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로잔 운동, 그 시작은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_01
by 문대원
2024-01-1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제4차 로잔대회가 2024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한국에서 열립니다. 전 세계 200여 국가에서 5,000명의 선교 지도자들이 모인다고 하는데,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로잔 운동(Lausanne Movement)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시작되었을까요? 로잔 운동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선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로잔 언약(Lausanne Covenant)이라는 문서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는 로잔 언약은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전도의 본질, 교회와 전도, 전도와 문화 등 선교에 대한 성경적 정의와 현재 상황, 향후 과제를 복음주의 관점에서 기술했습니다. 로잔 언약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제1차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The First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에서 발표된 공식 문서입니다. 세계적인 부흥사로 광범위한 국제 네트워크를 가진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과 20세기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John Stott)가 이 역사적인 선교 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세계 150개국에서 모인 2,400명의 선교 지도자들은 이 문서에 서명했습니다.제1차 로잔대회가 열렸을 당시 세계 교회는 종교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큰 위협을 마주했습니다. 1962년에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타 종교에도 구원에 이르는 은혜(saving grace)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했습니다. 또한 1968년에 열렸던 WCC 웁살라 대회는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정치·경제·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로 규정하며 복음 전도의 중요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매우 약화시켰습니다.이러한 시대적 도전 앞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정통 신학을 확립하고, 이에 근거한 선교 운동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1974년 제1차 로잔대회가 열리게 된 목적이었습니다. 1920년대 근본주의-자유주의 논쟁 이후 주류 사회와 거리를 두었던 복음주의자들이 복음 전도와 사회 참여를 통한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연합하고자 한 것입니다.한국에서는 로잔 언약이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괄하는 ‘복음의 총체성’을 강조한 선교 문서라고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공부했던 미국에서는 로잔 언약을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한 ‘복음주의 선교 문서’로 이해합니다. 로잔 언약은 1968년 WCC 웁살라 대회에서 주창된 자유주의 선교 신학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반증(反證)이었습니다. 로잔 언약은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천명했습니다. 로잔 언약 3항은 “우리는 모든 종류의 혼합주의를 거부하며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교나 어떤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는 식의 대화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손상시키므로 거부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는 종교간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가 선교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WCC의 입장과 명확한 차이를 보입니다.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 19세기 드와이트 무디, 20세기 빌리 그레이엄으로 이어지는 복음주의 부흥 운동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선교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교수는 “근대 선교 운동은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 맺은 최고의 열매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지리적,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
by 복음과도시
2024-01-17
로잔 운동을 알고 싶다2024 서울 로잔대회를 앞두고, 로잔 운동의 젊은 지도자 문대원 목사가 로잔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 역사적 복음주의 운동의 ABC를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드립니다.로잔 운동, 그 시작은로잔 대회는 ‘이벤트’가 아닙니다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1) ‘세계’ 키워드로 읽는 로잔 운동 (2) ‘복음주의’
C. S. 루이스를 얌전하게 길들인 이상한 영화
by Brett McCracken
2024-01-16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는 20세기 지적 거물이었고, 그들이 무신론과 기독교 변증분야에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하나님, 종교, 성, 그리고 삶의 의미에 대한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생각을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두 사람의 토론을 엿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가정이 워낙 설득력이 있어서인지, 300페이지 책, 4시간짜리 PBS 시리즈, 연극, 그리고 현재는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나는 아만드 니콜리가 쓴 The Question of God을 읽었고, 몇 년 전에 그 책에서 영감을 받은 연극을 본 적도 있다. 나는 책과 연극 모두를 즐겼기 때문에 탁월한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을, 그리고 매튜 구드(더 크라운, 다운튼 애비)가 루이스 역을 맡은 영화의 각색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뻤다.그러나 안타깝게도, Freud’s Last Session(맷 브라운 감독, 12월 22일 개봉)은 과거에 나온 다른 형태의 가상 대화를 다룬 작품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고, 루이스 팬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었다. 홉킨스가 때때로 흥미롭게 또 대체로 좋은 연기를 펼치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 루이스식보다는 프로이트식을 강조한 실존적 만가이다.표면적으로만 봐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큰 폭발성을 가진 두 가지 전혀 다른 전망을 다루는 영화의 경우, 강렬함과 더불어서 최소한 루이스가 만든 토론 모임인 잉클링(Inklings)에서 있었을 법한 수사적 정력과 활력이 스며나와야만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프로이트 생애의 마지막 날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는 이상하기만 한 꿈 장면, 루이스가 무어 부인과 오이디푸스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식의 암시, 그리고 안나 프로이트(Liv Lisa Fries가 연기)에 대한 과장된 레즈비언 서브플롯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 영화는 우뚝 솟은 지성인들 사이의 치열한 지적 전투의 생생한 불꽃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채, 도리어 기이하고 차가운 톤만을 뿜고 있다. 가상 회의니콜리의 책보다는 연극에서 더 많은 내용을 끌어낸 이 영화 (PG-13 등급)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었을 1939년 회의를 상상하지만, 아마도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흔 살의 루이스는 여든세 살이 된 프로이트가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휘감은 끔찍한 나치즘을 피해서 살고 있던 런던의 집으로 찾아간다. 죽기 불과 몇 주 전, 병든 프로이트가 루이스를 맞이한다. 옥스퍼드 수사인 루이스는 순례자의 귀향의 저자이자 무신론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악명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프로이드는 그런 루이스와 대화를 하고 싶은 흥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공습 사이렌과 독일에 대한 영국의 전쟁 선포 등으로 강조되지만, 영화 대부분은 서로 대조되는 세계관이 중간중간 충돌하면서 이어지는, 들쭉날쭉한 대화로 채워진다. 그나마 이 영화가 주는 장점이라면 관심 있는 시청자로 하여금 니콜리의 훌륭한 책을 보고 싶도록 자극하는 에퍼타이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책을 통해서 시청자는 진정 풍부한 메인 코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서 독자는 루이스와 프로이트가 가진 차이점의 범위와 규모 및 본질을 영화 스크린 보다 훨씬 더 큰 화면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영화에 흥미로운 순간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나는 기쁨과 갈망에 관한 부분을 즐겼다. 루이스와 프로이드는 갈망(Sehnsucht)에 생각과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서 결코 충족되지 않는, 찬성과 반대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욕망을 서로 비교했다. 나는 프로이트가 가진 커다란 불일치와 모순을 표현한 영화의 전개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던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인생의 슬픈 아이러니는 내가 믿음과 예배에 집착하는 열정적인 불신자라는 사실이야.” 물론, 프로이트의 이런 논평이 루이스에게는 친숙하게만 들렸을 것이다. 루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같은 무신론자였을 때 느꼈던 “모순의 소용돌이”를 회상한다.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분노했습니다.” 프로이트가 느낀 다른 불일치와 함께, 영화 속 루이스가 이런 식의 대화를 좀 더 보여주었더라면 하고 아쉬었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에 보고 내가 좌절감을 느낀 이유이다. 프로이트와 루이스 사이의 말다툼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단지 피상적인 방식으로만 다뤄진다. 악의 문제에 대해 몇 분 그리고 성경이 왜 신화가 아닌지에 대한 잠깐 언급하는 등등. 더욱이, 거의 모든 대화에서 비대칭적 역동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나이가 많은 프로이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에 자신감을 드러내는 반면, 젊은 루이스는 겁에 질려 있다. 