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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by 고성제
2023-11-03
하나님의 궤를 이스라엘로 옮기던 중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죽이신다(삼하 6장). 이런 기사를 읽으면 누구나 불평하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화를 낸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느냐!” 그도 그럴 것이 웃사가 무얼 잘못했는지가 썩 잘 이해되지 않는다.물론, 우리는 다 잘 알고 있다. 법궤를 수레에 실어서 운반한 것부터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법궤는 사람들이 메거나 들고 운반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법궤의 네 귀에 고리를 달라고 명하셨다. 그러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이 큰 잘못인데…. 그럴지라도 그것은 웃사의 잘못이 아니라, 다윗 왕이나 그의 종교 담당 비서관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장대에 꿰어서 나르게 했더라면, 짐승이 날뛰어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은 일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 같아져 손을 내민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웃사야! 고맙다!”는 음성이 들려야 할 상황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고, 독자의 감정이 좋지 않다.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화내기 전에 다시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무엇을 보게 될까? 우선 그 현장에 ‘웃사의 죽음’만 있는 게 아님을 보게 된다. 거기엔 언약궤도 거기 있고, 그뿐만 아니라 뒤돌아보면 성경에는 그때까지 언약궤에 관련된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웃사의 죽음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 마치 펼침막처럼 이 사건 배후에 펼쳐져 있는 그 에피소드들을 함께 살피며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에피소드 1첫 번째 에피소드는 사무엘상 4장에 있다. 엘리 제사장이 다스리던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 블레셋과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가 알다시피 당시는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그 지역에 전쟁이 잦았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약 4,000명이 죽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한다. “법궤를 가져오자.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이기게 해 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그 전쟁터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나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하게 될 것’이라고 믿은 그들의 생각은 미신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단히 모욕적이었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들은 하나님을 조작가능한 분으로 본 것이다.하지만 우리의 상황도 이와 똑같다. 사실 오늘 우리도 성경 계시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각도 똑같이 흐를 것이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분이라는 걸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생각과 다르다는 건 우리로서는 생각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늘 보는 것이 뭔가? 늘 애쓰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분과는 전혀 다른 분이라는 걸 알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계신 것이다. 거룩하고 거룩하고 또 거룩한 분! 쉽게 말하면 다르고 다르고 다른 분이다. 너무 다르고 다르고 달라서 어디 견주어 설명할 데가 없다는 것이다!법궤와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가 동일하게 바로 그 점을 가리킨다. “나는 너희가 상상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같은 얘기였다. 장로들의 제안은 이제 다시는 패배하지 않게 할 놀라운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조작이 가능한 분이 아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이라, 마음대로 살고, 그러다가 어려운 일 생기면 그냥 하나님을 동원하려 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래서 전쟁의 결과도 기대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들은 다시 패배했고, 그 결과는 이전보다 더 비참했다. 전사자 수가 이전의 8배에 달했다. 게다가 법궤마저 빼앗겼다.알다시피 이런 상황은 당시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지역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것은 다곤이 여호와보다 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영광스럽지 않은 분인가? 이제 더 이상 만왕의 왕이 아닌가?우리의 하나님 되시기를 거절하고 사임하셨나?블레셋인들도 생각했을 것이다. ‘다곤이 최고란 말인지? 우리의 다곤이 이제 이스라엘 신의 사업을 인수합병한 것이지?’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을 것이다.에피소드 2-3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블레셋 땅에서 일어난다. 법궤를 빼앗아 간 블레셋인들은 그것을 다곤 신전에 두었다. 그들은 승리에 몹시 들떠 있었고, 법궤는 그들에게 마치 승리의 트로피와 같았다.하지만 다음 날 아침,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아침에 신전에 들러본 그들은 경악했다. 다곤 신상이 법궤 앞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랐지만, 우연이라 생각하고 신상을 다시 원래대로 세워 놓았다. 하지만 그다음 날 아침 그들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다곤의 머리와 손목이 아예 잘려져 있는 것이다. 얼마나 불길하였을까?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온 동네에 갑자기 독한 종기가 돌았다. 그 재앙을 피하려고 사람들은 언약궤를 이곳저곳으로 옮기곤 했는데, 어디로 옮기든 피할 길이 없었다. 법궤가 있는 곳엔 어김없이 재앙이 내렸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라고 아우성쳤다.에피소드 4얘기는 자연스레 네 번째 에피소드로 이어진다(삼상 6장). 법궤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제 그것을 돌려보낼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가 제안했다. 궤를 보내되, 그 재앙이 그 신으로부터 왔는지 우연이었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아니냐고. 그가 제안한 방법은 간단했다. 새끼를 낳고 아직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준비해서 그것들로 수레를 끌고 가게 하자는 거다. 새끼는 집에 놔두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 소들이 새끼를 두고도 이스라엘 쪽으로 간다면, 그건 이 일에 이스라엘의 신이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가져오면 안 되는 법궤를 가져왔다는 뜻이라고 보기로 한 것이다. 나름 논리적으로 치밀한 방법이었는데, 그렇게 시행한 결과는 놀라웠다. 소들이 곧장 이스라엘 땅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끄는 사람도 없는데, 길을 잘못 들지도, 멈추지도, 무얼 먹으려고 곁길로 빠지지도 않았고 새끼에게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이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다 틀렸다는 거다. 하나님은 포로였던 적이 한순간도 없으며, 블레셋 땅 다곤 신전에 있을 때도 그곳에서 여전히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은 결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다. 블레셋은, 하나님을 포로로 잡기는커녕, 언약적 관계가 없는 그들은 그분의 상징물조차 그들 가운데 두고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법궤를 두고도 저럴 정도니, 그분의 실재(real presence)를 감당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명백했다.그뿐만 아니라 ‘그런 분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은 젖먹이를 둔 암소의 본능보다도 강렬했다. 그들이 그토록 잘못된 믿음의 미몽 속에 있을 때조차 말이다. 주님은 훗날 포로로 잡혀갈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결국 이 에피소드들은 무얼 말해 주나?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거룩하신데, 그의 사랑도 자비도 모두 남다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신도, 블레셋인들이 생각하는 신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그분을 배워가야 하는 것이다.에피소드 5이제 법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궤를 보고 너무 반갑고 궁금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그것을 들여다보려고 그만 그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리하여 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언약궤는 고핫 자손만 다룰 수 있고, 그들조차 만지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려 했던 것이다.여기서도 하나님은 다시 한번 거룩하심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분은 완전 타자였다. 조금이라도 비슷한 점이 있어야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이해할 텐데, 달라도 완전히 달라 알거나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 단지 만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이해가 불가능한 분이었다. 그분은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순종할 분이지, 분석하고 판단할 “그것”이 아니란 말이다. 놀랍고 위대하기를 상상 자체가 불가할 정도라는 것이다.에피소드 6이제 본문 곧 마지막 법궤 얘기다. 이 일은 다윗이 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시는 중에 일어났다. 다윗은 이 일을 위해 군대를 모으고 풍악을 울렸다. 그때까지 분위기는 좋았다. 하지만 다시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궤를 옮기던 중에 갑자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고 놀란 웃사가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고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지금까지 배후의 법궤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것은, 본문을 읽을 때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들이 잘못했는데, 왜 웃사가 죽어야 하나…. 설혹 웃사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이렇게 죽는 건 좀 심하지 않나….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얄팍한 감정을 앞세워 성급하게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설교자로서 우리는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비극을 대할 때마다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이 이런 비참한 비극까지 감수하고도 하시고자 한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을 겸손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는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평범한 돌도 뒤집어 보고 나뭇잎도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히 웃사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이거나, 다시는 만지지 말라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게 복음의 복음 됨을 더욱 밝히 보여주고자 하는 계시임을 보게 된다.단순히 “이제 웃사는 지옥 갔다”는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을 그렇게 단순하게 보면 안 된다. 사실 성경 인물들은 우리를 위한 드라마에 등장한 등장인물들이다. 드라마에서의 배역이나 내용을 가지고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말하는 것은 무리다. 드라마에서 배우 아무개 씨가 죽었다고 실제 그가 죽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실 웃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 말하도록 위임받지 않았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그러면 웃사 사건은 복음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어떤 하나님이 어떤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드러냄으로 그렇게 한다. 사실 복음이 정말 제대로 기쁜 소식이 되려면, ①하나님이 어떤 위대한 분인지를 알아야 하고, ②동시에 인간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③그렇게 위대하신 하나님이 그런 인간을 어떤 위대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세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깊고 풍성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는 복음이라는 이 기쁜 소식이 왜 그렇게 기쁜 소식인지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그렇다면 웃사 이야기는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 본문에서 웃사의 죽음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히려 웃사의 죽음을 그 이전에 이어져 온 법궤에 얽힌 이야기라는 펼침막 앞에서 법궤와 함께 보아야 한다고 했다. 웃사는 왜 죽었나? 법궤에 손을 대는 바람에 죽었다. 그는 왜 손을 댔나? 소들이 날뛰는 바람에 법궤가 굴러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법궤가 떨어져 더러워질까 염려한 것이다. 길에는 짐승의 배설물을 비롯해 더러운 게 많으니까 말이다. 이 점에서 그의 행동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하지만 그가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말 더러운 것은 길에 떨어진 짐승의 배설물이 아니라 웃사 자신이라는 거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짐승의 배설물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든 것 중에 가장 더러운 것은 웃사를 포함한 인간인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 17:9). 웃사는 자신이 그렇게 더러운 걸 모르고 손을 뻗어 하나님의 궤를 만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웃사를 치셨다. (기억할 것은 바로 이때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해 있었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 보라고 일으키신 사건이라는 말이다!)그 현장에 법궤가 있고, 그 뒤로는 이런 펼침막이 있다. 그 펼침막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거룩하다.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너희가 만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다. 나는 너희가 예배하고 순종해야 할 대상이지, 연구하고 분석하고 이제 ‘알았다!’라고 말할 “그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와 맺어준 언약 없이는 너희는 나의 상징물조차 너희 가운데 두고 누릴 수 없다. 나는 너희에 의해 조종될 수 없으며, 어느 신들보다 뛰어나며 어디서든 다스린다.이렇게 거룩하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죽었을까? 앞에 나온 에피소드들을 보며 생각해 보았나? 그 펼침막 속에서 죽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숫자가 무얼 말해 주나? 언약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몇 번 죽었어야 할지 모르는 자들이라는 거다. 우리는 매일 죽을 수밖에 없고,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성경은 그런 분이 죄인을 사랑하신 얘기다.웃사 얘기는 웃사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웃사의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이 “위하여 언약궤를 준비하신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작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대표로 삼아 구체적으로 언약을 맺으시고, 시내산에서 더욱 구체화하여, 궤에 담아, 손에 쥐어 주신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웃사와 같은 인간 혹은 그보다 못한 인간들이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못났고, 그렇게 도덕적으로 망가져서,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더러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자신들이 그러한 줄을 모르고, 넋 놓고 행동하는 우리들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런 얘기다.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이 얼마나 무지하고 더러운 인간을 이렇게까지 사랑하셨는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법궤는 오래전부터 바로 그 사랑의 증거로 그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은 지금까지 그나마 하나님 임재를 누릴 수 있었다. 그 법궤로 인해 죄인들도 그의 앞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 계획 속에서 웃사와 같은 죄인은 배제된 것이 아니라 포함되어 있었다. 기실 그 법궤와 거기에 담긴 언약은 웃사와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도 모르는 인간을 위해 말이다. 그들이 아직 연약하고 원수되고 죄인되었을 때, 본문의 그림으로는 웃사가 자신이 어느만큼 죄인인지도 모르던 그때에 하나님은 이미 그 언약궤를 주셨고, 그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 아들을 내어주고 계셨던 것이다. 웃사는, 오늘도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이미 수 없이 죽고 또 죽어야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게 한다.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고성제 목사의 설교영상 보러가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역사적...
