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ARTICELS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사역의 성공과 실패, “실패해도 괜찮아!”
by 김형익
2021-10-12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뵌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전 그 자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6:9–10).”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헌신하는 이사야를 칭찬하시며 그의 사역의 성공을 보장해주시는 대신, 도리어 그가 실패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는 보장된 실패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사역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팀 켈러는 ‘센터처치’의 프롤로그에서, 교회 내의 회심자, 등록자, 헌금 액수의 증가로 측정되는 성공, 그리고 성공이 아닌 신실함(faithfulness)을 사역을 평가하는 유일하고 참된 범주로 여기는 입장을 소개한다. 그리고 켈러는 성공이나 신실함보다 더 성경적인 기준으로 열매 맺음(fruitfulness)을 제시한다.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 이런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지게 된다. “신실함은 열매를 맺는가? 신실함과 열매 맺음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의 대답은 신실함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 열매는 즉각적이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인생의 시간 안에 결실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열매는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인 열매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나 자신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열매가 맺히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을 자만하게도 하고 좌절하게도 하는 이 열매의 문제는 좀 더 세심한 성경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 vs. 아더 핑크(1886-1952)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와 아더 핑크(Arthur Pink), 이 두 인물은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목사들이다. 로이드존스는 런던 중심가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목회를 하면서 당대 최고의 설교가로 인정받았고 생전에 그의 설교는 영국을 넘어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반면, 핑크는 30대 중반 이후 설교할 강단을 원했으나 얻지 못했고 결국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에 설교를 쓰다가 루이스 섬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했다. 훗날 핑크의 사후에 그가 ‘성경연구’에 남긴 많은 설교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삶을 부요하게 해주었다. 그의 사후에 말이다. 이 두 인물은 생전에 개인적으로 접촉한 적은 전혀 없었지만, 핑크의 ‘성경연구’의 정기구독자였던 로이드 존스는 한 영향력 있는 목사에게 “설교를 위해서 핑크의 책을 읽으세요”라고 조언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 핑크의 설교를 통해 섬광처럼 비친 하나님의 영광을 느꼈고 수일간 천국을 경험하는 압도적 확신과 기쁨의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같은 복음을 전했던, 충성된 말씀의 사역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자리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사역은 성공이고 핑크의 사역은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전기를 쓴 이안 머레이(Iain Murray)는 로이드 존스의 회고담을 소개한다. “내가 핑크 처럼 행동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 참아야 했고 사물을 아주 멀리 보아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목사직에서 물러났을 것이고 모든 일은 끝났을 것이다.”(‘아더 핑크’ 228쪽; ‘로이드 존스 평전 2’ 398쪽). 이 말은 두 사람의 기질과 성향이 만들어낸 차이를 잘 보여준다. 로이드 존스가 생전과 사후에 전세계 기독교회에 영향을 미쳤다면, 핑크는 사후에야 비로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은 기질과 성향의 차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끝까지 충성스러웠고 그들의 사역에는 열매 맺음도 풍성했다.윌리엄 스틸(1911-1997)또 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윌리엄 스틸(William Still)이다. 그에 대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의 말이다. “나는 십대에 윌리엄 스틸을 처음 만난 후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빚을 졌다. 스틸만큼 나에게 목사의 일에 대해 인상적인 메시지를 준 사람은 없다.” 스틸은 1945년부터 1997년 임종하기 2개월 전까지 52년간 줄곧 스코틀랜드의 길컴스턴 남부교회에서만 목회를 했다. 그의 말씀 사역은 생전에 이미 영국은 물론 해외로까지 널리 알려졌었다. 그가 50 여년 목회의 반환점을 돌 무렵인 1964-1965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IVF 신학생 컨퍼런스에서 전한 말씀이 ‘목사의 길’로 출판되었는데(장호준 역, 복있는사람, 2011), 이 책은 목회론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고, 싱클레어 퍼거슨은 모든 목사가 1년에 한번 씩은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에서 스틸은 자신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목회를 하는지, 복음이 얼마나 많은 저항을 불러오며 목사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목사의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이고 온전한 방식으로 수종 들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그가 이 설교를 했던 1964-1965년까지 그의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로 인하여 계속 떠나고 있었다. 그는 죽기까지 충성된 말씀의 종이었다. 그의 자리는 로이드 존스와 핑크의 사이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틸의 사역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그의 사역은 생전 보다 사후에 더 많은 열매를 맺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말이다.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 성공 같아 보이는 실패아더 핑크는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의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들은 성경과 교회 그리고 선교의 역사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이런 사람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썼던 히브리서 기자의 심정에 공감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역을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과 ‘성공 같아 보이는 실패’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역자는 눈에 보이는 성공과 실패 뿐 아니라, 진짜 성공과 실패의 다양한 조합을 경험하지만, ‘성공 같아 보이는 실패’만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역자가 성공 같은 실패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대형교회로 성장시켰거나 대형교회의 목사가 됨으로써, 경탄할 만한 사역의 결과를 만들어냄으로써, 탁월한 설교자나 저술가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음으로써 말이다. 반면,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은 거의 항상 사역자 자신에게는 고난의 형태로 주어지는데, 이것을 말씀으로 잘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씨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사역자 자신에게 미치는 유익은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 이 고난의 콘텍스트 안에서 사역자가 성경의 텍스트를 만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달콤하게 사역자 자신을 변화시키는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가 지나온 삶과 그의 말씀 사역은 수렴의 과정을 거쳐 점점 더 삶의 깊이가 녹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아!당신이 이제 사역을 준비하고 있거나 사역의 길로 들어서는 길목에 서 있다면, 혹시 사역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당신은 이제 막 사역에 들어섰거나 이미 오래도록 사역을 해온 사역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실패를 맛보았거나 실패감에 젖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실패해도 괜찮아. 그것이 네 눈에 실패로 보이든 성공으로 보이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이고 또 실패하든 성공하든 네가 언제나 내 아들이고 내 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렴. 실패해도 괜찮아.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지 않았니?” 청교도 목사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 1650-1678)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남긴 중요한 경구가 있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이 말을 이렇게 고쳐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사역자의 설교와 사역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평가(측정)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일을 계속하라!
교회사역
팀켈러
센터처치
마틴로이드존스
아더핑크
성경연구
윌리엄스틸
싱클레어퍼거슨
헨리스쿠겔
사랑하는 것을 속일 수는 없다
by Jon Bloom
2021-10-1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영혼은 비행으로 측정된다.어떤 영혼은 낮게 날고 어떤 영혼은 높게 난다.마음은 그가 즐거워하는 대상으로 드러난다.그리고 기쁨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존 파이퍼(John Piper)의 ‘하나님의 기쁨(The Pleasures of God)’이 처음 출간된 1991년에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당시 아내와 나는 존 파이퍼가 시무하는 베들레헴 침례교회(Bethlehem Baptist)에 이 년째 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존 파이퍼가 쓴 ‘하나님의 기쁨’, 그가 기독교 희락주의(Christian Hedonism)라고 부르는 내용을 자세히 설명한 바로 그 책을 읽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영광스러워진다는 진리의 강조는 우리 부부의 영적인 뼛속까지 강력하게 울렸다. 내가 ‘하나님의 기쁨’ 서문을 읽었을 때 위에서 인용한 시는 내 속에서 기독교 희락주의의 진리를 생생하게 보여주었고, 기독교인의 삶에서 기쁨이 담당하는 역할을 향해 내 마음을 활짝 열었다.한 문장은 다른 문장을 낳는다파이퍼는 그가 4년 전에 읽었던, 누군가의 삶을 변화시킨 문장의 주석이라는 의미로 내 삶을 변화시킨 바로 그 문장을 썼다. 사실 파이퍼의 책을 탄생시킨 전체 설교 시리즈는 17세기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라는 스코틀랜드의 젊은 신학 교수가 쓴 한 문장을 깊이 묵상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스쿠걸은 개인적으로 친구에게 보낸 영적 조언을 담은 편지에서 그 문장을 썼는데, 내용이 너무 심오해서 많은 사람이 그 편지 내용을 베껴서 퍼뜨리기 시작했다. 결국 스쿠걸은 1677년에 그 내용을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스쿠걸은 스물여덟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결핵으로 사망했다.파이퍼는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강하게 사로잡았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한 문장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 문장은 1987년 초반 내내 나의 생각 전체를 사로잡았고, 약 3개월 동안 묵상의 중심이 되었다. 이 문장에서 스쿠걸이 말한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보물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측량된다.”파이퍼는 이 말이 사람에 대한 것만큼이나 하나님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의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그 사랑의 대상은 반드시 하나님 자신이어야만 한다. 왜냐면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이퍼는 이전에 ‘하나님의 기쁨’에서 한 장 전체를 자기 자신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행복, 즉 하나님이 가진 하나님 중심성(God-centeredness)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그러나 스쿠걸의 문장은 파이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혼의 탁월함을 측정하는 방법을 숙고하는 과정에서 이 진리가 가진 영광스러운 새로운 차원을 보도록 인도해 주었다. 그리고 파이퍼의 문장은 인간이든 신이든 그 마음은 그가 누리는 기쁨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기 시작한 내게 영광스러운 새로운 차원을 열어 주었다.기쁨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내게 가장 충격을 준 문장은 파이퍼가 쓴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마음은 그가 즐거워하는 대상으로 드러난다.