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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참여에 필요한 네 가지 ‘R’
by Trevin Wax
2023-12-07
Mere Orthodoxy에 실린 브래드 이스트(Brad East)의 에세이 “한 번 더, 교회와 문화”는 올해 나온 글 중에서 가장 통찰력이 번뜩인다. 이 글은 기독교왕국(Christendom, “사회, 문화, 법률, 예술, 가족, 정치 및 예배가 교회의 영향력으로 포화되고 교회의 권위에 의해 정의될 때 기독교 문명에 부여하는 이름”)의 흥망성쇠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그리고 1951년에 처음 출판된 리처드 니버의 고전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시 살펴본다. 그리스도와 문화니버는 그리스도인이 주변 문화와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기준을 개신교인에게 제시했다. • 문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 • 문화의 그리스도 • 문화 위의 그리스도 •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 • 문화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니버의 분류법에 대한 개요는 내가 쓴 요약 및 비평을 참조하라.)이스트는 미국 상황을 표준 규범으로 가정하는 한 교회와 관련해서 이런 식의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사고방식은 힘들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비판은 돈 카슨이 니버의 작업을 재검토한 지점과 일치한다. “모든 것에 다 들어맞는 하나의” 사고방식을 반대하는 카슨은 성경이 각기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요소를 옹호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사면초가에 시달리고 억압받는 북한의 신도들에게 “문화를 변혁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는가?”)신실한 존재? 이스트는 계속해서 교회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다른 유형을 찾아낸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To Change the World도 그중 하나다. 헌터는 (1)방어력(Defensive Against), (2)적실성(Relevance To), (3 순결성(Purity From)이라는 세 가지 용납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을 설명한 다음에 대안으로 (4)내부의 신실한 존재(Faithful Presence Within)라는 방식을 제시한다. 헌터는 신실한 존재가 대사명에 대한 순종일 뿐 아니라, 긍정과 대조를 모두 포함하여 문화에서 선하고 진실하며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우상 숭배적인 것은 무엇이든 전복시키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스트는 헌터의 작업을 인정하지만, 거기에는 네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1. 충분히 글로벌하지 않다. 미국이라는 맥락에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2. 충분히 역사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세속성 정착을 교회 역사에서 만나는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라고 가정한다. 3. 충분히 폭넓지 않다. 중상류층과 관련된 전문직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므로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적용을 회피한다. 4. 충분히 경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금지된 기관과 직업에 대한 경계선을 제대로 긋지 않으므로 예리한 모순이 요구되는 미묘한 삶의 영역을 놓치고 있다. 앞에 놓인 더 나은 길이스트는 우리가 니버와 헌터 및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하나의 “올바른” 유형, 자세 또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고집을 포기할 때만 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가 문화에 충실하게 참여하는 네 가지 주요 방식이 있다.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중복되고 본질적으로 서로 비경쟁적이다. 어떤 방식이 필요한가는 전적으로 콘텍스트와 콘텐츠에 달려있다. 교회가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같은 공동체에 있든, 다른 공동체에 있든, 더 큰 교회의 개별 구성원에 있든, 모두가 동시에 작동한다.”이스트의 작업이 가진 장점은 폭이다. 우리는 전근대와 포스트모던, 확립된 것과 해체된 것, 특권을 가진 것과 박해받는 것 등 가능한 모든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각각의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네 가지 방식을 네 개의 R로 요약한다. 1. Resistance(저항)“언제 어디서나 불의와 우상 숭배가 발견되는 곳에서 교회는 저항하도록 부름받았다. 교회가 목소리를 높일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적 명성이 있든 없든 그렇게 해야 한다. 교회는 현존하는 권력에 ‘반대’하거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 정권이 그리스도인에게 우호적일 때에도, 심지어 정권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할 때도, 저항이라는 과업은 필요하다. 저항은 다년생이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순전한 인내뿐이다. 때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2. Repentance(회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저지르는 죄와 범죄, 실패를 회개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즉, 교회가 보편적으로 저항해야 하는 불의와 우상숭배는 무엇보다도 교회 외부가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확실하게 발견된다. 심판은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에서 발견되는 부패와 사악함을 ‘거스르며’ 또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상태로 살라는 뜻이다. … 복음의 신뢰성이 교회의 실패 때문에 위협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리어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더 끔찍한 경우는 그 부패를 은폐하려는 태도로 인해서 복음의 신뢰성이 위협받는다.” 3. Reception(수용)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많은 축복을 받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창조한 세상은 선하다. 그리고 오로지 그분만이 모든 민족과 모든 문화의 주인이시다. … 간단히 말해, 세상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서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중요한 지식과 귀중한 유물로 가득하다. (물론 궁극적인 근원은 바울의 말 대로 그리스도이다.) 신자들은 결코 순진하거나 무비판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경우에도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전에 겸손히 손을 내밀어 받아들이는 것이다.”4. Reform(개혁)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말씀인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포괄적이다. 그것은 마음과 지성, 몸, 영혼에 다 전달된다. 말씀은 농민과 하인의 문제뿐 아니라 상인과 치안판사의 문제도 다룬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정의를, 민족들 가운데 정의를 명령한다. 거기에는 분리의 벽이 없다. 삶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곳에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복음은 한 마디로 개혁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한 관점에서 사물이 있는 방식 안에 새로운 조정을 생성한다. … 때와 장소가 적절할 때,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이뤄지는 복음 선포는 문화를 뼛골까지 잘라낸다. 그럴 때 문화는 결코 더 이상 동일할 수 없다. 심지어 그 후로도 문화는 절뚝거리며 걷는다.”이스트의 제안은 니버 및 헌터의 분류법을 단일 모델로 축소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강점을 취한다. 그는 문화적 조건이나 역사적 상황과 상관 없이 실행 가능한 한도 내에서 모든 적절한 방법을 다 고려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특히 오늘날 전 세계 교회에 적용이 가능한 방법을 찾도록 격려하고 또한 역사를 통틀어 교회가 했던 다양한 선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 이스트에게 감사한다. 그의 에세이 전체를 읽기 바란다. 시간이 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스트의 분석과 주장에 대한 나의 요약이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란다. 원제: The 4 Rs of Cultural Engage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by 서나영
2023-12-06
크리스마스는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그 장엄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감탄사’와도 같다. 대서사시 서막의 커튼이 올라가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작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비록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복음의 소망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기뻐하며 이 축제에 집중한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크리스마스에 관한 추억과 이미지를 쉽게 떠올린다. 타오르는 양초, 포인세티아의 싱그러운 붉은 잎사귀, 청아한 핸드벨 소리, 수많은 색색의 리본과 배너, 성가대의 칸타타, 어린이들의 캐럴, 성탄절 연극, 쏟아지는 음악들, 화려한 불빛과 전구 장식, 트리와 갖가지 장식, 주일학교마다 열리는 파티와 쏟아지는 선물, 교회마다 가장 큰 파티를 연다. 그 행복한 파티에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구제 헌금과 선물 나눔도 빠지지 않는다.그뿐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교회 담을 넘은 축하 문화가 되었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한 축제로 한창이며, 카페나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으며, 자선모금과 기부를 통해 크리스마스에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이 크리스마스의 화려함과 기쁨을 되짚어 본 계기가 있다. 십여 년 전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이자 문화신학자 마크 카펜저(Mart Coppenger)의 주도 아래 기독교 윤리, 변증학, 철학, 미학을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함께 모여 길고 긴 크리스마스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 교회에서 겪은 무분별한 크리스마스 문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에 관한 증언들이 쏟아졌다. 재정이 파산하기 직전인 상태지만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거대한 크리스마스 공연과 파티를 한 교회 이야기, 조용한 크리스마스 예배와 행사를 원하던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쫓겨난 이야기, 복음의 진수는 참회와 회개인데 그런 언급은 절대로 하지 않게 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크리스마스 시즌 상권의 이치를 설명하며 자본주의와 결탁한 타락한 교회 행사들 이야기, 부활절의 깊은 복음의 진리에 비해 크리스마스는 복음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이야기, 복음 전파를 위해 믿지 않는 마을주민에게 성대한 음식과 공연과 파티를 준비하지만 크리스마스로 인한 실제 결신자는 희박한 통계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기독교 예술학 전공인 나에게는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헤치는 화려함과 장식성의 자본주의 예술에 대한 비판처럼 들렸다. 그 누구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학생으로 나는 한국의 크리스마스 문화를 떠올렸다. 오래전 한국의 어느 대형 교회가 미국의 한 크리스마스 공연을 카피해서 실제 낙타를 성탄 예배 무대에 세운 적이 있었다. 아기 예수의 해산을 앞둔 동정녀 마리아를 태운 낙타의 등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결국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 탄생극에서 낙타나 배설물을 분출하는 바람에 모두 코를 막고 애를 먹었다는 뒷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신학교 토론에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례들도 생각이 났다. 서울 근교 지방의 한 교회는 크리스마스 정기 음악회에 초청된 한 기독교 대학 여성합창단이 마지막에 단체로 치마를 걷어 올려 다리 노출 서비스를 보였고 회중을 소리 지르게 하는 깜짝쇼를 펼쳤다. 서울의 한 교회 크리스마스 연말 음악회에서는 한 여성 솔리스트가 가슴의 반이 보이는 노출 심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했지만, 목사들을 비롯해 그 누구도 복장을 문제 삼지 않는 기독교 문화를 만들었다고 말이다.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토론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진귀하고 값진 결론을 얻었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아름답게 표현할 유일한 매개체이자 타락의 원흉이기도 한 예술에 대해 말이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 기독교학자들, 교회 리더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서 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술을 즐길 때, 교회에서 예술에 대해 예산편성을 할 때, 예배 예술의 올바른 모습에 대해 그리스도인이자 예술가로의 삶을 살 때, 그 예술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냐?”고 말이다. 나의 답은 이렇다.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하라.” 