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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이 공략할 상대는 무관심의 문화이다
by Glenn Wishnew
2024-02-27
책 이름에 교회 이탈(dechurching)이라는 말이 들어있지만,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은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인 어조로 쓰인 책이다. 저자인 짐 데이비스와 마이클 그레이엄이 갖고 있는 소망은 지난 25년 동안 교회를 떠난 4천만 명 중 대다수(51%)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낙관론에서 비롯한다. 그 51퍼센트는 나름 참작할 만한 상황 때문에 교회를 떠난 “일상적” 이탈자로 볼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22퍼센트는 새로운 공동체로 이사했기 때문에 떠났고, 16퍼센트는 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불편”해서, 그리고 15퍼센트는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 출석이라는 습관”을 벗어던진 경우이다. 결국 종합할 때, 한때 신앙에 헌신했던 복음주의 교인의 53퍼센트가 평범한 이유로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하지만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주의를 꿈꾸게 하는 소망인 동시에 과거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평생 자유주의 주류 교회의 교인이었던 딘 켈리는 1973년에 발간한 Why Conservative Churches Are Growing(왜 보수 교회는 성장하는가)에서 보수 교회가 사람들에게 “고차원적 (large-scale)”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교회보다 더 많이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수준의 의미는 삶을 인도하고 죽음까지도 이겨내도록 한다. 보수 교회는 사람들이 자신감과 소망을 가지고 고통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는 우주적 진리를 선포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주장하는 초자연주의를 부끄럽게 생각한 주류 교회는 진짜 위로를 제공하는 핵심 교리(부활 등)를 일반적인 도덕주의와 정의에 대한 권고로 대체했다. 켈리에 따르면 이것은 운명적인 변화였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도덕적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의 메시지와 주변 문화의 목소리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하품과 함께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켈리가 발견한 사실은 단순하다. 종교 공동체의 회복력은 그 공동체 외부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우주적 목적”에 따라 살도록 성도를 준비시키는 만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켈리의 통찰력과 탈기독교시대 교회를 결합할 때, 지금 미국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교인들에게 교회 밖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고차원적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별생각 없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경우, 그건 자신들의 삶을 인도할 대안이 되는 진리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단지 냉담하고 무관심할 뿐이다. 우리 시대 영적 질병: 무관심우체 아니조르(Uche Anizor)는 Overcoming Apathy(무관심 극복하기)에서 현대인들은 “우리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들에 사로잡혀 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들에는 미지근하다”라고 주장한다. 무관심이 반드시 하루 종일 이어지는 방황으로 드러나는 건 아니다. 아니조르는 수도승인 존 캐시안(John Cassian)의 말을 인용하여 무관심은 “가장 중요한 의무를 제외한 모든 것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 불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문화가 얼마나 무관심에 깊이 빠져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니조르는 시트콤 Seinfeld를 사례로 든다. 아니조르 역시 90년대 시트콤의 팬이었지만, 이 시트콤은 “크고 의미 있는 일(예: 결혼, 가족, 종교, 사회적 관심, 심지어 홀로코스트)에 대한 무관심과 삶의 일상적인 사소한 일(예: 좋은 주차 공간, ‘옆에서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주는 성가심, 오락기에서 높은 점수 받기)에 집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는 오늘날 중요하지 않은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사인필드 사회의 시민이다.” 사인필드 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은 내용이 아니라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이다. 뻔한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대상을 더 우선시하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가는 우리는 조만간 그 차이조차 분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켈리의 언어를 빌리자면, 무관심한 문화가 양산하는 시민은 고차원적인 의미에서는 조금도 활기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여행 축구, 골프, 오락기가 주된 관심사가 되고 전능하신 주님은 이제 부차적인 주제로 전락한다. 영적 무관심이 교회를 침범하는 지금, 교회 지도자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의 제자도 실천이 과연 주변에 만연한 무의미함이라는 독소로부터 성도들을 제대로 예방하고 있는가이다. 수백만 명이 교회 출석을 중단했다는 사실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에게 지금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치료제: 예배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잔소리가 아니다. 데이비스와 그레이엄의 연구에 따르면,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는 가톨릭이나 주류 교회의 교회 이탈 교인들에 비해서 정통 교리를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의 신앙은 아직도 교회에 다니는 복음주의자의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교회를 이탈한 복음주의자에게 부족한 건 교리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다. 즉, 무관심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게 과연 진리인가에 대한 확신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초기 목회 시절 버지니아 시골에서 상담했던 한 어린 소녀에 관해서 들려준다. 그녀는 영적으로 퍽 우울한 상태였는데, 켈러는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 즉 어떻게 그녀를 용서하셨고, 당신의 피로 그녀를 사셨으며, 또 그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확증하셨는지 일깨워 줌으로써 그녀를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예, 목사님, 그거 다 알아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고 또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거, 다 압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나한테 관심 있는 남자애가 하나도 없는데,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요?” 켈러는 그녀의 영적 곤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학교에서 잘생긴 남학생이 주는 관심 또는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격려였고, 더 중요한 기쁨의 원천이자 자기 가치를 느끼게 하는 원천이었다.”그 소녀에게 부족한 것은 복음이 그녀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더 아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감각적 인식이었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알고 있는 신앙 교리를 마음의 갈망과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연결은 오로지 예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일 예배, 주중 소그룹, 매일의 묵상 등 다양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에 새긴다. 무심코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회복하려면 그들을 맞아들이기 위한 “정문”을 여는 건 당연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다시 새어나가지 않도록 “뒷문”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삶의 모든 초점을 우리 가운데 계신 거룩하신 분에게 맞춰야 한다. 기독교를 사람들의 입맛에 더 맞게 맞추려고 노력했던 20세기 주류 교회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들처럼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교회 이탈 경향을 뒤집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날 만연한 무관심 문화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는 대응적 실천을 오히려 두 배로 늘려야 한다. 더 많이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복음으로 인해서 더 큰 만족을 맛볼 것이다. 복음만이 제공하는 고차원적 의미만이 이 시대를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왕이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하기를 꺼리는 사람은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원제: Why Discipleship Must Target Apath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그리스도인이 가장 힘써야 할 일
시편 84편 묵상
by 고명환
2024-02-26
1 꾸준하게 기독 모임에 참여하여 조용히 여러 일로 섬기는 한 대학생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늘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해내는 그 친구가 기특해서 격려라도 해 주고 싶던 터에, 서로 기도해 주는 순서의 짝으로 맺어져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평소 학교생활과 기독 활동에 성실한 모습을 보아 왔기에 주님과 보내는 시간을 견실하게 지켜왔을 거라는 믿음 아래, 기도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지는지 물어보았다. 헌데, 형제에게서 들려온 응답은 기대와는 달랐다. 당황한 듯 머뭇머뭇하며, 그 친구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다고 힘겹게 대답했다. 아마도 주님과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생활화하지 못하는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일에 드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열심과 성실함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주님을 알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주님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한 모임의 워크숍 시간에 어떤 선교단체의 스태프들과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르신 사명을 따라 묵묵히 헌신하는 전임 사역자들이었다. 그 헌신의 삶을 익히 알던 차라, 한 분 한 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지하고 순수한 열정의 증거들이 기대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기도와 경건 생활에 대한 나눔의 시간에 들려온 그분들의 힘없는 고백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구동성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마음은 가져 보지만 실제로 기도 생활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바쁘다 보니 기도 생활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무엇에 바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사역이 바쁜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은 자명했다. 주님을 위한 일로 인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러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목까지 나오는 이 말을 눌러야 했다. 2시편 84편은 총 150편으로 편집된 시편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시이다. 수사나 기교가 뛰어나거나 짜임새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소박한 언어로 주님을 향한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성도의 공감을 쉽게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84고라 자손의 시, 지휘자를 따라 깃딧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1만군의 주님,주님이 계신 곳이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2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내 마음도 이 몸도,살아 계신 하나님께기쁨의 노래 부릅니다.3만군의 주님,나의 왕, 나의 하나님,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제 집을 짓고,제비도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4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복됩니다.그들은 영원토록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5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마음이 이미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복이 있습니다.6그들이‘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가을비도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7그들은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시온에서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8주 만군의 하나님,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야곱의 하나님,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9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돌보아 주십시오.10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다른 곳에서 지내는천 날보다 낫기에,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더 좋습니다.11주 하나님은태양과 방패이시기에,주님께서는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정직한 사람에게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12만군의 주님,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복이 있습니다. (새번역)시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4절),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5절),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12절)을 언급한다. 그들 모두 주님을 가까이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사람들이다. 주님 계신 성전에서 살며 수종 드는 선별된 사람들이나, 주님을 가까이하겠다는 열망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의인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시편 15편). 언제나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사는 시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진정 복 받은 사람들이 분명하다(1-2절). 성전에서 일하며 “영원토록 찬양하는” 레위인들은 복된 사람들이다(4절). 시인의 눈에 “만군의 주님”이 계신 곳에 살며, 섬기고, 항상 찬양하는 특권을 가진 그들이 누구보다 복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으로부터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그들이야말로 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성전에 둥지를 튼 새들도 주님을 곁에서 뵙고 싶은 시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3절). 이에, 성전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주님의 제단 곁에 집을 지을 수 있고 새끼 칠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조차 흠모함으로 바라본다. 그토록 주님을 바라고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성전이 자리 잡은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 시온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역시 복 있는 사람들이다(5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만군의 주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경배하고 싶을 따름이다. 주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뗀 순례자들에게 앞길의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5-7절). 주님께서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샘을 내어 갈증을 해결해 주시며, 먼 길에 기진하지 않도록 힘을 주신다. 결국,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올라가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이다.” 놀랍게도 “만군의 주님”은 그분을 찾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거절치 않는다(“만군의 주님”은 네 번 반복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빈부귀천,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 누구든지,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올 때 그 길의 모든 장애물을 없애 주실 뿐만 아니라 힘을 주셔서 반드시 만나게 하신다(5-7절).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12절). 그는 은혜와 영예를 주님으로부터 받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얻는다(11절). 이런 사람에게 주님을 떠나 행복이란 없다. 주님과 떨어진 먼 세상에서 천 일의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주님 계신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만 못하며, 악인과 함께하는 편안한 장막의 삶이 주님 집의 말단 문지기의 생활만 못하다(10절). 제사장이 아니었던 시인이 들어가 지낼 수 있었던 성전의 장소는 지성소도 성소도 아닌 ‘주님의 궁전 뜰’(the court of the Lord)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이면 어떠한가. 주님의 장중이고 동일한 영광이 머무는 곳인데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는 그곳은 시인에게 지성소와 다름없는 장소이다. 주님의 성전 뜰에 머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행복하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시편 73:28).3주님께서 자녀들의 삶에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만든 열심과 충성심으로 그분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업적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아니면, 그분이 기뻐하실 거라 배우고 공부한 것을 곱씹고, 고민하며, 전력으로 성취해 내는 삶은 아닐까. 그럴듯하나, 주님을 오해한 빗나간 대답들이다. 주님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사원들이 최대한의 실적을 올리기를 바라는 회사의 CEO가 아니다. 알아서 각자 매뉴얼 대로 움직여서 그분이 고대하는 목표를 이루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큰 업적을 들고 오는 것을 반기는 세상의 경영자와는 다른 분이다.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시면 언제라도 능력으로 그분의 목표를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녀가 해낸 일이나 업적보다 자녀 한 명 한 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다. 참다운 부모가 자녀의 성공이나 그들에게서 받는 혜택보다도 그들 자체에 더 관심을 갖듯이, 주님은 자녀라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신다. 그들은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고서 찾은 사랑의 대상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으로, 그들이 목적이고 이유인 존재로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자녀들과의 교제를 기뻐하신다. 교제를 통해 그분의 심오한 사랑을 알려 주기 원하신다. 그래서, 자녀들이 사랑을 깨닫고 성장하여 그분을 투영하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신비로운 사랑의 수혜자였던 사도 바울도 성도들이 무엇보다 주님께 다가가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에베소서 3:18-19). 