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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
by 정현구
2022-07-29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과 하나님 나라]①기도, 타인을 향한 자비의 실천ⓩ주기도문,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③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④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문제의 뿌리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는 기도다. 기도의 제목이 많을 텐데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다스림’을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구해야 할 핵심적인 기도 제목으로 가르치셨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바로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잘못된 뿌리에서 수많은 죄악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열매의 종류는 많지만 뿌리는 하나다. 그 하나의 뿌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불순종이다. 문제의 핵심인 뿌리를 해결해야 참된 응답이 주어지기에,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는 것이다.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알려주는 책이다. 죄의 시작을 다루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을 보면 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에덴동산이 나온다. 에덴동산은 단순한 동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초기 모델이다. 그곳에 다스림을 받는 백성으로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하는 땅인 에덴이 있었습니다. 그 땅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하는, 선악과 명령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다. 그런데 아담이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서 먹는다. 선악과 사건의 의미는 이렇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다. 선악과를 금지한 명령은 마치 하나님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기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구분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입법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행위다.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했기에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처럼 인간 죄의 뿌리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에 대한 거부와 반역적 독립 선언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똑같은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인격적인 신 앞에 기도한다는 의식이 약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 주로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외움으로 신이 기도를 꼭 들어주게 만들고자 하는 일종의 종교적 주술을 행했다. 이것이 ‘중언부언’이다. 이것은 인간이 기도로 신을 조종해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이렇게 종교에까지도 깊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신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면, 인간 문제를 푸는 핵심은 그 뿌리를 뽑아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근원적 기도를 가르치셨다고 할 수 있다.진정한 응답주기도문은 기도의 진짜 응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내 삶의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응답받은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생각해보자. 기도를 했더니 내게 필요한 양식이 주어졌다. 표면적으로 기도가 응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일에 대해 염려한다면, 아직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경제적 삶의 현실을 다스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보살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경제 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우리는 물질이 많음에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욕망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비록 일용할 양식이 풍족하더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물질이라는 땅을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물질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물질을 기꺼이 사용할 수 있다면, 그때 그는 물질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의 참 응답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경제 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용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의 가르침의 핵심은 “내 죄를 용서해 주소서”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하게 해주소서”의 기도다. 사실 남을 용서하는 것 만큼 어려운 것도 많지 않다.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쉬운데, 남의 죄를 용서하게 해달라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에 감격하고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온전한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기도의 진짜 응답은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의 엄청난 무게와 은혜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을 받아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갈등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는 진짜 응답을 받은 것이다. 바로 그의 삶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다.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는 위로 하늘의 다스림을 받는 것, 둘째는 아래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 삶의 현실을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내용이자,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전부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는 것종종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가 딛고 있는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사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창세기의 인간 창조 기사를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굉장히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음을 볼 수 있다. 창조 세계는 어마어마하며, 볼수록 기가 막힌 세계다. 그런데 이 창조 세계가 창조의 절정인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만들었으니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을 닮는 것이었다. 창세기 1:26은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에서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고 하여 의미를 둘로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성경신학이 발전하면서 이 의미가 보다 뚜렷해졌다. 창조 세계 가운데 하나님은 왕 중의 왕으로 계신다. 그 왕이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드셨다. 하나님을 대신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 즉 인간을 하나님을 대리하는 작은 왕들로 만드셨다는 것이다.고대 사회는 황제를 신의 형상이라고 불렀다. 오직 황제만이 신의 형상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이었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으니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생각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시대에는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고, 인간은 하나님이 할당한 일정한 영역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청지기이다. 인간은 자기의 땅에서 죄에 지배당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다스리는 왕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다스림을 받아 다스리다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처럼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일까? 하나님께는 그분보다 높은 존재가 없다. 하나님 위에 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왕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인간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에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능력의 다스림을 받아 삶의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왕 노릇 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대로 사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을 삶의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삶이 굉장히 힘들고 고달파, 순간순간 여러 상황과 그 상황이 주는 감정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자비와 은혜로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다스림을 받게 되면, 어려운 상황과 염려가 밀려올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면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삶이라고 해도 그 바다를 딛고 가는 왕처럼 살아갈 수 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계명을 지키는 길십계명도 살펴보자. 십계명 중에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십계명을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의 계명으로 읽지만, 사실 십계명이 그렇게 쓰인 것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다 보니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부정적인 명령어를 사용했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거짓말하지 말라”에서 끝나지 않고, “참을 말하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라”와 같은 적극적인 명령까지 그 속에 포함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역시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칼뱅이 십계명 주석을 굉장히 길게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이 성화되어갈 때 중요한 도구가 십계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소극적 명령에 한정하면 지키기 어렵지 않을 것같이 보이지만 적극적 명령까지 더하면 굉장히 깊어서, 제대로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그런데 어떻게 하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여섯 가지 계명이 인간에 관한 계명이다. 처음 네 가지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신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어기지 말라”이다. 이 네 가지 계명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온전히 고백하며 살게 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주기도문 전반부 내용과 같다.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에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문제가 다 들어있다. 이 계명을 어기지 않고 사는 삶이 곧 바른 삶이다. 즉 삶의 문제에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내 삶, 내 땅을 다스리며 갈 수 있다.언약궤, 하나님의 통치 의자구약에는 언약궤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스라엘 진영의 정중앙에 성막이 있었고, 성막 제일 안쪽의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는 아카시 나무로 만든 상자인데, 이 속에 십계명을 넣어두었다. 지성소 안에 놓인 이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할까? 언약궤라는 상자를 보면, 그 위에 권능의 천사를 상징하는 날개 넷이 세워져 있다. 역대상 28: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에 다윗 왕이 일어나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헌할 성전을 지을 마음이 있어.”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성전 지을 준비를 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발판인 언약궤를 봉헌하고 싶어서이다. 보통 왕의 의자가 높기 때문에 왕의 다리를 두는 발판을 둔다. 그런데 그 발판이 바로 언약궤다. 언약궤가 발판이라면 언약궤 위에 세워진 네 갈래의 날개는 왕이 앉은 의자의 다리에 해당된다. 즉 언약궤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신 왕좌가 있다는 뜻이다.언약궤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언약궤를 발판 삼아 하나님이 왕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좌에 앉아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 의자에 앉아 쉬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신다.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지성소에 하나님의 통치 의자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성전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그럴 때 너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 속에 언약궤를 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갈 때 가끔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나갔다. 언약궤를 하나님의 이동용 왕좌로 만든 것이다. 레위인의 어깨에 메인 언약궤는 백성을 승리로 이끄는 하나님의 이동용 지휘소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를 지닌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잘 받을수록 그들은 전쟁에서 이기며 강한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선한 영향력을 온 세계에 뻗칠 수 있는 제사장 민족이 된 것이다.사울과 다윗 이야기언약궤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긴 상태였다. 블레셋과 싸우다가 패배하자 엘리의 두 아들은 언약궤가 자신들을 이기게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긴다. 