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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내 소유’는 무엇인가
by 박혜영
2024-03-08
시편 119를 읽는 데 아주 익숙한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소유는…”(56절). 사유재산, 소유권, 소유주…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 역사는 ‘소유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소유한다’는 말에는 단지 ‘필요가 있기에 갖고 있다’라는 뜻 그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가 많을수록 존재감을 얻으며, 소유가 많을수록 대접받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지하고 저울에 올라서면 무게가 더 나가는 것처럼, 많이 소유할수록 무게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 여겨, 우리는 ‘내 소유’라는 말에서 안심, 안전, 보호라는 말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남을 수 있는 것만 무게 있는 실체가 됩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사 57:13). 이사야 본문에 나온 자들은 위기에 대비하여 의지가 될 만한 우상을 착실히 모아 둔 듯합니다. 재물의 우상, 학업의 우상, 연애의 우상을 모아왔습니다. 우상은 돌이나 나무, 또는 청동으로 만들었을 테니 제법 묵직합니다.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람에 떠가고, 기운에도 날아가는 연기와 같았습니다. 무게가 나갈 만한 그 어떤 실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내 소유”라 할 수 있을까요? 진정 “내 소유”라면 내 손에 끝까지 남아 나에게 존재감을 부여해야 할 텐데, 사라진 걸 보면 “내 소유”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평생 모으고, 평생 애쓴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충격일까요?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2-15). 사람들은 다 자신이 쌓은 공력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자신의 공력이 불에 타 없어질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만든 것이라 여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 타버렸다면, 그 순간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충격! 반면 “그 날 …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그대로 남아 있고, 불에 태워도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공력만이 “내 소유”입니다.여기서 시편 119:56이 중요해집니다. 그대로 남을 만한 진짜 “내 소유”가 무엇인지 귀띔해 주고 있으니까요. 무엇입니까?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진정한 “내 소유”란 재산이나 부동산이 아닙니다. 책에서 얻은 지식도 아니고, 인생 경험도 “내 소유”는 아닙니다. 그런 것에는 하나님 앞에 남을 수 있는 무게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그것만입니다. 그것만 내 이름으로 남습니다. 이는 위에 인용한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는 말과 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자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만 ‘하나님의 산’을 얻고, ‘하나님의 산’에만 요동치 않을 무게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 본문을 “…하면서 내 삶을 보냈으니”라고 번역한 영어성경(NLT)은 “내 소유”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를 간파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한평생 보냈는지 묻기 위한 번역처럼 보였습니다.사람이 죽으면 갖고 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사실 피상적입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면서 재산보다는 자신의 이름이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인생을 살라는 조언도 최고의 지혜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 갖고 가는 게 있노라고. 죽을 때 다 두고 가는 건 아니라고. “내 소유”라 할 만한 것은 갖고 간다고.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재산도 명예도 다 두고 가지만, 진정한 “내 소유”는 갖고 갑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 곧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무게를 순종을 통해 내 무게로 전환시킨 그것은 진정한 “내 소유”가 되어 우리에게 존재감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울 뿐’입니다.
인권의 자리는 어디인가
피터슨, 하라리, 홀랜드의 ‘인권’
by Derek Rishmawy
2024-03-05
THE KELLER CENTER 학부 때 수강한 인권의 도덕성에 관한 강좌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대부분의 철학 강좌와 마찬가지로 그 강좌도 명백하고 복잡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강좌 전반부는 인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왜 인권이 규범적이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를 칸트, 공리주의, 실증주의, 사회적 구성주의 등으로 설명한다. (신학적 이유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예 시작점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21세기에 들어서 더 이상해진 서구인 대부분이 인권이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여긴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권리는 “양도할 수 없으며” “자명”하다. 하지만 인권에 관한 공부가 다 끝나고도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사실은 딱 하나에 불과했다. 그 어떤 세속 철학도 인권의 근거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주장은 서로를 향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들이밀었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도 현대 도덕 담론과 국제법에서 인권이라는 중요한 개념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철학 수업에서야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도 어깨를 으쓱하고 얼마든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누구나 당연시하는 국제 도덕 질서 전체의 기초가 사실은 벌거벗은 임금님에 불과하다는 게 알려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거기에 실상은 “거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이 질문은 대학 강의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개 포럼에서도 논의된다. 공공 지식인이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역사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의 인권 논평을 둘러싼 최근 논란을 한번 살펴보자. X(과거 트위터)를 통해서 유포되는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인권은 천국, 신이랑 비슷하다. 인권도 우리가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주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다. 믿고 싶은 매력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현실이 아니다. 해파리, 딱따구리, 타조에게 권리가 없듯이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인권이란 없다. 인간의 배를 가르고 속을 살펴보라. 거기에 피, 심장, 폐와 신장은 있겠지만, 인권은 없다. 인권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에만 존재한다. 정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라는 것도 인권, 신, 그리고 천국처럼 이야기일 뿐이다. 진짜는 무엇인가? 산이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심지어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매우 강력한 이야기. 그래서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은 실제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이런 주장과 관련한 논란을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탈 기독교 문화의 도덕적 의식에 발생하는 몇 가지 중요한 균열을 만난다. 그 속에는 창조의 하나님을 모르기에 구원의 하나님은 아예 알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훈이 들어있다. 그냥 이야기라고? 하라리가 무신론자이자 자연주의자인 점을 감안할 때, 그가 비교적 표준적이고 철학적으로 정교하지 않은 형태의 과학주의, 즉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비과학적 신념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에게 유일한 “실제”는 산, 벌레, 피와 같은 생물학적 현실이다. 즉, 테스트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물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 천국, 지옥, 국가, 심지어 ‘인권’조차도 진짜가 아니다. 그냥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멋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결코 사물을 만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췌장 왼쪽이나 DNA나 염색체 구조와 같은 물리적 존재에는 인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관된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를 관찰할 뿐이다. 세상은 거기 있으니까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있기를 바란다고 해도,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어떤 절대적인 의무가 기록된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런 식의 주장이 마치 만화 속 악당이 자신의 마스터플랜(기후 변화 등을 피하기 위해 지구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폭로하기 위한 전주곡처럼 들린다는 사실이 하라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 같다. 상황이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합리적으로 대하려면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거기’에 있는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진실이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역사가 톰 홀랜드의 획기적인 책, 도미니언에서 언급한 요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권의 개념은 특정 시대와 장소(12세기 이탈리아), 특정 인물(교회법 변호사), 특정 교리(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특정 이야기(창조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 서사)를 기반으로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 인권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기독교 개념이 세속화한 결과이다. 홀랜드가 단언했듯이, 인권은 “가령 삼위일체보다도 객관적인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이 두 가지 다 기독교 신학의 작용에서 파생되었다. 이 둘을 다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홀랜드는 인권과 그 원천이 진리임을 확인함으로 그 “도약”을 이룬 것 같다.)어떤 측면에서 홀랜드와 하라리는 서로 동의한다. 예를 들어서, 인권에 관해서는 준수해야 할 목표가 없다. 그냥 단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홀랜드가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하라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홀랜드는 하라리의 경험론적 전제, 즉 “객관적”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것은 맛보고, 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권과 관련해서는 진짜로 ‘그게’ 있다고, 인권이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이야기와 관계없이 거기에는 ‘그게’ 있다주목할 만한 답변이 하나 더 있다. 홀랜드와의 부분적인 의견 차이를 보이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은 인권에 관한 한 거기에는 “객관성”이 없다는 공유된 전제에 이의를 제기했다.인권에 관한 교리는 의미 네트워크가 파생시킨 의미론적 냉혹한 결과임이 곧 드러날 것이다. 즉 인권은 단지 단어와 언어적 개념뿐만 아니라 이야기와 행동 패턴 사이의 관계에 걸쳐서 암묵적으로 인코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인간 존재의 구조 아니, 인간의 존재 자체에도 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즉, “인권”은 지속 가능하고 상향 지향적이며 상호 이타적인 인간 상호 작용을 특징짓는 전형적인 현실의 의미론적 표현이다. 전혀 임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피터슨의 언어는 확실히 비잔틴적이고 복잡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감각이 사물, 존재 또는 존재 자체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존재는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나아가서 아무런 사회적 구성이나 뿌리도 없이 서구의 양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이데올로기적 괴물이 아니다.물론, 피터슨이 지향하는 형이상학과 신학의 모호함을 고려할 때(그의 견해는 발전하는 진화 심리학 분야의 일부 발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추가한 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비유신론적 그리고 준종교적 혼합처럼 보인다), 그가 그 가치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건 별로 놀랍지 않다. 단지 이 진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든 검증이 가능해지고, 정량화가 될 거라는 일종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합리적인 정당성이나 설명이 없는 단순한 신념으로 보인다.자연법, 자연권, 양심: 억압인가, 지지인가?이런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이야기”는 지금과 같은 혼란에 어떤 빛을 비출 수 있을까? 기독교 인류학의 기본 형태를 이해하면 옳고 그름의 다양한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 및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제시할 수 있다.우리 마음에 새겨진 법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지식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한다(1:18-23). ‘자연신학’과 ‘자연법’이다. 우리의 도덕적, 인지적 특성이 올바르게 기능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숭배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라는 피조물에 적합한 요구를 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요구 중 하나가 다른 피조물을 존엄성과 존경심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즉, 학대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성관계를 가지거나 살해하거나 비방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24-32절).더 나아가서, 존중해야 할 대상이 단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방인, 즉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계시를 모르고 받지도 못한 비유대인도 포함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이 이방인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율법이 없어도 그들 자신에게 율법처럼 행하며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2:14).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5절).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감각, 즉 모든 시대, 문화,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 존재에는 법의 개념이 심겨 있다. 이것이 바로 C. S. 루이스가 “도”(Tao)라고 불렀던 것인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준수해야 하는 명령이 있음을 안다. 따라서 비록 창세기 1장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명확한 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성경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며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올바로 대하지 않는 경우에 거기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이성과 이데올로기사회 내부와 사회 간의 도덕적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한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영웅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무질서하고 부당하다고 반대할 수 있을까?비도덕적인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회는 자신이 가르치고 뿌리내리고 질서를 정하는 포괄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 사실은 세상에 타고난 보편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인류의 자연적 지식이 죄로 인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질서의 특징을 분별하는 인간이 능력이 하나님과의 소외된 관계로 인해 깨졌다. 인간의 도덕적 나침반은 더 이상 정북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점을 드러낸다. 거짓 신을 만들어 창조의 특징을 우상화하고 도덕법을 우리 자신의 왜곡된 형상으로 개조한다. 하라리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연주의는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으로 인해서 받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만들어 낸, 스스로를 속이는 멋진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보유한 진실 억압 무기고에서도 이데올로기는 가장 정교한 도구 중 하나이다. 일관성, 물질주의, 진리 파악이것이 바로 합리화되고 진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인 하라리의 기술생물학적 자연주의의 정체이다. 그래도 거기에는 최소한 일관성이라는 가치는 있다. 실제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자, 진화 심리학자, 자연주의 철학자는 도덕성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규범적 설명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는 데에는 다 동의한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와 폴 네델리스키가 쓴 Science and the Good’을 참고하라.)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의 진정한 가치를 부인하는 죄로 물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점점 악화시키는 현실에 대해서 일관되게 잘못된 해석만을 계속해서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피터슨은 한동안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놓고 씨름했다. 자연법과 자연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리를 명령하고 부여하는 하나님, “원형적 현실”을 저술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존엄성과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결과 또한 타락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모순 덩어리일 뿐이다. 신앙의 도약?홀랜드의 반응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인권 교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지만, 자연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견해는 매우 신앙주의(fideistic)와 역사주의에 치우쳐 있다. 홀랜드에게 있어서 “인권”에 대한 논의가 복음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특별한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권”이 “객관적인” 현실로서 자연에 내재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대부분의 윤리가 올바른 이야기를 믿기로 선택하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맞서 신학자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다음과 같이 썼다.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수 없다. 역사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은 정반대의 점을 지적하기 마련이다. 역사가 모든 의미와 가치에 대한 범주적 매트릭스로 만들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이야기라면,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다. 오도노반의 주장은 복음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바깥쪽에 있는 현실에 관한 서사라는 것이다. 현실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특정한 방식에 의거해 특정한 모양으로 만든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법과 자연권은 자연의 현실에 종속되거나 부과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에도 불구하고 확증하고, 명확히 하고, 정화하고, 또 중요한 경우에 확인시키는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계시는 자연계시에 대한 인간의 타락하고 죄악된 인식을 바로잡는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제공함으로써 계시를 완성시킨다.자연적 도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 피터슨은 옳다. 