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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주님께 즐거이 예배하고 싶다
시편 95편 묵상: 진정한 예배
by 고명환
2023-09-25
1 미국 보스턴 지역에는 이름난 두 교회가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파크스트릿 교회와 외곽에 자리한 그레이스 채플이다. 파크스트릿 교회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유서 깊은 보스턴 다운타운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적 특성과 함께 교회가 지닌 역사적 유산 역시 만만치 않아서 보스턴을 방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들러 예배하고 싶어 하는 교회이다.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라는 인상을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받는다. 미국의 교회들이 점점 젊은이들을 잃어가고 노령화되는 추세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래된 긴 나무 의자의 곳곳을 차지하고 진지하게 예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속으로 그 이유를 묻게 된다. 물론 보스턴은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명문대학들이 즐비해선지 인구의 상당 부분은 학생들이 차지하는 젊은 도시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전통적인 파크스트릿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보스턴 시내에는 그들이 찾을 만한 교회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쉽게 다닐 교회를 찾아낼 수 있다. 예배의 형식이 젊은이들을 불러들이는 것 같지도 않다. 그 교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을 듯한 전통 예배를 드린다. 사회자 한 사람이 인도하는 긴 예배 순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풍스러운 오르간 반주가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것 같지도 않다. 전통 성가를 부르는 찬양대나, 가운을 입고 성경을 한 줄 한 줄 풀이해 나가는 설교 방식도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찾는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바를 채워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교회인 그레이스 채플은 보스턴 시내를 한참 벗어나 한적한 타운에 있다. 담임 목사가 주장하듯 현시대의 사람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꾼 교회이다.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통만을 고수하면 문을 닫게 된다는 철학을 가진 목사 아래 여전히 그 교회는 끊임없이 참신한 시도를 한다. 다른 많은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처럼 이 교회 또한 설립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통 교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종탑이 뾰족하게 올라간 전형적인 외관은 해체되었고, 내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전면에 무대가 배치된 극장식 예배실을 비롯한, 카페, 체육관, 기도실 등 여러 부대 시설을 갖춘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성도는, 정장을 차려입은 이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캐주얼 복장이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나 찬양단, 설교자까지 티셔츠나 스포츠 셔츠를 입고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웅장한 오르간 대신 일렉트릭 밴드의 리드미컬한 연주에 맞춰 최근의 찬양 메들리를 부르는 것으로 예배는 시작된다. 예배를 위해 주보가 제작되지도 않는다. 찬양, 광고, 기도, 설교가 전부인 단순한 순서의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아이러니하게도, 현시대의 조류에 맞게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 이 교회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찾기 어렵다. 일어선 채 컨템포러리 찬양을 행복한 얼굴로 부르는 지긋한 나이의 성도들에게 드럼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같다. 간략하지만 마음을 담아 참여할 수 있는 예배 순서, 삶과 밀착된 설교, 종교적인 엄숙함이 줄 수 없는 인도자와 참여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오는 에너지가 연령을 막론하고 성도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2시편 95편1오너라,우리가 주님께즐거이 노래하자.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소리 높여 외치자.2찬송을 부르며그의 앞으로 나아가서,노래 가락에 맞추어,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3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4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5바다도 그의 것이며,그가 지으신 것이다.마른 땅도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6오너라,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무릎을 꿇자.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그가 손수 이끄시는 양 떼다.오늘,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8므리바에서처럼,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너희의 마음을완고하게 하지 말아라.9너희의 조상들은 그 때에,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나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10사십 년을 지나면서,나는 그 세대를 보고 싫증이 나서‘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나의 길을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하였고,11내가 화가 나서‘그들은 나의 안식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 95편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예배는 오직 만물의 창조주이며 소유주이신 하나님만을 높이는 최상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분은 땅과 바다를 지으셨고 해 아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4, 5절).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왕들 혹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이다(3절). 이 위대한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다.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삼으셨고 손수 기르시고 이끌어 주신다(7절). 더욱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반석이다(1절).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마땅히 최고의 경배를 올려야 한다. 여기에는 합당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 경외와 감사의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능력과 권세를 가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복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며 엎드려 경배함이 마땅하다(6절). 믿음이 없이 나아가는 참된 예배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임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현재의 삶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여정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하다. 시는 므리바에서 믿음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는지 들려준다(8-11절). 양인 우리가 목자를 신뢰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즉 믿음 없는 예배는 그분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다. 무의미한 요식행위 이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크신 하나님의 실존과 찾는 사람에게 보응하시는 인격임을 믿어야 한다(히브리서 11:6).예배에 합당한 마음가짐이 먼저 준비되고, 이 바탕 위에 그분을 높여 드리는 예배 행위가 얹어져야 한다. 음악은 예배자의 마음을 잘 담아내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오래된 매체이다. 목소리로 찬양하며 악기로 연주하여 주님을 높여 드릴 수 있다(1, 2절). 춤 역시 주님의 백성으로 왕께 기쁨을 표현하고 영광 돌리는 예배 행위이다(사무엘하 6:13-14; 시편 149:3). 이외에도, 오늘날에는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예배는 즐거운 일이다(1, 2절).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 자유와 절제와 완급이 있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믿음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우울하거나 무덤덤한 일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잊은 채 밝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기뻐하며 경배해야 한다. 3다니던 신학교에선 일주일에 세 번, 열한 시에 공식적인 예배가 열렸다. 주중의 가운데 날인 수요일에는 화려한 오르간 반주가 울려 퍼지고 전통적인 예배 순서에 따라 드리는 격식을 갖춘 채플이었고, 다른 두 번은 일렉트릭 밴드를 따라 찬양하는 시간과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간결하게 짜인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였다. 보통 총장과 교직원들이 참석하는 수요일 전통 예배에는 학생들이 채플실의 좌석을 채워서 성황을 이루었지만, 월요일과 금요일의 약식 예배에는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아 다소 썰렁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자주 참석하던 학생들마저 그 시간에 도서관에 머물렀다. 좋은 학점을 받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예배의 형태가 어떠하든 또 시험 기간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고, 오전 열한 시 채플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늘 앉는 자리를 찾았다. 그 시간만큼은 가정사나 힘겨운 공부, 낯선 나라에서 받는 압박감을 뒤로하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하며 힘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귀에 익숙지 않았던 전자 기타 소리에 따라하던 컨템포러리 찬양이나 오르간 반주에 섞여 힘차게 부르던 전통 찬양은 언제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황을 이룬 자리에서 듣던 설교는 물론, 듬성듬성 학생들이 앉아 있는 한적한 공간에서 경청한 교수님들의 설교는 한 번도 지루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때 4년간 참석했던 채플 시간은 고스란히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문제를 모두 잊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주님께 다가갔던 그 시간들은 몇몇 단편적인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 여러 과목의 강의보다도 오래 남을 가르침의 시간들이었다. 귀국 후, 주일이면 고민이 생겼다. 예배를 드리러 오늘은 어느 교회를 방문할지 고민이다. 목사로 섬기는 교회가 없으니 어디든 찾아가 회중 속에 섞여 예배해야 하는데, 마땅히 갈 만한 교회가 없다. 주변에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다. 군중 속에 앉아 있다가 떠날 때 붙잡히지 않을 커다란 교회들이 즐비하건만 마음 편하게 다음에 또 찾을 만한 교회가 없는 것이다. 기대를 안고 찾는 교회마다 실망하게 되고 주일이면 다른 교회를 찾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찾아오는 영혼의 뿌듯함이나 감격보다는 고민과 회의를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일에 찾은 굵직한 교단의 큰 교회들은 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찬양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순서가 단출한 예배를 하건, 교독문과 사도신경을 넣은 긴 순서의 예배를 하건 상관없이 생동감을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순서를 이끄는 사회자나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앞에 도열한 찬양팀, 또 말씀을 전하는 담임목사는 심각한 얼굴로 주어진 순서를 능숙하게 수행한다. 여기에, 대표기도를 맡은 분은 한참 시간을 들여 작성한 듯한 기도문을 들고 올라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회중석의 성도들은 이런 의식의 진행에 익숙해서 어느 부분에서 앉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움직이면서 동요 없이 예배의 흐름에 자신들을 맡기는 것 같다. 그러다가, 목사가 두 손을 올리고 엄숙하게 기도하는 의식이 끝나기 무섭게 주섬주섬 물건을 챙긴 후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자리를 뜬다. 좋게 말하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의식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계적으로 치르는 제사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제단을 쌓는다’는 표현을 쓴다.) 기계적이고 의례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주님이 예배의 주제와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보다 교회가 때로는 더 강조되고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다. 예배 중 교회의 다채로운 행사가 대형 스크린에 뜨고 화려한 미디어로 제작된 각 부서의 활동이나 앞으로 이루어질 프로그램에 대한 선전이 예배자의 마음에 적잖은 잔상을 남긴다. 한술 더 떠서 설교자가 앞서 광고한 내용을 부연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말씀을 전해야 할 시간에 설교자가 교회의 사업을 위해 재단한 선동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청중의 마음을 빼앗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물론 설교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명분도 잊지 않고 주입한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회중의 영혼에 역사해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님의 이름을 빌린 사업 설명회가 회중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것이다. 늘 찾던 교회가 코로나 시기에 한시적으로 문을 닫은 탓에 가족과 함께 한국의 이름난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화면 앞에 앉아 들은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은 중간에 끄고 싶은 내용이었다. 그분은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교육관을 지을 자금이 필요하다며 설교의 처음과 끝을 일관되게 헌금을 유도하는 내용으로 시간을 채웠다. 내용 중에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어떤 성도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말씀을 잘한다고 소문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청년인 아들이 도전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자리였는데, 기대와 달리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평소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을 가진 아들이 그분의 설교로 인해 불신의 마음을 더 갖는 데 일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이 좋은 환경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양질의 콘텐츠를 통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첨단 건물이 필요하고 마음을 써서 헌금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시간에 하면 틀린 말이 된다. 좋은 꼴인 주님의 말씀 대신 양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이면 교회를 뒤로하고 돌아가는 예배자들에게 자주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을 예배하고 왔는지, 예배를 통해 예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는지, 좋으신 그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지. 당신이 드린 찬양은 나를 잊고 주님만을 높여 드린 찬양이었는지. 아니면 나에게 몰입했던 찬양이었는지. 4‘참으로 예배하고 싶다.’ 예배학을 공부한 어떤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제목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어 한다. 