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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꼽은 2023년 10대 신학 사건
by Collin Hansen
2023-12-19
수년 동안 J. K. 롤링은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트랜스젠더를 거부하는 거의 유일한 주류 인사였다. 한때 동성애자의 권리를 지지하기 위해 펜을 휘둘렀던 그녀가 논리적으로 볼 때 성 혁명의 다음 단계를 밟지 않음으로써 많은 팬은 배신감을 느꼈다. 악명 높은 Tavistock 성 정체성 클리닉이 작년에 폐쇄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올해 영국 총리 리시 수낙은 성명을 통해서 동성 결혼에 대한 새로운 종류의 혼합 지지와 트랜스젠더 이념 거부를 비준했다.그리고 10월 7일에 군인과 민간인, 남녀노소를 불문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시작되었다. 실로 엄청난 놀라움과 공포를 가져다준 사실은 서구의 주요 도시와 명문 대학 캠퍼스에 하마스를 지지하는 군중이 모였다는 사실이다. 하마스가 LGBT+ 정체성을 반대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위자들은 스스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동성애자”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결국 하마스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훈련하고 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마스가 자유주의 지지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일부 하마스 지도자들은 억압받는다는 주장이야말로 자신들을 감시하는 서구 세계를 향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도구임을 인식했다.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동성애자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가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시위가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그리고 대학 총장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량 학살을 옹호하는 발언을 비난할 준비도 하지 않고 의회 청문회에 들어갈 수가 있는가? 존스 홉킨스 대학의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야샤 뭉크(Yascha Mounk)는 이런 현상을 “정체성 합성”이라고 부른다. 뭉크는 신작 The Identity Trap에서 올해 들어서 좌파 진영에서 과도한 비판적 인종 이론과 교차성, 그리고 성, 인종, 성별에 따라 정체성 그룹을 양극화하는 기타 교리에 대한 반대가 증가했음을 보여 준다. 이리저리 맞물린 탄압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동성애자” 그리고 여성 스포츠를 장악한 남성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등 전혀 일관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뭉크는 이렇게 썼다. “누군가가 교차성에 헌신하는 페미니스트 운동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이제 그 운동의 활동가들은 새롭게 참여하는 사람이 인종 차별의 본질, 장애인이 겪는 불의, 그리고 팔레스타인 분쟁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일련의 구체적인 입장에 동의할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뭉크의 우려를 공유하는 사람은 러시아 문학 분야의 선도적인 전문가인 Northwestern University의 게리 사울 모슨(Gary Saul Morson) 교수이다. 새로운 대작, Wonder Confronts Certainty에서 모슨은 “피해는 그 자체로 악에 대한 하나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피해자는 이제 자신이 초래하는 피해를 정의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의 관찰은 하마스의 공격에 적용이 가능하고 또한 이스라엘의 보복에 대한 경고로도 읽힌다. 모슨은 도스토옙스키가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복음의 심리학적 진리를 보여 주었다고 주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기억에 남는 인물들을 통해 예수님이 산상 수훈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설명한다. 악은 단지 나쁜 행동뿐만 아니라 합당하지 않은 욕망이기도 하다. 살인자의 행동만이 악이 아니다. 악은 비통한 마음이 품는 의도에도 담겨 있다. 그렇기에 억압받는 사람이 종종 억압자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는 악한 시대를 통해 길을 보여 주신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억압의 순환에 쐐기를 박는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요 15:13).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할 수 있다(눅 6:27). 정체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평화를 찾도록 도울 수 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복음은 더욱 빛난다.매년 회고의 글이 그렇듯, 올해에도 최고의 신학 사건을 식별하기 위해서 나는 TGC를 구독하는 미국인의 관점에서 글을 쓴다. 이것은 작은 세상 한구석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의 모습이다. 10. 남침례교 총회는 여성 목회자 문제로 새들백 교회를 제명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단이 가장 유명한 목사가 개척한 교회와 관계를 끊는 순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하다. 릭 워렌은 여성을 주요 사역 직위에 앉히지 못하도록 하는 교단의 견해를 바꿔 달라고 남침례교 총회에 호소하는 입장을 밝혔다. 꼭 워렌이 아니더라도, 여성을 목회자라고 부르는 교회를 훨씬 더 많이 제명할 근거를 줄 헌법 개정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거의 모든 신학적 요점에 동의하는 침례교도들조차도 선교를 중심으로 연합된 이 협약에서 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해서만은 일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9. 선거 패배 이후 생명 보호 운동이 재편성되었다.여러 측면에서 볼 때, 생명 보호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Dobbs가 Roe를 뒤집은 첫해인 2023년 첫 육 개월 동안, 이전이었다면 낙태를 선택했던 어머니에게서 약 3만 2,000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의롭고 생명을 보장하는 법은 실제로 행동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번 가을 선거에서 오하이오에서는 낙태 옹호론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켄터키와 버지니아 전역에서는 낙태 반대론자들을 패배시켰다. 생명 보호 운동의 다음 단계로 중요한 건 설득이다. 태어나지 않은 모든 아기가 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것으로 대우받도록 가르쳐야 한다. 8. 티모시 켈러가 사망했다. 팀 켈러가 사라진 지금, 복음주의 진영에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에 대해 폭 넓은 경험과 깊이 있는 통찰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확실한 후계자가 없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과연 어떤 다른 글을 썼을지 궁금하다. 예를 들어, 정체성에 대한 서구인의 집착과 같은 주제를 성경 주석과 문화 분석을 독특하게 결합해서 써내려가는 글 말이다. 그러나 켈러가 이전 세대의 신학자들로부터 배운 것처럼 켈러를 존경했던 지금 세대에게도 하나님이 여전히 당신의 신실하심을 증명하실 것이다. 7. 기독교 민족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새 하원의장에게 집중되었다. 미국 국회의사당 테러 이후,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이 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그 용어를 정의하기란 어렵다. 좋은 것, 나쁜 것, 추한 것이 다 조금씩 이 용어 안에 스며들어 혼합되었다. 지난 10월 미국 하원이 마이크 존슨을 의장으로 선출했을 때, 그는 가장 강력한 대표로서 빠르게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과 연결되었다.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기치 아래 옛 종교적 우파부터 새롭게 부활한 신정(theonomy)에 이르기까지, 비평가들이 모든 걸 하나로 묶으려고 할 때, 그들은 법이 필연적으로 도덕성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든다. 단지 그 영향력이 기독교에서 나올지, 다른 종교에서 나올지, 아니면 어떤 세속적인 변형에서 나올지의 문제일 뿐이다. 6. 대중의 이목을 끄는 개종은 세속주의에 대한 환멸을 암시한다.새롭게 기독교에 들어온 아이야 히르시 알리(Ayaan Hirsi Ali), 캐서린 본 드라첸버그(Katherine von Drachenberg), 그리고 몰리 워든(Molly Worthen)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히르시 알리는 신무신론(New Atheism)의 주요 대변인이었다. 리얼리티 TV에서 문신 예술가로 명성을 얻은 본 드라첸버그는 주술과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워든은 역사를 공부하고 미국의 가장 유명한 대학에서 가르쳤다. 그들의 이야기는 특히 여성에게 희박한 대안을 제시하는 세속 시대에 복음의 능력을 상기시킨다. 예수님이 여성을 위해 모든 걸 바꾸셨던 반면에 세속주의는 남성 지배로의 복귀를 위협한다. 5. 탈교회 추세가 기대를 뛰어넘었다. 올해가 되어서야 우리는 지난 25-30년 동안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규모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크고 빠른 종교 관행의 변화로, 약 4천만 명의 미국인이 교회 뒷문으로 도망쳤다. 아니, 다시는 교회 정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반제도적 정신을 고려할 때, 당파 정치와 학대 스캔들을 탈교회의 주요 원인으로 의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신학의 격하도 의심할 바 없이 한 몫을 했다. 그러나 단지 이사하고 새 교회를 찾지 않는 등, 탈교회의 진짜 이유는 평범하다. 그럼에도 좋은 소식은 신학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많은 교회가 그나마 쉽게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환대 실천에 대한 도전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4. Z세대가 영적 부흥의 조짐을 보인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어린 세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읽으면 당장 널리 퍼진 정신 질환과 성별과 성적 지향에 대한 혼란 때문에라도 걱정부터 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1960년대에도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청소년에 대해서 낙관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며 당시는 예수 혁명으로 부흥하지 않았던가? 올해 발생한 에즈베리 각성에 대한 신학적 평가에서는 열정적인 예배와 진정한 부흥에 대한 고무적인 징후가 많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주님께서 코로나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고통을 견뎌온 이 젊은 세대를 위해 부드럽고 감미로운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고 계신 거 같다.3. 활동가들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부터 성의 신학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어느 정도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앤디 스탠리가 복음주의자가 동성결혼을 축복하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받아들이기는 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성적 행위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도록 로마가톨릭 신자들을 계속해서 촉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서 놀라는 사람들도 없다. 