사실 언약궤는 요술상자가 아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언약궤 자체를 요술방망이처럼 믿고 나갔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언약궤를 빼앗기도록 하셨다. 이후 사울이 왕이 되었지만 그는 언약궤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통치하려고 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한번은 전쟁을 하고 돌아오는데, 백성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 한마디에 질투심이 화살처럼 사울의 가슴에 꽂혔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그는 결국 질투심의 지배를 받아 쓰러지고 말았다. 대단한 것에 지배받았으면 또 모르겠는데, 왕이라는 자가 고작 질투심에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사울은 겉은 왕인데, 실제로는 평생 종으로 살았다. 실제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대하게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는 굉장히 잘 사는 것같이 보여도 대부분 욕심이나 경쟁심이나 시기심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인격적 성숙도 변화도 없이 인생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왕이 되자마자 그가 행한 첫 번째 국가적 시책이 언약궤를 가져오고, 언약궤를 위한 성전을 봉헌하려는 것이었다. 언약궤를 찾아오려고 했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며 살았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 많이 처했다. 이럴 때 대다수의 인간은 그 상황이 주는 수많은 부정적 감정의 지배를 받기가 매우 쉽다. 한 인간이 삶의 최고의 경지와 최저의 경지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을까? 그가 지은 수많은 시편이 보여주듯이 다윗은 그 감정을 영적인 시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상황과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다윗이 썼던 시편들은 다윗이 여러 외적 상황, 내적 감정들과 싸워 이겨 얻은 영적 전리품에 해당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절망의 감정까지도 다스릴 수 있었다. 질투에 지배당했던 사울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다윗은 진작부터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다.이스라엘 역사이스라엘 역사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텍스트에 해당한다. 우리가 많은 민족 중 하필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참 중요하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다. 그런데 다양한 역사 중에서 원형 역사가 있다. 신·구약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은 결국 이 원형 역사가 여러 형태로 변주되면서 계속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도 전부 이스라엘 역사라는 틀 안에서 반복된다. 이스라엘 역사라는 하나의 작은 이야기에서 더 큰 본질적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인류의 역사, 전 우주적 역사까지 나선형으로 확장되어가는데, 그 원형이 이스라엘 역사인 것이다.이스라엘 역사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는 이집트에서의 역사다. 그다음은 광야에서의 역사, 또 하나는 가나안에서의 역사다. 이집트에서의 역사는 파라오의 지배를 받는 역사다. 잘못된 왕의 지배를 받는 역사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함한 하나님 아닌 존재에 지배받아 영적 의미에서 사실상 노예로 살고 있다. 죄의 노예요 죽음의 노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인간이 사실상 이집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났던 한 번의 구체적 역사이지만 영적으로는 온 세대를 통틀어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가 된다. 두 번째는 광야에서의 역사다. 출애굽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한다. 누가 주인인가? 여전히 자아가 주인이다. 자아가 주인이 되어 방황하는 역사가 광야의 역사다.세 번째는 가나안에서의 역사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수사학이 들어있다. 가나안은 역설적으로 가장 타락하고 가장 어둡고 가장 절망적인 곳이었다. 당시 하나님이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방황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표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잘못으로 40년을 방황한 셈인데, 가나안의 측면에서 보면 가나안 땅이 견딜 수 없어 토해내고 싶을 만큼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관영하는, 이른바 임계점에 이를 때를 기다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고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던 바로 그때가 정확하게 가나안 땅이 더 이상 가나안 백성의 죄악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는 때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방황이 필요해서 40년을 방황시켰다. 가나안은 가나안대로 죄가 관영할 때를 보다가 두 가지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는데,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놓은 후 들어와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나안 땅은 말 그대로 죄가 가장 관영한 곳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간다.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면 가나안이라는 가장 어두운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죄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땅이 토하고 싶어 할 만큼 어둡고 지옥 같았던 곳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들어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지금 어느 땅에 머무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어느 땅에 머물든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나안 땅은 주기도문이 성취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나안이라는 미움, 원망, 갈등, 음란, 폭력의 문화 속에서도 영향을 받거나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오히려 주변을 한 사람씩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는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 사람의 땅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 원리가 바로 이렇게 성경 속에서 여러 사건을 통해 연결된다.이 글은 하나님 나라 복음(새물결플러스)에 실린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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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awn Wright
2022-07-28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앞으로 함께 읽을 기독교 고전• 장 칼뱅_기독교 강요• 아우구스티누스_고백록• 조나단 에드워즈_신앙감정론• C. 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J. C. 라일_거룩• 존 오웬_죄 죽이기• 존 밀턴_실낙원• 아타나시우스_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J. I. 패커_하나님을 아는 지식• 리처드 십스_상한 갈대 (글 싣는 순서는 바뀔 수 있습니다.)장 칼뱅(1509-1564)은 역사에 큰 양향을 끼진 인물이다. 그에 관해서는 중립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종종 칼뱅에 관해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칼뱅을 비난한다. 그가 이중 예정을 주장했고, 마이클 세르베투스 같은 이단자의 처형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 몇 가지가 칼뱅이 믿었던 전부인 것처럼 말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칼뱅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방법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쓴 인간미 없고 머리만 큰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친구 하나 없고 감정 자체가 없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칼뱅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가 성경적이기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마치 칼뱅의 사상이 성경적이고 목회적인 성찰로는 전혀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이런 게 칼뱅에 대해 당신이 가진 우려나 두려움의 일부라면, 더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칼뱅과 그의 사상을 직접 이해하려면 칼뱅의 걸작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를 읽어야 한다. 당신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신 선물의 하나인 이 책을 통해 큰 유익을 얻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은 장 칼뱅의 이 저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체험할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옛날 책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C. S. 루이스는 학생들이 고전 원문이 아닌 주석을 읽는 이유가 겸손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덧붙였다. “이 학생은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다.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며 그 철학자의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현대 주석가들의 글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을 이 학생이 안다면 좋았을 것이다” (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서문).나는 칼뱅과 관련해서 루이스의 말에 동의한다.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독자가 기독교 강요를 향한 칼뱅의 의도만 정확하게 안다면, 주석이나 지침서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도 거의 모든 내용을 쉽게 다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바로 기독교 강요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 강요는 칼뱅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그리스도인을 향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실재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누려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시간을 초월한 갈망이다. 박해받던 16세기 프랑스 개신교도이든, 세상의 격변을 헤쳐나가려는 21세기 그리스도인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다음 일곱 가지 진리는 우리가 기독교 강요를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1. 제목Institutes는 라틴어 Institutio의 번역으로 “강요”나 “지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칼뱅은 그리스도인을 가르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그의 책은 고급 학생을 대상으로 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나 찰스 하지의 조직 신학만큼 광범위하지 않다. 칼뱅은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방식으로 썼다. 이런 점은 영어 번역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기독교 강요를 들고 읽어보라. 그리고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라!2. 대상기독교 강요를 쓸 때 애초에 칼뱅이 생각한 대상 독자는 두 부류였다. 처음에 그는 당시 학문의 언어인 라틴어로 책을 저술했고 또 출판했다. 따라서 출신 국가에 상관없이 유럽의 신학자와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개정하고 확장 보완하면서 칼뱅은 라틴어판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그의 모국인이 모국어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독자는 주로 박해받는 교회였다.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의 개신교인은 당시 매우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는 오늘날 신학 저술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진지함을 가지고 있다. 읽는 내내 당신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3. 세밀함에 쏟은 관심장 칼뱅은 모든 것을 다 제대로 하기 위해 엄청나게 몰두했다. 그는 1536년에 초판을 출판했다. 그것은 최종판의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곧이어 1539년판이 나왔다. 1543년과 1550년 사이에 칼뱅은 서로 유사한 두 가지 개정판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1559년판은 그가 죽기 불과 오 년 전에 출판되었다.칼뱅은 죽기 전까지 거의 성경 전체에 관해서 강의하거나 설교하거나 또는 주석을 집필했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판에는 그가 평생 성찰한 모든 성경에 관한 설명뿐 아니라 수십 년간 제네바 교회의 목양을 통해 얻은 목회자로서의 지혜까지 다 담겨있다. 1559년에 칼뱅은 기독교 강요의 이전 판에 관해서 이렇게 논평했다. “이제야 마침내 나온, 제대로 된 순서로 완성된 이 작업 전까지 나는 결코 만족한 적이 없었다.”지금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책도 순식간에 쓰이고, 또 그런 책이 과연 제대로 된 책인지 판단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지금 시중에 나온 책이 과연 백 년 후에도 읽을 가치가 있을까? 칼뱅은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계속해서 수정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6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 강요는 16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 강요를 읽고 세밀한 부분에까지 주의를 기울인 칼뱅으로부터 배우라. (현대 독자가 칼뱅의 저술 당시 역사적, 신학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몇 가지 훌륭한 책은 다음과 같다. 데이비드 칼훈(David B. Calhoun)의 칼뱅을 읽다(Knowing God and Ourselves), 데이비드 홀(David W. Hall)과 피터 릴백(Peter A. Lillback)의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위한 신학적 가이드’(A Theological Guide to Calvin's Institutes), 안소니 레인(Anthony N.S. Lane)의 ‘칼빈의 기독교강요 가이드’(A Reader's Guide to Calvin's Institutes), 그리고 프랑소와 웬델(Francois Wendel)의 ‘칼뱅.’)4. 신학적 균형불행하게도 그리고 부정확하게도 칼뱅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가 소위 말하는 “칼뱅주의의 5대 교리”의 기반이 되어야 하고 또한 칼뱅이 이 책을 쓴 이유도 다름 아니라 “칼뱅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맞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 강요의 첫 문장은 두 가지 큰 주제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가 소유한 거의 모든 지혜 즉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Institutes 1.1.1 ). 