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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짧은 삶은 헛되지 않았다
by John Musyimi
2023-05-07
투기 음부구와 무시미는 9개월 동안 우리 가족이었다. 2022년 7월 어느 시점에 하나님은 내 아내의 자궁에서 그를 만들기 시작하셨다. 투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 부부는 흥분했다.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켜달라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매달 의사를 만나면서 우리는 투기가 화면 속 작은 콩 모양의 깜박임에서 완전히 사람의 형태를 갖춘 아기로 커가는 것을 보았다.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고 또 자궁에서 움직이는 투기를 느꼈다. 힘찬 발차기와 강한 심장 박동은 건강하고 활동적인 아들의 모습을 기대하게 했다. 스캔을 통해서 우리는 3D로 만들어진 투기의 얼굴 이미지를 받았는데, 나는 아기가 나와 똑 닮았다고 결론지었다. 아내는 내 의견에 약간의 반발을 보였지만, 적어도 입술만은 무시미 가족이 가진 유전자의 힘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우리는 아기에게 다섯 번째라는 의미의 “T5”라는 별명을 붙였고, T로 시작하는 이름을 찾는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주로 아이디어를 내는 건 나였고, 그중 대부분은 폐기되었다. 아기의 형제인 타지, 타미, 티아, 그리고 탄도, 하나 같이 T로 시작하는 녀석들이 제안한 몇 가지 이름도 하나 같이 다 정중하게 거절되었다. 아이들은 새 가족을 맞을 기대에 부풀어 다들 매우 기뻐했다. 우리 부부는 아기를 “T5”라고 불렀지만, 아이들은 그냥 “아기”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아기에 관해서 수백 개가 넘는 질문을 쏟아냈다. “아기는 무엇을 먹나요?” “아기도 말을 하나요?” “아기가 지금은 자고 있나요?” “아기는 언제 나오나요?” “아기는 어떻게 나오지요?” (마지막 질문에 잠시 어색한 침묵으로 대응하던 아내와 나는 “숙제 끝냈어?”라며 화제를 돌렸다.) 투기의 직속 전임자, 그러니까 바로 위 형제인 탄도는 투기를 위한 전용 녹색 컵을 선물로 준비했다. 아이들은 항상 투기에게 “안녕, 아가야”라고 말했다. “안녕, 아가야.” “아가야, 잘 자.” 투기는 태어나기 전부터 온 가족과 친구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선사했다. 투기는 사랑받았고 보살핌을 받았다. 또 투기에게는 좋은 환경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2023년 3월 22일이 되었다. 떠났다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 뱃속을 돌아다니던 투기가 탯줄을 목에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생명의 기운이 빠져나갔다.아내 뭄비는 그날 투기가 평소보다 덜 움직인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아내는 그녀의 할머니와 함께 투기 출산에 필요한 마지막 준비를 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기에 투기가 자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38주가 되면 자궁 공간을 더 많이 차지한 아기의 움직임이 줄어드는 건 흔한 일이라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 다음날 의사에게 갈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의사를 만났다. 첫 번째 스캔, 심장 박동이 들리지 않았다. 두 번째 스캔, 의사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문제가 있습니다.” “아기가 죽었습니까?”“네.”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괴로웠다. 그러나 부서지지 않았다.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주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그들은 그 즉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 칸 병원 산부인과에서 아내의 힘든 진통과 분만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미 죽은 아기를 낳기 위해서는 남다른 강인함이 필요했다. 그래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아내는 그 과정을 이겨냈고, 24시간 후에 우리는 어린 투기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장례 예배를 드렸고 우리는 시신을 랑아타 묘지에 묻었다.투기를 보낸 우리는 임마누엘 침례교회 성도들에게서 특별한 위로와 보살핌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보살핌은 계속되고 있다. 기도와 심방, 전화와 문자, 음식 배달, 경제적 지원에 이르기까지. 친척들도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를 섬겼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관심과 지원을 제공했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분 중에 이 글을 읽는 이가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투기의 삶은 품위와 가치로 가득했다. 자궁에서 살았던 268일 동안, 투기는 우리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해주었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1. 투기는 우리 가족이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감사하게 만들었다. 자궁 스캔이라는 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복잡하고도 지혜로운 경이로움의 현장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2. 투기는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투기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는 기쁨이었다. 심장 박동 소리, 발차기와 움직임, 3D 스캔의 얼굴 사진, 태어날 때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누린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선물이었다. 3. 투기는 우리를 기도로 이끌었다. 투기는 우리 기도 속 간구와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건강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투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다.4. 투기는 우리 결혼 생활을 풍요롭게 했다. 투기를 임신한 내내 우리 부부는 서로를 섬길 많은 기회를 얻었다. 투기가 없었다면 하나같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했는지 모른다.5. 죽음을 통해서, 투기는 희미하지만 또렷하게 복음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투기를 통해서 우리는 아들을 잃은 또 다른 주인공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둘의 죽음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은 그가 잃은 아들을 통해서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고 죽도록 내어 주셨다. 그의 죽음은 투기의 죽음과 달리 사고가 아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그를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대속하기 위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무덤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부활은 언젠가 투기 또한 우리와 함께 부활할 것을 보장한다.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으로 우리는 투기를 다시 만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 함께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할렐루야!투기의 삶은 짧았지만, 결코 허사로 끝난 게 아니다. 투기의 삶은 결코 낭비된 게 아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허락되었지만, 투기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우리 부부는 비록 고통의 먹구름 아래를 지나야만 했지만, 주의 백성을 통해 주님의 깊은 긍휼을 체험했다. 슬픔도 크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다. 갑작스러운 투기의 죽음에 마음이 상한 우리는 우리를 단련시키는 몽둥이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고백할 뿐이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욥 1:21).어린 아들을 잃은 다윗 왕이 내린 결론보다 더 좋은 말은 없다. “나는 그에게로 갈 수 있지만, 그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소”(삼하 12:23).잘 가라, 아들아!원제: My Son’s Short Life Was Not a Wast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자녀의죽음
고통
성경적 창조의 관점‘들’ (1)
PCA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
by 이윤석
2023-05-06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창조에 대한 팀 켈러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자료 중 하나가 미국장로교회(PCA) 교단의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이다. 팀 켈러가 사역했던 리디머교회도 이 PCA 교단 소속이다.PCA 교단은 점증하는 다윈주의 진화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자 창조연구위원회(Creation Study Committee)란 명칭을 부여한 특별 위원회를 1998년에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2년간 연구를 진행했고 2000년 제28차 PCA 교단 총회에 그 결과를 보고했으며, 총회는 이 보고서를 인준했다. 이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Creation Study Committee)[1]는 창조에 대한 여러 관점을 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연구하고 정리하여 교단 차원의 입장으로 정리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 PCA 보고서는 창조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상당히 철저하게 검토했으며,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작업이 진행되었으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개혁주의 신학 또는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단이 참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지침이 된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따르는 교단과 교회에 유용할 것이다.먼저 PCA 창조연구위원회는 어떤 신학적 입장에서 이 작업을 할 것인지 합의하였는데, 다음과 같다.1. 우리는 성경, 그리고 창세기 1-3장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2. 우리는 창세기 1-3장이 모세의 일관성 있는 진술임을 확언한다. 3. 우리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가 이 장들을 나타내는 타당한 범주라고 믿으며, 더 나아가 그 역사도 참이라고 믿는다. 4. 