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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5): 그리스도 중심 설교
by 고상섭
2023-06-2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남긴 많은 유산이 있지만, 설교자로서의 팀 켈러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그는 에드먼드 클라우니에게서 배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합하고 체계화했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다양한 설교 방식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성경을 설교하는 유일한 방식이라 말한다. 모든 선지자, 제사장, 왕은 궁극적인 선지자, 제사장, 왕을 향해 빛을 비추고 있는데 성경을 남김없이 온전히 전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성경 메시지의 중심 주제와 본질로 설교하는 것이다.[1]엠마오 마을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누가복음 24:25-27)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서와 선지서로 통칭되는 구약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며, 모든 구약 성경은 ‘자기에 관한 것’ 즉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라고 설명하신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요한복음 5:39)거듭남에 대해 질문하는 구약에 능통했던 니고데모에게도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요 3:10)라고 하시면서 구약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구원에 대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들었던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에 관해 설명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4-16)유명한 요한복음 3:16도 구약에 나오는 놋뱀 사건을 선명하게 재진술하신 것이다. 이렇듯 성경은 단순한 아브라함,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귀결되는 이야기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성경이 기록된 의도대로,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대로 설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학자 트램프 롱맨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영화 ‘식스센스’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1999년 나이트 사먈란 감독의 이 영화는 결말이 특이한데, 영화를 보는 내내 결말을 보기 전까지 주인공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다가 주인공이 죽은 귀신이었다는 것으로 반전이 일어나면서 영화 전체가 다시 이해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 ‘비밀의 커튼’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주인공이 커튼 뒤에 숨어 있고 그림자만 보면서 질문을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맞추는 퀴즈 프로그램이었다. 마치 구약은 커튼 속에 비친 예수님의 그림자이고, 신약은 그 그림자가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식스 센스’를 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대입해서 구약성경을 읽으면 모두 그림자 뒤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이야기의 맥락이 모든 주제의 모든 절정이 그리스도께서 수렴된다는 걸 안다면, 당신은 모든 성경 본문이 궁극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것임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당신은 무조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본문이 딱히 메시아 예언이나, 그리스도를 전조하는 주요 인물 혹은 통정경적인 주제, 핵심적인 성경 이미지나 비유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제 당신은 그분을 볼 수밖에 없다.[2]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성경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교회 목회자의 설교와 유대 랍비의 설교가 차이점이 없을 것이라 말한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향해 있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경이 단순한 인간 저자의 글이 아니라 그들이 쓰는 본문에서 더욱 충만한 의미를 밝히는 참 저자이신 성령님의 의도를 따라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며, 따라서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단순히 역사적 정황 속에서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구속사의 관점에서 이해해서 전하는 것이다.[3]어떤 본문을 설교하든 그것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성취됨을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는 그 본문을 제대로 설교할 수 없다.문화를 향한 설교팀 켈러는 자신의 설교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고 표현하지 않고 ‘문화를 향한 설교’와 ‘마음을 향한 설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왜 그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하는 것일까? 단순히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만이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전에 인간의 한계 상황을 직면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복음이란 인간이 할 수 없다는 절망의 사건을 선포하는 것이고, 또한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서 인간의 타락과 한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죄 사함이 없는 복음이 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 마음을 향한 설교와 문화를 향한 설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문화 내러티브가 각 개인의 정체성과 양심, 실재를 이해하는 것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문화 참여(Cultural engagement: 설교 안에 각 문화의 특성을 드러내고 평가하고 도전하는 것)은 타당하게 보이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청중의 삶의 근본을 발가벗기기 위함이어야 한다.[4]결국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전에 ‘문화를 향한 설교’를 통해서 청중의 삶 속에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우상들을 제거하는 복음의 장애물을 치워주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 과정을 통과할 때 청중은 회개를 통한 믿음으로 성화의 과정에 이를 수 있게 된다. 팀 켈러가 말하는 ‘문화를 향한 설교’는 브라이언 채플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타락한 상황을 드러내기’(Fallen Condition Focus, FCF)에 해당한다. 브라이언 채플은 성경을 주신 목적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디모데후서 3:16을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면 인간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완전하지 못한 것은 타락의 결과이다. 이런 타락의 양상이 자신의 죄악과 세상의 파괴를 통해서 나타나며, 이것 때문에 성경의 교훈과 내용이 필요하다. … 이 세상과 우리가 모두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 이렇게 성경이 우리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FCF)을 맞추고 있다... FCF는 성경이 쓰인 그 시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상황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공동의 상황이다. … FCF는 설교의 진정한 주제를 결정해 준다. 왜냐하면 그 구절이 쓰인 진정한 목적이 바로 FCF이기 때문이다.”[5]팀 켈러는 ‘인간의 타락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FCF를 왜 ‘문화를 향한 설교’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이유가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오늘날의 문화는 “자아 바깥에 있는 모든 권위를 전복”시키는 문화이며, 이것은 17세기에서 19세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진리에 도달하려면 모든 전통과 종교적 신념을 내려놓고 오직 이성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배웠다. 이것은 유례없는 개인주의로의 전향이었고, 개인주의는 각 사람은 자기 안에 고대의 지혜나 신적 계시의 도움이 없어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사상이라 설명한다.이런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은 자율성이며, 이 자율성의 확대 때문에 많은 사람이 종교적인 믿음을 미칠 정도로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이러한 후기-현대 정신을 향해 우리는 어떻게 설교해야 할까? 문화를 향한 설교의 열쇠는, 앞서 말했듯이 그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내러티브를 규명하는 것이다. … 문화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6] 마음을 향한 설교 팀 켈러는 문화를 향한 설교를 통해 문화 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들을 드러내서 문화를 평가하고 도전한다. 그렇게 복음의 장애물을 제거한 후에 사람의 마음을 향해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도록 초대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사람의 ‘마음’을 향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만 사람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을 통해 인간의 마음 안에는 감정(emotion)과 정감(affection)이 있다고 말한다. 수련회 때 눈물 콧물 다 쏟아도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정감’의 변화가 아닌 단순한 감정적 행위만 변했기 때문이다. 참된 변화는 인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정감’이 변화되어야 하는데, ‘정감’의 변화는 오직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감지할 때 전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성향이다.” 마음의 중심인 정감이 그 대상을 향해 사랑으로 끌릴 때 그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단순한 감정의 변화는 다양한 물리적, 심리적 자극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실제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거나 극히 미미한 변화만을 일으킨 채 덧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7]결국 팀 켈러가 말하는 ‘문화를 향한 설교’와 ‘마음을 향한 설교’는 각 문화의 우상이었던 잘못된 문화 내러티브를 드러내어 도전하고 복음으로 초대해서 그리스도가 아닌 주인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인으로 삼는 과정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사랑의 순서’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복음 설교자들은,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good)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들의 문화적 열망을 매개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사로잡음으로써, 마침내 그들이 진정한 지혜와 의로움, 또한 참된 능력과 아름다움이신 그리스도께 오도록 초청해야 한다.[8]성경적 원리를 통해 예수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 없다면, 다시 말해 그 본문의 특정한 진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만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건드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9]그리스도 중심 적용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많은 관심이 일어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정작 실제 설교에서 적용하려고 하면 여러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설교의 적용 부분에서 천편일률적으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에 급급해서 제대로 된 적용을 선포하지 못할 때도 있다. 팀 켈러는 에드먼드 클라우니를 추모하는 책,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배우면서 어려웠던 점과 그것을 극복했던 소감을 나누었다.클라우니 박사님이 가르치신 대부분의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실천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 9년 동안 구약 성경을 설교하면서 저는 본문에 충실한 동시에 현실과 관련된 방식으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라는 어려운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정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성취하셨는지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 다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해석학적 측면에서는 건전하고 고무적으로 하지만 그 본문이 성도들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도록 구상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고, 그런 문제들에 답하는 저만의 방법을 찾았습니다.[10]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적용’이라는 부분에서 여타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위 도표는 2006년 4월 고든코넬 신학대학원의 ‘Preaching to the Heart’ 세미나에서 강의한 내용인데, 팀 켈러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설교를 일곱 가지 타입으로 나누었다. 1. A-B : 정보 전달식 설교(성경 텍스트–저자의 메시지)2. A-C : 알레고리 설교(성경 텍스트–그리스도의 성취): 성경 주해가 없다.3. A-D : 교훈적 설교(성경 텍스트-적용)4. A-B-D : 조직 신학적 주해 설교(청교도 설교) (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적용)5. A-B-C : 구속사적 설교(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그리스도의 성취)6. A-B-C-D: 구속사적 적용 설교(성경 텍스트-저자 메시지-그리스도의 성취-적용)7. A-B-D-C : 마음에 닿게 설교하기(Preaching to the Heart)흔히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팀 켈러가 말하는 6번에 해당한다. 그러나 팀 켈러는 A(성경의 텍스트)에서 B(저자의 메시지)를 아는 주해의 과정을 거치고, D(적용)로 나아간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선포하고 나서, 그러나 인간은 그 기준에 따라 살지 못한다는 FCF를 드러낸다. 말씀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절망적 상태를 직면하게 해주고 그 대안으로 우리는 할 수 없지만 그 일을 성취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즉 C(그리스도의 성취)를 드러낸다. 그리고 팀 켈러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A-B-D-C-D의 패턴을 보이기도 한다.성경의 메시지(A)에서 주해의 과정(B)을 거치고,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D)을 드러내 주고 단순히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설교를 끝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함으로써 그 은혜로 우리가 순종할 수 있다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배제한 도덕적 설교와 다르고 그리스도만을 선포하는 구속사적 설교와도 다르다. 인간 마음의 중심에서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 줌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사랑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런 방식은 좀 더 풍성하고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는 통로를 내어 준다. 본문을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윤리적인 적용이 되어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인간이 할 수 없다는 FCF를 선언하고 그리스도의 성취와 은혜를 설교한 후에 적용으로 이끌어 가면 본문이 말하는 그대로의 선포를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쿠루빌라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영역이 바로 적용 부분인데, 팀 켈러는 본인의 방식으로 그것을 해결한 것이다.팀 켈러의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특징은 단순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니라 칭의를 성화와 연결하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라 할 수 있다. 이 설교가 도덕주의 설교와 다른 이유는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에 있다. 인간적인 결단을 통해 “내가 ∼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라는 것은 도덕주의,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행위의 동기가 칭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의 동기로 순종하는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는 설교가 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면 도덕주의 설교가 되지만,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면 ‘그리스도 중심 적용 설교’가 된다.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복음 즉 칭의를 통해 다양한 삶의 자리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이 적용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제시한다. 낙망과 우울, 사랑과 인간관계, 성, 가정, 자기관리, 인종과 문화, 전도, 인간의 권위, 죄책감과 자아상, 기쁨과 유머, 다른 계층에 대한 태도 등이다. 이런 주제들이 모두 복음의 동기 즉 칭의와 연결되어 성화해야 하는 구체적인 적용점이다. D. A. 카슨도 바울의 고린도전서를 설교의 적용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는 복음이 어떻게 태도나 정신 기강, 인간관계, 그리고 문화적 상호작용들에 광범위한 변혁을 일으키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이 작동해야 함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동일하게 그래야 한다. … 복음이 다음의 영역들에서 어떻게 삶을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복음이 어떻게 사업 관행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상업상의 우선순위들을 바꿀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11]그리스도 중심의 삶 아마도 가장 탁월한 성경 설교자들의 (성경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탁월성은 본능에서 나온다. 그들의 공식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멍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원리들은 무의식 가운데 발전된 것이고, 타고난 능력과 은사, 청중과 설교자로서의 경험을 조합해 터득한 것이다. 성경적 설교는 그들의 모국어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신학의 문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언어 체계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말이다.[12]팀 켈러는 설교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를 ‘본능’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많은 설교자들을 좌절시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설교를 잘하는 사람은 타고났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여기서 말하는 ‘본능’은 단순한 타고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설교는 복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설교자의 내면이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 또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설교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과 거의 같다. …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설교할 때도 일어나지 않는다.”[13]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면, 설교 전의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절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목매어 통곡하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설교자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경험된다.결국 그리스도 중심 설교란, 단순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설교자의 뜨거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흘러나오게 된다. 팀 켈러는 단순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이론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설교자의 마음에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얼마나 더 경이로운 분인지를 보세요! 당신의 모든 문제가 결국 이 진실을 직시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겠나요?”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설교의 심장이다. 팀 켈러는 이렇게 도전한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느끼고 있는가? 설교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분을 묵상하고 그분께로 침잠하고 있는가? … 실제 우리 설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단지 설교 준비만 하는 게 아니라 매일 기도와 묵상을 통해 정기적으로 그것을 계발하는 수밖에 없다. 요컨대 설교단이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려는 유혹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이 우리를 설교단으로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기보다 설교자로서의 삶을 더욱 힘써 준비하라.[14]주1.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29.2. 같은 책, 119.3. 김대혁, 프리칭 텍스트, 텍스트 프리칭, 160. 4.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36.5. 브라이언 채플,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53.6. 같은 책, 165. 7. 같은 책, 216. 8. 같은 책, 35. 9. 같은 책, 37.10. 데시스 존슨 엮음,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80.11. 팀 켈러, 센터처치, 93.12. 같은 책, 118. 13. 같은 책, 228.14. 같은 책, 273.
