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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 우상까지 드러내라
by 고상섭
2023-10-04
팀 켈러는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시작했을 때 단순히 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형식을 통해 죄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젊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효과적이었다고 고백했다. 혹자는 팀 켈러가 죄에 대해서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팀 켈러가 죄에 대해 선명하게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그의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마음의 죄를 드러내라 폴 워셔로 대변되는 설교자들의 특징은 신자의 죄에 대해 강하게 선포한다. 폴 워셔 목사는 음란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죄를 지적한다. 음행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들 중 하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지배하지 못했다면 신앙의 기초조차 달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 여러분, 맥 빠진 채로 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음란의 문제를 처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강력한 도전이 있지만 두 가지 문제를 양산하는데,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과 죄를 거룩하지 못한 행위로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란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C. S. 루이스도 사람의 행위를 통해 죄를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모성애,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 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 등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지 싸우려는 충동이나 성 충동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가 모성애나 애국심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보다 더 많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나 군인처럼 의무적으로 성적 충동을 북돋우거나 싸우려는 충동을 북돋워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향한 모성애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자녀나 나라에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2]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있고 그 행위도 악한 행동을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단순히 악한 행동이 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 곧 그것이 비로 좋은 것일지라도 죄가 된다고 선포함으로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죄로 드러낸다. 자녀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랑의 대상이 될 때 그 좋은 것은 우리를 노예로 삼게 되고 죄로 변질되게 된다. 팀 켈러가 행위의 죄를 강하게 선포하지 않는 이유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선두주자였던 로버트 슐러 목사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죄를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마음의 죄를 드러내 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팀 켈러는 이런 방식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 접근법은 젊고 세속적인 직장인들에게 아주 효과적이었다. … 우상숭배의 개념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진 집착이나 두려움, 중독, 도덕적 결여, 타인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분노 등을 적절하게 이해하게 한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구원을 그들의 직업과 로맨스에서 추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3]팀 켈러의 우상숭배로서의 죄의 선포는 로버트 슐러식의 죄를 선포하지 않는 소비자 중심주의적 설교도 아니고, 폴 워셔 식의 행위의 죄만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도 아닌 인간 마음속의 숨어있는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좀 더 균형 있고 설득력 있는 방식의 죄의 선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우상을 드러내라 팀 켈러가 죄의 문제를 우상숭배라는 관점으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 덕분이었다.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지냈는데 당시 미국 교회의 분위기는 죄에 대해 언급할 때 개인적인 죄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었고 개인의 행위적 노력을 통해 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죄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와 악,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인 악의 문제까지 언급했는데, 그 중심에는 인간 마음의 기만성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4]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을 추모하면서 쓴 기사에서 내가 만든 신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라 말하면서, 단순히 개인의 우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 심어지는 우상이 있음을 언급한다.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5]데이비드 폴리슨도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서 인간을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세 가지를 육신과 마귀와 세상이라고 말한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죄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폴리슨이 언급한 ‘허영의 시장’이라는 말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말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다. 그곳은 온갖 욕망을 사고파는 장소였고, 거기서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내용에서 착안하여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말한다. 팀 켈러의 설교와 가르침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지 못하면 청중은 교회 안에 있지만 다른 하나님 즉 자신이 만든 가짜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우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6]콜롬비아 대학 인문학 교수 마크 릴라(Mark Lilla)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불충분성을 인식한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율적인 삶을 버리고 자신이 더 큰 무언가에 의존적인 존재임을 이해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팀 켈러는 이것을 오늘날 현대적 문화에 속한 자율성(autonomy)에 대한 도전이라 분석한다.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많은 사람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희망을 둔다. 팀 켈러는 이 자율성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종교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유라고 말한다.[7] 이런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개인의 우상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문화 저변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평가하고 도전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오,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이런 고백이야말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가장 해방적이고 촉매적인 단계 가운데 하나라고 팀 켈러는 말한다.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8]근원적 우상을 드러내라 자신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 내러티브 안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의 문제를 다루려면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9]근원적 우상이 ‘힘’인 사람은 자신이 굴욕당하고 창피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가 단순히 분노하는 문제만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 안에 힘을 추구하려는 근원적 우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정을 원하는 사람은 거절의 감정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계속 인정을 갈구하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숨 막힐 정도가 된다. 또 타인의 인정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맞추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어지고 비겁해지는 감정을 해결하지 못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험을 하거나 도전하는 상황들을 두려워한다. 요구사항이나 스트레스의 상황을 극도로 불안해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은 방치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무기력과 권태의 감정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근원적 우상이 ‘통제’인 사람은 매사에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불확실한 상황에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일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돌발상황을 힘들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일을 통제해야 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고, 걱정과 염려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 표면적 우상만을 다루어서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표면적인 방식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너무 사랑하는 모습으로 우상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지만, 돈과 권력을 미워하고 그것을 가진 사람들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렇게 돈과 권력을 멀리하면서 고결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태도이다.[10]내가 만든 신에 리디머 교회의 한 목회자가 부부를 상담한 내용이 나온다. 돈 관리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였다. 아내는 남편을 구두쇠로 여겼고 남편은 아내가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목회자와 상담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기적입니다. 옷과 외모 단장에 돈을 엄청나게 쓰거든요!” 남에게 예뻐 보이려는 욕구가 아내의 돈 씀씀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남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목회자는 남편에게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의 개념을 알려주고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전혀 쓰거나 베풀지 않고 동전 한 푼까지 다 쌓아두는 것도 똑같이 이기적인 일임을 아십니까? 당신은 지금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 욕구를 채우는 데 무조건 전액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11]아내는 돈을 많이 사용함으로 무엇을 얻고 싶었다면, 남편은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상은 돈, 섹스 같은 표면적 우상만 없애서는 해결될 수 없다. 그 일을 행하는 마음속 근원적 우상이 해결되어야 한다. 내가 만든 신에서도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매번 다른 여자들을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그 후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건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침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12]1. 팀 켈러, 센터처치, 271.2.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37. 3. 팀 켈러, 센터처치, 272.4. “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 5.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6.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5.7. 팀 켈러, 설교, 166.8. 팀 켈러, 설교, 35.9. 팀 켈러, 설교, 116.10. 팀 켈러, 왕의 십자가, 283.11. 팀 켈러, 일과 영성, 117.1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75.