칼뱅이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바램이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상호적 지식이다. 하나님을 알 때만 우리는 자신을 제대로 알게 된다. 또한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바로 이 방향이야말로 칼뱅이 책 전반에 걸쳐 자료를 다루는 데 있어 균형을 이루도록 이끈 핵심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예정론 (만약에 기독교 강요가 “칼뱅주의”를 설명하기 위한 책이었다면, 모든 내용을 예정론에서부터 시작할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교리를 책의 네 부분 중 세 번째 부분(3.21-24)이 끝날 때까지 다루지 않는다. 기독교 강요는 수많은 보석으로 가득하다. 믿음에 관한 성경적 이해에 대한 긴 설명이 있다 (3.2). 왜냐하면 이것이 신약성경의 핵심이고 칼뱅 시대에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서 뜨거웠던 토론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의미 있는 부분도 있는데, 거기에 관해서는 칼뱅이 평생 기독교 강요 내용 중에서 별도의 발췌 출판을 허락한 유일한 내용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작은 책’(A Little Book on the Christian Life)을 참조하라. 가장 길고 가장 영광스러운 장의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의미에 관한 칼뱅의 놀라운 설명이다(3.20).모든 자료를 칼뱅이 어떻게 배열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가 이 책을 얼마나 균형 있게 저술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학자들은 여전히 칼뱅이 왜 기독교 강요의 자료를 그렇게 배열했는지를 놓고 논쟁하고 있다. 그가 네 권으로 구분한 것을 놓고 사도신경(성부, 성자, 성령, 교회)의 일반적인 흐름을 따랐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물론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칼뱅은 실제로 루터교인 필립 멜란히톤의 지도를 따랐던 것 같다. 루터교인 필립 멜란히톤이 쓴 ‘신학총론’(Loci Communes)은 바울의 로마서 배열을 따랐다. 나는 칼뱅도 로마서의 순서를 따랐다고 생각한다. 칼뱅 역시 다른 16세기 개신교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서야말로 성경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칼뱅이 1560년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그의 책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열쇠”라고 말한 이유이다. (리차드 뮬러(Richard A. Muller)가 쓴 ‘수용되지 않는 칼뱅’(The Unaccommodated Calvin)에 실린 기독교 강요의 배열에 관한 사려 깊은 에세이 몇 개를 참조하길 권한다.)다시 말해서, 칼뱅은 성경의 윤곽을 고수하려고 했던, 전반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이었다.5. 성경적 담대함 칼뱅의 말은 너무 직설적이어서 현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예정론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정의로 설명한다. 예정이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으로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죽음을 맞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좀 더 자세하게 썼다.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선언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예정을 통해 각 사람과 자신과의 관계를 맺으셨다. 사람은 평등한 상태로 창조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생이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어 있다. 즉 누구나 다 이러한 목적 중 하나를 위해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다 생명 또는 죽음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한다 (3.21.5).어떤 이들은 택함을 받은 자와 택함 받지 아니한 자의 상태를 영원히 결정짓는, 예정과 관련한 하나님의 이중적 본성에 관한 칼뱅의 완고한 주장에 움찔할 수 있다. 그러나 칼뱅은 다른 성경 구절 중에서도 특히 로마서 9장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6. 역사적 거리고전 독서의 한 가지 장점은 다른 시대에 살았던 저자가 지금과 다른 압력과 유혹을 받으며 우리와 다른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목격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이런 점은 실망을 줄 수 있다. 고전에서 지금 당장 현실 속에 적용할 수 있는 거리가 많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한다면 종종 우리가 가진 염려와 질문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를 확인함과 동시에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칼뱅 또한 전혀 다른 시대의 말을 하기에 지금 우리가 던지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를 칼뱅에게서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던지는 질문의 일부는 사실상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도 깨닫게 될 것이다. 7. 하나님을 아는 지식기독교 강요를 읽는 것과 관련해 지금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이미 말했다. 칼뱅은 성경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렘 9:23-24, 요 17:3). 칼뱅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덮는 순간 주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기를 원했다. 바로 이런 열망이야말로 기독교 강요 곳곳에 숨은 진짜 메시지이다. 예를 들어, 칼뱅은 독자들에게 그가 “경건”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전시키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연관된 경외심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져다주는 유익함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존재의 전부를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는 것,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양육된다는 것, 그분이 모든 선의 창시자이시며 그렇기에 사람이라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구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그분께 기꺼이 헌신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찾기 전까지 사람은 결코 진심을 다해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1.2.2).당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에게 주신 은혜를 기뻐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존 칼뱅의 안내를 받으며 기독교 강요를 읽으라. 원제: Introducing the ‘Institute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기독교고전
기독교강요
하나님을아는지식
장칼뱅
예정론
칼뱅주의
대영박물관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다
by Daniel K. Eng
2022-07-27
2019년, 대영박물관에서 성경 속 사건들과 연관성이 있는 유물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들과 관련 있는 물건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흑백 사진처럼 단조롭던 성경 이야기가 총천연색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예후 왕을 묘사하고 있는 6피트(1.8m)짜리 검은 오벨리스크와 느헤미야가 다루었을 수도 있는 대형 은그릇 같은 다양한 아이템을 모아놓은 컬렉션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양하고 풍부한 유물과 정보 속에서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은 전시물이 있었다.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호화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났을 때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그리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 소형 조각상은 우르(현 이라크)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여러 쌍의 형상 중 하나이다. 학자들은 이 조각상이 제작된 시기를 기원전 2500년,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 이전으로 추정한다. 높이가 18인치(45.72cm)에 불과한 이 조각상은 뒷발로 선 채 작은 나무 꼭대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뿔이 있는 염소를 묘사하고 있다. 탁자나 받침대를 지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이다. The Ram in the Thicket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Leonard Woolley)는 우르의 원주민이었던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야기(창 22:1-9)를 바탕으로 이 조각상에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뿔 달린 동물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창세기 22:13에 기술되어 있는 그 족장이나 그 숫양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설사 그렇더라도 나는 이 조각상의 복잡한 세부 묘사와 그 재료의 다양성에 매료되었다. 조그마한 받침대에는 자잘한 붉은 석회암과 조개껍데기로 된 모자이크 장식이 있다. 그 동물이 앞발을 올려놓고 있는 관목의 이파리와 염소의 얼굴과 다리는 순금으로 덮여 있다. 염소 몸통을 덮고 있는 털은 나무 뼈대에 조개껍데기를 붙여 표현했고, 귀는 구리 합금으로, 눈과 뿔, 어깨 털은 청금석으로 만들었다. 상상컨대, 훨씬 더 호사스러운 무언가를 받쳐두려고 만들었을 이 작은 조각에 길고 고된 수고의 시간이 들어갔을 것이다. 희귀한 재료와 세심한 요소들은 고대 우르 문명에서 가능했던 풍요와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주께서 짐을 꾸려 떠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우르에 살았다. 낯선 땅을 향해 출발하면서 그는 익숙한 모든 것을 남겨두었다. 창세기의 설명을 너무 서둘러 읽다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면서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대충 넘겨버릴 때가 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 12:1).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저 새집으로 이사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그는 크나큰 희생을 치렀다. 아브라함의 본토는 원시적인 촌락이 아니었다. 우르는 숙련된 장인과 선진 시설을 갖추고 있던 빼어난 대도시였다. 아브라함은 선진 문명과 기술, 특권이 넘쳐나던 사회를 남겨두고 떠났다.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그의 행동은 정말 어리석어 보였다.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장막에 살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족장은 자식과 손자에게 준 것이라고는 고작 나그네의 거처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거류민의 삶을 살면서도 아브라함은 그 무엇보다도 안정된 삶을 고대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10.우르에는 숙련된 장인들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더 위대한 설계자요 건축자이신 강력하고 미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순종으로 그의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눈이 훨씬 더 안전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우르의 보물들을 포기했다. 그는 호사와 학식보다 더 큰 것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다.우리가 교회에서 믿음을 토론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대상만큼만 가치가 있다. 우리의 믿음을 부와 기술과 학식과 재능에 두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의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택할 때, 우리의 그 결정은 아브라함의 결정처럼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고, 그것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입증되었다. 우리의 순종하는 믿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은 그의 믿음을 귀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히브리서 11장이 소개하는 성도의 모범에 들어갔다. 이 족장의 믿음이 히브리서 저자가 청중에게 바라는 바로 그 믿음, 곧 하나님의 약속에 굳건히 서고 행동하는 믿음, 이 세상의 덧없는 가치보다 미쁘신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귀하게 여기는 지혜로운 믿음이다.원제: What I Learned About Faith at the British Museu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믿음
믿음의조상
아브라함
