 이제 기독교의 윤리(‘이것이 옳은가?’)를 세상에 말해야 할 것이다.변증에는 상대해야 할 다양한 전선들이 있으며, 각 전선에 나서려면 저마다 알맞은 맞춤형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는 회의론의 양상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회의론자들이 갖는 질문과 의심은 그들 각자의 삶의 경험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질문에 뛰어들어 그들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 소개할 두 편의 영화는 이러한 점을 잘 포착한 영화다. 개인의 삶을 추적한 전기(biography)와 맞춤형 접근이 변증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질문과 의심 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영화라 하겠다. 먼저, ‘가장 반항적인 개종자’(The Most Reluctant Convert)는 C. S. 루이스가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여정을 탁월하게 묘사한 원맨쇼 형식의 영화다. 두 번째 영화 ‘증거를 대라’(Send proof)는 “기적이 존재한다면 그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오늘날의 많은 회의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초자연적 현상을 그리고 있다. 두 편 모두 추천할 만하며 논의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가장 반항적인 개종자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C. S. 루이스의 삶을 다룬 ‘가장 반항적인 개종자’는 미국에서 11월 초 한정된 기간에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앞서 같은 이름으로 무대에 올라 크게 흥행했던 연극을 각색한 것으로, 루이스의 자서전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 홍성사 역간)을 토대로 한다. 영화의 초반에는 맥스 맥린(Max Mclean)이 등장하여 중년의 루이스를 연기하고 루이스가 기독교로 개종할 시기의 연기는 니콜라스 랠프(Nicholas Ralph, 영국의 유명 드라마 ‘All Creatures Great and Small’에 출현한 배우)가 맡았다.영국의 기독교 영화 제작자 노만 스톤(Norman Stone, 루이스의 삶을 그린 BBC의 영화 ‘Shadowlands’의 연출을 맡음-역주)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영국의 옥스퍼드 지역에서 대부분 촬영했다. 영화 자체로도 기독교 배경을 가진 다른 대부분의 영화보다 확실히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지만 대체로 루이스의 기존 팬들과 성도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것이다.8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영화는 루이스가 어리고 젊은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부터(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4살에는 무신론자가 되었으며, 19살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지적인 깨달음과 함께 하나님께 돌아가기까지의 영적 여정을 조밀하게 담고 있다. 한편, 루이스의 이러한 영적 여정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친 것이 있는데, 루이스는 조지 맥도날드(George MacDonald)의 소설 ‘판타스테스’(Phantastes)를 읽는 중에 자신의 상상력이 “세례”를 받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에게는 믿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오언 바필드(Owen Barfield) 같은 문학적 동지들이 있었으며, 특히 루이스는 톨킨(J. R. R. Tolkien)과 함께 막달렌(Magdalen) 대학 교정을 산책하곤 했는데, 그때 톨킨이 루이스에게 해준 “참된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루이스의 회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나 같은 루이스 마니아들에게는 이 영화에 볼거리가 정말 많다. 교수 시절의 루이스로 분한 마이클 와드(Michael Ward)의 카메오 연기는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맥린의 내레이션 또한 유쾌하고 재치가 넘치며, 그의 뛰어난 전달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은 바로 영화의 대본이다. 이 영화가 루이스의 회심을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루이스가 그간 했던 수 없이 많은 말들을 적확하게 인용한 것이 한몫을 했다.예컨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홍성사 역간)의 한 구절이 흘러나오는데(“온전한 만족을 이 세상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 홍성사 역간)의 한 문장(“지금 우리는 세상의 바깥, 문 저편에 있다.”)이 뒤따라 나온다. 출처가 다른 두 인용구가 매우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 영화가 으레 하는, 뭔가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듯한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이 영화는 좋은 의미에서 장황하다. 원작이 1인극임을 고려할 때 당연하겠지만, 이는 개인적으로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예컨대 루이스가 기쁨을 젠주흐트(Sehnsucht, 갈망, 열망, 그리움을 뜻하는 독일어) 개념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원작의 문구를 그려 낸 이미지는 간혹 실망스러울 때가 있다. 루이스는 장난감 정원을 보면서 처음으로 기쁨을 경험했다고 한다.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기쁨’에 눈을 떴을 때, 그때의 느낌을 “이제 막 멈췄다고 생각한 그리움에 다시 사로잡힌 것 같은”이라고 루이스는 표현한 바 있다. 영화는 비스킷 통으로 만든 장난감 정원으로 이를 이미지화했다. 영화의 연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그려 낸 이미지가 과연 루이스의 강렬한 메시지 전달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의문이다.증거를 대라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VOD 이용 가능) 최근 몇 년간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기독교 다큐멘터리이다. 감독과 내레이션을 모두 맡은 엘리야 스티븐스(Elijah Stephens)는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 그중에서도 기적적인 치유 사건을 다룸으로써 관객들을 흥미진진한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다.감독은 영화를 위해 놀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평론가들을 각지에서 불러 모았다. 기독교 변증학 쪽에서는 J. P. 모어랜드(Moreland),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게리 하버마스(Gary Habermas), 크레이그 키너(Craig Keener) 같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이 대거 등장한다. 한편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와 존 로프터스(John Loftus, ‘The Case Of Miracles’의 저자)같은 회의론적 무신론자들의 출연도 눈에 띈다. 스티븐스 감독은 치유를 주장하는 사례를 조사하는 의학 연구계, 실제로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 또한 벧엘 교회(Bethel)의 빌 존슨(Bill Johnson)을 비롯한 치유 사역의 지도자들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스티븐슨 감독은 이러한 견해와 목소리들이 그저 스스로 말하도록 둔다. 기적적인 치유를 믿을 것인지 의심해 봐야 할 것인지의 판단은 관객에게 맡긴다. 기독교 배경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오늘날의 다큐멘터리들 사이에서 이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대부분이 자료에 기반한 복잡한 논쟁을 공정하게 보이기보다는 답을 정해 놓고서는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해진 답 쪽으로 조종하려는 경향이 있다. 감독은 그리스도인이고 영화가 다루는 문제에 관해 자신의 확실한 견해가 있지만, 그는 영화를 보는 이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관객들에 대한 존중을 표한다. 이 영화는 무신론자는 결국 패배하고 멸절해 버린다는 식의 선동을 하지 않는다. 모든 견해가 다 타당하다는 듯이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식으로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도 않는다. 단도직입적으로 ‘기적의 증거가 있는가?’라고 묻고 서로 다른 의견이 공정하게 겨루도록 한다.이 영화는 개혁주의 은사지속론의 관점을 담아내면서도 은사 남용을 강하게 비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적이 가능하다고 믿지만, 기적의 간증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증거를 대라’는 은사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과학적인 단서(evidence)와 확실한 증거(proof)는 적이 아니라 동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가장 반항적인 개종자’와 ‘증거를 대라’가 엄청난 걸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관람할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특별히 믿지 않는 친구들 가운데 이 두 영화를 받아들일 만한 친구가 있다면 함께 보고 토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두 영화가 회의론자들을 완전히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심 많은 회의론자가 설복되어 신앙인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멀고 험하다. 수많은 생각과 주변의 조언들이 그 길을 따라 나서기 마련이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보여 주듯이) 하나님께서 이 두 편의 영화를 사용하셔서 이것을 보는 이들이 믿음의 길로 돌아서는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원제: The New Films About Faith and Skepticis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C.S.루이스
변증
회의론
무신론
가장반항적인개종자
증거를대라
기적
은사지속론
예기치못한기쁨
처음
1
페이지
2
페이지
3
페이지
열린
4
페이지
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