톨킨이 팀 켈러에게 끼친 영향
by Collin Hansen
2023-10-03
J. R. R. 톨킨에게 깊은 애정이 있었던 팀 켈러는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이든 또는 톨킨 사후에 출판된 13권의 전집이든, 그가 쓴 책을 쉬지 않고 읽었다. 어떻게 해야 소설가가 복음주의 목사에게 그토록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1937년에 ‘호빗’을 출판한 톨킨이 미국의 중산층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당장 영웅으로 등극한 건 아니었다. 그건 1954년에 ‘반지 원정대’가 나오고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톨킨은 단지 환경 파괴, 전쟁으로 파괴된 풍경, 그리고 샤이어에서 살면서 파이프 담배에 만족하는 작은 호빗에 대한 비전 정도로 대표되는, 반문화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 정도로만 알려졌고 전 세계의 기차역에는 “간달프를 대통령으로”와 “프로도는 살아있다” 등의 낙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 한 해에만 해도 밴드 Black Sabbath, Led Zeppelin, 그리고 Genesis 모두가 다 톨킨의 작업에 근거를 둔 노래로 차트에 올랐다.제인 치아바타리(Jane Ciabattari)는 BBC에 이렇게 썼다. “오늘날 우리는 톨킨의 작업이 코믹콘(Comic-Con)의 괴짜 세트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때는 우드스탁(Woodstock)에 모이는 군중에 더 가까웠다.”팀 켈러의 여동생 샤론 존슨은 1972년을 톨킨의 여름으로 기억한다. 버크넬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팀은 펜실베이니아 존스타운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첫째이자 선생 그리고 열정가인 팀은 여동생에게 C. S. 루이스, 특히 톨킨의 책을 읽도록 했다. 팀은 계속해서 동생을 다그쳤다. “아직 다 안 읽었어? 아직도 안 읽었다고?” 그는 동생이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따라하기를 기대했고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동생과 공유하고 싶어 했다.팀의 사망 전에 샤론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팀은 직관력이 있어요. 그는 다양한 도약과 연결을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팀의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우리는 성경 공부를 했고 또 같이 북 스터디도 했어요. 이런저런 모든 비교와 대조를 했는데, 무엇보다 톨킨의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곤 했어요.”켈러가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었을 때 의지한 대상이 바로 톨킨이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은 사우론에 있는 권력의 반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반지가 가진 모든 힘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반지가 주는 매혹적인 주문에 빠질 수밖에 없다. 노예 해방, 왕국의 보호, 죄인 처벌 등 당신이 추구하는 대의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반지는 결코 길들일 수 없다. 대의로 치장된 좋은 것들은 윤리를 단순한 방해물로 만드는 절대적 욕구가 된다. 톨킨은 로마서 12:18-21에서 악으로 결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바울의 경고를 예시로 반지를 사용한다. 오직 좋은 것만이 폭발력을 가진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반지를 낀 사람은 점점 더 반지에 예속되고 중독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상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반지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반지는 우리가 한때 존중했던 규칙을 어기게 만들고 반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해를 끼치게 만든다. 톨킨의 소설과 실제 삶에서 우상은 끔찍한 악으로 이어지는 영적 중독이다.”켈러는 Every Good Endeavour에서 약간 다른 적용 방식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명에 관해서 쓴 이 책에서 켈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톨킨의 또 다른 이야기인 “Leaf by Niggle”에 내용의 대부분을 의존했다. 그는 또한 일에 관한 2004년, 2008년, 2009년 그리고 2010년에 설교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사용했다. 켈러는 1995년 공개 포럼에서도 그 이야기를 언급했다. 켈러에게 “Leaf by Niggle”은 우상 숭배에 관한 교훈을 주는 반지 이야기와 함께 Tribeca에서 일하는 Makoto Fujimura와 같은 예술가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뉴욕의 여피들에게까지도 매력적일 수 있는 소재였다.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은 단지 사랑받는 작품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호빗’ 및 다른 저작물을 통해서 그는 언어와 배경 이야기가 가득한 하나의 완전한 우주를 창조했다. 그는 이 작품에 수십 년을 매달렸다. 사실 톨킨은 죽기 전에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행여라도 중간계가 꼭대기가 잘려버린 나무가 될까 봐 걱정했다. 창의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걱정할 때 문득 떠오른 게 바로 한 화가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톨킨은 그것을 “Leaf by Niggle”이라고 불렀다.니글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야기의 기원을 알려준다. 톨킨은 혼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완벽주의 경향도 생산성에는 방해가 되었다. 꼭 가야 하는데 니글이 미루고 있는 여행을 통해서 톨킨은 죽음을 말하고 싶어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니글은 적어도 그림 하나를 꼭 완성하고 싶어 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건 숲과 평야, 눈 덮인 산으로 가득한 나라 전체였다. 하지만 그는 외로운 나무에 달린 나뭇잎 하나에 먼저 집중해야만 했다. 완벽주의와 이웃의 도움 요청 사이에서 그는 결코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웃을 도우던 중에 니글은 병에 걸렸고, 더 이상 여행을 연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죽었다. 그가 살던 집을 산 사람들은 니글의 그림이 담긴 캔버스를 발견했고, 그들이 거기에서 본 것은 오로지 나뭇잎 하나가 전부였다. 그들은 그 그림을 박물관에 기증했고, 그곳에서 몇몇이 그 그림을 보았다.정의와 자비의 목소리를 듣는 니글을 통해서 톨킨의 이야기는 영원까지 계속된다. 정의는 나뭇잎 한 장만 그린 니글을 비난한다. 자비는 이웃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니글에게 박수를 보낸다. 기쁘게도 니글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나무가 이제는 복잡하고 절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건 선물이에요!”하고 니글이 소리친다.니글은 단지 자신이 작은 나뭇잎 하나만을 현실 세계에 남겨둔 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결코 잎사귀를 잃거나 시들지 않는 나무가 있는 진짜 현실에 들어섰음을 알았다.켈러에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기억될 것이라는 보편적인 희망에 관한 것이다. 누구라도 성취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필연적으로 부족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 노력도 세대가 오고 세대가 가면서 잊혀지기 마련이다. 켈러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잊혀질 것이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모든 노력, 심지어 최선을 다한 헌신도 결국에는 다 물거품이 될 뿐이다.” 단, 하나님이 없다면 말이다. 성경의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지금의 삶 아래와 뒤에 참된 실재가 있다면, 그래서 이 삶이 유일한 삶이 아니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모든 선한 노력, 심지어 가장 단순한 노력이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추구한다면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약속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고전 15:58). 바울이 말한 건 기독교 사역에 관해서였지만, 톨킨의 이야기는 바울의 말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모든 일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톨킨은 목회자로서 켈러가 단지 교회 사역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담긴 존엄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이 글은 콜린 핸슨이 쓴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의 보너스 장(bonus chapter)이다. 이 장은 무료 PDF로 볼 수 있다.원제: How J. R. R. Tolkien Influenced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전능자에 대한 좌절과 감격
by 전재훈
2023-10-02
출애굽기 6:3에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관주가 붙어있어요.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전능의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엘로힘’이 아니라는 거예요. ‘엘로힘’의 뜻은 전능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지요. 하지만 이 용어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 주시기보다 하나님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은 엘로힘이시다’라고 부른 것이지요. ‘엘’은 강한 자, 능력 있는 자를 뜻하는 말이고, ‘엘로힘’은 ‘엘’의 장엄복수형으로 ‘가장 강한 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른 것은 당시는 신들이 각자의 고유영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신론이 지배적이던 때였습니다. 신들은 자신의 지역이 있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특정 영역이 있습니다. 풍요를 다스리는 ‘바알’과 다산을 상징하는 ‘아세라’가 대표적이지요. 우리 개념으로 하면 바다에는 ‘용왕’이 다스리고, 산에는 ‘산신령’이 임신과 출산에는 ‘삼신할매’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역을 넘어서서 어디에나 계시고 전쟁에도 능하시고 양식도 주시며 자녀의 복도 주시는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 신이었기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신’의 개념으로 ‘엘로힘’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엘샤다이’도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이 말은 ‘엘로힘’과 뜻이 조금 다릅니다. ‘엘샤다이’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100퍼센트 이룰 능력과 의지가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하고자 마음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신다는 신의 주권적 의지가 강조된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6장에서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관주에 ‘엘샤다이’라고 토를 달아 둔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알까 봐 더 정확하게 해 주느라고 관주를 단 것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속성상 3무(無)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실수, 실패, 포기’가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속성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왜냐하면 ‘실수, 실패, 포기’는 일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변수를 알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반해, ‘전지’하신 하나님은 모든 변수까지도 알고 계시며 심지어 그 변수마저 통제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엘로힘’과 달리 계시적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을 ‘엘샤다이’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로 계시하신 것과 같습니다. ‘엘로힘’은 대부분 하나님을 지칭하기는 하나 부분적으로 다른 신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즉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도 쓰인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했던 말 중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라고 했었는데, 이때 사용된 단어가 엘로힘입니다. 하지만 ‘엘샤다이’는 고유명사로서 오직 ‘여호와’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른 어떤 신이든 능력만 있으면 되는 신일 때는 ‘엘로힘’이지만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할 때는 ‘엘샤다이’라는 것입니다. ‘엘샤다이’의 전능자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제가 전능자에게 느끼는 좌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자신이 뜻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저를 포함 우리 가족 모두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혹은 그분의 뜻을 이루는데 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는 형태의 기도로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써 주옵소서’ ‘주여 당신의 뜻을 내게 알리소서. 저를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정도입니다. ‘엘로힘’은 기도할 때 참 편한 신입니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까 무엇이든 요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면 됩니다.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든지, 40일 금식기도나 절벽에서 기도하듯이 하나님을 적당히 위협하면 됩니다. ‘엘로힘’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의 정서와도 딱 맞아떨어집니다.