예배의 자리에 가기를 기뻐하고, 예배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예배는 그분의 백성과 하나님이 만나 상호 교류하는 더없이 소중한 의식이다. 주님은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이고 사망에서 건져 주신 구원자이다. 그분은 예배를 통해 자기를 찾는 영혼들을 기뻐하시며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사람들에게 주님은 삶의 목적이고 의미이며 일관된 추구의 대상이다. 당연히, 마음을 다해 감사와 찬양으로 높여 드리고 싶어 한다. 예배는 이런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과 주님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이 교류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이 땅에서 예배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는 집회들은 그 의미에 부합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마음으로 예배자가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지…. 그렇지 않다면, 속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정형화된 형식을 되찾고, 모범적인 예배를 만들어 내자는 뜻은 아니다. 이미, 예배의 틀은 세대의 흐름과 함께 중요성을 상실했고 지금 와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예배의 정신이 있다. 혹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거나 경시했다면 원래의 모습을 찾아 위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예배자)는 절대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온전한 마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인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시고(로마서 1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그분을 추구하기 기대하신다(마가복음 12:30). 그렇기에 예배자는 최상의 심령을 가지고 와야 한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열망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권세가 많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늘 만나는 사람을 대면하러 가듯 성의 없이 예배의 자리로 향할 수는 없다. 예배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회자, 찬양팀, 기도자, 설교자 역시 예배자들이며, 그들도 예외 없이, 준비된 최상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고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심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모든 예배자가 흠 없는 완전한 상태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되, 오로지 주님을 향하는 열망과 그분의 은총을 기대하는 가난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배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모여 하나님을 높이는 배타적인 의식이 아니다. 그런 예배는 변화된 몸을 입은 성도들이 드릴 천상의 예배에서나 실현될 것이다. 지상의 예배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시간이다. 예배에 모인 성도 중에는 큰 죄를 범해 가책을 느끼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육체나 정신의 연약함으로 지친 성도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짐이나 복잡한 심령을 가졌든지 최상의 심령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동기로 참여해야 한다. 그럴 때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용서와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소원해졌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영혼이 힘을 얻고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육체와 정신의 치유를 얻는 놀라운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8). 사랑의 주님은 상하고 찢긴 마음이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녀들을 가엽게 여기시어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다음으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 예배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일꾼들의 인식과 역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참여자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모아지도록 최선으로 섬기는 한편, 각자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일하시도록 자신들을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중요한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가져야 할 인식과 마음의 자세를 늘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예배를 꾸미고 준비하는 일꾼들이 예배의 본질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질 필요가 있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누구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가? 초보 신자라도 답할 수 있는 쉬운 물음이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종종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예배의 대상에 사람이 혹은 교회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만족이 목표인 듯한 예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서비스하기보다 무언가를 얻으려 예배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서비스하려는 듯한 예배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님이 예배의 대상이며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비자가 된 듯한 참여자들을 만족시키고 교회에 계속 붙들어 놓기 위한 방편으로 예배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 중에 사람을 칭송하거나 교회 행사를 선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예배는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만을 높이고, 기뻐하며, 그분만이 전해지고, 성령님만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든 순서와 활동이 그 분께 모아져야 한다. 하여, 교회가 참여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예배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 이상 예배를 위한 콘텐츠 개발에 몰두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려한 콘서트 같은 예배를 통해 참석자들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주는 감동은 진정 영혼이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 세상의 잘된 공연에 취할 때 얻는 생명이 짧은 가벼운 감동 정도를 줄 뿐이다. 진정, 예배자가 주님을 경험하고 영혼의 빛을 얻는 것은 화려한 예배 음악이나 잘 짜인 순서 때문이 아니다. 기도할 때 크게 연주되는 반주나 설교의 말미에 은은하게 곁들이는 음악 효과에 달려있지 않다. 예배 과정 하나하나가 각자에게 의미로 다가오고 거기에 영혼이 실려질 때 성령에 의한 감동은 주어진다. 이는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지는 좋은 감정과 달리 잘 박힌 못과 같이 심령에 오래 살아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 것이다.그러므로, 인위적인 분위기 조성으로 예배자에게 감동을 주입하려 하기보다 오롯이 성령님께서 일하시게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 참여자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골몰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주님께 이끌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돕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5예배를 강조하지 않는 한국 교회는 없어 보인다. 교회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마다 크게 장식된 “살아 있는 예배” 혹은 “감동이 있는 예배” 등의 문구가 말해 준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예배를 찾고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교회들은 뭔가 그들만의 차별화된 예배 콘텐츠를 가진 것처럼 어필하고 있다. 바라기는, 예배를 자랑하고 최고의 예배를 추구한다는 교회들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분히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 행여라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사람을 위한 서비스는 아닐까 하는 우려가 쓸데없는 기우가 되기를 바란다.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이런 엄연한 관계를 잊은 채, 스스로의 만족과 감동을 얻기 위해 예배가 연출된다면 실로 무례한 불경이 아닐 수 없다. 예배자로서 가져야 할 합당한 마음가짐 위에 다채로운 내용이 실려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예배의 주인이심을 인식하면서, 소박하더라도 기쁨으로 찬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기도하며, 주님이 증거되는 생생한 능력의 말씀이 선포될 때, 진정한 예배는 드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전도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
by Matt Smethurst
2023-09-23
세속 시대에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쉽지 않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들 너무 바쁘다거나, 심각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애초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어색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하는 이유에 관해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뭐가 나올까? 뭔가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의 하나는 애초에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에는 세 가지 공통되는 이유가 있다.1. 맥락을 무시한다. 지금은 탈 기독교 시대이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에 관해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쉽게 가정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방식에 동참하기 위해서라도 주의 깊게 잘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오해를 사거나 완전히 거부당할 용어를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거기에는 심지어 성경의 용어까지 포함되어 있다. •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좋은 소식이지만, 하나님의 본질(또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쓴다면 의미 없는 말로 전락한다. • “당신은 죄인입니다.” 사실이지만, 죄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죄에 대해 그다지 나쁘게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은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 말도 사실이지만,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성경에 따르면요….” 훌륭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꺼내려면 조건이 있다. 성경이 구식, 가부장적 동화 모음집으로 치부되지 않는 경우이다. 복음을 멋있게 치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해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주변 문화를 연구하는 목적이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배적인 가치관과 희망, 두려움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복음이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키고 또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우상까지 전복시킬 수 있을까?오늘과 같은 문화 환경 속에서 효과를 높이려면 질문에 능숙해야 한다. 전도하는 핵심 목표가 단지 당신의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런데도 오로지 전문 성경 용어로만 나열하는 데 그친다면, 회의론자들은 기껏해야 혼란에 빠지거나 최악에는 도망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효과를 높이는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해하기 위해서 듣고 또 이해받기 위해서 말하게 된다. 더불어서 당신과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이웃이 곧 듣게 될 최고의 소식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유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전도는 단지 허공을 때릴 뿐이다. 2. 사랑하는 데에 실패한다.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살전 2:8).잃어버린 자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영적 미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는 메시지도 들리지 않는다. 신뢰는 필수이며, 당신이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기본이다. 사랑에 실패하는 순간 복음 전파가 허사가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을 향한 그들의 마음도 완고해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을 향한 전도의 문은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결코 실질적 전략의 범주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사랑이야말로 당신이 고백하는 바로 그 하나님을 당신이 진짜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리트머스 종이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단언한다.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전 13:1-3)당신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전도자일 수도 있다. 또 회심자도 적지 않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하다면, 당신은 단지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위험과 이해관계는 없다.제대로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가 잘 들어주는 것이다. 경청은 단지 힘든 시기를 겪는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조언이 아니다. 그건 감성 지능의 기초 중 기초이다. 경청과 사랑받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흡사해서 사람들 대부분이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성경이 무어라고 하는가?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 1:19) 권고한다. 하지만 이 말씀을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하는 데에 바빠서 상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위험까지 무릅쓰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여전히 길을 잃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는 것처럼 상대에게 말해야 한다. 지금은 분노의 시대이다. 문화를 역행하는 사랑의 말투가 없다면 복음이라는 반문화적인 메시지도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3. 두려움에 굴복한다.전도하기를 꺼리는 진짜 이유 중 하나가 두려움이라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어색한 상호작용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또 노골적인 거부나 당혹감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회의론자의 반대에 대응할 준비가 되지 않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두려운 이유는 수없이 많다. 두려움 중 일부는 소심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복음 전파의 기회를 낭비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전도는 복잡하지 않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나누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상태가 되어서 전도하는 날은 아예 꿈꾸지도 말라. 