프로이드의 의견에 반박하기보다는 경의를 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진짜 루이스는 자신과 반대되는 세계관을 만나는 경우에 정중하게 맞서는 방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실제 대화가 결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프로이트가 유명하고 카리스마가 넘친다고 해도, 루이스가 그 앞에서 주저했을 거라고는 믿을 수 없다. 성적 도덕에 관해 탐구되지 않은 차이점일례로, 영화에서 두 남자가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는데, 이는 영화 전체를 다 차지해도 될 정도로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주제이다. 동성애 문제를 제기한 프로이트는 그것이 조금도 부도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루이스는 설득력 있는 반론을 거의 내놓지 않는다. 그는 단지 “어떤 상황에서도 섹스가 완벽하게 정상적이고 건강하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지적할 뿐이다. 물론 틀린 지적이 아니다. 그리고 루이스는 이어서 구약과 신약 전체 흐르는 성경의 성적 규범은, “섹스는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서로에게 헌신한 두 사람”이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과 거의 모순되지 않으며, 만약에 루이스가 지금 살고 있다면, 이 말은 그를 헌신적인 동성 결합을 “확언”한 진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영화가 섹스처럼 극명한 차이와 거기에 따른 논쟁이라는 좁은 주제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었다면 훨씬 더 흥미로웠을 것이다. 니콜리의 책에는 섹스, 쾌락, 그리고 사랑에 대한 루이스와 프로이트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설명하는 두 장(6장과 7장)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제대로 된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루이스가 욕망 및 성적 활동과 관련된 억압과 억제의 중요한 차이점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모든 사랑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경향을 가진 프로이트와 달리 다양한 유형의 사랑(스토르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 사이의 미묘한 구별을 강조하는 루이스를 만나고 싶었다. 그랬다면, 루이스와 같은 정통 그리스도인과 프로이트와 같은 유물론자 사이의 성적 도덕성에 대한 확장되고 실질적인 논쟁이 지금처럼 더 시의적절하고 더 설득력을 발휘했을 때도 없었을 테니까. 정복된 루이스 일반적으로 이 영화에서 만나는 루이스는 나니아의 작가로 그를 알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낯설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의 편지, 책, 시, 전시 BBC 강연 등에 등장하는 “잭”은 구드가 연기한 것보다 훨씬 더 기발하고 재치 있으며, 확신 뿐 아니라 기쁨에 가득한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구드는 훌륭한 배우지만, 루이스 역을 맡은 그의 연기가 비참할 정도로 차분하다. 그게 내가 영화관을 떠나면서 느낀 감정이다. 그가 진짜 루이스의 통찰력(루이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거나 조금 바꾼 경우에)을 대사로 전달할 때조차도, 그 모든 게 억제된 확신과 거의 숨죽임에 가까운 당혹감으로 표현될 뿐이다. 프로이트가 어떻게 세상의 엄청난 고통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있느냐며 소리칠 때, 루이스는 “쾌락이 하나님의 속삭임이라면 고통은 그의 메가폰입니다”라고 말한다(고통의 문제에서 의역). 루이스는 계속해서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드가 연기하는 루이스는 루이스 자신조차도 자기가 하는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암시한다. 홉킨스가 연기한 프로이트도 중간중간 이 프로이트가 정말로 자기가 하는 말을 믿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하는 순간이 있다. 물론 루이스보다는 프로이트가 항상 더 과장되게 말을 한다. 비록 홉킨스가 프로이트 역할에 푹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1993년 섀도우랜드에서 그가 보여준 루이스의 연기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그가 이 영화에서 어떻게든 루이스와 프로이트 역할을 둘 다 연기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상호 배타적인 세계관맷 브라운 감독의 요점 중 하나는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주장이 각자의 견해에 관계없이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며,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이 서로 절충하면 완전한 진실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브라운은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문화적 양극화 시대에서 이 영화가 차이점을 뛰어넘는 대화의 모델이 되기를 원한다고 언급했다.대화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자 하는 어느 정도의 존경심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쩌면 누구에게나 다 나름의 제공할 것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 나는 과학과 종교를 믿으며, 그것을 영성이라 부르든, 하나님이라 부르든, 당신이 원하는 무슨 이름이라도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 대상이 적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지요.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것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영화의 마지막 순간은 한쪽이 옳고 한쪽이 틀리기보다는 ‘대화’에 대한 강조이다. 옥스포드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루이스는 프로이트가 준 선물을 펼친다. 그건 루이스가 쓴 책, ‘순례자의 귀향’이다. 그리고 책 안에는 비엔나 의사가 직접 쓴 인용문이 적혀 있다. “오류에서 오류로, 그럼으로 사람은 진실의 실체를 발견한다.” 물론 이 말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오류가 다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다. 프로이트와 루이스의 세계관은 정반대이며 상호 배타적이다. 결코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루이스와 프로이트 사이의 대화는 선의의 토론에 대한 모델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단지 철학적 단결을 표시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쪽의 사고를 더 깊이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봐야할 지 고민하도록 강요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원제: ‘Freud’s Last Session’ Tames C. S. Lew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우리에게 오바댜가 필요하다
by Brandon Cooper
2024-01-15
J. L. 마이어스의 1923년 고전 The Dawn of History(역사의 여명) 첫 장은 수백만 명이 아무런 역사에 대한 의식이 없이 살았음을 상기시킨다. 세상이 현재 그대로 앞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든 역사의 원호가 휘는 법이 없다. 그렇게 믿지 않는 건 망상이며 거짓된 희망을 낳는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이 사회가 여전히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우리는 전혀 다른 상상을 한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단지 고려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대안으로 인해서 생긴 순진한 발상에 불과할까?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끄는 끝, 텔로스(telos)가 있는가? 짧고 생소한 오바댜서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더 큰 의식을 발전시키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준다. 에돔에 관한 이 이상하고 작은 책은 어둡고, 국가주의적이며, 심지어 복수심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바댜는 우리에게 몇 가지 선물을 준다. 다름 아니라 역사와 종말론, 그리고 예수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왜 역사가 필요한가오바댜는 역사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영감받은 통찰력을 말이 아니라 “계시”(1절)를 통해서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에돔에게 말을 거는 오바댜는 이러한 통찰력으로 유다를 격려한다. 유다는 지금 막 엄청난 타격을 입었는데, 아마도 예루살렘이 약탈되고 그에 따른 유배가 시작된 거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하나님이 실패한 것일까? 바알이 여호와보다 강한가? 이웃 에돔은 그의 형제의 멸망을 보고 기뻐한다. 그리고 약탈을 하며 악행에 가담한다(10-14절). 에돔은 그 모든 나쁜 짓을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이며, 바로 그 점이 유다에게는 오바댜의 메시지가 필요한 이유이다. 역사에는 과연 목적이 있는가? 정의가 구현되는 날이 올까? 오바댜는 확신에 차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패배한 민족을 향해서 선지자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선포한다(15절). 유다의 패배가 여호와의 패배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연합한 적들 부족이 에돔에 접근했을 때, 오바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리차드 린츠의 말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역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에 대한 교훈이었다. … 물론 세부적인 부분까지는 아니지만 역사는 반복될 수 있기에 기록되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과거 행위가 그분이 자기 백성을 향해서 그리고 자신이 하신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주는 근거라는 원칙에 따라서 역사가 기록되었다.오바댜는 구속사의 안경을 쓰고 역사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법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는지에 추상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행동을 통해서 알고 있다.왜 종말론이 필요한가히틀러의 선전가 요제프 괴벨스는 “세상을 향해서 첫마디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옳다”라고 선언했다. 나치 정권에 대한 역사의 판단은 그가 틀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건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 단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마지막 말이 있다.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잘 알고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진 신앙은 종말론적이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있다. 