크리스마스와 같은 예술은 ‘예수 그리스도로 중심을 잡는 예술’을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그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명제는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 그리스도인이 그 길고 긴 순례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속해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매력적인 상징들과 주제들이 많기 때문에 숙련된 영성으로 집중을 다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감상하거나 만들어질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독교 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을 크리스마스처럼 하라”는 문장은 두 가지 상충하는 흐름이 만나는 지점이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끊임없는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예술의 세계는 인간의 내면과 세상의 세계만큼 복잡하고 넓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끊임없이 집중하기란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때로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견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예술작품은 성경이다.) 어제 읽은 욥기와 욥이 친구들 사이에 오간 길고 긴 대화를 읽으며, 나는 상담자의 자세와 타인의 고통의 문제를 묵상했다. 욥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을 묵상하는 것에는 상당한 집중력과 시간이 소모됐다. 죄성으로 인한 개인의 약함뿐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강력하게 방해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개인의 안위와 자율적 선택에 젖어 있는 문화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삶의 많은 주제와 생각의 틀을 들여다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완전히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가정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모던하고 편리하게 디자인된 교회 건물 안에서 정숙해 보이는 회중이 부르는 웅장한 찬양 속에 세련된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을 잃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충분한 예산을 들여 수준 높은 각종 크리스마스 기념행사에 온 교회가 전력투구해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위험들을 인지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는 초인간적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하심과 도우심이며,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지식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가 되게 하고 찬양이 되게 하는 관계적 영성 말이다. 이 영성 없이 기독교 예술을 누리고 영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을 크리스마스처럼 하라”는 두 번째 숨은 의미는 예술이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가를 기억하며 진정성을 가지고 임하라는 말이다. 때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어렵고도 두려운 일이다. 오늘날은 너무 많은 기독교학자와 리더들이 진리를 그저 냉정한 객관적 진리이기를 추구한다. 마치 과학적 진리를 보존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토론한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는 참된 증인은 다르다. 증인은 먼저 자기가 말하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경험하고 체험하여 온몸에 체화된 상태에서 나올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설명하고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진 피터슨은 이 명령의 목적이 우리 몸에 흡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신경 조직과 근육에 흡수되는 것처럼 그가 입을 벌려 말할 때 그것이 문장 속에 자연스럽게 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을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시는 길이자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이란 것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때로는 그 진리를 나르는 도구를 넘어 완전한 하나가 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자. 크리스마스에는 그 어떤 교회도 그저 언어적 설명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는다. 교회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촛불과 색색의 전구로 꾸민 빛의 예술의 장으로 변한다. 천사들이 노래했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외침은 헨델의 메시아로 울려 퍼지고 갖가지 악기들이 그날의 찬송을 재현한다. 온 교회는 크리스마스의 영광이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그 영광의 광대함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에서 천사가 찬송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계시록에서 회중이 찬송을 부리는 동안 일곱 천사의 심판이 준비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다(계시록 8-12). 성막과 성전의 수많은 상징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예표되고, 음악과 이미지의 환상 속에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구원을 예언했다. 예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불가결한 중심 행위다. 크리스마스처럼, 예배와 일상의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시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건물과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여 정돈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다듬으며 전하고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한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중심을 올려드리는 예술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많은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야 하는지 고민한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매일 대하는 문화예술에 대해 고민한다. 이 아름다운 12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예술’처럼 “용기 있게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예술을 추구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찾아 경청하고 응시하자고,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예술을 갈망하자고 외치고 싶다. 매일이 크리스마스처럼 기뻐야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하자. Soli Deo gloria!
일부다처 이단에서 나를 구하신 하나님
by Jared Larson
2023-12-05
우리 부부가 어떻게 만났는지 묻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맺어주셨는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글쎄요, 우리는 사실 일부다처 모르몬교에서 만났어요”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 피할 수 없다.그럼 사람들의 눈이 커지면서 말을 더듬거린다. “뭐라고요?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당황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한한 은혜에 대한 간증으로 인도한다. 그건 의심,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몇몇 죽은 친구들, 그리고 팀 켈러의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컬트나는 주류 모르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 조상의 모든 줄기는 모르몬교 설립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우리 부모는 주류였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떠나 컬트 집단인 모르몬 근본주의에 가입했다. 그들은 현대 모르몬교를 비판하고 조셉 스미스 시대 이후로 이루어진 모든 변화를 비난했다. 순종적인 아이로서 나는 부모를 따랐고 종말 시나리오로 가득 찬 세상에 몰입했다. 나의 전 생애는 온통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쓰였다. 우리는 음식과 탄약을 비축했다. 외부 교육은 비난받았고, 젊은 결혼이 장려되었다.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고 나흘째 되던 날 아내는 나와 결혼했다.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오른팔이라고 믿었던 컬트 지도자인 예언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가치있는 존재인가의 여부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여부에 달려있었다. 내가 속한 컬트는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받은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의 의로움에 달려있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재림 예수가 가장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신성한 능력을 우리 각자에게 부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조셉 스미스가 세운 교리를 마음대로 변경한 주류 모르몬 교회를 제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우리가 제시한 “복음”을 거부한 나머지 세상도 심판할 것이다. 의심모든 게 의심스럽기 시작한 건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다. 우리 공동체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특정한 날에 관한 예언이 있었다. 수석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며 그 진리를 확증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않았고, 내 속에는 의심이 생겼다. 의심은 숨 막히게 만드는 두려움을 동반했다. 행여라도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하는 내가 틀렸다면, 그것은 영원한 저주를 의미했다. 차마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의심을 억누르며 계속 버텼다.그러나 의심과 두려움은 손가락에 붙는 송진 수액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씻어내려 할수록 더 끈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절망감으로 바뀌어 서서히 겉으로 드러났다. 나는 갇혀버렸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을 품기 시작한 건 의심이 시작하고 약 육 년쯤 지났을 즈음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합리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두려움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의미했다. 나는 은밀히 무신론을 즐겼지만, 아무리 하나님을 내 속에서 없애려고 애써도 내가 창조주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깊은 자각과 그분이 나를 본향으로 데려가길 원하신다는 생각을 차마 떨칠 수는 없었다.그렇다면 타고난 그런 사랑의 감각이 나를 달래줬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도리어 나를 화나게 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 하나님이 왜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내버려 두는 걸까? 나는 컬트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줄 명확한 대답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이 사 년이 더 흘렀고, 두려움은 계속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신앙어느 날 밤, 지혜로운 아내의 권유로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에는 내가 너무 부족합니다. 제발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데려다주세요. 더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당신 것입니다.”이 모든 기도가 내 입술을 떠나는 순간, 깨달음이 나를 덮쳤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그때까지 내가 알던 모든 건 다 종교와 행위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움직이는 모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짜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성경에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하나님을 알려면 그리스도 위에 나의 기초를 세워야만 했다.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만이 합당했다.그날 밤 나는 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고, 그렇게 했을 때 모든 게 바뀌었다. 그리고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하나님은 나를 다시 인도하기 위해 세 명의 죽은 영을 보내셨다. C. S. 루이스,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고 마르틴 루터였다. 물론 진짜로 그들의 영이 나를 찾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만난 건 그들의 글이었다. 톨킨의 환상에 매료된 나는 루이스를 찾았다. 본회퍼를 알게 된 건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 덕분이었다. 그리고 성경 주석을 찾기 위해서 킨들 무료 책을 뒤지다가 루터를 만났다. 이 세 사람의 삶과 글은 나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잇는 새로운 관계로 이끌었고, 은혜에 대한 아름답고 새로운 이해로 나를 제자 삼았다.컬트를 떠나고 몇 주 지났을 때 하나님은 내게 살아 있는 작가를 보내 주셨다. 그때까지 나는 팀 켈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내가 접한 최초의 생존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이었다. 컬트에서 살았던 내 이전의 삶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에 나는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을 읽었다. 친숙한 비유에 대한 그의 생소한 접근에 나는 크게 놀랐다. 