그리고 기쁨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기쁨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로 인해 나는 혼란과 자기기만을 관통하여 문제의 핵심, 즉 내 마음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기쁨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쾌락으로 여기는 대상이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다 개인적인 경험뿐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통해 이 세상의 수많은 쾌락이 거짓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히 11:25). 사실 이 문장이 말하는 진짜 의미는 기쁨은 마음의 정체를 드러내는 내부 고발자라는 것이다. 기쁨은 우리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마음의 방식이다(마 6:21).사악한 것을 즐기는 경우 쾌락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사랑하는 대상(treasure)에 문제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마음속 쾌감 측정기는 원래대로 작동하고 있다. 단지 잘못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사랑하는 대상이다. 입술은 우리가 뭘 사랑하는지 얼마든지 거짓으로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쾌락을 주는 대상이 선이든 악이든, 그것을 결코 오랫동안 숨겨둘 수는 없다. 우리가 진짜 사랑하는 대상은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 밖으로 나와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할 때 혹은 표정이나 몸짓을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낸다. 내 마음도 하나님의 마음처럼 무엇을 기뻐하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이 놀랍도록 명확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내 모든 경험은 그 진실을 입증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성경 전체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이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비참할 때 보이는 기쁨내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이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비행 높이로 측정된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꾸밈이나 변장 없이 “벌거벗은 거 같이 드러나기”(히 4:13) 마련이다. 아무리 강력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신학에 근거한 신앙 고백을 하더라도, 내가 가진 은사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 어떤 “살았다 하는 이름”(계 3:1)도,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나의 부족함을 대신 채울 수는 없다. 그리고 애정의 척도에서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파이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당신은 미지근한 관심 또는 이를 악문 결심 정도로 영혼의 영광을 판단하지 않는다. 영혼의 비율을 알기 위해서는 영혼의 열정을 알아야 한다. 영혼의 진정한 차원은 영혼이 누리는 기쁨에서 드러난다. 그냥 의무감 정도로 원하는 게 아니라 열정으로 갈구하는 무엇인가가 우리의 탁월함 또는 악함을 드러낸다. 내가 가진 열정을 하나님 영혼의 척도에 놓고 볼 때 나의 부족함은 분명해진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관해서 내게는 여러 종류가 섞여 있다. 시편 63편에서처럼 하나님을 음미할 수 있지만, 시편 51편에서처럼 여전히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시편 73편 25-26절처럼 하나님을 소중히 여긴 적도 있었지만, 시편 73편 2-3절처럼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때로는 시편 23편 1-3절처럼 감미롭게 찬양을 부르기도 하지만, 시편 10편 1절처럼 쓴 마음으로 찬양하기도 한다. 때로는 로마서 7장 24절의 비참함을, 로마서 8장 1절의 경이로움을 예리하게 느끼기도 한다. 나는 시편 119편 105절의 빛과 시편 88편 1-3절의 어두움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로마서 12장 11절의 맹렬함뿐 아니라, 요한계시록 3장 15절의 미지근함도 알고 있다. 이런 나는 마태복음 26장 41절 예수님의 권고가 반복해서 필요하다. 내 마음의 상태와 내 영혼의 가치를 드러내는,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만을 손에 들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자비로운 비참함이다. 진정한 영적 풍요함을 진지하게 구하려면 먼저 영적 빈곤부터 알아야 한다. 회개하고 다 버리기 전에 우리는 내 속에 자리하고 있는 비참한 우상 숭배를 보아야 한다.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이 주를 기뻐하도록 하지 아니하시겠나이까?”(시 85:6)라고 부르짖기 전에 우리는 영적 죽음을 먼저 느껴야 한다. 이 모두는 다 진리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파이퍼의 문장을 더 오래 숙고할수록 내 영적 빈곤의 파괴적인 노출이야말로 기쁨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원한 세계로 가는 문을 의미한다는 것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영원무궁한 기쁨나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바로 이 사실을 발견했다(막 10:17-22). 예수님이 청년으로 하여금 마음속 진정한 열정을 보도록 하셨을 때(달리 말하면, 그의 영적 가난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의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기 위해, 그가 “하늘에 있는 보배”를 갈망하길 원하셨다(막 10:21).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하나님을 그의 최고의 보물로 보지 않는 한, 그 청년은 결코 하나님을 얻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팔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마 13:44).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의 폭로라는 파괴적인 방법을 통해서 그의 마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청년은 그 문을 열지 않았고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 문은 그가 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보물로 인도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행복하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기쁨이 우리 안에도 거하고 또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기쁨을 창조하셨다(요 15:11).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보물의 척도로 쾌락을 설계했을 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 보물, 바로 하나님(the Treasure) 안에서 최대한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안에서 경험하는 기쁨으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영광스러워진다. 우리가 누릴 영원한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 속 가난을 먼저 드러내야 한다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분 앞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우편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시 16:11). 그러므로 우리의 기쁨이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때로는 파괴적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이것은 실로 크나큰 자비이다. 원제: You Can’t Fake What You Lov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예배
영적성장
감정
존파이퍼
하나님의기쁨
가난한심령
기독교희락주의
부자청년
하나님중심성
성숙을 만드는 연약함에 관하여
by Tessa Thompson
2021-10-10
거의 스무 명의 대학생이 우리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모든 게 제자리를 잡아간다고 느꼈다. 집은 깨끗했고 슬로우 쿠커에는 부드러운 바비큐 치킨이 가득했으며, 커피를 끓일 준비도 다 끝나 있었다. 남편이 청빙을 받아 최근 이사한 우리는 새로 부임한 교회에 충실하게 출석하는 인근 대학의 학생들과 친해지고 싶었다.그러나 그날 주일 오후, 정신없는 부엌을 지날 때, 내 침착함은 돌연 고통스럽게 상기되는 나의 나약함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내가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예의 바른 한 청년이 더러운 접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간단한 질문을 했을 때, 나는 바로 옆에서 커피를 따르고 있던 여자 학생에게 지금 저 청년이 뭐라고 하는지를 물어야만 하는 어색한 상황을 만들고야 말았다. 그 여자 학생의 입술을 읽는 게 더 쉬웠기 때문이다. ‘휴우~ 주님, 내가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결코 오래 잊고 있도록 그냥 놔두는 법이 없으시군요.’ 몇 분 후, 우리는 모두 거실로 모였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자막으로 나오는 그들의 말을 읽었다. 이런 첨단 기술에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특별하게 선택한 이 육체의 가시에 별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이 신경계의 가시가 내 육체에 머문 지 거의 이십 년이 되어 간다. 나는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간청하지 않았다. 아마도 삼백 번 정도 기도했을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시를 없애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이 육체적인 약점이 이 세상에서 사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색한 대화, 제한된 사역 능력, 조용한 교회 예배는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선택하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분의 영광을 위해 연약해지는 것에 대해 배울 것이 많지만, 이런 저런 일을 통해 나는 적어도 한 가지를 제대로 배웠다.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이 가져다주는 것은 비참함 아니면 성숙이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연약함은 좌절을 낳거나 또는 열매를 맺는다.사도 바울도 이 점에 기꺼이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무엇이었을까? 투옥, 구타, 난파, 잠 못 이루는 밤, 굶주림, 끊임없는 위험, 그리고 교회의 건강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등등, 단지 몇 가지만 들어도 이렇게 많을 정도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까지 주어서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바울은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겉으로만 봐서는 참 비참한 삶이다. 그런데도 바울이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왜 만족하고 항상 기뻐할까? 바울은 삶 속에 그런 약점과 고난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연약함과 고난이 그를 날마다 더 그리스도의 충분함을 바라보도록 강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든 고통은 바울을 배경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가 중앙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 모든 고통은 하나님 왕국에 필요한 열매 맺는 삶을 위해 지혜와 힘과 은혜를 간절히 원하는 바울로 하여금 날마다 예수님의 발 앞에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바울의 연약함은 비참이 아니라 성숙에 이르는 도구였다. 바울은 성화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약함”에 대해 말할 때, 그건 죄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독교인 안에 내주하는 죄의 현실 때문에 죄는 참으로 언제나 우리의 궁극적인 약점이 된다. 즉,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를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주는 연약함도 우리가 그 죄를 죽일 때 성숙을 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사실 아직 영화롭게 되지 않은 몸으로 이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매일 많은 연약함을 경험하면서 산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들은 우리를 나약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환경과 상황, 그리고 경험과 상처이다. 우리에게 충분한 힘이 있다면, 아마도 제거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주일 마다 모이는 지역 교회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의 이러한 약점들을 목격한다. 어린 자녀를 둔 피곤한 어머니는 집 밖에서 사역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다. 나이든 성도는 몸과 마음이 점점 더 쇠퇴해감을 느끼고, 조금씩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학생은 부족한 사회성 때문에 고통받는다. 이십 대 미혼인 어느 여성은 함께 일할 남편이 없는 사실에 어려움을 느끼며 결혼을 갈망하고 있다. 이런 식의 목록은 수도 없다. 만성 통증, 교육 부족, 재정적 압박, 끝없는 시련으로 인한 낙망,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면서 느끼는 피로, 리더십 부족, 실업, 실명, 청각 장애 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 등등.