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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 신학...
by 고상섭
2023-12-13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현재까지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 종교적 분쟁의 한가운데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고통의 현장을 보고 있다.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한 손에 성경을, 또 한 손에 신문을 들라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이 문제를 역사적인 시선과 성경적, 신학적 시선 모두를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먼저 역사적인 시선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신학적 시선으로 이 전쟁을 살펴보려고 한다. 기독교는 이스라엘을 지지해야 하는가?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고 교회 소그룹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중동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성도 소수를 제외하고, 성도의 대다수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광화문 집회를 할 때도 그리스도인들이 동원되는 집회에서 특이하게도 미국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동시에 등장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고, 북한 인권 통일문제를 위한 집회에서도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기도 했다.왜 유독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일까? 그 뿌리에는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와 이스라엘 간에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을 기독교가 지지하는 이유는 종말론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로 비롯된 연대감 때문이며, 이런 배경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현재 이스라엘과 연계하여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건국을 성경 예언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종말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첫 번째 오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이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과 민족,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주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다. 창세기 12:3은 그 약속의 땅이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땅의 모든 족속’ 곧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모든 이방인이 너로 (아브라함)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갈 3:8; 3:14)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대주의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된 것이 구약 예언 가운데 일부가 성취된 것이며, 장차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서전을 건축할 것이고, 마지막 때 유대인들의 집단 회심을 통해 복음이 전 세계를 돌아 다시 예루살렘에 올 때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때 한국 교회를 어지럽혔던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이스라엘에서 복음이 시작되었는데, 복음의 서진을 통해 유럽이 변화되었고, 아메리카로 건너가 부흥을 이루었고, 다시 아시아로 와서 한국을 변화시켜 중국과 북한의 복음으로 변화되고 이슬람을 거쳐 결국 다시 예루살렘으로 지구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선교학적으로 보면 복음은 서쪽으로만 전진한 서진의 역사가 아니라, 전방위로 퍼진 역사이다. 두 번째 오해: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이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은 온 이방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려는 먼저 된 선택일 뿐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신들만 특별한 존재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졌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잘못된 선민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6-7).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방 교회인 갈라디아 교인들도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한다. 계속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고 말한 뒤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라고 선포한다. 구약의 혈통적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고 있다. 또 바울은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하갈과 사라를 언급한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이다.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라고 부르고, 이삭을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라고 말한다(갈 4:28-29). 창세기에서 어린 이삭을 이스마엘이 괴롭힌 사건을 통해 바울이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박해하고 있고,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다고 표현한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자’ 혈통적 이스라엘은 이스마엘을 상징하고,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이삭 즉 믿음으로 구원받은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삭은 혈통적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 즉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의 상징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경은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선택했지만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플랜 B를 계획해서 이방인을 구원하고 그 구원을 통해 결국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창세기의 이삭이 태어날 때부터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곧 ‘성령으로 태어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한다. 세 번째 오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종말 로마서 11:25-26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고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을 혈통적 이스라엘로 해석하게 되면, 복음의 서진이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예수님이 재림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는 의미는 이방인 전체가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를 말한다. 그다음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차기까지 유대인들의 남은 구원받는 사람들을 계속 모을 것이며 이렇게 해서 ‘온 이스라엘’ 곧 구원받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총칭하는 모든 언약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 일부 번역이 로마서 11:26의 헬라어 ‘후토스’를 ‘그 후에’라고 번역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구원받고 그다음에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시간 순서처럼 보이지만, ‘후토스’는 ‘그 후에’가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in this way)로 해석해야 하는 단어이다. 현재 개역개정은 ‘그리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이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종말론에 대한 다양한 오해들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서는 특히 로마서의 ‘온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단어만 떼어서 ‘온 이스라엘’이 혈통적 이스라엘이며 현재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구원받는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가 많은 해석이며, 문맥을 통해서 보면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중 구원받는 택자를 말하는 것이나, 유대인과 이방인을 총칭하는 모든 택자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 지금까지 이스라엘-하마스의 전쟁을 어느 한쪽 편을 들면서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말했다. 현재 이스라엘 땅이 구약의 약속의 땅이거나, 현재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우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어느 한 나라를 지지함으로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동지방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잘못된 유대 민족주의를 버리고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도 더 이상의 무력 충돌과 전쟁이 아닌 타협점을 찾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현재도 계속되는 전쟁 속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이 전쟁이 속히 끝이 나기를 그리고 인간의 지혜로 풀 수 없을 것 같은 이 문제들 위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시편으로 자녀에게 감정의 소중함을 가르치라
by Courtney Reissig
2023-12-12
벤 사스는 The Vanishing American Adult(사라지고 있는 미국 어른)에서 회복력이 뛰어난 아이들로 키우는 사례를 제시한다. 그는 인내, 노력, 고난을 배우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이야기한다. 이 책은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는 내내 장기간 관찰한 연장된 사춘기에 대한 대응과 함께 미국에 필요한 다음 세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이들이 회복력을 키우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스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회복력을 목표로 하는 순간,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탐색하도록 어떻게 도울까에 관한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되며, 거기에는 우리가 쉽게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하나는 어려운 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예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너진 이 세상 때문에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들 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려고 한다. 반면에, 자녀가 부서진 내면을 가지고 살기를 원치 않는 부모는 무심코 자녀들이 감정을 꾹꾹 채우게 만든다. 그러나 정서적 회복력을 가진 자녀를 키우는 보다 나은 방법은 성경에 있다. 우리는 좋은 때나 나쁜 때나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치는 데 시편을 활용할 수 있다.감정은 좋은 것이다하나님은 감정을 지닌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고통과 슬픔, 설렘을 느낀다. 이 모든 감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말해 준다. 때때로 감정은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큰 개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기도 한다.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사랑처럼, 감정이 소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불안감이나 압도감과 같은 감정은 우리의 한계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자녀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좋은 것임을 인식하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다.“슬프다”라고 말하는 자녀에게 그 즉시 등을 두드리며 입에 발린 말로 격려하지 말고, 시편을 가르치라. 너와 똑같이 슬퍼했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슬픔에 신실하게 귀를 기울여 주셨다는 사실을 시편으로 가르치라. 시편에는 구약성서의 서사와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 많으며, 따라서 성경 속 인물들의 영혼을 엿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우리는 배반을 말하는 다윗을 시편에서 만난다(55편). 짧은 인생의 허무함을 알려 주는 모세의 글도 있다(90편). 그리고 의심과 환멸을 겪는 에스라 사람 헤만을 본다(88편). 시편은 한 마디로 구약의 신자들이 자신의 어려움, 감정, 시련, 의심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기도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보여 주는 모델로서 시편 앞으로 자녀를 데려갈 수 있다.감정이 반드시 죄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탐닉해서도 안 된다. 때때로 감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친구의 새 장난감이나 운동 경기의 성공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라.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죄(탐심)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 주라. 질투심을 결코 슬프거나 행복한 감정과 똑같이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시편 4:4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시편 시인은 우리에게 아예 화를 내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분노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죄에 굴복하지 않으며 화를 내는 방법, 곧 온전히 느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있다. 시편 시인은 감정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녀가 분노든 또는 비슷한 과도한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이 자신을 죄로 이끄는지 물어 보고, 그렇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치라. 시편 51편은 회개의 모델을 제시한다. 감정은 나눌 수 있다시편 4:4이 분노를 마음에 담더라도 잠잠하라고 말하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주님께 마음을 쏟아붓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시편이 고난 중에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개인 기도도 있지만, 적지 않은 내용이 집단이 부르짖는 기도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울부짖으며 회중으로서 겪는 고통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제심을 발휘하는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은 얼마든지 성경적이다.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칠 때, 그들의 감정을 듣고 싶어 하며 또 믿을 수 있는 친구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모든 감정을 주님 앞으로 가져가야 한다. 감정을 항상 믿어서는 안 된다 시편 73편에서 우리는 악인의 형통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을 받는 시인을 만난다. 그는 시기와 탐욕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렬한 느낌이다(22절). 그는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다(2절). 내내 신실하게 행하던 그가 거의 실족할 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주님께 가져갔을 때 그의 마음과 관점이 바뀌는 것을 본다. 