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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 팀 켈러,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역사에 ...
by Michael Keller
2024-01-22
THE KELLER CENTER 작년 암 치료를 받고 있던 아버지(팀 켈러)에게 나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했는지 물었다. 구체적으로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즈, 네덜란드 신칼빈주의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아버지는 신앙을 형성하던 초기 단계에 내적 경건보다는 기독교가 삶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신칼빈주의의 영어 번역본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카이퍼와 바빙크가 체험적 경건에 관해서 남긴 저작물이 없다는 게 아니다. 아버지는 단지 영어로 번역된 그들의 책을 접하지 못했을 뿐이다.)그리고 그는 내적 경건에 관한 글을 더 많이 읽기 위해서 영국 작가들을 찾았다. 그 결과 개혁신학을 개인적이고 체험적 모델로 삼은 에드워즈와 존 오언, 그리고 여러 청교도의 책을 읽었다.켈러는 우리가 단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적인 믿음과 예수님으로 인해 달라진 마음의 변화는 전혀 다르다. 켈러는 신칼빈주의 자료를 통해 점점 더 탈기독교화해 가는 공간에서 체험적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개혁주의를 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오웬과 에드워즈로 인해 형성된 “경건주의적” 성향을 카이퍼, 반틸, 그리고 바빙크로 대표되는 신칼빈주의에서 비롯한 “문화주의” 성향과 독특하게 융합했다.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긴 하지만, 이 두 개혁파의 전통을 하나로 합친 사람이 팀 켈러 외에는 거의 없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켈러가 그 방법을 택한 것은 1980년대부터 2020년대에 걸쳐서 떠오르는 세속 문화에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켈러가 추구한 신칼빈주의/문화주의 형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의 경건주의적 감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로, 그가 추구한 맥락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두 번째로, 역사적 순간에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사용한 경건주의적 가치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날 교회가 활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적용점을 살펴보겠다. 역사적 맥락우리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비판적이고 전략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켈러의 삶과 사역이 다루고자 했던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기독교가 당연하게 공공의 도덕적 권위로 여겨지던 분위기가 쇠퇴하던 1950년에 태어났다. 1700년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직면했던 계몽주의 개인주의가 서구의 중심 이야기로 성장한 시점이었다. 1980년대 후반 뉴욕에 도착했을 때, 켈러가 만난 가장 뚜렷한 미전도 그룹은 경력 압박에 압도되어 어려움을 겪는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교육 수준이 높고, 계층 이동이 활발했다. 성적으로 활동적일 뿐만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동시에 외롭고 또 바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히 조직화된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를 불신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심리학적 용어로 분석하는 경향이 있었고, 어딘가에 헌신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삶에서 만나는 더 큰 질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는 왜 일을 하지? 켈러가 만난 사람은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앙을 직업과 통합하려고 애쓰는, 도시가 개인 생활에 가하는 윤리적 압력을 다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리스도인은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켈러는 복음을 과연 어떻게 전했을까?켈러 사역에서 만나는 두 가지 경건적 적응켈러는 자신의 상황에 맞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두 가지 혁신 기술을 사용했다.1.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재발견하면 회개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게 된다. 대각성 운동 내내 에드워즈는 믿음의 증거로 다양한 표적과 기사를 주장하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뚜렷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도리어 반대 경우를 흔하게 접했다. 에드워즈는 사람들 사이에서 질투, 악의, 비통함, 전반적인 비열함이 증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무효화하지 않으면서도 (부흥을 단순한 감정주의로 일축한 찰스 천시와는 반대로), 에드워즈는 믿음의 증거가 단지 외적인 표현에 뿌리를 둘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고전 13:1-3). 심지어 순종의 행위도 믿음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부흥론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시종일관 오직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할 때에만 구원(eternal acceptance)을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마찬가지로 켈러는 1980년대에 자신이 개척한 교회 속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다 순종만 하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켈러의 스승인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가 지적했듯이, 많은 그리스도인은 칭의에 기초를 둔 성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성화에 기초를 두고 칭의를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영적 쇄신이 가져다준 역동성의 실천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을 깨우고 세속적 불신자를 개종시켰다. 켈러가 자주 말했듯이, “당신은 순종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받아들여졌기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관용구는 러브레이스가 들려주는 에드워즈 해석의 요약이기도 하다. 모든 순종은 감사하는 믿음의 마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순종이 아니다.이것을 어떻게 혁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종종 제자도와 전도를 분리했던 1980년대의 많은 미국 그리스도인에게, 비그리스도인의 핵심 문제인 불신앙이 사실상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는 문제와 하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었다. 죄를 짓는 순간에 그리스도인이나 불신자나 우주의 창조주로부터 자신들이 사랑받고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오로지 성화만을 칭의의 증거로 여기는 한, 결코 구원을 주는 믿음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리스도인은 불안해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단지 “열심히 노력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라는 메시지가 아님을 깨닫도록 도움을 받았다. 대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그들을 위해 살고 죽으심으로써 타락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며,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칭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를 간단하게 표현할까?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거의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신학 전문 용어의 도움이 없이도 복음을 쉽게 이해하도록 하려면 이 메시지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켈러가 제시하는 원칙은 이것이다. “나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인이고 결함 투성이이다. 동시에, 나는 내가 꿈꾸던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존재이다.” 이 간결한 문구는 복음의 본질을 요약한다. 죄많은 인간의 본질적인 깨어짐과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되는 무한한 사랑과 수용 사이의 긴장을 분명히 설명함으로써, 켈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신학적 개념을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메시지로 뽑아냈다. 이 말은 교회에 다니지 않거나 교회에 거의 가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의 핵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들로 하여금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깊이 인식하도록 초대한다. 이는 또한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정체성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안내하고, 나아가서 변화와 구속, 회복을 은혜 안에서 누리도록 인도하고 촉진하는 빛의 역할을 한다. 2. 교리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이해만으로는 부족하다. 1980-1990년대에 걸쳐서, 공적 영역에서 물러나는 그리스도인과 믿는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속성 있는 목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은 믿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못 느낍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에드워즈의 통찰력은 여기에 답을 준다. 즉, 정서적 (마음) 영역이 인지적 (머리) 영역과 얽혀 있어야만 한다는 강력한 확언이다. 진정한 이해는 지식을 넘어 체험까지 포괄한다. 에드워드는 설교 “하나님의 그리고 초자연의 빛”에서 지식의 이중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 개념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이 인지할 수 있도록 부여하신 선에는 두 가지 지식이 있다. 첫 번째는 단지 개념적일 뿐이다. … 다른 하나는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마치 마음이 어떤 개념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때와 같다. … 그러므로 단지 하나님이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분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과 은혜의 사랑스러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꿀이 달콤하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과 꿀의 단맛을 실제로 느끼는 것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생각은 켈러의 설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에게 설교는 단순히 정보만 전달하는 플랫폼도, 그렇다고 감정적 반응만을 끌어내는 통로도 아니었다. 그의 설교는 단지 성경의 진리를 지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상의 목적을 이루었다. 설교를 통해서 진리가 만져지고 체험될 수 있도록 설교를 구성했다.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영적 실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에드워즈의 확신을 받아들인 켈러는 생생한 이미지와 가슴 아픈 삽화가 지닌 상상력을 통해, 설교에는 이 땅과 궁극적 실재 차이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인식했다. 에드워즈는 결코 “무조건 말씀을 선포하라”는 뻔한 격언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사명이 단순한 설명을 넘어 만지고 체험하는 실현에 이르도록 하는 것임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켈러는 이렇게 회상했다. “에드워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가 당신을 감동시키지 않는다면, 당신을 녹이고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그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 지향해야 할 변혁적 목표이다. 단순한 지적 이해를 넘어서서 교인들을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진리의 만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켈러는 에드워즈가 자신에게 끼친 영향에 관해서 개인 노트에 이렇게 썼다. 그는 내게 지금 만연한 20세기 강해설교가 실제로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었다. 설교가 지나치게 지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렇다고 해결책이 단순히 … 감동을 자아내는 감성적인 이야기로 설교를 채우는 건 결코 아니다. 답은 이미지, 예화, 내러티브 등 구체적인 방식으로 진실을 구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에 있다. 신학교 시절에 나는 에드 클라우니(Ed Clowney)로부터 “그리스도 중심” 설교에 대해 배웠다. … 그리고 러브레이스로부터는 에드워즈의 부흥주의에 대해서 배웠다. … 그러나 내가 복음주의 하위문화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이 중에서 그 어느 것도 내 설교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거기서 나는 모든 게 다 빠진 전통적 강해 설교라는 보상을 받았을 뿐이다. … 나는 그때에도 분명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실상 나는 단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고 그분처럼 살라고 교인들을 다그쳤을 뿐이다. 