사도가 표현했듯 그리스도의 사랑은 입체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온전히 헤아릴 수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는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그분을 생각의 영역과 시간의 영역 속에 모시고 살 때 그 사랑의 힘은 삶에 작용하게 되고, 비로소 그분을 나타내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를 도외시하거나 소홀히 한 채 본인의 원함과 스스로 만들어 낸 열심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면 어쩌면 그날에 자취 없이 타버릴 공력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린도전서 3:13-15). 그것이 십자가를 높게 들어 올린 기념비적인 예배당을 지어 봉헌했든지, 선교지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했든지, 수많은 병자를 고친 기적을 행했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냈지만 정작 주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 결과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지인 자녀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5:5).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엄청난 일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떠나서 이룬 일들은 받으실 만한 “열매”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불법”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7:22-23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등장할 저주받은 사람들을 언급하신다. 그들은 주님을 거듭 부르면서(“주님, 주님”),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적법자들임을 주장한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실로 이들은 능력을 행한 사람들이다. 예언, 축사, 여기에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그야말로 ‘능력의 종들’인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들과 방법은 칭찬받고 보상받아야 마땅한 선한 일이다. 어떤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불법”으로,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로 규정하셨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 덧붙여,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선언을 들려주신다. 실제로, 전지의 능력이 있으신 주님이 그들이나 그들이 한 일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주님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행한 업적이 아무리 성스럽고 선한 일일지라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심판의 날에 인정받지 못할 허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주님을 떠나서 자신들의 마음을 따라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쌓은 어떤 업적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나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신 일이 아니라 어두움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음도 몰랐다. (주님이 불의한 자들의 일을 위해 조종당하실 리 없다.) 계시록의 서두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각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책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책망을 받은 교회들의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데 기인한다. 그들이 사명을 잊고 일하지 아니하거나 가시적인 선교적 성과를 내지 못해 책망받은 것이 아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간직해야 할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불신앙의 요소들을 용납하는 등,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질 때 파생하는 결과로 책망을 받은 것이다. 4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주님의 일(ministry)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을 적당히 하라, 혹은 주님은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 아니다. 삶에서 우선순위의 문제와 더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잘 대접해 드리기 위한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예수님 홀로 오신 것도 아니고 일행이 들이닥쳤으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부산했을지 충분히 이해된다. 손이 열 개라도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형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긴급상황에서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침내,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만을 터뜨렸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0:40). 마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중대사에 마리아가 동참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 톤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직접 마리아를 책망하고 일어서게 한다면 무례한 일일 수 있지만, 마르다의 언사는 부탁이 아닌 불평이었고 주님을 향한 원망이 묻어 있다.)의당, 마리아를 일으켜 부엌으로 보낼 줄 알았던 마르다의 불평은 효과는커녕, 가르침으로 바뀌어 돌아왔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Martha, Martha, the Lord answered,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but few things are needed or indeed only one.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41, 42절, NIV) 주님은 마르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거나,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그녀가 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마르다를 두 번이나 부르신 뒤(개인의 이름을 두 번 부른 예는 드물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NIV)”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안정되지 못한 영혼을 지적하셨다. 여기서, “마리아가 ‘좋은 몫(what is better)’을 선택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유의하고 싶다. 마르다가 주님을 위한 일에 최선으로 종사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하는 일이 더 좋은 선택(the better choice)이었다.혹여, 강단에서 이 본문이 여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마르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외침을 위해 인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교회에 많은 충성스런 일꾼이 필요한 것은 이해되나 다른 본문으로도 목적에 부합한 설교를 풍부하게 해낼 수 있다. 주님은 마리아의 편이셨다.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마르다의 열심을 부각하는 것은 주제를 비껴간 주관적 해석 이상이 될 수 없다. 최선보다 차선이 더 좋다고 강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록은 마리아를 조명하고 있다. 명백히, 주님은 그분을 위한 일에 바쁜 사람보다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죄와 인생의 무게 아래 지친 세상의 모든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내게로 오너라”는 초청은 오직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구도 죄와 사망으로 대표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오라’고 인생들을 부른 적이 없었다. 아니, 부를 수 없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석가도. 모두 죄의 저주 아래 놓였던 사람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 사람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주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람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서 죄인을 향한 정당한 표현은 ‘가라’가 되어야 한다. ‘가까이 오지 말라’가 되어야 한다.(출애굽기 3:5, 19:12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분의 경계를 모두 허물어 버리셨다. 무거운 짐을 벗고 그분을 안식처로 삼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오라’고 적극적으로 손짓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지치고 마음이 병든 영혼들을 일깨우는 빅뉴스가 아니겠는가?그분의 초청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선언을 통해 더욱 적극성을 띤다. 지친 영혼을 부르는 호스트는 마음이 온유하고(gentle)하고 겸손하다(humble). 어떤 형편의 사람이라도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고 편안한 쉼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인격을 가지신 분이다. 바로 그분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쉬러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잠시 쉬게 한 다음 목적을 위해 사용할 일꾼을 모집하는 초청이 아니다. 단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지치고 억눌린 영혼을 가엽게 여겨 쉬게 하시려는 사랑의 초대이다. 와서 할 일은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한테 배우는 것이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인생에 부과된 멍에는 구속을, 짐은 고통을 던져 줄 뿐이지만, 주님의 것은 마음의 쉼(rest)을 가져다준다. ‘오라’는 초청에 응하여 배우고 충분히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할 일이 있다면, 함께 메어 주시는 편한 멍에를 메는 것이다. (주님의 “내게 오라”는 초청은 원어의 뉘앙스 상 한 번으로 끝나는 일회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실천해야 할 반복 행동이다.) 주님께 다가가서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대신 자신이 만든 멍에를 메고 짐을 지는 생활에 의미와 목적을 두고 수고한다면, 그 멍에와 짐은 또다시 영혼을 피곤하게 하고 종래는 탈진해 버릴 것이다. 매일 주님을 찾고, 배우고, 주목하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편하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갈릴리 호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아침을 잡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셨다(요한복음 21:15-17). 그것도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왜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설교자들은 ‘사랑하다’는 세 가지 유형의 헬라어를 소개하며, 베드로의 대답이 최상의 사랑한다는 표현인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대답했기 때문에 세 번이나 물으셨다는 오래된 해석을 선호한다. 이와 함께 ‘내 양을 치라(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준엄한 명령으로) 강조해서 성도들의 헌신을 촉구하기도 한다. 왜, 주님은 세 번이나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을까?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대답했기 때문에 ‘아가파오’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일까? 그러다 마지막에는 베드로의 고백에 사랑의 마음으로 눈을 낮추시어 어쩔 수 없이 예수님도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물어보셨을까? (실제로 그렇게 설명하는 설교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용어를 가지고 의미를 두는 해석은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적절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여러 고대 문서는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했다는 걸 증명한다. (예수님도 두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질문하셨다.)무언가를 깊이 심어 주기 위해 주님은 같은 질문으로 세 번이나 묻고 동일한 부탁을 하셨다. 그 어떤 일보다도 그분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시려고 베드로를 세 번이나 불러 확인하여 강조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을 사랑해야 함을, 다음으로, 주님의 양을 돌봐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순서에 있어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시기 위해 ‘나를 사랑하느냐’는 전제조건을 거듭 확인하셨고, 그 뒤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주님의 부탁을 이루어 드리기 전에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 된다. 그분의 양을 치는 일에 앞서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일은 그분을 사랑하는 일, 그분 안에 거하는 일, 그분께 속하는 일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제쳐 두고 맡긴 사명을 좇아 열정을 불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든 예들 외에도, 그 어떤 일보다 주님과의 관계와 사귐에 힘써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는 성경의 근거는 많다. 이를 일일이 나열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서 충분할 듯하다. 5한국 교회로 대표되는 우리의 기독교는 통계가 말해 주듯 여러 면에서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다양한 전도 전략, 세분된 신앙 성장 프로그램, 새로운 형태의 소그룹 모임, 업그레드된 어린이 청소년 교육, 참여자를 배려한 예배, 편리한 시설 등 어느 분야 하나 빠짐없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 수는 줄고 있고 교회의 대외 이미지 또한 나빠지고 있다. 범부의 눈에도 과거와는 확연하게 가벼워진 우리 교회의 모습이 감지된다. 교회 건물 머리에 길게 늘인 유명 연예인 초청 전도집회 광고 현수막은 눈에 띄어도 말씀 사경회를 연다는 글귀는 자취를 감춘 것 같다. 김장 봉사, 급식 봉사 기회를 알리는 광고문은 보여도 기도회 참석을 독려하는 광고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껏 차려입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메운 무리는 보이지만, 침낭을 들고 기도처로 가기 위해 서성이는 성도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모니터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에 기웃거리는 일꾼들은 많으나, 세상의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일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의 콘서트를 방불하게 하는 수련회 집회 중 팔을 높이 들어 열창하는 청년들은 보이지만, 치열하게 주님을 찾다 예배당의 긴 나무의자에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을 밝히는 젊은이들은 사라진 것 같다. 복잡하게 얽힌 소셜 네트워크를 연신 체크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은 보여도, 세심하게 말씀의 장을 천천히 넘기는 손가락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가벼워지고 약해져 가는 현실에 대해, 단지, 시대의 변화로 원인을 돌리거나 내부의 한두 가지 이유로 설명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 전문가들의 크거나 세밀한 분석은 제쳐 두고, 내게 한 근본적인 이유를 끄집어내라 한다면, 이 땅에 진중하게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소중하게 여기며, 부단히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영적인 힘을 얻어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말씀을 직접 읽고 연구하여 그것이 주는 감동과 교훈을 얻기보다, 수고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설교나 성경해석, 간증을 듣는 것으로 영적인 양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용한 장소를 찾아 주님을 묵상하며 기도로 깊이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갖기보다, 여러 사람 속에 섞여 급한 마음으로 대충 기도를 쏟아 내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으로 기도 생활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충분한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 없이, 듣고 배운 지식 정도에 만족하며,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도들이 늘어남과 함께, 소리는 요란해졌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밝히고 선도할 내면의 힘을 기르지 못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본다. 진정한 내면의 힘은 지속적인 주님과의 진지한 교제를 통해서 길러진다. 끊임없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로 주님의 세계 속에 머무는 시간이 쌓여 감에 따라 그분의 능력과 형상을 드러낼 힘이 축적되는 것이다. 이는 그 분에 대해 듣는 것으로,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주목하고 그분의 세계에 몰입하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주어진다.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영혼을 돌보기 위해 성도를 만나는 시간, 공식적인 기도회에 참석하는 시간, 같은 뜻을 가진 동역자와의 교제의 시간이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고. 주님을 위한 일들이니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시간들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대체할 수 없다. 주님을 앞에 모시고 귀 기울여 듣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영적인 양식과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목사로서 주일 맞이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매번 긴장과 두려움이 따른다. 성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과 함께 그 시간에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로 드려져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런 긴장과 염려는 잘 된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으로 해소될 수는 없었다. 주님에게서 오는 자신감과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음에 아무런 가책이 없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가까운 관계가 준비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토요일은 온전히 주님과 개인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으로 떼어 놓았다. 그날을 사람을 만나는 일로, 행사에 참여하는 일로, 혹은 다음 날 설교문을 만드는 일로 보내지 않았다. 주일에 전할 말씀은 토요일 전에 준비했고, 한적한 장소를 찾아 묵상하고 기도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예배를 드릴 장소에 들러 성도들이 앉을 자리 하나하나를 붙잡고 한 분 한 분을 머리에 떠올리며 기도해 드렸다. 모두가 다음날 주님 앞에 나와, 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얻어 돌아가기를 위해 기도했다. 고백이 난무하고 표어들이 이곳저곳을 장식해도 주님과의 교제가 결핍되면 개인이나 교회는 힘을 잃어버린다. 시편 기자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라고 표현했듯이 그리스도인의 힘은 주님과의 교제에서 온다. 각자에게 주어진 성도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갈 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할 만한 생명력 있는 삶의 힘은 끈질기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든든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독교도 본래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고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만을 주목했던 마리아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깊이 경청하라! 세계 선교를 상상하라!