그리스도중심설교
팀켈러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4) : 복음 생태계
by 고상섭
2023-06-14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남긴 유산이 많지만, 여전히 팀 켈러가 이루지 못한 비전이 있다면 아마도 연합을 통한 복음 생태계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팀 켈러는 뉴욕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수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가 되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그 비전은 아직 진행 중이며, 팀 켈러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그가 꿈꾸었던 복음 생태계는 어떤 것인가? 팀 켈러를 대표하는 책, 센터처치는 세 가지 중요한 신학적 비전을 담고 있는데, 복음-도시-운동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신학적 비전은 각각의 정의와 내용이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비전이 되기도 한다. 복음을 통해 도시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운동성을 가지자는 명제를 묶어서 복음도시운동(Gospel City Movement)으로 표현하기도 한다.[1]복음적 겸손 팀 켈러가 말하는 복음 생태계는 단순한 교회 연합운동이 아니다. 복음도시운동은 말 그대로 복음을 통해 연합하여 도시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복음을 통하지 않으면 단순한 인간의 연합일 수밖에 없고 인간적 연합은 상호 이익에 기반할 수밖에 없다. 참된 연합은 복음적 겸손이 뿌리에 있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권유한다. 남편과 아내가 연합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성령님의 역사에 기대어 자기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한다. 부부의 연합은 단순히 인간적 노력으로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복종이며,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가능해진다.[2]지역교회의 연합도 마찬가지이다. 한 교회가 지역 전체를 전부 품을 수 없다는 복음적 겸손이 서로를 연합을 시작하게 한다. 팀 켈러는 도시 전체가 복음으로 변화되려면, 도시 안에 효과적인 몇몇 교회가 있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3]또 연합을 위해서는 복음적 겸손이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교회의 모델이나 신학 전통이 되었든 한 종류의 교회가 도시 전체를 전도할 수 없다. 도시를 전도하려면 다른 교회들과 기꺼이 협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비록 다른 신념과 관심을 가진 교회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관점을 ‘범 교회성’(Catholicity)이라고 부른다.”[4]리더머 교회를 개척했을 때 팀 켈러는 이 교회가 뉴욕이라는 도시를 불쌍하게 내려다보는 잘못된 경향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교회가 스스로를 도시의 구원자인양 여기는 것은 해로운 생각이었다. 복음적 겸손은 도시와 사람들을 존경하며 배운다. 그리고 기꺼이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을 가진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은 어쩌면 복음 전도를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5] 빌립보서 2:3에서 바울은 복음적 겸손을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설명한다. 교만은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는 것이고,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 복음적 겸손은 연합의 핵심 뿌리이자 그 전제조건이 된다. 기독교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겸손할 수밖에 없는 종교이다. 왜냐하면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도 선량함과 슬기로움을 갖추고 있음을 믿게 할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상당수는 윤리적으로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산다는 인식을 구성원들에게 심어준다. …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 기독교는 스스로의 윤리적인 공로나 지혜, 덕성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 덕분에 하나님의 용납을 받은 까닭이다.[6]또 복음적 겸손이 연합을 이룰 수 있는 이유는 겸손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을 멈추기 때문이다. 연합을 방해하는 요소는 ‘다툼과 허영’이다. 팀 켈러의 전기를 쓴 콜린 핸슨은 팀 켈러를 추모하는 글, “나의 영웅, 팀 켈러”에서 자신은 팀 켈러가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없다고 고백한다. 나는 팀 켈러가 다른 사람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십자가에 대해 많은 말을 한 사람에게서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내 목회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그렇지 않은 게 일반이다. 나 역시 고백하기보다는 비판하는 데 더 많은 말을 낭비했다. 안타깝게도, 불평을 들어줄 귀는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팀 켈러는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전화해서 자기가 중상모략을 당했다며 화를 내지 않았다.[7]팀 켈러는 “논쟁에 관하여”라는 존 뉴턴의 다음 글을 자주 인용했다. 친구들에게서 오는 비판에는 보통 핵심이 있고, 실제로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을 때 거기에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망이 일부 또는 심지어 크게 잘못되었더라도, 당신이 정말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아마도 당신이 신중하지 못하게 행동했거나 발언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비평가가 제시하는 비판이 근거가 틀렸더라도 그의 지적은 일부나마 옳을 것입니다. 그 비판의 근거가 잘못되었더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하고 주님 앞에서 마음을 다해 회개하고 겸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비판으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비판하는 이의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비판하는 그 사람을 정중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8]복음적 겸손은 비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에 연합을 가능하게 한다. 지역교회의 연합 복음적 겸손은 범 교회성을 강화하고 또한 분파주의를 타파한다. 노회와 총회로 연합하는 교단별 연합이 아니라, 지역에 있는 다른 교단과 함께 연합할 때 지역 전체를 더 효과적으로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리디머 교회는 수년 동안 다른 교단이 교회를 개척할 때 그곳에 재정과 자원을 보냈다. 장로교회뿐 아니라 오순절, 침례교, 성공회 교회가 개척하는 것을 도왔다. 이런 노력에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팀 켈러는 이것이 범 교회성을 실현하는 한 가지 분명한 방법이라 믿었다. 분열된 그리스도인 교회들과 교단들을 도시 운동으로 바꾸는 방법이었다.우리가 다른 종류의 교회들을 깎아내리거나 비판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관용이 없다는 보편적인 비판에 빠지게 된다. 만일 우리가 연합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우리를 실패한 이들로 볼 것이다. … 신학적 특징을 공유하는 교단들과 지속적으로 함께 하려고 애써야 하지만, 지역 수준에서 다른 교회들과도 협력하는 방향으로 일해야 한다.[9]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섬기려면 지역의 모든 교단의 교회들이 연합해야 한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그리스도가 환영하는 사람들을 교회가 배제할 수 없다고 못 박으며 분파주의는 이것을 부인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다른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요구하시는 교제를 거부하는 것이다.”[10]교회 성장학을 중심으로 도날드 맥가브란이 주장한 ‘동질성의 원리’라는 것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교회에는 비슷한 문화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할 때도 명확한 대상을 선정해서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로 모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지역사회와 교회 지도자가 잘 맞지 않을 때는 ‘당신의 교인을 재구성하라’는 과감한 말을 하기도 한다.[11]그러나 복음은 나와 잘 맞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셔서 죄인들과 함께 거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팀 켈러는 복음은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내려가는 성육신의 원리를 실천하는 것이라 말한다. C. S. 루이스의 대표작 순전한 기독교의 원제는 Mere Christianity이다. ‘순전한 기독교’보다는 ‘그냥 기독교’에 가깝다.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 교회는 각각 다른 교파이며 교리의 차이점이 있다. 각 교단의 차이점이 아니라, 그 모든 교단을 공통으로 묶고 있는 기독교, 곧 ‘공통 기독교’를 말한다. 개혁주의 교회와 감리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장로교, 침례교, 오순절이 모두 천국에서 만난다면 우리를 함께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공통적 요소에 집중해야 하고, 그 공통된 요소인 복음만이 지역교회를 연합시킬 수 있다. 그래서 팀 켈러는 지역교회를 복음으로 연합하기 위해 범 교회성과 비 분파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게 한다. 복음 생태계한 지역에서 한 교회가 빠르게 성장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의 숫자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재배치’ 즉 기존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이동하는 수치상의 부흥인 경우가 많다. 보통 활력이 떨어진 교회들로부터 신자들이 이동함으로써 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평 이동으로 몇몇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부흥이라면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도시 안에서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단지 재배치되는 것뿐이다. 도시 전체의 부흥이 일어나는 복음도시운동이 되려면 복음으로 도시를 변화시키는 운동성이 필요하다. 팀 켈러는 지역교회의 운동성을 위해 복음 생태계(Gospel Ecosystem)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생태계’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연 생태계가 유기체들과 시스템, 자연의 힘이 상호작용하며 균형을 이룰 때 자라는 것처럼 복음 생태계도 교회 조직과 사상, 개인과 성령님의 힘이 함께 상호작용하는 균형을 이룰 때 전체 지역교회가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 생태계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러한 유기적 균형은 오직 ‘복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진정한 부흥은 인간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원예의 비유’를 자주 든다. 인간이 최선의 노력으로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야 하지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노력이 없어도 수확하지 못하지만,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비가 내리지 않고 햇빛이 적절히 비치지 않는다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정원이 무성해지려면 원예사의 기술과 근면, 그리고 땅의 생태와 기후가 모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두 요소는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첫째, 인간적으로 운동에 이바지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철저하게 하나님께 속한 영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님의 섭리 없이는 복음 운동을 만들 수 없다. 운동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힘을 받고 복을 받는 생태계와 같다.”[12]팀 켈러는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복음도시운동을 일으키는 생태계를 세 개의 동심원으로 설명한다. 1) 첫 번째 원: 상황화된 비전 ‘상황화된 비전’이란 복음을 소통하고 구체화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복음을 도시 문화에 상황화할 때 비로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로 오고, 믿는 사람들이 다시 복음 안에서 회심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도시에서 복음 운동을 촉진하는 교회들이 모두 동일한 예배 스타일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복음 DNA’를 공유할 때 복음 중심적이며 문화에 기울이며 균형이 있고 선교적인 교회가 될 수 있다. 지역 연합의 핵심에는 상황화된 신학적 비전의 공유가 있다. 2) 두 번째 원: 교회 개척과 교회 갱신 운동들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하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재발견하며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는 회개 운동이 일어난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교회개척 운동이다. 오래된 교회가 갱신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지만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팀 켈러는 오래된 교회가 갱싱하려면 교회 분립, 즉 교회 개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생각하기에 교회가 부흥해야 분립 및 개척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팀 켈러는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분립해야 교회가 건강해진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그리스도인을 증가시키는 주된 방법은 교회 부흥이 아니라 교회 개척을 통해서다. 정체된 교회들이 부흥의 국면에 들어가서 성장할 때, 대개는 다른 교회들로부터의 수평이동에 의존한다. … 미국 교회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새로 시작한 교회들의 교인은 삼분의 일 내지 이가 전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던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10-15년 이상 된 교회들에 등록하는 새 교인들은 80-90퍼센트가 이미 다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다.”[13]100명의 교인이 있지만 계속 성장하지 않고 정체된 교회가 있다면, 50명을 떼어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 개척된 50명은 새로운 교회의 역동성을 가지기 때문에 지역 안에서 다양한 새 신자를 품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남아있는 50명의 모교회도 새로운 교회들로부터 도전을 받아 새로워진다. 1년 뒤에 두 교회는 성장하지 않았던 100명의 한 교회가 아니라 역동성이 있고 계속 성장해 가는 두 교회가 되고 성도들의 숫자도 100명이 훨씬 넘는 숫자가 될 것이다. 도시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나의 예배 스타일이 아닌 다양한 스타일의 예배가 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자신들에게 맞는 교회로 찾아가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거주민들, 새로운 집단을 전도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기존의 큰 규모의 교회보다 개척교회들은 변화가 쉽고, 다양한 사람들의 감수성을 반영하기 쉬운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백인들만 살던 지역에 33퍼센트의 중남미계 사람들이 들어온다면 의도적으로 이중 인종을 추구하는 교회가 새로운 거주민들에게 문화적 공간을 훨씬 잘 만들어 낼 것이다. 새 집단이 미국 문화에 충분히 동화되어 교회로 오기를 바란다면, 그들을 전도하지 못한 채 수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14]결국 한 도시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의 숫자를 확실하게 늘리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교회의 숫자를 확실하게 늘리는 것이다. 팀 켈러가 은퇴 후에 리디머 교회를 세 개의 교회로 나눈 이유도 교인 수 4,000명의 대형 교회 하나보다 교인 수 400명 되는 10개의 교회가 훨씬 더 역동적이고 전도에 효과적이며 지역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인 4,000명인 한 교회와 400명의 10개의 교회가 각각 1년이 지난 후 교인 수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작은 10개의 교회에서 교인 수가 훨씬 더 증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교회를 분립하거나 개척하는 것이 교회를 먼저 부흥시켜서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대안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3) 세 번째 원: 특화된 사역들세 번째 원은 교회를 자극하고 함께 도움을 주는 다른 기관들과 연합하는 것이다. 도시의 중보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부흥의 역사는 언제나 중보기도의 역사였다. 기도는 신학적 관점이나 교리보다 교회를 더 하나로 연합시킨다. 기도는 교단과 조직적 경계를 뛰어넘어 친목과 관계 형성을 돕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또한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협력할 때 더욱 성장과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 특정 그룹들은 다양한 단체들을 말한다. 캠퍼서 사역과 청소년 사역 등 특화된 복음 사역의 사람들과 미래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연합을 말한다. ‘정의와 자비’ 사역은 지역의 사회적 문제와 경제적 필요들을 채우는 데 연합하여 일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인 연대를 통해 한 교회가 돕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지역을 섬길 수 있게 된다. 복음과 직업을 연결하는 사역은 도시 안에 직장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연합운동이다. 이런 연합운동을 통해 지역 내에 교회 및 다양한 선교단체 심지어 NGO 단체와 연합하여 전체 지역을 섬기고 발전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티핑 포인트티핑 포인트는 작은 변화들이 일정 기간 축적되어 작은 변화가 하나만 더 일어나도 갑자기 큰 영향을 초래하는 시점을 말하는 단어이다. 물이 100도에 끓는다면 99도에서 더해지는 마지막 1도의 상황이다. 팀 켈러는 복음 생태계를 통해 지역을 변화시키는 티핑 포인트를 뉴욕이라는 도시에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숫자가 10퍼센트가 되는 지점으로 예상했다.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종류의 거주민들이 인구의 5퍼센트를 차지하기 전에는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5-22퍼센트에 도달하게 되면 전체 지역은 이들로 인해 움직이기 시작하며, 빠르게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뉴욕시의 경우 소수 집단들이 삶의 방식에서 감지할 만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숫자가 최소 5-10퍼센트이면서 동시에 구성원들이 공공 생활에 적극적으로 나설 때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감옥 안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감자들의 수가 10퍼센트에 도달하면, 감옥의 집단생활과 문화 자체가 변화된다고 한다. 도시의 티핑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과학적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점은 복음이 도시 생활고 문화에 가시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는 때이다. 우리는 뉴욕시에서 도심 인구의 10퍼센트가 복음 중심적인 교회에 참여하는 때가 오기를 위해 기도하며 사역하고 있다.[15]팀 켈러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처음 뉴욕에 와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복음을 통해 뉴욕에 헌신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은 1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25년이 지난 지금 5퍼센트 정도로 성장했다고 고백했고 이런 연합운동을 통해 궁극적인 목표는 10퍼센트가 넘는 것이라 말했다. 인터뷰를 하고 25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지금은 30년이 지난 시점이지만 팀 켈러가 꿈꾸었던 10퍼센트는 아직 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팀 켈러는 소망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상상해보라, 만일 맨해튼과 같은 곳에 많은 신자들이 있어서, 대부분의 뉴요커들이 자기가 존경하는 한 명의 그리스도인을 실제로 안다면 어떤 일어나겠는가? 많은 도시 거주민들을 기독교의 메시지로부터 방해하는 강력한 장벽들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만 명의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 … 도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술, 과학, 학문, 기업 등에서 핵심 역할들을 수행할 때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가진 권력, 재물, 영향력을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의 선을 위해 사용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16]팀 켈러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가 남긴 복음 생태계의 비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CTC코리아 이사들이 함께 쓴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에는, 팀 켈러의 소천 이전이지만,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복음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도시 가운데 충분히 많아져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도시의 공공 및 사회생활 가운데 눈에 띄게 드러나고 인정할 만한 수준이 되면 도시가 변화된다. 팀 켈러는 이런 비전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있고, 자신이 죽어도 이 비전은 계속 되어서 뉴욕의 10퍼센트의 복음의 증인들이 뉴욕을 변화시킬 날을 기대하고 있다.[17]팀 켈러는 자신이 죽어도 이 비전은 계속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말이 새삼 더 크게 마음에 와닿는다. 팀 켈러의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던 D. A. 카슨 교수는 팀 켈러를 추모하는 글에서 아벨은 죽었으나 여전히 말하는 것(히 11:4)처럼 팀 켈러의 비전도 그가 죽었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 회자되고 이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팀 켈러의 복음 생태계의 비전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천국에서 복음으로 변화된 뉴욕의 10퍼센트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동시에 한국에서도 각 지역의 도시에서 복음 생태계를 통해 변화의 티핑 포인트가 달성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한다. 복음은 우리를 연합시킨다. 그 연합은 복음의 생태계를 구축하여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주1. 팀 켈러, 센터처치, 778.2. 팀 켈러, 결혼을 말하다, 84-85.3. 같은 책, 779. 4. 같은 책, 772.5. 같은 책, 357.6.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55.7. Collin Hansen, “나의 영웅, 팀 켈러”8. Collin Hansen, “나의 영웅, 팀 켈러”에서 재인용9. 센터처치, 774.10. 같은 책, 776.11. 릭 워렌, 새들백 교회 이야기, 204.12. 같은 책, 783.13. 같은 책, 755.14. 같은 책, 759. 15. 같은 책, 788. 16. 센터치치, 788-78917. 전재훈, 고상섭, 박두진,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209.