순종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22-07-26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 놀라운 한 사람· 사랑하는 것을 속일 수는 없다· 고통에 관한 내 모든 생각을 바꾼 한 문장· 누가 하나님 앞에서 ‘막아선 자’가 될 것인가?· 의무에서 보물로: 기쁨이 바꾸어 놓은 내 신앙· 간달프의 죽음·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문단은 책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책 전체에 걸친 문맥 때문에 종종 독특한 힘까지 얻는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것이다. 한 문장이나 단락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 또는 단락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 나는 에벌린 크리스텐슨(Evelyn Christenson)의 책 What Happens When Women Pray(여자가 기도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의 제7장 제목인 이 문장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솔직히 말해,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문장을 냉소했다. 진부하고 순진하게만 들렸다. 나는 작가가 인생에서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그랬다면 이처럼 대담한 주장을 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교만하게 추측했다. 내 생각에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절대 실수하지 않으셨다는 주장은 이 세상을 휘감고 있는 거대한 악과 고통의 현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크리스텐슨의 말에 너무 짜증이 나서 나는 책을 던지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다.그녀의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막 큰딸을 임신함과 동시에 닥쳐온 결혼 위기의 여파를 겪고 있었다. 나는 우리 부부가 다시 원상회복한 것에 감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소리로만 들렸다. 내 삶은 이미 여러 면에서 어려웠다. 유아기에 앓은 소아마비로 나는 수도 없이 병원을 들락거렸다. 초등학교 내내 왕따를 당했고, 최근에는 무려 세 번이나 유산을 겪었다.시련으로 얼룩진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내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내 모든 고통?절대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게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이 적어도 내가 처음으로 겪었던 일부 고통에는 함께하셨다고 믿었다.열여섯 살 먹은 내가 그리스도께 나왔을 때, 나는 이미 장애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우연히 요한복음 9장을 읽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가리켜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가 지은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하나님이 지금 내게 직접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내 고통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고, 그로 인해 삶과 역경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 바뀌었다.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는 육체적인 어려움을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그 원칙이 나의 모든 고통에 다 적용되는지는 의심스러웠다.하나님의 주권회의적이었지만 내가 인도하는 교회 독서 토론회의 책이 크리스텐슨의 책이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읽어야만 했다. 모임 전에 성경을 숙고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지혜와 인도를 구했고,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주권과 목적에 대한 구절에 끌렸다. 나는 관주 성경을 이용해서 특히 눈에 띄는 구절로 목록을 만들었다.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마태복음 10:29-30.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욥기 42:2.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 잠언 19:21.처음부터 내가 장차 일어날 일들을 예고하였고,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알렸다. ‘나의 뜻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이룬다’고 말하였다. … 내가 말하였으니, 내가 그것을 곧 이루겠으며, 내가 계획하였으니, 내가 곧 그것을 성취하겠다. 이사야 46:10-11.말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 구절들을 읽고 또 읽었다. 내가 흔들 수 없는 진리토론이 시작되자 나와 마찬가지로 다들 “하나님은 절대 실수하지 않으신다”라는 이 한 문장에 사로잡혔다. 일부는 확신에 차서 반대했다. 하나님과 실수를 연결한 구절에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세상에서 힘든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우리는 그걸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운 경험 또는 상실로 인한 어려움을 나누기도 했다. 한 자매가 그랬다. “로마서 8장 28절, 다 알잖아요? ‘주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것을 다 통제하고 계시고, 결국에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모든 어려움을 사용하신다는 거잖아요.” 멋진 말이었지만, 내게는 진리가 아니라 그저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는 진부하고 순진한 소리로만 들렸다. 그 어떤 공감이나 이해심도 없이 단지 교리에만 매달린 것 같은 그녀의 단호한 주장에 나는 다른 관점을 옹호하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그렇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쩐지 내 속 깊은 곳에서 나는 저자의 말이 성경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며 이게 인생을 바꾸는 진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나는 내 믿음을 독서 모임에서 선포했다.내 아들이 왜 죽었냐고요? 몇 주 후에 나는 믿음을 시험할 상황을 만났다. 20주 정기 초음파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 폴에게 수술이 필요한, 생명을 위협하는 심장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 나는 그 문장이 내 어휘가 될 때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러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내게 임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이 말이 임신 기간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태어나자마자 성공적인 수술을 받은 폴은 경과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달 정도가 지나 의사의 부주의로 갑자기 사망했다. 솔직히 멍하기만 했지만, 남편과 나는 장례식에서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반복했다. 우리 부부는 그 말을 통해 주님 안에서 소망을 찾기 위해 서로를 도왔다. 장례식에서 한 말은 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몇 주가 지나자 갑자기 그 말이 공허하고 진부하게만 느껴졌다. 내 아들이 왜 죽었지? 하나님은 왜 죽음을 허락하셨지? 그건 의사의 부주의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하나님이 실수하신 거 아니야? 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공허하고 건조하게만 보였다. 말이 되는 게 없었다. 그 어떤 말도 마음속에서 튕겨 나와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 몇 달이 지나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나를 다시 당신께로 이끄셨다. 차 안에서 흐느끼다가 과격하다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만났고, 내가 밀어냈던 말씀 속에 굳건한 진리가 있음을 보았다. 거기에는 내 삶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모든 말이 다 들어있었다. 가장 어두운 날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말이 다 담겨있었다. 아, 폴을 만드신 하나님, 폴을 우리에게 잠시 주셨던 하나님, 그리고 다시 폴을 데려가신 하나님, 하나님은 그 어떤 과정에서도 실수하지 않으셨다. 우리 아들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목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하나님의 플랜 A폴이 죽은 후 나는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가 쓴 When God Weeps(하나님이 울 때)를 읽었다. 그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조니는 말한다.둘 중 하나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거나, 아니면 사탄이 세상의 의제를 정하고 하나님은 단지 거기에 반응할 뿐이거나. 후자라면, 전능자는 단지 사탄의 청소꾼이 되어서 마귀가 짓밟고 지나간 뒤처리를 하면서,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최선을 끌어낼 방법을 찾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최선의 계획, 플랜 A가 아니다. 결코 그건 그가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아무리 나중에 수습한다고 해도, 그 경우에 당신이 겪는 고통 그 자체는 무의미한 것이다(84).크리스텐슨의 그 문장처럼, 조니의 말이 나에게 강하게 와 닿았다. 나의 고통에는 의미가 있었다. 고통 모든 부분 부분이 다 의미가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플랜 A를 살고 있다. 조니의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인생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고, 가장 어두운 시련을 헤쳐나갈 힘을 얻었다. 나는 다시 하나님의 손길을 찾았고, 내 고통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 악몽 속에서조차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 이 말은 내 삶을 빚고 다시 빚었으며, 많은 폭풍우를 뚫고 내 삶 속에서 닻을 내렸다. 소아마비후증후군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이 말을 붙잡았다. 첫 남편이 나를 떠난 뒤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 말을 되풀이했다.내게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악몽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말이다. 하나님은 나의 선과 그의 영광을 위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과라도 사용하실 것이다. 크리스텐슨은 말한다.몇 년 동안의 시련과 어려움을 겪은 후, 모든 것이 다 당신의 선을 위해서였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 때에 도달하는 곳,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깨닫는 바로 그 자리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 모든 곳에 자리 잡은 “만약에 그때 그랬더라면…”을 다 알고 계셨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당신은 이제 시련 중에서도 기쁨을, 그것도 깊은 기쁨을 가질 수 있다(89-90).몇 년 전,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크리스텐슨이 말하는 수준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감사한다. 에블린 크리스텐슨이 겪은 다양한 시련 속에서 함께하시면 그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동일한 하나님이 나와도 함께 걸으시고 나에게도 동일한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죽으시고,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시는 예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뜨겁게 감사한다. 원제: God Never Makes a Mistak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감사
고통중에감사
에블린크리스텐슨
조니에릭슨
의료사고
성숙한신앙
시련
하나님의뜻
거대한 우주 너머에, 그리고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by Chris Martin
2022-07-25
과학 교육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초등학교에 나를 입학시킨 부모님 덕분에 나는 천문학과 밤하늘의 신비에 푹 빠져들었다. 우리 학교에는 초급 천문대도 있었고, 나는 그 시절 여느 아이들처럼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저런 게 정말 저 하늘에 다 있을까?”그리고 스타워즈,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특히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천문학을 가르치셨던 제임스 루소 선생님이 내 가슴에 호기심의 불을 붙였다. 별들을 너무나 좋아하셨던, 그리고 그 별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셨던 루소 선생님은 우주에 대한 내 열정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에게 닿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래서 나사(NASA)가 지난 크리스마스에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을 발사했을 때, 나는 이 망원경이 몇 달 뒤에 보내올 것들을 기대하면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난 천문학자가 아니다. 밤하늘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다. 창피하게도 망원경도 없다. 하지만 최근에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보내온 이미지들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의 장엄함에 놀라 숨을 헐떡이는 데는 굳이 천문학자가 될 필요도 없고 망원경을 장만할 필요도 없다. SMACS 0723 이미지를 찬찬히 보자. 나사가 “지금까지 먼 우주에서 가장 깊고 선명한 적외선 이미지”라고 부르는 그 이미지 말이다. 며칠 전에 제임스웹의 첫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중요하다.그 이미지들을 보면서 우리 우주가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하면, 오늘 직장에서 있었던 힘든 일도, 곧 있을 휴가도, 나의 멋진 가족도 특별히 중요할 게 없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곧바로 광대한 우주의 티클 만한 이 행성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음미하고 볼 수 있다는—그리고 그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다는—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가?우주의 거대함을 파악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나사는 SMACS 0723 이미지가 “팔을 쭉 뻗은 공간 안에 있는 모래 알갱이 한 알만 한 크기”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모래 알갱이 하나를 찾아서 밤하늘에 올려놓고, 그 안에 우리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수천수만의 은하들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더 많은 은하가 분명히 존재한다. 가장 깊은 우주의 먼 과거를 바라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실까?”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주 저편의 은하에 있는 먼 행성에 계시면서 그의 나라가 지구에 임할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깊은 우주와 우리가 우주-시간을 통해 되돌아보는 먼 과거를 초월하여 계신다. 그러나 내가 SMACS 0723 이미지에 처음 시선을 고정했을 때, 고백하건대 나의 경이로움은 의심과 섞여 있었다: 하나님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초월하실까?그렇다. 말씀으로 수조 개의 별들을 존재하게 하신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든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가장 먼 은하계들을 넘어서시는 분이실 뿐 아니라 또한 그 은하계들을 둘러싸고 계시며, 그리고 그 은하계들을 통하여 실제로 존재하신다. 우주의 거대함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하나님이 그보다 더 크고 그 너머에 계신다는 것을 이해하기란 훨씬 더 어렵다. 그렇다.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믿기 어렵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계실 수 있다!우주의 가장 깊은 범위에 있는 수천 개의 은하를 담고 있는 SMACS 0723 이미지는 많은 사람이 제임스웹 우주 망원경을 통해 본 최초의 이미지이다.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이 정말로 그런 이미지를 넘어서실까 생각했다. 그러나 카리나성운 이미지(아래)를 보았을 때, 나는 깨달음의 답을 얻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모든 것 배후에 계실 수 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의 배후에 계시고, 이 모든 것을 품으시고, 또 이 모든 것 안에 현존하실 뿐만 아니라(시 121; 사 40:28), 이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다(렘 32:17).오직 하나님만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빚어내실 수 있다! 오직 한없이 강하신 하나님만이 이토록 헤아릴 수 없이 크고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으셨다.어떤 이미지가 130억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우주의 먼 과거를 보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상당히 긴장하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것이다. 