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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 현장의 “허용된 죄들”
by Jen Oshman
2024-02-08
우리 가족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 있을 때, 우리가 있던 나라에서 죄악에 빠진 모습을 찾기란 매우 쉬웠다. 동남아시아는 거리 모퉁이마다 사원과 신사, 제물(祭物)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거짓 신을 숭배했다.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대낮에 버젓이 매음굴이 영업을 하고 불법 마약이 거래되었다. 우리 주변을 가득 메운 어둠을 보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미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 술 취함, 성적 부도덕 등을 찬양하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교회 개척을 시작했다.이러한 노골적인 죄의 모습이야말로 복음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큰 이유이다. 우리는 어둠을 보고 언덕 위의 도시로 출발한다(마 5:14-16).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쉽게 진단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악은 너무 자주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지만, 우리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7:3-5). 제리 브리지스는 Respectable Sins(허용된 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부도덕하거나 비윤리적인 행위 속에 담긴 죄를 식별하는 건 쉽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바로 ‘믿는 자들이 짓는 허용된 죄’이다. … 사실상 우리는 전반적인 사회와 마찬가지로 내가 짓는 죄를 부인하며 살고 있다.”브리지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런데 이 진리를 평신도를 넘어 국내외 사역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정직하다면, 몇몇 “허용된 죄”에 관해서는 교회 지도자라고 해도 쉽게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죄에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는 종종 당연하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1. 걱정한다사역에는 돈이 많이 들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족한 자금이라는 상황은 수시로 만나는 현실이다. 재정을 둘러싼 두려움은 종종 우리를 자린고비의 사고방식으로 사역하게 만든다. 자원을 비축한다. 불안에 사로잡혀 관대함에서 멀어진다. 걱정하는 마음을 현명한 청지기의 태도라는 식으로 위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불안과 걱정이 어떻게든 재정적인 바닥은 치지 않도록 지켜줄 거라는 심정에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된다. 삶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믿음을 가져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그분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다(마 6:25-34).2. 소유권을 주장한다 지금 다룰 허용된 죄도 자린고비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는 종종 흙이 건조한 곳에서 사역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척박하던 토양에서 싹이 트고 뿌리가 자라면 자기도 모르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열매 맺는 사역 자체가 성공했다는 증거이고, 언젠가부터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다른 교회를 희생시키면서까지 내 사역을 더 키우려고 하고, 또 우리가 키워낸 제자들이 다른 곳에서 봉사하려는 것을 막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를 독려하곤 했다. “우리만 성장하는 소문자 나라(kingdom)가 아니라 대문자 하나님 나라(Kingdom)을 추구합시다. 다른 교회도 열매를 맺도록 합시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것에 좌절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막 9:40).3. 떠들고 비방한다사역에 종사하는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하는 게 있다. 비공개로 모일 때, 짜증을 분출하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거 말이다. 지혜와 기도 제목을 나눈다는 미명으로 우리는 같은 교회를 섬기는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다른 사역자나 교회까지 뻔뻔스럽게 비방한다. 사역 팀이라면 서로 통찰력과 정보를 공유하는 게 맞다. 하지만 때로는 선을 넘어 험담할 때도 있으면, 그럴 때면 기분이 좋다는 사실에 솔직해야 한다. 누군가 내 자녀를 욕하고 다닌다고 할 때, 화가 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를 욕할 때,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화를 내실지 한번 상상해 보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는가?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35).4. 불평한다어둠에 맞서려면 편안함, 안전, 편의성, 지위 등을 희생해야 한다. 불평은 해로운 습관이 될 수 있다. 다루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불평하는 게 얼마나 쉬운가? 감사가 부족한 사람, 문화에 얽힌 죄 또는 만연한 불의를 보며 한탄하는 건 어렵지 않다. 너무 뻔한 진실처럼 들릴지 몰라도, 불평하는 사람의 진짜 마음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틀렸고 내가 더 잘 안다’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의문을 제기한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요 6:43-44). 상황이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과 구조 속에서도 여전히 역사하시며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5. 과로한다허용을 넘어서 존경까지 받을 만한 이 죄는 근면과 노력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는 참혹하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구원자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과 나의 방법에 의존할 때, 우리의 목회는 자립으로 변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깊은 안식과 성령님을 뒷전으로 미룬다. 사역으로 인한 탈진은 현실이며, 동시에 하나님만이 무한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그의 이름으로 사역하도록 파송하신 후(막 6:7-13), 그들은 돌아와서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다 예수께 고했다”(30절).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31절)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한적한 곳에 혼자 가시는 습관이 있었다(마 14:13). 하나님은 우리를 제한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따라서 주어진 한계에 따라 섬기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허용된 죄를 회개하기이런 죄를 나열하는 건 사실 내가 스스로 내 속에 오물을 넣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이 모든 죄에서 유죄이다. 이런 죄는 짓기 쉽다. 가면을 쓴 이런 죄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활보한다. 그냥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존경받을 만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독과 다르지 않다. 각각의 죄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 이 모든 하나하나의 죄가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동시에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상기시킨다. 복음을 맡은 자로서 우리는 숨은 죄를 회개하고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야 한다(히 12:1-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는 자로서 우리는 입의 말 그리고 모든 마음의 묵상이 그분 앞에 열납되기를 바라야 한다(시 19:14). 우리의 믿음과 행동이 오로지 그분의 영광만을 드러내길 간절히 바란다. 원제: Respectable Sins in Christian Minist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로잔 대회는 ‘이벤트’가 아닙니다
대회와 대회 사이에 ‘운동’이 있습니다
by 문대원
2024-02-0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대규모 국제 선교대회의 시의성과 필요성에 대해 질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 세계 200여 국가에서 5,000명이나 되는 선교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15-20년마다 열리는 로잔 대회(Lausanne Congress)를 일종의 국제 이벤트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로잔 운동의 의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라면 선교의 범위가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다들 인정할 것입니다. 일례로, 아프리카 부룬디 선교사로 사역했던 필자는 미국 단체가 설립한 국제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섬겼습니다. 캠퍼스에서 대학생을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사역이라고 생각하며 부룬디로 떠났지만, 현지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아와 임산부를 위한 사역, 낙후 지역 식수 개선 사업, 현지 교회 건축 사역 등 다양한 사역을 섬기게 되었습니다.수많은 필요가 있는 선교지에서 순전히 영적인 사역만을 감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과 더불어, 취약 계층을 돌보는 사역,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사역, 병자를 치료하는 사역 등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와 사회 책임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사역은 선교에 있어서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선교 현장에서 가장 의미 없는 질문은 “복음이 먼저인가, 빵이 먼저인가?”입니다. 복음과 빵 모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선교의 범위가 광대하고 선교지의 필요는 다양하기 때문에,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위한 연합과 협력은 필수입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1792년에 출간된 그의 책 ‘이교도 개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에서 대륙별로 세계 선교 현황을 제시하며, 전 세계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모여서 선교 현황과 전략을 논의하는 국제 선교대회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1810년에 이러한 선교대회가 열리기를 희망했는데, 그의 제안은 그로부터 100년 후인 1910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가 개신교 최초의 국제 선교대회는 아니었습니다. 1888년 런던 선교대회(Centenary Missionary Conference)와 1900년 뉴욕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가 있었지만, 에든버러 대회는 이전 대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선교회(총 160개)가 참여했습니다. 에든버러 대회에 참석한 1,200명의 대표단은 각각의 선교회에서 선정했는데, 이는 세계 교단의 기구적 연합이 아니라 실제 선교사들의 협력 사역을 꿈꾸었던 의장 존 모트(John Mott)의 비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에든버러 선교대회에는 총 8개의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1) 비기독교 세계에서의 복음 전파, (2)현지 교회와 현지 지도자, (3)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육, (4) 타종교에 대한 선교적 메시지, (5) 선교사 준비, (6) 선교회 본부, (7) 선교와 정부의 관계, (8) 연합을 위한 노력. 에든버러 대회 이후에도 활발하게 사역을 이어간 8개의 위원회는 선교 역사에서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고 불리는 19세기를 지나온 당시 선교 지도자들이 세계 복음화에 대한 어떤 비전과 전략을 품고 있었는지 보여줍니다.‘이 세대 안에 세계의 복음화’(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담대한 비전을 선포한 에든버러 선교대회는 국가와 교단을 넘어선 새로운 기독교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영국 성공회교회, 독일 루터교회, 네덜란드 개혁교회 같은 국교회(state church) 개념이 지배적이었던 기독교 왕국(Christendom) 시대에서 국가를 넘어선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 시대로의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에든버러에 모인 선교 지도자들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1920년 창설)이나 국제연합(United Nations, 1945년 창설)보다 훨씬 전에 전 세계가 하나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주창했습니다. 보스턴 대학의 데이나 로버트(Dana Robert) 교수는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선교사들이 에든버러 선교대회를 통해서 국제화(internationalism)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해 전 세계가 가까이 연결되어 있고, 세계 복음화를 위한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선교 사역의 이해와 접근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서구 교회와 현지 교회가 상호 존중 가운데 동반자 관계를 세워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이러한 배경이었습니다.로잔 대회는 15-20년마다 열리는 국제 이벤트가 아닙니다. 앞선 대회와 다음 대회 사이에 100회가 넘는 다양한 규모의 국제 포럼과 협의회(consultation)가 열리는데, 12개의 권역(regions)과 27개의 이슈 네트워크(issue networks)로 변화하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선교 전략과 신학적 성찰이 공유되었습니다. 교회개척, 성경번역, 도시선교, 디아스포라, 비즈니스, 어린이, 장애인, 사회정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한 선교 협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될 그날까지 함께 기도하며 헌신하는 이들의 자발적인 연합체가 로잔 운동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고 하셨을까?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일까?