이 장들에서 우리는 무로부터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기록, 그리고 모든 인류의 부모이자 실제 인간 존재인 아담과 하와의 특별한 창조(따라서 그들은 낮은 형태의 생명체로부터의 진화의 산물이 아니다)를 발견한다. 5. 우리는 또한 이 장들에서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의 상태로 만든 역사적 타락에 대한 진술, 그리고 구속자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발견한다. 6. 성경은 창조주이자 모든 존재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역사적 과학적 연구로 탐구되는 주제들에 대하여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옳다. 7. 우리는 또 비-지구중심 천문학(non-geocentric astronomy)을 수용하는 것이 성경적 권위에 대한 완전한 복종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8. 우리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참된 기독교 신앙과 조화되지 않음을 인정하며, 기꺼이 성경적 초자연주의 입장에 선다.[2]팀 켈러를 비판하는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겠지만, 이 위원회가 작성한 PCA 보고서는 젊은지구론만을 타당한 창조의 관점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은 젊은지구론이 아니면 무엇이든 유신진화론인 것처럼 싸잡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PCA 보고서는 ‘창조에 대한 네 가지 관점’을 허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관점으로 인정한다. 그 네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다.첫째, 역일 해석(the calendar-day interpretation) 관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의 하루를 24시간으로만 보는 관점이다. 창세기 1장을 역사적 내러티브로 보며 문자적 해석만을 주장하고 역사성을 인정하는 관점이다. 이 역일 해석 관점은 부인할 수 없는 다수 견해이다. 그래서 PCA 창조연구위원회도 이 관점을 첫 번째로 언급한다. 그러나 이 역일 해석 관점의 설명에 약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둘째, 날-시대 해석(the day-age interpretation) 관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이 24시간 하루가 아닌 아주 긴 기간 또는 시대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각 시대는 대체로 순차적이긴 하지만 중첩되거나 포함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 관점도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은 인정한다. 날-시대 해석 관점은 역일 해석 관점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 특히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항들을 좀 더 잘 설명하는 장점이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약점도 있다.셋째, 틀 해석(the framework interpretation) 관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을 은유로 이해하며, 창조의 날들이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배열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을 일반적인 날들이라 여기지만 24시간 하루의 특정한 기간으로 보지 않으며 비유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일체 반대한다. 틀 해석 관점은 역일 해석 관점이나 날-시대 해석 관점과 달리 창조의 날의 길이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창의적인 해석이다. 물론 이 관점도 여러 가지 약점을 갖고 있다.넷째, 유비적 날들 해석(the analogical days interpretation) 관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이 인간 관점에서의 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날들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인간 기준에서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의 날이기 때문에 날의 길이도 24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또 초자연적이면서도 역사적이고 연속적인 것으로 여긴다. 유비적 날들 해석 관점은 젊은지구론이나 오래된지구론과는 양립할 수 있지만 유신진화론과는 양립할 수 없다. 물론 이 관점도 여러 가지 약점을 갖고 있다. PCA 창조연구위원회는 위 네 가지 관점을 교단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는 관점이라고 판단하고 총회에 보고하였다. 위원회가 이 보고서를 총회에 제출하면서 제시한 핵심적인 권고 사항은 다음과 같다. “개혁신학 안에는 신학자들 간에 역사적으로 창조의 날들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었고, PCA 교단의 시작부터 다양성을 허용해 왔으므로, 총회는 어떤 관점이 이 보고서에서 다루어진 내용대로 창조에 대한 설명이 충분한 역사성을 받아들이는 한 수용 가능한 관점이라고 확언한다.”[3] 위원회의 이런 권고는 우리도 귀담아들어야 한다.우리는 PCA 교단 소속인 팀 켈러가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보다는 훨씬 유연한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세상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 젊은지구론‘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주1. PCA, Report of the Creation Study Committee, 2302.2. PCA, Report of the Creation Study Committee, 2364.
창조과학
창조연구위원회보고서
날시대해석
역일해석
유비적날들해석
틀해석
유신진화론
젊은지구론
오래된지구론
어린 아이들과 같이
by Jared Kennedy
2023-05-05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물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 18:1).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9:46-48은 제자들이 그들 중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인지를 두고 다투었다고 말한다. “내가 가장 큰 사람인가요? 내가 승진할 사람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과 같다. 당신이라면 이렇게 지나치게 야심 찬 목회 후보생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기중심적인 질문에 반문화적인 대답으로 반응하신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라.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영접하라.”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을 환영하는 일은 예수님에게는 로비나 지정된 가족 출입구에 놀이터를 갖추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다. 좋은 간판을 달거나 아이들의 이름을 환하게 웃으며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어린아이를 환영하는 일은 바로 어린아이의 자세를 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서로 누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인지를 두고 제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예수님은 한 아이를—제자들 중 한 명의 아이 일수도 있다—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18:3).겸손에 대한 반문화적 부름예수님의 시대에 유대인은 우리 문화와 같이 가족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구약은 자녀를 주님이 주시는 유산이자 상급으로 묘사한다(시 127:3). 그만큼 자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하신 언약의 중심 역할을 했다(창 3:15, 12:2, 15:5). 동시에 유대인은 아이들을 낭만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는 거버 유아식 광고나 베이비 갭 매장, “이 달의 아기” 달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구약을 포함한 당시 유대 문학은 청소년과 어린아이를 일관된 훈육과 시정이 필요한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현실적이게 묘사한다. 주디스 건드리(Judith Gundry)가 쓴 것처럼, 유대 문학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이들이 성인의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이고, 그리스-로마 환경[당시 점령 문화]에서 아이들과 비교되는 이것은 매우 모욕적인 일"이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대답하여 그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분명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성숙과 지혜는 나이와 함께 쌓인다. 그렇다면 왜 반대로 가야 할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 18:4-5).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낮은 신분 때문에 제자들에게 그들과 같이 되라고 요구하셨다. 또한, 돈 카슨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이 이상으로 높여지고 있다. 무죄, 깨끗함 혹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겸손함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제자들이 어린아이와 같기를 예수님이 바라신 이유는 어린아이들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똥을 싸고, 울고, 말썽을 부린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어린아이들처럼 자신들도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길 바라셨고, 우리 또한 이 사실을 깨닫기 원하신다. 지위에 대한 관심 내려놓기 어렸을 때 넘어져 앞니 두 개가 빠진 적이 있다. 덕분에 이제 그 자리엔 인공 치아가 있다. 최근 어느 토요일 밤에 어디에 부딪혀 그 중 하나가 흔들렸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다음날 아침 예배 시간에 주일학교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한창 가르치고 있을 때 한 남자 아이가 손짓을 하면서 말했다, “목사님! 이빨이 빠졌어요!” 그 아이 말이 맞았다. 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그 앞니가 빠졌다! 이런 부족한 순간들을 통해 나는 내가 이끄는 아이들만큼 엉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필요하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처럼 요즘 시대의 제자들도 본인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복음적인 책들을 읽고, 제자훈련을 받고, 종종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수천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있어야 인정받았다는 느낌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상을 받아야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위에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인정과 교만에 빠지는 우리의 경향 때문에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위대해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C. S. 