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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의 네 원칙
by Chris Watkin
2023-10-10
THE KELLER CENTER 변증에 관해서만은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 최근 들어서 기독교 신앙을 변론하고 옹호할 때 내가 꼭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네 가지 현명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딱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1. 변증은 ‘우리’ 문제이다. ‘내’ 문제가 아니다. 변증을 잘하려면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 중 누구도 모든 문제를 원스톱으로 다 처리할 수는 없다. 철학자인 나의 주특기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동시에 이면에 숨겨진 가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전달 방식에 관해서 요청한다면, 그건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예를 들어,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거창한 사상의 실제적인 결과를 연구할 뿐 아니라 때때로 그러한 사상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정치와 경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모두가 힘을 합칠 때에만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완전한 사례를 개발할 수 있다.변증을 위해서는 나와 다른 형제자매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사나운 불독(바리새인과 싸우는 그리스도처럼)도 필요하지만 온순한 콜리(우물가의 여인과 함께 있는 그리스도처럼)도 있어야 한다. 젊은이와 노인이 다 필요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흑인과 백인, 아프리카, 동부, 서부의 그리스도인, 모두가 힘을 합칠 때 비로소 우리는 나와 다른 그리스도인의 감수성과 사각지대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변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복음을 제시할 수 있다. 2. 변증은 ‘무엇’만이 아니라 ‘어떻게’에 관한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은 단지 변증의 한 측면일 뿐이다. 똑같은 주장이라도 표현 방식에 따라 기억에 남을 수도 있고 평범하게 끝날 수도 있다. 눈에 띌 수도 있지만 전혀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문장이야말로 진리의 날카로움을 제대로 전달하는 최고의 방식이다. 나는 C. S. 루이스, 재키 힐 페리(Jackie Hill Perry), 그리고 프랜시스 스퍼포드(Francis Spufford)에게서 이 점을 배웠다. 그들은 진실이 스스로 노래하도록 하는 아름다운 문장 작성에 시간을 투자했고, 그 결과 그들의 글은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아마도 지난 수백 년 동안 G. K. 체스터턴만큼 이 일을 잘 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원한 사람에서 그는 “익숙함이 애정이 아닌 경멸을 불러일으킨다면, 익숙함을 차라리 낯설게 만드는 게 더 낫다”라고 말한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안다면 사람들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체스터턴의 생각은 이것이다. 기독교 예방 접종을 너무 많이 받은 서구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차라리 유럽을 생소한 극동의 환경이라고 가정하고 복음을 전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기독교 이야기이기에 비난받는 환경에서는 차라리 기독교를 이교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관심을 받도록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예수님의 많은 비유 속에서 발견하는 탁월함이다. 어떤 비유 속 일부 행동은 옳지 않다. 또 어떤 태도는 우리의 고개를 갸웃거리게도 만든다. 오래되고 또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라. 하나의 참된 복음을 전하라.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말해보라. 불편할 정도로 신선하게 설교하라. 이전에 다 들어서 아는 이야기라고 떠나는 교인들이 결코 생기지 않도록 설교하라. 3. 변증은 또한 변증하는 사람의 ‘인격’에 관한 문제이다.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는 데에는 말보다 더 중요한 측면이 있다. 바로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사람됨(character)이다. 나는 언젠가 완고하고 지적으로 뛰어난 무신론자 친구를 데리고 가서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와 케임브리지 철학과의 무신론자 사이의 토론을 듣도록 한 적이 있다. 철학과 교수는 냉철했고, 목표가 명확했으며 무엇보다 완벽하게 일련의 주장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잔인한 방식으로 크레이그의 자격을 비웃었다.토론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완고하고 회의적인 친구에게 토론 감상을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비겁한 공격을 받은 크레이그가 반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가장 인상 깊은 점으로 꼽았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크레이그가 더 맘에 든다고 말했다. 그날 드러난 크레이그의 사람됨은 그이 말보다 더 큰 울림을 냈다(벧전 3:15).변증이라는 현장을 벗어나서도 인격은 여전히 중요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강력한 주장과 빛나는 산문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던 몇 명의 저명한 기독교 변증가의 극적인 죽음을 목격했다. 안타깝게도 이들 변증가는 하나같이 세 번째로 중요하고 또 타협할 수 없는 특성인 경건을 놓치고 있었다.기독교의 진리가 아무리 탁월한 표현으로 강력하게 묘사된다고 하더라고, 그 말이 지속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건 카드로 만들어진 집처럼 단숨에 무너질 것이다. 누구나 죄를 짓는다. 그러나 다 똑같지 않다. 우리는 회개하고 투쟁하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과 통탄할 만한 잘못을 탐닉하고 심지어 숨기면서 사는 삶의 차이를 안다. 오, 주님,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4. 오늘날 변증은 동시에 내부자와 외부자가 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피어스 테일러 힙스(Pierce Taylor Hibbs)가 곧 출간될 책에서 “내부자(insider)-외부자(outsider)”라고 표현한 그 입장을 가지려고 노력했다.이에 대한 훌륭한 모델 중 하나가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문화를 관찰한 내부자였다. 그는 로마에서 극진한 존경을 받는 키케로가 왜 그토록 훌륭한 작가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단지 로마를 무너뜨리는 방법에 대해서 비겁하게 작성한 목록을 읽어 내려간 게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로마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독자가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로마에 대해서 썼다.그러나 그는 동시에 철저한 외부자였다. 생각과 감정이 성경적 시각에 맞춰진 사람의 눈으로 로마 문화를 바라보았기에, 로마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기이함과 특이함도 볼 수 있었다.누군가는 내부자(맥락화하라! 관련성을 가지라!)라는 게 더 자연스럽고, 또 누군가는 외부자 (선포하라! 충성하라!)가 더 자연스럽다. 변증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당신에게는 내부자-외부인의 어떤 측면을 더 노력해야 하는가? 이것이 내가 변증과 관련해서 내가 배우려고 노력하는 네 가지 원칙이다.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변증의 사명을 실천하는 여러분에게 이 네 가지 원칙을 구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원제: 4 Principles for Practicing Apologetic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변증
문화변증
팀 켈러가 영국 복음주의에 끼친 다섯 가지 영향
by Thomas West
2023-10-07
영국 복음주의자 그룹이 팀 켈러의 삶과 사역을 기억하기 위해 2023년 7월 4일 런던에 모였다.Redeemer City to City가 주도하여 시작한 런던 프로젝트(The London Project)는 메이페어에서 “팀 켈러 감사의 밤”을 주최했다. 저녁 시간은 런던의 다양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켈러가 그들의 삶과 사역에 미친 영향력을 간증으로 나눔으로 시작했다. 그날의 핵심 의제는 최근 영국에서 출간된, 켈러에 관한 콜린 핸슨의 책이었다. Christian Heritage London의 이사인 벤 버고가 저자 핸슨을 인터뷰했다.핸슨의 이 책은 여러 유명한 영국 복음주의자를 포함하여 켈러의 삶과 사역 뒤에서 그를 만든 인물들을 탐구한다. 그러나 특히 놀라운 점은 그가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켈러가 끼친 사역의 영향력이 대서양을 건너 지구 반대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방식이다. 영국 사랑에 기반을 둔 밀접한 관계영국 복음주의의 상당 부분이 미국 복음주의 속으로 스며들던 20세기 중반에 특히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이 팀 켈러였다. 켈러는 따뜻한 경건함을 갖춘 박식한 정통주의와 문화적으로 민감한 접근 방식이 조화를 이루는 모델을 영국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이어받았다. J. I. 패커, 마틴 로이드 존스, 그리고 C. S. 루이스는 켈러의 설교와 책에서 자주 언급된다. Helen's Bishopsgate의 딕 루카스(Dick Lucas)와 All Souls Langham Place의 존 스토트는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기독교에 충실하면서도 열매를 맺는 도심 사역의 모델을 켈러에게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존 뉴턴은 목회 상담의 기본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가르친 바로 그 영국 복음주의 집단에게 켈러가 되돌려 준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런던에 사는 미국인으로서 몇몇 영국 목사들에게 연락해서 켈러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보았고, 영국 복음주의자들에게 끼친 켈러의 영향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1. 회의주의에 빠진 세대를 향한 설득력 있는 설교케임브리지에서 있었던 켈러의 설교, “위조된 신들”은 마음에 복음을 심는 좋은 사례이다. 켈러 사역의 독특한 특징의 하나는 문화가 만든 우상들을 언급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이었다. 트레버 아처(Trevor Archer)의 지적이다. “팀은 성경이 강조하는 우상 숭배라는 죄를 다시 끄집어내어 설명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야 따뜻하고 통찰력 있는 방식으로 접근함으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두 세대에 걸친 영국 설교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영감을 주었습니다.”맷 풀러(Matt Fuller)는 켈러의 설교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를 일찌감치 인식하고, 그의 설교를 회의적인 지금 세대를 향한 설교 방식의 모델로 삼았다. “런던과 같은 세계 도시의 중심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선하고 신실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데에 있어서 켈러는 선두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다 회의적인 시대의 바다에 빠져 있는 지금 상황을 고려할 때, 진리를 선포하는 데에는 설득이라는 과정이 꼭 필요했습니다.”