by 고상섭
2023-11-02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현재까지 이스라엘-하마스 사이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 종교적 이권 다툼 속에서 선량한 사람들까지 희생당하는 고통의 현장을 보고 있다.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한 손에 성경을, 또 한 손에 신문을 들라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이 문제를 역사적 시선과 성경적, 신학적 시선 모두를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앞으로 두 차례의 글을 통해 역사적인 시선과 신학적인 시선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하마스를 지지한다는 대학가의 움직임과 개인들의 지지 성명이 있었다. 미국 쪽의 기사나 목회자들이 쓴 글들은 대개 이스라엘을 호의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 안에서도 비슷한 입장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서 선과 악의 구도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단순한 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신학적 뿌리가 있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동의 역사중동지방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스만제국이 통치하던 하나의 나라였다.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지만 한 국가 안에 있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제국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와 동맹국 편에서 이 전쟁에 참여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의 연합군에 패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후 현재의 아랍 22개 국가가 분리, 형성되었다. 한 나라를 여러 나라로 임의로 나누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나누어진 한 나라 안에 다양한 종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고, 또 민족이 여러 국가로 쪼개져 편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현재 이라크는 같은 이슬람을 믿지만, 이슬람의 지도자를 선발하는 방식 등 여러 면에서 차이가 큰 시아파와 수니파가 각각 60퍼센트, 3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기타 종파들도 3%). 수니파 중에서도 아랍권이 20퍼센트, 쿠르드 민족이 17퍼센트를 차지하는 등 한 나라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있어서 서로 간의 이권 다툼 등으로 내전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그들의 종교적, 정치적 이권들이 개입되어 있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이라는 나라를 임의로 나눈 것이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이스라엘은 기원전 1세기경에 하스몬 왕조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66년부터 세 번의 유대 전쟁을 통해 독립을 꿈꾸었지만 로마 제국에 진압되었고, 그 과정에서 티투스 장군에 의해 현재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이방인의 뜰 부분의 서쪽 담장만 남아 있고, 성전이 무너졌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에서 축출되어 여러 나라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역사가 시작된다. 나라를 잃어버린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다양한 핍박을 받고 편견과 오해에 극심하게 시달렸다. 특히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나라를 잃은 유대인들의 서러움을 폭발시켰다. 포병 대위 드레퓌스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명을 쓰고 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에 가게 된다. 러시아에서도 반유대주의의 확산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박해를 받았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열망은 결국 시온의 땅, 곧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하자는 ‘시온주의운동’으로 이어진다. 이 운동은 테오도르 헤르첼이 ‘유대국가’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급물살을 탔고, 이런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 경이 시온주의운동의 재정 후원자 로드 차일드 가문에 편지를 보내 영국에 재정을 후원해 주면 유대인의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벨푸어 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벨푸어 선언’은 이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인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맥마흔 선언’과 상충하기 때문에 영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맺었던 두 개의 조약이 지금의 중동 전쟁의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었다. ‘벨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시온주의는 점점 확산하였고,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긴장이 시작될 무렵 1948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가결한다. 이스라엘은 유엔의 결의안을 따라 독립을 선포했고, 팔레스타인은 반대했다. 팔레스타인으로서는 2,000년 동안 자신들의 땅이었던 터전에 이스라엘이 과거에 자신들이 살았던 땅이라며 나라를 세우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유엔의 분할안을 거부하면서 결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에에 전쟁이 벌어졌다. 3차까지 이어진 중동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인근 아랍 국가의 상당한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스라엘은 현재까지도 그 점령지에 유대인 정착촌을 세우는 등 그 땅들을 차지하고 있다. ‘두 국가 해법’과 이스라엘 정착촌 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해결책으로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이 등장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 자기의 영토에서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것이 두 국가 해결론의 핵심이다. 이 해결책은 시간이 흘러 1993년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아라파트 의장이 미국의 빌 클린턴의 중재로 맺은 오슬로협정으로 이어졌다. 이 협정으로 세 지도자는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의 극우파들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이스라엘 극우파에 의해 1995년 11월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뒤이어 이스라엘에서는 우파 연합의 강성 지도자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가 되면서 중동 문제는 다시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스라엘 극우 세력은 그들의 약속의 땅인 팔레스타인을 전부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들의 지지를 받는 강성 정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해 나갔다. 정착촌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 있으며, 이로써 분쟁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은 국제법상 불법이지만 시온주의를 신봉하는 종교적 유대인들을 계속해서 정착촌으로 이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하마스의 공격은 규탄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단순히 선량한 이스라엘에 하마스가 이유 없이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팔레스타인이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는 갈등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지 말라 중동지역은 오스만제국이 소멸하면서 여러 국가로 나뉘어졌고, 한 국가 안에서도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뒤섞여 살기 때문에 갈등과 내전이 빈발하지만, 같은 이슬람권 또는 아랍권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공통의 적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할 때는 전 아랍이 연합하여 공격하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2023년 10월 17일 가자지구에 있는 알하흘리 병원 폭발 사건은 하마스의 오발이라는 주장과 이스라엘이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아랍과 협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스라엘의 전략이라는 주장 등 여러 설이 난무한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이유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단일 사건이 아니라 복잡한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이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 이유도, 단순히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전체 아랍국가의 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마스가 예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민간인을 습격하고 인질로 잡아간 반인륜적 행위이기에 철저한 보복과 공격으로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마스 입장에서는 자신의 터전을 무단으로 장악하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만행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공격과 정착촌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국민들은 무장단체 하마스를 정식 투표를 통해 정당으로 인정해 주었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 이 전쟁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위험성 때문이다. 세계적인 헤지펀드를 운영하고 있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1년 일찍 예측한 것으로 유명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CEO 레이 딜레오는 그의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서 역사는 반복적인 빅 사이클을 가진다고 분석한다. 강대국이 무너지고 다른 신흥강국이 들어서는 일이 반복되는데, 특히 사이클의 마지막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폭동이 일어나거나 전쟁을 통해 강대국의 종말이 반복된다고 말했다. 국가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외부와의 전쟁을 통한 사이클이 반복되는데, 이 기간이 150-250년 정도이고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절대로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는 않지만,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에서 경제적 갈등에서 촉발된 분노가 외부의 전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한다. 특히 경제가 힘들어지고 사회의 양극화가 심해지면 내전 또는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고 서로 감정적으로 공격하게 되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레이 딜레오의 분석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다. 존 스토트는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에서 그리스도인은 화평케 하는 사역으로 부름을 받은 존재들이기에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쟁과 다른 나라의 갈등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미래를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균형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고 평화의 본을 보이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권고한다. 또한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공적 토론의 장에서 평화를 위해 애써야 하는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세계 곳곳에 벌어지는 기근과 전쟁의 소식들은 모두 세계를 품고 기도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 속에서 너무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현실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방산 회사 주식이 올랐다는 기사가 있었다. 모든 나라들이 자기네 나라의 이권을 먼저 생각하는 삭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어려운 시기이기에 더욱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느 한 나라를 지지함으로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중동지방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잘못된 유대 민족주의를 버리고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도 더 이상의 무력 충돌과 전쟁이 아닌 타협점을 찾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때이다. 종교와 정치적 이권이 뒤섞인 인간의 탐욕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이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넘어 우리는 세계를 위해 기도해야 할 사명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오늘도 무릎을 꿇고 이 땅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이다.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2:4)
목사가 목사 된 것은...오로지 주의 은혜
by 전재훈
2023-11-01