루이스는 겸손의 명령을 이해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중심적인 지위에 빠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러분이 정말 겸손한 사람을 만난다면 ‘요즘 사람들이 흔히 겸손하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겠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저야 정말 부족한 사람이지요”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느끼하고 역겨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주는 인상은, 여러분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쾌활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인생을 너무 쉽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데 약간의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그는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자기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자신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한 처방은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고 몸을 굽혀 낮은 자들, 특히 “작은 자들”(마 18:10)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으로 이끌린 삶의 모습이다. 결국, 예수님은 몸을 굽혀 제자들을 섬기심으로써(요 13:1-17; 빌 2:1-11), 우리를 섬기기 위해 몸을 굽히심으로써 겸손을 받아들이셨다. 이제 우리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낮은 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영접하도록 부름을 받았다(요일 4:19).원제: Be Like Children: Jesus's Surprising Advice for Growing in Christian Matur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창호
어린이
겸손
성숙
죽는 날이 더 좋은 그런 삶을
by 정현구
2023-05-04
인생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 더 좋은지를 죽음이라는 순간을 고려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곧 ‘좋은 기름’을 가진 사람(전 7:1)은 태어난 날을 크게 잔치하며 해마다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을 곧 현재를 즐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결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그에게 죽음의 순간이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름을 다 앗아가는 순간 더도 덜도 아닙니다.하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곧 ‘좋은 이름’의 사람은 어떠할까요? 그에게는 태어난 날도 귀하고, 현재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귀중한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게 될 순간입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시간도 복되지만, 이 땅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날은 더욱 복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은 날이 됩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7-8)바울 사도는 자기 생명의 촛불이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안타까워하지만은 않습니다. 도리어 최선을 다해 주어진 길을 힘써 달린 자신을 맞이하실 의로운 재판장 예수님을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가장 복된 날은 어떤 날이었을까요? 이 땅에서 육신의 생명을 얻은 날보다, 또 지금 살아가는 현재보다, 하나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그날 곧 죽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산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내일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최후의 순간은 곧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진정으로 내일이 더 좋은 삶을 살았습니다.우리도 바울처럼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고 더 축하해야 할 날이 되는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태어난 날도 좋지만 죽는 날이 더 좋은 그런 인생이 될 때, 또 살아있는 이 순간도 좋지만 죽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이 더 좋은 그런 사람이 될 때, 그런 인생이 진정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전도서
죽는날
복된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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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계승의 세 가지 원칙
by T. J. Tims
2023-05-03
목회 계승은 복잡한 문제이다. 사실 복잡하지 않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된다. 영적, 정서적, 제도적 역학 관계를 다 같이 다루는 것은 항상 복잡할 수밖에 없다. 특히 관계가 큰 부분을 차지하는 목회 계승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얼마든지 아름다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약 4년 전 임마누엘 내슈빌 교회에서의 담임 목회자 전환 기간은 독특하고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장로들은 나의 전임자인 레이 오틀룬드 목사와 함께 힘을 합쳐서 애초 모두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관계적으로 현명하고 또 온전히 성령님에게만 의존하는 계승의 길을 계획했다. 그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이었다. 물론 되돌아보면 개선할 부분도 있지만, 나는 앞으로도 그때와 똑같이 뛰는 심장으로 행복한 목회의 길을 걸을 것이다.다음은 임마누엘 교회에서 누린 즐거운 경험과 그 이후 몇 년간의 신학적 성찰에 기초해서 뽑아낸 목회 계승을 위한 세 가지 원칙이다. 1. 차분하게 또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39:23)전환기를 맞은 교회는 예수님만 바라보지 않고 이런저런 계획과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쉽다. 그러나 창세기 39:23이 강조하는 길은 우리의 그릇된 경향과 정반대되는 방향이다. 모든 축복은 신실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주님의 준비하심으로 인한 것이다. “주님께서 요셉을 돌보셔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 되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요셉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실하고 올바른 방법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넓은 축복의 길을 주심으로 그의 능력을 넓히신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긴장을 푸는 것이다.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우리의 위대한 지혜가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계획을 사용하신다. 제도적 정착 과정이 성공했다고 칭찬하는 데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많은 계획이 성공하는 것은 모범 사례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최고의 구원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모든 목회 계승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능력 있는 복음의 본질에 “더욱 유념”하는 것이다(히 2:1). 목회 계승이 교회 전체를 뒤덮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때일수록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차분하고 확신에 찬 믿음이다. 그 믿음은 가장 본질적인 요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리는 데에서 비롯한다.2. 뜨거운 기도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사도행전 12:5)특별한 필요는 특별한 기도를 요구한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사랑하는 목사인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서 살아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진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위해서 갑절로 기도했다. 이 사건이 목회 계승과 어떤 관련이 있음은 명확하다. 사랑이 넘치는 교회일수록 목회자를 잃는다는 생각에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건 당연하다. 그러나 위기의식은 기도에 활력을 준다. 물론 적절한 계획도 세워야 한다. 성경은 현명한 계획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진정한 확신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획에 함께하심을 아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뜨겁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뿐이다. 우리 교회에서 목회 계승 기간에 실천했던 하나님을 찾는 방법의 하나는 온 성도가 함께 모여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 모임을 통해서 우리는 목회 계승에 대한 업데이트를 제공하고, 피드백을 듣고, 교회와 도시를 위해 최전선에 선 기도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기도회는 정기적인 의사소통뿐 아니라 성공적인 계승에 필요한 관계의 형평성을 구축하게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임을 통해서 교인들이 올바른 관점에서 목회 계승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무슨 관점인가? 바로 목회 계승을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인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릴 것인가의 관점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3. 사랑을 표현하라그리고 모두 실컷 울고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들을 가장 마음 아프게 한 것은, 다시는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울의 말이었다. 