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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동성애를 논하신 적이 있는가?
by Paul Carter
2023-11-15
예수님이 동성애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 묻는 것은 예수님이 노인 학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지 묻는 것과 다소 유사하다. 그렇지만, 비슷하기는 한데, 꼭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노인 학대”라는 정확한 말을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는 부모를 잘 섬기지 않는 바리새인을 꾸짖었다(막 7:12-13). 그리고 다섯 번째 계명을 지키라고 말하셨다.“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 20:12).따라서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노인 학대를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특정 단어를 사용해서 그 주제를 직접 언급하신 적이 없다.동성애에 관해서도 거의 비슷한 말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언약적 결혼에 대한 성경의 이상을 무시하는 바리새인들을 꾸짖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서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신 것을, 너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 19:4-6).분명히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성경의 비전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평생의 결합임을 확증하셨다. 그는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고 찬성하면서 그 특별한 맥락에서 성(sexuality)을 확증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구약의 한 구절을 권위 있게 언급했다. 더욱이 예수님은 모든 형태의 성적 부도덕을 부정적으로, 비난적으로 언급했다. 마태복음 15:19-2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마음에서 악한 생각들이 나온다. 곧 살인과 간음과 음행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다.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 그러나 손을 씻지 않고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마 15:19-20).‘더럽힌다’는 것은 부정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이는 예배 공동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 용어는 요한계시록 21:27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속된 것은 무엇이나 그 도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증한 일과 거짓을 행하는 자도 절대로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계 21:27).그러므로 예수님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성적 부도덕, 도둑질, 거짓 증언 및 중상이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배제하는 더러운 죄라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십자가에서의 속죄 사역을 통해 고백하고 용서받지 못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적 부도덕”이라는 죄를 더럽게 하고 배제하는 것 중 하나로 언급하신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신약 및 기타 초기 기독교 문학의 그리스어-영어 사전(BDAG)에서는 대부분의 성경에서 “성적 부도덕”으로 번역되는 ‘포르노네이아’라는 단어를 “불법적인 성교”와 관련해서 정의한다. 유대법은 레위기 18-20장에서 불법적인 성관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긴 목록을 제공한다. 해당 법령에 따르면 남자는 다음과 같은 대상과 성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 1. 이웃의 아내(레 18:20)2. 다른 남자(레 18:22)3. 동물(레 18:23)4. 장모(레 20:11)5. 며느리(레 20:12)6. 자매(레 20:17)이들 중 누구와 성 관계를 갖는 것은 포르노, 그러니까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님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성은 사람을 더럽히고 예배 공동체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밖에 머물도록 만든다. 예수님이 동성애 문제를 긍정하셨거나 무관심하셨다고는 확실하게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구약의 비전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맺은 불가침의 계약으로 분명히 지지하셨으며, 불법적인 성행위가 사람을 더럽히고 하나님 나라 밖에 두는 일임을 분명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동성애”라는 단어뿐 아니라 “근친상간”이나 “수간”이라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그리스어 포르네이아를 사용해서 유대법이 합법적인 성과 불법적인 성에 대해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에 따르면, 불법적인 성은 죄악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속죄 제물로 바치러 오셨으므로 모든 범법자와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다.거기에는 당신도 포함된다. 그리고 나도 들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상처받은 남자와 여자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신다고 말씀하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그는 제자들에게 잔을 건네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이것은 죄를 사하여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8).불법적인 성 관계는 죄이다. 도둑질은 죄이다. 살인과 간음과 거짓 증언과 비방은 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모든 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 용서받고 영원히 씻겨질 수 있다.할렐루야!원제: Did Jesus Ever Talk about Homosexu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빈대는 이렇게 번져간다
빈대의 확산을 막는 지혜
by 필립 정
2023-11-14
요즘 빈대로 떠들썩한 한국 사회라 빈대가 어떤 벌레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빈대를 다루는 매체마다 매우 자세하게 빈대에 대해 알려주고 있으니 이 지면에 빈대에 관해 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빈대에 감염이 되고 확산이 되는지는 어느 매체도 잘 알려주고 있지 못하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난 16년간 빈대를 잡아 온 기록을 찾아보았다. 개인적으로 빈대 방역 처리 기록이 70여 차례가 넘고 나와 같이 일하는 직원들 기록까지 더하면 100차례가 넘는 것 같다. 여기에 빈대 검사만 하고 돌아온 기록까지 더 하면 훨씬 더 많은 경험이 축적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달리 비교적 짧은 페스트 컨트롤 역사를 갖고 있고 빈대의 재출현도 시간적으로 얼마 되지 않아 빈대 감염과 확산 연구에 대한 자료가 충분치 않은 것 같다. 물론 내가 사는 이곳이 여러 인종이 섞여 사는 미국 남부라는 지역적 한계가 있고 한국과 주거 환경이 달라 일반화하기 쉽지 않겠지만 아직 빈대 출현의 빈도수가 낮은 한국에 보다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써 본다.나는 이 글을 통해 빈대의 감염과 확산 경로, 빈대를 잘 옮기는 사람 특징, 그들의 직업적 특성, 문화적 특성, 주거 형태, 왜 주로 빈곤층에 빈대가 확산하는지, 나아가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빈대의 감염과 확산을 막기 위해 어떻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하고 빈대의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페스트 컨트롤 전문가로서 견해를 밝히고 싶다.빈대 감염과 확산 경로나는 고객들의 의뢰로 빈대를 잡으러 가면 제일 먼저 묻는 말이 있다. 최근에 여행 가서 어디서 묵었는가, 손님을 집에 재운 적이 있는가? 왜냐면 빈대의 감염 경로를 찾아야만 빈대의 확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객들이 여행하면서 묵었던 숙박업소에서 감염되어 온 경우가 50퍼센트를 웃돈다. 그다음이 고객의 집에 다른 사람을 재웠던 경우로 30퍼센트 이상 되는 것 같다, 버리려고 내놓은 가구를 가져오거나 남이 입던 옷을 사 입었을 경우도 매우 흔하다.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아파트 천장 안에 비둘기가 살았는데 비둘기 몸에 있던 빈대가 거주인에게 옮겨 온 적도 있다. 빈대 감염과 확산은 직업과 매우 관련이 깊다. 출장이 잦거나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호텔에서 잘 수밖에 없으니 빈대에 잘 감염되어 집으로 옮겨 온다. 미국에서 호텔은 저가의 숙박업소나 고급 호텔 할 것 없이 빈대의 온상지로 유명하다. 호텔을 옮겨가며 잠을 자야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빈대를 피할 수 없다. 한번은 매우 큰 호텔에서 호텔 전체에 빈대 약을 쳐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충격적으로 빈대가 많아 호텔 측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호텔 측은 경영난에 빈대까지 겹쳐 영업을 포기하고 버티다가 결국은 다른 큰 호텔 업체에 인수되었다.많은 손님을 맞이하는 숙박업소 직원, 찜질방 종사자의 숙소에도 빈대가 번져 네 번이나 가서 처리해 준 적이 있다. 단체 생활을 하는 학생, 근로자들도 빈대를 많이 옮긴다. 기숙사에서 살던 대학생이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빈대를 옮긴 경우도 여러 차례이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의 가방에 빈대가 함께 와 온 집안에 빈대를 확산시킨 적도 여러 번 있다.국가 간 문화에 따라 빈대 감염과 확산에 차이가 있다. 내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유난히 공동체 의식과 유대감이 강한 문화를 지닌 민족일수록 빈대가 더 잘 퍼지는 특징이 있다. 한국, 남미, 인도 등 이런 나라들은 자기의 먼 친척, 오래전 친구라도 연락이 오면 쉽게 방을 내주고 잠을 재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초청받아 온 사람이 장기간 여행하며 여러 호텔을 거쳤다면 가정집 방문은 확산의 경유지가 된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빈대는 주로 잘 안 물리는 사람이 옮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데 사실 빈대에 전혀 물리지 않거나 거의 물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한집에 같이 사는 부부인데 한 사람만 물리는 경우가 흔하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가설이 가능하다. 