이러한 약점 때문에 좌절하며 우리는 그 연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휘해야 할 유용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하기 쉽다. 돈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성격이 좀 달랐더라면, 조그만 더 건강했더라면,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날 좀 더 잘 이해시켰더라면, 이런 약함만 없었더라면, 등등. 그러나 바울의 삶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포용한다. 약점은 그의 일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 매일 그의 거룩함을 돕는 조력자이다. 바울은 자신의 약점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통해 역사하고, 그의 유한한 수고를 결실 있게 만들고 있음을 상기한다. 거기에 더해서, 너무도 자주 표면 위로 올라오는 교만, 비통함, 탐욕, 게으름, 짜증과 같은 죄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에게 약점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연약함 때문에 바울이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일을 하는 데 주저한 적이 없다. 약점은 결코 그를 수동적이거나 게으르게 만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전 15:10). 그래서 바울은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그의 열매가 드러내는 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다는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을 드러냈는가이다.하나님을 위대하게 드러낸 것이 무엇인가? 연약함은 아니다. 연약함 그 자체는 결코 거룩한 것도 아니고 또 열매도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점에 대처했기에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좌절하며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대신, 또는 약점 때문에 침체되는 사역을 생각하며 절망하는 대신, 바울은 그의 눈을 육신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권능을 가지고 영광 중에 부활해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신 구주를 바라보았다. 바울이 이 구세주를 보았을 때, 자신은 단지 그 영광을 보고 찬양할 수 있는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을 더 많이 바라볼수록 바울은 예수님을 닮아갔고, 그 결과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그의 연약함은 점점 더 큰 열매를 맺었다. 왜냐하면 나날이 성장하는 성숙함에 따라 그의 삶의 목표는 이제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통한 그리스도가 드러나심이요, 바울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라”가 되었기 때문이다.연약함은 어렵다. 그 무게를 느낄 때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고후 5:2), 타락한 몸과 세상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신음한다. 만약에 이런 신음이 우리로 하여금 오로지 내면만을 바라보게 하고 그 결과 우리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이 우리를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한탄하도록만 만든다면, 그렇다. 연약함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열매를 맺는 데 방해가 될 것이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죄와 비참함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탄식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성숙을 가져오는 탄식이다. 연약함 가운데 나오는 나의 탄식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부러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나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일과 예수님을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보여 달라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이끄는 탄식일 수도 있다. 연약함 가운데 나오는 나의 탄식이 교만에 기인한 불안함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내 마음이 안정을 찾는 곳은 사람의 칭찬이 아닌 그리스도의 미소이기에, 사람들을 더 잘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이끄는 탄식일 수도 있다. 연약함 가운데 나오는 나의 탄식이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느끼는 비통함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했기에 그가 아낌없이 베푸시는 기쁨의 새로운 깊이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탄식일 수도 있다. 연약함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연약함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능을 찬양할 수 있는 장성함에 이르도록 간절히 기도하라.원제: Weakness unto Maturity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바울의가시
육체의가시
약점
존파이퍼
연약함
탄식
비통함
네 맘대로 살지 말라!
by Matt Smethurst
2021-10-09
자녀들은 커가면서 다양한 종류의 영화와 영상물들을 보게 된다. 나는 자녀들에게 그런 영상들 속에서 “거짓말들을 찾아보라”고 얘기하면서 그들을 양육하였다. 사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몇 년 전에 내 딸이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인 ‘트롤’을 보았다. 저스틴 팀버레이크(Justin Timberlake)와 안나 켄드릭(Anna Kendrick)이 목소리로 출연한 유명한 작품이었다. 내 딸은 그 만화를 보자마자 곧바로 내게 이렇게 질문을 하였다. “아빠, 행복이 정말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사실 그것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내 딸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딸은 “아빠,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되묻기도 하였다.내가 그때 바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대답은 아이스크림을 사줄 만한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다.사실 모든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트롤’도 하나의 설교와 같다. 그 안에는 문화적인 교리가 담겨있다. 영화의 광고 문구에서부터 그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트롤 공주인 파피와 브랜치의 대화에서도 영화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제시된다.파피: 고마워요브랜치: 아니에요, 제가 고마워요.파피: 왜 제게 고마워하세요?브랜치: 왜냐하면 제게 행복해지는 법을 보여주셨으니까요.파피: 정말요? 그럼, 이제 행복하세요? 브랜치: 그런 것 같아요. 행복은 우리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저 누군가 우리 안에 있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 같아요.이 영화의 주제곡은 팀버레이크의 “느끼는 것을 멈출 수 없어요”(Can’t Stop the Feeling)이다. 이 노래는 파티에서 춤추며 부를 수 있는 아주 신나는 노래이다. 유튜브에는 이 노래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있는데, 거의 6억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상은 시작하자마자 파피 공주와 그리슬 왕의 대화를 보여주면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슬 왕: 너는 내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파피: 당연하죠! 행복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 모두의 내면에 행복이 있어요. 나는 행복을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행복을 느끼고 있죠.“나는 행복을 내 안에서 느낄 수 있어요!”잠시도 쉼을 얻을 수 없는 피곤한 삶사실 이런 현상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이런 생각들은 비상식적인 생각으로 취급되었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예전에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스스로 발견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 안에, 무언가 역사적인 유산을 물려받으며, 상당히 많은 책임을 짊어진 채 태어났다.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의 목적을 스스로 발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삶의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이름이 베이커(Baker)라면 화덕을 구우면 되고 스미스(Smith)라면 연장을 만지면 되었다.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근대 이후의 사람들의 삶이나 그 이전의 사람들의 삶이나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갇혀서 살았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가 외치는 목소리들을 들어보시라.“네 마음대로 살아라.”“네 자신에게 솔직하라.”“네 자신을 찾아라.”“네 자신을 사랑하라.”“네 자신을 표현하라.”“네 자신을 믿어라.”오늘 우리는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지금은 초월의 세계는 무시되고 하찮게 여겨지는 시대이다. 그 대신에 “위대한 자아”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서 진ㆍ선ㆍ미에 대한 탐구는 별 쓸모없는 것으로 이미 전락해버렸다.그런데 사실 이런 삶은 잠시도 쉼을 얻을 수 없는 피곤한 삶이다. 사실, 나는 내 운명을 깨달을 지혜도, 그것을 이루어낼 능력도 없다. 또한 내 삶의 수많은 난관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친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통들을 이겨낼 자신도 없다. 나는 나의 내면을 탐구하기에도, 또한 내 삶을 스스로 이끌고 가기에도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사실 우리 시대가 외치는 이러한 주문들은 좋은 의도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부분적으로 진리가 들어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 시대의 이런 주문과 정반대로 가르친다.세상: “네 마음대로 살아라.”성경: “나(예수님)를 따르라”(마 10:38).세상: “네 자신을 사랑하라.”성경: “네 하나님 여호와와 네 이웃을 사랑하라”(막 12:30-31).세상: “네 자신을 발견하라.”성경: “네 자신을 부인하라”(눅 9:23).세상: “네 자신을 믿으라.”성경: “나(예수님)를 믿으라”(요 6:35).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근대 이후의 모든 사상들을 거부하고 옛날 시대로 돌아가면 될까? 아니다! 사실 성경은 옛 것이든, 새 것이든, 모든 시대가 가지고 있는 악한 생각들을 다 무너뜨렸다.권위를 인정하라!우리는 개인주의의 반대말이 공동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조나단 리먼(Jonathan Leeman)이 이에 대하여 통찰력 있는 말을 하였는데,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의 반대말은 권위라는 것이다. 그의 책 ‘Don’t fire your church members’은 이렇게 시작한다.개인주의는 반공동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일부 은둔자들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은 공동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사실 개인주의는 권위에 대한 반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사실 모든 권위가 다 선한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권위는 악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주변에서 권위주의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심지어 교회에도 권위주의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한 권위들을 만들어놓으셨다. 다윗은 그 건강한 권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삼하 23:3-4).사실 권위만큼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는 것도 없다.만약 우리가 프로 스포츠팀에 입단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를 뽑아준 구단주를 만나면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자세한 것은 감독과 대화하세요!” 스포츠팀에서 감독은 조직을 관리하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선수는 감독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선발한 구단주의 권위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왕인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약 나를 따르기 원한다면 나의 교회에 보고하세요. 당신의 삶을 교회에 헌신함으로써 나에게 헌신하세요. 교회는 내가 그리스도인들이 성장하고,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동체입니다”교회는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와 권위를 제공한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경건한 동지들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사람은 경건한 목사이다.영적인 지도자들은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엡 4:11-14).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며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적용시킬 목사와 장로들을 계획하셨다. 목사들은 성도들을 모든 이단들과 잘못된 교리, 부패한 복음으로부터 보호할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 바울은 감독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그러므로 여러분은 건강하고, 성경적이며, 복음 위에 바로선 교회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찾았거든,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성도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초대교회로부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자라가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진정한 행복전통적인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의무대로 살아야 한다. 만약 현대인들의 생각이 옳다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는 우리 주인의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백성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자기집착에 갇혀서 살아가는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라. 우리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는 배역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이것은 속박이 아니다. 이것은 자유다. 그분을 위한 삶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원제: Don’t Follow Your Hear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문화