그런 날은 없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혼을 붙잡고 관리하겠다고 결심하라.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 순간이 오면, 당신은 갑자기 대화의 방향을 영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적으로는 괴로울 것이다. 뱃속이 울렁거릴 수도 있다. 그건 정상이다. 맥박이 마구 뛸 수도 있다. 그것도 정상이다. 목소리가 떨릴 수도 있다. 이제 당신은 진정한 복음 전파자의 세계로 들어왔다. 환영한다. 기억해야 한다. 이런 불쾌한 감정이 결코 도망치라는 신호이거나 다음으로 미루라는 신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지금 당장 두려움을 정면으로 직면하고 전쟁을 선포해야 할 바로 그 순간이다. “그래, 두려움아, 너는 실재하고 또 강력하지. 하지만 넌 전능하지 않아. 넌 나를 지배하지 못해. 나는 너에게 굴복하지 않을 거야. 나는 오로지 왕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볼 거야. 지금 나는 그분께 기대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겠어.” 당신이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지금 한번 상상해 보라. 당신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두려움에 얼어붙었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주님, 저는 아닙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아직 준비가 안 됐고, 게다가 게다가 환경도 이상적이지 않아서 당신이 복음을 듣지 못했더라면,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위대하시며 동시에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복음서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하나를 선포하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감을 잡았는가? 목자. 아버지. 왕. 하나의 작은 구절, 그러나 세 개의 거대한 진리.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목자이시며,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아버지이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왕이시다. 이천 년 전, 목자이신 왕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되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라는 구절만큼이나 위로가 되는 게 있다. 바로 “어린양이 나의 목자이시다”(계 7:17)라는 약속이다. 영광으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이다”(마 28:20).전도가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Matt Smethurst,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 (10Publishing, 2022)에서 간추린 글입니다.원제: 3 Reasons We Avoid Evangelism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적 존재를 부정하는 미국인이 늘고 있다
by Joe Carter
2023-09-22
이야기: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하나님, 천사, 악마 같은 영적 존재의 실재를 부인하고 있다.배경: 미국에서 하나님, 악마 및 기타 영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 최저점에 도달했다. 최근 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하나님, 천사, 천국, 지옥 및 악마의 존재를 믿는 미국인의 비율이 2016년 이후 3-5퍼센트포인트 하락했다. 그러함에도 미국인 대다수는 여전히 영적 존재를 믿고 있는데, 74퍼센트가 하나님을 믿고, 69퍼센트는 천사의 존재를 믿으며, 67퍼센트는 천국을 그리고 59퍼센트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 악마의 존재를 믿는 수치는 58퍼센트였다. 2001년과 비교할 때, 가장 많이 감소한 게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인데 각각 16퍼센트포인트였다. 2001년 이후 지옥에 대한 믿음도 12퍼센트포인트 떨어졌고, 악마와 천사에 대한 믿음도 각각 10퍼센트포인트씩 하락했다. 전체적으로 미국인의 51퍼센트는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모두 믿는다. 그 어떤 존재도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은 11퍼센트이며,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고 대답한 사람은 7퍼센트이다. 전반적으로 모든 연령대에 걸쳐서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감소했지만, 18-34세 연령대가 그중에서도 가장 낮았다. 가톨릭보다는 개신교인에서 믿는 비율이 더 높았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종교 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대다수가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다 믿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정치 성향도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화당원의 78-87퍼센트가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믿는데, 무소속의 경우에는 51-68v퍼센트이다. 이에 비해서, 민주당원의 56-66퍼센트가 하나님과 천사, 천국은 믿는다고 했지만, 지옥과 악마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절반 미만이었다. 무슨 의미인가: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감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식론적 권위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특정 주제에 관한 인식론적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해당 주제에 관해서 보유하고 있는 정보나 통찰력이 신뢰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다. 과거에 인식론적 권위는 현실에 대한 공유된 감각과 현실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권위에 대한 존중에 크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새로 태어난 아기를 놓고 삼신할머니가 준 거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와 자기의 자궁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두 의견이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머니의 말을 믿었다. 아기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현실을 어머니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식의 많은 영역에서 인식론적 권위는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에 빠르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형이상학은 실재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연구이고,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는 실재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입장이다.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실재 또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의 인식, 신념 또는 기타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구성되거나 조건화된다는 것이다. 실재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저 바깥”의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형성되거나 심지어 존재하게끔 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는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누구도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낙태에 관한 1992년 대법원 사건인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사건을 생각해보자. 그 판결에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에 관해서 지금까지 발표된 내용 중에서도 가장 명확하고 영향력 있는 주장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낙태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면서 케네디 판사는 다수의견에서 “자유의 중심에는 존재, 의미, 우주, 인간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개념을 정의할 권리가 있다”라고 썼다.많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케네디도 형이상학적 주관주의가 자명하다고 가정한다. 전직 판사 케네디의 정의에 따르면, 존재의 본질(존재함), 윤리의 본질(의미), 물질세계의 본질(우주), 그리고 사고와 감정 및 행위(인간 생명의 신비) 등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은 하나같이 개인이 정의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실재의 본질을 스스로 정의할 권리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에 필요한 기본 권리가 된다. 물론 아무리 케네디라고 해도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를 일관되게 적용한 적이 없다. 아니, 그건 아예 불가능하다. 그런 개념은 터무니없고, 누구라고 거기에 따라서 살 수는 없다. 케네디의 견해는 합의가 필요한 실재에 대한 부정이자 누구나 스스로 실재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민법이 존재하고 이에 따라 대법원 판결이 가능하려면, 현실 내지 실재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있어야만 한다. 자기모순 없이는 누구도 일관되게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념상 형이상학적 주관주의 내에서 자기모순은 누군가가 동의하는 경우에만 “실재”가 된다. 따라서 얼마든지 실재 그 자체를 거부함으로 누구라도 비일관성과 모순이라는 현실을 피할 수 있다. 자기모순을 무시하고 대신에 “자기 눈에만 보이는 진실”에 의지하면 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 모순적이고 실재의 재정의라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의 대표적인 사례가 트랜스젠더 운동이다. 얼핏 보기에 이건 거의 갑자기 세상에 튀어나온 것만 같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남자도 여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한 게 아니다. 인식론적 권위를 거부하고 이를 내부 권위로 대체하는 데에는 무려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나의 진실”이라는 말에 더 이상 웃지 않게 되었을 때, 도리어 급진적인 내부 주관성을 지적 존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발생한 게 다름 아닌 트랜스젠더 운동이다. 그렇기에 이번 갤럽 여론조사는 놀랍지 않다. 하나님, 천사, 악마, 천국, 지옥이 정말로 실재한다면(당연히 그렇다), 그 사실은 진리가 개인의 감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생각에 실존적 위협을 가한다. 형이상학적인 주관주의가 기반을 확보함에 따라 하나님과 그 외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비례하여 감소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다.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가 성경의 인식론적 권위와 성경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도록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시며, 그를 통해서 천사, 귀신, 천국, 지옥 등 모든 실재가 창조되었다(골 1:16-17).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이웃이 그들의 궁금함이나 채우는 수준의 일반적인 신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대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분을 받아들이도록 애써야 한다. 진정한 진리의 권위를 올바로 인식할 때야 우리는 비로소 주관적인 ‘나의 진실’이 얼마나 무가치한 우상인지를 똑똑히 볼 수 있게 된다. 원제: Poll Finds an Increasing Number of Americans Reject Re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삶의 이벤트를 점처럼 이으면
by 필립 정
2023-09-21
19세기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유행하던 퀼트라는 수예 기법이 있다. 여인들이 옷을 만들고 남은 천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그 위에 실로 인상적인 말들을 새겨 넣는 수공예이다. 당시 미국의 여인들은 이런 퀼트 공예품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서부로 먼 길을 떠났다. 그런데 종종 그 퀼트에 성경 구절들을 새겨 선물하기도 하였다. 이어 붙인 천 조각에 새겨 넣은 성경 구절은 떠나간 이의 삶에 새겨진 은혜를 추억하게 하고 험한 길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위로를 심어 주었다.반복되지 않고 일회적이어서 머물러 있지 않은 시간을 우리 인간들도 퀼트처럼 이어 붙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 형형색색 삶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다 보면 누군가에게 보여 줄 만한 소품 하나가 나올까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들을 하나둘 이어 붙여 보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특별하지 않아 너무 특별한, 반박할 수 없는 라이프 퀼트 소품 하나가 나왔다. 인간의 삶은 지으신 이의 디자인을 버리고 욕심의 천 조각을 끊임없이 이어 붙여가는 탐욕의 퀼트라고… 그리고 주님의 디자인은 그 탐욕의 반대편 그림이라고….몇 년 전 어느 날, 일하다 너무 피곤해 중간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 극심한 피곤 증세는 몇 주 동안 이어졌고 하루는 거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없었던 주름과 피부의 노화가 그 몇 주 사이에 얼굴에 내려앉아 버렸다. 왜 그런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혈압, 당뇨, 혈중 콜레스테롤이 평균보다 조금 높았다. 하루 세끼를 잡곡으로 꼬박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 온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이 들어 더 자세히 원인을 찾아 나갔다.내가 얼마나 탐욕스럽게 먹고 살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간 하루 밥 두세 공기 거기에 과일, 과자까지 합쳐 내 나이 필요 탄수화물 기준치 2배 이상을 훨씬 초과해 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2020년 한국 보건복지부와 한국 영양학회에서 발표한 ‘2020년 한국인 영양 섭취 기준 자료’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하루 탄수화물 일일 평균 섭취량은 307.8그램으로 하루 기본 탄수화물 100그램의 3배를 초과하는 수치라고 한다. 그래서 식사를 하루 두 끼니로 줄이고 탄수화물의 양도 줄이며 조금씩 건강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당과, 혈압, 고지혈증을 개선할 수 있는 자연 치유법을 찾다가 식초의 효능을 알고 매일 식초를 물에 타서 섭취하기 시작했다. 소화가 촉진되고 피로도 개선이 되고 피부도 확연히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며 둘 사이에 뭔가 있을 것 같아 탄수화물과 식초의 두 조각을 이어 붙여 보았다. 식초는 곡물이나 과일로 술을 빚어 만드는 과정에서 알코올을 발효시켜 만드는 조미료이다. 과다한 탄수화물 섭취로 생긴 병을 먹다 남은 탄수화물을 버리지 않고 식초를 만들어 치유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 적게 먹어야 하고 남은 것까지 발효시켜 먹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욕심 많은 인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탄수화물 창조자의 디자인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과잉 섭취로 병이 드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기아로 죽어 가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이런 간극은 왜 생겨났을까?” 이런 문제를 발렌틴 투른과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가 그들의 책 왜 음식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2011) 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들의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식량 부족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산업화한 농업의 대량 생산 방식 때문에 물이 부족하고, 휴경 없이 계속된 농사로 땅이 황폐되어 소출이 줄어들었고, 농업의 산업화로 온실가스의 40퍼센트를 배출하여 기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과유불급을 해결하려면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고 공정한 분배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시스템을 바꾸어 대량 생산 농법을 포기하고 자연 친화 농업을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대량 생산 기술을 무기로 만들어버린 욕심 많은 농업 강대국들이 포기할 수 있을까?