제대하고 학교에 복학했을 때였습니다. 복학을 신청하러 학교에 갔는데 채플실 올라가는 계단을 시각장애인 학우가 혼자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팔을 내어 주고,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그 학우가 대뜸 ‘재훈이 형?’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인지 다시 봤지만 전혀 기억이 없어서, 나를 어떻게 아는지 물었더니, 내가 군대 가기 전에 도와드렸던 시각장애인 선배가 이맘때쯤 전재훈이 제대해서 도와줄 거라고 “예언”했다네요. 사람들은 대개가 도와줄 때 팔을 잡지, 자기 팔을 내어 준 사람이 없었다고 해요. 나는 부모님이 시각장애인이셔서 몸에 밴 습관이라 팔을 내어 드렸던 것입니다. 자기 팔을 내어 주자 저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를 신대원 졸업할 때까지 6년간 도와주었습니다. 신대원 다닐 때는 장애인신학연구회를 맡아서 장애인 학우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지금도 길을 가다가 시각장애인을 만나면 팔을 내어 드리고 가는 곳까지 안내해 드립니다. 신대원 졸업할 때 시각장애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와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습니다. 장애인들을 잘 알고 그들을 돕는 법도 알지만, 하기가 싫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장애인 사역으로 부르시지 않는다고 믿었고, 그냥 평범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장애인들을 돕다가 지쳤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사역을 감당하려면 장애인을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사역에 대한 소명이 확실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목회자가 소명 없이 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만, 특수 사역이라고 부르는 일들에는 그만큼의 특수한 소명이 필요한 법이지요.최근에 목사 안수식에 갔다가 들은 권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들을 대접하려고 집에서 기르던 개를 끌고 다리 밑으로 갔습니다. 개를 죽이기 위해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는데, 그만 빗맞아서 개가 도망갔습니다. 할 수 없이 개를 포기하고 닭이나 몇 마리 잡아서 보신탕 대신 삼계탕으로 목사님들을 대접하셨지요. 그리고 집에 돌아가 보니 도망간 그 개가 집에 와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보면서 반갑게 꼬리를 치면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 개를 보면서 장로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죽이려 했는데도 그런 자기를 주인으로 알고 여전히 꼬리치는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목사님이 목사안수를 받는 분들에게 이 개처럼 충성해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지요.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 땅의 부귀영화를 바라고 사는 것은 아니기에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분명한 자기 확신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개처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시면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는 헌신과 이름도 빛도 없이 살겠다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나는 장애인 사역과 선교사로만 부르지 말아 달라는 조건부 헌신을 했던 전도사로 그런 면에서 자격 미달이었습니다. 최소한 소수의 대형교회 목사님들을 보고 자신도 성공하려고 목사 안수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나는 할 수만 있으면 큰 교회를 하고 싶었고,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화성에서 평범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장애인을 섬기고 있지도 않고, 선교사로 나갈 마음도 여전히 없습니다. 큰 교회에 대한 동경과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도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 안수를 받을 때와 비교하면 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그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목사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한 바울처럼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자기 일을 버리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종은 자기 일도, 자기 시간도, 자기 소유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러니 목사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또한 목사는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대로 주님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주님의 사역자나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개념에 목사의 지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는 성도들보다 조금 높고 하나님보다는 조금 낮은 존재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만큼은 아니어도 성도보다 좀 더 거룩해야 한다고 느꼈고, 집사님이나 장로님보다는 더 신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사님보다 1분이라도 더 기도해야 하고, 구역장보다 한 장이라도 성경을 더 읽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성도가 21일 작정 금식기도를 하면, 목사는 40일쯤은 해야 하고, 성도가 방언하면, 목사는 통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느끼는 긴장감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종 주제에 자기 시간과 소유가 많다는 것이 죄책감으로 작용했고,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이유로 돈의 유혹에 너무 약한 것도 불편했습니다. 거룩해 보이고 신령해 보이는 성도들과 경쟁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오락과 쾌락에 눈이 돌아갈 때마다 거부할 힘이 없어 몰래 숨어서 해야 하는 숨바꼭질도 상당한 스트레스였습니다. TV에 걸그룹이 나올 때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컴퓨터로 영화를 보다가도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다가도 누가 오면 성경 보고 있었던 것처럼 쇼할 때마다 ‘나는 가짜다’라는 생각에 괴로웠습니다.목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돕는 것이 아무런 보상 없이 그저 나의 희생과 헌신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매우 힘들게 했습니다. 차라리 다른 일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잘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학원 강사라도 했더라면 아내를 공장에 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거, 갖고 싶다는 거 다 사 주고, 남들 다 가는 학원에 우리 아이들도 보낼 수 있었을 거라 여겼습니다. 나와 내 가족이 다 희생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상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이 땅에서 거지같이 살아도 하늘에서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으니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는 말에 발끈해서, 천국은 들어가기만 하면 됐지 무슨 면류관이냐고, 차라리 이 땅에서 돈으로 바꾸어 쓰게 미리 가불해 줬으면 좋겠다고까지 했습니다. 천국은 가게나 매장도 없을 텐데 거기에 보화가 있다고 한들 어디에 쓰겠냐고 하면서, 이 땅에서나 유용한 것이니 쓰다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지요. 내 마음 구석진 곳에 하나님을 장애인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느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은 인정도 안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럴 바에야 뭐하러 목사 할까 싶어도, 쉽게 그만두지도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목회가 하나님의 일에서 나의 일로 슬며시 바뀌면서 교회가 내 사업장이 되고, 성도는 고객이 되었으며, 헌금은 내 수입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상품이 되었고, 십자가는 인테리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에서 하나님과 동업자로 바뀌더니, 심지어는 주객이 전도되어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나의 동역자가 되는 이상한 목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여야 할 주님이 영리법인, ‘(주)예수 그리스도’가 되어버렸습니다.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했을까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였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셈입니다. 성도들에게도 내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내가 목사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했고, 나를 목사님으로 불러주는 성도들이 내게 필요한 존재였습니다.대학가 한복판에서 꼭 필요한 직업을 묻는 설문 판을 만들어 세워 둔다고 가정해 봅시다. 한쪽은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 20개를 나열하고, 다른 쪽에는 ‘없어도 되는 직업’ 20개를 나열한 뒤 스티커를 붙이게 하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 미용사, 건축가, 일용직 근로자, 택시 기사 등을 목사와 함께 두면, 20개의 직업 중 목사는 몇 위쯤 할까요? ‘없어서는 안 되는 직업’에서는 하위권에, ‘없어도 되는 직업’에서는 상위권에 오를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부르신 종이나 동역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목사가 성도보다 거룩하거나 신앙이 좋아서 특별히 선택하신 것도 아닙니다. 성도를 돌보는 일도 목사가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전도하고 가르쳐 회개시켜서 구원받게 하고, 예배와 설교를 통해 은혜받게 하고, 제자 양육으로 성화하도록 하는 일도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씀하신 대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고전 3:7).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는 찬양처럼, 내가 목사가 된 것은 나의 헌신과 희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을 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목사가 되려고 했었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목사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행복한 목사가 되게 하시려고 인내심 많은 성도님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목사로서 하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 있으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목사도 그저 당신의 어린 양일 뿐이고, 사랑받아야 할 당신의 자녀였습니다. 목사 안수식 때, 선배 목사님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헌신하며 충성된 목사가 되려고 하셨는지를 설교하거나 권면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으로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음을 고백하시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예비 목사님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며 희생과 헌신을 결단하도록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으로 예비 목사들을 돌보아 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세워지고, 성도님들이 계셔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
교회를 사랑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by Matthew Barrett
2023-10-31
종종 마르틴 루터를 로마 성문을 향해 돌격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격렬한 시위자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캐리커처는 진실과 거리가 멀다.루터는 종파주의자도, 분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교회를 분열시키지도 않았다. 더더욱 로마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은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로마가 마침내 가톨릭(보편) 교회의 풍부한 유산을 드러내는 더욱 현대적인 혁신의 시대로 전환했다고 확신했던 루터의 원래 의도는 내부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그의 생각은 그가 내건 95개조 반박문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반박문을 제시한 이유가 공개 토론을 위해서였지만, 서두에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밝히려는 열망”이었다는 점을 그는 분명히 밝혔다. 루터의 반박문은 열정, 심지어 심각한 경악까지 드러내고 있지만, 그의 대담한 불만 뒤에 숨은 더 깊은 동기, 곧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된다. 바로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다. 면죄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면죄부의 남용은 루터가 이 95개조 반박문을 쓰도록 자극했다.당시에 반박문을 작성하고 게시하는 게 참신한 건 아니었다. 루터가 토론을 위해서 이런 식의 글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관행이 루터의 독점물도 아니었다. 중세의 많은 이들이 비슷한 행동을 했다. 아마도 루터는 앞서 살았던 여러 사람을 모방한 것 같다. 이건 루터가 일으킨 자극을 경시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의도한 게 대중의 반란이 아니라 학문 논쟁이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요한 테첼(Johann Tetzel)의 면죄부 설교를 주관했던 브란덴부르크 대주교 알베르트(Albert of Brandenburg)에게 이 반박문을 보냈다. 그 외에 여러 친구에게도 보냈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루터의 궁극적인 목표가 학문 논쟁이 아니라 구원 자체만큼 중요한 어떤 문제에 대한 공개적이고 목회적인 해명이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회적 관점을 반영하는 그의 반박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죄에 대한 회개와 형벌루터의 첫 번째 논제는 마태복음 4:17에 대한 로마의 해석에 도전한다. “우리의 주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 되기를 바라셨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서 죄인에게 “참회하라”(라틴어는 poenitentiam agite 명령했다고 생각했다.