하나님은 나를 그의 나라에서 탕자 동생으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화를 내는 형으로도 이끄셨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올바른” 일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자기중심적인 종교인에 불과했다. 켈러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참된 자유와 용납은 오로지 사랑으로 충만한 구주의 의로우심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으로 나의 작은 가족을 어두운 곳에서 끌어내어 그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다. 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원제: God Saved Me from a Polygamist Cul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명목상 기독교’ 현상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3-12-04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언젠가 카페에서 지인과 대화를 하는 중에 옆 좌석에 앉은 청년들이 하는 얘기를 엿듣게 됐다. 그들의 대화에서 “교회~”가 언급되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했다. “우리 부모님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고 신앙을 되게 중요하게 여기셔. 그래서 나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잘 다녔지.” “그러면 너도 기독교 신자야?” “아니, 난 그 정도의 신앙은 없어. 그래도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있지. 우리 집이 기독교 배경이고, 나도 교회에 적은 두고 있으니까.” 이들의 대화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명목상 기독교 현상을 보여 준다. 한국 교회 내에서 우리가 흔히 ‘선데이 크리스천’ ‘나일론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얼마 전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서 실시한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실태에 대한 첫 번째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s)이란 교회에 다니거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면서도, 신앙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 또는 교회 출석 외의 실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번 조사에서는 만 19세 이상 개신교인 교회 출석자 1,000명 가운데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39.5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1) 신념 영역, (2) 신앙 활동 영역, 그리고 (3) 신앙 정체성 영역으로 나누어 명목상 교인 규모를 파악하고자 했다. 신념 영역, 즉 자신에게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묻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근거’ ‘신앙생활의 목적’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들을 명목적 교인의 기준으로 설정했다. 신앙 활동 영역에서는 예배 외의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지, 그리고 평소의 기도생활 및 성경읽기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실천하지 않는’ 명목상 교인의 여부를 파악하고자 했다. 여기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대답을 신앙 정체성의 결여로 인한 명목상 교인에 포함시켜, 최종 39.5퍼센트가 산출됐다(조사 결과의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 참조).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와는 달리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명목상 그리스도인’보다는 ‘명목상 교인’으로 분류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명목상 교인에 관한 조사는 가나안 성도 조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가나안 성도는 현재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회가 있는지의 여부로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명목상 교인은 ‘신앙의 정도’에 관한 질문이기에 좀 더 복합적인 접근을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2018년 명목상 기독교에 관한 로잔위원회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범주를 (1)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교회 소속이 없거나’(not affiliated), (2) ‘규칙적으로 교회활동이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not practicing), (3) ‘회심, 또는 거듭남이 없는’(not converted, unregenerated), 그리고 (4) ‘헌신하지 않고 피상적인’(not committed, superficial)이라는 네 가지로 제시한다(Evert Van de Poll, “Defining Nominal Christianity,” 4-12). 따라서 이번 명목상 교인 조사는 위의 네 가지 범주에서 가나안 성도에 해당하는 (1)의 경우를 제외하고, (2)-(4)의 명목상 교인 범주들을 고려해서 한국의 명목상 교인 비율을 산출한 것이다. 선교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그리스도인 됨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경계집합적 접근과 중심집합적 접근을 구분한다. 경계집합(bounded set)이란 교회출석, 세례, 신앙고백 등과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경우다. 그러나 히버트는 중심집합(centered set)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인 됨을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중심집합은 경계를 나누는 외적 표지보다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 및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됨의 진정성을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 중심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부응하는 믿음과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를 통해 그리스도인 됨을 진단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경계보다는 중심을 향한 방향과 거리가 중요하다. 명목상 교인에 관한 조사는 이러한 중심집합적 개념에서의 그리스도인 됨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누군가를 명목상 교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명목상 기독교 현상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던 로잔운동에서도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는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술적으로 제안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해당 문서의 16페이지). 이번 조사에서도 명목상 교인을 산출하는 로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결과값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때문이 아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이들을 명목상 교인으로 포함해야 할 것인가? 명목상 기독교에 관한 조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앙의 진정성을 묻는다면 단순히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긴다는 답변은 미흡해 보인다. 이들을 포함하면 명목상 교인의 비율은 50퍼센트대로 올라간다. 실제로 어떤 양육모임에 참여한 이들 30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100퍼센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때문이 그리스도인 됨의 근거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선행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최종 결과에서는 예수님,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라는 답을 하지 않은 이들만 명목상 교인으로 분류했다. 이와는 반대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을 명목상 교인으로 포함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연구자들 내부에서 이견이 있었다. 확신이라고 단어가 주는 단정적인 어감 때문에 겸양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음에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 여부를 명목상 교인 구분에서 제외하면 최종 결과는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단순히 신앙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믿음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하여 포함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이 교회에서 다소 인위적으로 쓰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미국 기독교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파악하는 데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를 묻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보다 구원의 확신이 설문조사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더욱 자주 쓰인다는 현실을 고려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 상당 부분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복음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는 점도 감안해야 했다. 가장 최근에 명목상 그리스도인에 관한 미국의 조사는 2022년도에 Personal Faith Journey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이 조사는 미국 전역에서 9,50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과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집단을 분류했다. 분류의 기준 질문은 (1)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이상 교회(또는 신앙 모임)에 참석하는지의 여부와 (2) 자신들의 삶에서 신앙이 높은 혹은 가장 지대한 중요성을 지니는지의 여부였다. 이 조사는 두 기준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한 경우에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해서 응답자의 33.3퍼센트가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66.7퍼센트가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분류됐다. 일반적으로 서구권의 명목상 교인 조사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소위 ‘가나안 성도’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이번 목회데이터연구소 조사는 가나안 성도를 제외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명목상 교인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가장 최근의 가나안 성도 비율이 29.3퍼센트가 나왔고, 이번에 파악된 명목상 교인 39.5퍼센트를 가나안 성도를 제외한 70퍼센트에 비례해서 산출하면 27.9퍼센트가 나오므로, 가나안 성도를 포함하는 서구식 명목상 교인의 비율은 57.2퍼센트가 나온다. 이는 미국의 66.7퍼센트에 비해서 약 10퍼센트가량 낮은 수치인데,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고려할 때 수긍할 만한 측면이 있다.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통계는 없었는데, 이번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 교회 내부의 실질적 신앙생활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졌다는 의의가 있다. 사실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오래된 관심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경고하셨다. 입술로만 표명하는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는 신앙이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는 주님의 교훈은 우리가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이유이다. 역사적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관습화되고 힘을 잃을 때마다 명목상 기독교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청교도들은 명목상 기독교 현상을 넘어서기 위해 진정한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명목상 기독교(nominal Christianity)는 주로 탈기독교세계(post-Christendom)에 접어든 서구 교회의 현상이었지만, 기독교가 전래된 지 4세대가 지난 곳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한 세대를 25-30년으로 볼 때, 기독교가 전래된 지 138년이 된 한국 교회에서 명목상 기독교 현상은 주목해야 할 과제이다. 최근 가나안 성도와 탈교회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사실 명목상 교인은 가나안 성도와 탈 교회 현상의 전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고민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은 있으나 자신의 가치관으로 인해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나, 심지어는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 판단으로 무신론자가 된 이들보다도 더욱 약한 고리가 될 수도 있다. 명목상 교인 조사는 누군가의 신앙을 등급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인생 여정 가운데 명목상 신앙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영적 변동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동적이며 불확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명목상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아예 신앙을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명목상 교인은 교회 내의 양육 대상일 뿐 아니라 선교적 대상이기도 하다. (다음 글에서는 명목상 교인들의 주요 특징과 사역 방향을 다루겠다.)