by Wyatt Graham
2024-02-06
마태복음 24:36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하셨다.당연히 이런 질문이 생긴다.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르신다고 했을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들이 모른다면,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인가?아들은 하나님이시고 또 사람이시다성경은 아들이 하나님(요 1:1; 골 2:9)이시요, 동시에 사람(요 1:14; 히 2:14; 빌 2:7; 롬 8:3)이시라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24:36은 이러한 성경의 진리 중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한 성경의 규칙은 이렇다. 보통 성경은 때때로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인성 면에서 아버지보다 낮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아버지와 동등함을 확증하셨다. 그러면서 인성에 있어서는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요 14:28)이시라고 기꺼이 인정하셨다.이 기본 해석 규칙은 성경만큼 오래되었다. 이 성경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는 글을 보려면 여기를 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진리는 두 가지이다. “아버지는 종의 형체보다 크시지만 아들은 형체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1]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빌립보서 2:6-8에서 바울은 아들이 본체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인성에서는 종의 형체를 지녔기에 하나님보다 작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다. 이 기본 진리를 알면 마태복음 24:36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기본 해석 규칙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의 무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처럼 사셨다. 이런 원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마태복음 24:36을 둘러싼 더 큰 성경의 맥락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마태복음 24:36의 전후 문맥 푸아티에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310-367)는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에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아리우스파가 마태복음 24:36을 어떤 식으로 인용하는지를 설명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모르는 예수님이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한 구절만을 놓고 보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문맥에 맞게 읽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36과 관련해서, 힐러리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앞뒤의 내용을 확인할 때 제대로 드러난다”라고 언급한다(De Trinitate §9.2).힐러리의 이 말은 마태복음 24:36의 문맥을 이해하려면 본문 자체를 넘어서 마태복음 전체, 심지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서 힐러리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무려 두 장(9-10장)에 걸쳐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한다. 근접 문맥에서 볼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4:36(마 22:41-46)을 말씀하시기 전에 우선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막 13:32)에서도 예수님은 이 말씀에 앞서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을 뿐만 아니라(막 12:35-37), 마가는 마가복음 11:15-19에서 예수님이 주 하나님으로 성전에 오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마가복음 서두가 암시하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막 1:2). 전체로 볼 때, 성경이 증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요 21:17; 시 44:21). 아들과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다(신 6:4; 요 10:30). 바울이 말했듯,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시고”(골 2:9).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요 1:16; 골 2:10).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또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 1:14)고, 그리고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다”(히 2:14)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자 하나님은 사람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에게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사람이신 게 사실이라면, 마가복음 8:29이나 마태복음 24:36에서도 그분이 자신의 그런 존재를 멈추실 리가 없다. 마태복음 24:36을 정경의 맥락에서 읽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Q: 마태복음 24:36에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있는가? A: 그렇다.Q: 아들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신가? A: 그렇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들어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이 점이다. 설혹 어떤 구절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굳이 다 설명할 의도가 없다고 해서, 완전한 그리스도가 완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다”(히 13:8).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누구라는 점을 오로지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라서만 확증해야 한다. 이 진리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없는 특정 구절이 있다고 해서 그분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예를 들어, 칼뱅은 마태복음 24:36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2]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이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근거로 할 때, 하나님으로서 아들은 모르는 게 없으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36에서 드러난 예수님이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그분의 무지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Nazianzus)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무지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귀속시킴으로, 우리는 가장 경건한 방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Or. 30). 그리고 그레고리도 지적했듯이,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야만 했던 이유도 “내 몸으로 내가 직접 감당하지 않고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Epistle 101 to Cledonius).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모든 부분을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처럼, 즉 몸과 영혼과 정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시험과 슬픔과 고난이 가득한 진정한 인간으로 사셨다.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인간을 공감하기 위해 “살과 피”를 취하셨다(히 2:17-18).마찬가지로, 히브리서 5:7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예수님도 인간의 슬픔과 염려가 있으셨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히 5:7).조금 앞서 히브리서 4:15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 26:3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이 어떤 느낌인지 아신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1:5-6)고 확증해야 한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히 4:15) 참 인간이시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날과 그 시를 모르셨다. 칼뱅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요 21:17)가 인간으로서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슬픔과 불안을 겪지 않으셨을 것이고, 결코 우리와 같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히 2:17)”(Harmony, 154).칼뱅은 슬픔과 불안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러한 시련과 유혹을 경험하셔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공감할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도 시험을 이기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실 수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벧전 2:21-22).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칼뱅은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무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긴 문장으로 설명한다.“중보자가 되려고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계시는 동안에 한해서, 그래서 최소한 그가 직분을 완수할 때까지는, 정확한 종말 시점에 관한 정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이해한다. 그건 그가 부활하신 이후에 받은 지식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예수님이 직접 부활하시고 나서야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이다(마 28:18절)” (Harmony, 154).중보자되신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인간처럼 알고 계실 뿐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날과 그 시간에 관한 지식을 받으셨다는 게 칼뱅의 주장이다. 칼뱅은 성경 전체를 자신만의 문맥으로 이해해서 읽었기에 이 구절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Harmony, 154).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마태복음 24:36을 읽어야 한다. 즉, 신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성경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칼뱅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에서도 특별한 부분, 즉 그날과 그 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시는 동안에도 어떻게 여전히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때는 쉬는 상태(a state of repose)였다.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이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에, 즉 인성이 고유한 특성에 따라 별도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성은 전혀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Harmony, 154).칼뱅이 의미하는 바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서 그분의 신성이 더 드러나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와 구속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구속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있어서 예수님의 무지는 그분의 참된 인성을 보여주며,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여준다. 힐러리는 그 점을 지적한다. “주님께서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염려의 무게를 없애셨다” (Matthew §26.4).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굴욕을 당하시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셨고, 그 사실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참 인간으로 사셨음을 의미한다.성경은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한다아리우스파가 성경을 문맥에 맞게 읽지 않는다는 힐러리의 비판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마태복음 24:36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떼어내서 읽는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 구절을 이해했다. 힐러리의 지적은 단순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도록 성경 전체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마태복음 24장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길게 가르치지 않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는 그 점을 배울 수 있다. 성경의 각 부분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 전체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 24:36 주위의 몇 구절만 읽는 것은 문맥을 떠나 성경을 읽는 것이다. 힐러리의 주장에 따르면, 그게 바로 아리우스파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속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자 사람이심을 가르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부르면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셨습니다”(딤전 3:16). 성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기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딤전 2:5)가 되셨다. 마태복음 24:36에서 그날과 그 시를 모른다고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 곧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참된 인성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 2:5).1. See The Trinity, trans. Edmund Hill, ed. John E. Rotelle, 2nd ed.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78.2.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6), 154. 원제: Why Doesn’t Jesus Know the Day and the Hour in Matthew 24:3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참여와 초청의 예배, 그리고 음악