우주의 나이를 둘러싼 논쟁들이나 창조론과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들은 교회 안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카리나성운이 존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성운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경외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음식이 꼭 맛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꽃이 꼭 향기로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몇 광년 높이의 우주 절벽이 있는 카리나성운이 꼭 아름답고 신비로워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 우리는 카리나성운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보는 것만 같다(시 33:6). 하나님께서 별을 탄생시키는 초거대 광경을 만드시면서 아름다움까지 더하셨다. 지금까지는 어떤 인간도 이것을 보지 못했다. 우주의 어느 구석에는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다른 비길 데 없는 경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결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감지하지 못한, 당신의 지극한 즐거움을 위해 또 어떤 영광을 손수 빚어두시지 않았을까? 그분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폭발적인 창조성은 끝이 없으니 우리는 결코 그 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지구라고 불리는 우주 암석의 조각에 있는 한은 말이다. 영원의 이쪽에 있는 한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신다하나님은 당신의 이름과 내 이름을 아신다. 그리고 그는 지금 카리나성운에서 태어나고 있는 별들의 이름을 아신다(시 139:13-14; 시 147:4).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이 무엇을 보여주건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은 또한 당신 안에 계시고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고, 우리처럼 사시고 죽으신,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우리가 영원히 그와 함께할 수 있게 하신, 작고 연약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다. 아마도 당신도 나처럼 이 놀라운 이미지들을 보고서는 궁금할 것이다. “나의 하나님은 정말 이렇게 크신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만 이렇게 크다. 그리고 너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그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엡 3:20)그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이시다(골 1:16). 당신을, 나를, 그리고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은하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온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소리높여 외친다(롬 1:20). 그 합창에 참여하자(시 95:6; 계 5:13). 원제: God Is Beyond and Behind the Enormous Univers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우주
하나님의속성
천문학
내적 시련, 그리고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혜
J. I. 패커를 기리며
by J. I. Packer
2022-07-24
제임스 이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년 7월 22일 - 2020년 7월 17일) 은혜란 무엇인가? 신약에서 은혜는 사랑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행동으로 베푸시는 사랑을 의미한다. 은혜란 자신을 구원하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죄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움직이시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란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하늘 나라에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로 보내셔서 지옥에까지 내려가도록 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신약은 은혜의 뜻과 은혜의 역사 둘 다에 대해 말한다. 은혜의 뜻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다. 은혜의 역사는 하나님이 시작하신 “너희 안에서 [행하신] 착한 일”(빌 1:6)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교제로 부르시며(고전 1:9),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리시고(엡 2:1-6), 하나님의 영을 선물로 주사 당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치시며(엡 1:13-14), 당신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며(고후 3:18), 마침내 영광중에 서 당신의 몸을 살리실 것이다(롬 8:30; 고전 15:47-54).수년 전 개신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은혜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와는 별개로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성경적 구분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10을 보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은혜라는 말은 분명 바울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역사로 바울을 먼저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다음에는 사역자로 만드셨다.은혜의 목적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하여 이 회복된 관계의 기초를 놓으시는 것은, 이후로는 우리가 그분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본성을 새롭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을 향해서 사랑과 신뢰와 기쁨과 소망과 순종을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만들며, 사실상 그러한 행동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서다. 우리 편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더욱 깊어지는 지식 그리고 하나님과 계속 친밀해지는 교제야말로 모든 은혜의 역사가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 죄인을 그분께로 점점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어떻게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시는가? 그분은 우리를 세상과 육신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막아 주시거나, 부담스럽고 좌절되는 환경들로부터 보호해 주시거나, 우리 자신의 기질과 심리로 인해 생겨나는 문젯거리들을 막아 주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이 모든 것에 노출되도록 하신다.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이러저러한 괴로움들과 당혹스러운 일로 채우시는 궁극적인 이유다. 곧 우리가 하나님을 꼭 붙잡는 법을 확실히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강력한 반석이시며, 견고한 방어물이시고, 확실한 피난처시며, 연약한 자들의 도움이시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데 그처럼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이유는,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연약하다는 것과, 옳은 길을 찾거나 따르기 위해 감히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많은 시간을 소비하시기 때문이다.기분 좋게 거칠 것 없는 길을 따라가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돕겠다고 팔을 잡아 준다면, 우리는 성급하게 그 사람을 뿌리쳐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폭풍우가 점차 거세지고 힘은 다 빠져 가는 가운데 어둠 속에서 거친 시골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돕기 위해 팔을 잡아 준다면,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기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이 험하고 혼동스러울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경건한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는 전형적인 성경의 문구를 빌린다면 ‘여호와를 앙망하도록’ 하기 위해, 조처를 취하신다.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 진리는 여러모로 적용된다. 가장 놀라운 적용 중 하나는 하나님이 사실상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 죄와 실수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패와 실수라는 교육적 징계 수단을 매우 자주 사용하신다. 성경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경건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와, 그로 인해 하나님이 그들을 연단하시는 것에 대해 다루는가!아브라함은 아들을 약속받았으나, 그 아들을 갖기까지 기다려야 했고, 참지 못하여 섣불리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시행하려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그에게 말씀하시기까지 13년을 기다려야 했다(창 16:16-17:1). 모세는 권력을 휘두르고, 애굽인을 죽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사사로운 문제까지 해결하려 하면서, 주제넘게 나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 애쓰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고는 자부심과 허영심이 사라질 때까지 수십 년 동안 광야의 뒷전으로 추방당해 있었다. 다윗은 밧세바를 유혹하고, 우리아를 죽였으며, 자기 가족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명성을 위해 인구 조사를 하는 등 연달아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호된 연단을 받았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도망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이런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요점은 인간의 실수에 이어 하나님이 즉시 불쾌함을 보이신 것이 결코 이야기의 끝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모세는 그의 자신감을 치유받았다(실로 그 이후 모세는 너무 심하게 바뀌어 그의 태도는 거의 죄에 가까웠다! 출애굽기 4:10-14을 보라). 다윗은 실수를 저지른 후에 회개했으며, 처음보다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으며, 살아난 뒤 니느웨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하나님은 우리의 심각한 어리석음에서도 선을 이끌어내실 수 있다. 하나님은 메뚜기가 먹어 버린 수년의 시절을 회복하실 수 있다.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분명 이 사람들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실수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매달리도록 가르치셨다. 그런 실수가 없었다면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실패감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 무시무시한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괴로워하는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하나님의 회복시키시는 은혜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종교에서 비현실성은 불행한 것이다. 비현실성은 저주다. 하나님에 대한 비현실성은 현대 기독교의 고질병이다. 우리 자신과 하나님 모두에 대해 현실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아마도 존 뉴턴(John Newton)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찬송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이 찬송가에서 뉴턴은 자신이 현실주의로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나는 주님께 구했네.믿음과 사랑과 모든 은혜에서 자라게 해 달라고주님의 구원을 더욱 알게 해 달라고그리고 더욱 진지하게 주님의 얼굴을 구하게 해 달라고나는 어떤 은총의 시간에주님이 즉시 나의 요청에 응답해 주시기를 바랐네.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억제력으로나의 죄를 진압하고, 내게 안식을 주시기를 바랐네.그러나 그 대신에 주님은마음속에 감추어진 죄를 느끼게 하셨네.그리고 지옥의 성난 세력이내 영혼의 전부를 공격하도록 하셨네.그뿐 아니라 주님 자신의 손으로나의 비통함을 더 깊게 하시느라 애쓰셨네내가 세운 모든 훌륭한 계획을 방해하셨고나의 모든 희망을 사라지게 하셨으며 나를 쓰러뜨리셨네나는 떨면서 울부짖었네.“주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세요?”“벌레 같은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주님은 대답하셨네.“바로 이것이 은혜와 믿음을 구하는 기도에 대한 나의 응답이니라.”“이 내적 시련들을 사용해서나는 너를 자아와 교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 한다.그리고 지상의 기쁨을 위한 너의 계획들을 무산시켜네가 내 안에서 모든 것을 구하게 하려는 것이다.”이 글은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IVP)의 21장 “내적 시련”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
은혜
시련
실수
회복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
by Josh Howerton