자신의 감정을 믿고 싶은 유혹을 받는 자녀에게 시편 73편 같은 시편을 읽게 하라. 자녀가 이 부서진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가르침과 동시에 오로지 감정만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개념에 당당히 맞서도록 가르치라.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자신만의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내 솔직한 기분이었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게 마음이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예. 17:9-10). 감정을 믿는 순간 우리는 감정에 속아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이다. 진리의 표준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라. 우리의 모든 감정까지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감정이 우리를 배신할 때가 있다. 행여라도 감정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우리는 수시로 감정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를 배반한다는 말이다. 자녀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 주라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는 자녀의 눈에 마치 감정만이 유일한 실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감정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그들을 이끌 수는 없다. 그들이 감정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장점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 감정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타락한 감정을 지닌 존재로 존재하는 현실까지 모두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삶에서 감정의 위치를 인정하고, 더불어서 죄에 대한 충동과 어떻게 싸우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든지 자녀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타당성을 분별할 자격을 가진다. 우리 문화는 감정에 대해 두 가지 옵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감정을 항상 신뢰하거나, 아니면 아예 감정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짜 회복력을 가진 아이들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건전한 방법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시편을 지침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더 나은 방법을 보여 주라. 그것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올바르게 느끼도록 가르치기 위해 성경 전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이다. 원제: Use the Psalms to Teach Kids About Feel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손편지의 온기
by 양혜원
2023-12-11
예쁜 카드나 엽서를 보면 사는 것도 좋아하지만, 거기에 몇 자를 적어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 간단한 안부든, 감사의 표현이든, 생일 축하든,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하든, 비록 글씨는 잘 못 쓰지만, 그래도 직접 손으로 써서 봉투에 담아 어울리는 스티커 하나 장식으로 붙이고, 주소를 적어 우체국의 손을 거쳐 상대에게 보내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나면 제법 마음이 훈훈해진다. 지난가을에는 처음으로 일본어로 그런 감사 엽서를 교토 어느 카페의 여사장에게 적어 보냈다. 교토의 가을을 노래하는 친구의 꼬임에 짬을 내어 조금 긴 주말의 형식으로 짧게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그때 교토의 어느 절 근처에서 다리를 쉬기 위해 들어간 카페의 사장은 마실 것도 몇 개 없는 메뉴가 전혀 허전하지 않게, 카페라테의 거품을 직접 내와 풍성하게 얹어 주고 교토의 다과라며 서비스도 주고, 지도를 펼쳐 보이며 근처에 가볼 만한 곳들을 소개해 주었다. 볼펜으로 경로를 표시해 주면서, 다리는 튼튼하냐, 튼튼하다면 여기까지 한 50분 걷는데 가 볼 만하다는 둥, 상대의 연령대를 감안하는 듯한 세심한 안내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별다른 간섭없이 편하게 커피를 마시고 경치를 감상하다 가게 해 주었다. 적절하게 다가가고 적절하게 물러나는 그 주인의 손님 접대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 여운 또한 길었다. 받아온 지도에 마침 그 카페의 이름과 주소가 도장으로 찍혀 있기에, 나중에 기억할 요량으로 보통은 현지 여행이 끝나면 버리고 오는 지도를 한국까지 챙겨서 왔는데, 아, 주소가 있으니, 카드도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마침 교토에서 산 가을에 어울리는 엽서가 있었고, 새로 산 잉크 펜도 있었다. 일본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말은 짧은 일어로 해도, 편지나 카드를 보낼 때는 영어 아니면 한국어로 썼었기에, 일본어 편지는 처음이었는데, 볼펜과는 다르게 새로 산 잉크 펜으로 일본어를 쓰니 글씨가 제법 그럴듯하게 써졌다. 그때 참 고마웠다, 당신이 안내해 준 곳도 가 보았는데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거품 폭신한 카페라테 마시러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는, 봉투를 봉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우체국에서 떠나보냈다. 그 여사장이 이 엽서를 제대로 받았을지 어땠을지, 받고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환대에 이렇게 반응함으로써 내 나름으로는 한편의 마음이 아니라 주고받는 마음이 되고 싶었다. 카드를 쓰는 즐거움은 일찍이 십대 시절에 터득했다. 크리스마스를 유난히 좋아해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누구에게 카드를 보낼 것인지 리스트를 만들고 선물은 누구에게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십대 초반을 영국에서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장식부터 선물 아이템까지 일찍이 가게와 거리를 장식하는 통에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쉬웠지만, 우편물이 몰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에 카드가 한국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의 크리스마스는 일찍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안에 우편물이 도착하려면 언제까지 발송해야 하는지 날짜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카드를 부치기 위해서 일찍부터 리스트를 만들고 카드를 준비하고 카드 메시지를 썼다. 나의 카드 쓰기는 크리스마스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생일에는 생일 카드를 썼고, 그 외에 편지도 수시로 썼다. 사실 핸드폰도 없고, 전화기도 한 가정이 하나를 쓰던 시절을 살았던 우리 세대에게 편지로 그간의 일을 전하고 상대에게 하고픈 말을 하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학보를 보내는 것으로 안부를 전하는 풍습도 있었다. 중학교 이후 소식이 끊긴 친구로부터 어느 날 대학교 과사무실로 그가 보내온 학보를 받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학보를 감싼 하얀 띠지는 편지지와 봉투의 역할을 다하여 겉에는 주소가 적히고 뜯어서 펼치면 안에 편지글이 있었다. 대개는 간단한 인사말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런 우편물을 받으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었다는 기분이 들어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할 수 있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도 더는 편지도 카드도 쓰지 않은 시절이 오고 나서도 나는 제법 꾸준히 카드도 쓰고 편지도 썼다. 물론 그 대상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문자와 이메일이 주된 소통 수단이 되고 나서는 손으로 쓴 카드나 편지는 아무래도 좀 특별한 계기나 대상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40대로 들어서면서는 그나마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미리 챙겨 해외로 대량 발송하는 일도 없어졌다.그러다가 카드를 보낼 사람의 리스트를 다시 짜게 된 것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본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낼 때였다. 카드라기보다는 사실 연하장이었는데, 일본의 큰 명절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신년이었고, 그때 일본 사람들은 카드가 아닌 엽서 형태의 연하장을 인사로 주고받았다. 일본에서 산 지 1년 정도 지나면서 나에게도 친구와 지인들이 생겼기에 그곳에서 생긴 인연들을 챙기면서 나는 연하장을 준비해 보냈고, 그들도 내게 연하장을 보내주었다. 비단 연하장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내가 다니는 길목에 우체국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일본 문화 전반에 아직도 편지 쓰는 관습이 남아 어딜 가나 쉽게 이쁜 편지지와 엽서 등을 접할 수 있어서 일본 사는 동안 한동안 잊었던 편지 보내는 습관을 다시 붙여 부지런히 이 나라 저 나라의 지인에게 우편물을 보냈다. 이제 긴 편지는 쓰기 어렵게 되었어도, 이쁜 카드나 엽서에 제법 빽빽이 적어 보냈다. 이 재미가 쏠쏠했는데, 귀국하자마자 맞닥뜨린 코로나 기간 아주 비싼 특급 우편 외에 일반 우편물을 해외로 보낼 수 없다는 게 내게는 매우 답답하고 힘든 일이었다.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는 해외로 비싼 특급 아니면 일반 우편은 아예 부쳐주지를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우편물이 왔다. 연하장을 보내준 은퇴하신 여교수님도 있었고, 엽서와 기념품을 정기적으로 챙겨서 보내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받기만 하고 보내지를 못해, 문자로, 이메일로 고맙다, 아직 한국에서는 우편물을 부칠 수가 없어 안타깝다 메시지를 보내며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문자도 보낼 수 있고, 이메일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줌으로 얼굴도 볼 수 있었지만,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해야 했던 시절에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좋은 기분이 며칠간 이어질 만큼 훈훈한 일이었다. 편지 쓰기를 자제해야 했던 그 시절에 딱 한 번 특급 우편을 보낸 일이 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내가 유일하게 반송을 받은 편지가 되었다. 수신인은 작고한 유진 피터슨의 아내 잰 피터슨이었다. 2018년 10월, 일본에서 유진 피터슨이 작고한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의 책을 열두 권 번역했고, 2012년에 몬태나에 있는 그의 집에도 방문하여 하룻밤을 머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진과는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사적인 대화는 잰과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둘째 아들이 막 이혼의 아픔을 지나고 새로운 출발을 했을 무렵이라 그런지 나에게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도 물었고, 나의 스스럼 없음이 편했던지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도 해 주었다. 혹시 잰은 글을 쓰지 않냐고 물었더니, 꾸준히 써온 일기가 있다며 주변에서 출판하라는 말도 한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 또한 꼭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을 떠나기 마지막까지 유진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나는 늘 유진과 잰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와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된 후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처음으로 답장이 없었고,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당장 잰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아,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를 기억하는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몇만 원짜리 특급 우편으로 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남편이 작고했으니, 여전히 몬태나의 그 집에 그가 살고 있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 집의 내력을 생각할 때 어떻게든 편지가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 편지가 반송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그래 내가 너무 늦었지,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내 마음을 거절당한 것 같아 조금 슬프기도 했다. 내가 그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내가 만났을 때의 잰은 유진과 달리 여전히 힘이 있어 보였기에 나는 그가 이디스 쉐퍼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도 그 후로 오래 살면서 책도 쓰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가고 불과 8개월 만에 그도 갔다는 것이다. 수취인불명이라더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정말로 수취인불명인 채로 발신인에게로 돌아와 버렸다. 나의 편지쓰기가 조금 이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는 사실 매우 친숙한 매체이다. 알다시피 신약 성경의 태반이 편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편지처럼 개인 대 개인 사이의 글은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를 위해 쓰는 소설과 같은 장르의 글과 달리, 편지는 수신인이 있고, 그 수신인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다. 하지만 분명한 수신인이 있다고 해서 의도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 또한 편지의 특징이다. 편지는 우편 사고로, 혹은 나의 경우처럼 상대가 사망해서,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할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된다고 해도 내가 전하고자 한 마음 그대로 수신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사실은 없는 게 편지이다. 자기 나름으로는 정성스레 쓴 편지가 상대의 손에서 찢겨버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만난 적이 없는 로마의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가 제대로 그들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었을까. 다른 서신서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의 경우도, 감정적으로 제법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오네시모와 빌레몬과 바울의 관계에서 과연 이 편지는 그 필자가 의도한 대로 전달자와 수신자 사이를 화해시킬 것인지, 그것은 제법 권위 있게 비치는 바울조차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선의처럼 빌레몬의 선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그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달력이 12월을 넘기니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 이다. 그와 동시에 몇 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직장을 옮기면서 7월부터 유례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늦기 전에 짬을 내어 새로 산 잉크 펜을 들고 ○○에게, 혹은 ○○께와 함께 시작하는 카드 편지를 몇 장을 써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서랍에는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카드 편지가 봉해진 그대로 남아 있다. 제대로 도착할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손을 떠난 보낸 편지의 운명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온기를 전하는 한쪽 편의 일은 하고 싶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선의(good will)가 당신과 함께한다는 좋은 소식(good tidings)을 전하는 시즌으로 오랫동안 교회는 지켜 왔다. 이 소식을 받는 사람의 반응과 상관 없이 전하는 사명을 받은 것도 교회이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선의가 함께하시기를, 그리고 그 선의의 온기도 계속 전해 나가시길 빈다.