미국이든 유럽이든 장소를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능력이 문화가 만든 우상들까지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방식으로 신앙을 선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켈러는 이러한 복잡성을 탐색하는 데에 귀중한 가이드가 된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그의 모범을 따르는 데 도움을 주는 자료가 있다. 나는 켈러의 통찰력, 특히 그의 책 설교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 도시 운동을 위한 신학 비전말씀 사역이 복음 사역의 핵심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켈러는 영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자신감과 협력으로 이어지는 사역에 대한 통합된 신학 비전을 제시했다. 앤디 메이슨(Andy Mason)의 말이다. “팀은 탈 기독교 시대의 세속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전도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복음이 런던 사람들의 마음과 얼마든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더불어서 복음이 얼마나 강력하고 변혁을 일으키는 능력인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희망을 주었습니다.” 도시 운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협력해야 한다는 켈러의 주장이야말로 그의 신학 비전이 가진 특징이다. 닐 파웰(Neil Powell)의 말이다. “이 심오한 믿음에 영감을 받은 나를 포함한 많은 목사들이 복음주의 교파를 넘어 동역하는 사역의 능력을 인식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답보 상태를 깨부수는 과격한 움직임이었고, 실로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불어 넣는 일이었습니다.”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는 속도는 교회보다 훨씬 더 빠르다. 켈러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에 뿌리를 둔 도시와 협력에 대한 태도를 모델로 삼았다.3. 문화와 연결켈러의 삶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그가 영국 복음주의 목사들과 신학자들에게 큰 빚을 졌을 뿐만 아니라 영국 문화와 땅을 누렸다는 점이다. 켈러가 세워 놓은 좋은 기반 위에서 더 큰 사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지도자의 한 명인 제임스 에글린턴(James Eglinton)은 영국 리더십에 끼친 켈러의 영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통찰력을 제공한다. “오늘날 영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켈러의 사역만큼 널리 영향력을 끼친 다른 기독교 지도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팀이 영국인이 아니고 또 영국에서 살거나 공부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가 끼친 영향은 더욱 놀랍습니다.”켈러의 뉴욕 사역은 그가 다양한 사람들과 문화에 적응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문화적 민감성은 의심할 바 없이 영국인에 대한 그의 매력을 강화시켰다. 에글리턴의 결론이다. “그는 사람들의 숨겨진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았고, 그 지식을 사용하여 영국 그리스도인들과 설득력 있게 연결했습니다.”4. 아름다운 은혜를 강조문화 변증학은 불신자가 복음이 무엇인지 알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참되기를 원하도록 돕는 데에 중점을 둔다. 켈러는 단지 이론적이거나 명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깊고도 정서적이며 또한 살아있는 실재로서의 은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러한 접근 방식을 구현했다. 여기에 관한 메이슨의 설명이다. “켈러는 은혜가 개인적이고 목회적인 모든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깨닫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풀러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준 효과를 더욱 자세히 추적한다. “켈러의 인자한 말투는 사람들을 교정하는 데에 더욱 효과적이었습니다. 종종 스스로를 자유주의 조류를 가로막는 포위된 소수자라고 느끼며 힘들어하는 영국 복음주의자들에게 켈러는 관대함과 은혜를 바탕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 고백의 진리를 굳게 붙잡는 모습을 보여준 훌륭한 모델이었습니다.”켈러는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개혁신학의 중심 사상이야말로 삶과 사역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영국인들에게 보여주었다.5. 교회 개척에 투신켈러는 영국 전역에 걸친 교회 개척 현장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 하나이다. 파웰의 말이다. “도시 교회 개척에 대한 켈러의 헌신은 전반적인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뉴욕에서 그가 보여준 사역은 영국 도시 사역의 청사진이 되었으며, 많은 목사들이 야심찬 노력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가 끼친 비전의 영향은 뉴욕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훨씬 넘어 영국의 도시 사역 조직에까지 스며들었습니다.”켈러의 영향력은 Co-Mission, New Frontiers 및 FIEC를 포함한 영국의 주요 교회들의 개척 노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인상센터처치에서 켈러는 이전보다 청중의 마음에 진리가 더 실제로 다가가도록 만드는 것이 설교의 목표라고 설명한다. 그러고는 로이드 존스의 말을 인용한다. “설교의 첫 목표이자 가장 중요한 목표는 … 하나의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그 인상은 설교를 듣는 시점에도 강렬해야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더 강하게 남아야 한다.”나는 켈러의 삶과 사역이야말로 이런 설교의 목표를 달성한 전형이라고 믿는다. 켈러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며 진리를 전달했을 뿐 아니라, 그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믿는 이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원제: 5 Ways Keller Influenced British Evangelical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믿음의 출현
by 박혜영
2023-10-06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믿는 자란 서 있는 자이며, 흔들리지 않는 자입니다. 믿음은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선 믿는 자의 의지와 태도를 강조하는 느낌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지와 버티는 태도가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처음에 서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당신은 처음 어떻게 서 있게 되었습니까?’ 그 질문도 중요합니다.“아브람[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본문의 중요성은 “믿음에 대하여 성경이 명백하게 언급하는 최초의 것”(게할더스 보스)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 전에 이미 아벨, 에녹, 노아를 믿음의 인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창세기는 그들이 등장하는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키지 않다가, 15장 6절에서 비로소 처음 등장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출현을 “명백하게”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냥 믿은 것일까요? 무조건 믿었을까요? “믿으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만’ 동사의 ‘히필’ 형태입니다. 히브리어 ‘아만’에는 ‘충성, 성실, 진실’이라는 기본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쓰는 ‘아멘’이 바로 이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파생어입니다. 그런데 이 ‘아만’ 동사가 ‘히필’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는 ‘능동사역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인이 제공되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아만’의 히필 형태가 두 번 더 나오는데 이렇습니다. “너희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창 42:20),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창 45:26). 믿기 위해서는 저쪽에서 뭔가 신실함을 제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평소에 믿음직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아비 야곱을 믿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중요한 특징은 무조건 믿는 게 아니라, 어떤 소식이 나에게 와서 ‘진실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이 점은 히브리어 문법 형태로 한 번 더 강조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보여주기 위하여 히브리어 “여호와”에 ‘어디에서’라는 의미를 담은 히브리어 전치사 ‘베’가 붙어 있습니다. “그 전치사는 이 확신이 생겨난 곳이 다름 아닌 인격적 여호와임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게할더스 보스는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 믿거나 열심히 믿기 전에 이 믿음을 촉발하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라는 말이 나오기 전, 먼저 하나님에게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이 처음 등장하는 창세기 12장이 아니라, 15장에 가서야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12-14장까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먼저 ‘믿음’이 와야 합니다(참고. 갈 3:23, 25).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는 하나님이 먼저 주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걸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니…”(창 24:27).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성실하게 대하셨기 때문에, 그걸 보는 종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본 것을 말하였지, 그저 믿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야곱도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성실]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창 32:10). 아브라함의 믿음이 등장하기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직스러운 분임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멘’으로 응답하였으며,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그러한 ‘아멘’의 반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수 24:14).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자기가 믿는 대상을 향한 “성실과 진정”이 있습니다. 믿음직스러운 모든 사람은 다 그렇게 합니다.