빈대는 사람들이 입과 피부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에 반응하는데,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빈대에 잘 물리지 않는 사람들은 본인이 감염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리저리 다니며 빈대를 확산시킬 수밖에 없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무증상자들이 코로나를 확산시키는 원리와 동일하다. 내 자료에도 거의 40퍼센트 이상이 빈대에 물리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곳과 다른 곳에 빈대를 옮겨 온 것으로 나타났다.미국이 한국과 다른 것 중 하나는 중고 용품의 재사용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사용하던 가구나 옷들을 싸게 파는 유명한 가게들이 매우 많다. 이런 곳에서는 사실 빈대를 잘 옮겨오지 않는다. 헌 용품을 구매할 때 깨끗이 손질해 내놓거나 세탁하기 때문에 옮길 일이 많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옷을 입어보고 벗어 놓는 과정에서 빈대를 옮겨오는 일이 매우 흔하다. 또 중고 물품을 위생처리 하지 않고 구입한 그 상태로 다시 되파는 가게들도 많다. 그래서 빈대가 헌 옷과 중고 가구와 함께 들어오는 것이다. 가장 흔한 경우는 빈대에 감염되어 버리려고 내놓은 가구들 때문이다. 주로 침대 프레임, 매트리스를 가져와 문제가 발생한다. 서랍장, 신발장에도 빈대가 딸려 오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내 자료에 의하면 이 경우 10건 가까이 된다.빈대의 확산은 주거 형태와 깊은 상관이 있다. 미국의 아파트나 한국의 고시원에서 빈대가 비교적 잘 번지는 이유가 있다. 미국의 아파트와 한국의 고시원은 매우 얇은 나무 합판 벽 하나로 나뉘어져 있다. 옆방에서 내는 작은 소리조차 들릴 정도라 한 곳에서 빈대가 나타나면 곧 옆집, 위아래 집으로 번져간다. 미국의 호텔도 마찬가지 원리다. 이런 곳에 빈대 처리 문제로 가면 한곳에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런 주거 형태가 구조 때문에 사방으로 빈대가 잘 번져 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기숙사도 같은 이유로 쉽게 번진다. 작은 규모의 방을 나무 벽으로 이어 붙였기 때문에 한곳에서 번지면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한다. 내 경우 제일 심했던 곳은 노인 아파트이다. 미국엔 65세 이상이면 약간의 돈만 내고 살 수 있는 노인 아파트가 있다. 세대 전원이 노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그 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같이 먹고 나누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어 바퀴벌레, 빈대가 상당히 번져 있다. 빈대도 너무 심하고 경제적으로도 취약하여 손을 쓸 수 없어 내 경우에도 여러 번 의뢰를 받았지만 포기한 적이 많았다.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외로운 노인들은 계속 다른 노인들의 아파트를 방문하면서 빈대를 계속 옮겨 왔기 때문이다.빈대는 주로 학생, 노동자들의 숙소, 노인 아파트 같은 저소득층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어 다른 곳으로 확산할 소지를 갖고 있다. 이유는 빈대 방역의 비용이 매우 비싸기 때문이다. 방 한 칸만 약을 쳐도 원화로 60만 원이 넘는다. 아파트라도 방 두 칸에 거실까지 합치면 원화로 150만 원 이상이 든다. 이 비용이 크기 때문에 저소득자들은 본인이 해결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빈대는 일반인들이 처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확산해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빈대의 유행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가 있다. 한국 매체의 기사를 보면 빈대 감염의 원인으로 외국인 유학생, 외국인 근로자 등이 많이 언급되는데 감염과 확산 이유는 매우 다양해서 누구나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함부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예를 들자면 빈대의 확산은 고비용 때문에 저소득층에서 비교적 높게 나타나지만 오히려 외국 여행을 하며 호텔에서 숙식할 수 있는 중산층에서 감염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혀를 잘못 사용하여 스스로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여행과 이동이 잦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목회자들이나 고려해야 할 것 하나가 있다. 이들이 국내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 초청받아 호텔에서 묵을 때 침대에 눕기 전에 유심히 침대 매트리스와 이불을 살펴야 한다. 나무 침대면 특히 침대 프레임 사이 사이와 매트를 잘 살펴 검은 점같이 생긴 빈대의 배설물이 있으면 즉각 방을 옮기거나 다른 호텔로 옮기는 것이 좋다. 혹시 모르고 하루를 보내더라도 몸의 혈관을 타고 일정한 간격으로 빨갛게 물린 흔적이 여러 개 있으면 입었던 옷은 버리거나 아니면 비닐봉지에 넣고 입구를 잘 묶어 봉하여 후에 세탁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호텔 예약할 때 빈대를 발견하면 호텔비용 반납이나 피해 보상을 처리해 주는지 꼭 물어보는 게 좋다. 호텔마다 빈대 문제 처리에 대한 정책들이 있다. 알고 계약할 것을 권한다. 호텔 측은 빈대를 눈으로 발견하지 않는 이상 절대 빈대가 있다고 인정하거나 피해 보상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호텔의 명예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을 꼭 찍어 두어야 한다. 빈대가 있던 호텔에 묵었다가 초청자의 교인 집에 묵는 것은 큰 실례이다. 그냥 호텔에서 묵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빈대의 유행은 잼버리, 올림픽, 엑스포 같은 국제 행사가 열리고 나면 한껏 올라갔다가 방역이 강화되면 다시 완화된다. 지금처럼 심할 때는 타인의 집에 묵는 것은 민폐 행위다.당분간은 중고 물품을 거래할 때 유의해야 한다. 빈대가 유행하면 유난히 중고 물품 거래가 많고 버리는 빈도가 급격히 늘어난다. 이때 중고 물품을 살 때 주의하여 살펴보고 남이 버린 물건을 가져오는 행위는 금지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감염된 물건을 버릴 때 반드시 빈대에 감염된 물건이라는 메모를 남겨 다른 사람들이 재사용하는 걸 막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하는 것이라 믿는다. 빈대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코로나 유행 시 우리가 들어가 앉을 곳을 가려가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했듯이 지금은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 자신과 주위를 항상 살펴야 한다. 극장같이 사람이 많은 곳을 다녀왔으면 바로 옷을 벗어 비닐에 넣어 묶어 두었다가 나중에 뜨거운 물로 세탁 또는 뜨거운 열로 말리길 권한다.매체에서 읽은 약간의 지식으로 빈대에 대해 아는 체하거나 조언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빈대 감염자를 돕는다고 어설픈 지식을 전수하는 것은 매우 해롭다. 빈대에 감염된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며 봉사 정신으로 이리저리 약을 쳐 주는 것 역시 100퍼센트 자해 행위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방역 비용을 보태 주거나 전문가를 소개해 주는 것이다. 가끔 외국 유학생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대부분 파리, 런던,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유학하는 한국인들이다. 이들은 엘리트층이라 자기가 인터넷을 찾아 빈대 약을 사고 약 치는 방법도 익혀 서로 약을 쳐 주며 한국인의 도전 정신을 시전한다. 그러다 한계에 막혀 나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이러면 너무 빈대 감염이 악화하여 힘들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이라도 전문가 부르세요’라고 조언한다. 비싸서 못한다고 하면 ‘그럼 나중에 훨씬 더 많이 들어요’ 대답한다. 약을 어설프게 치면 잠자리 근처에 머무르던 빈대는 집안 곳곳으로 깊이 들어가 숨는다. 가구 틈, 천장, 카펫 바닥, 창문틀, 어디든 살 곳으로 찾아 숨어 좀처럼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정도면 전문가들도 힘들어한다. 비용만 더 들 뿐이다. 어설픈 지식으로 더 많은 시간과 약을 써야 하도록 일을 그르쳤기 때문이다.다른 전염병과는 다르게 빈대는 어떤 질병도 옮긴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빈대 처리 보조금이나 보험처리를 어느 나라 정부도 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냥 두면 학교, 극장, 전철, 버스, 호텔, 직장 등을 통해 온 나라와 세계로 퍼져갈 수밖에 없다. 교회나 선교 단체에서 자금을 모아 전달하거나 기금을 만들어 주위에서 빈대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정말 지혜로운 일이다. 빈대는 그야말로 공포를 부른다. 항상 새벽에 물기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것은 물론이고 알레르기 반응이 심각한 사람은 물린 부위가 심하게 부어오르고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어한다. 평상시에도 스멀스멀 빈대가 기어가는 느낌이 있어 스트레스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곤란할 정도다. 그래서 이들을 돕는 것은 중병 환자들 돕는 것 같이 시급한 일로 취급해야 한다.한국인들의 체면 문화 때문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밝히지 않아 문제가 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빈대 감염 여부를 주위에 빨리 밝히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좋다. 이런 일로 경제적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오히려 지혜롭고 서로에게 선한 일이다. 빈대가 다 처리되는 동안 교회나 이웃, 직장 출근을 삼가는 것 역시 지혜로운 일이다.코로나 유행 시 교회는 비대면 세상에서 살았다. 많은 교인이 교회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교회의 따듯한 말 한마디와 도움이 필요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유의 일을 겪어야 했던 교회는 이 일로 좋은 경험을 쌓았다. 이제 빈대로 곤란을 겪는 이웃을 위해 어떻게 도울지 모를 수 없다. 앞으로 이런 감염과 질병으로 사회 문제가 계속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가는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웃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다. 세상의 정부는 이런 것 하나 처리하려 해도 법을 만들고 시행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교회처럼 신속하게 결정하고 적절하게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이 또한 주가 주신 은혜를 베풀 기회가 아니던가!