그 부분을 자연 너머로부터 오는 확증과 명확한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인식한 홀랜드로 마찬가지로 옳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이런 측면에서 사실일 때에만 그 이야기는 인간 존엄성을 확증함으로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도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우리가 뼈속 깊이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이해하고, 확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실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감자,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도 없고 복음도 없다면 하라리가 어느 정도 옳은지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단지 고기이며, 그 속에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주장할 합리적 근거는 없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만큼이나 오래된 주장이지만, 아무리 하라리가 이 문제에 관해서 틀렸고 대부분의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주장을 지금 현실과 관련이 없고 또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본성의 존엄성에 대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꺼려한다. 극도로 세속적인 사람이라도 피터슨과 같은 본능을 갖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기독교는 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 이성적 힘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한 그에 관한 정당화를 제공한다. 성경의 진리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에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확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복음과 함께 오는 더 큰 존엄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죽으시고, 같은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와 죄, 불의의 대가까지 치르시고, 그들을 예정된 영광으로 회복시키셨다. 할렐루야!둘째, 이 결과에는 반직관적인 부분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와 진리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기적이 진짜냐의 여부가 아니라 도덕성과 관련이 있다. 즉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자연 질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 특히 결혼과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독교의 믿음과 이해에 관한 반대 때문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은 뒷걸음질 치며 후방을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기독교의 관점이 사랑과 정의라며 스스로를 옹호하기에만 바쁜 모습처럼 보인다.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덕적 질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진리를 위해 변증적 이점을 강조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다. 세속적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서기에 점점 더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럴수록 기독교는 세상과 비교해서 더 확고하게 대조를 이루며 다른 이데올로기가 고작해야 희미하게 제시하는 소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우리가 항상 믿어왔던 것을 단순히 확증하는 역할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우리 양심의 진실을 억압해 온 모든 세상의 방식에 대한 시정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위로와 격려를 주는 말씀뿐만 아니라 심판을 약속하는 말씀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대량 학살, 강간, 인종 차별, 편견 등 이웃에 대한 인류의 폭력적인 범죄와 죄악,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다른 영역의 진실까지도 억압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성생활, 성적 취향, 성 정체성에 관해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하신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릴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강조할 때,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로서 다른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에게 말한다. 그렇기에 겸손하고 자신감 있게 말해야 한다. 불의로 진리를 억압하는 모든 방식에 대해 정기적으로 말씀으로부터 교정 받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나아간다. 그렇다고 겸손이 나태함이나 절망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만이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접근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증거를 남겨 두셨다. 율법은 그들의 마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들도 지금 양심을 누르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사모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심판으로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있다(롬 2:16).원제: Is There a ‘There’ There? Peterson, Harari, and Holland on Human Righ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그리스도인이 가장 힘써야 할 일
시편 84편 묵상
by 고명환
2024-02-26
1 꾸준하게 기독 모임에 참여하여 조용히 여러 일로 섬기는 한 대학생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늘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해내는 그 친구가 기특해서 격려라도 해 주고 싶던 터에, 서로 기도해 주는 순서의 짝으로 맺어져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평소 학교생활과 기독 활동에 성실한 모습을 보아 왔기에 주님과 보내는 시간을 견실하게 지켜왔을 거라는 믿음 아래, 기도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지는지 물어보았다. 헌데, 형제에게서 들려온 응답은 기대와는 달랐다. 당황한 듯 머뭇머뭇하며, 그 친구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다고 힘겹게 대답했다. 아마도 주님과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생활화하지 못하는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일에 드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열심과 성실함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주님을 알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주님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한 모임의 워크숍 시간에 어떤 선교단체의 스태프들과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르신 사명을 따라 묵묵히 헌신하는 전임 사역자들이었다. 그 헌신의 삶을 익히 알던 차라, 한 분 한 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지하고 순수한 열정의 증거들이 기대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기도와 경건 생활에 대한 나눔의 시간에 들려온 그분들의 힘없는 고백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구동성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마음은 가져 보지만 실제로 기도 생활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바쁘다 보니 기도 생활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무엇에 바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사역이 바쁜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은 자명했다. 주님을 위한 일로 인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러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목까지 나오는 이 말을 눌러야 했다. 2시편 84편은 총 150편으로 편집된 시편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시이다. 수사나 기교가 뛰어나거나 짜임새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소박한 언어로 주님을 향한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성도의 공감을 쉽게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84고라 자손의 시, 지휘자를 따라 깃딧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1만군의 주님,주님이 계신 곳이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2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내 마음도 이 몸도,살아 계신 하나님께기쁨의 노래 부릅니다.3만군의 주님,나의 왕, 나의 하나님,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제 집을 짓고,제비도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4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복됩니다.그들은 영원토록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5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마음이 이미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복이 있습니다.6그들이‘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가을비도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7그들은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시온에서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8주 만군의 하나님,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야곱의 하나님,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9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돌보아 주십시오.10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다른 곳에서 지내는천 날보다 낫기에,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더 좋습니다.11주 하나님은태양과 방패이시기에,주님께서는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정직한 사람에게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12만군의 주님,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복이 있습니다. (새번역)시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4절),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5절),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12절)을 언급한다. 그들 모두 주님을 가까이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사람들이다. 주님 계신 성전에서 살며 수종 드는 선별된 사람들이나, 주님을 가까이하겠다는 열망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의인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시편 15편). 언제나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사는 시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진정 복 받은 사람들이 분명하다(1-2절). 성전에서 일하며 “영원토록 찬양하는” 레위인들은 복된 사람들이다(4절). 시인의 눈에 “만군의 주님”이 계신 곳에 살며, 섬기고, 항상 찬양하는 특권을 가진 그들이 누구보다 복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으로부터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그들이야말로 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성전에 둥지를 튼 새들도 주님을 곁에서 뵙고 싶은 시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3절). 이에, 성전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주님의 제단 곁에 집을 지을 수 있고 새끼 칠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조차 흠모함으로 바라본다. 그토록 주님을 바라고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성전이 자리 잡은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 시온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역시 복 있는 사람들이다(5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만군의 주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경배하고 싶을 따름이다. 주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뗀 순례자들에게 앞길의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5-7절). 주님께서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샘을 내어 갈증을 해결해 주시며, 먼 길에 기진하지 않도록 힘을 주신다. 결국,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올라가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이다.” 놀랍게도 “만군의 주님”은 그분을 찾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거절치 않는다(“만군의 주님”은 네 번 반복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빈부귀천,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 누구든지,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올 때 그 길의 모든 장애물을 없애 주실 뿐만 아니라 힘을 주셔서 반드시 만나게 하신다(5-7절).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12절). 그는 은혜와 영예를 주님으로부터 받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얻는다(11절). 이런 사람에게 주님을 떠나 행복이란 없다. 주님과 떨어진 먼 세상에서 천 일의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주님 계신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만 못하며, 악인과 함께하는 편안한 장막의 삶이 주님 집의 말단 문지기의 생활만 못하다(10절). 제사장이 아니었던 시인이 들어가 지낼 수 있었던 성전의 장소는 지성소도 성소도 아닌 ‘주님의 궁전 뜰’(the court of the Lord)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이면 어떠한가. 주님의 장중이고 동일한 영광이 머무는 곳인데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는 그곳은 시인에게 지성소와 다름없는 장소이다. 주님의 성전 뜰에 머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행복하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시편 73:28).3주님께서 자녀들의 삶에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만든 열심과 충성심으로 그분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업적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아니면, 그분이 기뻐하실 거라 배우고 공부한 것을 곱씹고, 고민하며, 전력으로 성취해 내는 삶은 아닐까. 그럴듯하나, 주님을 오해한 빗나간 대답들이다. 주님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사원들이 최대한의 실적을 올리기를 바라는 회사의 CEO가 아니다. 알아서 각자 매뉴얼 대로 움직여서 그분이 고대하는 목표를 이루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큰 업적을 들고 오는 것을 반기는 세상의 경영자와는 다른 분이다.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시면 언제라도 능력으로 그분의 목표를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녀가 해낸 일이나 업적보다 자녀 한 명 한 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다. 참다운 부모가 자녀의 성공이나 그들에게서 받는 혜택보다도 그들 자체에 더 관심을 갖듯이, 주님은 자녀라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신다. 그들은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고서 찾은 사랑의 대상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으로, 그들이 목적이고 이유인 존재로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자녀들과의 교제를 기뻐하신다. 교제를 통해 그분의 심오한 사랑을 알려 주기 원하신다. 그래서, 자녀들이 사랑을 깨닫고 성장하여 그분을 투영하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신비로운 사랑의 수혜자였던 사도 바울도 성도들이 무엇보다 주님께 다가가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에베소서 3:18-19). 사도가 표현했듯 그리스도의 사랑은 입체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온전히 헤아릴 수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는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그분을 생각의 영역과 시간의 영역 속에 모시고 살 때 그 사랑의 힘은 삶에 작용하게 되고, 비로소 그분을 나타내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를 도외시하거나 소홀히 한 채 본인의 원함과 스스로 만들어 낸 열심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면 어쩌면 그날에 자취 없이 타버릴 공력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린도전서 3:13-15). 그것이 십자가를 높게 들어 올린 기념비적인 예배당을 지어 봉헌했든지, 선교지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했든지, 수많은 병자를 고친 기적을 행했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냈지만 정작 주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 결과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지인 자녀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5:5).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엄청난 일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떠나서 이룬 일들은 받으실 만한 “열매”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불법”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7:22-23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등장할 저주받은 사람들을 언급하신다. 그들은 주님을 거듭 부르면서(“주님, 주님”),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적법자들임을 주장한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실로 이들은 능력을 행한 사람들이다. 예언, 축사, 여기에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그야말로 ‘능력의 종들’인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들과 방법은 칭찬받고 보상받아야 마땅한 선한 일이다. 어떤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불법”으로,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로 규정하셨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 덧붙여,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선언을 들려주신다. 실제로, 전지의 능력이 있으신 주님이 그들이나 그들이 한 일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주님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행한 업적이 아무리 성스럽고 선한 일일지라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심판의 날에 인정받지 못할 허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주님을 떠나서 자신들의 마음을 따라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쌓은 어떤 업적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나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신 일이 아니라 어두움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음도 몰랐다. (주님이 불의한 자들의 일을 위해 조종당하실 리 없다.) 계시록의 서두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각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책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책망을 받은 교회들의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데 기인한다. 그들이 사명을 잊고 일하지 아니하거나 가시적인 선교적 성과를 내지 못해 책망받은 것이 아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간직해야 할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불신앙의 요소들을 용납하는 등,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질 때 파생하는 결과로 책망을 받은 것이다. 4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주님의 일(ministry)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을 적당히 하라, 혹은 주님은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 아니다. 삶에서 우선순위의 문제와 더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잘 대접해 드리기 위한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예수님 홀로 오신 것도 아니고 일행이 들이닥쳤으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부산했을지 충분히 이해된다. 손이 열 개라도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형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긴급상황에서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침내,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만을 터뜨렸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0:40). 