거룩한 습관을 지닌 젊은이가 되라
by Bobby Scott
2023-10-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젊은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는 현재 어떤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사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나는 목사이고 직업상 책을 읽는다. 그래서 지난 35년 동안 말 그대로 수 많은 책을 구입했다. 사무실과 집, 심지어 침실에도 책으로 가득하다. 산 것도 있고 선물로 받은 것도 적지 않다. 내가 J. C. 라일이 쓴 Thoughts for Young Men(하나님의 청년에게)를 샀는지 선물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책을 사용하여 나를 영원히 변화시켰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나는 라일의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계속해서 공유했다. 책 내용 전부를 좋아하지만, 특히 “젊은 남자들이 어떻게 성장하느냐는 그들의 현재 모습에 크게 좌우된다”라는 제목이 붙은 장을 좋아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십 대의 나는 그 내용을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젊은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는 현재 어떤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사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 내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습관은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습관의 뿌리는 깊다. 죄가 일단 당신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결코 당신이 명령한다고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습관이라는 사슬은 마치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삼겹줄”과 같다. … 나무와 마찬가지로 습관도 나이가 들면서 강화된다. 어린 참나무는 어린아이는 쉽게 구부리지만, 다 큰 참나무는 장정 백 명이 달라붙어도 못 뽑는다. … 선한 습관이나 악한 습관이 매일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있다. 당신은 매일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있다. 회개하지 않는 시간을 점점 더 많이 보낼 때, 당신과 천국 사이의 벽은 더 높아지고 두꺼워진다. 건너야 할 물은 더 깊고 넓어진다. 날마다 죄에 머물러 굳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라! 이제 죄에 관해서 뭔가를 해야 할 때이다. (Thoughts for Young Men, 15, 17-18)라일의 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데에 꼭 필요한 두 가지 거룩한 습관을 기르고자 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셨다. 하나는 죄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갈망이었다.죄성에 찬 습관에서 도망치라삶은 방향이 정해져 있으며, 잘못된 길을 걷게 되면 점점 더 죄에 얽매이기 마련이다.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행여라도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죄에 빠질까 두려웠다. 라일의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음을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오는 지혜를 구하는 습관을 기르라는 강한 동기를 부여하셨다.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책임과 실천이 밑바탕이 되는 진정 투명한 관계와 우정을 발전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전의 죄악된 습관과 타협하기보다는 피하도록 내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하나님은 내가 나이 많고 지혜로운 신자들로부터 조언을 찾아서 듣도록 선하게 인도하셨다.이 글을 읽는 당신이 꽤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주변에서 젊은이들을 찾아 이 진리를 가르치라. 우리의 영혼이 살고 죽는가는 죄에 굴복한 후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치열하게 죄와 싸우는 데에 달렸다(롬 6:1-2; 살전 4:1-8). 사탄은 지금도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 가혹하다고, 또 거부하기에 죄는 너무 달콤하다는 거짓말을 젊은이의 귀에 속삭이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라!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삼고 죽음으로 이끌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이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만족시킬 것이다(빌 3:8). 그러므로 죄로 이끄는 죽음의 습관을 버리는 데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도 너무 급진적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마 5:29-30; 골 3:5).거룩한 습관을 들이라하나님은 또한 거룩한 습관이 가진 성결케 하는 힘을 내게 가르치기 위해서 라일을 사용하셨다.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성결함이 가진 역동성을 경험한다. 어떤 습관을 실천하는가에 따라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룩한 습관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에 부채질하고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바로 눈앞에 두는 은혜의 수단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화시키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을 체험하려는 내 속에 타오르는 열망을 불어넣으셨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기도하는 습관을 들였다. 아무리 바빠도 성경을 읽었다. 그 결과 아무리 중요한 학교 프로젝트의 마감이 눈앞에 있어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다가와도, 나는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서 성경을 읽었다.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몇 달이 몇 년이 되고, 지금은 몇 년이 수십 년이 되었지만, 이 결심은 바뀌지 않았고 평생의 습관으로 굳어졌다. 경건의 습관에 힘입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을 아는 지식과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무럭무럭 성장했다. 주일 오전 예배 외에 나는 주일학교와 주중 성경공부에도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거기서 나는 성경 연구 방법을 배웠다. 나는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성경 속 핵심 책에 관해서 배웠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 제자 삼는 방법, 소그룹을 이끄는 방법 등 실용적인 신학까지 섭렵했다. 나는 성도의 교제를 삶의 주요 습관으로 삼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디모데후서 2:22을 보라.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경건한 덕을 추구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혼자 하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 함께” 하라고 격려한다. 요점은 명확하다. 경건한 신자들과의 교제를 타협하지 않는 습관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죄와 싸우고 경건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을 상실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라일의 권고에 더불어 덧붙이는 내 간증에 여러분이 현명하게 귀를 기울이길 기도한다. 죽은 사람으로부터 배우라지금까지 말한 습관들이 대단히 심오한 통찰력은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다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을 복잡하게 만드실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다루시며 우리가 성장하도록 때에 맞게 먹이신다. 라일이 젊은 독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행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행 2:42).내 인생을 변화시킨 라일의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는 그가 죽은 지 백 년이 훨씬 넘었을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UCLA의 세속 교실에 앉아있는, 막 구원받은 도시에서 자란 한 소년을 제자로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라일이 쓴 정교한 글을 통해서 나를 빚으셨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백 년 더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당시의 나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권면 받아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로 여전히 넘칠 것이다. 여러분과 내가 힘을 합쳐 귀한 젊은이들을 거룩한 습관으로 부르는 일에 함께 충성하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원제: Young Men with Holy Habit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근원적 우상까지 드러내라
by 고상섭
2023-10-04
팀 켈러는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시작했을 때 단순히 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형식을 통해 죄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젊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효과적이었다고 고백했다. 혹자는 팀 켈러가 죄에 대해서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팀 켈러가 죄에 대해 선명하게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그의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마음의 죄를 드러내라 폴 워셔로 대변되는 설교자들의 특징은 신자의 죄에 대해 강하게 선포한다. 폴 워셔 목사는 음란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죄를 지적한다. 음행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들 중 하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지배하지 못했다면 신앙의 기초조차 달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 여러분, 맥 빠진 채로 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음란의 문제를 처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강력한 도전이 있지만 두 가지 문제를 양산하는데,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과 죄를 거룩하지 못한 행위로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란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C. S. 루이스도 사람의 행위를 통해 죄를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모성애,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 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 등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지 싸우려는 충동이나 성 충동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가 모성애나 애국심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보다 더 많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나 군인처럼 의무적으로 성적 충동을 북돋우거나 싸우려는 충동을 북돋워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향한 모성애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자녀나 나라에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2]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있고 그 행위도 악한 행동을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단순히 악한 행동이 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 곧 그것이 비로 좋은 것일지라도 죄가 된다고 선포함으로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죄로 드러낸다. 자녀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랑의 대상이 될 때 그 좋은 것은 우리를 노예로 삼게 되고 죄로 변질되게 된다. 팀 켈러가 행위의 죄를 강하게 선포하지 않는 이유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선두주자였던 로버트 슐러 목사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죄를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마음의 죄를 드러내 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팀 켈러는 이런 방식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 접근법은 젊고 세속적인 직장인들에게 아주 효과적이었다. … 우상숭배의 개념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진 집착이나 두려움, 중독, 도덕적 결여, 타인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분노 등을 적절하게 이해하게 한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구원을 그들의 직업과 로맨스에서 추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3]팀 켈러의 우상숭배로서의 죄의 선포는 로버트 슐러식의 죄를 선포하지 않는 소비자 중심주의적 설교도 아니고, 폴 워셔 식의 행위의 죄만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도 아닌 인간 마음속의 숨어있는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좀 더 균형 있고 설득력 있는 방식의 죄의 선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우상을 드러내라 팀 켈러가 죄의 문제를 우상숭배라는 관점으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 덕분이었다.