C. S. 루이스의 마지막 날들
by Trevin Wax
2023-12-09
C. S. 루이스는 예순다섯 생일을 며칠 앞둔 1963년 11월 22일에 사망했다.비교적 일찍 죽은 그의 죽음을 비극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십 년을 더 살았던 그의 형 워렌(와니)를 생각하면 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고 있음을 잘 알았던 루이스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비극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았다. 그가 보낸 마지막 몇 달은 영원한 행복을 기대하며 죽음을 맞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 쇠약평생 건강 문제로 고통한 루이스는 1961년 6월 신장염을 앓았고, 이로 인해 패혈증이 발생해서 그해 케임브리지 가을 학기를 쉬었다. 1962년 봄에 다시 학교로 복귀했지만 건강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는 학생 중 한 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심장과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전까지는 전립선 수술이 불가능하고, 전립선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심장과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병원과 나는 이상한 “악순환”에 빠진 상태이다. 전기 작가 A. N. 윌슨은 루이스의 친구이자 의사인 로버트 하바드가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며, 루이스의 이른 죽음의 탓을 그에게 돌렸다. 그러나 다른 전기 작가들은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1950년대 내내 하바드가 권장했던 음식 제한(루이스는 한번도 장기간 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을 제외하고, 당시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루이스는 홍차를 과도하게 마셨다. 당시는 카페인 섭취와 고혈압 사이의 상관관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때였다. 오늘날 일반적인 전립선 비대 치료법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개발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일부 보고서를 통해서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은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3년 여름루이스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다가오는 죽음을 볼 만큼 현명하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 현명하지는 않은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이다.” 1963년 여름, 루이스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는 6월 17일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의지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메리 윌리스에게 썼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죽을 때 우리는 후회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가 뒤에 놓고 떠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편지에 “끝나가는 여행에 피곤을 느끼는 여행자”라고 서명했다. 그달 말에 루이스는 메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당신을 이 지구에서 인내심을 갖고 싹을 틔우길 기다리는 씨앗과 같다고 생각해 봐. 정원사가 정한 가장 좋은 타이밍에, 저기 진짜 세상에서, 진짜 깨어나서 꽃을 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야. 그곳에서 돌이켜보면 우리가 사는 여기 생활은 아마도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고 반쯤 조는 상태로 보일 거야.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꿈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거지. 그런데 닭까마귀가 오고 있어. 그날은 이제 내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어. 루이스의 건강은 여름 동안 더 악화되었다. 그의 신장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수혈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투석 치료가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피로와 집중력 저하에 놀란 그는 7월 15일 다시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바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거의 죽기 직전이라는 판단에, 그는 죽기 전 신자에게 행하는 종부성사를 받았다.하지만 루이스는 그날 오후 2시에 깨어났고,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때때로 오락가락했지만, 그는 천천히 회복했다. 무어 부인의 딸이자 그의 친구 패디의 여동생인 모린 블레이크가 병원에 있는 루이스를 방문했다. 루이스는 그녀를 어릴 때부터 잘 알았고, 그녀는 한동안 루이스의 집(Kilns)에서 같이 살았다. 그런데 모린이 스코틀랜드 Caithness에 있는 Hempriggs의 Baron Dunbar의 George Cospatrick Duff-Sutherland-Dunbar 경의 재산을 상속받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루이스는 모린을 알아보지 못했다. 조용히 병실로 들어온 모린이 “잭, 나 모린이에요”라고 말하자, 루이스는 “아니지요. Hempriggs가의 Lady Dunbar가 맞지요”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란 모린이 말했다. “아니, 잭,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해요?”그러나 루이스가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기억하다니? 어떻게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다시 집으로퇴원한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왔다. 계단 사용이 금지된 그는 침실과 서재로부터 차단되었다. 거실에 침대가 설치되었고, 루이스가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남자 간호사가 육 주 동안 집에서 같이 살았다. 다시 가르치는 건 루이스에게 벅찬 일이었다. 결국 그는 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에 사직서를 냈다. 평생 친구인 아서 그리브즈에게 9월에 쓴 편지에서 그는 형의 부재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했다. “형은 나를 완전히 버렸어. 아마도 어디선가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을 “병자”라고 표현했지만, 동시에 “아주 편안하고 쾌활하다”라고도 썼다.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은 외침으로 끝난다. “아서, 오 내 친구야,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겠구나!”여름이 가을로 바뀌면서 루이스는 이런저런 편지에서 자신을 “사화산이기는 하지만 나름 여전히 활발한 상태”라고 묘사하곤 했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다가 문턱을 넘지 않고 되돌아온 그였다. 그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래봐야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슬픔을 느꼈다. 그는 그 경험을 언제가 자신이 두 번 죽어야 했던 원형 순교자 (protomartyr)라고 묘사했던 나사로의 경험과 연결 지었다. 당시 루이스의 서신을 살펴보면, 그는 끊임없이 “명랑하고” “자족한” 상태를 선언하고 있지만, 동시에 나빠진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루이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의 세력을 상상했다. 한 악마가 다른 악마에게 이렇게 썼다.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훈련한 대로 거짓말하는 의사, 거짓말하는 간호사, 거짓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모든 인간이 값비싼 요양원에서 죽어간다면,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약속하고, 질병으로 인해 모든 죄(indulgence)가 다 사해진다는 믿음을 주입하고, 거기에 행여라도 사제가 진실을 말해서 환자가 자기의 진짜 상태를 알아채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의 일꾼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만 해준다면, 우리 일이 얼마나 편해질까?” 그러나 루이스에게는 그런 얄팍한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나약함과 죽음을 직면했다.와니는 10월에 돌아왔고, 동생의 삶에 남은 마지막 몇 주를 책임졌다. 종종 친구들이 방문했고, 또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달 어느 시원하고 화창한 날, 친구 조지 세이어가 가을빛으로 물든 너도밤나무를 보여 주겠다며, 루이스를 런던 로드 자락에 있는 비콘 힐로 데리고 갔다. 루이스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올해에 누릴 마지막 정취 속에 빠져든(soak) 거 같아.” ‘soak’는 시골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가며 창조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는 기쁨을 표현할 때 그가 쓰는 단어였다.대기실로서의 집지상 생활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루이스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고(“나는 정원 산책보다 더 멀리 나가는 모험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라고 썼다), 편지에 답장을 보내거나 개인 도서관을 다시 방문했다. 10월 29일에는 “내가 과연 다시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썼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조금 전 일리아드를 다시 읽었는데, 이번만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만끽하고 있다.” 다음 주에 그는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과 테니슨의 ‘In Memoriam’을 다시 읽었다.집은 루이스가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며 쉼을 누리는 조용한 피난처이자 대기실이 되었다. 10월 31일에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편지를 썼는데, 동정녀 탄생,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 속죄 이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질문에 답했다.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이르는 몇 주 동안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나중에 팀 켈러가 아내가 된) 젊은 캐씨 크리스티에게는 일주일에 두 번씩 편지를 보냈다. 마지막 주루이스의 생애 마지막 주는 조용했다. 11월 15일에는 Lamb and Flag(Eagle and Child 길 건너편에 있는 펍)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Roger Lancelyn Green은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루이스의 집을 찾았다. 루이스는 Saturday Evening Post에 실린 그의 마지막 에세이가 될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 원고를 수정하느라 바빴다. 이 글은 무엇보다 ‘성적인 행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사회를 향한 놀랍도록 예지력 있는 분석이다. 그 주 후반에 방문한 J.R.R. 톨킨과 그의 아들 존은 루이스의 건강 이야기 대신 토마스 말로리(Thomas Malory)가 쓴 ‘아서왕의 죽음’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11월 18일 마지막으로 Lamb and Flag에 간 루이스는 콜린 하디를 만났다. 대부분의 시간을 루이스는 집에 머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형과의 시간을 즐겼다. 와니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바퀴가 완전히 한 바퀴 돌아서 원을 이루었다.” 어머니를 잃은 고통스러운 슬픔을 겪으며 형제들끼리 서로 의지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한 번 더 우리는 작은 방에 함께 있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너무도 뻔한 이야기는 우리의 대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대신 알 수 없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새 학기가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잭은 용감하고 침착하게 새로운 시작을 직면했다. “형, 나는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했고, 이제는 떠날 준비가 되었어.” 어느 날 저녁 동생이 내게 말했다.11월 21일, 그는 한 어린이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편지를 썼다. 그 아이의 편지를 “놀랍게도 좋은 편지”라고 칭찬함과 동시에 나니아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데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더불어서 재판에서 발견한 오타를 알려주겠다는 데에도 고맙다고 썼다. 11월 22일1963년 11월 22일 금요일은 정해진 루틴 그대로 흘러갔다. 루이스와 형은 아침 식사를 즐겼고, 후원자들에게 몇 통의 편지를 보낸 다음에 매일 나오는 십자말 풀이를 했다.점심 식사 후 루이스가 의자에서 잠이 들었고, 와니는 침대가 더 편할 거라고 말했다. 거실 건너편 “음악실”은 루이스가 더 이상 위층에 올라갈 수 없게 되자 침실로 바뀌었다. 오후 4시, 루이스에게 차를 가져다준 와니의 눈에 루이스는 졸려보였지만, 한편 편안해 보였다. 5시 30분에 와니는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발견한 건 침대 옆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루이스였다. “약 3-4분 후에 루이스가 숨을 거두었다”라고 와니는 썼다.그날 오후 루이스의 사망 소식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 즉 텍사스 달라스에서 발생한 존 F. 케네디의 암살로 인해 가려졌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도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이 이상한 세 죽음의 합류는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가 쓴, 세 가지 서로 다른 세계관을 대변하는 세 남자가 천국 외곽에서 나누는 가상의 대화를 담은 C. S. 루이스 천국에 가다의 배경이 되었다.죽음을 앞둔 루이스가 남긴 유산1963년 11월 26일, 루이스의 장례식이 그가 가장 자주 참석했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교회 마당에 묻혔다. 십 년 후 와니는 동생 옆에 함께 묻혔다.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이야기꾼 루이스의 마지막 몇 달은 그가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소망, 즉 하나님의 품에 안긴 영생의 약속에 대한 가슴 아픈 그림을 보여 준다. 마치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쪽배를 타고 파도 위로 향하는 리피칩이 그랬듯이, 루이스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 때문에 슬퍼하면서.” 그러는 동시에 “행복에 떨면서.” 그의 시와 산문에 생기를 불어넣은, 위로할 수 없는 그리움의 찌름과 같은 기쁨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조용하게 보낸 생애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는 육체의 고통을 인내와 뛰어난 유머로 이겨냈다. 그는 이 세상이 단지 더 큰 이야기로 이어지는 서막에 불과하며 신성한 사랑의 깊은 마법으로 가득 찬 새롭고 경이로운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원제: The Last Days of C. S. Lew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들림의 시간