by 서나영
2024-02-05
우리는 각자 다른 음악에 감동한다. 그래서 ‘어떤 음악으로 예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예배를 준비하는 수뇌부가 거쳐야 하는 유격 훈련과도 같다. 예배학 저서에서 볼 수 있는 ‘예배 전쟁’(Worship War)이라는 용어는 현장에 나와 보니 과장이 아니었다. 때로 예배음악 수업 전에 임하는 나의 태도는 전장에 나가는 채비를 갖추곤 한다. 교회마다의 사정도 비슷하다. 담임목사와 음악목사의 갈등, 찬양팀과 장로님의 갈등, 지휘자와 예배팀의 갈등 등, 그들의 뒷 여담은 꽤나 흥미롭다. 이 전쟁은 예배를 준비하는 최전방 리더들의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휴전과 침공이 끝나지 않는다.마르틴 루터는 1544년 개신교 예배를 위해 최초로 지어진 교회의 봉헌 예배에서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우리는 응답하는 시간이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조지 플로로브스키도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정의했다. 후에 수많은 예배신학자들의 매혹적인 정의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정의를 어렵지 않게 읊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자세,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할렐루야로 ‘송축’하는 자세, 즉,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예배라는 사실에 대해 말이다.문제는 ‘참여’라는 단어는 그 본래 의미를 한없이 축소가능한 단어라는 것이다. 나는 강의 현장에서 실제로 수업 내용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출석을 놓치지 않는 학생들을 줄곧 봐왔다. 수업에 관심이 없지만 출석으로 학점을 따고 졸업에 문제가 없게 하겠다는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은 수업에 참여하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참여한 것이 아니다. 수업을 주도하는 교수자는 이런 종류의 인격모독을 생각보다 많이 경험한다.이와 마찬가지로 주일 예배시간에 참여는 하지만, 몸만 와서 앉아 자신의 죄를 가리는 은신처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 도피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는데,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배 장소를 “도적의 굴혈”로 만든 파렴치한 삶의 유다 백성의 예배(렘 7:22)는 하나님을 비인격적 존재로 치부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그들은 평일에는 강탈을 일삼다가 일말의 양심을 털어낼 때와 장소로 안식일과 성전을 택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범행을 피해 은신의 방법이 더 세밀해지고 다양해진 듯하다. 개신교에서 알맞다고 정해 놓은 예배 순서와 형식에 맞춰 예배를 선포하고, 대표기도를 하고, 말씀을 듣고, 헌금을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축도까지의 시간을 마치면 복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없다는 믿음과 함께 예배당에 앉아 있다. 마치 출석의 의무를 끝내 안도하는 학생들처럼, 어딘가에서 보고 계실 하나님 앞에 눈도장을 찍는 것으로 만족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익한 말씀, 개인의 입맛에 맞는 음악, 눈을 즐겁게 하고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적당한 조명이면 좋은 예배였다고 말한다. 설교자의 신박한 성경해석으로 인해 몰랐던 것을 깨닫거나 삶과 일에 적용할 유용한 통찰력을 얻으면 은혜로운 설교였다고 고백한다. 긴장한 마음이 풀어지고 위로를 얻었으면 성령충만한 예배였다고 확신한다. 물론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인지 여부는 인간이 감히 논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체자가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될 때 일어나는 일에 우리는 끊임없이 주의해야 한다. 이 일은 너무도 교묘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남은 물론 자기 자신도 깨어 있지 않으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체가 된다 해도 하나님을 위한 자리도 어느 정도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보좌에 앉는 것이 자신이 될 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고 찬양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묘한 뒤바뀜의 결과는 끔찍하다. 아무리 하나님을 의식하는 점유율이 높아도 보좌의 주인이 자신인 이상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함이 아니다. 이것은 냉철한 진실이다.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통제권이 가장 중요해진 오늘, 사회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전문인들을 고용한다. 세상에서 원하는 인재는 자신의 전문분야 안에서 일어나는 예외사항과 오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슬픈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통제권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는 현상이다. 내 감정을 위로하는 찬양에는 은혜 받았다고 매일 듣지만, 내 행동을 교정하려는 오래된 신앙교육적 찬송가 가사에는 음악과 가사가 촌스럽다며 부르질 않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를 부르는 것은 원시 그리스도인이 부르던 찬송 문헌으로 남겨지기 직전이다.예배의 임무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예배의 음악에 있어 통제권을 갖는 일은 위험한 일이다. 예배음악을 논하고 싶은 자들은 평생에 단 한 번의 예배도 느슨한 선택을 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으로 임해야 한다. 예배에 사용되어야 하는 음악에 대해 수없이 많은 질문을 들어왔다. (대개 질문자들은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시험하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예배학 책을 수십 권을 읽어도 음악 스타일에 대한 구체적 기준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 지문만큼 각기 다 다른 미학을 지닌 곡들에 어떤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는가? 단언컨데, 성경에 나온 찬양 용어와 내용을 다 파악하고 외운다 해서 좋은 예배음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교와 좋은 교회음악 대학원을 졸업한다 해서 하나님께 합당한 음악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성경 전체를 밤낮으로 즐겨 읽으며 묵상하고, 매일 기도하며, 예수님의 방식대로 선택하고자 주님께 자문을 구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평생에 걸친 이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온전한 예배자로 서겠다는 갈망함이다.온전한 예배자는 두 단어를 목에 걸고 가슴에 새겨야 한다. 첫 번째는 ‘초청’이라는 단어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최근 한 젊은 과학도가 주일 회중예배에 대한 자신의 의구심에 대해 말했다. 안식일이 아닌 일요일에 다 같이 모여 회중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어디서든 명확하게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예배신학의 인용과 설명은 모두 회중예배의 필요성과 유익성을 설명해 주시만,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당위성을 찾을 수 없다고 말이다. 회중예배 순서 속에 만들어진 형식의 강요가 올바른 것인가라는 의문도 뒤따랐다.논리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교회예배의 모든 것이 설명 불분명하다고 교회와 예배를 떠나는 일이 많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별히 코로나 이후 방구석 온라인 예배를 맛본 사람들은, ‘사실은 예배의식이 그저 사회적 약속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발적인 참여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심정,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초청에 응하여 참여하는 인격적인 관계에 행복해하시는, 그 파격적인 선물에 관해서 말이다. 예배에 관해서도, 예술에 관해서도,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진리들에 관해서도 명확하게 선을 긋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랑의 신비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청하는 자유로운 초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과 참여를 뼈저리게 기다리고 계시지만 우리를 로보트처럼 취급할 생각은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자식을 만날 날만 기다리지만 자식을 사랑해서 강제로 앉혀다 놓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 때문이다. 나는 열두살 난 딸에게 때때로 시를 쓰도록 지도하지만, 한번도 시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자유로운 상상력에 방해를 받으면 진짜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배의 본질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로의 초청과도 같다. 구약의 까다로운 제사법이 종료되고 예수님이 명하신 “영과 진리”의 예배로 바뀌며, 긴 시간동안 선조들은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예배의 방법이 맞지 않으면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나라가 갈라지기도 했다. 우리는 신약에 듬성듬성 나오는 성찬과 기도와 찬송, 말씀, 구제(헌금) 등의 예전적 요소를 추적할 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확한 예배의 설명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어쩌면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말하기 위해 침묵하신 것일 수도 있다. 예배는 강제로 행해지는 의식이 아니라 초청에 참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온전한 예배자가 품어야 할 단어는 “참여”다. 초청자에게 화답할 때 예배자가 된다. 찬양은 주님을 경외하고 감사하고 감탄한다는 참여의 가장 확실한 표식이다. 성찬이 절기 의식으로 남은 오늘날, 예배 속에서 찬양 외에 우리의 감탄과 감사와 경외함을 소리칠 수 있는 예배 순서가 또 있는가? 그러므로 예배음악이 어떠해야 한다는 안전한 기준은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음악이어야 할 것이다. 밴드음악이든, 클래식이든, 어떤 악기를 사용하든, 어떤 발성법으로 인도하든, 음악은 온 회중을 태워 움직일 수 있는 대형 에스칼레이터가 되어야 한다. 회중이 응답할 마땅한 내용으로, 회중이 부를 수 있는 음역대와 박자와 소리로 울려야 할 것이다. 감각의 폭발을 유도하는 행위가 주된 목적이었던 바알의 제사(왕상 18:26-29)가 되지 않게 늘 주의하고, 음악의 기쁨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응답하며 그 관계 속에 참여할 수 있는 집중력이 필요하다.예배는 하나님의 세계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계 속에 들어가 흘러 넘치게 받은 힘과 능력과 기쁨의 잔으로 우리의 나머지 삶을 적시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에 일터과 가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 가운데 사소한 언어 한마디까지도 그 거룩함 속에 잠기는 것이 예배다. 예배는 우리의 종착지인 새 땅과 새 하늘과 새 도시의 건물에서 새 삶을 살며 부를 희락의 노래를 연습을 하는 시간이다(계 21:1-4).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주인의 보좌에 앉지 말자.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그 초청이라는 사랑의 선물을 누리고,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께 참여하자. Soli Deo gloria!