‘엘로힘’에게는 예배도 무당의 굿판과 비슷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정성껏 굿을 준비하여 무당으로 하여금 춤추게 하고 나는 그 앞에서 손을 싹싹 빌기만 하면 귀신의 능력을 빌려와 다른 귀신도 내쫓고 질병도 고치고 액운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예배도 정성껏 준비하여 바른 자세로 예물을 힘껏 준비하여 드리고 손을 모아 기도하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축복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예배를 아무리 잘 드리고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하고 기도를 아무리 세게 해도 꿈쩍도 안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이 정해진 이상, 나는 아무리 애써도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시련과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대중적 인기’ 혹은 ‘유명세’에서 엘로힘에게 엄첨 밀렸습니다.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은 엘샤다이가 아닌 엘로힘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국식 기도원에는 ‘엘샤다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무조건 ‘엘로힘’이어야 합니다. ‘엘샤다이’는 수도원에서만 간간히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수도원보다 기도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을 말할 때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걸핏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주의 보혈을 뿌리노라’ ‘믿는 대로 될지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주여 믿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등의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엘로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나의 ‘원함’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하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사람들은 ‘엘샤다이’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질병 앞에 치유를 구하지 않고 겸손과 지혜와 깨달음을 구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고난 앞에 해결을 기도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믿음을 구하거나 고난이나 환란이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깨닫게 되면 도리어 고난 앞에 즐거워합니다. 이들은 종종 ‘엘로힘’을 섬기시는 분들에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구원의 문제에 대면했을 때입니다. 뜻을 정하기만 하셔도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100퍼센트이신데 뜻을 정하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 걸었다면 이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며 실패하지 않으시고 도중에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요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떤 변수도 없고 어떤 훼방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런 엘샤다이께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뜻을 정하셨다면 나는 그 앞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차에서 뒤돌아 앉아도 천국까지 가고 전봇대를 붙잡고 늘어져도 전봇대 채 뽑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때문에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 부르고 타력 종교라 부르며 고등 종교라 부릅니다. ‘엘로힘’은 이 세 가지 모두를 흐릿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구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선포에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수단입니다. 다시 말해, 엘샤다이께서 나를 사랑하시기로 뜻을 정하셨으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까지 거셨으니 나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앞에서 엎드려지게 될 것입니다.‘엘샤다이’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예배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시며 내 입술에서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내가 비록 사는 것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 있는 것은 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엘샤다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다
by 최창국
2023-09-27
그리스도인에게 ‘은혜’는 매우 중요한 언어이다. 은혜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언어이다.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알기 위해서는 은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은혜(grace)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첫째는 형태, 몸가짐, 동작, 행동의 우아함 혹은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둘째는 호의나 선의와 관계되고, 셋째는 호의의 표현과 관계된다. 그리고 넷째는 사람의 마음에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해롤드 엘런스(Harold Ellens)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 은혜의 관계를 매우 의미 있게 묘사한다. 그는 인간의 상태인 죄를 인간의 용어로는 ‘완전한 절망’이지만, 하나님의 용어로는 ‘완전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인 인간을 소망으로 변혁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삶에 소망의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성경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인간의 죄를 말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한계를 말하기 위한 차원도 있지만, 죄는 인간의 한계성만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희망의 근원을 말하기 위한 역설이 있다. 인간의 희망의 근원과 원동력은 은혜의 복음이다. 은혜는 인간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혁하는 힘이다.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열매는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기쁨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공기를 들이마시듯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호흡한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흠뻑 누리면, 그것이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낸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인류의 공공선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와 관계된 특별 은혜와 삶의 진선미와 관계된 보통 은혜로 구분할 수 있다. 특별 은혜는 초자연적이지만, 보통 은혜는 자연적이다. 특별 은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주어지지만, 보통 은혜도 구원의 일부와 관련이 있지만 죄를 제거하거나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지 못한다. 특별 은혜는 우리의 죄와 죄의 부패를 제거하고,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은혜다. 보통 은혜는 도덕적 삶과 사회 안의 선한 질서, 시민적 공동선, 과학과 예술의 발전 등을 증진한다. 보통 은혜는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시간적으로 우선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이 세상 안에서 작용할 때 특별 은혜를 보조하기 때문에 논리적 우선성은 특별 은혜에 두어야 한다.특별 은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계가 있지만, 보통 은혜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세계 안에서도 역사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는 모두 이 세계 안에서 역사한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보다 일상과 자연계와 관계된다고 하면, 특별 은혜는 새 창조의 일들과 관계된다. 이 두 은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특별 은혜뿐 아니라 보통 은혜도 교회를 풍요롭게 한다. 교회는 보통 은혜의 은사들과 열매들을 중생한 삶의 영향 아래 둠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은혜는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은혜는 단지 받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고 아래로 흘려보내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동시에 은혜에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강권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동하는 삶과 노력을 강화하는 것이지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이자 고요하면서도 능력 있는 삶과 사역의 열쇠는 방향을 잘 맞춘 과단성 있고 지속적인 우리의 노력이다”(브루스 데머레스트, 영혼의 계절들, 132). 따라서 행동을 통해 은혜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건강한 행동을 낳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일찍이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도 우리 없이는 우리 삶 가운데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은혜는 정직하고 책임을 지려는 노력에 능력을 부어 줌으로써 우리 안에 존엄성을 심어 준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 안에 겸손을 심어 준다. 은혜는 믿음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발성과 신뢰를 자라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수용 능력과 민감성을 심어 준다. 이 모든 은혜는 우리 안에서 부드럽게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빛나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탁월한 사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1세기에 변방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로마에서 성장하게 된 주요인은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로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단지 좋은 교인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야 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자녀, 건강한 시민 됨에 두어야 한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자녀, 좋은 시민 됨 없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아버지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있지만, 나쁜 아버지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는 성경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있듯이, 좋은 사람과 좋은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유기적인 관계다. 물론 과거에 나쁜 아버지였다고 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영성의 세계
by 이춘성
2023-09-26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주일이다. 난 오전 9시에 시작하는 2부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의 교회학교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기 위해 근처 한 카페에 와 있다. 카페 2층에는 몇몇 무리가 모여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엄마, 잠시 커피 마시고 있는 아저씨, 컴퓨터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는 중고생들, 그리고 직장인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 여럿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대화에 집중해 보았다. 이들은 어떤 외국인 저자의 소설책을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을 묻고, 자기 경험을 나누면서, 위로의 말과 격려의 감정을 주고받고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같이 욕해주면서 웃고 울면서 지친 일상을 달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들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나왔다. ‘설교.’ 어떤 사람이 직장 상사나 주변의 꼰대 같은 사람의 잔소리가 꼭 설교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공감하였다. 공교롭게도 지금 옆 건물에는 내가 다니는 교회 3부(오전 11시) 예배에서 목사님이 설교하고 계셨다. 옆 건물에서는 설교가 행해지고, 여기에서는 설교를 자기 삶에는 아주 쓸데없는 잔소리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 공감해 주면서 힘을 얻고 있었다. 이들의 모임은 마치 예배 같았다. 이들이 읽고 나누고 있는 소설책은 성경이나 신앙 서적 같았고, 이들이 이 책을 해석해서 자기 경험을 말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또 다른 형태의 설교 같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인 카페는 이들의 예배당이며, 먹고 마시는 음료와 빵은 성찬일까?작년 초 불교계에서는 한국의 4대 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의 연구자들을 모아 포럼을 열었다. 이 연구는 각각의 종교학자들이 약 2년 이상 모여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모인 종교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코로나19 이후의 가장 주목 받을 종교는 불교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올해 1월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 조사’에서 사실로 밝혀졌다. 직전 2017년 조사에 의하면 종교 인구 비율이 개신교가 1위(20.3%)였는데, 5년이 지난 이번 조사에서는 5퍼센트 가까이 떨어져 15.0퍼센트가 되어 불교가 1위(16.3%)가 된 것이다. 또한 무종교인의 호감도는 불교가 29.5퍼센트, 개신교는 4.7퍼센트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종교인의 급격한 증가세다. 종교인의 비율이 2017년 조사보다 10퍼센트나 줄어 역대 최저치인 36.6퍼센트로 주저앉았다. 