by 이춘성
2023-12-08
“지름신이 강림하셨다.” 이 말은 홈쇼핑 채널이 새로운 쇼핑 트렌드를 만들었던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유행어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문장을 충동구매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에서 물건을 홍보하는 쇼호스트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옷이나 음식을 선전하는 모델의 그럴듯한 외모를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들고 버튼을 누르는 모습이 마치 신들림 현상과 비슷하다는 뜻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러한 ‘신들림’ 표현은 다양한 영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의 영역에서 ‘신들림’ 표현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의미 전환에 성공해서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지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분이 오셨다”와 같은 신들림의 표현은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수식하는 관용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마니아라는 표현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러한 현상을 ‘신들림의 세속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세속화란 과거 신성시하였던 표현과 현상, 공간을 인간의 언어와 현상, 공간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세속화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작년에 유행했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추앙’ ‘은혜’ ‘구원’ 등의 종교적인 용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낯선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풍기면서 히트 친 이유는 배우들의 좋은 연기도 있었겠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이상한 언어들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인물들이 일상어가 아닌 종교적인 신성한 언어들을 일상어로 세속화하면서 일상의 영역을 일종의 신성한 영역으로 만드는 묘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경험은 일상의 지루함, 익숙함을 신선함, 새로움, 설렘 등의 신선한 감정으로 탈바꿈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신성화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모든 것이 신성하면, 결국 모든 것이 세속적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정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Human Future에서 범신론이 대중적인 인도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인도에서 ‘소’는 신성한 존재이지요. 그러나 인도에서 가뭄과 기근이 들면 제일 먼저 잡아먹는 동물이 바로 ‘소’라는 것입니다. 후쿠야마는 이것이 모든 것의 신성화는 결국 모든 것의 세속화라는 증거라고 주장하지요. 그런 세상은 인간이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할 마지노선의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속화는 신성한 공간과 언어, 현상만이 아닌 신성한 규범을 상대화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림’의 언어의 대중화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세속화 현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또한 ‘신들림’의 세속화와 대중화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이 현상의 시작점을 보면, 탁월한 쇼호스트들과 유명인들이 인터넷과 홈쇼핑 등을 통해 전국 단위로 물건을 팔게 된 2000년대 초반 이후에 극대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그보다 약 20년 정도 앞서 이러한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현상을 상품에 인격이 거주하는 현상, 달리 표현하자면 상품에 판매자나 생산자의 인격을 담아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 현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분석하였습니다.상품들이 자발적으로, 자생적으로 시장에 가기 위해 걸어가지는 않으므로, 그들의 “보호자들”과 “소유자들”이 이러한 사물들에 거주하는 척한다. 그들의 “의지”가 상품들에 “거주하기”(hausen) 시작한다. 여기서 ‘거주하다’와 ‘신들려 있다’ 사이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파악 불가능하다. 인격은 자신이 사물에 거주함으로써 생산한 객관적인 신들림의 효과 자체에 의해, 말하자면 그 자신이 신들리게 함으로써 인격화된다. 인격(사물의 보호자나 소유자)은 그가 자신의 말과 의지를 마치 거주자들처럼 사물 속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 속에서 생산하는 신들림에 의해, 역으로, 그리고 구성적으로 신들리게 된다. … 이러한 환영 산출적인 또는 몽환적인 과정에 대한 기술은 “종교적 세계”와의 유비 속에서 물신숭배에 대한 담론의 전제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306쪽)신들림이란 사실 서로 존재하는 영역이 다른, 전혀 다른 타자들이 하나로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합니다. 귀신, 혹은 신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면, 이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괴기스럽고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현상일 것입니다. 귀신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존재는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이나 매력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귀신 들린 영매나 무당을 찾아다니며 점을 치고 안정을 찾기도 하지요. 이렇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공포가 공존하는 현상이 신들림입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신들림이 일상화된 것이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 활동이라는 통찰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물건과 파는 사람의 인격을 동일시하고, 생산자와 물건을 동일시하는 신들림 표현을 통해 인간과 물건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물건화, 물건의 인격화 그것이 현대 신들림의 중심에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여 누군가의 탁월한 능력을 그의 인격과 동일시하며, 추앙하고 신앙처럼 떠받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추앙받는 존재의 능력이 바닥나면 동시에 그의 인격도 바닥으로 내팽개쳐집니다. 신의 몰락인 것입니다. 인간을 신격화하는 신들림의 표현은 인간을 측정 가능한 물질로 환원시켜 인간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이것이 앞에서 후쿠야마가 인도과 동양 종교의 범신론을 통해서 분석한 ‘소를 잡아 먹는 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의 세속화는 모든 것의 신성화이며, 달리 말해 모든 것의 신성화는 모든 것의 상대화를 의미합니다. 끝으로 인격과 물건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물질에 자기의 인격을 담는 것이 아니라 신(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때(벧후 1:4),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신성함을 세속화하여 모든 것을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성함을 더 신성하게하고 세속을 세속에 걸맞게 대접하는 것, 또한 인격이 물건이 되는 것에 저항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인간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증진할 수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문화 참여에 필요한 네 가지 ‘R’
by Trevin Wax
2023-12-07
Mere Orthodoxy에 실린 브래드 이스트(Brad East)의 에세이 “한 번 더, 교회와 문화”는 올해 나온 글 중에서 가장 통찰력이 번뜩인다. 이 글은 기독교왕국(Christendom, “사회, 문화, 법률, 예술, 가족, 정치 및 예배가 교회의 영향력으로 포화되고 교회의 권위에 의해 정의될 때 기독교 문명에 부여하는 이름”)의 흥망성쇠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그리고 1951년에 처음 출판된 리처드 니버의 고전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시 살펴본다. 그리스도와 문화니버는 그리스도인이 주변 문화와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기준을 개신교인에게 제시했다. • 문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 • 문화의 그리스도 • 문화 위의 그리스도 •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 • 문화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니버의 분류법에 대한 개요는 내가 쓴 요약 및 비평을 참조하라.)이스트는 미국 상황을 표준 규범으로 가정하는 한 교회와 관련해서 이런 식의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사고방식은 힘들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비판은 돈 카슨이 니버의 작업을 재검토한 지점과 일치한다. “모든 것에 다 들어맞는 하나의” 사고방식을 반대하는 카슨은 성경이 각기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요소를 옹호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사면초가에 시달리고 억압받는 북한의 신도들에게 “문화를 변혁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는가?”)신실한 존재? 이스트는 계속해서 교회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다른 유형을 찾아낸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To Change the World도 그중 하나다. 헌터는 (1)방어력(Defensive Against), (2)적실성(Relevance To), (3 순결성(Purity From)이라는 세 가지 용납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을 설명한 다음에 대안으로 (4)내부의 신실한 존재(Faithful Presence Within)라는 방식을 제시한다. 헌터는 신실한 존재가 대사명에 대한 순종일 뿐 아니라, 긍정과 대조를 모두 포함하여 문화에서 선하고 진실하며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우상 숭배적인 것은 무엇이든 전복시키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스트는 헌터의 작업을 인정하지만, 거기에는 네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1. 충분히 글로벌하지 않다. 미국이라는 맥락에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2. 충분히 역사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세속성 정착을 교회 역사에서 만나는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라고 가정한다. 3. 충분히 폭넓지 않다. 중상류층과 관련된 전문직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므로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적용을 회피한다. 4. 충분히 경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금지된 기관과 직업에 대한 경계선을 제대로 긋지 않으므로 예리한 모순이 요구되는 미묘한 삶의 영역을 놓치고 있다. 앞에 놓인 더 나은 길이스트는 우리가 니버와 헌터 및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하나의 “올바른” 유형, 자세 또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고집을 포기할 때만 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가 문화에 충실하게 참여하는 네 가지 주요 방식이 있다.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중복되고 본질적으로 서로 비경쟁적이다. 어떤 방식이 필요한가는 전적으로 콘텍스트와 콘텐츠에 달려있다. 교회가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같은 공동체에 있든, 다른 공동체에 있든, 더 큰 교회의 개별 구성원에 있든, 모두가 동시에 작동한다.”이스트의 작업이 가진 장점은 폭이다. 우리는 전근대와 포스트모던, 확립된 것과 해체된 것, 특권을 가진 것과 박해받는 것 등 가능한 모든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각각의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네 가지 방식을 네 개의 R로 요약한다. 1. Resistance(저항)“언제 어디서나 불의와 우상 숭배가 발견되는 곳에서 교회는 저항하도록 부름받았다. 교회가 목소리를 높일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적 명성이 있든 없든 그렇게 해야 한다. 교회는 현존하는 권력에 ‘반대’하거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 정권이 그리스도인에게 우호적일 때에도, 심지어 정권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할 때도, 저항이라는 과업은 필요하다. 저항은 다년생이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순전한 인내뿐이다. 때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2. Repentance(회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저지르는 죄와 범죄, 실패를 회개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즉, 교회가 보편적으로 저항해야 하는 불의와 우상숭배는 무엇보다도 교회 외부가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확실하게 발견된다. 심판은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에서 발견되는 부패와 사악함을 ‘거스르며’ 또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상태로 살라는 뜻이다. … 복음의 신뢰성이 교회의 실패 때문에 위협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리어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더 끔찍한 경우는 그 부패를 은폐하려는 태도로 인해서 복음의 신뢰성이 위협받는다.” 