그들은 배 타는 곳까지 바울을 배웅하였다. (사도행전 20:37-38)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관한 사회적 생태계를 창조하셨다. 예수님은 그 새로운 생태계를 교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의 가슴 아픈 이별 장면을 통해서 사랑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목회 승계를 생각하는 교회라면 담임 목사의 사역으로 인해 축복받은 교회일 가능성이 크다. 목회 승계는 일반적으로 안정되고 성숙한 사역의 표시이며 퇴임하는 목회자에 대한 감사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감사와 이별의 슬픔은 성공한 목회를 의미한다. 목회 승계는 단지 최고경영자가 바뀌는 게 아니라 슬픔과 기쁨의 뒤섞임이다. 내 전임자를 통해서 나는 교회가 목회 계승이라는 전환기를 잘 넘기는 유일한 방법은 퇴임하는 목사에게 교회의 애정을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배웠다. 전임자가 바른 목회를 했다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표현하고 당연히 경의를 표해야 할 곳에 표할 때 비로소 교회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차기 담임 목사와 마음과 손을 잡고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목회 계승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조직적이고 절차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관계적인 것임을 바로 깨닫길 바란다. 영적인 부분은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다. 게다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교회마다 관계의 측면에서 다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 목회 계승에는 교회마다 독특한 지도가 필요하다. 나는 여러분의 교회를 모르기에 지도(map) 같은 걸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소개한 세 가지 원칙을 참고로 해서 여러분의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 지도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목회 계승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길 간절하게 기도한다. 원제: 3 Principles for Pastoral Success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계승
목회리더십
에베소교회
벌레도 미션이 있다
by 필립 정
2023-05-02
경쟁과 성과를 위해 잠을 쫓으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불면증은 쫓아내기 힘든 불청객이 되었다. 이 불청객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의미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진한 아이스티를 마신 탓에 잠들지 못해 컴퓨터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다양한 자연의 소리가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천둥소리, 빗소리, 물 흐르는 소리, 또 여치나 귀뚜라미 같은 벌레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심신이 안정되어 느지막이 잠들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벌레들은 왜 그리도 밤새 울어댈까! 하루 미션에 지친 한 인간 잠재우려고 그리 울지는 않을 텐데….곤충을 인간에게 백색소음이나 제공해 주는 예능 충 정도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의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 수가 심상치 않게 많다. 지구에 있는 동물 중 80퍼센트 이상이 곤충이다. 현재 150만 종의 곤충이 있다고 보고 되지만, 과학자들은 200만 종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산할 정도다. 이렇게 종과 수가 많은 이유는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그들의 미션이 분명히 있다. 첫째는 꽃가루를 매개해 확산시켜 꽃나무가 성장하고 번식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죽은 동식물을 먹이로 삼아 배설해 썩어가는 물질을 토양의 영양소로 재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벌, 나비, 딱정벌레, 개미 같은 벌레들이 수행한다. 수분 활동이나 유기물을 분해하여 영양소를 재활용하는 일 모두 살아있는 생물이 열매 맺고(Be Fruitful) 번성하도록(Increase in Number) 지원하는 일이다. 이런 지원이 없다면, 지구는 생태계가 붕괴하여 먹거리가 사라지고 썩지 않는 동식물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죽음의 터가 되어 버릴 것이다. 페드로 카르도소(Pedro Miguel Cardoso) 같은 학자는 곤충이 사라지면 다른 동물뿐 아니라 인간들까지 사라지게 된다고 하며 곤충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시사하고 있다.이상과 같이 곤충의 미션을 광의의 개념에서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라(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 보인다. 단지 곤충 자신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물의 생육과 번성을 지원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미션 수행으로 보인다.그럼 곤충 자신들을 위한 생육과 번성을 위한 협의의 미션은 어떻게 수행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 봐야 한다.곤충들은 그 울음조차도 ‘생육과 번성’을 위한 미션 수행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츠르르’ 소리를 내는 여치와 베짱이는 생김새가 비슷하다. 이들의 수컷들은 앞날개를 위로 들어 가슴 근육을 당겼다 늘였다 하며 날개를 비벼 소리를 증폭시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이들은 다른 수컷들보다 더 청량한 소리로 멀리 전달하려고 날개가 닳도록 비벼가며 경쟁하며 밤을 지새운다.귀뚜라미도 여치류와 같이 날개를 마찰시켜 소리를 낸다. 늦여름이면 풀밭에서 시끄럽게 울다가 가을이 익어가면 점차 사람이 사는 집 주변에서 울어 댄다. 가을이 다 지나 추운 겨울이 되면 집 안까지 들어와 드문드문 힘 다 빠진 소리를 낸다. 가을 내내 날개를 비벼 날개에 구멍이 나고 헐거워져 더 이상 매력적인 리릭 테너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귀 기울이는 암컷이 없어 그 노총각 귀뚜라미의 임 타령 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다.여치류나 귀뚜라미류와 다르게 메뚜기들은 낮에 활동한다. 그들의 수컷은 여치류와 다르게 까칠한 돌기가 있는 뒷다리를 신속히 날개에 비벼가며 소리를 낸다. 이런 곤충들은 현 역할을 하는 다리에 날개가 쉽게 상처를 입는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여름 내내 우는 이유는 ‘생육과 번성’의 수행 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수컷 곤충들이 때로는 날카롭고 강한 소리를 낼 때가 있다. 구애 활동을 할 때 다른 수컷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신사협정을 맺는데 이 거리가 좁혀지거나 구애 활동에 방해를 받으면 다른 수컷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경고를 하는 것이다. 개구리들도 다르지 않다. 개구리들은 밤에 단체로 모여 노래하며 암컷을 부른다. 수컷들이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경계하며 제창을 하면 이를 듣고 사방에서 암컷들이 호응하며 같이 울어 댄다. 비가 오면 더 즐겁게 노래한다. 노래 부르기 좋게 목청에 습도를 제공해 주고 피부로도 호흡하는 개구리에게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짝을 찾은 개구리는 결혼에 대한 찬가로, 반대로 짝을 못 찾은 개구리는 애가를 부르며 밤이 무르익는다.곤충들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지구의 생존과 번영을 벗어나서 설명하기 힘들다. 심지어 곤충들이 자기 몸에 생채기를 내가며 노래하는 이유조차도 자신들의 결혼과 후손의 번성을 위해서이다. 이것을 진화론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진화론자들은 곤충의 짝짓기와 산란을 본능을 통한 생존과 진화 그 이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귀뚜라미 노랫소리에서조차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결혼 명령을 듣는다. 그리고 그 작은 벌레가 이를 수행한다.벌레들이 부르는 구혼의 노래가 평화로운 자장가로 들리는 이유가 있다. 주파수 1000에서 1,0000헤르츠 소리의 규칙적인 리듬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어 편안한 잠자리에 들게 한다고 한다. 흐르는 물소리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수컷 벌레들이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가 남의 것 차지하기 위해 애쓰며 하루를 살다 겨우 잠자리에 드는 우리에게 잠을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치열한 생업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벌레의 노래가 그리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은 우리의 이런 구차한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결혼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고 이 명령을 온 우주가 수행하도록 생태계를 관리하고 돌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20년 지구의 날 50주년을 맞이하여 목회자를 대상으로 Christianheadline.com에서 지구의 온난화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 명령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무심함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목회자들의 53퍼센트만이 지구의 온난화가 실제적이며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일반인에 비해 지구의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관심이 적었다고 한다. 복음주의 교회 목회자(39%)일수록 그렇지 않은 목회자 (71%)에 비해 지구의 온난화와 인간의 책임에 대해 무관심함을 볼 수 있다.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미국 교회의 정치적 지지를 받는 공화당의 많은 지도자가 지구의 온난화가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이 개인의 구원에 머무르는 신앙의 한계성을 복음주의 목회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곤충들의 수가 지난 10년간 41퍼센트나 사라졌다. 산업화와 도시화를 위한 난개발로 대기, 수질, 토양이 오염되어 곤충들의 서식처가 사라지며 인간의 삶조차도 위협받고 있다. 개인의 구원이 실존적이지 못하면 그 존립의 근거가 편협하고 유치해 보인다. 타인의 가난과 고통, 약자의 눈물과 설움을 비켜서면 내 개인의 구원이 손가락질받기 쉽다. 인간의 잘못 때문에 자연이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데 인간 자신이 구원받아 만족하고 그친다면 내 구원은 자연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말까. 세상을 지으시고 보기 좋다고 하시며 계속해서 번성해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지구를 살펴보자. 오늘도 귀뚜라미는 열심히 울어대며 하나님의 미션을 수행한다.