복음생태계
팀켈러
상황화
교회개척
겸손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3) : 기독교 변증
by 고상섭
2023-06-10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존경하는 목회자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기지만 팀 켈러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가진 독보적인 영역 때문일 것이다. 마치 기독교 안의 한 영역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특히 팀 켈러의 변증적 설교와 가르침은 그의 탁월한 능력이 더욱 돋보인 영역이었다. 포스트모던 시대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교회의 부흥기에 인도 선교사로 갔다가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영국이 마치 자신이 처음 인도에서 마주했던 그 사회처럼 이교도의 사회로 변해 버렸다고 그의 다윈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에 술회한다. 뉴비긴은 영국 교회가 그렇게 쇠퇴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문화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 분석하면서 “서구 교회의 과제는 계몽주의 이성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다원주의 사회에서 일방적인 기독교의 선포는 자칫 교만으로 비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1]팀 켈러도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의 하나는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기독교 신앙에 점점 더 적대감을 드러내는 문화라고 말한다. 이제는 비기독교 문화가 아니라 탈 기독교 문화 시대에 직면했다. 이전 시대에는 교회의 가르침과 일반 사람들의 생각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오늘날은 초월과 초자연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문화적 분위기 때문에 신성한 질서 체계(sacred Order)를 무시하는 경향을 띤다.[2] 한국 교회에서 유행했던 사영리, 브릿지 전도법은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서 일대일로 전도하는 방식이었다. 가가호호 방문해서 전도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은 낯선 사람이 초인종을 누르는 것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큰 저항이 있는 시대이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달라져야 한다. 팀 켈러는 복음의 접점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복음의 접점(missionary encounter)을 마련하는 일은 (세상 문화를 배척하는 전략과 달리) 주변 문화와 연결점을 만들고(connects), (세상 문화에 동화되는 전략과 달리) 그 문화 속에 자리한 문제를 드러내며(confronts),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전략과 달리) 사람들이 진정으로 돌이킬 수 있도록 다가가야 한다(converts). … 세상과 같은 모습으로 그들과 연결되어야 하지만 또한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뿐 아니라 그들을 섬겨야 하며 리드하되 진정으로 회개하고 변화되도록 이끌어야 한다.[3]전제주의 변증 이런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팀 켈러는 변증의 방식으로 복음의 접점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을 뼈대로 자신의 변증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수업 시간마다 위의 그림을 그리고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큰 원인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성에 의해 스스로 판단하게 된다. 반틸은 “하나님 안에는 절대적 진리의 체계가 있어서 하나님은 비논리적이시지 않으시다”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는 모든 인간의 생각은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4] 전제주의 변증(Presuppositional Apologetics)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사람의 생각과 세계관 속에는 기초가 되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반틸은 이것을 생각의 ‘궁극적 준거’라고 표현했고, 팀 켈러는 ‘믿음의 도약’이라고 표현했다. 사실이란 누구나 다 알기에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거나(예를 들어, 길에 돌이 떨어져 있다) 감각적으로 자명하지 않지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걸 가리킨다.”[5] 그러나 사람의 세계관이나 주장들은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이 전제로 깔려 있다. 즉 “수많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취하는 첫째 신념은 배타적 합리성이다.”[6]유신론은 믿음을 근거로 하고 무신론은 이성을 근거로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가장 기초가 되는 첫째 신념은 믿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무신론을 신념으로 가지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신론을 증명하기 어렵듯이, 무신론 또한 증명으로 확정할 수 없는 신념일 뿐이다. 결국 유신론보다 무신론은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하고, 그래서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신념이며 ‘믿음의 도약’을 통해 어떤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팀 켈러는 “무(無)에서 불쑥 쏟은 관점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논리의 기초는 논리로 도달하지 않는 선행적인 신앙적 헌신”이라 설명한다. 결국 “‘이 세상 너머에 초자연적 실재가 없다’라는 진술이나 ‘이 세상 너머 초월적 존재가 실재한다’라는 진술 중 어느 쪽도 합리적 인간이 회의할 수 없게끔 경험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신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하는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담겨있다. 따라서 과학만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선언은 그 자체가 과학적 연구 결과가 아니라 또 하나의 신념일 뿐이다.”[7]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계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는데, 자연을 통한 일반계시와 성경을 통한 특별계시가 그 둘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자연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리스도와 성경의 렌즈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은 세속적인 생각은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팀 켈러는 전제주의 변증의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잘못된 전제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복음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복음 전도의 방식이라 말한다. 팀 켈러는 반틸의 전제주의를 변증의 틀로 사용하지만, 반틸과 다른 면도 많다. 팀 켈러 전기의 작가 콜린 핸슨은 “켈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반틸로 대표되는 신칼빈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면서도 켈러는 일반 은혜 교리를 강조함으로써 반틸과 노선을 달리했다”고 평가한다.[8]가장 다른 점은 반틸이 거부했던 고전주의 변증을 받아들여서 활용하는 것이다. 반틸은 전제주의를 통해서만 바르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팀 켈러는 변증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결국 성경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만 세상과 인간에 대해 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둘 다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비교해보면 성경적 관점이 더 말이 되고 합리적이며 비성경적 관점은 스스로 안에서 모순을 드러낸다. 문화 내러티브 왜 팀 켈러는 이렇게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한 변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 즉 다른 신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마음의 주인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주인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문화를 통해 사람의 마음이 형성된다고 말한다. 종교를 완전히 없애버릴 때가 아니라 종교 때문에 특별히 동요하게 되는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때 사회는 세속화된다. 영국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1퍼센트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29퍼센트만이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답변했다. 자신이 특정 종교 그룹에 속해 있지만 열성적이지 않다는 의미이며. … 블룸즈버리 그룹이 하나님의 왕국을 대체해버린 셈이다.[9]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블룸즈버리 그룹’은 1906년경부터 1930년경까지 런던과 케임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한 영국의 지식인, 예술가 모임을 말한다. 즉 오늘날 신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라고 했다. 세속화된 오늘날은 신을 죽인 사회이지만 사람의 마음속에는 ‘종교의 씨앗’이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무언가를 신의 대체자로 삼아야 하는데, 오늘날은 그 자리를 ‘문화’가 차지한다고 설명한다. 팀 켈러는 이것을 ‘문화 내러티브’라고 부른다. “문화 내러티브는 모두가 아는 것들, 너무나 자명해서 거의 의식조차 하지 않지만, 성경과 다른 세상이 아는 공리를 말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식의 표현이다.”[10]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복음 설교자들은,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good)을 향한 그들의 가장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11]설교자가 성도들 생각 속에 숨어 있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도전해줄 때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들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 복음으로 가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 뒤에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렇게 팀 켈러는 변증적 요소를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삼으며, 복음으로 가는 장애물을 제거해준 후 복음을 소개한다. 변증의 예 사람들이 교회를 거부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하는 ‘진리의 배타성’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여러 종교가 모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 배타적이라 비난한다. 그러나 팀 켈러가 말하는 전제주의 변증의 방식으로 ‘기독교가 배타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전제를 살펴보면 아마도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신념이 있을 것이다.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신념이 있을 때만이 진리가 하나라는 신념을 배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A 진리를 비판하는 근거는 B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하나라는 사람의 전제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전제를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표현기독교는 배타적이라 틀렸다 기독교는 진리이다 신념진리는 하나가 아니다 진리는 하나이다 근거없음 성경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믿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가 배타적이다’라는 명제를 알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생각하는 세계관은 결국 어딘가부터 들어온 것인데 바로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의 신념은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생각의 뿌리에서 온 것인데 ‘진리가 하나가 아니다’라는 신념은 증명할 수 없는 생각으로 결국 그의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첫째 신념은 언제나 믿음이다. 그래서 팀 켈러는 이것을 ‘믿음의 도약’이라고 표현했다.‘도약’이라는 말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연결이 없다는 뜻이다. ‘기독교가 배타적이다’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신념은 ‘진리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말이고 그 신념이 어디서부터 왔냐고 묻는다면 합리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진리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의 신념은 ‘진리는 하나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결국 성경이라는 근거를 통해서 온 것이다. 즉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은 어떤 근거도 없는 문화 내러티브적 생각만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성경이라는 가장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믿음을 세운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상충되어 보이지만 모순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아닌 세계관은 모두 스스로 모순에 부딪치게 된다.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종교관이 기독교의 종교관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비난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서 그리스도인도 기독교의 종교관이 다른 종교의 종교관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의 논리대로라면 기독교가 자기 종교관이 우월하다고 다른 종교관이 틀렸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자기도 동일한 배타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자신이 따르는 신앙이 다른 것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은 자기중심적인 발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단정부터가 자기중심적이지 않을까?[12]자신의 종교관이 진리라는 주장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배타성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 정말 진리가 하나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적 포용과 연합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사지선다 문제 중에서 정답이 오직 하나라면, 정답을 하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배타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타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기독교가 진리라는 주장을 하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폭력 또는 회유와 협박을 통해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배타적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근본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는 종교이다. 왜냐하면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 자신들보다 훨씬 인격적이고 슬기롭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의 윤리적인 공로나 지혜, 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 덕분에 하나님의 용납을 받은 까닭이다. … 근본주의는 폭력으로 이어진다고들 하지만, 불가피하게 (진리를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배타적일지라도 따르는 이들을 겸손하고 평화를 사랑하게 만드는 신념이 있을 수도 있다.[13]진리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배타적 확신 체계를 믿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적이며 섬기며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질렀던 일들을 눈 질끈 감고 가볍게 넘어갈 순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힘이 이 어지러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팀 켈러는 ‘기독교가 배타적이어서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신념을 들추어서 그가 가진 모순을 드러낸 후에 진리를 하나라고 믿는 배타성을 가지고 있어도 세상에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이 기독교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비난했던 사람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며 모순이 없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팀 켈러는 탈기독교 시대 전도에서도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 아래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바르게 복음을 전하려면 세속적 내러티브에 대항할 교리문답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전 개신교 교리문답을 보면 로마가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이 많다. 그것은 로마가톨릭의 문화 내러티브적 오류를 드러내는 대항적 교리문답이었다.[14]이처럼 기독교 신앙 안에서 변증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의 모순을 드러내고 진리를 바르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팀 켈러는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지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주었다. 레슬리 뉴비긴이 서구 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져야 할 ‘계몽주의 이성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것’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바로 팀 켈러일 것이다. 팀 켈러는 복음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과 과정의 중요함을 변증을 통해 알려준다. 팀 켈러의 유산인 기독교 변증을 통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며 바르게 복음을 전하는 많은 사람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주1. 레슬리 뉴비긴, 다윈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26.2. 팀 켈러, 탈기독교 시대 전도, 15.3. 같은 책, 26.4. 이승구, 코넬리우스 반틸, 59.5.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370.6. 팀 켈러, 답이 되는 기독교, 51. 7. 같은 책, p.56.8. 콜린 핸슨,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 115. 9.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14.10. 팀 켈러, 설교, 154.11. 같은 책, 35.12.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46.13. 같은 책, 57. 14. 팀 켈러, 탈기독교 시대 전도, 77.