by Xiaoli Yang
2024-02-24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로잔운동의 지도부가 발표한 글로벌 공청회(global listening calls) 분석 보고서[1]를 읽고 난 뒤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경청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경청하고 (재)상상해야 변혁적인 힘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가 담아낼 수 있는 깊은 경청과 (재)상상의 방법과 특징은 무엇인가? 삼십 년 전, 존 스토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세상에 대해 ‘이중 경청’의 기술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2] 하지만 그는 경청하고 (재)상상하는 자세가 어떤 것인지, 다각적인 변화를 이루는 기술적인 행위로 분명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 글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언어, 육체, 침묵의 세 가지 중요한 수단을 다루는 방법을 통하여, 다른 무엇보다 성령의 은혜로 경청과 (재)상상하는 기술을 발달시킬 수 있도록 초대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함께 듣고 응답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깨지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세계 선교(Missio Dei)에 참여할 수 있다.다문화적 지혜다양한 전통에 나타난 고대의 지혜는 경청과 (재)상상의 기술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무한한 보물을 제공한다. 호주 원주민 공동체들은 앉는 것, 배우는 것, 아는 것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배우고 실천해 왔다. 탄다냐(Tandanya) 국제 원주민 문화 기관에서 ‘야바라(Yabarra)-빛 속에서 꿈꾸기’라고 불리는 예술 축제에 손님들을 환영하면서, 그들은 “당신은 우드리(Wodli)에 앉도록 초청되었고 당신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보는 것을 알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해의 길을 보고 들으십시오”라고 노래했다.[3]이런 종류의 경청은 단지 지식이 아닌 일상생활에 대한 지혜를 찾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앉기, 바라보기, 이해하기와 함께 완전히 구현된다. 2021년 올해의 시니어 호주인(Senior Australian)인 미리암 로즈 웅건머(Miriam-Rose Ungunmerr)는 “우리 안에 있는 깊은 샘을 두드리기”에 대해 말한다. 그녀가 속한 부족의 이름은 응강이쿠룽쿠르(Ngangikurungkurr)인데, 이는 ‘깊은 물소리’[4]를 의미한다. 이 부족의 구성원들은 내면에서 ‘깊은 샘물’이 솟아오를 때까지 귀 기울이는 자세를 취한다.고대 중국인들은 다섯 가지 복합적인 요소들의 결합이 ‘경청’의 총체적인 구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배웠다. ‘Ting/청’(듣다, 聽)이라는 단어의 중국어 어원은 듣기에 필요한 다섯 가지 요소: 듣는 귀, 보는 눈, 생각하는 사고, 느끼는 마음, 그리고 온전한 주의를 위한 한 획으로 구성되는 건설적인 모델을 제공한다.[5]완전히 구현된 종류의 경청은 자신의 편견, 전제, 예상을 제쳐두고 상대를 향한 존중과 공경을 요구한다. 이해(understanding)를 얻으려면 상대방의 ‘밑에 서 있어야(stand under)’ 한다. 그러므로 경청은 겸손, 취약성, 인내의 행위이다.언어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개념에 익숙하다. 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규범적이고 권위가 있는 말씀에 대한 확고한 헌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기독교의 전통은 우리의 상상력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말씀을 읽는 고대의 방법인 신성한 독서(Lectio divina)는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더 깊은 친교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성경에 대한 사색적인 접근은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우리를 읽게 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에 응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팬데믹의 격동,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인종 차별, 기후 변화, 그리고 경제 침체는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겪은 폭풍에 비유할 수 있다(막 4:35-41; 눅 8:23-25). 우리의 상상력을 활성화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바람과 거친 물살 한 가운데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공황 상태에 빠져 미친 듯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 혹은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돌보지 않으시는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변화될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동료, 협력 단체, 선교 협력 기관,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 등 다른 이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도자인 우리는 듣기보다는 더 많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귀를 열고 듣는 것이 다른 사람들, 특히 취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며,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서 첫 번째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토착민 선교, 상황화 선교는 우리 자신과 다양한 문화 속에서 우리가 섬기는 사람들과 함께 그 지역의 땅에서 듣고 상상하는 깊은 감각으로부터 만들어져야 한다.경청에 있어서 종종 간과되는 부분은 내면의 자기 대화이다. 혼잣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자라게 한다. 뒤에서 하는 혼잣말은 우리를 자기 부인이나 강박의 유혹에 빠뜨릴 수도, 혹은 생명을 주는 길로 끌어줄 수도 있다. 우리 내면의 소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발견될 때, 우리는 이름을 부르고, 분별하며,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응답할 수 있다.육체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간의 육체는 신성하고, 거룩하며, 그리고 전적으로 주님 안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고, 하나의 사람이자 하나의 주체이다. 마치 화가에게 캔버스, 시인에게 단어처럼, 육체는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수단이기도 하다. 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존엄하게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의 진심 어린 통곡을 들으셨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알아보셨다(눅 5:18-20; 17:11-19).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고 있던 제자들의 육체의 언어(body language)를 들으셨고, ‘그들의 눈이 피곤함’을 보셨으며, 그러므로 그들의 연약한 육체를 알아보셨다(막 26:36-46). 또한, 예수님은 적대하는 자들의 육체의 언어를 들으시고, 그들 마음속의 문제를 알아보셨다(눅 5:17-26; 7:36-40).오늘날,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칠 줄 모르고 일하며 육체적인 피로, 탈진을 자주 경험한다. 만약 그들이 신체의 중요한 신호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많은 탈진(burnout) 현상들을 초기 단계에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역 사역 혹은 세계 선교에 참여할 때,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성육신을 통해 인간이 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그들과 연결됨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육체를 통해 깊은 의식이 표면으로 나오게 되고 실재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험될 수 있다.육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창조 전체로도 확장될 수 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성경뿐만이 아니라 나무, 꽃, 구름, 별에도 기록하신다고 주장했다. 토착민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각각의 영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물 전체를 위한 것임에 대해 많은 것을 일러준다. 복음주의의 전통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는 중요한 계명에 큰 강조를 두는 것이 맞지만(마 28:18-20),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위대한 극장 안에 앉아서 하나님의 창조물이 우리에게 설교하도록 둘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자연계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대해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침묵많은 그리스도인이 침묵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들의 모임은 보통 소리, 말, 활동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침묵은 매우 중요한 언어이며 사랑의 하나님이 소통하시는 방법이기도 하다.하나님의 침묵이 꼭 움직임이 없다거나 하나님께서 침묵 속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혹은 새로운 돌파구의 탄생 전 매우 의미심장한 멈춤의 시간일 수 있다. 사무엘상은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으나, 그 말씀을 듣는 데 네 번이나 걸렸던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삼상 3:1-10). 구원자의 오심을 인내하며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들은, 오랜 멈춤 후에 하나님과의 교감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눅 2:26; 37-3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심문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시며, 침묵 속에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지 궁금해했을 것이다(요 8:3-11). 강력한 두 번의 멈춤(6절과 8절)은 고발자들이 죄로 물든 자신들의 삶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 자신들의 손가락을 거두도록 하는 침묵의 순간이 된다.지도자들이 모여 함께 들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기에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의 모든 질문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침묵은 모든 우리의 고통 가운에 함께 계시며, 우는 자에게 안식을 주시며, 극복해 나가는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처럼 그분의 계시를 알아볼 수 있는가? 때때로 가장 좋은 응답은 이야기, 시, 혹은 그림을 통해 모양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재)상상력이 솟아올라 신선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침묵의 공간일지 모른다.일상속에서 성경의 날개가 높이 날기 위해서는 공간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회화나 건축물의 여백은 내용을 비우지 않고, 오히려 가득 채운다. 침묵의 공간은 바라보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찾고 해석할 수 있도록 표면에서 그들을 향해 흐른다. 시에서 발생하는 멈춤은 우리를 친숙한 세계로부터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이 공간이 없이 우리는 형체도, 말로 표현되지 않는 진실도 가질 수 없다. 내적인 침묵은 히브리어 성경의 시집에서 발견되는 ‘셀라’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칠십인역 성서는 이 단어를 구분점으로 보여주지만, 그것은 멈추다, 가늠하다, 듣다를 가리키는 묵상의 멈춤, 중단을 의미한다.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주고 받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영향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신성함,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기 위한 멈춤은 우리가 메시지를 씹고 먹을 수 있게 해준다. 침묵의 케노시스(kenosis)[6]상태는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받을 준비가 된 비어 있고 부서진 열린 그릇이 될 수 있도록 해주며, 이는 우리의 ‘새로운 자아’가 거하는 곳이 된다(엡 4:24).결론로잔 운동의 세계적인 모임이 열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다중심적(polycentric)이고 다성적(polyvocal)인 사명 안에서 경청하고, 현명하게 분별하며, 그리고 창의적으로 (재)상상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자.거룩한 경청과 (재)상상의 기술을 발달시킴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추구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2024년 서울에서 열릴 제4차 로잔대회가 육체와 침묵이라는 수단을 통해 경청하고 (재)상상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을까?우리가 의도적으로 몸을 움직여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열린 자세를 취할 때, 성령의 바람이 더 강하게 불고, 희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더 분명하게 들려올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희생이 요구되는데, 희생은 본래 ‘증인’(witness)을 의미하는 ‘순교자’(martyr)라는 단어와 종종 연관된다. 영원하시고 살아 계시는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귀를 기울이는 것을 통해 희생적인 사랑을 담아낼 때, 우리는 혼란스럽고 양극화된 세상 속에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변화시키시는 성령님의 힘을 볼 수 있게 된다.1. ‘The Evangelical Church Interacting between the Global and the Local: An Executive Summary of the Analysis of Lausanne 4 Listening Calls,’ Lausanne Movement, Dec 1, 2021, https://lausanne.org/l4/global-listening/the-evangelical-church-interacting-between-the-global-and-the-local. 2. John R. W. Stott, The Contemporary Christian: An Urgent Plea for Double Listening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2). 3. Dean Eland, ‘Eyes on the Street: See What is Around You,’ Loving the Neighourhood, August 17, 2020, accessed 30th Sept 2022, https://lyn.unitingchurch.org.au/2020/08/. 4. Miriam-Rose Ungunmerr, ‘Listening to Another,’ Compass Theological Review 22 (1988). 1. ‘5 Listening Insights from the Chinese Character for Listening,’ SkillPacks, accessed 30th Sept 2022, https://www.skillpacks.com/chinese-character-listening-5day-plan/. 6. ‘Kenosis’ meaning ‘self-emptying of Christ’. 원제: The Transformative Power of Deep Listening출처: lausanne.org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가?