마찬가지로, 현대 기독교 음악은 종종 성경적 도덕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영국 성공회는 수년 동안 동성 결합을 축복했고, 성공회 내에서 분열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왔다. 구도자에 민감한 복음주의자, 음악계의 거물, 로마가톨릭, 국가 교회 등을 막론하고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신학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회 철학이다. 역사는 실용주의와 복음주의가 결합하는 순간, 결국에는 신학적 자유주의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현명한 신학생과 대학생은 남성과 여성을 각각 만드신 하나님의 설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드러내는 기독교 인류학 수업에 몰려들고 있다.2. ChatGPT는 기술 미래학자들을 두렵고 놀라게 한다. 아마도 2007년 아이폰 출시 이후, 대중의 관심을 끌 만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적이 없는 거 같다. OpenAI CEO 샘 알트먼(Sam Altman)의 미스터리한 해고와 재고용은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 획기적인 기술은 교회 사역과 신학 교육, 그리고 거의 모든 영역에서 좋은 방향이든 또는 나쁜 방향이든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이는 이미 AI가 정보를 발견하고 정리하는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젊은 세대를 따라잡으려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ChatGPT가 당신의 설교를 작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설교를 단지 데이터 전송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1. 이스라엘 군대와 민간인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이 예상치 못한 지원을 받았다.10월 7일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공격의 규모와 파괴는 전 세계,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 정보부, 군 지도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진짜 큰 충격은 무고한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까지 살해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하마스의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하마스가 높은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다. 많은 하마스 지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식민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정당화가 수천 년 동안 경쟁을 벌여온 토지에 대해 명확성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약속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우리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할 수 있다(시 122:6).원제: My Top 10 Theology Stories of 202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임의의 작은 친절
by 전재훈
2023-12-18
예전에 재밌게 봤던 영화 중에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짐 캐리가 주인공 브루스 놀란 역을 맡았습니다. 브루스가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전능을 위탁받게 되면서 펼쳐지는 사랑이야기지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전능은 반드시 전지를 수반해야 하는 거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전지를 갖지 못하고 전능만을 가지고 있던 브루스로 인해 세상이 엉망이 되었거든요. 브루스 올마이티 후속으로 ‘에반 올마이티라’는 영화도 재밌게 봤습니다. 에반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노아처럼 방주를 짓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댐이 무너진 도시에서 에반이 지은 방주로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방주를 짓는 미치광이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가던 에반의 아내가 휴게소에서 하나님과 나눈 이야기가 압권이었습니다. “누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신은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줄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기회를 주시려 할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만일 누군가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뿅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도록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기회를 주실까요?”그녀는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방주가 완성될 수 있도록 남편을 돕습니다. 저는 이 대사 말고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임의의 작은 친절’이라고 했던 에반의 말에 하나님이 바닥에 ‘ark’라고 씁니다. 그렇습니다. 방주라는 뜻이지요. 이는 임의의 작은 친절(Act of Random Kindness)의 머리글자였습니다. 영화는 타인에게 이유 없이 베푸는 작은 친절이 세상을 바꾸는 노아의 방주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방주를 항상 심판으로만 이해했던 저에게는 홍수가 심판이고 방주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던 중에 베푸신 작은 친절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ark’에는 나무로 만든 상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방주와 언약궤를 모두 ‘ark’라고 하지요. 하지만 방주를 히브리어로는 ‘테바’라고 합니다. 테바는 방주뿐만 아니라 모세의 갈대 상자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만들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홍수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게 하셨지요. 모세의 갈대 상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이스라엘 사람의 남자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으로부터 모세를 지키기 위해 어머니가 아기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웠던 상자였습니다. 모세는 나일 강변에서 목욕하던 이집트 공주의 손에 건져져 후대에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는 지도자가 되었지요.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구유를 상기시켜 줍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누가복음 2:10-12)이 말씀은 천사들이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려주실 때 했던 말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표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유는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갈대 상자와 같은 느낌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방주에 탔던 노아는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고,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이스라엘로 태동시킨 인물이 되었지요. 그리고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반 올마이티의 대사처럼 방주가 세상을 바꾸는 임의의 작은 친절이었다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C. S. 루이스가 남긴 마지막 글: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
by Trevin Wax
2023-12-16
이전에 쓴 칼럼 둘(아메리칸드림은 저절로 불이 켜졌을까?와 자유와 한계, 행복에 대한 ‘권리’)에서 나는 아메리칸드림, 행복 추구, 그리고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의하는 자유를 살펴보았다. C. S. 루이스는 1963년 사망하기 직전에 Saturday Evening Post에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라는 논평을 기고함으로써 마지막 글을 남겼다. 이 짧은 글은 영원한 법칙에 대한 순종과 ‘행복’의 분리라는 문제, 그리고 나아가서 ‘성적인 행복’이라는 권리를 추구함으로 인해서 행복에 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뿐 아니라, 결국에는 인류 문명의 본질까지 필연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탁월한 통찰을 보여 준다. 다음은 루이스의 글 전문이다. C. S. 루이스: ‘우리에겐 행복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중요한 건 말이지요. 그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라고 클레어가 말했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언젠가 일어났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A는 B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내를 버리고 이혼했고, B도 A와 결혼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이혼했다. A와 B가 서로 매우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 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또 건강이나 수입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그들이 앞으로 매우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 두 사람이 과거 배우자에게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도 똑같이 분명했다. B의 경우에, 그녀는 한 때 남편을 아주 사랑했다. 그러나 남편은 전쟁에서 몸이 망가졌고, 그 결과 남자로서 능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직장까지 잃고 말았다. 그런 남자와 함께 사는 삶은 애초에 B가 원했던 게 아니었다. 불쌍한 건 A의 부인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외모가 망가졌다. 더불어서 한때 밝게 빛나던 활력도 없어졌다. 여러 번의 출산과 또 오랫동안 A를 간병하는 중에 그녀의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졌다는 사람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그렇다고 A가 마치 단물 다 짜 먹은 마른 오렌지를 내다 버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내를 저버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녀의 자살은 그에게도 끔찍한 충격이었다. 우리 모두 그 점을 모르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언젠가 직접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그가 말했다.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잖아? 딱 한 번 오는 기회인데, 나는 그걸 놓칠 수 없었어.” ‘행복할 권리’라는 건 도대체 뭘까? 나는 그날 ‘행복할 권리’라는 말의 개념을 생각하면서 그와 헤어졌다.얼핏 보면, 이 말은 마치 행운을 누릴 권리만큼이나 이상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저런 도덕주의 학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관계없이, 행복이나 불행이란 건 인간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무언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게 행복할 권리라는 말은 내 키가 180이 넘는 권리, 백만장자를 아버지로 갖는 권리, 소풍 가는 날에는 항상 날씨가 좋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나는 사회의 법으로 보장되었다는 측면에서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이 사회가 자유를 주기에, 나는 공공 도로를 사용해서 여행할 권리를 가진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도로에 “공공”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이유이다. 