바트 어만 씨, 뭐라고요?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요?
by Glenn Hohnberg
2023-12-02
성경 연구 저자이자 회의론자인 바트 어만은 ‘복음서를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성경의 모순들’이라는 강의에서 반복해서 말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으세요. 읽으면 다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성경 본문을 읽었다. 그리고 내가 찾은 것은 어만이 신자들에게 어려운 구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조금만 생각해도 그가 말한 수많은 모순이 단숨에 사라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가 말한 모순 중 일부는 논리가 너무나 연약해서, 나는 어만이 솔직하지 않은 게 아닌지 궁금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경의 모순이라는 이 문제에는 많은 게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어만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읽는다고 해서 그게 꼭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게 다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9분 50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은 더 큰 주제로 이어진다.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모순에 대한 어만의 정의는 ‘서로 다르고 조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성된 둘 이상의 설명’이다. 따라서 ‘두 개의 모순된 설명이 둘 다 역사적으로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강의 시작 부분에서 어만은 성경을 나란히 놓고 읽을 것을 열정적으로 촉구한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누가복음, 마가복음, 마태복음의 같은 구절을 서로 평행선에 놓고 비교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의 독서법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한 학자의 열정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오래된 NIV로 복음서를 읽을 때 나는 이미 유사한 모든 구절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었다. 자, 서론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본격적으로 모순이라는 문제로 들어가서 어만이 말하는 모순이 진짜 모순인지 살펴보자. 그의 강의에 나오는 순서대로 그 문제를 다루도록 하자. 1. 야이로의 딸을 고치심비교가 가능한 두 구절은 마가복음 5:21-24과 마태복음 9:18-20이다. 어만은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한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야이로의 딸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의 기록을 보면 그녀는 죽었다. 자, 여기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 어만은 청중에게 텍스트를 읽으라고 촉구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몇 가지를 알아차린다. 마가복음에서 야이로는 예수님께 오리지널 코이네 헬라어로 ‘내 딸이 죽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대담하고 생생한 이미지이다. 따라서 독자가 그의 딸이 실제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가 야이로의 집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딸이 지금 죽었다고 말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살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막 5:35)이건 보기에 따라서 어만의 주장을 확증하는 거 같다. 그러나 마가와 마태를 주의 깊게 읽으면 피 흘리는 여인의 이야기가 일으키는 방해와 야이로의 딸 주변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서,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더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이 사건에 관한 마가의 기록이 23절에 걸친 반면 마태의 경우는 9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마태가 야이로의 딸과 피 흘리는 여인에 대한 두 이야기를 압축하여 두 문장으로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적지 않은 세부 사항을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마태가 서술한 야이로의 이야기는 단지 상황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기에 굳이 종들이 알려준 자세한 설명까지 다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게 아닐까?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죽었다’로 번역된 마태가 사용한 동사는 부정과거형이다. 단순함을 위해 종종 과거형으로 번역되지만, 행동이나 사건을 요약해서 말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은 야이로가 그의 딸이 지금 막 죽었다고 말하거나(단순 과거 시제), 또는 마가의 경우에서처럼 그녀의 죽음이 임박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경우에도 쓰일 수 있다. 죽음이 내 딸 가까이에 있다. 아마도 이런 설명이 당신을 설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두 설명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세부 사항에서 동의한다는 점을 고려하라. 1. 야이로가 온다.2.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다.3. 야이로는 예수님께 딸에게 손을 얹으라고 요청한다.4. 피 흘리는 여자가 방해한다.5. 피 흘리는 여자에게 예수가 하는 말.6. 예수가 도착했을 때 죽은 소녀.7. 예수의 말씀,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8. 군중의 웃음과 불신.9.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는다. 사건의 핵심은 예수가 도착하기 전에 소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드라마이자 중심점이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 텍스트를 공정하게 읽으면, 비록 스타일이 다르다고 해도 그것을 압도하는 일관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주의 사항 중 하나에 도달했다. 각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건을 다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은 그것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어만은 지금 거기에 21세기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그는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축어적) 보도에 절대적인 정확성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게다가 한 인물의 말투에서 발견되는 약간의 차이를 핑계 삼아 전체 사건을 엉터리라며 창밖으로 던지고 있다. 그가 발견한 차이점이 실제로 야이로의 딸이 실제로 죽음의 순간에 있지 않았거나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실제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일단 다음 문제로 넘어가자. 2. 누가와 마태의 족보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의 예수님 족보의 차이이다. 역사적으로 학자들은 하나를 마리아의 족보로, 다른 하나를 요셉의 족보로 이해했다. 그러나 어만과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것처럼, 누가의 족보에도 그게 마리아의 족보라는 말은 없고 요셉의 혈통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바로는 두 족보가 요셉이 받은 유산의 두 가지 다른 측면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하나는 생물학적 혈통을 드러내고 다른 하나는 법적 계보일 수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족보에 관한 데럴 복(Darrel Bock)의 짧은 토론(복음서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을 참조하라. 그러나 텍스트를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일어나는 훨씬 더 많은 일을 눈치챘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에 관련된 문제이다. 마태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가 세 명의 왕을 연속해서 놓친 사실을 알 수 있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이다(참조, 역대상 3장과 솔로몬의 아들들). 그는 또한 여호야김도 뺐다. 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까지, 그리고 유수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멋진 14세대를 연속해서 가지기 위한 마태의 자의적인 조작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니까 마태는 역사가 아닌 수학으로 족보를 썼다는 주장이다. 아니, 아니, 그렇게 빨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다시 돌아가서 그가 뺀 네 명의 왕을 보면, 그들이 하나같이 다윗의 본을 따라서 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저버리고 다윗 왕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즉, 그들은 진정한 다윗의 자손이 아니었다. (아하시야-왕하 8:25-27, 요아스-대하 24:17, 아마샤-대하 25:27, 여호야김-왕하 23:36-37). 그래서 마태는 그들을 제외했다! 이 사실을 확증하는 것은 여호와께 헌신하지 아니하였으나 다윗을 위하여 명시적으로 확증된 아비야 왕이다(왕상 15:15). 그래서 마태는 그를 포함했다. 마태는 1장 1절에서 이 족보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사라고 말한다. 아마도 마태는 어만보다 구약의 본문, 즉 유대인의 경전을 훨씬 더 주의 깊게 읽었던 거 같다. 그러나 어만 식의 이해가 가진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다. 족보와 관련하여 어만은 유대인들이 후손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지 않았다고, ‘…족보 보관은 있을 수 없습니다’(20분)라며 매우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두 족보 모두 다 분쿰(bunkum, 헛소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이 정말로 족보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1세기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자신의 생애에 관해서 쓴 다음 내용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부터 나의 선조들을 순서대로 나열할 것이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이름은 사이먼…요세푸스는 조상의 이름을 계속해서 나열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리하여 나는 공공 기록에서 발견한 대로 내 가족의 족보를 지금까지 기록했다.요세푸스는 자신의 족보를 자세히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개된 기록이라고 말한다. 족보 보존이 전혀 당시에 없던 일이라면, 어떻게 족보가 공문서에까지 남을 수 있을까?더욱이 콘트라 아피온(Contra Apion)[1]에는 족보를 보관하는 유대인 관습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족보가 서술된 구약성서의 페이지가 나온다. 유대인들의 족보 보존은 정말로 당시에도 대단한 일이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따라서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 족보를 찾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어만이 전에 무어라고 했던가?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어만의 학문 연구에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은 다음 문제를 보자. 3. 이집트 피난어만이 제기하는 세 번째 모순은 이집트 피난이다. 누가복음2:2-40과 마태복음 2:1-23이다.이 둘의 설명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누가에는 목동만 있고 동방 박사는 없다. 마태에는 천사, 동방 박사의 꿈, 더 많은 꿈, 그리고 이집트 피난까지 들어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잠시 멈추고 누가가 처음에 무어라고 하는지 들어 보자.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눅 1:1-3).누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조사하여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보컴(Bauckham)과 같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이 정보는 목격자의 인터뷰를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이 사실은 왜 꿈, 이집트 피난, 그리고 귀환 등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없는지에 대한 간단하고도 가장 분명한 설명이다. 