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바로 찾아온 것은 결핍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일해도 풍족할 수 없었다.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지치도록 일해야 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서로 속이고 싸워 착취해왔다. 보다 건설적인 대안이 농업혁명, 산업혁명이었다. 홍윤철이 지은 질병의 탄생을 보면 인간이 수렵 생활을 그만두고 농업혁명으로 곡물을 섭취하면서 면역체계가 부실해졌고 가축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가축의 병균이 인간에게 전염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도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히 그 전염병이 퍼져 나갔다고 말한다. 또 산업혁명 이후 수질과 토질, 대기가 오염이 되어 질병이 폭발적으로 늘어갔다고 한다. 인류의 유전자가 환경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지금 인간의 몸은 환경을 버텨낼 수 없는 사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어 버렸다.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욕심을 버리고 땅을 7년마다 쉬어 가며 적게 생산하고 적게 먹고 나누어 먹으면 땅도 살아나고 수확도 늘어날 것이고 결국은 병도 사라지도록 하나님이 디자인해 놓으신 것을 보면 삶의 길과 사망의 길이 확연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나는 이런 교훈을 얻으며 먹는 것을 조절해 나가면서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갔지만 더 노력이 필요했다. 책상에 한 번 앉으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리에 부종도 생기고 혈전도 생겨 약도 복용하면서 운동의 강도를 높여갔다. 어느 날, 가끔 가던 식당에 가 점심 식사로 콩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쓴맛이 나 먹다 말고 그냥 나와 버렸다. 가리지 않고 잘 먹기 때문에 그 식당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 안 가 깨져 버렸다. 쓴맛을 느끼는 그 빈도수가 점점 늘어나 내 건강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이랬다. 시간이 부족해 항상 쪼개어 쓰기 때문에 식후에 쉬지 않고 바로 운동을 하던 습관이 있었다. 심지어는 복근 운동까지 격하게 했으니 위산이 역류하여 쓴 물이 계속 올라왔던 것이다. 뭘 먹어도 쓴맛이 났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음식 탓할 것 없구나 싶었다. 그 결과 위산이 성대를 상하여 예전의 힘차게 뽑아내던 테너 소리를 잃어 버렸다게다가 과한 운동은 또 하나의 안 좋은 결과를 내고 말았다. 왼쪽 어깨의 힘줄이 찢어져 팔을 전혀 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병원을 다니며 회복하는 데 2년 가까이 걸리고 말았다. 과식이 건강을 무너뜨리는 주범인 것처럼 과로 역시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욕심을 따라 절제 없이 살다가 삶이 조금씩 무너져갔고 추락하기 전에서 겨우 멈추어 설 수 있었다.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도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어느 날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듣다가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후 아침에 차를 타고 일을 하러 나가면서 차 속에서 습관처럼 이 연설문을 수천 번 듣다 보니 다 외워 버리게 되었다. 그 연설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내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을 잇는 것에 관한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스티브 잡스는 그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점처럼 하나씩 이어가며 스탠퍼드 졸업생들에게 연설한다. 태어나서 입양된 이유와 돈이 없어서 콜라 캔을 팔아 밥을 사 먹어야 했고, 기숙사 방이 없어서 친구의 방 바닥에서 자고 심지어는 결국 대학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사건들이 다 연결이 되어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의 필수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대학을 그만두고 손으로 쓴 서체 수업을 청강으로 들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10년이 지나보니 맥킨토시 컴퓨터 폰트 디자인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그 대학에서 다른 수업을 듣고, 그 서체 수업을 안 들었다면 현재의 맥킨토시의 아름다운 서체는 없었다고 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 과거의 점들을 선처럼 이어보면 순간들은 결국 이어진다고 그 연설에서 강조한다. 불교 신자인 스티브 잡스의 연설에서 ‘점 잇기’는 불교의 용어인 인연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물이 흩어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서로 이어지고 맺어져 존재로 형성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사물이 존재로 형성이 되기 위해서는 사물의 내부에 원인이 되는 씨앗이 외부의 물과 햇빛 같은 조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연의 교리다. 인연 교리는 기독교의 섭리 교리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 씨앗이 내 속에는 없고 외부의 창조주에게서 온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우리의 존재가 디자인되어 있고 사람이 그 디자인을 따라야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올해 2023년 한국에 가서 몇 가지 건강 검진을 해 보았다.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피부과까지 가서 내 망가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미국의 병원비가 비싸기도 하지만 비교적 잔병 없이 살아 병원에 갈 필요를 느껴보지 못하다가 감당 못 할 정도가 되어서야 병원을 찾게 되었다. 결과는 그랬다.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관리를 엉망으로 하셨습니다.” 닥터들의 말이 동일했다. 안과 의사는 심하게 나무라기까지 했다. 나는 그분들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큰 감동이 오던지. 마치 내가 열네 살 때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회개 하라는 설교를 들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이벤트의 점들을 하나로 이어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삶에 디자인한 것들을 감상하곤 한다. 그럼 너무 신기한 것이 있다. 나는 내 삶에서 나 스스로 나를 위해서 스케치하거나 채색해 본 적이 전혀 없다. 그저 주어진 삶이라는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왔다. 지나고 보니 대부분의 일에 대한 열심은 탐욕이었고 게으름은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대한 포기에 가까웠다.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소망을 심고 믿어지게 하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 있었다. 그 자리엔 내 욕심이 끼어들 수 없었고 그 길은 결코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삶의 조각들을 잇다 보면 주의 은혜와 설계가 있고 그 끝에는 주님이 있었다. 또 지금까지 이어온 점들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점에 이어보면 그럼 앞으로 주님이 내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도 짐작하게 된다. 그 길을 따라가면 과거처럼 앞으로도 소망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호흡도 의미가 있고 일도 쉼도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믿어지는 것은 오늘도 날마다 색다른 선물이라는 고백을 하고 글을 마치고 싶다.
일터에서 양심에 꺼리는 일이 있을 때
by 김선일·이금주
2023-09-20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회사에서 선진 마케팅 기법이라고 해서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시제품을 과대 홍보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소 거짓말이 들어간 것 같은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실을 말하자니 회사의 영업이 어려워지고, 저도 상사에게 질책을 당합니다.김선일: 회사에서 신제품을 내놓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제품이 나온 것처럼 예고를 해서 고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고민은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겪을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금주: 이 질문을 보고 검색을 해보니, 요즘 마케팅에서는 고객의 필요를 잘 파악해서 거기에 맞춰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을 선진기법이라고 한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야말로 기독교적인 ‘타협’(compromising)의 이슈를 안고 있다고 봐요. 이 타협이란 거룩함의 문제와 연결되고, 그것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자체가 거룩하게 구별되기 위해서이지요. 이: 이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직장인들이 취해야 할 몇 가지 단계를 제 나름대로 생각해봤습니다. 첫째, 먼저 그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서 사실적 분석을 하십시오. 회사에서 계획하는 홍보방식이 과대홍보라고 바로 결론짓지 말고 정말 과대홍보인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자신은 과대홍보라고 생각하지만, 회사입장에서는 과대홍보가 아니라 정말로 선진기법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혼자서 추론하고 끙끙 앓지 마십시오. 어쩌면 회사의 운영방침이 내가 고지식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더욱 객관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먼저 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 예, 저도 조직 생활을 하다보면 한 개인으로서 업무나 경영을 대할 때와, 책임을 맡은 리더로서 전체를 볼 때의 상황이 크게 차이가 나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리 개인이라 하더라도 실무자의 경우는 그 일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이: 그래서 둘째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분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분명히 거짓이 담긴 과대홍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이 둘째 단계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실 말하기를 목회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김: 목회적이라 함은 사람을 대할 때, 비록 그가 나보다 상관이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의심될지라도 너그럽고 배려하는 자세로 접근하라는 것인가요? 이: 맞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짓말을 안 하고도, 고객의 필요를 채워주는 선진기법의 취지를 잘 살려서 회사에 진정한 유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건의하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나를 의롭게 보이려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다른 사람도 수긍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최대한 겸손하게 지혜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하려고 하는 선진기법이 100퍼센트 거짓말이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김: 질문하신 분도 “다소 거짓말이 들어간 것 같다”고 하신 것을 보니 조금 애매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품을 홍보하는 데 있어서 거짓보다는 진실을 늘리고, 사람들이 잘못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자고 건의해야겠네요. 이: 미국의 조직문화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윗사람에게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예의를 지키면서 건의해야 합니다. 공손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상사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말하십시오. 아무리 권위주의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얼마나 겸손한 태도와 용어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상사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김: 진실과 공의가 중요하지만, 그 진실과 공의를 담는 방식은 겸손과 온유함이어야겠습니다. 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하고 연구해서 제안을 하십시오. 불평부터 하지 마십시오. 옳고 그름만을 따지지 말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하십시오. 그게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김: 제 경험으로도, 어떤 일에서 잘못된 것을 불평하고 뒤에서 비난을 일삼으면 점점 조직에 대해서 불신이 쌓이고, 일에 대해서 실망하고 의욕도 잃는 것 같습니다. 이: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실지를 생각하고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김: 어쩌면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놓고, 비즈니스에서는 기독교적인 선을 이룰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일의 신학에서는 일터에서 일어나는 딜레마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해놓고 안주하려는 자세를 가장 경계합니다. 회사의 영업이 어려워지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올바르게 접근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김: 지금까지 두 단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사실분석을 하고, 그다음에는 양심에 거리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과 온유함 가운데 더 나은 대안을 찾아서 건의하라. 그래도 윗사람이 들어주지 않고 기만적인 과대홍보를 밀어붙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그때는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명백한 거짓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10)라고 말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자녀들이 걸식하지 않게 하신다(시 37:25)는 믿음을 가지십시오.김: 아마 그렇게 하면 설령 회사 정책에 반하는 선택을 하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더라도 결국 더 큰 상전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평안해지고,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도 경험하리라 봅니다. 이: 동시에 영업이나 홍보에서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좁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의적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고 자신도 더 연구하고 심사숙고하면서 접근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항상 기도하고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 상황에서 떠오릅니다. 비즈니스의 속성인 이익 추구 시스템을 너무 순결주의로 접근해서 섣불리 선악을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순결함은 상사 및 동료들과 일에 대한 논의를 할 때 겸손과 존중의 목양적인 지혜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 끝으로, 저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 교회와 목사님의 협력적인 목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고민을 많이 할 겁니다. 목사님들이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교인들을 일의 신학적 관점으로 목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양적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의 일에 대한 목양을 받아야 일터에서 목양자가 될 수 있겠습니다. 목양 받아야 목양합니다!