마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중대사에 마리아가 동참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 톤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직접 마리아를 책망하고 일어서게 한다면 무례한 일일 수 있지만, 마르다의 언사는 부탁이 아닌 불평이었고 주님을 향한 원망이 묻어 있다.)의당, 마리아를 일으켜 부엌으로 보낼 줄 알았던 마르다의 불평은 효과는커녕, 가르침으로 바뀌어 돌아왔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Martha, Martha, the Lord answered,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but few things are needed or indeed only one.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41, 42절, NIV) 주님은 마르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거나,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그녀가 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마르다를 두 번이나 부르신 뒤(개인의 이름을 두 번 부른 예는 드물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NIV)”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안정되지 못한 영혼을 지적하셨다. 여기서, “마리아가 ‘좋은 몫(what is better)’을 선택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유의하고 싶다. 마르다가 주님을 위한 일에 최선으로 종사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하는 일이 더 좋은 선택(the better choice)이었다.혹여, 강단에서 이 본문이 여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마르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외침을 위해 인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교회에 많은 충성스런 일꾼이 필요한 것은 이해되나 다른 본문으로도 목적에 부합한 설교를 풍부하게 해낼 수 있다. 주님은 마리아의 편이셨다.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마르다의 열심을 부각하는 것은 주제를 비껴간 주관적 해석 이상이 될 수 없다. 최선보다 차선이 더 좋다고 강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록은 마리아를 조명하고 있다. 명백히, 주님은 그분을 위한 일에 바쁜 사람보다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죄와 인생의 무게 아래 지친 세상의 모든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내게로 오너라”는 초청은 오직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구도 죄와 사망으로 대표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오라’고 인생들을 부른 적이 없었다. 아니, 부를 수 없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석가도. 모두 죄의 저주 아래 놓였던 사람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 사람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주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람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서 죄인을 향한 정당한 표현은 ‘가라’가 되어야 한다. ‘가까이 오지 말라’가 되어야 한다.(출애굽기 3:5, 19:12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분의 경계를 모두 허물어 버리셨다. 무거운 짐을 벗고 그분을 안식처로 삼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오라’고 적극적으로 손짓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지치고 마음이 병든 영혼들을 일깨우는 빅뉴스가 아니겠는가?그분의 초청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선언을 통해 더욱 적극성을 띤다. 지친 영혼을 부르는 호스트는 마음이 온유하고(gentle)하고 겸손하다(humble). 어떤 형편의 사람이라도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고 편안한 쉼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인격을 가지신 분이다. 바로 그분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쉬러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잠시 쉬게 한 다음 목적을 위해 사용할 일꾼을 모집하는 초청이 아니다. 단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지치고 억눌린 영혼을 가엽게 여겨 쉬게 하시려는 사랑의 초대이다. 와서 할 일은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한테 배우는 것이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인생에 부과된 멍에는 구속을, 짐은 고통을 던져 줄 뿐이지만, 주님의 것은 마음의 쉼(rest)을 가져다준다. ‘오라’는 초청에 응하여 배우고 충분히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할 일이 있다면, 함께 메어 주시는 편한 멍에를 메는 것이다. (주님의 “내게 오라”는 초청은 원어의 뉘앙스 상 한 번으로 끝나는 일회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실천해야 할 반복 행동이다.) 주님께 다가가서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대신 자신이 만든 멍에를 메고 짐을 지는 생활에 의미와 목적을 두고 수고한다면, 그 멍에와 짐은 또다시 영혼을 피곤하게 하고 종래는 탈진해 버릴 것이다. 매일 주님을 찾고, 배우고, 주목하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편하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갈릴리 호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아침을 잡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셨다(요한복음 21:15-17). 그것도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왜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설교자들은 ‘사랑하다’는 세 가지 유형의 헬라어를 소개하며, 베드로의 대답이 최상의 사랑한다는 표현인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대답했기 때문에 세 번이나 물으셨다는 오래된 해석을 선호한다. 이와 함께 ‘내 양을 치라(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준엄한 명령으로) 강조해서 성도들의 헌신을 촉구하기도 한다. 왜, 주님은 세 번이나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을까?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대답했기 때문에 ‘아가파오’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일까? 그러다 마지막에는 베드로의 고백에 사랑의 마음으로 눈을 낮추시어 어쩔 수 없이 예수님도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물어보셨을까? (실제로 그렇게 설명하는 설교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용어를 가지고 의미를 두는 해석은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적절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여러 고대 문서는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했다는 걸 증명한다. (예수님도 두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질문하셨다.)무언가를 깊이 심어 주기 위해 주님은 같은 질문으로 세 번이나 묻고 동일한 부탁을 하셨다. 그 어떤 일보다도 그분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시려고 베드로를 세 번이나 불러 확인하여 강조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을 사랑해야 함을, 다음으로, 주님의 양을 돌봐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순서에 있어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시기 위해 ‘나를 사랑하느냐’는 전제조건을 거듭 확인하셨고, 그 뒤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주님의 부탁을 이루어 드리기 전에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 된다. 그분의 양을 치는 일에 앞서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일은 그분을 사랑하는 일, 그분 안에 거하는 일, 그분께 속하는 일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제쳐 두고 맡긴 사명을 좇아 열정을 불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든 예들 외에도, 그 어떤 일보다 주님과의 관계와 사귐에 힘써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는 성경의 근거는 많다. 이를 일일이 나열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서 충분할 듯하다. 5한국 교회로 대표되는 우리의 기독교는 통계가 말해 주듯 여러 면에서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다양한 전도 전략, 세분된 신앙 성장 프로그램, 새로운 형태의 소그룹 모임, 업그레드된 어린이 청소년 교육, 참여자를 배려한 예배, 편리한 시설 등 어느 분야 하나 빠짐없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 수는 줄고 있고 교회의 대외 이미지 또한 나빠지고 있다. 범부의 눈에도 과거와는 확연하게 가벼워진 우리 교회의 모습이 감지된다. 교회 건물 머리에 길게 늘인 유명 연예인 초청 전도집회 광고 현수막은 눈에 띄어도 말씀 사경회를 연다는 글귀는 자취를 감춘 것 같다. 김장 봉사, 급식 봉사 기회를 알리는 광고문은 보여도 기도회 참석을 독려하는 광고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껏 차려입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메운 무리는 보이지만, 침낭을 들고 기도처로 가기 위해 서성이는 성도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모니터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에 기웃거리는 일꾼들은 많으나, 세상의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일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의 콘서트를 방불하게 하는 수련회 집회 중 팔을 높이 들어 열창하는 청년들은 보이지만, 치열하게 주님을 찾다 예배당의 긴 나무의자에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을 밝히는 젊은이들은 사라진 것 같다. 복잡하게 얽힌 소셜 네트워크를 연신 체크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은 보여도, 세심하게 말씀의 장을 천천히 넘기는 손가락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가벼워지고 약해져 가는 현실에 대해, 단지, 시대의 변화로 원인을 돌리거나 내부의 한두 가지 이유로 설명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 전문가들의 크거나 세밀한 분석은 제쳐 두고, 내게 한 근본적인 이유를 끄집어내라 한다면, 이 땅에 진중하게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소중하게 여기며, 부단히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영적인 힘을 얻어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말씀을 직접 읽고 연구하여 그것이 주는 감동과 교훈을 얻기보다, 수고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설교나 성경해석, 간증을 듣는 것으로 영적인 양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용한 장소를 찾아 주님을 묵상하며 기도로 깊이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갖기보다, 여러 사람 속에 섞여 급한 마음으로 대충 기도를 쏟아 내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으로 기도 생활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충분한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 없이, 듣고 배운 지식 정도에 만족하며,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도들이 늘어남과 함께, 소리는 요란해졌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밝히고 선도할 내면의 힘을 기르지 못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본다. 진정한 내면의 힘은 지속적인 주님과의 진지한 교제를 통해서 길러진다. 끊임없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로 주님의 세계 속에 머무는 시간이 쌓여 감에 따라 그분의 능력과 형상을 드러낼 힘이 축적되는 것이다. 이는 그 분에 대해 듣는 것으로,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주목하고 그분의 세계에 몰입하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주어진다.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영혼을 돌보기 위해 성도를 만나는 시간, 공식적인 기도회에 참석하는 시간, 같은 뜻을 가진 동역자와의 교제의 시간이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고. 주님을 위한 일들이니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시간들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대체할 수 없다. 주님을 앞에 모시고 귀 기울여 듣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영적인 양식과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목사로서 주일 맞이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매번 긴장과 두려움이 따른다. 성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과 함께 그 시간에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로 드려져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런 긴장과 염려는 잘 된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으로 해소될 수는 없었다. 주님에게서 오는 자신감과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음에 아무런 가책이 없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가까운 관계가 준비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토요일은 온전히 주님과 개인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으로 떼어 놓았다. 그날을 사람을 만나는 일로, 행사에 참여하는 일로, 혹은 다음 날 설교문을 만드는 일로 보내지 않았다. 주일에 전할 말씀은 토요일 전에 준비했고, 한적한 장소를 찾아 묵상하고 기도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예배를 드릴 장소에 들러 성도들이 앉을 자리 하나하나를 붙잡고 한 분 한 분을 머리에 떠올리며 기도해 드렸다. 모두가 다음날 주님 앞에 나와, 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얻어 돌아가기를 위해 기도했다. 고백이 난무하고 표어들이 이곳저곳을 장식해도 주님과의 교제가 결핍되면 개인이나 교회는 힘을 잃어버린다. 시편 기자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라고 표현했듯이 그리스도인의 힘은 주님과의 교제에서 온다. 각자에게 주어진 성도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갈 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할 만한 생명력 있는 삶의 힘은 끈질기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든든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독교도 본래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고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만을 주목했던 마리아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공감과 위로의 배신
공감에서 성육신으로
by 이춘성
2024-02-15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칼 트루먼(Carl R. Trueman)은 최근 어느 지역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 신부들과 개신교 목사들의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곳에는 소위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개신교 목사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그 모임에 참여한 후 자기와 같은 복음주의 목사들에게 이질감을 느꼈고, 그 소회를 한 기독교 잡지에 기고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적어도 성자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에 있어서는 복음주의 목사들보다 로마 가톨릭의 수도회 소속 신부들에게서 더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후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곳에 참여한 개신교 목사들이 그리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분이지만,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신부의 예수님은 성부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 트루먼의 지적처럼, 현대 교회의 설교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와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수가 위로와 공감에 대한 것이다. 모두 괜찮고, 네 잘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가 설교단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설교가 정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교회 안에서 정죄의 언어는 죄악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청중에게 배척당하고, 설교자들에게서도 이질적인 언어가 되었다. 무조건 죄악과 부정적인 말로 우울하게 하는 메시지도 문제지만, 분별 없는 공감과 위로도 큰 문제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자신의 죄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정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더 큰 쾌락과 안정을 위해 약의 용량을 늘리지만, 그것이 그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답 없는 위로와 공감 또한 문제의 근원인 죄를 외면하게 만들어 상처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위로와 공감에 대해서 뭐라 말하고 있을까? 예수님의 공감 첫째로 성경은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사실이 기록된 성경 말씀은 히브리서 4:15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영어 성경(ESV)은 이 말씀에서 ‘동정’을 ‘공감’(sympathize)로 번역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이 둘은 서로 바꿔 사용해도 의미상의 문제가 없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고 이해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공감을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강조한다. 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은 인간이 처한 죄악의 환경, 그리고 죄의 비참함에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둘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시지만, 그 공감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히브리서 4:15의 ‘시험’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유혹’이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과 같은 죄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또한 그 유혹을 견디고 이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갈등과 죄에 취약한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경험하셨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예수님의 공감은 여기까지라고,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 성경은 그 공감과 위로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예수님의 공감은 죄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 네가 죄를 지은 것 모두 공감한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견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네 마음을 내가 다 알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너와 비슷해. 그러니 난 널 깊이 공감하고 위로해.” 이런 식의 공감과 위로가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가 결코 아니라는 의미이다.성육신과 복음C.S. 루이스는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위대한 기적”(the Grand Miracle)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아래로 내려가십니다. … 자신이 창조하신 자연의 그 뿌리와 해저까지 내려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내려가시는 것은 다시 올라가시기 위함입니다. 황폐된 세상 전체를 자신과 함께 위로 들어 올리시기 위함입니다.”(기적, 218) 이어서 루이스는 성육신은 힘센 사람이 커다랗고 복잡하게 생긴 짐을 들기 위해 자기 몸을 거의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짐 밑으로 숙이는 것에 비유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큰 짐을 어깨에 사뿐히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육신의 신비는 낮아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올라가는 ‘상승’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상승이 인간에게 복음인 이유는 그분 홀로 상승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상승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야말로 복음 그 자체이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핵심은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해결과 상승에 있다. 위로와 공감은 전능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높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상승할 때, 위로와 공감은 그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위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위로와 공감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가장 위대한 소식’(the Grand News)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고 하셨을까?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일까?
