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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Q란 무엇인가?
by 최창국
2023-11-27
인간의 삶-생명은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의해 육체와 마음과 영(시 16:9)으로 선(先, 태초에/최초에) 형성된 통전적 존재다. 인간의 삶-생명은 생체적 육체 또는 몸, 역할적 마음 또는 정신, 초월적 영의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되어 가는 존재다. 인간의 세 차원은 내적으로 상호 대화적, 상호 침투적, 상호 형성적 작용을 통해 온전한 삶을 형성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어느 한 차원만으로는 온전하게 형성될 수 없다. 인간의 세 차원은 내적 차원이면서 동시에 내적 형성의 장이다. 사회-역사적 차원은 외적 형성의 장으로서 인간의 삶을 함께 형성하는 근원적 차원이다. 인간은 사회-역사적 상황 안에서 현존하면서 세계로부터 형태를 부여받고 또한 형태를 형성해 가는 존재다. 인간의 생체적, 역할적, 초월적, 사회-역사적 차원이 상호 작용을 통해 공명(consonance)을 형성할 때 온전한 삶을 형성할 수 있다. 천연적인 통전적 존재로 선 형성된 인간은 생체적, 역할적 차원을 통해 발현되는 IQ와 EQ와 초월적 또는 영적 차원을 통해 발현되는 SQ를 창조적 선물로 받았다. SQ(Spiritual Quotient 영성 지수 또는 지능)는 인간의 정신 또는 마음과 유기적인 관계 안에 있지만, 몸과 정신을 초월해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와 마음과 뜻과 공명하게 하는 지능으로 초월적 지능이다. SQ는 인간으로 하여금 근원적 문제인 선과 악을 질문하게 하고, IQ와 EQ를 통합하며, 제한된 삶의 조건을 초월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게 하는 지능이자 인격이다. 데오도르 로작이 “우리는 이제 영혼의 운명이 곧 사회적 질서의 운명이라는 것-만일 우리 안의 영이 말라비틀어지면 우리 주변에 세워 놓은 온 세계 역시 말라비틀어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Theodore Roszak, Where the Wasteland Ends: Politics and Transcendence in Post-industrial Society, xxii-xxiii)라고 간파했듯이, 인간의 영의 지능인 SQ는 인간의 삶-생명에서 중요한 지능이자 인격이다. 인간은 타락 후에 공명적 삶에 기능 장애가 발생하여 조화로운 삶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불공명적 삶은 SQ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불구 상태가 되었다. 원래 히브리어의 사탄은 ‘무응답’, ‘응답하지 못하는 자’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은 하나님께 응답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SQ가 불구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불공명적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한다. SQ가 불구 상태에 놓이면 실제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즉, 인간은 SQ가 불구 상태가 되면 자신의 IQ와 EQ를 통해 얻은 지식과 명예와 소유 등에 스스로 지배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의식에만 의존하게 되고, 삶의 겉모습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고, 삶의 근원적인 것들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인간의 SQ가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로부터 분리되면 결국 악의 힘에 노출되고 만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인간의 심리 내적 에너지마저 불공명적 상태가 된다. SQ가 결여된 인간의 불공명적 삶은, 쇠렌 키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른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절망은 죽음, 생명의 결핍,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반응의 결핍이 그를 구속한다. 인간이 자살을 하는 근본 원인도 SQ의 결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SQ가 결여되면 인간은 삶의 궁극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자살은 절망의 극한적 행위이고, 무의미성에 대한 항복과 관계되기도 한다. 인간 사회에서 자살이나 자살 시도가 유행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여러 요인으로 나타나지만, SQ와 깊은 관계가 있다. 1990년대 후반에 런던 선데이 타임스는 젊은이들이 자살을 시도하는 원인 중 하나는 삶에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어서 자살을 시도한다고 보고하였다. 의미의 상실은 결국 SQ의 결여와 관계가 깊다. SQ가 결여되면, 삶의 의미를 순간 너머를 바라보거나 사태를 더 큰 의미와 가치의 구조에 자리매김하는 능력이 부족하게 된다. SQ의 결핍은 심각한 영적 왜곡 상태를 낳는다. 인간을 자살로 몰아넣는 절망은 영적 왜곡 상태의 가장 심각한 형태다. 그러므로 형태와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영적 왜곡 상태는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며, 종종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SQ가 결여되거나 배제되면, 인간의 생체적, 역할적, 영적 성향 모두가 왜곡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삶은 불공명적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인간의 영적인 병도 삶-생명의 불공명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적 건강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SQ와 IQ와 EQ가 전체적으로 공명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SQ는 영적인 병에서 영적 건강 상태로 가게 하는 원형적인 원동력이다. SQ는 의미의 회상과 관계된 지능이다. 여기서 회상은 문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분열된 조각들을 ‘다시 모으다’(recollect), ‘모으다’(gather)라는 뜻이다. SQ는 삶-생명의 차원들이 흩어져 불공명적 상태에 놓일 때, 다시 모아 공명적인 상태로 전환하는 지능이자 인격이다. 깊은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도 인간의 IQ와 EQ와 SQ의 공명적인 관계의 회복과도 관계된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SQ는 인간 존재의 핵심에 자리 잡은 신비로운 지능이자 인격이다. 이것은 공명을 위한 근원적인 지능이다. SQ는 다른 형성적 지능인 IQ와 EQ의 성향들을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들을 더 새롭고도 심오하게 뿌리내리도록 한다. SQ는 IQ와 EQ가 자신들의 성향들 자체에 사로잡히게 되는 일이 없이 서로 생동적으로 공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인간의 공명, 즉, 인간의 정신 또는 마음과 몸의 평화의 신비스러운 원천이다. 인간의 SQ가 병들면, 인간은 오로지 역할적 성취나 생체적 만족 또는 사회적 조정에만 중심을 두게 된다. 이런 성향의 인간의 역할적 에고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의 목소리에 대해서 합치적 순종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역할적 정신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역할적 정신이 인간을 일방적으로 사로잡아 버리게 되면, 자기만족과 자아도취, 그리고 교묘하게 자기를 낮추는 듯 과시하는 오만함으로 왜곡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인간은 너무도 자주 공격적인 분석적 방식을 통하여 인간의 모든 성향을 분석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역할적 정신에 지나치게 중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역할적 정신의 역할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여러 형태로 발현되었다. 예를 들어 역할주의의 한 형태인 관념론에서는 마음이 물질을 형성한다고 여기고, 유물론에서는 물질이 마음을 만들어 낸다고 여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삶-생명에 대한 환원주의적 형태들이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역할적 정신을 중심에 두는 환상을 초래했다. 이러한 역할주의적 삶의 형태는 본질적으로 오만이다. 삶의 오만 형태는 이성주의, 주지주의, 심리주의, 물질주의 등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삶의 오만 형태인 역할주의적 야망은 불공명적 삶을 야기한다. 인간의 SQ가 결여된 역할적, 생체적 차원은 언제든지 이성주의와 유물론주의와 같은 형태 등으로 발현될 수 있다. SQ는 삶의 차원들을 분열하게 하지 않고 다른 차원, 즉 IQ와 EQ와 공명하도록 한다. 이것은 역할주의적 정신이 갈라놓은 것을 다시 온전하게 한다. SQ는 해체적이고 공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오히려 모든 불공명적 성향들 속에서 삶과 세계의 더 깊은 일치를 묵상적이고 회복적이고 온유하게 보존하게 하는 지능이다. SQ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근원적 3중 요소와 관계된 지능이자 인격이기도 하다(마 22:37-40; 고전 13:13). SQ는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삶-생명의 근원적 형태가 영적 존엄과 신비와 관계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와 공명하게 하는 지능이다. 이러한 예는 성경의 바울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회심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의해 발현된 영적 체험이었다. 하나님에 의해 그의 SQ가 발현되었을 때, 그의 생체적 몸, 역할적 정신을 통해 얻은 신학적 지식과 교리도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다(빌 3:5-9). 또한 형성하는 하나님의 신비에 의해 그의 SQ가 발현되었을 때 역할주의의 성향에 의해 형성된 율법주의적 삶의 성향이 근원적 삶의 성향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성향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고전 13:13). 인간의 평화의 상태와 온전한 상태는 태평하고 아무 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삶-생명의 차원들이 영적인 중심에 의해 질서가 잡혀 공명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SQ는 인간의 삶-생명의 공명 형성, 즉, 인간을 더 온전하고 더 넓은 삶-생명의 흐름 속으로 이끄는 지능이자 인격이다.