루터는 죄에서 돌이키라는 단순한 명령을 면죄부를 포함한 로마의 전체 참회 제도로 독해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회개하라”라는 대체 번역을 선호했다.그는 “이 단어는 성직자가 집전하는 고해성사, 즉 고백과 속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라고 썼다. 오히려 그것은 “오직 내면의 회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한 경험을 바탕으로 루터는 외적인 열매가 없는 “회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육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외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내적 회개는 무가치하다.”죄에 대한 언급에서 루터는 죄가 주는 자책감과 죄의 형벌에 대한 로마의 구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터는 마치 교황이 그리스도인을 모든 죄의 형벌에서 전부 없애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며 교황에게 호소하는 것을 반대했다.더욱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라면 결코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동시에 모든 면에서 그를 겸손하게 하시고 그의 대리자인 제사장에게 복종하게 하지 않는 한 누구의 죄도 사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했다.1517년까지만 해도 루터는 사제직에 관한 로마의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제들, 특히 연옥의 개념을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며, “죽는 사람의 경우에 연옥을 들먹이며 성경의 형벌을 유보하는 사제들은 무지하고 사악하게 행동한다”고 지적했다.루터가 “형벌은 진정한 회개를 시험하기 위해 죄 용서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부과되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통 알려졌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 점은 루터를 끝없이 괴롭힌 문제였다. 아마도 루터는 일단 용서받으면 처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반 교회 신도들에게 비슷한 말을 했을 수는 있다. 연옥과 면죄부루터는 연옥에 대한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은 연옥의 목적을 전달하려고 사랑보다는 두려움을 사용했다. 루터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필연적으로 두려움이 줄어들고 사랑은 늘어나는 것 같다”라고 썼다.루터는 모든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는 잘못된 인도를 받고 있다고 확신했다. 교황이 “모든 형벌의 전면적 용서”를 허용했을 때, 그가 “실제로 의미한 건 ‘모든 형벌’이 아니라 교황 자신이 부과한 형벌만을 의미했다.”루터는 한탄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든 형벌에서 면제되고 교황의 면죄부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테첼 같은 연옥 설교자들이 면죄부 구입으로 연옥에서 즉시 석방될 것이라고 약속하며 거짓말을 선포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돈이 상자에 딸깍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탈출한다는 인간의 교리만을 설교한다”라고 썼다.돈 상자가 많아질수록 ‘욕심과 탐욕’은 더욱 커졌다. 자기가 하는 회개가 진짜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면, 어떻게 면죄부로 인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냐며, 루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했다. 의분에 불탄 루터가 면죄부 탁자를 뒤집었을 수도 있다. “면죄부 편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가르친 교사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불타는 언어, 목자의 마음루터의 강한 언어인 ‘저주’는 그의 목회적 혐오감을 전달했다. 면죄부를 살 만큼 충분한 돈만 있다면 회개 여부에 상관 없이 언제라도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인들은 면죄부 테이블을 향해서 달려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강간한 사람도 면죄부만 있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 “미쳤다!”라고 루터는 소리쳤다. “이 얼마나 끔찍한 참회 시스템의 남용인가? 진정한 참회와 관계없이 또 어떤 죄를 지었는지와도 아무런 상관없이 마치 죄에 대한 일시적인 형벌에 대한 속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마음의 진정한 성화를 희생시키는 값싼 은혜라고 확신했기에 루터는 그토록 격렬하게 반대했다.그리고 루터는 테첼 같은 설교자들을 화나게 했을 논제를 내놓았다. “진정으로 회개한 그리스도인은 면죄부 없이도 형벌과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용서받을 권리를 가진다.”“조심하기”를 거부한 “교황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평신도들에게 다른 “사랑의 선행”은 덜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루터는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루터는 면죄부 제도 전체를 뒤흔들었고,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의 동기와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가치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가톨릭, 그러나 로마는 아니다!루터는 교황이 면죄부 사건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처음만 해도 루터는 교황의 선의를 믿었다. 면죄부가 어떻게 남용되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교황이 앞장서서 면죄부 판매와 구매를 중단하리라 생각했다. “교황이 면죄부 설교자들이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를 안다면, 양의 가죽과 살, 뼈로 세워지는 성 베드로 대성당 대신 그는 차라리 그 성당이 불타서 재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자신이 얼마나 틀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종교개혁 여정 중 이 시점에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완전히 거부한 게 아니었다. 단지 교황의 권위를 분명하게 했는데, 즉 그 권위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남용될 것을 두려워했다. 루터는 교황의 권위를 일반 주교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한은 모든 주교나 큐레이터가 자신의 교구나 성당에서 신도들에 관해서 갖고 있는 권한과 동일하다.”루터는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받아서 교황에서 물려준다는) 열쇠에 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교황은 자신이 가지고 있지도 않은 열쇠의 권능이 아니라 양을 사랑하는 중보의 마음으로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사죄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다.” 95개조 반박문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데 있어 아직 초심자였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그가 나중에 포기한 신념도 여전히 담겨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그의 핵심 우려는 분명히 담겨있고, 그 반박문이 올바른 손에 쥐어졌을 때 폭발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루터의 진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는 단지 교회의 진정한 유산을 회복함으로써 교회를 갱신하려는 중세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때가 다다랐을 때, 그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로마에 종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글은 Zondervan Academic과 협력하여 출판되었으며 Matthew Barrett의 The Reformation as Renewal: Retrieving the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Church(Zondervan, 2023년 6월)에서 간추렸다.원제: Catholic, Not Roman: Luther’s Ninety-Five Theses of Love for the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그는 현대판 ‘하나님의 도성’을 쓰고 싶을 것이다
by Chris Watkin
2023-10-30
기독교 고전 재발견C. S. 루이스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불고 있는 깨끗한 바닷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오로지 “오래된 책을 읽어야만 가능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잊고 지낸 기독교 고전을 재발견하는 시리즈(Rediscovering Forgotten Classics series)를 시작한다.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움을 주는,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기독교 고전을 하나씩 찾아나갈 것이다. 이와 닮은 주제를 크리스 왓킨은 그의 신간 Biblical Critical Theory: How the Bible’s Unfolding Story Makes Sense of Modern Life and Culture(성서 비평 이론: 성서 속 이야기를 통해 현대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에서 탐구한다. TGC 편집장 콜린 핸슨은 이 책을 “내가 읽은 최고의 책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자, 다음과 같은 사회를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무런 논리도 없이 오로지 상대를 향해 소리만 지르는 완강한 파벌로 쪼개진 사회. 자유와 개방성에 대한 자축에 가까운 수사학으로 시대가 숭상하는 우상을 향한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 압박을 교묘하게 가리는 사회. 엘리트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 및 경제 세력의 공모가 판을 치는 사회. 그리고 미신을 따르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역사의 올바른 편”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정작 수많은 기괴한 미신과 오래된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 이런 사회,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지 않은가?5세기 로마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유명한 사회 및 정치 이론서 하나님의 도성을 집필할 당시의 로마는 말 그대로 복잡하고, 비틀거리고, 분열되고, 자기모순에 가득 찬 사회였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이 책은 당시 로마 상황을 반영하는 현대 사회를 향한 문화적 비평에 필요한 강력한 틀을 제공한다. 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걸작에서 뽑은, 그리스도인이 현대 문화에 참여하는 방식을 심화하고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여섯 가지 도구이다. 1. 안에 머무는 아웃사이더가 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후기 로마 문화에 대한 이런저런 목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로마 문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의 글은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수사학을 강의했고, 진심을 담은 경외감으로 키케로를 인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 책을 쓴 건 단지 당시 쇠퇴하던 로마 문화를 부당하게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로마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화가 왜 그토록 찬란했던 건지,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에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현대 알제리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신인 그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무엇보다 그를 로마 문화의 외부에 두는 요소는 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참여라고 할 때 보통 “민감한 인사이더” 또는 “용감한 아웃사이더” 중에서 선택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일반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2. 문화 전체를 다루라아우구스티누스는 후기 로마 문화 내에서도 고립된 경향만을 따로 떼어내서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심오한 구조와 근본적인 가정을 탐구했다. 즉 문화의 악덕만 아니라 미덕까지, 철학만 아니라 경건까지, 그리고 대중적 오락만이 아니라 정치적 환경까지 고찰했다. 하나님의 도성은 어떤 특정한 문화 도깨비를 박멸하기 위해서 뛰어든 특수기동대가 아니다. 이 책은 로마 사회 전체의 길이와 폭을 다 아우르는 경찰 전체의 감시망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자 찰스 매튜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도성은 특정 사회 환경 속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성찰하지 않는 현실을 대상으로 누군가 오늘날 비판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포괄적인 모든 사회이론과 비판이론의 뿌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3. 성경 전체를 다루라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몇 구절과 애용하는 기독교 교리 몇 가지를 가지고 로마 문화를 다루지 않았다. 하나님의 도성 11-20권에서 그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개관한다. 그리고 성경이 어떻게 로마가 가진 각종 해괴망측한 믿음을 대체할 수 있는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지 보여준다. 성경은 문화적 범주에 끼어들지 않고 성경만의 방식으로, 성경만의 강조점을 제시하며 독창성 있게 스스로를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은 일부 현대 패러다임과는 달리 창조, 죄, 심지어 구속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의 문화 비평은 일관되게 성경적 균형을 유지한다. 4. 표면 아래를 살펴보라아우구스티누스의 문화 비평은 전혀 얄팍하지 않다. 