by 고상섭
2024-02-23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반대 의견들도 나오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문제 제기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는 의견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부분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본문에서 무리하게 그리스도를 드러내면 성경 본문의 주제가 흐트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배경에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설교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구약의 특정 본문에서만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가?“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의 저자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좁고 제한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다 설교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1] 이런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정의에 대한 혼동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본문을 갈보리와 십자가상의 속죄와 연결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지만 단순히 속죄만을 선포하지 않았다. 그레이다누스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를 분석해보면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 모두를 하나님의 옛 언약 약속들의 성취로 선포했으며, 또한 성령님을 통한 이 예수님의 오늘날의 임재와 그의 임박한 재림을 선포했다. 간단히 말해,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구속사의 전 영역이라는 문맥에서 전파하는 것을 의미했다.[2]즉, 그리스도를 설교함이란 단순히 모든 본문을 십자가의 구속으로 연결하는 설교가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사 전 영역을 포함한 설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정의하게 되면,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해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된다.“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함”에 대한 오해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라는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런 질문을 하는 저변에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모든 본문에서 일대일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저자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의미는 회당에서 설교하는 것과는 달리 구속의 드라마 전체를 고려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의미한다. 본문을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 보는 것은 그것을 더 큰 문맥, 즉 계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목적의 맥락에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문이 주는 특정 메시지를 무시하거나 만능으로 써먹을 수 있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마무리를 써놓고 매주 필요할 때 골라가며 쓰라는 말이 아니다.[3]클라우니는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연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바라보는 더 큰 문맥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취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든 본문 안에서 인간의 한계 상황(FCF: The Fallen condition Focus)이 드러나면,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초청할 수도 있다.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말의 의미를 싱클레어 퍼거슨의 표현을 빌린다면,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칭의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며 그 구원의 은혜가 인간의 순종이라는 성화로 이어져야 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다면 복음이 아닌 종교적 설교, 윤리적 설교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의 선행은 선행을 통해 어떤 보상을 받게 되는 공로주의가 아니라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선행이기에 모든 순종과 선행은 칭의라는 은혜가 동기로 작용한다.결국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의 쉬운 적용은 “칭의가 성화로 연결되는 설교”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는 구절을 따로 떼어 설교하지 않겠지만, 굳이 이 구절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하라고 하면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로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열심은 은혜의 만족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그것을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우리의 열심의 동기는 부족과 결핍이 아니라 은혜와 만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은혜의 감격이 열심의 동력이 되어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게으름은 인간의 열심과 결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가 우리의 열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동기가 아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개미도 저렇게 열심히 일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게으름이 습관이 되어서 늘 시작한 일을 끝마치지 못하십니까? 요한복음 13:1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그리스도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게으름의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게으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열심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팀 켈러는 오늘을 사는 잠언에서 잠언 6:6이 포함된 본문을 이렇게 설교했다. 지혜로운 자는 누가 위험하지 않아도 내면의 동기만으로 스스로 알아서 일한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온갖 구실로 작아 보이는 일탈을 삼다가 빈궁이 닥쳐오면 깜짝 놀란다. … 이런 삶은 예수님의 삶과 크게 대비가 된다. 그분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의 삶에 당신이 일하지 않아 사라져버린 부분은 없는가? 우리는 일할 때도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4]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말은 성경의 본문에서 무조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 본문을 포함한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를 조망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찰스 스펄전의 일화를 들려주면서 이런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스펄전이 한 웨일즈의 젊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설교)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다”고 하자, 그 설교자는 “글쎄요. 성경 본문 안에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늘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에 있는 것을 설교해야 하니까요”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 영국의 모든 자그마한 동네에도, 그게 어디 있든 런던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예, 그럼요.” 그러자 스펄전은 “성경의 모든 본문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수도로 통하는 길이 있다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일세, 사랑하는 형제여, 자네의 직무는 본문을 대할 때 그리스도께로 통하는 길이 무엇일까?” 하고 말하고 곧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저 거대한 대도시, 즉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달리면서 설교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나는 아직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만난 적이 없네. 만에 하나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어떡하든 길 하나를 만들 것이네. 담벼락을 넘고 도랑물을 건너서라도 나의 주님께로 나아갈 것이네. 설교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지.”[5]스펄전은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본문 자체에서 그리스도를 무조건 연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팀 켈러도 이렇게 조언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희미하게 연상시키는 모든 것이 예수님께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떠오르는 대로 무조건 덤벼서는 안 된다. 라합이 창문에 걸어 둔 붉은 줄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연상될 수는 있지만(수 2:18)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정말로 그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 설교가 끝나기 전에, 바로 그 길을 가리키고, 바로 그 길을 여행하라”[6]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의 의미는 팀 켈러의 표현처럼 “온전함을 잃지 않은 채 각 본문의 중심 메시지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어떤 길‘”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1.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p.29.2. 같은 책, p.32. 3. 에드먼드 클라우니, 성경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p.30.4.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p.28.5. 팀 켈러, 팀 켈러의 설교, p.95. 6. 같은 책, p.96.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by Trevin Wax
2024-02-22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연구한 마이클 그레이엄과 짐 데이비스의 유익한 책, 탈기독교시대 교회(The Great Dechurching)를 계기로 지난 25년 동안 미국에서 발생한 교회 이탈(dechurching)의 원인과 영향에 대한 많은 논의가 최근에 있었다. 여기에는 떠난 이들이 다시 교회에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방법에 대한 제안도 들어 있다. 나는 교회 이탈 현상을 좀 더 자세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내가 운영하는 팟캐스트 Reconstructing Faith에 그레이엄과 데이비스, 라이언 버지를 초대해서 인터뷰했다. 왜냐하면 교회 이탈은 지금 미국 전역에서 화제가 되는 뜨거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교회 이탈을 논하려면 거기에 수반된 다른 질문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왜 교회에 가는가?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는가에만 집중하다 보면, 물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인 왜 교회에 가는지를 까맣게 잊곤 한다. 사람들은 왜 교회에 갈까? 거기에 뭐가 있기에 매주 가는 걸까? 당신은 왜 교회에 가는가?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한 간단한 답이 없는 것처럼(The Great Dechurching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왜 다니는가에 대해서도 정답은 없다. 이 문제를 놓고 교인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다면, 아마도 다양한 이유 앞에서 놀랄 것이다. 교회 지도자라면 신자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게 하나 같이 고상하고 또 강력한 신학적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자극적인 예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거라는 사실을 안다. 예배를 위해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온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보다 현실적인 경우가 많다.습관적 참석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그건 순전히 습관 때문이다. The Lamp에 기고한 글에서 매튜 왈더는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가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하거나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대접하는 것과 똑같이 미사가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식료품점이나 쇼핑몰, 동네 고등학교의 풋볼 경기에 가는 것처럼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는 이유가 그게 항상 하는 일이고 또 항상 해오던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아직도 교회 다니는 게 당연한 동네가 있다. 거기에서는 이웃에게 “어느 교회 다니세요?”라고 묻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고 전혀 불쾌감을 일으키는 질문이 아니다. 습관적 참석자(the regulars)는 교회에 가는 게 일상이고, 그건 사회적 결속과 가족 안정을 위한 중요한 일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시대를 고려할 때, 이런 사람은 점점 고령층이 되어간다. 여기에 해당하는 젊은이는 많지 않다. 습관적 참석자가 누구인가? 어머니날이나 아버지날에 자녀들과 손주들을 데리고 나타나 그들의 일상이 후손들에게 이어지길 바라는 부모와 조부모들이다. 책임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두 번째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책임자”(the Responsibles)라고 부른다. 안내자나 집사, 주일학교 교사거나 유아반 봉사자, 성가대 또는 주차 봉사 등, 가지 않으면 당장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소그룹에 속한 이들이다. 그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는 맡은 책임 때문이다. Everybody Loves Raymond의 한 에피소드에서 레이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 때문에 부모와 가족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국 그는 성당에 가기를 꺼렸던 과거를 반성하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성당에 열심히 참석하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그가 성당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건 아버지가 성당을 열심히 다닌 게 신앙 때문이 아니라 헌금 봉사와 헌금 계수하면서 사람들과 주고받는 잡담을 좋아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존경자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세 번째 이유는 가족 생활에까지 영향을 주는 사회적 혜택 때문이다. 나는 이들을 “존경자”(the respectables)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도덕적 본능을 발전시키고 유지하도록 돕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교회는 도덕적으로 존중받는 곳,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곳이다. 크리스챤 스미스와 에이미 아담스직이 쓴 Handing Down the Faith(신앙 전수)는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성공적으로 전달한 가족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담고 있다. 그들의 인터뷰에는 ‘토대’ ‘베이스’ ‘기초’ 같은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존경자는 교회 출석이 자녀에게 좋은 삶을 살도록 이끄는 도덕 기반을 제공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그들이 선하고 도덕적이며 품위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무언가를 제공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자기들은 가지 않았으면서도 부모들이 굳이 십대 자녀를 교회 청소년 모임이나 교회 캠프에 보내는 이유이다. 자기네는 이미 교회가 제공하는 도덕적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추구자교회에 가는 네 번째 이유로 진리를 찾기 위해서인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매주 미국 전역의 교회에는 영적으로 갈구하지만, 아직 신앙에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추구한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과 그 가르침에 관심이 있다. 