SQ
영성지수
함께 가는 길
시편 133편 묵상
by 고명환
2023-11-25
1 신학교 교회사 시간에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는 분열을 계속해 왔다는. 사실이다. 개신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그 가지 수를 늘리고 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한국에서 그 실상은 쉽게 발견된다. 교파를 가르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교파 안에 수많은 교단이 정통의 깃발 아래 간판을 달리하고 있다. 개신교를 방어하는 혹자는 이를 다양성이라는 미명으로 애써 포장하지만, 다양성을 낳은 태생의 동기를 파헤쳐 보면 얼마나 허전한 변명인지 금방 알아채게 된다. 분리는 연합보다 쉬운 선택이다. 일치를 위해 애쓰는 것보다 떠나 독립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나아가려면 인내가 필요하고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긴 고민 없이 분리를 선택하는 큰 이유일 것이다. 덩치가 큰 기독교 집단이 분리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들끼리 협력보다 분리를 선택하는 이유는 일맥상통한다. 그 속성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갈등하며 같이 가는 것보다 혼자 자신의 길을 가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다. 함께 가기 위해 맞춰주고 받아주고 기다리고 설득하고 때론 싸워 조정하는 데에는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렇지만, 떠나고 숨고 거부하고 무관심한 편을 선택하면 그런 일과 씨름할 필요가 없어진다.나 역시 쉽게 떠나는 편을 선택해 왔다. 어떤 그룹은 세상적이라고, 아니면 그 친구들은 너무 보수적이라고 하면서. 생각이 맞지 않는다며 동역자들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들의 모임을 피하려 했다. 소수라도 마음이 맞는 교우들과 일하려 했지, 껄끄러운 분들을 적극 설득해서 같이 하려 하지 않았다.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가 교회를 떠나면, 어쩔 수 없다며 적극 다시 끌어오려 하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 앞으로 속 썩지 않아도 된다는 얄팍한 계산도 했던 것 같다. 2시편 133편은 시의 분량이 말해주듯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간결한 시이다. 그런데, 시작이자 시 전체를 수렴하는 1절은 긴 공명을 일으킨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새번역)시편 133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1그 얼마나아름답고 즐거운가!형제자매가 어울려서함께 사는 모습!2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3헤르몬의 이슬이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주님께서 그곳에서복을 약속하셨으니,그 복은 곧 영생이다.형제자매들(하나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사는 모습은 밖에서 보기에 좋아 보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즐거움이 있다(1절). 주님의 사람들이 선한 일에 연합하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즐겁고 기쁜 일은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은 두말할 필요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답다. 이런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시며 마음껏 복을 주신다(3절). 형제들과 함께하며 얻는 즐거움은 시편의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시편 122편을 시작하는 구절이다. 시 전체는 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을 둘러보고 느낀 황홀한 감격을 그린다. 이 잊지 못할 경험은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는 형제들의 제안에서 시작된다. ‘기뻤다’는 표현이 말해주듯 같은 마음을 품은 형제들과 좋은 일을 함께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전도서에는 주님의 백성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때 비단 즐거움을 얻는 데 그치지 않음을 들려준다.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유익을 얻게 됨을 가르친다. 물론, 힘을 합하여 큰일을 도모할 수도 있다. 홀로 일어나지 못할 때 서로 일으켜 줄 수 있으며, 혼자의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상황에서 힘을 보탤 수 있다.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여럿이 힘을 합쳐 이루어 낼 수 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9-12, 새번역).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신 일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다. 그런데도,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과 다니며 일하셨다. 이 땅을 떠나시기 전,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그들이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요한복음 17장). 잡히실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깨어 기도하라 부탁하기도 하셨다. 부활 후에는 제자들 곁을 아주 떠나지 않으신 채, 한동안 세상에 머무시며 확신을 심어 주시고 사명을 부여하셨다. 마침내, 그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교회가 시작되게 하심으로 주님의 원대한 계획에 제자들이 동참하는 영광을 얻게 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함께 일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전도 여행에는 언제나 동행자들이 있었다. 때론 그들 가운데 뜻이 맞지 않아 의견 다툼이 생기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혼자의 길을 고집하지 않았다. 새로 만나는 주님의 일꾼들과 거리낌 없이 협력했고, 의견이 다른 일꾼들과 잠시 갈라서기도 했으나 영영 결별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편지에는 받는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내용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들이 그가 하는 일에 기도와 마음으로 동참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3즐겁고 아름다운 형제의 연합은 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는,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다름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다양성의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같은 모습으로 만드시지 않았다.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에서 각각 차이가 난다. 이처럼 각 사람을 독특하게 지으신 목적은 자기만의 색깔을 내며 홀로 독불장군이 되어 독립적으로 살아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아니하면서 다른 색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큰 그림을 완성하는 데 기여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사람들의 모습과 성격이 다르듯이 살아가는 방식은 각각 다르다. 한 아버지를 모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양태 역시 제각기 다르다. 유사한 사람들로 그룹을 지을 수 있지만, 면밀하게 뜯어보면 그 안에도 똑같은 생각이나 방식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란 없다.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있고, 형편에 따라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신앙인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TV를 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문제 될 게 없다고 하는 신앙인이 있다. 어떤 사람은 좋은 프로그램만 골라 보면 된다고 한다. 유행가를 불러도 된다 혹은 안된다. 교회 안에서 반바지를 입지 말아야 한다, 괜찮다 등등, 다양한 의견 차이와 생활 방식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 미국에 사는 동안 현지 목사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한국 목사님들의 삶에 익숙한 내게 미국 목사들은 너무도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매일 새벽잠 깨어 교회로 향하지 않아도 되고, 밤늦은 시간에 기도회를 인도하지 않아도 된다. 주일 오전 예배에 사용할 설교 한편이면 설교 준비는 끝난다. 주중에는 교회에 마련된 목사실로 며칠 출근하여 스스로 정한 근무 시간을 채우면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개인적으로 활용하든 상관하는 사람이 없다. (미국 목사들은 ‘오피스 아워’라고 부르는 시간 동안 사무원처럼 사무실에서 일한다.) 본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특별한 요청이 있을 때 어쩌다 교인을 심방하기 때문에 심방으로 시간을 빼앗기지도 않는다. (계절별로 대심방이나 성도들의 기념일로 심방 하는 일은 없다. 병원을 방문하거나 상을 당한 성도를 심방 하는 일 정도가 심방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원하는지 잘 판단해야 한다.) 게다가 일 년에 한 달 이상 휴가를 다녀오고 두세 주 정도의 독서를 위한 특별휴가까지 받는 것이 보통이다. 설교 시간에 지난주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프로야구 경기장에 가서 친구들과 환한 얼굴로 찍은 사진들을 교회 프로젝트 화면에 띄우며 자랑하기도 한다. 사명감에 불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회 일에 분주한 한국 목사들에 비하면 그들은 놀고먹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직무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설교 준비에 성의를 다하고, 매일 새벽에 교회로 향하지 않지만 개인의 처소에서 경건 생활을 위해 힘쓴다. 단지 그들은 한국의 목사들과 다를 뿐이다. 목사라는 직책을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고, 목회 철학이 다르고, 세상과 가정과 개인 생활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은 어떤 이유에서 건 다 다르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반목과 무시로 서로를 대하기 쉽고 불협화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가진 것만이 옳다고 믿고 주장할 때,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어울리지 못할 타인들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합과 조화에서 오는 즐거움은 고사하고 분열에 따른 아픔만 남게 된다. 이는 서로 사랑함으로 그 정체성을 세상에 알려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히려 분열함으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은 차가울 것이고 나아가 주님에게 큰 손해를 끼칠 건 뻔하다. 어떤 그룹이나 개인이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면 그다음 문제에 대해서는 마음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작은 이슈들에 집착해서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 거리를 두기보다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집중하면 좋겠다. 하나님 나라는 흑백으로만 그려져야 할 지루한 평면적인 그림이 아니다. 형형색색이 어울려 그려져야 할 화려하고 아름다운 입체적인 그림이다. 다음으로, 이해와 포용, 용서와 화해의 자세를 가질 때 연합과 조화의 아름다운 그림은 그려진다. 이해와 포용의 기반 위에 협력과 동행의 좋은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관계를 이어가는 힘은 이해와 포용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용서와 화해는 이해와 포용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의 핵심 정신이다. 이해와 포용이 상대의 연약함이나 약점을 덮을 수 있는 정도라면 용서와 화해는 상대방의 잘못과 허물까지 덮을 수 있다. 용서와 화해가 없는 기독교는 정의와 법만이 지배하는 삭막한 종교의 수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이해와 포용을 넘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기까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대학 시절에 교회의 청년부에 속해 있으면서 대학생선교회 활동을 했다. 분명 두 그룹은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한쪽은 모이면 전도와 민족복음화를 얘기하는 순수 열정 대학생 모임이었고, 다른 쪽은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대화로 가져와 웃고 즐기는 세상적인 기독 청년 모임이었다. 한창 뜨거웠던 나의 눈에 비친 교회 청년들의 모습은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안타깝게도 이런 비교는 점점 그들과 거리를 두게 했고 그들 속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소속한 대학생선교회에 대한 자부심은 또한 다른 그룹의 대학생선교회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각자의 특성대로 일하는 동역자이자 형제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못했고 칭찬은 고사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열리는 연합 행사에 건성으로 협조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의 관점에서 대학생선교회를 지도하시는 간사님들은 최고로 헌신된 주님 나라의 일꾼들이었다. 일정한 소득 없이 매달 불안정한 후원으로 살아가면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묵묵히 일하던 그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주님의 사도들처럼 보였다. 반면에, 의식을 집전할 때는 근엄한 태도의 성직자들이 되지만, 단을 내려오면 언어나 생활에 본이 되지 않는 교회의 목사님들은 그저 그런 일꾼으로 판단했다. 이런 좁은 생각으로 인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고 가까이하여 그분들의 좋은 점들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기도로 기꺼이 돕지도 못했다. 미국 교회의 원로 목사님이 해 준 말씀이 생각난다. 아마 그분과의 대화 중 당시 내가 섬기던 교회의 한 성도의 흠을 잡았던 것 같다. 이혼을 거듭했고 말을 사납게 하는 여자 성도가 교회에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노령의 목사님은 그 성도를 잘 품어 주라고 당부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아주 비싼 벤츠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데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갔다고 차를 버리겠냐?” 내 좁은 속을 부끄럽게 만드는 적절한 충고였다. 그 당시의 나는 전체의 가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트집 잡으며 가치를 절하시키고 나중에는 폐기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 다 실수하고 때론 죄를 지으며 산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보고 죄를 꼬집는 나 또한 실수와 죄의 비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다고, 실수했다고,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죄를 지었다고 멀리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주님은 그분의 사람들이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고 연합과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신다. 상대의 약점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함께 가라고 하신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다시 하나가 되어 주님 나라를 확장해 가라 요구하신다. 세상은 혼자 당당하게 사는 당신이 아름답다고 한다. 당신에게 유익을 주지는 못하면서 에너지를 빼앗아 가는 사람을 손절하라고 가르친다. 홀로 아무런 제약 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부각하며 동경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혼자 살아가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어울려 즐겁고 아름답게 살도록 부름받았다. 그리고 함께 일하도록 부름받았다. 어울려 살아가고 조화를 이루며 함께 일하려면 서로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형제라도 끝까지 참아 주고 곁에 있어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주님에게서 손절당할 무익한 존재들이다. 이를 생각한다면 하찮게 여겨지는 관계라도 함부로 끊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들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가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길 바래 본다.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는가?