이 소망이 없이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암울한 게 현실이 아닌가. 오바댜는 힘든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그날”이라는 표현은 11-14절에 여덟 번 나오며, 항상 부정적인 의미, 즉 환난, 재난, 불행의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15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느니라”라는 종말론적 소망이 터져 나온다. 그날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아직’이 마침내 ‘지금’과 ‘드디어’가 되는 날이다. 모든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끝끝내 모든 잘못이 바로잡힐 것이다. 큰 불행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바댜는 다가올 하나님의 공의로 그들을 격려하고 싶어한다. 에돔이 행한 불의함은 그에게 고스란히 다시 닥칠 것이다(15절). 모든 빚은 청산되고, 모든 계좌는 정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제대로 다루시지 않는다면, 천국조차도 지옥이 될 것이다. 과거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정의를 갈망한다. “그때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 계셨는가?”라고 울부짖을 때마다, 사실상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요청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심판은 필요하고 옳은 일이다. 그날이야말로 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정이 다다른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바댜가 약속하는 게 단지 하나님의 보복적인 정의만은 아니다. 그는 회복을 예언한다. 이 책의 마지막 세 구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역사적인 국경에 도달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겠다고 약속하신다. (포로 생활 중인 난민들에게 이 얼마나 감미로운 메시지인가!) 애초에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일부이기에 사실상 하나님은 지금 자신이 했던 그 언약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다. 골고다 이후를 사는 우리는 이 회복이 단지 땅 문제에 그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온 땅을 덮을 것이다(합 2:14).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될 것이다. 주여, 제발 그의 나라가 하루빨리 임하게 하소서(옵 1:21).하나님의 통치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모든 잘못은 바로잡히고, 지상에는 평화가 임할 것이다. 인신매매, 인종차별, 그리고 살인이 마침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침내 역사를 애초에 목적하신 대로 마무리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필요한가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불의를 저지르면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부터 바로잡혀야 한다. 오바댜서를 겉핥기로 읽는 경우에 마치 세상이 단순하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예언의 메시지가 은혜라기보다는 카르마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벨사살이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그릇으로 술을 마셨던 것처럼(단 5:3), 에돔의 죄는 하나님의 성산에서 술을 마심으로 성전을 더럽힌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과 열방은 계속해서 술을 마실 것이다(옵 1:16). 뭘 마신다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 그 포도주는, 물을 섞어서 묽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부어 넣은 것이다”(계 14:10).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엡 2:3). 유다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그들을 약탈하기 위해 바벨론을 보내셨다. 그 결과 어느 이스라엘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포도주를 먹여 비틀거리게 하셨습니다”(시 60:3)라며 한탄했다.그러나 이스라엘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새날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너의 손에서, 비틀거리게 하는 그 잔 곧 나의 진노의 잔을 거두었으니, 다시는 네가 그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사 51:22). 이런 현실이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것이며, 그의 나라는 불완전하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댜는 단지 심판(16절)이 아니라 “시온산에 구원이 있으리라”(17절)고 말한다. 어떻게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와 변함없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만나기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진노의 잔을 우리 손에서 거두어 그의 아들에게 마시게 하셨다(막 14:36).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길에서 돌이켜 예수님께로 돌아오면 더 이상 진노의 잔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따라서 종말론이 주는 소망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반드시 우리의 죄를 벌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제사장으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로 하여금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시게 하셨다. 원제: We Need Obadia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왜 서울 2024인가?
by David Bennett
2024-01-13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2024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대한민국 서울에서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제4차 로잔대회(일명 서울 2024 대회)가 개최된다. 이 중요한 모임과 이 모임에 이르기까지, 그 이후에도 계속될 다년간의 다중심적인 로잔4(L4) 여정의 목적은 예수님의 지상대위임령 성취를 위한 협력적 행동을 가속하는 데 있다.도전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마 28:19-20)는 사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 인구 중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30퍼센트를 웃도는 수준에 머물렀다.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말씀을 증언할 그리스도인들은 부족하다. 도처에 제자를 양육할 수 있는 교회가 없는 사람들, 장소들이 있다. 수많은 교회와 일터의 분야에서 시대를 이해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회 곳곳의 영역에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이 절실히 필요하다.지상대위임령은 총체적이고 포괄적이며, 로잔운동이 추구하는 세계 선교는 가정, 직장, 지역 사회, 사회 전반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모든 공동체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표로 한다.세계 교회에는 진정으로 포괄적이며, 조율된 그리고 협력적인 세계 선교가 부족하다.우리는 전 세계 교회가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한 국가, 한 민족, 한 교파 혹은 문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하지만, 한 몸된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 지역적 차원에서도 이 사명을 향한 진전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4년 전 로잔운동의 지도층은 이를 염두에 두고 네 번째 국제대회를 소집하고, 이 대회까지 이어지는 다년간의 과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현재 격차가 존재하는 곳과 새로운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파악하기 위한 여정을 전 세계, 또 각 지역에서 계속해 왔다.우리는 세계 각지에서 현재 격차가 존재하는 곳과 새로운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곳을 파악하기 위한 여정을 계속해 왔다. 또한 가장 큰 도전 과제와 가장 눈에 띄는 기회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획기적인 혁신과 고무적인 돌파구가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도 노력해 왔다. 우리는 협업을 통해 함께 일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지속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경험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청하고, 모으고, 배우며 함께 행동하는 여정을 계속 이어 나가고자 한다.우리는 현존하는 격차를 해소하고 현재의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현장에서 기능할 수 있는 협업 이니셔티브(Initiatives)와 협업 행동팀(Collaborative Action Teams)이 속히 진행되기를 바란다. 이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삼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목표로 삼을 것이다.경청의 과정지난 3년 동안 로잔운동은 전 세계 다양한 계층을 초청하여 5가지 질문에 대한 답에 경청하는 과정을 가졌다:1.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격차 혹은 남아있는 기회는 무엇인가?2.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가속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돌파구 또는 혁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3.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해 어떤 분야에서의 협력이 가장 중요한가?4. 어떤 분야의 연구가 더 필요한가?5. 우리는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분별하고 2050년 세계 선교의 최전선에서 일할 차세대 리더를 준비하기 위해 글로벌 공청회를 주최하고, 세계 및 지역 모임을 통해 경청에 참여하고, 포커스 그룹을 개최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선교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왔다.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추가적으로 우리는 전 세계 100명 이상의 연구진으로 구성된 팀에게 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의뢰했다. 이 보고서에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기 위한 우리의 세계적 노력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발전 요소와 가장 관련성이 높은 동향이 담겨있다. 