대부분은 다른 부류에 해당하는 누군가의 초대를 받아 방문하지만, 일부는 스스로 교회를 찾아 다니거나 온라인에서 검색을 한 후 출석하기도 한다. 추구자(the reachers)는 규모가 가장 작다. 왜냐하면 교회 출석이 그들의 영적 여정에서 첫 번째 단계가 아니라 나중 단계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확신자마지막 부류지만 의미가 있는, 굳건함과 결단력으로 특징지어지는 믿음의 소유자가 있다. 이들은 가장 명백하게 중생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교회 출석자이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일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살아서 역사한다. 확신자(the resolute)의 열정과 헌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내가 처음 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불신자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인간의 마음은 복잡하다. 따라서 오로지 성경적인 이유만으로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확신자는 교회를 성경적 렌즈로 본다는 측면에서 가장 독실한 신자이다. 확신자는 신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의 백성을 사랑한다. 신약성경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고,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또한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갈구한다. 그들은 또한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중심의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올바른 영성 형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가족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교회 참석자의 대다수가 이 독실한 그룹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교인을 구상하는 건 다양한 수준의 영적 성숙도를 지닌 다섯 가지 범주의 사람들 모두이다. 또한 습관적 참석자인 동시에 책임자일 수도 있다. 교회 출석의 미래지금까지 살펴본 사실이 교회 출석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습관적 참석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그건 세대교체가 일어나고 있으며 동시에 매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줄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자 그룹에서도 지속적인 쇠퇴를 예상할 수 있다. 교회 이탈이 계속되고 우리 사회가 더욱 고립됨에 따라 해결해야 할 요구 사항과 더불어 각종 서비스와 활동까지 줄어들기에 서로를 연결하고 의무를 이행할 장소까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존경자 사이에서도,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을 고수하다 보면 주류 사회와 보조를 맞출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교회 출석이 초래하는 사회적 대가가 너무 높으면 상당수가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 문화의 광기에 대응하여 신앙에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교회를 도덕적 건전성의 원천으로 보며 더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의 숫자도 무시할 수 없다. 성 혁명은 필연적으로 치유가 필요한 사상자를 낳을 것이다.추구자 중에서는 영적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의 증가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존 신자들이 그들을 어떻게 따뜻하게 환영하는가에,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그들에게 어떤 지혜와 가이드를 제공하는가에 달려있다. 확신자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문화적 변화가 계속된다면, 이 그룹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대다수를 차지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다음 세대에까지 자신들과 같은 확신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이다. 확신자가 과연 기독교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추구자를 더 많이 찾고 초대하려고 할까? 교회 리더들에게 좋은 소식이 모든 건 교회 출석과 관련한 하나의 시험적인 생각이다. 나는 지금까지 소개한 분류를 비판하거나 보강하려는 모든 의견을 환영한다. 목회자와 교회 리더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당신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일부가 처음 세 가지 범주와 더 밀접하게 일치한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거기에도 긍정적인 면이 숨어있다. 그들은 여전히 당신의 교회를 다니고 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만나고 그들이 확신자가 되도록 인도하라. 이를 위해서는 복음의 능력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믿어야 한다.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는 성령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을 책망하고 강권하며 참된 회심을 가져온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순종을 단순한 의무에서 기쁨으로 바꾼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자유함으로, 그리고 자존심이 아니라 진정한 이웃 사랑으로 봉사하게 한다. 세상이 우리의 믿음을 비웃을 때,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가 두려움 없이 일어서게 한다. 복음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를 성숙시키고 성화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이는 이유에 관해서 점점 더 그분의 뜻과 일치하게 된다. 우리 공동체가 예수님의 향기를 더 많이 발산할수록, “교회에 가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될 것이다. 원제: Why Does Anyone Go to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불확정성의 원리와 평강
by 전재훈
2024-02-21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과학이라는 문명이 거대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하늘로 쏘아 올린 공은 반드시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핵심 원리 중 하나입니다. 과학이 떨어지는 공의 원인을 밝혀주었고, 쏘아 올린 모든 공은 예외 없이 모두 떨어지므로 과학의 진정성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만약 쏘아 올린 공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공이 계속 하늘에 머무를지, 아니면 내 머리에 떨어지지는 않을지, 혹시 내 아이가 떨어지는 공에 다치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마음은 과학의 세계로 들어가서 왜 떨어지지 않고 있는지를 규명해 주어야 맘이 편해집니다. 더 나아가 그 공이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를 예측해 주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지요. 내 마음에 평강을 찾아주는 과학은 결정론적 사고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태양은 반드시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집니다. 만약 낮이 너무 짧아서 누군가가 신적인 권능을 가지고 태양을 기브온 위에 잡아둔다면, 혹은 밤이 오지 말라고 달을 아얄론 골짜기에 가둬둔다면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들게 될 것이고, 세상은 종말을 보여주듯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과학이 준 위대한 평강입니다. 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이 땅은 안전할 것이라고 믿어야 평강이 임합니다. 하지만 뜬금없이 싱크홀이 생기면서 어느 순간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그 평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지요. 우리는 과학자들이 땅꺼짐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고, 땅꺼짐 위험 지도를 완성해 주어야 비로소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게 펴게 됩니다. 인류는 세기말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시한부 종말론 때문에 홍역을 앓아왔습니다. 몇 년 전에는 전쟁설이 등장하여 한반도를 긴장하게 만들었지요. 이런 종말론과 전쟁설 때문에 평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신앙인의 말보다 과학자의 말이 더 옳은 것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신령한 목사님을 통해 5년 후 종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한다면 평강을 잃어버릴 사람들은 지옥에 갈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이어서 천국의 상석을 예약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그려주는 장밋빛 미래에 젖어 그날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학의 세계에 복병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시 세계에 있던 양자역학이었지요. 원자 주위의 전자들의 세계가 입자인가 파동인가를 두고 고민하다 밝혀진 것이 불확정성의 원리입니다.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규명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워낙 어려운 내용인지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더 잘 알려진 불확정성의 원리는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과학의 산물입니다. 매일 아침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아침 식사를 하던 사람에게 ‘당신은 내일도 아침을 드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일이 100퍼센트 이뤄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저 확률적으로 아침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일 뿐, 반드시 먹는다고는 할 수 없지요. 사람은 이상하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면 보란 듯이 아침을 굶기도 하겠지만, 그 사람이 사고로 저녁에 죽거나 다칠 수도 있으므로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덕분에 이 시대가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버젓이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틈을 내주었습니다. 물론 그 작은 틈새 사이로 보험도 생존하여 번성할 수 있게 했지요. 뿐만 아니라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와 같은 원효 철학도 가능케 했습니다. 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20세기 폭스)는 ‘미래가 예측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거대 담론을 담아내었습니다. 사람의 행동양식을 통해 살인을 예측하고 미리 사전에 통제할 수 있다는 설정입니다. 이 영화 속 살인범들은 살인할 뻔한 사람들이지 실제 살인을 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런 살인을 할 뻔했던 사람들을 살인 직전에 잡아서 살인범으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문제제기였지요. 범죄 예방 수사국 소속 범죄과 수사반장이었던 존 앤더튼(톰 크루즈)은 과학적 사고관인 ‘결정론적 사고관’의 맹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결론에 다다르자 살인 예측 시스템의 붕괴로 결정론적 사고관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면서 끝이 납니다. 우리의 미래는 확률적으로 예측할 뿐이지, 결코 결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과학과 같은 결정론적 사고관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시한 양자역학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의지’라는 또 하나의 축이 있어서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의지’라는 놈은 결과를 분명하게 만들지 못해서 ‘진인사대천명’ 즉 최선을 다하나 결과는 하늘에 맡기게 되었지요. 여기에 나오는 ‘하늘’이 불교에서는 ‘인연’이고, 기독교에서는 ‘주님의 뜻’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결국 미래는 ‘의지’에 ‘하늘’이 합쳐서 만들어 내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의 평강은 어디에서 올까요? 가장 기본적인 평강은 물리학에 기초한 세계에 있습니다. 여름에 눈이 오면 안 되고, 겨울이 더우면 안 되지요. 낮은 환해야 하고, 밤은 캄캄해야 합니다.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어야 하고요.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으면 차가 나가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서야만 평강이 생기는 법입니다. 인간의 평강은 물리학적인 평강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또 한 부분을 채워줘야 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밤의 잠이 달콤한 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열심히 공부해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인내는 쓰고 결과는 달다고 믿는 사람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서 간혹 평강의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긍정의 힘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도 아니라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사업에 실패했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존 그레이는 이혼했습니다. 자기계발서 100권 읽고도 실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도 뿌리 깊게 내려있습니다. 그것도 결정론적 사고관으로 위장해서 말이지요.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된 예를 알고 있습니다. 운전하기 전에 항상 기도하시던 분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것도 봤지요. 십일조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 그렇지 않은 교인들보다 반드시 더 잘 살지는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불확정성의 원리에 갇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 안에 결정론적 사고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와 같이 분명하고도 확고한 절대 진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문제가 현재의 평강을 담보해 주지 않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평강을 주겠지만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지요. 과학의 세계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듯, 신앙의 세계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불안이 깃들고, 낭패와 실망을 겪게 만듭니다.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서 지동설이 진리이듯, 신앙의 세계에서도 분명하고도 확고한 결정론적 진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평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합니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사랑 변함 없으신 거짓 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을 믿을 때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이 깃들게 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오늘처럼 내일도 나를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팀 켈러가 알려주는 공격적 변증법
by Ross Bowerman
2024-02-20