by Joanna Kimbrel
2023-11-24
소셜 미디어에 관한 또 다른 관점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왜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는가?” 중학교 때 가족용 데스크탑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화 접속 인터넷의 친숙한 소리를 기다렸다가 Internet Explorer를 두 번 클릭하고 MySpace로 이동하곤 했다. 종종 몇 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내 순위를 확인하고 완벽한 프로필 노래를 내 페이지에 삽입할 수준이 되도록 HTML을 배우고, 작은 빨간색 알림이 주는 반복되는 도파민 자극을 느끼기 위해 브라우저를 계속해서 누르며 페이지를 새 화면으로 바꾸곤 했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소셜 미디어는 크게 발전했다. 중독성은 여전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다. 불쾌한 트위터 싸움과 열띤 댓글 싸움을 볼 때면, 상대에 대한 고려 없이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인간의 타락성을 다시금 생각한다. 필터를 통한 이미지 조작과 핏스포(fitspo: fitness inspiration)는 우리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 채우는 동시에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나는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왜? 나는 하나님이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소셜 미디어까지도 얼마든지 구속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위험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소셜 미디어에 로그인하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연결을 이루는 장소온라인 관계가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온라인은 내가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환상을 줄 수 있다. 사실상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온라인 연결을 맺었다. 그 일부는 나중에 콘퍼런스나 커피숍에서 만났고, 또 수시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도 있다. 나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은 내게 일종의 가상 지원 시스템이다. 소셜 미디어는 내가 일자리를 찾을 때 통로 역할도 했다.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자원과 사람들을 소셜 미디어에서 만났다. 내가 Gospel Coalition을 알게 된 것도 사실상 소셜 미디어 덕분이었다. 성장을 위한 기회요리법과 생활 꿀팁부터 육아와 영적 성장에 이르기까지, 내가 팔로우하는 수많은 계정의 포스팅을 통해서 나는 격려를 받고 성장을 체험한다. 긍정적인 성장을 장려하는 피드만을 골라서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내가 얻은 리소스를 생각할 때 그건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이다. 명확한 의도성과 분별력을 갖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전에는 고려하지 전혀 않았던 관점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의 포스팅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포함하여 모든 걸 다 시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식과 공감이 커진다. 복음 전파의 통로틱톡이 전도에 필수도 아니고,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대면 사역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러한 앱을 사용하고 또 듣고 있는 게 현실이다.온라인 플랫폼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더불어서 성경 공부 도구와 영성 훈련을 실행하는 실제적인 방법, 그리고 지역 교회 공동체를 향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다양한 기회까지 제공한다. 경계 설정이처럼 소셜 미디어에는 잠재적인 이점이 많이 있지만, 심각한 위험도 따라온다. 중요한 건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로 제대로 탐색하는 자세이다. 경계를 설정하지 않거나 내 삶과 영혼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소셜 미디어는 시간 낭비, 불안 고조, 탐심이라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나는 건강한 소셜 미디어 사용을 위해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가드레일을 설치했다. 내가 실천하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시간을 제한해 둘 것무의식중에 휴대폰 소셜 미디어 앱에 빠져 있는 나를 보며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소셜 미디어의 중독성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에베소서 5:15-16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지혜 없는 자처럼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때가 악하니 시간을 활용하라”고 권고한다. 이 명령을 따르기 위해 나는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 앱에 대한 시간제한을 설정했다. “15분 추가” 버튼을 누르고 싶은 유혹이 너무 강하다면,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다른 누군가가 해당 앱을 잠그도록 하는 비밀번호 설정을 고려하라. 2. 시간을 정해 두고 휴식을 취할 것나는 주말에는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 앱을 완전히 삭제한다. 또 일 년에 몇 번 장기간 소셜 미디어 방학을 가진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오로지 기도하고, 성경 묵상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으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며칠이라도 앱을 제거하면 다시 앱을 다시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휴대폰을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3. 포스팅을 잘 선별할 것스크롤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사고 싶고, 외모에 더 집중하게 되는가? 유혹에 빠지는가? 아니면 괴로움과 불안을 느끼는가? “팔로잉” 목록 조사에 시간을 투자하라. 당신이 팔로우하는 계정들이 과연 참되고, 경건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칭찬할 만하고, 탁월하고, 칭찬할 만한 것인지를 확인하라(빌 4:8). 대답이 ‘아니요’라면, 당장 ‘팔로우 취소’ 버튼을 클릭하라. 4. 게시물 올리기 전에 생각할 것내가 게시하는 내용은 내가 먹는 음식만큼이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게시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 보라. 내가 이 게시물을 성취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게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이기적인 야망과 헛된 자만심에서 포스팅하는가, 아니면 겸손함이 동기인가? 내 게시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가?5. 정기적으로 재점검하기나는 소셜 미디어를 계속 사용하기로 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 내가 사용하는 방식이 항상 같을지도 확신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라. 소셜 미디어가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직도 내가 시간을 잘 활용하고 있는가? 변경해야 할 사항은 없는가? MySpace에 처음 가입했을 때, 위험한 개인 정보를 낯선 사람과 공유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 나는 딱히 무엇이 현명한 사용법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친구들과 연결하는 재미있는 방법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몇 년 후,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소셜 미디어가 가진 선과 악의 잠재력을 점점 더 깨달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소셜 미디어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를 기도한다. 그건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원제: Why I’m Staying on Social Medi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는가?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11-23
소셜 미디어에 관한 또 다른 관점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는가?”9개월 전, 소셜 미디어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하던 중에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뒀다.계정을 삭제하기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슬플지, 외로울지, 아니면 사람들과 연락이 끊길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과연 소셜 미디어를 안 하고 살 수 있을지 자체도 가늠할 수 없었다. 사실 직업 면에서 소셜 미디어는 내가 활용하는 자료가 온라인에서 뒤떨어지지 않는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게다가 또 온라인에도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은가? 상호 연결이 있고, 다양한 성경 해석을 접할 수 있으면 기쁨이 공유되고 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등 아름다운 활동이 일어난다. 내가 정말로 이 모든 것에서 나 자신을 영구히 차단하는 게 맞을까? 하지만 여기에 솔직한 진실 하나가 있다.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고 40주가 흘렀는데 한 번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여름 방학, 생일, 그리고 이런저런 휴일을 지나면서 단 한 번도 사진을 게시하지 않았고,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또 오랜 친구가 올린 인생 전환 스토리도 보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사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다시 돌아갈 계획이나 욕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소셜 미디어에 가입하기 이전의 내 삶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아졌기 때문이다. 왜 소셜 미디어를 시작했는가나는 스물일곱 살 때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다. 홈스쿨링을 하는 젊은 엄마로서 소셜 미디어는 (말 그대로) 내가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건 우리 가족이 무엇을 하는지 그들과 공유하고, 또 나와 같이 홈스쿨링하는 다른 엄마들과 서로 기뻐하거나 위로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페이스북이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말한 성경 말씀(롬 12:15)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소셜 미디어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아이들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하는 게 어색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대화를 중단했다. 