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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과 우상숭배
by 박혜영
2024-04-08
고난주간 수요일 저녁에 모이는 성찬식(주의 만찬) 참석을 위해 매번 성도들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시간을 내는 일도, 가장 붐비는 퇴근 시간에 모임 시간에 맞추어 안양에 도착하는 일도, 동네를 돌고 돌면서 차 댈 데를 찾는 일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가 수요일 저녁을 고수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찬식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을 얻고자 하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귀한 것을 얻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살펴보니 제가 성찬식에 대한 글을 다섯 편이나 썼습니다. 여러 번 강조한 셈입니다. 20년 전 분립개척을 시작하면서 성찬식에 대한 저의 질문은 이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교리가 가르치는 대로 성찬식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면, 신자들은 성찬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적이 있는가? 애조 띤 찬송가를 부르면서 마음이 좀 짠해지는 그런 순간 말고, 진정 믿음이 견고해지고,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용기를 얻고,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고, 심지어 몸과 마음에 치유가 일어나는 그런 은혜의 경험이 있는가? 성찬식이 진정 은혜의 방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그렇다면 교회의 성도라면 질문해야 합니다. 성찬식에서 “참된 양식” “참된 음료”를 먹고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린도 교회가 하나의 반면교사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 11:20). 좀 더 정확한 번역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먹은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니”(ESV). 그들은 주의 만찬이라고 하여 먹었습니다. 그런데 참된 주의 만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원하는 신자들끼리 모여 먹고 마신 일에 불과했습니다. 성찬 신학이 빠져 있고, 성찬 신앙이 빠져 있는 주의 만찬은 그냥 음식을 먹고 마신 시간에 불과합니다.고린도 교회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우상숭배 문제, 곧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고전 10:21)하는 것인데, 저들은 겸하여 참여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 내에 분쟁이 있었고, 차별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 11:22).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성찬식은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성찬의 말씀으로 그 첫 번째 문제,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거나,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는 문제를 살짝 다루었습니다.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식을 자랑하며 강한 척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참고. 고전 8:1). 그러면서 이방신의 신전에서 열리는 연회나 친목 모임에 참석하여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친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 다음 교회로 모여서는 주의 잔을 마시고 주의 상에서 받아먹었습니다. ‘뭐, 어때!’ 하면서…. 오늘날 교회 신자들 가운데 다른 신전에 가서 절하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취직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 월급을 받고, 합당하지 않은 곳에서 먹고 마시면서 그렇게 해야만 만나주는 거래처가 주는 돈으로 먹고산다면, 그 신자의 주인은 과연 누구입니까? 우상숭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직접 규명했습니다.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나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 마음과 관심은 어느 것 하나를 중히 여기거나 경히 여기기 마련이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소득이 많아지면 생활 규모를 늘리고, 생활 규모를 늘리면 유지하거나 더 늘리기 위해 더 많은 소득이 필요하고, 그러자면 더 바쁘게 더 많이 일해야 하고, 그러면서 신앙은 점점 경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 아니겠냐고. 우리가 그런 상승기류에 사로잡혀 있다면, 성찬식이 은혜의 방편이라는 말은 아마 경험하기 힘들 겁니다.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2) ‘복음주의’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
by 문대원
2024-04-05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인천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세계 선교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으로 로잔 운동의 비전을 설명하기 위한 두 번째 키워드는 ‘복음주의’입니다.근대 복음주의 운동은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과 존 웨슬리의 부흥 운동에 그 역사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지역과 교단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이는 복음주의를 정의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영국 스털링 대학의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 교수는 복음주의의 특징을 네 가지 핵심 요소로 규정했습니다. 이른바 “베빙턴의 사각형”이라 불리는 복음주의의 네 가지 특징은 성경주의, 십자가 중심주의, 회심주의, 행동주의입니다. 복음주의 운동으로서 로잔의 공식 문서들은 이 네 가지 복음주의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성경주의(biblicism)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경관으로, 고등비평에 기반한 자유주의 신학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자 절대 권위로 강조하며,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기적과 부활을 무오한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로잔 언약 2항은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실천의 유일하고도 정확무오한 척도임을 믿는다”라고 고백합니다.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이 구원의 유일한 방편임을 강조합니다. 로마가톨릭과 WCC가 타 종교 안에도 구원의 은혜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 것과 대조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이 없음을 단언합니다. 로잔 언약 3항은 “유일한 신인(God-Man)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한 유일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회심주의(conversionism)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회심의 경험을 강조합니다. 구원은 바른 교리를 머리로 믿는 지성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는 전인적인 경험입니다. 마닐라 선언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증거가 전도에 있어서 절대 필요하며, 따라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이는 중생이나 새로운 삶이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합니다.행동주의(activism)는 아직까지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전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20세기 초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분리한 것을 비판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사회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합니다. 로잔 언약 6항은 “우리는 우리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비그리스도인 사회에 스며들어가야 한다. 교회가 희생적으로 해야 할 일 중에서 전도가 최우선이다”라고 강조합니다.19세기 이후로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D. L. 무디, A. T. 피어슨, R. A. 토레이 같은 복음주의 부흥사들은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대형집회를 열었는데, 이들의 사역은 당시 교회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례로, “케임브리지 7인”(The Cambridge Seven)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젊은 선교사들은 무디의 부흥집회를 통해서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깨닫고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미국과 영국의 사회, 교회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확산하는 방식 또한 달랐습니다. 국교회(state church) 개념이 없는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주류 사회에서 분리되어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에 비해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개혁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예를 들어서, 영국 사회의 개혁 운동을 이끌었던 클래펌회(Clapham Sect)는 투철한 복음주의자 윌리엄 윌버포스를 중심으로 세계에서 최초로 노예제도를 철폐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진리를 가려버리는 그 알약
by Peter Gurry
2024-04-04