나를 깨우기 위해서는 뉴욕에서 설교하는 강렬한 경험이 필요했다. …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했을 때, 사실상 내게는 필요한 모든 신학적, 역사적 자원이 다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켈러의 글은 우리로 하여금 잠시 멈춰서 질문하게 한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우리 속 자원을 다르게 사용할 용의가 있다면, 그 자원이 우리의 접근 방식을 어떻게 향상시킬까? 현재 상황을 반영하는 필요가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끼치는 영향을 받아들인다면, 복음을 전달하는 나의 방식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개념, 진리, 범주 및 내용까지 보유하고 있던 켈러였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운 상황이 가져다주는 긴급한 요구에 직면해야 했다. 그렇다고 변혁적인 변화가 성경의 진리나 복음의 본질을 바꾸는 건 아니다. 단지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을 재형성했다. 그는 복음이 다양한 청중의 귀에 다 들릴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야말로 효과적인 상황화를 위한 필수 프로세스이다. 모든 세대를 위한 복음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켈러의 경건주의적 가치를 분석하면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은 재창조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막 부임한 목사였을 때, 나는 교인들에게 전혀 새로운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자책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로서 켈러가 말했다. “내 몸에 원래 내 것이었던 뼈는 하나도 없다. 내가 설교하는 모든 내용은 따지고 보면 다 다른 곳에서 나온 거야.” 이것은 중요하다. 재창조가 목사나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복음이 정말로 좋은 소식이고 객관적 사실이라면, 그것은 바뀔 필요가 없다. 우리의 임무가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자. 둘째, 복음은 불변하나 문화는 변한다는 게 켈러가 지향한 중요한 원칙이었다.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복음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만 해도 교회에는 “죄”와 같은 용어를 즉시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경 지식을 갖춘 교인이 대부분이었고, 목사는 그런 사실을 전제로 설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로 켈러가 만난 사람들은 그러한 근본적인 개념과 용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복음을 아예 새롭게 바꾼 건 아니다. 단지 접근 방식을 조정했을 뿐이다.켈러가 활용한 공식은 인간의 마음에는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라 단지 무질서한 사랑을 품고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었다. 좋은 일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는 순간 삶의 균형을 깨뜨린다. “죄 많은”(sinful)이라는 용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우상 숭배의 언어를 활용했다. 즉, 무언가에 대한 과도한 몰두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수준에까지 이른 현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해로운 결과를 강조했다. 특정 범주가 부족하다고 개인을 비난하는 대신, 켈러는 복음을 청중이 접근할 수 있는 용어로 바꿔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복음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켈러의 접근 방식을 반영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끊임없이 상황에 맞게 조정함으로(바꾸는 게 아니다), 나날이 더 깊어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발맞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전도하려는 대상에게 과연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가?셋째, 문화적 변화 속에서는 역사적 맥락 전반에 걸쳐서 지속해온 유사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 복음이 어떻게 선포되었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 공부가 아니라 현대에 필요한 소통을 위해서 귀중한 자원이다. 우리의 과제는 죄, 수용, 사랑에 관한 진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그 용어를 적절하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다. 불신앙과의 싸움은 보편적이며, 이 싸움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전달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 단지 지적 지식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복음은 체험적 참여와 변혁적 변화를 모두 요구한다. 복음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당장 우리부터 복음으로 인해서 움직이고 변화되어야 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부지런히 분별하고 있는가? 그럼으로 지금 우리가 수행하는 복음 선포가 과거와 현재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한 격차를 효과적으로 메우고 있는가?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위해서 사람을 바꾸는 복음의 능력을 쉬지 말고 새롭게 번역해 내야 한다. 단지 이론으로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은 많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각은 이것이다. 내가 좋은 삶을 살고 있기에, 예수님이 나를 받아들이신 거야. 이러한 불일치는 만연한 초조감, 불안감,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당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체험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러한 경우에 복음은 현실이 아닌 이론적인 개념으로 전락한다. 결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야 한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변화의 힘이 단지 교리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깊이 느껴지고 실천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복음의 진가를 발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제야 비로소 그 전까지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를 다니면서 어느 정도까지는 불안, 분노, 시기, 취약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만족, 감사, 평안이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낫다고 느낀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비그리스도인에게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단지 “순종하면 받아들여진다”는 또 하나의 수행 모델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수용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그럼으로써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새로운 방식임을 깨달을 때야 그들의 삶은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맞을 것이다. 원제: My Dad (Tim Keller) Listened to History to Speak the Gospe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 창조세계, 그리고 기후 위기
글로벌 기독교 지도자들의 행동을 요청한다
by Kuki Rokhum, Jasmine Kwong, Dave Bookless
2024-01-20
로잔에서 서울까지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기후 관련 사건은 거의 매일 뉴스에 등장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전도 사역에 방해가 되는가, 아니면 선교를 위한 기회가 되는가?John Stott on Creation Care[1]에서, 존 스토트는 생태학적 참여가 ‘선교 사역’의 범주에 적절히 포함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환경 참여를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선포에 대한 집중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생태 위기를 무시할 수 없다. 기독교의 사랑은 우리가 증가하는 기후 위기와 재난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케이프타운 서약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예수님이 온 세상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이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과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모든 창조세계를 포괄하는 것이기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복음 선포는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는 복음적 이슈이다(CTC I-7).[2]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타내는 복음적 이슈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글로벌 기후 문제2023년 7월,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그달이 사상 최고로 더운 달로 기록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발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구 온난화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글로벌 열대화(global boiling)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 리더는 이끌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주저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변명할 필요도 없으며,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먼저 움직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3]기후 문제는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며 전 세계가 점점 더 심각하게 겪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셋은 천연자원과 농업에 대한 의존도, 인구 밀도가 높은 해안 지역, 취약한 제도, 만연한 빈곤으로[4] 인해 기후 변화에 특히 더 취약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이 글을 쓴다.기후 변화는 오늘날 북반구의 부유한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난한 나라들에게 그것은 이미 고통스러운 현실이 되었다. 필리핀과 같은 섬나라의 경우 해안 어촌과 해양 생태계는 더욱 심해지고 빈번해지는 폭풍으로 인해 위험에 처해 있다. 토지 이용 변화(예: 삼림 벌채 및 채굴)로 인해 발생하는 기후 문제는 식량 안보와 생물의 다양성을 위협한다.마찬가지로, 인도는 전 세계에서 재해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나라에 든다. 위치와 지형으로 인해 사이클론, 가뭄, 홍수, 지진, 화재, 산사태 등 자연재해에 취약해졌으며, 이러한 자연재해는 더욱 극심해졌다. 생태계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피해와 함께 인간에게도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중에도 이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에 가장 적은 책임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이다. 2019년 인도에서는 최소 10,281명의 농부가 극단적 선택을 했으며, 이는 전체 자살의 7.4퍼센트를 차지한다.[5]필자들의 실제 경험에서 나온 이러한 사례들은 글로벌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이에 대응하고 행동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많은 지역의 교회들이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많은 교회가 감당하기에 벅찬 도전으로 인해 마비되었다. 이러한 도전들은 무엇이며, 글로벌 기독교 공동체로서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기후 문제로부터 기회 창출2012년 창조세계 돌봄과 복음에 관한 로잔 글로벌 협의(Lausanne Global Consultation on Creation Care and the Gospel)에서 비롯된 문서인 자메이카 행동 촉구(Jamaica Call to Action)는 세계 교회에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절박하고 시급하며 우리 세대에서 해결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6] 이 문서는 발표된 지 이제 10년이 되었지만 중요한 문제들을 주목하고 있어 여기서 그중 일부를 논하고자 한다.도전 1: 세계 교회는 기후 문제에 더 많이 관여해야 한다.기후에 대한 교회의 참여가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증가하는 고통을 무시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독교 복음 증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호주,[7] 영국,[8] 캐나다[9]의 조사에 따르면 창조와 기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갈망하는 기독교 청소년들이 있지만 그들이 속한 교회가 이 분야에 너무 적게 관여하고 있다고 느낀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후 문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더 갖추게 된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온 교회는 창조와 구속의 성경 이야기 안에서 기후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창조세계 돌봄은 기독교 사역에 전문가용 옵션처럼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지구를 돌보는 책임을 주신 첫 번째 선교적 과업이었다. 