공격과 수비 없이 스포츠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수비는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약점의 은폐라고 할 수도 있다. 반대로 공격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한다. 이 비유를 사용하면 변증에도 방어적 변증과 공격적 변증, 두 가지가 있다. 방어적 측면으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주장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한다. 반대로 공격적인 변증을 통해 우리는 세상 세계관의 약점을 드러낸다. 수비에도 능했던 팀 켈러지만, 그는 동시에 공격적 변증의 이유와 방법을 가르쳤던 사람이다.공격적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기독교를 수호하는 대중 옹호자로서 켈러는 이 세상에 믿음이 아예 없는 사람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믿음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종교적 신념이 없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라도 현실 속에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핵심 사항에 관해서 많은 가정을 한다. 이러한 신념은 폭로되고 조사되어야 한다. 켈러의 가장 유명한 문구 중 하나가 바로 “당신이 가진 의심을 의심하라”이다. 사람들은 (비록 없다고 주장하더라도) 자기에게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아이디어 시장’에 존재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켈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승 중 한 사람인 C. S. 루이스가 ‘순전한 기독교’에서 믿음이라는 건 아주 작은 시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실제로 실행이 가능한 세계관은 고작해야 물질주의, 범신론, 그리고 유신론 세 가지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기존 믿음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까지 기독교를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공격적인 변증이 될까켈러는 내용과 태도 면에서 모두 다 훌륭한 공격 모델을 보여주었다. 콘텐츠와 관련하여 켈러는 절대적 증명이 가능한 믿음 체계는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믿음 체계와의 비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평가를 위해 그가 제시한 것은 세 가지 기준이었다. 나의 믿음이 얼마나 일관성 있는가(일관성의 기준)? 그 믿음이 우리의 지식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증거의 기준)? 그 믿음이 삶의 경험과 얼마나 일치하는가(생존의 기준)? 켈러는 사람들이 가진 믿음 체계가 의미, 도덕성, 진실, 정체성, 인권 등 기본이 되는 서구 문화의 가정과 욕구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성과 자원을 제대로 제공하는지 고려하라고 말했다. 믿음 체계가 성공하려면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그 믿음을 기초로 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가 가진 믿음 체계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켈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좋은 공격 모델을 만들었다. 그는 냉철한 정신, 최고의 경청 기술, 그리고 논쟁이 아니라 사람을 얻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를 수행했다. ‘성찰하는 경청’의 헌신적 옹호자인 켈러는 자신의 목표가 상대의 주장을 상대방보다 더 잘 설명해서 상대방 스스로가 그 사실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허수아비 전략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상대의 주장이 가진 강점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켈러는 상대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 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이해하고 마음을 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 다음에 켈러는 프랜시스 쉐퍼가 원조로서 선보인 전술을 사용했다. 쉐퍼는 이를 “집에서 지붕을 떼어내는 것”이라고 불렀다. 쉐퍼는 청중의 믿음을 비에 노출시켰다. 달리 말해서, 그건 일관성, 증거 및 생존 가능성에 대한 테스트였다. 쉐퍼는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집은 결코 제대로 된 생활이 가능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돕고 싶었다.기독교가 진리임을 원하도록 하라블레즈 파스칼로부터 켈러가 배운 점은 기독교가 참되다고 믿기 전에 먼저 그것이 참되기를 원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이 변증에 있어서 켈러의 전략을 공격적인 전략으로 이끈 주된 원인이었다. 누구나 핵심 믿음이 필요하고 또는 이미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탐구하고 공유하며 진정으로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일관성, 증거 및 생존 가능성의 기준으로 자신의 믿음을 테스트할 기회가 주어지면 그들은 기꺼이 현재 믿음을 의심하고 기독교를 더 매력적인 대안으로 고려할 것이다. 그래야만 기독교 진리가 가진 긍정적 증거를 계속해서 탐구할 것이고, 나아가서 방어적인 변증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열망까지 가질 것이다. 변증 게임에서 켈러는 열심히 그러나 공정하게 플레이했다. 그는 상대팀의 존경을 받는 그런 선수였고, 사람이 아닌 공을 다루는 선수였다. 켈러처럼 마냥 좋아 보이기만 하는 사람이 그토록 다양한 공격 전략을 가르쳐줄 줄이야,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원제: How Tim Keller Taught Us to Be Offensi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형과 아우, 아버지와 아들이 지켜낸 교회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여수 장천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4-02-19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19세기 말 호남의 중심지는 전주와 나주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전남으로 좁히면 나주와 순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상대적으로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주는 선교사들을 배척함으로 광주에 선교부가 만들어졌고, 순천은 지리상의 여건도 있었지만, 주변 지역에 비해서 늦게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순천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시작되었음에도 성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려야 했다. 순천에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공식적으로 설치되는 것이 1913년이고, 순천에 공동체(현 순천중앙교회)가 1906년에 설립이 되는 것은 선교부 설치보다 빠른 것이지만, 순천 주변 지역에 설립된 교회들에 비하면 오히려 늦은 경우이다. 이 말은 호남 남동부지역 선교거점이 순천에 설치되었지만, 순천 읍내보다 변두리 지역에 먼저 교회가 세워졌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서 광양 신항리교회, 벌교 무만동교회, 여수 장천교회 등이 순천중앙교회보다 일찍 설립되었다. 그 이유는 순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불교(514년 송광사, 529년 선암사)와 유교(1407년, 순천향교, 1568년 옥천서원) 등이 이 지역의 문화와 생활, 세계관까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의 풍습과 전통이 이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외래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현재도 송광사와 선암사는 전국에서 찾는 불교도들이 많고, 일반 관광객들이 많은 사찰로 유명하다.호남 남동부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대부분 남장로교회 선교부의 영향력이 직접 미쳤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경우만은 아니다. 오히려 서울이나 선교가 설치된 도시에서 선교사들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복음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앙을 이어가게 될 때,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우는 바다 건너 제주도에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아 놀랍고 귀하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여수시 율촌면에 있는 장천교회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장천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하는 과정에는 조일환과 조의환 형제의 역할이 컸다. 그중에 형인 조일환이 어떤 목적으로 만주로 가려다가 일본 경찰에 쫓겨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숨어들어 그곳에서 복음을 접하고 개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서 1905년 10월 자기 집에서 아우인 조의환과 이기홍, 박중호 등과 함께 오웬(Clement C. Owen) 선교사의 조사인 지원근이 중심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장천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공동체가 모임을 가지는 과정에서 조일환은 목포에 있는 프레스턴(John F. Preston) 선교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이렇게 시작된 장천교회는 광양의 신항리교회와 함께 순천 이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 선교사들의 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새롭게 설립되는 교회들을 모두 돌아볼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조사의 역할이 컸고, 조사라도 있으면 감사한 일이었다. 실제로 순천에 공식적인 선교부가 설치되는 것이 1913년이니까, 장천교회를 목회하거나 직접 목회할 수 있는 지도자는 없었다. 그러한 상황임에도 조일환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개종자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심이었다.그러한 열심은 공동체가 시작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1908년 첫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 비록 작은 평수이지만 12평 목조 예배당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며 교회를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작은 규모의 예배당이지만, 이러한 공적인 공간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물이었다. 따라서 선각자로서 조일환 등은 이 공간을 활용하는 방안이면서 동시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 그것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1910년 장천교회는 근대교육을 위한 여흥학교를 설립했다. 여흥학교는 교명은 ‘여수를 흥하게 하자’는 의미를 담은 여수의 여(麗)와 흥할 흥(興)을 더하여 지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는 이 여수지역에서 근대교육에 있어서 효시이다.그러나 이미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상태에서 교회가 원하는 교육이나 민족교육 등과 같은 것은 점점 시행할 수 없게 되어갔다. 일본은 한일병탄을 완성한 다음 즉시 식민지에서의 국민교육과 관련한 칙령을 내려서 식민지교육을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교육을 실시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결국 1935년에 이르러서 일제의 박해가 더욱 가혹해졌다. 특별히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등 점차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교회로서는 학교를 지속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결국 자진 폐교를 하기에 이르렀다.한편 조일환의 동생 조의환은 직접적으로 교회를 세워가는 중심에서 일을 감당했다. 1908년 예배당을 건축하고, 여흥학교도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형제의 열심은 신자들과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이내 예배당이 비좁아지게 되니, 1913년 기와지붕을 이은 15평 규모의 예배당을 다시 지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없는 상황인지라 공동체의 영적인 성장에는 갈급함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의환은 1909년 영수(令首)로 임명을 받아 사실상 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영수로 임명을 받아서 공동체를 섬기면서 1912년에는 이 교회의 장로로 임직했다. 영수와 장로의 직분을 가지고 이 교회를 섬기던 조의환은 결국 목회자의 소명을 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광양교회, 여수교회, 제주도 모슬포교회 등지에서 목회했다. 그러다가 제주도에서 일제에 의해서 검거되어 두 번이 투옥되었다. 그만큼 그의 항일정신과 복음을 통한 변화된 생활에 충실하고자 했던 그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지로 나가는 그해에야 이 교회에는 처음으로 곽우영 목사가 부임하게 되었다.1920년대, 어찌 보면 일제에 의한 식민지가 폭력을 동반하게 되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1922년 승주군 도룡교회, 1923년 율촌면 평촌교회, 1925년 율촌면 광암교회 등을 개척 설립함으로써 복음전파와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이렇게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면서도 좁아진 예배당은 더 큰 규모의 예배당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1923년에는 학교 23평 건물을 지었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석조 예배당(80평)을 새롭게 건축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현재 유치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문화재 예배당이다. 그리고 1928년에 목사가 된 조의환은 자신의 고향이며, 자신의 모교회이며, 형인 조일환과 함께 시작한 이 교회의 2대 목사로 부임을 했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이 교회 5대 목사로 다시 부임하여 원로목사가 되는 기록을 남겼다.그리고 1973년 다시 석조 예배당(86평)을 지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옛 건물은 부속시설로 사용하면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1년 예배당이 비좁아지면서 20여 평을 증축하여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현재 중앙에 있는 건물이다. 현재는 교제실 겸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3년 현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건축하여 시대의 변화에 따른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지역 복음화와 교회로서 섬김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장천교회를 찾았을 때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여기 소개한 대로 1924년, 1971년, 2003년에 각각 건축한 예배당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예배당이 한 장소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서 한국기독교회의 예배당 건축사에 있어서 특별한 장면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매우 특별하고,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여기 장천교회에서만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1924년에 건축한 예배당만 문화재(115호)로 보호되고 있지만, 건축사적인 의미에서 더 중요한 것은 건축 시대가 다른 세 개의 예배당이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장천교회 예배당은 각각 다른 양식과 소재로 지어진 예배당 건축의 변화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것이다.그런데 1924년에 건축된 예배당과 1971년에 지어진 예배당은 출입구가 남녀가 각기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특별히 문화재 예배당은 지상 2층으로 지어진 것으로 계단을 통해서 예배당에 올라가게 했고, 남녀출입문을 따로 만들되 그 위에는 캐노피를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아마 현존하는 예배당들 가운데 이런 양식으로 지은 것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또한 이 예배당은 호남 남동부지역 최초의 석조 건물로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 1971년에 지어진 예배당도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 시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남자 성도와 여자 성도가 출입문을 각각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 1970년까지도 남녀가 유별한 사회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교회에 문화재 예배당 앞에는 특별한 비석이 하나가 서 있다. ‘지한영 강도사, 지준철 성도 순교비, 2015 건립.’ 여기 새겨진 두 사람은 부자지간이다. 이곳 율촌에서 나고 자랐으며,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지한영이 소명을 받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 조선신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당시 교회 수에 비해서 지도자가 절대 부족한 시대이다 보니, 신학생들도 목회 현장에서 필요로 했다. 지한영은 전도사 신분으로 덕충교회와 승주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러다가 강도사 신분으로 모교회인 장천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하던 중인 1950년 공산군에 점령되었고, 목회자인 지한영은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8일 아들 준철 군과 함께 공산군에 의해서 처형되고 말았다. 부자지간 순교를 당한 것이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다.사실 이러한 순교는 장천교회만의 일은 아니다. 호남지역에 있는 많은 교회가 6.25사변을 전후해서 희생당한 것은 잊힐 수 없는 일이다. 아쉬운 것은 지한영 강도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 교회에는 겉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 있는 예배당 종각에는 특별한 종이 있다. 특별한 관심과 함께 찾아보아야만 볼 수 있는 것인데, 이 교회의 역사와 함께 지켜온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증언해 주는 종이다. 교회 종은 종이지 무엇이 특별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회들의 종은 나름 사연이 많다. 모든 교회가 경험했던 것은 일제 말기에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다음 전쟁 물자를 확보하려는 조치로 각 가정은 물론 기관 단체들로부터 온갖 쇠붙이를 징발했다. 이때 교회의 종이나 교회에서 사용하는 도구들 가운데 어떤 형태의 쇠붙이가 되었든 모두 징발 대상이 되었다. 이에 한국의 교회들은 교회의 종을 징발당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했지만 대부분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런데 이 교회는 그러한 수탈 과정에서 종을 지켜냈다. 특별히 이 종의 의미가 있는 것은 이 교회 설립에 동참했고, 이 교회를 섬겨온 조일환과 조의환 형제가 아버지 조병하가 별세하자 1929년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한 종을 주문 주조하면서 종에다 부모님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사연을 가진 종을 1924년에 건축한 문화재 예배당 종각에 달아 사용하다가 현재는 1971년에 새롭게 건축한 중앙에 있는 예배당 종각에 달려있다. 이 교회의 입장에서 이 종의 역사와 사연을 아는 것만으로도 장천교회의 역사와 섬김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이어갈 수 있는 동기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선교지에 기독교 화가와 음악가가 필요하다