2016년 여름, 한 과학자 그룹이 새로운 세계 지도책을 출판했다. 그 지도는 새로운 운송 경로에 관한 것도 또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심해 지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의 빛 공해 지도였다. 끔찍한 소식이었다. 그 지도에 따르면 미국인의 80퍼센트는 인공조명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은하수를 볼 수 없다. 인공조명은 여러 측면에서 축복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이상 은하수를 볼 수 없게 된 우리는 뭔가를 잃어버렸다. 그 지도를 만든 수석연구원의 말이다. “문학, 종교, 철학, 과학은 물론 모든 예술도 하나같이 밤하늘을 보면서 고민하던 인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제 우주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볼 가능성이 없이 자란 첫 번째 세대가 되었다.”그리스도인에게 문제는 더 심각하다. 다윗이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밤하늘이었다(시 8:3-8).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곳도 하늘이었다(시 19:1). 별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는 보편성 때문에 오히려 특별하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은 별을 볼 수 있다(3절; 롬 10:18). 산이나 바다, 동물을 누구나 다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빛 공해가 이런 현실을 바꾼다. 그렇다고 실수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다윗이 들었던 것과 똑같은 메시지를 보내신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우리가 과학기술로 가려버렸다. 우리의 차이를 가려버리는 소음하늘과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우리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이다. 그리고 하늘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하나님에 관해서 증언한다. 몸은 우리 자신에 대해(잠 19:13-14; 벧전 3:7), 세상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에 관해서(창 1:27; 시 8), 그리고 우리의 구속에 대해서(엡 5:31-32)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성-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전등이라는 기술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모호하게 만든 것처럼, 인간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인간의 성적 차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주요 기술은 1960년 FDA의 승인을 받은 경구 피임법이다.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경구피임약이 수많은 약 중에서 우리가 단순히 “알약”(the Pill)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약이라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기술은 여성에게 전례 없는 독립의 시대를 열었고, 따라서 출산을 연기하고 교육을 추구하며 정규직 고용을 추구하는 여성의 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세대의 머릿속에 있던 섹스와 출산 사이의 연관성을 단절시켰다. 경구 피임이 자연스러워지면서, 무과실 이혼, 동성결혼, 그리고 오늘날의 트랜스젠더 운동의 초석이 놓였다. 더불어서 ‘임산부’ ‘수유’ ‘생리하는 사람’ 등의 용어에도 새로운 뉘앙스가 더해졌다. 피임약이 이를 가능하게 한 이유는 Mary Harrington이 쓴 것처럼 “남녀 간에 가장 줄일 수 없는 차이, 즉 임신 여부라는 차이를 사라지도록 약속하기” 때문이다. 기술은 어떤 의미에서 교육학이며, 피임약은 여성의 출산 능력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출산을 고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성관계를 하고 싶은 남성의 욕구에 더 적합한 환경을 만들었다. 이런 역사는 광범위한 피임법 사용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예상치 못한 결과의 하나인 혼외 출산의 극적인 증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George Akerlof와 Janet Yellen은 거의 삼십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다소 갑작스럽게 낙태와 피임의 증가가 목격되고 있다. 이를 생식 기술의 충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혼외 출산의 증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낙태와 피임으로 인해 미혼모가 줄어들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기가 생겨도 굳이 결혼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2014년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무려 40퍼센트가 결혼이라는 보호의 테두리 바깥에서 태어났다. 1960년에는 그 비율이 고작 5퍼센트에 불과했다. 과거에는 남자가 임신시킨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느꼈지만, 그런 의무감은 피임약의 보급과 함께 줄어들었다. 아니, 여자가 피임약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생식 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남자가 임신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초기 많은 여성 권리 운동가가 두려워했던 것처럼 남자는 이제 섹스에 대한 책임감에서 점점 더 해방감을 느낀다. 피임이 실패하는 경우, 남자는 조용히 낙태를 설득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얼마든지 아기 아버지의 동의 없이, 심지어 알리지도 않은 채 낙태가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낙태에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피임약이 초래하는 다른 효과에도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빛 공해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피임은 성적 차이의 찬란함을 보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때로는 욕망을) 흐리게 한다. 어느 때보다도 남자와 여자의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시대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거기에 동의한다. 일에서든, 생활에서든, 교회에서든 자신도 모르게 남자를 여자의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 딸들이 어렸을 때 나도 이런 사고방식의 피해자였다. 나는 가끔 딸들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고, 그런 다음 교사, 작가, 의사 등 온갖 멋진 직업을 제시하곤 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여자만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곧 엄마를 제외한 모든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기를 깨끗하게 하자기술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 무기력하거나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건 아니다. 하늘의 경이로움을 보고 감상할 방법이 여전히 있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놀라운 차이를 보고 감상할 방법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1. 주의를 기울이자피임이 남자와 여자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한 내 이야기를 듣는 그리스도인은 하나같이 놀란다. 처음에는 피임이라는 게 그토록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못한다. 바로 그 사실, 피임에 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우리의 문제이다. 우리는 피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가르쳐야 한다. 오랫동안 개신교인은 피임이 가톨릭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위로해 왔다. 순진한 착각이다. 피임약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봐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의 하나이다. 우리는 사실상 위험하다고 할 정도로까지 피임의 위력을 무시한다. 피임약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견해(책임감 있게 사용할지, 아니면 아예 쓰지 않을지)가 무엇이든, 이 작은 알약이 가져온 변화를 이해하지 않고서 현재의 문화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는 마셜 맥루한이 신기술에 대해 제기한 네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술이 증진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이 쓸모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로 인해서 우리가 찾게 된 것은 무엇인가? 그 기술이 극단적으로 사용될 때 반전되거나 뒤집히는 것은 무엇인가?피임을 포함한 모든 기술의 사용이 우리의 가치를 어떻게 반영하고 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에게 피임이 필수품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날 자율성과 자급자족이 그토록 높은 지위로 높아진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가 되는 것이 행복의 길이 아니라 인생의 방해가 된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인 젊은이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 모든 질문은 가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피임약 사용은 내가 가진 어떤 가치를 드러내는가? 인간의 기술이 가려버린 창조의 선함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가치는 어디에서 수정되어야 할까?2. 경외로움으로 다시 바라보자그렇다고 피임약이 임신의 기적이나 출산의 고통스러운 승리를 바꾼 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아기는 언제나 그래왔듯 여전히 잠재력으로 가득 찬 눈을 깜빡이며 세상에 나온다. 로맨스 또한 그 깊은 매력을 잃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서로에게 끌리고 또 불꽃을 튀긴다. 매우 다른 두 피조물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매력, 고통, 희극은 여전히 훌륭한 이야깃거리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부활이 필요하다면, 그건 좋은 러브스토리가 주는 마음졸임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진부해졌기 때문이다.성경은 우리에게 창조의 이러한 측면에 경탄하라고 요구한다.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기이한 일이 셋,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넷이 있으니, 곧 독수리가 하늘을 날아간 자취와, 뱀이 바위 위로 지나간 자취와,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간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하였던 자취이다.” (잠 30:18-19).젊은 남자가 여자에게 구애하는 방식은 날아다니는 독수리나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움직임만큼이나 경이롭고 설명하기 어렵다. Lindsay Wilson은 “인생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탐험할 수 있는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라고 쓰면서 이 잠언 구절의 역동성을 포착한다. 우리는 인생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우리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기뻐해야 한다. 성적 차이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면 어떨까? 남자와 여자의 특성을 모은 목록이 환원주의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 차이가 단순한 목록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오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성적 차이에 이렇게 접근할 때, 우리는 누군가 자신이 “잘못된 몸”으로 태어났다고 말할 때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다. 더 나은 이야기현대 문화는 종종 젠더에 대한 서사를 억압의 형태, 버려야 할 부담, 기술(피임 기술은 물론이고 호르몬, 성전환 수술 등)로 극복해야 할 자연의 장애로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훨씬 더 나은 이야기가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사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하셨다는 이야기이다. 결혼이 무엇인가? 서로 대조되는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서 우주의 중심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고유한 축복과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현대 기술이 우리의 비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그림은 여전히 우리가 보고, 기뻐하고, 또 선포할 수 있도록 남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출처: How the Pill Obscures God’s Truth in Creation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