소셜 미디어가 우리 영혼을 뒤틀고 있다
by Ian Harber
2023-11-13
“소셜 미디어는 중립 지대에 있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렸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짓말이다. 온 나라가 정신 건강 위기를 맞고 있는 이때 소셜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이 기술이 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서 정부가 나서서 여기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몬태나는 틱톡을 완전히 금지한 최초의 주가 되었다. 아칸소는 미성년자가 특정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계정을 만들려면 부모의 승인을 받도록 요구하는, 일종의 유사 법률을 제정했다.소셜 미디어의 해로움이 영성 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잘 알고 있다. 크리스 마틴(Chris Martin) 같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가르치는 핵심 스승이 되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의 패턴(불안, 분노, 두려움, 무감각)에 맞춰서 우리의 마음을 재설계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드리는 예배 관행(열기, 스크롤, 스와이프, 좋아요, 댓글)에 따라서 우리의 습관을 바꾼다. 그리고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게시하고 광고주를 통해 기업이 이익을 얻게 하라)고 요구한다.소셜 미디어는 현실에 대한 관점을 바꿈으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 인지적 왜곡 기계 역할을 한다. 이는 로마서 12:1-2을 체계적으로 뒤바꾼, 그리고 기업적으로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뒤바꾼 버전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워지지 않는다. 대신에 성화되지 않은 욕망에 가장 잘 맞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선별된 세상의 특정 패턴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에 순응하도록 손짓한다.소셜 미디어는 결코 성화에 있어서 중립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에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활동적 행위자이다. 그렇다고 소셜 미디어가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디어 섭취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도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게 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알고리즘이 소셜 미디어를 되살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우리의 욕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갈망할수록, 그리고 그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돕는 콘텐츠를 더 많이 추구할수록, 알고리즘은 제자도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 중심 콘텐츠 쪽으로 더욱 기울어질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바로 그 도구가 도리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도록 재형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소셜 미디어 사용자의 새로운 카테고리소셜 미디어의 영적 왜곡 영역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현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예 소셜 미디어 자체의 중단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디지털 바빌론에서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번영하도록 돕는 운영 방식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고려해야 할 네 가지 범주는 다음과 같다.1. 콘텐츠 개발을 통한 제자도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하여 떨어지는 콘텐츠 소비의 형성력을 낮잡아 평가한다.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면, 또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콘텐츠를 만들고 모범 사례를 사용하여 의도한 청중에게 다가가는 충실하고 의도적이며 지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교회는 특정 청중을 향해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고 있다. 점점 더 목회자가 팟캐스트로 대체되고 평균 교회 출석률이 한 달에 한 번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교회는 사람들을 지역 교회와 연결하는 지역별 디지털 미디어를 제작하여 일주일 내내 성도들을 만날 수 있다.우리에게는 이미 몇 가지 초기 사례가 있다. Immanuel Nashville은 Substack을 사용하여 교인들을 위한 짧은 매일 묵상집을 제공한다. 애리조나에 교회를 개척한 Trey VanCamp는 수년 전부터 그의 유튜브 채널을 사용하여 사역을 공개하고 있다. 다양한 책을 추천하고, 경건의 시간을 독려하고, 자신의 교회에서 인도한 워크숍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Crossing Church는 성경의 여러 권을 소개하는 Ten Minute Bible Talks라는 주간 묵상 팟캐스트를 제작한다. 2. 인플루언서 대신 선교사가 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플랫폼을 만드는 대신에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특정 청중을 위한 틈새 기반 콘텐츠를 만들고 자신을 그들을 섬기는 선교사로 여기면 어떨까? 소수의 유명 인사가 장악하는 기독교 미디어 환경 대신에 지역 교회에 뿌리를 둔 중소 규모의 기독교 콘텐츠 제작자들이 틈새 시장을 향해서 목소리를 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함으로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아니라 오로지 플랫폼 자체에만 쏟는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까? 한 가지 예가 Gavin Ortlund와 그의 유튜브 채널 Truth Unites이다. 개빈은 기독교(특히 개신교)를 옹호하는 명확하고 도움이 되는 냉철한 동영상을 만든다. 또 다른 예는 젊은 그리스도인 틱토커 Elijah Lamb(@doctrinewithlamb)이다. 그는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보다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더 친근한 플랫폼에서 7만 명이 넘는 청중을 대상으로 꾸준히 어려운 교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두 제작자는 자신의 디지털 플랫폼에서 각각 고유한 형식으로 변증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콘텐츠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청중을 찾고 있다. 나름대로 그들은 다 디지털 선교사이다. 3. 좋은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큐레이팅하자모든 사람에게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콘텐츠 제작은 시간과 정신의 노력이 들어가는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콘텐츠 큐레이팅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성장하는 데에 유익한 자원을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목회자라면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더 깊이 파고드는 데에 필요한 추가 자료가 담긴 웹페이지를 만들어서 설교 시리즈와 함께 게재할 수도 있다. John Houmes 목사는 ‘몸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관한 설교 시리즈와 관련해서 바로 이 작업을 했다. 나는 누군가의 신앙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백 시간이 넘는 음악과 팟캐스트를 담은 Spotify 재생 목록을 만든 적이 있고 또 헌신적이고 지적인 성장을 바라는 교인들을 위해서 교회 역사 문서를 큐레이팅한 웹 사이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4. 떠남으로 저항하라아예 소셜 미디어 삭제가 답인 사람들도 있다. 그 결과는 종종 행복과 영적 건강의 증가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영적, 문화적 저항의 한 형태로도 기능한다. 때때로 기독교 진리의 증거는 참여보다는 금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느 그리스도인과 다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서 눈에 띄는 그리스도인도 있지만, 동시에 전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사람도 있다. 떠난다는 목표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건 아니다. 다만 소셜 미디어를 당신의 삶에서 제거함으로써 당신의 정신적, 영적 건강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역 사회에 긴밀하게 밀착된 친밀한 관계를 세우려는 목표를 포기하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소셜 미디어라는 새로운 선교 분야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재능 있는 콘텐츠 제작자이자 전달자를 교회가 어떻게 식별하고 지원할 수 있을까? 교회는 교인 중에서 콘텐츠 제작자를 찾아서 서로 연결하고, 협력하고, 격려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더불어서 다른 선교사들을 돕는 방식과 유사하게 “디지털 선교사”가 소프트웨어나 광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소액의 급여를 준비할 수도 있다. 특정 상황에서 제작자가 장비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교회의 카메라나 마이크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는 또한 소셜 미디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영적 왜곡 지역을 떠난 피난민들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공동체를 찾아 지역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 두 팔 벌려서 그들을 환영해 줄 건강하고, 눈이 맑고, 적응력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디지털 플랫폼을 주요 사역으로 삼은 교회라면, 소셜 미디어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라면 가정 교회, 성경 공부, 심방과 같이 오프라인 참여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대면 사역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오프라인을 선택한 사람들이 더 풍성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체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네 가지 범주가 겹칠 때도 있고 완전히 다를 때도 있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 모두 소셜 미디어를 변형시키는 기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셜 미디어 환경이 가져다주는 어두운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우리의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을 점점 더 타락시킬 것이다. 이 뒤틀린 공간에 어떻게 해야 복음의 소망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고민하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은 참으로 아름답다. 원제: Social Media Is a Spiritual Distortion Zo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빈대가 쏟아 놓은 판도라의 항아리