그는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분석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표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밝히기 위해 지각판을 파헤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구조 분석의 핵심은 사랑이다. 두 도시가 두 가지 사랑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실제로 사랑은 사상보다 더 깊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움직이는 건 사랑이고, 몸을 움직이는 건 무게이다.” 문화 사상과 행동 또는 태도를 접할 때 그의 반사적인 반응은 “이것이 드러내는 건 어떤 사랑인가?”라는 질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문화를 고찰할 때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예리한 질문이다!5. 대립과 성취 사이의 잘못된 선택을 거부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도시 사이의 대립만을 보는 그리고 하나님의 도시가 지상 도시의 가장 깊은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키는지만 보는, 쌍둥이처럼 닮은 두 가지 함정을 피한다. 더불어서 대립과 성취 차이를 애매하게 가로지르는 미지근한 타협도 피한다.그의 독특한 전략은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를 통해서 놀랍도록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영광”은 로마를 특징짓는 가치였다. 로마가 적을 어떻게 정복하고 멸망시켰는지를 보면 로마의 영광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로마의 영광은 결코 기독교의 미덕이 아니었다. 만약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날 책을 쓴다면, 그 책은 현대인에게 가장 감각적으로 다가갈 단어를 써서 이런 식으로 시작할 것이다.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해방된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또는 “나의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깨어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언어는 선을 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은 지금 현대 문화의 상징인 Kool-Aid를 마신 거요[Drink the Kool-Aid: 무언가를 심각할 정도로 믿는다는 뜻의 은어_편주].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불필요하게 도발적이고 잠재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로마인과 어울리다가 같이 망하지 말고 그들로부터 탈출하세요!”그러나 이런 식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영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가 로마가 말하는 영광의 정의와 정반대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광은 자신을 높이고 노예를 거느리는 가이사의 영광이 아니다. 자신을 비우고 남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영광에 대한 호소는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화려한 시발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로마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영광을 가장 깊고 진실하게 실현하는 형태로서 설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광에 대한 로마의 이해는 한낱 뒤틀린 환상에 불과하며 로마 안에는 진짜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성경의 패턴을 따른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함을 세상 지혜와 철저한 대조(20-23절)인 동시에 세상 지혜가 추구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25, 30-31절)로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 선포를 대조 또는 성취 중에서 선택할 이유가 없다. 복음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6. 교회와 문화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라아우구스티누스가 주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가 현시대에는 서로 얽혀서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최종 심판의 날 완전히 분리될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대조를 강조하는 문화 비평의 접근 방식은 두 도시를 완전히 별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문화가 형성하는 여러 방식에 무지하기 쉽다. 반대로 지나치게 성취를 강조하는 접근 방식은 두 도시를 근본 가치에서 동일한 대안의 표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복음 외에는 세상을 향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선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주는 성경의 틀은 우리가 굳이 감당하기 힘든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도 두 도시는 여전히 얽혀 있다. 세상 “문화”는 결코 문밖에 서서 교회가 문을 열어주기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좋든 싫든 세상 문화는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형성한다. 동시에 전혀 다른 운명을 가진 두 도시의 운명은 후기 현대적 사고방식이 아무리 편안하게 느껴지더라도 이 세상은 결코 본향이 아니고 우리는 세상을 비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행여라도 우리가 후기 현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우리 시대에 성경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민감함을 잃지 않고 현대 문화 속에 참여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청사진을 제공한다. 지난 세월, 이 책이 가진 광채를 모방하려는 작가가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능가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도성아우구스티누스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도성은 가장 위대한 신학 저서 중 하나이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직전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쓴 이 책은 로마의 고대 이교,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 그리고 성경의 계시를 고찰한다. 로마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정치 경험을 뛰어넘어 영원히 지속될 시민권을 제공하는 하나님 나라 시민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도성은 기독교 발전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저작 중 하나이다. 원제: Augustine Could’ve Written ‘City of God’ in 2022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도성
아우구스티누스
분노의 시대에 빠지기 쉬운 흔한 오류들
by Steve Bateman
2023-10-28
허위 정보, 당파적 조작, 조직적인 불신이 난무하는 온라인 세상에서 무엇을 믿을지 분별하라는 성령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깨어 있으라”(엡 6:18). “분별하도록 힘쓰라”(엡 5:10). “모든 것을 분간하라”(살전 5:21). 그리고 “생각하라”(딤후 2:7).무엇이 걸린 문제인가? 첫째, 교회의 평안이다. 40년 동안이나 목회를 했지만, 나는 전염병과 대통령 선거가 성도들 사이에서 얼마나 열정적인 분열을 일으키는지 제대로 몰랐다. 여느 목회자들처럼 나도 성도들로부터 “잘 연구된” 여러 기사 링크가 포함된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이런저런 문제에 관해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어떤 입장을 표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 입장을 명확히 밝힌 다른 주에서 목회하는 유명 목회자들을 언급하며, 그들의 모범을 따르라며 충고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교인들이 서로 모순되는 기사들을 보낸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들 모두의 의견에 다 동의하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중한 우정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적지 않은 교인들이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연합이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걸린 문제는 신뢰성이다. 우리가 거짓에 쉽게 설득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이 참되다는 우리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고의적인 무지함 또는 눈가림은 진리의 여부를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라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주제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전에는 반드시 전략적 망설임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분별을 위한 중요한 기술 중 하나가 성경 읽기 능력이다. 매일 뉴스 자료를 습득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행 17:11).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헤드라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동성 결혼을 옹호하는 현직 대통령의 다음 말 속에 숨은 실체를 파악하게 한다. “결혼은 단순한 제안일 뿐이다.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는가?” 성경적 능력은 우리를 이런 식의 속임수로부터 보호한다. 성경 읽기 능력을 키우는 것 외에도 행여 우리가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공개 토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곱 가지 오류는 다음과 같다.1. ‘성급한 결론’ 오류관련성이 있지만 불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몇 년 전, 전선 오류로 인해 애매한 상황에서 내 차의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내 앞에 있던 성급한 운전자들과 싸움을 벌일 뻔했다. “속보”가 난무하는 문화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가족, 교회, 국가가 감정적인 성급한 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가?야고보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약 1:19). 천천히, 진정하고, 입을 닥치고, 곰곰이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급하게 부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나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일단 공개적인 입장을 취한 이상, 거기에 반대되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에 우리의 자존심이 더 크게 손상된다는 위험 요소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할 때까지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고 판단을 보류하라. 2. ‘반복 논증’ 오류단지 자주 반복된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믿는 것은 반복 논증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믿을 가능성이 커진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끊임없이 거짓 비난에 시달렸다(막 14:55-59).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런 식의 반복되는 거짓말을 믿었기에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여러 가지 일로 고발”(막 15:3)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을 반복한 히틀러가 사용한 게 바로 이 기술이다. 나치의 선전은 거짓말을 증폭시켰고, 독일 문화에 반유대주의를 부추겨 마침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반복되는 거짓말은 오늘날도 치명적인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반복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 전에 생각하라. 3. ‘인신공격’ 오류이 오류는 토론자가 논쟁보다는 사람을 공격할 때 발생한다. 논쟁에서 이긴 예수님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렀다(요 8:48). 모욕은 더 이상 논쟁할 무기가 남지 않은 사람이 의지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욕설에 능한 정치인은 인신공격을 통해서 상대방의 정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수고를 피하는 동시에 속기 쉬운 유권자를 효과적으로 설득한다. 복음에 충실한 목사를 단지 다른 목사가 ‘다시 깨어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렇게 믿는 건 차마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일이다.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신공격에 빠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나아가서 진리마저 훼손한다. 사람이 아닌 논쟁을 해체하라. 4. ‘이중 잣대’ 오류이중 잣대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표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더십에서는 성품이 중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위임받기 전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딤전 3:2). 그들이 그 신뢰를 배반한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부자라는 이유로, 인맥이 많거나 유명하다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는 지도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편견 없이 이것들을 지키고, 어떤 일이든지 공평하게 처리해야”(딤전 5:21) 한다.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결점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옹호자들의 비슷한 결점에는 변명으로 일관할 때, 믿지 않는 세상은 우리가 드러내는 불일치와 편파성을 고의적인 속임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라. 5. ‘억제된 증거’ 오류이것은 당신의 주장에 불리한 증거를 숨기는 것이다. 사법 제도에서는 진실을 판단하려는 공정한 제삼자 앞에서 두 당사자가 주장을 펼친다. 솔로몬의 말을 기억하라.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잠 18:17). 