by 고상섭
2024-04-0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 중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하지 말고 삼위일체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기에 설교에서 그리스도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본문에 맞춰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고 말한다. 언뜻 신학적으로 더 균형 있는 말인 것처럼 들리지만 이 또한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이 곧 삼위일체 중심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설교여야 한다는 명제가 증명되려면, 먼저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이 아니다”라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삼위일체 중심적이지 않은가? 프레스 샌더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복음이다에서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더욱 삼위일체적이 된다고 설명한다. “만일 성육신이 없다고 한다면 아마도 세 위격은 구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세 위격은 계시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차이점에 의해 서로를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에서는 하늘에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없고, 오직 익명의 셋만 있게 될 것이다.”이 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만 삼위일체의 구분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한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양자됨으로 우리가 성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부와 성령과 동떨어져 독자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부에 의해 보냄을 받고, 성령 안에서 사역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적일 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가 더욱 찬란하게 계시된다.센더스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것은 성부를 망각하는 것도 성령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경 히브리서 말씀을 읽을 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는 말씀이 있다면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예수를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삼위일체 중에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라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가 보내는 성령에 대해 생각한다. 즉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도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 설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모든 설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설교자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신약의 서신들은 처음에 시작되는 인사말과 끝에 나오는 축도조차 그렇게 하지 않는다. 11개의 신약의 서신서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라고 언급한다. 자세히 보면 성령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바울 서신이 ‘성령님’을 뺀 잘못된 설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성자를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설교한다는 것이고, 설교를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심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리스도 중심 설교야말로 최선의 삼위일체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 설교가 존재하는가?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표현은 듣기에는 좋지만 학술적 정의가 불분명한 표현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다양한 신학 근거를 가진 책들과 실용서들이 출판되었지만, ‘삼위일체 중심 설교’라는 설교학 교과서는 아직 보지 못했다. ‘삼위일체 설교’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가? 모든 설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반드시 다 거론해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본문에서 성부가 나올 때는 성부만, 성자가 나올 때는 성자만, 성령이 나올 때는 성령을 강조하는 설교여야 한다는 말인지 명확하지 않다. 본문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나오지 않는 본문을 설교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에서 말하는 것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 중심 설교라면, 삼위일체가 모두 등장하지 않는 본문은 늘 인간의 스토리만을 설교해야 할 것이다. 그 본문이 포함된 문맥과 각 책, 구약과 신약의 전체 속에서 설교할 본문을 바라보는 숲속의 나무로 본문을 보는 성경신학의 눈이 생길 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라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말은 명확한 실체가 없는 표현이기에 실례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지 않고 삼위일체적으로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삼위일체 설교의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보여달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설교하는 것이 삼위일체 중심 설교인지 구체적인 설교문을 보고 싶다. 삼위일체 설교라는 주장은 많지만 정작 삼위일체 설교를 이렇게 해야 한다는 학문 근거도 실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모두 강조해야 한다는 주장일 뿐이다. 삼위일체 설교는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삼위일체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극단적으로 성부와 성령을 배제하는 설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프래드 샌더스도 삼위일체를 깨뜨리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성부와 성령을 동시에 붙잡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붙잡는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성부와 성령으로부터 분리해서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이 유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그를 보내신 성부의 사랑을 그리고 지금도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의미의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존재 그대로를 보는 데 실패하게 된다.”결론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삼위일체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정도 요점을 살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곧 삼위일체 중심 설교이다. 둘째, 삼위일체 중심 설교의 구체적인 예와 원리가 명확하지 않다. 셋째, 그러함에도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는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고려하지 않는 설교를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삼위일체 중심 설교는 결국 그리스도 중심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의 풍성함이 더 아름답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리스도 중심 설교, 삼위일체 설교라는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욱 아름답고 찬란하게 드러내어서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이 선포되도록 더욱더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삼위일체 중심이 된다.
비극의 소비자가 되지 말라
by Caroline Stoltzfus
2024-04-02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전쟁, 무차별 총격 사건,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연예인, 정치극, 그리고 재판받는 첨단 기술 관련 억만장자들 등등. 오늘날 사회에는 끊임없이 뉴스가 쏟아지고, 그 모든 뉴스를 챙겨봐야 할 나름의 이유가 있다. 정보를 얻는다는 건 사회와 연결되었음을 확인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 및 역량을 강조하는 현대 문화의 미덕을 발휘하는 모습이다. 물론 탄탄한 저널리즘을 기반으로 한 역사적이고 시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건 가치가 있다. 창작자가 정직하게 이야기를 전할 때 정의가 구현되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자를 대변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뉴스를 통해서 각 세대가 이웃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자원을 사용하도록 영감을 받는다. 개인과 공동체로서 서로 배우고, 연결하고, 또 성장하는 데에 뉴스는 도움을 준다. 하지만 나쁜 뉴스에 관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둠스크롤링(doomscrolling: 뉴스 스크롤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과 더불어 쉬지 않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또 속보가 뜰 때마다 오는 알림을 강박적으로 클릭하는 게 과연 그리스도의 왕국을 잘 섬기는 데에 도움이 될까? 우리는 정말로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을 쏟는 걸까? 아니면 비극이 우리의 오락이 되었기 때문일까?참여냐 도피냐?솔직하게 말해서, 쉬지 않고 새로운 소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게 나와 이웃의 고통을 피하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비난하는 게 바로 앞 모퉁이에 있는 노숙자를 돕는 거보다 훨씬 쉽다. 리얼 범죄 팟캐스트에 몇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가상 작업의 단조로움에 일시적인 만족감을 주는 아드레날린 해독제이다. 가족과 함께 가치 있는 대화를 나누는 대신 인스타그램 릴(Reel)이 제공하는 정치 드라마의 토끼 굴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치 내가 역사의 올바른 편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내 정신 건강과 내 공동체에 초래하는 피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정보 소비 행태는 주로 혼자 이뤄진다. 둠스크롤링은 굳이 육체를 갖춘 인간과 구원의 관계를 맺는 복잡하고 헌신적인 작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뉴스를 시청하다 보면 애초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벗어나게 된 과거의 절망에 다시 빠지고,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그 절망이 더 깊어지기도 한다. 시청에서 행동으로무력하게 멀리서 지켜보는 대신, 이사야 58:10-11에 귀를 기울이자.