피조물을 돌보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우리의 핵심이며 지도자로서 우리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기회 1: 현재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에 우리가 최소한으로 참여하는 상황을 기후 문제를 배우고 참여할 기회로 전환한다.[10]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 이웃, 창조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논리에 따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지구를 돌보고 지구에 있는 풍부한 자원을 책임 있게 사용한다.”[11]실천 단계 #1기후 문제에 대해 더 배우자. 창조 신학과 실천에 관한 책과 기사를 읽자. 과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도전 2: 많은 그리스도인이 편안한 생활 방식에 익숙하고 단순한 삶의 방식을 주저한다. 기후 문제에 대응하려면 우리 일상생활 속 선택에 대한 정직한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공정성과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소비를 조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정의롭고 겸손하게 자비롭게 살기 위해서는(미가 6:8) 이기심을 인정하고, 새로운 습관을 받아들이고,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물론, 우리는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온전치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완벽한 환경 의식과 정의로운 생활 방식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기회 2: 교회는 예수님의 삶, 즉 다른 사람을 돌보며 단순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적용하며 본받아야 한다.모든 피조물이 갈망하는 회복의 약속인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해지는 것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완전한 사람도 완전한 세상도 없다(롬 8장). 그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따라 노력해야 한다.실천 단계 #2교회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의 실제 필요에 따라 시작하라. 우리가 행하는 일이 환경에 해를 끼치고 있는지 평가하자. 지역의 소규모 농부들을 돕자. 제철 음식을 먹고 육류 소비를 줄이자. 대중교통을 이용하자. 소그룹으로 모여 각자의 실천에 대해 나누고 격려하자. 환경에 보존하는 전통적인 방식들을 연구하고 찾자.도전 3: 부실한 창조 신학. 우리는 성경을 가르치고 선교할 때 인간, 특히 영혼에 초점을 맞춰 왔다. 복음주의 교회는 창조세계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육체의 문제보다 영혼의 문제를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예수님의 주되심은 우리의 삶 전반에 걸쳐 있다. 우리는 새로운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하며, 창조세계 전체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 계획의 일부인지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도자들이 창조세계 돌봄을 복음의 문제로 가르친다면, 우리는 ‘지구를 구하라’는 압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지구를 맡아 돌보도록 명하신 우리 주 예수님에 대한 순종과 예배의 마음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다.더욱이 창조는 개인으로나 신앙 공동체로서 우리의 기도와 예배에 통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관해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가? 우리는 애통의 습관을 회복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우리는 고통과 억압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우리는 야생 동물에게 해를 끼치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 얼마나 자주 회개하는가?기회 3: 세상은 주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반응한다.우리가 창조세계 돌봄을 제자도로서 수용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구원자’로서의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반응할 것이다.실천 단계 #3창조세계 돌봄을 기도, 성경 공부, 그리고 예배와 함께 일상적인 리듬이 되게 하자. 자연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도전 4: 우리는 사람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이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창조세계에는 사람도 포함된다. 창조세계를 돌보는 일은 사람들의 영적, 육체적, 사회적 필요(건강, 일, 가정, 안전)를 돌보는 것을 포함하며, 이 모두가 환경에 달려 있다.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는 이미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자연계를 포함하도록 우리의 선교를 확장해야 한다. 우리가 사람을 돌보는 것과 자연을 돌보는 것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둘다 하나님께 중요하고 회복을 위한 그분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기회 4: 이미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 기독교 전통/교단으로부터 배우자!우리 모두가 창조세계의 모든 측면을 잘 돌볼 수는 없다. 그러나 지도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고려하도록 초대받았다.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면서 우리는 각자의 공동체와 상황에서 충실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곳이 어딘지를 분별할 수 있다.실천 단계 #4당신의 교회/단체에서 이미 이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도록 요청하자.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구체적인 기회들에 대해 듣자. 토착 공동체들로부터 배우자.도전 5: 지구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기후는 복잡하고 세계적인 문제이며,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든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 대해 쉽게 낙담하거나 무시하고 말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기후 위기를 해결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순종하고자 한다. 창조세계 돌봄은 우리가 걷는 제자도 여정의 일부이다. 우리가 기도와 성경 공부를 일반적인 기독교 리듬으로 삼는 것처럼, 창조세계에 대한 관심도 일상생활의 일부로 통합해야 한다.우리는 결코 창조세계의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제자도의 일부로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충실하게 그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실수와 갈등을 창조세계를 돌보는 여정의 일부로서 포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우리는 인내하고 그 과정을 함께 통과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롬 8:19). 그리고 이것은 피조물의 탄식 소리에 교회가 반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기회 5: 당신의 공동체가 머리, 가슴, 손 등 다양한 수준에서 참여하게 하라.창조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행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소망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매우 큰 격려가 될 수 있다.실천 단계 #5일회성의 행사를 넘어 다년간에 걸친 참여에 헌신하자. 당신의 공동체가 숲, 강, 바다, 도시 등 어느 한 곳에 집중해서 헌신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적소를 발굴하자.더 깊이 나아가기 기독교 자료를 통하여 과학자들과 전 세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창조세계 돌봄의 깊이를 더하는 데 유익할 것이다.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에게 적극 권장되는 내용은 다음의 ‘주’를 참조하라.)• 보다 체계적인 창조세계 돌봄의 신학을 개발하자:[12] [13] [14] [15] • 생태학 렌즈로 성경을 공부하자: [16]•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되심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예배하자: [17] [18] • 모든 창조세계를 위해 세계교회와 함께 기도하자: [19]• 교회 네트워크에 가입하고 지역 상황에 맞는 환경 활동에 참여하자: [20] • 전 세계의 현재 창조세계 돌봄 행사에 대한 업데이트를 받아보자: [21]• 창조세계 돌봄에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개인 및 단체과 함께 활동하자: [22] [23] • 기후 정책 토론에 국제적 수준으로 참여하자: [24]요약하자면, 우리가 창조세계를 돌보는 것은 이것이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긴급한 부르심에 대해 우리가 응답하고자 하는 중요한 이유 때문이다.[25]주1. RJ (Sam) Berry with Laura Yoder, John Stott on Creation Care (Illinois: IVP, 2021), https://ivpbooks.com/john-stott-on-creation-care. 2. ‘The Cape Town Commitment,’ Lausanne Movement, Part 1, Sec. 7, accessed 1 August 2023, https://lausanne.org/content/ctc/ctcommitment. 3. Ajit Niranjan, ‘‘Era of global boiling has arrived,’ says UN chief as July set to be hottest month on record,’ The Guardian, 27 July 2023, https://www.theguardian.com/science/2023/jul/27/scientists-july-world-hottest-month-record-climate-temperatures. 4. Venkatachalam Anbumozhi, Meinhard Breiling, Selvarajah Pathmarajah, and Vangimalla R. Reddy, eds. ‘Climate Change in Asia and the Pacific: How can countries adapt?’ ADBInstitute (India: SAGE, 2012), https://www.adb.org/sites/default/files/publication/159335/adbi-climate-change-asia-and-pacific-how-can-countries-adapt-highlights.pdf 5. ‘Accidental Deaths and Suicides in India,’ National Crime Records Bureau, accessed 1 August 2023, https://ncrb.gov.in/sites/default/files/ADSI-2019-FULL-REPORT.pdf. 6. ‘Creation Care and the Gospel: Jamaica Call to Action,’ Lausanne Movement, accessed 1 August 2023,https://lausanne.org/content/statement/creation-care-call-to-action. 7. ‘Leader’s Summary: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 Tearfund Climate Report,’ Tearfund,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tearfund.org.au/resources/leaders-summary-they-shall-inherit-the-earth-tearfund-climate-report. 8. ‘We are Burning Down the House,’ We Are Tearfund,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earetearfund.org/burning-down-the-house/. 9. ‘For All the Earth,’ Tearfund Canada, accessed 1 August 2023, https://tearfund.ca/climatesurvey/ 10. Editor’s Note: See article entitled ‘Devastating Fires and the Church’s Mission’ by Tim Carriker in the March 2020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20-03/devastating-fires-churchs-mission. 11. ‘The Cape Town Commitment,’ Lausanne Movement, Part 1, Sec. 7, accessed 1 August 2023, https://lausanne.org/content/ctc/ctcommitment. 12. Colin Bell and Robert White, Creation Care and the Gospel: Reconsidering the Mission of the Church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2016). 13. R.J.(Sam) Berry with Laura Yoder, John Stott on Creation Care (Illinois: IVP, 2021). 14. Douglas Moo and Jonathan Moo, Creation Care: A Biblical Theology of the Natural World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2018). 15. Dave Bookless, Planetwise: Dare to Care for God’s World (Nottingham: InterVarsity Press, 2008). 16. ‘Why care for creation?’ OMF International, accessed 1August 2023, https://omf.org/resources/why-care-for-creation/. 17. Climate Vigil,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climatevigil.org/album-leadsheets. 18. ‘Doxecology,’ Resound Worship,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resoundworship.org/projects/doxecology. 19. ‘Season of Creation 2023,’ Season of Creation, accessed 1 August 2023, https://seasonofcreation.org. 20. ‘Become an A Rocha Church Partner,’ A Rocha International, accessed 1 August 2023, https://arocha.org/en/church-partners/ 21. The Pollinator: Creation Care Network News, accessed 1 August 2023, http://news.lwccn.com. 22. The Oikos Network, Oikos,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oikos-network.org 23. ‘Join the Rubbish Campiagn!’ Renew Our World Campaign, accessed 1 August 2023, https://www.renewourworld.net. 24. Christian Climate Observers Program (CCOP) 2023, accessed 1 August 2023, http://www.ccopclimate.org. 25. Berry, John Stott on Creation Care, 193. 원제: Climate Crisis and God’s Creation: Calling Global Christian Leaders to Act출처: lausanne.org