세계관
개인주의
자유
진정한행복
권위
교회
목사
트롤
세속화
알고리즘이 만드는 교활하고 거짓된 친밀함
by Chris Martin
2021-10-08
소셜 인터넷은 다양한 의견과 각종 오락이 물결치는 분주한 시장과도 같다. 쇼핑몰의 상점처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또는 틱톡(TikTok)과 같은 다양한 앱은 더 많은 정보와 영감 또는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우리의 끝없는 갈망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한다. 각각의 앱에는 고유한 특징이 있지만, 그 모두를 작동시키는 핵심 구성 요소는 바로 “알고리즘”이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관계없이 피드(feeds)를 통해서 볼 내용을 결정하는 알고리즘은 다른 앱이나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위한 탭과는 대조적으로, 사용자의 주의를 끌어서 오로지 해당 플랫폼에서만 계속 스크롤을 하도록 만드는 콘텐츠를 제공하도록 설계되었다. 알고리즘이 사용자의 관심을 끌도록 설계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소셜 미디어 앱이 사용자의 관심을 오래 끌수록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사용자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광고의 가치도 더 높아지게 된다. 알고리즘이 우리를 오싹하게 만드는 이유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은 최근 가장 진보된 알고리즘 중 하나를 갖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인 틱톡이 어떻게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감지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 조사한 비디오를 게시했다. 저널은 특정 관심사를 갖도록 프로그래밍된 인공 지능이 실행의 수를 설정하는, 다수의 “가짜” 계정이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오로지 슬프고 우울한 콘텐츠에만 관심을 갖도록 설계된 한 계정의 경우, 틱톡이 그 계정이 무슨 내용에 관심을 갖는지 인식하는 데에는 단 36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가짜 계정이 시청한 모든 동영상과 좋아요를 표시한 정보에 근거해 틱톡이 이 계정에 제공한 콘텐츠 중 무려 93%가 우울증 또는 슬픔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불행하게도 아주 흔한 이런 예를 통해서 볼 때, 알고리즘의 관심은 우울한 생각을 완화시키는 게 아니라 사용자의 관심을 더 유지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울한 사용자는 점점 더 심각한 우울증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 알고리즘은 치유나 개선에 관심이 없다. 알고리즘이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정확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망가진 자아가 거부할 수 없는 내용을 계속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를 무척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알고리즘이 소름 끼치는 주된 이유는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알고리즘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피드에서 만나는 내용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숨기고 싶어하던 가장 어두운 욕망에 직면했기 때문일 수 있다.알고리즘은 숨겨진 마음을 드러내고 지배한다알고리즘은 마음에 우상 숭배를 퍼뜨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음미하는 것보다 소셜 미디어를 스크롤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정작 숭배하는 것이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이라는 사실이 그리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비록 인스타그램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지는 않더라도, 사실상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두 배나 더 많은 시간을 인스타그램에 쏟고 있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 유튜버의 통찰력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보다 더 중요한 게 현실이 아닌가? 우리가 알고리즘을 “숭배”하는 수준에까지 이른 한 가지 이유는 알고리즘이 마치 하나님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과 욕망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아시는데(시 139:23; 렘 12:3; 행 15:8; 계 2:23), 그건 알고리즘도 마찬가지이다. 알고리즘에서 우리는 가장 깊은 두려움과 취약성을 악용하는, 왜곡된 친밀감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진정한 친밀함, 즉 우리의 가장 큰 갈망을 충족시키는 진짜 친밀함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알고리즘은 우리를 속여 우리를 돌보는 것이 알고리즘이라고 믿도록 만들 수 있다. 겉으로만 봐서는 알고리즘이 꽤나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가진 선호도에 따라서 우리를 기분 좋게도 또는 나쁘게도 만든다. 알고리즘이 요구하는 건 단지 우리의 시간과 관심뿐이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이야기 속 영웅으로 만들고, 모든 현실이 오로지 욕망에만 맞춰지도록 유도한다.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알고리즘은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그와의 영원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알고리즘도 우리를 친밀하게 알 수 있지만, 결코 우리를 하나님처럼 사랑하지는 않는다. 알고리즘은 결코 우리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위해 우리 마음을 찾으신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미치는 알고리즘의 엄청난 통찰력과 영향력을 깨달을 때, 우리는 현실 속 알고리즘과 같은 수학적 중재자를 피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을 중요시하는 사람들과의 친밀감을 추구해야 한다. 알고리즘에서 도망치라, 그리고 사람을 찾으라사람들과 얼마나 자주 어울리는가? 직장을 잃을까봐 거의 항상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느낀다고 소그룹에서 털어놓는가? 아니면, 그냥 형식적으로 웃으면서 모든 게 잘 돌아간다고 말하는가? 친구와 커피를 마실 때 십대 자녀 양육이 주는 고민을 나누는가? 아니면, 그냥 새 학기 시작에 대한 잡담으로 그치는가? 당신이 지금도 정욕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자가 알고 있는가? 배우자는 몰라도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 사람들보다 알고리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보다 화면을 두드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알고리즘이 나를 더 잘 아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에 기초한 안전한 우정을 통해, 우리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알고리즘은 욕망에서 탈출하는 대신 욕망 속에 존재 전체를 던질 때 온전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라는 거짓말을 우리가 믿기 원한다. 알고리즘이 우리로 하여금 믿기를 원하는 다른 또 하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라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알려지고 그 안에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이다.알고리즘의 거짓된 친밀감과 거짓된 약속에 속지 말라. 진짜 친구 및 가족과 누리는 진정한 친밀감을 추구하라. 알고리즘이 당신의 마음을 형성하고 예배를 훔치도록 놔두지 말라. 목적 없이 스크롤하고 클릭하는 시간을 줄이고,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모든 피드에 속절없이 빠지지 않도록 하라. 대신 기도와 성경 연구 그리로 예배를 통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하라. 오늘날 온라인 생활에 관한 아픈 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콘텐츠가 당신을 소비하고 있음을 기억하라.원제: The Insidious, Fake Intimacy of Algorithm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사회이슈
온라인
소셜미디어
알고리즘
우상숭배
플랫폼
틱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고통에 관한 내 모든 생각을 바꾼 한 문장
by Joni Eareckson Tada
2021-10-07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싫어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신다. 그날을 나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병원에서 퇴원한 나는 막 십 대 티를 벗은 때였고, 친구 스티브 에스테스(Steve Estes)와 함께 성경과 탄산음료를 앞에 놓고 식탁에 앉아 있었다. 스티브와 나는 내가 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후 하나님에 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중에 알게 된 사이였다. 무엇보다 내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것을 스티브는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스티브는 나와 거래를 했다. 나는 탄산음료와 어머니의 특기인 BLT 샌드위치를 주는 조건으로 그는 내게 최선을 다해 성경에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주는 것으로 말이다. 비록 그날 나눴던 말을 문장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무려 오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대화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그날의 대화는 내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나는 항상 하나님은 선한 분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날 봐, 난 휠체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지 마비 환자야. 지금 느끼는 감정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적인 것 같다니까. 하나님은 왜 사고를 막지 않으신 거지? 얼마든지 가능한 일 아니야? 아니, 하나님이 그 현장에 계시기는 했나? 아니야, 그날 거기 있었던 건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일 거야.”그날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후, 스티브는 그날을 기억하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조니, 그날 밤 너와 마주 앉았을 때, 나는 정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했어. 사실 나는 휠체어에 의지하는 내 또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거든. 네가 던지는 질문을 들을 때 사실 교회에서 배운 성경 구절 열 개 정도가 생각났지. 그러나 그날 맞은편에 앉은 너를 보면서 나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 구절이 말하는 진리를 삶속에서 확인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 사실 나한테는 수학에서 D학점 받는 것 보다 나쁜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거든. 그래서 나는 널 바라보며 계속 이렇게 생각했어. 성경이 지금 온몸이 마비된 이 소녀의 삶에서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면, 성경은 사실 아무 소용이 없는 거다. 그래서 조니, 난 사실 그날 목소리를 가다듬었고, 말씀을 가지고 그냥 모험을 한 거야.”하나님은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허락하신다그날 밤, 스티브는 식탁에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조니, 너를 그 휠체어에 앉게 하신 건 하나님이야. 그리고 나는 그 이유는 몰라. 하지만 하나님과 싸우는 대신 그분을 믿고 의지한다면, 너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게 비록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이 아니라고 해도 천국에서라도 알게 될 거야. 하나님은 네 목이 부러지는 사고가 일어나도록 허락했어. 그리고 아마 내가 오늘 여기 있는 건 그 이유에 관해 몇 가지 이유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야.”잠시 말을 멈췄던 스티브는 곧이어 그날 이후 내 인생을 바꾼 한 문장을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싫어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신다.