지상대위임령 현황 보고서는 2024 서울 대회 몇 달 전에 발표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제4차 대회의 모든 참가자들이 현재의 세계 상황과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이슈, 각 지역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서울 선언문우리가 말하는 격차 중 일부를 위해서는 전략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부 격차는 성서적 그리고 신학적 이해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신학위원회 역시 로잔의 세 가지 기본 문서, 즉 로잔언약, 마닐라 선언문 그리고 케이프타운 서약에 기반한 서울 선언문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서울 선언문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재확인하고 성서적 통찰력, 명령, 그리고 우리 시대에 대한 의미를 강조할 것이다.2024 서울 대회는 이러한 다년간 경청 과정의 정점이자, 현재까지 확인된 격차와 기회를 모두 다루기 위한 협력적인 행동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서울 2024는 전 세계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보여줄 기회이다.처음 세 차례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대회는 1974년 스위스 로잔; 1989년 필리핀 마닐라; 그리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되었다. 앞선 세 대회의 토대 위에 세워진 이번 서울 대회는 5,000명의 현장 참가자와 5,000명의 온라인 참가자가 모여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의 선교에 영향을 미치는 남녀가 ‘현세대에 단 한 번’ 함께 모이는 기회가 될 것이다. 참가자는 젊은, 노년 세대를 모두 포함하며, 일터는 물론 교회와 선교 관련 직업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를 대표할 것이다. 로잔의 한 리더는 서울 2024를 ‘사일로(silos)의 혼합’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파트너십이 탄생하며, 새로운 협업 행동팀이 출범할 것으로 기대한다. 대회 시작 전 준비 과정과 주제 강연, 테이블 그룹 대화, 그리고 오후에 진행되는 다양한 분과 세션을 통해 참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참가자들이 지역 및 세계 차원에서 다른 참가자들과 협력하여 우리 앞에 놓인 가장 시급한 필요와 격차, 전략적 기회를 다룰 기회를 허락하실 것을 믿는다.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각 지체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 몸으로 지어졌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모임을 통해 우리는 전 세계 그리스도의 몸이 서로에게서 배우고 서로의 자원을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서울 2024는 지상대위임령의 성취를 위한 협력적 행동에 속도를 붙일 것이다.양극화되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세계 교회가 가장 주된 사명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양극화되고 분열된 세상 속에서 세계 교회가 가장 주된 사명을 기억하고, 삶의 모든 영역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주권을 선포하고 드러내며, 도움이 필요한 혼란스러운 바다에서 희망과 방향의 등대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 로잔은 네 가지 비전이 함께하는 여정에서 세계 교회를 선도해 왔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 모든 사람과 지역을 위해 제자 삼는 교회• 모든 교회와 사회 부문을 위한 그리스도를 닮은 지도자•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미치는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협업 행동을 위한 헌신이 여정 동안 우리는 예루살렘을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 틈새를 성벽과 성문의 재건을 통해 메꾸는 느헤미야의 소명을 떠올렸다. 느헤미야 4:6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렀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하였음이니라.’ 느헤미야 3장에 묘사된 것처럼, 이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일부는 개인으로, 일부는 팀으로 참여했다. 이 모두는 서로 협력하고 서로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느헤미야가 이스라엘을 한데 모아 성벽을 재건한 것처럼, 로잔운동은 2024년 대회를 필두로 출범할 ‘협업행동팀’이라는 이니셔티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전 세계 교회를 하나로 연합하고자 한다. 로잔은 이 팀을 통해 전략적 협력과 세계 자원의 공유를 촉발하는 연결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업무 중복과 자원 낭비를 초래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일로를 극복하고자 한다.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은 전 세계 수천 개의 단체가 함께 협력 행동을 약속하는 ‘협업 행동을 위한 헌신’에 함께하는 것이다.어언 50년 동안 로잔운동은 세계 선교를 가속하는 데 힘써왔다. 우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협업행동이 계속해서 가속화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이 땅 모든 나라의 신자들과 함께 ‘교회가 함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선포하자’라고 외치기를 소망한다.원제: Why Seoul 2024?출처: lausanne.org
해체가 탈회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by Jesse Furey
2024-01-12
“아직도 예수를 믿기는 해. 하지만 나 자신을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고는 부를 수는 없어.” 오랜 친구가 이렇게 말하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충격에 나는 거의 커피를 뱉을 뻔했다. “그러면 안 돼!”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힘들게 참았다. 그날 나는 친구가 “교회”에 느끼는 좌절감을, 그리고 신앙을 해체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더듬거리듯 그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대학 도시에서 목회를 하는 나는 점점 더 자주 이런 대화를 나눈다. 신앙 여정에서 해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이전 세대에게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표현이 특징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교회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신앙과 배교를 가르는 미지의 영역이 이제는 활짝 열린 상태이다. 친구와 나눴던 그 대화를 되돌아보면, 그때 내가 그가 다시 정통 신앙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될 책을 소개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런 측면에서 션 맥도웰과 존 메리어트가 쓴 표류: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믿는 바를 해체하기는 참으로 소중한 자원이다. Set Adrift: Deconstructing What You Believe Without Sinking Your FaithSEAN MCDOWELL AND JOHN MARRIOTT기독교의 비본질적인 측면을 제거함으로 이 책은 많은 사람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질문과 문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당신은 역사상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정의하는 데에 있어서 모두 다 똑같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각 장은 진정으로 기독교적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세상과 동떨어지지 않은 신앙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분석하고, 다시 생각하고, 나아가서 재조립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한다. ZONDERVAN. 192 PP.의심의 안개 이 책의 표지는 짙은 안개가 밀려오는 바다에서 누군가 패들보드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시각적 기준점을 잃는 순간, 방향 감각을 잃게 될 것은 뻔하다. 그렇다면 바다에 휩쓸려 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움직이지 말아야 할까? 앞으로 노를 젓는다면, 그게 안전한 곳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도리어 더 큰 위험을 향해 가는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해체 과정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의심의 짙은 안개가 낀 바다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낀다. 안개는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정치적일 수도 있다: 아니, 어떻게 우리 교회의 그 많은 교인이 저 사람에게 투표했다는 거야? 또는 신학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영원한 저주를 주기로 예정한 사람들이 있다고? 아니면 윤리적 문제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세상에 왜 이리 고통과 악이 만연할까? 그리고 많은 경우에 안개는 개인적 이유로 발생한다: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의심의 원인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표류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들의 방향을 잡아줄 무언가와 그 길을 따라가는 데 도움을 주는 안내자이다. 이 책은 바이올라 출신의 두 사람, 기독교 변증학 부교수 맥도웰과 기독교 사상 센터 소장 메리어트가 힘을 합쳐서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안내판을 제공하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이다. 해체 재정의하기표류는 해체의 철학적 측면이나 문화 현상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저자들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시작한 철학적, 문학적 운동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며 해체의 기술적 의미를 고려하는 데에는 고작 몇 페이지를 할애할 뿐이다. 자신의 신앙을 재평가하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데리다가 누군지도 모르며, 맥도웰과 메리어트는 기독교가 억압적이거나 편협하기에 해체를 시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해체 과정에서 종종 듣는 말은 이런 식이다. 표류는 해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수를 따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받은 믿음이 애초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완전히 정제된 선인지 여부를 의심하기 때문에 생기는 분석 과정으로서 찌꺼끼를 걸러냄으로 가장 소중한 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정의이다. 