무종교인이 60퍼센트가 넘은 것이다. 그리고 무종교인의 약 3분의 1이 과거에 종교인이었으며, 그중의 3분의 2가 개신교인이었다. 이 조사의 결과는 여러 시사점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성 종교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마음 수행 종교의 특성을 가진 불교는 이를 이들의 새로운 기회로 포착하고 템플스테이나 개인화된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 명상 등의 프로그램을 더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러한 탈 기성 종교 현상에 대해서 그 원인을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종교 모임 때문이라고 평가하면서, 대면 모임이 활성화되면 곧 회복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코로나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금 일어나는 탈 기성 종교 현상은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있는 한국 사회의 세속화 현상이었다는 것이 대부분 종교학자의 분석이다. 한국 사회의 세속화로 인하여 기성 종교의 공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종교가 더욱 개인화되면서, 모임의 형태에서도 종교가 기관이나 제도화된 집단이 아닌 개인화된 영성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와 그 기간은 이를 더욱 가속하는 계기였을 뿐이다.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는 2016년 어느 모임에서 “종교를 넘어선 종교와 새로운 영성”이란 제목의 주제 발표를 하였다. 이듬해 그는 이 발표문을 “무종교의 종교 개념과 새로운 종교성”이란 논문으로 발전시켰다. 성해영 교수는 이 발표문과 논문에서 한국 사회에서 출현한 ‘세속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이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기성 종교에서 경험하는 종교적 체험을 종교 활동이 아닌 여러 다른 방식과 활동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약물이나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것을 통해서도 예배 시간에 경험한 감동과 신비적 체험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약물이나 뇌 자극과 같은 방법은 실험실에서나 있을 법한, 위험한 일이기에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다른 사회적 움직임과 결합하여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SBNR)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영성의 출현이었다. 이 표현은 2000년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얼랜스(Sven Erlandson)가 그의 책 제목으로 처음 사용하였고, 다음 해인 2001년에 로버트 풀러(Robert C. Fuller)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교회 밖으로 나간 미국 이해하기”(Spiritual, but not Religious: Understanding unchurched America)라는 책을 통해 학문적으로 더 자세히 다루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 두 저자의 주장은 미국의 종교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제도적 교회 밖에서 영적인 갈망을 채우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이 현상은 종교적(Religious)이란 단어보다는 영적(Spiritual)이란 단어로 포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를 교회라는 공동체적인 의미보다는 제도나 공동체 밖의 개인 영역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공동체와 제도를 떠올리는 종교와 연관된 것이 교리, 전통이라면,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성과 연관된 것은 개인의 체험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단월드’ ‘마음 수련’ ‘선 수행’ ‘요가’ ‘템플스테이’ ‘타로 카페’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또한 교회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가나안 성도’ 현상도 SBNR 영성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교회에 대한 윤리적 실망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탈 교회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종교의 공적인 역할과 영역을 사적인 역할과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 세속화 영향으로 인하여, 현대인의 종교에 대한 역할과 인식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이전의 종교가 제공했던 신비적 체험에 대한 개인적 필요가 여전히 존재하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한 SBNR식의 영성이 종교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교회가 SBNR 영성에 대해서 시급하게 성찰해야 할 점을 하나 언급하고 이 글을 마치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설교 시간이나 신앙 상담 중에 하물며 신학교의 강의실에서 목사와 신학자들이 쓰는 ‘영성’이란 말을 성도들과 신학생들은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교회가 처한 여러 위기 중 하나는 기독교 신앙과 믿음의 내용, 교리와 신앙 지식, 예배와 삶의 전통을 신자 개인의 신비적 체험과 깊숙하게 잇지 못하고 이것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속의 흐름 속에서 개인화된 영성, 세속적인 영성이 아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통합되고 신비와 합리성이 결합한 진정한 기독교 영성을 회복하는 길을 찾는 것, 이것이 현대 교회의 또 다른 과제이다. 다음에는 ‘세속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아, 주님께 즐거이 예배하고 싶다
시편 95편 묵상: 진정한 예배
by 고명환
2023-09-25
1 미국 보스턴 지역에는 이름난 두 교회가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파크스트릿 교회와 외곽에 자리한 그레이스 채플이다. 파크스트릿 교회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유서 깊은 보스턴 다운타운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적 특성과 함께 교회가 지닌 역사적 유산 역시 만만치 않아서 보스턴을 방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들러 예배하고 싶어 하는 교회이다.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라는 인상을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받는다. 미국의 교회들이 점점 젊은이들을 잃어가고 노령화되는 추세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래된 긴 나무 의자의 곳곳을 차지하고 진지하게 예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속으로 그 이유를 묻게 된다. 물론 보스턴은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명문대학들이 즐비해선지 인구의 상당 부분은 학생들이 차지하는 젊은 도시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전통적인 파크스트릿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보스턴 시내에는 그들이 찾을 만한 교회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쉽게 다닐 교회를 찾아낼 수 있다. 예배의 형식이 젊은이들을 불러들이는 것 같지도 않다. 그 교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을 듯한 전통 예배를 드린다. 사회자 한 사람이 인도하는 긴 예배 순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풍스러운 오르간 반주가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것 같지도 않다. 전통 성가를 부르는 찬양대나, 가운을 입고 성경을 한 줄 한 줄 풀이해 나가는 설교 방식도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찾는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바를 채워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교회인 그레이스 채플은 보스턴 시내를 한참 벗어나 한적한 타운에 있다. 담임 목사가 주장하듯 현시대의 사람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꾼 교회이다.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통만을 고수하면 문을 닫게 된다는 철학을 가진 목사 아래 여전히 그 교회는 끊임없이 참신한 시도를 한다. 다른 많은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처럼 이 교회 또한 설립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통 교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종탑이 뾰족하게 올라간 전형적인 외관은 해체되었고, 내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전면에 무대가 배치된 극장식 예배실을 비롯한, 카페, 체육관, 기도실 등 여러 부대 시설을 갖춘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성도는, 정장을 차려입은 이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캐주얼 복장이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나 찬양단, 설교자까지 티셔츠나 스포츠 셔츠를 입고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웅장한 오르간 대신 일렉트릭 밴드의 리드미컬한 연주에 맞춰 최근의 찬양 메들리를 부르는 것으로 예배는 시작된다. 예배를 위해 주보가 제작되지도 않는다. 찬양, 광고, 기도, 설교가 전부인 단순한 순서의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아이러니하게도, 현시대의 조류에 맞게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 이 교회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찾기 어렵다. 일어선 채 컨템포러리 찬양을 행복한 얼굴로 부르는 지긋한 나이의 성도들에게 드럼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같다. 간략하지만 마음을 담아 참여할 수 있는 예배 순서, 삶과 밀착된 설교, 종교적인 엄숙함이 줄 수 없는 인도자와 참여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오는 에너지가 연령을 막론하고 성도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2시편 95편1오너라,우리가 주님께즐거이 노래하자.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소리 높여 외치자.2찬송을 부르며그의 앞으로 나아가서,노래 가락에 맞추어,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3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4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5바다도 그의 것이며,그가 지으신 것이다.마른 땅도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6오너라,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무릎을 꿇자.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그가 손수 이끄시는 양 떼다.오늘,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8므리바에서처럼,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너희의 마음을완고하게 하지 말아라.9너희의 조상들은 그 때에,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나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10사십 년을 지나면서,나는 그 세대를 보고 싫증이 나서‘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나의 길을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하였고,11내가 화가 나서‘그들은 나의 안식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 95편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예배는 오직 만물의 창조주이며 소유주이신 하나님만을 높이는 최상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분은 땅과 바다를 지으셨고 해 아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4, 5절).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왕들 혹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이다(3절). 이 위대한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다.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삼으셨고 손수 기르시고 이끌어 주신다(7절). 더욱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반석이다(1절).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마땅히 최고의 경배를 올려야 한다. 여기에는 합당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 경외와 감사의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능력과 권세를 가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복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며 엎드려 경배함이 마땅하다(6절). 믿음이 없이 나아가는 참된 예배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임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현재의 삶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여정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하다. 시는 므리바에서 믿음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는지 들려준다(8-11절). 양인 우리가 목자를 신뢰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즉 믿음 없는 예배는 그분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다. 무의미한 요식행위 이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크신 하나님의 실존과 찾는 사람에게 보응하시는 인격임을 믿어야 한다(히브리서 11:6).예배에 합당한 마음가짐이 먼저 준비되고, 이 바탕 위에 그분을 높여 드리는 예배 행위가 얹어져야 한다. 음악은 예배자의 마음을 잘 담아내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오래된 매체이다. 목소리로 찬양하며 악기로 연주하여 주님을 높여 드릴 수 있다(1, 2절). 춤 역시 주님의 백성으로 왕께 기쁨을 표현하고 영광 돌리는 예배 행위이다(사무엘하 6:13-14; 시편 149:3). 이외에도, 오늘날에는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예배는 즐거운 일이다(1, 2절).