팀켈러
기독교변증
문화내러티브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에서
by Matt Smethurst·Collin Hansen
2023-06-05
기리며: 팀 켈러(1950-2023)콜린 핸슨은 그의 새 책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Timothy Keller: His Spiritual and Intellectual Formation)에서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의 이 공동 설립자를 형성한 가족 구성원, 친구, 교수, 목회자, 저자를 조사한다. 켈러의 삶과 영향에 대한 이 매혹적인 심층 탐구서의 일독을 추천한다. 이 책을 더 읽고 싶어질 스무 대목을 간추렸다. [아래 인용의 페이지는 원문/역간본 순서] 브루스 헨더슨은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이던 1970년 4월 21일, 그날의 극적인 순간을 기억한다. 브루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니 팀이 침대 발치 바닥에 말없이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브루스는 뭔가 달라졌음을, 팀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마침내 팀의 씨름이 끝난 것이다. 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 마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구원을 받았다. 어찌 된 일일까? 팀은 왜 달라졌을까? 악과 고난과 심판에 대한 그의 지적 관심은 돌연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타 종교에서 답을 모색하고 그리스도인들과 열띠게 토론한 끝에 팀은 결국 자신에게 하나님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새로운 방식의 영적 깨달음이 아니라 마침내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자신의 죄에 압도되고 실패와 결함을 직시한 팀은 성경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다." 그는 주제넘게 하나님을 판단하던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의로우신 동시에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따르기로 했다. 정의로우신 그분이 그의 죄를 용서하셨다. 이로써 종교학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Jesus the King)에서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대학 시절 설명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성경이 생생히 살아났다. 이렇게 표현하면 가장 좋을 것이다. 변화되기 전에는 내가 성경을 뜯어보고 캐묻고 분석했는데, 변화된 후에는 마치 성경이 또는 성경을 통해 그분이 나를 뜯어보고 캐묻고 분석하시는 것 같았다.” (18/53-54) 클라우니와 메릿 중 누구를 본받았든 간에 켈러는 버크넬 시절에 들은 전도 설교 방식을 이후 수십 년간 그대로 구현했다. 그는 곁가지 없이 늘 복음의 기본 메시지를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그분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27-28/65)크리스티에서 켈러로 성이 바뀌기 전부터 이미 캐시는 팀 켈러의 지성과 영성이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팀 켈러에 대한 글쓰기는 곧 팀과 캐시에 대해 쓰는 것이나 같다. 이 대등한 지성의 부부는 신학교에서 만날 때부터 똑같이 사역에 헌신하고 문학을 사랑하고 신학에 잔뜩 심취해 있었다. (42/86) 머잖아 켈러는 자신의 설교를 조정하여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고 명확하게 전달해야 함을 깨달았다. 호프웰에서 상황화에 입문한 셈이다. 먼저 듣고서 실상을 파악한 후에야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음을 그는 절감했다. (109-110/173-174)웨스트호프웰에서 재직하던 중에 켈러는 리처드 백스터의 참목자상(The Reformed Pastor)을 청교도 문고본으로 읽었다. 그 책에서 백스터는 매년 적어도 한 번은 모든 교인의 가정을 심방할 것을 권한다. … 책에서 읽고 호프웰 지역의 다른 목사들에게서 본 역할 모델을 통해 그는 설교자만이 아닌 목회자의 본분을 익혔다. … 켈러는 호프웰 시절을 일생 최고도의 사역 형성기로 회고했다. (114-115, 118/180, 184)많은 사람의 결론에 따르면 켈러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법을 호프웰에서 배웠다. 호프웰의 블루칼라 회중 덕분에 그가 어렵고 복잡한 개념을 그리스도인과 비신자가 똑같이 이해할 수 있게 다듬어야만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만일 신학교에서 곧바로 고학력자 위주의 회중에게로 건너뛰었다면, 그는 결코 널리 대중적인 작가나 설교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의욕적으로 배우려는 이들에게 도전하면서도 나머지 모두의 덕을 세우는 글이나 설교를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121/188)켈러에 따르면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는 원인도 거기[독선]에 있다. 예수님은 아웃사이더를 끌어들이고 인사이더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셨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반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반듯한 사람들은 자신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함을 알지만, 망가진 소외층은 환영받는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143/217-218)20세기 초의 보수 복음주의와 진보주의는 뉴욕을 온갖 득실거리는 유혹으로 신앙인을 노리는 현대판 바벨론으로 보았다. 켈러가 세우려 한 교회는 도시 안에서 도시와 구별되면서 도시를 사랑하는 회중이었다. 도시의 영적 곤경에 늘 초점을 맞추면서도 물리적 필요 또한 채워 줄 수 있는 교회 말이다. (156-157/235)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교회의 어떤 결정이 자신들과 다르면 이를 신앙고백에서 벗어난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적하는 교리의 타협은 때로 신학적 비전의 차이에 불과하다. (173/257)켈러가 처음에 이 사명에 적합한 다른 사람을 찾다가 점차 자신이 가야 함을 깨닫는 동안, 필라델피아의 친구들은 몇 달째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그 모임에 가서 “제가 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캐시가 보기에 그 결정은 남편의 평생에 “진짜 가장 ‘남자다운’ 일 중 하나”였다. 그는 이주하기가 두려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느껴졌다. 그 결단의 열매가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대형 교회가 될 줄을 그가 알았을 리는 만무하다. 교회가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그냥 믿음으로 다음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192/279-280) 리디머가 이 장로교 여성회에서 받은 후원금은 거의 9만 달러로, 개척을 위해 모금된 총액의 약 3분의 1에 달했다. 그들의 지원은 단번의 헌금으로 그치지 않았다. 본인도 시인하듯이 캐시가 그 여성들에게 쓴 “기도 편지들은 그때까지 누군가에게 쓰거나 받은 것 중에서 가장 자기연민에 젖어 징징거리는 내용이었다. 캐시가 보기에 그 여성들은 자기네가 살벌한 대도시에서 세 아들을 길러야 하는 캐시의 입장이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해했다! 그녀가 받은 헌금 중에는 어떤 가정에서 푼돈을 모아 켈러 가정의 맥도널드 외식용이라고 따로 표시한 12달러도 있었다. 지금도 그녀는 이 여성들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캐시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기도의 사투를 벌였어요. 그래서 처음 몇 년 동안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교회개척을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과 특히 여성들이 기도한 적은 사도 바울과 초대 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결코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193/281)기독교 공동체 자체가 [리디머]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이었다. … “세상에서 효과적으로 열매 맺는 선교의 진정한 비결은 우리 공동체의 질에 있다.” (197, 215/287, 310)켈러는 … 책을 동시에 넓고 깊게 읽지 않으면 자신의 설교가 진부한 반복으로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206/299)켈러는 이렇게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유능한 기독교 사역자가 되는 관건은 자신의 은사와 재능의 한계를 어떻게 온전히 은혜에 힘입어 성품으로 보완하느냐에 달려 있다. 리더십 책들이 대체로 조언하는 내용은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은사를 파악하라는 것과 이를 보완해 줄 은사가 있는 사람들과 팀으로 사역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면 현명한 처사지만, 그게 가능하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본인의 경건으로 보완하지 않는 한 은사의 부족함이 당신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 으레 관찰하는 바지만 사역은 어느 쪽으로든 사람의 영적 성품을 증폭시킨다. 이전의 모습 그대로 두지 않는다. 이전보다 훨씬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반대로 훨씬 못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214/309) 캐시가 매일 밤 예외 없이 함께 기도할 것을 제안했다. 그때 그녀가 한 말이 팀의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신이 죽을병 말기라서 매일 밤 취침 전에 특정한 약을 한 알씩 복용하지 않으면 의사 말대로 몇 시간 내로 죽는다고 가정해 봐요.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죽는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잊어버릴까요? 건너뛰는 날이 있을까요? 아니죠, 너무 중요해서 잊지 않을 거예요. 한 번도 빼먹지 않을 거예요. 마찬가지로 이 모든 일이 우리 앞에 닥쳐왔는데도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겨 낼 수 없을 거예요. 나는 절대로 못 해요. 그러니 우리는 기도해야 해요. 기도를 잊어버리면 안 돼요.” (228/328)2010년 이전까지는 예배 후에 앞으로 나와서 켈러에게 말을 건 사람 대부분이 뉴요커와 그 교회 교인이었다. 각 예배가 끝난 뒤 그는 한 시간씩 전도나 목양 성격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2000년대 말에 두 가지 변화가 눈에 띄었다. 첫째로, 질문이 과학과 역사에서 도덕과 가치관으로 바뀌었다. 회의와 불신이 분노와 비난으로 바뀌었다. (232/333)켈러는 옥스퍼드 학생들에게 AD 800년 영국의 앵글로색슨족 전사를 상상해 보게 했다. 이 전사의 내면에는 누구든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있다. 그게 수치와 명예 문화에서 요구하는 반응인지라 그가 그렇게 느낀 것은 당연했다. 그는 또한 성적으로 남성에게끌리는데, 이 감정만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문화가 요구하는 대로 억누른다. 이번에는 우리 시대의 맨해튼 거리를 걷는 같은 나이의 남자를 생각해 보라. 그의 감정 역시 앵글로색슨족 전사와 똑같다. 누구든 자기를 째려보는 사람을 죽이고 싶고, 남성과의 성관계를 갈망한다. 우리 문화는 그에게 분노 조절 치료를 받게 한다. 그리고 그는 성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을 것이다. 이 예화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무엇인가? 켈러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선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이 단순히 내면에서 비롯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보다 우리는 모종의 도덕적 해석이라는 잣대를 받아서 자신이 느낀 다양한 감정과 충동을 그 잣대에 비추어 걸러 낸다. 이 잣대에 힘입어 우리는 어떤 감정이 '나'이므로 표현되어야 하고 어떤 감정은 내가 아니기에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타고난 순수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신념을 해석하는 이 잣대다. 많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내면의 심연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기에는 역부족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외부의 기준 내지 규정이 필요하다. 그게 있어야 우리 내면생활에서 서로 싸우는 충동을 처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앵글로색슨족 전사와 현대의 맨해튼 청년은 그런 잣대를 어디서 얻었을까? 각자의 문화, 각자의 공동체, 각자의 영웅담에서 얻었다. 사실 그들은 단순히 '나다워지기를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걸러 내 취사선택한 것이다. 문화가 허용하는 자아를 선택한 것이다. 결국 독자적으로 자기 내면의 감정에만 기초한 정체성이란 불가능하다.” (241/344-346)[켈러는 그의 설교에서] 의심을 인정함으로써 믿음이라는 문을 열어젖[혔다]. (244/349)켈러의 세대 중에서 복음주의를 미래의 세계화와 다문화와 도시를 위해 준비시키고자 켈러보다 더 많이 힘쓴 사람도 없다. 이 중심 주제 때문이 아니라면 그가 행여 뉴욕 타임스 부고란에 실릴 이유도 없다. 가장 가까운 유례는 이전 세대의 존 스토트다. 그런데 생애의 절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켈러는 세계화 사역이나 다문화 사역이나 도시 사역을 거의 전혀 몰랐다. 비교적 사역 후반부인 50대 때에야 그는 널리 인정받았다. 지금의 젊은 세대도 주님을 사모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나이테를 키워 나가는 게 최선이다. (265/378)켈러의 독창성은 종합에서 나타난다. 그는 여러 출처를 한데 모아 뜻밖의 통찰을 이끌어 낸다. 당신의 영웅이 한 명뿐이라면 그들 모방하는 것에 불과할 테지만, 영웅이 100명이라면 그만큼 당신이 온 세상을 다니며 가장 맑은 우물들을 찾아내 깊이 마셨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원전을 통합해서 사람들에게 통찰을 나누어 주는 켈러의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대학 시절부터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 눈에 띄었다. 그는 거장들에게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그들이 내린 최고의 결론에 자신의 독특한 변주를 더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265-266/378-379) 원제: 20 Quotes from the New Book About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윤종석,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두란노)
석양이 더욱 찬란하게 비친 날
by Trevin Wax
2023-06-02
기리며: 팀 켈러(1950-2023)광대한 산맥, 광활한 바다, 넓게 펼쳐진 평야와 농지, 그 어디든 해가 지는 광경을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요소가 하나 있다. 느림과 속도이다. 불덩이가 지평선 위로 내려오는 속도가 처음에는 느리기 이를 데 없다. 아주 천천히 하늘과 땅에 온갖 색과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일단 지구 가장자리에 도달하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 놀랍기만 하다. 천천히, 그러다가 빠르게. 빛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공기에는 냉기가 들기 시작한다.그 전날 저녁, 켈러가 곧 육체적으로는 루스벨트 섬으로,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의 영원한 상급을 받으러 본향으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는 사무실에서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태양 빛이 내 책장 팀 켈러 장서를 비췄다. 내 영혼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남긴 그가 전한 말씀이다. 오늘 아침 팀 켈러가 삼 년의 췌장암 투병 끝에 돌아갔다. 거대한 빛이 지평선 너머로 미끄러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주 오랫동안 진행된 노을인데도 너무나 갑작스럽게만 느껴진다.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해와 비교하는 나를 향해서, 의심할 여지 없이 켈러는 눈썹을 치켜올리고 어리둥절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속에 미소를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저서와 글에서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에는 분명히 주인공이 있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주인공이자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켈러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알고 살아간 사람이 아니다. 그의 삶은 그가 언제나 예배하는 구주에 관한 것이었고 구원이 필요한 잃어버린 세상을 그분에게 인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실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예수님을 꼭 닮은 사람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의 죽음은 마치 빛이 꺼져버린 것과 같은 상실감을 준다. 내게 수년에 걸친 켈러의 심오한 영향은 처음에는 그의 글을 통해서, 나중에는 이따금 주고받는 서신을 통해서, 그리고 만남과 독서 제안을 통해서 이뤄졌다. 지난 칠 년 동안 켈러는 내 독서의 많은 부분을 이끌었다. (내 책더미에는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는데, 켈러가 추천한 책 중에서 아직 읽지 않은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이다.) 켈러는 조언해 주었고, 특정 방향을 알려주었으며, 막다른 길에 대한 경고를 했다. 그리고 내가 작업하고 있는 일부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켈러의 글과 사역은 내게 닻이 되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평온함을 발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드라마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는 ‘안달하지 않는 존재’의 전형이었고, 다양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존경과 친절로 교류할 수 있는, 신앙에 깊이 뿌리를 박은 깊은 안정감의 소유자였다. 그는 또한 교회의 미래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올해 초 그와 함께 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너는 분명히 나보다 더 오래 살면서 교회의 갱신도 목격할 거잖아’라며 나를 짓궂게 놀렸다.)켈러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몇몇 친구에게 팀 켈러가 없는 복음주의는 상상만 해도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모든 세대에는 영웅, 잘 섬기는 사람이 필요하다. 각종 실패와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에게 신실함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켈러가 내게는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오늘 나는 그가 믿음의 선한 경주를 마친 것에 감사한다. 해는 비록 졌지만, 지금 켈러는 궁극의 분, 밝은 새벽 별 앞에 서 있다(계 22:16).“나는 이제 말하지 않겠다. 울지 마라. 비록 모든 눈물이 악한 것은 아니니까.” 회색 항구로 떠날 준비를 하는 프로도에게 간달프가 한 말이다. 오늘 나는 이런 좋은 눈물을 몇 번이나 흘렸다.우리에게 오늘은 마치 샘이 그의 사랑하는 친구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다. “저녁이 깊어지며 어둠이 내렸다. … 샘의 눈에는 곧 사라진 서쪽 바다 위 그림자만 보인다. … 해변에서는 파도의 한숨과 중얼거림만 들렸다.” 그러나 켈러가 지금 목격하는 건 프로도와 비슷할 것이다. “프로도는 공기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물 위로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 회색 비 커튼이 모두 다 은색 유리로 바뀌고 뒤로 젖혀지자 하얀 해안을 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빠른 일출 아래 멀리 푸른 나라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우리는 켈러에게 안녕이라고 작별을 고하지만, 주님과 천사들은 그에게 지금 환영한다고 인사하고 있을 것이다. 원제: Tim Keller into the Sunset(1950-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와의 만남: 격려, 부끄러움, 안도감