그에게는 그 사실을 확인할 목격자가 없었다. 꿈꾸는 사람 외에 누가 꿈을 증언할 수 있을까? 이 사실은 동방 박사의 방문에도 두 가지 방식으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다르게 그들은 목자들과 같은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목격자가 없었다. 페르시아에서 왔던 동방박사들은 다시 돌아갔기에 그들과는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누가는 마태와 모순을 초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검증을 받을 수 없었기에 이러한 세부 사항을 빠뜨린 게 아닐까?그러나 아직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마리아의 정결 예식을 마치고 성전에 올라갔다가 나사렛으로 돌아간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 가족은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나사렛에 정착한다. 왜 누가는 그들이 정결 예식을 마치고 곧장 나사렛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 같이 썼을까? 나는 그가 그렇게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차로 22분, 약 9.3킬로미터 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라. 고작해야 몇 시간만 걸으면 되는 거리이다. 어느 날 요셉은 갑자기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물건이 많은 그곳 상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정화 의식도 당일치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정화 의식을 마친 후 어느 시점에서 그들은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런 추론을 더욱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의 목자들보다 늦게 마리아와 요셉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헤롯은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마 2:14). 그래서 그들은 고작해야 얼마 동안만 베들레헴에 있을 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서 쇼핑, 정결 의식 등 예루살렘을 들락날락했어야만 했다. 어만은 다시 이 모순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처럼 누가가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조사하고 그가 인터뷰할 수 있었던 목격자들에게 중요했던 사실에 근거해서 복음서를 썼다고 보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4. 예수님의 죽음과 찢어진 성전 휘장이것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이는 또 다른 명백한 모순이다. 마가복음 15:37-39과 누가복음 23:45-46이다. 어만은 이 모순을 매우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나서 예수님이 죽은 건지, 아니면 예수님이 죽고 나서 휘장이 찢어졌는지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모순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혀 없다! 먼저, 이 두 구절이 담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텍스트에는 시간 표시가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 대략 ‘언제’ ‘이후’ 또는 더 직접적으로 ‘오후 열두 시에’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다음은 누가복음이다. 어느덧 낮 열두 시쯤 되었는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눅 23:44-45).그러나 문제가 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시간 표시가 없다.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눅 23:45-46).한편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막 15:37-38).발생한 일을 다른 순서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위의 구절에도 시간 표시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휘장이 찢어진 것은 단순히 등위접속사(kai)에 의해 연결되는데, 이는 ‘그리고, 그러나, 또는, 심지어, 그러나, 아직은’ 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된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휘장이 찢어지고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쉬셨다. 그리고 마가복음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쉬셨고 그러자 휘장이 찢어졌다. 당신이 거리의 평범한 소녀나 남자라면 이런 차이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ESV와 같은 현대 영어 성경 번역은 단순하고 충분할 때 kai에 대해서 바로 위에서 번역했듯이 ‘그러자’(then)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번역이 보통 사람에게는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어만과 같은 학자가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2]따라서 등위 접속사를 고려할 때,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요점은 예수님의 죽음과 휘장이 찢어지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내러티브의 요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다시 말해, 복음서 저자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죽음과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 사이에는 순서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와 마가복음의 순서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가지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때 그 중 하나를 먼저 이야기해야만 한다. 동시에 두 문장을 쓰거나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와 마가는 단지 문장을 다른 순서로 넣었을 뿐이다. 이것을 모순이라고 부르는 어만의 정직성을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게다가 텍스트 비평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신약의 헬라어를 알 것이다. 당연히 등위 접속사도 알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쉬운 사실을 놓쳤다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어만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더 포괄적인 역사적 사건알려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신뢰성에 관련해서, 어만은 누가복음 2장과 일치하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어슨(Brooke W. R. Pearson)은 누가복음 2:2의 핵심 문장을 기존의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 호적 조사는 퀴리니우스가 시리아를 다스리기 이전에 (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 있었다.’ 피어슨은 이것이 맞는 번역이며 널리 알려진 역사적 맥락에 매우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음은 ‘누가복음 속 인구 조사를 다시 들여다보기’(Lucan Census Revisited)에 관한 기사이다. 나는 어만이 이 연구를 고려했는지 궁금하다. 그는 어떻게 대답할까? 청중에게 증거가 이끄는 곳으로 가라고 도전했던 그가 이 질문에 기꺼이 응답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그가 뭐라고 했던가? 고집을 부리는 무지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마음을 바꾸고 총명해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론그렇다고 내가 어만이 제기한 모든 모순을 다 해결한 건 아니다. 그 점을 인정한다. 게다가 나는 그가 더 많은 모순을 들고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그가 제기한 ‘모순’ 중 일부는 결코 면밀한 조사를 견디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단지 텍스트를 주의 깊게 읽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은 명확해졌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아마도 어만은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1세기에 대한 그의 지식도 자신이 자랑하는 만큼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약하자면, 어만이 복음서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복음서를 거부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심지어 당신이 이미 결정한 사실에 대해서 그는 단지 확증을 하는 데 불과하더라고 말이다. 1. http://penelope.uchicago.edu/josephus/apion-1.html#S7그들은 조상과 조상의 옛 이름을 서면으로 예루살렘에 보내고 증인이 누구인지도 알린다. 심지어 먼 조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1세가 우리나라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폼페이(Pompey) 대왕과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tilius Varus) 3세가 침공했을 때처럼, 게다가 이미 수많은 전쟁이 우리 시대에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런 경우에는 살아남은 제사장들이 오래된 기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족보를 작성하고 남아 있는 여성들의 상황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여전히 포로된 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2. 누가복음 23:45의 분사는 부정과거이다.원제: Bible Contradictions? A Response to Bart Ehr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인간의 가치
by 전재훈
2023-12-01
인류 역사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글입니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하고, 고고학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하지요. 역사시대의 시작은 문명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합니다.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그 예입니다. 문명은 크게 넷으로 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강을 중심으로 이집트 문명, 황하강을 중심으로 황하문명,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인도문명입니다. 이들 문명을 확인하는 것이 문자입니다. 즉 문자는 문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죠.역사시대 이전의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수많은 신화가 존재합니다. 그리스 신화, 바벨론 신화, 구약의 원역사 같은 일들이 전해져 옵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선사시대는 돌을 들고 뛰어다니던 구석기, 신석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구석기는 돌을 깨서 날카로운 돌을 사용한 타제석기 시대이고, 신석기는 돌을 갈아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사용한 마제석기 문화였지요.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그냥 짐승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또 다른 짐승이었지요. 이들이 불을 발견하고 고기를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익은 고기는 씹는 힘을 줄여주어서 머리뼈를 가늘게 만들었고, 소화 에너지를 뇌로 보내 뇌가 발달하는 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던 이들이 농사에 눈을 뜨면서 정착된 삶을 살게 됩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소유가 생기게 되지요.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게 되고 재산이 생기게 됩니다. 자연스레 재산은 친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이로써 혈연의 개념이 생깁니다. 혈연이 생기기 전에는 모계 사회였습니다. 남자들은 사냥을 다녔고, 여자들은 아이를 키우며 채집하고 살았지요. 