온라인 빵으로만은 살 수 없다
by Trevin Wax
2023-09-19
2020년 3월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봉쇄 조치가 시행되자 많은 교회가 발 빠르게 라이브 스트리밍과 비디오로 전환했다. 팬데믹 이전까지 실시간 스트리밍을 하는 교회는 22퍼센트였다. 그러나 몇 주 만에 그 수치는 66퍼센트로 급증했고, 개신교 목사의 92퍼센트가 영상 설교나 예배를 제공했다.팬데믹이 사그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는 교회의 수가 늘어났으며, 이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있지만 온라인 예배라는 관행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게 거의 분명하다. (Pew Research의 새로운 설문 조사는 라이브 스트리밍에 대한 교인들의 관점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한 세대 이전에 대형 교회들은 이미 찬란한 일요일 아침의 텔레비전 방송에 필적할 만큼 응집력 있고 매력적인 예배 방송에 능숙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사역을 하는 모든 교회가 주장하듯, 전문적으로 잘 포장한 교회 콘텐츠는 지역 교회의 영향력을 넓힐 뿐 아니라 설교자와 성경 교사의 영향력까지 확장한다. 보충제는 대체물이 아니다하지만 온라인 예배에는 단점이 있다. 우리는 오늘날 미국인들을 괴롭히는 문화적 질병인 “대체주의”(substitutism)에 취약하다. 이는 조슈아 미첼이 쓴 American Awakening에 나오는 용어이다. 그는 쉬지 않고 쉬운 대안과 지름길을 찾아 헤매는 우리의 열망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또한 보충제를 아예 대체물로 만들기 좋아하는 우리의 경향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미첼의 책에 온라인 교회나 라이브 스트리밍 예배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소셜 미디어와 우정과 같은 다른 영역에서 ‘대체주의’가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 분야에서 대체주의에 대한 그의 진단을 살펴보고, 그의 통찰을 예배에 적용해보자. 소셜 미디어는 고작해야 실생활에서 이미 알고 있는 관계를 향상할 뿐이다. 미첼은 이렇게 설명한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기존 우정에 보충제가 될 수 있다. 악수, 등 토닥이기, 포옹 등을 통해 우리가 진정한 친구인지 확인할 수 없을 때, 오랜 친구와 연락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 이 보충제를 통해서 우리는 친구라는 존재감을 느낀다. 그러나 기존에 만들어진 우정이라는 역량이 없이 단지 보충물만으로는 결코 존재감을 만들어낼 수 없다.(xxiii)즉, 우정은 진짜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보충제에 불과하다. 그러함에도 소셜 미디어가 우정이라는 느낌을 주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이미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온라인에서만 아는 존재를 향해서 “친구”라는 말을 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비타민은 정기적인 식사가 반드시 함께 할 때만 필수 영양소를 제공하는 보충제이다. 사람이 비타민만으로는 살 수 없다. 비타민이 식사를 좋게 만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 그 자체이다. 식사가 핵심이다. 비타민이 도움을 줄 뿐이다. 용기가 넘치는 경험 많은 전사를 상상해보라. 무기를 손에 쥐는 순간, 그의 전투 능력이 향상되고 승리에 대한 열정도 커질 것이다. 그렇다고 무기가 그 사람을 전사로 만드는 건 아니다. 무기가 용기를 주는 것도 아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이라면, 똑같은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우리의 능력을 갉아먹는 지름길이게 문제이다. 진짜를 보충제로 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진짜로 좋은 것을 제공하는 “역량” 그 자체를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미첼은 이렇게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방대하고 겉보기에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유혹들이다. 살면서 당연히 치러야 하는 노력 없이 지름길로도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전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다는 것이 이 유혹 속에 숨은 위험성이다. (xxv)비타민이 식사를 대체할수록, 우리는 점차 훌륭한 음식을 요리하고 잔치를 벌이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단순한 보충제가 아니라 진짜 우정을 대체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얼굴을 보면서 우정을 쌓아가는 능력 자체를 잃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친구”와 더 많이 “연결”된 소셜 미디어 시대에 왜 외롭다는 사람의 비율이 증가했는지 궁금한 적이 없는가? 바로 대체주의 때문이다. 보충제에 너무 매료된 우리는 진짜 식사를 하지 못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점점 더 이상 미덕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풍부하고 깊은 우정을 쌓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진짜 우정이 어떤 것인지도 아예 모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온라인 예배나 텔레비전 설교 시청이 언약 공동체로 모인 신자들의 물리적인 모임을 대체할 수 있는 진짜 대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 아프거나 출장 중일 때야 온라인 예배라는 보충제에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유익은 오로지 진짜로부터만 나온다. 온라인 예배는 진짜 예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진짜 경험의 맛을 보게 할 뿐이다. 진짜 식사에 대한 보충제일 뿐이다. 지름길의 유혹삶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지름길이 주는 매력은 신앙의 문제에서도 항상 존재하는 유혹이다. 우정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함께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리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 생활의 어려운 수고를 피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보충제에 달려가는 사람에게서 거룩함과 의로움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영적인 성장은 오로지 합당한 수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준 높은 온라인 예배 제공이라는 선한 일에 종사하는 교회들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낸다. 단, 이것이 보충제라는 점만은 꼭 기억하자. 단지 보충제일 뿐이다. 교회마저 대체주의에 빠지는 순간, 다음 세대는 영적으로 빈곤하게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교회 생활” 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남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원제: Man Shall Not Live by Online Bread Alo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설교의 허구
by 전재훈
2023-09-18
설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 설교하는 목사, 그리고 설교를 듣는 회중입니다.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기록한 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쓰신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면 죽습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을 죽지 않을 만큼만 경험했습니다. ‘미스터리’는 ‘입을 다물다’라는 말에서 기원한 말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미스터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경험 너머에 계신 분입니다. 성경 기록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되 말을 할 수 있을 만큼만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 경험밖에 되지 않습니다.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한 다양한 사람들의 기록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입니다. 본 것을 백 번 들어도 그 사람의 경험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은 뜻과 톤과 의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정확히 들어야 말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자칫 야단치는 말을 칭찬하는 말로 오해하게 됩니다. 성경은 아쉽게도 녹음된 책이 아니라 기록된 책입니다. 우리는 톤과 의도가 사라진 뜻만 있는 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험을 글을 통해 바르게 전달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마저도 그 성경의 원본이 없습니다. 사본만 있을 뿐입니다. 사본은 원본과 다른 점이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오해의 소지가 분명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그마저도 설교자는 사본을 보고 설교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 설교자는 역본을 거치고 개역을 거친 우리말로 기록된 한글 성경을 보면서 준비합니다. 그나마도 개역개정4판을 기본 텍스트로 합니다. 개역하고 개정하기를 4번이나 더 한 텍스트라는 말입니다. 원본에서 멀어져도 한 참 멀어진 글이 되는 셈입니다. 설교는 목사가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기준으로 볼 때, 나는 원어의 의미를 모릅니다. 원어가 쓰이던 당시의 문화나 생각, 가치관, 역사관, 세계관,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입니다. 같은 말도 어느 문화권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뜻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나는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과 다른 인식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경 지식이 다르고 이해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더군다나 20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지구 반대편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기와 건기를 살던 사람들과 사계절을 사는 사람의 생각이 비슷할 수 없습니다. 저녁이 되니 새 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쓴 책을 아침이 되니 새 날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설교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공간과 문화와 언어와 역사를 가지셨으며 회중을 완벽하게 이해하시고 모든 이적과 기사를 행하실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읽으셨던 분이 하는 설교에서도 안 믿는 사람들이 기적처럼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 부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물리적 기억이 있는 동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도들이 설교할 때가 되면 예수님이 하셨을 때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안 믿습니다. 교부들은 사도들의 제자로서 같은 문화권 속에서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설교는 안 믿는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보다 더 훨씬 후대의 사람입니다. 내가 설교할 때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설교는 회중에게 하는 행위입니다. 회중의 듣기 실력에 따라 설교는 얼마든지 오해와 곡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회중의 태도에 따라 설교의 전달 능력은 현저한 차이를 보입니다. 설교 시간에 수면 보충하는 사람들, 빨리 끝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 그저 재밌기를 원하는 사람들, 이들이 회중이라면 설교는 그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회중의 상태도 문제가 됩니다. 지식수준의 차이, 나이의 차이, 경험의 차이, 생활수준의 차이, 학력의 차이가 매우 큰 집단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시간의, 공간의, 역사의, 능력의 갭을 가진 내가 원어 성경도 아니고 한글 성경 개역개정 4판을 가지고 다양한 욕구와 스팩을 가진 회중에게 행하는 이야기가 설교인 것입니다. 최초 하나님을 경험한 성경 기록자들의 하나님 경험을 100이라고 한다면 나를 통해 회중이 인식하게 될 하나님 경험은 0.000000001쯤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최초 기록자들 역시 하나님을 100퍼센트 경험한 것이 아닐 터이니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설교를 통해 회중이 갖게 될 하나님은 몇 퍼센트일 것 같으십니까?아주 아주 희미하게나마 갖게 된 하나님 인식이 그마저도 오해나 곡해나 왜곡된 하나님 인식일 가능성은 거의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인간인 목사가 인간이 기록하고 베껴 쓰고 번역하고 개정한 성경을 가지고 인간들에게 행한 설교에 그 어떤 은혜나 믿음을 기대한다면 그건 죄악입니다. 은혜나 믿음은 사람의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있지 않습니다. 설교자의 수고나 학력이나 권위는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설교를 통해 성도의 변화를 기대한다면 교만입니다. 누가 만약 내 설교에 은혜를 받거나 믿음이 생기거나 하나님을 좀 더 알게 된다면 그건 둘 중 하나입니다. 왜곡된 은혜나 믿음일 가능성이 가장 크고, 참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린도전서 2:4-5).