by 고성제
2023-06-02
기리며: 팀 켈러(1950-2023)늦게 신학을 한 관계로 부교역자 생활도 못해 본 채, 1990년대 초 교회를 개척한 나는 평생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하려고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균형의 문제를 고민하는 설교, 변증적 설교, 십자가 복음을 풍성하게 선포하는 설교, 구속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강조하는 설교, 시사적이고 상담적인 설교 등등. 그저 듣기 좋은 말 다 끌어다 쓴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사실 그 하나하나는 당시 오랫동안 혼자 고민하던 것들의 진실한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향한다!’고 표방할 수는 있지만 쉽게 거기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의 처지가 그랬다. 끊임없이 고민은 했지만, 속 시원한 진전은 없었다. 다소 진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통합 정리된 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언제 굴착이 끝나 터널 저편 빛을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터널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굴착공과 같은 심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팀 켈러와의 만남, City To City, 그리고 그 운동을 함께하는 동역자들과의 만남은 바로 그런 때에 이루어졌다. 나는 늘 그 만남을 ‘마치 터널 작업장 저편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한 마스터(대가)와의 만남이었고, 탁월한 멘토를 만난 것과 같았다. 그 만남은 내게 격려(위안)와 부끄러움과 안도감이 뒤엉킨 묘한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먼저는 격려였다. 그것은 그동안 고민해온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위안 같은 것이었다. 팀 켈러가 세밀하게 관심을 두고 고민한 부분들이 내가 고민해온 부분들과 상당히 중첩되고 있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틀리지 않았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약간의 희열과 위안이 느껴졌다. 회중 가운데 있을 ‘사실상의 불신자들’을 의식한 변증적 설교에 대한 강조, 타 종교나 세속적 신념을 비난이 아닌 존중의 태도로 극복하려는 것, 시대의 문제를 잘 분석하고 극복하려 애쓴다는 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한 강조, 복음 안에 답이 있음에 대한 확신 등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내게 부끄러움 또한 느끼게 했다. 그의 가르침은 그동안 나의 고민이 얼마나 폭이 좁고 미숙하며 피상적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름 고민하며 해 온 설교가 얼마나 허술하며, 전체적으로 통합된 탄탄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파편처럼 따로 노는, 조직되지 못한 지식들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갑자기 이런 목사를 의지해서 신앙의 여정을 걸어온 성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동안 내가 더 잘 정립된 목회자였더라면 성도들은 얼마나 더 잘 세워지고 복음 안에서 기쁨과 확신에 찬 생활을 하였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그것은 복음을 깊고 넓게 그리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서 신앙의 여러 주제를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여 뚫어내고, 통합하여 균형 있는 복음적 입장을 정리해 낸 탁월한 마스터를 만났다는 안도감이었다. 지금까지 고민해 오면서도 마땅히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확고한 복음적 논리 위에서 명쾌하게 답을 찾아가도록 도와줄 길잡이를 만난 느낌! 이분이라면 나뿐 아니라 지금 한국 교회 전체가 처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데에 본질적 도움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그는 한국 교회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미 급격한 ‘역-엑소더스’(탈교회) 현상을 겪고 있었다. 혹자는 그 현상을 몇몇 대형 교회의 탈선 탓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돌릴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더 근본적 이유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진정한 복음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데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경험한 것은 ‘우상과 죄의 속박과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주는 복음’이 아니라 그저 ‘의무나 관습으로 옭아매는 종교’뿐이었던 것이다. 진리를 만나기를 기대하며 교회에 왔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스스로 진리를 부정하는 모순된 삶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진리를 찾아 오히려 교회를 떠나는’ 기막힌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윤리적 노력으로 극복될 일이 아니며, 교회가 복음을 통해 본질적으로 새롭게 될 때 극복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팀 켈러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었다.그는 복음을, 그것과 혼동하기 쉬운 것들과 탁월하게 대비해 줌으로써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의 차이를 선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우선 그는 복음을 각종 의무와 종교적 관습으로 가득한 ‘종교’와 대비시킴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복음 아닌 종교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게 했다. 또 그는 복음과 복음의 결과(선행 섬김 헌신 등의 윤리적 삶)를 구별함으로써 우리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자주 빠지는 오류로부터 건져주었다. 복음 자체에 대한 올바른 강조가 선행과 헌신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 목회자는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선포하는 데 더욱 힘을 써야 하는데, 종종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이 가져오는 결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강조하고 선포해 왔음을 보게 하였던 것이다. 강단의 설교가 그러하다 보니 교인들은 풍성한 동기는 알지 못한 채 의무를 강조하는 말만 듣게 되어, 괜히 교회를 다녀서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풍성한 설명 없이 의무만 강조한 것이 한국 교회를 끝없는 죄책감 아래로 몰아가고 성도들을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팀 켈러는 이 점에서 깊은 임팩트를 남겼다.또 그는 복음을 선포하되, 마음의 우상을 분석하여, 거기에다 대고 복음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복음이 효과적으로 선포되도록 도와주었다. 당시까지 우리는 우상을 대개 피상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은연중에 우리 자신은 우상과 무관한 줄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상을 예리하고 실제적으로 파헤침으로써 우리 안에 깔려 있는 불안과 두려움, 인정과 통제의 욕구 등 우상의 역동들을 잘 드러내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로, 복음을 선포하되, 허공을 치듯 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복음이 우리 안의 무엇을 겨냥해서 어떻게 선포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 무엇에서 자유롭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며 설교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팀 켈러는 설교자의 선포가 분명하게 초점 잡히게 도와주어서 복음 선포가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청중의 내면을 깊이 흔드는 울림이 되게 도와주었다. 또 그는 상황화에 대한 강조를 통해 복음이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와닿는 말씀’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물론 설교자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상황화를 하고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켈러는 설교자가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도한 상황화와 과소한 상황화 사이에서 균형은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세밀하게 생각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설교가 주변 문화와 적절하게 관계하게 함으로써 설교가 더욱 들리는 설교, 와닿는 설교가 되게 했다. 이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그의 확신과 열정, 즉 복음 안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는 그의 확신과 그 확신에서 비롯된 끝없는 열정이다. 바로 그런 뜨거운 확신 때문에 그는 설교 때마다 그 속에서 무언가에 대해 답을 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회중은 그의 설교를 통해 무언가 적어도 한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듣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런 이유로 그의 설교는 모든 회중에게 매력적이고 심지어 불신자에게까지 매력적 전도가 되었다. 설교할 때 그가 그저 전해야 할 내용을 전하는 데에만 치중하지 않고,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불신자와 회의자의 반론과 질문을 의식하고 그것들에 대해 대답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대단히 중요한 태도라 여겨진다. 그런 설교는 ‘기독교는 맹목적 신앙을 강요한다’는 일반의 오해를 불식시킴으로써, ‘이유 있는 신앙’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와닿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를 본받아 “질문에 대답하는 설교”에 힘쓴다면 우리의 설교 또한 적실성(relevance)을 더욱 갖게 되어 회의적인 세대들에게 더욱 와닿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복음 안에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답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역자는 복음 안에서 그 보물을 찾기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좀처럼 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복음 안에 그 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흥분과 기대를 품고서 열정적으로 탐구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결국 교회는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새로워질 것이며, 이 회의론자의 시대는 그런 목회자들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팀 켈러가 발굴해 낸 보화(대답들)을 배우는 데에 만족하지 말고, 그보다 더, 복음 안에 모든 답이 있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탐구를 계속해 온 그의 치열한 자세를 더욱더 배우면 더욱 좋을 것이라 믿는다.보수신학 계열에 서 있는 나로서 그에게 특별히 감사하는 것은 그가 ‘보수신학이 가지기 쉬운 편협함을 보수신학에 의해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논지를 위해 성경 말씀을 일부러 비틀지 않고도 교회가 이 모든 책임 가운데서 균형을 갖추도록 깨워준 것은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다.이렇듯 신선한 도전이 되었던 팀 켈러!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이제 더 이상 우리와 같은 별 위에 있지 않다. 그가 자신이 평소 그처럼 사랑하고 또 위하여 살던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위대한 말들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자신이 남긴 수많은 책과 글, 설교와 족적을 통해 여전히 우리 곁에서 그가 하던 일들을 계속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짧은 시간이지만 살아서 그를 만나 함께할 수 있었던 귀한 특권을 누렸던 우리는 그가 죽어서도 한 알의 밀알처럼 백배, 천배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되리라 믿는다.살아 있는 동안, ‘세상에서 가장 세속적인 도시에서도 복음은 여전히 뉴요커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던 팀 켈러, 그가 천국에서도 그의 소원이 한국을 포함해 지구촌 곳곳의 도시와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란다. 목사님, 정말 수고 많았어요. 주안에서 다시 뵐 때까지 편히 쉬세요.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2) : 문화의 상황화
by 고상섭
2023-06-01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남긴 빈자리가 가장 크게 보이는 곳이 있다면 아마 문화의 영역일 것이다. 그의 설교와 강의가 다른 여타 목회자들과 차별성을 보인 지점 또한 문화의 상황화이다. 팀 켈러 전까지 많은 목회자가 복음 자체에 집중했다면, 그는 복음이 전달되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중요함을 일깨워주었다. 1. 신학적 비전 센터처치에서 팀 켈러는, 많은 사람이 리디머 교회가 많은 열매를 맺은 비결을 찾으면서 문학작품과 미디어를 잘 활용하는 스타일에 주목하거나 또 어떤 목회 프로그램을 사용하는지에 관심을 보이지만 더 중요한 점은 리디머 교회가 그 방법들에 도달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에 있다면서, ‘신학적 비전’이라는 말을 소개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비전이란 교리적 기초와 사역의 현장 사이에 있는 중간 영역으로 “교리적 신조들이 어떻게 현장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질문이며, 당신의 교리를 가지고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다.”[1]신학적 비전은 조직신학이나 신앙고백서에서 해결되지 않는 이슈들이며 현장에 접목되는 실용적인 서적들에서 제기하는 것보다는 더 깊은 주제들이다. 그래서 신학적 비전을 품으려면 먼저 교리적 기초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역의 현장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 기도하고 고민해야 한다. 2. 문화의 상황화 신학적 비전이 교리와 현장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교리와 사역의 현장 즉 문화를 알아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은 영국 교회가 부흥하던 시기에 인도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그가 사역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영국 교회는 쇠퇴했고 사람들은 교회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뉴비긴은 비기독교 문화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는 새롭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팀 켈러도 문화에 맞추어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소망과 두려움, 열망을 이해하고 긍정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 시대의 문화가 아무리 낯설다 하더라도 깊이 이해하고자 했고, 그 문화에 말을 걸 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용어로 하지 않았다. 문화의 질문을 재구성하고, 관심을 재형성하고, 소망을 재조정했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선교학자들이 말하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다.”[2]3. 다양한 문화관상황화를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 안에 다양한 문화관이 존재하는데, 팀 켈러는 그것을 센터처치에서 하나의 도표로 정리해서 설명한다. 문화관을 분석할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위의 네 가지 문화관은 모두 성경적이지만, 그중 하나의 문화관을 가지고서는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D. A. 카슨은 그리스도와 문화의 모델을 연구하고 나서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아우르는 통시적이고 동시적인 지배 모델은 없다”[3]고 말했다. 즉 모든 기독교 모델은 성경적이지만 성경 전체와 세상 전부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각 모델은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관에 대한 이해이지 어느 하나의 문화관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가 속한 교단이나 신학 배경에 맞는 한 가지 모델을 중심으로 세상과 소통하려 한다. 네 가지 모델의 각각의 장단점을 모두 이해하고 적용할 때 비로소 세상과 올바른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문화관이 유일한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라 네 가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1/4의 영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문화관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 변혁주의 모델한국 복음주의권 교회에서 가장 많이 취하는 변혁주의 모델(Transformation Model)은 그리스도의 주재권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정적으로 사역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이 세계관 모델은 너무 지적인 개념에 치우친 단점이 있고 교회와 공동체가 배제된 채 개인의 비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구호에 매몰되어 승리주의, 자기의, 과도한 확신으로 여러 가지 문제를 양산하기도 한다. 2) 적절성 모델 적절성 모델(Relevance Model)은 일반은총을 극대화하는 공공선을 추구함으로써 세상과 연결하는 다리를 놓는다. 그러나 공공선을 복음의 영역까지 확대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해방과 영혼구원을 동일선상에 놓기도 한다. 