로널드 J. 사이더의 유산
변혁적 선교를 형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by Al Tizon
2024-02-03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선교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실천에 대한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의 여정의 역사는 북미 신학자이자 활동가인 로널드 J. 사이더(Ronald J. Sider)를 빼놓고 논할 수 없다. 그는 2022년 7월 27일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은 의미 있는 삶을 살았던 그를 기념하고 그의 업적이 교회 선교에 끼친 지속적인 영향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준다.그는 거의 45년 동안 필라델피아 인근의 파머(Palmer) 신학교에서 신학, 통전적 사역, 공공 정책 분야의 저명한 교수이자 사회행동을 위한 그리스도인(Christians for Social Action)의 설립자이기도 했지만, 다문화 선교사로 섬긴 적이 없었다. 영혼과 사회를 모두 다루는 온전한 기독교에 주목하던 그의 연구와 사역은 주로 북미라는 자신의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북미 대륙은 그의 메시지를 담아낼 수 없었고, 사이더의 영향력은 대륙의 경계를 넘어 교회의 세계 선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이는 순전한 우연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그는 국제 로잔대회에 세 차례 모두 참석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2010년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로잔대회에 그와 함께했다. 제1차 대회와 제2차 대회 사이 1980년도에 사이더는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Fellowship, 현재는 World Evangelical Alliance)의 윤리 및 사회 부서(Unit on Ethics and Society)에서 일하며 단순한 생활방식과 공동체 개발에 관한 두 차례의 협의를 조직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문화적 맥락에 적절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지만, 그의 시야 안에는 전 세계가 담겨 있었다.그는 변혁의 운동을 촉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 선교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는데, 이는 인페미트(INFEMIT, International Fellowship for Mission as Transformation), 옥스퍼드 선교 연구 센터(Oxford Centre for Mission Studies), 그가 초대 편집장을 역임한 저널 트렌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국제 레그넘 북스(Regnum Books)와 같은 지속적인 단체에서 잘 드러난다.변혁 운동 혹은 ‘변혁으로서의 선교’는 신학적인 학문에 뿌리를 둔 통합적, 상황적, 관계적 선교를 실천하는 성찰하는 실천가들의 느슨한 글로벌 네트워크라고 정의될 수 있다. 변혁주의자들은 평화, 정의, 구원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해방 없는 복음화, 구조의 변화가 없는 마음의 변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 화해가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화해, 공동체의 구축이 없는 교회 개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1]고 주장한다.이 운동의 뿌리와 열매를 파헤치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매번 로널드 J. 사이더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르네 파디야(Rene Padilla),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 비나이 사무엘(Vinay Samuel), 멜바 마가이(Melba Maggay), 콰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피터 쿠즈믹(Peter Kuzmic) 같은 인물들도 친구 혹은 ‘협력자’로써 함께 ‘변혁으로서의 선교’에 동참했다.온전한 복음에 대한 변혁적 이해를 기초이자 배경으로 삼아, 사이더가 이 운동을 형성할 때 기반으로 한 다섯 가지 주요 방법을 살펴보자.변혁과 제자도: 나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다첫 번째 요소는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제자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이더를 사회 정의와 연관시킨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더의 대답은 분명했다. “나는 사회 운동가가 아닙니다.”[2] 이 답변은 선언적이면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사이더가 스스로를 사회 운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주의 구주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3] 사회 변혁에 대한 그의 동기는 인본주의적 이타주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도, 즉 세상에서 예수님을 신실하고 근본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깊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부와 빈곤: 기아 시대의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제 여섯 번째 판을 출간한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Christianity Today의 복음주의 세계를 만든 50대 도서에 선정되었다. 그 영향력만 놓고 볼 때, 사이더가 복음주의 선교의 중심이 되는 경제적인 삶을 위해 그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부의 추구는 신처럼 떠받드는 소와도 같으므로 이에 도전하는 것은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같다! 그러함에도 사이더는 부를 복음의 사역을 방해하는 강력한 우상이라고 불렀다.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생활 수준은 21세기 북미의 신이며, 광고인들은 그들의 메신저이다.”[4]사이더의 비판은 성경적 신앙의 규칙이 아닌 자본주의의 규칙에 따라 의심 없이 부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그는 “풍요와 빈곤의 시대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 성경적 진리보다는 사회의 물질주의적 가치를 따르는 이단에 굴복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5]고 적었다. 성경 속 선지자들의 정신에 따라 사이더는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경제를 실천하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한다고, 즉 예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촉구했다.부유한 그리스도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이더의 추궁은 교회의 전 세계 선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이는 나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하고 억압받고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팔아 그 수익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요청으로 해석되었다(참조. 막 10:17-27; 마 25:31-40). 여기에 함축된 의미는 우리의 부가 선교의 자산이라기보다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조나단 봉크(Jonathan Bonk)의 저서 ‘선교와 돈’[6]은 부유함이 선교 사역에 미치는 영향에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라면, 사이더의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직접 사역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선교 공동체 전체가 물질적 자원에 대한 태도와 관리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생각하도록, 경제적으로 의식적인 선교에 영감을 주었다. 우리에게 맡겨진 풍부한 자원은 복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인가?[7]단순한 생활방식: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대로 살기의심할 여지 없는 부의 추구에 대한 경고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의 실천적인 헌신은 선교적 신실함에 필수적인 단순한 생활방식에 대한 그의 부르심과 맞닿아 있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가 세계 속 가난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준다. 사이더는 전 세계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이러한 신념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는 “수많은 사람이 겪는 빈곤에 우리 모두가 충격을 받으며, 이 빈곤의 원인인 불의에 대하여 분개한다. 우리 중에 풍요한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은 검소한 생활양식을 개발해서 구제와 전도에 더욱 공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확신한다”(언약 9항)는 로잔 언약의 내용을 마음에 새겼다. 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영감을 받은 사이더는 1979년 미국 뉴저지와 1980년 런던에서 두 차례에 걸쳐 단순한 생활방식에 관한 협의체를 조직했다. 이 모임을 이끌었던 주된 질문은 “부유한 이웃의 생활 수준이 아닌 가난하고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필요를 기준으로 우리의 생활방식을 측정할 수 있는가?”였다.[8]단순함(Simplicity)은 더 적은 것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며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더에게 있어 단순함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보여주고, 이는 교회의 사명에 신뢰성을 준다. 실제로 단순함은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향하게 한다. 또한 여유로운 시간과 자원으로 선교에 더욱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그리고 제품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마음을 키운다.평화와 비폭력: 예수가 주님이시라면비폭력에 대한 사이더의 신념은 그에게 책임이 있는 또 다른 선교의 윤곽을 제시한다. 확고한 평화주의로 유명했던 사이더는 비폭력 행동을 ‘“적”의 인격까지 존중하며 악에 맞서는 활동가로서, 비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억압을 종식시키고 억압하는 자와 화해를 도모하는 것’[9]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저서 ‘비폭력 행동(Nonviolent Action)’에는 1980년대 중반 필리핀의 잔혹한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피플 파워 혁명(People Power Revolution) 등 비폭력이 사회 변화를 일으킨 역사의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10] 하지만 궁극적으로 사이더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사이더가 비폭력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따분한 평화주의 대 정당 전쟁(just war)의 논쟁에만 국한하지 않고, 교회 전체가 평화를 만드는 데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진정한 정당 전쟁의 관점에서는 폭력의 사용을 전술 목록의 제일 마지막에 두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폭력에 의존하기 전에 모든 비폭력적 가능성을 시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폭력 행동에 대한 요청은 평화주의자, 정당 쟁 이론가,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 땅에서 ‘평화를 쟁취’하라고 손짓한다.예수의 정치: 사회정치 참여[11]마지막으로 사이더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정치에 부합하는 자세로 공공의 문제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주로 북미 지역의 신자들에게 사회정치적 참여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각자의 상황에서 정치 과정에 참여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권력에 진실한 목소리를 내며 하나님의 평화, 정의, 공의를 반영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라는 그의 메시지는 세계 교회에도 뚜렷하게 전달된다.[12]이는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일반적인 오해에 도전한 것이다. 또한 단순히 교회됨을 통해 대안 사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사회 윤리적 책임을 줄이는 일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와도 대립하였다. 카터 행정부의 정책입안팀에서 일했던 사이더는, 교회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치의 주된 흐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굳게 믿었다.그렇긴 하지만, 사이더는 당파적 정치를 반대했다.[13] 그리스도인의 사회정치 참여는 정당을 초월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당파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따금 나에게 “알, 정치 노선의 양쪽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화나게 하면 자네는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거야!”라고 말했다. 이념적으로 어딘가에 사로잡히거나 당의 노선을 따르기를 거부한 그는 ‘예수님의 정치’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런 정치는 “친생명, 친빈곤, 친가족, 친인종정의, 친평화, 친창조세계돌봄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 모두를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14]강력한 기반 위에 구축요약하자면, 나는 오늘날 복음주의 세계 선교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 로널드 J. 사이더의 업적에서 다섯 가지 요소를 강조했다. 