by 필립 정
2023-11-11
요즘 한국 사회가 빈대 출몰로 매우 시끄럽다. 내년에 올림픽이 열릴 프랑스 곳곳에서 빈대가 퍼진다는 소식을 듣고 온 세계가 촉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꿈쩍하지 않던 한국인들도 멀리 떨어진 나라의 작은 벌레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다 인천의 한 찜질방과 대구의 한 대학 기숙사에서 빈대가 발견되고, 10월 한 달에만 서울의 18개 구에서 빈대가 출몰하자 코로나 이후 잠자고 있던 혐오 정서들이 빈대에 대한 공포와 함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나는 빈대를 잡으러 다니는 직업 때문에 빈대를 흔하게 본다. 그래서 빈대를 보아도 개미나 거미 같은 벌레 보는 것처럼 별다른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다. 진정 내게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신중치 못하게 빈대를 퍼뜨린 사람들을 속단하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공포와 불안을 투사하며 날 선 혀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유행기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나를 노려보던 미국인들의 눈길이 아직도 선하고 중국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코로나 한풀이 하던 한국인들의 냉소도 여전히 끔찍하다. 그런데 요즘 빈대 출현과 함께 온라인의 댓글과 소셜미디어로 실어 나르는 혐오의 바이러스들이 다시 퍼져 나가고 있어 내 불안을 붙들어 맬 수가 없다.교회도 혐오, 편견, 인종 차별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역사가 있다. 흑사병으로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14세기 로마 교회의 모습은 코로나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와 매우 흡사하다. 로마 교회는 종말론 교리를 앞세워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페스트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이 과오로 이전까지 수백 년간 쌓아 온 영적 권위를 실추시켜 버렸다. 이 얼룩진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 사회를 비추어 보면 온전치 못한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반성할 수 있을까 싶어 이 글을 써 본다.페스트, 종말의 공포를 부르다14세기의 소 빙하기로 인한 대기근(1315-1322)과 페스트 전염병(1348)으로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죽어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전부를 교회와 함께했던 유럽인들은 전쟁, 아사, 전염병을 겪으며 이를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종말의 징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하며 회개하여 재앙을 피하려 하였지만 페스트는 교회를 통해 더 번져 갈 뿐이었다.당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건강을 살피고 공포를 극복하게 도울 곳은 교회가 유일했다. 교황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체계화된 조직력으로 유럽의 곳곳에 명령 전달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속 권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 지방만 관할하는 영주들의 분산된 힘으로는 범 인류적 재난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영주들의 세력에 비해 아직 중앙집권적 왕권은 충분히 무르익지도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일한 희망이었던 로마 교회는 이미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오랜 십자군 전쟁의 여파와 패배로 그 단단하던 조직력이 붕괴하고 있었다. 대기근이 오자 농노를 기반으로 하는 장원 제도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페스트 전염병으로 농도가 절대 부족하자 교회 재정이 무너져 버렸다. 교회 권력의 와해는 곧 사회적 불안과 공포에 불을 지폈다.미국의 역사가 바바라 터크만(Babara W. Tuchman, 1912-1989)은 이 시기를 “폭력적이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럽고, 붕괴된 시기였으며 사탄이 승리한 시기였다”고 정의하였다. 결국 교회가 무너져 가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선택한 것은 마녀사냥이었다. 세상이 불행해지는 것은 악마의 탓이라며 악마와 결탁한 마녀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기근과 전염병의 공포에 눌려 있던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도 현실을 잊고 광분하여 폭력의 불길에 휩쓸려 버렸다.1484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는 마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황령으로 단죄를 지시하였다. 곧 교황의 지시로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6)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에는 마녀와 악마와의 계약, 마녀들의 범죄, 마녀를 가려내는 방법, 재판과 처형 방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이후로 100년이 넘도록 28판이나 인쇄되었고 수십만 명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안내서가 되었다.교황이 처음에 마녀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지금의 독일 지역의 주술사들이었다. 성경(출애굽기 22:18)에 근거하여 마녀재판을 시작하였지만 사실 이들 다수는 전통적 의학을 시전하거나 신앙의 힘으로 전염병을 극복하도록 돕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교황은 이들이 교회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전염병은 몇 년이 더 지속되었고 교회는 계속 희생자를 찾아야 했다. 갈수록 걸인, 외국인 이주민, 저소득 여성, 어린아이, 특히 유대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마녀로 몰려 희생되었다. 철저한 정결 의식 때문에 전염병이 잘 안 걸리는 유대인들을 우물에 독을 타 질병을 퍼뜨렸다고 모함하여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수십만 명을 처형하였다.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절망에 젖은 농민들이나 배고픈 도시 빈민들은 종말론의 교리를 만나자 곧 자신들의 처지가 개선될 것 같았다. 지금 사탄이 잠시 승리해 재앙이 임하였지만 곧 그리스도가 이를 제압하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져 살기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탄과 손잡은 마녀들을 심판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폭력 사태를 행하며 천년왕국을 도래시킬 하나님의 전사로 자처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한 초법적인 그들의 행태는 더 큰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 코로나인류는 언제나 재앙이 닥치면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양 삼아 혐오와 분노를 분출하며 사회적 낙인을 찍고 폭력을 가하는 행태들을 계속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천연두가 번지자 아시아인 이민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괴롭히고 추방법까지 만들 정도였다. 페스트 유행이 7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마치 페스트 유행 시대를 거울로 보는 것 같은 유사한 일이 코로나 시기에 일어났다. 내가 사는 미국에서 검은 머리를 한 아시아인들은 언제 폭력을 당할지 모르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코로나 유행 이후 미국에서 아시아인 증오 범죄는 급증하여 1년간 4,000건이나 된다고 인종차별 혐오범죄를 연구하는 AAPI가 발표하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한국인의 중국 유학생,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많은 한국인이 코로나19를 일부러 중국 바이러스 또는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국내 중국인들을 잠재적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런데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코로나 이후 잠잠하던 혐오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빈대가 나타나 증오와 혐오가 가득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것이다. 빈대가 나타나자 매체마다 학자들의 입을 빌어 기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여러 편을 읽어 보았는데 한결같이 그 기사들의 행간들에 숨겨진 의도들은 불순하기 짝이 없다.오프라인, 온라인 가리지 않고 그 기사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최근에 발견되는 빈대들은 예전에 있던 종들과 다르게 주로 열대 지방에 사는 종인데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외국 이민자, 또는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한국인들이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빈대 종이 발견된 곳이 주로 외국 유학생 기숙사, 고시원, 찜질방 같은 곳이다.” 이 글을 쓴 기자들은 전문가의 견해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도록 편집하여 독자들의 혐오 정서를 자극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많은 사람이 기사를 구독하고 읽게 하여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14세기에 ‘마녀들을 잡는 망치’를 쓴 학자들을 대신해 지금 21세기의 각종 매체가 혐오와 폭력의 광기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돈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조금만 더 알면 속지 않는다빈대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면 우리는 매체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빈대는 원래 박쥐의 몸에 붙어 있던 박쥐벌레(Batbug)였다. 석기 시대에 수렵 생활을 하던 조상들은 주로 떠돌며 동굴에서 생활하였다. 동굴에서 박쥐와 함께 기거하면서 사람들의 몸에도 박쥐벌레가 같이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수렵 생활을 끝내고 농작물 경작을 하며 주거 생활을 하면서 박쥐벌레도 사람들의 주거지에 같이 살게 되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 벌레를 침대벌레(Bedbug)라 부른다.한국에 빈대가 급격히 퍼지게 된 계기는 미군정 시기에 들어온 미군 때문인 것 같다. 1차 세계대전, 2차 대전 이후 빈대가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렸는데 제일 극심한 곳은 미군 진영이었다. 미군을 따라 상륙한 빈대들은 1970년대까지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DDT를 사용하면서 그 이후 빈대의 출현이 더 이상보고 되지 않았다. 