2022-07-23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관련 기사·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의 낙태권 찬성론자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를 두고 그리스도인들은 태아 생명에 대한 정의 실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며 기뻐하지만, 기독교 바깥에 있는 상당수의 우리 이웃은 이를 실존의 위협으로 느끼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의 결정이 위선적이고 심각한 국가적 비극이라고 비난하며 종교 단체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이들은 왜 이토록 불안해하는 것일까? 우리의 친구와 가족과 동료들이 한탄하는 이 결정을 신앙을 가진 우리가 환영하는 이유를,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바로 알릴 수 있을까?사랑의 마음으로, 사실에 기초하여 이웃의 잘못된 통념에 접근해 보자. 다음은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 곧 잘못된 통념과 그에 관한 우리의 대답을 그 근거와 함께 제시한 것이다.신화 #1: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태아만 존중할 뿐이다.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옹호한다는 주장에 반감을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태아만 옹호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태아만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 상처받고 소외된 생명 모두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가? 다음의 수치는 “물론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미국의 도시 도처에 있는 위기 임신 센터 대부분을 그리스도인이 시작했다. 이 밖에도 그리스도인의 입양률은 미국 전체 평균의 두 배를 웃돈다.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비율도 일반 시민보다 그리스도인이 훨씬 높다.입양 비율 미국 전체 가구 2%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5%출처: Barna Research, 2013 report기부지난 일주일 동안 가난한 이웃에게 돈, 시간, 물품을 기부한 적이 있다.주일마다 교회 가고, 매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65%그 외 1%출처: Pew Research Center, 2014 data신화 #2: 낙태를 반대하는 쪽은 남성이다.과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한 것일까? 자궁이 없는 남성이 어떻게 여성을 대신해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음의 수치를 보자.아래의 그래프는 여성이 남성보다 낙태 반대론자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한 예로 2014년 가디언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여성은 왜 낙태에 더 부정적인가?”) 신화 #3: 나의 몸, 나의 선택 “나의 몸, 나의 선택”은 낙태권 찬성 운동의 슬로건이다. 이 구호는 픽사 영화에도 등장한 바 있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태아는 여성의 발톱과 유사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솔직히 이러한 관점은 과학이 태아 발달과 정체성에 관해 말하는 내용과 반대된다.뱃속의 태아도 그만의 고유한 DNA, 지문, 심장 박동, 사고, 감정, 고통과 쾌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태아는 다른 사람의 몸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만의 뚜렷한 몸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은 확증한다.신화 #4: 대부분 합당한 이유로 낙태를 한다.선의를 가진 낙태 찬성론자들은 미국 낙태 대다수의 사유를 강간, 근친상간, 빈곤,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 등과 같은 끔찍한 상황에 돌린다. 그러나 다음의 낙태 통계 분석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하게 모든 낙태 사유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플로리다주의 낙태 사유 통계를 보면, 2020년도 낙태의 75퍼센트 가까이가 특별한 이유가 없이 이루어졌다. 하나의 주에 국한된 결과이긴 하지만, 미국 전체 실정을 예증한다고 할 수 있다.플로리다는 해마다 주에서 일어나는 낙태의 사유를 모두 기록한다. 지난 2020년 플로리다에서는 총 7만 4,868건의 낙태 시술이 행해졌는데, 아래의 표는 각각의 이유와 그 비율이다.백분율 이유 0.01%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0.15% 강간에 의한 임신 0.20% 여성의 생명에 위협 0.98% 태아에 심각한 기형 1.48% 여성의 신체적 건강에 위협 1.88% 여성의 정신적 건강에 위협 20.4% 사회경제적 이유 74.9% 이유 없음(여성의 선택)신화 #5: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폐기는 수많은 여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미국의 낙태 찬성론자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시대(post-Roe world)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임신하게 된 여성들이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자궁외임신, 패혈성 자궁염, 유산을 경험한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현실은 이렇다. 낙태를 강하게 규제하는 주에서도 산모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반드시 따르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돕스 판결 이후 이러한 것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낙태 반대론자도 낙태 찬성론자만큼이나 산모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신화 #6: 낙태 반대 정서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들어 있다.일부에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폐기는 백인 우월주의라는 더 큰 질병의 징후라고 주장한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소수 집단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특권이 있는 위치에서 백인 중산층과 상류층이 자기네 의견을 훨씬 더 수월하게 내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낙태 반대론자들은 존재한다. 슬픈 사실은 1976년 이후 다른 어떤 인구 집단보다 소수민족의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낙태 찬성 운동은 인종차별주의와 연관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낙태 합법화 운동을 주도하는 Planned Parenthood의 설립자인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는 소름 끼치는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유색인종을 차별했다. 신화 #7: 대부분의 미국인이 낙태권을 지지한다. 대법원은 6대 3으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지만, 만약 이것을 일반 투표에 부쳤더라면 명백한 다수의 동의를 얻었을까? 미국은 일반적으로 낙태권 찬성이 다수 의견이라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돕스 판결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체제를 뒤엎은 것이라는 말인가?간단히 대답하자면, 아니다. 미국인의 약 71퍼센트는 여성의 선택권을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아래의 그래프는 낙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의 수치의 격차가 실제로는 상당히 근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낙태는 예외 없이 항상 합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시 극소수의 사람들이 낙태는 예외 없이 항상 불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중간 그 어디쯤 자리하고 있다. 이 둘이 합의에 이르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대부분이 여성의 선택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에는 동의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임신 후기 단계에서는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증가한다. 임신 24주 이후의 낙태에 대서는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법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거의 두 배나 많다. 미국 성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임신 6주가 되면 심장 박동이 감지된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 낙태는 법적으로...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6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25%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6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19%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6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2%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임신 초기가 끝나는 무렵인 임신 14주가 되었을 시점에 낙태는 법적으로...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14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15%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14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22%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14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9%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임신 24주가 되면 건강한 태아는 엄마의 몸 밖에서도 의학적 도움을 받아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 낙태에 대해서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24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3%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24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18%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24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34%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신화 #8: 낙태 금지가 낙태율을 줄이지 못한다.낙태 금지법은 효과가 있는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 방법 부재로 혹 임신을 중지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낙태 금지법이 곧 낙태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실용적이다. 그러나 낙태 반대론자의 입장은 실용성이 아닌 도덕성과 관계가 있다. 노예 해방 선언이 모든 주에 적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고 할 수 있는가? 노예제가 도덕적 악인 것처럼 낙태는 도덕적 악이다. 도덕적 악을 억제하고자 하는 모든 법률은 환영받아야 한다.더욱이 주 차원의 낙태 금지령과 함께 낙태율이 급감했다는 증거 자료도 있다.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극단의 시대에 정직한 질문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이러한 논쟁에 관련된 영적 전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잘못된 가정과 주장에 맞서는 것은 이웃 사랑 실천에 꼭 필요한 일이다.우리는 은혜와 진리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가운데 이웃의 진리가 되어 버린 신화를 바로잡기 위해 겸손히 헌신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이웃의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원제: Debunk 8 Abortion Myth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불쌍한 짐승들, 부러운 짐승들
by 전재훈
2022-07-22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1.불쌍한 짐승들성경을 보면서 말도 못 하는 짐승들이 참 억울하겠다 여겼던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가운데에는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 것이라 하셨지요. 하지만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죽이시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내보내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낸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죽을 것이라 말씀하셨지요. 그것도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죽은 것은 다른 짐승이었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려고 짐승을 죽이셨습니다. 짐승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하신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 부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실 때 잡은 짐승은 결코 부정한 짐승이 아닙니다. 가장 흠이 없고 정결한 짐승을 잡으셨습니다.이 짐승이 만약 뱀처럼 대화가 가능했다면 아마도 하나님께 원망하였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이건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 때 저희는 그 근처도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그 아담과 하와를 죽이셔야지 왜 저보고 죽으라 하십니까?”제가 이 짐승이었다고 상상하면 억울함에 미쳐 죽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억울한 짐승들이 성경에 더 나옵니다. 세상이 악해져 갈 때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셔서 방주를 짓게 하시고 노아의 식구들과 그 방주에 탄 짐승들을 제외한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명을 멸하십니다.그때 방주에 타게 되는 짐승들의 규정이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이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으로 정하셨습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는 창세기 6:19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위의 규정을 다시 생각해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세 쌍에 한 마리를 더 태우고 부정한 것은 암수 한 쌍만을 태우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신 이유는 방주에서 나올 때 제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며 예배하는 장면을 창세기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창 7:20-21).저는 제물이 된 정결한 짐승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세상을 멸하실 때는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세상에 나갈 때는 죽임을 당한 짐승들입니다. 이럴 거면 왜 자신들을 살려 주었냐고 항의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죽으려고 더러운 세상에서 정결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고 항의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 짐승들이 불쌍해 보였습니다.벧세메스 암소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사무엘상 6장에 보면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두 마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자꾸만 패배하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회의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전쟁터에 두기로 결의합니다. 그 언약궤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지요.그러나 결과는 언약궤를 블레셋에 뺏기게 됩니다. 이 일로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죽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 엘리 제사장도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비느하스의 아내 역시 만삭의 몸이었는데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죽습니다.블레셋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다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신전에 갖다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다음 날은 아예 부서져 있었고 아스돗에 사는 사람들은 독한 종기와 재앙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아스돗에 있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두려워하여 가드로 보내지만 같은 일이 벌어졌고 다시 에그론에 보내니 그곳 사람들도 독한 종기가 나서 죽어갔습니다.블레셋 사람들은 이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리하여 속건제로 바칠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수레에 하나님의 궤와 함께 실어 이스라엘로 보내기로 합니다.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어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수레를 매어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젖 나는 소란 어린 송아지가 있는 소를 말합니다. 