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지냈는데 당시 미국 교회의 분위기는 죄에 대해 언급할 때 개인적인 죄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었고 개인의 행위적 노력을 통해 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죄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와 악,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인 악의 문제까지 언급했는데, 그 중심에는 인간 마음의 기만성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4]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을 추모하면서 쓴 기사에서 내가 만든 신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라 말하면서, 단순히 개인의 우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 심어지는 우상이 있음을 언급한다.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5]데이비드 폴리슨도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서 인간을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세 가지를 육신과 마귀와 세상이라고 말한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죄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폴리슨이 언급한 ‘허영의 시장’이라는 말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말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다. 그곳은 온갖 욕망을 사고파는 장소였고, 거기서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내용에서 착안하여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말한다. 팀 켈러의 설교와 가르침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지 못하면 청중은 교회 안에 있지만 다른 하나님 즉 자신이 만든 가짜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우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6]콜롬비아 대학 인문학 교수 마크 릴라(Mark Lilla)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불충분성을 인식한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율적인 삶을 버리고 자신이 더 큰 무언가에 의존적인 존재임을 이해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팀 켈러는 이것을 오늘날 현대적 문화에 속한 자율성(autonomy)에 대한 도전이라 분석한다.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많은 사람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희망을 둔다. 팀 켈러는 이 자율성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종교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유라고 말한다.[7] 이런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개인의 우상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문화 저변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평가하고 도전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오,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이런 고백이야말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가장 해방적이고 촉매적인 단계 가운데 하나라고 팀 켈러는 말한다.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8]근원적 우상을 드러내라 자신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 내러티브 안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의 문제를 다루려면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9]근원적 우상이 ‘힘’인 사람은 자신이 굴욕당하고 창피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가 단순히 분노하는 문제만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 안에 힘을 추구하려는 근원적 우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정을 원하는 사람은 거절의 감정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계속 인정을 갈구하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숨 막힐 정도가 된다. 또 타인의 인정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맞추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어지고 비겁해지는 감정을 해결하지 못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험을 하거나 도전하는 상황들을 두려워한다. 요구사항이나 스트레스의 상황을 극도로 불안해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은 방치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무기력과 권태의 감정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근원적 우상이 ‘통제’인 사람은 매사에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불확실한 상황에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일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돌발상황을 힘들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일을 통제해야 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고, 걱정과 염려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 표면적 우상만을 다루어서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표면적인 방식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너무 사랑하는 모습으로 우상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지만, 돈과 권력을 미워하고 그것을 가진 사람들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렇게 돈과 권력을 멀리하면서 고결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태도이다.[10]내가 만든 신에 리디머 교회의 한 목회자가 부부를 상담한 내용이 나온다. 돈 관리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였다. 아내는 남편을 구두쇠로 여겼고 남편은 아내가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목회자와 상담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기적입니다. 옷과 외모 단장에 돈을 엄청나게 쓰거든요!” 남에게 예뻐 보이려는 욕구가 아내의 돈 씀씀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남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목회자는 남편에게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의 개념을 알려주고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전혀 쓰거나 베풀지 않고 동전 한 푼까지 다 쌓아두는 것도 똑같이 이기적인 일임을 아십니까? 당신은 지금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 욕구를 채우는 데 무조건 전액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11]아내는 돈을 많이 사용함으로 무엇을 얻고 싶었다면, 남편은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상은 돈, 섹스 같은 표면적 우상만 없애서는 해결될 수 없다. 그 일을 행하는 마음속 근원적 우상이 해결되어야 한다. 내가 만든 신에서도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매번 다른 여자들을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그 후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건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침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12]1. 팀 켈러, 센터처치, 271.2.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37. 3. 팀 켈러, 센터처치, 272.4. “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 5.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6.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5.7. 팀 켈러, 설교, 166.8. 팀 켈러, 설교, 35.9. 팀 켈러, 설교, 116.10. 팀 켈러, 왕의 십자가, 283.11. 팀 켈러, 일과 영성, 117.1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75.
톨킨이 팀 켈러에게 끼친 영향
by Collin Hansen
2023-10-03
J. R. R. 톨킨에게 깊은 애정이 있었던 팀 켈러는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이든 또는 톨킨 사후에 출판된 13권의 전집이든, 그가 쓴 책을 쉬지 않고 읽었다. 어떻게 해야 소설가가 복음주의 목사에게 그토록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1937년에 ‘호빗’을 출판한 톨킨이 미국의 중산층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당장 영웅으로 등극한 건 아니었다. 그건 1954년에 ‘반지 원정대’가 나오고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톨킨은 단지 환경 파괴, 전쟁으로 파괴된 풍경, 그리고 샤이어에서 살면서 파이프 담배에 만족하는 작은 호빗에 대한 비전 정도로 대표되는, 반문화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 정도로만 알려졌고 전 세계의 기차역에는 “간달프를 대통령으로”와 “프로도는 살아있다” 등의 낙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 한 해에만 해도 밴드 Black Sabbath, Led Zeppelin, 그리고 Genesis 모두가 다 톨킨의 작업에 근거를 둔 노래로 차트에 올랐다.제인 치아바타리(Jane Ciabattari)는 BBC에 이렇게 썼다. “오늘날 우리는 톨킨의 작업이 코믹콘(Comic-Con)의 괴짜 세트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때는 우드스탁(Woodstock)에 모이는 군중에 더 가까웠다.”팀 켈러의 여동생 샤론 존슨은 1972년을 톨킨의 여름으로 기억한다. 버크넬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팀은 펜실베이니아 존스타운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첫째이자 선생 그리고 열정가인 팀은 여동생에게 C. S. 루이스, 특히 톨킨의 책을 읽도록 했다. 팀은 계속해서 동생을 다그쳤다. “아직 다 안 읽었어? 아직도 안 읽었다고?” 그는 동생이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따라하기를 기대했고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동생과 공유하고 싶어 했다.팀의 사망 전에 샤론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팀은 직관력이 있어요. 그는 다양한 도약과 연결을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팀의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우리는 성경 공부를 했고 또 같이 북 스터디도 했어요. 이런저런 모든 비교와 대조를 했는데, 무엇보다 톨킨의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곤 했어요.”켈러가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었을 때 의지한 대상이 바로 톨킨이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은 사우론에 있는 권력의 반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반지가 가진 모든 힘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반지가 주는 매혹적인 주문에 빠질 수밖에 없다. 노예 해방, 왕국의 보호, 죄인 처벌 등 당신이 추구하는 대의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반지는 결코 길들일 수 없다. 대의로 치장된 좋은 것들은 윤리를 단순한 방해물로 만드는 절대적 욕구가 된다. 톨킨은 로마서 12:18-21에서 악으로 결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바울의 경고를 예시로 반지를 사용한다. 오직 좋은 것만이 폭발력을 가진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반지를 낀 사람은 점점 더 반지에 예속되고 중독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상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반지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반지는 우리가 한때 존중했던 규칙을 어기게 만들고 반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해를 끼치게 만든다. 톨킨의 소설과 실제 삶에서 우상은 끔찍한 악으로 이어지는 영적 중독이다.”켈러는 Every Good Endeavour에서 약간 다른 적용 방식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명에 관해서 쓴 이 책에서 켈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톨킨의 또 다른 이야기인 “Leaf by Niggle”에 내용의 대부분을 의존했다. 그는 또한 일에 관한 2004년, 2008년, 2009년 그리고 2010년에 설교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사용했다. 켈러는 1995년 공개 포럼에서도 그 이야기를 언급했다. 켈러에게 “Leaf by Niggle”은 우상 숭배에 관한 교훈을 주는 반지 이야기와 함께 Tribeca에서 일하는 Makoto Fujimura와 같은 예술가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뉴욕의 여피들에게까지도 매력적일 수 있는 소재였다.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은 단지 사랑받는 작품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호빗’ 및 다른 저작물을 통해서 그는 언어와 배경 이야기가 가득한 하나의 완전한 우주를 창조했다. 그는 이 작품에 수십 년을 매달렸다. 사실 톨킨은 죽기 전에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행여라도 중간계가 꼭대기가 잘려버린 나무가 될까 봐 걱정했다. 