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진부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 문장은 마치 신비로운 수수께끼처럼 나를 유혹했다. 거기에는 내 속에서 매혹을 불러일으킬 어떤 깊고 신비한 진실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그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어.” 그리고 이내 나는 그의 이야기에 푹 빠졌다.그 여름 내내 나는 스티브와 함께 성경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탐구했다. 나는 하나님이 어떻게 악마와 손을 잡지 않고도 혐오스러운 일을 허용하는지 알고 싶었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은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아니, 내 목을 부러뜨려서 이뤄야 할 만큼 가치있는 게 하나님에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다그해 여름 스티브가 나에게 준 조언을 앵무새처럼 옮겨보면 이렇다. 그는 예레미아애가 3장 32-33절로 시작했다.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한 구절에 걸쳐 성경은 하나님께서 “근심하게 하시나”,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단언한다. 그 구절을 근거로 스티브는 하나님이 내게 사고를 허용한 건 맞지만, 그 사고 때문에 하나님이 재미있어 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내게 일어난 끔찍한 사고가 하나님에게 아무런 기쁨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내게 참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내 사고가 누구의 책임이냐는 질문은 어떤가? 비극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관해서는, 그게 하나님이건 또는 악마이건 간에, 예레미야애가 3장은 그 비극을 하나님이 가져온 것이라는 점에 관해서 분명하게 하고 있다. 모든 비극 뒤에는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은 사탄이 운전하는 버스에 탄 밀항자이시며, 악마의 분노 주위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세우고 사탄의 사악함에서조차 궁극적인 선을 가져오신다. 모든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다“하나님이 주관자야,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는 거야, 조니.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너를 실제로 뗏목에서 밀어내 물에 빠뜨렸다는 뜻은 아니야.” 스티브가 말했다. “민수기 35장 11절은 ‘사고’로 죽은 사람을 묘사하면서 그 일을 ‘의도하지 않은’이라고 말해. 그러나 같은 사건에 대해 성경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하거든.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출 21:13). 그러니까 사고지만, 하나님이 낸 사고라는 거지. 하나님은 명령을 내려서 고난이 일어나도록 허용은 하지만, 결코 그 고난을 직접 ‘행하지는’ 않으셔.”이것은 너무 깊은 차원의 이야기다. 하나님이 명령은 하시는데, 그렇다고 반드시 직접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내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달라고 말했을 때 스티브는 미소를 지었다. “조니,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한 유한한 사람들의 모임에 온 것을 환영해.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신이 기꺼이 승인하지 않는 모든 일까지도 허락하신다는 거야. 하나님은 자신이 결코 하지 않을 일을 다른 누군가가 하는 것을 허용하셔. 하나님은 욥의 낙타를 훔치지도 않았고, 갈대아인을 유혹해서 욥의 재산을 빼앗지도 않았어. 그러나 그 모든 비극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단 일 초도 욥의 인생에서 손을 뗀 적이 없으시지.”이어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서 조니, 모든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거야. 비록 사람들이 하나님이 네 사고와 아무 상관이 없고, 모든 비극은 다 얕은 물에 부주의하게 다이빙을 한 네 책임이라고 말해도 말이야.”오케이, 이제 알겠어. 하나님은 당신이 싫어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신다. 그러나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가 사랑하는 역사를 성취하기 위해 끔찍한 일을 허용하는 부분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아직도 내가 겪는 이 고통과 사지 마비라는 끔찍한 대가를 치러야 할 정도로 하나님이 이루고 싶은 그 선하고 사랑스러운 역사가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었다.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비용 대 수익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은 가장 먼저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렸다. 그는 독생자의 죽음을 원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겪은 고통을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계획은 하나님이 했지만, 그 모든 일을 선동한 것은 사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초래한 반역과 고문 그리고 죽음과 살인을 생각해보라.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가룟 유다는 물론이고 예수를 나무에 못 박은 로마인을 포함한 온 무리도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행 4:28)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오케이, 너희들이 그렇게까지 죄를 짓고 싶다는 거지?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너희가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내 뜻을 이루는 방식으로 그 일이 일어나도록 하겠다.” 요컨대, 하나님은 자신의 놀라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유대인의 사악한 계략을 조종하셨다. 그의 백성에게 선을 가져다주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에게는 최대의 영광을 가져다줄 신성한 계획을 이루셨다.“그리고 십자가의 끔찍한 대가까지 치러야 했던 영광스러운 계획은 다름 아니라 죄인들로 가득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거야.” 스티브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곧 고통과 죄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악으로 악을 물리치기“조니, 하나님은 네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지만, 네 고통은 단지 더 심각한 문제의 징후일 뿐이야. 하나님에게는 네가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바로 네가 죄를 미워하고 그럼으로써 영적으로 성장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네가 천로역정의 길을 걷는 동안 고통을 통해 죄의 쏘는 것이 무엇인지 많이 느끼도록 하시고 있어.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너는 네가 얼마나 끔찍한 죄로부터 구원받았는지를 계속해서 상기할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래서 사실상 악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한 너의 고통과 마비는 도리어 무기가 되어서 다른 형태의 악을 물리칠 수 있어. 바로 쓴뿌리, 분노, 불안, 두려움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지. 이 모든 과정이 다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기 위함이야.”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미워하셨던 십자가 죽음을 허락하심으로 그가 사랑하시는 것, 곧 나의 구원과 그 구원을 통한 그의 영광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사실상 자기 목을 베었다. 세상 최악의 살인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그들을 위한 고통“조니, 이건 정말로 네 인생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져.” 스티브가 말했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일, 지금 경우에는 바로 네 척추에 생긴 사고지, 바로 그 일을 허락하셔. 그리고 그건 다름 아니라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이 말씀을 이루시는 거야.”“하지만 그 일이 너에게서 끝나는 건 아니야.” 스티브가 말을 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난 받는 법을 배워야 해. 이건 비밀이 아니야. 하나님은 네 고통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올 수 있도록, 네 고통을 하나의 불쏘시개로 쓰기를 원하셔.” 그러니까, 내 이야기가 요셉과 그의 사악한 형제들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요셉은 창세기 50장 20절에서 형제들에게 노골적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그렇다. 하나님은 내게 증오스럽고 끔찍한 전신 마비를 허락하셨지만 그의 사랑은 단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통해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 할렐루야!오십 년이 지나고스티브와 대화를 나눈 그해 여름 이후 벌써 오십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현재 펜실베니아주 브릭레인 커뮤니티 교회(Brick Lane Community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나는 장애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단체 ‘조니와 친구들(Joni and Friends)’을 통해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요셉”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의 기쁨에 의아해한다. 특히 요즘 들어 나는 만성 통증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방식으로 그의 기쁨을 내게 나눠주고 있으며, 그 조건은 내게 어느 정도는 그의 소중한 아들, 예수처럼 고통을 견뎌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다 괜찮다.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만 굳게 붙들면 그가 주시는 기쁨이 모든 고통보다도 더 낫다. 그렇기에 내가 증오하는 전신 마비로 인해서 나는 지금도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쁨도 내가 천국에서 누릴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하나님은 끔찍한 일을 허용하시지만, 도로시 세이어스(Dorothy Sayers)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나 웅장하고 영광스러운 역사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 지구 행성에서 경험한 모든 고통은 그날의 영광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날 이 땅에서 흘리는 모든 눈물에 관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보상하실 것이며(시 56:8), 모든 상처에 대해서도 실로 풍성하게 보상하실 것이다(롬 8:18).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고통 속에 숨은 신비스런 당신의 모든 뜻을 그날 환히 밝혀 주실 것이다. 끔찍한 일이 생겼는가? 나는 당신에게도 이 문장을 전하고 싶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해 싫어하는 일까지도 허락하신다.” 만약 당신도 언젠가 나처럼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선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서도 끔찍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자, 나도 스티브처럼 말씀에 의지해서 모험을 하겠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기에 당신에게 고난이 닥쳤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하나님과 싸우는 대신 그를 신뢰한다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당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셨고, 아마도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당신이 자신의 삶을 축복하고, 다른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며, 구주께 최대의 영광을 돌리고, 그렇게 함으로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하늘의 재산을 통해 더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 아름다운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돕도록 하기 위해서다. 원제: Ten Words That Changed Everything About My Sufferi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고통의의미
합력하여선을이룸
인자하심
주관자
사지마비
십자가
하나님의뜻
만성통증
배우자가 꼭 가장 친한 친구일 필요는 없다
by Shane Morris
2021-10-06