멍에를 한 번도 매어보지 아니한 소라면 수레를 끌기가 매우 힘듭니다. 거기에 더해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는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로 갈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멍에를 매어보지 않았으니 불편해서 몸부림을 치거나 본능을 따라 서로 자기 새끼들에게 가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두 마리의 소는 벧세메스로 곧장 나아갑니다. 그때의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삼상 6:10-12). 암소가 벧세메스로 가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저는 소를 키워본 경험이 없지만 듣기로는 소가 영물이라 도살장에 끌려갈 때는 운다고 들었습니다. 이 두 소는 자신이 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 두 소에게 실컷 여물을 삶아 먹이고 깨끗하게 씻겨서 자기 송아지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야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수레를 장작삼아 두 소를 번제물로 하나님께 태워 버립니다. 이 두 소는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했을까요? 한번도 매어본 적 없는 멍에를 매고 새끼들마저 떼어놓고 귀한 예물을 담아 여호와의 궤를 고생고생하며 가져왔더니 상은 못 줄망정 번제물로 태워 버리다니요. 저는 이 두 소가 매우 불쌍해 보였습니다. 부러운 짐승들 그러나 제가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서는 이 짐승들을 보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기 위해 죽어야 했던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이 짐승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부러웠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수많은 정결한 짐승들 중에 하나님께 택함을 입어 ‘거룩한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노아의 방주에서 나온 정결한 짐승들도 부러웠습니다. 땅에는 짐승들의 시체로 넘쳐났지만 이미 죽어버린 짐승은 제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암수 짝을 찾지 못한 나머지 그 한 마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었습니다.이방 땅에서 태어나 결코 일평생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볼 수 없었던 이 두 마리 암소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 그 말씀을 전하시고 사람들의 손에 번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영적 예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가장 거룩한 예배는 십자가 위에서 드린 예수님의 예배였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드렸던 예배는 전혀 그 어떤 희생도 담아내지 않는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향기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자비하심으로 저의 악취 나는 예배를 참아 주셨습니다.그 언젠가 저도 구약의 그 짐승들처럼, 십자가 위의 예수님처럼 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제 평생 소원이 이 땅에 거룩한 순교자의 피를 필요로 하실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한 번이라도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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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 J. I. 패커를 기리며
by Sam Storms
2022-07-21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앞으로 함께 읽을 기독교 고전• 장 칼뱅_기독교 강요• 아우구스티누스_고백록• 조나단 에드워즈_신앙감정론• C. 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J. C. 라일_거룩• 존 오웬_죄 죽이기• 존 밀턴_실낙원• 아타나시우스_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J. I. 패커_하나님을 아는 지식• 리처드 십스_상한 갈대 (글 싣는 순서는 바뀔 수 있습니다.)제임스 이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년 7월 22일 - 2020년 7월 17일) 신중심(theocentricity)은 “하나님 중심”을 간결하게 담아내는 장엄하고도 인상적인 단어이다. 이 단어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핵심이며, 우리가 하는 행동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근원의 힘이시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 누구도 고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쓴 고 J. I. 패커(1926-2020)보다 더 신중심 관점을 잘 드러낸 저자는 없다. 제임스 패커는 상당히 유명하다. 형벌 대속 속죄(penal substitutionary atonement)에 대한 엄격하고도 철저한 성경적 표현, 성경 무오성에 대한 확고한 변호, 그리고 청교도의 공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은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많은 자질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유명한 패커가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왜소한 기독교패커는 하나님 중심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영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했다. 마음의 애정에 생명을 주는 열기가 있으려면, 먼저 그 마음에 성경의 빛이 내리쬐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성경적 지식, 그리고 거기에 대한 인지적 이해야말로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모든 것의 기초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패커의 방식이었다. 패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은 곧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을 아주 왜소하게 축소해 버리는” 것이며, 결국 그렇게 “왜소해진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함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17). 패커가 지금 과장하는 걸까? 이런 말이 단지 신학적 과장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채로 살려고 애쓴다면, 우리 자신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이상하고 미친 듯하며 고통스러운 장소이고, 삶은 실망스럽고 불쾌한 일이다.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하는 것은 눈가리개를 하고서 아무런 방향 감각 없이 그리고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아마도 당신은 사는 동안 내내 비틀거리고 머뭇거리게 될 것이며,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고 영혼을 잃어버릴 수 있다(26). 패커는 독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단지 더 차원 높고 궁극적인 영혼의 만족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아님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하려는 목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수단이 될 때, 그 결과는 자존감 상승, 지역 교회가 누리는 더 큰 권력과 존경, 또는 이 지상에서의 더 큰 부와 같은, 훨씬 덜 중요한 목표로 자신을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패커의 이 저작을 읽고 이해하려는 모든 독자를 위한 그의 기도는 에베소 성도를 향한 바울의 기도와 똑같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의미이고 또 무엇을 수반하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그분의 성품이 어떠한지에 관해 비추시는 성령님의 빛에 의지하여 이미 기록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을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패커는 말한다. 그러나 듣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경청 후에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우리의 삶과 생각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길지에 관해서까지 영향을 미치도록, 기쁜 마음으로 그 진리를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다면적인 방법을 부지런히 탐구해야 한다. 그 탐구는 하나님의 속성과 행동에 대한 면밀하고 진지한 연구를 포함하며, 그 결과 하나님에 관한 탐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어져 그분이 누구이며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뜨거운 찬양과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된다. 어떤 경우에도 패커는 우리가 하나님께 공헌을 하거나 하나님에게 부족할 영광을 공급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찬양과 직접적인 순종, 그리고 우리 앞에 열린 모든 선택 중에서 그를 가장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항상 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그를 높이고 또한 경의를 표한다. 즉,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세 가지 개념이 하나로 융합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종합적인 목표이다(기도, 20)패커는 기독교 희락주의(Hedonism)라는 명시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점을 근본적인 진리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모든 활동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그를 위해 존재한다”(Hot Tub Religion, 36). 우리는 그를 영원히 즐거이 누림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존재한다. 계속해서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옳다면, 하나님께서도 같은 목적을 갖는 것이 잘못일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높은 목적을 가질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럴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작은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그건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스스로를 위해 사는 것이 옳지 않은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단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향해 범사에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시기를 멈추라는 요구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을 향해 존재하지 말라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신성모독은 없다(Hot Tub Religion, 38).하나님의 속성 찬양하기그 어떤 책도, 또한 우주의 모든 책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다 확인하고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패커는 성경에서 특별히 강조된 하나님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의 연구를 제한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성숙하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이다. 그는 빌립보서 3:7-10에서 지나간 모든 것을 “배설물” 즉 “똥”으로 여겼다고 말한 바울의 감정을 다시 한번 되풀이한다. 패커는 바울의 의도가 그러한 것들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의 말은 또한 그것들을 계속 마음에 둔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향수에 젖어서 멍하니 똥거름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겠는가? 하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이 바로 이러한 일을 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37).믿는다고 공언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조차 하나님의 속성 중 일부가 일상생활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패커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리는 언제나 영적 변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 항상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영광스럽고 안도감을 주는 약속,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에 해당하는 신성한 불변성을 우리가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위엄, 측량할 수 없는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 관해서도 장을 할애한다. 하나님은 또한 확고하게 의롭거나 거룩하지 않으시면 결코 하나님이실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 아예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려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지만, 패커는 죄를 향해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은 그 어떤 경배와 헌신을 받을 가치도 없다고 믿는다. 이 책에서 많은 깨달음을 주지만 동시에 반직관적인 내용이라고 볼 수 있는 게 바로 하나님의 질투에 관한 부분이다. 왜 그런지 궁금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질투”(출 34:14)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하고 구속한 자들에게 전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을 요규하시며, 그들이 신실하지 못함으로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다면 단호한 행동을 취하심으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보이시리라는 의미다”(271).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아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면, 이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패커는 이 책이 기독교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1993년 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이 100만 부가 넘게 팔렸고, 12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에 패커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른다. 그런데 그때로부터도 거의 30년이 지났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이 고전에 관해 훨씬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 놀라운 책을 합당하게 평가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패커 자신이 이 책에 관해 결론 내린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이 책을 읽고 독자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 점에서 시편 기자의 마음에 더 가까워진다면 이 책은 헛되이 쓰인 것이 아닐 것이다(447). 원제: Knowing God: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제임스패커
하나님을아는지식
기독교고전
무오한말씀
시편기자의마음
하나님중심
하나님의속성
팀 켈러는 왜 ‘도시 선교’를 말하는가?