나는 또한 권리(right)를 법이 보장하는 요구이자 그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지워지는 의무로도 이해한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백 달러를 받을 권리가 있다면, 그건 당신이 내게 백 달러를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A가 아내를 버리고 이웃의 아내를 유혹하는 것을 법이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엄밀히 말해서 A에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있다는 것뿐이지, 거기에 무슨 행복이니 하는 말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행복과 자연법물론 지금까지 말한 게 클레어의 의도는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는 법적 권리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있다는 게 클레어의 말이었다. 즉, 클레어는 토마스 아퀴나스, 그로티우스, 후커, 로크의 스타일을 따르는 고전적 도덕주의자이다. 물론 그건 그녀가 자기 말을 곱씹었을 때 그렇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국가가 보장하는 법 뒤에 자연법이 있다고 믿고 있다.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 개념은 모든 문명의 기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게 없다면, 국가의 실정법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된다. 판단할 기준이 없기에 비판도 할 수 없게 된다. 클레어의 격언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의 유래는 8월 선언(the august declaration)이다. 모든 문명인, 이건 특히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말로, 인간의 권리 중 하나가 아예 “행복을 추구할 권리”로 규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진짜 요점에 도달했다.8월 선언을 만든 사람들은 그럼 무슨 의미로 쓴 것일까? 자연법의 의미그들이 의미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인간이 아무리 행복하고 싶더라도 살인, 강간, 강도, 반역, 사기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아예 존속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의미는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법이 궁극적으로 승인하고 나아가서 국가의 법까지 승인하는 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 말이 보기에 따라서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권리를 가지는 한도 내에서 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식의, 격언의 원래 의미를 축소하는 동어반복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적절한 역사 맥락에 비추어 볼 때, 동어반복이 항상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은 아니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오랫동안 유럽을 지배해 왔던 정치 원칙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 그 도전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 개혁 법안 이전의 영국, 그리고 부르봉 프랑스에 던져졌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수단이 누구에게나 합법적이어야 하며 특정 계층, 계급, 지위 또는 종교의 사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어느 나라에서도 또 어느 당에서도 이 사실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던 세기였던 만큼, 이것을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그러나 어떤 수단이 “합법적”인지, 즉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자연법에 의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지 또는 특정 국가의 입법부에 의해 법적으로 허용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나는 클레어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에게 무제한의 “행복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성적인’ 행복우선 나는 클레어가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건 아주 단순한 ‘성적인 행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클레어와 같은 여성들이 결코 다른 의미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클레어가 다른 종류의 “권리”에 관해서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치에 있어 다소 좌파적인 그녀이기에 만약에 누군가가 오로지 돈을 버는 데에서만 행복을 찾는 무자비한 살인마 재벌이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면, 그녀는 분명히 크게 분개했을 것이다. 그녀는 또한 광적인 금주론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는 술에 취하면 행복하기에 알코올 중독자로 산다는 사람을 변명하는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다.클레어의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 특히 여자 친구들은 말 옮기기 좋아하는 클레어의 귀를 틀어막으면 자신들의 행복이 눈에 띄게 커질 것이라고 느끼고 있다. 나는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자, 클레어가 과연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의 이론에 친구들의 이런 바람까지도 적용할까? 내 생각에는 그러지 않을 거다. 사실 클레어는 지난 40여년 동안 서구 세계 전체가 하던 일을 그대로 반복했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 모든 진보 진영 사람들은 “왜 그렇게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거야? 다른 모든 충동을 다루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섹스를 다루자고”라며 말하곤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그들이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나는 그들이 사실상 정반대의 의미로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문명이 다루는 인간 본성의 다른 모든 충동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섹스 충동이 다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충동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인정한다. 자기 보호 본능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비겁함이라고 부른다. 다 가지고 싶은 충동은 탐욕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경계를 서는 보초라면 자고 싶은 충동도 참아야 한다. 그러나 목표가 오로지 “침대 위 벌거벗은 네 개의 발”로 바뀌는 순간, 모든 불친절과 믿음의 배신까지도 얼마든지 용납되는 것 같다. 이건 마치 과일을 훔치는 게 잘못된 일이지만, 그게 복숭아인 경우에는 괜찮다는 식의 이상한 도덕성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이런 견해에 항의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의 정당성과 아름다움, 신성함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성을 나쁜 무언가 또는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청교도의 편견을 품고 있다는 비난까지 받을 것이다. 나는 이런 혐의를 부인한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비너스… 황금의 아프로디테… 키프로스의 성모…. 나는 당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복숭아를 훔치는 소년을 반대한다고, 내가 복숭아 전부를 반대하는 걸까? 아니면 소년들 전부를 다? 내가 반대하는 건 단지 도둑질일 수도 있다.성적 충동과 터무니없는 특권이 문제의 진짜 핵심은 A에게 아내를 버릴 ‘권리’가 있는가를 일종의 ‘성도덕’에 관한 문제 중 하나로 간주함으로 실제 상황을 교묘하게 은폐하는 것이다. 과수원 강탈이 ‘과일 도덕’이라는 특별한 도덕에 대한 위반이 아니다. 이는 정직성에 대한 위반이다. A의 행동은 (엄숙한 약속에 대한) 선의, (깊은 빚을 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감사 그리고 공통되는 인간성에 대한 위반이다.따라서 오늘날 성적 충동은 터무니없는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놓여 있다. 성적 동기가 포함되는 순간, 다른 경우에서라면 무자비하고 비열한 배신이며 불의하다고 비난받았을 모든 종류의 행동까지도 다 용인되는 게 현실이다. 나는 섹스에 이런 식의 특권을 부여할 타당한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거기에는 강력한 이유가 있다. 바로 이것이다.성 충동은 강하고 에로틱한 열정이라는 본질을 가진다. 이것은 일시적인 식욕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무엇이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감정과는 달리 더 큰 약속을 하도록 만든다.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의 욕망은 무슨 약속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게 대단한 건 아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계속 사랑할 것이라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확신을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또한 빈번한 황홀경 뿐만 아니라 안정되고 결실을 맺으며 뿌리 깊은 평생의 행복까지 얻을 것이라는 거의 거부할 수 없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이 경우에 모든 것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는다. 이 기회를 놓치면 남은 인생을 헛되게 살 거 같은 위기감마저 느낀다. 그리고 그런 운명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자기 연민에 빠진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랑의 약속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어른이 되면 성적인 열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는 친구들이 떠버리는 사랑에 대한 끝없는 허세 정도는 아주 쉽게 무시한다. (물론 자신이 느끼는 건 제외하고) 우리는 그런 사랑이 지속될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까지 사랑한다고 해도 그게 꼭 시작할 때 했던 약속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두 사람이 지속적인 행복을 얻은 건 그들이 꼭 훌륭한 연인이어서가 아니라, 좀 거칠게 말하면 (이런 표현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그러니까 스스로 통제하고, 신실하고, 공정하고, 상호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행동의 모든 일반적인 규칙을 대체하는 수준으로까지 “(성적인) 행복에 대한 권리”를 확립한다면, 그건 평소의 경험이 그 사실을 증언해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그 열정에 빠져 있는 동안에 그것을 한 없이 소중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쁜 행동은 실제로 비참함과 타락을 가져오지만,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 행복이라는 대상은 여전히 환상으로 남을 뿐이다. A와 B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 년 정도 지나면 A가 옛 아내를 버렸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B를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또 인생의 전부가 위험에 처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 번 더 진짜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볼 것이다. A가 자신을 향해서 느끼는 동정심은 그로 인해서 불행해질 여자를 향한 마음이 조금도 없기에 가능하다. 