전주를 깨운 종(鐘)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전주서문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09-16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남장로교회 선교부가 1892년에 조선 선교를 위해서 입국한 후 사실상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모임을 재건한 것이 장로교공의회(Presbyterian Council)인데, 이 공의회에서 지역 분할 선교 정책을 결정했고, 이 정책을 감리교회 선교부와 협약을 맺고 시행하기로 했다. 다른 교파 선교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는 소수였기에 굳이 이 정책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 결정에 따라서 제주도를 포함한 호남지역의 선교는 남장로교회에 할당되었다.따라서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은 호남지역 선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를 하게 되는데, 1893년 늦은 봄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가 조선어 선생인 정해원을 전주에 파송해 은송리에 주택을 마련하여 예배 처소와 거처를 겸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주서문교회의 출발이었다. 그해 9월에는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과 테이트(Lewis B. Tate)가 전북 도청소재지인 전주를 조랑말을 타고 방문하였다. 그들은 전주가 선교 거점 도시로서의 요건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그해 11월에 다시 전주를 방문해서 두 주를 보냈다. 이듬해인 1894년에는 루이스 테이트의 여동생 매티 테이트(Mattie S. Tate)가 가마를 타고 전주를 방문했다. 전주에 도착한 그녀는 한옥을 한 채 매입해 거주하면서 선교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로서는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외국 사람들을 보지도 못했던 조선 사람들이 이 여인의 생김새는 물론 모든 면에서 이인(異人)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1894년은 동학혁명이 있었던 해로 매티 테이트는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택으로 사람들을 초청하거나, 조선어 선생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전도용 소책자를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하지만 전주는 동학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곳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일단 서울로 귀경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틈을 이용해서 선교사들은 호남지역의 선교를 위한 선교지 여행을 계속했다. 동학혁명이 끝난 후 전주는 폐허가 되었다. 1895년 매티 테이트와 레이놀즈가 동학혁명이 끝난 후 전주를 다시 찾았을 때 예수님을 믿기로 했던 사람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결국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1895년 말에 테이트 남매는 전주로 거처를 완전히 옮겼고, 1896년에는 해리슨(William B. Harrison)이, 1897년에는 레이놀즈가 전주에 합류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호남선교의 거점인 전주에 남장로교회 선교사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으면서 기반을 다져갔다.그들의 시작은 미약했다. 하지만 복음의 씨앗은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열매를 얻게 되었다. 당시 전주는 조선왕조 시조 이성계의 본가가 있는 곳으로 조선의 왕손들에 의해서 형성된 씨족 도시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전주성 내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땅이나 집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선교사들은 성안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기에 성 밖에 터전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선교사들이 전주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제물포에서 배를 이용해서 군산까지 갔고, 군산에서 다시 만경강을 거슬러 목천포까지 역시 배로 가야 했다. 전주 성문 밖 은송리까지 가는 데 보름이 걸렸다고 하니, 전주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외국인에 대한 배척이 심했던 지역이요 시대인지라 환영받지 못한 그들의 전주 방문은 위험하고 힘든 여정이었다. 1895년에 전주에 다시 찾아온 선교사들은 이듬해인 1896년 완산동 야산에 선교사들이 거처할 수 있는 주택을 지었다. 하지만 은송리의 집터가 전라감사 이완용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계속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은송리교회를 맡고 있었던 전킨 선교사는 예배당을 화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현재의 예배당이 있는 곳으로 옮긴 것은 1905년이며, 이때 57평 규모의 벽돌 예배당을 마련했고 전주서문밖교회로 개명했다. 그 후 1940년에 다시 교회명을 서문교회로 개명함으로써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서문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1893년에 레이놀즈와 테이트가 전주를 찾았고 거처를 마련하는 등, 복음을 전하기 위한 초기의 사역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개종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학혁명의 여파로 선교사들이 전주에 머물 수 없어서 서울로 철수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전주에서의 사역은 지속되지 못했다. 이 공백기에 최초의 개종자들이 다시 흩어지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최초의 개종자들은 완전한 신앙을 형성하지 못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도 맞닥뜨리게 된다. 선교사들이 철수한 후 다시 전주에 돌아오기까지의 공백이 1년 이상의 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시작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초기에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내려와서 사역을 재개하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완고하기 그지없는 전주에서 개종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1897년 7월 15일 개종하여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원했던 것이다. 그것도 남자 3명과 여자 4명이 세례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그들을 대상으로 세례 문답을 했고, 그중에 선교사들이 묻는 말에 정확하게 대답을 한 5명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그런데 그들의 정확한 이름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전 씨로만 알려진 남자와 테이트의 사역을 돕던 사환 김내윤(金乃允), 함성칠의 부인 임씨, 김제원의 부인 진주 강씨, 유성안의 부인 김씨 등 5명이었다. 이들은 레이놀즈 선교사에게 문답을 받고 7월 17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전주 최초의 세례교인이 탄생했고, 그들에 의해서 전주서문교회는 기도처가 아닌 정식으로 교회가 세워졌다. 호남선교를 말하게 되면 7인의 선발대라 불리는 사람들(Rev. Lewis Boyd Tate, Miss. Mattie Samuel Tate, Rev. William Davis Reynolds, Mrs. Patsy Bolling Reynolds, Rev. William McCleery Junkin, Mrs. Mary Leyburn Junkin, Miss. Linnie Davis)을 생각하게 된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 호남선교 초기에 많은 수고를 한 이들이다. 또한 각각의 은사를 따라서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남장로교회의 호남선교는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남장로교회의 호남선교만이 아니라 전체 장로교회는 물론 새롭게 형성되는 한국 교회를 위하여 결정적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이 있다. 그가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이다. 그는 선교사들 가운데서 경험이나 나이가 비교적 많았다. 또한 성경 원어와 언어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고,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데서도 지도력을 발휘하는 재원이었다. 따라서 전주서문교회는 물론 남장로교회의 호남선교는 그의 역할이 크게 미칠 수밖에 없었다. 레이놀즈가 전주를 찾은 것은 1894년 3월 27일 선편으로 제물포항을 출발해서 사흘 걸려 3월 30일 새벽에 군산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육로를 걸어서 다음 날인 31일에 전주에 도착했다. 이때 그와 동행한 사람은 남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드루(Drew A. Damer), 레이놀즈에게 조선말을 가르치는 서씨라고 하는 한국인, 요리를 전담하는 옥선이라고 하는 소녀 등이었다. 이들은 이미 육로를 이용해서 레이놀즈보다 한 주간 먼저 전주에 도착해 있던 테이트 남매의 환영을 받으면서 전주에 도착해서 전주에서의 사역을 계획하면서 더 넓게는 호남의 전 지역을 선교하기 위한 설계를 했다. 그는 전주에 도착해서 5일간 머물면서 전주를 호남 선교의 거점으로서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개종을 원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당장 세례를 받겠다는 사람들이 레이놀즈 앞에 나타났고, 그들이 놀랄 만큼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을 보고 그는 “전주는 선교의 앞날이 유망하다”라고 그의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5일간 전주에 머물면서 살펴본 후 그는 바로 호남지방을 순회하면서 앞으로의 선교계획을 구상할 요량으로 전주를 떠나 김제, 정읍, 흥덕, 고창, 그리고 전라남도 지역인 영광, 함평, 무안을 거쳐 목포까지 갔다. 그는 목포항을 중심으로 한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어서 4월 23일 다시 목포를 출발하여 우수영을 거쳐 진도, 진도에서 선편으로 완도, 신지도, 녹동항을 통해서 28일 고흥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벌교와 순천을 돌아보고 5월 1일 여수, 2일 남해에 도착했다. 남해에 도착했을 폭풍이 불어서 며칠 머물 수밖에 없었고, 바람이 잠잠해지자 5일 출발해서 이틀 걸려 부산에 도착했다.이렇게 그는 전주를 떠나 47일 동안 호남 일대를 돌아보고 남해안을 따라서 부산까지 반도의 남쪽을 모두 답사했다. 이 여행은 그에게뿐 아니라 선교사들에게 조선 선교의 가능성에 확신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여행을 통해서 선교의 어려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이 외세에 의해서 개항은 했지만, 국민들의 의식에는 여전히 외세를 배척하려는 강한 의식이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가 답사한 호남지방은 동학의 출발지로써 동학사상이 외세에 대한 배척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어렵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조금이라도 늦게 전주에 도착했거나 호남지역을 돌아보는 일을 늦게 했다면, 그는 호남선교를 위한 설계도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답사 여행을 하고 돌아오자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전주는 사실상 동학혁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더 이상 전주에도 머물 수 없었다. 