목회자 삶의 세 단계
by Mike Minter
2023-05-01
은혜롭게 마무리하는 목회자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이건 몇 년 전 내가 “상급”(고전 9:24)을 얻기 위해 경주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깊이 생각하는 중에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목회자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일련의 장애물이 있다는 뜻일까? 회심자 수, 세례자 수, 또는 재정 규모에 따라서 각각의 목회자에게 점수가 부여된다는 말일까?결국 나는 잘 마무리하는 것은 후회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것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았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의 교회 문을 통해 들어왔는지에 관계없이 목회 기간 내내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끝을 맺는 삶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잘 달리고 있는지 또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목회 과정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에 따라서 이 질문의 답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했건 또는 결승선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건 관계없이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부족한 속도를 다시 올리는 데에 너무 늦어버린 때란 없다. 지금부터 목회자 삶의 세 단계를 살펴보자. 1단계: 상상스스로 생각하기에 뛰어난 성경 해석 능력과 비전을 품은 젊은 목사는 미래를 내다보고 폭발하듯 성장할 교회를 꿈꾼다. 나는 이것을 상상의 단계라고 부른다.교회를 개척했거나 기존 교회를 담임할 때 생길 수 있는 함정을 피할 몇 가지 방법이 있다.1.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목회라는 큰 책임을 감당한다고 해서 나 자신이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뿐이고 당신은 그가 아니다. 겸손하게 사역을 시작하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강제로 겸손하게 만드시는 비극을 피할 수 있다.2. 오로지 주님만을 기대하라. 교회는 주님에게 속한 것이지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수천 명, 수백 명, 또는 수십 명에게 설교하도록 부르셨을 수 있다. 당신의 글이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고, 단지 교회 주보에만 실릴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신다.3. 재능이 아니라 겸손함을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라. 이 점을 제대로 깨닫는 데 나는 몇 년이 걸렸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겸손이 부족한 스태프와 직분자는 옆구리의 가시가 될 수 있다. 재능이나 은사를 경시하라는 게 아니다. 단 그것이 교만과 혼합되는 순간, 당신은 잠 못 이루는 밤, 어색한 회의, 사역의 모든 면을 잠식한 긴장감을 겪게 될 것이다. 4. 작은 문제라고 덮어서는 안 된다. 내가 가장 크게 후회하는 부분이다. 나는 가능하면 평화를 위해서 갈등을 피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치른 값이 만만치 않다. 모든 우려 사항을 다 추적할 필요는 없지만, 썩은 냄새를 감지하면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끄는 것보다 작은 불꽃을 끄는 게 훨씬 쉽다. 내게는 그 점을 증명할 적지 않은 화상 자국이 남아있다. 5.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 일찍 결정하라. 어떤 목회자는 주일 준비에 주당 30-35시간을 사용하고, 어떤 목회자는 병원 방문, 상담 또는 제자훈련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단지 8-10시간만 쓸 수도 있다. 성경이 이 부분과 관련해서 명확하게 알려주는 지침은 없다. 따라서 시간 배분은 당신이 사역하는 장소와 당신의 스타일에 근거해서 내려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마치지 못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6. 모든 개인 미팅은 자세하게 기록하라. 이 기록은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다. 나는 뛰어난 기록자가 아니다. 그래서 피해를 본 적도 있다. 기억은 희미해지지만, 기록은 그렇지 않다.7. 리더십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리더십 밖의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만들라. 좋은 관계는 당신의 사역 상태를 인식하는 방식에 균형을 줄 것이다. 일반 성도들은 종종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리더십이 있다고 항상 나무가 아닌 숲만 보는 건 아니고, 일반 성도라고 해서 항상 숲이 아닌 나무만 보는 건 아니다. 시력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두 개의 눈이 다 필요하다. 외눈박이 교회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8. 선배 목사에게 지혜와 방향을 구하라. 그들은 당신이 처한 상황에 이미 몇 번이나 있었고, 또 어디에 느슨한 맨홀 뚜껑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경험에 의지하라. 2단계: 경험목회 사역의 두 번째 단계에는 종종 흔들리는 소명으로 힘들어진다. 당신에게는 어쩌면 사역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실패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탄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이다. 사탄은 당신을 산만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이 교회에서 내가 뭘 잘못한 거지? 왜 이렇게 사람들이 힘들지? 지난 시간 내내 나는 그런 척만 하고 사역한 건가? 혹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못 읽은 걸까? 엔지니어가 되어야 했나? 후회하는 대신 나는 빌립보서를 통해서 내 생각을 거르고 정리했다. 빌립보서가 어떤 책인가? 바울이 감옥에서 성도의 기쁨을 위해서 쓴 책이다. 빌립보서야말로 철창 뒤의 아이러니이다. 또한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하나님의 사역에 더 열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다음은 2단계의 사역 기간에 좌초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다. 1. 목회자로서 나의 역사를 점검하라. 내가 잘한 것은 무엇이고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내가 가장 많은 열매를 맺은 분야가 어디인가? 우리 교회에서는 나의 사역 20주년을 맞아 ‘하나님의 신실하신 2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축하 행사를 열었다.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삶이 바뀐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게 결코 나 혼자 힘으로 이룬 게 아니라는 사실을 행사 내내 나는 실감했다. 그 기간에 수백 명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했다. 2. 사역 중간 지점에서 수정되어야 할 점을 고려하라. 몇 년 동안 당신을 지켜본 정직한 친구들을 찾아라. 그들은 당신의 사각지대를 알고 있다. 내게는 내가 잘못할 때 또는 깊이 없는 설교를 할 때 용기를 가지고 지적해 줄 사랑하는 형제들이 있다. 그들은 또한 내가 지쳤을 때 바로 알아차렸다. 누구라도 사역으로 고갈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2000년대 초에 사직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고작 몇 달 만에 근처 대형 교회로 거의 천 명의 교인을 빼앗긴 직후였다. 사역의 트라우마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라! 당시에 나는 실패하고 있다고 느꼈다. 장로님 한 분이 내 사직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외쳤다. “우리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역을 계속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교인을 잃는 상실의 고통은 실로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교회가 쓰러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교회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여기에 굳건하게 서 있다. 사역 기간 내내 자신에게 정직하라. 3. 문화의 변화에 주목하라. 도덕적, 윤리적, 기술적 표현은 세대와 종교 배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목회자라면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 내러티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먼지가 되어 사라질지도 모른다. 문화의 변화는 아무런 예고 없이 슬며시 들어올 수 있고, 미처 변화를 깨닫기도 전에 당신의 사역은 시대에 뒤떨어질지도 모른다. 이 말을 기억하라. “뭔가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고, 새롭게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고,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이 있다.” 새로운 문화를 태운 기차를 놓치지 말라. 4. 교회 젊은이와 시간을 보내라. 그들의 인생관을 파악하라. 젊은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당신은 눈을 뜰 것이다. 물론 목회의 어느 단계에서나 이런 과정은 필요하지만, 목회를 시작하고 십 년 또는 이십 년이 지났다면, 반드시 이 작업을 해야 한다. 그들은 당신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사실 삼십 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는 세대 차이가 있다고 해도, 고작해야 몇 인치 정도로만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은 세대 차이를 마일 단위로 벌려놓았다. 나는 십대들과 함께 앉아서 학교생활이 어떤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전투가 무엇인지 묻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장담한다. 그들은 정말로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다. 5. ‘사역’이라고 부르는 이 일에 정말로 마음이 있었는지를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정직하라. 이건 힘든 일이지만, 수십 년의 후회가 되기 전에 꼭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당신 속에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돌보고자 하는 불꽃이 타고 있는가? 과거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면, 꺼져버린 그 불꽃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한 조언을 얻자. 사탄은 의심을 일으키고 소명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시작한 게 사역이라면, 더 늦기 전에 선배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라. 사임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당신이 부름받지 않았다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그 누구보다 당신의 가족에게는 가장 좋은 선물이 될 것이다. 3단계: 백미러3단계는 최소한 25년 이상 사역한 목회자를 위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백미러 단계라고 부르겠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천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고, 가족과 교회, 그리고 친구들에게 유산을 남기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다. 