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라고 하신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우리가 부름 받은 건 단지 배고픈 사람들을 돕자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포스팅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바램을 보며 답답하다며 고개를 흔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을 쏟아부음으로 궁핍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부름받았다. 타인의 불행을 보다 보면 종종 두려움과 우울함이 생기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울 때 주님은 모든 우울함을 밝게 하시고, 계속해서 인도하시며, 나아가서 우리의 소망까지 만족시켜 주신다. 우리가 만족을 찾아야 할 행동은 스크롤링이 아니라 진짜 봉사이다. 하나님이 끊임없는 주시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흐름 이상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이야기로 초대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의 필요에 부응할 때 우리에게 정신적이고 영적인 복지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육체적 필요를 채우며 고통과 싸울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감정적, 영적 어려움을 만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시고 우리가 기쁨의 증언을 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결코 뉴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취약계층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는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비극은 결코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극은 단지 인간의 죄가 모든 개인과 사회에게 어떤 끔찍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지 주변 고통에 대한 정보를 알라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그 고통 속으로 발을 디디라고 부르신다. 성령의 열매를 고려하라어떻게 해야 주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돕는 방식으로 정보를 접할 수 있을까? 일단 뉴스 소비가 우리 삶에 어떤 열매를 맺는지 생각해야 한다. 게시물을 스크롤하고, 기사를 읽고, 또 팟캐스트를 들을 때 당신 속에 일어나는 반응에 주의를 기울이라. 거기에 성령의 열매라는 특징이 있는가(갈 5:22-26)?• 이웃 사랑•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 당신의 삶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여부에 달린 평화• 학습 과정에서 필요한 인내심• 행동에서 드러나는 친절• 의롭고 겸손한 마음에서 나오는 선함• 봉사하는 데서 드러나는 신실함• 마음과 몸의 한계를 향한 너그러움• 더 많이 알고 싶은 욕구에 대한 자제력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도리어 두려움, 불안, 죄로 특징지어진 반응이 주로 나타난다면, 당신의 뉴스 소비 습관은 재고되어야 한다. 보니 크리스티안은 Untrustworthy에서 단지 정보를 얻는 것보다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공부하는 자세를 갖는다는 건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이 모든 걸 다 잘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굳이 모든 헤드라인을 다 읽으려고 하지 말고, 적은 수의 기사를 깊이 신중하게 읽으라는 충고이다. TV 뉴스, 앱 알림, 일일 뉴스 요약 이메일의 단식부터 시작하라. 적어도 몇 주 동안 소음을 제거하고 이런 변화가 당신의 관계, 기분 및 불안 수준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하라. 그리고 시간을 내어 성경을 읽으라. 일기를 쓰고, 기도하고, 또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며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나눠 보라. 혹시라도 더 개선하거나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는지 알아보라. 이 모든 과정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와 돕는 손길과 재정을 어떻게 바치라고 요구하시는지를 고민하라. 그런 다음에 뉴스 피드를 새롭게 구성하라. 당신은 이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새롭게 정보를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주제에 대한 온갖 정보를 다 얻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오늘 터지는 뉴스와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영원한 구원 스토리의 일부가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 사역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원제: Tragedy Isn’t for Consump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파괴되기 전에, 다시 세워야 한다
by 전재훈
2024-04-01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보게 되는 표지판이 ‘아시안 하이웨이’다. ‘일본-한국-중국-인도-터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는 아시안 하이웨이 1번 도로이며 6번 도로의 경우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릉-원산-청진으로 북상해 블라디보스토크-이르쿠츠크-모스크바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지만 북으로는 철책이 놓여 있어 일본처럼 섬이나 다름없는 형국이다. 자연스레 이 땅의 젊은이들은 세계관이 다른 나라에 견주어 좁은 편이다. 하지만 이 하이웨이가 개통되고 오토바이 타고 유럽을 갈 수 있게 된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젊은 친구들이 꿀 수 있는 꿈의 크기가 달라지고 세계관의 스케일이 달라진다. 미국은 50년 동안 달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달에 깃발 꽂고 사진 한 장 찍은 것이 전부였다. 이것마저도 사기라며 음모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개의치 않고 달 탐사에서 한 발 더 나가 화성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달 탐사 프로젝트가 가져온 결과는 비단 사진 한 장만이 아니다. 달에 가기 위해 극도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무수히 많은 기술적 진보를 이뤄냈고, 그 혜택을 우리가 누리며 살고 있다.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혔고, 이는 다양한 문화적 확장을 이뤄냈다. 스타워즈의 시대를 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인식의 한계를 지닌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듣고, 보고, 느끼는 세계는 매우 좁다.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너무 멀리 있거나 혹은 매우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보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의 귀는 20~2만 헤르츠 사이의 주파수대에서 소리를 듣고, 우리의 시야는 120도를 넘지 못한다. 0.03초 이내의 순간은 전혀 볼 수도 없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는 우리의 한계 속에서 규정된 세계였다. 하지만 과학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매우 넓어진다. 광학 현미경으로 나노 크기의 원자를 보고, 천체 망원경과 우주탐사선으로 도움으로 화성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소리는 키워서, 큰 소리는 줄여서 들을 수 있는 기계들도 많다. 야간에는 적외선 탐지기로 어둠 속을 보고, 엑스레이나 MRI로 몸속을 볼 수도 있다. 배 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 소리를 듣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손가락을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분명 더 확장된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SNS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앞집 아저씨의 근황은 몰라도, 인도에서 선교하는 친구의 근황은 잘 안다.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무한대로 넓어졌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선물도 받았다. 페이스북의 친구들을 파도타기 하면 불과 다섯 번 만에 전 세계인을 다 만날 수 있는 시대다. 번역기는 언어의 한계를, 구글은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준다. 지금까지의 과학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앞으로 수년 내에 펼쳐질 미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지금 상용화를 앞둔 다양한 기술들은 불과 1, 2년 전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술들이다. 과학이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이는 삶의 편의성만 증대시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사고의 변화를 일으킬 것이고, 세계관의 변화를 이끌게 되며, 가치관의 혼돈도 생겨날 것이다. 과학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신학과 철학이 인간의 생각을 주도해 왔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철학적 사고보다 과학적 사고가 더 환영받는다. 어떤 신이 참 신인가에 대한 논쟁은 신이 있기는 한 것인가의 논쟁으로 바뀌었고, 진부한 싸움은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살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신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대가 되었다. 이런 생각들은 다시 한번 변화의 기회를 맞고 있다. 화성탐사프로젝트로 빅뱅이론이 근간부터 흔들리고 있다. 원자 단위로 물체를 분리 추출하는 기술은 물체 에너지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를 정리하고 데이터하여 미래를 예측하고 선도하는 기술은 이미 가동 중이다.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자동차는 양산을 앞두고 있다. 3D 프린터는 가정용으로 만들어 판매되고 있다. 화상캠을 통하여 집에서 교회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제어하며, 미국 출장 가서 한국 집에 있는 보일러를 조작할 수 있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대화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공간과 시간 안에 갇혀 있던 우리의 생각들은 무한의 세계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4차원’이라는 말이 더 이상 바보를 뜻하는 말이 아닌 진보적이며 창조적인 의미로 바뀌고 있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은 더 이상 설 곳을 잃어가고, 엉뚱한 상상은 인류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가고 있다.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말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쇄술의 발달로 종교의 울타리가 무너졌듯, 다가올 미래는 신학의 파괴를 부채질할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종교적 마인드로는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설득력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AI가 인간을 대체하기 전에 재림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묶어 두었던 종교적 세계관, 가치관, 인간관, 신관을 모두 재정립해야 한다.