복음이 분명하지 않은 교회들이 많은 상황에서 NGO와 교회의 차별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단점을 가지고 있다.3) 반문화주의 모델반문화주의 모델(Counterculturalist Model)은 세상과 다른 구별된 대조 사회를 목표로 삼기 때문에 교회의 순결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러나 교회 밖의 문화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기 때문에 제국과 권력, 자본주의 시장 등은 모두 사람들을 억압하는 제도로 간주한다. 이런 관점은 정치와 비즈니스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하며, 주변 문화의 영향에 대해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 두 왕국 모델 두 왕국 모델(Two Kingdom Model)은 하나님이 전 세계를 통치하시는 통치자이시지만 두 개의 왕국을 별개의 방식으로 통치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두 왕국 모델은 하나님은 세상을 일반은총을 따라 통치하시고 교회는 특별은총에 따라 통치하신다고 믿으며, 기독교적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성도로, 교회 밖에서는 건전한 시민으로 사는 삶을 강조한다. 그러나 일반은총의 타락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단점이 있고, 사회의 선은 모두 자연 계시로 생긴 것으로 간주한다. 또 중립적인 기초 위에 신앙을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법률, 정부, 예술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부하는 단점이 있다. 4. 계절을 알라 위의 그림에서 가운데 있는 원은 각 모델의 중요한 키워드를 말한다. 변혁주의는 세상과 구별된 (탁월한) 세계관을, 적절성 모델은 공공선을, 반문화주의는 대항문화로서의 교회를, 두 왕국이론은 세상을 향한 겸손과 직업 세계를 향한 탁월성을 추구한다. 각각의 키워드가 있지만 원 안에 있는 네 가지 문화관의 키워드를 모두 섞어서 자신의 영역에 맞는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우리말 역간 ‘센터처치’에는 그림 안에 따로 표기가 없지만, 원서에는 “blended Insights”라는 표현이 있다. 각 모델의 장점을 섞어서 활용하라는 것이다. 네 가지 모델은 모두 성경적이지만 모든 환경에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의 ‘계절’을 잘 살펴보고 그 상황에 맞는 세계관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문화적 상황화이며 문화참여(cultural engagement)이다.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교회의 문화참여를 두 개의 ‘아니요’와 하나의 ‘예’로 설명하는데, 켈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전적인 변혁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아니요’이다. 둘째, 문화에 적응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니요’이다. 셋째, 문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이다. 볼프가 말하는 변혁과 적응이 아닌 참여라는 말은 문화를 지배하는 것(변혁)과 문화를 버리는 것(적응) 사이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안에 머물면서 다르게 사는 삶’을 말한다. 즉 세상 문화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통해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하는 삶이다.”[4]만약 세상이 교회를 적대적으로 대할 때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변혁주의 모델보다는 교회의 순결을 강조하는 반문화주의 모델이 적절할 것이다. 또 핍박받지만 성장하는 시기에는 변혁주의 모델이 더 어울린다. 교회와 세상의 가치가 비슷한 시기에는 두 왕국 모델이 필요할 것이다. 교회가 매력을 잃어가는 시기에는 적절성 모델을 통해 공공선에 이바지함으로 문화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봄_교회가 핍박받지만 성장하는 시기_변혁주의 모델• 여름_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시기_두 왕국 모델• 가을_교회가 매력을 잃어가는 시기_적절성 모델• 겨울_교회가 세상에 적대적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 약해진 시기_반문화주의 모델어떤 모델이 좋은가를 따지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 교회와 현실은 어느 시대에 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먼저 세상을 살펴보고 거기에 맞는 문화 모델을 섞어서 활용하면 된다. 단순히 여름은 두 왕국 모델이라고 규정하기보다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문화관 속에서 네 가지 모델의 장점을 모두 섞어서 각 문화에 맞도록 적절히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팀 켈러가 말하는 “blended Insights”이다. 5. 자세와 몸짓 팀 켈러는 문화관을 섞어서 활용하자고 제안하면서 ‘자세와 몸짓’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는 앤디 크라우치의 컬처 메이킹에 나오는 단어로 ‘자세’(posture)는 네 가지 문화관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모델을 상징하는 단어로, 흔히 말하는 디폴트 값 즉 무의식적 기본위치(unconscious default position)이다. ‘몸짓’(Gesture)은 다른 모델에서부터 나오는 즉흥적인 움직임이다.[5] 각자 자신에게 가장 맞는 문화관의 자세를 가지고서, 상황에 따라 계절에 맞도록 다른 모델의 장점을 취해서 몸짓을 가질 수 있다. 문화에 매우 우호적인 적절성 모델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 반문화주의 모델을 취할 수 있고, 문화에 대해 좀 더 적대적인 모델을 가진 사람들도 상황에 따라 공공선을 추구할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신약의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가지는 이중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에베소서 1:1)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의 정체성을 에베소라는 지역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과 교회라는 두 영역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느냐가 우리의 문화관을 결정하게 된다.이원론적 삶으로 문화의 모든 것을 거부해서도 안 되고, 문화의 모든 것을 긍정해서도 안 된다. 비판적 향유(critical enjoyment)와 적절한 경계(appropriate wariness)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문화들의 영감과 창작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문화 안에 있는 정의와 지혜, 진리, 그리고 아름다움의 표현들을 경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의식을 갖고 이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특히 죄와 우상숭배로 인해 왜곡된 것들을 살펴야 한다.[6]6. 대응하지 말고 행동하라다양한 문화관이 있음을 인정하고, 모두 성경의 진리를 반영하는 문화관임을 인정하며 서로 다른 문화관으로 논쟁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문화관과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세상 속에서 더욱 전도의 문은 닫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오만을 피하라. 자신에게 가장 도움이 많이 된 문화 모델이 모두에게 최고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의 장점과 다른 모델의 약점을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모든 문화관은 각각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진리의 한 단면임을 기억하라. 둘째, 비난하지 말라. 자신에게 과도하게 영향을 끼친 문화의 단점을 알아가면서 그 문화관의 모든 것을 버리게 될 수도 있다. 또 특정 모델을 맹종하는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상처를 입고서는 그 특정 모델을 비난하게 되기도 한다. 문화에 대해 생각할 때 개인의 경험을 지우고 성경, 문화적 시기, 그리고 당신의 은사를 종합해서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라. 셋째, 좌절하지 말라. 자신이 선호하는 모델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갈등이 일어날 때, 그 갈등 때문에 자기 입장의 완고한 지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 순진하게 생각하지 말라. 교회가 모든 모델을 초월해야 한다거나 모든 모델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라. “나는 어떤 모델도 따르지 않아”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부정적인 어느 하나의 모델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다른 모델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가진 모델들을 주장할 수 있는 겸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관점의 강점을 누리고 약점을 인정하며, 다른 모델들의 강점을 힘써 배워야 한다. 결국, 문화관에서도 복음의 겸손이 필요하다. 팀 켈러는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초기에 교회가 도시의 구원자라도 된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회개했다. 이처럼 우리가 도시의 구원자인 양 여기는 것은 해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겸손히 도시와 사람들을 존경하며 배워야 한다. 그들과의 관계는 의도적으로 상호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보려고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더 충만히 알기 위해 그들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인정해야 한다. … 복음만이 우리에게 겸손함을 주고(나는 도시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자신감을 주고(나는 도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용기를 준다(나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타인을 축복하는 효과적인 사역이 가능해진다.[7]우리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자칫 리차드 마우가 표현한 것처럼 ‘무례한 기독교’로 전락할 수도 있다. 다양한 문화관을 인식하며 또한 겸손히 배우고 활용하는 신학적 비전이 필요하다. 문화에 대해 분석하고 도전하는 팀 켈러의 설교가 아직도 생생하다. 성경을 이야기하는 설교자는 많지만, 문화를 분석해주는 설교자는 많지 않다. 앞으로 팀 켈러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문화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문화를 향해 평가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통해 포스트 모던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이 능력이 됨을 확신하고 싶다. 주1. 팀 켈러, 센터처치, 26 2. 팀 켈러, 설교, 1353. 센터처치, 4834. 같은 책, 493. "그 안에 머물면서 다르게 사는 삶"이라는 표현은 볼프의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인용. 5. 같은 책, 502 6. 같은 책, 2327. 같은 책, 358
50가지, 팀 켈러가 남긴 말
by Matt Smethurst
2023-05-31
기리며: 팀 켈러(1950-2023)팀 켈러(1950-2023)는 그토록 신실하게 사랑하던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본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평생 주님에 관해서 쓴 글과 설교가 얼마나 많은가? Gospel Coalition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한 켈러는 다작가였다. 더불어 리디머 교회에서 선포된 그의 모든 설교는 무료로 제공된다. 그의 삶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콜린 핸슨이 최근에 쓴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Timothy Keller: His Intellectual and Spiritual Formation) 일독을 권한다. 켈러가 내 삶과 사역, 그리고 수많은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측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함에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명언 50가지를 소개한다. 1“죽음이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역할은 단 하나, 그들의 삶을 영원히 더 좋게 만드는 것이다.”2“그리스도인이 가진 확신의 중심 기초는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하나님께 두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우리 마음에 제대로 자리 잡고 있는가이다.”3“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면, 그분의 말씀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가 무슨 말씀을 했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신앙의 핵심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가 진짜 부활했는가 아닌가이다.”4“당신이 거부하는 하나님에 관해서 설명해 보라. 당신이 믿지 않는 하나님에 관해서도 설명해 보라. 당신이 싫어하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어쩌면 나도 믿지 않을 거 같다.”5“현대인에게는 성경을 조사하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방향을 반대로 잡아야 한다. 성경이 나를 조사하게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실 수 없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6“사탄은 육체에 상처를 남기는 송곳니로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거짓으로 지배한다. … 사탄의 거짓말과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진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7“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죄가 많아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지만, 그러함에도 그분에게 우리는 무척 사랑받고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깊은 겸손과 더불어 큰 자신감을 얻는다.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나라는 존재를 굳이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8“죄의 교리는 기독교 세계관이 말하는 것만큼 그리스도인이 그리 선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일반 은총의 교리는 세상의 잘못된 세계관이 말하는 것만큼 불신자가 그리 결함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9“당신이 믿는 신이 당신을 화나게 하고 도전할 수 있을 때만, 그 신이 상상의 산물이 아닌 진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행여라도 당신 생각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 신을 믿고 있는가? 지금 당신이 예배하는 신은 단지 이상화된 당신 자신에 불과하다.”10“하나님의 영광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방식으로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 … 교회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제자도의 수단은 없다.”11“사랑은 풍덩 빠지는 게 아니다. 사랑은 당신 전부를 올인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당신과 함께 할 거야.’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12“‘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건 알아. 하지만 내가 용서가 안 돼.’ 이 말의 진짜 의미를 아는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더 중요한, 나라는 우상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뜻이다.” 13“당신에게 정체성이 일이고 일에서 성공한다면, 그런 정체성은 단지 머리에 남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그건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14“그가 나를 사랑하지만, 그가 나를 모른다면, 그건 피상적인 사랑이다. 그가 나를 알기는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그건 악몽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밑바닥까지 아시고 또 우리를 하늘까지 사랑하신다.” 15“곤히 잠든 왕을 깨워서 감히 새벽 세 시에 물 달라고 할 수 있는 건 어린아이뿐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다.”16“관용에 믿음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관용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의 믿음이 취하는 태도이다.”17“전통적 종교는 ‘나는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니까 신은 내게 복을 줘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도록 하셨다. 그러니 이제 나는 그리스도께 감사드리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 종교는 ‘내가 순종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신다’라고 한다. 반면에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니 순종하기를 원한다’라고 한다.” 18“당신이 감히 상상하는 것보다 당신은 훨씬 더 죄가 많고 결함으로 가득하다. 동시에 당신이 감히 꿈꾸던 것보다 당신은 훨씬 더 사랑받고 인정받는다. 이게 바로 복음의 메시지이다.” 19“절벽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약한 가지에 대한 강한 믿음은 강한 가지에 대한 약한 믿음보다 치명적이다. 최종 구원의 여부는 당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 누군인가에 근거한다.” 20“고통받는 사람들이 당하는 유혹은 고통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알 수 없기에 생긴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21“세상에는 좋은 것, 어려운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영광, 거룩함, 아름다움처럼 최고의 것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은 최고의 것으로 가는 길은 좋은 것이 아니라 대개는 어려운 일을 통해서라고 한다. … 이것보다 세상이 삶을 이해하는 방식과 더 반대되는 가르침은 없다. 세상이 바라보는 가치에 비추어 이보다 더 전복적인 메시지는 없다.”22“사도들은 기독교 성 윤리를 기독교의 핵심 신념 중 하나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정통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성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실천은 가난한 사람에 향한 관심과 인종 평등 문제만큼이나 복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지가 포함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옳지만 성에 관한 내용은 구식이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면 이런 주장은 불가능하다.”23“품질 면에서 매력적이고 가격 면에서 저렴한 혼외 섹스가 얼마든지 소비 상품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약속이 담보되지 않았기에 품질이 떨어지거나 비용이 올라가면 언제라도 떠나면 된다. 하지만 급진적인 자기 헌신과 평생을 바치는 결혼 생활 안에서만 이뤄지는 섹스를 생각해보라. 섹스 시장은 사라질 것이다. 