요즘 들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을 만드는 조건으로 긴밀한 우정 관계가 자주 언급된다. 흔히 소셜 미디어에 배우자 사진을 게시하는 젊은 커플이 자주 하는 말이 이것이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다.” 흔히들 배우자를 향한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표현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결혼이 성적 매력을 초월한 수준에서 이뤄졌다는 사실, 즉 동반자적 관계의 연속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결혼 서약을 하러 주례자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미 잘 확립되어 있는, 주로 플라토닉한 관계에 또 하나의 단계를 추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태도에 대해 할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우정을 결혼까지 이끌어낸 사랑의 정점으로 취급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의미에 대해 우리 문화가 겪고 있는 혼란의 징후이며, 그런 현실을 보며 나는 여러 유형의 사랑을 구별한 C.S. 루이스(Lewis)가 지금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본다. 절친과 결혼하는 것이 좋을 때나는 진실한 친구로 교제를 시작했다가 결혼까지 골인한 많은 커플을 알고 있다. 그런 커플은 좋아하는 취미에서부터 종교까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상대를 매력적으로 생각했던 그들은 대화 중에 서로에게 끌렸고,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사랑이라는 다른 측면이 드러났다. 종종 매력은 다른 것보다 먼저 시작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성적 매력이 드러나게 되고, 사랑이라는 막강한 힘을 그냥 표면 아래에 방치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로맨스의 가능성을 차단할지, 아니면 받아들일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후자를 선택하는 커플(특히 남성)은 종종 눈이 열리는 경험(sense of epiphany)을 한다고 말한다. “나는 워낙 오랜 기간 이 여자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겨왔기에, 사실상 그녀가 적합한 배우자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어요.” 때때로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친구로 지내는 여자가 신체적인 면에서 평소 남자가 생각하는 “이상형(type)”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들이 남편을 향해서도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둘 중 하나 또는 둘 다 다른 사람과 낭만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우정이 애초에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미래의 아내인 조이 데이비드맨(Joy Davidman)을 향해 끌리는 진심을 깨닫고 인정하는 데 무려 몇 년이나 걸렸던 C.S. 루이스에게 로맨스적 관계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우정은 새롭고 아름다운 애정을 탄생시켰다.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하는 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사랑의 카테고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그러나 결혼으로 이끄는 사랑의 절정 내지 그 이상으로 우정을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깊은 우정에 근거하지 않은 결혼을 애초에 뭔가가 결핍된 상태라고 은근히 암시하는 것도 전혀 맞는 말이 아니다.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마치 결혼이 (성적 관계 및 가족의 혜택까지 포함된) 반드시 강렬한 우정의 결과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정의와 관련해서 사용하는 다양한 단어와 개념을 심각하게 혼동시킬 수 있다. 거기에는 모두 네 가지가 있다. 역사를 통틀어서 볼 때 대부분의 결혼은 우정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혼 중 상당수는 경제적,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 필요성에 근거했다.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은 틀림없이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결합이었을텐데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아닌 양가 아버지의 주선에 의해서 이뤄졌을 것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결혼에 관한 교훈적인 구절 그 어디에도 배우자와 더불어 우정을 키우라는 명령을 찾을 수 없다. 결혼과 관련해 성경에서 찾는 진리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뿐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중심에서 신성한 신비를 구현하는, 다스림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 관계가 드러내는 황홀한 비전이다. 창세기에서 시작되어 솔로몬의 노래에서 찬양을 받고, 복음서에서 확인되고 옹호되고, 바울에게서 거룩하게 되며, 그리고 마침내 계시록에서 성취되는 결혼에서 발견하는 것은 단지 같은 방을 쓰는 동반자적 관계 그 이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에로스적 관계인 결혼을 주로 우정의 한 유형으로 묘사하는 것은 결혼과 우정 모두를 다 값싸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했다.”라는 말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배우자를 단지 친구 상태로 두는 것은 신부이자 조력자라는 정당하고 가장 높은 지위에 있어야 할 내 배우자를 강등시키는 것이다. 우정을 에로틱하게 여기지 말라우정을 결혼의 최고 기준(gold standard)으로 삼는 현대적 습관은 심각하면서 대중적인 또 다른 사랑 유형 간의 혼동과 유사하다. 우정이 에로틱해지는 반대 현상을 생각해 보자. 나는 최근 반지의 제왕이 동성애를 기저에 깔고 있다는, 피곤하고 불쾌한 주장을 반복하는 트위터를 보았다. 그 트위터는 이렇게 주장한다. “J. R. R. 톨킨(Tolkien)은 단지 두 종류의 인물들만 썼다. 아내를 사랑하는 빛나는 남자와 여우 구멍을 갈망하는 동성애자.” 그보다 훨씬 더 현명한 어느 트위터 사용자는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사랑(The Four Loves)’을 인용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우정을 실질적인 사랑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변장한 에로스나 에로스의 확장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사실은 이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제대로 된 친구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 책에서 루이스는 우정과 낭만적인 사랑, 또는 필리아와 에로스의 차이점에 대해 그리스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인용을 이어간다. 같은 사람을 놓고 에로틱한 사랑과 우정을 함께 가질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우정만큼이나 사랑과 거리가 먼 것도 없다. 연인들은 항상 사랑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친구는 거의 없다. 연인은 일반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 흡수된다. 그러나 친구는 서로를 보는 게 아니라 나란히 한 곳을 바라보며, 공통 관심사에 몰두한다. 무엇보다 에로스(최소한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는 필연적으로 단지 두 사람 사이에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정에 있어서 두 사람이라는 숫자는 필요 조건도 아닐 뿐더러 반드시 최상의 숫자도 아니다. 반성애(Demisexuality)와 진정한 에로스의 죽음또는 에로스를 “게이”, “레즈비언” 또는 “양성애자”와 유사한 성적 정체성 내지 지향으로 재정의함으로 단순한 동물적 육체로부터 에로스 자체를 구하려는 노력을 생각해보자. 뉴욕 주지사의 딸인 미카엘라 케네디 쿠오모(Michaela Kennedy-Cuomo, 23살)는 최근 스스로 자신을 ‘반성애자(demisexual)’라고 표현한 내용이 담긴 인터뷰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 신조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가디언지(Guardian) 칼럼니스트는 반성애자를 “일단 강렬한 정서적 유대가 먼저 형성되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사람들”로 정의하다. 그 칼럼니스트는 소위 성적 성향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눈에 띄지 않는지, 그렇기에 쿠오모와 같이 이미 부유하고 특권층인 젊은 여자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굳이 이처럼 난해한 성적 정체성을 선언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칼럼니스트는 계속해서 누군가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있어서 감정과 관계가 수행하는 역할에 관해 굳이 선언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가 되려면 우리 문화가 얼마나 더 성적이고 음탕해져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나는 성에 관한 대화에 실제 에로스(actual eros)를 다시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낀 쿠오모야말로 지금 우리가 다양한 유형의 사랑을 어떻게 혼동하고 또 융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로서 제시하고 싶다. 구원하는 사랑우리 문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 때때로 사랑과 생식기를 동의어로 취급할 정도다. 또 어떤 경우에는 모든 사랑, 심지어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까지도 함께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 사이의 강렬한 우정 형태에 불과하다는 영지주의적 이상을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플레이보이(Playboy)와 홀마크(Hallmark, 카드 회사) 사이를 오가며 어떤 순간에는 동물적 욕망을, 그러다가 다음 순간에는 감상적인 사랑을 찬양한다. 여러 사랑이 다투는 현실 속에서 볼 때, 진짜지만 시큰둥한 우정은 “억압된 동성애” 정도로 중상모략을 당한다. 그리고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인 아가페 사랑, 즉 그리스도로 하여금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도록 이끈 신성하고 영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다른 사랑들을 소생시키고 성화시키려고 의도하신 그 사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루이스의 책, ‘네 가지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스토르게, Storge), 에로스 사랑(Eros), 친구간의 사랑(Philia) 및 아가페 사랑(Agape)을 올바르게 구별하도록 함으로써 오늘날 문화가 각각의 사랑의 이해에 끼친 피해를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장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루이스가 이 네 가지 사랑에 대한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지식을 끌어낸 우물인 성경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불어 루이스는 이 네 가지 사랑을 완벽하면서도 뚜렷하게 구분해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연인인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마음을 고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 원제: Your Spouse Doesn’t Have to Be Your Best Frie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가정
결혼
친구와의결혼
성경적인결혼
왜곡된결혼
네가지사랑
진짜사랑은예수님
C.S.루이스
영혼의 감독자가 제대로 보고 행동해야하는 이유
by Joe Rigney
2021-10-05
목사, 장로, 감독(overseer).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직책을 표현하는 세 가지 용어이다. 현대 기독교인이 교회 지도자를 언급할 때, 첫 번째 단어인 목사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두 번째로 장로를 쓰지만, 세 번째 감독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직책과 업무를 이해하는 데 이 세 가지 용어는 모두가 도움을 준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선한 일을 사모하는 감독의 직분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의 끝부분에서 한 가지 대답을 준다. 그곳에서 그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벧전 5:2)라고 명령한다. 따라서 교회의 장로는 하나님의 양 떼를 감독하며 목양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목양의 맥락에서 감독의 의미를 풀 때 모든 장로를 부르신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보는 것, 거기에 더한 책임그럼 목양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실제 목자와 양의 사례를 든다. 목자는 양을 돌본다. 목자는 양 떼를 이끌고 또 양 떼를 먹인다. 목자는 양 떼를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곰과 이리와 우는 사자로부터 지키고 보호한다. 그들은 양의 건강과 안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병들 것 같은 양을 위해서는 먹이를 살피고, 진짜로 병에 걸리면 약으로 치료한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해낸다. 공격하는 사자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양 떼를 지킨다. 베드로가 추가한 “감독을 행사하는 것(한글 성경에서는 ‘양무리를 친다’로 번역)”을 고려하면 의미는 더 명확해진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그냥 보는 것(sight)과 감독(oversight)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감독에는 당연히 보는 것이 포함된다. 명확하게 보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감독할 수 없다. 그러나 감독은 단지 보는 것 이상이다. 감독은 거기에 책임까지 더한 것이다. 감독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즉시 조치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당신은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제대로 보고 “조치해야 한다.”보는 것에 실패장로가 실패할 수 있는 영역을 생각할 때 그들의 사역을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감독이 보는 것과 그에 따라 행동하는 책임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이 사실에서 목회자가 실패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을 본다. 첫 번째,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실패하는 경우다. 