‘영적 예배’의 참 의미는
by 최창국
2024-03-29
바울이 말한 ‘영적 예배’(롬 12:1)는 기독교 예배의 정신과 목적에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로마서 12:1의 ‘영적’이라는 단어는 ‘로기코스’(λογικός)를 번역한 것이다. ‘로기코스’는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이 단어는 ‘합리적’(개역판), ‘영적’(RSV, 개역 한글판, 새번역), ‘마음과 심성으로 드린’(표준새번역, 표준 신약성서)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또한 여러 번역서가 ‘이성적’(KJV, STV, NBG)으로 번역하고 있다. ‘로기코스’는 동사 ‘생각하다’와 명사 ‘말씀’과 관계가 있는 단어로 어떤 것의 참되고 핵심적인 본질에 부합한다는 의미의 ‘진정한’을 뜻하기도 한다. NEB 성경은 그 형용사의 다중적인 의미를 담아 ‘지성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로 번역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로기코스’를 이성적으로 번역하여 ‘영적 예배’가 아니라 ‘이성적 예배’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더라도, 여기서 이성적이란 의미는 이성 그 이상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한 예배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는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어떤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에 의해 변화되고 갱신된 정신을 가진 이들이 드리는 믿음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즉, 영적 예배는 이 시대의 가치, 태도, 행동, 삶의 방식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삶과 관련된다(롬 12:2).분명히 ‘로기코스’는 단순히 ‘이성적’으로만 번역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로기코스’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비유적’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에서 몸(σώμα)을 비유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로기코스’도 비유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몸을 전인적이고 영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듯이, ‘로기코스‘도 ’영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바울은 영적 예배를 우리의 몸, 즉 전인을 드리는 예배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명사 ‘예배’는 ‘섬김’(service)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의식(儀式)과 의무라는 뜻 모두를 내포한다. 따라서 여기서 예배란 우리가 흔히 이해하고 있는 예배 의식이나 행위만이 아니라 삶과도 관계된다. 이 단어의 이중적 의미는 우리의 예배 의식과 일상의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뿐 아니라 삶의 행동과 봉사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응답하는 형태들임을 상기시켜 준다.바울은 영적 예배를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과 잇는다. 필립스 의역본은 그 구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변 세상이 당신을 틀에 박지 못하게 하라”(롬 12:2). 따라서 영적 예배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즉 이 세대의 문화와 가치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를 추구하는 삶이다. 영적 예배는 이 세대의 물질주의와 부도덕성과 잘못된 사고방식과 수단을 거부하는 삶과 관계된다. 중요한 것은 바울 시대를 전후한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그 시대의 물질주의와 부도덕한 삶을 거부하고 거룩한 또는 건전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기독교 초기에 그리스-로마 사회의 종교는 신과 관계된 의례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윤리적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다. 그 당시 사회에서 종교는 “신전과 제단, 사당에서 거행되는 제사와 제의적 활동, 그리고 특정한 축일을 준수하는 책무가 대부분이었다”(래리 허타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200). 그러나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 사상의 발전과 함께 윤리적인 삶을 종교와 결부시켰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한다고 가르치며 실천했다. 2세기 말에 이교도와 기독교도 간에 벌어진 논쟁에서 기독교의 대변인이었던 옥타비아누스가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 하면서, 그 원인이 건전한 삶의 방식이라고 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87에서 인용). 초기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사회 안에서 건건한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옥타비아누스의 고백이 증명해 준다. 예배와 사회적 실천은 상호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배의 실천과 사회적 실천을 분리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적은 종교적인 신뢰를 갖게 하는 본질적인 요인이었다. 실제로 램지 맥멀른은 “눈에 보이는 신적 역사”가 엄청난 개종의 이유가 되었다고 하였다(Ramsay MacMullen, Paganism in Roman Empire, 126). 그리스-로마 사회의 이러한 종교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갈 때, 어느 종교 공동체보다 그리스도인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존율이 높았던 것을 기적으로만 말할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당시 다른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은 전염병 환자를 멀리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환자를 적극적으로 간호하며 보살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병자를 낳게 한 것은 단지 그리스도인들이 환자를 위해 올린 기도 덕분만이 아니라 참을성 있게 떠다 먹인 수프 덕분이었다(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142). 이처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영적 예배로서 거룩한 삶을 일상에서 신실하게 실천하는 공동체였다.로마서에서 영적 예배를 강조한 바울도 거룩한 삶의 실천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관계시킨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특히 남성들에게 그들의 색욕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다스리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행동하지 말라고 권면한다(살전 4:4-5). 당시 이교도 문화에서 ‘포르네이아’ 즉 간음은 여성이 몸을 파는 행위인 매춘을 의미했지만, 바울은 포르네이아를 혼외정사로 이해하고 가르쳤다.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아내에게는 보통 결혼 생활 중에 정조를 지킬 것을 엄격히 요구하였지만, 남편들은 상당히 자유로웠다. 남편들은 유부녀나 자유민 출신의 처녀와 성관계를 맺는 일은 용인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성행위는 구애받지 않았고 심지어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사회에서 여성, 특히 아내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함과 존귀함”의 기준을 남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 당시 지배적인 이중 잣대의 성문화에 도전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남편들에게 성관계의 대상을 아내로 한정하고 아내를 명예롭게 대할 것을 요구했다(살전 4:4-5). 이 구절에서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신을 섬기는 용도로 준비된, 이를테면 제단이나 제의 용구 같은 신물이라든가 사제를 수식하는 용어다“(래리 허타도,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204-05). 이는 거룩한 삶과 신을 섬기는 제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바울에게 남자들의 거룩한 성생활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표지 중의 하나였다. 즉, 바울이 가르치는 핵심은 남편과 아내 사이의 바른 성적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는 거룩한 삶과 거룩한 제사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깊은 차원에서 거룩한 삶이 거룩한 제사, 즉 영적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예배는 거룩한 삶의 형성과 관계된다. 영적 예배는 어느 한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다. 영적 예배는 십자가를 아름답게 장식해 놓은 공간이나, 화려한 현대식 시설을 갖춘 건물이나, 찬송이 큰 소리로 울려 퍼지는 기도원 같은 특별한 장소나 행동이 있는 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주일 예배도 영적 예배에 포함된다. 따라서 영적 예배가 거룩한 삶과 관계된다는 의미가 주일마다 함께 드리는 공동체 예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매주 드리는 주일 예배와 영적 예배는 서로 순환 관계 안에 있을 때 서로를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의 부활은 더더욱 ...