by 고상섭
2022-07-20
팀 켈러의 센터처치는 복음, 도시, 운동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비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복음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키는 연합운동으로 복음 생태계를 만들어 도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팀 켈러를 언급할 때 지금까지 가장 많이 대두된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복음’과 ‘복음설교’일 것이다. 복음의 재발견은 너무 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복음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복음은 반드시 도시로 그리고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 도시인가? 도시선교라는 단어는 많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도시를 선교해야 한다면 농촌은 선교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팀 켈러가 말하는 ‘도시’는 단순히 농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도시가 아니고 또 농촌선교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팀 켈러가 도시에 집중하는 이유는 도시는 단위면적당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도시에 몰려서 살고 있고, 이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문화와 사회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도시의 변화는 한 개인의 변화를 넘어 도시 속에 창출된 경제, 정치. 법질서, 문화의 변화를 촉진한다. 오늘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개인의 성향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 내러티브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도시의 개념에 눈을 뜨지 못하면 복음은 단지 개인의 구원에만 집중하게 되고 구조적인 사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도시를 선교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룰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한다는 뜻이 된다. 도시의 긴장도시는 사람들이 몰려 밀집된 곳이라 도시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면 선교적 확장성을 가질 수 있지만 또한 죄의 온상지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타락한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모여 있는 도시에는 안정과 안정, 다양성, 생산성과 창조성이라는 일반은총의 긍정적 요소도 있지만 죄와 타락이라는 부정적인 모습도 가득하다. 그래서 교회는 도시에 빛을 비추어서 선한 영향력을 통해 문화를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소금이 되어 도시의 부패를 지연시켜야 하는 책임을 함께 가지고 있다. 도시의 긴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시를 변화시키겠다는 기독교 승리주의식 사역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도시는 교회가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이지만 교회의 힘만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곳임을 인식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도시의 완전한 변화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날의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예고편으로 나침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8).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인간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곳임을 이해하라고 권면한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노력한 만큼 열매가 거두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노력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밭의 채소’의 위로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세상 속에 있지만(도시가 완전히 변화되지 않지만) 우리가 먹을 밭의 채소를 통해(하나님이 주시는 변화의 예고편과 맛보기) 우리는 소망 가운데 실망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이상주의는 속삭인다. 일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고 영향을 끼치며 새로운 것들을 내놓으며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라고. 반면에 냉소주의는 비아냥거린다. 일한들 뭐가 변하겠어? 쓸데없는 희망을 품어서는 안 돼, 그저 먹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지, 너무 공들이지 말고 여건만 되면 당장이라도 집어치워”(팀 켈러,일과 영성, 111쪽).본래 의도된 만큼은 아니지만, 우리의 노력은 여전히 얼마쯤 열매를 맺는다. 도시는 교회가 원하는 만큼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나그네로, 천국의 시민권자로 이 땅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임을 선포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 나라가 저기 있다는 나침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도시와 구원 구약 시대의 선교는 구심적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세상 가운데 이방의 빛이 되어서 많은 이방 민족들이 유입되는 중심을 향해 바깥에서 모여드는 흐름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시바의 여왕이 와서 감탄하는 형태의 선교적 모델이었다. 신약 시대 선교는 원심적이다. 중심에서 바깥으로 향해 움직인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천국을 약속하셨지만 또한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 파송의 사명을 함께 주셨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예수님이 교회를 향해 주신 소명은 세상으로 파송이며 이것은 곧 도시를 변화시키라는 부름이다. 도시목회와 선교의 저자인 하비 칸 교수는 선교신학적으로 ‘도시선교’를 단순히 선교라는 개념에 도시만 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시선교를 새로운 선교학작 장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도시를 선교하는 것은 기존 선교의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1) 접근 가능한 미전도 종족 이전엔 선교지로 나가서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이 많았지만 요즘 도시는 많은 외국인 노동자와 학생들이 유입된다. 국가에서 복지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있고, 이주자들과 이민자들은 여러 가지로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에 가장 효과적인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선교의 불모지에서 선교를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선교적 환경이 훨씬 좋은 곳에서 새로운 이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할 때 미전도 종족에 대해 쉽고 효과적인 사역을 할 수 있게 된다. 2) 젊은 세대도시에는 젊은 세대들이 몰려 있다.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18세에서 34세 사이의 미국인 중에 55퍼센트가 뉴욕 시에 살고 싶어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직장이나 학교 주변에 머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더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주로 삶과 환경에 변화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직장을 가거나, 결혼과 출산을 했을 때이다. 삶의 변화가 있는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양육한다면 새롭게 직장을 구하고 사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믿음으로 도시를 변화시킬 귀한 자원들이 된다. 3) 문화적 엘리트도시는 출판, 미디어, 학문, 예술의 영역이 모두 종합적으로 모여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그 문화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시대정신이 된다. 제임스 헌터는 문화가 변화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이 변방에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의 네트워크라고 말했다. 문화적 엘리트들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고 그것을 수용해서 활용하는 교양인들이 많아질 때 문화는 운동이 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오늘날 세계에 있는 젊은 세대들은 비슷한 문화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문화를 함께 공유하기 때문이다. 헝가리에 사는 청소년들이 뉴욕에 사는 청소년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맨해튼과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문화 생산물이 세계에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방식 중 하나는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엘리트들이 복음의 가치를 가지고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복음과 연결할 때 도시의 문화는 복음의 가치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4) 빈곤층 도시는 명암이 확실한 곳이다. 화려한 면이 있지만 어두운 면도 있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쇼핑몰 뒤에 보이지 않는 빈곤층과 노숙자들이 함께 있는 곳이 도시이다. 급성장하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1/3이 판자촌에서 살고 있다는 보고도 있다. 세계 빈곤층의 대다수는 도시에 살고 있다. 도시에서 엘리트를 전도하는 것과 빈곤층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빈곤층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교회의 존재 이유와 타당성에 중요한 표시가 된다. 그리고 빈곤층을 섬길 때 필요한 돈과 자원은 엘리트들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빈곤층과 도시의 필요를 위해 엘리트들의 돈과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도시 교회는 빈곤층에 대한 사역과 엘리트에 대한 사역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빈곤층을 돕기 위해서 엘리트들의 경제적, 문화적 자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빈곤층에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메시지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문화 엘리트층에 대한 전도가 된다”(센터처치, 345쪽).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 싶어 했다. 아마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기 때문일 것이며, 로마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 시대의 로마처럼 오늘날 세계의 도시들은 그 중요성과 영향력이 계속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도시 사역을 강조하고 지원하는 것보다 선교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모든 교회는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교적 교회의 핵심은 성도들의 선교적 삶이어야 한다. 이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는 길이 바로 도시를 복음으로 품는 것이다. 사람들을 전도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다음 세대를 전도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세상의 문화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문화를 창조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려면 우리는 반드시 도시로 가야 한다”(센터처치, 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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