그들은 언제 무리에게 질병이 퍼졌는지 알지 못했다. 늑대 무리가 언덕 위로 기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고, 양가죽을 입은 늑대에게 속았으며, 진짜 양을 늑대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물이 오염된 사실을 보지 못했다. 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했다는 것은 실패한 목양을 의미한다.교회 상황으로 보면 장로가 그들의 양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지는 거짓 가르침을 보지 못할 수 있다. 특히나 기만적인 가르침이 남성 사역, 여성 사역, 아동 청소년 사역, 상담 사역과 같은 하위 그룹을 통해 전체 커뮤니티로 퍼져갈 수 있다. 또한 장로가 교인들 사이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는 파괴적인 행동 패턴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험담과 중상모략, 믿음 없는 의심, 독선적인 리더십이나 수동적인 리더십 또는 헌신자를 비난하거나 헌신자를 이용하는 것 등 잘못된 믿음과 파괴적인 행동 패턴이 교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것을 제때 보지 못한다면 장로는 감독하지 않은 것이다. 행동하는 데 실패두 번째, 장로가 알면서 행동하지 않을 수 있다. 퍼지고 있는 질병을 보지만 제대로 약을 바르지 않는다. 늑대를 보지만 도리어 두려움에 움츠린다. 오염된 물을 보고도 양 떼를 다른 목초지로 옮기지 않는다. 행동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보살피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교회 상황으로 보면 장로가 거짓 가르침을 진리로 무장하여 대적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오류를 수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참으면서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는 그와 반대로, 그런 오류가 특정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 대응하여 신학적 갈등만 더 확대할 수도 있다. 그들은 사소한 문제를 너무 자주 일으킬 수도 있고(또는 진짜 중요한 문제를 사소하게 처리할 수도 있고), 조바심이나 게으름으로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파괴적인 행동 패턴에 직면했을 때 장로가 냉정하고 명료한 판단과 진실한 사랑으로 무장하지 못해서 제대로 말을 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그들은 교인이 “교회를 떠남으로 의사를 표시(vote with their feet)”하고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두려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다루는 것을 회피할 수도 있다. 전혀 평화롭지 않은데도 “평화, 평화”라고 포장하고 싶은 충동에 굴복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만날 때 장로는 분명한 위험을 알기에 그들 앞에 놓인 문제를 현명하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용기가 부족할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은 감독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치명적인 유혹아주 교묘하고 치명적인 유혹에 빠져 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목회자도 있을 수 있다. 이런 목회자는 분명히 보고 있고, 눈에 보이는 현상과 관련해 용기와 연민으로 행동할 준비까지도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양 떼의 특정한 필요, 염려, 문제, 위험, 유혹 등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눈은 위험을 멀리 그리고 넓게는 볼 수 있지만, 정작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인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베드로의 부름은 구체적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양 떼를 치는 것”이 아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치라”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기 교인을 돌보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남의 교인이 아니다. 다른 목자의 양이 아니다. 목회자는 자신이 맡은 자들을 감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스턴트 뉴스와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는 이런 사실의 중요성을 놓치기 아주 쉽다. 목회자가 저쪽에 있는, 도시 반대쪽이나 나라 반대편에 있는 양 떼의 건강을 놓고 걱정하기는 쉽다. 그러나 정작 자기 양 떼가 처한 위험은 무시하고 저 멀리 다른 양 떼의 위험을 지적하는 것이 사랑이 많은 목자, 더 목자다운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정작 자기 교회에는 홍수가 났는데 다른 동네나 다른 교단에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모습, 온라인에서 차고 넘치는 화재를 진압하겠다며 양손에 소화기를 들고 뛰어다니는 목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지혜롭고 신실한 목자는 그들 가운데 있는 양 떼의 필요와 염려, 그들이 처한 문제와 위험 그리고 유혹과 관심사에 주의를 기울인다. 더 많은 눈과 더 많은 손보지 못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위험에 직면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큰 도움을 주셨다. 첫 번째는 다수의 장로이다.지역 교회 장로에 관한 신약의 모든 언급에서처럼 베드로는 장로를 복수로 말한다. 장로가 여러 명일 때 더 많이 보고 더 잘할 수 있다. 한 명의 양치기가 360도 시야를 확보할 수는 없다. 한 명의 양치기는 거시적 위협과 미시적 위험에 주의를 기울일 수는 없지만, 양치기 팀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어떤 목자는 수평선을 동쪽으로 훑어볼 수 있고 또 다른 목자는 지평선을 서쪽으로 훑어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멀리 떨어진 위협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늑대 무리가 계곡에 정착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다. 또 다른 사람은 목초지의 상태와 개별 양의 건강 문제가 소홀히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장로가 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되어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함께 치면 혼자 보고 행동할 때보다 더 많이 보고 더 큰 지혜와 명철로 행동할 수 있다.감독자를 위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두 번째 도움은 기도이다. 감독을 행사하라는 부름과 잠재적인 두 가지 실패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좋은 방법을 제공한다. 하나는 목회자가 교회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을 분명히 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현실에 주목해서 자신이 담당한 교인들의 필요와 위험 그리고 그들의 상황과 유혹까지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전국의 많은 교회에서 화재가 발생했지만, 우리 교회는 홍수가 났다면 우리가 원하는 목사는 소방관과 소방 호스가 아니라 모래주머니와 구명 뗏목을 들고 오는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목회자가 양 떼 속에서 봐야 할 것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와 행동할 용기와 동정심을 갖고 말씀을 통해서 양들에게 최선의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보아야 할 것을 본 목회자는 이제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무엇을 행동해야 하는가? 누가 그것을 말해야 하는가? 언제, 얼마나 자주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목회자로서 감독을 잘 하려면 마음과 배짱(nerve), 용기와 연민, 복수의 동역자(plurality)와 책임 그리고 가르침과 기도가 필요하다.원제: Overseers of Souls: Why Elders Must See and Ac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교회
교회사역
감독자
목양
목회사역
장로
목자
목회자
동역자
양치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기
by David Boxerman
2021-10-04
내가 만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 개인적인 결정을 내릴 때, 특히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중요한 결정일 경우(“하나님이 예비하신 결혼 상대가 이 사람이 맞습니까?” 혹은 “이 일자리가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이 명확한 답을 주시길 우리는 바란다. 그렇게 바라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게 아니다. 특히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잡고 책상에 앉아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한다. 편안한 자세로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다 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시기를 원한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굳이 내가 나서서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기 전에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알아서 그 일을 이끌어 가기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개인적인 결정을 내릴 때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그 인도하시는 방향을 바로 알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우리는 성경이 계시한 것 외에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려 하는 가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도움을 주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찾아낸 사실은 개인적인 의사 결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주신 원칙을 따르는 바로 그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서 꼭 필요한 구체적인 결정을 내릴 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도움을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방법이다. 가장 기본이 되고 꼭 필요한 처음 두 개를 제외하고는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다음에 설명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가야 할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1. 성경: 드러난 하나님의 뜻 그리고 “신앙과 삶의 유일한 원칙”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결정의 지침과 조언을 구하는 데 있어서 분명하고 오류가 없는 유일한 원천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5-6).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어기는 결정이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2. 기도: 믿음에 기반을 둘 때 하나님은 들으신다그분은 사랑 많으신 아버지이시며 의사 결정 과정에서 언제나 도와주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3. 당신을 잘 아는 거룩하고 성숙하며 성경적으로 지식이 많은 기독교인이 주는 조언우리가 내린 결정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 우리가 고려하지 않은 잠재적인 위험, 도전 또는 기타 요인(사각지대)을 경고할 수 있는 사람과 의논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3:10).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잠 20:18). 이러한 일반 원칙을 자주 위반하는 것 중 하나는 덜 성숙한 사람이나 비기독교인 친구에게 상담을 받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잠 12:5)라는 말씀에 근거할 때 상담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성경에 정통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4. 준비, 확인, 창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오류가 전혀 없는 상황 해석이란 게 있을 수는 없겠지만, 약간의 오류를 인정하더라도 그 상황 또는 환경은 주님의 지시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정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아직 오지 않은 기회조차도 주님의 주권 아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타이밍이나 기회의 방향을 하나님이 언제라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요소이다. 5. 이미 주신 하나님의 빛 속에서 순종함으로 걷는 것“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요일 1:7). 우리는 빛 가운데서 걸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명하게 밝히신 부분조차 인정하지 않고 그분을 무시하는 가운데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그런 요청을 하나님이 들어주실 이유가 없다.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7-8).6. 관심사, 은사, 소망 및 재능하나님은 우리의 소망, 은사, 재능을 통해 그분의 뜻으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과 능숙하게 하는 일을 결합하여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 12:6).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4-5).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 10:24).7.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이 결정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 나만 위한다면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요소까지 고려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빌 2:4).8. 