예를 들어, 알리사 차일더스는 “해체”라는 용어가 가진 광범위한 의미 속에는 “순진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위험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들일 가능성이 있는 무엇”으로 정의할 여지가 있기에, 애초에 “해체”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또 다른 선택은 성경에 따라 신앙을 정제하는 과정으로서 ‘탈문화화’(disenculturation)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해체’와 같은 용어가 주는 부담에서 피하려는 시도이다. 표류는 일단 해체를 긍정적인 의미로 채우려는 선택을 반영한다. 어떤 용어를 사용하든 저자는 정직한 질문자가 의심을 극복하고 정통 기독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를 희망한다. 잘 해체하기두 저자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순전한” 기독교를 해체 과정의 경계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지구의 나이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 및 천년 왕국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 서로 간에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권위가 우리의 “경험, 직관, 문화 또는 다른 것”에 위치한다는 진보적 관점에 맞서서, 성경적 권위에 대한 역사적 교리를 옹호하는 데 한 장을 할애한다. 일부 교리에 대해서는 건전한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그러한 토론조차도 성경의 권위라는 경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건전한 해체를 위해서는 단지 교리에 대한 신실함을 넘어서 사회적 상상까지도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인지적으로는 어떤 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지만, 느낌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저자는 “모든 사회적 상상에는 (일반적인) 세상과 (특정한) 개인이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무언의 비전이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이 책이 특히 탁월하게 이바지하는 부분은 해체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사회적 상상과 교리 사이의 갈등을 인식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다양한 해체의 단계에 있는 여러 친구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개인마다 가진 사회적 상상 사이의 격차는 메울 수 없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종종 오해와 좌절로 이어졌다. 이 책이 정확하게 지적하는 지점은 바로 개인마다 가진 근본적인 가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수록 그 가정에 의해 통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혼자 표류하지 말라표류는 해체의 초기에 있는 사람에게 특히 유용하다. 이 책은 해체자들을 평가 대상의 표본으로 다루기보다는 여행을 떠나는 순례자로 다룬다. 개인별 독서뿐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함께 읽고 토론하기에도 좋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더불어 사는 삶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불확실하고 낙담할 때일수록 더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진리를 믿지 않는 상태에서 그 사람은 결코 스스로를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말씀을 전달하고 선포하는 다른 형제이다.” 사역자라면 의심의 안개 속에서 표류 중이라며 고백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손에 이 책을 한 권씩 들고 있어야 한다. 원제: Don’t Let Deconstruction Become Deconvers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샬롬! 아름다운 도시여
by 서나영
2024-01-11
나는 매일 아침 도시 안 오래된 아파트숲 속 좁은 공간에서 눈을 뜬다. 이 도시는 한민족이 역사를 지나며 일군 ‘한강의 기적’을 자랑하는 땅이자, 기술 산업의 눈부신 발전과 문화강국의 주역을 이룬 공간이다. 세계 1위를 자랑하는 인터넷 속도로 손가락 터치 한 번에 음식과 생필품이 배달되고, 식료품은 신선함을 위해 새벽 배송을 고집하는 편리한 도시다. 저명한 미국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의 저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이 세계가 낳은 가장 중요한 불행과 불의 세 가지 중에 “추한 도시”를 언급했다. 그는 공간의 중요성을 모르는 세대에 탄식하며 “도시의 미학”에 무관심한 세대를 불행한 세대로 보았다. 물리적 실재, 즉 이 땅과 자연과 우리의 실재 공간 속에 내재한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는 것인데, 온전한 샬롬을 위해서는 “기쁨과 희락”의 요소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쁨”은 감각의 아름다움에서 오는데, 그 감각은 오늘날 모던한 세련미나 최첨단 기술로부터 느껴지는 편리한 느낌이 아닌, 칼뱅이 말했던 절제된 우아함이 있던 인간 생활 방식과 장소의 아름다움이라고 독자들을 설득한다.그러나 과연 이 시대는 말과 마차가 다니던 17세기의 암스테르담을 그리워하는 학자를 이해할 수 있을까? 말의 배설물이 풍기는 냄새와 여러 불편함은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기쁨은 대단했다고, 강철과 유리로 지어진 현대 건축술과 자동차 중심의 도시 건설로 인해 도시가 한껏 추해졌다고 확신하는 위대한 철학자의 미학관에 대해 말이다.현재 몸담고 있는 도시의 추함에 대해 묵상하자면 끝이 없이 써내려갈 수 있다. 홍수 때마다 사상자가 나오는 반지하의 가난한 삶들, 배달의 민족이라는 훈장 뒤에 하루가 멀다하고 듣는 배달기사들의 불의한 사고들,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가족이 생을 마감하는 뉴스들, 믿지 못할 청년 실업률 및 자살률, 그로 인한 미혼율과 저출산 문제, 세계 최고를 찍은 노인 불행 지수와 자살률 등등, 이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도시의 아픈 자식들이다.고도로 발달된 이 도시에서 이런 추함의 현상을 미학과 연결해 본다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살게 하는 형식과 관련 있을 것이다. 도시가 가진 형식과 인간의 삶은 직결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남긴 말을 재해석하자면, 도시의 미학이 중요한 이유는 거주민들이 잘 살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생활방식을 표현하는 방식을 넘어, 생활방식을 이끌고 가며 주도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월터스토프가 말한 “도시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지각할 수 있는 재료에 심겨진 가치”이며 하나의 예술적 건축물처럼 “합리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도시의 샬롬을 미학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어떤 기준의 미학관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기 때문이다. 샬롬을 ‘기쁘고 행복하며 질서정연함 속에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이해할 때, 내가 밟고 있는 공간의 미학을 어떻게 기준할 것인가? 그 기준을 탁월한 예술과 일치되는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둘 것인가? 이미 많은 도시가 심미적 즐거움을 위해 설치예술을 통해 환경예술, 대지예술 등등의 새로운 용어가 생긴 지 오래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추함으로 인해 도시의 아름다움을 갈구한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계몽주의 이전 시대, 즉 기계화 되기 전의 자연과 친밀하고 자동차가 아닌 인간 중심으로 설계된 좁은 도로에서 볼 수 있는 고즈넉한 아름다움에 둘 것인가? 성경 속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려 입성하신 예루살렘은 기술의 발전을 찾아볼 수 없는 말과 나귀가 다니는 자연과 친밀한 도시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도시를 보시자 마자 통탄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부재가 도시의 불행임을 암시하신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도시가 눈에 들어오자, 예수께서 그 도시를 보고 우셨다. “네게 유익한 모든 것을 오는 네가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앞으로 네 원수들이 포병대를 몰고 와서 너를 포위하고 사방에서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들이 너와 네 아이들을 바닥에 메어칠 것이다. 돌 하나도 그대로 남지 않을 것이다. 이 모두가, 너를 직접 찾아오신 하나님을 네가 알아보지도 않고 맞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눅 19:41-44).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도시와 연관된 공간미학의 고민은 정확히 성경적 고민이기도 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목적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도시 속에서 이루어져 가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운명은 에덴동산과 같이 대자연과의 화합과 일치를 고집하는 무릉도원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꿈꾸게 되는 “새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삶이다(계 3:12, 21:10). 이는 타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복음의 특징이기도 하다. 완전하고 새로운 기쁨의 도시에 사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다.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새예루살렘 도시는 그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을” 뿐 아니라 벽옥으로 된 성곽으로 둘러싸였고, 정금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에서 새 몸을 가지고 왕이신 하나님과 함께 그의 백성으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요한계시록 21장). 성경은 주의 백성이 마침내 아름다움과 삶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원래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으로 진짜 삶을 살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그곳이 ‘샬롬의 도시 그 자체’일 수 있는 이유는 보석과 정금 때문이 아니다. 인격적 생활방식 때문만도 아니다. 샬롬의 진짜 이유는 보좌에 앉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의 왕 되시고 그의 백성과 친히 함께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복할 뿐 아니라 찬양하고 감탄하며 경외하는 삶의 연속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 때문이다. 팀 켈러 목사의 역작 센터처치에서 강조하는 ‘도시 사역’에 관한 설명은, 철저하게 도시의 샬롬을 이루는 사역적 비전을 세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 샬롬의 기준은 ‘복음’이며, 이 ‘복음’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부터 죽음과 부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이 땅 가운데 이뤄지는 능력의 이름이며, 모든 추함을 구원할 유일한 이름이다. 