또 내가 하는 일을 이리저리 떠드는 것도 내 자랑 같아서 점점 줄여나갔다(잠 27:2). 게다가 어떤 이슈에 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도 전혀 쓰지 않았다(잠 17:28).그 시점에 이르자 나는 사실상 잠수를 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내가 올린 게시물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도파민의 흥분 호르몬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둘 수 없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행여라도 내가 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왜 그만두었는가나름 조사한 결과, 나는 소셜 미디어 계정을 폐쇄하는 사람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강하게 반대하는 내부 충동을 극복하는 데에는 어떤 자극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의 첫 번째 작은 시작은 에밀리 젠센이 쓴 통찰력 있는 Social Sanity in an Insta World를 읽으면서였다. 그녀는 내가 소셜 미디어를 하면서 일찍이 느꼈던 여러 증상을 하나씩 나열했다. 남는 시간을 때우려고 소셜 미디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 긴 독서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느끼는 낮은 수준의 불안감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게 결정적인 충격을 준 것은 통찰력 있고 경건한 Z세대 여자아이들과 대화하는 중에 그들을 얽매고 있는 소셜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얻는 것은 거의 없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셜 미디어를 떠나는 데에는 겸손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리즘에 맞설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소셜 미디어에 접속할 때마다 느끼는 도파민이 주는 기대감을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내 페이지를 계속 업데이트하며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완전히 성공할 수 없었다. 데이비드 앨런(David Allen)의 표현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정복하기 불가능한 일종의 무한 고리이다. 나라고 소셜 미디어를 적절하게 활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마침내 아예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 친구 로라의 경우에는, 소셜 미디어에 며칠 내내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거기에 조금도 매여 있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도구를 통해서도 그녀의 사역을 아름다운 방법으로 축복하고 계신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아무리 관대하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로그인하려고 해도, 다른 글들을 읽을 때면 조급해지거나 지루해졌다. 흥미로운 글이 내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열리도록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날카로운 분노나 좌절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소셜 미디어를 그만뒀을 때, 나는 결코 그 이전보다 더 친절하고, 더 똑똑하고, 더 현명하거나, 주님을 더 사랑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다 없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그리고 트위터까지. 왜 나는 소셜 미디어를 여전히 하지 않는가에밀리가 옳았다. 소셜 미디어는 그녀와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손을 떼고 난 이후 나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더 명확하게 생각하고, 더 효과적으로 내 삶을 조절하면서 집과 직장에서 눈에 띄게 효율성이 높아졌다. 이제 나는 지루함 없이 성경과 다른 책들을 읽을 수 있다. 가족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사랑한다. 사라지지 않던 낮은 수준의 불안감이 없어졌다. 더 편안하고 더 잘 참는 사람이 되었다. 선택을 내릴 때도 훨씬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하는 무언가가 소셜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점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다. 더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팟캐스트 Gospelbound에서 내가 Collin Hansen과 나눈 이야기를 권한다.)이제 나는 누군가가 소셜 미디어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 덕에 나는 트위터에서 벌어졌을 수백 번의 싸움과 험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진짜 생활과 다른 사람이 온라인에 올린 인스타 생활을 비교하는 일도 내 삶에서 사라졌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다. 물론, 분명히 몇 가지는 놓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 즉 순전한 기쁨, 향상된 집중력, 주님의 인도에 대한 민감성이 주는 장점은 분명하다. 소셜 미디어 사용 여부의 장단점을 결정하는 저울의 추는 하지 않는 쪽으로 더욱더 기울고 있다. 내게는 이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통 미국인이 하루에 소셜 미디어에서 쓰는 시간이 두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신도 ‘내가 왜 이걸 계속해야 하지? 이게 그럴 가치가 있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원제: Why I Left Social Media—and Won’t Go Bac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소셜미디어
상(床)을 베푸시는 하나님
by 박혜영
2023-11-22
우리는 성찬의 말씀을 나누고, 주의 떡과 잔을 함께 먹는 시간을 갖습니다. 매번 이 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자세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의 기원은 흔히 알고 있는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고전 11:23)보다 훨씬 이전인 광야 시대의 성막에 놓인 ‘상’에 있습니다(참고. Brant Pitre, Jesus and the Last Supper). 레위기 24:5-9과 출애굽기 25:23-30은 둘 다 광야의 성막 안에 설치한 ‘진설병 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너는 대접과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정금으로 만들지며, 상 위에 진설병[떡]을 두어 항상 내 앞에 있게 할지니라”(출 25:29-30). 숟가락까지 준비해 놓은 걸 보면, 이는 식사를 위한 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내 앞에”]서 먹고 마시는 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베푸신 상일까요? 하나님이 베푸신 상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여기에 놓은 떡(진설병)이 특이합니다. ‘기념의 떡’이었으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레 24:7, 8). “기념[기억]”을 위한 것이라니, 먼저 이런 상을 베푸신 적이 있다는 뜻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시내산 언약식 장면입니다.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출 24:10-11). 모세를 중보자로 하여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의 대표들에게 하나님이 상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다니, 이는 하나님 앞에서 먹었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출애굽기 24장)이 끝나자마자 성막 설치에 대한 지시(출애굽기 25장)가 나오는 걸 보면, 성막 안 ‘진설병 상’은 시내산 언약 식사의 축소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학자들은 성막을 ‘휴대용 시내산’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진설병 상’의 떡을 ‘기념의 떡’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 시내산 언약 식사를 기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베푸신 상이라니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합니까! ‘진설병 상’이 언급된 구약의 본문을 찾아보면, 거의 언제나 지성소 안의 ‘증거궤’ 다음으로 등장합니다.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한지 지성소의 증거궤와 ‘진설병 상’만 삼중 포장하여 이사합니다(민 4:6-8). 성막의 다른 기구들은 이중 포장이면 충분했습니다.그렇게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 12지파를 위해 베푸신 ‘진설병 상’을 유월절에 예수님이 12 제자에게 베푸셨습니다(눅 22:14-20). 이 상은 예수님이 베푸신 게 분명합니다. 14절 문장을 원문 순서로 읽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앉으시니, 제자들이 함께 하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었고, 12제자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위한 초청입니까?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 식사 자리에서 떡을 주시며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으며(눅 22:19), 잔을 주시면서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 하셨습니다. 구약 12지파를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얼굴의 떡[진설병]’(출 25:30)을 먹었듯이, 12제자는 “내 몸”(눅 22:19), 곧 ‘주의 몸’을 먹었습니다. 정리해 보면, ‘진설병 상’이 이어져 내려온 순서는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24:10-11→출애굽기 25:23-30(레위기 24:5-9)→누가복음 22:14-20.광야 백성에게 상을 베푸신 분이 하나님이듯, 교회의 신자들에게 상을 베푸시고 초청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이 상의 기원은 시내산 언약이며, 예수님은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눅 22:7)에 새 언약을 세워 시내산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사도들에게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하셨기에, 오늘날 교회도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일러 ‘성찬식’이라 하는데, 주님이 베푸신 ‘언약의 식사’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진설병 상’을 그렇게 거룩하고 중요하게 여겼다면, 교회의 신자들도 예수님이 베푸신 상을 거룩하고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다른 일이 있다는 이유로 빠지는 교회의 정회원들이 있다면 유감스러운 일입니다(참고. 눅 14:16-20). 자신에게 흠이 있어 이 거룩한 식사를 감당치 못해 피한 것이라면, 더 좋은 방법은 참석하여 그런 내용을 주님께 고백하고, 한 몸이 된 교회의 성도들에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세워가야 합니다.