감히 섹스에 값을 매기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24“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 궁극의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당신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당신을 위해 죽었다. 궁극의 어둠 속에서도 당신을 버리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지금 당신을 버리시겠는가? 어둠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당신을 버리실 리가 있겠는가?”25“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 대속 교리를 이해할 때만 영적 왜곡을 막을 수 있다. … 오로지 이 교리만이 하나님에 관한 착각을 막는다. 사랑이 있기는 하지만 거룩이 본질인 하나님 또는 어느 정도 거룩함이 있지만 사랑이 본질인 하나님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거룩하심과 사랑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두 속성은 상호 의존적이나 동등하다. 오로지 이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볼 때 은혜를 핑계로 버릇없거나, 또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건강하고 제대로 사랑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26“세속적 틀은 … 상처 입은 양심의 치유에 아무런 역할을 못 한다. 사랑과 용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자아에게 할 말이 없다. 나의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본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도 돼.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라는 세상의 방식으로는 내 양심을 달래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본 사람에게 세속적 틀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27“진정한 회개는 회칠하기(‘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와 책임 전가(‘사실 내 잘못이 아니었어.’) 그리고 자기 연민(‘당한 걸 생각하면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과 자기 학대(‘나를 욕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무 기분 나쁠 거야. 제발 누가 나를 좀 괴롭혀줘.’)가 끝날 때 시작한다.”28“느끼기 전에 먼저 용서해야 한다.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느끼는 경우는 없다. 용서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더 이상 죗값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글쎄, 용서하기 전에 미리 느껴야 할 거 같은데.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하기 전부터 화가 누그러지는 느낌이 들어야 할 거 같은데 말이야.’ 용서하기 전에 용서했다는 감정부터 느끼길 원한다면, 당신은 결코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분노의 감옥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9“중보기도하는 대상을 향해 계속 화를 품고 있는 건 쉽지 않다. 또한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 상대한테 화를 품거나, 또는 중보기도를 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왜 그럴까? 기도할 때 당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30“기도는 진정한 자기 지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이다. 또한 깊은 변화, 곧 사랑의 재배열을 경험하는 주된 방법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선물을 내리신다. 참으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안전함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장 원하는 많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자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야말로 우리가 삶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일의 열쇠이다.”31“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거나, 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을, 우리도 안다면 구했을 것을 주신다.” 32“끔찍한 그날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이셨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실 하나님을 우리는 안다. …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거절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이제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가 당연히 받으셨어야 할 바로 그 응답의 대상이 되었다.” 33“자비는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책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표지이다.” 34“좋은 설교는 인간의 의지를 부수는 몽둥이가 아니라 마음을 찌르는 칼과 같다.”35“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설교의 주요 식단은 강해 설교가 되어야 한다. … 강해 설교야말로 성경 전체가 참되다는 확신을 나타내고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강해 설교를 통해서 설교자는 특정 주제나 몇몇 동의하는 내용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부분이 조금도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36“설교가 단지 본문을 설명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본문을 사용하여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설교자가 종종 첫 번째 사명, 본문 설명에 너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곤 한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두 번째 사명에는 거의 생각을 쏟지도 못하고 독창성을 부여하지도 못한다.” 37“성경 본문을 주해할 때마다 기억하라. 해당 본문에서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예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끌어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아직 본문 설명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38“최소한 기독교를 전파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을 믿지 않는 상태가 어떤지 내가 아주 잘 기억하고 (또는 최소한 이해는 하고) 있음을 불신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39“세속주의의 인간 중심 도덕 가치는 과학적 추론의 결과가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 그것도 나름의 신학적 역사가 있다. 그리고 현대인은 신앙으로만 그 가치를 붙잡고 있다.” 40“십자가 믿음을 통해 우리는 정체성에 필요한 새로운 기초를 확립한다. 이기주의에서 빠져나와 겸손하게 되었고 참으로 확고한 사랑 안에서 든든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기보다는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41“[이것들은] 기독교가 제시하는 비길 데 없는 제안이다: 고통이 제거할 수 없는 의미,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만족, 상처를 주는 대신에 오히려 사랑을 강화하는 자유, 자신을 압도하거나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는 정체성, 스스로를 압제자로 만들지 않는 도덕적 나침반, 그리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소망.” 42“십자가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런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43“예수님은 위대한 세계 종교를 세우거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수 세기 동안 인간의 생각과 삶의 진로를 정하거나 한 역사상 극소수의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극소수의 그룹에 속한다. 반면에 역사 속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신성한 존재라고 암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주장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들 중 다수가 선동가였고 때로는 참된 기독교 신자들 일부를 끌고 나온 작고 독립적인 분파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독특한 점은 그가 극소수에 불과한 첫 번째 집단에 속하면서도 동시에 두 번째 집단의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44“히브리 세계관은 하나에서 열까지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모든 생각에 반대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발음하거나 철자로 쓰지도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삶과 주장, 부활을 통해 가장 가까운 유대인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선지자일 뿐 아니라 우리를 찾으러 오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까지 확신시켰다.”45“그리스도께 나올 때, 당신은 모든 조건을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하면, 당신께 복종하겠다’라고 말할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하면, 당신께 순종하겠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전혀 순종이 아니다. 실제로 당신의 말은 이런 의미이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 아니라 조언자이다. 귀하의 조언을 기꺼이 받겠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러면 안 된다. 정말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자기 결정권을 포기해야 한다. 자기 부인은 자기 주장으로 정의되는 후기 현대 문화에 역행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부름받았다. 자기 부인 외에는 답이 없다.” 46“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교리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교리이다.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구원받는 교리이다.” 47“죽음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안전이 아니라면, 네게 안전이란 없다. 왜냐하면 너에게서 빼앗길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 영원한 팔로 너를 안아주겠다. 다른 모든 무기는 너를 실망에 빠트리지만, 나는 결코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냄새나는 소금은 매우 불쾌하지만, 동시에 효과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환상에서 깨어날 때 마음을 평안히 가지라. 믿음으로 우리가 그를 구주로 모신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을 맛보게 될 것이다.” 48“자기 행동을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죄를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죄는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위해 더 열심이시고 선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데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불신한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에게 나의 통제권을 전부 맡긴다면 비참해질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아담과 하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결코 ‘오늘 악해져야지. 그래서 우리 인생뿐 아니라 인류 모두의 인생을 망쳐버려야지’라고 결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바란 것은 행복이었다. ‘우리는 단지 행복하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행복해지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아.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행복을 찾아야겠어. 하나님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49“진정으로 당신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폭풍, 곧 죄와 악에 대한 신성한 공의와 심판의 폭풍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기꺼이 그 궁극의 폭풍 속에서 고개를 숙이셨다. 그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받고 죽으셨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용서받을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를 괴롭히는 모든 고통에 대한 답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는 당신을 향한 예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증명한다. 당신을 위해 그는 폭풍 속으로 자신을 던졌다. 그렇기에 지금 당신을 둘러싼 폭풍 가운데에서도 그분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 50“당신이 지금보다 백배 더 나쁘다고 해도 그의 자비 앞에서는 차마 죄인이라는 명함도 내밀 수 없다.” 원제: 50 Quotes from Tim Keller(1950-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 켈러, 그를 통하여 변화된 나와 우리 교회
by 길성운
2023-05-30
기리며: 팀 켈러(1950-2023)좋은 작품은 화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 가치가 급등하듯이, 귀한 분들의 소천은 그분의 인격과 사역이 널리 알려지며, 그들이 남긴 업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 팀 켈러의 소천은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다가온다. 나에게도 팀 켈러의 소천 소식은 처음에는 충격이었지만, 이제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더욱 깊이 다가온다.성복중앙교회는 70년대 성령 운동으로 유명했던 이천석 목사께서 설립하였다. 그분의 소천 이후 교회는 크고 작은 내홍을 여러 번 앓았다. 그러는 사이 교회는 약해졌고, 이웃들에게 좋지 못한 소문으로 외면당했다. 2009년 12월, 나는 성복중앙교회 5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나의 임무는 상처를 치유하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다시 부흥을 꿈꾸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7년간 분투하였다. 성경을 가르치며 제자훈련에 진력하였다. 성도들이 돌아오고 새가족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이미지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격려가 이어졌다. 그러나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옳은 길인지 확신이 없었다. 2014년, 현 복음과도시 이사장인 이인호 목사의 제안으로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면서, 팀 켈러를 만났고, 그의 목회 철학을 배우게 되었다. 그 후 나와 내 삶에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목회자로서 다시 가슴이 뛰게 되었고, 목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목회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픔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열렸다.내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복음의 재발견’에서 출발한다. 미국의 많은 교회는 지금 부흥의 시기가 끝난 이후에 율법화, 종교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런 교회들은 전통을 진리로 믿고 자신들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 결국 고사하게 될 위기 앞에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위험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종교화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복음이다. 종교는 순종하면 용서받는다고 한다. 바리새인들은 행동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 자를 의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복음은 이미 용납되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비난당할 때, 종교적인 사람은 격노하거나 무너진다. 좋은 평판 받는 자아상은 나에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나의 정체성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사랑이기에 다르게 반응한다. 종교는 나의 행위와 윤리를 강조하나 복음은 그리스도가 베푸신 은혜와 그 은혜에 기반한 동기를 강조한다. 이런 복음적 시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나는 복음의 재발견을 통하여 자주 질문하게 되었다. 나의 목회적 동기는 무엇인가? 나의 정체성은 누구로 인하여 세워지는가? 내가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우리 교회는 55년이 된 교회이다. 그러다 보니 나름의 전통이 있었다. 과거의 일들을 답습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는 토요일에 본당 청소를 한다. 본당 1층은 여전도회가, 2층은 남전도회가 한다. 그런데 계단에 떨어진 휴지는 아무도 줍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성도들에게 질문을 한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렇게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교회는 복음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 교회는 계단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교회가 되었다. 팀 켈러 덕분이다.둘째로 설교와 예배의 변화이다. 팀 켈러는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의 진수를 몸소 보여주었다. 나의 설교는 언제나 도덕주의적으로 끝을 맺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등이었다. 그런데 팀켈러는 “이런 성경적 진리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렇게 사셨고, 우리를 용납해주셨고, 지금도 힘을 주시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이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성경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품과 그분의 사역의 결과들을 알려주는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어느 해부터인가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나의 설교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항상 복음이 있어서 감사하다고 한다.