3. Reception(수용)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많은 축복을 받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창조한 세상은 선하다. 그리고 오로지 그분만이 모든 민족과 모든 문화의 주인이시다. … 간단히 말해, 세상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서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중요한 지식과 귀중한 유물로 가득하다. (물론 궁극적인 근원은 바울의 말 대로 그리스도이다.) 신자들은 결코 순진하거나 무비판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경우에도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전에 겸손히 손을 내밀어 받아들이는 것이다.”4. Reform(개혁)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말씀인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포괄적이다. 그것은 마음과 지성, 몸, 영혼에 다 전달된다. 말씀은 농민과 하인의 문제뿐 아니라 상인과 치안판사의 문제도 다룬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정의를, 민족들 가운데 정의를 명령한다. 거기에는 분리의 벽이 없다. 삶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곳에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복음은 한 마디로 개혁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한 관점에서 사물이 있는 방식 안에 새로운 조정을 생성한다. … 때와 장소가 적절할 때,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이뤄지는 복음 선포는 문화를 뼛골까지 잘라낸다. 그럴 때 문화는 결코 더 이상 동일할 수 없다. 심지어 그 후로도 문화는 절뚝거리며 걷는다.”이스트의 제안은 니버 및 헌터의 분류법을 단일 모델로 축소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강점을 취한다. 그는 문화적 조건이나 역사적 상황과 상관 없이 실행 가능한 한도 내에서 모든 적절한 방법을 다 고려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특히 오늘날 전 세계 교회에 적용이 가능한 방법을 찾도록 격려하고 또한 역사를 통틀어 교회가 했던 다양한 선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 이스트에게 감사한다. 그의 에세이 전체를 읽기 바란다. 시간이 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스트의 분석과 주장에 대한 나의 요약이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란다. 원제: The 4 Rs of Cultural Engage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by 서나영
2023-12-06
크리스마스는 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에게 가장 좋은 소식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그 장엄한 첫 문장을 시작하는 ‘감탄사’와도 같다. 대서사시 서막의 커튼이 올라가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작을 가장 아름답게 장식하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비록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복음의 소망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기뻐하며 이 축제에 집중한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크리스마스에 관한 추억과 이미지를 쉽게 떠올린다. 타오르는 양초, 포인세티아의 싱그러운 붉은 잎사귀, 청아한 핸드벨 소리, 수많은 색색의 리본과 배너, 성가대의 칸타타, 어린이들의 캐럴, 성탄절 연극, 쏟아지는 음악들, 화려한 불빛과 전구 장식, 트리와 갖가지 장식, 주일학교마다 열리는 파티와 쏟아지는 선물, 교회마다 가장 큰 파티를 연다. 그 행복한 파티에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구제 헌금과 선물 나눔도 빠지지 않는다.그뿐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는 교회 담을 넘은 축하 문화가 되었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치장한 축제로 한창이며, 카페나 상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선물과 카드를 주고받으며, 자선모금과 기부를 통해 크리스마스에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이 크리스마스의 화려함과 기쁨을 되짚어 본 계기가 있다. 십여 년 전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이자 문화신학자 마크 카펜저(Mart Coppenger)의 주도 아래 기독교 윤리, 변증학, 철학, 미학을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함께 모여 길고 긴 크리스마스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여기저기 교회에서 겪은 무분별한 크리스마스 문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에 관한 증언들이 쏟아졌다. 재정이 파산하기 직전인 상태지만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거대한 크리스마스 공연과 파티를 한 교회 이야기, 조용한 크리스마스 예배와 행사를 원하던 목사님이 그 교회에서 쫓겨난 이야기, 복음의 진수는 참회와 회개인데 그런 언급은 절대로 하지 않게 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 크리스마스 시즌 상권의 이치를 설명하며 자본주의와 결탁한 타락한 교회 행사들 이야기, 부활절의 깊은 복음의 진리에 비해 크리스마스는 복음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이야기, 복음 전파를 위해 믿지 않는 마을주민에게 성대한 음식과 공연과 파티를 준비하지만 크리스마스로 인한 실제 결신자는 희박한 통계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기독교 예술학 전공인 나에게는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헤치는 화려함과 장식성의 자본주의 예술에 대한 비판처럼 들렸다. 그 누구보다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학생으로 나는 한국의 크리스마스 문화를 떠올렸다. 오래전 한국의 어느 대형 교회가 미국의 한 크리스마스 공연을 카피해서 실제 낙타를 성탄 예배 무대에 세운 적이 있었다. 아기 예수의 해산을 앞둔 동정녀 마리아를 태운 낙타의 등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결국 신성한 예수 그리스도 탄생극에서 낙타나 배설물을 분출하는 바람에 모두 코를 막고 애를 먹었다는 뒷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신학교 토론에서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례들도 생각이 났다. 서울 근교 지방의 한 교회는 크리스마스 정기 음악회에 초청된 한 기독교 대학 여성합창단이 마지막에 단체로 치마를 걷어 올려 다리 노출 서비스를 보였고 회중을 소리 지르게 하는 깜짝쇼를 펼쳤다. 서울의 한 교회 크리스마스 연말 음악회에서는 한 여성 솔리스트가 가슴의 반이 보이는 노출 심한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했지만, 목사들을 비롯해 그 누구도 복장을 문제 삼지 않는 기독교 문화를 만들었다고 말이다.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토론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진귀하고 값진 결론을 얻었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아름답게 표현할 유일한 매개체이자 타락의 원흉이기도 한 예술에 대해 말이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 기독교학자들, 교회 리더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에게서 많은 질문을 받아왔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술을 즐길 때, 교회에서 예술에 대해 예산편성을 할 때, 예배 예술의 올바른 모습에 대해 그리스도인이자 예술가로의 삶을 살 때, 그 예술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냐?”고 말이다. 나의 답은 이렇다.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하라.” 크리스마스와 같은 예술은 ‘예수 그리스도로 중심을 잡는 예술’을 말한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그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명제는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 그리스도인이 그 길고 긴 순례의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속해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매력적인 상징들과 주제들이 많기 때문에 숙련된 영성으로 집중을 다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감상하거나 만들어질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기독교 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을 크리스마스처럼 하라”는 문장은 두 가지 상충하는 흐름이 만나는 지점이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끊임없는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의 표현이다. 예술의 세계는 인간의 내면과 세상의 세계만큼 복잡하고 넓기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끊임없이 집중하기란 불가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때로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견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예술작품은 성경이다.) 어제 읽은 욥기와 욥이 친구들 사이에 오간 길고 긴 대화를 읽으며, 나는 상담자의 자세와 타인의 고통의 문제를 묵상했다. 욥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원을 묵상하는 것에는 상당한 집중력과 시간이 소모됐다. 죄성으로 인한 개인의 약함뿐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을 강력하게 방해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개인의 안위와 자율적 선택에 젖어 있는 문화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삶의 많은 주제와 생각의 틀을 들여다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완전히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가정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모던하고 편리하게 디자인된 교회 건물 안에서 정숙해 보이는 회중이 부르는 웅장한 찬양 속에 세련된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그리스도에 대한 초점을 잃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충분한 예산을 들여 수준 높은 각종 크리스마스 기념행사에 온 교회가 전력투구해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위험들을 인지하고 날마다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는 초인간적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하심과 도우심이며,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지식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가 되게 하고 찬양이 되게 하는 관계적 영성 말이다. 이 영성 없이 기독교 예술을 누리고 영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을 크리스마스처럼 하라”는 두 번째 숨은 의미는 예술이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중차대한 일인가를 기억하며 진정성을 가지고 임하라는 말이다. 때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어렵고도 두려운 일이다. 오늘날은 너무 많은 기독교학자와 리더들이 진리를 그저 냉정한 객관적 진리이기를 추구한다. 마치 과학적 진리를 보존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토론한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는 참된 증인은 다르다. 증인은 먼저 자기가 말하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경험하고 체험하여 온몸에 체화된 상태에서 나올 수 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설명하고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진 피터슨은 이 명령의 목적이 우리 몸에 흡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신경 조직과 근육에 흡수되는 것처럼 그가 입을 벌려 말할 때 그것이 문장 속에 자연스럽게 표현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을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하시는 길이자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이란 것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때로는 그 진리를 나르는 도구를 넘어 완전한 하나가 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자. 크리스마스에는 그 어떤 교회도 그저 언어적 설명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는다. 교회는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촛불과 색색의 전구로 꾸민 빛의 예술의 장으로 변한다. 천사들이 노래했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외침은 헨델의 메시아로 울려 퍼지고 갖가지 악기들이 그날의 찬송을 재현한다. 온 교회는 크리스마스의 영광이 말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그 영광의 광대함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에서 천사가 찬송하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계시록에서 회중이 찬송을 부리는 동안 일곱 천사의 심판이 준비되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다(계시록 8-12). 성막과 성전의 수많은 상징으로 인해 그리스도가 예표되고, 음악과 이미지의 환상 속에 선지자들은 메시아의 구원을 예언했다. 예술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불가결한 중심 행위다. 크리스마스처럼, 예배와 일상의 장소에서 노래를 부르고, 시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건물과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여 정돈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다듬으며 전하고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한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중심을 올려드리는 예술적 예배가 되어야 한다. 많은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야 하는지 고민한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매일 대하는 문화예술에 대해 고민한다. 이 아름다운 12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예술’처럼 “용기 있게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예술을 추구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찾아 경청하고 응시하자고,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예술을 갈망하자고 외치고 싶다. 매일이 크리스마스처럼 기뻐야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예술은 크리스마스처럼 하자. Soli Deo gloria!