남자들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사냥하던 습관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사나운 짐승과 눈싸움을 하고 절호의 순간을 잡아야 하기에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나무의 열매를 따면서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으므로 여자들은 통화를 하면서 설거지하고, 거실에서 하는 수다에 끼어드는 게 가능한 신비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농경사회가 되면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바뀌게 됩니다. 농사지을 땅과 농기계 및 농사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힘이 몰리면서 자연스레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중요해졌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큰아들이 누군가 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씨족사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회가 형성되면 응당 리더를 결정해야 합니다. 추장이 되었건, 족장이 되었건, 마을 이장이 되었건, 그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지요. 당연히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그의 장남계열이 승계하게 됩니다.씨족이나 부족이 여럿 모여 국가를 이루면 그 국가의 왕을 누가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힘 있는 사람이 나서서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무리들은 하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기에 그 하늘에 있는 신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리더를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신의 아들을 중심으로 신의 뜻에 따라 나라가 세워지고 신의 아들은 신의 지혜와 힘을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신의 아들이 다스리는 사회는 신정국가입니다. 하늘의 뜻을 점치는 제사장과 무녀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권력을 형성한 이들은 이런 하늘의 뜻을 독점하고 백성을 다스렸던 것이지요. 이런 문명이 시작될 때의 문헌들에는 신의 뜻을 묻는 글들이 많이 나옵니다. 황하문명의 오래된 갑골문에도 대부분이 신의 뜻을 구하는 질문과 그 뜻을 찾기 위해 점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문헌은 자신들이 신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시대 이전 선사시대의 내용들에 대해 신화적인 요소들을 많이 차용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처음에는 한낱 짐승에 불과했다가 불을 사용하면서 짐승과는 다른 구별된 존재임을 자각했고, 나중에는 선조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된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혈연관계로 자신을 이해하면 자신은 그저 한 시대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존재임을 알게 되면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지요. 그러던 이들이 신정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보편적 절대자인 하늘의 백성으로 승격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디엔가 소속되기를 원하지요. 소속은 진영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진영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런 갈등이 부딪치는 것이 전쟁이지요. 전쟁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대개 신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신이 진짜 신인가 하는 테스트를 전쟁을 통해 하게 됩니다. 또한 누가 진짜 신의 아들인가 하는 것도 왕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지요. 때로는 신의 뜻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지는가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신이 없다는 생각을 못 하던 시대이니만큼 이해되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신의 뜻이 인간의 행동에 따라 옮겨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신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까지 성장했지요.하지만 실제로 그런 신이 있어서 어떤 특정한 가문을 통해 나라를 세우고 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진짜 신의 아들인 예수님은 왕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지요. 나머지는 다 가짜 아들들입니다. 즉 신이라는 것과 그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백성을 통치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걸 깨달은 이들이 신화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화두를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 최초라고 알려진 사람이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라는 철학자입니다.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사람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굉장히 강한 신화이지요. 그 신화에서 만물의 근원은 모두 신이었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려면 신의 뜻을 어르고 달래는 과정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철학자의 아버지가 됩니다. 만물에서 신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신의 뜻을 어르고 달래기보다 인간의 노력으로 환경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했던 것이지요. 소크라테스가 했던 유명한 말인 ‘너 자신을 알라’가 사실은 탈레스가 한 말이라는 주장도 있지요. 신을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엄청난 주장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출현합니다. 공자의 사상은 후에 유교로 집대성되었는데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의 뜻을 따라 살던 사람들을 인간의 예(禮)로써 살게 한 사람이 공자입니다. 노자는 신이 아닌 자연의 뜻을 따라 살자고 주장했지요. 결국 둘 다 신의 뜻을 찾기보다 인간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함을 강조했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후로 인간들은 서서히 신에게서 독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과 동양에서 각각 인간의 길을 모색한 철학이 태동하고 인간 스스로의 가치가 증대되어 갈 때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인도에서는 싯다르타 고타마가 태어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치며 절대적 인간관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더 가깝다고 하지요. 요즘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열심히 하면서 불교는 철학이라는 주장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서양에서는 탈레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화를 배제해 나가고, 동양에서는 공자와 노자, 맹자 등 철학자들이 신의 뜻을 지워나갈 때, 인도에서는 부처가 나타나 인간을 계몽시켜 갈 때, 유대교에서도 한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진짜 신의 아들 예수님이시지요.가짜 신을 섬기는 나라들에서는 진짜를 추구하기 위해 가짜 신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인간의 가치를 끌어올렸다면 진짜 신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신의 피조물 중에서 택함 받아 선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신의 아들이 되는 방향으로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켰습니다. 더불어 선민이 아닌 이방인들과 신의 은총에서 소외되던 사람들까지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독점했던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고, 신의 아들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대상이며, 성령을 부어 주어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는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이 시대는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해 있습니다. 여전히 신화 속에 갇혀 점을 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스스로 독립하여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무신론자들과, 여전히 신을 독점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여 권력을 누리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 지도자들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사랑을 입어 살아가는 신의 자녀들이 있지요. 신이 가짜라면 철학자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 존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존귀한 삶이 되겠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은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지성소를 덮어 두던 휘장은 찢겨나갔습니다. 죄는 사함을 받았고, 성령은 이미 각 사람 안에 임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이미 예수의 사람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며,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신을 배격하고 철학자의 뒤를 따를 것이 아니라면 신의 뜻을 독점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그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존귀하게 살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TGC Advent Concert
by TGC
2023-12-01
TGC Advent Concert '소망의 찬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찬양사역자들의 출연으로 크리스마스 찬양과 성구들이 매우 잘 구성된 콘서트입니다. 찬양과 시와 말씀을 통해 평안을 누리고 소망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Songs of Hope: A TGC Advent Concert].1. 오 거룩한 밤(쉐인 앤 쉐인)2. 황량한 한 겨울에(키스 & 크리스틴 게티)3. 엘리사벳의 기쁨(푸어 비숍 후퍼)_말씀(누가복음 1:39-42)4. 임마누엘(테니엘 네다, 존 구에라)_말씀(이사야 7:14)5. 마침표!(퀴나 아라곤)_말씀(이사야 11:1)6. 엘리사벳을 위로하는 마리아(산드라 맥크라켄)_말씀(마태복음 1:21)7. 저 들 밖에 한밤중에(솔버린 그레이스 뮤직)_말씀(누가복음 2:10-12)8. 누우실 곳 없는 왕(리즈 바이스, 매디슨 커닝햄)_말씀(마태복음 2:13-14)9. 그날이 오면(캐롤라인 콥)_말씀(이사야 2:4)10. 어두운 곳의 크리스마스(글렌 스크리브너)_말씀(이사야 9:2)11. 참 반가운 신도여(솔버린 그레이스 뮤직)_말씀(갈라디아서 4:4-5)12. 그리스도(푸어 비숍 후퍼)_말씀(마태복음 1:17)13. 얼마나 아름다운지(퓨처 오브 포레스트리)_말씀(히브리서 2:14-15)14. 마리아의 송가(블레어 린)_말씀(누가복음 1:46-19)15. 산 위에 올라가서(쉐인 앤 쉐인)_말씀(이사야 52:7)16. 기쁘다 구주 오셨네(산드라 맥크라켄)_말씀(시편 98:2-4)17. 곧 오소서 임마누엘(조쉬 게럴스)_말씀(이사야 35:10)18. 깨어 있으라(캐롤라인 콥)_말씀(마태복음 25:13)19. 기쁨이 충만하기를(키스 & 크리스틴 게티)_말씀(요한복음 1:9)20. 오 거룩한 밤(퓨처 오브 포레스트리)_말씀(요한복음 1:14)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
by Keith A. Evans