교회 안의 주객전도
by 전재훈
2024-01-19
주인과 손님이 바뀌었다는 의미의 주객전도(主客顚倒).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집을 지키는 개가 아니라 개를 지키는 집처럼, 몸에 맞는 옷을 사기보다 옷에 몸을 맞추기 위해 다이어트를 한다. 피시방에서 피시 이용료로 돈을 벌기보다 피시방에서 파는 음식으로 돈을 버는 것과 같은 일도 있다. 유재석이 다른 프로에 게스트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도 게스트로 간 유재석이 진행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교회 안에서도 주객전도 현상은 많다. 섬기라고 항존직을 뽑았더니 섬김을 받고 있더라 하는 식이다. 하나님께 받은 것에서 십일조를 떼어 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의미로 드리는 예물이 오히려 하나님께 더 받으려는 투자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의 하루는 저녁이 되어 잠을 자고 아침이 되어 하루를 일하고 저녁이 되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아담은 창조 후 안식을 먼저 맞이하고 그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산에 들어가 1년을 예배하고 40년의 광야를 살아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면 하루가 끝난다. 일주일 내내 일하고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예배에 나와 위로와 치료를 받는다. 은혜를 받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서 상을 받으려고 애쓴다. 주일에 주 앞에 나와 주님의 힘을 얻어서 일주일을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간 사람은 다음 주일에 감사를 가지고 재단에 나오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주의 일을 하다가 지친 마음으로 주일에 나오는 사람은 자신이 일한 만큼의 보상을 기대하고 나온다. 예배에 감사를 가지고 나오기보다 자신의 의를 가지고 나오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열심히 주의 일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열심히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한다. 어떤 선한 결과물이 나오면 전자는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지만 후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린다. 예배를 드리는 자세도 은혜를 받은 것에 감사하여 드리는 사람과 은혜를 받으려고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지만,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여 물개박수를 치며 찬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감동시켜 은혜를 받으려고 물개박수를 치며 찬양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잘 섬겨서 재물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가 재물이어야 하는데 도리어 재물이 목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박씨를 받으려고 제비 다리를 고친 놀부처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것을 얻으려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마 6:33) 이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 했더니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상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이다. 하지만 수많은 설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기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선포하고 있다. 다윗을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선포하기보다 어린 목동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지는 설교한다. 어린 목동도 사용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된 다윗의 성공을 찬양하게 만들고 있다. 모든 사람이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여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조차도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의 사랑을 선포하기보다, 바디매오의 포기할 줄 모르는 열정과 근성을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서 우리도 포기하지 말고 부르짖을 것을 설교한다. 하나님이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한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변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전하는 것이 주객전도가 일어난 설교인 셈이다. 구원에 있어서도 주객전도가 일어난다. 구원하신 자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연단에 통과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구원 얻은 자가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식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분이심에도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으로 바꿔 버렸다. 하늘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아닌 우리의 행위가 기록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천국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기보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전하는 것이 문제이다. 거기에 덧붙여 천국에서 더 큰 집과, 더 좋은 자리와, 더 많은 상을 얻는 방법이 있다는 식이다. 은혜여야 할 많은 것들이 수고에 대한 대가나 삯, 혹은 보상의 개념으로 바뀐 셈이다.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주객전도 현상의 백미는 역시 주인이신 하나님을 나의 종으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어떻게든 하나님께 내 뜻을 알리고 내 기도대로 응답해 주시도록 만들려고 한다. 기도할 때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기보다 내 기도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이 주를 이룬다.이 시대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영광을 받으시기보다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바쁘실 듯하다. 마치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통해 내가 영화롭게 되며 그분을 영원토록 부려 먹는 것과 같이 되었다.내 신앙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출산을 장려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방식
by Heidi H. Dean
2024-01-18
정해진 범주를 흩트리고 청취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신학자로 스탠리 하우어워스를 따라올 사람은 없다. 그는 도덕 윤리 분야의 최고 목소리였고, (내가 지지하는) 개혁 신학에 대한 비판자였으며, 내가 아는 한 강의 시간에 입에 욕을 담은 유일한 신학자이다.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도 남을 그는 신학적 좌파에 관해서는 그들이 아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며 무시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타임은 2001년에 그를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명명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는 “최고”라는 단어는 자신이 아는 한 신학 용어가 아니라며 무미건조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우파가 가진 우상과 좌파가 가진 우상,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장 위험한 우상을 불러내는 데에 적극적 의지를 가진 하우어워스로부터 우리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목사가 설교 시간에 헌금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교회가 얼마나 조용해지는지 눈치챈 적이 있는가? 하우어워스는 이런 모든 어색함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물질주의, 통제에 대한 욕구,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실패가 우리의 출산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말로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불편해진다. ‘출산’에 대한 논의는 그만큼 어색하다. 그렇다면 하우어워스는 아이들에 대한 나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토론(debating)에서 데이트(dating)로 나는 독신 대학원생으로서 하우어워스와 함께 공부했는데,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가족”에 관한 그의 비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바로 범인이었다. 좌절한 범인. 미혼이었던 나는 전반적으로 진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듀크 대학에서 나는 데이트보다 토론을 더 좋아하는 남자 동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다가 철학과 학생 한 명이 내 마음을 끌었고, 나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듀크뿐 아니라 같은 교회를 다녔던 그 “친구”와의 몇 주간에 걸친 논쟁에서 (그게 과연 단지 우정이었을까?) 중심이 된 건 결혼에 대한 하우어워스의 견해였다. 단순한 학문적 활동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논쟁이었다. 우리 각자가 독신 생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혼 부부만큼, 혹은 그 이상을 이바지할 수 있는가? (내 친구의 입장이다.) 아니면 뭔가 더 좋은 것은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만 성취될까? (내 입장이다.) 우리는 교제와 로맨스 같은 개인적인 가치와 다음 세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과 같은 사회적 가치의 바른 위치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스티븐은 나이 많은 독신이고 로맨스보다 생산성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나는 부분적으로 하우어워스의 강력하고 비감정적인 결혼 비전 덕분에 오늘까지도 그 큰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섯 자녀를 둔 후에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가족의 목적과 관련해서 하우어워스의 도전적이고 파괴적이며 필요한 관점을 인용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의 행동노틀담 대학에서 진행했던 결혼 강의에서 하우어워스가 학생들에게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라. 나는 “당신이나 다른 사람이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들은 건, “아이들은 재미있다” “아이들은 외로움을 막아주는 울타리이다”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를 키우라고 추천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진짜 좋게 들리는 멋진 대답을 하나 내놓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사람들은 완벽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충분한 재정과 집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그게 가능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이들을 이 세상에 맞이하려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어떤 아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 끔찍한 비극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자녀를 갖는 것은 실로 엄청난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 특별한 행위이다. 자유주의나 복음주의 집단 중 그 어디에서도 하우어워스가 2001년에 발표한 글에서 말했던, 자녀 출산에 대한 “급진적 소망”과 같은 말을 하는 신학자는 만날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녀를 갖는 것이다. 자녀를 먼저 낳아야 하고, 그런 다음 우리 삶의 다른 측면을 ‘내게는 자녀가 있다’라는 현실에 종속시켜야 한다.”