모든 문화와 언어의 상상력으로 끊임없이 재발견 되어야 하는 이름이며, 끝도 없이 아름답고 정확하게 설명되어야 하는 이름이다.신이 없이도 잘살 수 있는 최첨단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인 도시에서, 하나님을 뺀 온갖 인본주의적 선과 정의를 부르짖는 도시에서, 인간을 이용하고 등급을 매겨 비인격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세련됨이라고 착각하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추함을 예언한 학자들의 미학관을 답습하고 다음세대에 가르쳐야 하는가? 아니면 도시 속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회피하고 숨어서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만 하는가?나의 경우에는,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지만, 도무지 칼뱅의 주장대로 평생 시편가만을 부르고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시편가는 음악 안의 클라이막스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고 그로 인한 감정의 고양을 방지한 밋밋한 선율 위에 부르는 다윗의 시편이다. 칼뱅이 그렇게 경계하고 금지했던 수많은 신앙고백의 찬송과 아름다운 음악들이 귀에 즐겁고 마음에 감동을 준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어도 나는 이미 칼뱅의 예배음악관에 동의할 수 있는 정서를 갖기엔 글렀다. 그렇지만 칼뱅이 삶으로 말했던 미학관 이면의 진지하고 엄격했던 자세는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마음을 다해 배우고 싶다. 편리함이라는 우상, 화려함과 인기를 갈망하는 우상, 많음과 큰 것에 최고가치를 두는 온갖 우상으로부터 미혹되고 싶지 않다. 날아가는 새를 포착해 정교하게 그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말씀 안에 진지했던 그 미학관으로 세상을 포착해 정확하게 분별해서 읽고 싶다. 그것이 팀켈러 목사가 말한 ‘문화적 상황화’의 이상이자 목표가 아닐까 생각한다.최근 신도시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지인을 만나 나눈 대화 중 중요했던 주제는 다름아닌 “교회의 주차장 크기”였다. 한 대형교회가 그 신도시에 지교회를 세우며 범접할 수 없는 크기의 편리한 주차장을 건설했고, 많은 사람들이 단시간에 몰려 수적으로 부흥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흥의 이유가 단지 최고시설의 주차장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실제로 교회를 정할 때 주차장의 편리함이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는 소문이 실재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율법 속 제사를 폐하시고 “영과 진리로”(요 4:23) 예배하라고 새롭게 명하셨지만, 한번도 편리한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적이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도시가 주는 형식 안에서 그저 도시가 추구하는 기준대로 살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그 심각성은 크다. 오늘의 도시가 섬기는 신은 힘과 권력이고, 돈과 개인의 이기적 안위이며, 화려함과 인기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말한, 땅에서 올라온 미혹하게 하는 짐승(계 13:11)과 같이 새끼양처럼 두 뿔을 가져 어린양 그리스도와 비슷한 선한 차림을 한 ‘거짓의 영’일 것이다. 미혹 당하는 자는 지식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의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이 잘살아 보자는 도시의 슬로건에서, ‘오직 예수’라고 외치면 무식하고도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 오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아름다운 도시에 대한 꿈을 꿔야 한다. 도시에 기쁨과 샬롬이 임하는 비전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각자의 도시에서 그렇게 살도록 연습해야 한다. 절대적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다. 도시 속에서 그 기준을 고집하는 것이 힘들어도 반드시 최우선으로 바꿔야 하며, 매일매일 흐트러져도 그 아름다움의 기준을 재정렬해야 한다.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불행이며 빈곤일 수밖에 없다”는 월터스토프의 말은 교회가 꼭 기억해야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각자 밟고 서 있는 도시 속 한 평이라도 변혁하려고 애쓰는 우리의 모든 노력과 기도와 방향은, 단지 평화와 공의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왕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미리 닦고 예비하며 보수하는 일이다. 복음의 길을 닦는 일이다. ‘복음의 도시’를 이룩할 그날까지, 용기 내며 걷는 작은 한 걸음의 2024년이 되기를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더 깊이 들어가야 길을 잃지 않는다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우리 신앙의 정체성과 귀속성
by 김선일
2024-01-10
선교한국의 희망을 찾아서 종교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우선 한국의 3대 종교인 개신교, 불교, 천주교 모두에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이 가장 높다. 이는 우리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지난 2023년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마음의 평안을 신앙생활의 이유로 꼽은 개신교인들은 42퍼센트로 나왔는데, 이전 조사들(2017년, 2012년)의 37-38퍼센트에 비해서 유의미하게 높아진 수치이다. 반면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개신교인들은 42.5퍼센트에서 35.9퍼센트로 많이 떨어졌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신도들과의 친교를 위해서’라는 응답이 종전의 1퍼센트대에서 2023년 조사에서는 6.5퍼센트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교제를 위해서 종교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조짐이지만, 이는 그만큼 현대인의 외로움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구원과 영생이라는 신앙의 핵심적 목표보다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응답이 더욱 높아진 것은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점검하게 한다. 그런데 다른 종교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정체성과 귀속성은 더욱 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신앙을 갖는다는 응답이 천주교의 경우에는 73.4퍼센트, 그리고 불교에서는 68.9퍼센트가 나왔으니 개신교(42%)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라는 답을 택한 이들도 개신교 35.9퍼센트인데 반해, 불교는 2.7퍼센트, 천주교는 7.2퍼센트로 현저히 낮다. 구원과 영생이 불교도에게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에 선택지로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건강, 재물, 성공 등의 ‘현실적 복을 받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12.2퍼센트로 나와서 개신교(6.1%), 가톨릭(5.9%)보다 두 배 이상 높다(한목협, 한국 기독교 분석 리포트: 2023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67).같은 뿌리의 종교라 할 수 있는 개신교와 천주교 간 비교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드러난다. 구원의 확신 여부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인은 66.9퍼센트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천주교인은 47.7퍼센트로 큰 차이를 보여줬다. 이는 지난 2017년 조사에서 천주교인들 가운데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이 68.8퍼센트였던 것에 비해서 대폭 낮아진 것이다. 그전에도 천주교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응답한 이들이 60퍼센트 중반대였으나 이번 조사에서 크게 하락한 것이다. 개신교인들은 그동안 천주교인들과 비슷한 비율로 구원의 확신 여부에 대해 긍정응답을 해오다가 이번에는 큰 차이로 앞서 것이다(한목협, 75).자기 신앙의 정도를 묻는 질문에서도 네 가지 신앙단계, 즉 기독교 입문층, 그리스도 인지층, 그리스도 친밀층, 그리스도 중심층의 네 단계 중에서 천주교는 개신교에 비해서 초보 단계인 기독교 입문층(50.1% 대 31.8%)과 그리스도 인지층(35.7% 대 27.5%)에 더 많은 신도가 분포하는 반면, 개신교인은 천주교인에 비해 더욱 성숙된 단계인 그리스도 친밀층(28% 대 12.6%)과 그리스도 중심층(12.6% 대 1.6%)에서 더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한목협, 79). 이는 개신교인들이 유사 종교인 천주교인들에 비해서 신앙의 정체성과 귀속성에서 더욱 적극적임을 시사한다.종교의 교리에 대한 인식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온다. 주요 교리에 대한 입장을 보면, 개신교인들은 종말론에 대해 50퍼센트만 믿고, 종교다원론을 믿는 사람이 31.8퍼센트, 유일신 신앙을 믿는 이들은 62.9퍼센트로 나왔다. 이러한 수치는 일단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교리적 신앙이 점점 약화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종교와 비교하면 이러한 현상은 비단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불교인의 경우에는 가장 대표적인 교리로 알려진 윤회설을 믿는 이들이 21.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다소 충격적이게도, 개신교인들 중에서 12.5퍼센트, 천주교인 중에서 15.8퍼센트가 윤회설을 믿는다고 대답해서 불교인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내세와 영생의 신앙이 혼합된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개신교인들의 66.2퍼센트가 믿는데, 2017년 대비 8.9퍼센트포인트 하락했다(한목협, 82-83) 이러한 결과들을 통해서 우리는 선교한국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우선, 기독교가 여전히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신앙의 목적, 교리에 대한 믿음, 신앙의 활동성에 있어서 더욱 적극적이라는 점은 청신호다. 한국 교회가 아무리 대외적 신뢰도와 이미지가 낮다고 하지만, 교인들이 무기력하거나 퇴조된 신앙생활에 빠져있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설령 습관적이라 할지라도 규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인생에서 신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이 점은 한국 기독교의 자산이다. 타종교와 비교되는 부정적 이미지로 교회가 위축될 필요까진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신앙의 잠재적 활동성을 담아내고 분발시킬 신앙의 방향과 공동체가 정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기독교의 상대적으로 견고한 신앙 정체성과 귀속성이라는 자산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까? 