성적인 행복 위에 세워진 사회살펴볼 게 두 가지 더 남았다. 하나는 이것이다. 부부간 불륜이 용인되는 사회는 결국 여성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몇몇 남자들의 노래와 풍자가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여자는 천성적으로 남자보다 일부일처제를 지향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필요가 만든 결과이다. 따라서 난잡한 행위가 만연한 곳에서 여자는 주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또한 가정의 행복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를 쉽게 사로잡았던 바로 그 특성, 여자의 아름다움은 성숙함을 지나면서 매년 감소한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를 여자로 생각하도록 만든 내적인 특성에 있어서는 그 어떤 감소도 발생하지 않는다. 또 하나 기억할 건, 남자의 외모에 관해서 여자는 단 십 원어치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무자비하고 난잡한 전쟁에서 여자는 이중의 불리한 입장에 놓인다. 아무리 더 높은 지분을 위해 싸운다고 해도 여자는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 점점 더 야박해지는 여자들의 도발에 눈살을 찌푸리는 도덕주의자를 나는 동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렇게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두 번째로, ‘행복에 대한 권리’가 주로 성적 충동에 대한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단지 거기에만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리 치명적인 원리라고 해도 일단 특정 분야에서 자리를 잡는다면, 그건 조만간 우리 삶 전체에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각 개인 뿐 아니라 각자가 느끼는 모든 충동에까지도 백지 위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그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라는 부사를 덧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다. 원제: C. S. Lewis’s Last Written Word: We Have No Right to Happi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일의 신학을 위한 좋은 출발
by 김선일
2023-12-15
세계 3대 전력회사 AES의 최고경영자였던 데니스 바키(Dennis Bakke)는 그 동안 모은 재산으로 겨자씨재단(Mustard Seed Foundation)을 세웠는데, 이곳은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의 도시선교 지원, 그리스도인 인재 장학 지원, 그리고 일의 신학 프로그램 지원 등에 해마다 이삼백 만 달러를 기부해 왔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신학대학원에서도 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의 신학(Theology of Work)을 정식 교과목으로 개설하고 학생들의 등록금과 도서비를 보조해 주었다. 일주일간 집중 수업으로 개설된 이 과목에는 일의 신학과 리더십 연구로 특화된 미국의 기독교대학원인 바키대학원대학교(Bakke Graduate University)에서 강사를 파견한다. 전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의 신학 프로그램이 개설됐는데, 한국은 주로 신학교들이 지원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교인들에게 목회자가 미치는 영향력이 높은 점을 감안할 때, 신학생 때부터 교인들의 주중 일터 생활에 대한 신학적 안목을 형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에서다.일의 신학 수업에서 중요하게 보는 과제 하나가 일터의 그리스도인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당시 수업을 조율하던 나는 이 과제를 건전하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기업을 탐방하는 것으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변의 전문가들에게 문의해서 그동안 알려진 그리스도인이 운영하는 기업들 외에 최근에 새롭게 떠오르는 주목할 만한 기업들 몇 곳을 알아 놨다. 주일성수와 정직한 납세 등으로 기독교적 모범을 보인 회사들뿐 아니라, 경영 그 자체에서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혁신과 창의성을 도모하는 기업들이었다. 학생들을 몇 개의 조로 나누어서 해당 기업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게 했다. 그렇게 학생들은 일터 그리스도인 인터뷰 과제를 수행하고 발표를 했다. 미국에서 파견된 교수는 학생들의 모든 발표를 듣고 수고했다며 칭찬한 뒤 뼈 있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멀리 힘들게 탐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과제의 목적은 훌륭한 기독교 기업을 탐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 전문인과 인터뷰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학생 여러분 주변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유명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친 그리스도인 전문인을 일부러 찾지 마세요. 예를 들어서 아파트에서 경비일 하시는 분이 교회에 다니신다면 그런 분이 좋은 인터뷰 대상자입니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교회 청년도 적합한 대상자고요.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평범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일과 신앙이 관련이 있다고 느끼는지, 교회와 목회자로부터는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 어떤 도움을 받고 있는가입니다.” 꽤 참신한 그리스도인 기업들을 발굴해서 알게 해줬다며 나름 흡족했던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왜 나는 일의 신학을 구상하면서 모범적이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기업인들부터 생각했을까?’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인생의 문제와 해법을 명망가 중심으로 보는 습관에 익숙했던 것인가?’ 이 일을 겪은 뒤 일의 신학에 접근하는 내 관점은 변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귀감이 될 만한 사례를 찾아서 일터 사역의 실체를 제시하려던 방식을 재고해야 했다. 일의 신학은 우리의 일상과 멀찍이 떨어진, 선망할 만한 기독교적 사례를 찾는 작업이 아니다. 일의 신학은 우리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일’이라는 관점에서 관찰하지도, 성찰하지도 못했을 뿐이다. 일의 신학은 ‘일’이라고 내놓을 만한 정규직, 전문직, 혹은 기업경영에서 신앙의 모델을 찾는 것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서 날마다 경험하고 씨름하는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나 자신 또한 수년 전부터 일의 신학을 신학교 교과목에 도입하고, 일터 사역의 필요성을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강조할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것은 통상 알려진 ‘일’의 개념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직업, 또는 일자리와 자연스럽게 연관시킨다.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은 곧 상대의 직업을 묻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도 급여를 받는 고정된 일자리여야 ‘일’을 한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의 신학은 자칫 교회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해 왔던 여성들, 그것도 전업주부이거나 경력 단절 여성들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아울러 일의 신학은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나머지 성년의 자녀들과도 접점이 약해 보인다. 일은 바깥 어딘가에서(out there)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몇몇 교회에서는 일터 사역을 하면서 일의 개념을 확장하여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일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상과 가정에서의 모든 일을 포함하였다.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업주부 여성들이 많은 봉사를 도맡아 왔다. 그러나 일터 사역은 전업주부나 미성년자들과는 무관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제는 단순히 일터 사역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하는 차원을 넘어서, 일의 신학을 더욱 근원적으로 성찰해야만 해결될 수 있다. 일의 신학을 일상과 가족의 차원에서 근본부터 다시 접근해야 한다. 일과 병행되긴 하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고 생각했던 가족, 자녀 양육, 일상의 관계 등이 일의 신학을 위한 출발점이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일을 한다. 급여를 받은 일이든 아니든, 공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일과 더불어 살아간다. 살림살이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의 관계, 친구들을 사귀며 공동체를 이루는 일, 사람을 섬기는 각종 봉사활동,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취미로 식물을 재배하는 일 등 모두가 인간이 자신과 타인을 향하여 의미 있게 에너지를 활용하는 일이다. 존 스토트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일이란 정신적, 혹은 육체적 에너지를 방출해서 공동체에 유익을 주고, 개인의 성취를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존 스토트, 현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261). 일의 유형이나 범위가 중요하지 않다. 일은 직업이나 기업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 일상에서 누구나 참여하고 경험하는 실체다.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일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일이라고 하면 사무실이나 공장을 떠올리고 일의 신학을 말하려면 전문직이나 기업경영에서 모범을 찾는 습관적 행태는 근대적이고, 엘리트적인 일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미래 사회로 나아갈수록 AI 같은 디지털 문명이 전통적 인간 노동을 급속도로 대치할 텐데, 그때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일을 주로 수익을 창출하는 직업이나 활동으로 국한하던 기존 인식에 변화는 불가피하다. 전통적 노동의 종말을 예고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을 돌보며 공공선과 관계된 일들은 계속 늘어난다는 점을 주목한다(제러미 리프킨, 한계비용 제로 사회, 2019). 미래의 일은 재화나 용역을 통한 수익 창출 범위에 국한되기보다는 인간 돌봄이나 공익적 활동으로 확대될 전망이 높다. 일의 신학을 모범적인 기독교 전문인이나 선한 영향력을 끼친 기독교 기업을 발굴하려는 태도는 시대의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일의 신학은 고도를 낮춰야 한다. 일의 신학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현실을 위한 신학이다. 인생 대부분을 교회와 학교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일의 신학은 엄중한 현실적 고민이자 과제다. 교회와 신학교에도 일터의 문화와 위계질서에 대한 고민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육아와 살림만 해왔던 주부들에게도 일의 신학은 중요하다. 자녀들이 자기들의 전공을 선택하고 일을 찾아갈 때 일의 신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소명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의 이웃들도 일을 하며, 일 가운데 살아간다. 일의 신학은 평범한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원래의 의도된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바울이 말한 몸의 가시가 무엇일까?