빈대가 다시 나타난 시기는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세계화의 진행과 더불어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부터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 정서상 빈대가 얼마나 번져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이에 관한 어떤 연구나 조사도 이루어진 질 수 없었다. 최근에 발견되는 열대성 빈대 또한 언제 어디서 누가 들여왔는지 공식적인 보고조차 없다. 빈대에 관한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기숙사나 고시원이나 찜질방에서 기거하는 가난한 외국인 유학생들을 빈대 유입자로 낙인을 찍어 버리고 있다. 그리고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를 것처럼 분노를 표출한다. 이제 한국 교회가 과연 코로나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달래 주고 위로가 되었는지 반성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코로나19가 번져 가자 정부에서 모이는 예배를 당분간 중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종교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코로나19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라고까지 하며 예배를 강행하였다. 그러다 여러 교회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이 되면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게 되자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잘못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사에서 언제나 교회는 자기 생존 유지에 급급하였다. 교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성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해서 페스트를 퍼뜨렸던 14세기의 교회와 지금의 교회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유사하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혐오와 폭력의 광기를 누그러뜨릴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인간은 습관적으로 자기 죄를 부정하고 합리화한다.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누구에게서 옮았을까에만 집중한다. 머릿속에서 작동되는 원인과 결과의 계산기에 언제나 나는 피해자로만 남는다. 나는 절대 가해자일 수 없어 가해자는 언제나 남이 된다. 가해자를 찾아 징벌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고 덤벼들지만, 대상은 항상 자기를 대변할 수 없는 만만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힘든 뇌구조를 갖고 있다는 뇌 과학자 정재승 교수의 말이 맞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각종 방어기제와 거짓으로 무장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리를 보면서 결국 아담의 후손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원인과 결과의 체계는 계속 죄를 합리화할 수밖에 우리의 영혼이 쉴 자리가 없다. 오늘도 이 글을 마치면서 하나님의 돌발적인 은혜가 이 폐쇄적인 시스템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히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해 본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자기가 만든 여자 판도라에게 항아리를 하나 선물한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자 혐오, 증오, 거짓 같은 죄악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항아리를 막아 버리자, 그 안에 담겨 있던 희망은 끝내 세상으로 나아오지 못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이야기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과 다른 것은 판도라의 항아리에서 쏟아져 나온 것 같은 이 세상에 구원의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러 오셨다는 것이다. 빈대 때문에 쏟아져 나온 이 혐오와 폭력의 세상, 주의 은혜가 아니면 어디 희망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by Russell L. Meek
2023-11-10
TGC의 성경 읽기(Read the Bible) 운동에 참여하세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일 년 안에 힘을 합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어렸을 때 나는 암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할머니의 머리카락이 화학요법으로 서서히 빠졌고, 암에 굴복한 몸은 말라갔으며, 할머니가 숨을 거둔 방 밖에서 쭈그리고 있던 나를 위로하던 간호사의 말까지, 나는 그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한다. 무엇보다 암 투병 내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며 쉬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야기하던 할머니의 모습은 여전히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할머니가 인생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을 이해하는 데에 무려 수십 년이 걸렸다: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욥기가 알려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왜 욥을 회복시키셨을까? 나는 답을 숨길 생각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언제나 마음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회복을 원하셨다. 이것이 욥기 전체가 추구하는 주제이다. 욥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욥의 (또는 다른 사람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무려 마흔한 장에 걸친 빽빽한 시에 이어 욥기의 마지막 여덟 구절[욥 42:10-17]에 도달한 순간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욥기가 고난에 관한 책이라고 쉽게 생각하곤 한다. 고난이라는 주제가 욥의 서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욥의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은 누구의 몫인가, 그리고 나아가서 고통을 피하는 방법에 대한 오랜 투덜거림은 이 책이 전하는 더 큰 신학적 메시지를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오늘날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주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인간도 감히 하나님에게는 티끌 같은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고통받을 사람이 아니었다욥 역시 죄인이기는 하지만(롬 3:23), 그러함에도 욥기 서문은 욥이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욥 1:1)이라고 말한다. 3절은 욥의 막대한 재력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마치 그것이 욥의 정직함의 결과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묘사된 순종에 대한 축복과 일치하는 해석이다(신 28:1-14).욥은 자신의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나 1장에서 벌어지는 여호와와 대적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른다. 그러나 책 전반에 걸쳐 욥의 주된 불만은 자신이 그렇게 가혹한 형벌을 유발할 죄를 짓지 않았기에 지금 닥친 고통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그가 받는 고통이야말로 그가 지은 죄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독자들은 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우리가 곧 살펴보듯, 그것은 요점이 아니다. 핵심은 욥과 그의 친구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사실이다.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는 욥의 주장과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친구들의 주장 모두에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할지 저주할지 통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생각이다. 신명기 28장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같은 신약성경에서도 분명히 밝히듯이 하나님은 사람의 선택과 관련된 보상과 징계의 범주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욥기 속 당사자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범위를 가정하고 있다.그들은 고난과 죄, 축복과 순종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바라보았다. 축복은 항상 순종에 대한 보상이고 고통은 항상 죄에 대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서 순종은 항상 축복을 가져오고 죄는 항상 고통을 가져온다고 간주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올바른 행동을 통해서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는 우주의 사탕 자판기로 축소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높이고 하나님을 낮추는 행위이다. 여호와께서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신 이유이고, 또한 욥이 회개해야만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욥은 회복될 자격이 없었다욥기의 마지막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축복의 분명한 표시인 막대한 부와 많은 자녀를 얻은 이야기로 끝난다(신 28:1-14). 마치 저자가 미소를 지으며 독자들에게 해피 엔딩을 선물하는 것 같다. 아마도 1장 속 욥을 보면서 그가 충분히 복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독자라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욥기를 끝까지 읽고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욥의 시련과 야훼의 놀라운 자기 계시를 읽은 후, 하나님이 그의 무한한 지혜와 공의 안에서 선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욥의 고백에 마침내 우리도 동의하는가? 42장은 하나님이 욥을 회복시키신 내용이 아니다. 욥은 확실히 옳지 않은 말을 한 것에 대해서 회개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 42:5-6). 그러나 욥기는 여전히 욥에게 행한 악에 대해 여호와께 책임을 묻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주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그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또 위로하기도 하였다”(욥 42:11). 우리는 다른 성경(예: 창 3장; 요일 1:5; 약 1:13)을 통해 여호와가 악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욥기 속 구절과 다른 구절(예: 암 3:6)은 하나님이 악을 이기고 악까지도 그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주권자이심을 분명하게 한다. 이건 인간이 풀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여호와께서는 욥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왜 “욥의 말년을 그의 처음보다 더 복되게”(욥 42:12) 했는지에 대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그렇게 하셨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욥의 상황에 중점을 맞추는 식으로 욥기의 결말을 해석하는 것은 특히 욥이 여호와와의 만남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드러난 앞선 이야기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욥기를 다 읽어도 우리는 고통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가진다. 그럼에도 최소한 축복이나 저주의 경험이 사람의 의를 측정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축복하거나 저주하실 수 있다.원제: Why Does God Restore Job?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를 더 기이하게 만들자