2023-11-29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이유”도 함께 소개합니다. 신학교(신학대학원) 첫 수업을 들었을 때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결혼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스물두 살이었다. 신학교 수업은 내 수준에서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성경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 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당신은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왜 과거의 당신과 똑같은 젊은이들에게 신학교를 가라고 권유하고 있는 걸까? 이유는 명확하다. 그러함에도, 단점보다 장점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를 볼 때,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사역을 추구했다. 목회에 필요한 신학 교육을 위해서 기존의 직업을 그만두는 경우는 서구 기독교에서 상대적으로 드물다. 물론 좀 더 인생에 노련한 사람이 되어서 신학교를 가면 분명한 이점이 있다. 교인들의 삶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들로부터 존경받을 이유도 더 갖춰져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젊을 때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신학교에 진학하면 상당한 이점이 있다.1. 장수어린 나이에 신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두 번째 직업이나 노년의 부름을 받아 간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사역할 수 있다. 사역에서 금혼식은커녕 은혼식을 맞는 사역자를 거의 찾기 힘든 시대에 남들보다 일찍 시작해서 오랫동안 인내하며 사역한다면, 그런 사역자의 신실함은 눈에 뛸 수밖에 없다. 일찍 사역을 시작할수록 성장하고 성숙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아무리 최고의 신학교라고 해도 사역에 관한 전부를 배울 수는 없다. 목회자의 진짜 교육은 사역지에서 이루어진다. 실전에 더 일찍 투입되는 일꾼인 만큼, 더 많은 경험과 성숙을 기초로 영혼을 목양할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2. 에너지와 열정젊음은 젊을 때 낭비된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건 나름 재치있는 과장이지만, 젊은이일수록 더 큰 에너지와 야망을 갖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조심하지 않으면 열정에 넘쳐 과격해지는 유혹에 직면한다. 젊은 남자들이 신학교 시절에 쌓은 신학이 소위 말하는 “새장에 갇힌 단계”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열심(딛 2:14)을 목표로 삼되, 그렇다고 지나치면 안 된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헌신하되, 그렇다고 선동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젊은이가 젊음과 열정을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때, 그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한다. 다른 직업과 달리 젊음의 에너지를 사역에 쏟을 때, 교회에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전도하고, 봉사하고, 심방하고, 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일에 인생을 바치라. 빠를수록 좋다.3. 집중쟁기를 잡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게 그리스도의 말씀이다(눅 9:62). 힘든 사역을 하다 보면 채 일 년이 되지도 않아서 모든 걸 벗어버리고 싶은 경우를 여러 번 만난다. 그때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단지 마구잡이로 사역에 투신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마음대로 사역을 떠나서는 안 된다. 그렇다. 때때로 사역에서 한 발 떨어지는 게 지혜로울 때가 있다. 예상치 못하게 만난 장애 또는 부양의 책임이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전적 헌신을 방해할 수도 있다. 더불어서 가족 간의 불화, 특히 부부 관계 또는 자녀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는 가족에 집중하는 게 우선순위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비상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역을 포기하는 것은 당신에게 사역이 부르심이 아니라 단지 직업이고 개인적인 결정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목사 안수는 교회를 통해서 추수할 밭에서 일할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이다. 그렇다면 일찍 시작한 신학교가 어려움을 만난 사역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속 집중하는 데에 어떻게 도움이 될까? 신학을 일찍 시작할수록, 아무리 사역이 어렵다고 해도 다른 곳에 한눈팔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러나 애초에 목사가 아닌 다른 직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사역이 어려워질 때 얼마든지 다른 직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세상 직업에서 받는 돈이 사역에서 받는 사례보다 더 많을 때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교회 밖에서 다른 교육을 받거나 기술을 익히는 게 잘못이라는 건 아니지만, 일찍부터 오로지 목회에만 집중하면 분명한 유익이 있다. 한눈팔 가능성을 현저하게 줄이는 동시에 참고 견디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4. 유연성젊을수록 오로지 공부에만 신경쓰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젊을수록 어떤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최고의 신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교육이 항상 온라인 교육보다 우수하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식의 이동이 모든 사역 후보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감당할 수만 있다면, 교수, 급우, 지역 교회 공동체와 함께 생활이 가능한, 보다 완전한 신학교 경험을 하라고 권면하고 싶다. 젊은 가족일수록 유연한 선택이 가능하다. 신학생의 가족이 기존의 삶에서 시작하는 대신에 새로운 환경에서 온 가족이 사역을 통해서 함께 성장할 수도 있다. 젊기에 적응과 변화는 좀 더 쉽고, 온 가족이 사역을 중심으로 함께 성장하는 통일된 경험은 소중하게 남을 것이다. 나는 반복되는 이사에도 잘 적응하는 우리 어린 자녀들의 회복력에 몇 번이나 놀라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역사회와 특정 장소에 매이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한번 내린 뿌리를 뽑기는 어렵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섬기는 것은 특권이다. 왜 굳이 늦게 시작해야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기쁨이다. 그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은 축복이다. 경건한 교수들로부터 멘토를 받고 동료 학생들로부터 격려를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젊은 세대가 일어나 봉사하는 건 하나님의 백성에게 유익이다. 왜 하루라도 빨리 사역에 투신하지 않는가? 젊은이들이여, 무엇을 기다리는가? 신학교 교육을 받는 데에 지금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원제: Why You Shouldn’t Wait to Go to Semina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서는 안 되는 이유
by Ryan Williams
2023-11-29
“신학교 입학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도 함께 소개합니다.나는 막 신학교를 졸업했다. 불과 몇 달 전에 졸업장을 받으려고 연단에 올랐다. 정말 멋진 하루였다. 지금 벽에 졸업장이 붙어 있다는 것은 내가 복음 사역을 위한 훈련을 정식으로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럼 졸업하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나는 십이 년 동안 전담 사역을 해왔고, 그중 십 년은 담임목사로 섬겼다. 이번에 건축 프로젝트, 재개척, 코로나19 팬데믹, 몇 번의 논쟁적인 정치 시즌 등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두 교회에서 목회했다.나는 좀 예외에 속한다. 서구에서 일반 목사는 보통 소명을 받으면 신학교부터 간다. 따라서 목사 안수 전에 신학교 훈련을 하는 교단이 대부분이다. 사역을 시작한 지 무려 십 년이 넘게 지나서야 신학교에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왜 젊은이가 신학교 입학을 기다리는 게 좋을까? 이게 과연 좋은 판단일까? 지금 당신이 신학교 입학을 고려하거나 다른 학위 취득에 관심이 있다면, 왜 좀 더 기다리는 게 가치가 있는지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하겠다. 1. 사역에 관한 비전이 좀 더 성숙해야 한다나는 모태 신앙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고, 따라서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지, 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리고 목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패러다임이 없었다. 성경 대학에 진학한 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역의 길에 접어들었다. 입학하고 나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공부가 정말로 싫었다. 겉보기에 경박하게만 보이는 신학 토론, 겉보기에 천박하게만 보이는 성적에 대한 관심, 그리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만 보이는 강의 자료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강의 시간에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상상하곤 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헬라어를 배우는 동안 저들은 과연 어디에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까? 나는 교회에서 인턴으로 섬기기 위해 성경 대학을 중퇴했다. 그리고 그 기간에 목회 사역 훈련과 제자훈련 과정을 거쳤다. 교인들을 만나서 조언하고 보살핌을 주면서 나는 신학교 수업에서 토론한 진리가 어떻게 개인의 고통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사역을 통해서 “성장”한 후에야 나는 마침내 사역을 위한 정규 교육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었다.2. 인격적으로 더 성숙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난 직후에 나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있었지만,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 삶에 깊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목회자는 내 주변에 없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풀타임 학위 프로그램에 뛰어들기 전에 좀 더 기다리면서 성숙함을 키우라는 조언을 들었을 것이다. 내가 만났던 야심 찬 많은 신학생이 공감할 거다. 그들은 지원서의 핵심 부분을 놓치고 있다. 즉, 이 사람이 신학교에 갈 준비가 되었다고 그가 다니던 지역 교회의 교인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추천하는 부분 말이다. 신학교는 기본적인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훈련하기 위한 곳이 아니다. 그건 온전히 지역 교회의 몫이다. 따라서 신학이라는 고등 교육에 뛰어들기 전에 당신의 소명을 지지하고 학교생활 내내 당신과 동행하며 헌신할 정도로 성숙한 기독교 지도자가 있는 지역 교회에서 성장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3. 학습 습관을 길러야 한다성경 대학에 다닐 때, 한번은 구약성서 교수가 세 시간 강의를 마친 후에 나를 옆으로 부르더니 말했다. “앞으로 너는 내 강의 시간에 스트레스를 푸는 고무볼을 손에 들고 주무르면서 강의실 뒤에 서서 수업을 들어라.” 다시 학생이 되기 전까지 나는 법 집행 기관에서 근무했고, 따라서 수업이라는 환경을 떠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난 상태였다. 그런 내게 세 시간짜리 강의는 말 그대로 고문이었다.단지 신학책과 교회사 관련 서적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신학교 전 과정을 따라가는 건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헬라어 어휘, 교회사 읽기, 여러 주제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처음 다운로드했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압도당했다. 성경 대학 입학은 내게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목사로서 공부에 더 익숙해진 후에조차도 전임 신학생이 되기 위해서 나는 학습 역량을 더 키워야만 했다. 4. 먼저 가족 부양과 사역에 들어가는 비용도 계산하라처음 계획은 인턴십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턴십을 수료한 나를 교회에서 목회자로 청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교 입학을 고려할 때마다 교회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길을 가로막았다. 단지 학위를 추가하기 위해 결혼 생활과 가장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은 옳지 않았다. 게다가 교회에 들어가는 비용도 계산해야 한다. 신학교는 몇 년에 걸쳐서 주당 몇 시간이 들어가는 긴 과정이다. 그렇게 바쁜 학위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는 약간의 브레이크를 밟고 조금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교회를 개척하고, 또다시 개척하고, 또 그러다 보면 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고,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건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도전적인 사역 기간에는 평소보다 목회자와 사역 지도자에게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사역에 정신이 없는 상태라면, 신학교 학위를 취득하는 데 여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교회와 가족을 목양하고 돌보는 것이 더 높은 우선순위이다. 신학교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다.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사역 훈련을 위해 성경적으로 신실한 신학교에 가야 한다. 하지만 먼저 비용을 계산하라. 좀 더 기다리거나 레지던트나 인턴십이라는 비전통적인 경로를 택하는 것이 최선의 결정일 수도 있다. 때로는 당신 자신과 가족, 섬기는 교회가 당신의 신학교 경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좀 더 기다림이 필요할 수도 있다. 원제: Why You Should Wait to Go to Semina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번영 복음은 미국 태생이다