따라서 레이놀즈를 포함해서 전주에 있었던 테이트 선교사 남매도 모두 서울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섭리를 몸으로 경험하면서 호남과 조선 선교에 대한 비전을 세운 그는 훗날 한국 교회를 형성시키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그는 미국 버지니아주 노포크라고 하는 곳에서 1867년 태어났다. 그는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존스 홉킨스대학에서 라틴어 교수로 지냈다. 그런데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와서 순회하면서 조선 선교를 호소하던 언더우드의 강연을 듣고 조선에 가기로 뜻을 세우게 되었고,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남장로교회의 선교 사업을 이끌면서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한 일들을 감당했다. 특별히 그가 한 일들 가운데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장로교회를 탄생시키는 산파역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장로회 공의회를 이끌면서 사실상 한국장로교회를 설립하는 역할을 했고, 훗날 한국장로교가 총회를 구성하게 될 때는 독노회의 마지막 노회장으로서 1912년 총회로 개편하는 일을 했으니 그는 한국장로교회의 진정한 산파였다.또한 그는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희생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상 구약성경은 거의 그의 손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성경번역위원회를 이끌면서 성경 번역 전반에 걸친 역할도 감당했다. 게다가 평양신학교에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의 기초를 놓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는데, 이것은 모두 한국장로교회를 형성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찾아보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는 현실이 아쉽다.서문교회 마당에 들어서면서 바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중에서도 다른 교회에서는 보기 어려운 종각이 방문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지금은 대부분 교회에 종각이 없는 것은 물론 종을 치지 않는다. 아주 특별한 역사를 간직한 교회에서나 어쩌다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서문교회의 종각은 다른 교회의 종각과도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종각은 초기 호남선교의 기초를 놓은 전킨 목사를 기념하는 것이다. 1908년 1월 2일 당시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던 전킨 선교사가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그는 호남지역의 초기 선교사로서 군산과 전주지방에서 지역선교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갑작스럽게 별세한 것이다. 서문교회와 유족들이 심각한 충격에 빠졌다. 전킨의 별세 소식을 들은 레이놀즈는 서울에서 급히 내려와서 장례식을 주관했고, 결국 다시 전주에 내려와서 서문교회를 돌보면서 주변의 교회들을 관리하는 일까지 감당하게 되었다.전킨이 별세한 후 부인(메리 레이번)은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남편을 머나먼 이국땅에 주검으로 남겨놓은 채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본교회의 성도들은 전킨이 별세할 때 섬겼던 교회에 그를 기념할 만한 무엇인가를 설치해서 그의 사역을 기억하게 하자는 뜻을 모으게 되었다. 모교회의 신자들이 전킨 부인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을 때 전킨 부인은 남편이 생전에 서문교회에 설치하고 싶어 했던 종각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모교회의 신자들은 전킨 부인의 뜻에 따라서 서문교회에 종각을 설치하기로 하고 뜻을 모아서 연보를 했다. 종을 구입하는 경비는 물론 종을 미국에서부터 조선까지 운반하고 설치하기까지 모든 경비를 부담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서 준비한 종을 미국의 해외 선교 신문의 편집장인 윌리엄(H. F. William) 목사가 기선에 싣고 태평양을 건너 제물포까지 운반해왔다. 그러나 다시 이것을 전주로 옮겨와야 했는데, 이때 육로로 운반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범선(帆船)을 이용해서 서해를 거쳐 김제의 만경강(萬頃江)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회포면(回浦面) 쌍강포(전주에서 40리 거리)까지 옮겼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육로로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서문교회까지 옮겼다. 이때 쌍강포 가까운 난산과 쇠평리 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이 힘을 합하여 운반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서문교회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종각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이 미국에서 도착하자 서문교회에서는 1908년 10월 26일(월) 제직회를 열어서 종을 설치할 수 있는 종각(鐘閣)을 건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와 함께 종각을 설치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연보를 하기로 하고 교우들의 뜻을 모았다. 그런데 이 종각을 건립하는 것은 서문교회의 신자들만이 아니라 인근의 교회들도 동참하였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서문교회에 설치된 종이 주는 의미가 단순하지 않은 것을 알게 한다. 종각을 건립하기 위하여 서문교회에서는 장로 장필수, 전도인 전영칠 집사, 신자 가운데 목수인 김학수 등 세 사람을 종각건립위원으로 세워서 맡겼다. 1908년 12월 초 한 달 반의 공사 기간을 거쳐서 종각을 완성하였고, 12월 10일(목) 오후 4시 헌종예식(獻鐘禮式)을 거행했다. 이때 건립위원인 전영칠 집사가 쌍강포에서부터 서문교회까지 종을 운반하는 데 도움을 준 이웃교회 형제들의 도움과 협조에 감사하는 말과 함께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서 레이놀즈 선교사가 미국에서부터 이 종이 보내지게 된 동기와 어떤 의미로 사용할 것인지 설명했다. 또한 미국에서부터 이 종을 운반해온 윌리엄 목사가 미국에서 종을 구입하게 된 사연과 함께 그 종이 ‘전킨 목사 기념종’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다음에 김필수 장로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과정을 마치고 나서 “윌리엄 목사와 레이놀즈 선교사, 그리고 류서백 목사, 전영칠 집사에 이어서 교회에서 종을 관리하면서 종을 책임지고 치게 될 안경오 형제들이 차례로 종을 한 번씩 쳤다.” 미국에서 제작, 운반하여 설치한 이 종은 직경이 90cm에 이르는 대형 종이다. 이때부터 전주를 깨우는 새로운 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려졌고, 종소리 하나만으로도 교회의 존재는 물론 신자들에게는 교회를 향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는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전킨을 생각하게 하는 서문교회의 종각은 당시 전주시민들의 마음과 귀를 열게 했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공하는 개인 전도를 위한 세 가지 법칙
by Sean McGever
2023-09-15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원의 계획”과 “영적인 법칙”을 사용하시는 게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도 방법’ 운운하는 책을 볼 때면 불편함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런 책이 사실로 가정하는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전도 관련 책들은 주로 정보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건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오로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서 말씀을 들고서 실제로 누군가를 만나서 전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전도 전략은 사람이 하는 논쟁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그러니까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과 말씀을 통해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에서 나오는 말을 혼동할 위험이 있다. 어떤 사람이 전도에 반응한다는 것은 논쟁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에 반응하는 것이므로 전도는 단지 정보 제공에 그쳐서는 안 된다. 전도는 인격적이어야 한다. 진정으로 인격적인 전도가 되도록 돕는 새로운 “법칙”을 소개하겠다. 법칙 1: 경청하라전도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과 하나님 말씀의 좋은 소식, 그리고 우리가 가는 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의 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일 때 번성한다. 복음 전도자들은 소책자나 팜플렛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사람의 영혼을 보살피는 전도자는 귀를 기울인다. 먼저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 자신의 죄에 대해 변명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당신 스스로 초래한 수치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행여라도 당신의 마음에 속삭이는 사탄의 거짓말을 분별하겠다는 결심에서 멀어진 건 아닌가? 나 자신의 실패를 알게 되었다면, 나를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의 진리로 모든 실패를 당당히 대면함으로 대응해야 한다. 전도자라면 항상 성경 속 복음을 바라보아야 한다. 당신이 사는 공동체를 구원하고 싶은가?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 기도실로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새롭게 압도하도록 만들라. 오늘 복음을 들었는가? 얼마 전에 저지른 죄를 똑똑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말씀을 들었는가? 그리고 그 죄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어떻게 처참하게 패배했는지를 한 번 더 마음속에서 그려보았는가? 복음을 제대로 들었다면 이제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 앞에 세우신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 영혼이 성경으로 적셔지고 새롭게 된 마음과 영혼과 생각으로 무장한 전도자는 이제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다. 전도는 천편일률적인 일이 아니기에 경청은 매우 중요하다. 환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의사는 모든 증상에 같은 약을 처방함으로써 환자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런 의사는 대학을 다시 다녀야 한다. 귀 하나는 앞에 있는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의 특별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현명하게 선포할 준비를 하라. 법칙 2: 선포하라전도는 들은 내용을 전도 대상자에게 지혜롭게 연결하고 적응시키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선포할 때 번성한다. 대부분의 지도 앱은 상황에 따라서 믿을 수 있는 대체 경로를 제공한다. 심지어 다양한 교통수단(자동차, 대중 교통, 도보 등)의 경로까지도 조정해준다. 마찬가지로 현명한 전도자는 십자가에 이르는 많은 경로에 능숙해야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이 매번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미리 결정된 도로, 일련의 법칙 또는 다리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도하시는 성령의 지혜를 의지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그리스도 예수가 주님이심을 선포할 가장 적절한 기회를 끊임없이 모색한다. 