by Darryl Dash
2023-11-09
지난 토요일에 나는 불신자들이 적지 않게 참석한 결혼식에서 설교를 했다. 나는 신랑신부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불신자에게 복음까지 전하는 성경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어려운 구절을 골랐다. 에베소서 5:22-33. 나는 신랑신부에게 주례자로서 하기 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고 말했다. 바로 복종과 사랑이다. 동시에 긍정적인 말도 있다고 말했다. 서로 사랑하고 복종할 때,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두 사람이 반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다. 나는 복종에 관해서 말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주제였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런 일이 퍽 자주 발생한다.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설교하다 보면 지금 우리 생각과 모순되고 이상해 보이는 부분을 성경 속에서 꼭 만나곤 한다. 전에는 그런 구절을 부드럽게 하거나 아니면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나는 어려운 구절들로 곧장 달려간다. 나이가 들수록 기독교의 어려운 부분이 지렛대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굳이 어려운 주제를 피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에라도 어려운 구절을 적극적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더 정직하다어려운 문제를 피하는 교회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만나는 사람들의 반응은 실망스럽다. 이건 마치 고객을 유인하는 상술 같다. 성경 속 어려운 주제는 적지 않다. 따라서 교인들이 나중에 그런 부분을 일부러 숨겼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솔직하게 알릴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사도행전의 설교를 보라. 사도들은 적대적인 청중과의 의사소통에 매우 능통했다. 종종 그들은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으로 바로 이동했다. 그런 내용은 피하거나 부드럽게 페달을 밟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공개하는 것이 좋다.더 힘 있다어려운 주제의 공개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우리에게 필요한 대위법을 제공하는 지점이 바로 성경 속 난제가 있는,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성경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 어려움이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소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다. 따라서 어려운 구절일수록 피하기보다는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과 우리가 메시지를 전하는 교인들 사이의 긴장 지점은 무엇인가? 그 지점을 피하지 말라. 적극 끌어안으라. 성경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변화를 어떻게 이뤄내는지를 보여주라. 결국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과 사고방식으로 고쳐 나가야 한다. 어려운 구절을 피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무엇보다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복음의 타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 모두와 모순된다(고전 1:18-25). 우리는 믿기 어려운 많은 내용을 믿는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성육신. 그의 죽음, 장사, 부활이 역사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 더불어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이다. 믿지 않는 귀에는 이 모든 게 이상하며, 복음을 타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부드럽게 바꿀 수 없다.내 생각에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경향과 기독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더 낫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응답을 요구한다. 말씀이 현대인의 감성과 모순될 때, 올바른 접근 방식은 모순의 완화가 아니라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더 나은 말씀을 어떻게 제공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을 부드럽게 하지 말라. 정면으로 제대로 이야기하라. 달려가라. 어려운 부분, 이상한 부분, 괴이한 부분은 오히려 하나님 계시의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보다 더 나은 말씀을 어떻게 주시는지 더 잘 보여줄 수 있다.원제: Keep Christianity Wei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에서도 아기 울음이 사라지고 있는데…
저출산 시대의 교회
by 이춘성
2023-11-08
최근 셋째를 출산하고 여러 교회에 가서 특강과 설교를 하면서 출산 소식을 전하면 사람들이 내게 박수를 보내 준다. 노산(내 나이는 47, 아내의 나이는 46, 첫째는 고2, 둘째는 중2)이고 셋째라는 말에 격려해 주는 의미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리라. 또 심각한 저출산의 시대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런 반응이 어색하기만 하다. 아이를 낳고 며칠 후에 서울의 어느 대형 교회에 가서 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을 했다. 강의 시작 한 시간 전에 담당 장로님을 만나 차담을 잠시 나누면서, 늦은 나이에 셋째가 태어났다고 말했다. 매우 기뻐하시면서 요즘 청년들의 비혼, 신혼부부들의 딩크족 등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면서 나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래서 난 “교회가 문제입니다”는 첫 문장으로 내 말을 이어 나갔다.“장로님. 제 생각에, 저출산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입니다. 남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 명령(창1:28)을 믿는 우리가 그 말씀대로 교회를 운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직원과 사역자들에게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이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다행히 대형교회에는 교회 직원들, 특히 여자 직원들에게는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극히 일부이지만요. 그리고 그것도 사역자들에게는 예외입니다. 남자 사역자들이 출산 휴가와 휴직을 사용한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일반 직장은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기에 그럴 수 있지요. 그러나 교회는 가치와 성경을 믿고 따르면서 이를 보여 주고 교회의 성도들이나 세상을 향해 성경의 가치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가정사역, 어머니 기도회, 부부 세미나, 자녀 교육 세미나 등. 오늘도 저를 부르셔서 이런 강의를 부모들에게 하고 있지만, 사실 교회의 목사와 전도사, 직원들은 이렇게 실천할 시간도 여유도 없습니다. 정작 목사들은 아이가 태어나도 아이를 신앙으로 돌볼 시간이 없지요. 사모들은 방치당하고…. 이런 상황을 교회를 위한 희생이라고 말하고 포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목사들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거룩하게 기르라고 설교하고 가르치면 누가 듣고 따르겠나요? 저는 청년 사역을 오랜 시간 했는데, 이런 위선을 보면서 결혼하고 딩크족으로 살겠다는 청년들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의 교회가 먼저 사역자들의 출산 휴가, 육아 휴직을 추진해 주세요. 이런 유명한 교회가 이를 추진하면 다른 교회도 배우고 따르겠지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진지하게 내 말을 듣던 장로님은 자신이 당회에 적극적으로 건의해 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사역자는 당회의 분위기는 지출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지금 있는 사역자도 줄이려 한다고 귓속말로 알려 주었다. 교회도 나름 여러 고민이 있으리라 생각한다.교회의 아이들이 없다. 새신자 전도도 문제이지만, 교회 안에 신혼부부도 적고, 결혼한 부부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지방에서는 장례식과 병원 심방은 많지만, 산모 심방과 유아 세례는 일 년에 몇 차례 기회가 없다고 한다. 개선되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여전히 교회의 구조와 시스템이 사역자들이 아이를 많이 낳으면 사역을 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이런 환경에서 다자녀를 두고 어렵게 생활하며 성도들을 섬기는 사역자들의 믿음이 위대하고 감사할 뿐이다.끝으로 교회와 대기업을 비교하는 분들이 있다. 대기업처럼, 삼성처럼 일하라고 사역자들에게 요구하는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있다. 하지만 가치를 위해 일하는 직업은 그렇게 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수천 년 전 그리스인도 알았던 지혜다. 학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 스콜라(scholar)는 그리스어 스콜레(σχολή)에서 온 단어이다. 스콜레는 레저(leisure), 여가(free time)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철학자와 정치가들의 일은 스콜레의 일이었다. 이들은 정신없이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가치와 철학, 깊이 있는 영적 삶을 추구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먹고 살기 위한 일에서 여유로운 사람들, 즉 스콜라들이 가치를 고민하고,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들과 이 가치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의 정치였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이런 스콜라적 목사가 극소수라는 점이다. 모두 삼성, 현대 등의 대기업보다 더 일하는 목사들만 원한다면, 교회는 미래가 없다. 결코 성경의 가치를 성도들에게, 세상에 전할 수 없다. 가치를 가르치거나 살 수 없는 교회에는 위선만 가득해지는 것이다.