‘번영 복음’ 팩트체크
by Joe Carter
2023-11-21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번영 복음 관련 신앙을 믿는 교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Lifeway Research 이사 스코트 맥코넬은 “지난 오 년 동안 훨씬 더 많은 교인의 신앙이 사실상 번영 복음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물질적인 축복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이단적인 믿음도 포함된다”라고 말한다. 맥코넬이 지적한 것처럼 문제는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축복을 주신다는 생각(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제공되는 모든 좋은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롬 8:32])이 아니라, 그런 축복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다 해야 한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있다. 번영 복음에 관해 알아야 할 아홉 가지는 다음과 같다.1. 번영 복음은 다양한 이름과 브랜드를 자랑한다.번영 복음은 “건강과 부의 복음” 또는 “원하는 것을 선포하고 쟁취하라” 등의 용어를 다 포함하는 모든 신학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많은 사람에게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는 “믿음의 말씀” (Word of Faith) 운동이다. 이는 실로 엄청난 추종자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현대 기독교 운동이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고 신체적으로 복지를 누리기를 원하며, 믿음과 긍정적인 말, 특정 기독교 사역처에 대한 헌금이 바로 이 두 가지 축복을 증가시키는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다음은 스티븐 헌트의 설명이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육체적 건강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확신에 관한 교리는 번영 복음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최전선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건강과 부”가 성경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동으로 갖는 신성한 권리이며, 이런 축복의 결과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 패키지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단지 죄만이 아니라 질병과 빈곤도 함께 제거했기 때문이다. 2. 번영 복음은 신사상으로 알려진 신비주의 운동에 뿌리를 둔다.신사상(New Thought) 운동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정신철학이다. 명시적으로 기독교 사상은 아니지만 기독교뿐만 아니라 동양 철학, 형이상학적 전통, 심리학 및 자기 계발 같은 신흥 분야의 영향을 받았다.이 운동은 긍정적 사고(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상황을 가져온다는 믿음), 끌어당김의 법칙(좋아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것을 끌어당긴다는 생각, 바라는 것을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그리면서 오로지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 그 결과, 바라는 결과를 이뤄내는 환경을 갖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마음에는 몸을 치유하고 번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신사상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성경의 요소를 통합하지만, 이를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해석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 같은 성경 구절은 흔히 끌어당김의 법칙을 확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신사상은 힌두교, 불교 및 기타 동양 철학의 사상까지 통합해서 혼합적인 영적 틀을 만든다. 3. ‘번영 복음의 아버지’는 오클라호마 출신의 신유 설교자이다.현대 번영 복음 교육의 아버지로 여겨질 수 있는 사람은 오랄 로버츠(Oral Roberts)이다. 1918년 오클라호마 폰토톡 카운티에서 태어난 로버츠는 20세기 중반에 명성을 얻었으며, 오늘날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 기독교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다. 가난하게 자랐고 십대 때 결핵으로 고생했던 그는 부흥회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된 후 자신의 삶을 기독교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복음 전파의 매체로서 텔레비전의 잠재력을 깨달은 최초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 시청자는 수백만 명에 이르렀다. 신유 은사를 가진 이 복음 전도자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Oral Roberts University라는 학교를 시작했다. 전성기 시절에 그는 연간 수익 1억 1천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사역을 총괄했다.4. “믿음의 말씀”이 번영 복음 전파에 큰 역할을 했다. 로버츠가 신사상 원리와 신유 은사를 결합한 최초의 사람 중 하나라면, 번영 복음의 가장 저명한 전도자이자 “믿음의 말씀” 운동의 아버지는 케네스 E. 해긴(1917-2003)이다. 1962년에 해긴은 Kenneth Hagin Ministries를 설립하여 믿음의 말을 선포함으로 건강과 부, 기타 축복을 불러올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파했다.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의 하나는 로고스(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와 레마(입을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의 구분이다. 그는 레마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약속을 활성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셀 우드브리지가 말했듯이,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믿음의 말씀 운동이야말로 20세기 후반에 미국 전역에 번영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5. “씨앗 믿음”이 번영 신학 운동의 초석이다. “씨앗 믿음”(seed-faith) 교리는 번영 복음 설교자의 사역에 금전으로 기부하는 것이 결국 축복의 수확을 가져올 씨앗을 심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은 믿음의 행위로 사역에 금전의 “씨앗”을 뿌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금전의 번영, 육체의 치유 또는 기타 형태의 은혜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축복의 형태로 그 씨앗을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주장은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헌금을 통해서 더 긴밀해지는 거래 관계라는 것이다. 로버츠는 세 단계 모델을 사용하여 씨앗 믿음 개념을 분명하게 했다. (1) 씨앗을 심는다: 가치 있는 것(보통 돈)을 사역에 씨앗으로 심는다. (2) 기적을 기대한다: 당신의 헌금이 하나님의 개입을 촉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3) 기적을 거둔다: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그 축복은 종종 물질적 또는 재정적 형태로 주어진다. 6. 텔레비전이 번영 복음 전파에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텔레비전을 활용하여 예배와 기독교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방식인 텔레벤절리즘(Televangelism)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방송 규제가 완화되고 케이블 TV가 확대되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텔레비전 전도사 중 다수가 번영 복음 운동 및 그 가르침과 관련이 있다.로버츠는 많은 청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 매체를 사용한 최초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한때 그의 비행기를 조종하고 또 자동차 운전사였던 케네스 코플랜드도 나중에 가장 악명 높지만 (가장 부유한) 번영 설교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로버츠와 코플랜드는 짐과 타미 베니커(Jim and Tammy Faye Bakker), 베니 힌 (Benny Hinn),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로버트 틸튼(Robert Tilton), 그리고 프레드 프라이서(Fred Price)를 포함하여 19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린 텔레비전 전도사들을 위한 길을 열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조엘 오스틴(Joel Osteen), 크레플로 달러(Creflo Dollar), 조이스 메이어(Joyce Meyer), T. D. 제이크스(T. D. Jakes), 그리고 폴라 화이트(Paula White) 등 가장 저명한 번영 복음 지도자들도 TV를 통해서 먼저 자신들의 이름을 알렸다. 7. 번영 복음은 성경의 가르침, 특히 부와 고통에 관한 내용을 무시한다. 많은 기독교학자와 윤리학자는 물질적 번영에 초점을 맞춘 번영 복음이 겸손, 연민, 고통의 당연함을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존 파이퍼 목사는 2005년 11월 1,000명이 넘는 대학생 모임에서 “나는 당신이 번영 복음, 즉 건강, 부, 돈을 가져다준다는 그런 복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했다. “아주 미워합니다.”2014년에 파이퍼는 번영 복음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여섯 가지 핵심 사항을 정리했다. ·고난의 성경적 필요성과 고난의 당연함에 관한 진지한 교리의 부재· 자기 부인이라는 명확하고 두드러진 교리의 부재· 성경에 대한 진지한 설명의 부재· 성경 속 긴장을 다루지 못함· 사치를 즐기는 교회 지도자들· 자기의 탁월함을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소외시키는 것8. 번영복음 신앙은 미국 신자들 사이에서 흔하다. Lifeway Research의 2023년 연구에 따르면 미국 개신교 신자 중 절반 이상(52%)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 지도자가 교회 또는 자선 단체에 더 많이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더 크게 축복해 주실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그리고 네 명 중 한 사람(24%)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2017년 연구에서는 같은 질문에 38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오늘날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하신다고(76% 대 69%),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45% 대 26%) 믿을 가능성이 2017년보다 더 높아졌다. 오늘날 교인 넷 중 셋(76%)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재정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하신다고 믿고 있으며, 그중 43퍼센트는 그 주장에 강력하게 동의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축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는 응답자는 무려 45퍼센트였으며, 21퍼센트는 강력하게 동의했다.9. 번영 복음은 거짓 복음이다.2015년 The Gospel Coalition의 기사에서 기독교 윤리학자 데이비드 존스는 번영 복음 가르침의 다섯 가지 신학적 오류를 설명했다.· 아브라함 언약은 물질적 권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다. · 예수님의 속죄는 물질적 빈곤이라는 “죄”까지 확장된다.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헌금한다. · 믿음은 번영으로 이끄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영적 능력이다. · 기도는 하나님께 번영을 달라고 강요하는 도구이다. 존스는 “성경에 비추어 보면 번영 복음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라고 말한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빚어진 거짓 복음이다. 간단히 말해서, 번영 복음이 사실이라면 은혜는 쓸모없고 하나님은 무의미하며 만물의 척도는 사람으로 바뀐다. 아브라함의 언약, 속죄, 나눔, 믿음, 기도 등 무엇을 이야기하든, 번영 신학 전도사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돈으로 주고받는 거래 수준으로 전락시킨다.”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the Prosperity Gospe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번영복음
번영신학
‘가족적’ 기독교: 우려와 희망
by 김선일