by Wyatt Graham
2023-12-14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누가 주었을까? 그리고 바울은 왜 가시를 자신을 괴롭히고 “교만하지 않게” 하는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불렀을까? 이 글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이다.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무엇이었나? 가시라는 단어는 은유적으로 바울의 몸에 박힌 막대기를 가리킨다. 가시라는 단어가 은유로 기능하기에 주석자들은 그 은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머레이 J. 해리스(Murray J. Harris)는 사람들이 흔히 바울의 가시를 식별하는 세 가지 방법을 요약한다(2 Corinthians, 532-3). 어떤 정신적 불안 장애로 보는 사람이 있고 또 사역의 대적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의 질병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주석자들은 갖가지 신체의 질병을 제시한다. 나는 심지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에 따른 부분적 실명이라는 주장까지 들은 적이 있다(참고. 갈 4:15). 한 가지 일반적인 견해는 바울이 분명하게 “슈퍼 사도들”을 자신의 적대자로 명명했기 때문에 가시가 그들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Michael Gorman, Apostle, 386). 불안 장애는 사실 너무 추측성이 강하지만, 바울의 사역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따라서 가시는 불안 장애, 질병, 심지어 특정 상대를 나타낼 수 있다.다양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주석자들은 바울의 가시에 대해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꺼린다. 해리스의 결론이다. “정보의 부족 그리고 바울이 쓰는 언어의 모호함은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에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533). 프레드릭 댄커(Frederick Danker)도 여기에 동의하면서 바울의 가시는 “영원한 신비”라고 결론을 내린다(2 Corinthians, 193). 콜린 크루즈(Colin Kruse)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결정하기에는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하다”라고 지적한다(2 Corinthians, 266). 어느 정도 확실성을 가지고 바울의 가시를 식별할 수 없다는 데에는 현대 주석자들이 하나같이 동의한다. 바울은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기에 해석자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나는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그는 가시를 직접적으로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식별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세 가지 추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가시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가 바울에게 주었으며, 사탄의 사자/하수인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가시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가 주었는가?바울은 한 구절에서 가시의 목적을 두 번이나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고후 12:7)이라고 밝혔다. 바울은 “계시”를 받았고, 이 가시가 없었다면 그는 교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시를 누가 주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사탄이 바울의 교만을 꺾으려고 가시를 줄 이유가 없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친히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는 이유로 가시를 제거하지 않겠다고 구두로 말씀하셨다.그리고 해리스가 설명했듯이, 고린도후서 12:2, 4에서 수동 동사의 사용은 하나님을 가리킨다(2 Corinthians, 532). 마찬가지로, 바울이 “내 몸에 가시를 주셨으니”(고후 12:7)라고 말할 때, 그에게 가시를 주는 암묵적 주체는 하나님이다. 그럼 가시를 준 주체가 하나님인데, 어떻게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사탄의 하수인은 무엇인가? 사자/하수인(messenger)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안젤로스(angelos)인데, 바로 여기서 천사(angel)라는 단어가 유래한다. 그리고 바울은 “내 몸에 가시를 주셨으니”라고 말하면서 즉시 그것을 “사탄의 사자/하수인”(a messenger of Satan)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탄이 보낸 천사가 바울의 가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 가시를 준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설명은 천사라는 단어가 (사자/하수인이 되기 위한) 영의 기능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의 본질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근본적인 관찰을 하기 전까지는 이상하게 들린다(Isidore of Seville, Sententiae, I.10.1).모든 천사가 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영이 다 사자 또는 하수인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모두 다 사용하신다고 가르친다. 또는 그레고리오 1세(Gregory the Great, AD 540-604)가 말했듯이, “사탄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숨겨진 정의의 목적을 수행한다”(Moralia, 2.20.38).특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령들이 자신의 공의를 집행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가르친다. 열왕기상 22장에서 선지자 미가야는 선한 영과 악한 영에 둘러싸여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환상을 전한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보좌에서 “누가 아합을 꾀어 내어서, 그로 길르앗의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고 물으신다(왕상 22:20).영 하나가 자원하고, 여호와께서는 그 영에게 어떤 방법으로 아합을 꾀겠느냐고 물으신다(왕상 22:21-22). 이에 대해 영은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습니다”(왕상 22:22)라고 대답한다.여호와께서 그 계획을 확증하신다. “네가 그를 꾀어라.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가서, 곧 그렇게 하여라”(왕상 22:22). 그리고 선지자 미가야는 다음과 같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다. “주님께서는 임금님께 이미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왕상 22:23). 더 유명한 것은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사탄과의 대화에서 먼저 욥을 언급한 건 하나님이었다(욥 1:8). 그건 하나의 암시적인 도전이었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탄은 욥이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비난한다(욥 1:9-11).욥을 사탄과의 대화에 넣은 여호와는 사탄의 도전을 들으신 후, 그가 욥을 해하도록 허락하신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욥 1:12; 또 욥 2:6 참조).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괴롭히도록 허용하셨지만, 욥은 그의 고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라”(욥 1:21). 욥은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가 언급한 것처럼 “주신 이가 여호와시요, 마귀가 빼앗는도다” (Psalm, §28)라고 말하지 않았다.마찬가지로 사무엘상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삼하 24:1)고 말씀하심으로 “다윗을 격동시켜 그들을 치게” 하셨다. 그러나 역대상 21:1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 조사를 하게 한 주체가 여호와인가 아니면 사탄인가? 이 점에서 대답은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들이 그분의 뜻을 성취하도록 허락하신다.또한 시편 78:49에서 말하는 대로, 재앙이라는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파괴하는 천사들의 무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그분의 진노의 길을 마련하셨다”(시 78:50). “파괴하는 천사들”이라는 문구는 “악한 천사들”(מַלְאֲכֵי רָעִים)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헬라어 구약성서(ἀγγέλων πονηρῶν)와 라틴 벌게이트(angelos malos)도 그렇게 번역했다. 더욱이 세 가지 번역본(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자들을 보내신다고 말한다. 이 시편을 해설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 악한 세상에서는 악한 천사들을 통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최고의 공의는 악한 피조물이라도 선용하신다”(Psalm, §28)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모두 다 사용하신다. “사탄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숨겨진 정의의 목적을 수행한다”(Moralia, 2.20.38).이러한 성경 배경으로 볼 때, 사탄의 천사는 사자, 하수인(문자 그대로는 천사의 의미)의 역할이나 직무를 맡은 악령을 가리키는 것 같다.그 사자/하수인은 악한 영이다사탄의 천사나 사자/하수인은 사탄에게 속한 악한 영이며, 하나님은 미가야의 환상에서처럼 악령을 보내시기도 하고, 또 사탄이 욥을 해하도록 허락하신 것과 같은 역할도 맡기신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사탄을 사용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도록 선동함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셨다. 또는 시편 78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출애굽기의 재앙 동안 하나님은 악한 천사들을 통해 진노의 길을 마련하셨다(시 78:49-50).욥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고후 12:8).지금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시고(시 119:68), 악한 영들은 2차 인과율 수준에서 자유 선택에 따라 행동한다고 확증하는 게 기독교 신학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이러한 악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비록 악령들이 자신의 악의적인 목적을 추구하지만 그분의 결정과 재량에 복종한다”(2.20.38).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가르침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나는 요점만 지적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사탄의 영, 즉 악한 영을 통해서 바울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어떻게? 정기적으로 우리의 육신에 고통을 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악마의 방식 그대로이다. 가시는 바울의 몸에 있는 사탄의 유혹과 관련이 있다바울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나는 이 말을 바울의 몸 속에 있는 악한 영이 그를 괴롭힌다는 뜻으로 직설적으로 받아들인다. 몸에 관해 말할 때 바울은 몸 안에는 욕망과 정욕, 곧 죄를 짓게 하는 것들이 있음을 명확하게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육체와 그 정욕과 욕심”에 대해 말한다.그리스도인은 쉬지 않고 이러한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육신에 속했기”(롬 7:14)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욕망을 품고 있다. 바울은 인격과 육체를 의미하는 자신의 “지체” 안에서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는 스스로를 “내 지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에 사로잡힌 자”(롬 7:23)라고 말한다. 바울이 직면한 이 싸움, 우리 모두가 영광 앞에서 직면하는 이 싸움은 그로 하여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고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또한 “육신 안에” 살고 있으며 “죄의 정욕”을 갖고 있다(롬 7:5). 바울도 말했듯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기”(갈 5:17) 때문에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정욕과 욕망은 육신 안에 있다. 그러면 죄가 어떻게 다가오는가? 몸이 금지된 욕망으로 유혹을 받거나, 또는 방종에 가까운 식욕으로 폭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육체에 뿌리를 둔 열정과 욕망이 뜻대로 활개를 펼치도록 고삐를 푸는 것이다. 흔히 그렇듯이, 과거의 신학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지금 다루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세비야의 이시도르(AD 560-636)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육체의 욕망 및 정욕과 연관시켜 그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사탄의 사자가 일으킨 도발로 인해서 바울에게 임한 육체의 자극(참조, 고후 12:7)은 인간의 몸이라는 지체 속 죄의 법에서 나온 것이다(참조, 롬 7:19-23). 왜냐하면 그건 음란한 욕망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 안에 거하면서 저항하는 이런 충동을 쫓아낼 때, 그는 온전해지고 비로소 음란한 기쁨이라는 약점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싸움을 싸웠다는 미덕을 받는다(참조, 고후 12:9)”(Sententiae, II.39.11).이시도르의 요점은 사탄의 사자가 시각, 후각, 그리고 촉각 등 신체의 감각을 통해 바울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정욕은 육신에 있다. 마귀는 육체의 감각과 욕망을 통해 사람을 유혹한다. 비록 육체를 입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육체의 욕망과 정욕을 어떤 식으로 공격했는지에 관해서 이시도르가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그는 다름 아니라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가시라고 결론지었다.결론바울은 몸의 가시를 자신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사탄이 보낸 사자/하수인임을 밝혔다. 나는 이 가시가 육체적인 질병이나 불안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믿지 않는다. 여기에는 몸 안에서, 즉 육체의 욕망을 통해 바울을 유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령이 포함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시련은 바울이 교만하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를 겸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에 있는 슈퍼 사도들이 전체 그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바울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더 오래된 기독교 주석가인 세비야의 이시도르의 해석처럼, 육체를 입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바울을 유혹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이 악령의 공격으로 인해 바울은 교만해지지 않게 되었다. 권력과 명성에 대한 바울의 욕망, 즉 그의 교만은 가시, 즉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악용하려는 특별한 욕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은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시는 육체를 입고 있는 사탄의 사자/하수인 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바울이 육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악령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성경 말씀을 고려하면, 우리는 바울이 겪은 어려움을 어느 정도 종합할 수 있다. 악한 영이 그의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끝끝내 저항했다.이러한 연약함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악한 목적으로 사탄이 심은 몸의 가시가 예수님을 통해서 선이 되었다. 약함을 통해 바울은 강해졌다. 우리도 약함을 통해, 예수님의 은혜로 강해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가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원제: What was Paul’s Thorn in the Fles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 신학...