최근 선교적 교회 운동에 가장 큰 영감을 준 고 레슬리 뉴비긴이 서구 기독교의 쇠퇴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신앙의 역사성과 공공성을 잊어버리고 복음에 대한 고유한 자신감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 힌두교 친구가 기독교에 대해서 지적한 바를 회고한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성경을 읽어 보니, 거기에는 우주 역사에 대한 아주 독특한 해석과 더불어 인간을 역사의 책임 있는 행위자로 보는 독특한 이해가 담겨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당신네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또 하나의 종교 경전인 것처럼 이야기한단 말이야. 우리 인도에는 그런 유의 종교 서적이 이미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또 하나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75).뉴비긴은 이교도의 이러한 지적을 상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인류 역사의 실마리를 푸는 거대한 이야기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공적인 영역에서도 진리임을 확신하고 증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도 기독교 신앙의 효력이 내면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용도로, 또는 개인의 문제 해결, 혹은 기껏해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불안에 정신 승리를 제공하는 내세주의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개인적인 효용성에 머무는 복음은 온전한 변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세대에서 세대로 지속가능할 수 없음은 서구 기독교의 쇠퇴가 보여줬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상대적으로 강한 신앙적 정체성과 귀속성은 그 자체로 선교한국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산이다. 그러나 이 신앙의 성격이 더욱 역사적이고, 공공적이어야 하며, 특정 이데올로기나 문화적 패러다임에 끌려다니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지녀야 한다. 유한한 인간은 더 큰 세계와 이야기 안에서 비로소 존재와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그 큰 이야기는 오직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발견된다. 신앙의 지경을 넓히는 과제는 선교한국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기초 작업이 될 것이다. 오랜 경험의 한 산악구조 전문가는 왜 등산객들이 산에서 조난을 당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한 바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충분히 깊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등산객들이 산속으로 너무 깊이 갔기 때문에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달랐다. “사람들이 더 많이 가야 길이나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자기들의 불안함과 짧은 생각으로 중간에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의 부흥과 회복은 대외적 이미지를 재고하고 외형적 신뢰를 얻기 위한 제스처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복음의 하드코어로 더 깊이 들어가서 전인격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복음적 갱신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다.
나는 내 트랜스젠더 아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by 익명
2024-01-09
예수님은 가족의 갈등을 십자가 지는 것과 연결한다(눅 14:26-27). 나는 이 가르침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우리 큰아들과 나, 그리고 아내 및 다른 가족 사이에서 일종의 죽음이 일어나는 일이다. 아들은 어릴 때만 해도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나는 물론이고 교회의 다양한 지체들과도 신앙 대화를 꾸준하게 나눴다. 우리 부부는 가정에서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쳤다. 따라서 작년에 성 혐오증에 빠진 아들이 자신이 행여 트랜스젠더가 아닌가를 놓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는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채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열여덟 살 된 아들은 자신이 트랜스젠더라고 믿었고, 동시에 LGBT+ 정체성이 성경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왜입니까? 우리 부부는 물밀듯 몰려오는 질문들과 싸워야 했다. 도대체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왜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건데? 아들이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도대체 뭔지를 찾고 또 찾았지만, 우리가 발견한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옛 친구 하나가 코로나 시절에 내 아들의 삶에 스며들었고, 둘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다양한 LGBT+ 공동체를 거친 사람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가르쳤는데, 거기에는 친구를 향해서 사랑과 관심을 쏟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내 아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은 몇몇 다른 사람들이 LGBT+ 생활 방식도 얼마든지 기독교와 일치할 수 있다고 아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현재 모든 LGBT+ 정체성이 기독교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 아들지만, 그는 현재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가 좋지 않음을 인정한다. 우리 부부는 아들이 진정한 신자라면 그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갈 5:19-21; 고전 6:9-10). 아들이 동성애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와 순종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아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결정을 내린 이후로, 나는 LGBT+ 정체성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모든 잠재 요인과 원인에 대한 책을 읽었다. 정말로 내적 또는 외적 끌림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주님께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함을 갈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주님의 주권에 항복함을 의미한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내 아들과 내 가족을 위한 가장 좋은 대답은 언제나 예수님이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한다고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실제로 이 고백을 삶에서 실천하는 건 어렵기만 한다. 아들을 사랑하기동성애를 선언하고 몇 달 동안 아들은 대부분 폐쇄적인 시간을 보냈고 우리조차도 적대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에 대한 확신이 커짐에 따라 조금씩 주변을 향해서 마음을 열었다. 오늘날 그는 다정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예를 들어, 마침내 아들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호칭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선가 자신이 선호하는 이름과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서 그는 우리가 부모로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막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육신의 존귀함을 무시하는 성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하나님,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어느 날 대화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이름과 대명사를 사용할 수 없다는 우리 말에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가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할 수 없어요.” 그날 아들은 방으로 가서 통곡하며 울었다. 나와 아내도 무력감을 느끼며 울었다. 물론, 그가 원하는 이름과 대명사로 부르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아들이 기뻐하는 방식으로 같이 기뻐하는 게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이렇게까지 힘든 순간을 맞으면, 아무리 신앙을 굳건히 갖는다고 해도 아들이 요구하는 변화가 결국에는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에도 해를 끼칠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는 게 쉽지 않다. 심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 아들은 작년 크리스마스 휴가 내내 응급실로 실려 가야 했다.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암울한 크리스마스였던 그 시간은 몇 달이 되었고, 그 기간 내내 우리는 행여라도 자살한 아들을 방에서 보는 게 아닐까 마음 졸여야만 했다. 우리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왜 우리는 아들을 다시 정상으로 만들 수 없는 걸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아들은 우리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그가 몰랐던 게 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도 그는 제대로 몰랐다. 누가복음 14:26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녀를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건 문자 그대로의 미움이 아니다. 성경에는 자녀를 기뻐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선한 명령으로 가득하다(신 4:9; 잠 17:6; 사 49:15-16; 말 4:6; 골 3:21; 엡 6:1-4). 예수님은 여기에 반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예수님이 강조하는 게 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할 때 치러야 하는 희생의 정도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가족, 심지어 당신의 자녀에게도 증오로 보일 수도 있다.우리 부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건 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들을 사랑하기에 우리는 항상 아들이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의 죄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리는 도무지 “악을 기뻐할 수” 없다. 비록 우리의 사랑이 아들에게는 미움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진리를 기뻐해야만” 한다(고린도전서 13장).우리 부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우리 자신을 향해서 죽어야만 한다. 1.