by Wyatt Graham
2024-02-06
마태복음 24:36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하셨다.당연히 이런 질문이 생긴다.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르신다고 했을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들이 모른다면,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인가?아들은 하나님이시고 또 사람이시다성경은 아들이 하나님(요 1:1; 골 2:9)이시요, 동시에 사람(요 1:14; 히 2:14; 빌 2:7; 롬 8:3)이시라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24:36은 이러한 성경의 진리 중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한 성경의 규칙은 이렇다. 보통 성경은 때때로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인성 면에서 아버지보다 낮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아버지와 동등함을 확증하셨다. 그러면서 인성에 있어서는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요 14:28)이시라고 기꺼이 인정하셨다.이 기본 해석 규칙은 성경만큼 오래되었다. 이 성경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는 글을 보려면 여기를 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진리는 두 가지이다. “아버지는 종의 형체보다 크시지만 아들은 형체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1]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빌립보서 2:6-8에서 바울은 아들이 본체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인성에서는 종의 형체를 지녔기에 하나님보다 작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다. 이 기본 진리를 알면 마태복음 24:36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기본 해석 규칙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의 무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처럼 사셨다. 이런 원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마태복음 24:36을 둘러싼 더 큰 성경의 맥락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마태복음 24:36의 전후 문맥 푸아티에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310-367)는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에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아리우스파가 마태복음 24:36을 어떤 식으로 인용하는지를 설명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모르는 예수님이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한 구절만을 놓고 보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문맥에 맞게 읽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36과 관련해서, 힐러리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앞뒤의 내용을 확인할 때 제대로 드러난다”라고 언급한다(De Trinitate §9.2).힐러리의 이 말은 마태복음 24:36의 문맥을 이해하려면 본문 자체를 넘어서 마태복음 전체, 심지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서 힐러리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무려 두 장(9-10장)에 걸쳐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한다. 근접 문맥에서 볼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4:36(마 22:41-46)을 말씀하시기 전에 우선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막 13:32)에서도 예수님은 이 말씀에 앞서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을 뿐만 아니라(막 12:35-37), 마가는 마가복음 11:15-19에서 예수님이 주 하나님으로 성전에 오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마가복음 서두가 암시하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막 1:2). 전체로 볼 때, 성경이 증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요 21:17; 시 44:21). 아들과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다(신 6:4; 요 10:30). 바울이 말했듯,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시고”(골 2:9).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요 1:16; 골 2:10).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또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 1:14)고, 그리고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다”(히 2:14)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자 하나님은 사람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에게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사람이신 게 사실이라면, 마가복음 8:29이나 마태복음 24:36에서도 그분이 자신의 그런 존재를 멈추실 리가 없다. 마태복음 24:36을 정경의 맥락에서 읽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Q: 마태복음 24:36에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있는가? A: 그렇다.Q: 아들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신가? A: 그렇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들어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이 점이다. 설혹 어떤 구절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굳이 다 설명할 의도가 없다고 해서, 완전한 그리스도가 완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다”(히 13:8).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누구라는 점을 오로지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라서만 확증해야 한다. 이 진리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없는 특정 구절이 있다고 해서 그분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예를 들어, 칼뱅은 마태복음 24:36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2]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이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근거로 할 때, 하나님으로서 아들은 모르는 게 없으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36에서 드러난 예수님이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그분의 무지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Nazianzus)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무지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귀속시킴으로, 우리는 가장 경건한 방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Or. 30). 그리고 그레고리도 지적했듯이,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야만 했던 이유도 “내 몸으로 내가 직접 감당하지 않고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Epistle 101 to Cledonius).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모든 부분을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처럼, 즉 몸과 영혼과 정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시험과 슬픔과 고난이 가득한 진정한 인간으로 사셨다.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인간을 공감하기 위해 “살과 피”를 취하셨다(히 2:17-18).마찬가지로, 히브리서 5:7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예수님도 인간의 슬픔과 염려가 있으셨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히 5:7).조금 앞서 히브리서 4:15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 26:3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이 어떤 느낌인지 아신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1:5-6)고 확증해야 한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히 4:15) 참 인간이시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날과 그 시를 모르셨다. 칼뱅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요 21:17)가 인간으로서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슬픔과 불안을 겪지 않으셨을 것이고, 결코 우리와 같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히 2:17)”(Harmony, 154).칼뱅은 슬픔과 불안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러한 시련과 유혹을 경험하셔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공감할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도 시험을 이기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실 수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벧전 2:21-22).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칼뱅은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무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긴 문장으로 설명한다.“중보자가 되려고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계시는 동안에 한해서, 그래서 최소한 그가 직분을 완수할 때까지는, 정확한 종말 시점에 관한 정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이해한다. 그건 그가 부활하신 이후에 받은 지식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예수님이 직접 부활하시고 나서야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이다(마 28:18절)” (Harmony, 154).중보자되신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인간처럼 알고 계실 뿐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날과 그 시간에 관한 지식을 받으셨다는 게 칼뱅의 주장이다. 칼뱅은 성경 전체를 자신만의 문맥으로 이해해서 읽었기에 이 구절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Harmony, 154).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마태복음 24:36을 읽어야 한다. 즉, 신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성경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칼뱅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에서도 특별한 부분, 즉 그날과 그 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시는 동안에도 어떻게 여전히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때는 쉬는 상태(a state of repose)였다.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이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에, 즉 인성이 고유한 특성에 따라 별도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성은 전혀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Harmony, 154).칼뱅이 의미하는 바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서 그분의 신성이 더 드러나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와 구속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구속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있어서 예수님의 무지는 그분의 참된 인성을 보여주며,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여준다. 힐러리는 그 점을 지적한다. “주님께서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염려의 무게를 없애셨다” (Matthew §26.4).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굴욕을 당하시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셨고, 그 사실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참 인간으로 사셨음을 의미한다.성경은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한다아리우스파가 성경을 문맥에 맞게 읽지 않는다는 힐러리의 비판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마태복음 24:36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떼어내서 읽는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 구절을 이해했다. 힐러리의 지적은 단순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도록 성경 전체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마태복음 24장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길게 가르치지 않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는 그 점을 배울 수 있다. 성경의 각 부분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 전체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 24:36 주위의 몇 구절만 읽는 것은 문맥을 떠나 성경을 읽는 것이다. 힐러리의 주장에 따르면, 그게 바로 아리우스파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속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자 사람이심을 가르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부르면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셨습니다”(딤전 3:16). 성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기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딤전 2:5)가 되셨다. 마태복음 24:36에서 그날과 그 시를 모른다고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 곧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참된 인성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 2:5).1. See The Trinity, trans. Edmund Hill, ed. John E. Rotelle, 2nd ed.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78.2.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6), 154. 원제: Why Doesn’t Jesus Know the Day and the Hour in Matthew 24:3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화장 또는 매장, 이 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by Justin Dillehay
2024-01-31
과거에 화장할까 매장할까를 놓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었다. 그리스도인에게 매장은 표준이었고, 따라서 “기독교식 매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스도인에게 화장은 고작해야 바이킹이 나오는 이야기에서나 만나는 먼 나라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상황이 바뀌었다. 화장이 보다 더 일반화되었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조금씩 사라졌다. 이제는 매장보다 화장이 더 일반적인 나라가 적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중에도 아예 처음부터 화장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은 목사로서 내가 종종 받기에 충분히 생각할 가치가 있다.내 주장은 “기독교식 매장”이 잘못된 명칭이 아니라 적절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시신이 화장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활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하나님에게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화장이 성경의 명확한 명령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적 관행이 기독교 신학과 잘 맞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나는 매장이 인간의 몸과 그 미래에 관한 성경적 선례, 성경적 이미지, 그리고 성경적 신학을 더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행위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매장은 절망적인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주는 희망을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죽음이 주는 슬픔 안에서 기쁨을 찾는 방법으로서 회복할 가치가 있는 관행이다. 바른 질문을 하라성경에 화장에 대한 도덕적 금지 조항은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많은 예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화장한 예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라헬, 요셉, 미리암, 모세, 다윗, 엘리사, 세례 요한, 스데반, 그리고 가장 유명한 매장 사례로는 그리스도의 시신이다(창 25:10; 35:19, 29; 49:31; 50:14, 민 20:1, 신 34:6, 여 24:32, 왕상 2:10, 왕하 13:20, 막 6:29, 행 8:2, 고전 1:31; 15:4).왜 그런지 물어볼 가치가 있다. 얼마든지 다른 옵션도 있었다. 스테판 프로테로는 “이집트인, 중국인, 히브리인을 제외하면 화장은 고대인의 표준 관행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매장이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하나님 백성의 표준 관행이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일까?매장 패턴은 정경이 완성되었다고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매장이 화장을 대체했다는 게 역사의 증명이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지배적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문화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화장이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인구 증가와 장례 비용 증가도 한몫했다.) 하지만 왜?반문화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이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항상 지배적인 관습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몸에 대한 유대-기독교의 믿음과 유대-기독교의 매장 관습 사이에 어떤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어서가 아닐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몸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죽고 나서조차 그 몸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종교들이 바라보는 몸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는 화장한다. 인도나 네팔과 같은 곳에서는 화장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힌두교인이 환생과 몸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다. 한 힌두교 웹사이트에 따르면, “죽은 후에 인간의 외양, 즉 육체는 아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영혼을 해방시키고 환생 과정을 돕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몸을 태우는 것이다”라고 한다. 육체와 내세에 대한 힌두교의 믿음과 죽음을 둘러싼 힌두교의 문화적 관습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 이건 놀랍지 않다. 