by Steve Bateman
2024-03-28
마크 트웨인이 믿음(faith)을 설명한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believe) 것.” 그는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그런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럼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그들은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믿는 걸까, 아니면 증거 때문에 믿는 걸까? 오늘 그 점을 살펴보자. 게다가 지금 이 시점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주장에 대한 몇 가지 증거를 고려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3월의 이데스(Ides of March, 3월 가운뎃날—에 수십 명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그날로부터 거의 77년 후인 서기 33년 4월 5일 일요일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역사가가 과거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는 네 가지 관행을 따르면 우리는 두 사건 모두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1. 두 가지 방법의 구분과학적 방법은 관찰을 기록하고, 가설을 세우고, 예측하고, 반복 가능한 실험을 수행하고, 결과를 분석한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한 반복 실험이 불가능하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1월에 루비콘 강을 건넜다거나, 조지 워싱턴이 1776년 12월 25일에 델라웨어 강을 건넜다거나,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에 영국 해협을 건넜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합리적인 사람은 이러한 사건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역사적 방법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다.역사가 루이스 고트샬크(Louis Gottschalk)는 역사적 방법을 “과거의 기록과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양심적인 역사가’는 개인적인 편견을 버리고, 문서를 연구하고, 유물을 조사하고, 사실을 수집하고, 증거를 따른다. 귀추법(Abductive reasoning)을 통해 역사가는 사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설명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주장이 있다. 과학에 호소하여 이 주장을 거부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다”(고전 15:14)라고 인정했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역사적 방법을 통해 검증과 반증이 가능하다. 2. 두 간격의 조사먼저,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이를 보고하는 원본 원고 사이의 간격을 조사한다. 이 간격이 짧을수록 작성자는 실제 사건에 더 가깝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암살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과거 사건을 믿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 사실을 믿는다. 목격자들은 눈으로 본 사실을 썼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많은 사람이 카이사르의 암살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고등학교 때 1599년에 초연된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를 읽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출처는 토마스 노스(Thomas North)가 1579년에 영어로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Parallel Lives)이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암살 후 약 160년이 지난 서기 2세기 초에 가서야 그 책을 썼기 때문에 목격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출처는 누구였을까?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기(Gallic Wars)를 일부 자료의 출처로 사용했다. 카이사르야 당연히 당사자로서 암살의 목격자였지만, 그가 거기에 관해서 글을 쓰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마도 키케로가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운명적인 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채 일 년 후에 죽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사건의 살아 있는 목격자를 접할 수 없었지만, 로마 사회의 저명한 구성원으로서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는 없는 여러 문서와 구전 전통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카이사르의 암살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본 문서 사이의 간격은 약 160년이다. 이에 비해 신약성경은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과 그 가까운 동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죽은 지 160년 후에 글을 쓴 반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빈 무덤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두 가지 핵심 주장을 확인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목격자들의 생애 동안에 글을 썼다.서기 50년에 이미 바울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기록했다(갈 1:1). 예수께서 서기 33년에 죽었다면, 부활과 이를 보고하는 최초의 원본 사본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20년 미만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대 역사의 표준이 되는 플루타르코스나 신약성경 작가가 쓴 원본이 없다. 그래서 두 번째 간격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원본 원고와 현존하는 원고 사이의 간격이다. 역사적 방법은 텍스트 비평을 사용하여 (손으로 쓰인) 현재의 사본을 검토하여 원본을 재구성한다. 이 간격은 짧을수록 좋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본 원고와 우리 손에 들린 가장 초기 원고 사이의 간격은 무려 800년 이상이다. 거기에 비해서 요한복음의 원본 사본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요한복음 사본 조각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50년이다. 신약학자 대럴 복(Darrell Bock)의 결론이다. “복음서는 예수와 카이사르에 관해 출처 간격의 증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른 어떤 고대 기록과 비교해도 뛰어나다. 고전과 카이사르 연구에 효과가 있는 연구 방식을 예수의 기록에 적용한다면, 예수의 기록은 신뢰성이 탁월하다.” 3. 두 숫자의 비교법정에서 믿을 만한 증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처럼, 사본도 많을수록 좋다. 아무리 신실한 증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보지 못한 세부 사항을 생략할 수 있고 또 봤다고 착각하는 세부 사항을 추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증언을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주변적인 세부 사항에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의 요지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 사본의 수를 다른 고대 문서와 비교하면 신약성경이 가진 역사적 증거의 우월성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은 다양한 부분을 망라하는 23,986개의 사본을 가진 것에 비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경우에는 사본이 채 열 개가 되지 않는다. 이건 엄청난 숫자의 차이이다.신약성서 학자 댄 월리스(Dan Wallace)는 현존하는 신약성서 사본들을 모두 합쳐서 쌓으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4개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조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고대 그리스 작품의 경우에 모든 사본을 다 쌓아도 높이가 1미터를 조금 넘을 뿐이다. 4. 두 동기의 검토원본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재생산 기록이 많더라도 작성자가 진실을 보고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날조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또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플루타르코스 시대에 카이사르 암살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평판이나 사회적 지위에 해를 끼칠지 모를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글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사회 엘리트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였을 뿐이다. 그는 역사적 주장을 글로 써서 당시에 오늘날의 베스트셀러 계약에 버금가는 이익을 얻었다. 그는 잃을 것이 거의 없었고 얻을 것이 많았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진실 아니면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굳이 그들이 왜 거짓말을 할까? 그들의 대담한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정치적으로 위험했다. 목격자의 증언(행 1:22)으로 인해 그들은 지위와 부, 자유를 잃었고 어떤 사람은 생명까지 잃었다.역사가는 그러한 고통을 문서의 신뢰성에 대한 논거로 간주한다. 고트샬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술이 증인, 그의 사랑하는 사람 또는 그의 대의명분에 해를 끼치는 경우 그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과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큰 해를 끼쳤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그들의 증언을 가장 설명하는 방법은 그들이 진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광신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해서 죽을 사람은 있어도 거짓임을 알면서 죽을 사람은 없다. 그들은 부활이 이익을 준다는 이유로 증언한 게 아니다. 부활이 사실이었기에 증언했다. 3월의 이데스를 기념하는 역사학자가 몇 명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은행조차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부활절에 모든 대륙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할 것이다. 카이사르는 세상에 율리우스력을 주었지만, 1세기에 목수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우리에게는 연수를 계산하는 새로운 방식이 생겼다. 그건 랍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다. 그의 죽음 때문도 아니다. 예수 외에도 로마가 십자가에서 죽인 적의 숫자는 적지 않다. 2068년 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계는 이를 하나의 역사적 각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로부터 불과 77년 후,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세상은 그날을 기점으로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원제: I Believe in the Death of Julius Caesar and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그리스도인을 위한 심미안 기르기
by 서나영
2024-03-27