창의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걱정할 때 문득 떠오른 게 바로 한 화가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톨킨은 그것을 “Leaf by Niggle”이라고 불렀다.니글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야기의 기원을 알려준다. 톨킨은 혼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완벽주의 경향도 생산성에는 방해가 되었다. 꼭 가야 하는데 니글이 미루고 있는 여행을 통해서 톨킨은 죽음을 말하고 싶어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니글은 적어도 그림 하나를 꼭 완성하고 싶어 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건 숲과 평야, 눈 덮인 산으로 가득한 나라 전체였다. 하지만 그는 외로운 나무에 달린 나뭇잎 하나에 먼저 집중해야만 했다. 완벽주의와 이웃의 도움 요청 사이에서 그는 결코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웃을 도우던 중에 니글은 병에 걸렸고, 더 이상 여행을 연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죽었다. 그가 살던 집을 산 사람들은 니글의 그림이 담긴 캔버스를 발견했고, 그들이 거기에서 본 것은 오로지 나뭇잎 하나가 전부였다. 그들은 그 그림을 박물관에 기증했고, 그곳에서 몇몇이 그 그림을 보았다.정의와 자비의 목소리를 듣는 니글을 통해서 톨킨의 이야기는 영원까지 계속된다. 정의는 나뭇잎 한 장만 그린 니글을 비난한다. 자비는 이웃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니글에게 박수를 보낸다. 기쁘게도 니글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나무가 이제는 복잡하고 절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건 선물이에요!”하고 니글이 소리친다.니글은 단지 자신이 작은 나뭇잎 하나만을 현실 세계에 남겨둔 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결코 잎사귀를 잃거나 시들지 않는 나무가 있는 진짜 현실에 들어섰음을 알았다.켈러에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기억될 것이라는 보편적인 희망에 관한 것이다. 누구라도 성취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필연적으로 부족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 노력도 세대가 오고 세대가 가면서 잊혀지기 마련이다. 켈러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잊혀질 것이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모든 노력, 심지어 최선을 다한 헌신도 결국에는 다 물거품이 될 뿐이다.” 단, 하나님이 없다면 말이다. 성경의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지금의 삶 아래와 뒤에 참된 실재가 있다면, 그래서 이 삶이 유일한 삶이 아니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모든 선한 노력, 심지어 가장 단순한 노력이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추구한다면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약속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고전 15:58). 바울이 말한 건 기독교 사역에 관해서였지만, 톨킨의 이야기는 바울의 말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모든 일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톨킨은 목회자로서 켈러가 단지 교회 사역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담긴 존엄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이 글은 콜린 핸슨이 쓴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의 보너스 장(bonus chapter)이다. 이 장은 무료 PDF로 볼 수 있다.원제: How J. R. R. Tolkien Influenced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전능자에 대한 좌절과 감격
by 전재훈
2023-10-02
출애굽기 6:3에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관주가 붙어있어요.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전능의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엘로힘’이 아니라는 거예요. ‘엘로힘’의 뜻은 전능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지요. 하지만 이 용어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 주시기보다 하나님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은 엘로힘이시다’라고 부른 것이지요. ‘엘’은 강한 자, 능력 있는 자를 뜻하는 말이고, ‘엘로힘’은 ‘엘’의 장엄복수형으로 ‘가장 강한 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른 것은 당시는 신들이 각자의 고유영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신론이 지배적이던 때였습니다. 신들은 자신의 지역이 있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특정 영역이 있습니다. 풍요를 다스리는 ‘바알’과 다산을 상징하는 ‘아세라’가 대표적이지요. 우리 개념으로 하면 바다에는 ‘용왕’이 다스리고, 산에는 ‘산신령’이 임신과 출산에는 ‘삼신할매’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역을 넘어서서 어디에나 계시고 전쟁에도 능하시고 양식도 주시며 자녀의 복도 주시는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 신이었기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신’의 개념으로 ‘엘로힘’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엘샤다이’도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이 말은 ‘엘로힘’과 뜻이 조금 다릅니다. ‘엘샤다이’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100퍼센트 이룰 능력과 의지가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하고자 마음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신다는 신의 주권적 의지가 강조된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6장에서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관주에 ‘엘샤다이’라고 토를 달아 둔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알까 봐 더 정확하게 해 주느라고 관주를 단 것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속성상 3무(無)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실수, 실패, 포기’가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속성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왜냐하면 ‘실수, 실패, 포기’는 일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변수를 알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반해, ‘전지’하신 하나님은 모든 변수까지도 알고 계시며 심지어 그 변수마저 통제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엘로힘’과 달리 계시적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을 ‘엘샤다이’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로 계시하신 것과 같습니다. ‘엘로힘’은 대부분 하나님을 지칭하기는 하나 부분적으로 다른 신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즉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도 쓰인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했던 말 중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라고 했었는데, 이때 사용된 단어가 엘로힘입니다. 하지만 ‘엘샤다이’는 고유명사로서 오직 ‘여호와’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른 어떤 신이든 능력만 있으면 되는 신일 때는 ‘엘로힘’이지만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할 때는 ‘엘샤다이’라는 것입니다. ‘엘샤다이’의 전능자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제가 전능자에게 느끼는 좌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자신이 뜻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저를 포함 우리 가족 모두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혹은 그분의 뜻을 이루는데 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는 형태의 기도로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써 주옵소서’ ‘주여 당신의 뜻을 내게 알리소서. 저를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정도입니다. ‘엘로힘’은 기도할 때 참 편한 신입니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까 무엇이든 요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면 됩니다.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든지, 40일 금식기도나 절벽에서 기도하듯이 하나님을 적당히 위협하면 됩니다. ‘엘로힘’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의 정서와도 딱 맞아떨어집니다.‘엘로힘’에게는 예배도 무당의 굿판과 비슷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정성껏 굿을 준비하여 무당으로 하여금 춤추게 하고 나는 그 앞에서 손을 싹싹 빌기만 하면 귀신의 능력을 빌려와 다른 귀신도 내쫓고 질병도 고치고 액운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예배도 정성껏 준비하여 바른 자세로 예물을 힘껏 준비하여 드리고 손을 모아 기도하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축복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예배를 아무리 잘 드리고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하고 기도를 아무리 세게 해도 꿈쩍도 안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이 정해진 이상, 나는 아무리 애써도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시련과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대중적 인기’ 혹은 ‘유명세’에서 엘로힘에게 엄첨 밀렸습니다.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은 엘샤다이가 아닌 엘로힘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국식 기도원에는 ‘엘샤다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무조건 ‘엘로힘’이어야 합니다. ‘엘샤다이’는 수도원에서만 간간히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수도원보다 기도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을 말할 때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걸핏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주의 보혈을 뿌리노라’ ‘믿는 대로 될지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주여 믿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등의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엘로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나의 ‘원함’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하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사람들은 ‘엘샤다이’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질병 앞에 치유를 구하지 않고 겸손과 지혜와 깨달음을 구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고난 앞에 해결을 기도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믿음을 구하거나 고난이나 환란이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깨닫게 되면 도리어 고난 앞에 즐거워합니다. 이들은 종종 ‘엘로힘’을 섬기시는 분들에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구원의 문제에 대면했을 때입니다. 뜻을 정하기만 하셔도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100퍼센트이신데 뜻을 정하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 걸었다면 이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며 실패하지 않으시고 도중에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요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떤 변수도 없고 어떤 훼방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런 엘샤다이께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뜻을 정하셨다면 나는 그 앞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차에서 뒤돌아 앉아도 천국까지 가고 전봇대를 붙잡고 늘어져도 전봇대 채 뽑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때문에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 부르고 타력 종교라 부르며 고등 종교라 부릅니다. ‘엘로힘’은 이 세 가지 모두를 흐릿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구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선포에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수단입니다. 다시 말해, 엘샤다이께서 나를 사랑하시기로 뜻을 정하셨으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까지 거셨으니 나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앞에서 엎드려지게 될 것입니다.‘엘샤다이’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예배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시며 내 입술에서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내가 비록 사는 것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 있는 것은 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엘샤다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다