육체를 영혼의 껍데기나 감옥으로 여기는 종교도 적지 않다. 이런 시각이 반드시 매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건 분명하다. 탈출한 감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행 17:32). 반면에, 매장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다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매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드러난다.)종교는 문화의 일부이며 문화적 신념은 문화적 관행에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몸기독교는 이 점에서 힌두교와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혼 불멸뿐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믿는다. 다른 많은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와 창조 전반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창 1-2 참조). 이것이 기본적인 기독교의 시각이다. 물리적 창조와 인간의 몸은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결과이다. 이는 또한 인간에 대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교리의 일부이다. 인간으로서 당신은 몸을 가진 영혼 또는 영혼이 있는 몸으로 묘사될 수 있다. 두 요소 모두 중요하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 죽음의 정의이다(약 2:26).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몸이 단지 “진짜 나”를 만드는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몸은 인간이 인간이 되도록 하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아비가일 파페일이 말했듯이,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다. 신체는 겉으로 드러난 사람 자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전이 된 5세기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에 대해 썼고, 그는 죽은 사람을 돌보는 방법에 이를 적용했다.아버지가 입던 옷, 아버지의 반지, 그리고 그의 모든 물건이 아버지가 베푼 사랑을 고려할 때 자식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육신은 얼마나 더 잘 보살펴야 하겠는가? 평생 입었던 육신을 어떻게 옷과 비교할 수 있을까? 몸은 단지 외적 장식이나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죽음으로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몸을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신 이유이다. 예수님이 매장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를 썩음을 당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 삼일에 살리실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행 2:27, 고전 15:4).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그리스도인 대부분도 부활하기 전에 부패를 겪겠지만, 우리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 참조 고전 15:51-55).힌두교 신학이 그들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초기 기독교 신학도 교회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쳤다고 신학자 티모시 조지는 지적한다. “로마의 카타콤이 증명하듯이 초기 그리스도인은 매장을 고집했다. 그리스도인의 묘지는 코에메테리아(coemeteria)라고 불렸는데, 문자적으로는 ‘잠자는 곳’을 의미한다. 곧, 미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간단히 말해서, 인체의 본질적인 선함과 미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근본이다. 따라서 그것이 사후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문화적 관행을 형성했다는 건 조금도 놀랄 일이 아이다. 바른 신호를 보내라그리스도인이 최근까지 거의 보편적으로 매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문화 추세를 단순히 따르기 전에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의식은 문화적, 신학적 공백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화장하는 요즘의 추세가 과연 바람직할까? 더 중요한 것은 (성경과 그 이후 모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적 관행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이 매장이라는 보편적 관행을 제대로 설명하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러셀 무어가 말했듯이, “문제는 단지 화장이 죄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다, … 진짜 문제는 장례가 과연 기독교적 행위로 이뤄지는지의 여부이며, 따라서 장례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이다.” 무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장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이며, 약함으로 뿌려진 것이 언젠가는 능력 있게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전달한다(고전 15:42-43). 부활에 관한 모든 구절 중 가장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땅에 심어진 씨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고전 15:35-37)시신을 묻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둘 다 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땅에서 나오는 것이 둘 다 생물학적으로 연속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차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상태로 다시 나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 동일한 비유를 사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이 말씀은 죽은 자를 매장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으로서의 부활과 기독교 관습으로서의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지침이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농업이든 장례식이든 매장은 최종 행위가 아니라 시작 행위이다. 단순한 끝이 아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교 문화 속에서 우리가 활용해야 할 기회이다. 그리스도인의 매장은 단순히 주검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는다. 추수를 바라며 씨를 뿌리듯, 우리는 부활을 바라며 장사를 치른다. 기독교식 매장을 다시 주장하며나는 무어의 이 말에 동의한다. “기독교 목사로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도 중 일부가 화장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거기에 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변의 다른 문화처럼 우리는 죽음과 매장조차도 단지 개인 취향에 따른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사람은 바다에 홀로 뜬 섬이 아니며,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장례식은 항상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책임이 개인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실용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 그리고 문화적 조류에 휩쓸리는 미국의 개인주의자로서 치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경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장례라는 엄숙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화장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돈 문제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묻어주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나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단지 입에 발린 동정은 가치가 없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이것이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가 여전히 장례를 기독교적 행위로 믿는다면, 우리는 중요한 곳에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적 이유로 매장을 하지 못하는 교인에게 교회가 나서서 재정적 지원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앞에서 나는 몸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역사적인 기독교 매장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화장을 선택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서 화장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나의 소망은 미래 지향적이다. 사랑하는 사람,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장례를 논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어서이다. 매장은 성경의 사례, 성경의 비유, 그리고 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가 점점 더 이교화될수록, 우리도 점점 더 반문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매장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크게 외치자,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원제: Cremation or Burial: Does Our Choice Matt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도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by 최창국
2024-01-26
교회 역사에서 형성된 중요한 경구가 있다. 바로 기도의 법이 곧 믿음의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란 경구다. 이 경구는 5세기의 수도사 아퀴테인의 프로스퍼(Prosper of Aquitaine)가 남긴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요한계시록 8:3-5에는 성도의 기도가 세상에 미치는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성도의 기도는 천국의 향로와 함께 천사에 의해 하나님의 존전으로 올라간다. 그 후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며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난다”(계 8:5). 이는 기도가 우주에 미치는 생생한 묘사이다. 이처럼 기도는 우주적 영향력이 있는 영적 활동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요 3:16)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기도는 세상을 치유하는 생명력을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의 생명력을 초월적이고 기적적 능력으로만 보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만병통치약처럼 접근하는 것은 기도의 가치와 효과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주의해야 한다. 기도는 단지 기적을 낳는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많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맺고, 이를 기적적으로 성취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자녀를 약속한 내용이다(창 17:15-19; 18:10-15; 30:22; 삿 13; 삼상 1:20; 눅 1:7).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적으로 출생한 아이들은 각자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하는 현대의 여성들이 이 내용을 자신에게 똑같이 적용하여 기도하면 아이를 허락하신다는 약속으로 간주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을 배제해서도 안 되지만,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이용하거나 제도화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초자연적 기적 추구의 열정으로만 이해되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배제하는 기도 문화를 형성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치유는 초자연적일 수 있지만 창조적 설계, 즉 자연법칙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기도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차가운 겨울에 벼를 심어놓고 눈이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법칙과 배치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노화 차제를 막거나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따르면, “자연법이라고 하는 용어는 자연으로부터(from Nature) 기원하는 법칙이란 뜻이 아니라 자연 위에(upon Nature) 부과된 법칙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은 위로는 궁창에도, 아래로는 대지에도 있으며 이 세계는 이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시편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와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흐르는 피와, 호흡기관인 우리의 허파에도 하나님의 계명이 주워져 있다”(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96). 우리의 기도가 자연법칙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의 기도가 모두가 인정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무시한다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로써 야기된 재앙은 자연법칙을 무시한 기도에 대한 창조자가 설계한 보편법의 응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자들은 이런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부른다”(도로시 세이어즈, 창조자의 정신, 26). 하나님은 우주가 창조 법칙에 따라 작용하도록 설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 또는 신유 역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바로 그 법칙 안에서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 안에서 더욱 충만해질 때 하나님의 신비를 더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하지만, 기도의 초자연적 특성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루돌프 오토는 서구 기독교가 신학과 신앙의 본질을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 즉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차원에만 종속시킴으로 기도와 같은 신앙의 생명력을 고갈시켰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반이성적이거나 반지성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비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계몽주의 시대사조가 저지른 합리주의적 오류와 독단에 도전을 하였다. 그는 종교 경험의 비이성적 차원을 뉴미너스(numinous)라고 부르고 거룩한 존재 앞에 설 때 자기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임을 느끼는 의식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비이성적 종교 체험의 신비감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경험한다. 그는 종교 경험은 역설, 비약, 실존적 결단, 자기 초월의 감정, 황홀한 감성, 비매개적인 직관, 비인과적 동시성 체험 등을 동반하기 때문에 종교 경험이 반드시 논리적, 과학적, 인과론적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실재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였다(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1-40). 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했듯이, 인간의 영적 경험은 이성적이고 감성적 표현 능력을 초월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적 경험은 은혜, 신비, 봉사, 경험 등과도 관계된다. 루이스는 “종교적 권위가 보다 확고히 수립되면 될수록 우발적 영감에 대해서는 더욱 대적하게 된다”고 하였다(C. S. Lewis, Ecstatic Religion, 34). 그것은 아마 기도의 신비의 미학을 의심의 눈을 가지고 자기도취적 행위나 욕망의 추구로 보고, 기도를 점점 무시하는 것에 대한 예견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기도 경험은 자연법칙 안에서만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의 미학이 있다. 특히 기도의 신비의 미학은 우리의 영적 삶을 이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리는 과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기도를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삶과 맞바꾸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를 통한 창조 세계의 샬롬에 대한 성경적 전망은 천상적이지만, 이 땅에서 실현되는 천상적 질서에 대한 전망이다(계 21:1-2). 이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배우는 텔로스(telos), 즉 궁극적인 목적이다. 주의 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의 기도는 현실을 도피하는 전망이 아니라 회복하는 전망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의 성경적 전망은 이 땅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다. 기도의 성경적 전망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분법을 철저히 거부한다. 앙리 드 뤼박의 말처럼,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으로 욕망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은총이 초자연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창조된 자연적인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Henri de Lubac, The Mystery of Supernatural, 130-137). 따라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은총도 결국은 자연적인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 여전한 유혹
시편 49편 묵상
by 고명환
2024-01-25