by Byron Spradlin
2024-02-17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몇 년 전 볼리비아 인디언 목장 일꾼들이 사는 한 마을 전체가 주님께 나아왔을 때, 내 친구 선교사들은 몇 가지 어려운 질문에 직면했다.이제 주님을 구주로 알게 된 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 대부분이 성경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들에게 성경을 공부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기독교 음악이 없는데, 그들에게 어떤 노래를 부르도록 권할까? 그들의 문화적 표현에 예전(liturgy)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공동체의 어떤 관습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고백, 찬양, 경배를 표현해야 할까?이 질문들에 대해 나의 선교사 친구들은 옳은 일을 했다. 그들은 볼리비아 인디언 신자들이 자신만의 음악적 표현을 만들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문화적으로 합당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원주민들이 직접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친숙하고 진심 어린 표현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적절하고 현명할 것이라고 인정했다.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복음화가 충만하게 일어날 때, 새 신자들의 목표를 나는 그들이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공감을 일으키는 자신들의 문화적 표현을 통해 드리는 믿음과 예배를 의미한다. 참된 예배는 우리 내면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나 공동체의 핵심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숙한 표현을 통해 진행되어야 한다.[1] 그래서 주님의 복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복음으로 구원받고 해방되고 변화된 그 마음에서 노래와 춤, 의식과 전례 및 장식의 고유한 표현이 샘솟게 된다.또한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종종 문맹으로 인해 많은 의사 소통이 필연적으로 예술적 또는 상상적 표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음악, 드라마, 스토리텔링, 그림, 건축, 마임, 인형, 공예, 축제, 운동, 의식, 음식, 장식 등은 공동체가 이를 통해 예배하고, 배우고, 제자 삼고, 축하하는 모든 형태의 예술적 표현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서구 세계에서 흔히 ‘예술’이라고 부른다)이 문화적으로 친숙하지 않다면,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예배가 되기 어렵고, 복음의 전달은 덜 효과적일 것이며, 공동체의 성장은 더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표현이 낯설고 어색하거나, 단순히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예술적 소통가와 예술적 표현 전문가들은 종종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지만,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을 진전시키는 데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을 위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표현 전문가들은 상상력이 풍부한 디자인과 표현에 있어 비범한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이 개념은 장인(craftsman, 상상력을 요하는 디자인이나 표현에 있어서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이라는 히브리어 개념과 관련된 용어에 근거한 것이다. 음악가와 가수도 이 큰 범주에 속한다. 그들은 목사나 교사, 음악가, 화가, 작가, 관리자, 공장 노동자, 농부 또는 주부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이 주신 ‘특출한’ 상상력을 가진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모든 사람이 ‘상상력’을 갖고 있지만, 문화적으로 적절한 노래나 가사, 시, 이야기, 움직임, 시각적 표현, 환경적 감수성 등을 만들어 내는 미적 감수성의 비범한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한 적절한 예술 형식과 방법을 예배나 가르침, 제자도 훈련, 전도에 적극적으로 통합하는 비전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의 중요한 역할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로 듣고 이해하기 훨씬 전에 마음으로 듣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일반적으로 학자나 변증가가 아니라 예술가와 시인이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는 기독교 음악가와 예술가들이 세계 복음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외치는 것이다. 지상명령이 진정으로 수행된 곳에 침투된 문화에서 자신의 마음의 언어와 문화적 스타일로 예배하고 신앙을 선포하게 되는 것은 매우 마땅한 일이다.이러한 마음의 언어와 문화적 스타일은 예술 사역 전문가 또는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전문가인 토착 예술가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시각과 음악, 스토리텔링 또는 기타 집합적인 표현의 역학이 사용되는 의식이나 예전 또는 공식 대회에서 공적 및 사적 예배의 표현에서 믿는 공동체를 촉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예술 사역 전문가이다.“현재 예배는 현대 복음주의에서 잃어버린 보석입니다. … 그것은 현대 교회에서 잃어버린 하나의 빛나는 보석이며, 나는 우리가 그것을 찾을 때까지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토저(A. W. Tozer)는 이렇게 썼다.[2] 그리고 가장 귀중한 보석은 자신의 문화의 맥락에서 이해되는 예배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상징과 은유, 의식을 필요로 한다.이러한 예배는 머리의 언어를 넘어 마음의 언어로 하나님의 실재와 진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예술적 표현의 영역일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인격과 나라의 실재를 말을 뛰어넘어서 표현할 수 있도록 현대의 예배 예술가들을 특별히 준비시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예배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을 교회와 그 사명의 자리에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배치해야 한다.남아프리카 북동부 콰줄루나탈(KwaZulu-Natal)의 광대한 시골 지역 출신의 기독교 공예가들이 성경에 대한 진정한 아프리카의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밝은 구슬 장식의 태피스트리. 출처: 로잔운동 예술 및 음악 사역 인력에 대한 교회 내부의 저항젊은 신자로서 나는 두 가지를 아주 분명히 깨달았다. 하나는 교회 지도부가 예술 전문가를 신뢰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술계가 기독교 예술가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깨달음을 통해 나는 세계 복음화의 더 큰 대의를 위해 예술가들과 음악가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셨음을 느꼈다. 나는 또한 이러한 예술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역 구조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열정은 음악가와 예술가, 그리고 모든 종류의 창조적 사역을 시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선교 기관인 국제 기독교 증인 예술가회(Artists in Christian Testimony International, ACT Intl)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토착 예배와 원주민 기독교 공동체 형성에 헌신된 사람들이다.이 분야의 역사가 50년 정도 되었는데, 이제는 비록 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이 사역과 선교에서 예술적, 음악적 전략의 중요성에 대해 더 개방적이 되었지만, 교회 지도자들의 마음에는 이러한 저항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예술적 표현과 방법 및 전략에 대한 전략적 성격을 이해하는 소수의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기꺼이 제공되는 “사역 촉진 구조”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육과 교회 개척, 하이브리드 예배 큐레이팅 등의 사역 콘텐츠를 개발하는 실험을 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필요: 예술가와 음악가를 위한 선교적 구조예술적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이다.처음부터 ACT Intl은 사람들이 적절한 문화적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선포하도록 돕고, 교회가 적절한 예배를 열방에 가져오게 하는 세계 복음화와 총체적 사역을 위해 음악가와 예술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전념해 왔다. 이 일들은 음악과 예술을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의 문화를 되찾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독교’ 명령의 열쇠이다. 예술적 그리스도인은 사역을 지속하기 위해 적어도 세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이다. 그래서 ACT Intl은 이 세 가지 영역을 모두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예술 사역자를 찾고 파송하려는 더 많은 선교 기관이 필요하다.창조적인 하나님 나라의 종들이 모든 문화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예술가들을 사역에 동원하는 유사한 운동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오래지 않아 주님은 우리에게 테네시주 내슈빌에 위치하도록 지시하셨다. 이곳은 현재 음악의 도시이자 기독교 음악의 본고장으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큰 녹음 계약을 기다리고 있는 엄청난 수의 음악가와 아티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보수나 팡파르 없이 교도소 사역을 통해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ACT Intl의 교도소 사역은 실습을 통해 배우는 전도 훈련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교도소 사역이 성장함에 따라 예술가, 음악가, 무용수, 배우들에게 비전과 리더십 그리고 구조화된 기회를 제공했다.필요: 예술과 음악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더 많은 제자 훈련과 교육우리는 또한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는 예술가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더 심도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이러한 필요는 현재 uSeminary.org 및 Worshipedia.org라고 하는 예술-사역 훈련 프로그램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경험 많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이 그들의 지혜를 구체화하고 전달할 수 있는 고품질, 저비용의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예술 사역을 위한 성경적 신학, 성경적 전략 및 성경적 기술을 탐구한다. 우리는 현재 uSeminary, Worshipedia, uSeminary Publishing 세 가지 교육 서비스를 위한 온라인 포털을 보유하고 있다.ACT Intl 창작 예술가 커뮤니티는 이미 사역 중인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두 명의 초기 예는 현대 음악가인 마티 맥콜(Marty McCall)과 스캇 웨슬리 브라운(Scott Wesley Brown)이다. 두 형제는 내슈빌 음악가를 돌보는 데 중점을 둔 월간 ACT Intl Christian Musicians Fellowship을 주최하는 데 서로 다른 시간에 나와 함께하게 되었다. 마티와 스콧의 목회적 강점이 표면화되자, 하나님은 순회 사역에 예배 목회를 추가하여 지역 교회에서 리더십 역할을 하도록 두 사람을 감동시키셨다. ACT Intl과 연결된 다른 사람들은 해외에서 단기 음악 봉사 활동을 했다. 일단 지역 교회의 지경 너머의 사역에 참여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 예술적 방법과 전략을 통한 단기 선교와 지속적인 사역을 하는 것이 쉬워졌다.봉사할 준비가 됨: 예배 예술과 다른 창조적인 하나님 나라 일꾼들창조적인 하나님 나라 일꾼들과 예배와 예술 사역 전문가들은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잡아당김을 느끼고 있다. 많은 사람이 멘토링과 지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을 식별하고, 그들을 참여시키고, 그들을 배치하는 구조를 개발하고,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의도적으로 격려해야 한다. 세계 복음화는 예술 사역의 실천가와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 전문가의 참여 없이는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그러므로 당신이 창의적이라면, 매일의 예배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집중력과 사명을 주님께 간구하고, 당신의 예술적 열정과 기술을 그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당신이 교회에서 섬기는 리더라면 어떤 자격으로든, 당신의 영향이 미치는 영역에서 예술적인 사람들을 찾으라고 나는 촉구하고 싶다. 그런 다음 그들을 볼 때, 그들을 돌보고, 그들과 연결하고, 긍정하고 존경하고, 지원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강력한 방법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배에서 그의 영광을 표현하고, 용서와 접근에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성령께서 많은 사람의 삶에서 역사하실 아름다운 그릇으로 봉사하도록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특히 우리를 흑암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하여 해방된 주님의 예술 영역의 종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세계 복음 전도가 더욱 번성하게 될 것이다. 부디 여러분이 복음을 위한 이 풍부한 창조적 예술가 그룹을 참여시키고 돌보는 일을 지지하게 되기를 바란다.주1. ‘Christian Communities For Every Context’ by Michael Moynagh in the September 2020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0-09/christian-communities-for-every-context. 2. A. W. Tozer, Worship: The Missing Jewel (Camp Hill, Pennsylvania: Christian Publications, 1961), 9.원제: The Critical Role of Christian Artists and Musicians in Missions출처: lausanne.org
‘무교’는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by Joe Carter
2024-02-16