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인생을 충만하게 살도록 하는 유일한 길이다.2.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아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줄 수 있다.3.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이 더 큰 삶과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다.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한다. 이건 부모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처음부터 정해진 패턴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다. 그건 부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오로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만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이 험난한 물살을 헤쳐나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은혜밖에 없음을 쉬지 않고 확증한다. 아들의 어려움은 우리가 예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로지 우리 구주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부활의 생명으로 꽃피운 유일한 죽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건 예수님 자신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이자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며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본다면, 영적으로 장님이 된 아들로 인한 나의 계속되는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받고 싶은 것을 받으면서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죽음을 낭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원제: I Love My Transgender Child. I Love Jesus Mor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주시는 시련보다 크다
by Abigail Dodds
2024-01-08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시험을 주시지 않는다.” 오래되고 진부한 이 말이 나를 조롱했다. 나는 살면서 하나님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주신 게 분명하다고 여러 번 느꼈다. 생명을 위협하는 발작으로 인해 임사 체험까지 한 아들을 둔 사람에게, ‘그건 당신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입니다’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는 또 어떤가? 무력함? 만성통증? 어쩌면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나쁜 시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모든 상황을 견디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그 상황을 헤쳐 나가려고 노력할 뿐이다. 하지만 옆방에서 구급대원들이 발작하는 아들을 치료하는 동안 땀에 젖어 기절한 채 욕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나를 생각하면, 그건 도무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가 없다. 사자와 우리의 한계“갤럽, 브리, 뛰어. 너희는 군마라는 사실을 기억해”(The Horse and His Boy, 270). 자신의 조국 칼로르멘의 악을 피해 도망친 어린 공주 아라비스는 말하는 말 브리에게 적들로부터 최대한 빨리 도망가라고 재촉했다. C. 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 7권 중 하나인 말과 소년(A Horse and His Boy)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리와 친구 흐윈(Hwin)은 각자 나름 생각하기에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거 같다. “확실히 두 말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루이스는 그리고 이렇게 지적한다. “하지만 그 둘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말하는 두 마리의 말과 그 등에 올라탄 소년과 소녀의 필사적인 질주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공포의 정점을 향해서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그들은 칼로르멘 군인들로 이루어진 끔찍한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가까이에서는 더 위험한 적인 위대한 사자가 바로 뒤에서 포효하고 있었다.“브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지 않음을 알았다. 사실 별로 빠른 게 아니었다. 샤스터는 그 변화를 바로 느꼈다. 이제 그들은 정말로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었다”(271). 동화 속 이 단순한 장면이 지난 십 년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측면에서 내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1)어려움 속에서 나의 “한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었다. (2)어려운 시기에 나를 짓누르는 분이 누구인지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3)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짓누르기로 선택하셨는지와 관련해서도 그분의 선하심을 엿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욕실 기절 사건에 적용하기브리는 위대한 사자 아슬란을 등에 태우고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내 경우에는 위기를 맞은 아들과 필사적으로 함께하고 싶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정신을 잃었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을 잃어버린 끔찍한 생리 반응을 어떻게 사자를 등에 태우고 속도를 더 내는 브리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겉으로만 봐서는 전혀 비슷한 게 없다. 하지만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던 나는 나만의 새로운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거기 누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내 아들을 구해 달라고 간구했고, 동시에 주님을 더 믿기 위해서 내게는 새로운 변속 기어가 필요했다. 내가 매 순간 아들 곁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항상 계셨다. 나는 아들의 발작을 멈출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다. 아들이 죽는다고 내가 따라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내 아들 곁에도 계실 것이다. 브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내 생각에 괜찮다 싶을 정도만 믿음을 가졌다. 사실 그게 대단한 믿음도 아니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내가 다 감당한 것도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로 대단한 시련이 아니었다. 위대한 사자의 추격과 함께 나는 새로운 믿음의 차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당신은 알고 있는가? 당신이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상 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창조자이자 유지자가 아니기에,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당신의 한계를 결코 제대로 알 수 없다. 내 한계를 넘어서 우리는 모든 걸 다 바쳤고,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나의 한계를 제대로 시험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은 끊임없이, ‘나는 안 돼, 이건 내 한계를 넘은 거야, 이런 손해는 감당할 수 없어, 이런 시험은 말도 안 돼, 난 이런 결과를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으로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에 필요한 압력을 행사하신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9)알다시피, 고난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믿음이 우리가 원래 강인한 체질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믿음과 희망을 불어넣는 건 내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다.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는 식은땀을 흘리며 화장실 바닥에서 박박 기는 동안에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할 수 있다. 변치 않는 사랑의 길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통해서(그분을 의지함으로써)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음을 종종 보여주신다. 그리고 직관에 거슬리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단지 격려나 긍정적인 사고 또는 확언을 통해서 우리를 그 믿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니다. 브리의 경우처럼 고통과 시련을 증가시킴으로,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해서 달려나가도록 인도하신다. 브리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자, 위대한 사자는 그들과 그들을 쫓는 진정한 적들 사이의 거리를 더 벌어지게 했다. 아슬란이 그들을 겁주었지만, 결국에는 그게 다 그들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서였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느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고 선한 일에만 복종하게 하실 뿐, 필요 없는 고통은 단 한 방울도 더하지 않으실 것임을 믿는다. 하나님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일이 합력하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신다(롬 8:28-29).하나님께서 우리가 죽어라 질주하고 숨에 헐떡이도록 몰아가실 때, 그건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은혜이다. 그분은 오로지 선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는 우리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바라보라고 우리를 압박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옛 적들, 즉 세상과 육신과 마귀 사이에 거리를 두심으로써, 정말로 해를 끼치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당신이 위대한 사자의 압력을 받는다고 느낄 때 결코 잊지 말라. 그의 모든 길은 변함없는 사랑이다(시 25:10). 화장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도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원제: More Than Mom Can Bea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처음
이전
6
페이지
7
페이지
열린
8
페이지
9
페이지
1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