어린 시절부터 악기들을 다루고 듣다 보니 얻은 것은 예민한 귀다. ‘예민’의 다른 말은 섬세한 구분이 빨리 가능한 상태다. 초등학교 때는 3년간 베이스 리코더로 리코더부에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소리만 들어도 아는 텅잉 기술과 섬세한 핑거링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3년간 현악부에서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는데, 포지셔닝의 손가락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음색, 활털의 재질, 브릿지가 정확한 위치에 놓여 음이 울리는지, 심지어 연주자 팔 길이에 따른 다이나믹 차이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다룬 피아노는 물론, 기타는 음색만 들어도 대충 어떤 회사의 제품인지 구별이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리움미술관의 상설전시관을 자주 들여다 보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달항아리가 왜 모조품인지 지나가는 화면 찰나에도 구별이 가능해졌다. 많은 경험과 감상의 시간들은 구별할 수 있는 감각을 선물해줬다.‘심미안’이란 ‘아름다움을 살피는 안목’을 말한다. ‘안목’이라는 단어는 눈의 보는 활동을 넘어 “포괄적으로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을 의미하고, ‘살핀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가 개입되는 적극적 행위를 뜻한다. 즉 심미안을 풀어 이야기하면, 아름다움을 분별하고 애써 찾으려는 열정적인 눈과 귀와 그 외의 감각적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심미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에게 무척 어울리는 단어다.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사람들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주했던 성경인물들은 그를 향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했고, 거룩의 내적 의미는 ‘다르다’라는 사실에 대한 감탄이다. 그분을 어떤 식으로든 마주하면 죄로 타락한 ‘우리와는 다르다’라는 구별이 가능해진다(이사야 6장). 구별된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다름과 차이에 민감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사는 그들의 삶은 세상과는 다르다. 전인격적 영역을 포함하며, 가정과 일터와 사회와 나라 속에서, 그리고 모든 관계와 행위와 선택들이 세상과는 구별된다.개혁주의 기독교 전통은 가톨릭 신학자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의 ‘신학적 미학’의 역사를 애써 외면해 왔다. 아름다움은 감각의 영역이라 신학의 영역에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지금도 거두지 않았다.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을 변호해 보자면, 가장 큰 이유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 감정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인류를 대표하는 화가인 반 고흐(Vincent can Gogh)나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Johann Sebastian Bach)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들의 작품이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반 고흐는 사후 15년 뒤에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열린 회고전(1905)을 시작으로, 바흐는 사후 100년 후 멘델스존의 마태수난곡(바흐, 1729 초연) 재연(1829)을 계기로, 지금까지 꺼지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된다. 즉,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감상자의 맥락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며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된다는 것에 그 복잡함이 있다. 맥락에는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 개인의 믿음과 취향과 세계관이 포함되어 있어 추적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어떤 아름다움은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지, 왜 역사는 특정한 작품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분석하는 것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아름다움에는 익숙하지만, 인간이 만든 예술을 대할 때의 태도와 취향은 극과 극을 오간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심미안이라는 단어가 가능한 말인지를 늘 의심받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심미안 형성은 중차대한 일이다.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감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이해하길 거부하는 사람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 심미안은 순례길에 있어 장식품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것들도 꼼꼼하게 볼 수 있고, 다름과 차이에 그 누구보다 민감해지는 것, 그 길은 그리스도인이 걸어가는 성화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심미안,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눈으로 분별하여 아름다움을 찾는 눈은, 섬세한 훈련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꼭 가져야 하는 눈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심미안이라는 바다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떻게 도달해야 할지 큰 강줄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시작은, 순금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노를 저어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열망은 세례받은 심미안 시작의 모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잊지 못할 장면들이 있다. 그중 예전 한 미국의 다큐 프로그램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 가운데 트럭에 매달려 목숨을 담보로 레이싱을 즐기던 한 소년의 인터뷰가 기억난다. 마약 기운에 초점 없는 눈빛을 하고 “I’m Christian”(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한 장면이다. 그 외에도 많다. 평생에 새벽예배도 빠지지 않고 온갖 헌신과 봉사로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한 여집사님이, 14년간 이어온 불륜 내연남과 호텔에서 심정지로 사망한 참담한 사고의 기억이다. 설교 강단에서 몇십 년을 가르쳤지만 동성애를 지지하고 애완견에게 세례를 주는 목사들이 존재하는 등의 놀라운 경험들이다. 후에 세계관에 관한 공부는 내가 놀랐던 이유를 꽤 명확하게 말해줬다. 현대사상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 안에 ‘섞여 있는 세계관들’이 그 이유다. 성경의 진리 말고도 동양의 범신론적 일원론 사상, 유신론적 실존주의 사상, 자연주의 이신론 사상,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 등 다른 믿음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바알을 섬겼던 고대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처럼, 한 사람 안에 두 마음 세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약 4:8). 이러한 세계관의 공존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일에 정함이 없게 만든다(약 1:8), 그리스도인 속에 숨어서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그만큼 분별이 힘들다는 이야기다. 선과 아름다움으로 가장한 죄악의 은밀한 공존은 남도 자신도 특별한 노력의 시선이 아니면 알아챌 수 없다.성경의 진리와 함께 갖가지 다른 세계관들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먼저다. 연단의 과정을 거쳐 정금같이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기를 바란다. 죄가 세련된 멋으로 가장해 가짜 아름다움을 진짜라고 믿게 하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최근 제임스 사이어(James W. Sire)의 유작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개정 6판이 출간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성경의 진리를 지키고자 쓴 (대학 축제 비판에 관한) 작문 과제물에 대해 F 성적을 받았던 한 학생은, 후에 기독교 세계관의 순전함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사이어와 같이 순전한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옥같은 학자들의 책들이 많이 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장해 매섭게 파고든 현대사상들을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외의 다른 사상들을 쪼개어 다듬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번째는 훈련된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모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 기독교 예술학과가 개설되고 학생들을 뽑을 때, 첫 번째 조건은 예술에 대한 학위가 있는 자들이었다.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이해를 위해 읽어야 하는 문헌들의 양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한 ‘예술적 심미안’이 어느 정도 길러진 사람을 뽑겠다는 심사였다. 그러나 공부를 하며 마주한 사실은 어차피 감당하지 못할 양의 문헌들이 평생을 괴롭힐 것이라는 슬픈 진실이었다. 머리를 쥐어짜며 고군분투한 세월에서 내가 다다른 결론은 “많이 경험한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이었다. 평생을 미술관을 다니며 얻은 심미안을 엿보고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의 글을 외우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대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죄로 가득한 세상은 탐욕의 엔진으로 돌아간다. 채워지지 않은 갈망으로 한 우물을 팠던 사람들의 경험을 읽어라. 그리고 경험해야 한다면 그 안에서 선별해서 경험하기를 추천한다. 그리스도인은 게걸스럽게 모든 세상 문화 예술 콘텐츠를 즐기고 경험할 시간이 없다. 구별하는 시각을 갖겠다고 매력적인 모든 것을 깊숙이 자세히 경험하고자 하면 너무 많은 죄악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결국 탐욕의 주인이 될 확률이 높다. 예술 세계의 마지막은 소유다. 소유만이 만족을 주기 때문에 결국 세례받지 않은 심미안의 끝은 원작을 끊임없이 소유해야 하며, 라이브로 들어야 만족을 느끼고, 거창한 건축물을 지어내야만 만족의 마침표를 찍는다. 이런 소유의 과정은 심미안을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브레이크를 걸 수 없다면 덕이 되지 않는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많은 세계관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이 아닌 다른 사상들은 최대한 간단히 핵심만 보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지혜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심미안을 훈련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러한 절제가 필요하다. 잊으면 안 된다. 작은 십자가라도 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마지막 큰 줄기는,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다. 아름다움은 늘 감춰져 있다. 그 숨은 의도를 발견하고 감춰진 내용을 들춰보는 것이 심미안의 묘미다. 그리고 어떤 아름다운 작품을 대하든 그 숨겨진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은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자만 획득할 수 있다. 음악, 미술, 댄스, 사진, 영화와 드라마, 시와 소설, 건축 등 수많은 영역의 예술이 존재하고 각자 다 다른 색과 맛의 미학적 노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본질을 파헤치기를 원하는 자, 성경을 열정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와 손을 통해 주신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성경은 쉽지만 어려운 말씀이다. 누구나 명확하게 복음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지만, 알수록 깊어지며 수많은 연구와 묵상의 과정이 필요한 책이다. 살아 있는 거룩한 언어가 문자로 남겨져 있는 것이 성경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본질을 파헤치는 자만이 그 안의 생명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 빛과 색과 소리와 움직임은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로 모두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데, 실로 생명의 아름다움은 실존하는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일차로 하나님으로 말씀으로부터 온다. 많은 버전의 성경을 읽어보고, 충분히 묵상하며, 쉬운 주석부터 통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이 되기를 기도하라. 심미안을 가장 온전하게 형성해 가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 될 것이다. Soli Deo gloria!