‘디지털 영’에 우리 아이들이 사로잡혔다
by Isaac Serrano
2023-11-07
“휴대폰 때문에 우리 애를 잃었어요. 애가 아예 딴사람이 되었어요.” 이렇게 한탄하는 부모의 말을 듣곤 한다. 이건 마치 “병으로 남편을 잃었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과 비슷하다. 이 두 가지가 그토록 유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유사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까? 영향 아래에서 술과 휴대폰, 둘 다 개인에게 작용하는 외부 영향이다. 도수가 높은 알코올의 경우, 그 물질을 흔히 ‘영’(spirit)이라고 부르곤 한다. 사람들이 증류주에 이 용어를 붙이기 시작한 데에는 신비한 역사가 있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이 도무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점이다. 술은 과음한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 적당하게 마셨다면, 술기운은 빨리 사라지고 몇 시간 내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술이라는 영이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초대받으면 어떻게 될까? 술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영주권을 갖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바꿔버린다. 술을 남용하는 주체가 처음에는 당신이다. 그러다가 불길한 교환 속에서 학대하는 주체가 서서히 술로 바뀐다. 그리고 학대의 피해자는 당신이 된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악한 영처럼, 술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을 왜곡시켜 결국에는 아예 달라진 성격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이와 같은 현상은 거의 모든 중독에서 발견된다. 무언가를 우리 속에 받아들이는 순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슬그머니 위험이 들어오다디지털 시대는 잠재적으로 유해한 각종 장치를 우리 집에 공개적으로 초대하는 세상을 가져왔다. 좋은 부모는 중독성 있고 유해한 물질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만, 그럼에도 디지털이라는 기술 자체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많은 위험이 생겼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자명하다. 부모들 대부분이 디지털 기기를 자녀가 새로운 기술 세계에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만 해도 잘 몰랐지만, 이제 연구 결과는 분명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화면과 소셜 미디어는 중독성이 강하고 행동을 바꾼다.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단절되고, 더 비참하고, 외롭다. 대부분의 중독성 물질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장치는 기쁨을 약속하지만 불행을 더 많이 가져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디지털 시대의 정신이 우리 자신이나 아이들을 통제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현명한 사람이라면 술과 같은 전통적인 유해 물질에 관해서 절제하고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부모와 법률이 접근 자체를 제한한다. 중독성을 가진 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을 취해야 한다. 디지털 소비를 규제하고 접근을 제한하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건 너무 위험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기술이 아이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조치는 뭐가 있을까? 미국의 법적 음주 연령은 21세이다. 아동 온라인 개인정보 보호법(COPPA)은 13세 미만 어린이의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제한하지만, 법 시행 메커니즘은 효과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부모는 지혜롭게 자녀를 위해서 결정해야 한다. 나는 16세 미만의 자녀에게는 소셜 미디어의 금지를 제안한다. 책임감 있는 성인이 포도주 두 잔을 음주 제한으로 설정하듯, 어린이와 성인 모두 화면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하루 최대 한두 시간을 제안한다. 앤디 크로우치의 The Tech-Wise Family 같은 지침서를 활용해서 다양한 방안(예를 들자면, 집의 열린 공간에서만 화면을 보는 것)을 구현한다면, 디지털 시대에 성공하는 자녀로 교육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건강한 습관이 하루아침에 들지는 않는다. 중독성 있는 디지털 기술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완화하도록 다양한 예방 아이디어를 한 번에 하나씩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구현해야 한다.절박한 시대에어쩌면 당신은 ‘이젠 너무 늦었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디지털 중독으로 자녀들이 학교, 스포츠, 가족 관계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능력은 이미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게 현재 당신의 현실이라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즉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녀를 위한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하라. 일정 시간을 정해서 화면 시청 시간을 크게 줄이거나 아니면 아예 보지 않도록 하라.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30일간의 청정 식습관 도전으로 생각하라. Screen Strong은 가족이 디지털 기술로부터 완전한 해독을 구현하도록 돕는 훌륭한 30일 계획을 제공한다. 핵심은 디지털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대담한 시도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전을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자녀를 지배하는 디지털 영의 영향력이 약해질 수 있다.성령으로 충만하여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 5:18)라고 경고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중독이 우리 가족을 사로잡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풍속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 우리 몸은 성전이며,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현재의 디지털 시대에도 신실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디지털을 제한하고 대체하는 패턴을 개발하라. 생명을 빼앗는 디지털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바꾸라.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롬 13:14).휴대폰을 내려놓고, 소셜 미디어에서 로그아웃하고, TV를 꺼라.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라. 식사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라. 픽셀의 빛에 취해서 잠자리에 들지 말고 하나님 말씀이 주는 빛의 인도함을 받아 잠자리에 들라. 자녀가 당신을 항상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하라. 자녀는 당신을 보고 그대로 본받는다. 기술이 나쁜가? 당연히 아니다. 기술의 성취는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많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성경은 포도주를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남용에 관해서만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나 자신과 아이들이 디지털 중독이라는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지혜와 신실함으로 이 위험한 디지털 시대의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 원제: What If Our Kids Are Addicted to the Spirit of the 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젊은 기독교에서 가능성을 찾자
by 김선일
2023-11-06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현재 대한민국은 세속화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종교 인구가 계속해서 감소한다. 한국갤럽에서 2022년에 9,18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종교인은 36.6퍼센트이고, 무종교인이 63.4퍼센트이다. 조사 대상의 약 2/3가 종교가 없는 셈이다. 연령이 낮을수록 종교인의 비율은 더 떨어진다. 20대는 19.1퍼센트, 30대는 24.5퍼센트로 평균과 큰 차이를 보인다. 각 종교(개신교, 불교, 천주교)의 인구도 모두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비종교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있다. 20대와 30대를 기준으로 종교별 인구 비율을 비교하면 개신교가 불교와 천주교보다 훨씬 높다. 20대의 개신교 인구는 11퍼센트로서 불교(3.5%)보다는 3배, 천주교(4.5%)보다는 2배 이상이 높다. 30대에서도 개신교 인구는 14.6퍼센트인데, 이는 불교(4.7%), 천주교(4.8%)보다 3배 이상 높은 수치다. 40대에서도 개신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지만(21.5%), 그 차이는 줄어든다(불교=15.6%, 천주교=7.5%). 그러나 50대로 가면 불교(27%)가 개신교(17.8%)를 훨씬 상회하고, 60세 이상에서는 그 차이가 더 커진다(불교=33.5%, 개신교=21.3%). 어쨌든 젊은 세대에서 종교를 갖는 이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많다. 물론 이들에게서도 사실상 기독교 인구는 계속 줄고 있으므로, 이러한 차이가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다. 비록 종교를 가진 2030에서 개신교인이 제일 많지만, 그 비율은 이전 조사에 비해 현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20대의 개신교인 비율은 2017년 조사에 비해 9.8퍼센트나 감소했고, 30대는 5.5퍼센트가 줄었다. 전체적인 비종교화, 탈교회 현상은 2030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위의 통계에 대해서는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를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가진 2030세대에서 여전히 기독교 인구가 가장 높다는 사실은 선교적으로 고려해야 할 가치가 있다. 기독교는 젊은 층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친밀한 종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마도 신앙이나 영성에 관심을 지닌 젊은이가 있다면 주변의 교회나 선교단체를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 교회는 사찰이나 성당에 비해서 젊은이들에게 접근이 가장 수월한 종교적 공간일 것이다. 가시성과 접근성 모두 높으며, 젊은 또래의 신앙 공동체도 활발한 경우가 많다. 개인주의를 넘어서한 인터뷰에서 캠퍼스 선교단체 간사는 최근 대면 수업이 전면 재개되면서 유례없는 상황을 경험했다. 믿지 않는 청년들이 자기 발로 기독교 동아리 방을 찾아온 것이다. 대학 축제 때 그 간사가 사역하는 동아리 부스를 차려 놓고 모임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한 번도 교회에 다닌 적 없는 청년들이 직접 신앙 공동체를 찾아왔다. 이들은 코로나가 터진 직후 신입생으로 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캠퍼스 현장 수업에 참여했다. 그동안 대학생 공동체를 경험한 적 없는 이들이었는데, 대면 수업 이후 재개된 교내의 모임이나 동아리는 가볍게 즐기고 생각 없이 노는 분위기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그와 같은 전형적인 또래 문화와는 달리 진지하고 탐구심이 많은 구도자 유형에 가까웠다. 이 청년들과 대화해 본 간사는 요즘 청년들이 자유로움 속에서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들이 겪는 외로움이나 관계의 문제가 하나님을 알고 변화의 여정에 들어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하의 인터뷰 내용들은 2023년 10월 5일 국민미션포럼의 ‘한국교회 다음세대 희망터치’ 발표문에 근거한다.)현대 젊은이들의 문화는 개인주의를 기본값으로 한다. 혼자 사는 게 익숙하고 다른 이들과는 아무리 친해도 적절한 경계를 긋는다. 하지만 인간은 개인주의 영토 안에서 오롯이 살아갈 수는 없다. 개인이 중요한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주의에 편승하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선교가 아니다.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어떠한 공동체를 원할까?안전한 공동체인터뷰에 응한 여러 청년은 ‘안전’이라는 단어로 그들이 열망하는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안전은 불안과 위험에 대응하는 단어다. 청년세대는 불안하다. 생계의 문제로 불안하고, 정서적으로도 불안하다. 기후 위기, 폭력, 사회 갈등의 증폭으로 인해 위험을 느낀다. 그럼에도 교회는 아직 안전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때로 기독교 지도자들의 발언과 행태가 위험을 조장한다. 교회에서 전하는 하나님은 편파적이고 무섭게 느껴진다. 외로움과 불안을 느끼는 청년들은 안전한 공동체를 찾는다. 여러 청년이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주고 안전함을 느꼈던 교회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나 한때 신앙을 잃고 스스로 불신자로 간주했던 한 청년은 외로운 유학생 시절,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 준 한인교회의 경험으로 다시 신앙과 기도의 의미를 회복했다. 또 다른 청년도 한동안 “가나안 성도”로 지내다가 자기를 잊지 않고 문자로 안부를 묻는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보채지는 않는) 교회 어른이 고마워서 그가 섬기는 청소년부에 보조교사로 참여하다 신앙을 다시 회복한다. 