1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적 성공을 바란다.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이 시대에, 성공이 가져다주는 물질적 정신적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인의 아들이 의사가 되었다. 유치원생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간 뒤, 험한 일을 해가며 자식 뒷바라지를 했으니 나름 성공한 것이다. 일전에, 그분에게 아들이 의대에 진학하려는 동기를 물은 적이 있었다. 들려온 답은 간단했다. 아들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의대에 가려 한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적성에 맞아서’나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아니면 ‘보람 있는 직업이라 생각해서’ 정도의 상투적인 선택 동기를 기대했는데, 정제되지 않은 솔직한 대답에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난다.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돈을 좇는 것에 냉소를 보내고 싶지 않다.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그들에게 돈은 안정과 안락함을 보장해 주는 수호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넉넉한 돈은 갖고 싶은 것 갖게 해주고,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주고, 병들었을 때 치료받게 해주고, 고민 없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해주며, 편안히 쉴 공간을 제공해 준다. 물신의 통치 아래 사는 시민에게 돈은 쾌락이요, 안정이요, 권력인 것이다.허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 편승해서 성공과 돈을 좇는 대열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는 풍조는 그들이 진정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이생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의대 보낸 이웃을 부러워하고, 안되면 치대라도 보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자녀를 일찍이 학원으로 몰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를 대할 때면 서글픈 마음마저 든다. 투기를 목적으로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고,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곳곳에 불필요한 땅을 사둔 사람들도 교회의 요직에 배치되어 있다. 백세가 보장된 것처럼 ‘백세시대’를 노래하며 그때까지 누리고 즐길 넉넉한 자금을 비축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장로님 목사님들 앞에 하루하루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빈자의 마음은 더욱 불안해진다. 예배 시간에 백억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하는 당회장 목사를, 거부가 교회에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장로님을 마주할 때면 이곳이 교회인가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잠언 30:8). 과거에 그리스도인들 입에 제법 회자되던 성구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겸손한 기도와 가르침을 듣기는 쉽지 않다. 물질의 어려움 없게 해 달라는 기도나 사업이 잘되어 주님을 위해 멋지게 쓰게 해달라는 기도를 더 듣게 된다. 겨우 의식주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는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디모데전서 6:8)고 가끔이라도 강조하는 설교자들은 주변에 있는가? 의식주만 해결되면 자식 교육, 문화생활, 노후 준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만족하며 살라고 가르치면 교회 건축, 선교 등의 교회 사업은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이런 시대적 필요 앞에 자족과 절제 같은 성경의 미덕은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교회 속에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2시편 49편1만민들아, 이 말을 들어라.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2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모두 귀를 기울여라.3내 입은 지혜를 말하고, 내 마음은 명철을 생각한다.4내가 비유에 귀를 기울이고, 수금을 타면서 내 수수께끼를 풀 것이다.5나를 비방하는 자들이 나를 에워싸는 그 재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들과 돈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들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7아무리 대단한 부자라 하여도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속량하지 못하는 법, 하나님께 속전을 지불하고 생명을 속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8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값으로 매길 수 없이 비싼 것이어서, 아무리 벌어도 마련할 수 없다.9죽음을 피하고 영원히 살 생각도 하지 말아라.10누구나 볼 수 있다. 지혜 있는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자나 우둔한 자도 모두 다 죽는 것을!평생 모은 재산마저 남에게 모두 주고 떠나가지 않는가!11사람들이 땅을 차지하여 제 이름으로 등기를 해 두었어도 그들의 영원한 집, 그들이 영원히 머물 곳은 오직 무덤뿐이다.12사람이 제아무리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13이것이 자신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말을 기뻐하며 따르는 자들의 운명이다.14그들은 양처럼 스올로 끌려가고, ‘죽음’이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아침이 오면 정직한 사람은 그들을 다스릴 것이다.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은 시들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될 것이다.15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내 목숨을 건져 주시며, 스올의 세력에서 나를 건져 주실 것이다. (셀라)16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더라도, 그 집의 재산이 늘어나더라도, 너는 스스로 초라해지지 말아라.17그도 죽을 때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며, 그의 재산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18비록 사람이 이 세상에서 흡족하게 살고 성공하여 칭송을 받는다 하여도,19그도 마침내 자기 조상에게로 돌아가고 만다.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20사람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니, 미련한 짐승과 같다. (새번역)“들어라(Hear)” “귀를 기울여라(Listen)”(1절). 시인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며 시작한다. 그가 하려는 말을 흘려 버리거나 가볍게 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혜(wisdom)가 있고, 명철(understanding)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련한 짐승처럼 근시안적 삶을 사느냐(12, 20절), 미래를 내다보고 영원을 사느냐 하는(14, 15절) 중대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낮은 자도, 높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2절), 들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만백성”(1절)은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이스라엘 사람이든, 저주 받은 이방인이든 가릴 것 없이, 삶을 부여받은 피조물들은 지혜를 말하고 명철을 주며 인생의 의문을 풀어낼 수 있는 시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3, 4절).시인은 단지 부자들을 경고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자기의 민족 이스라엘만을 향해 교훈하려고 그들을 첫머리에 부르지 않는다. 만백성(all people)을 부른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all who live in this world)에게 외친다. 누구도 예외 없이 들어야 할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호소하듯 “들으라”고 외친 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경고한다. ‘죽음의 목자’가 기다리고 있다고. 높은 자, 낮은 자, 부자, 가난한 자, 우매 자 혹은 지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생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알라고 소리를 높인다(10절). 이 죽음 앞에 사람은 조금도 저항할 수 없다. 양처럼 지각이 없는 존재인 사람은 목자인 죽음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다(14절). 다만, 보이는 물질세계의 위력에 눈이 멀어 인생의 진리를 볼 수 없는 것뿐이다. ‘죽음의 목자’를 따르는 선두에는 가진 자들이 도열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쌓아 놓고 의지하는 부와 권력이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며(18절), 영원히 기거할 집(11절)이라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어두움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고, 무덤이 영주할 주인인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11절). ‘죽음의 목자’가 이끄는 대열의 선두 뒤에는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며 그 대열에 진입하고자 애쓰는 무리가 있다(13절). 그들은 가진 자들의 교훈과 철학을 기뻐하고 그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충고를 반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쥘 기회를 제공하는 그들이 고맙기만 하다. 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인 가진 자들만이 보이지, 가진 자들 앞을 인도하는 ‘죽음의 목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영원한 거처, “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19절)으로 향하는 인파 속에 섞여 있음을 알지 못한다.살펴본 것처럼 시인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분명하게 밝힌다. 반면, 거기에 따르는 구체적인 훈계나 교훈은 절제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시인의 외침만으로도 청자나 독자들이 각자의 인생의 좌표를 점검하게 만든다. 더하여, 시 안에 직접적인 지시나 명령을 내리지 않더라도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한다.부언) 부한 자들을 경고하고 부를 경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이를 전체를 수렴하는 주제로 내세우기에는 미흡한 감이 있다. 따라서, 새번역 성경에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인 “부유함을 의지 하지 말아라”는 제목은 적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재물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바꾸거나 살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임을 일깨워 주고(6-8절), 소멸하지 않는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의 자신감은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확신에서 나온다(15절).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시인이 부자를 두려워하거나(6절), 그들로 인해 초라해질 리 없음은 당연하다(16절). 3소유욕은 정말 질긴 욕망이다. 만족할 줄 모르며 중단할 줄도 모른다. 한 사람을 주관할 수도 있고 집단을 조종할 능력도 있다. 영특해서 노골적으로 정체를 드러낼 때도 있고, 숨어 정체를 숨길 때도 있다. 다스림 받기를 싫어하고 조금만 틈을 보이면 뛰쳐나가 일을 벌인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통 채로 삼켜 버리기까지 한다. 사무엘하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범죄 기록을 거론할 때 간음죄를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면 살인죄를 붙여 풀어 나간다. 물론 이 둘로 해석하고 교훈을 얻는다 해도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물면 사건의 온전한 실체를 다 아우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간음과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은 원인이 빚어낸 결과임을 찾아 낼 수 있다. 그 사건의 이면에는 엄청난 일을 벌이도록 작용한 배후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범죄 당시, 다윗의 인생은 절정기에 있었다. 불안했던 왕위가 확고하게 안정되었고 왕국을 위협할 만한 주변의 큰 이방 민족들은 모두 평정되어 직접 전쟁에 나가도 되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시기였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약속하셨던 약속의 땅에 해당하는 영토를 완전히 차지할 수 있었고, 이에 앞장섰던 다윗왕을 향한 백성의 신망은 매우 두터웠다. 아내로 삼은 여섯 여인에게서 여러 왕자가 태어나 왕가 역시 크게 번성했다(사무엘하 3:2-5). 왕으로서 최고의 영예와 부를 누리는 그야말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다윗은 내면에 도사린 탐욕을 제어할 수 없었다. 밧세바가 우리야의 아내라는 사실을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통제를 벗어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밧세바를 소유했고, 이를 덮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말았다. 이를 보신 하나님은 다윗이 일시적인 성적인 유혹을 못 이긴 간음죄 정도로 가볍게 여기시지 않았다. 나단 예언자의 입을 빌어 예를 든 비유 중, 많은 양과 소를 가졌는데도 손님이 오자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뿐인 어린 암양을 빼앗아 대접한 부자의 탐욕이 다윗 안에 숨어 있음을 먼저 들추어내신다. 그런 뒤, 직접적으로 그의 근본적인 잘못이 무엇인지 준엄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또 내가 사울의 손에서 너를 구하여 주었다. 나는 네 상전의 왕궁을 너에게 넘겨 주고, 네 상전의 아내들도 네 품에 안겨 주었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 나라도 너에게 맡겼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네게 무엇이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어찌하여 나 주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사람의 칼에 맞아서 죽게 하였다.” (사무엘하 12:7-9)주님은 다윗을 왕이 되게 하시고 상전의 아내들을 그의 품에 안겨 주시기까지 모든 것을 넘치게 베풀어 주셨다. 나라와 백성을 맡기셨고, 그것으로도 부족하게 여기었다면 그 이상 무엇이든 더 주실 마음이셨다. 그런데도 다윗은 그의 소유를 부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악한 일의 원인이 만족함이 없는 그의 소유욕에 있었음을 집어 내시고 그것을 간음과 살인보다 더 악한 것으로 판단하셨음을 들려준다. 마가복음 10장에 전도유망한 한 청년이 등장한다(누가복음 18장, 마태복음 19장). 공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관리로서 높은 위치에 있는 부자였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크게 성공한 엘리트 젊은이였다. 거기에 신앙심도 깊어 하나님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잘 지켜온 믿음 좋은 청년이었다. 아마도, 믿음 좋은 딸을 둔 부모들이라면 사윗감으로 삼고 싶은 보기 드문 젊은이였다. 돈과 지위를 이미 거머쥔 이 부자 청년은 무엇이 부족했던지 예수님을 찾았다. 그가 한 질문이 이유를 말해 준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부자 청년은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나사렛 청년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부자이고 지위가 있는 젊은이가 예를 갖춰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질문한 것을 볼 때, 이미 주님에 대한 상당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찾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얻고자 하는 바, 영생의 길을 예수님은 알려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겸손하게 다가와 영생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계명들을 나열하시며 “생명의 길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의 랍비라 칭함을 받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할 만한 평범한 대답을 먼저 하신 것이다. 이에 부자 청년은 말한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참으로 비범한 젊은이가 아닐 수 없다.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아온 청년이다. 세 복음서 기자들이나 예수님께서 청년의 대답에 대해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말은 진실했던 것 같다. 마가는 이즈음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삽입한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마가복음 10:21). 기자는 한 개인에게 예수님께서 따뜻한 시선을 보이셨다는 흔치 않은 설명을 덧붙인다. 마가의 관찰대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사랑하셨다. 아버지가 자랑스런 아들을 사랑하듯, 여러 면에서 칭찬할 만한 청년을 주님은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헌데, 주님은 이 부자 청년을 그것으로 놓아주시지 않는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쉬운 해답을 들려주시지 않았다.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집어엎고 다시 구축해야 할 혁명적인 길을 제시해 주신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가복음 10:21)시간이 흐르면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을 버리고 영원히 남을 것을 대신 소유하라고 도전하신다. 영원한 보물 저장고에 그의 소유를 옮기고, 그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소유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유로 삼았던 돈, 명예, 도덕성의 추구, 종교적 업적이 줄 수 없는 영생을 얻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버린 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추구해 오던 인생의 업적을 모두 해체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산과 같은 제안을 하셨던 것이다.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자 청년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일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꾸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섞어질 것을 썩지 않을 ‘하늘의 보화’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보이지만 임시적인 세상의 보화를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하늘의 보화로 바꾸라고 말씀하셨다. 이 트레이드를 보장해 주시는 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었고,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야 하는 청년에게는 그분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필요했다. 예수님을 다른 랍비들과 다른 정도의 수준이 아닌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시는 메시아로 믿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이 트레이드에 실패했다. 그를 사랑했던 예수님과, 갈구하던 영생의 길을 뒤로하고 근심하며 떠나가고야 말았다. 많은 소유가 그를 붙들었고, 청년은 이를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마가는 청년이 결단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22)초대형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젊은 목사 시절부터 꿈꾸어 왔던 제자화 전략을 통해 소규모 교회를 거대 교회로 일구는 데 성공했다. 물론 교회 주변에 신도시들이 생겨서 교회가 커지는 데 일조한 면도 있었다. 교회의 몸집을 더 이상 불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시점부터는 꾸준히 분립개척을 여러 번 해왔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가 커지면 한국 교회가 손대는 대안학교, 복지시설 등도 운영해서 교회 그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60대 중반의 나이인데도 일년 후에 조기 은퇴할 거라고 했다. 이유인즉, 이젠 “번아웃(burnout)” 되어 더 이상 목회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큰 교회 목회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하여,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조그만 목회를 하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목회다운 목회를 하려면 교회가 200명 이상이 되면 어렵다는 소견을 가졌던 나는 그분의 결정을 반기며 잘 생각하셨다고 맞장구를 치고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이어진 그분의 장래 계획은 나의 기대를 금방 깨고야 말았다. 조그만 교회를 일구어 큰 교회에서 못한 한 영혼 한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의 심정으로 섬기고 돕겠다는 소박한 꿈이 아니었다. 목회자들을 컨설팅하는 사무실을 열어서 자신의 목회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컨설팅 자격증을 땄고 교회에서는 그 일에 이미 지원을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교회에서 마련해 준 공간에서 자신의 목회 성공(?) 노하우(교회를 크게 만드는 비결)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며 목회자들의 멘토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였다. 어찌 생각해 보면, 성공한 목회자가 성공을 위해 몸부림 치지만 어떤 이유에서 건 고전하고 있는 후배를 위해 나선다는데 박수치고 기대감을 가져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그 길은 더 높은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픈 본인의 또 다른 욕망 성취를 위한 시작은 아닌지.’ ‘목회라는 책임감과 정신적 압박의 자리에서 비켜나, 힘들이지 않고 여전히 존재감을 잃지 않을 자리로 옮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스쳐 가는 의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른 한편, 그분이 젊은 시절 부목사로 시무했을 당시의 담임목사님의 은퇴에 대해 언급했다. 개척해서 견실한 중대형 교회로 성장시키기까지 고생하신 목사님에게 교회가 은퇴 처우를 섭섭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었지만 흔히 있는 불미스러운 일 정도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멈추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더는 캐묻지 않았다.시간이 지나, 그 교회에 함께 다녔던 장로님을 만나는 기회에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은퇴하시는 목사님에게 교회로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섬겨 드렸다고 했다. 원로 목사님으로 추대해서 담임목사님이 받는 80퍼센트의 사례비를 매월 지급하고 있고, 퇴임 후 퇴직금은 물론, 편안하게 사실 아파트까지 마련해 드렸다고 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내가 판단하기에도, 기본적으로 개인 재산이 있으시고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뒷바라지가 끝난 노년에 그 정도면 사모님과 큰 불편 없이 살아갈 만한 충분한 지원이었다. 그런데도, 그 성공한 목사님은 자신이 모시던 담임 목사님이 섭섭한 대접을 받고 은퇴했다고 전해주었다. 궁금하다. 작은 교회를 초대형 교회로 키운 그 목사님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 어떤 퇴직이 보장될지. 분명한 건, 섭섭하게 보냈다던 그 목사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퇴직금과 생활보장이 이루어질 거라는 사실이다. 이 땅을 떠나는 날까지 후배들에게 존재감을 보여주며, ‘성역’을 이룬 보상으로 주어진 재물이 주는 편리함을 향유하고, 그것이 가진 힘을 행사하며 넉넉한 노년을 보낼 것 같다. 4얼마나 가져야 하는가? 성경은 그 한계를 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한 소유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이 가져야 할 분량의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얼마나 소유해야 하느냐에 대한 답은 각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과의 관계에 실패를 가져오는 어떤 소유도 정당화될 수 없다. 소유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거나 관계에 틈을 만든다면 소유는 악이고 적인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데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는 정도의 양이 각자가 가져야 하는 분량이다. 미련 없이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적고 많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얼마나 많은 가치를 부여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가치에 눈을 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고,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와도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은 많은 가축과 종을 거느린 부자였다. 단지, 가축과 재산만 소유한 부자가 아니라 주변의 왕들과 싸워도 결코 밀리지 않는 훈련된 사병을 보유한 강력한 족장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진 것을 가진 것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를 낮게 바라보며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그의 소유는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카 롯에게 좋은 곳을 선택할 기회를 먼저 줄 수 있었고, 자식들에게도 공평하고 적정하게 재산을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에게 많은 소유는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 수중에 있었어도 그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욥 역시 가진 자였으나 가지지 않은 자처럼 살았다. 그의 거대한 재산이나 많은 자식이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틈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재산도 자식도 축복으로 생각했으나 소유로 여기지 않았다. 잠시 자신에게 맡겨진 임시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뿐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가 모든 것을 잃고 했던 고백이 이를 증명한다.“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죽을 때에도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주신 분도 주님이시요,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욥기 1:21, 새번역)그의 곁에 있다가 사라진 많은 것들, 재산, 자녀, 건강, 신뢰 같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일시에 잃었을 때, 욥은 권리를 가지신 주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보통 욥의 믿음을 강조하는 선에서 관찰을 멈추고 끝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행동도 간과하지 말고 주목하기를 바란다. 욥은 잃은 것에 대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주님을 찬양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니라 찬양을 통해 영광을 돌린다.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하셨기에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는 절대적인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 합당하며 선한 뜻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차원 높은 믿음의 표현까지 실천했던 것이다. 보았듯, 많은 소유가 욥과 주님과의 관계에 조금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을 소유주로 착각하지 않고 만유의 하나님을 소유주로 바르게 인식했던 믿음의 사람을 상실이 침몰시키지 못했다.5인류의 타락 이후 소유욕은 사람들 마음의 빈자리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에덴 동산에 머물 때는 소유할 필요가 없었다. 소유하지 않더라도 불안하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등진 이후 사람들은 소유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힘과 만족으로 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서로를 소유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마침내 소유는 영혼의 불안과 공백을 채우는 양식이 되었고, 하나님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빼앗아 갔다. 그런 뒤,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마저 그것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부유한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소유가 영혼에 밀착되어 사고와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성경의 여러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많이 거둔 소출에 취해 영혼마저 부유해진 나머지 커다란 착각에 빠진다. 자기가 소유와 영혼의 주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영혼에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누가복음 12:19, 새번역)어리석은 부자는 많은 소출로 영혼의 양식을 삼고 앞으로 즐기며 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영혼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그날 밤 영혼을 회수할 수 있는 절대자가 권리를 행사하면 모든 것과 이별해야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는 영혼을 소유에 빼앗긴 채, 자신의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계획을 세웠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소유로 인해 전 인생을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소유를 마음에서 분리해 내야 한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그것이 마음을 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내게 주어졌으나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들은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부족함 없는 생활을 넘어 외유와 관광이 잦고, 사치와 호식을 축복으로 자랑하며 고민 없이 즐기는 영적 지도자들이 많아졌다. 선교지를 방문한다는데 골프 장비를 가지고 가야 할지 테니스 채를 가져가야 할지 저울질하는 목사들의 들뜬 고민이 들려 오기도 한다. 과연 이분들 영혼 속에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자리 잡을 틈이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사도 바울은 감독이 갖추어야 할 여러 자격에 대해 열거할 때,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디모데전서 3:3)라는 항목을 포함시킨다. 바로 이어서 언급하는 집사의 자격보다 감독(overseers)의 자격을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언급한 것으로 보아, 감독이 중요한 직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에게 ‘돈을 사랑하지 아니해야 한다’(not a lover of money)는 요구조건은 집사가 될 사람들에게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아니해야 한다’(not pursuing dishonest gain)는 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수준 높은 자격요건인 듯하다. 그만큼, 영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일꾼들은 소유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소유에 의해 잠식당하기 쉬운 오늘날의 영적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점검하는 엄격한 표지의 하나로 삼아야 할 가르침이라 생각한다.책을 좋아하던 젊은 시절에 사방을 빽빽하게 책으로 장식한 목사님들의 사무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많은 책은 그분의 영적인 내공을 보여주는 것 같았고, 그 무게 앞에서 나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가르침만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심리적 위축감이 들었다. 교회는 담임 목사님의 도서 구입비로 상당액을 사례비 외에 지원해 주었고, 어쩌다 지나치는 당회장실 문 옆에는 배달된 큼직한 책 박스가 눈에 띄었다. 어느 날, 당회장실 소파에 앉아 목사님을 마주할 때,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할 겸 객쩍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책이 참 많으시네요.”“아! 내가 책 욕심이 많아요.”목사님이 반색하며 말씀을 이어 가셨다.“새 기독교 서적이 나오면 무조건 알아서 내게 배달이 되게 되어 있어요.”그러고 보니, 구석에는 아직 끈도 풀지 않은 큰 박스 두어 개가 눈에 띄었다. ‘책 욕심’욕심이 책과 결부되면 미덕으로 둔갑하는가 보다. 그럴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개인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책 읽기에 욕심을 부린다면. 하지만, 공간을 꾸미기 위해 수집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도 미덕이 될까. 미덕은커녕 허세가 되지는 않을지. 유학을 결심하고 짐을 부쳐야 할 때가 되었다. 거기 가서도 필요하리라 선택된 물건들이 박스에 쌓였다. 그중에는 생활비를 아껴 구입한 주석서, 성경 사전 등의 소장 가치가 있는 책들이 박스들의 반이 넘게 차지하고 있었다. 공부하러 가니 충분히 그곳에서도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었다. 일반적인 신앙 서적들은 어느 교회에 기증한 터였고, 신중하게 챙긴 알짜들은 그 나라까지 기어코 나와 동행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앞으로 두고두고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석, 사전류 등을 없는 살림에 열심히 구입했고,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서 그 덩치가 점점 커졌다. 이렇게 모은 책들은 빈번한 이사 때마다 싸고 풀고 정리하는 일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 갔다. 그때마다, 나그네 생활이 끝나고 어디에 정착한 후 번듯한 공간이 생기면, 더 이상 박스에 담을 일도, 풀어 책꽂이에 반듯하게 정리할 일도 없을 거라는 작은 소망을 위안 삼아 며칠 간의 정리 작업을 해내곤 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그런 날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또다시 박스에 싸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번엔 달랐다. 이제 많은 책 박스들은 귀국하는 짐이 되어야 했다. ‘그동안 애착을 가지고 구입하고, 끌고 다녔던 것들인데. 또, 한국에 가면 구할 수 없는 원서들인데. 앞으로 주의 일을 하려면 필요한 재산일 텐데.’ 두 번 생각할 이유 없이 당연히 함께 가야 할 짐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준비하면서 책들이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곳에서도 저 많은 책을 풀고, 정리하고. 또, 다시 옮겨 할 텐데, 같은 일을 언제까지 되풀이해야 하는가?’ 앞으로는 새로운 것을 살림으로 만들지 않기로 다짐하고, 이미 의복 외에 정들었던 세간을 처분해 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책들은 끝까지 곁에 있어 주어야 할 것 같은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과 생각은 그것들도 이젠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계속 사인을 보내왔다. 마침내, 모든 책을 처분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책 중에는 일 년에 한 번 들춰 볼까 말까 하는 두꺼운 책들이 상당수였고, 어떤 책들은 구입한 후 나중에 읽어 보리라 마음먹고 표지도 열어보지 않은 채 몇 년을 끌고 다닌 묵은 것들도 있었다. 이미 읽었지만, 나중에 또 한 번 보겠다고 보관하고는 다시 꺼내지 않은 책들도 제법 되었다. 가까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늘 가까이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힘들여 소유할 만한 이유보다 보내고 나서 오래도록 아쉬워할 만한 이유가 덜한 것들이었다.책을 떠나보내도 정 필요하면, 도서관을 방문하거나 기본적인 기독교 서적 정도는 구비한 목회자를 찾으면 해결될 것 같았다. 아니면, 전자도서를 사거나 빌려 이용하면 짐스런 책들을 더 이상 불러들이지 않아도 필요를 채우는 데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애착을 가졌던 값나가는 책들을 팔고, 주고, 버리는 일은, 결코, 쓰지 않는 생활용품을 처분하는 것처럼 즐겁게 할 일이 아니었다. 마치 폐업정리 하는 주인과 같이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분은 목회자인데 책이 별로 없어.”오래전, 한 집사님이 어떤 목사님 방을 들여다본 후 하던 소리가 생각났다. 더불어, “책 욕심”이 많다던 그 목사님의 소리도 겹쳐 들려왔다. 다행히, 단권 주석 두 권, 성경 두 권, 신학 사전 두 권을 빼고는 모든 책이 순조롭게 정리되었다. 남긴 여섯 권의 책은 급할 때 가까이 두고 쓸 의향으로 떠나보내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금도 처분한 책들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없는 아쉬움보다 자유로움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마음 한켠에는 ‘그것들이 무엇이라고’ 목사로서의 정체성을 조금이라도 거기에 두려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다. 책이라는 조그만 소유로 영혼이 부요한 적이 있었음을 후회하는 마음 또한 지우지 못한다. 6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풍족하게 주시는 이유는 명백하다. 나누고 베풀라고 주신다. 사치와 향락에 쓰기보다 돕고 사랑하는 데 쓰라고 주신다. 소유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소진하라고 주신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여러 목회적 충고 가운데, 부한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내용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넉넉한 형편을 주시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한 자들에게 ‘명하라(command)’는 강한 어휘를 사용한다. 오늘날, 사도의 명령 그대로 교회 안의 부자들에게 명하여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다면 아마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17-19, 새번역)하나님은 부한 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주라”고 부를 맡기셨다(18절). 한낱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거나 거기에 소망을 두게 하는(17절) 사적 소유물로 간직하라고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 맡기신 부를 “아낌없이” “즐겨” 베풀고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며 이로 인한 기쁨을 누리며 살라고 허락하신 것이다(18절). 주님의 뜻대로 소유를 흘려보내는 일은 결코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하늘의 계좌로 이체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정성스럽게 보내 준 쓸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그들의 섬김이 사도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마음에 새겨지는 선물이 될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들의 장부(account)에 기록되는 열매라고 흥미롭게 표현한다(빌립보서 4:17). 이는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늘에 계좌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에서 사랑으로 베풀고 나눈 소유는 자신의 하늘 계좌에 고스란히 기입되어 쌓이게 됨을 가르쳐 준다.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어라”(누가복음 12:33)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상충되지 않는 적절한 설명이다. 소유를 떠나보낼 때, 나의 장부의 잔고가 줄어들었다고 아쉬워하기보다 보상이 반드시 따르는 안전한 계좌에 입고되었다고 기뻐해야 할 이유이다. 성경 원리를 따라 맡겨진 부를 적절하게 내보내는 일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최상의 투자이며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7이제, 긴 전개를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다. 소유가 끄는 힘은 너무도 강하다. 타락한 본성 안에 도사린 소유욕을 부추겨 어떤 사람이라도 수하에 거느릴 수 있다. 수십 년의 선한 업적과 명성을 쌓은 지도자라고 말년에 소유의 희생양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를 탐하다 오명을 남기고 떠난 교계 거성들이 근자에도 제법 되지 않은가? 시인이 말한 부와 성공이 생명을 속량할 수 없다는 진리와,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재산이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범한 명제를 흘려듣지 말기를 바란다.소유를 사고의 모든 영역에서 분리해 내고 객체화하는 작업을 통해 소유의 지배를 끊어 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유는 서서히 그 편리함과 위력에 나를 취하게 하고 마비시켜, 도저히 분리해 낼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에게는 성공한 자로 칭송과 명예를 얻게 할지 몰라도 생명의 목자이신 주님과의 관계성에는 실패한 자로 전락시킬 것이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소유에 대한 집착을 이길 적극적인 방법은, 가지셨으나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분이 내 속에서 그 어떤 소유보다 귀중한 존재로 자리 잡는다면, 또 그분이 약속한 하나님 나라가 실상으로 다가온다면, 소유는 제힘을 발휘할 수 없다. 단순한 원리이지만 최선의 해법이다. 기억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교회에서, 혹은 목회에서 성공했다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성에 실패한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임을. 예수님께 나와 영생의 길을 물었던 성공한 부자 청년처럼 말이다.