2023-11-2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올해 초에 인기 연예인 이승기씨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에게 좀 더 충격적인 소식은 원래 교회에 다녔던 그가 결혼을 하면서 처가의 종교인 불교로 개종한다는 것이었다. 모범적인 이미지의 그는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교회 오빠” 이승기가 “절 오빠”가 되었다는 아쉬움이 번졌다. 결혼과 함께 종교를 바꾸는 일은 한국에서는 흔하다. 종교 배경이 다른 남녀가 결혼한 뒤에 가족의 화목을 위해 상대방의 종교로 바꾸는 현상을 종종 본다. 이번에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사례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이처럼 가족의 화목과 일치를 위한 개종이 빈번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종교보다 가족이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선택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서 결혼과 함께 개종을 하거나, 혹은 부모의 영향으로 인해 종교를 갖게 된다는 것은 가족이 더 큰 종교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세우고 전하는 데 있어서 우려와 가능성을 모두 안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특징 중 하나가 가족 종교다. 그리고 가족 종교 현상은 계속 심화하고 있다. 가족 종교란 신앙이 가족 외의 다른 이들에게 전파되지 못하고 자기 가족 안에서만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처음 신앙을 가진 시기가 모태신앙인 경우는 10년 전보다 두 배나 높아졌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75퍼센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신앙을 가진 것으로 나온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113-114). 즉, 성인 이후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비율이 낮아진다는 것인데, 이는 가족 밖에서 신앙의 전파가 활성화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격적이고 진지한 결단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문화적 관습에 의한 명목상 신앙의 비율이 늘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유별나다.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지난 세기에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가족이었다. 가족 간 애정을 중시하는 문화는 어느 곳에나 있다. 그러나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때로 혈연 가족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가족이 아니어도 나이 드신 분을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따뜻하고 예의 바른 관행으로 여겨진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이모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사용된다. 한국인의 가족주의 문화는 사회를 향해 더욱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것 같다. 건강한 가족 경험이 다른 이들을 향한 가족적 연대로 이어진다면 이는 성경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하다. 다만 불안과 불신 속에서 더 큰 사회를 외면하고 내 가족만 챙기는 가족 이기주의가 장애물이었다. 요즘에는 전통적 가족의 해체가 더 큰 문제로 떠오른다. 화목한 가족은 줄어들고 병든 가족은 늘어난다. 최근 유행하는 비혼 비출산의 풍조도 좋은 가족의 모델을 경험하지 못해서라는 뼈아픈 진단이 있다. 혈연 가족이 가족의 전부는 아니지만 사회의 가족적 연대를 위한 기초가 된다. 끈끈한 관계가 약해지고 느슨한 관계가 대세라고 하지만 인간에게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경험은 기본적인 생명력이다. 혈연 가족의 해체와 위기는 사회 전체의 정서적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족적 연대가 상실되는 시대에서 종교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비기독교인 심리학자의 진단은 의미심장하다(한국인의 마음속엔 우리가 있다, 235). 가족주의적인 한국 사회가 가족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로 인해 취약한 소속감과 연대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역할을 다시 일깨워 준다.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인의 가족주의는 종교를 선택할 때 영향을 준다. 가족 간 종교가 다를 경우에는 더욱 신앙이 절실한 가족에게로 끌릴 수 있다. 과거에 비해서 신앙의 헌신이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기독교는 불교나 천주교에 비해서 신앙의 정체성이나 활동성이 훨씬 강하다. 신앙의 목적도 마음의 평안과 같은 개인적 유익보다 구원과 영생이라는 종교적 이유가 현저히 높게 나온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복음적 신앙과 선교적 헌신이 필요하다. 믿지 않는 이에게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을 믿고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면 이는 비록 낯설지라도 신선한 도전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믿는 가족이 혼자만의 신앙에 그치지 않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하여 섬김과 관심의 삶을 보여 주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준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혼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족을 섬기는 교회가족의 해체와 위기가 현실이 되는 이 시대에 교회는 인간 공동체의 기본인 가족을 섬겨야 한다. 성경은 혈연 가족주의나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가족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라고 경고한다. 디모데전서가 교회의 직분과 목회적 소명을 언급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가족을 섬기는 의무는 교회의 중대한 사역이다. 인간은 가족 안에서 가장 원초적인 자기 정체성과 정서적 신뢰를 얻게 된다. 따라서 가족의 불안정은 인간됨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기초로 한 올바른 부부 관계와 자녀 양육을 지원하는 것은 설령 교회 성장을 위한 동기가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시대 상황에서 화급한 과제를 맡는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은 교회의 가정사역이 소위 통념적인 ‘정상 가족’의 범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혼, 저출산, 이혼 등으로 인해서 다양한 가족 형태들이 등장하고 있다. 가족을 섬기는 교회의 사역은 생물학적 가족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이들을 사회적 가족까지 포괄하는 형태로 나아가야 한다. 사실은 교회 자체가 새로운 가족의 친교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러한 가족적 유대관계의 맥락 안에서 신앙의 전수와 나눔이 이루어질 때 교회의 선교적 역량은 가족이라는 관계망을 타고 넘쳐흐를 것이다. 교회를 섬기는 가족 로드니 클랩은 “기독교 가정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도적으로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갈 때 선교 기지(mission base)가 된다”고 말한다(Families at the Croissroads, 61)고 말한다. 기독교 가정이 선교기지라는 말은 섬세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족이 함께 단기선교에 가거나, 주변의 이웃에 열심히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실천도 포함될 수 있지만, 이는 기독교 가정이 혈연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확장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가족은 아무리 중요해도 그 자체가 하나님 백성 가족인 교회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유한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을 사모하며 그 나라를 알리고 넓히는 소명을 안고 있다. 기독교 가정의 건강성은 자기 혈육의 안정적이고 윤택한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으로 품기 위한 사명과 능력을 양성하는 데 있다. 기독교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선교적 사명에 응답하도록 지원하고 협력하는 곳이다. 화목한 가족만으로는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부응하지 못한다. 기독교 가정은 상호 섬김과 환대를 가족 내에서부터 가족 외의 이들에게로 확대하도록 부름 받았다. 몇몇 조사들에 의하면 새로이 신앙을 갖게 된 이들의 상당수는 가족의 권유를 통해서 교회에 나온다(가족전도, 35-39).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데 있어서 가족적 요인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 기독교가 가족 종교화되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가족을 섬기는 사역뿐 아니라, 가족에게 선교적 삶의 가치를 알리고 경험하게 한다면 한국의 가족 문화는 기독교 신앙을 지속시키는 토양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목포양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11-18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호남에 선교사들이 찾아든 것은 군산과 전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을 선교구역으로 정한 미국남장로교회 선교부는 1893년 입국과 동시에 군산으로 가서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를 찾았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동학혁명이 정읍, 김제, 전주를 점령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자 선교사들은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동학혁명이 수습되면서 다시 호남선교를 위해서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선발대라고 하는 7명의 선교사를 전주로 파송함으로써 비로소 호남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전주에 거점을 마련한 선교부는 호남의 각 지역에 선교거점을 만들어 나갔다. 선교부가 목포에 정착하기 전인 1894년 4월 18일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와 드루(A. Damer Drew)가 처음으로 목포 선창가에 첫발을 디뎠다. 처음 방문과 함께 전도를 하고 있을 때, 서울 남대문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개종을 했다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목포를 찾기 전에 서울에 전해진 복음을 듣고 개종한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곳까지 전해지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이에 선교사들은 목포가 또 하나의 선교거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만복동에 2,500평의 토지를 매입한 후 1897년 3월 5일, 벨(Eugene Bell) 선교사의 어학 선생이면서 조사인 변창인이 전도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사실상 양동교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해 10월 목포항이 공식적으로 개항을 함으로써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듬해인 1898년 11월에 벨과 오웬(Clement C. Owen) 선교사가 목포에 내려와 자리를 잡음으로써 본격적으로 목포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남장로교회가 호남지역에 전주, 군산 다음에 세운 거점이다. 이후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광주와 순천에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호남선교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었다. 변창인의 전도로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벨과 오웬이 내려왔고, 여자 선교사 미스 스트래퍼(F. E. Straeffer)도 동참했다. 벨은 변창인이 전도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목포에 선교거점과 함께 양동교회의 시작을 이끌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목포라고 하는 항구가 갖고 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내륙 교통이 없었던 시대인 만큼 뱃길로 연결되는 다른 도시에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이렇게 시작된 목포 선교는 오웬은 의사로서 프렌치병원을 개원하여 진료를 시작했고, 스트래퍼는 정명학교와 영흥남학교를 열어서 목포의 아이들에게 신교육을 시작했으니, 이것은 목포에 있어서 서양병원과 근대교육이 효시가 되었다. 1897년 전도를 시작한 후 1년 만에 50여 명의 신자들이 형성되었고, 그들 중에 노학구를 비롯한 7명이 1899년에 세례를 받음으로 양동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인 1900년에는 30명의 세례 지원자가 나왔지만 문답한 결과 6명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세례 지망자는 많았지만 실제로 문답에서 탈락하게 된 것은 관습과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세례를 받는 조건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주초나 축첩 같은, 당시 우리 사회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가운데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신앙고백이나 성경 지식에는 합격했어도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세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동교회의 경우 “김 씨”라는 사람이 세례를 받기 원했지만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 그의 직업이 술빚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고민을 했고, 결국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나서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그러다가 벨 선교사의 부인이 갑자기 별세함으로 벨은 두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오웬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면서 목포와 양동교회의 지도자가 없어지게 됨으로 일시적이지만 위기를 맞았다. 