양측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1770년 존 아담스는 보스턴 대학살에서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한 영국군을 변호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들을 향한 배심원단의 편견을 눈치챈 아담스는 다음 사실을 상기시켰다. “사실은 완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바람, 성향, 열정이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사실과 증거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양측으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은 배심원단은 멸시받는 군인들 가운데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판결했다.그리스도인은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증거를 억압할 수 있다.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무료로 보장된 뉴스 매체 간의 시장 경쟁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실을 (그리고 팩트 체크를) 제공한다. “내가 원하는 사실”만을 보도하는 뉴스만 선택함으로 우리는 자신의 편견을 더 굳히고 나아가서 자신까지 속이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인의 80퍼센트 이상이 디지털 기기에서 뉴스를 얻는다. 디지털 기기는 독자를 편중된 정보에 가두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조작된 뉴스 제공원이다. 깊게 읽는 게 능사가 아니다. 다양하게 읽으라. 6. ‘유명인 의존’ 오류주장의 타당성보다는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명인 의존 오류’이다. 많은 언론인이 남다른 수사 기술을 갖고 있으며 청중이 의견을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다. 나중에 책임을 추궁당하면 유명인은 “농담이었어!”라고 즉시 변명한다(잠 26:18-19). 단지 재미있는 코미디, 풍자, 해설이었다는 식으로 자기 말에 책임을 회피한다. 1732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리처드 손더스라는 가명을 만들어 자신의 경쟁자인 타이탄 리즈(Titan Leeds)의 사망일을 예측하고 발표했다. 리즈는 프랭클린이 예상한 날에 죽지 않았지만, 프랭클린-손더스는 사기를 계속 치며 엄청난 양의 연간 정보집(Poor Richard’s Almanack)을 팔고 미디어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모든 청중이 프랭클린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게 틀림없기에, 그는 자신의 거짓말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저널리즘과 엔터테인먼트의 혼합은 미국의 오랜 전통이니까. 좌파 쪽에서 볼 때, 레이첼 매도우(Rachel Maddow)는 시청률을 성공적으로 끌어낸 매력적인 스타일의 미디어 유명인이다. 방송 중 명예훼손 발언으로 다른 언론사로부터 고소를 당했지만, 항소법원은 다음과 같이 사건을 기각했다. “합리적인 시청자라면 매도우가 객관적 사실을 암시했다고 결론 내렸을 리가 없다.” 우파 쪽에서는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법정에서 그의 변호사들은 칼슨이 허구를 사실로 제시했다는 원고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이 선택한 변론 전략은 “칼슨이 자신이 논의하는 주제에 대해 ‘실제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되고 ‘비문자적’ 논평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청중이 인식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사는 이에 동의하고 사건을 기각했다.두 유명인 모두 다 추종자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소스로 인식되지만, 둘 다 언론 윤리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법원 모두 미국인이 진실 주장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불행하게도 미국인 대부분이 손에 들고 있던 증거는 오로지 매도우와 칼슨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였다. 엔터테인먼트의 이면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증거를 제대로 파악하라. 7. ‘동기 호소’ 오류제안한 사람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며 제안 자체를 기각하는 경우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나쁜 동기로 전파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동기로 전파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빌 1:18). 동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명예나 재산 축적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책임을 질 것이다. 요점은 동기가 논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동기와 상관없이 복음은 참되다. 기소하는 주체가 단지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전직 직원, 질투심 많은 교단의 경쟁자, 필사적인 정치인, 또는 경멸받는 언론 매체라는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자나 정치인에 대한 혐의를 즉석에서 일축하는 그리스도인은 ‘동기 호소’ 오류에 빠진 것이다. 아무리 악의적인 동기라고 해도 제시하는 증거가 진짜일 수 있다. “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주장도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와 관계 없이 혐의의 증거 자체가 검증될 수 있다면 고발자의 동기는 무관하다. 동기를 무시하라. 그리고 메시지를 조사하라. 합리성이라는 평판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아신다. 공개적으로 무언가를 지지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가진 지적 능력에 대해서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하는 팩트 체크와 비판적 사고가 최신 헤드라인에 대한 진실을 드러낼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여러분의 관용(합리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빌 4:5)라고 권면했다. 합리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진실을 증언하는 우리를 여물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주체로 만든다. 원제: Common Fallacies in an Age of Outr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도는 우리의 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by 최창국
2023-10-27
기도는 매우 역동적인 힘이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기도가 지닌 특성이기도 하다. 물론 기도를 통해 단지 개인의 내면의 안녕과 욕구만을 추구할 때 기도는 종교 중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내면과 삶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기도에 관한 신학과 현상학의 통합적 연구를 처음 시도한 프레드릭 헤일러는 누구도 자신의 정신이나 내면세계와 관련이 없는 추상적인 내용으로 기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1] 헤일러의 말처럼, 누구도 자신의 내면세계와 무관하게 기도할 수 없다. 따라서 기도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우리가 기도를 통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은총, 즉 창조적 선물인 내면세계, 뇌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종교심리학의 개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여러 종교 행위 가운데 특별히 기도가 가져오는 효과를 강조하였다. 그는 종교 행위 가운데 기도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않을 때의 차이점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과 사랑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것에서 나타나는 경험의 차이와도 같다. 우리가 아주 오래된 (진부한) 세상 속에 산다 할지라도 기도가 개입되면 우리의 정신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2] 기도는 신학적, 영적 의미를 지닐뿐 아니라 인간 삶의 여러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효과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첫째, 기도는 성품 개선에 효과가 크다. 기도와 감사의 관계를 관찰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의 성품이 더 높게 나타났다. 기도와 감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이클 지가렐리가 그리스도인 성품 지수(Christian Character Index)에 관한 연구를 위해 미국 내의 50개 주, 전 세계 60개국을 대표하는 5,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적 연구에 따르면, 기도와 찬송과 예배 생활의 비율이 높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감사의 성품이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감사의 성품이 계발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과 예배하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3] 이는 기도와 감사는 상호유기적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진정한 기도는 감사와 같은 성품을 우리 안에 형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수많은 성품의 특성을 계발하는 하나님의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커리큘럼이기도 하다.둘째, 기도는 뇌를 치유하고 성장시킨다. 앤드류 뉴버거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대의 뇌 기능의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 부위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 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되었다.[4]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믿고 기도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우리의 신체적, 관계적, 심리적, 영적 상태가 달라졌다. 셋째, 기도는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면역체계를 강화한다. 마이애미대학교의 연구팀이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질병에 대항해 싸우는 주요 면역세포들의 숫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탠퍼드대학교가 100여 명의 여성 유방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종교 활동 수치가 높을수록 백혈구나 림프구 같은 면역세포의 수치가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5] 기도와 묵상은 중요한 영적 삶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1987년과 1995년 사이에 2만 1,000명이 넘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기도와 같은 종교 생활과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예상 수명이 7년이나 연장되었다고 밝혔다.[6] 넷째, 기도는 자기 절제력을 높여준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기 전에 평소 기도를 해온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직면한 문제에 효과 있게 대처하는 힘을 보인다. 묵상과 기도에 사용한 시간은 자아에 병적으로 함몰될 수도 있는 삶을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7]다섯째, 기도는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발휘한다. 기도는 스트레스의 부정적인 영향을 감소시킨다. 기도하는 동안 인간의 뇌파와 심박동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결과가 나타났다.[8] 특히 평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들의 경우 재정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신체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자신의 재정적인 유익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적인 정서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나아가 기도는 스트레스로 인한 알코올 섭취량을 줄이는 결과가 나타났다. 체스터 톨슨과 헤롤드 코닝의 의하면, 가장 효과가 뛰어난 스트레스 감소요법은 기도라고 하였다.[9] 나아가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적인 활동에 참여하면 개인의 삶과 건강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들이 임상연구를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10] 신앙심 깊은 기도는 사람을 상대적으로 더 튼튼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을 유지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더 건전한 생활방식을 가지게 하고,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더 쉽게 이겨내게 한다. 나아가 심각한 혈관 관계 질환을 막아주고,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면역체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11]1. Friedric Heiler, Prayer: A Study in the History and Psychology of Religion, 308. 2. 윌리엄 제임스, 종교 체험의 여러 모습들, 496.3. 마이클 지가렐리, 예수의 성품을 가진 크리스천, 81.4. Andrew Newberg·Mark Robert Waldman, How God Changes Your Brain: Breakthrough Findings from a Leading Neuroscientist, 27-32, 53.5. T. E. Woods·M. H. Antoni·G. H. Ironson·D. W. Kling, “Religiosity is Associated with Affective and Immune Status in Symptomate HIV-Infected Gay Men,” Journal of Psychosomatic Researches, 45(1999): 165-76.6. R. Hummer·R. Rogers·C. Nam·C. G. Ellison, Demography, no. 36/2(1999): 273-85. 7. 월트 래리모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건강한 사람, 258-59. 8. 필립 얀시, 기도, 456.9. Chester Tolson·Herold Koening, The Healing Power of Prayer, 48. 10. 래리 도시, 치료하는 기도 참조, 이 책은 미국의 80여 의학대학원에서 대체의학의 한 유형으로 기도치료에 관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11. Chester Tolson·Harold Koenig, The Healing Power of Faith 참조.