하우어워스는 불편하지만 절실하게 필요한 진실을 말한다. 우리는 과연 “이 세상이 원하지 않는 어린이들을 환영”할 만큼 급진적인 소망을 품고 있는가?성경 전체에서 드러나는 소망출산, 입양, 양육, 봉사 등에서 우리가 출산을 원하는 사람(pro-children)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있다. 고대 세계에서 억압받던 여성, 어린이, 기타 약자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신 예수님은 다름 아니라 구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패턴을 이어간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문화적으로 열등한 대상이었던 과부, 둘째, 외부인과 어린이를 높이셨다. 학자들은 성경에 번식과 자손의 중요성이 계속해서 강조되었음을 입증한다. “씨”(자녀, 후손)라는 모티브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진다. 이는 창조, 타락, 이스라엘, 예수, 교회, 새 창조 등 모든 주요 순간에 필수 요소이다. 인류에게 내려진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첫 번째 사명, 즉 자신의 형상을 온 땅에 전파하라는 명령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마침내 성취된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왕국을 “열방”(요한계시록 21장),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요한계시록 7:9)로 구성된 하나의 “성(도시)”으로 묘사한다. 역사적으로 씨와 번식이라는 모티프가 상상력을 자극했을 때 교회는 번성했다. 초기 교회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용하고, 죽도록 내버려진 유아를 입양하는 등 적극적으로 생명 옹호의 입장에 섰다. 바로 그 점에서 교회는 로마 문화보다 우월했고, 그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약자를 통한 교회의 성장은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다. 어린이를 포함하여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독특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모습이다. 소망은 오로지 교회에서만 찾을 수 있다자녀 양육이 소망의 기초가 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희생과 지연된 만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생은 아이들이 자라서 광범위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하우어워스는 이렇게 썼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즉 권력, 부, 그리고 영향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힘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가장 독실한 신자들의 특징이다. 국립보건원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종교를 중요시하는 여성일수록 출산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한다. 교회에 충성하는 신실한 여성일수록 더 많은 자녀를 원한다. 그렇다고 출산만이 취약한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건 아니다. 더불어서 개인에게 일일이 출산의 소명을 부여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백성으로서 교회는 단체적으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투신할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은 독신의 길을 영원히 존귀하게 여기셨다. 구원과 성화 활동을 통해 독신자도 셀 수 없이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음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독신에 대한 확신이 결혼이라는 소명을 통해서 이뤄지는 생물학적 출산이라는 축복을 과소평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우어워스의 지적이다. “결혼은 자녀를 목적으로 하는 관행이다. … 결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녀를 낳고 돌보라는 부르심과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교회는 이 소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자녀를 갖는 것이 교회에서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라면, 세상에 의해서 제자화 되는 길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출산에 관한 설교가 그 안에 담긴 신학적 복잡성을 간과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그 점이 경시되어 왔다. 내게는 여전히 답보다 질문이 더 많다. 피임 기구 사용과 관련하여 복음주의자가 고려해야 할 윤리 문제는 무엇인가? 피임은 이제 어디에서나 만나는 일상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여기에 관해서 신학적 입장을 형성하고 명확하게 표현하도록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비전, 어떤 윤리적 패러다임과 지혜의 인도를 받아야 할까?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 잘 가르치지 못한다면,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우리가 진정한 제자도를 키울 수 있는 영역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예를 들어, 결혼한 부부는 인공수정 기술과 관련해서 적절한 사용과 부적절한 사용에 대한 지침을 어떻게 받는가? 자녀를 갖기 전에 기다려야 하는 이유와 적절한 임신 시점을 어떻게 판단할까?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부부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목적 속에는 반드시 출산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팀 켈러는 물질주의와 같은 우상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계층으로 이뤄진 소그룹을 통해서 이뤄지는 깊은 공동체 의식과 투명성을 통해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교회의 몸으로서 서로 간의 피드백이 필요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피드백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자녀를 갖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에 수반한 윤리 문제를 탐색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 간에 믿음과 책임을 지며 동시에 개별적인 조언까지 주고 받을 수 있는 소그룹 공동체이다. 출산과 관련해서 제자 훈련을 하려는 교회라면 꼭 필요한 이 문제를 도발적으로 제안한 하우어워스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기를 갖는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은밀하고 어색한 주제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우선순위로 인식하고 다뤄야만 하는 중차대한 주제이다. 원제: How Stanley Hauerwas Inspired Us to Have More Kid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로잔 운동, 그 시작은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_01
by 문대원
2024-01-1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제4차 로잔대회가 2024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한국에서 열립니다. 전 세계 200여 국가에서 5,000명의 선교 지도자들이 모인다고 하는데,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로잔 운동(Lausanne Movement)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시작되었을까요? 로잔 운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선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이라는 문서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는 로잔 언약은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전도의 본질, 교회와 전도, 전도와 문화 등 선교에 대한 성경적 정의와 현재 상황, 향후 과제를 복음주의 관점에서 기술했습니다. 로잔 언약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제1차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에서 발표된 공식 문서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사로 광범위한 국제 네트워크를 가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과 20세기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이 역사적인 선교 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세계 150개국에서 모인 2,400명의 선교 지도자들은 이 문서에 서명했습니다.제1차 로잔대회가 열렸을 당시 세계 교회는 종교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큰 위협을 마주했습니다. 1962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타 종교에도 구원에 이르는 은혜(saving grace)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1968년에 열렸던 WCC 웁살라 대회는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정치·경제·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로 규정하며 복음 전도의 중요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약화시켰습니다.이러한 시대적 도전 앞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정통 신학을 확립하고, 이에 근거한 선교 운동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74년 제1차 로잔대회가 열리게 된 목적이었습니다. 1920년대 근본주의-자유주의 논쟁 이후 주류 사회와 거리를 두었던 복음주의자들이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를 통한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연합하고자 한 것입니다.한국에서는 로잔 언약이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괄하는 ‘복음의 총체성’을 강조한 선교 문서라고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공부했던 미국에서는 로잔 언약을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한 ‘복음주의 선교 문서’로 이해합니다. 로잔 언약은 1968년 WCC 웁살라 대회에서 주창된 자유주의 선교 신학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반증(反證)이었습니다. 로잔 언약은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천명했습니다. 로잔 언약 3항은 “우리는 모든 종류의 혼합주의를 거부하며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식의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거부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는 종교간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가 선교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WCC의 입장과 명확한 차이를 보입니다.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 드와이트 무디, 20세기 빌리 그레이엄으로 이어지는 복음주의 부흥 운동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선교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교수는 “근대 선교 운동은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맺은 최고의 열매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
by 복음과도시
2024-01-1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로잔 운동, 그 시작은로잔 대회는 ‘이벤트’가 아닙니다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1) ‘세계’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2) ‘복음주의’
C. S. 루이스를 얌전하게 길들인 이상한 영화
by Brett McCracken