일부다처 이단에서 나를 구하신 하나님
by Jared Larson
2023-12-05
우리 부부가 어떻게 만났는지 묻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맺어주셨는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글쎄요, 우리는 사실 일부다처 모르몬교에서 만났어요”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 피할 수 없다.그럼 사람들의 눈이 커지면서 말을 더듬거린다. “뭐라고요?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당황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한한 은혜에 대한 간증으로 인도한다. 그건 의심,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몇몇 죽은 친구들, 그리고 팀 켈러의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컬트나는 주류 모르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 조상의 모든 줄기는 모르몬교 설립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우리 부모는 주류였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떠나 컬트 집단인 모르몬 근본주의에 가입했다. 그들은 현대 모르몬교를 비판하고 조셉 스미스 시대 이후로 이루어진 모든 변화를 비난했다. 순종적인 아이로서 나는 부모를 따랐고 종말 시나리오로 가득 찬 세상에 몰입했다. 나의 전 생애는 온통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쓰였다. 우리는 음식과 탄약을 비축했다. 외부 교육은 비난받았고, 젊은 결혼이 장려되었다.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고 나흘째 되던 날 아내는 나와 결혼했다.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오른팔이라고 믿었던 컬트 지도자인 예언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가치있는 존재인가의 여부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여부에 달려있었다. 내가 속한 컬트는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받은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의 의로움에 달려있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재림 예수가 가장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신성한 능력을 우리 각자에게 부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조셉 스미스가 세운 교리를 마음대로 변경한 주류 모르몬 교회를 제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우리가 제시한 “복음”을 거부한 나머지 세상도 심판할 것이다. 의심모든 게 의심스럽기 시작한 건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다. 우리 공동체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특정한 날에 관한 예언이 있었다. 수석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며 그 진리를 확증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않았고, 내 속에는 의심이 생겼다. 의심은 숨 막히게 만드는 두려움을 동반했다. 행여라도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하는 내가 틀렸다면, 그것은 영원한 저주를 의미했다. 차마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의심을 억누르며 계속 버텼다.그러나 의심과 두려움은 손가락에 붙는 송진 수액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씻어내려 할수록 더 끈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절망감으로 바뀌어 서서히 겉으로 드러났다. 나는 갇혀버렸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을 품기 시작한 건 의심이 시작하고 약 육 년쯤 지났을 즈음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합리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두려움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의미했다. 나는 은밀히 무신론을 즐겼지만, 아무리 하나님을 내 속에서 없애려고 애써도 내가 창조주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깊은 자각과 그분이 나를 본향으로 데려가길 원하신다는 생각을 차마 떨칠 수는 없었다.그렇다면 타고난 그런 사랑의 감각이 나를 달래줬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도리어 나를 화나게 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 하나님이 왜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내버려 두는 걸까? 나는 컬트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줄 명확한 대답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이 사 년이 더 흘렀고, 두려움은 계속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신앙어느 날 밤, 지혜로운 아내의 권유로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에는 내가 너무 부족합니다. 제발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데려다주세요. 더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당신 것입니다.”이 모든 기도가 내 입술을 떠나는 순간, 깨달음이 나를 덮쳤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그때까지 내가 알던 모든 건 다 종교와 행위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움직이는 모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짜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성경에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하나님을 알려면 그리스도 위에 나의 기초를 세워야만 했다.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만이 합당했다.그날 밤 나는 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고, 그렇게 했을 때 모든 게 바뀌었다. 그리고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하나님은 나를 다시 인도하기 위해 세 명의 죽은 영을 보내셨다. C. S. 루이스,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고 마르틴 루터였다. 물론 진짜로 그들의 영이 나를 찾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만난 건 그들의 글이었다. 톨킨의 환상에 매료된 나는 루이스를 찾았다. 본회퍼를 알게 된 건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 덕분이었다. 그리고 성경 주석을 찾기 위해서 킨들 무료 책을 뒤지다가 루터를 만났다. 이 세 사람의 삶과 글은 나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잇는 새로운 관계로 이끌었고, 은혜에 대한 아름답고 새로운 이해로 나를 제자 삼았다.컬트를 떠나고 몇 주 지났을 때 하나님은 내게 살아 있는 작가를 보내 주셨다. 그때까지 나는 팀 켈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내가 접한 최초의 생존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이었다. 컬트에서 살았던 내 이전의 삶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에 나는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을 읽었다. 친숙한 비유에 대한 그의 생소한 접근에 나는 크게 놀랐다. 하나님은 나를 그의 나라에서 탕자 동생으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화를 내는 형으로도 이끄셨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올바른” 일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자기중심적인 종교인에 불과했다. 켈러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참된 자유와 용납은 오로지 사랑으로 충만한 구주의 의로우심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으로 나의 작은 가족을 어두운 곳에서 끌어내어 그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다. 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원제: God Saved Me from a Polygamist Cul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명목상 기독교’ 현상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3-12-04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언젠가 카페에서 지인과 대화를 하는 중에 옆 좌석에 앉은 청년들이 하는 얘기를 엿듣게 됐다. 그들의 대화에서 “교회~”가 언급되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했다. “우리 부모님은 교회를 열심히 다니시고 신앙을 되게 중요하게 여기셔. 그래서 나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잘 다녔지.” “그러면 너도 기독교 신자야?” “아니, 난 그 정도의 신앙은 없어. 그래도 기독교인이라고 볼 수 있지. 우리 집이 기독교 배경이고, 나도 교회에 적은 두고 있으니까.” 이들의 대화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명목상 기독교 현상을 보여 준다. 한국 교회 내에서 우리가 흔히 ‘선데이 크리스천’ ‘나일론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얼마 전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서 실시한 한국의 명목상 기독교 실태에 대한 첫 번째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s)이란 교회에 다니거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면서도, 신앙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 또는 교회 출석 외의 실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번 조사에서는 만 19세 이상 개신교인 교회 출석자 1,000명 가운데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39.5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1) 신념 영역, (2) 신앙 활동 영역, 그리고 (3) 신앙 정체성 영역으로 나누어 명목상 교인 규모를 파악하고자 했다. 신념 영역, 즉 자신에게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묻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근거’ ‘신앙생활의 목적’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들을 명목적 교인의 기준으로 설정했다. 신앙 활동 영역에서는 예배 외의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지, 그리고 평소의 기도생활 및 성경읽기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실천하지 않는’ 명목상 교인의 여부를 파악하고자 했다. 여기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대답을 신앙 정체성의 결여로 인한 명목상 교인에 포함시켜, 최종 39.5퍼센트가 산출됐다(조사 결과의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 참조).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와는 달리 현재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명목상 그리스도인’보다는 ‘명목상 교인’으로 분류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명목상 교인에 관한 조사는 가나안 성도 조사와는 성격이 다르다. 가나안 성도는 현재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교회가 있는지의 여부로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명목상 교인은 ‘신앙의 정도’에 관한 질문이기에 좀 더 복합적인 접근을 통해 파악되어야 한다. 2018년 명목상 기독교에 관한 로잔위원회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범주를 (1)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교회 소속이 없거나’(not affiliated), (2) ‘규칙적으로 교회활동이나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not practicing), (3) ‘회심, 또는 거듭남이 없는’(not converted, unregenerated), 그리고 (4) ‘헌신하지 않고 피상적인’(not committed, superficial)이라는 네 가지로 제시한다(Evert Van de Poll, “Defining Nominal Christianity,” 4-12). 따라서 이번 명목상 교인 조사는 위의 네 가지 범주에서 가나안 성도에 해당하는 (1)의 경우를 제외하고, (2)-(4)의 명목상 교인 범주들을 고려해서 한국의 명목상 교인 비율을 산출한 것이다. 선교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그리스도인 됨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경계집합적 접근과 중심집합적 접근을 구분한다. 경계집합(bounded set)이란 교회출석, 세례, 신앙고백 등과 같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는 경우다. 그러나 히버트는 중심집합(centered set)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인 됨을 파악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중심집합은 경계를 나누는 외적 표지보다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 및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 됨의 진정성을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 중심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부응하는 믿음과 삶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를 통해 그리스도인 됨을 진단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경계보다는 중심을 향한 방향과 거리가 중요하다. 명목상 교인에 관한 조사는 이러한 중심집합적 개념에서의 그리스도인 됨을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누군가를 명목상 교인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명목상 기독교 현상에 관해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던 로잔운동에서도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는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술적으로 제안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해당 문서의 16페이지). 이번 조사에서도 명목상 교인을 산출하는 로직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결과값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때문이 아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이들을 명목상 교인으로 포함해야 할 것인가? 명목상 기독교에 관한 조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앙의 진정성을 묻는다면 단순히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긴다는 답변은 미흡해 보인다. 이들을 포함하면 명목상 교인의 비율은 50퍼센트대로 올라간다. 