출산을 장려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방식
by Heidi H. Dean
2024-01-18
정해진 범주를 흩트리고 청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신학자로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따라올 사람은 없다. 그는 도덕 윤리 분야의 최고 목소리였고, (내가 지지하는) 개혁 신학에 대한 비판자였으며, 내가 아는 한 강의 시간에 입에 욕을 담은 유일한 신학자이다.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도 남을 그는 신학적 좌파에 관해서는 그들이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며 무시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타임은 2001년에 그를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명명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는 “최고”라는 단어는 자신이 아는 한 신학 용어가 아니라며 무미건조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우파가 가진 우상과 좌파가 가진 우상,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장 위험한 우상을 불러내는 데에 적극적 의지를 가진 하우어워스로부터 우리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목사가 설교 시간에 헌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교회가 얼마나 조용해지는지 눈치챈 적이 있는가? 하우어워스는 이런 모든 어색함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물질주의, 통제에 대한 욕구,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실패가 우리의 출산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말로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불편해진다. ‘출산’에 대한 논의는 그만큼 어색하다. 그렇다면 하우어워스는 아이들에 대한 나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토론(debating)에서 데이트(dating)로 나는 독신 대학원생으로서 하우어워스와 함께 공부했는데,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가족”에 관한 그의 비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바로 범인이었다. 좌절한 범인. 미혼이었던 나는 전반적으로 진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듀크 대학에서 나는 데이트보다 토론을 더 좋아하는 남자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다가 철학과 학생 한 명이 내 마음을 끌었고, 나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듀크뿐 아니라 같은 교회를 다녔던 그 “친구”와의 몇 주간에 걸친 논쟁에서 (그게 과연 단지 우정이었을까?) 중심이 된 건 결혼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견해였다. 단순한 학문적 활동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논쟁이었다. 우리 각자가 독신 생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혼 부부만큼, 혹은 그 이상을 이바지할 수 있는가? (내 친구의 입장이다.) 아니면 뭔가 더 좋은 것은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성취될까? (내 입장이다.) 우리는 교제와 로맨스 같은 개인적인 가치와 다음 세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과 같은 사회적 가치의 바른 위치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스티븐은 나이 많은 독신이고 로맨스보다 생산성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우어워스의 강력하고 비감정적인 결혼 비전 덕분에 오늘까지도 그 큰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섯 자녀를 둔 후에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가족의 목적과 관련해서 하우어워스의 도전적이고 파괴적이며 필요한 관점을 인용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의 행동노틀담 대학에서 진행했던 결혼 강의에서 하우어워스가 학생들에게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라. 나는 “당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들은 건, “아이들은 재미있다” “아이들은 외로움을 막아주는 울타리이다”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를 키우라고 추천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진짜 좋게 들리는 멋진 대답을 하나 내놓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사람들은 완벽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충분한 재정과 집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이들을 이 세상에 맞이하려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어떤 아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 끔찍한 비극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녀를 갖는 것은 실로 엄청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 특별한 행위이다. 자유주의나 복음주의 집단 중 그 어디에서도 하우어워스가 2001년에 발표한 글에서 말했던, 자녀 출산에 대한 “급진적 소망”과 같은 말을 하는 신학자는 만날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녀를 갖는 것이다. 자녀를 먼저 낳아야 하고, 그런 다음 우리 삶의 다른 측면을 ‘내게는 자녀가 있다’라는 현실에 종속시켜야 한다.”하우어워스는 불편하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진실을 말한다.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이 원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환영”할 만큼 급진적인 소망을 품고 있는가?성경 전체에서 드러나는 소망출산, 입양, 양육, 봉사 등에서 우리가 출산을 원하는 사람(pro-children)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있다. 고대 세계에서 억압받던 여성, 어린이, 기타 약자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신 예수님은 다름 아니라 구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패턴을 이어간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문화적으로 열등한 대상이었던 과부, 둘째, 외부인과 어린이를 높이셨다. 학자들은 성경에 번식과 자손의 중요성이 계속해서 강조되었음을 입증한다. “씨”(자녀, 후손)라는 모티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진다. 이는 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 교회, 새 창조 등 모든 주요 순간에 필수 요소이다. 인류에게 내려진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첫 번째 사명, 즉 자신의 형상을 온 땅에 전파하라는 명령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마침내 성취된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왕국을 “열방”(요한계시록 21장),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요한계시록 7:9)로 구성된 하나의 “성(도시)”으로 묘사한다. 역사적으로 씨와 번식이라는 모티프가 상상력을 자극했을 때 교회는 번성했다. 초기 교회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용하고, 죽도록 내버려진 유아를 입양하는 등 적극적으로 생명 옹호의 입장에 섰다. 바로 그 점에서 교회는 로마 문화보다 우월했고, 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약자를 통한 교회의 성장은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다. 어린이를 포함하여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독특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모습이다. 소망은 오로지 교회에서만 찾을 수 있다자녀 양육이 소망의 기초가 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희생과 지연된 만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생은 아이들이 자라서 광범위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썼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즉 권력, 부, 그리고 영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독실한 신자들의 특징이다. 국립보건원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종교를 중요시하는 여성일수록 출산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한다. 교회에 충성하는 신실한 여성일수록 더 많은 자녀를 원한다. 그렇다고 출산만이 취약한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 아니다. 더불어서 개인에게 일일이 출산의 소명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백성으로서 교회는 단체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투신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은 독신의 길을 영원히 존귀하게 여기셨다. 구원과 성화 활동을 통해 독신자도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독신에 대한 확신이 결혼이라는 소명을 통해서 이뤄지는 생물학적 출산이라는 축복을 과소평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우어워스의 지적이다. “결혼은 자녀를 목적으로 하는 관행이다. … 결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녀를 낳고 돌보라는 부르심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교회는 이 소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자녀를 갖는 것이 교회에서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라면, 세상에 의해서 제자화 되는 길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출산에 관한 설교가 그 안에 담긴 신학적 복잡성을 간과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 점이 경시되어 왔다. 내게는 여전히 답보다 질문이 더 많다. 피임 기구 사용과 관련하여 복음주의자가 고려해야 할 윤리 문제는 무엇인가? 피임은 이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일상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여기에 관해서 신학적 입장을 형성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도록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비전, 어떤 윤리적 패러다임과 지혜의 인도를 받아야 할까?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잘 가르치지 못한다면,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우리가 진정한 제자도를 키울 수 있는 영역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는 인공수정 기술과 관련해서 적절한 사용과 부적절한 사용에 대한 지침을 어떻게 받는가? 자녀를 갖기 전에 기다려야 하는 이유와 적절한 임신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까?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부부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목적 속에는 반드시 출산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팀 켈러는 물질주의와 같은 우상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계층으로 이뤄진 소그룹을 통해서 이뤄지는 깊은 공동체 의식과 투명성을 통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교회의 몸으로서 서로 간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피드백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자녀를 갖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에 수반한 윤리 문제를 탐색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 간에 믿음과 책임을 지며 동시에 개별적인 조언까지 주고 받을 수 있는 소그룹 공동체이다. 출산과 관련해서 제자 훈련을 하려는 교회라면 꼭 필요한 이 문제를 도발적으로 제안한 하우어워스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기를 갖는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은밀하고 어색한 주제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우선순위로 인식하고 다뤄야만 하는 중차대한 주제이다. 원제: How Stanley Hauerwas Inspired Us to Have More Kid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우리에게 오바댜가 필요하다
by Brandon Cooper
2024-01-15
J. L. 마이어스의 1923년 고전 The Dawn of History(역사의 여명) 첫 장은 수백만 명이 아무런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이 살았음을 상기시킨다. 세상이 현재 그대로 앞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역사의 원호가 휘는 법이 없다. 그렇게 믿지 않는 건 망상이며 거짓된 희망을 낳는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가 여전히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우리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한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단지 고려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대안으로 인해서 생긴 순진한 발상에 불과할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끄는 끝, 텔로스(telos)가 있는가? 짧고 생소한 오바댜서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더 큰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에돔에 관한 이 이상하고 작은 책은 어둡고, 국가주의적이며, 심지어 복수심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바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선물을 준다. 다름 아니라 역사와 종말론, 그리고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왜 역사가 필요한가오바댜는 역사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영감받은 통찰력을 말이 아니라 “계시”(1절)를 통해서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에돔에게 말을 거는 오바댜는 이러한 통찰력으로 유다를 격려한다. 유다는 지금 막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아마도 예루살렘이 약탈되고 그에 따른 유배가 시작된 거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바알이 여호와보다 강한가? 이웃 에돔은 그의 형제의 멸망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고 약탈을 하며 악행에 가담한다(10-14절). 에돔은 그 모든 나쁜 짓을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며, 바로 그 점이 유다에게는 오바댜의 메시지가 필요한 이유이다. 역사에는 과연 목적이 있는가? 정의가 구현되는 날이 올까? 오바댜는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패배한 민족을 향해서 선지자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선포한다(15절). 유다의 패배가 여호와의 패배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연합한 적들 부족이 에돔에 접근했을 때, 오바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리차드 린츠의 말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에 대한 교훈이었다. … 물론 세부적인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역사는 반복될 수 있기에 기록되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과거 행위가 그분이 자기 백성을 향해서 그리고 자신이 하신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주는 근거라는 원칙에 따라서 역사가 기록되었다.오바댜는 구속사의 안경을 쓰고 역사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법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는지에 추상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행동을 통해서 알고 있다.왜 종말론이 필요한가히틀러의 선전가 요제프 괴벨스는 “세상을 향해서 첫마디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옳다”라고 선언했다. 나치 정권에 대한 역사의 판단은 그가 틀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건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 단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마지막 말이 있다.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잘 알고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신앙은 종말론적이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이 없이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한 게 현실이 아닌가. 오바댜는 힘든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그날”이라는 표현은 11-14절에 여덟 번 나오며, 항상 부정적인 의미, 즉 환난, 재난, 불행의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15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느니라”라는 종말론적 소망이 터져 나온다. 그날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아직’이 마침내 ‘지금’과 ‘드디어’가 되는 날이다. 모든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끝끝내 모든 잘못이 바로잡힐 것이다. 큰 불행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바댜는 다가올 하나님의 공의로 그들을 격려하고 싶어한다. 에돔이 행한 불의함은 그에게 고스란히 다시 닥칠 것이다(15절). 모든 빚은 청산되고, 모든 계좌는 정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제대로 다루시지 않는다면, 천국조차도 지옥이 될 것이다. 과거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정의를 갈망한다. “그때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 계셨는가?”라고 울부짖을 때마다, 사실상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심판은 필요하고 옳은 일이다. 그날이야말로 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이 다다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바댜가 약속하는 게 단지 하나님의 보복적인 정의만은 아니다. 그는 회복을 예언한다. 이 책의 마지막 세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국경에 도달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겠다고 약속하신다. (포로 생활 중인 난민들에게 이 얼마나 감미로운 메시지인가!) 애초에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일부이기에 사실상 하나님은 지금 자신이 했던 그 언약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다. 골고다 이후를 사는 우리는 이 회복이 단지 땅 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을 덮을 것이다(합 2:14).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될 것이다. 주여, 제발 그의 나라가 하루빨리 임하게 하소서(옵 1:21).하나님의 통치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모든 잘못은 바로잡히고, 지상에는 평화가 임할 것이다. 인신매매, 인종차별, 그리고 살인이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역사를 애초에 목적하신 대로 마무리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불의를 저지르면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부터 바로잡혀야 한다. 오바댜서를 겉핥기로 읽는 경우에 마치 세상이 단순하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예언의 메시지가 은혜라기보다는 카르마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벨사살이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그릇으로 술을 마셨던 것처럼(단 5:3), 에돔의 죄는 하나님의 성산에서 술을 마심으로 성전을 더럽힌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과 열방은 계속해서 술을 마실 것이다(옵 1:16). 뭘 마신다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 포도주는, 물을 섞어서 묽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부어 넣은 것이다”(계 14:10).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엡 2:3). 유다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그들을 약탈하기 위해 바벨론을 보내셨다. 그 결과 어느 이스라엘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포도주를 먹여 비틀거리게 하셨습니다”(시 60:3)라며 한탄했다.그러나 이스라엘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새날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너의 손에서, 비틀거리게 하는 그 잔 곧 나의 진노의 잔을 거두었으니, 다시는 네가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사 51:22). 이런 현실이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이며, 그의 나라는 불완전하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댜는 단지 심판(16절)이 아니라 “시온산에 구원이 있으리라”(17절)고 말한다. 어떻게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와 변함없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만나기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진노의 잔을 우리 손에서 거두어 그의 아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막 14:36).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더 이상 진노의 잔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따라서 종말론이 주는 소망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반드시 우리의 죄를 벌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제사장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로 하여금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게 하셨다. 원제: We Need Obadia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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