2024-01-16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는 20세기 지적 거물이었고, 그들이 무신론과 기독교 변증분야에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 종교, 성,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생각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두 사람의 토론을 엿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가정이 워낙 설득력이 있어서인지, 300페이지 책, 4시간짜리 PBS 시리즈, 연극, 그리고 현재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나는 아만드 니콜리가 쓴 The Question of God을 읽었고, 몇 년 전에 그 책에서 영감을 받은 연극을 본 적도 있다. 나는 책과 연극 모두를 즐겼기 때문에 탁월한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을, 그리고 매튜 구드(더 크라운, 다운튼 애비)가 루이스 역을 맡은 영화의 각색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그러나 안타깝게도, Freud’s Last Session(맷 브라운 감독, 12월 22일 개봉)은 과거에 나온 다른 형태의 가상 대화를 다룬 작품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고, 루이스 팬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홉킨스가 때때로 흥미롭게 또 대체로 좋은 연기를 펼치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 루이스식보다는 프로이트식을 강조한 실존적 만가이다.표면적으로만 봐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큰 폭발성을 가진 두 가지 전혀 다른 전망을 다루는 영화의 경우, 강렬함과 더불어서 최소한 루이스가 만든 토론 모임인 잉클링(Inklings)에서 있었을 법한 수사적 정력과 활력이 스며나와야만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프로이트 생애의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이상하기만 한 꿈 장면, 루이스가 무어 부인과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식의 암시, 그리고 안나 프로이트(Liv Lisa Fries가 연기)에 대한 과장된 레즈비언 서브플롯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영화는 우뚝 솟은 지성인들 사이의 치열한 지적 전투의 생생한 불꽃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채, 도리어 기이하고 차가운 톤만을 뿜고 있다. 가상 회의니콜리의 책보다는 연극에서 더 많은 내용을 끌어낸 이 영화 (PG-13 등급)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었을 1939년 회의를 상상하지만, 아마도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흔 살의 루이스는 여든세 살이 된 프로이트가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휘감은 끔찍한 나치즘을 피해서 살고 있던 런던의 집으로 찾아간다. 죽기 불과 몇 주 전, 병든 프로이트가 루이스를 맞이한다. 옥스퍼드 수사인 루이스는 순례자의 귀향의 저자이자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악명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프로이드는 그런 루이스와 대화를 하고 싶은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공습 사이렌과 독일에 대한 영국의 전쟁 선포 등으로 강조되지만, 영화 대부분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관이 중간중간 충돌하면서 이어지는, 들쭉날쭉한 대화로 채워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주는 장점이라면 관심 있는 시청자로 하여금 니콜리의 훌륭한 책을 보고 싶도록 자극하는 에퍼타이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책을 통해서 시청자는 진정 풍부한 메인 코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서 독자는 루이스와 프로이트가 가진 차이점의 범위와 규모 및 본질을 영화 스크린 보다 훨씬 더 큰 화면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영화에 흥미로운 순간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나는 기쁨과 갈망에 관한 부분을 즐겼다. 루이스와 프로이드는 갈망(Sehnsucht)에 생각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결코 충족되지 않는, 찬성과 반대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욕망을 서로 비교했다. 나는 프로이트가 가진 커다란 불일치와 모순을 표현한 영화의 전개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던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의 슬픈 아이러니는 내가 믿음과 예배에 집착하는 열정적인 불신자라는 사실이야.” 물론, 프로이트의 이런 논평이 루이스에게는 친숙하게만 들렸을 것이다. 루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같은 무신론자였을 때 느꼈던 “모순의 소용돌이”를 회상한다.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했습니다.” 프로이트가 느낀 다른 불일치와 함께, 영화 속 루이스가 이런 식의 대화를 좀 더 보여주었더라면 하고 아쉬었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에 보고 내가 좌절감을 느낀 이유이다. 프로이트와 루이스 사이의 말다툼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다뤄진다. 악의 문제에 대해 몇 분 그리고 성경이 왜 신화가 아닌지에 대한 잠깐 언급하는 등등. 더욱이, 거의 모든 대화에서 비대칭적 역동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나이가 많은 프로이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반면, 젊은 루이스는 겁에 질려 있다. 프로이드의 의견에 반박하기보다는 경의를 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진짜 루이스는 자신과 반대되는 세계관을 만나는 경우에 정중하게 맞서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실제 대화가 결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프로이트가 유명하고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해도, 루이스가 그 앞에서 주저했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다. 성적 도덕에 관해 탐구되지 않은 차이점일례로, 영화에서 두 남자가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는 영화 전체를 다 차지해도 될 정도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주제이다. 동성애 문제를 제기한 프로이트는 그것이 조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루이스는 설득력 있는 반론을 거의 내놓지 않는다. 그는 단지 “어떤 상황에서도 섹스가 완벽하게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물론 틀린 지적이 아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어서 구약과 신약 전체 흐르는 성경의 성적 규범은, “섹스는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이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과 거의 모순되지 않으며, 만약에 루이스가 지금 살고 있다면, 이 말은 그를 헌신적인 동성 결합을 “확언”한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영화가 섹스처럼 극명한 차이와 거기에 따른 논쟁이라는 좁은 주제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면 훨씬 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니콜리의 책에는 섹스, 쾌락, 그리고 사랑에 대한 루이스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설명하는 두 장(6장과 7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제대로 된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루이스가 욕망 및 성적 활동과 관련된 억압과 억제의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모든 사랑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경향을 가진 프로이트와 달리 다양한 유형의 사랑(스토르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 사이의 미묘한 구별을 강조하는 루이스를 만나고 싶었다. 그랬다면, 루이스와 같은 정통 그리스도인과 프로이트와 같은 유물론자 사이의 성적 도덕성에 대한 확장되고 실질적인 논쟁이 지금처럼 더 시의적절하고 더 설득력을 발휘했을 때도 없었을 테니까. 정복된 루이스 일반적으로 이 영화에서 만나는 루이스는 나니아의 작가로 그를 알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의 편지, 책, 시, 전시 BBC 강연 등에 등장하는 “잭”은 구드가 연기한 것보다 훨씬 더 기발하고 재치 있으며, 확신 뿐 아니라 기쁨에 가득한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구드는 훌륭한 배우지만, 루이스 역을 맡은 그의 연기가 비참할 정도로 차분하다. 그게 내가 영화관을 떠나면서 느낀 감정이다. 그가 진짜 루이스의 통찰력(루이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거나 조금 바꾼 경우에)을 대사로 전달할 때조차도, 그 모든 게 억제된 확신과 거의 숨죽임에 가까운 당혹감으로 표현될 뿐이다. 프로이트가 어떻게 세상의 엄청난 고통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있느냐며 소리칠 때, 루이스는 “쾌락이 하나님의 속삭임이라면 고통은 그의 메가폰입니다”라고 말한다(고통의 문제에서 의역). 루이스는 계속해서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드가 연기하는 루이스는 루이스 자신조차도 자기가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홉킨스가 연기한 프로이트도 중간중간 이 프로이트가 정말로 자기가 하는 말을 믿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순간이 있다. 물론 루이스보다는 프로이트가 항상 더 과장되게 말을 한다. 비록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할에 푹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1993년 섀도우랜드에서 그가 보여준 루이스의 연기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그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든 루이스와 프로이트 역할을 둘 다 연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상호 배타적인 세계관맷 브라운 감독의 요점 중 하나는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주장이 각자의 견해에 관계없이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며,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 절충하면 완전한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브라운은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문화적 양극화 시대에서 이 영화가 차이점을 뛰어넘는 대화의 모델이 되기를 원한다고 언급했다.대화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자 하는 어느 정도의 존경심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누구에게나 다 나름의 제공할 것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 나는 과학과 종교를 믿으며, 그것을 영성이라 부르든, 하나님이라 부르든, 당신이 원하는 무슨 이름이라도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대상이 적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영화의 마지막 순간은 한쪽이 옳고 한쪽이 틀리기보다는 ‘대화’에 대한 강조이다. 옥스포드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루이스는 프로이트가 준 선물을 펼친다. 그건 루이스가 쓴 책, ‘순례자의 귀향’이다. 그리고 책 안에는 비엔나 의사가 직접 쓴 인용문이 적혀 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럼으로 사람은 진실의 실체를 발견한다.” 물론 이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오류가 다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다.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세계관은 정반대이며 상호 배타적이다. 결코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루이스와 프로이트 사이의 대화는 선의의 토론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지 철학적 단결을 표시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쪽의 사고를 더 깊이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봐야할 지 고민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원제: ‘Freud’s Last Session’ Tames C. S. Lew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우리에게 오바댜가 필요하다
by Brandon Cooper
2024-01-15
J. L. 마이어스의 1923년 고전 The Dawn of History(역사의 여명) 첫 장은 수백만 명이 아무런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이 살았음을 상기시킨다. 세상이 현재 그대로 앞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역사의 원호가 휘는 법이 없다. 그렇게 믿지 않는 건 망상이며 거짓된 희망을 낳는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가 여전히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우리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한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단지 고려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대안으로 인해서 생긴 순진한 발상에 불과할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끄는 끝, 텔로스(telos)가 있는가? 짧고 생소한 오바댜서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더 큰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에돔에 관한 이 이상하고 작은 책은 어둡고, 국가주의적이며, 심지어 복수심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바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선물을 준다. 다름 아니라 역사와 종말론, 그리고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왜 역사가 필요한가오바댜는 역사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영감받은 통찰력을 말이 아니라 “계시”(1절)를 통해서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에돔에게 말을 거는 오바댜는 이러한 통찰력으로 유다를 격려한다. 유다는 지금 막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아마도 예루살렘이 약탈되고 그에 따른 유배가 시작된 거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바알이 여호와보다 강한가? 이웃 에돔은 그의 형제의 멸망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고 약탈을 하며 악행에 가담한다(10-14절). 에돔은 그 모든 나쁜 짓을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며, 바로 그 점이 유다에게는 오바댜의 메시지가 필요한 이유이다. 역사에는 과연 목적이 있는가? 정의가 구현되는 날이 올까? 오바댜는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패배한 민족을 향해서 선지자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선포한다(15절). 유다의 패배가 여호와의 패배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연합한 적들 부족이 에돔에 접근했을 때, 오바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리차드 린츠의 말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에 대한 교훈이었다. … 물론 세부적인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역사는 반복될 수 있기에 기록되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과거 행위가 그분이 자기 백성을 향해서 그리고 자신이 하신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주는 근거라는 원칙에 따라서 역사가 기록되었다.