by 고상섭
2023-12-13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현재까지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 종교적 분쟁의 한가운데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고통의 현장을 보고 있다.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한 손에 성경을, 또 한 손에 신문을 들라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이 문제를 역사적인 시선과 성경적, 신학적 시선 모두를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먼저 역사적인 시선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신학적 시선으로 이 전쟁을 살펴보려고 한다. 기독교는 이스라엘을 지지해야 하는가?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고 교회 소그룹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는데, 중동지역에서 사업을 하는 성도 소수를 제외하고, 성도의 대다수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광화문 집회를 할 때도 그리스도인들이 동원되는 집회에서 특이하게도 미국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동시에 등장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고, 북한 인권 통일문제를 위한 집회에서도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기도 했다.왜 유독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일까? 그 뿌리에는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와 이스라엘 간에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교를 믿는 이스라엘을 기독교가 지지하는 이유는 종말론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로 비롯된 연대감 때문이며, 이런 배경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현재 이스라엘과 연계하여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건국을 성경 예언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종말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첫 번째 오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이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과 민족,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주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다. 창세기 12:3은 그 약속의 땅이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땅의 모든 족속’ 곧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모든 이방인이 너로 (아브라함)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갈 3:8; 3:14)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대주의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정부가 수립된 것이 구약 예언 가운데 일부가 성취된 것이며, 장차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서전을 건축할 것이고, 마지막 때 유대인들의 집단 회심을 통해 복음이 전 세계를 돌아 다시 예루살렘에 올 때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고 주장한다. 한때 한국 교회를 어지럽혔던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은 이스라엘에서 복음이 시작되었는데, 복음의 서진을 통해 유럽이 변화되었고, 아메리카로 건너가 부흥을 이루었고, 다시 아시아로 와서 한국을 변화시켜 중국과 북한의 복음으로 변화되고 이슬람을 거쳐 결국 다시 예루살렘으로 지구 한 바퀴를 돌아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선교학적으로 보면 복음은 서쪽으로만 전진한 서진의 역사가 아니라, 전방위로 퍼진 역사이다. 두 번째 오해: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백성이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은 온 이방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려는 먼저 된 선택일 뿐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신들만 특별한 존재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졌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잘못된 선민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6-7).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방 교회인 갈라디아 교인들도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한다. 계속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고 말한 뒤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라고 선포한다. 구약의 혈통적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고 있다. 또 바울은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하갈과 사라를 언급한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이다.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라고 부르고, 이삭을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라고 말한다(갈 4:28-29). 창세기에서 어린 이삭을 이스마엘이 괴롭힌 사건을 통해 바울이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박해하고 있고,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다고 표현한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난 자’ 혈통적 이스라엘은 이스마엘을 상징하고,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이삭 즉 믿음으로 구원받은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삭은 혈통적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 즉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의 상징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경은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선택했지만 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나님이 플랜 B를 계획해서 이방인을 구원하고 그 구원을 통해 결국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미 창세기의 이삭이 태어날 때부터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곧 ‘성령으로 태어난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한다. 세 번째 오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종말 로마서 11:25-26에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고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을 혈통적 이스라엘로 해석하게 되면, 복음의 서진이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어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올 때 예수님이 재림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순히 혈통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는 의미는 이방인 전체가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를 말한다. 그다음에 나오는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방인들 가운데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차기까지 유대인들의 남은 구원받는 사람들을 계속 모을 것이며 이렇게 해서 ‘온 이스라엘’ 곧 구원받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총칭하는 모든 언약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 일부 번역이 로마서 11:26의 헬라어 ‘후토스’를 ‘그 후에’라고 번역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구원받고 그다음에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시간 순서처럼 보이지만, ‘후토스’는 ‘그 후에’가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in this way)로 해석해야 하는 단어이다. 현재 개역개정은 ‘그리하여’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이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종말론에 대한 다양한 오해들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서는 특히 로마서의 ‘온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 단어만 떼어서 ‘온 이스라엘’이 혈통적 이스라엘이며 현재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구원받는다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가 많은 해석이며, 문맥을 통해서 보면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중 구원받는 택자를 말하는 것이나, 유대인과 이방인을 총칭하는 모든 택자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 지금까지 이스라엘-하마스의 전쟁을 어느 한쪽 편을 들면서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말했다. 현재 이스라엘 땅이 구약의 약속의 땅이거나, 현재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우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어느 한 나라를 지지함으로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중동지방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잘못된 유대 민족주의를 버리고 팔레스타인을 인정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도 더 이상의 무력 충돌과 전쟁이 아닌 타협점을 찾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현재도 계속되는 전쟁 속에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이 전쟁이 속히 끝이 나기를 그리고 인간의 지혜로 풀 수 없을 것 같은 이 문제들 위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도한다.
시편으로 자녀에게 감정의 소중함을 가르치라
by Courtney Reissig
2023-12-12
벤 사스는 The Vanishing American Adult(사라지고 있는 미국 어른)에서 회복력이 뛰어난 아이들로 키우는 사례를 제시한다. 그는 인내, 노력, 고난을 배우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이야기한다. 이 책은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는 내내 장기간 관찰한 연장된 사춘기에 대한 대응과 함께 미국에 필요한 다음 세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이들이 회복력을 키우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스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회복력을 목표로 하는 순간,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탐색하도록 어떻게 도울까에 관한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되며, 거기에는 우리가 쉽게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하나는 어려운 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예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너진 이 세상 때문에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들 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려고 한다. 반면에, 자녀가 부서진 내면을 가지고 살기를 원치 않는 부모는 무심코 자녀들이 감정을 꾹꾹 채우게 만든다. 그러나 정서적 회복력을 가진 자녀를 키우는 보다 나은 방법은 성경에 있다. 우리는 좋은 때나 나쁜 때나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치는 데 시편을 활용할 수 있다.감정은 좋은 것이다하나님은 감정을 지닌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고통과 슬픔, 설렘을 느낀다. 이 모든 감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말해 준다. 때때로 감정은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큰 개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기도 한다.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사랑처럼, 감정이 소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불안감이나 압도감과 같은 감정은 우리의 한계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자녀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좋은 것임을 인식하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다.