선교에 대해 진정한 총체적, 상황적, 관계적, 신학적 접근을 지지한 변혁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사이더가 크게 기여한 바는 다음과 같다. (1) 통합적 선교를 제자도의 영역에 위치시킨 것; (2) 부와 빈곤의 문제를 선교 의제로 집중시킨 것; (3) 단순한 생활방식에 관한 로잔 언약의 선언을 개발하는 데 다른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 (4) 세상에서 교회의 정의 사역의 일환으로 비폭력 평화 만들기를 외쳤다는 것; (5)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변화와 취약 계층을 위해 각자의 상황 속 정치의 과정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다는 것이다.나에게 로널드 사이더의 추도식에서 연설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다. 나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을 마음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가 타협하지 않고 예수님과 복음에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풍성한 자원을 제공해 준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주1. Al Tizon, Transformation after Lausanne: Radical Evangelical Mission in Global-Local Perspective (Oxford et al: Regnum, 2008), 6.2. See Ronald J.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Making Jesus the Agenda (Scottdale, PA: Herald, 2008). 3.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21. 4. Ronald J. Sider,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Moving from Affluence to Generosity. Sixth edition (W Publishing, 2015), 28. 5. Sider, Rich Christians, 25. 6. Jonathan Bonk, Missions and Money. Revised and Expanded (Maryknoll: Orbis, 2006). 7.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A Holistic Approach to Poverty Alleviation in Asia’ by Kumar Aryal in 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a-holistic-approach-to-poverty-alleviation-in-asia. 8. Ronald J. Sider, ‘Introduction,’ in Living More Simply: Biblical Principles and Practical Models, ed. Ronald J. Sider (Downers Grove, IL: IVP, 1980), 16. 9. Ronald J. Sider, Nonviolent Action: What Christian Ethics Demands but Most Christians Have Never Really Tried (Grand Rapids, MI: Brazos, 2015), xv. 10. Sider, Nonviolent Action, 63-77. 11. This section is adapted from ‘Leading Evangelicals for Social Action,’ in Religious Leadership: A Reference Handbook, ed. Sharon Henderson Callahan (Los Angeles et al.: Sage reference, 2013), 459-460. Used by permission. 12.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Working for Freedom in a World of Exploitation and Trafficking’ by Marion L. S. Carson in Lausanne Global Analysis, July 2022,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2-07/working-for-freedom-in-a-world-of-exploitation-and-trafficking. 13. 그렇지만 그는 트럼프를 분명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매우 드문 이런 경우에도, 그는 특정 정당의 입장에서 그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See The Spiritual Danger of Donald Trump: 30 Evangelical Christians on Justice, Truth, and Moral Integrity, ed. Ronald J. Sider (Eugene, OR: Cascade, 2020). 14. Sider, I Am Not a Social Activist, 203. 원제: The Legacy of Ronald J. Sider출처: lausanne.org
세상에서 가장 비관적인 종교
by Jerry Riendeau
2024-02-02
“똑같은 신을 숭배하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근본적인 면에서 동일한 핵심을 갖고 있다.”미시간주 디어본에서 교회 개척 사역을 하는 나는 이런 주장을 자주 접한다. (디어본은 북미에서 아랍인이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주로 젊은 무슬림인데, 그들의 의도는 나쁜 게 아니다. 나름대로 문화와 종교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로의 신앙을 향한 상호 이해와 존중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기독교의 근본 원리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다. 나는 종종 이렇게 반문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유한다는 ‘핵심’이 과연 뭘까요? 기독교와 이슬람이 정말로 그렇게 비슷합니까?”그러면 보통 듣는 대답이 있다. “글쎄요, 결국 우리는 다 신을 기쁘시게 하고, 그래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나요? 그런데 말이죠. 내가 지금 기독교라는 종교는 너무 비관적이어서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사실 난 세상에서 가장 비관적인 종교가 기독교라고 생각하거든요.” 기독교의 핵심에 있는 비관주의내 반응은 종종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은 내가 왜 그리스도인을 그토록 비관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말로 궁금해한다. 대화는 보통 이렇게 흘러간다. “그리스도인이 비관적이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글쎄요, 당신은 우리가 다 신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죄를 지은 인간은 결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아니, 그럼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부분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런 질문을 전도의 기회로 착각할 수도 있다.농담이지만, 이게 단지 기독교와 이슬람교만의 차이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기독교의 뿌리 깊은 비관주의는 기독교를 거의 모든 다른 세계관과 차별화시킨다. 대부분의 비기독교 신앙과 철학은 완벽함을 (또는 적어도 적절함을) 추구하는 다양한 전략을 제공한다. 오로지 기독교만이 자기 정당화의 시도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완전한 패배를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쁜 소식은 좋은 소식을 의미있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이 부분만 정확하게 구분되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많은 차이점이 쉽게 설명된다. 다음은 두 가지 예이다. 첫째, 무슬림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이 보내신 여러 선지자 중 한 명이라고 주장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무슬림의 관점에 따르면, 이런 주장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지시 사항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메신저, 사자이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서 그런 지시를 한다는 건 극도의 과잉 조치이다. 둘째, 무슬림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지 않는다. 결국,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였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낸 선지자가 그런 식의 불명예를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다른 사람이 예수를 대신해서 죽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는 단지 잠시 죽은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이런 견해는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기독교의 비관적인 견해를 제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위험에 처하지 않은 사람을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죽음을 영웅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냥 말도 안 되는 헛된 죽음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인간관을 공유하지 않는 무슬림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터무니없이 들리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만 잘 정리하면 환상적인 대화의 문을 열 수 있다. 반짝하고 전등이 켜지는 순간“잠깐만요.” 내 친구 하산이 대화 중에 끼어들었다. 하산은 내가 디어본 캠퍼스에서 만난 레바논 대학생이다. “그럼 그리스도인은 천국에 가려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 때문에 이미 천국에 가게 하신 것에 너무 감사해서 선한 일을 한다는 소리인가요?” 하산에게 이건 완전히 새로운 이야이였다.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다른 게 있다면 단지 해당 경로를 따라가는 방법에서 만나는 세부 사항의 차이 정도라고만 본 것이다. 나는 그가 지금 내린 기독교에 대한 평가가 옳았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했다. “그게 훨씬 나아요! 천국에 가려고 선한 일을 한다면, 그건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소리잖아요. 하지만 당신 말이 맞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선한 일을 할 수 있겠네요.” 하산이 그날 그리스도인이 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기독교가 무엇인지, 더 중요한 건 그리스도가 그에게 제시하시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기독교의 복음이 바람직하고 심지어 아름답다고까지 생각했다. 커지는 연결점이런 대화는 얼마든지 디어본 밖에서도 가능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는 다른 점보다 유사점이 많다는 견해가 무슬림 공동체 내에서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지금은 대부분의 미국인이 무슬림 인구가 많지 않은 곳에 살지만, 앞으로 몇 년 안에 상황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우리가 믿는 신앙에 관한 의미 있는 대화에 무슬림 이웃을 참여시킬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잘 설명하는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하나님이 나쁜 소식이 어떻게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선포하는 복음의 귀한 도구로 당신을 언제 어떻게 들어서 쓰실지 말이다. 원제: The Most Pessimistic Religion in the Worl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자율주행과 인공지능, 그리고 십자가
by 전재훈
2024-02-01
저는 오래된 중고차를 타고 다닙니다. 17년만 해도 고급차였던 제 차가 이제는 여기저기 부식되고 힘도 딸려 고장 나면 폐차시켜야 할 수준이지요. 하지만 살살 달래가며 잘 타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통풍 시트가 안 돼서 여름이면 엉땀, 등땀으로 촉촉해지는 것 정도입니다.최근 나오는 차량들 보면 부러운 기능들이 있습니다. 후측방 경고 시스템, 어라운드 뷰 모니터, 하이패스내장형 룸미러, 추돌 방지 시스템,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 스탑 앤 고 기능, 스마트 하이빔, 자동 라이트, 스마트 트렁크, 차선 유지 시스템, 전동조절의자,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 전자식 사륜구동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요. 이런 기능들이 달린 차를 구매하기에는 제가 가진 재정의 심히 연약함 때문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기능들입니다.제가 고급 승용차를 사지는 못해도 다양한 방법으로 그런 기능들을 제 차에 붙일 수는 있습니다. 통풍 시트를 대신해 주는 쿨링 시트가 오픈 마켓에 있고, 후방 카메라나 센서도 붙일 수 있습니다. 신호 대기 중일 때 인위적으로 시동을 껐다가 다시 켜면서 스탑 앤 고 흉내도 낼 수 있지요. 하지만 제가 정말 간절히 원하는 자율주행은 오픈 마켓을 통해서 시도해 볼 수가 없습니다.자율주행의 기본은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과 차선 유지 기능, 그리고 추돌 방지 시스템입니다. 어뎁티브 스마트 크루즈 기능은 차가 설정된 속도로 일정하게 앞 차를 따라서 스스로 주행하는 기능입니다. 멈추기도 하고 다시 출발하기도 하지요. 차가 밀리는 정체구간에서 브레이크와 악셀레이터에 발을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고속도로에서도 자기가 알아서 속도를 내기 때문에 운전하기가 정말 편합니다. 수동미션이 달린 차를 몰 때 오토미션 달린 차를 보면서 왼발에 쥐가 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어뎁티브 스마트 컨트롤 달린 차를 보면서 오른발에 쥐가 나기 시작하더군요.차선 유지 기능은 차 앞에 달린 센서가 차선을 인식해서 차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운전대를 조정해 주는 기능입니다. 두 손 놓고 운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돌 방지 시스템은 말 그대로 추돌 위험이 있을 때 급제동을 걸어 주는 시스템입니다. 이 기능을 달고 외제차 한번 박을 일 막아주면 충분히 제값을 하는 기능입니다.차선 유지 기능이 가능하려면 운전대가 유압식 운전대가 아닌 전자식 운전대여야 합니다. 그래야 컴퓨터가 전자신호로 운전대를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제 차는 유압식 운전대라서 이게 오픈마켓을 이용한다고 해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꿈의 기능인 셈입니다.자동차들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운전자의 조작없이 스스로 운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직 법이 마련되지 않았고, 대중화를 이루지 못해서 완벽한 형태의 자율주행이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만 기술들은 이미 자율주행을 할 수 있는 시점까지 와 있습니다. 스스로 주차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목적지만 입력하면 알아서 데려다줍니다. 