오바댜는 구속사의 안경을 쓰고 역사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법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는지에 추상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행동을 통해서 알고 있다.왜 종말론이 필요한가히틀러의 선전가 요제프 괴벨스는 “세상을 향해서 첫마디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옳다”라고 선언했다. 나치 정권에 대한 역사의 판단은 그가 틀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건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 단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마지막 말이 있다.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잘 알고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신앙은 종말론적이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이 없이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한 게 현실이 아닌가. 오바댜는 힘든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그날”이라는 표현은 11-14절에 여덟 번 나오며, 항상 부정적인 의미, 즉 환난, 재난, 불행의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15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느니라”라는 종말론적 소망이 터져 나온다. 그날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아직’이 마침내 ‘지금’과 ‘드디어’가 되는 날이다. 모든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끝끝내 모든 잘못이 바로잡힐 것이다. 큰 불행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바댜는 다가올 하나님의 공의로 그들을 격려하고 싶어한다. 에돔이 행한 불의함은 그에게 고스란히 다시 닥칠 것이다(15절). 모든 빚은 청산되고, 모든 계좌는 정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제대로 다루시지 않는다면, 천국조차도 지옥이 될 것이다. 과거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정의를 갈망한다. “그때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 계셨는가?”라고 울부짖을 때마다, 사실상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심판은 필요하고 옳은 일이다. 그날이야말로 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이 다다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바댜가 약속하는 게 단지 하나님의 보복적인 정의만은 아니다. 그는 회복을 예언한다. 이 책의 마지막 세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국경에 도달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겠다고 약속하신다. (포로 생활 중인 난민들에게 이 얼마나 감미로운 메시지인가!) 애초에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일부이기에 사실상 하나님은 지금 자신이 했던 그 언약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다. 골고다 이후를 사는 우리는 이 회복이 단지 땅 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을 덮을 것이다(합 2:14).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될 것이다. 주여, 제발 그의 나라가 하루빨리 임하게 하소서(옵 1:21).하나님의 통치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모든 잘못은 바로잡히고, 지상에는 평화가 임할 것이다. 인신매매, 인종차별, 그리고 살인이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역사를 애초에 목적하신 대로 마무리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불의를 저지르면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부터 바로잡혀야 한다. 오바댜서를 겉핥기로 읽는 경우에 마치 세상이 단순하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예언의 메시지가 은혜라기보다는 카르마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벨사살이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그릇으로 술을 마셨던 것처럼(단 5:3), 에돔의 죄는 하나님의 성산에서 술을 마심으로 성전을 더럽힌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과 열방은 계속해서 술을 마실 것이다(옵 1:16). 뭘 마신다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 포도주는, 물을 섞어서 묽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부어 넣은 것이다”(계 14:10).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엡 2:3). 유다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그들을 약탈하기 위해 바벨론을 보내셨다. 그 결과 어느 이스라엘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포도주를 먹여 비틀거리게 하셨습니다”(시 60:3)라며 한탄했다.그러나 이스라엘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새날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너의 손에서, 비틀거리게 하는 그 잔 곧 나의 진노의 잔을 거두었으니, 다시는 네가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사 51:22). 이런 현실이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이며, 그의 나라는 불완전하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댜는 단지 심판(16절)이 아니라 “시온산에 구원이 있으리라”(17절)고 말한다. 어떻게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와 변함없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만나기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진노의 잔을 우리 손에서 거두어 그의 아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막 14:36).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더 이상 진노의 잔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따라서 종말론이 주는 소망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반드시 우리의 죄를 벌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제사장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로 하여금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게 하셨다. 원제: We Need Obadia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왜 서울 2024인가?
by David Bennett
2024-01-13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2024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대한민국 서울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4차 로잔대회(일명 서울 2024 대회)가 개최된다. 이 중요한 모임과 이 모임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에도 계속될 다년간의 다중심적인 로잔4(L4) 여정의 목적은 예수님의 지상대위임령 성취를 위한 협력적 행동을 가속하는 데 있다.도전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마 28:19-20)는 사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 인구 중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30퍼센트를 웃도는 수준에 머물렀다.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말씀을 증언할 그리스도인들은 부족하다. 도처에 제자를 양육할 수 있는 교회가 없는 사람들, 장소들이 있다. 수많은 교회와 일터의 분야에서 시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회 곳곳의 영역에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지상대위임령은 총체적이고 포괄적이며, 로잔운동이 추구하는 세계 선교는 가정, 직장, 지역 사회, 사회 전반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모든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세계 교회에는 진정으로 포괄적이며, 조율된 그리고 협력적인 세계 선교가 부족하다.우리는 전 세계 교회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한 국가, 한 민족, 한 교파 혹은 문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하지만, 한 몸된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 지역적 차원에서도 이 사명을 향한 진전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4년 전 로잔운동의 지도층은 이를 염두에 두고 네 번째 국제대회를 소집하고, 이 대회까지 이어지는 다년간의 과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현재 격차가 존재하는 곳과 새로운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파악하기 위한 여정을 전 세계, 또 각 지역에서 계속해 왔다.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현재 격차가 존재하는 곳과 새로운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파악하기 위한 여정을 계속해 왔다. 또한 가장 큰 도전 과제와 가장 눈에 띄는 기회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획기적인 혁신과 고무적인 돌파구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도 노력해 왔다. 우리는 협업을 통해 함께 일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지속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경험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청하고, 모으고, 배우며 함께 행동하는 여정을 계속 이어 나가고자 한다.우리는 현존하는 격차를 해소하고 현재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현장에서 기능할 수 있는 협업 이니셔티브(Initiatives)와 협업 행동팀(Collaborative Action Teams)이 속히 진행되기를 바란다. 이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삼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목표로 삼을 것이다.경청의 과정지난 3년 동안 로잔운동은 전 세계 다양한 계층을 초청하여 5가지 질문에 대한 답에 경청하는 과정을 가졌다:1.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격차 혹은 남아있는 기회는 무엇인가?2.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가속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돌파구 또는 혁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3.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해 어떤 분야에서의 협력이 가장 중요한가?4. 어떤 분야의 연구가 더 필요한가?5. 우리는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분별하고 2050년 세계 선교의 최전선에서 일할 차세대 리더를 준비하기 위해 글로벌 공청회를 주최하고, 세계 및 지역 모임을 통해 경청에 참여하고, 포커스 그룹을 개최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선교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왔다.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추가적으로 우리는 전 세계 100명 이상의 연구진으로 구성된 팀에게 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의뢰했다. 이 보고서에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기 위한 우리의 세계적 노력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발전 요소와 가장 관련성이 높은 동향이 담겨있다. 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는 2024 서울 대회 몇 달 전에 발표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제4차 대회의 모든 참가자들이 현재의 세계 상황과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이슈, 각 지역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서울 선언문우리가 말하는 격차 중 일부를 위해서는 전략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부 격차는 성서적 그리고 신학적 이해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신학위원회 역시 로잔의 세 가지 기본 문서, 즉 로잔언약, 마닐라 선언문 그리고 케이프타운 서약에 기반한 서울 선언문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서울 선언문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재확인하고 성서적 통찰력, 명령, 그리고 우리 시대에 대한 의미를 강조할 것이다.2024 서울 대회는 이러한 다년간 경청 과정의 정점이자, 현재까지 확인된 격차와 기회를 모두 다루기 위한 협력적인 행동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서울 2024는 전 세계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보여줄 기회이다.처음 세 차례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대회는 1974년 스위스 로잔; 1989년 필리핀 마닐라; 그리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되었다. 