“슬프다”라고 말하는 자녀에게 그 즉시 등을 두드리며 입에 발린 말로 격려하지 말고, 시편을 가르치라. 너와 똑같이 슬퍼했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슬픔에 신실하게 귀를 기울여 주셨다는 사실을 시편으로 가르치라. 시편에는 구약성서의 서사와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 많으며, 따라서 성경 속 인물들의 영혼을 엿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우리는 배반을 말하는 다윗을 시편에서 만난다(55편). 짧은 인생의 허무함을 알려 주는 모세의 글도 있다(90편). 그리고 의심과 환멸을 겪는 에스라 사람 헤만을 본다(88편). 시편은 한 마디로 구약의 신자들이 자신의 어려움, 감정, 시련, 의심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기도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보여 주는 모델로서 시편 앞으로 자녀를 데려갈 수 있다.감정이 반드시 죄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탐닉해서도 안 된다. 때때로 감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친구의 새 장난감이나 운동 경기의 성공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라.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죄(탐심)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 주라. 질투심을 결코 슬프거나 행복한 감정과 똑같이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시편 4:4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시편 시인은 우리에게 아예 화를 내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분노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죄에 굴복하지 않으며 화를 내는 방법, 곧 온전히 느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있다. 시편 시인은 감정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녀가 분노든 또는 비슷한 과도한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이 자신을 죄로 이끄는지 물어 보고, 그렇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치라. 시편 51편은 회개의 모델을 제시한다. 감정은 나눌 수 있다시편 4:4이 분노를 마음에 담더라도 잠잠하라고 말하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주님께 마음을 쏟아붓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시편이 고난 중에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개인 기도도 있지만, 적지 않은 내용이 집단이 부르짖는 기도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울부짖으며 회중으로서 겪는 고통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제심을 발휘하는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은 얼마든지 성경적이다.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칠 때, 그들의 감정을 듣고 싶어 하며 또 믿을 수 있는 친구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모든 감정을 주님 앞으로 가져가야 한다. 감정을 항상 믿어서는 안 된다 시편 73편에서 우리는 악인의 형통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을 받는 시인을 만난다. 그는 시기와 탐욕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렬한 느낌이다(22절). 그는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다(2절). 내내 신실하게 행하던 그가 거의 실족할 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주님께 가져갔을 때 그의 마음과 관점이 바뀌는 것을 본다. 자신의 감정을 믿고 싶은 유혹을 받는 자녀에게 시편 73편 같은 시편을 읽게 하라. 자녀가 이 부서진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가르침과 동시에 오로지 감정만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개념에 당당히 맞서도록 가르치라.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자신만의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내 솔직한 기분이었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게 마음이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예. 17:9-10). 감정을 믿는 순간 우리는 감정에 속아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이다. 진리의 표준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라. 우리의 모든 감정까지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감정이 우리를 배신할 때가 있다. 행여라도 감정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우리는 수시로 감정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를 배반한다는 말이다. 자녀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 주라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는 자녀의 눈에 마치 감정만이 유일한 실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감정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그들을 이끌 수는 없다. 그들이 감정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장점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 감정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타락한 감정을 지닌 존재로 존재하는 현실까지 모두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삶에서 감정의 위치를 인정하고, 더불어서 죄에 대한 충동과 어떻게 싸우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든지 자녀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타당성을 분별할 자격을 가진다. 우리 문화는 감정에 대해 두 가지 옵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감정을 항상 신뢰하거나, 아니면 아예 감정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짜 회복력을 가진 아이들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건전한 방법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시편을 지침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더 나은 방법을 보여 주라. 그것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올바르게 느끼도록 가르치기 위해 성경 전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이다. 원제: Use the Psalms to Teach Kids About Feel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손편지의 온기
by 양혜원
2023-12-11
예쁜 카드나 엽서를 보면 사는 것도 좋아하지만, 거기에 몇 자를 적어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 간단한 안부든, 감사의 표현이든, 생일 축하든,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하든, 비록 글씨는 잘 못 쓰지만, 그래도 직접 손으로 써서 봉투에 담아 어울리는 스티커 하나 장식으로 붙이고, 주소를 적어 우체국의 손을 거쳐 상대에게 보내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나면 제법 마음이 훈훈해진다. 지난가을에는 처음으로 일본어로 그런 감사 엽서를 교토 어느 카페의 여사장에게 적어 보냈다. 교토의 가을을 노래하는 친구의 꼬임에 짬을 내어 조금 긴 주말의 형식으로 짧게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그때 교토의 어느 절 근처에서 다리를 쉬기 위해 들어간 카페의 사장은 마실 것도 몇 개 없는 메뉴가 전혀 허전하지 않게, 카페라테의 거품을 직접 내와 풍성하게 얹어 주고 교토의 다과라며 서비스도 주고, 지도를 펼쳐 보이며 근처에 가볼 만한 곳들을 소개해 주었다. 볼펜으로 경로를 표시해 주면서, 다리는 튼튼하냐, 튼튼하다면 여기까지 한 50분 걷는데 가 볼 만하다는 둥, 상대의 연령대를 감안하는 듯한 세심한 안내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별다른 간섭없이 편하게 커피를 마시고 경치를 감상하다 가게 해 주었다. 적절하게 다가가고 적절하게 물러나는 그 주인의 손님 접대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 여운 또한 길었다. 받아온 지도에 마침 그 카페의 이름과 주소가 도장으로 찍혀 있기에, 나중에 기억할 요량으로 보통은 현지 여행이 끝나면 버리고 오는 지도를 한국까지 챙겨서 왔는데, 아, 주소가 있으니, 카드도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마침 교토에서 산 가을에 어울리는 엽서가 있었고, 새로 산 잉크 펜도 있었다. 일본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말은 짧은 일어로 해도, 편지나 카드를 보낼 때는 영어 아니면 한국어로 썼었기에, 일본어 편지는 처음이었는데, 볼펜과는 다르게 새로 산 잉크 펜으로 일본어를 쓰니 글씨가 제법 그럴듯하게 써졌다. 그때 참 고마웠다, 당신이 안내해 준 곳도 가 보았는데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거품 폭신한 카페라테 마시러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는, 봉투를 봉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우체국에서 떠나보냈다. 그 여사장이 이 엽서를 제대로 받았을지 어땠을지, 받고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환대에 이렇게 반응함으로써 내 나름으로는 한편의 마음이 아니라 주고받는 마음이 되고 싶었다. 카드를 쓰는 즐거움은 일찍이 십대 시절에 터득했다. 크리스마스를 유난히 좋아해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누구에게 카드를 보낼 것인지 리스트를 만들고 선물은 누구에게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십대 초반을 영국에서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장식부터 선물 아이템까지 일찍이 가게와 거리를 장식하는 통에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쉬웠지만, 우편물이 몰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에 카드가 한국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의 크리스마스는 일찍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안에 우편물이 도착하려면 언제까지 발송해야 하는지 날짜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카드를 부치기 위해서 일찍부터 리스트를 만들고 카드를 준비하고 카드 메시지를 썼다. 나의 카드 쓰기는 크리스마스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생일에는 생일 카드를 썼고, 그 외에 편지도 수시로 썼다. 사실 핸드폰도 없고, 전화기도 한 가정이 하나를 쓰던 시절을 살았던 우리 세대에게 편지로 그간의 일을 전하고 상대에게 하고픈 말을 하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학보를 보내는 것으로 안부를 전하는 풍습도 있었다. 중학교 이후 소식이 끊긴 친구로부터 어느 날 대학교 과사무실로 그가 보내온 학보를 받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학보를 감싼 하얀 띠지는 편지지와 봉투의 역할을 다하여 겉에는 주소가 적히고 뜯어서 펼치면 안에 편지글이 있었다. 대개는 간단한 인사말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런 우편물을 받으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었다는 기분이 들어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할 수 있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도 더는 편지도 카드도 쓰지 않은 시절이 오고 나서도 나는 제법 꾸준히 카드도 쓰고 편지도 썼다. 물론 그 대상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문자와 이메일이 주된 소통 수단이 되고 나서는 손으로 쓴 카드나 편지는 아무래도 좀 특별한 계기나 대상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40대로 들어서면서는 그나마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미리 챙겨 해외로 대량 발송하는 일도 없어졌다.그러다가 카드를 보낼 사람의 리스트를 다시 짜게 된 것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본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낼 때였다. 카드라기보다는 사실 연하장이었는데, 일본의 큰 명절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신년이었고, 그때 일본 사람들은 카드가 아닌 엽서 형태의 연하장을 인사로 주고받았다. 일본에서 산 지 1년 정도 지나면서 나에게도 친구와 지인들이 생겼기에 그곳에서 생긴 인연들을 챙기면서 나는 연하장을 준비해 보냈고, 그들도 내게 연하장을 보내주었다. 비단 연하장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내가 다니는 길목에 우체국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일본 문화 전반에 아직도 편지 쓰는 관습이 남아 어딜 가나 쉽게 이쁜 편지지와 엽서 등을 접할 수 있어서 일본 사는 동안 한동안 잊었던 편지 보내는 습관을 다시 붙여 부지런히 이 나라 저 나라의 지인에게 우편물을 보냈다. 이제 긴 편지는 쓰기 어렵게 되었어도, 이쁜 카드나 엽서에 제법 빽빽이 적어 보냈다. 