by Russell S. Woodbridge
2023-11-28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열린 기독교 도서전에 참석한 나는 잔뜩 쌓인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만이 아니었다. 내 마음도 그 책들을 탐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책을 정독하는 동안 갑자기 내 눈이 한 곳을 향했다. 바로 내 앞에 놓인 테이블에 조엘 오스틴의 러시아어판 ‘긍정의 힘’이 있었다. 이날 만난 ‘긍정의 힘’은 미국의 번영 복음 설교자들이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심지어 동유럽 등지로도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이 글에서는 번영 복음의 기원을 간략하게 추적하고 말 그대로 그것이 왜 미국에서 번성했는지, 그 이유를 몇 가지 알아보겠다. 신사상이 그 뿌리이다번영 복음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유행한, 일명 신사상(New Thought)으로 알려진 준기독교 이단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이 철학은 건강과 부를 획득하는 열쇠가 올바른 말을 생각하고 시각화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뉴욕시의 Marble Collegiate Church의 목사 노만 빈센트 필(1898-1993)은 그의 책 ‘노먼 빈센트 필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통해서 미국에서 신사상 사상과 기술을 대중화했다. 그러나 신사상을 가장 널리 퍼뜨린 사람은 랄프 왈도 트린(Ralph Waldo Trine, 1866-1958)이다. 이 두 사람의 글에서는 하나 같이 번영 복음의 반복되는 핵심 요소의 일부를 찾을 수 있다. 즉, 올바른 말을 할 것, 성공을 가져다주는 보편적인 법칙을 말에 적용할 것,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다. 신사상 사상은 특히 전도자이자 목사이며 베델성경연구소의 설립자 E. W. 케년(1867-1948)에게 영향을 미쳤다. 신학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은 번영 복음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의 기초가 되었다. 새로운 현실을 가져오기 위해 올바른 말을 하라는 것이다. 당신의 고백이 바로 당신의 소유물이 된다는 것이다. 케년은 현대 번영 복음 운동의 기초를 형성한 대중적인 번영 설교자들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예를 들어, 1940년대 후반에 오럴 로버츠가 신유와 금전의 번영을 외치며서 혜성과같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 그가 진행하는 텔레비전 쇼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교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비록 로버츠가 확실히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번영 신학을 전파했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번영 복음의 가장 저명한 전도자이자 믿음의 말씀 운동의 아버지로 인식하는 사람은 케네스 E. 해긴(1917-2003)이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믿음의 말씀’ 운동은 20세기 후반 미국 전역에 번영 복음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해긴은 1962년에 자신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한 전도사역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번영 복음을 전파한 게 해긴 혼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해긴이 전파하는 오염된 교리를 받아들인 많은 사람이 자기만의 미디어 사역을 시작했다. 예를 들면 해긴의 아들인 케네스 해긴 주니어, 케네스 코플랜드(Kenneth Copeland), 프레드릭 프라이스(Frederick Price), 로버트 틸튼(Robert Tilton), 베니 힌(Benny Hinn), 찰스 캡스(Charles Capps) 및 제리 사벨(Jerry Savelle) 등이다. 믿음의 말씀 또는 번영 복음을 대표하는 교단은 없지만 많은 조직이 번영 복음 옹호자들의 사역을 지원하고 미디어를 통해 그들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수출한다. 1973년에 폴 크라우치(Paul Crouch)와 젠 크라우치(Jan Crouch)는 짐과 페이 베이커(Jim Faye Bakker and Tammy Faye Bakker)와 함께 TBN(Trinity Broadcast Network)을 설립했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TBN은 현재 세계 최대의 기독교 TV 네트워크이다. TBN은 로드 파슬리(Rod Parsley), 크레플로 달러(Creflo Dollar), 폴라 화이트(Paula White), 케네스 코플랜드, 제시 듀플란티스(Jesse Duplantis), 케네스 해긴 주니어 같은 잘 알려진 건강 및 부를 전파하는 설교자들을 포함하여 번영 신학 교사들이 수백만 명에게 다가갈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조엘 오스틴, T. D. 제이크, 그리고 조이스 마이어(Joyce Meyer) 등의 사역을 통해 번영 복음이 다시 한번 인기를 얻고 있다. 2007년에 나온 ‘잘 되는 나’에서 오스틴은 이렇게 썼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또 말하라. 성경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인정할 때 우리의 믿음이 효력을 발휘한다’라고 말한다. … 우리의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인정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나에게는 밝은 미래가 있다. 나는 재능이 있다. 사람들은 다 나를 좋아한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와 같은 말을 확실하게 선언하라.”이런 메시지는 긍정적 사고의 신사상과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말의 힘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번영 복음 지도자들의 미디어 제국은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번영 복음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 이게 여전히 미국에서 울려 퍼지고 번성하는 걸까?성공 비법 성공 요인은 단 한 가지가 아니다. 아마도 혼합된 여러 가지 이유로 번영 복음이 미국에서 정착했을 거다. • 번영 복음은 성공하고 건강하며 금전적으로 안전해지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에 호소한다. 이러한 욕망이 본질적으로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을 향해야 할 우리의 욕망을 대신한다면 죄가 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건강이나 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대하는 태도에 달린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이나 다른 사람을 믿을 때마다 우리는 우상 숭배자가 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애쓰는 고집 센 마음에 최악의 상황을 가져다주는 게 바로 번영 복음이다. 물론 이 이유는 사는 지역에 상관 없이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지만, 다음 몇 가지 이유는 오로지 미국에만 해당한다. • 번영 복음은 아메리칸드림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기에 미국인에게는 매력 있게 다가간다. 집과 자동차 두 대를 소유하고, 금전적 안정을 누리며 행복한 가족을 이루라. 아메리칸드림을 강화하는 것은 광고주가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건강, 외모, 재정 상태, 현재 소유물에 대해 불만을 품게 만드는 것과 하나 다르지 않은 소비자 문화이다. “당신은 지금보다 나아질 충분한 자격이 있으며, 우리 제품을 사용하면 삶이 개선되고 더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다. 더욱이, 개인적 성취, 심지어 자격 부여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는 미국 문화에서 바로 그것을 약속하는 게 번영 복음이다. 성공의 징표는 신실한 믿음이 아니라 긍정적인 고백과 믿음의 말을 통한 개인적 성취를 이루는 것이라는 게 이 가르침이다. 그리고 번영 복음은 하나님에 대한 비물질적인 믿음이 언제나 물질적인 부를 불러온다고 가르친다. 번영 복음은 아메리칸드림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을 당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자 축복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번영 복음은 미국 문화의 특정 측면에 호소한다. 미국에는 낙관주의와 개인주의가 넘쳐난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역경을 극복하라.” “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 되라.” 이런 만트라, 구호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개인적인 책임감과 긍정적인 태도는 바람직한 특성이지만, 그러한 낙관주의와 개인주의로 인해 미국인들은 인간의 본성과 잠재력에 대해 고상한 견해를 갖는 경향이 커졌다. 번영 복음은 당신이 충분히 선하다고 가르친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당신의 뜻에 맞게 상황을 바꾸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과 말을 바꾸고 믿으면 된다고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당신의 개인 비서인 우주 벨보이 하나님이 당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길로 인도할 것이라 한다. • 자본주의와 강력한 노동 윤리의 틀 속에서는 부를 창출하고 증대할 기회가 존재한다. 미국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요인으로 인해서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자본주의 체제에는 분명히 장점이 있으며, 정직한 노동을 통해 부를 창출하는 것은 사회에 좋은 일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번영 복음은 매력 있게 다가온다. 얼마든지 상향 이동이 가능하고 번영하는 경제 시스템이 있는 나라에 살 때, 당신 편에 선 하나님이 경제 시스템이 당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축복하는 것은 추가 보너스이다. 충분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축복이 흘러나올 것이다. 결국 왕의 자녀가 되는 것은 당신의 권리이자 특권이다. • 교회에 성경보다 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교인으로 넘친다. 그리스도인은 종종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행복과 기쁨, 성공을 정의한다. 우리는 종종 성공을 거룩함과 신실함,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아니라 지위와 부, 지위의 관점에서 본다. 불행하게도 번영 복음은 책, 콘퍼런스, 소셜 미디어, 그리고 텔레비전을 통해 예상치 못한 곳까지 마구 퍼졌다. 작년에 나는 아르메니아에서 설교했다. 거기서 요청한 주제가 바로 번영 복음의 진실이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번영 복음은 지금도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이 글은 2015년에 TGC에 발표된 글입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철 지난 글이 아닙니다. 이 미국 태생의 ‘번영 복음’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습관에도 이미 깊숙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국산번영 복음은 한국 나름의 구복 신앙, 기복 신앙과 이종교배하여 더욱 질긴 변종을 만들어 냈습니다. 송구영신의 시간이 곧 다가옵니다. 번영 복음과 기복 복음, 이 가짜 복음이 ‘복음’으로 위장하기 딱 좋은 시즌입니다_복음과도시원제: Prosperity Gospel Born in the USA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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