설교자여, 쉼 없이 회중을 사로잡는 설교를 갈망하라
by Trevin Wax
2024-03-26
몇 주 전, 나는 The Keller Center 설교 섹션에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모서리를 찾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모서리를 찾는 것은 다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성경 본문 속 전제, 태도 및 적용이 우리가 세상에서 “상식”으로 간주되는 요소와 어떻게 대조되는가? 이 본문이 세상적 또는 삶의 사고방식과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지점이 어디인가? 모순이 가장 날카롭게 부각되는 곳은 어디인가? 모서리 탐구는 설교자가 지나치게 길고 종종 지루한 설교에 안주하지 않고 교인들의 관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설교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거나 모서리를 찾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을 타협의 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인의 유익이라는 미리 정해진 조건에 따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여라도 이런 접근 방식이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하는 것보다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의미일까?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에 기초하여 설교를 작성하는 건 아닐까? “구도자에게 민감”해지도록 성경의 거친 부분을 깎아내거나, 설교를 “매력 있게” 만들려고 노력함으로 설교자로서의 신념을 희생하는 건 아닐까? 이런 우려를 함부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신약성경에도 가려운 귀를 만족시키려는 유혹을 받는 목회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제쳐두고,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정치 또는 사회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결집하려 하거나, 복음과는 동떨어진 조언이나 제공하면서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설교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교인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설교의 목적이 인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것이라면, 그런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얕고 피상적으로만 파악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견고하고 성경에 충실한 설교가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 리는 없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고, 내용의 심각성이 어조에 잘 반영되도록 열정을 담아 전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주석가의 영원한 관심사였으며 지금도 그렇다.유창함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On Christian Doctrine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애정의 표현이라고 해서 반드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다. … 또는 반드시 다양한 담론이 듣는 이들이 짜증 내지 않고 주의를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 동경하거나 회피하게 하는 마음을 만드는 것은 발명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존 카바디니는 그의 글 “The Sweetness of the Word”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주요 목표는 단지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건전한 가르침”을 제시받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단순히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르침이 “지혜”롭거나 “건전”한 경우라면, 거기에 유창함이 더해지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설득이 목표가 아니라면 연설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다. 몸을 더 강하게 만들지 않는 운동, 접시가 절반만 찬 식사, 쓴맛 때문에 환자가 삼킬 수 없는 약 등등, 이 모든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학적 비유를 사용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달콤하게 말하고, 현명하게 말하는 사람은 건전하게 말한다. … 그러나 치유의 힘이 있는 달콤함, 혹은 달콤한 치유의 힘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단맛을 더욱 간절하게 갈구할수록, 치유의 힘은 더 쉽게 발휘된다. 유창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찬사는 교만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교인들이 “저 설교자 참 대단하지 않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더 잘 알고 진리와 더욱 사랑에 빠지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쉼 없이 흥미로울 것나는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몇 년 전, 나는 우리 교회에서 초대 목사로 섬겼다. 2021년부터는 두 번이나 임시 목회직을 맡아 주간 메시지를 전했고, 또 전국 각지의 여러 교회나 콘퍼런스, 대학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어디에서 설교하든 내 목표의 하나는 설교가 시종일관 흥미롭게 하는 것이다. 설교가 너무 흥미로워서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게 힘들게 하는 것, 그러면서 그들이 계속해서 성경 본문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설교가 쉼 없이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딴짓하는 게 집중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잘한다는 건 아니다. 이 목표가 쉽지 않기에 나는 되도록 설교를 길게 하지 않는다. 이삼십 분 정도면 목표를 달성할 거 같지만(물론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삼십오 분을 넘기면 아주 힘들어진다. 설교 길이에 관해서 물었을 때, 한 설교학 교수가 말했다. “정해진 길이는 없습니다. 교인들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설교하세요. 그런데 기억하세요. 설교자들 대부분이 자신이 실제보다 교인의 집중력을 십오분 정도 더 오래 잡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의 하나는 신뢰할 수 있는 몇몇 출처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피드백 없이 발전은 힘들다. 교인들이 당신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신이 과연 교인들의 주의력을 붙잡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과의 만남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기에 설교 내용과 전달은 중요하다. 존 스토트는 모든 설교자의 열망에 대해 이렇게 썼다.설교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경험은 설교 중간에 회중에게 임한 이상한 침묵을 목격하는 것이다. 자던 사람이 깨어나고, 기침하던 사람이 기침을 멈추며, 산만하던 사람이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눈도 또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듣고 있지만, 그들이 귀를 기울이는 대상은 더 이상 앞에 선 설교자가 아니다. 어느새 설교자는 잊히고, 교인들은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팀 켈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설교가 기록할 가치가 있는 통찰로 가득 차야 한다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설교에 펜과 메모지를 다 제쳐두고 우리의 구원을 이룬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경외에 차서 멍하게 만드는 지점이 없다면, 결국에는 실패한 설교이다.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는 이렇게 상기시킨다. 설교를 듣는 것은 강의 듣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당신은 그의 영광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그에게 집중하고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다시금 주목하자. 사람들을 휘어잡지 못하는 설교는 자격이 없다. 우리가 정말로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길 원한다면, 설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영광을 보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영광에 걸맞은 설교를 하자.원제: Preachers, Aspire to Be Relentlessly Interest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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