교회를 멀리 한 자신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친절히 기다려 주다가 결국에는 돌아온 자신을 환대하는 어른들에게 감명을 받는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안전한 공동체를 마련하는 일에는 기성세대의 역할도 중요하다. 사회에서 회자되는 세대 갈등론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발붙일 자리가 없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신앙 유산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단, 환대와 존중의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그렇다.삶으로 침투하는 영성공동체만으로 젊은이들의 신앙이 온전히 회복되진 않는다. 청년의 시기는 존재의 외로움과 허무감을 겪는다. 공동체를 통한 관계와 정서적 위로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현실과 미래를 더 큰 세계관 안에서 마주해야 한다. 교회는 청년세대의 가볍고 재미있는 문화를 복제만 할 것이 아니라, 인생과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인 설명 체계를 제공해야 한다. 오랫동안 취업 준비를 하면서 낭패감에 시달리던 한 청년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넘어서 나의 삶을 계획하시고 지금 자신의 상황도 그분의 타이밍 안에 있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면서 큰 위로와 더불어 ‘감각의 확장’을 경험했다고 한다. 이는 인식의 전환을 통한 삶의 재구성이다. 인식의 전환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에서 비롯된다.싱클레어 퍼거슨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교훈의 본’(롬 6:17)을 따라 완전히 새로운 모양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복음 교리가 그리스도인에게 확실히 각인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이나 영향을 남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성도의 삶, 23). 젊은이들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말랑말랑한 위로나 재미있는 경험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존적 상황을 해석하고 인생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는 견고한 답을 원한다. 성경의 큰 맥락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기도와 봉사만 요구하지 말고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언어와 상황에서 들려지도록 전달하는 일은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역자가 끌어안아야 할 과제다. 인간은 생애 주기에 따라 위기와 숙제를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20대는 주체적 성인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자아와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30대는 자립과 가족의 구성이라는 과제를 갖는다. 그때 그들 곁에 누가 선한 조력자의 역할을 할 것인가? 누가 가장 견고하고 분명한 진리를 친절하게 들려줄 것인가? 복음과 그 복음대로 살아가는 공동체는 모든 세대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사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by Trevin Wax
2023-11-05
얼마 전에 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하면서 예수님처럼 영원한 심판을 다뤘다. 우리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 이상, 나는 아무리 불편한 진리라고 해도 결코 살금살금 피해 가며 성도들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정말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에 관한 경고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내용, 그리고 분노와 정욕이 지옥불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또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성경에 있는 그대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말고는 없다. 그게 현대인의 귀에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말이다.예배가 끝난 후에 한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는 그동안 많은 교회를 다녔는데 지옥에 관해서 말하는 목사를 처음 봤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중요한 메시지를 큰 소리로 선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마치 저주의 단어로 남용되는 지옥이 그 힘을 잃은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비밀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신실한 신자들은 그 단어가 여전히 정통 기독교의 일부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소리 내서 말하지 말아야 할 누군가의 목적지임을 알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심판을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예수를 전한다는 걸까? 예수님의 그 다양한 비유를 어떻게 설명한다는 걸까? 멸망에 대한 그의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경고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걸까? 이게 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양자택일과 대조를 강조하셨다. 비록 당신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교리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교단을 초월한 급진 그리스도인(red-letter Christian)이라고 할지라도, 멸망과 사라지는 영혼을 경고하신 예수님의 육성(the red letters)과 지옥을 상징하는 죽지 않는 벌레와 꺼지지 않는 불의 이미지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굿바이, 사탄지옥이 없다는 사실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은 사라지는 사탄이다. 점점 더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는 마귀나 귀신, 세력과 정사에 관한 말씀을 듣는 게 힘들어지고 있다. 말 그대로 사탄이 사라졌다. 그렇다. 은사주의 교회나 오순절 교회에는 종종 나타나지만, 점점 더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이 높아지는 복음주의 교파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사탄이라는 고소자에 관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 앞에서 사람들은 치를 떤다. 악마가 모든 문제의 배후에서 엿보고 있고, 사탄의 영향력이 성경의 증언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지나치게 강조되는 다른 신앙 전통에 만연한 일종의 과장을 피하고 싶어 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절제된 방식으로 가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거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유일한 장애물에 있는데, 그게 바로 성경이다. 성경뿐만 아니라 교회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비서구 지역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성경이 이런 태도를 반대하고 있으며, 기독교 역사 속 모든 신자도 그러했고, 또 서구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지역의 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우리는 지금 많이 특이하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침묵은 꽤나 정교하다고 여겨지는 거 같다. 사탄이 사라지고 생긴 여러 여파문제는 이거다. 당신이 사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말하는 구원은 성경이 증언하는 죄와 구원이 아니다. 고작해야 일반적인 좋고 나쁨으로 구분되는, 심리치료적이고 세속적인 범주를 넘어설 수 없다. 지옥에 대해서 당신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나누는 복음 속에는 긴박감이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전하는 복음은 단지 사람들이 듣기에 더 좋고 더 만족스러워 보이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 이게 바로 인스타그램 인플루엔서부터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는 일이다. 당신이 악마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천사도 언급하지 않을 거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성경이 실재라고 말하는 영의 세상을, 즉 보이지 않는 영역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고작해야 말씀에서 벗어난 우주관을 가진, 빈약한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는 분명하게 성경의 주장을 확증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 교회는 거기에 동참하고 있다. 더욱이 천사, 귀신, 사탄, 지옥에 대한 빈약한 시각은 우리가 죄와 싸울 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자 할 때,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마음의 순결을 추구할 때, 우리를 불리하게 만든다. 사탄의 상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맥락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며, 영적 전쟁터가 어느새 평화로운 위로와 성취의 현장으로 변형되었음을 드러낸다. 영원이란 지분의 무게를 줄임기독교가 말하는 영원이 달린 문제의 중요성을 낮출 때 수반되는 필연적인 결과는 결국 사소한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달한 생사의 긴급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무슨 결과가 생길까? 우리는 생사의 긴급성을 다른 문제에 삽입함으로 세상 문제를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구 교회에서 목격하는 현실이다. 우리가 우주적 관점을 잃고 “이 세상”과 관련된 삶의 측면만을 강조할 때, 미래의 심판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경시할 때, 우리는 결국 영원한 정의에 대한 희망마저 잃게 된다. 이는 결국 지상의 정의만이 우리에게 남은 전부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완전한 정의를 달성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정의가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현실을 만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밖에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남은 결과가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각종 정의 추구는 사실상 생사의 투쟁이 된다. 진짜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할 무언가를 찾는 과정에서 싸워야 할 진짜 전쟁 대신에 우리는 쉬지 않고 계속되는 작은 전투에 매료된다. 위대한 드라마를 놓친 사람의 눈에는 이 세상이 만드는 작은 세속적 드라마가 중요해 보인다.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있는가? 나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사탄, 지옥, 천사, 악마에 대한 설교가 어떻게 다가갈지 깊은 고민 없이 섣부르게 하는 설교를 권하지 않는다. 상황화는 중요하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해석하라고 설교자를 주셨다. 단지 말씀은 소리 내서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작 필요한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주의 깊게 설명하고 성경이 쓰였을 당시와 지금의 문화적 거리를 인정하면서 사람들이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초대하는 것이다.하지만 아무리 세심하게 배려한다고 해도 이상한 점을 모두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고 현대인의 귀에 이상하게 들리는 모든 부분을 다 없애겠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특이한 점은 눈에 띄기 마련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그를 전하는 예수님의 선포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가 말씀하신 모든 것, 심지어 오늘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까지도 고심해야 한다. 그건 독선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확장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교묘함으로 심판에 대한 경고를 비웃는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이중적인 공격도 포함하고 있다. 정통적이고 건전한 신앙고백을 고수하는 교회도 얼마든지 성경이 강조하는 가르침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있다. 올바른 교리를 따르면서도 거기에 따른 합당한 엄중함을 가지고 그 교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가능하다. 오늘날 사탄이 신자들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의 하나가 목회자들이 예수님처럼 말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예수님에 관한 참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처럼 설교하게 하는 것이다. 원제: Whatever Happened to Sata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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