문도 열어 주고, 실내 온도도 맞춰 주고, 운전자의 기분에 따라 음악도 틀어 줍니다.이런 자율주행이 가능해진 것은 인공지능의 발달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스스로 학습하는 딥 러닝 기술이 개발된 지 수년이 흘렀기 때문에 컴퓨터는 이미 인간 지능을 넘어서는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중 한 예가 이세돌 9단과 겨룬 알파고이지요. 앞으로의 시대는 이런 인공지능이 인간 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원해 줌으로 삶의 편의성을 극대화해 줄 날이 올 것입니다.하지만 이미 다 되어 있는 기술들이라고 해도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의 경우 운전자의 의도를 벗어나는 운전이 되면 이건 생명을 위협하는 폭탄이 되고 말지요. 차가 스스로 판단하고 운전한다고 해도 그 기능을 부여해 주는 인간의 명령을 벗어나 버리면 그 차는 쓸모없는 차가 되고 맙니다. 이것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만약 통제를 벗어나는 인공지능이 등장하면 그것을 어떻게 제지할 것인지 불분명한 상태입니다.인공지능은 분명 인간에게 유익한 기능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선한 통제 아래서 운영될 때만 유익한 기술입니다. 악한 사람이 인공지능을 개발해서 나쁜 의도로 이용하게 되면 인공지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말지요. 더 나아가 인간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 움직인다면 인간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는 게 중론입니다.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과연 인공지능을 선하게 통제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하는 차량이 갑자기 앞에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탑승자를 희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주인인 탑승자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다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지요. 설문조사에 의하면 탑승자를 희생시켜서라도 보행자를 지켜야 한다고 답하지만, 그런 기능이 달린 차를 자신이 타고 싶지는 않다고 합니다.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인간이 상상하는 가장 수준 높은 인공지능보다 훨씬 뛰어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배신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말았지요. 우리가 가진 지능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과 원칙 아래서 그분의 통제를 받으며 사용될 때 가장 바람직하게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와 지능을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 사용하므로 죄와 죽음의 굴레를 덮어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타락한 인간은 신의 존재를 부정해 버렸고,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인간이 인공지능을 개발할 때 부딪치는 문제가 스스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제재할 것인지의 문제이고, 이것은 아직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문제이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지능을 부여하실 때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같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지능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라는 큰 벽에 부딪히게 해 두셨고, 그 능력의 한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심으로 다시금 하나님의 통제 아래로 들어오게 하셨지요.인간의 한계 덕분에 인간은 인간을 창조하신 이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가 바로 그 인간 능력의 한계를 과학의 발전으로 점점 없애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더 오래 살 수 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며,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신이 점점 필요 없어지고, 더 나아가 신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하지만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이며, 죽음 너머의 세계이고, 그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스스로 느끼는 죄의 문제입니다. 인간이 살아갈 때 겪는 죄의 문제는 긍정심리학이나 철학 같은 학문이 일정 부분 죄책감을 해결해 주지만 죽음을 앞에 둔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 대답이 되었지요.과학의 시대에 우리가 겪는 감사한 불행은 죽음이 시간의 흐름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 사고의 형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00년을 넘게 살 수 있는 시대임이 분명하지만, 오늘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시대이기에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장 또는 매장, 이 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by Justin Dillehay
2024-01-31
과거에 화장할까 매장할까를 놓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었다. 그리스도인에게 매장은 표준이었고, 따라서 “기독교식 매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스도인에게 화장은 고작해야 바이킹이 나오는 이야기에서나 만나는 먼 나라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상황이 바뀌었다. 화장이 보다 더 일반화되었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조금씩 사라졌다. 이제는 매장보다 화장이 더 일반적인 나라가 적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중에도 아예 처음부터 화장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은 목사로서 내가 종종 받기에 충분히 생각할 가치가 있다.내 주장은 “기독교식 매장”이 잘못된 명칭이 아니라 적절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시신이 화장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활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하나님에게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화장이 성경의 명확한 명령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적 관행이 기독교 신학과 잘 맞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나는 매장이 인간의 몸과 그 미래에 관한 성경적 선례, 성경적 이미지, 그리고 성경적 신학을 더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행위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매장은 절망적인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주는 희망을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죽음이 주는 슬픔 안에서 기쁨을 찾는 방법으로서 회복할 가치가 있는 관행이다. 바른 질문을 하라성경에 화장에 대한 도덕적 금지 조항은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많은 예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화장한 예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라헬, 요셉, 미리암, 모세, 다윗, 엘리사, 세례 요한, 스데반, 그리고 가장 유명한 매장 사례로는 그리스도의 시신이다(창 25:10; 35:19, 29; 49:31; 50:14, 민 20:1, 신 34:6, 여 24:32, 왕상 2:10, 왕하 13:20, 막 6:29, 행 8:2, 고전 1:31; 15:4).왜 그런지 물어볼 가치가 있다. 얼마든지 다른 옵션도 있었다. 스테판 프로테로는 “이집트인, 중국인, 히브리인을 제외하면 화장은 고대인의 표준 관행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매장이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하나님 백성의 표준 관행이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일까?매장 패턴은 정경이 완성되었다고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매장이 화장을 대체했다는 게 역사의 증명이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지배적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문화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화장이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인구 증가와 장례 비용 증가도 한몫했다.) 하지만 왜?반문화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이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항상 지배적인 관습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몸에 대한 유대-기독교의 믿음과 유대-기독교의 매장 관습 사이에 어떤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어서가 아닐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몸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죽고 나서조차 그 몸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종교들이 바라보는 몸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는 화장한다. 인도나 네팔과 같은 곳에서는 화장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힌두교인이 환생과 몸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다. 한 힌두교 웹사이트에 따르면, “죽은 후에 인간의 외양, 즉 육체는 아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영혼을 해방시키고 환생 과정을 돕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몸을 태우는 것이다”라고 한다. 육체와 내세에 대한 힌두교의 믿음과 죽음을 둘러싼 힌두교의 문화적 관습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 이건 놀랍지 않다. 육체를 영혼의 껍데기나 감옥으로 여기는 종교도 적지 않다. 이런 시각이 반드시 매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건 분명하다. 탈출한 감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행 17:32). 반면에, 매장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다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매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드러난다.)종교는 문화의 일부이며 문화적 신념은 문화적 관행에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몸기독교는 이 점에서 힌두교와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혼 불멸뿐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믿는다. 다른 많은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와 창조 전반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창 1-2 참조). 이것이 기본적인 기독교의 시각이다. 물리적 창조와 인간의 몸은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결과이다. 이는 또한 인간에 대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교리의 일부이다. 인간으로서 당신은 몸을 가진 영혼 또는 영혼이 있는 몸으로 묘사될 수 있다. 두 요소 모두 중요하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 죽음의 정의이다(약 2:26).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몸이 단지 “진짜 나”를 만드는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몸은 인간이 인간이 되도록 하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아비가일 파페일이 말했듯이,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다. 신체는 겉으로 드러난 사람 자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전이 된 5세기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에 대해 썼고, 그는 죽은 사람을 돌보는 방법에 이를 적용했다.아버지가 입던 옷, 아버지의 반지, 그리고 그의 모든 물건이 아버지가 베푼 사랑을 고려할 때 자식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육신은 얼마나 더 잘 보살펴야 하겠는가? 평생 입었던 육신을 어떻게 옷과 비교할 수 있을까? 몸은 단지 외적 장식이나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죽음으로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몸을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신 이유이다. 예수님이 매장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를 썩음을 당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 삼일에 살리실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행 2:27, 고전 15:4).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그리스도인 대부분도 부활하기 전에 부패를 겪겠지만, 우리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 참조 고전 15:51-55).힌두교 신학이 그들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초기 기독교 신학도 교회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쳤다고 신학자 티모시 조지는 지적한다. “로마의 카타콤이 증명하듯이 초기 그리스도인은 매장을 고집했다. 그리스도인의 묘지는 코에메테리아(coemeteria)라고 불렸는데, 문자적으로는 ‘잠자는 곳’을 의미한다. 곧, 미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간단히 말해서, 인체의 본질적인 선함과 미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근본이다. 