또한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정책적으로 광주선교부를 중심으로 일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스트래퍼와 프레스턴(J. F. Preston)도 광주선교부로 옮기고 폐쇄하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목포선교부를 유지하는 결정을 했다. 벨과 오웬이 다시 돌아왔고, 군산에서 활동하던 해리슨(H. B. Harrison) 선교사가 새로 합류함으로써 목포선교부와 양동교회는 활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날로 성장하게 됨으로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1898년 8칸짜리 마련한 한옥 예배당으로는 수용에 한계가 있어서 1903년 18칸 규모로 증축했지만, 그마저도 수용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예배당을 지어야 했다.그 후 양동교회는 성장을 거듭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500여 명으로 늘어난 신자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한옥 예배당에서 정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당장 좁은 공간에서 예배하자니 남자들은 예배당 안에서, 여자들은 영흥남학교 교실에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양동교회 신자들은 어려운 생활고 중에서도 예배당을 짓기 위한 연보를 드리기 시작했고, 유달산 주변에서 건축에 필요한 돌들을 주워 모았다. 그렇게 준비하여 1910년 3월부터 시작한 건축은 1년이라는 기간이 걸려서 완공되었다. 지금의 예배당은 기본적으로 이때 지은 것으로 서쪽에 있는 남자들의 출입문 위의 아치에 태극문양과 함께 새겨진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이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자들의 출입문인 동쪽 출입문 위의 아치에는 “쥬강생일쳔구백십년”이라고 새겨 놓은 예배당 건축 연도는 그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 예배당이라는 것으로도 의미가 크다. 또한 예배당을 완성한 다음에 “로티 위더스픈 벨 기념예배당”이라고 명명했다. 다만 현재의 예배당은 처음 건축 때와는 조금 다르다. 처음에는 정사각형 예배당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강대상 뒤쪽으로 20평 정도를 증축함으로 직사각형으로 바뀌었다. 또한 1982년 남쪽에 중앙출입문을 만들면서 4층 높이의 종탑을 세웠다. 그러나 그 원형을 훼손한 것은 아니기에 2004년에 등록문화재 제114호로 등재되어 관리를 받고 있는 예배당이다.대개의 지역에서도 그랬지만 양동교회와 선교부가 운영하는 학교들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이었고, 교회나 학교의 지도자들과 학생들은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목포와 양동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목포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정명학교와 영흥남학교 학생들과 양동교회 신자들 200여 명이 독립선언서를 뿌리면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양동교회 담임인 이경필 목사와 서기연 장로, 양일석 장로, 그 외 신자들, 그리고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은 예배당 지하실에서 목판에 태극문양을 새겨서 태극기를 급조했다. 또한 독립선언서는 광주에서 만들어 왔다.이경필 목사가 이끄는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면서 시내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군은 칼을 휘둘렀고, 그 칼에 서상봉이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별세했고, 박상술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는데, 결국 그 후유증으로 별세했다. 이경필 목사 역시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1926년에 양동교회 담임으로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이미 군산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죄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민족지도자였다. 그가 양동교회로 부임한 후 설교를 통해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서 제국주의 망상에 빠진 일본이 조선을 포함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전쟁이라고 설교하면서 비판했다. 칼과 힘으로 천황을 숭배하도록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천황도 주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설교했다. 이런 설교를 하는 박연세 목사를 보고만 있을 일본이 아니었다. 결국 1942년 11월 11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박 목사는 체포되었고,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가했으며, 그럼에도 변화가 없자 겨울에 감옥에서 동사하게 만들었다. 1944년 2월 15일 박연세 목사는 믿음 하나로 살면서 신자들과 함께 신앙을 지키는 것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그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차가운 감옥에서 차라리 얼어 죽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현재 예배당 앞에 있는 ‘선교기념비’는 1986년 부활절에 한국 선교 100주년을 맞아서 목포의 교회들이 연합예배를 드리고 모은 헌금으로 세웠다. 교파와 교단을 떠나서 목포 지방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 감사하고, 특별히 선교 100주년을 맞이해서 목포 선교의 출발지인 양동교회에 이 기념비(“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를 세움으로써 감사한 마음과 함께 복음의 빚진 것을 잊지 않기를 원했다.
이땅첫교회들을찾아
AI, 두려워할 필요 없다
by Mike Kirby·Matthew Emadi
2023-11-17
감성 지능, 창의 지능, 그리고 최근 들어 “인공” 지능 등, 말 그대로 우리는 지금 “지능”이 넘치는 세대에 살고 있다. 인공 지능(AI)은 게임 플레이부터 자동차 운전까지,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컴퓨터 과학의 광범위한 연구 분야이다. AI의 두 가지 주요 하위 분야는 “특정” 형태와 “일반” 형태이다. 특정 AI 기술이 특정 작업에 참여하는 인간을 모방하는 시스템(예: ChatGPT)인 반면, 일반 AI는 보다 광범위하게 생각, 언어 및 행동에서 인간을 모방하려는 시도이다(예: Star Trek 속 Data 역할인 The Next Generation). 이제 ChatGPT 같은 특정 AI 도구가 사회에 출시되었으므로 “기계 학습”이라는 용어도 심심찮게 들린다. 이는 특정 또는 일반적인 작업을 실행하는 방법을 “학습”한 시스템을 의미한다. 기술자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매우 흥미로운 시기이다. 많은 사람은 AI 기술이 과거 인쇄기(계몽주의 시대), 연소 엔진(산업 시대), 그리고 컴퓨터(정보 시대)만큼 사회를 바꾸어 놓을 거라 예상한다.일반 은총 또는 현실 속 터미네이터? 단지 도구로만 볼 때, 역사적으로 기술 발전에 대응했던 앞선 그리스도인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도 AI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한마디로 도구는 선하고 현명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일반 은총에 따라 부여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관점이다.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나는 대장장이를 창조하였다. 그는 숯불을 피워서 자기가 쓸 연장을 만든다. 군인도 내가 창조하였다. 그는 무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사 54:16). 하나님께서는 역사 전반에 걸쳐 기술 발전이 증가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나 선하든 악하든 관계없이 우리가 일반 은총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이므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AI 기술이 너무 멀리 나아간 게 아닌지 물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A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수단과 별개로 신성한 형상을 재창조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고유한 권위를 찬탈하려는,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이 벌이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한편으로 인류의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이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더 멀리 개발하고 배포할 수 있는지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AI는 초창기부터 인간을 연구하고 모델링한 만큼 부분적으로 인간을 모방했다. AI 연구와 신경과학의 상호작용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AI가 인간의 마음을 얼마나 가깝게 모방할 수 있을지는 유토피아적 추측과 디스토피아적 추측, 두 가지를 전부 다 불러일으킨다. 좀 더 환상적인 측면에서 The Jetsons 또는 스타 트렉의 희망적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좀 더 부정적인 측면에서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영혼을 창조하지 못하는 존재를 두려워하지 마라목회자들과 교인들은 AI가 무엇인지, 그리고 AI가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질문하고 씨름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심오하고 미묘한 질문을 던진다. AI가 인간의 독창성과 산업을 쓸모없게 만들 것인가? AI에 대한 성경적 대응은 무엇인가? 인쇄기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자원의 전파를 가속하는 신성한 선물이 맞는다면, 전 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AI는 과연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이 간단한 글의 목적이 이 모든 질문에 답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많은 질문 뒤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일반적인 불안이나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새롭고 복잡한 기술에 대한 숨어 있는 두려움에 맞서면서 동시에 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성경적 원칙을 다루고자 한다. 1.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거룩하고 지혜로우시다. 그분은 권능 있는 주권의 역사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AI의 발전이 흥미롭고 놀랍기도 하지만, 인간이 이루는 최고의 기술 발전도 하나님의 눈에는 고작해야 어린아이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즉 창조주의 귀여운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혁주의의 기본 전제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탐험가이자 발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처음부터 종말을 보시고,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사 46:10). 그분은 인간 세상에서 AI 기술의 수준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오로지 당신 뜻의 결정에 따라 행하신다(엡 1:11). 2. AI 기술(다른 모든 인간의 업적과 함께)이 죄인의 구원을 통해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없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마음에 간직함으로 우리는 AI에 대한 열정이나 두려움을 완화할 수 있다. AI가 큰일을 할지는 몰라도 궁극적인 일을 이룰 수는 없다(행 4:12). AI를 구세주나 적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은 AI에게 그 목적을 넘어서는 역할을 잘못 할당하는 것이다. 