주님을 위해 일할 나이
시편 92편 묵상
by 고명환
2023-10-26
1.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광고나 강연에서 듣던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나이는 숫자 정도로 여겨지는가? ‘아니다’ 단언해도 무리가 없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니 고정관념을 깨자’는 취지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는 몰라도, 현실은 그 숫자가 가지는 위력 앞에 쉽게 굴복하고 만다. 여전히 나이를 따져 효율을 저울질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잣대이다. 개척하여 섬기던 한인교회 가까이에 한참 떨어져 있던 한인교회가 이사를 왔다. 한인들이 희소한 매사추세츠주와 뉴햄프셔주의 경계에 자리한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한인교회 둘이 오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할 곳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개척을 결심할 때 마음으로 정한 원칙이 둘 있었다.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빼내어 시작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미 한인교회가 있는 곳에 터를 잡지 않는다.’ 한인교회가 가까이에 없는 지역에, 주님을 모르거나 낙심한 영혼들을 찾아내어 개척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기도하며 시작했다. 주님의 도움으로, 더디었지만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장소에서, 새롭게 주님을 알아가는 분들과 함께, 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다져 가는 중이었다. 한데, 적지 않은 역사를 가진 교회가 무슨 사정인지 지척에 들어온 것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체 상태였던 교회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전도에 의욕적인 젊은 목사님을 맞아들였고, 교회 자리도 옮겨왔다고 했다. 처음에는 납득하기 힘들었지만, 젊은 한인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 서로 협력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점점 바뀌었다. 그래서 연락해 오면 기꺼이 만나 인사도 나누고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그 목사님과 만나 식사하는 자리는 수개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같이 식사하자고 내가 먼저 연락해서 마련한 기회였다. 만난 자리에서, 교회의 부흥을 위해 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그 분의 헌신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비교하니 나의 활동은 게으른 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계속된 이야기 가운데, 그 열정의 젊은 목사님은 한국의 유수한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서울의 대형교회 부목사로 일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주의 종’임을 듣게 되었다. 나무랄 데 없는 경력에 젊음과 열정마저 갖춘 그 분에 비하면 나의 것은 조촐했지만, 차례가 된 것 같아 나름 소상하게 풀어 놓기 시작했다. “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십오 년 동안 하며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위해 전 시간을 드려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신학교에 마흔이 넘는 늦은 나이에 들어가서 겨우 졸업한 뒤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소개에 이어 교회 개척 동기와 진행, 현재의 모습에 이르도록 나름대로 성의 있게 설명해 주었다. “난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갑작스런 그 분의 말에 짐짓 당황했다.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갔다고 말한 사람의 면전에서 그런 말을 직설적으로 하다니?’ ‘그의 앞에 있는 나이배기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 했었다는 말 아닌가?’혼란스러웠다. 즉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공격적인 질문 대신에 상투적인 변호를 늘어놓았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팔십세가 되어 부름을 받았고, 갈렙은 팔십이 넘는 나이에도 주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성경에 보면 나이가 많아도 주님의 일꾼으로 귀하게 일한 분들은 많은데요.”이에, 그는 입술을 약간 떨며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응대했다. “어쨌든 전 나이 든 사람들이 신학교 가는 것에 반대합니다.”얼굴을 붉히며 내보이는 단단한 고집을 확인하고 나니, 더 이상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다. 하여, 애써 불쾌한 마음을 추스른 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을 어설프게 마무리해야만 했다.왜 그분은 나이 든 사람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것을 싫어했을까? 왜 목사는 자신처럼 젊은 나이에만 헌신해서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믿었을까? 자신은 제때 신학교를 거치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는데, 늦게 신학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세상에서 더럽혀진 사람들이 나중에 ‘성직자’가 되는 것은 자격이 없다고 믿은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이 든 사람들은 목회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듣고 싶지 않은 대답에 대한 질문을 지금도 해 본다. 2.시편 92편1-3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4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5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6어리석은 자도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7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8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9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이다 정녕 주의 원수들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흩어지리이다10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을 부으셨나이다11내 원수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들이 보응 받는 것을 내 귀로 들었도다12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13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14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15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며 찬양하는 시이다. 시인이 노래하고 싶어한 주님의 사랑, 성실하심은 정의를 행사하시는 것으로 밝히 입증된다. 곧, 악인들과 의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 악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잠시 그들의 악행이 세상에 만연한다 해도 영원한 멸망에 처하도록 심판하신다. 반면에, 의인들은 악인들로부터 온전하게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크게 번성하는 복을 누리게 하신다. 시에서 악인은 풀(잡초)에, 의인은 나무(종려, 백향목)에 비유된다(7, 12절). 풀과 나무는 수명과 유용성에 있어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풀은 아무리 쑥쑥 자라 무성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말라 그 생명을 다해 쓸모없어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나무는 그 생명이 길고 여러 쓰임새로 인해 큰 가치를 지닌다. 의인은 우거지고 높이 치솟는 종려나무나 백향목처럼 크게 번성하고 뻗어 나간다. 수령이 오래되어도 생기를 잃지 않고 푸르며 열매를 맺는다. 오래된 나무라도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며 풍성한 결실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이 늙으나 젊음을 유지하며 열매 맺는 생활을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의 근원이신 주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젊거나 늙거나 나이에 상관없이, 활기차고 열매 맺는 의인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관건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밀착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3.나이란 하나님께는 숫자에 불과하다. 주님의 선발기준에 나이는 존재하지 않는다.주님의 쓰임을 받는데 나이의 커트라인이란 없다. 주님은, 자원하는 사람이 나이가 많다고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어리다고 돌려보내시지 않는다. 누구든지 쓰임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선택의 대상이 된다.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주님께서 그 어떤 조건의 사람이라도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이 가진 특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재능을 가졌든 못 가졌든, 나이가 어리든 어리지 않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쓰임에 합당한 열매를 반드시 맺는다. 관건은 나이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이다. 주님께 뿌리를 두어야 푸르름을 유지하고 열매 맺을 수 있다. 홍안의 소년이라도 주님께 뿌리를 두지 않으면 열매 맺지 못한다. 백발의 노인이지만 주님께 뿌리가 연결되어 있으면 그 잎은 푸르며 열매는 풍성하다. 시편 1편의 시절을 따라 열매 맺는 나무가 생명의 시냇가에 천착하였듯이, 진액이 넘치고 푸르르며 늘 열매를 맺는 나무는 생명의 근원인 주님께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다. 예수님은 가지인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려면 포도나무인 그분께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요한복음 15장). 주님 앞에 나이를 따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를 크게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작게 보는 사람이다. 어렸으나 주님의 쓰임에 적합한 다윗을 무시했던 사람들의 일원이며, 사무엘이 늙었다고 강제 은퇴시키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동조하는 부류 중 하나이다. 강력한 주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초라한 사람의 능력을 크게 보는 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고린도전서 1:27)이시라는 사실에 무지한 사람이다.아직 어리다고 뒤로 물러나지 말기를 바란다. 이제는 늙었다며 조기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님 안에 뿌리를 두기만 하면 나이를 불문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탐스러운 열매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것도 숨이 멎는 그날까지.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삶을 꿈꾸어야 마땅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이 가능함을 보장해 준다. 얼마나 힘이 되고 소망을 주는 말씀인가!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레바논의 백향목처럼높이 치솟을 것이다.주님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우리 하나님의 뜰에서크게 번성할 것이다.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12-14절, 새번역)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무시하지 말라
지옥 교리를 선포해야 하는 이유
by Bradley Bell
2023-10-25
어렵지만 아름다운 교리(Difficult but Beautiful Doctrines)탈 기독교 시대에 접어든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학적 진리의 깊은 의미와 필요성을 느끼고자 하는 시리즈입니다. “죽기 30초 전.”이것은 판타지 작가 브랜던 샌더슨이 피할 수 없는 일을 불길하게 예시하는, 등장인물이 죽기 전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통찰력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어쩌면 판타지 소설이 주는 불멸의 매력을 찾는 독자에게 이런 식의 표현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의 Stormlight Archive 시리즈에 매혹된 수백만 명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말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 영혼에 깊은 의미를 던진다. 나는 누구라도 이와 비슷하게 죽음 직전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그 사람의 남은 수명에 대해 당신의 귀에 속삭인다고 상상해 보라. 정말로 기이하고 끔찍한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당신이 그 사람과 맺으려는 관계의 방식을 근본부터 바꿀 것이다. 엄중한 현실은 차원이 다른 긴급성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그 이상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적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는 별개로 지옥, 즉 악인들이 의식적으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실제 장소가 무자비한 입을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소중하다. 그들이 모르는 지식을 안다는 이 짐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을 주는가? 선교사의 짐아마도 선교사만큼 그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요삼 1:7) 나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천하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할 만한 유일한 이름” (행 4:12)이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는 것이다(유 1:23). 많은 선교사가 그들의 부르심 뒤에 숨은 중심 동기가 다른 게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즉시 인정한다. 선교사의 삶과 소명이 가진 부담은 지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이 얼마 남았는지 알려주는 내레이터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겪어봐서 잘 안다. 동아프리카 선교사로서 우리는 종종 먼 거리를 운전하며 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을 위해서 기도하곤 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장소에 멈췄는지, 우리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동안 수백 곳에서 수천 명을 만났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신자들을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내 머리를 떠난 적이 없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누군가가 막 죽었다는 의미였다.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 봤을까? 최근에 내가 시장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일까? 내가 복음을 전한 사람일까? 이것은 마치 비명을 지르듯 세레나데를 부르는 청년처럼 내게 쏟아지는 나 자신을 정죄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죽음이라는 장막 바로 너머에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한 번 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선교사가 받는 유혹이런 부담과 함께 따라오는 유혹이 있다. 지옥의 교리를 잠시 제쳐두면 어떨까? 그건 전혀 어렵지 않다. 쉬운 방법이 여러 가지 있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장될 것이라고 믿는 보편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영원한 저주는 불필요하며 성경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죽는 즉시 바로 사라지거나 지옥에서 잠시 고통은 받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없어진다는 영혼 소멸론(annihilationism)도 나름 좋은 방식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불신자는 아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영원한 심판의 장소인 지옥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지옥을 제쳐두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예 거기에 관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남았다고 해도 부담은 없다. 영혼에 대한 긴급성은 함께 줄어든다. 한때 선교사를 감동시켰던 지옥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무관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밤에 들리는 통곡 소리, 사방에 쌓인 장작더미, 죽음이 31초 남았던 이웃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동정이 부른 피로감 또는 문화 충격이라고 치부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에 관한 걱정과 부담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의 포기를 어떤 사람은 “사랑이 이긴다”라고 표현한다. 밀라드 에릭슨이 관찰한 바와 같이,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며 종종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먼저 비신화화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러면 왜 선교사는 그 주제가 가져다주는 끊임없는 고뇌를 고집해야 하는 걸까? 에릭슨이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옥의 교리를 고려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지옥의 교리를 포기한 선교사가 갑자기 더 자유로워지고 더 도덕적인 선교사가 되는 건 아니다. 교리의 상실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욱더 제한된 신앙과 협소한 사역이다. 선교사의 확신성경 속 지옥에 관한 가장 분명한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나온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관한 긴 설교를 한다. 물론 사역 내내 그의 가르침 대부분이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정죄를 암시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울며 이를 갈며”(마 24:51; 25:30)라는 문구를 반복한 후, 그는 그러한 고통이 일어나는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다. 