실제로 어떤 양육모임에 참여한 이들 30명을 대상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100퍼센트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때문이 그리스도인 됨의 근거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선행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최종 결과에서는 예수님,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라는 답을 하지 않은 이들만 명목상 교인으로 분류했다. 이와는 반대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을 명목상 교인으로 포함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연구자들 내부에서 이견이 있었다. 확신이라고 단어가 주는 단정적인 어감 때문에 겸양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비록 자신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음에도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 여부를 명목상 교인 구분에서 제외하면 최종 결과는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단순히 신앙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믿음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간주하여 포함했다.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이 교회에서 다소 인위적으로 쓰인 것도 사실이다. 또한 미국 기독교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파악하는 데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를 묻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보다 구원의 확신이 설문조사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더욱 자주 쓰인다는 현실을 고려했다. 또한 미국에서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이 상당 부분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복음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는 점도 감안해야 했다. 가장 최근에 명목상 그리스도인에 관한 미국의 조사는 2022년도에 Personal Faith Journey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이 조사는 미국 전역에서 9,50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과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는 두 집단을 분류했다. 분류의 기준 질문은 (1)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이상 교회(또는 신앙 모임)에 참석하는지의 여부와 (2) 자신들의 삶에서 신앙이 높은 혹은 가장 지대한 중요성을 지니는지의 여부였다. 이 조사는 두 기준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한 경우에는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해서 응답자의 33.3퍼센트가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66.7퍼센트가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분류됐다. 일반적으로 서구권의 명목상 교인 조사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소위 ‘가나안 성도’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이번 목회데이터연구소 조사는 가나안 성도를 제외한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명목상 교인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가장 최근의 가나안 성도 비율이 29.3퍼센트가 나왔고, 이번에 파악된 명목상 교인 39.5퍼센트를 가나안 성도를 제외한 70퍼센트에 비례해서 산출하면 27.9퍼센트가 나오므로, 가나안 성도를 포함하는 서구식 명목상 교인의 비율은 57.2퍼센트가 나온다. 이는 미국의 66.7퍼센트에 비해서 약 10퍼센트가량 낮은 수치인데,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고려할 때 수긍할 만한 측면이 있다.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이러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통계는 없었는데, 이번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 교회 내부의 실질적 신앙생활에 대한 파악이 이루어졌다는 의의가 있다. 사실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오래된 관심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경고하셨다. 입술로만 표명하는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는 신앙이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는 주님의 교훈은 우리가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이유이다. 역사적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관습화되고 힘을 잃을 때마다 명목상 기독교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청교도들은 명목상 기독교 현상을 넘어서기 위해 진정한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명목상 기독교(nominal Christianity)는 주로 탈기독교세계(post-Christendom)에 접어든 서구 교회의 현상이었지만, 기독교가 전래된 지 4세대가 지난 곳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한 세대를 25-30년으로 볼 때, 기독교가 전래된 지 138년이 된 한국 교회에서 명목상 기독교 현상은 주목해야 할 과제이다. 최근 가나안 성도와 탈교회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사실 명목상 교인은 가나안 성도와 탈 교회 현상의 전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고민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은 있으나 자신의 가치관으로 인해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나, 심지어는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 판단으로 무신론자가 된 이들보다도 더욱 약한 고리가 될 수도 있다. 명목상 교인 조사는 누군가의 신앙을 등급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인생 여정 가운데 명목상 신앙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영적 변동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동적이며 불확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명목상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아예 신앙을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명목상 교인은 교회 내의 양육 대상일 뿐 아니라 선교적 대상이기도 하다. (다음 글에서는 명목상 교인들의 주요 특징과 사역 방향을 다루겠다.)
바트 어만 씨, 뭐라고요?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요?
by Glenn Hohnberg
2023-12-02
성경 연구 저자이자 회의론자인 바트 어만은 ‘복음서를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성경의 모순들’이라는 강의에서 반복해서 말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으세요. 읽으면 다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한 대로 성경 본문을 읽었다. 그리고 내가 찾은 것은 어만이 신자들에게 어려운 구절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조금만 생각해도 그가 말한 수많은 모순이 단숨에 사라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가 말한 모순 중 일부는 논리가 너무나 연약해서, 나는 어만이 솔직하지 않은 게 아닌지 궁금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성경의 모순이라는 이 문제에는 많은 게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어만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읽는다고 해서 그게 꼭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게 다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9분 50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말은 더 큰 주제로 이어진다.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모순에 대한 어만의 정의는 ‘서로 다르고 조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성된 둘 이상의 설명’이다. 따라서 ‘두 개의 모순된 설명이 둘 다 역사적으로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강의 시작 부분에서 어만은 성경을 나란히 놓고 읽을 것을 열정적으로 촉구한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누가복음, 마가복음, 마태복음의 같은 구절을 서로 평행선에 놓고 비교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의 독서법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한 학자의 열정으로 강조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 오래된 NIV로 복음서를 읽을 때 나는 이미 유사한 모든 구절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었다. 자, 서론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본격적으로 모순이라는 문제로 들어가서 어만이 말하는 모순이 진짜 모순인지 살펴보자. 그의 강의에 나오는 순서대로 그 문제를 다루도록 하자. 1. 야이로의 딸을 고치심비교가 가능한 두 구절은 마가복음 5:21-24과 마태복음 9:18-20이다. 어만은 여기서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한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야이로의 딸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의 기록을 보면 그녀는 죽었다. 자, 여기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 어만은 청중에게 텍스트를 읽으라고 촉구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몇 가지를 알아차린다. 마가복음에서 야이로는 예수님께 오리지널 코이네 헬라어로 ‘내 딸이 죽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대담하고 생생한 이미지이다. 따라서 독자가 그의 딸이 실제로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가 야이로의 집에서 온 어떤 사람들이 그에게 딸이 지금 죽었다고 말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살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말하였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막 5:35)이건 보기에 따라서 어만의 주장을 확증하는 거 같다. 그러나 마가와 마태를 주의 깊게 읽으면 피 흘리는 여인의 이야기가 일으키는 방해와 야이로의 딸 주변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까지 해서, 마가의 기록이 마태보다 더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이 사건에 관한 마가의 기록이 23절에 걸친 반면 마태의 경우는 9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마태가 야이로의 딸과 피 흘리는 여인에 대한 두 이야기를 압축하여 두 문장으로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적지 않은 세부 사항을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마태가 서술한 야이로의 이야기는 단지 상황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기에 굳이 종들이 알려준 자세한 설명까지 다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게 아닐까?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죽었다’로 번역된 마태가 사용한 동사는 부정과거형이다. 단순함을 위해 종종 과거형으로 번역되지만, 행동이나 사건을 요약해서 말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은 야이로가 그의 딸이 지금 막 죽었다고 말하거나(단순 과거 시제), 또는 마가의 경우에서처럼 그녀의 죽음이 임박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경우에도 쓰일 수 있다. 죽음이 내 딸 가까이에 있다. 아마도 이런 설명이 당신을 설득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의 두 설명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세부 사항에서 동의한다는 점을 고려하라. 1. 야이로가 온다.2.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다.3. 야이로는 예수님께 딸에게 손을 얹으라고 요청한다.4. 피 흘리는 여자가 방해한다.5. 피 흘리는 여자에게 예수가 하는 말.6. 예수가 도착했을 때 죽은 소녀.7. 예수의 말씀,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8. 군중의 웃음과 불신.9.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는다. 사건의 핵심은 예수가 도착하기 전에 소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드라마이자 중심점이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 텍스트를 공정하게 읽으면, 비록 스타일이 다르다고 해도 그것을 압도하는 일관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주의 사항 중 하나에 도달했다. 각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건을 다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은 그것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어만은 지금 거기에 21세기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그는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축어적) 보도에 절대적인 정확성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적용하고 있다. 게다가 한 인물의 말투에서 발견되는 약간의 차이를 핑계 삼아 전체 사건을 엉터리라며 창밖으로 던지고 있다. 그가 발견한 차이점이 실제로 야이로의 딸이 실제로 죽음의 순간에 있지 않았거나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실제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일단 다음 문제로 넘어가자. 2. 누가와 마태의 족보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의 예수님 족보의 차이이다. 역사적으로 학자들은 하나를 마리아의 족보로, 다른 하나를 요셉의 족보로 이해했다. 그러나 어만과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것처럼, 누가의 족보에도 그게 마리아의 족보라는 말은 없고 요셉의 혈통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바로는 두 족보가 요셉이 받은 유산의 두 가지 다른 측면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하나는 생물학적 혈통을 드러내고 다른 하나는 법적 계보일 수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족보에 관한 데럴 복(Darrel Bock)의 짧은 토론(복음서는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을 참조하라. 