by 최창국
2023-09-27
그리스도인에게 ‘은혜’는 매우 중요한 언어이다. 은혜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언어이다.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알기 위해서는 은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은혜(grace)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첫째는 형태, 몸가짐, 동작, 행동의 우아함 혹은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둘째는 호의나 선의와 관계되고, 셋째는 호의의 표현과 관계된다. 그리고 넷째는 사람의 마음에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해롤드 엘런스(Harold Ellens)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 은혜의 관계를 매우 의미 있게 묘사한다. 그는 인간의 상태인 죄를 인간의 용어로는 ‘완전한 절망’이지만, 하나님의 용어로는 ‘완전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인 인간을 소망으로 변혁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삶에 소망의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성경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인간의 죄를 말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한계를 말하기 위한 차원도 있지만, 죄는 인간의 한계성만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희망의 근원을 말하기 위한 역설이 있다. 인간의 희망의 근원과 원동력은 은혜의 복음이다. 은혜는 인간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혁하는 힘이다.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열매는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기쁨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공기를 들이마시듯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호흡한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흠뻑 누리면, 그것이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낸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인류의 공공선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와 관계된 특별 은혜와 삶의 진선미와 관계된 보통 은혜로 구분할 수 있다. 특별 은혜는 초자연적이지만, 보통 은혜는 자연적이다. 특별 은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주어지지만, 보통 은혜도 구원의 일부와 관련이 있지만 죄를 제거하거나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지 못한다. 특별 은혜는 우리의 죄와 죄의 부패를 제거하고,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은혜다. 보통 은혜는 도덕적 삶과 사회 안의 선한 질서, 시민적 공동선, 과학과 예술의 발전 등을 증진한다. 보통 은혜는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시간적으로 우선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이 세상 안에서 작용할 때 특별 은혜를 보조하기 때문에 논리적 우선성은 특별 은혜에 두어야 한다.특별 은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계가 있지만, 보통 은혜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세계 안에서도 역사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는 모두 이 세계 안에서 역사한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보다 일상과 자연계와 관계된다고 하면, 특별 은혜는 새 창조의 일들과 관계된다. 이 두 은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특별 은혜뿐 아니라 보통 은혜도 교회를 풍요롭게 한다. 교회는 보통 은혜의 은사들과 열매들을 중생한 삶의 영향 아래 둠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은혜는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은혜는 단지 받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고 아래로 흘려보내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동시에 은혜에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강권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동하는 삶과 노력을 강화하는 것이지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이자 고요하면서도 능력 있는 삶과 사역의 열쇠는 방향을 잘 맞춘 과단성 있고 지속적인 우리의 노력이다”(브루스 데머레스트, 영혼의 계절들, 132). 따라서 행동을 통해 은혜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건강한 행동을 낳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일찍이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도 우리 없이는 우리 삶 가운데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은혜는 정직하고 책임을 지려는 노력에 능력을 부어 줌으로써 우리 안에 존엄성을 심어 준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 안에 겸손을 심어 준다. 은혜는 믿음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발성과 신뢰를 자라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수용 능력과 민감성을 심어 준다. 이 모든 은혜는 우리 안에서 부드럽게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빛나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탁월한 사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1세기에 변방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로마에서 성장하게 된 주요인은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로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단지 좋은 교인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야 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자녀, 건강한 시민 됨에 두어야 한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자녀, 좋은 시민 됨 없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아버지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있지만, 나쁜 아버지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는 성경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있듯이, 좋은 사람과 좋은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유기적인 관계다. 물론 과거에 나쁜 아버지였다고 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영성의 세계
by 이춘성
2023-09-26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주일이다. 난 오전 9시에 시작하는 2부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의 교회학교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기 위해 근처 한 카페에 와 있다. 카페 2층에는 몇몇 무리가 모여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엄마, 잠시 커피 마시고 있는 아저씨, 컴퓨터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는 중고생들, 그리고 직장인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 여럿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대화에 집중해 보았다. 이들은 어떤 외국인 저자의 소설책을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을 묻고, 자기 경험을 나누면서, 위로의 말과 격려의 감정을 주고받고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같이 욕해주면서 웃고 울면서 지친 일상을 달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들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나왔다. ‘설교.’ 어떤 사람이 직장 상사나 주변의 꼰대 같은 사람의 잔소리가 꼭 설교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공감하였다. 공교롭게도 지금 옆 건물에는 내가 다니는 교회 3부(오전 11시) 예배에서 목사님이 설교하고 계셨다. 옆 건물에서는 설교가 행해지고, 여기에서는 설교를 자기 삶에는 아주 쓸데없는 잔소리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 공감해 주면서 힘을 얻고 있었다. 이들의 모임은 마치 예배 같았다. 이들이 읽고 나누고 있는 소설책은 성경이나 신앙 서적 같았고, 이들이 이 책을 해석해서 자기 경험을 말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또 다른 형태의 설교 같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인 카페는 이들의 예배당이며, 먹고 마시는 음료와 빵은 성찬일까?작년 초 불교계에서는 한국의 4대 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의 연구자들을 모아 포럼을 열었다. 이 연구는 각각의 종교학자들이 약 2년 이상 모여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모인 종교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코로나19 이후의 가장 주목 받을 종교는 불교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올해 1월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 조사’에서 사실로 밝혀졌다. 직전 2017년 조사에 의하면 종교 인구 비율이 개신교가 1위(20.3%)였는데, 5년이 지난 이번 조사에서는 5퍼센트 가까이 떨어져 15.0퍼센트가 되어 불교가 1위(16.3%)가 된 것이다. 또한 무종교인의 호감도는 불교가 29.5퍼센트, 개신교는 4.7퍼센트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종교인의 급격한 증가세다. 종교인의 비율이 2017년 조사보다 10퍼센트나 줄어 역대 최저치인 36.6퍼센트로 주저앉았다. 무종교인이 60퍼센트가 넘은 것이다. 그리고 무종교인의 약 3분의 1이 과거에 종교인이었으며, 그중의 3분의 2가 개신교인이었다. 이 조사의 결과는 여러 시사점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성 종교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마음 수행 종교의 특성을 가진 불교는 이를 이들의 새로운 기회로 포착하고 템플스테이나 개인화된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 명상 등의 프로그램을 더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러한 탈 기성 종교 현상에 대해서 그 원인을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종교 모임 때문이라고 평가하면서, 대면 모임이 활성화되면 곧 회복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코로나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금 일어나는 탈 기성 종교 현상은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있는 한국 사회의 세속화 현상이었다는 것이 대부분 종교학자의 분석이다. 한국 사회의 세속화로 인하여 기성 종교의 공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종교가 더욱 개인화되면서, 모임의 형태에서도 종교가 기관이나 제도화된 집단이 아닌 개인화된 영성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와 그 기간은 이를 더욱 가속하는 계기였을 뿐이다.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는 2016년 어느 모임에서 “종교를 넘어선 종교와 새로운 영성”이란 제목의 주제 발표를 하였다. 이듬해 그는 이 발표문을 “무종교의 종교 개념과 새로운 종교성”이란 논문으로 발전시켰다. 성해영 교수는 이 발표문과 논문에서 한국 사회에서 출현한 ‘세속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이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기성 종교에서 경험하는 종교적 체험을 종교 활동이 아닌 여러 다른 방식과 활동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약물이나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것을 통해서도 예배 시간에 경험한 감동과 신비적 체험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약물이나 뇌 자극과 같은 방법은 실험실에서나 있을 법한, 위험한 일이기에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다른 사회적 움직임과 결합하여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SBNR)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영성의 출현이었다. 이 표현은 2000년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얼랜스(Sven Erlandson)가 그의 책 제목으로 처음 사용하였고, 다음 해인 2001년에 로버트 풀러(Robert C. Fuller)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교회 밖으로 나간 미국 이해하기”(Spiritual, but not Religious: Understanding unchurched America)라는 책을 통해 학문적으로 더 자세히 다루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 두 저자의 주장은 미국의 종교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제도적 교회 밖에서 영적인 갈망을 채우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이 현상은 종교적(Religious)이란 단어보다는 영적(Spiritual)이란 단어로 포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를 교회라는 공동체적인 의미보다는 제도나 공동체 밖의 개인 영역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공동체와 제도를 떠올리는 종교와 연관된 것이 교리, 전통이라면,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성과 연관된 것은 개인의 체험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단월드’ ‘마음 수련’ ‘선 수행’ ‘요가’ ‘템플스테이’ ‘타로 카페’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또한 교회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가나안 성도’ 현상도 SBNR 영성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교회에 대한 윤리적 실망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탈 교회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종교의 공적인 역할과 영역을 사적인 역할과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 세속화 영향으로 인하여, 현대인의 종교에 대한 역할과 인식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이전의 종교가 제공했던 신비적 체험에 대한 개인적 필요가 여전히 존재하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한 SBNR식의 영성이 종교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교회가 SBNR 영성에 대해서 시급하게 성찰해야 할 점을 하나 언급하고 이 글을 마치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설교 시간이나 신앙 상담 중에 하물며 신학교의 강의실에서 목사와 신학자들이 쓰는 ‘영성’이란 말을 성도들과 신학생들은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교회가 처한 여러 위기 중 하나는 기독교 신앙과 믿음의 내용, 교리와 신앙 지식, 예배와 삶의 전통을 신자 개인의 신비적 체험과 깊숙하게 잇지 못하고 이것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속의 흐름 속에서 개인화된 영성, 세속적인 영성이 아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통합되고 신비와 합리성이 결합한 진정한 기독교 영성을 회복하는 길을 찾는 것, 이것이 현대 교회의 또 다른 과제이다. 다음에는 ‘세속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아, 주님께 즐거이 예배하고 싶다