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 자유와 절제와 완급이 있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믿음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우울하거나 무덤덤한 일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잊은 채 밝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기뻐하며 경배해야 한다. 3다니던 신학교에선 일주일에 세 번, 열한 시에 공식적인 예배가 열렸다. 주중의 가운데 날인 수요일에는 화려한 오르간 반주가 울려 퍼지고 전통적인 예배 순서에 따라 드리는 격식을 갖춘 채플이었고, 다른 두 번은 일렉트릭 밴드를 따라 찬양하는 시간과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간결하게 짜인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였다. 보통 총장과 교직원들이 참석하는 수요일 전통 예배에는 학생들이 채플실의 좌석을 채워서 성황을 이루었지만, 월요일과 금요일의 약식 예배에는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아 다소 썰렁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자주 참석하던 학생들마저 그 시간에 도서관에 머물렀다. 좋은 학점을 받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예배의 형태가 어떠하든 또 시험 기간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고, 오전 열한 시 채플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늘 앉는 자리를 찾았다. 그 시간만큼은 가정사나 힘겨운 공부, 낯선 나라에서 받는 압박감을 뒤로하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하며 힘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귀에 익숙지 않았던 전자 기타 소리에 따라하던 컨템포러리 찬양이나 오르간 반주에 섞여 힘차게 부르던 전통 찬양은 언제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황을 이룬 자리에서 듣던 설교는 물론, 듬성듬성 학생들이 앉아 있는 한적한 공간에서 경청한 교수님들의 설교는 한 번도 지루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때 4년간 참석했던 채플 시간은 고스란히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문제를 모두 잊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주님께 다가갔던 그 시간들은 몇몇 단편적인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 여러 과목의 강의보다도 오래 남을 가르침의 시간들이었다. 귀국 후, 주일이면 고민이 생겼다. 예배를 드리러 오늘은 어느 교회를 방문할지 고민이다. 목사로 섬기는 교회가 없으니 어디든 찾아가 회중 속에 섞여 예배해야 하는데, 마땅히 갈 만한 교회가 없다. 주변에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다. 군중 속에 앉아 있다가 떠날 때 붙잡히지 않을 커다란 교회들이 즐비하건만 마음 편하게 다음에 또 찾을 만한 교회가 없는 것이다. 기대를 안고 찾는 교회마다 실망하게 되고 주일이면 다른 교회를 찾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찾아오는 영혼의 뿌듯함이나 감격보다는 고민과 회의를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일에 찾은 굵직한 교단의 큰 교회들은 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찬양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순서가 단출한 예배를 하건, 교독문과 사도신경을 넣은 긴 순서의 예배를 하건 상관없이 생동감을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순서를 이끄는 사회자나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앞에 도열한 찬양팀, 또 말씀을 전하는 담임목사는 심각한 얼굴로 주어진 순서를 능숙하게 수행한다. 여기에, 대표기도를 맡은 분은 한참 시간을 들여 작성한 듯한 기도문을 들고 올라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회중석의 성도들은 이런 의식의 진행에 익숙해서 어느 부분에서 앉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움직이면서 동요 없이 예배의 흐름에 자신들을 맡기는 것 같다. 그러다가, 목사가 두 손을 올리고 엄숙하게 기도하는 의식이 끝나기 무섭게 주섬주섬 물건을 챙긴 후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자리를 뜬다. 좋게 말하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의식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계적으로 치르는 제사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제단을 쌓는다’는 표현을 쓴다.) 기계적이고 의례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주님이 예배의 주제와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보다 교회가 때로는 더 강조되고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다. 예배 중 교회의 다채로운 행사가 대형 스크린에 뜨고 화려한 미디어로 제작된 각 부서의 활동이나 앞으로 이루어질 프로그램에 대한 선전이 예배자의 마음에 적잖은 잔상을 남긴다. 한술 더 떠서 설교자가 앞서 광고한 내용을 부연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말씀을 전해야 할 시간에 설교자가 교회의 사업을 위해 재단한 선동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청중의 마음을 빼앗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물론 설교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명분도 잊지 않고 주입한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회중의 영혼에 역사해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님의 이름을 빌린 사업 설명회가 회중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것이다. 늘 찾던 교회가 코로나 시기에 한시적으로 문을 닫은 탓에 가족과 함께 한국의 이름난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화면 앞에 앉아 들은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은 중간에 끄고 싶은 내용이었다. 그분은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교육관을 지을 자금이 필요하다며 설교의 처음과 끝을 일관되게 헌금을 유도하는 내용으로 시간을 채웠다. 내용 중에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어떤 성도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말씀을 잘한다고 소문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청년인 아들이 도전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자리였는데, 기대와 달리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평소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을 가진 아들이 그분의 설교로 인해 불신의 마음을 더 갖는 데 일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이 좋은 환경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양질의 콘텐츠를 통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첨단 건물이 필요하고 마음을 써서 헌금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시간에 하면 틀린 말이 된다. 좋은 꼴인 주님의 말씀 대신 양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이면 교회를 뒤로하고 돌아가는 예배자들에게 자주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을 예배하고 왔는지, 예배를 통해 예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는지, 좋으신 그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지. 당신이 드린 찬양은 나를 잊고 주님만을 높여 드린 찬양이었는지. 아니면 나에게 몰입했던 찬양이었는지. 4‘참으로 예배하고 싶다.’ 예배학을 공부한 어떤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제목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어 한다. 예배의 자리에 가기를 기뻐하고, 예배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예배는 그분의 백성과 하나님이 만나 상호 교류하는 더없이 소중한 의식이다. 주님은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이고 사망에서 건져 주신 구원자이다. 그분은 예배를 통해 자기를 찾는 영혼들을 기뻐하시며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사람들에게 주님은 삶의 목적이고 의미이며 일관된 추구의 대상이다. 당연히, 마음을 다해 감사와 찬양으로 높여 드리고 싶어 한다. 예배는 이런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과 주님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이 교류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이 땅에서 예배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는 집회들은 그 의미에 부합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마음으로 예배자가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지…. 그렇지 않다면, 속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정형화된 형식을 되찾고, 모범적인 예배를 만들어 내자는 뜻은 아니다. 이미, 예배의 틀은 세대의 흐름과 함께 중요성을 상실했고 지금 와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예배의 정신이 있다. 혹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거나 경시했다면 원래의 모습을 찾아 위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예배자)는 절대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온전한 마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인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시고(로마서 1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그분을 추구하기 기대하신다(마가복음 12:30). 그렇기에 예배자는 최상의 심령을 가지고 와야 한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열망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권세가 많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늘 만나는 사람을 대면하러 가듯 성의 없이 예배의 자리로 향할 수는 없다. 예배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회자, 찬양팀, 기도자, 설교자 역시 예배자들이며, 그들도 예외 없이, 준비된 최상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고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심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모든 예배자가 흠 없는 완전한 상태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되, 오로지 주님을 향하는 열망과 그분의 은총을 기대하는 가난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배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모여 하나님을 높이는 배타적인 의식이 아니다. 그런 예배는 변화된 몸을 입은 성도들이 드릴 천상의 예배에서나 실현될 것이다. 지상의 예배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시간이다. 예배에 모인 성도 중에는 큰 죄를 범해 가책을 느끼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육체나 정신의 연약함으로 지친 성도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짐이나 복잡한 심령을 가졌든지 최상의 심령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동기로 참여해야 한다. 그럴 때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용서와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소원해졌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영혼이 힘을 얻고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육체와 정신의 치유를 얻는 놀라운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8). 사랑의 주님은 상하고 찢긴 마음이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녀들을 가엽게 여기시어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다음으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 예배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일꾼들의 인식과 역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참여자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모아지도록 최선으로 섬기는 한편, 각자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일하시도록 자신들을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중요한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가져야 할 인식과 마음의 자세를 늘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예배를 꾸미고 준비하는 일꾼들이 예배의 본질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질 필요가 있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누구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가? 초보 신자라도 답할 수 있는 쉬운 물음이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종종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예배의 대상에 사람이 혹은 교회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만족이 목표인 듯한 예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서비스하기보다 무언가를 얻으려 예배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서비스하려는 듯한 예배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님이 예배의 대상이며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비자가 된 듯한 참여자들을 만족시키고 교회에 계속 붙들어 놓기 위한 방편으로 예배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 중에 사람을 칭송하거나 교회 행사를 선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예배는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만을 높이고, 기뻐하며, 그분만이 전해지고, 성령님만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든 순서와 활동이 그 분께 모아져야 한다. 하여, 교회가 참여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예배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 이상 예배를 위한 콘텐츠 개발에 몰두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려한 콘서트 같은 예배를 통해 참석자들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주는 감동은 진정 영혼이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 세상의 잘된 공연에 취할 때 얻는 생명이 짧은 가벼운 감동 정도를 줄 뿐이다. 