따라서 그것이 사후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문화적 관행을 형성했다는 건 조금도 놀랄 일이 아이다. 바른 신호를 보내라그리스도인이 최근까지 거의 보편적으로 매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문화 추세를 단순히 따르기 전에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의식은 문화적, 신학적 공백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화장하는 요즘의 추세가 과연 바람직할까? 더 중요한 것은 (성경과 그 이후 모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적 관행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이 매장이라는 보편적 관행을 제대로 설명하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러셀 무어가 말했듯이, “문제는 단지 화장이 죄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다, … 진짜 문제는 장례가 과연 기독교적 행위로 이뤄지는지의 여부이며, 따라서 장례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이다.” 무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장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이며, 약함으로 뿌려진 것이 언젠가는 능력 있게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전달한다(고전 15:42-43). 부활에 관한 모든 구절 중 가장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땅에 심어진 씨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고전 15:35-37)시신을 묻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둘 다 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땅에서 나오는 것이 둘 다 생물학적으로 연속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차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상태로 다시 나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 동일한 비유를 사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이 말씀은 죽은 자를 매장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으로서의 부활과 기독교 관습으로서의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지침이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농업이든 장례식이든 매장은 최종 행위가 아니라 시작 행위이다. 단순한 끝이 아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교 문화 속에서 우리가 활용해야 할 기회이다. 그리스도인의 매장은 단순히 주검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는다. 추수를 바라며 씨를 뿌리듯, 우리는 부활을 바라며 장사를 치른다. 기독교식 매장을 다시 주장하며나는 무어의 이 말에 동의한다. “기독교 목사로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도 중 일부가 화장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거기에 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변의 다른 문화처럼 우리는 죽음과 매장조차도 단지 개인 취향에 따른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사람은 바다에 홀로 뜬 섬이 아니며,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장례식은 항상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책임이 개인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실용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 그리고 문화적 조류에 휩쓸리는 미국의 개인주의자로서 치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경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장례라는 엄숙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화장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돈 문제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묻어주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나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단지 입에 발린 동정은 가치가 없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이것이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가 여전히 장례를 기독교적 행위로 믿는다면, 우리는 중요한 곳에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적 이유로 매장을 하지 못하는 교인에게 교회가 나서서 재정적 지원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앞에서 나는 몸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역사적인 기독교 매장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화장을 선택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서 화장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나의 소망은 미래 지향적이다. 사랑하는 사람,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장례를 논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어서이다. 매장은 성경의 사례, 성경의 비유, 그리고 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가 점점 더 이교화될수록, 우리도 점점 더 반문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매장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크게 외치자,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원제: Cremation or Burial: Does Our Choice Matt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쀼’의 세계
by 양혜원
2024-01-30
커플 걱정하는 거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헤어진다느니, 더는 같이 못 살겠다느니, 남친이나 남편에 대한 불평과 하소연을 잔뜩 늘어놓던 친구의 말을 기껏 들어주고 위로해 줬더니, 불과 며칠 후 헤헤거리며 다시 짝꿍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본 싱글들이 만들어 낸 말이지 싶다. 자식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 흉을 잔뜩 보는 어머니에게 맞장구를 칠라 하면 이내 아버지 두둔을 하고 나서는 어머니를 보며, 그들의 세계는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다 하는 어느 작가의 감상을 읽은 적이 있다. 문득, 지난 12월, 선배 언니 아들의 결혼식에서 본 광경이 떠오른다. 16년 전, 유방암 4기 진단을 받고 당시 중학생이던 아들이 대학 가는 거까지라도 보고 싶다고 하던 언니가, 계속 항암 치료를 받으며 암과 동거하는 생활을 해오던 중에 그 아들이 대학도 가고, 군대도 다녀오고, 결혼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가지 않을 수 없는 결혼식이었다. 곱게 한복을 입고 혼주 차림을 한 언니를 보고 괜한 감동에 울컥 눈물이 나서 급하게 인사를 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감정을 추스르고 식장에 들어갔다. 이 뜻깊은 결혼식을 제대로 보고 싶어 가장 잘 보이는 좌석을 찾는데, 마침 혼주 하객 테이블이 단상 바로 가까이라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테이블에는 혼주 중에서도 아버지 쪽, 그러니까 선배 언니 남편의 지인들이 나머지 자리를 채우는 바람에 실로 오랜만에 홍일점으로 앉아 식사를 하며 식을 지켜보았다. 육칠십 대는 되어 보이는 이 혼주 쪽 지인들은 서로들도 아는 사이인 듯,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그중 한 사람이 “저는 오늘 김장하는 날이라 좀 일찍 들어가 봐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귀가 쫑긋해졌다. 김장은 여자들의 일이고, 남자는 집에 있어봤자 걸리적거리는 존재라 집을 비워주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되는 게 오랜 가부장제 문화의 패턴인 줄 알았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 김장 때문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니 신선했다. 그러자 그 옆에 앉은 분이, “우리는 어제 했어요. 거기도 절인 배추 사서 하세요? 그걸로 하니까 훨씬 편해요.” 이런다. 아,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은퇴한 중산층 남자들의 대화란 말인가. 부부 관계의 신풍속도를 보는 듯했다.선배 언니의 남편은 운동권 출신이라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 지인들의 대화 중에 누가 옛날에 감옥 갔다 와서 어쨌고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강남의 부잣집 딸이었던 언니는 가진 거 하나 없는 시골 출신 운동권 남자에게 반해서 결혼을 했고, 그 후에 적잖이 고생을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언니가 덜컥 암에 걸리자, 집안일 한번 안 해본 남편이 살림과 간병에 뛰어들었고,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앞서는 마음과 서투른 일처리에 못 따라오는 몸 때문에 빚어지는 갈등도 있었다고 들었다.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어도, 언니는 그런대로 남편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고, 아픈 와중에도 정말 같이 못 살겠다 싶은 순간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부부로 지내고 있다. (언니는 아직도 항암 중이다.) 2023년이 이런 이야기로 그럭저럭 훈훈하게 마무리 되어가던 무렵 또 다른 선배 언니가 암에 걸린 것 같다며 전화를 해 왔다. 기침이 생각보다 오래가서 병원을 찾았다가 덜컥 폐암 4기일지도 모르니 얼른 검사를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마침 언니랑 아는 후배 하나랑 같이 셋이서 여행을 가기로 한 바로 전날이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 서둘러 예약한 숙소와 기차를 취소하려는데, 언니가 호기롭게, 어차피 지금 아픈 거도 아니고 검사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예약 일까지 기다려야 하니 그냥 여행을 가자고 고집해 우리는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하면서도 같이 길을 나섰다. 정말 암이라면 치료하는 동안 여행은 힘들 테니 갈 수 있을 때 가자는 심산도 있었던 것 같다. 푸짐한 저녁과 뜨끈한 온천으로 몸과 마음이 노곤해진 우리는 언니로부터 평소 듣지 못했던 이야기도 들으면서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 그 후 언니는 다행히 폐암은 아니지만 역시 암은 암인 것이 밝혀져 항암 치료를 시작했고, 커플이 아니었기에 남편 대신 요양병원의 간호를 받으며 나한테 전화해서, 여기 아주 편하고 좋다, 라면서 만족스러워했다. (이 언니도 계속 항암 중이다.) 그리고 해를 넘겨 2024년 첫 주에, 어머니도 갑자기 암 진단을 받으셨다. 예후가 아주 좋지 않은 뇌 쪽의 림프종으로, 진단이 나왔을 때는 이미 종양과 부종이 오른쪽 뇌를 가득 채운 후였다. 그렇게 갑자기 발현되고 확산이 매우 빠른 암이라 일주일 전과 후의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어머니는 기저 질환이 없으셔서, 몸에 이상이 생겨도 혈압약을 드시는 아버지 쪽일 거라 생각했지, 어머니가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괜히 항암으로 고생만 하시다 가는 것 아닐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대로면 일주일 안으로 돌아가신다는 의사의 말에 급하게 항암이 시작되었다. 뇌에 종양이 생긴 어머니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시기도 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기도 해서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착잡했고,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힘들어하셨다. 아버지는 자상하고는 거리가 먼 분이었고, 어머니가 한 번씩 나랑 길게 통화할 때는 주로 아버지에 대한 불평일 때가 많았다. 정말 이제는 같이 못살겠다는 말씀도 제법 진심을 담아 여러 번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지하게 들어드렸고, 정말 심각한 갈등이면 그냥 헤어지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도 해 보았다. 40대 때만 해도 부모님이 헤어지시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50대가 되고 나니, 뭐, 그리 큰일도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쓸데없는 커플 걱정이었다. 코로나 이후의 병원 규정 때문에, 어머니 옆에는 한 명의 지정 간병인만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버지가 간병을 고집하셨다. 그러나 돌봄 노동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간병이 서툴렀고, 그로 인해 하룻밤 새에 어머니가 세 차례나 낙상하는 바람에 골절이 있는 것은 아닌지 엑스레이까지 찍으셔야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처음 하는 일이라 그랬다고, 이제는 잘할 수 있다며 계속 간병을 고집하며 병실 안에서 버티셔서 우리는, 도대체 엄마가 몇 번을 더 낙상해야 포기하시려나 하는 심정으로 물러섰는데, 결국 밤새 간병하며 힘이 드셨던지 간병인을 부르라 하고는 시골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의 서투름으로 낙상하여 눈가가 시퍼렇게 멍든 어머니가 되려 아버지를 계속 찾아댔다. 간병인 돌려보내고 대신 아버지를 오라 하라고 하시는데, 이분들이 이렇게 서로 애틋한 사이였던가, 그동안 내가 들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불평불만은 다 뭐였단 말인가, 싶었다. 결국 아버지는 하루 만에 서울의 병원으로 돌아오셨고, 마침 간병인의 학대 정황도 잡히는 바람에 아버지의 간병 주장은 더욱 힘을 얻어 본격적인 아버지의 간병인 생활이 시작되었다.하지만 올해 만으로 여든이신 데다가, 최근에는 정신도 오락가락하시는 아버지가 간병을 하게 되면서 자식들은 환자와 간병인 모두를 살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더욱 정신이 없었다. 간병인 이외의 출입을 금지하는 병원 규정 때문에, 이리저리 눈치 보며 두 분의 상태 확인하고 필요한 것 나르고 하느라 동생과 나는 멘탈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병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아버지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사랑이었던가. 