앞선 세 대회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번 서울 대회는 5,000명의 현장 참가자와 5,000명의 온라인 참가자가 모여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의 선교에 영향을 미치는 남녀가 ‘현세대에 단 한 번’ 함께 모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참가자는 젊은, 노년 세대를 모두 포함하며, 일터는 물론 교회와 선교 관련 직업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를 대표할 것이다. 로잔의 한 리더는 서울 2024를 ‘사일로(silos)의 혼합’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파트너십이 탄생하며, 새로운 협업 행동팀이 출범할 것으로 기대한다. 대회 시작 전 준비 과정과 주제 강연, 테이블 그룹 대화, 그리고 오후에 진행되는 다양한 분과 세션을 통해 참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참가자들이 지역 및 세계 차원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협력하여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필요와 격차, 전략적 기회를 다룰 기회를 허락하실 것을 믿는다.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각 지체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 몸으로 지어졌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모임을 통해 우리는 전 세계 그리스도의 몸이 서로에게서 배우고 서로의 자원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서울 2024는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한 협력적 행동에 속도를 붙일 것이다.양극화되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세계 교회가 가장 주된 사명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양극화되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세계 교회가 가장 주된 사명을 기억하고, 삶의 모든 영역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주권을 선포하고 드러내며, 도움이 필요한 혼란스러운 바다에서 희망과 방향의 등대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로잔은 네 가지 비전이 함께하는 여정에서 세계 교회를 선도해 왔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 모든 사람과 지역을 위해 제자 삼는 교회• 모든 교회와 사회 부문을 위한 그리스도를 닮은 지도자•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미치는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협업 행동을 위한 헌신이 여정 동안 우리는 예루살렘을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 틈새를 성벽과 성문의 재건을 통해 메꾸는 느헤미야의 소명을 떠올렸다. 느헤미야 4:6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느헤미야 3장에 묘사된 것처럼, 이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일부는 개인으로, 일부는 팀으로 참여했다. 이 모두는 서로 협력하고 서로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한데 모아 성벽을 재건한 것처럼, 로잔운동은 2024년 대회를 필두로 출범할 ‘협업행동팀’이라는 이니셔티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전 세계 교회를 하나로 연합하고자 한다. 로잔은 이 팀을 통해 전략적 협력과 세계 자원의 공유를 촉발하는 연결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업무 중복과 자원 낭비를 초래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일로를 극복하고자 한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은 전 세계 수천 개의 단체가 함께 협력 행동을 약속하는 ‘협업 행동을 위한 헌신’에 함께하는 것이다.어언 50년 동안 로잔운동은 세계 선교를 가속하는 데 힘써왔다. 우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협업행동이 계속해서 가속화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이 땅 모든 나라의 신자들과 함께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선포하자’라고 외치기를 소망한다.원제: Why Seoul 2024?출처: lausanne.org
해체가 탈회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by Jesse Furey
2024-01-12
“아직도 예수를 믿기는 해. 하지만 나 자신을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어.” 오랜 친구가 이렇게 말하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충격에 나는 거의 커피를 뱉을 뻔했다. “그러면 안 돼!”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참았다. 그날 나는 친구가 “교회”에 느끼는 좌절감을, 그리고 신앙을 해체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더듬거리듯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대학 도시에서 목회를 하는 나는 점점 더 자주 이런 대화를 나눈다. 신앙 여정에서 해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이전 세대에게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표현이 특징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교회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신앙과 배교를 가르는 미지의 영역이 이제는 활짝 열린 상태이다. 친구와 나눴던 그 대화를 되돌아보면, 그때 내가 그가 다시 정통 신앙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될 책을 소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 션 맥도웰과 존 메리어트가 쓴 표류: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믿는 바를 해체하기는 참으로 소중한 자원이다. Set Adrift: Deconstructing What You Believe Without Sinking Your FaithSEAN MCDOWELL AND JOHN MARRIOTT기독교의 비본질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 이 책은 많은 사람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질문과 문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당신은 역사상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모두 다 똑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각 장은 진정으로 기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은 신앙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분석하고, 다시 생각하고, 나아가서 재조립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한다. ZONDERVAN. 192 PP.의심의 안개 이 책의 표지는 짙은 안개가 밀려오는 바다에서 누군가 패들보드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시각적 기준점을 잃는 순간, 방향 감각을 잃게 될 것은 뻔하다. 그렇다면 바다에 휩쓸려 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움직이지 말아야 할까? 앞으로 노를 젓는다면, 그게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도리어 더 큰 위험을 향해 가는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해체 과정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의심의 짙은 안개가 낀 바다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낀다. 안개는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정치적일 수도 있다: 아니, 어떻게 우리 교회의 그 많은 교인이 저 사람에게 투표했다는 거야? 또는 신학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저주를 주기로 예정한 사람들이 있다고? 아니면 윤리적 문제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세상에 왜 이리 고통과 악이 만연할까? 그리고 많은 경우에 안개는 개인적 이유로 발생한다: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의심의 원인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표류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들의 방향을 잡아줄 무언가와 그 길을 따라가는 데 도움을 주는 안내자이다. 이 책은 바이올라 출신의 두 사람, 기독교 변증학 부교수 맥도웰과 기독교 사상 센터 소장 메리어트가 힘을 합쳐서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안내판을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이다. 해체 재정의하기표류는 해체의 철학적 측면이나 문화 현상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저자들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시작한 철학적, 문학적 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며 해체의 기술적 의미를 고려하는 데에는 고작 몇 페이지를 할애할 뿐이다. 자신의 신앙을 재평가하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데리다가 누군지도 모르며, 맥도웰과 메리어트는 기독교가 억압적이거나 편협하기에 해체를 시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해체 과정에서 종종 듣는 말은 이런 식이다. 표류는 해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수를 따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받은 믿음이 애초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완전히 정제된 선인지 여부를 의심하기 때문에 생기는 분석 과정으로서 찌꺼끼를 걸러냄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의이다. 예를 들어, 알리사 차일더스는 “해체”라는 용어가 가진 광범위한 의미 속에는 “순진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위험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무엇”으로 정의할 여지가 있기에, 애초에 “해체”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또 다른 선택은 성경에 따라 신앙을 정제하는 과정으로서 ‘탈문화화’(disenculturation)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해체’와 같은 용어가 주는 부담에서 피하려는 시도이다. 표류는 일단 해체를 긍정적인 의미로 채우려는 선택을 반영한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저자는 정직한 질문자가 의심을 극복하고 정통 기독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한다. 잘 해체하기두 저자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순전한” 기독교를 해체 과정의 경계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지구의 나이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 및 천년 왕국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 서로 간에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권위가 우리의 “경험, 직관, 문화 또는 다른 것”에 위치한다는 진보적 관점에 맞서서, 성경적 권위에 대한 역사적 교리를 옹호하는 데 한 장을 할애한다. 일부 교리에 대해서는 건전한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그러한 토론조차도 성경의 권위라는 경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건전한 해체를 위해서는 단지 교리에 대한 신실함을 넘어서 사회적 상상까지도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지적으로는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지만, 느낌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저자는 “모든 사회적 상상에는 (일반적인) 세상과 (특정한) 개인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무언의 비전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이 특히 탁월하게 이바지하는 부분은 해체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사회적 상상과 교리 사이의 갈등을 인식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다양한 해체의 단계에 있는 여러 친구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개인마다 가진 사회적 상상 사이의 격차는 메울 수 없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종종 오해와 좌절로 이어졌다. 이 책이 정확하게 지적하는 지점은 바로 개인마다 가진 근본적인 가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가정에 의해 통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혼자 표류하지 말라표류는 해체의 초기에 있는 사람에게 특히 유용하다. 이 책은 해체자들을 평가 대상의 표본으로 다루기보다는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로 다룬다. 개인별 독서뿐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도 좋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더불어 사는 삶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불확실하고 낙담할 때일수록 더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믿지 않는 상태에서 그 사람은 결코 스스로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말씀을 전달하고 선포하는 다른 형제이다.” 사역자라면 의심의 안개 속에서 표류 중이라며 고백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손에 이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어야 한다. 원제: Don’t Let Deconstruction Become Deconvers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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