진정, 예배자가 주님을 경험하고 영혼의 빛을 얻는 것은 화려한 예배 음악이나 잘 짜인 순서 때문이 아니다. 기도할 때 크게 연주되는 반주나 설교의 말미에 은은하게 곁들이는 음악 효과에 달려있지 않다. 예배 과정 하나하나가 각자에게 의미로 다가오고 거기에 영혼이 실려질 때 성령에 의한 감동은 주어진다. 이는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지는 좋은 감정과 달리 잘 박힌 못과 같이 심령에 오래 살아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 것이다.그러므로, 인위적인 분위기 조성으로 예배자에게 감동을 주입하려 하기보다 오롯이 성령님께서 일하시게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 참여자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골몰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주님께 이끌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돕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5예배를 강조하지 않는 한국 교회는 없어 보인다. 교회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마다 크게 장식된 “살아 있는 예배” 혹은 “감동이 있는 예배” 등의 문구가 말해 준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예배를 찾고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교회들은 뭔가 그들만의 차별화된 예배 콘텐츠를 가진 것처럼 어필하고 있다. 바라기는, 예배를 자랑하고 최고의 예배를 추구한다는 교회들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분히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 행여라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사람을 위한 서비스는 아닐까 하는 우려가 쓸데없는 기우가 되기를 바란다.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이런 엄연한 관계를 잊은 채, 스스로의 만족과 감동을 얻기 위해 예배가 연출된다면 실로 무례한 불경이 아닐 수 없다. 예배자로서 가져야 할 합당한 마음가짐 위에 다채로운 내용이 실려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예배의 주인이심을 인식하면서, 소박하더라도 기쁨으로 찬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기도하며, 주님이 증거되는 생생한 능력의 말씀이 선포될 때, 진정한 예배는 드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전도하지 않는 세 가지 이유
by Matt Smethurst
2023-09-23
세속 시대에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쉽지 않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들 너무 바쁘다거나, 심각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애초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가 아니라 어색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하는 이유에 관해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뭐가 나올까? 뭔가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의 하나는 애초에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에는 세 가지 공통되는 이유가 있다.1. 맥락을 무시한다. 지금은 탈 기독교 시대이다.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에 관해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쉽게 가정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방식에 동참하기 위해서라도 주의 깊게 잘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오해를 사거나 완전히 거부당할 용어를 사용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거기에는 심지어 성경의 용어까지 포함되어 있다. •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좋은 소식이지만, 하나님의 본질(또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쓴다면 의미 없는 말로 전락한다. • “당신은 죄인입니다.” 사실이지만, 죄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죄에 대해 그다지 나쁘게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은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이 말도 사실이지만,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성경에 따르면요….” 훌륭한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을 꺼내려면 조건이 있다. 성경이 구식, 가부장적 동화 모음집으로 치부되지 않는 경우이다. 복음을 멋있게 치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해체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주변 문화를 연구하는 목적이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배적인 가치관과 희망, 두려움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복음이 그들이 갖고 있는 가장 깊은 갈망을 충족시키고 또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우상까지 전복시킬 수 있을까?오늘과 같은 문화 환경 속에서 효과를 높이려면 질문에 능숙해야 한다. 전도하는 핵심 목표가 단지 당신의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런데도 오로지 전문 성경 용어로만 나열하는 데 그친다면, 회의론자들은 기껏해야 혼란에 빠지거나 최악에는 도망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효과를 높이는 것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해하기 위해서 듣고 또 이해받기 위해서 말하게 된다. 더불어서 당신과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이웃이 곧 듣게 될 최고의 소식에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유도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전도는 단지 허공을 때릴 뿐이다. 2. 사랑하는 데에 실패한다.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살전 2:8).잃어버린 자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영적 미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실용적이기까지 하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는 메시지도 들리지 않는다. 신뢰는 필수이며, 당신이 상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는 기본이다. 사랑에 실패하는 순간 복음 전파가 허사가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을 향한 그들의 마음도 완고해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들을 향한 전도의 문은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결코 실질적 전략의 범주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사랑이야말로 당신이 고백하는 바로 그 하나님을 당신이 진짜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가장 확실한 리트머스 종이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단언한다.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전 13:1-3)당신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전도자일 수도 있다. 또 회심자도 적지 않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하다면, 당신은 단지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위험과 이해관계는 없다.제대로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가 잘 들어주는 것이다. 경청은 단지 힘든 시기를 겪는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조언이 아니다. 그건 감성 지능의 기초 중 기초이다. 경청과 사랑받는 것은 사실 너무나도 흡사해서 사람들 대부분이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성경이 무어라고 하는가?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약 1:19) 권고한다. 하지만 이 말씀을 무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하는 데에 바빠서 상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위험까지 무릅쓰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여전히 길을 잃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하는 것처럼 상대에게 말해야 한다. 지금은 분노의 시대이다. 문화를 역행하는 사랑의 말투가 없다면 복음이라는 반문화적인 메시지도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3. 두려움에 굴복한다.전도하기를 꺼리는 진짜 이유 중 하나가 두려움이라는 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어쩌면 그건 어색한 상호작용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또 노골적인 거부나 당혹감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회의론자의 반대에 대응할 준비가 되지 않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다. 두려운 이유는 수없이 많다. 두려움 중 일부는 소심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현실이다.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복음 전파의 기회를 낭비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전도는 복잡하지 않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시간은 결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나누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완벽한” 상태가 되어서 전도하는 날은 아예 꿈꾸지도 말라. 그런 날은 없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혼을 붙잡고 관리하겠다고 결심하라. 언제가 될지 몰라도 그 순간이 오면, 당신은 갑자기 대화의 방향을 영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육체적으로는 괴로울 것이다. 뱃속이 울렁거릴 수도 있다. 그건 정상이다. 맥박이 마구 뛸 수도 있다. 그것도 정상이다. 목소리가 떨릴 수도 있다. 이제 당신은 진정한 복음 전파자의 세계로 들어왔다. 환영한다. 기억해야 한다. 이런 불쾌한 감정이 결코 도망치라는 신호이거나 다음으로 미루라는 신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대로 지금 당장 두려움을 정면으로 직면하고 전쟁을 선포해야 할 바로 그 순간이다. “그래, 두려움아, 너는 실재하고 또 강력하지. 하지만 넌 전능하지 않아. 넌 나를 지배하지 못해. 나는 너에게 굴복하지 않을 거야. 나는 오로지 왕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볼 거야. 지금 나는 그분께 기대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겠어.” 당신이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지금 한번 상상해 보라. 당신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두려움에 얼어붙었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주님, 저는 아닙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아직 준비가 안 됐고, 게다가 게다가 환경도 이상적이지 않아서 당신이 복음을 듣지 못했더라면,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위대하시며 동시에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복음서를 통틀어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의 하나를 선포하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적은 무리여, 너희 아버지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눅 12:32).감을 잡았는가? 목자. 아버지. 왕. 하나의 작은 구절, 그러나 세 개의 거대한 진리.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는 목자이시며,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아버지이시며, 또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왕이시다. 이천 년 전, 목자이신 왕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되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라는 구절만큼이나 위로가 되는 게 있다. 바로 “어린양이 나의 목자이시다”(계 7:17)라는 약속이다. 영광으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이다”(마 28:20).전도가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Matt Smethurst,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 (10Publishing, 2022)에서 간추린 글입니다.원제: 3 Reasons We Avoid Evangelism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적 존재를 부정하는 미국인이 늘고 있다
by Joe Carter
2023-09-22