복음의 선포는 주일 예배 중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설교, 세례, 성만찬, 또는 확신의 말씀 중에 선포되기도 한다. 또는 예배가 끝나고 나누는 주차장 대화에서도 선포될 수 있다. 때때로 자녀를 재우는 부모의 입에서 복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다. 복음의 선포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가능하다. 복음은 뒤뜰, 사무실, 문자 메시지, 피자 가게, 기차역 등등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성령의 음성에 예민하다면,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선포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바로 다음 말이 될 수도 있다.법칙 3: 반복하라전도는 우리가 경청하고 선포하는 습관을 규칙적으로 만들 때에 번성한다. 영혼을 직접 돌보는 전도자는 반복해서 듣고 또 반복해서 복음을 전한다. 그들은 자신을 계속해서 성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선포는 여러 조각을 맞춰야 하는 깨진 기록과 같다. 전도는 결코 제자도에 따라오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도야말로 철저한 전도, 그 자체이다. 경청할 수 있는 기회와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많이 찾으라. 그리스도인이라면 개인적으로 영혼을 돌보기 위해 얼마든지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언제나 복음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만유의 주가 되셨다는 선포야말로 평생 동안 우리의 마음을 고치는 향유, 연고, 치료제이다. 복음의 선포는 그리스도인 삶의 시작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십자가로 짊어지셨고 부활을 통해 죄를 정복하셨다. 세례는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선포는 믿음으로 사는 삶의 중심이다. 우리 앞에 놓인 길, 기쁨, 시련이 무엇이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성찬식에 정기적으로 참여함으로 우리는 이 진리를 끊임없이 상기한다. 마지막으로,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삶이 끝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주님께도 그러하셨듯, 우리의 부활의 날이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장례식도 이 사실을 기념할 것이다. 전도는 결코 은사를 가진 소수에게 맡겨진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물론 전도에 은사가 있는 일부가 있을 수 있다.) 전도는 단지 일회성의 논쟁하는 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그럴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전도가 반복해서 상대의 말에 경청하고 또 반복해서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일어나는 지속적이고 개인적인 목회 활동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원제: 3 Laws for Truly Personal Evangelism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독교, 경계를 넘어 영화로 소통하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 9월 14일 개막
by 복음과도시
2023-09-14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기독교 영화 축제,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9월 14일 개막한다. 2023년 제20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지난 20년의 역사(History)의 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도 영화를 통해 전할 그 분의 이야기(His story)를 소망하며 올해의 주제를 ‘History’로 정했다. 2003년 ‘기독교, 영화와 만나다’를 기치로 출범한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해마다 기독교적 시선을 지닌 영화들을 세상에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올해는 <지저스 레볼루션>으로 축제의 문을 연다. 이 영화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전역을 휩쓸었던 기독교 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10대 히피 공동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미국 기독교 영화계 선두 주자인 어윈 브라더스가 메가폰을 잡았고, 올 초 미국에서 개봉하여 5천만 달러의 흥행 수입도 기록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2회 상영된다. 폐막작은 일본 영화 <마이 대디>. 작은 교회의 목사인 카즈오는 생계를 위해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중학생 딸 히카리를 홀로 키우고 있다. 어느 날 히카리가 불치병에 걸리게 되면서 카즈오는 오랜 시간 감춰져 왔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되며 목사로서의 정체성이 뒤흔들릴 위기에 처한다.영화제 기간 엿새 동안 상영되는 영화는 3개 섹션(아가페 초이스, 미션 초이스, 필름포럼 초이스)으로 구성되고, 영화 상영 후에는 시네토크가 진행된다. 아가페 초이스는 주님이 빚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과 삶을 영화를 통해 조망해보는 섹션이다. 올해 선정된 작품들은 소외된 인간들이 내가 속한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커밍 홈 어게인>은 암으로 죽음을 앞둔 엄마의 집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뉴요커 창래가 잃어버린 엄마의 정체성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야기이다. 재미작가 이창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창래 역을 맡은 <파친코>의 저스틴 전 감독의 연기가 돋보인다. 매년 한반도평화연구원(KPI)이 함께하는 ‘KPI 시네토크’에 올해에는 <커밍 홈 어게인>으로 이무영 감독과 심혜영 교수, 성현 부집행위원장이 관객과 만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끄는 영상 제작집단 <분부> 소속 카와와다 엠마 감독의 상업 영화 장편 데뷔작 <나의 작은 나라>는 쿠르드 난민 고등학생 사랴의 성장 이야기이다. 사랴는 어릴 때 일본으로 이주하여 평범한 일본인으로 살아왔으나 가족의 난민 신청이 거부되고 사랴의 아버지마저 수용소에 감금되면서 사랴의 일상은 크게 흔들린다. 영화 상영 후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과 올해의 영화제 홍보대사 리키김이 내가 속한 세상에서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한다.<조용한 이주>는 덴마크 시골에서 양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한국인 입양아 칼의 이야기이다. 양부모는 그가 언젠가 가족의 농장을 물려받아 가업을 이어 가기를 바라지만, 칼은 자신의 ‘집’인 덴마크와 더불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인 ‘한국’이라는 두 세계 모두에 끌리기 시작하고 선택을 해야 하는 시간이 빠르게 다가온다. 영화 상영 후, KBS 라디오 ‘강유정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을 진행하며, 인문학, 심리학, 글쓰기 등 여러 면에서 글을 쓰며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정여울 작가와 함께 하는 시네토크가 있다. 마지막으로 <파편들의 집>은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동쪽에 이혼을 앞둔 부모들의 아이들을 머무르는 보육원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결국 부모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입양기관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사랑에 목말라 있다. 영화 상영 후에는 폴란드로 보내진 한국 전쟁 고아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연출한 추상미 감독과 재난 전문 다큐멘터리 연출가인 이승구 PD가 이야기를 나눈다. 선교 영화, 전통적인 의미의 기독교 영화를 상영하는 섹션인 미션 초이스는 신앙의 비전을 고취하고 복음의 가치를 영화를 통해 돌아보는 전통적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시몬 김성수 : 우리는 최고다>는 1930년 출생인 성공회 시몬 김성수 주교의 이야기이다. 김성수 주교는 1970년대 국내 첫 발달장애인 학교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하고 평생을 장애인들의 아버지로 살아 온 인물. 이 영화는 사제, 수녀, 신자, 가족, 지인 등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주교이면서 누군가의 가족이기도 한 인물의 삶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영화 상영 후에는 김성수 주교, 영화를 연출한 남승석 감독, 서울국제사랑영화제의 배혜화 집행위원장과 함께하는 시네토크가 있다. 충무로 시대로 대변되는 한국 영화 전성기의 기독교 영화 <사랑의 원자탄>은 <마부>로 1961년 베를린영화제 특별은곰상을 수상한 강대진 감독이 연출했다. 나병환자촌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돌보던 손양원 목사는 1948년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을 모두 잃게 되나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친자식처럼 보살피며 살다가 순교한다. 한국 기독교 근현대사에서 잊지 못할 사랑의 정신을 실천한 인물의 이야기가 40년 만에 디지털 리마스터링 복원되어 특별 상영된다. 기독교 영화 평론가 강진구 교수의 사회로 1980년대 한국 영화 성장에 크게 이바지한 이장호 감독이 그 시절 함께 활동했던 강대진 감독의 작품세계와 기독교 영화관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필름포럼 초이스는 필름포럼이 최근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다시금 주목할 만한 영화와 하반기 국내 배급 예정 신작을 선공개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특별히 2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국제사랑영화제의 모체가 된 단편영화경선을 거쳤던 이경미 감독, 최진영 감독의 작품을 상영한다. 제2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출품작인 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과 장편 대표작 <미쓰 홍당무>를 함께 상영하고 이경미 감독과 단편 출연배우 최희진 배우, 서영주 배우가 함께 관객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 제13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단편경선 출품작인 최진영 감독의 <반차>와 최진영 감독의 장편 대표작 <태어나길 잘했어>의 상영 이후에는 <반차>의 주인공인 윤경호 배우, 이안나 배우와 최진영 감독이 관객과의 만남을 이어갈 예정이다. 또한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화인 <드롭박스>도 재상영한다. 이종락 목사는 교회 대문 앞에서 한 아기를 발견한 이후 다른 아기들도 구하기 위해 교회에 베이비 박스를 설치한다. 영화는 이종락 목사의 삶의 여정과 베이비 박스 사역을 통해 공동체의 삶에 대해 그린다. 영화 상영 후에는 <드롭박스>의 주인공 이종락 목사가 관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폐막식에는 (재)통일과나눔이 후원하고 서울국제사랑영화제를 주관하는 (사)필레마가 진행하는 “통일의 빛, 평화의 다리 프로젝트”의 2022년 사전 제작 지원 당선작 <백두대간>이 <마이 대디>와 함께 상영되며 축제의 막을 내린다.제20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영화 예매는 디트릭스(www.dtryx.com)에서 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공식 홈페이지(www.siaff.kr)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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