그러나 텍스트를 제대로 읽는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일어나는 훨씬 더 많은 일을 눈치챘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에 관련된 문제이다. 마태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가 세 명의 왕을 연속해서 놓친 사실을 알 수 있다.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이다(참조, 역대상 3장과 솔로몬의 아들들). 그는 또한 여호야김도 뺐다. 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유수까지, 그리고 유수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멋진 14세대를 연속해서 가지기 위한 마태의 자의적인 조작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니까 마태는 역사가 아닌 수학으로 족보를 썼다는 주장이다. 아니, 아니, 그렇게 빨리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다시 돌아가서 그가 뺀 네 명의 왕을 보면, 그들이 하나같이 다윗의 본을 따라서 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저버리고 다윗 왕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즉, 그들은 진정한 다윗의 자손이 아니었다. (아하시야-왕하 8:25-27, 요아스-대하 24:17, 아마샤-대하 25:27, 여호야김-왕하 23:36-37). 그래서 마태는 그들을 제외했다! 이 사실을 확증하는 것은 여호와께 헌신하지 아니하였으나 다윗을 위하여 명시적으로 확증된 아비야 왕이다(왕상 15:15). 그래서 마태는 그를 포함했다. 마태는 1장 1절에서 이 족보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사라고 말한다. 아마도 마태는 어만보다 구약의 본문, 즉 유대인의 경전을 훨씬 더 주의 깊게 읽었던 거 같다. 그러나 어만 식의 이해가 가진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다. 족보와 관련하여 어만은 유대인들이 후손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지 않았다고, ‘…족보 보관은 있을 수 없습니다’(20분)라며 매우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두 족보 모두 다 분쿰(bunkum, 헛소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유대인들이 정말로 족보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1세기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자신의 생애에 관해서 쓴 다음 내용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부터 나의 선조들을 순서대로 나열할 것이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이름은 사이먼…요세푸스는 조상의 이름을 계속해서 나열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리하여 나는 공공 기록에서 발견한 대로 내 가족의 족보를 지금까지 기록했다.요세푸스는 자신의 족보를 자세히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개된 기록이라고 말한다. 족보 보존이 전혀 당시에 없던 일이라면, 어떻게 족보가 공문서에까지 남을 수 있을까?더욱이 콘트라 아피온(Contra Apion)[1]에는 족보를 보관하는 유대인 관습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족보가 서술된 구약성서의 페이지가 나온다. 유대인들의 족보 보존은 정말로 당시에도 대단한 일이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따라서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서 족보를 찾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어만이 전에 무어라고 했던가?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어만의 학문 연구에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은 다음 문제를 보자. 3. 이집트 피난어만이 제기하는 세 번째 모순은 이집트 피난이다. 누가복음2:2-40과 마태복음 2:1-23이다.이 둘의 설명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누가에는 목동만 있고 동방 박사는 없다. 마태에는 천사, 동방 박사의 꿈, 더 많은 꿈, 그리고 이집트 피난까지 들어 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잠시 멈추고 누가가 처음에 무어라고 하는지 들어 보자.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눅 1:1-3).누가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조사하여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보컴(Bauckham)과 같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이 정보는 목격자의 인터뷰를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이 점은 중요하다. 이 사실은 왜 꿈, 이집트 피난, 그리고 귀환 등의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없는지에 대한 간단하고도 가장 분명한 설명이다. 그에게는 그 사실을 확인할 목격자가 없었다. 꿈꾸는 사람 외에 누가 꿈을 증언할 수 있을까? 이 사실은 동방 박사의 방문에도 두 가지 방식으로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이야기와 다르게 그들은 목자들과 같은 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목격자가 없었다. 페르시아에서 왔던 동방박사들은 다시 돌아갔기에 그들과는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누가는 마태와 모순을 초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검증을 받을 수 없었기에 이러한 세부 사항을 빠뜨린 게 아닐까?그러나 아직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마리아의 정결 예식을 마치고 성전에 올라갔다가 나사렛으로 돌아간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 가족은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나중에 나사렛에 정착한다. 왜 누가는 그들이 정결 예식을 마치고 곧장 나사렛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 같이 썼을까? 나는 그가 그렇게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구글 지도에 따르면,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차로 22분, 약 9.3킬로미터 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라. 고작해야 몇 시간만 걸으면 되는 거리이다. 어느 날 요셉은 갑자기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물건이 많은 그곳 상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성전에서 정화 의식도 당일치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정화 의식을 마친 후 어느 시점에서 그들은 이집트로 피신했다. 이런 추론을 더욱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동방박사가 베들레헴의 목자들보다 늦게 마리아와 요셉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헤롯은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마 2:14). 그래서 그들은 고작해야 얼마 동안만 베들레헴에 있을 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서 쇼핑, 정결 의식 등 예루살렘을 들락날락했어야만 했다. 어만은 다시 이 모순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처럼 누가가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조사하고 그가 인터뷰할 수 있었던 목격자들에게 중요했던 사실에 근거해서 복음서를 썼다고 보면, 모든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4. 예수님의 죽음과 찢어진 성전 휘장이것은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이는 또 다른 명백한 모순이다. 마가복음 15:37-39과 누가복음 23:45-46이다. 어만은 이 모순을 매우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나서 예수님이 죽은 건지, 아니면 예수님이 죽고 나서 휘장이 찢어졌는지에 관해서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모순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전혀 없다! 먼저, 이 두 구절이 담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텍스트에는 시간 표시가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 대략 ‘언제’ ‘이후’ 또는 더 직접적으로 ‘오후 열두 시에’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다음은 누가복음이다. 어느덧 낮 열두 시쯤 되었는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눅 23:44-45).그러나 문제가 되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시간 표시가 없다. 해는 빛을 잃고, 성전의 휘장은 한가운데가 찢어졌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는 숨을 거두셨다(눅 23:45-46).한편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막 15:37-38).발생한 일을 다른 순서로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위의 구절에도 시간 표시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휘장이 찢어진 것은 단순히 등위접속사(kai)에 의해 연결되는데, 이는 ‘그리고, 그러나, 또는, 심지어, 그러나, 아직은’ 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된다. 따라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휘장이 찢어지고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쉬셨다. 그리고 마가복음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쉬셨고 그러자 휘장이 찢어졌다. 당신이 거리의 평범한 소녀나 남자라면 이런 차이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ESV와 같은 현대 영어 성경 번역은 단순하고 충분할 때 kai에 대해서 바로 위에서 번역했듯이 ‘그러자’(then)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번역이 보통 사람에게는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어만과 같은 학자가 그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2]따라서 등위 접속사를 고려할 때,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요점은 예수님의 죽음과 휘장이 찢어지는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내러티브의 요점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다시 말해, 복음서 저자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죽음과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것 사이에는 순서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와 마가복음의 순서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가지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때 그 중 하나를 먼저 이야기해야만 한다. 동시에 두 문장을 쓰거나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와 마가는 단지 문장을 다른 순서로 넣었을 뿐이다. 이것을 모순이라고 부르는 어만의 정직성을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게다가 텍스트 비평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신약의 헬라어를 알 것이다. 당연히 등위 접속사도 알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쉬운 사실을 놓쳤다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어만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작은 일에 관한 설명이 틀렸는데, 진짜 중요한 일에 관한 설명이 틀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더 포괄적인 역사적 사건알려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성경의 일반적인 신뢰성에 관련해서, 어만은 누가복음 2장과 일치하는 기록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어슨(Brooke W. R. Pearson)은 누가복음 2:2의 핵심 문장을 기존의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이 호적 조사는 퀴리니우스가 시리아를 다스리기 이전에 (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 있었다.’ 피어슨은 이것이 맞는 번역이며 널리 알려진 역사적 맥락에 매우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음은 ‘누가복음 속 인구 조사를 다시 들여다보기’(Lucan Census Revisited)에 관한 기사이다. 나는 어만이 이 연구를 고려했는지 궁금하다. 그는 어떻게 대답할까? 청중에게 증거가 이끄는 곳으로 가라고 도전했던 그가 이 질문에 기꺼이 응답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그가 뭐라고 했던가? 고집을 부리는 무지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마음을 바꾸고 총명해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론그렇다고 내가 어만이 제기한 모든 모순을 다 해결한 건 아니다. 그 점을 인정한다. 게다가 나는 그가 더 많은 모순을 들고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그가 제기한 ‘모순’ 중 일부는 결코 면밀한 조사를 견디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단지 텍스트를 주의 깊게 읽는 것만으로도 그 사실은 명확해졌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아마도 어만은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1세기에 대한 그의 지식도 자신이 자랑하는 만큼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요약하자면, 어만이 복음서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복음서를 거부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심지어 당신이 이미 결정한 사실에 대해서 그는 단지 확증을 하는 데 불과하더라고 말이다. 1. http://penelope.uchicago.edu/josephus/apion-1.html#S7그들은 조상과 조상의 옛 이름을 서면으로 예루살렘에 보내고 증인이 누구인지도 알린다. 심지어 먼 조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1세가 우리나라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폼페이(Pompey) 대왕과 퀸틸리우스 바루스(Quintilius Varus) 3세가 침공했을 때처럼, 게다가 이미 수많은 전쟁이 우리 시대에도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런 경우에는 살아남은 제사장들이 오래된 기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족보를 작성하고 남아 있는 여성들의 상황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여전히 포로된 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2. 누가복음 23:45의 분사는 부정과거이다.원제: Bible Contradictions? A Response to Bart Ehrm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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