처음에는 간병이 서툴렀던 아버지는 이내 요령을 익히셨고, 일주일쯤 지나자 우리도 조금 마음을 놓게 제법 간병을 잘하셨다. 다른 일은 다 정신이 없으신데도 간병은 그런대로 잘 해내시니 그게 신기하기도 했고, 어머니도 심리적 안정을 얻으면서 만족스러워하셨다.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어머니의 뜻에 다 맞추었고, 전 같으면 언짢아하실 만한 일도 그냥 다 받아주셨다. 어머니가 먹고 싶다고 하는 것 부지런히 사다 나르고, 뒷일 처리며 부축이며 제법 능숙해지셨다. 다행히 항암이 잘 들어 최근에 2차 항암을 위해서 다시 입원을 하셨는데, 이제는 병원이 편하다며, 어머니랑 같이 있어서 좋으시단다. 잠시 쉬시게 하루라도 교대해 드린다 해도 다 괜찮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랑꾼의 모습이다. 정말이지 부부에게는 부부만의 신비로운 세계가 있나 보다. 그러고 보니 친척 중에 평생을 남편에게 맞고 살았고, 나중에는 접근 금지 명령까지 내려놓고도, 결국 이혼을 안 하고 한집에서 (각방 쓰며) 같이 사는 부부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친척은, 부인이 외국에서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남편은 은퇴 후에도 홀로 한국에서 인스턴트 음식이나 배달 음식으로 매 끼니를 이어가며 몇십 년을 떨어져 사는 부부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내가 공부한 상식이나 경험으로는 부부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없는데도, 이들은 부부의 관계를 유지한다. 그래서일까. 일본의 가톨릭 작가 소노 아야코는 부부 관계를 “불가사의한” (혹은 “알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은 이런 부부 관계의 속성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남이 개입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문제라는 뜻이다. 사실, 남이 개입할 수 없는 ‘당사자들’의 관계란, 비단 부부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소노 아야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선택한 원칙이고 “하나의 성역이어서 어떤 사람도 침범할 수 없다”라고 했다(남들처럼 결혼하지 않습니다, 218쪽). 그러니 당사자들 이외의 사람이 개입하기 힘들다. 그런데, 심지어 부모 자식 관계도 서로를 떠나는 시기가 있다면, 부부란 중간에 헤어지거나 일찍 사별하지 않는 한, 그 누구보다는 긴 시간을 꾸준히 서로를 상대하며 지내야 하는 사이이다. 그렇게 쌓인 시간 때문에 부부는 정말로 굵은 물줄기처럼 아무리 잘라도 잘리지 않는 무엇으로 묶이게 되는 것 아닐까. 몸으로 안다는 것은 비단 섹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네 몸이 내 몸인 양 만져도 아무런 설렘이 없는 그런 시간의 물리적 축적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이런 관계는 밋밋한 관계라고, 부부간의 로맨스를 살리라는 조언들이 넘쳐나는 것 같은데, 사실 이게 딱히 성경적인 말 같지는 않다. 바울은 정욕을 위해서 각자 한 명의 배우자를 두라고 했는데, 정욕은 로맨스와는 별개의 문제이고, 정욕이란 게 평생 있는 것도 아니고, 성별과 나이와 개인 성향에 따라 다 다르고, 한 대상에게만 느끼는 것도 아니라, 사실 이 규범은 그냥 혼자 살라는 대원칙을 따르지 못하는 대다수 사람을 위한 위안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가톨릭교회는 오늘날에도 소수의 독신 수도자를 다수의 결혼한 평신도보다 우위에 둔다). 성경에서 일상적 부부 생활의 사례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든데, 그나마 오랜 세월 부부로 살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성경의 커플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떠오른다. 남편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넘기지를 않나, 아내가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넘기지를 않나, 그러면서도 백세가 다 되도록 후손을 얻기 위해 성생활을 이어가는 이 부부는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관계이다. 그렇게 보면, 부부는 사명으로 이어질 때 가장 단단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로맨스 운운하는 것은 역시 성경적이지 않다. C. S. 루이스가 그랬던가, 로맨스란 결혼이라는 차를 힘차게 출발시키는 엔진과 같은 것이라고. 아마도 그렇게 강력한 엔진의 발동이 없다면 결혼이라는 차는 제대로 출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로맨스의 역할은 거기까지. 그러나 오랜 세월 그 차를 계속 같이 타고 가다 보면, 로맨스라는 말로는 담기 부족한, 불가사의한 “쀼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 그것이 곧 결혼의 신비가 아닐까. 오늘도 아버지는 항암 치료하는 어머니 곁에서 행복하게 간병을 하고 계신다.
“가나안 성도” 현상: 교회 공동체에 던지는 질문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4-01-29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지난 10년간 한국 교회에 경각심을 일깨워 준 대표적 현상 가운데 하나는 “가나안 성도”의 증가라 할 수 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교회에 ‘안나가’기 때문에 거꾸로 ‘가나안’ 성도라 불리는 이들의 비율은 2012년의 10.5퍼센트에서 2017년의 23.3퍼센트로 훌쩍 뛰었고, 2023년 조사에서는 29.3퍼센트로 더욱 높아졌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02쪽 이하). 이 수치는 코로나로 인해 현장 예배를 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높아졌을 개연성도 담고 있다. 이들 중 25퍼센트는 코로나 기간 중 교회를 떠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장 최근 조사인 2023년 10월 통계에서는 가나안 성도들이 26.6퍼센트로 약간 낮아지기도 했다.이러한 증가세가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탈-교회 현상일 수도 있고, 또는 신앙생활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하겠다는 새로운 신앙표현의 발로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혹시라도 “가나안성도”라는 이름 붙이기가 그동안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했을 우려도 있다. 2012년 이전인 1998년 조사에서는 가나안성도가 11.7퍼센트, 2004년에는 11.6퍼센트였으니 2012년까지의 조사들에서는 가나안 성도 비율은 대체로 일정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그 개념이 널리 알려지면서 비율이 뚜렷하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어쨌든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는 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어느 한 가지 지배적인 원인만을 지목하는 것은 이 현상에 접근하는 정직한 자세가 아니다. 가나안 성도에 대한 논의가 처음 나왔을 때는 소위 ‘소속 없는 신앙’(believing without belonging)의 가능성이 제시됐다. 현대인들이 더 이상 교회라는 집단에 의존하거나 소속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추구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갱신되고 변화되더라도 이러한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 자체에 대한 기대가 없고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었다. 심지어 1인 교회라는 단어까지 나오기도 했다. 과거 조사에서도 30퍼센트 이상의 가나안 성도들이 이러한 유형에 속했다. 한국 교회의 위계주의나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주체적 자아의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속 없는 신앙을 진지하게 추구하기에 탈 교회를 한 것일까? 실제 조사를 보면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시기는 중고등학교 때나 대학생 때가 높다. 이들은 주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다가 스스로 교회 출석 여부를 선택할 즈음에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조사에서도 청소년(38%)과 청년(45%)의 연령대에서 가나안 성도의 비율은 전체 평균보다 훨씬 높게 나온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신앙에 대한 관심이나 구원의 확신 비율은 낮다. 반면, 교회생활 경험과 구원의 확신까지 있는 가나안 성도들은 주로 성인이 되어서 교회를 떠난 경우가 많다. 이들의 탈-교회 원인으로는 주체적인 신앙의 추구라기보다는 목회자와 교인들에 대한 상처나 실망이 더 크다. 따라서 이들 중 상당수(43%)는 교회가 변화된다면, 혹은 좋은 교회를 찾는다면 여전히 교회로 돌아오길 원한다(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111). 나는 ‘소속 없는 신앙’이라는 용어에 대해 그 어떤 신학적 동감도 느낄 수 없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시대와 타협하고 변질되었을 때, 제도권 교회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움직임들은 교회의 참된 본질을 찾으려는 반성적이며, 실험적인 몸부림이었다. 실제로 그와 같은 움직임들을 통해서 교회는 갱신되었다. 하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자들이 모여 그의 몸을 이루는 교회됨의 소명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양보하거나 약해질 수 없는 신앙의 중심이다. 비록 현실 교회가 허물이 많고 신뢰를 잃었다 하더라도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교회됨의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지, 교회됨을 간과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인간이 자율적이며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한다는 발상은 근대적 자아주의 신화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여러 경험과 이야기를 통해 습관과 신념을 형성한다. 그리고 특정한 공동체와 전통이 바로 그러한 경험과 이야기를 제공한다.그렇다고 해서 가나안 성도 현상을 부정적으로 단죄하는 태도는 더더욱 곤란하다. 혹자는 가나안 성도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히 10:25)에 빗대기도 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을 질타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이 본문은 좀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권면은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 전통을 버린 자들이라고 질시와 고난을 받을 때 주어졌다. 율법과 제사를 뛰어넘고 완성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 더 이상 유대교인들의 공격과 비난으로 인해 위축되지 말고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모임을 늘리라거나 교회당에 더 많이 오라는 차원이 아니다. 히브리서 10:24은 무슨 모임인지를 명료하게 알려준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이는 돌봄과 격려를 위한 모임을 말한다.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즉, 서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소망을 갖고 일상을 살아내도록 돌아보고, 더 나아가 사랑과 선행의 삶을 실천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함이다. 그렇지 않고 종교적 열심이나 의무를 강조하는 것은 가나안 성도의 증가라는 탈-교회 현상에 대한 해법이 전혀 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교권주의와 율법주의의 위험성까지 지닐 수 있다.이러한 교회됨의 목적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성찬의 신비를 말할 때도 드러난다. 그는 당시 주의 만찬이라는 맥락에서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18절)라는 표현을 쓴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위해서 모이는 것이 곧 교회로 모이는 것이었다.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20절)나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절)는 표현을 보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교회로 모일 때에 주의 만찬이 중심순서였음을 암시한다. 우리말의 식구(食口)가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을 의미하듯, 함께 먹으러 모인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가족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위해서 모일 때에 “분쟁이 있다 함을”(18절)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쟁으로 말미암아 먹으러 모이기를 폐하는 것이 그의 해법은 아니다. 오히려 만찬의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했다. 비록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함께 식사할 때 갈등과 반목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그의 몸을 이룬다는 깨달음 가운데 자기를 돌아보며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과 희생을 배워가야 했다. 그것이 교회로 모여 주의 몸을 이루는 신비였다. 개인의 취향과 권리가 최고의 덕목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한 공동체에 소속되고 헌신한다는 것은 분명히 유행과는 어긋난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공동체를 갈망하고 찾아 나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동체적인 존재로 지으셨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삼위일체라는 관계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 현상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고 반성하게 한다. 가나안 성도들이 소속 없는 신앙을 추구해서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혹은 교회와 신앙에 대한 실망과 회의 때문에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아니면 애초부터 진정한 신앙을 확립하지 못해서 교회를 떠났을지라도, 그 모든 탈 교회의 원인과 해법은 모두 교회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가 어떠한 관계와 습관의 공동체로 존재할 것이냐의 과제는 가나안 성도 현상을 통해 더욱 중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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