지난 십 년간 종교계에서는 새로운 인구통계 항목인 “무교(Nones)”가 꾸준히 비율을 높이며 두각을 나타냈다.“무교”는 종교 정체성 조사에서 “(종교) 없음”이라고 응답하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로서 기존의 종교 전통과 일치하는 부분이 없음을 나타낸다. 퓨(Pew)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무교라고 답한 사람들 가운데 17퍼센트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또 20퍼센트는 불가지론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63%)는 단지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 없음”을 선택했다.무교 가운데 69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31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상대적으로 종교를 가진 미국 성인의 45퍼센트는 50세 미만이고, 55퍼센트는 50세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무교는 남성(51%)과 여성(47%)이 거의 비슷한 비율로 나타난다. 지난 50년간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에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다고 말한 사람은 거의 0명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인 네 명 중 한 명(28%)이 무교라고 말한다. 이러한 추세는 현대 세계가 처한 영적 상태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종교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담론 분야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교의 부상을 신앙 포기와 무종교(irreligiosity)의 증가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기억할 점은 무교가 우리 주변에서 없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존재했다. 나디아 윌리엄스는 Cultural Christians in the Early Church(초기 교회의 문화 그리스도인)에서 이 용어가 지칭하는 이들을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지만, 외적 행동,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내적 생각과 동기는 기독교 신앙과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주변 문화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윌리엄스의 책이 짚어주는 포인트는 명확하다. 문화적 기독교를 현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그것은 교회가 생긴 이래로 항상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무종교인의 증가가 이와 관련된 현상이며 오늘날 자신을 무교라고 규정하는 많은 미국인은 단지 수십 년 전의 문화적 그리스도인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싶다.유행하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교의 신념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종교 정체성을 채택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니케아 신경의 고백을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거부한다는 건, 그 종교가 주장하는 명제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물론 이것도 사람들이 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로 무교인 사람이 가장 자주 제기하는 게 다름 아니라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이다. 무교의 무려 60퍼센트가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무종교를 지향하는 아주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믿음이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에 기반을 둔다고 말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각각 83%와 78%),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응답자 중에서는 단지 절반 미만(48%)이 같은 대답을 했다. 무교 중 상당수(47%)가 종교 단체에 대한 혐오가 비종교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답했다. 약 3분의 1(30%)은 종교인으로부터 겪은 나쁜 경험을 언급한다. 전체적으로, 무교의 55퍼센트가 종교 단체나 종교인(또는 둘 다)을 자신들이 비종교적인 주요 이유로 언급했다.믿음의 형성이라는 과정이 단지 추론에만 기반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기에 이런 결과는 놀랍지 않다. 팀 켈러는 인간의 지식에는 (1) 합리적/지적, (2) 경험적/직관적, (3) 사회적/실용적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서 (1) “그것에 타당한 이유가 있고” (2) “그것이 우리의 내적 경험과 일치하며” (3)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진짜로 ‘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켈러는 “적어도 교회에 대한 환멸 때문에 ‘확고하고 활동적인 신자’에서 ‘완전한 불신자’로 변하는 일부 사람들은 세 번째의 사회적 측면에서 보아야 하며,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만큼은 거의 확고하게 가졌던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특히 종교나 정치처럼 사회 현상에 대한 믿음 중 상당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회적/실용적 측면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유형의 믿음을 경제학자 아놀드 클링(Arnold Kling)은 “유행을 타는 믿음”이라고 불렀다. 즉, 내용의 타당성과 관계없이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지위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믿음을 말한다. 클링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젊고 부유한 십대들이 점점 더 LGBTQ+라고 선언하는 건,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유행이기 때문이에요.” 나를 포함한 많은 보수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동의할 것이다. 양성애, 섭식 장애, 성전환과 같은 부정적인 행동이 급증하고 있다. 그 원인은 그런 행동의 기본이 되는 신념이 점점 더 대중화되고 동료들에 의해 확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을 보면서도 우리가 종종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인기를 얻고 널리 채택되기를 원하는 믿음, 즉 기독교의 믿음에도 얼마든지 동일한 과정이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믿음은 참되고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통 복음주의 신앙이 유행하는 믿음이 되기를 원한다.기독교는 미국에서 아주 오랫동안 유행하는 믿음이었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는 가장 유행하는 믿음 중 하나로서 그 지위를 유지했다. 1960년대가 되어서야 하나의 문화 브랜드로서 누리던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다. 따라서 상당수의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 꼬리표를 별 부담 없이 “그리스도인”에서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으로 바꾸는 데에는 족히 또 한 번의 50년이 더 걸릴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독교가 유행하는 믿음이었던 이유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향수에 젖기 쉽다. 그러나 유행이 된 다른 믿음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또한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거나 유지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사람들의 비율은 언제나 높았다. 나의 논제가 정확하다면 그러니까 과거에 상당수의 미국인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이유가 단지 유행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라면, 오늘날 무교의 급부상도 철저한 무종교성의 증가 때문이라기보다는 항상 존재했던 무언가가 드러난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니까 일부 미국인들의 경우에 이전에 유행했던 특정 믿음을 더 유행하는 새로운 믿음으로 바꿨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힘든 도전과 함께 상당한 기회를 함께 제공한다. 더 많은 위선을 통한 더 나은 도덕성먼저 도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미국에서 기독교가 유행했을 때 기독교 도덕은 매우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물론, 기독교 도덕의 상당 부분, 즉, 인종 평등의 경우에 미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철저하게 무시받았다. 그러나 미국 역사의 초기에 기독교의 도덕 원칙(특히 성과 관련된 원칙)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매우 높게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 결과 도덕 나침반뿐 아니라 죄악된 충동을 억제하는 데에까지 많은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예언서, 산상수훈, 바울서신은 기독교 신앙에 완전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인정되는 윤리적 행동에 대한 명확한 틀을 제공했다. 기독교 도덕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존경심은 특정 행동을 억제하고 성경적 원칙에 기초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을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반대로,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 도덕의 지위가 쇠퇴함에 따라 죄악된 행동에 대한 외부 제한도 그에 상응하여 침식되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부패한 마음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28절)을 허용한 사회에 생길 비극이 무엇일지를 경고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경고가 현실이 된 사회를 목격하고 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가 사라지는 순간, 개인은 한때 통제되었던 충동에 호기심을 느끼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시스템이 유지되었던 것은 많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위선자였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이 실천하지 않는 도덕 표준이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예를 들어, 1973년에는 미국인의 절반 미만(43%)이 혼전 성관계를 지지했다. 이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에 결혼 외의 성관계를 반대했지만, 그중 상당수는 여전히 불법적인 성적 행위에 가담하고 있었다. 스스로 공언한 믿음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들은 용어의 정의상 위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행동이 (최소한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고 그 점을 기꺼이 인정했다.그렇다면 이런 식의 위선이 대안보다 더 나을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라메쉬 포누루가 주장한 것처럼 위선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도덕적 행위에 대한 공공 표준이 영향력을 가지려면, 필연적으로 그 표준을 믿는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충족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품위 있고 관대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위선은 필수적이다.” 다른 말로 해서, 최선의 선택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선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믿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다.이런 식의 위선을 선호해야 하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문화적 기독교에서 무교 상태로 전환되면서 상당한 손실이 발생한 건 사실이다. 기독교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에 오늘날처럼 외부의 장애물이 많지는 않았다. 더불어서 당시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믿음 때문에 생계를 잃을 염려 없이 “평안하고 조용한 생활”(딤전 2:2)을 하기가 더 쉬웠다. 그러므로 미국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왜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 기독교가 다시 유행할 가능성은 없으며 무교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과거 문화적 기독교 시대의 위선으로 돌아가라는 호소는 전혀 먹히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 이전이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넘치는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 아예 무교인 사람들이 기독교의 도덕을 사용해서 충분히 도덕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전례없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염소 판별기다행히도 심각한 도전과 함께 기회도 찾아온다. 이전에 문화적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무교가 됨으로써 누가 “염소”인지를 확실하게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참된 신자가 아님을 분명하게 한다(마 7:21-23).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 25:31-33).미래에 염소들은 예수님에 의해 가려질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염소 판별기”가 1776년에 발명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누가 진정한 예수의 제자이고, 누가 “염소”인지 단박에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데에 유리한 유행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심지어 도덕적인 삶도 살았지만, 그들은 사실상 “거듭나지” 않은 염소였던 것이다(요 3:3).만약에 그런 염소 판별기가 있었다면, 기독교는 한참 전에 유행과는 거리가 먼 종교가 되었을 것이고, 미국에서 도덕성의 쇠퇴는 수십 년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이다. 만약에 역사의 매 단계에서 유행에 이끌려 그리스도인 행세를 한 염소를 식별하고 그들을 진짜 믿는 양과 분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교회는 다니지만 진짜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건 사실상 시종일관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밥 존슨은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한다. “가장 확실한 전도 대상자는 언제나 교회 안에 있습니다.” 무교 현상을 일종의 자체 식별이 가능한 염소 판별기라고 생각하자. 과거에는 그리스도인 양들 사이에 숨어서 거듭나지 않은 염소로 남아 있던 이들이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더 이상 숨지 않고 진짜 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들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임을 당당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이제는 모를 수가 없다. 따라서 전도가 훨씬 더 쉽게 되었다. (아무 목사나 붙잡고 물어보라. 또는 단편 소설 계시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에게 물어보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불신자를 전도하는 게 쉬운지 아니면 독선적이고 기독교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는 거듭나지 않은 문화적 그리스도인을 전도하는 게 쉬운지 말이다.)무교의 약 44퍼센트(무신론자의 73퍼센트 포함)는 삶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거나 종교를 가질 시간이 없어서 비종교를 택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하는 그들의 필요를 본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들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 예수님이 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없다종교 정체성의 새로운 변화는 전도를 위한 독특한 기회를 제공한다. 어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문화적 기독교에서 훨씬 더 정직한 자기 정체성이라는 무교로의 전환은 복음을 나누기 위한 보다 명확한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종교에 대한 불신이나 무관심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이며, 그들이 잠재적으로 문화적 가식의 장벽 없이 복음의 진리를 듣는 데 더 쉽게 마음을 열도록 하는 기회이다. 이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에 나오는 상황과 비슷하다. 씨 뿌리는 사람은 다양한 땅에 씨앗을 뿌리는데, 그 결과는 복음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다. 어떤 씨앗은 길에 떨어지고, 더러는 돌밭과 또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일부는 좋은 땅에 심겨진다. 이 비유에서 무교는 문화적 기독교라는 가시가 제거된 땅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들의 땅은 이제 복음이 역사할 준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복음의 씨앗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뿌리고, 그중 일부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 맺기를 믿는 것이다. 동시에 무교의 부상은 교회 내 성찰과 개혁을 요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문화적 형태의 기독교를 장려하는가? 우리 교회가 삶에서 역사하는 복음의 변혁적인 힘을 드러내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패턴을 따르라는 압력에 굴복하고 있는가? 무교의 증가는 교회가 제자를 삼는 핵심 사명(마 28:19-20)을 다시 다짐하고, 기독교의 믿음이 단지 유행하는 부속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는 관계임을 확신하도록 하는 기회이다. 무교의 증가를 보며 실망해서도 또 현재에 안주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우리의 복음 전도 노력에 활력을 불어넣는 도전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내가 믿는 신앙을 삶에서 제대로 실천하겠다는 자극을 받아야 한다. 더 신실하게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더 큰 열매를 주실 주님의 주권을 신뢰하며(고전 3:6),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와 진리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주며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내뱉는 “특별히 관심 가는 종교가 없음”이라는 대답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을 믿음”으로 바뀌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원제: ‘Nones’ Have Always Been with 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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