인생에서 가장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모여 과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지혜와 경험의 렌즈를 통해 인생을 바라보고 웃을 때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단계에 들어서면 후회가 생기고 때로는 우울증이나 깊은 슬픔으로 이끄는 성찰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런 질문이 생길 수도 있다. 왜 나를 돕던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왜 그들을 더 잘 이끌지 않았을까? 상담을 훨씬 더 잘 할 수도 있었는데…. 질문과 의심의 목록이 바닷물 위로 솟아오르는 고래처럼 계속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과거의 실패를 지울 수는 없다. 죄 때문이건,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건, 또는 지혜의 부족 때문이건 관계없다. 좋은 마무리는 매일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마무리를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깨끗한 양심”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행 24:16). 바로 이것이야말로 교회를 핍박한, 자신을 죄인 중에 으뜸이라며(딤전 1:15) 후회에 몸부림친 사도 바울이 가장 갈망하던 것이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을 “자기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3:14)이라고 하시고, 죄가 다윗보다 훨씬 적게 기록된 사울을 배척하셨을까? 다윗이 전심으로 회개하였기 때문이다(시편 32편과 51편). 그러나 사울은 불순종을 변명하며 회개하지 않고 다윗을 미워했다.척 스윈돌은 “올바른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백번 맞는 말이다. 목회자로서 (또는 은퇴한 목사로서) 또 지금 몇 살이건, 당신에게는 잘못을 바로잡을 시간이 있다. 깨끗한 양심은 마무리를 잘하기 위한 핵심 요소이다. 죄책감을 누그러뜨릴 만큼 부드러운 베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잘 마무리하는 것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후회로 끝을 맺는 것이다. 치유가 필요한,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관계가 있는가? 좀 더 마음을 담아서 감사를 표현해야 할, 신실한 성도가 있는가? 미완으로 두지 말고 제대로 마무리하라. 원제: 3 Stages of a Pastor’s Lif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목회소명
사역점검
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3호
한국로잔위원회
by 한국로잔위원회
2023-05-01
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3호전체 내용 보기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 3호 (소식지는 매월 말에 발행됩니다)제4차 로잔대회 소식지에서는 한국 준비위원회의 로잔대회 준비 현황과 더불어 한국 교회 성도님들에게 로잔운동을 소개하기 위한 다양한 내용들을 다룹니다.로잔운동의 특별한 소명은 다양한 지역, 다양한 주제, 다양한 연령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진보를 위해 함께 연대하고, 기도하며, 일할 수 있도록 인플루언서와 아이디어를 연결함에 있습니다. 로잔언약에 동의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 세계 복음주의 운동입니다.로잔운동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제1차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의 결과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세계교회는 서구 중심의 기독교왕국(Western Christendom)에서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로의 본질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교수는 20세기 후반에 발흥한 세계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교리적 교회사는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현상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합니다. 기독교 복음이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전달될 때, 현지 문화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글로벌한 관점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4년 한국에서 열릴 제4차 로잔대회는 세계 기독교의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세계 모든 대륙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세계교회가 함께 듣고 나눌 때, 세계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열정이 새롭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향한 비전이 회복되는 제4차 로잔대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국제 로잔운동 이사, 제4차 로잔대회 한국 준비위원회 총무 | 문대원 목사대구동신교회 저널팀 모임 4월 7일(금), 대구동신교회(문대원 목사) 참신관 4층 선교회실에서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제4차 로잔대회 한국 준비위원회 총괄기획본부장 이대행 선교사(엠브릿지)와 대구동신교회 저널팀(박주용 목사, 김태수 목사, 김용음 목사, 권오경 전도사)이 한자리에 모여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제4차 로잔대회의 의의와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깊게 나누었다. 또한 대구동신교회 저널팀을 중심으로 앞으로의 제4차 로잔대회에 관한 기사와 홍보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만들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며 진행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여러 방안을 논의하였다.
오늘의 교회가 갖춰야 할 새로운 앞마당
포치에서 나누는 레모네이드 한 잔: 탈 기독교 사회에서 복음 전하기 1-3
by Tim Keller
2023-04-30
이 글은 문화로서의 기독교(cultural Christianity)마저 퇴색하는 서구 세계에서 복음을 계속해서 나눌 방법을 모색하는 2부작의 첫 번째입니다. 1-1. 교회 앞마당이 사라졌다• 포치의 중요성• 앞마당의 종말1-2. 앞마당의 상실: 미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예외”• 미국 교회의 실패1-3. 오늘의 교회가 갖춰야 할 새로운 포치• 포치를 만드는 교회들• 포치와 “전복적 성취” • 일반 은총의 기초 위에서 포치(porch): 건물의 입구나 현관에 지붕을 갖추어 잠시 차를 대거나 사람들이 비바람을 피하도록 만든 곳. 출처_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포치를 만드는 교회들 해결책은 단 하나다. 미국 교회는 교회의 포치를 만들기 위해서 더 이상 문화에 의존할 수 없다. 교인들은 이제 아직 “집” 안으로 들어올 준비가 되지 않은 외부인에게 레모네이드를 대접할 수 있는 포치를 그들의 교회에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외부인을 준비시켜야 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교회의 포치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포치라는 은유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일반적인 교회 예배와 교육 외에 유익하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기독교에 노출되는 장소를 설명한다. 내가 “장소”라고 말할 때, 그것은 반드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일련의 관계이다. 이 공간에서 불신자는 자신이 침입자나 용인된 방관자, “보호관찰자”가 아니라, 사랑받고 완전히 받아들여진 “인정받은 참여자”라고 느낀다.포치에서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꾸준히 기독교에 노출된다. (1) 그들이 기독교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별 그리스도인의 삶이 모범이 될 때도 그렇게 될 것이고, 또한 지역 사회에서의 봉사(가난한 사람을 돌봄), 예술(문학, 음악, 극장), 교육(기독교 학교)을 통해 기독교가 가시적으로 드러날 때도 가능하다. (2)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질문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공간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의 의심과 질문에 대해 진심으로, 참을성 있게 경청하고, 또 겸손한 마음과 사려 깊은 태도로 응답해야 한다. 물론 질문은 양방향으로 진행된다. 포치에서,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하고 문화적 내러티브—우리는 비관용에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와 “항상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를 끈기 있게 검증하게 된다. (3) 마지막으로,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기독교가 (그리스도인의 내부 전문 용어 대신에) 그들의 언어와 어휘로 제시되어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그들에게 제시하는 답이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질문을 충족시킬 때,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직관과 믿음보다 더 잘 그들의 가장 큰 포부와 희망을 채워줄 때 가능하다. 이러한 특성을 모두 공유하는 교회의 포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제공된다. 오늘은 네 가지만 소개하겠다. (다음 글에서 더 많은 사례와 훨씬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겠다.)1950년대와 1960년대에 스위스에 있던 최초의 라브리 센터는 유럽의 젊은 비신자들이 와서 신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깊은 환대를 경험하고 믿음과 의심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었다. 오늘날 대학 캠퍼스 근처에 있는 “기독교 연구 센터”가 이러한 기능을 한다.학문적 우수성으로 지역 사회에서 큰 평판을 얻고 특정 교회에 공식으로 또는 비공식으로 소속된 기독교 학교는 자녀를 그곳에 보내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는, 믿지 않는 많은 부모를 위한 교회의 포치가 될 수 있다.저렴한 주택을 짓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다른 필요를 채워주는 봉사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이, 특히 특정 교회가 주관할 때, 꾸준히 자원봉사를 하는 비신자에게는 교회의 포치가 될 수 있다.소그룹 독서 클럽, 성경 공부, 또는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비신자인 여타 학습 과정이 교회의 포치 역할을 할 수 있다.원래 교회의 포치는 (신약에서 볼 수 있듯이) 순전한 마음으로 환대하는 기독교 가정이었다. 그곳에서는 믿지 않는 이웃과 동료가 끊임없이 초대되었고 기독교 신앙이 알게 모르게 모범이 되고 또 토론되었다. 