시편 95편 묵상: 진정한 예배
by 고명환
2023-09-25
1 미국 보스턴 지역에는 이름난 두 교회가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파크스트릿 교회와 외곽에 자리한 그레이스 채플이다. 파크스트릿 교회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유서 깊은 보스턴 다운타운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적 특성과 함께 교회가 지닌 역사적 유산 역시 만만치 않아서 보스턴을 방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들러 예배하고 싶어 하는 교회이다.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라는 인상을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받는다. 미국의 교회들이 점점 젊은이들을 잃어가고 노령화되는 추세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래된 긴 나무 의자의 곳곳을 차지하고 진지하게 예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속으로 그 이유를 묻게 된다. 물론 보스턴은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명문대학들이 즐비해선지 인구의 상당 부분은 학생들이 차지하는 젊은 도시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전통적인 파크스트릿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보스턴 시내에는 그들이 찾을 만한 교회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쉽게 다닐 교회를 찾아낼 수 있다. 예배의 형식이 젊은이들을 불러들이는 것 같지도 않다. 그 교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을 듯한 전통 예배를 드린다. 사회자 한 사람이 인도하는 긴 예배 순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풍스러운 오르간 반주가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것 같지도 않다. 전통 성가를 부르는 찬양대나, 가운을 입고 성경을 한 줄 한 줄 풀이해 나가는 설교 방식도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찾는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바를 채워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교회인 그레이스 채플은 보스턴 시내를 한참 벗어나 한적한 타운에 있다. 담임 목사가 주장하듯 현시대의 사람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꾼 교회이다.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통만을 고수하면 문을 닫게 된다는 철학을 가진 목사 아래 여전히 그 교회는 끊임없이 참신한 시도를 한다. 다른 많은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처럼 이 교회 또한 설립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통 교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종탑이 뾰족하게 올라간 전형적인 외관은 해체되었고, 내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전면에 무대가 배치된 극장식 예배실을 비롯한, 카페, 체육관, 기도실 등 여러 부대 시설을 갖춘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성도는, 정장을 차려입은 이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캐주얼 복장이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나 찬양단, 설교자까지 티셔츠나 스포츠 셔츠를 입고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웅장한 오르간 대신 일렉트릭 밴드의 리드미컬한 연주에 맞춰 최근의 찬양 메들리를 부르는 것으로 예배는 시작된다. 예배를 위해 주보가 제작되지도 않는다. 찬양, 광고, 기도, 설교가 전부인 단순한 순서의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아이러니하게도, 현시대의 조류에 맞게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 이 교회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찾기 어렵다. 일어선 채 컨템포러리 찬양을 행복한 얼굴로 부르는 지긋한 나이의 성도들에게 드럼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같다. 간략하지만 마음을 담아 참여할 수 있는 예배 순서, 삶과 밀착된 설교, 종교적인 엄숙함이 줄 수 없는 인도자와 참여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오는 에너지가 연령을 막론하고 성도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2시편 95편1오너라,우리가 주님께즐거이 노래하자.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소리 높여 외치자.2찬송을 부르며그의 앞으로 나아가서,노래 가락에 맞추어,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3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4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5바다도 그의 것이며,그가 지으신 것이다.마른 땅도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6오너라,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무릎을 꿇자.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그가 손수 이끄시는 양 떼다.오늘,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8므리바에서처럼,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너희의 마음을완고하게 하지 말아라.9너희의 조상들은 그 때에,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나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10사십 년을 지나면서,나는 그 세대를 보고 싫증이 나서‘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나의 길을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하였고,11내가 화가 나서‘그들은 나의 안식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 95편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예배는 오직 만물의 창조주이며 소유주이신 하나님만을 높이는 최상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분은 땅과 바다를 지으셨고 해 아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4, 5절).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왕들 혹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이다(3절). 이 위대한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다.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삼으셨고 손수 기르시고 이끌어 주신다(7절). 더욱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반석이다(1절).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마땅히 최고의 경배를 올려야 한다. 여기에는 합당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 경외와 감사의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능력과 권세를 가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복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며 엎드려 경배함이 마땅하다(6절). 믿음이 없이 나아가는 참된 예배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임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현재의 삶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여정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하다. 시는 므리바에서 믿음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는지 들려준다(8-11절). 양인 우리가 목자를 신뢰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즉 믿음 없는 예배는 그분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다. 무의미한 요식행위 이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크신 하나님의 실존과 찾는 사람에게 보응하시는 인격임을 믿어야 한다(히브리서 11:6).예배에 합당한 마음가짐이 먼저 준비되고, 이 바탕 위에 그분을 높여 드리는 예배 행위가 얹어져야 한다. 음악은 예배자의 마음을 잘 담아내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오래된 매체이다. 목소리로 찬양하며 악기로 연주하여 주님을 높여 드릴 수 있다(1, 2절). 춤 역시 주님의 백성으로 왕께 기쁨을 표현하고 영광 돌리는 예배 행위이다(사무엘하 6:13-14; 시편 149:3). 이외에도, 오늘날에는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예배는 즐거운 일이다(1, 2절).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 자유와 절제와 완급이 있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믿음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우울하거나 무덤덤한 일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잊은 채 밝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기뻐하며 경배해야 한다. 3다니던 신학교에선 일주일에 세 번, 열한 시에 공식적인 예배가 열렸다. 주중의 가운데 날인 수요일에는 화려한 오르간 반주가 울려 퍼지고 전통적인 예배 순서에 따라 드리는 격식을 갖춘 채플이었고, 다른 두 번은 일렉트릭 밴드를 따라 찬양하는 시간과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간결하게 짜인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였다. 보통 총장과 교직원들이 참석하는 수요일 전통 예배에는 학생들이 채플실의 좌석을 채워서 성황을 이루었지만, 월요일과 금요일의 약식 예배에는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아 다소 썰렁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자주 참석하던 학생들마저 그 시간에 도서관에 머물렀다. 좋은 학점을 받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예배의 형태가 어떠하든 또 시험 기간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고, 오전 열한 시 채플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늘 앉는 자리를 찾았다. 그 시간만큼은 가정사나 힘겨운 공부, 낯선 나라에서 받는 압박감을 뒤로하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하며 힘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귀에 익숙지 않았던 전자 기타 소리에 따라하던 컨템포러리 찬양이나 오르간 반주에 섞여 힘차게 부르던 전통 찬양은 언제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황을 이룬 자리에서 듣던 설교는 물론, 듬성듬성 학생들이 앉아 있는 한적한 공간에서 경청한 교수님들의 설교는 한 번도 지루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때 4년간 참석했던 채플 시간은 고스란히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문제를 모두 잊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주님께 다가갔던 그 시간들은 몇몇 단편적인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 여러 과목의 강의보다도 오래 남을 가르침의 시간들이었다. 귀국 후, 주일이면 고민이 생겼다. 예배를 드리러 오늘은 어느 교회를 방문할지 고민이다. 목사로 섬기는 교회가 없으니 어디든 찾아가 회중 속에 섞여 예배해야 하는데, 마땅히 갈 만한 교회가 없다. 주변에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다. 군중 속에 앉아 있다가 떠날 때 붙잡히지 않을 커다란 교회들이 즐비하건만 마음 편하게 다음에 또 찾을 만한 교회가 없는 것이다. 기대를 안고 찾는 교회마다 실망하게 되고 주일이면 다른 교회를 찾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찾아오는 영혼의 뿌듯함이나 감격보다는 고민과 회의를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일에 찾은 굵직한 교단의 큰 교회들은 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찬양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순서가 단출한 예배를 하건, 교독문과 사도신경을 넣은 긴 순서의 예배를 하건 상관없이 생동감을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순서를 이끄는 사회자나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앞에 도열한 찬양팀, 또 말씀을 전하는 담임목사는 심각한 얼굴로 주어진 순서를 능숙하게 수행한다. 