이야기: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하나님, 천사, 악마 같은 영적 존재의 실재를 부인하고 있다.배경: 미국에서 하나님, 악마 및 기타 영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 최저점에 도달했다. 최근 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하나님, 천사, 천국, 지옥 및 악마의 존재를 믿는 미국인의 비율이 2016년 이후 3-5퍼센트포인트 하락했다. 그러함에도 미국인 대다수는 여전히 영적 존재를 믿고 있는데, 74퍼센트가 하나님을 믿고, 69퍼센트는 천사의 존재를 믿으며, 67퍼센트는 천국을 그리고 59퍼센트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 악마의 존재를 믿는 수치는 58퍼센트였다. 2001년과 비교할 때, 가장 많이 감소한 게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인데 각각 16퍼센트포인트였다. 2001년 이후 지옥에 대한 믿음도 12퍼센트포인트 떨어졌고, 악마와 천사에 대한 믿음도 각각 10퍼센트포인트씩 하락했다. 전체적으로 미국인의 51퍼센트는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모두 믿는다. 그 어떤 존재도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은 11퍼센트이며,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고 대답한 사람은 7퍼센트이다. 전반적으로 모든 연령대에 걸쳐서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감소했지만, 18-34세 연령대가 그중에서도 가장 낮았다. 가톨릭보다는 개신교인에서 믿는 비율이 더 높았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종교 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대다수가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다 믿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정치 성향도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화당원의 78-87퍼센트가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믿는데, 무소속의 경우에는 51-68v퍼센트이다. 이에 비해서, 민주당원의 56-66퍼센트가 하나님과 천사, 천국은 믿는다고 했지만, 지옥과 악마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절반 미만이었다. 무슨 의미인가: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감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식론적 권위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특정 주제에 관한 인식론적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해당 주제에 관해서 보유하고 있는 정보나 통찰력이 신뢰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다. 과거에 인식론적 권위는 현실에 대한 공유된 감각과 현실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권위에 대한 존중에 크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새로 태어난 아기를 놓고 삼신할머니가 준 거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와 자기의 자궁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두 의견이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머니의 말을 믿었다. 아기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현실을 어머니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식의 많은 영역에서 인식론적 권위는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에 빠르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형이상학은 실재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연구이고,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는 실재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입장이다.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실재 또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의 인식, 신념 또는 기타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구성되거나 조건화된다는 것이다. 실재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저 바깥”의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형성되거나 심지어 존재하게끔 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는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누구도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낙태에 관한 1992년 대법원 사건인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사건을 생각해보자. 그 판결에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에 관해서 지금까지 발표된 내용 중에서도 가장 명확하고 영향력 있는 주장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낙태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면서 케네디 판사는 다수의견에서 “자유의 중심에는 존재, 의미, 우주, 인간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개념을 정의할 권리가 있다”라고 썼다.많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케네디도 형이상학적 주관주의가 자명하다고 가정한다. 전직 판사 케네디의 정의에 따르면, 존재의 본질(존재함), 윤리의 본질(의미), 물질세계의 본질(우주), 그리고 사고와 감정 및 행위(인간 생명의 신비) 등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은 하나같이 개인이 정의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실재의 본질을 스스로 정의할 권리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에 필요한 기본 권리가 된다. 물론 아무리 케네디라고 해도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를 일관되게 적용한 적이 없다. 아니, 그건 아예 불가능하다. 그런 개념은 터무니없고, 누구라고 거기에 따라서 살 수는 없다. 케네디의 견해는 합의가 필요한 실재에 대한 부정이자 누구나 스스로 실재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민법이 존재하고 이에 따라 대법원 판결이 가능하려면, 현실 내지 실재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있어야만 한다. 자기모순 없이는 누구도 일관되게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념상 형이상학적 주관주의 내에서 자기모순은 누군가가 동의하는 경우에만 “실재”가 된다. 따라서 얼마든지 실재 그 자체를 거부함으로 누구라도 비일관성과 모순이라는 현실을 피할 수 있다. 자기모순을 무시하고 대신에 “자기 눈에만 보이는 진실”에 의지하면 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 모순적이고 실재의 재정의라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의 대표적인 사례가 트랜스젠더 운동이다. 얼핏 보기에 이건 거의 갑자기 세상에 튀어나온 것만 같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남자도 여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한 게 아니다. 인식론적 권위를 거부하고 이를 내부 권위로 대체하는 데에는 무려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나의 진실”이라는 말에 더 이상 웃지 않게 되었을 때, 도리어 급진적인 내부 주관성을 지적 존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발생한 게 다름 아닌 트랜스젠더 운동이다. 그렇기에 이번 갤럽 여론조사는 놀랍지 않다. 하나님, 천사, 악마, 천국, 지옥이 정말로 실재한다면(당연히 그렇다), 그 사실은 진리가 개인의 감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생각에 실존적 위협을 가한다. 형이상학적인 주관주의가 기반을 확보함에 따라 하나님과 그 외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비례하여 감소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다.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가 성경의 인식론적 권위와 성경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도록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시며, 그를 통해서 천사, 귀신, 천국, 지옥 등 모든 실재가 창조되었다(골 1:16-17).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이웃이 그들의 궁금함이나 채우는 수준의 일반적인 신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대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분을 받아들이도록 애써야 한다. 진정한 진리의 권위를 올바로 인식할 때야 우리는 비로소 주관적인 ‘나의 진실’이 얼마나 무가치한 우상인지를 똑똑히 볼 수 있게 된다. 원제: Poll Finds an Increasing Number of Americans Reject Re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삶의 이벤트를 점처럼 이으면
by 필립 정
2023-09-21
19세기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유행하던 퀼트라는 수예 기법이 있다. 여인들이 옷을 만들고 남은 천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그 위에 실로 인상적인 말들을 새겨 넣는 수공예이다. 당시 미국의 여인들은 이런 퀼트 공예품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서부로 먼 길을 떠났다. 그런데 종종 그 퀼트에 성경 구절들을 새겨 선물하기도 하였다. 이어 붙인 천 조각에 새겨 넣은 성경 구절은 떠나간 이의 삶에 새겨진 은혜를 추억하게 하고 험한 길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위로를 심어 주었다.반복되지 않고 일회적이어서 머물러 있지 않은 시간을 우리 인간들도 퀼트처럼 이어 붙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 형형색색 삶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다 보면 누군가에게 보여 줄 만한 소품 하나가 나올까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들을 하나둘 이어 붙여 보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특별하지 않아 너무 특별한, 반박할 수 없는 라이프 퀼트 소품 하나가 나왔다. 인간의 삶은 지으신 이의 디자인을 버리고 욕심의 천 조각을 끊임없이 이어 붙여가는 탐욕의 퀼트라고… 그리고 주님의 디자인은 그 탐욕의 반대편 그림이라고….몇 년 전 어느 날, 일하다 너무 피곤해 중간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 극심한 피곤 증세는 몇 주 동안 이어졌고 하루는 거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없었던 주름과 피부의 노화가 그 몇 주 사이에 얼굴에 내려앉아 버렸다. 왜 그런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혈압, 당뇨, 혈중 콜레스테롤이 평균보다 조금 높았다. 하루 세끼를 잡곡으로 꼬박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 온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이 들어 더 자세히 원인을 찾아 나갔다.내가 얼마나 탐욕스럽게 먹고 살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간 하루 밥 두세 공기 거기에 과일, 과자까지 합쳐 내 나이 필요 탄수화물 기준치 2배 이상을 훨씬 초과해 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2020년 한국 보건복지부와 한국 영양학회에서 발표한 ‘2020년 한국인 영양 섭취 기준 자료’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하루 탄수화물 일일 평균 섭취량은 307.8그램으로 하루 기본 탄수화물 100그램의 3배를 초과하는 수치라고 한다. 그래서 식사를 하루 두 끼니로 줄이고 탄수화물의 양도 줄이며 조금씩 건강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당과, 혈압, 고지혈증을 개선할 수 있는 자연 치유법을 찾다가 식초의 효능을 알고 매일 식초를 물에 타서 섭취하기 시작했다. 소화가 촉진되고 피로도 개선이 되고 피부도 확연히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며 둘 사이에 뭔가 있을 것 같아 탄수화물과 식초의 두 조각을 이어 붙여 보았다. 식초는 곡물이나 과일로 술을 빚어 만드는 과정에서 알코올을 발효시켜 만드는 조미료이다. 과다한 탄수화물 섭취로 생긴 병을 먹다 남은 탄수화물을 버리지 않고 식초를 만들어 치유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 적게 먹어야 하고 남은 것까지 발효시켜 먹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욕심 많은 인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탄수화물 창조자의 디자인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과잉 섭취로 병이 드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기아로 죽어 가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이런 간극은 왜 생겨났을까?” 이런 문제를 발렌틴 투른과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가 그들의 책 왜 음식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2011) 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들의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식량 부족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산업화한 농업의 대량 생산 방식 때문에 물이 부족하고, 휴경 없이 계속된 농사로 땅이 황폐되어 소출이 줄어들었고, 농업의 산업화로 온실가스의 40퍼센트를 배출하여 기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과유불급을 해결하려면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고 공정한 분배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시스템을 바꾸어 대량 생산 농법을 포기하고 자연 친화 농업을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대량 생산 기술을 무기로 만들어버린 욕심 많은 농업 강대국들이 포기할 수 있을까?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바로 찾아온 것은 결핍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일해도 풍족할 수 없었다.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지치도록 일해야 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서로 속이고 싸워 착취해왔다. 보다 건설적인 대안이 농업혁명, 산업혁명이었다. 홍윤철이 지은 질병의 탄생을 보면 인간이 수렵 생활을 그만두고 농업혁명으로 곡물을 섭취하면서 면역체계가 부실해졌고 가축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가축의 병균이 인간에게 전염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도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히 그 전염병이 퍼져 나갔다고 말한다. 또 산업혁명 이후 수질과 토질, 대기가 오염이 되어 질병이 폭발적으로 늘어갔다고 한다. 인류의 유전자가 환경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지금 인간의 몸은 환경을 버텨낼 수 없는 사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어 버렸다.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욕심을 버리고 땅을 7년마다 쉬어 가며 적게 생산하고 적게 먹고 나누어 먹으면 땅도 살아나고 수확도 늘어날 것이고 결국은 병도 사라지도록 하나님이 디자인해 놓으신 것을 보면 삶의 길과 사망의 길이 확연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나는 이런 교훈을 얻으며 먹는 것을 조절해 나가면서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갔지만 더 노력이 필요했다. 책상에 한 번 앉으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리에 부종도 생기고 혈전도 생겨 약도 복용하면서 운동의 강도를 높여갔다. 어느 날, 가끔 가던 식당에 가 점심 식사로 콩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쓴맛이 나 먹다 말고 그냥 나와 버렸다. 가리지 않고 잘 먹기 때문에 그 식당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 안 가 깨져 버렸다. 쓴맛을 느끼는 그 빈도수가 점점 늘어나 내 건강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이랬다. 시간이 부족해 항상 쪼개어 쓰기 때문에 식후에 쉬지 않고 바로 운동을 하던 습관이 있었다. 심지어는 복근 운동까지 격하게 했으니 위산이 역류하여 쓴 물이 계속 올라왔던 것이다. 