포치와 “전복적 성취” 유능한 교회 포치의 주요 표시의 하나는 “전복적 성취”(subversive fulfillment)라는 개념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것은 불신자가 가진 좋은 가치, 헌신, 열망에 대한 깊은 존경 및 인정(“성취”)과 더불어 그들이 가진 비판과 불신앙과 관련해서는 명확한 대결(“전복”)의 균형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모든 문화는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 가족에 대한 복종, 국가권력에 대한 사회주의적 믿음, 시장에 대한 자본주의적 믿음, 또는 국가, 혈통, 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인기영합주의의 믿음 등, 선하지만 본질적으로 타락한 피조물로부터 절대자(가짜 신 또는 가짜 구주)를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가 기본적인 인간의 갈망과 염원을 채워준다는 사실을 다른 종교와 세계관의 구성원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갈망의 충족을 추구하는 모든 문화 속에 있는 거짓 우상을 비판해야 한다. “전복적 성취”는 혼합주의와 부적실성(irrelevance)이라는 쌍둥이 오류를 피한다. 일반적인 죄뿐 아니라 문화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우상 숭배의 형태도 반드시 고발되어야만 한다. 구원은 단지 선포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문화가 만들어낸 우상이 채워줄 것이라고 잘못 전해진 바로 그 희망을 성취하는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 댄 스트레인지는 전복적 성취를 기술적인 용어이자 복음 소통의 전략으로 대중화하고 장려했다.[9] 즉, 바르게 전파된 복음은 대항할 뿐 아니라 끌어당긴다. 단지 호소하고 강조할 뿐만 아니라, 기분을 상하게도 한다.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 삶의 줄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피엔딩에 이를 것입니다.” 전복적 성취는 긍정적인 동시에 모순적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도전하지만, 그들이 이해하는 용어를 쓴다. 그리고 복음적 조건에서 그들에게 모든 인간의 마음이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한다. 즉 고통이 없앨 수 없는 삶의 의미, 상황에 근거하지 않은 만족, 사랑과 공동체를 파괴하지 않는 자유, 당신의 자아를 회피하고, 짓밟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제하지 않도록 하는 진정한 정체성, 당신을 새로운 압제자로 만들지 않는 정의의 근거, 상대주의에 의존하지 않고도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리고 당신이 어떤 어려움에도 침착하게 직면할 수 있도록 소망, 심지어 죽음까지도 말이다.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교회의 포치에서 우리가 불신자의 존경을 얻고 그들의 믿음 중 일부를 확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10] 우리는 단순히 “우리는 옳고 당신은 그르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믿음에 옳은 부분이 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과 이와 같은 질문으로 논쟁한다. “당신이 정말로 그 사실을 믿는 게 맞는다면, 왜 그 믿음에 일관성이 없습니까?” 그런 다음 우리는 그들이 찾는 것을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끌어들인다. 공공 영역에서 더 강경한 태도를 보이라, 진실을 더 크고 분명하게 선포하라, 설득하려고 하지도 말고, 기독교의 타당성 또는 매력을 보여주려고 애쓰지도 말라. 이런 요구를 하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이교도들과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그분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남겨 두셨다고 사도행전 14:15-17에서 말하는 것을 본다. 사도행전 17:23-31에서는 이교도 철학자들의 저술이 주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상 숭배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긍정하지만 비판하며, 또 존중하지만 맞선다. 일반 은총의 기초 위에서 이 모든 것은 “일반 은총”의 교리, 즉 하나님이 모든 인간과 모든 문화에 진리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주심으로써 세상의 악과 어둠을 억제하신다는 교리를 전제한다.[11] 어떤 사람은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에 탈 기독교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기초가 되는 믿음, 예를 들어 하나님과 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맞다.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특정 교리에 대한 명백한 동의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롬 1:18). 아무도 그 지식을 완전하게 억제할 수는 없다. 어떤 진실은 언제나 비집고 들어간다. 그래서 오래된 문화의 앞마당에서는 명목상 그리스도인도 종교적 의식을 가졌다. 그들은 하나님과 천국, 십계명을 도덕적 절대 신앙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속인은 하나님이나 내세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과학적이고 물질적인 설명이 가능하고, 모든 사람은 “자기가 믿는 진리에 기초하여 살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도덕은 단지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들은 여전히 일종의 종교적 무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대부분 세속적인 사람이 경험하는 이런 현상을 ‘교차 압력’(cross pressures)이라고 부른다.)그들은 특정 수준에서는 자신의 세계관을 믿는다. 그러나 그 세계관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수준이 있다는 직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또한 이 세상을 뛰어넘는 어떤 아름다움, 말하자면 “초월”에 대한 덧없는 감각이 있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험도 단지 생존과 DNA 전달을 위해 우리 뇌에서 개발된 화학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믿음에 근거한 설명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런 설명을 진리로 믿고 살 수는 없다. 그들은 모든 도덕이 상대적이라고 말하지만, 정의에 대한 도덕적 이상은 결코 상대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도덕적 이상에 대한 도덕적 출처가 부족하다. 그들은 또한 자신과 자신의 이익보다 더 큰 무언가에 뿌리를 둔 의미와 정체성의 필요성도 느낀다. 많이 교육받고 지식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앞선 단락의 마지막 부분에 나열된 불일치로 하나의 변증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에게는 “하나님이 영혼에 만든 구멍”에 해당하는 의미, 아름다움, 사랑, 진실,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는 단지 논쟁거리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이다. 교회의 포치에서 그들은 기독교가 어떻게 이 모든 문제에 다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원을 제공하는지 보게 된다. 그러나 포치에서 우리는 단지 긍정하고 성취할 뿐만 아니라, 불신자가 소중히 여기는 많은 믿음에 도전하고 반박한다. 포치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제안과 혜택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특정 문화가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믿음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이뤄지기에 값비싼 비용과 희생하는 삶을 수반한다. 우리가 (문화를 고려할 때 따라오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우, 얼마든지 불신자를 믿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진리라서가 아니라, 기독교가 그들이 보기에 개인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 지역과 같이 시대를 가리지 않고 박해받는 교회는 어떤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적어도 사회적 배척을 가져오고 최악의 경우 투옥과 죽음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가? 기독교가 현세적 삶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가? 전혀 아니다. 아니, 그럼 그들은 왜 고통을 초래하는 기독교 믿음을 버리지 않는 걸까? 진리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잠깐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의 삶에 유익을 주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따라서 교회의 포치에서 우리가 전파하는 게 단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기독교로 그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과 그 진리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그들을 도전해야 한다. 결론 탈 기독교 문화 시대를 사는 교회는 포치가 필요하다. 어떤 교회에서 포치는 크고 형식적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작고 비공식적일 수도 있다. 적용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포치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내용과 다양한 사례를 원할 것이다. 바로 그 정보를 주기 위해서 나는 한 번 더 글을 쓸 것이다. 주9. Daniel Strange, “For Their Rock Is Not as Our Rock: The Gospel as the ‘Subversive Fulfillment’ of the Religious Other.”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56/2 (2013) 379-95. See also Dan Strange, Plugged In: Connecting Your Faith With What You Watch, Read, and Play (Good Book, 2019). 댄 스트레인지는 이 용어를 The Authority of Faith: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Meeting at Tambaram, Madras(ed. G. Paton;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9), 5에 실린 헨드릭 크레머(Hendrik Kraemer)의 글, “Continuity or Discontinuity”서 가져온다. 10. 존중(Respect)은 일반적으로 ‘문화적’ 또는 ‘사회적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다음 글에서 이 개념을 설명할 것이다. 11. 피터 라이하트(Peter Leithart)는 서구 문화에는 ‘일반 은총’뿐만 아니라 그가 ‘중간 은총’(middle grace)—서구 문화에 남아 있는 기독교 가치의 잔재—이라고 부르는 것도 있다고 현명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가치들—모든 사람에게 있는 동등하고 침해할 수 없는 존엄성,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 필연성 등등—은 세속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다들 받아들인다. 그 세속적 세계관이 이런 가치들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원제: Lemonade on the Porch: The Gospel in a Post-Christendom Society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포치
문화적앞마당