여기에, 대표기도를 맡은 분은 한참 시간을 들여 작성한 듯한 기도문을 들고 올라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회중석의 성도들은 이런 의식의 진행에 익숙해서 어느 부분에서 앉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움직이면서 동요 없이 예배의 흐름에 자신들을 맡기는 것 같다. 그러다가, 목사가 두 손을 올리고 엄숙하게 기도하는 의식이 끝나기 무섭게 주섬주섬 물건을 챙긴 후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자리를 뜬다. 좋게 말하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의식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계적으로 치르는 제사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제단을 쌓는다’는 표현을 쓴다.) 기계적이고 의례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주님이 예배의 주제와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보다 교회가 때로는 더 강조되고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다. 예배 중 교회의 다채로운 행사가 대형 스크린에 뜨고 화려한 미디어로 제작된 각 부서의 활동이나 앞으로 이루어질 프로그램에 대한 선전이 예배자의 마음에 적잖은 잔상을 남긴다. 한술 더 떠서 설교자가 앞서 광고한 내용을 부연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말씀을 전해야 할 시간에 설교자가 교회의 사업을 위해 재단한 선동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청중의 마음을 빼앗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물론 설교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명분도 잊지 않고 주입한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회중의 영혼에 역사해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님의 이름을 빌린 사업 설명회가 회중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것이다. 늘 찾던 교회가 코로나 시기에 한시적으로 문을 닫은 탓에 가족과 함께 한국의 이름난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화면 앞에 앉아 들은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은 중간에 끄고 싶은 내용이었다. 그분은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교육관을 지을 자금이 필요하다며 설교의 처음과 끝을 일관되게 헌금을 유도하는 내용으로 시간을 채웠다. 내용 중에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어떤 성도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말씀을 잘한다고 소문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청년인 아들이 도전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자리였는데, 기대와 달리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평소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을 가진 아들이 그분의 설교로 인해 불신의 마음을 더 갖는 데 일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이 좋은 환경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양질의 콘텐츠를 통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첨단 건물이 필요하고 마음을 써서 헌금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시간에 하면 틀린 말이 된다. 좋은 꼴인 주님의 말씀 대신 양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이면 교회를 뒤로하고 돌아가는 예배자들에게 자주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을 예배하고 왔는지, 예배를 통해 예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는지, 좋으신 그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지. 당신이 드린 찬양은 나를 잊고 주님만을 높여 드린 찬양이었는지. 아니면 나에게 몰입했던 찬양이었는지. 4‘참으로 예배하고 싶다.’ 예배학을 공부한 어떤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제목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어 한다. 예배의 자리에 가기를 기뻐하고, 예배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예배는 그분의 백성과 하나님이 만나 상호 교류하는 더없이 소중한 의식이다. 주님은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이고 사망에서 건져 주신 구원자이다. 그분은 예배를 통해 자기를 찾는 영혼들을 기뻐하시며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사람들에게 주님은 삶의 목적이고 의미이며 일관된 추구의 대상이다. 당연히, 마음을 다해 감사와 찬양으로 높여 드리고 싶어 한다. 예배는 이런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과 주님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이 교류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이 땅에서 예배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는 집회들은 그 의미에 부합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마음으로 예배자가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지…. 그렇지 않다면, 속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정형화된 형식을 되찾고, 모범적인 예배를 만들어 내자는 뜻은 아니다. 이미, 예배의 틀은 세대의 흐름과 함께 중요성을 상실했고 지금 와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예배의 정신이 있다. 혹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거나 경시했다면 원래의 모습을 찾아 위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예배자)는 절대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온전한 마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인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시고(로마서 1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그분을 추구하기 기대하신다(마가복음 12:30). 그렇기에 예배자는 최상의 심령을 가지고 와야 한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열망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권세가 많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늘 만나는 사람을 대면하러 가듯 성의 없이 예배의 자리로 향할 수는 없다. 예배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회자, 찬양팀, 기도자, 설교자 역시 예배자들이며, 그들도 예외 없이, 준비된 최상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고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심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모든 예배자가 흠 없는 완전한 상태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되, 오로지 주님을 향하는 열망과 그분의 은총을 기대하는 가난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배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모여 하나님을 높이는 배타적인 의식이 아니다. 그런 예배는 변화된 몸을 입은 성도들이 드릴 천상의 예배에서나 실현될 것이다. 지상의 예배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시간이다. 예배에 모인 성도 중에는 큰 죄를 범해 가책을 느끼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육체나 정신의 연약함으로 지친 성도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짐이나 복잡한 심령을 가졌든지 최상의 심령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동기로 참여해야 한다. 그럴 때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용서와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소원해졌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영혼이 힘을 얻고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육체와 정신의 치유를 얻는 놀라운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8). 사랑의 주님은 상하고 찢긴 마음이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녀들을 가엽게 여기시어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다음으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 예배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일꾼들의 인식과 역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참여자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모아지도록 최선으로 섬기는 한편, 각자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일하시도록 자신들을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중요한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가져야 할 인식과 마음의 자세를 늘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예배를 꾸미고 준비하는 일꾼들이 예배의 본질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질 필요가 있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누구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가? 초보 신자라도 답할 수 있는 쉬운 물음이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종종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예배의 대상에 사람이 혹은 교회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만족이 목표인 듯한 예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서비스하기보다 무언가를 얻으려 예배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서비스하려는 듯한 예배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님이 예배의 대상이며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비자가 된 듯한 참여자들을 만족시키고 교회에 계속 붙들어 놓기 위한 방편으로 예배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 중에 사람을 칭송하거나 교회 행사를 선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예배는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만을 높이고, 기뻐하며, 그분만이 전해지고, 성령님만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든 순서와 활동이 그 분께 모아져야 한다. 하여, 교회가 참여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예배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 이상 예배를 위한 콘텐츠 개발에 몰두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려한 콘서트 같은 예배를 통해 참석자들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주는 감동은 진정 영혼이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 세상의 잘된 공연에 취할 때 얻는 생명이 짧은 가벼운 감동 정도를 줄 뿐이다. 진정, 예배자가 주님을 경험하고 영혼의 빛을 얻는 것은 화려한 예배 음악이나 잘 짜인 순서 때문이 아니다. 기도할 때 크게 연주되는 반주나 설교의 말미에 은은하게 곁들이는 음악 효과에 달려있지 않다. 예배 과정 하나하나가 각자에게 의미로 다가오고 거기에 영혼이 실려질 때 성령에 의한 감동은 주어진다. 이는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지는 좋은 감정과 달리 잘 박힌 못과 같이 심령에 오래 살아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 것이다.그러므로, 인위적인 분위기 조성으로 예배자에게 감동을 주입하려 하기보다 오롯이 성령님께서 일하시게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 참여자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골몰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주님께 이끌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돕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5예배를 강조하지 않는 한국 교회는 없어 보인다. 교회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마다 크게 장식된 “살아 있는 예배” 혹은 “감동이 있는 예배” 등의 문구가 말해 준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예배를 찾고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교회들은 뭔가 그들만의 차별화된 예배 콘텐츠를 가진 것처럼 어필하고 있다. 바라기는, 예배를 자랑하고 최고의 예배를 추구한다는 교회들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분히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 행여라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사람을 위한 서비스는 아닐까 하는 우려가 쓸데없는 기우가 되기를 바란다.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이런 엄연한 관계를 잊은 채, 스스로의 만족과 감동을 얻기 위해 예배가 연출된다면 실로 무례한 불경이 아닐 수 없다. 예배자로서 가져야 할 합당한 마음가짐 위에 다채로운 내용이 실려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예배의 주인이심을 인식하면서, 소박하더라도 기쁨으로 찬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기도하며, 주님이 증거되는 생생한 능력의 말씀이 선포될 때, 진정한 예배는 드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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