의로운 “양”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나라로 맞아들일 것이며, 저주받은 “염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마25:33, 41). 이런 심판의 범위를 반복하면서 예수님은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 25:46)라고 결론 내린다. 마태복음 25장이 그리는 지옥의 모습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옥이라는 이 중요한 교리가 단지 한 장의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지옥이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며 “그들의 벌레가 죽지 않는 곳”(막 9:48)으로 묘사된 것을 본다.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인용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부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렇게 외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눅 16:23-24). 요한계시록은 또한 끝없는 고통의 연기가 나고 유황이 많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한다(계 9:1-2, 11; 14:9-11; 19:3; 21:8).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옥에 관해서 성경은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을 정도로 분명하다. 카운트다운을 향한 위로지옥에 관한 너무나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 때문에 선교사는 이 교리가 가진 진리뿐 아니라 그 선함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의식적으로 영원한 고통을 겪는다는 이 교리의 어떤 점이 좋을 수 있을까? 이 교리가 영혼의 교화에 도움을 주는가? 사역에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는가?다음부터 밤에 통곡 소리가 들리거나 내레이터가 속삭일 때 이 교리가 주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유익을 기억하라. 3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민족 가운데 잃어버린 그의 친족을 생각하며 바울이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롬 9:2)라고 썼을 때, 그가 지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지옥이 사실이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면, 그분의 자비에 대한 말씀도 우리는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다.성경의 신뢰성을 확신하는 것보다 선교사의 사역에 유익을 주는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고후 4:5).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기록된 말씀을 통한 살아 있는 말씀이다. 지옥의 짐이 엄습할 때, 선교사는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며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라는 말씀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다.2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지옥 교리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의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인간의 악에 대해서 어떻게 영원한 심판을 행하실 수 있다는 건가? 선교사는 웨인 그루뎀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처벌받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악을 징벌하시고 악을 이기실 때 그의 공의와 의와 모든 대적을 이기시는 능력의 영광이 나타난다.”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고 또 겸손하게 지옥에 대해서 경고하는 선교사는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며 공의로우시고 또 전능하신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듣는 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복음은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한 사람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2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를 키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선교 현장에서 탄생했다. 어느 날, 우리 팀장이 나를 산꼭대기의 탁 트인 전망 앞으로 데려갔다. 접근할 수 없는 마을이 수 마일에 걸쳐 수천 개의 양철 지붕의 모습으로 반짝였다. 그날 밤, 나는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살 뻔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오로지 나의 힘에 달려 있었다면, 나는 절망에 빠져 그만두었을 것이다.감사하게도 나는 당시 로마서를 읽고 있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롬 9:18)라는 바울의 선언을 접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혼의 선택이 나를 선교 현장에 머물게 한 위로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그 자유로움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안식을 준다. 15초 전… 지옥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한다.내가 말하는 안식은 선도 활동에서 한 발 떨어진 안식이 아니라 내 영혼을 위한 안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주는 힘으로 우리는 더욱더 노력한다(히 4:11). 이것이 어쩌면 지옥 교리가 주는 가장 분명한 이로움일 수도 있다. 지옥이 실재하고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몇 초 후에 죽는다면, 선교사는 복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바울의 긴박감을 들어보자.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롬 10:14-15)이 얼마나 대단한 동기 부여인가!10 초 전…. 지옥은 우리로 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숨이 막히게 한다.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지옥 교리를 묵상하라고 권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옥의 중요성과 분명히 일치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교리만은 깊이 성찰할 것을 촉구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 같이 하늘의 휘장이 열렸을 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여호와여” (사 6:3, 계 4:8) 외치는 피조물을 묘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셨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 영광을 훼손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시는 하나님은 옳으시다. 의식적인 고통을 영원히 겪는 지옥을 항상 생각하는 선교사는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에서(살후 1:9) 오로지 하나님의 진노만이 있는 지옥에서(계 14:10) 영혼이 영원히 슬퍼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렇다. 지옥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척도일 수 있다. 시편 기자와 함께 선교사도 얼마든지 감동에 차서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소리쳐야 한다(시 99:9).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한다. 선교사로 사역하는 것은 힘들다. 수백만 명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동시에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있음을 의미한다. 선교사가 인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는 것이다. 지옥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또한 그분의 자비의 깊이에 대한 기념비도 제공한다. 감사는 어려운 시기에 위안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길 바라신다(요 15:11). 우리가 지옥(자비)을 피하고 영생(은혜)을 상속받도록, 실로 놀라운 사랑으로 선택되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얼마나 큰 감사와 기쁨을 주시는가.결국, 선교사 자신도 몇 초 후면 죽는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언제 내가 죽을지 내 귀에 속삭이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사의 미래는 지옥이 아니다. 오직 천국만이 있고 그다음에는 새로운 창조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왕의 길이다. 오로지 하나님께 감사한다!원제: Don’t Ignore the Countdown to Damnation: Why Missionaries Need a Doctrine of Hel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가 일터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걸까요?”
by 김선일·이금주
2023-10-24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교회 다니지 않는 아이에게 과외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전도를 하나 봅니다. 아이가 저에게 선생님도 교회 다니냐고 묻더니, 그 미술 선생님이 자기에게 기독교 얘기를 많이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동안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이금주: 이 질문이 전도의 주제라면 김 교수님이 더 전문이실 것 같은데요. 제가 이 사연을 보고 처음 떠오른 질문은 ‘이 과외 선생님은 전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전도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였습니다. 아마 이는 일터에서 복음전도의 사명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모두 가져야 할 질문일 것입니다. 김선일: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21세기 복음전도의 주된 현장은 일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지요. 우리의 일터는 그곳이 많은 사람이 일하는 큰 조직이든 아니면 이처럼 어린 학생 하나를 지도하는 사적인 공간이든 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이 사례에서 과외를 받는 학생이 ‘선생님도 교회 다니냐?’ 물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가 열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교회를 다닌다고 답하고 대화를 계속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김: 예, 비록 사소한 질문 같지만 전도의 문이 열리는 자연스러운 상황일 것 같습니다. 골로새서 4:5에서 바울이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며 세월을 아끼라”고 했는데,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기회를 사라”는 의미라고 하지요. 일상에서 이러한 순간은 “하나님이 전도할 문”(골 4:3)을 열어 주시는 것일 수 있으니 영적으로 민감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저라면 이 학생에게 ‘그래 선생님도 교회 다닌단다’ 이렇게 답하고 나서, ‘그런데 왜 그걸 묻는 거니?’ 또는 ‘너도 교회에 관심이 있니?’ 물으면서 대화를 더 이어가겠습니다. 학생에게 예수님과 복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요. 김: 그렇지요. 근데 저 질문의 행간을 보면, 질문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약간 머뭇거리고 자신이 없는 것 같기도 해요.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일까요?’ 물은 것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 그래서 제가 시작할 때 그 과외 선생님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지나 성경을 펼치지 않고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복음을 전합니다. 과외 선생님의 말과 행실이 그 학생에게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선생님이 다른 믿지 않는 선생님들과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학생은 ‘이 선생님은 뭔가 다르구나’ 느꼈을 겁니다. 우리의 언행과 태도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훨씬 더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김: 사실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느냐가 이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그래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있다면 사영리나 다리 예화 같은 특정한 프로그램의 ‘전도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이미 전도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좋은’ 전도를 하느냐 ‘나쁜’ 전도를 하느냐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삶의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을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나쁜 전도가 되겠지요.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통적 의미에서 전도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과 행실의 전도자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상황에서 전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김: 예,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질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앞서 일터에서, 즉 일을 위해서 만난 자리에서 전도라는 종교 활동을 해도 되느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과외라 해도 일은 공적인 것인데, 여기서 개인의 종교를 나누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고민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이런 문제가 더욱 심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터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전도라는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을 나누어도 괜찮은가?’ 이런 의문이 함축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의 신학은 일터에서 우리의 일차적 사명은 하나님 앞에서 일 자체를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이 선생님의 경우도 학생에게 과외를 가르치는 일이 전도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성껏 학생을 지도하면서 학생이 공부하는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세심하게 돌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소명입니다. 일 자체의 소명에 충실하고 고 어린 사람일지라도 존중하며 대하는 선생님의 그러한 모습이 복음을 전하는 기반을 마련할 것입니다. 김: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들린다.’ 이런 영어 속담이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들려진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전서 3:1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선한 행실을 보일 때 그 남편들이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이고, 좋은 소식이어야 합니다. 이: 선생님이 학생에게 귀감이 안 된 상태에서, 공부를 지도하는 일에 대한 진실한 관심과 열정이 없는 상태에서 복음만 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전도에 더 장애가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말과 행동이 같이 전달되어야 설득력이 훨씬 높아집니다. 김: 우리가 종종 디모데후서 4:2의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는 구절을 전도에 적용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도를 해야 한다는 전도 제일주의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도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복음제시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 사역자로서의 소신과 영적 권위를 가리킵니다. 당시 연소한 목회자였던 디모데에게 스승 바울이 교회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원하는 말만 하려 하지 말고 인내와 용기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말이지요. 물론 이러한 자세가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자세와 동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 다음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라]”고 권합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의 목양과 교육을 의미합니다. 교회 밖에서 불신자를 만나면 아무 때라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의미가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 교회들에서 그 말씀을 너무 아무 때나 전도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저도 종종 봅니다. 일보다 전도가 우선이라고 하거나, 그래서 일은 전도의 도구라고 생각하면 복음의 더 큰 차원을 놓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과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이미 복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 예, 물론 이렇게 개인적으로 과외지도를 하는 경우라면 가르침과 돌봄이라는 공적인 일에서 선생님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모습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관계 형성과 선한 행실이 일종의 예비적 전도사역이 될 것입니다. 사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엄격히 분리하는 것 또한 근대 계몽주의가 가져온 여러 폐해 중 하나입니다. 공적인 일에 최선을 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인간미가 필요합니다. 좋은 배려와 돌봄의 관계에서 복음을 나눌 기회는 언제든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너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준비”(벧전 3:15)하는 자세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 적절하게 할 말을 준비하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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