하나님의 설계에 충실한 제자훈련을 위한 ‘이중 귀 기울임’
by 최창국
2023-04-29
제자훈련은 단지 성경과 교리의 지식 습득이 아니라 성경과 세상(요 3:16), 영성 형성과 삶의 형성 두 지평의 연결이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과 자연 만물을 모두 포함한다. 제자훈련은 하나님과 인간, 성경과 세계를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제자훈련을 위해서는 존 스토트가 강조한 ‘이중 귀 기울임’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서 필수 불가결하다. 이중 귀 기울임은 하나님과 복음을 신실하고 효과적으로 세상과 연결하기 위해 성경과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과 관계된다. 스토트는 이중 귀 기울임은 먼저 ‘이중 거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열중해서 세상을 직면하지 못할 정도로 말씀으로 도피하는 것과 세상에 너무 몰두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판단하지 못할 만큼 순응하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도피와 순응은 정반대의 실수이지만, 이 둘 다 기독교적 선택은 아니다(존 스토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33-34). 그는 우리는 이런 이중 거부 대신에 이중 귀 기울임 곧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에 귀 기울이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 때는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애써야 하지만, 세상에 귀 기울 때는 비평적 자세와 세상의 처지에 공감하며 복음이 어떻게 세상과 관련되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하며 들어야 한다. 그는 이런 이중 귀 기울임을 통해 신실하고 민감하게 말씀과 세상을 서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이 두 지평을 연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실함과 세상에 대한 민감성이 있어야 한다. 즉, 거짓된 적실성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도 안 되지만, 말씀에 대한 신실함이란 미명 아래 세상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 두 가지 의무 중 하나를 희생하면서 다른 하나를 성취하면 안 된다. 말씀에 대한 실실함과 세상에 대한 민감성을 조화시켜야 진정한 제자훈련이 가능하다. 제자 훈련은 세상 속에서 제자도의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토트의 이중 귀 기울임의 목적은 세상에 대한 이해와 비평뿐 아니라 공감 행위와도 관계된다. 그는 세속 사회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경청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며, 사람들의 좌절과 분노, 혼란과 절망에 공감하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에 대답하고, 아무도 가려워하지 않는 것을 긁어 주며,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 것을 제공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스토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293-94). 그가 이해한 이중 귀 기울임은 한편의 귀로는 성경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동시에 다른 한편의 귀로는 세상의 습관과 문화적 어법을 주의 깊게 듣고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과 한숨을 경청하는 것을 포함한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이중 귀 기울임을 훈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때”의 빛에 비추어 “지금”을 살아낼 수 있다.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제자훈련이 행해진다고 할지라도, 이 훈련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혼의 활동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자훈련의 사회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규범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식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은 단지 그리스도와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다지는 일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회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일과도 관계된다.스토트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기독교를 ‘외톨이’ 종교로 바꾸어 버리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한 존 웨슬리의 말이 옳았다”라고 보고,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현대적이며 진보적이어야 함을 피력한다(스토트,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29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말씀과의 관계에서는 보수적이어야 하지만,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진보적이어야 한다. 제자훈련은 개개인의 구원과 영적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도 포함해야 한다. 제자 훈련은 개인의 영적 성장뿐 아니라 사회적 성장과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울타리 너머에 있는 더 넓은 문화를 알아가며, 이 둘과 대화할 수 있는 자질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도 성경뿐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비평과 공감도 요구된다.제자훈련이 성경과 교리에 대한 이론적 차원에만 머무르고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일에 실패할 때, 이러한 제자훈련은 일상 안에서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실현해 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언어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요 3:16), 즉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언어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에 대한 한계”라고 말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도전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Ludwig 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3). 성경과 세상의 언어, 즉 이중 언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의 역동적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중 언어를 배운 사람은 통역가가 필요 없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오직 성경의 언어만을 배우고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 즉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왜곡된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만연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몸에 대한 이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플라톤의 사상에 기초하여, 몸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몸도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인격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달라스 윌라드는 “종교에서 육체를 제외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종교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만 살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삶이다”라고 하였다(달라스 윌라드, 영성훈련, 42). 로버트 브라우닝은 그의 시를 통해 사람은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몸 때문에’ 발전한다고 하였다(오스왈드 챔버스, 전도서, 116에서 인용).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을 가장 잘 반영해 주는 창조적 선물이다. 제자훈련에서 이론과 실재의 균형은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삶의 실재를 위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종교적 신념이나 믿음은 단순한 사고방식이 아닌 삶의 방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Wittgenstein, Culture and Value, 73). 이런 맥락에서 좋은 신학은 단순히 바른 생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참되고 의미 있는 삶과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제자훈련도 삶의 실재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단지 교리와 성경 해석과 같은 이론적인 정확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제자훈련을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 있는 실재에 관심을 돌려 단지 성경 텍스트에만 초점을 맞추는 우를 법할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살아있는 인격적 실재를 이론으로 대치하려는 위험이 있다. 루이스는 본질적으로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이라고 믿었다. 물론 복음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복음에 대한 해석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실재에 첨가되는 것일 뿐이다. 루이스는 “나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C. S. Lewis, C. S. Lewis: Essay Collection and Other Short Pieces, 21). 그에게 기독교 복음은 ‘큰 그림’을 보게 하는 눈이자 생명이었다. 여기서 큰 그림이란 우리가 눈으로 관찰하는 것 너머와 그 아래의 숨져져 있는 가치와 의미의 방식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는 티머시 제닝스가 강조한 인간과 세계에 계시된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을 아는 것과도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티머시 R. 제닝스, 뇌, 하나님 설계의 비밀, 46-49). 나아가 우리의 경험 세계가 아무리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기독교 복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큰 그림, 즉 교회와 세상, 성경과 인간, 영혼과 몸, 신앙과 일상 등은 서로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실재다. 성경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서 있다”(골 1:17)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제자훈련이란 이 큰 그림을 붙드는 것이고, 그 구조 안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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