죽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모방하여 “그들”과 다시 대화하기 위해 Seance AI를 사용하는 시도를 볼 때, 우리는 죽음의 저주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이 구현하는 기술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새삼 상기한다. AI 기술이 인간 산업을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더 나쁘게는 인간 생명을 근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세계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AI가 아니라 성경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사는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의 노선을 따라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줄거리의 반전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는지는 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하늘에 앉으셨으며, 새 창조를 위해 재림하실 때까지 교회를 지키실 것이다. 그때까지는 밀과 가라지가 나란히 존재한다(마 13:24-30). 두려움을 지혜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3.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AI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다), 결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의 존재가 아니라 영의 존재이다. 우리는 단지 생물학 주머니나 복잡하고 유기적인 슈퍼컴퓨터가 아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육신과 영혼 둘 다를 갖춘 피조물(psychosomatic creatures)이다. 하나님은 흙으로 첫 사람을 만드시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창 2:7). 우리는 결코 기계에 똑같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 인간을 제사장이요 왕으로 만드셨다(창 1:26-28). 어떤 기술적인 발명도 영광과 영예의 면류관을 얻을 수는 없다. 그 특권은 사람이 되신 말씀, 곧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졌다. 오로지 인간만이 구원의 소망을 가진다(시편 8편).AI 기술은 인류에게 하나님이 주신 독창성을 증명한다. 이 독창성은 그분을 섬기는 데 사용된다(물론 많은 사람이 자신의 창의 지능을 악을 위해 사용하지만). 하지만 인공 신체를 만들지는 몰라도 결코 영혼을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마 10:28).4. 변화의 시대를 맞아서 기술적으로는 밝지만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겠다는 그리스도인의 결의를 재확인하자. 두 건축자의 비유에서처럼, 폭풍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반석 위에 집과 모래 위에 집이 다르지 않았다(마 7:24-29). AI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드러내는 어떤 사상적 “기반”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도록 한다. 당신이 죽은 후에 AI가 당신의 목소리를 흉내 낼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무덤에서 살릴 수는 없다. 따라서 이 기술로 우리가 의기양양하거나 낙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고, 하나님의 계획에서 우리의 위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숙고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AI 시대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그 기술을 복음 전파에 참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믿음을 보여 주고, 희망을 전하고, 또 사랑을 드러낼 수 있는 흥미로운 개척지이다.원제: Christians Shouldn’t Fear AI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커피와 설교
by 전재훈
2023-11-16
천국에 커피가 없을까 봐 걱정될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달달한 맛에 라떼나 마끼야또를 좋아했지요. 봉지 커피나 자판기를 이용하면 200원으로 해결될 수 있는 커피를 3,000원 넘게 주고 마셔야 하는 부담감이 커서 아무 때나 마실 수는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 줄 때 한 번씩 마시던 고급 커피를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제게 주는 상으로 한 번씩 마시곤 했지요.개척 후 아내와 함께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무 생각 없이 카페라떼 한 잔 들고 차에 올랐다가 타박을 받았습니다. 개척교회 목사가 정신이 있냐는 말을 들었지요. 300원이면 될 커피를 3,000원씩 주고 마실 형편이냐는 것입니다. 그 후 2년 정도 라떼를 마시지 못했습니다. 커피에 대한 한이 맺히고 말았지요. 그 뒤로 누군가가 밥을 사 준다고 하면 밥 대신에 커피를 사 달라고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초라해 보였을 것 같습니다만 덕분에 제 주변 목사님들이 감사하게도 제게 늘 커피를 권해 주십니다. 우리 교회 인근에 에스플러스라는 카페가 생겼습니다. 목사님 부부가 하시는 카페이고, 교회에서 가깝다 보니 자주 갑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면, 늘 과일을 내어 주시고, 드립 커피도 한 잔 권해 주십니다. 카페에 앉아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면서 과테말라에서 케냐AA까지 다양한 커피를 마시고, 텀블러에 아메리카노 한 잔 가득 담아 나옵니다. 드립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든 생각이 커피는 내려 마시는 것이었는데, 그동안 마셨던 커피는 녹여 먹는 커피였습니다.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때는 티스푼으로 저어서 마셨는데 드립은 그냥 마시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커피는 원두를 사다가 볶고 분쇄하여 머신으로 내리거나, 핸드드립을 해서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커피 원액을 에스프레소라고 합니다. 여기에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 아메리카노이지요. 그러나 원액을 건조하여 가루로 만들면 인스턴트커피가 됩니다. 인스턴트커피는 원액을 건조시킨 것이니 물에 녹여 마셔야 했던 것입니다. 커피는 맛도 중요하지만 향이 중요한 음료이지요. 인스턴트커피를 만들 때 향이 사라지기 때문에 향을 따로 저장하는 장치를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가루와 향을 잘 배합시켜서 우리가 마시는 봉지 커피가 만들어집니다.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이런 봉지 커피에는 커피 원액이 10퍼센트 미만인 것이 많습니다. 캔 커피의 경우에는 원액을 1퍼센트만 넣고 커피향을 이용해 감히 커피라는 이름을 도용하지요. 그것도 눈속임하느라 ‘1.00%’라 적어 놓습니다. 요즘은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갖추신 분들이 많아졌고, 교회에서 커피 교실을 운영하는 곳도 많습니다. 커피 가격이 로스팅한 것과 분쇄한 것의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로스팅한 원두를 사다가 직접 분쇄해서 마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는 아예 원두를 사다가 로스팅해서 드시는 고수들도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초 향기가 많았다면 이제는 커피향이 많아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일에 청년이 먼저 와서 커피를 내려놓고 있기에 커피향이 진하게 납니다. 커피는 그 종류도 굉장히 많습니다. 이름조차 외우기 힘들지요. 커피 원액을 에스프레소라고 합니다.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물을 부으면 아메리카노가 되고, 우유를 넣으면 라떼, 우유 거품을 많이 넣으면 카푸치노, 우유와 초코 시럽을 넣은 것을 모카라고 하구요, 우유와 카라멜 시럽을 넣으면 카라멜 라떼나 카라멜 마끼야또가 됩니다. 에스프레소에 아이스크림을 넣은 것을 아포카토라고 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커피입니다. 그 밖에 우유와 커피의 혼합비율로 도피야나 콘파냐 등이 있지만 별로 대중적이지는 않습니다. 카페 로얄, 아이리시 커피, 카페 깔루아, 파리제 등은 커피에 술을 넣어서 만든 것들입니다. 커피를 찬물로 오랫동안 내린 커피를 더치커피라고 합니다. 카페인이 비교적 적다고도 하구요. 그 맛이나 향이 진해서 ‘커피의 와인’ 혹은 ‘커피의 눈물’로 불립니다. 일반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커피 중 제일 비싸기도 합니다. 더치커피에 사이다를 부어 마시는 것을 더치소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한 번 마셔보고 다시는 안 마시는 커피입니다. 그러나 더러 더치소다를 즐기시는 목사님들이 계신 듯합니다. 커피가 맛과 향으로만 즐기던 시대에서 이제는 눈으로 즐기는 시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커피아트라고도 불리는 라떼아트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라떼의 우유 거품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나뭇잎이나 하트 같은 간단한 것에서, 곰돌이 푸우나 고양이 그림 같은 고난이도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달인들은 입체 캐릭터도 그려내고 심지어 커피 주문한 사람의 초상화까지 그리는 사람이 있다니 가히 예술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커피가 아무리 종류가 다양하고, 멋지고 예쁜 작품까지 만들 수 있다고 해도, 저는 아메리카노가 맛있는 집이 좋습니다. 좋은 원두를 쓰고, 원두에 맞게 섬세하게 로스팅한 다음, 신선하게 내린 질 좋은 커피를 제일 좋아하지요. 이런 기본을 무시한 채, 달달한 맛이나 예쁜 그림으로 내놓는 커피는 금방 질려 버립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 손재주가 좋은 바리스타가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들을 주변에서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럴 바에는 손재주 있는 분들보다 투박하고 느려도 기본에 충실한 바리스타가 더 좋습니다.커피처럼 설교에서도 기본에 충실하시고, 손재주도 뛰어나신 설교가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 복음적이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참 재밌습니다. 하지만 많은 목사님의 설교는 복음적이다 싶으면 졸립고, 재밌다 싶으면 남는 게 없을 때가 많지요. 설교는 이 둘 사이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해 보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설교의 내용을 이루는 신학을 배웁니다. 하지만 졸업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니, 세미나 같은 곳에서 내용보다 스킬을 더 많이 배우게 됩니다.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에서, 다양한 설교의 형태, 효과적인 언어 전달법, 미디어 사용법 등 다양한 방법론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정작 설교의 내용은 세미나에서 나눠 주거나, 다른 목사님들의 것을 표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설교의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전한다 해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내용보다 전달력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이 졸아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졸지 않고 들을 수 있도록 유머나 예화도 자극적인 것을 사용하고, 영상도 틀고, 연극도 보여주고, 원맨쇼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 현실상 목사님들이 설교 준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시대라 목회 말고도 다른 일을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만 전념한다고 해도 일주일에 8번에서 12번 정도 설교해야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전도사님 한 분 없이 혼자서 교회 일을 다 꾸려가야 할 경우, 설교를 위해 책 한 권 읽어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님들이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시간을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데, 오히려 영상을 편집하고, 미디어를 만들고, 유머나 예화를 찾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좋은 예화를 만나면 예화를 살리기 위해 설교 본문을 바꿔 버리기까지 합니다. 바리스타라 해도 좋은 원두를 볼 줄도 모르고, 로스팅을 전혀 못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저 로스팅된 원두를 사다가 갈아서 우유 넣고, 카라멜 시럽 넣고, 예쁘게 그림이나 그려내는 바리스타가 더 많지요. 바리스타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성경을 제대로 연구할 줄 모르고 묵상하는 힘도 없이, 그저 다른 사람의 설교를 가져다가 예쁘게 흉내만 낸다면 사람들의 귀는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힘을 잃게 되고 맙니다. 재밌고 좋은 설교를 들을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재밌는 설교보다는 좋은 설교가 듣고 싶습니다. 설교를 듣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게 지나가는 것보다, 설교자가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하고 묵상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설교가 더 좋아진 것입니다. 손재주를 가르쳐 주는 세미나보다 좋은 원두를 고를 줄 알고, 그에 걸맞게 로스팅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세미나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자의 고뇌가 설교의 형식보다 내용에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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