내적 평안의 여부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남용되는 기준일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뜻이라고 느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찾기보다는 합리화나 죄의 변명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감정은 결코 최종 결정자가 아니다. 감정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어떤 일과 관련해서 평안을 말하려면 다음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요약하면, 하나님의 인도 방법은 섭리 가운데 원칙을 따르게 하시고 더 나은 것을 찾게 하시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구하고, 성경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하고, 대안을 비교하고, 조언을 저울질하고, 마음의 소망을 고려하고, 스스로 능력을 평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신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그분이 더 놀랍게 역사하실 일이 무엇인지, 어떤 방법으로 역사 하실지를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역사를 받기에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면 놀라운 지혜는 언제라도 주어질 것이다. 주의와 위로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이 “처방”과 더불어 경고 라벨이 붙어야 한다. 프로세스의 한 측면을 강조하다가 자칫 다른 측면을 간과하게 될 때 어려움은 불가피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과정에서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단일 소스” 솔루션은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감정’이다. 특히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집중하여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할 때 ‘나쁜 결정에는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죄는 언제나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라는 내용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개인적인 결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여전히 정확하지 않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의 일과 욕심을 살피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은 거짓된 것이라고 말한다(렘 17:9). 우리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해야 하지만, 누군가의 조언은 또 다른 사람의 조언과 얼마든지 상충할 수 있다(잠 18:17). 우리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만, 상황 판단만으로는 결코 오류 없는 지침을 내릴 수 없다(창 3:6).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만, 그분의 응답은 직접적인 계시나 환상의 형태로 오지 않는다(히 1:1-2).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차선책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최선책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모든 결정, 심지어 잘못 내린 결정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그의 모든 거룩한 뜻과 궁극적인 목적을 항상 성취하신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편 57:2).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어떤 결정을 내릴 때 평화와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궁극적인 선과 그의 최종 영광을 위해 모든 결정 과정에서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에 개입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분을 찾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선하고 옳은 일을 하려는 올바른 동기로 내린 결정이라면 대부분 상황을 더 쉽게 만든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일을 망치고 엉망이 되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실수까지도 선용하신다. 여전히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 불안과 두려움이 휘몰아치는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평화와 위안은 오직 하나, 그분이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원제: God’s Will and Personal Decision Making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의뜻
인도하심
의사결정
섭리
은사
내적평안
차선책
성경
찬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by Shai Linne
2021-10-03
20여 년 전 내가 기독교로 회심했을 때 어머니 교회에서 보낸 첫 주일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교회 예배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상상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자라면서 나는 가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 건물에 발을 디뎠다. 어머니와 내가 알고 지내는 몇몇 기독교인들은 여러 해에 걸쳐 나를 교회에 초대했다. 내게도 구원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라는 그들의 생각을 속으로 비웃으면서 나는 항상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몇 주 전에 나는 요한복음을 읽은 후 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갑자기 나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게 강력하게 자신을 계시하신 나의 보배로운 주 예수님을 환호하는 데 나만큼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자리로 걸어가는데 이름 모를 성도들이 수차례 멈춰 서서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나를 위해 기도해 왔다고 말했다. 반주가 시작되자 모두 일어서서 한참 동안 ‘찬양과 경배’에 전념했다. 노래하고, 박수치고, 춤추고, 외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회중 전체가 동참하는 경배 찬양은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며 매우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모든 찬양이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멜로디가 익숙해지자마자 바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한 곡은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사랑의 기쁨과 단순함을 잘 포착하고 있었다.주의 이름 높이며주를 찬양하나이다나를 구하러 오신주를 기뻐하나이다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위에십자가를 지시고 죄 사했네무덤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리셨네주의 이름 높이리주님을 영접한 초기에 나는 위의 찬양 가사처럼 교회에서의 찬양을 주로 나의 구원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때는 찬양이 성도의 성화를 위한 은혜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성화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리 대부분은 성경 말씀, 믿음, 성령, 시련, 시험, 고난, 기도와 같은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 모든 단어들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더 닮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신자 개개인과 회중 모두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잘 자라도록 돕는 데 찬양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나타난 새 언약의 더 큰 영광을 대조한다. 그는 18절에서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되어가는지에 대해 강력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다음 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들이 발견한 성경의 진리를 공개적으로 진술하는데, 그 말씀을 통해 이 영광스러운 성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부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설교나 성경 연구 또는 개인의 헌신과 연관시킨다. 그러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엡 5:19)로 우리가 함께 찬양할 때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렇다, 찬양은 정말 사람을 변화시킨다!우리는 고난, 어려움, 의심 또는 낙담을 다루는 시편 기자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희망의 표현으로 결론을 내리는 수많은 시편에서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특히 시편 3, 22, 31:9–24, 38, 73 참조).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은 단순히 더 좋아진 기분이 아니라 영적으로 심오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깊어지는 사랑과 같이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특별한 은혜다. 시편은 원래 하나님 백성의 찬송가였다. 교회는 이 시편들을 시대에 걸쳐 메아리쳐 왔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원저자들이 처음 시를 썼을 때 경험했던 것과 같은 영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이것은 우리가 성경과 복음으로 충만한 노래를 부를 때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든 노래로 불리든 영광이 그분께 돌려진다. 복음은 묵묵히 읽든지 선율로 읽히든지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기독교인들이 기쁘게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 스스로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순복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된 자들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경험은 거의 없다.회중이 함께 모여 성경 말씀에 근거한 복음 중심의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강화되고 있는가? 또 복음에 대한 감사가 깊어지고 죄의 유혹이 약해지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고조되었는가?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 말씀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베푸시는 친절이다.나는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교회 예배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한다. 히브리서 6장은 우리가 “내세의 권세”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암시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가 교회에서 말다툼을 하거나 예배 중 키보드의 시끄러운 소리나 예배 후의 점심 식사 계획으로 주의가 산만해지면 그것을 쉽게 놓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가 모임에 참여하면, 죄인들이 모든 얼룩진 죄과를 벗게 된다는 찬양을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방황하거나 사랑하는 하나님을 떠나기 쉽다는 것을 노래로 다시 고백할 때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게 될 수 있다. 우리는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고 자비롭고 전능하신 삼위의 하나님, 복되신 삼위일체’를 말로 표현할 때 경외심에 압도될 수 있다. 우리가 월요일을 맞으며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주일을 통해 그분이 승리하심으로 죄의 저주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우리 교회의 전통 중 하나는 모임이 끝날 때 서로에게 축복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하나님의 사랑과성령의 교통하심이지금 그리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기를지금 그리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기를우리는 찬양을 드리며 형제자매들을 둘러보고 음악에 맞춘 성경 말씀으로 서로 격려한다. 그리고 매주 나의 이야기는 똑같다. 내가 교회에 와서 느낀 것이 무엇이든, 지난주에 얼마나 힘들었든지 간에, 우리가 거룩한 세레나데에 참여하면서 성도들과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에 무언가 일어난다. 항상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찬양을 드리고 나면 내가 예배를 드리러 교회 안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항상 지구를 뒤흔드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거기엔 뭔가 다른 초월적인 것이 있다.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찬양은 진정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원제: Yes, Singing Really Does Change People출처: www.9marks.org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찬양
변화
주의이름높이며
회중
시편
성화
십자가
삼위일체
처음
이전
86
페이지
87
페이지
88
페이지
열린
89
페이지
9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