뭘 먹어도 쓴맛이 났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음식 탓할 것 없구나 싶었다. 그 결과 위산이 성대를 상하여 예전의 힘차게 뽑아내던 테너 소리를 잃어 버렸다게다가 과한 운동은 또 하나의 안 좋은 결과를 내고 말았다. 왼쪽 어깨의 힘줄이 찢어져 팔을 전혀 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병원을 다니며 회복하는 데 2년 가까이 걸리고 말았다. 과식이 건강을 무너뜨리는 주범인 것처럼 과로 역시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욕심을 따라 절제 없이 살다가 삶이 조금씩 무너져갔고 추락하기 전에서 겨우 멈추어 설 수 있었다.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도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어느 날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듣다가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후 아침에 차를 타고 일을 하러 나가면서 차 속에서 습관처럼 이 연설문을 수천 번 듣다 보니 다 외워 버리게 되었다. 그 연설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내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을 잇는 것에 관한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스티브 잡스는 그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점처럼 하나씩 이어가며 스탠퍼드 졸업생들에게 연설한다. 태어나서 입양된 이유와 돈이 없어서 콜라 캔을 팔아 밥을 사 먹어야 했고, 기숙사 방이 없어서 친구의 방 바닥에서 자고 심지어는 결국 대학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사건들이 다 연결이 되어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의 필수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대학을 그만두고 손으로 쓴 서체 수업을 청강으로 들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10년이 지나보니 맥킨토시 컴퓨터 폰트 디자인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그 대학에서 다른 수업을 듣고, 그 서체 수업을 안 들었다면 현재의 맥킨토시의 아름다운 서체는 없었다고 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 과거의 점들을 선처럼 이어보면 순간들은 결국 이어진다고 그 연설에서 강조한다. 불교 신자인 스티브 잡스의 연설에서 ‘점 잇기’는 불교의 용어인 인연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물이 흩어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서로 이어지고 맺어져 존재로 형성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사물이 존재로 형성이 되기 위해서는 사물의 내부에 원인이 되는 씨앗이 외부의 물과 햇빛 같은 조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연의 교리다. 인연 교리는 기독교의 섭리 교리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 씨앗이 내 속에는 없고 외부의 창조주에게서 온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우리의 존재가 디자인되어 있고 사람이 그 디자인을 따라야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올해 2023년 한국에 가서 몇 가지 건강 검진을 해 보았다.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피부과까지 가서 내 망가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미국의 병원비가 비싸기도 하지만 비교적 잔병 없이 살아 병원에 갈 필요를 느껴보지 못하다가 감당 못 할 정도가 되어서야 병원을 찾게 되었다. 결과는 그랬다.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관리를 엉망으로 하셨습니다.” 닥터들의 말이 동일했다. 안과 의사는 심하게 나무라기까지 했다. 나는 그분들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큰 감동이 오던지. 마치 내가 열네 살 때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회개 하라는 설교를 들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이벤트의 점들을 하나로 이어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삶에 디자인한 것들을 감상하곤 한다. 그럼 너무 신기한 것이 있다. 나는 내 삶에서 나 스스로 나를 위해서 스케치하거나 채색해 본 적이 전혀 없다. 그저 주어진 삶이라는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왔다. 지나고 보니 대부분의 일에 대한 열심은 탐욕이었고 게으름은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대한 포기에 가까웠다.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소망을 심고 믿어지게 하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 있었다. 그 자리엔 내 욕심이 끼어들 수 없었고 그 길은 결코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삶의 조각들을 잇다 보면 주의 은혜와 설계가 있고 그 끝에는 주님이 있었다. 또 지금까지 이어온 점들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점에 이어보면 그럼 앞으로 주님이 내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도 짐작하게 된다. 그 길을 따라가면 과거처럼 앞으로도 소망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호흡도 의미가 있고 일도 쉼도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믿어지는 것은 오늘도 날마다 색다른 선물이라는 고백을 하고 글을 마치고 싶다.
일터에서 양심에 꺼리는 일이 있을 때
by 김선일·이금주
2023-09-20
엉겅퀴와 가시덤불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회사에서 선진 마케팅 기법이라고 해서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시제품을 과대 홍보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소 거짓말이 들어간 것 같은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실을 말하자니 회사의 영업이 어려워지고, 저도 상사에게 질책을 당합니다.김선일: 회사에서 신제품을 내놓으려고 하는데 사람들에게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제품이 나온 것처럼 예고를 해서 고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고민은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겪을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금주: 이 질문을 보고 검색을 해보니, 요즘 마케팅에서는 고객의 필요를 잘 파악해서 거기에 맞춰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을 선진기법이라고 한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질문이야말로 기독교적인 ‘타협’(compromising)의 이슈를 안고 있다고 봐요. 이 타협이란 거룩함의 문제와 연결되고, 그것은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핵심입니다. 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 자체가 거룩하게 구별되기 위해서이지요. 이: 이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직장인들이 취해야 할 몇 가지 단계를 제 나름대로 생각해봤습니다. 첫째, 먼저 그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서 사실적 분석을 하십시오. 회사에서 계획하는 홍보방식이 과대홍보라고 바로 결론짓지 말고 정말 과대홍보인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자신은 과대홍보라고 생각하지만, 회사입장에서는 과대홍보가 아니라 정말로 선진기법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회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혼자서 추론하고 끙끙 앓지 마십시오. 어쩌면 회사의 운영방침이 내가 고지식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더욱 객관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속이려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먼저 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 예, 저도 조직 생활을 하다보면 한 개인으로서 업무나 경영을 대할 때와, 책임을 맡은 리더로서 전체를 볼 때의 상황이 크게 차이가 나긴 하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리 개인이라 하더라도 실무자의 경우는 그 일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이: 그래서 둘째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분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분명히 거짓이 담긴 과대홍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이 둘째 단계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실 말하기를 목회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김: 목회적이라 함은 사람을 대할 때, 비록 그가 나보다 상관이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의심될지라도 너그럽고 배려하는 자세로 접근하라는 것인가요? 이: 맞습니다. 그뿐 아니라, 거짓말을 안 하고도, 고객의 필요를 채워주는 선진기법의 취지를 잘 살려서 회사에 진정한 유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자고 건의하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나를 의롭게 보이려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고, 다른 사람도 수긍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최대한 겸손하게 지혜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하려고 하는 선진기법이 100퍼센트 거짓말이라고 확신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김: 질문하신 분도 “다소 거짓말이 들어간 것 같다”고 하신 것을 보니 조금 애매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품을 홍보하는 데 있어서 거짓보다는 진실을 늘리고, 사람들이 잘못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자고 건의해야겠네요. 이: 미국의 조직문화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윗사람에게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예의를 지키면서 건의해야 합니다. 공손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상사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말하십시오. 아무리 권위주의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얼마나 겸손한 태도와 용어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상사의 반응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김: 진실과 공의가 중요하지만, 그 진실과 공의를 담는 방식은 겸손과 온유함이어야겠습니다. 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하고 연구해서 제안을 하십시오. 불평부터 하지 마십시오. 옳고 그름만을 따지지 말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하십시오. 그게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김: 제 경험으로도, 어떤 일에서 잘못된 것을 불평하고 뒤에서 비난을 일삼으면 점점 조직에 대해서 불신이 쌓이고, 일에 대해서 실망하고 의욕도 잃는 것 같습니다. 이: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실지를 생각하고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지혜를 달라고 구하십시오.김: 어쩌면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선과 악으로 구분해놓고, 비즈니스에서는 기독교적인 선을 이룰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일의 신학에서는 일터에서 일어나는 딜레마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해놓고 안주하려는 자세를 가장 경계합니다. 회사의 영업이 어려워지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올바르게 접근할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김: 지금까지 두 단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사실분석을 하고, 그다음에는 양심에 거리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과 온유함 가운데 더 나은 대안을 찾아서 건의하라. 그래도 윗사람이 들어주지 않고 기만적인 과대홍보를 밀어붙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그때는 신앙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명백한 거짓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10)라고 말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운 자녀들이 걸식하지 않게 하신다(시 37:25)는 믿음을 가지십시오.김: 아마 그렇게 하면 설령 회사 정책에 반하는 선택을 하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받더라도 결국 더 큰 상전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평안해지고, 하나님의 오묘한 인도하심도 경험하리라 봅니다. 이: 동시에 영업이나 홍보에서 진실과 거짓의 차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좁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의적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고 자신도 더 연구하고 심사숙고하면서 접근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항상 기도하고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 상황에서 떠오릅니다. 비즈니스의 속성인 이익 추구 시스템을 너무 순결주의로 접근해서 섣불리 선악을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순결함은 상사 및 동료들과 일에 대한 논의를 할 때 겸손과 존중의 목양적인 지혜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 끝으로, 저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 교회와 목사님의 협력적인 목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고민을 많이 할 겁니다. 목사님들이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교인들을 일의 신학적 관점으로 목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 일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양적 자세가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의 일에 대한 목양을 받아야 일터에서 목양자가 될 수 있겠습니다. 목양 받아야 목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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