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과 살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 판단이 난무하던 교회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셋째로 도시문화에 대한 복음적 침투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현대 사회는 점점 도시화되고 있으며, 도시는 개인화 계층화를 심화시킨다. 이런 도시 문화에 적절히 반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앞에는 고려대학교가 있다. 수년 전부터 베리타스 포럼에 참여하고 있다. 고대 기독 교수들과 선교단체 간사들이 연합하여 저명한 학자들을 모시고, 신자와 비신자를 초대하여 토론을 통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리이다. 일종의 신개념 전도집회라고 할 수 있다. 일방적 선포가 아니라 진리에 대하여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므로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많은 젊은이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첫해 오스 기니스가 주강사로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제임스 스미스, 존 레녹스, 알리스터 맥그라스, 이어령 교수에 이르기까지 소중한 분들을 만날 수 있었고, 지역교회 목회자로서 맛보기 힘든 은혜를 맛보고 있다.넷째로 이웃 교회들과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확신을 심어주었다. 팀 켈러는 우리가 속한 도시가 복음화되려면 하나의 대형교회보다는 100개의 소형교회가 연합할 때 훨씬 효과적이라고 강조하였다. 단순한 연합을 넘어서 거룩한 목적을 위한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였다.이런 도전은 내가 속한 종암동에 있는 22개 교회를 아름답게 보게 하였고, 성북구에 있는 400여 교회와 어떻게 연합을 이룰 것인지 고민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연합회와 함께 지역 아파트 단지 경비원과 미화원을 위로하고, 코로나 시기에 고생하는 보건소 공무원들에게 선물과 편지 보내기 운동을 하고, 작은 교회들의 영상 설비 지원하는 일 등을 하게 되었다. 함께 웃고, 함께 웃는 동네가 무엇인지 알아가게 되었다.마지막으로 그는 목사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앞의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그의 가르침을 뒷받침하는 그의 인격 때문이었다. 그의 삶의 향기를 생각할 때 무엇보다 성육신적 모습이 떠오른다. 2016년 안식월에 리디머 교회 주일 예배를 참석하였다. 리디머 교회는 당시 뉴욕 맨해튼에 3개의 캠퍼스를 가지고 있었고, 그중 웨스트에 있는 예배당은 1층 2층 예배방이었다. 그곳은 빈자리 없이 가득 메워져 있었고, 연령층은 매우 젊었으며, 강대상 없이 메모 한 장만으로 그는 청중과 소통하였다. 예배 후 입구에서 팀 켈러 목사님은 평범한 동양인 목사를 친근하게 반겨주었고, 함께 사진을 찍고, 읽고 있었던 그의 저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그는 평범한 옆집 아저씨처럼 교인들과 인사하였고, 아내와 함께 이동하였다. 그는 매우 자연스러웠고, 평범한 인간이었다.2018년 내한하여 횃불회관에서 목회자 콘퍼런스를 하고 있을 때 한 기자가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사랑이 많은 아버지, 남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였고, 좋은 이웃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면…”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본인이 좋은 아빠 혹은 좋은 이웃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다. 뉴욕에서 개척하여 6천 명이 이상이 출석하는 초대형교회 담임목사였고, 복음적 분립개척자 양성소인 CTC와 복음연합 TGC의 설립자 겸 대표였다. 그는 미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는 언제나 인간이었고, 우리들의 친구였다.내 동료는 팀 켈러 추모 댓글에 “내가 그동안 만나본 분 중에 가장 예수님을 닮은 분이므로, 천국에 가면 가장 먼저 팀 켈러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보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 그의 겸손한 모습이 그분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든다.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1) : 복음의 재발견
by 고상섭
2023-05-29
팀 켈러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그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 몇 가지를 되돌아보며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팀 켈러가 그토록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이제 눈물이 없는 곳에서 기뻐할 팀 켈러를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인 존재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발자취를 남겼다. TGC 회장 샌디 웰슨은 추모글에서 지난 100년 동안 팀 켈러처럼 영향을 준 목회자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삶을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을 몇 가지 정리해보는 것으로 팀 켈러를 기억해보고자 한다. 팀 켈러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한결같이 팀 켈러의 여러 설교와 저서를 통해 “복음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팀 켈러의 목회와 삶을 한 문장으로 평가한다면 아마도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The Gospel Changes Everything)라는 문장으로 대변할 수 있을 것 같다.1. 매로우 논쟁 팀 켈러가 전하는 복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복음이다. 그 복음을 오늘의 현실에 맞도록 상황화한 것인데, 팀 켈러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17세기 매로우 논쟁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그 당시의 대두되었던 ‘은혜의 복음’이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팀 켈러는 매로우 논쟁의 의미를 다룬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를 추천하는 글에서 당시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신앙의 정수(Marrow of Mordern Divinity)를 읽고 동의했던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율법폐기주의자로 오해받고 또 그들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율법주의자로 오해받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양쪽 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동일하게 믿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로 나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단순히 교리를 믿는 것 이상의 문제다. 매로우 논쟁 당시 양측은 모두 행위로 구원받는다거나, 구원받은 뒤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둘 다 대놓고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목회와 설교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냄새를 강하게 풍겼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둘 다 마음의 태도, 행동, 인격, 성경을 읽는 방식이 종합된 결과물이다.[1]팀 켈러는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전통적인 교리를 믿지만 목회의 방식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고, 성도들의 삶 속에서도 복음을 분명히 알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오해하면 엉뚱한 해법을 내놓게 된다고 우려한다. 율법주의에 대한 해답으로 율법과 순종을 덜 강조하게 되고, 반율법주의에 대한 해답으로 율법과 순종을 더 강조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복음을 다시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뿌리를 발견하여 실체를 드러내어야 한다. 팀 켈러는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매로우 논쟁 당시의 상황과 비슷하게 복음을 믿고 있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매로우 논쟁에 대한 팀 켈러의 입장을 알려면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 에드워드 피셔의 개혁신앙의 정수를 추천한다.) 2. 칭의와 성화의 분리 팀 켈러는 복음이 쉽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간파하고서 단순히 복음만을 전하는 이전의 전통적인 방식을 떠나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형태로 복음이 변질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제3의 방식인 복음을 선포했다. 그는 복음을 다시 재정의하면서 “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지 말라”는 말로 복음을 소개한다.[2]“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다.” 이 말은 복음은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무엇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복음 안에는 인간의 행위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대신해 주신 것을 믿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이라는 말을 통해 행위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율법주의적 요소를 배제한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지 말라.” 이 말은 은혜와 은혜의 결과인 선행은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곧, 이 말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설명한다. 칭의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구원을 말하고, 성화란 구원 받은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성경적 복음은 칭의의 은혜가 성화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고 오해될 때 생겨난다. 율법주의자는 칭의를 얻었으니 이제 나의 힘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율법주의로 변질되고, 반율법주의자는 칭의의 구원은 감사하지만 성화의 과정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버리고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이 모두가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한 오해이다. 은혜로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선행과 순종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게 된 것이다. 싱클레어 퍼거슨은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한 어머니 자궁 안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다”라고 정의했다.[3]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그 뿌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이 분리될 때 사람들은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로 오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신뢰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 안에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제3의 길로 복음을 전하라 팀 켈러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아닌 제3의 길로 복음을 전하라 권유한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과 방탕한 선지자이다. 두 책의 원제는 ‘The Prodigal God’, ‘The Prodigal Prophet’으로 ‘낭비하다’라는 단어 ‘prodigal’을 사용하고 있다. 팀 켈러는 누가복음 15장에서 흔히 말하는 ‘탕자’가 아니라 그 본문에서는 사랑이 헤픈, 충만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는 ‘탕부’ 즉 하나님 아버지를 조명하고, 그 끝없는 사랑은 ‘방탕한 선지자’인 요나를 진정한 선지자로 변화시키는 끝없는 사랑임을 재조명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가서 허비하는 둘째 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반율법주의자를 대변한다. 또 아버지의 집에서 있지만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분노하는 첫째 아들은 율법주의자를 대변한다. 동생이 돌아오자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 앞에서 첫째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팀 켈러는 첫째 아들이 전형적인 율법주의자로서 자신의 행위로 아버지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사람이라 말하면서 “아버지와 그의 관계를 가로막은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저주받을 그들의 선행이다”라고 율법주의를 비판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로 비교해서 설명한 팀 켈러는 방탕한 선지자를 통해서 그 모습이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욥바로 내려가서 배를 타도 도망가는 요나는 전형적인 둘째 아들 즉 반율법주의의 모습이다. 또 순종하긴 하지만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분노하는 요나는 첫째 아들 전형적인 율법주의자의 모습이다. 팀 켈러는 오늘날 행복을 추구하는 두 가지 모습을 자아 발견과 도덕적 순응의 길로 설명한다. 첫째 아들은 도덕적 순응의 길로 행복을 추구하고, 둘째 아들은 자아 발견의 길로 행복을 추구한다고 분석하면서, 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진정한 아버지의 마음 즉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4. 그리스도 중심적 복음 팀 켈러의 복음의 핵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있다. 복음이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해 주신 일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랑에 대한 오해가 양극단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팀 켈러는 바로 그리스도를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탕부 하나님에서 팀 켈러는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 모두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며, 그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 진정한 형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형은 동생을 용서하지 못했고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한 동생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지 못했지만, 진정한 형이신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또한 자신이 죽음으로써 잃어버린 아들인 우리에게 진정한 하늘의 유산을 남겨주셨다.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이 순종의 동기가 될 때 비로소 복음이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방탕한 선지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분노하는 방탕한 선지자인 요나를 대신해서 진정한 요나이신 예수님을 소개한다. 요나는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빠져서 목숨을 건졌지만, 예수님은 진정한 요나가 되셔서 고통의 폭풍 속으로 친히 목숨을 버리셨다. 방탕한 선지자 요나를 향해 끝없는 사랑의 추격을 멈추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결국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품고 변화시키신다. 팀 켈러는 인생의 폭풍이 올 때 그 폭풍이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폭풍 속으로 뛰어드심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삶을 통해 우리에게 닥쳐야 할 모든 독과 저주와 심판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인생의 폭풍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폭풍 속에 있는 모든 저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 더 이상 폭풍은 심판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도구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폭풍 속에서 빠져 죽게 버려두지 않으신다. …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아도 고난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의문 속에서도 그분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그 폭풍 속으로 던져졌기 때문에, 우리는 이 폭풍 한복판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4]팀 켈러의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에서 “인생의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 닥친 폭풍 속에서 당신을 건져주실 것입니다”라고 설교한다면 그 설교가 유대교 랍비의 설교와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는 율법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고 또한 기도해도 폭풍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반율법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팀 켈러는 복음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선포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오해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즐겁게 순종할 수 있는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않고 연결한다. 팀 켈러의 유산인 복음의 재발견은 오늘날 복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많은 목회자와 성도에게 참된 복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선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등불이 되었다. 그가 남긴 복음의 유산을 이제는 더욱 풍성하게 전달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남아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같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양극단을 오가던 우리에게 팀 켈러는 복음을 통해 참된 은혜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그의 고백처럼 정말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주1. 싱클레어 퍼거슨, 온전한 그리스도, 13.2. 팀 켈러, 센터처치, 52.3. 센터처치, 109.4. 팀 켈러, 방탕한 선지자, 190.
팀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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