이 재미가 쏠쏠했는데, 귀국하자마자 맞닥뜨린 코로나 기간 아주 비싼 특급 우편 외에 일반 우편물을 해외로 보낼 수 없다는 게 내게는 매우 답답하고 힘든 일이었다.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는 해외로 비싼 특급 아니면 일반 우편은 아예 부쳐주지를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우편물이 왔다. 연하장을 보내준 은퇴하신 여교수님도 있었고, 엽서와 기념품을 정기적으로 챙겨서 보내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받기만 하고 보내지를 못해, 문자로, 이메일로 고맙다, 아직 한국에서는 우편물을 부칠 수가 없어 안타깝다 메시지를 보내며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문자도 보낼 수 있고, 이메일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줌으로 얼굴도 볼 수 있었지만,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해야 했던 시절에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좋은 기분이 며칠간 이어질 만큼 훈훈한 일이었다. 편지 쓰기를 자제해야 했던 그 시절에 딱 한 번 특급 우편을 보낸 일이 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내가 유일하게 반송을 받은 편지가 되었다. 수신인은 작고한 유진 피터슨의 아내 잰 피터슨이었다. 2018년 10월, 일본에서 유진 피터슨이 작고한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의 책을 열두 권 번역했고, 2012년에 몬태나에 있는 그의 집에도 방문하여 하룻밤을 머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진과는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사적인 대화는 잰과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둘째 아들이 막 이혼의 아픔을 지나고 새로운 출발을 했을 무렵이라 그런지 나에게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도 물었고, 나의 스스럼 없음이 편했던지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도 해 주었다. 혹시 잰은 글을 쓰지 않냐고 물었더니, 꾸준히 써온 일기가 있다며 주변에서 출판하라는 말도 한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 또한 꼭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을 떠나기 마지막까지 유진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나는 늘 유진과 잰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와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된 후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처음으로 답장이 없었고,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당장 잰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아,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를 기억하는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몇만 원짜리 특급 우편으로 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남편이 작고했으니, 여전히 몬태나의 그 집에 그가 살고 있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 집의 내력을 생각할 때 어떻게든 편지가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 편지가 반송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그래 내가 너무 늦었지,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내 마음을 거절당한 것 같아 조금 슬프기도 했다. 내가 그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내가 만났을 때의 잰은 유진과 달리 여전히 힘이 있어 보였기에 나는 그가 이디스 쉐퍼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도 그 후로 오래 살면서 책도 쓰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가고 불과 8개월 만에 그도 갔다는 것이다. 수취인불명이라더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정말로 수취인불명인 채로 발신인에게로 돌아와 버렸다. 나의 편지쓰기가 조금 이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는 사실 매우 친숙한 매체이다. 알다시피 신약 성경의 태반이 편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편지처럼 개인 대 개인 사이의 글은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를 위해 쓰는 소설과 같은 장르의 글과 달리, 편지는 수신인이 있고, 그 수신인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다. 하지만 분명한 수신인이 있다고 해서 의도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 또한 편지의 특징이다. 편지는 우편 사고로, 혹은 나의 경우처럼 상대가 사망해서,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할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된다고 해도 내가 전하고자 한 마음 그대로 수신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사실은 없는 게 편지이다. 자기 나름으로는 정성스레 쓴 편지가 상대의 손에서 찢겨버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만난 적이 없는 로마의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가 제대로 그들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었을까. 다른 서신서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의 경우도, 감정적으로 제법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오네시모와 빌레몬과 바울의 관계에서 과연 이 편지는 그 필자가 의도한 대로 전달자와 수신자 사이를 화해시킬 것인지, 그것은 제법 권위 있게 비치는 바울조차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선의처럼 빌레몬의 선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그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달력이 12월을 넘기니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 이다. 그와 동시에 몇 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직장을 옮기면서 7월부터 유례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늦기 전에 짬을 내어 새로 산 잉크 펜을 들고 ○○에게, 혹은 ○○께와 함께 시작하는 카드 편지를 몇 장을 써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서랍에는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카드 편지가 봉해진 그대로 남아 있다. 제대로 도착할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손을 떠난 보낸 편지의 운명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온기를 전하는 한쪽 편의 일은 하고 싶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선의(good will)가 당신과 함께한다는 좋은 소식(good tidings)을 전하는 시즌으로 오랫동안 교회는 지켜 왔다. 이 소식을 받는 사람의 반응과 상관 없이 전하는 사명을 받은 것도 교회이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선의가 함께하시기를, 그리고 그 선의의 온기도 계속 전해 나가시길 빈다.
C. S. 루이스의 마지막 날들
by Trevin Wax
2023-12-09
C. S. 루이스는 예순다섯 생일을 며칠 앞둔 1963년 11월 22일에 사망했다.비교적 일찍 죽은 그의 죽음을 비극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십 년을 더 살았던 그의 형 워렌(와니)를 생각하면 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지고 있음을 잘 알았던 루이스는 자신의 죽음을 결코 비극적인 측면에서 보지 않았다. 그가 보낸 마지막 몇 달은 영원한 행복을 기대하며 죽음을 맞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 쇠약평생 건강 문제로 고통한 루이스는 1961년 6월 신장염을 앓았고, 이로 인해 패혈증이 발생해서 그해 케임브리지 가을 학기를 쉬었다. 1962년 봄에 다시 학교로 복귀했지만 건강이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는 학생 중 한 명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심장과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전까지는 전립선 수술이 불가능하고, 전립선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심장과 신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병원과 나는 이상한 “악순환”에 빠진 상태이다. 전기 작가 A. N. 윌슨은 루이스의 친구이자 의사인 로버트 하바드가 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다며, 루이스의 이른 죽음의 탓을 그에게 돌렸다. 그러나 다른 전기 작가들은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1950년대 내내 하바드가 권장했던 음식 제한(루이스는 한번도 장기간 그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을 제외하고, 당시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루이스는 홍차를 과도하게 마셨다. 당시는 카페인 섭취와 고혈압 사이의 상관관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때였다. 오늘날 일반적인 전립선 비대 치료법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개발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일부 보고서를 통해서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경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은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3년 여름루이스는 언젠가 이렇게 썼다. “다가오는 죽음을 볼 만큼 현명하지만 그것을 견딜 만큼 현명하지는 않은 게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이다.” 1963년 여름, 루이스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는 6월 17일에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의지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메리 윌리스에게 썼다. “이 세상이 너무 좋아서 죽을 때 우리는 후회해야 할까? 아니다. 우리 앞에는 우리가 뒤에 놓고 떠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편지에 “끝나가는 여행에 피곤을 느끼는 여행자”라고 서명했다. 그달 말에 루이스는 메리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이 땅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다.당신을 이 지구에서 인내심을 갖고 싹을 틔우길 기다리는 씨앗과 같다고 생각해 봐. 정원사가 정한 가장 좋은 타이밍에, 저기 진짜 세상에서, 진짜 깨어나서 꽃을 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이야. 그곳에서 돌이켜보면 우리가 사는 여기 생활은 아마도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고 반쯤 조는 상태로 보일 거야.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꿈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거지. 그런데 닭까마귀가 오고 있어. 그날은 이제 내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어. 루이스의 건강은 여름 동안 더 악화되었다. 그의 신장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수혈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투석 치료가 일반화되지 않았었다. 피로와 집중력 저하에 놀란 그는 7월 15일 다시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바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다음날 아침 거의 죽기 직전이라는 판단에, 그는 죽기 전 신자에게 행하는 종부성사를 받았다.하지만 루이스는 그날 오후 2시에 깨어났고, 차를 마시고 싶다는 말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 후 몇 주 동안 때때로 오락가락했지만, 그는 천천히 회복했다. 무어 부인의 딸이자 그의 친구 패디의 여동생인 모린 블레이크가 병원에 있는 루이스를 방문했다. 루이스는 그녀를 어릴 때부터 잘 알았고, 그녀는 한동안 루이스의 집(Kilns)에서 같이 살았다. 그런데 모린이 스코틀랜드 Caithness에 있는 Hempriggs의 Baron Dunbar의 George Cospatrick Duff-Sutherland-Dunbar 경의 재산을 상속받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고,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루이스는 모린을 알아보지 못했다. 조용히 병실로 들어온 모린이 “잭, 나 모린이에요”라고 말하자, 루이스는 “아니지요. Hempriggs가의 Lady Dunbar가 맞지요”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란 모린이 말했다. “아니, 잭,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해요?”그러나 루이스가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기억하다니? 어떻게 그 동화 같은 이야기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다시 집으로퇴원한 루이스는 집으로 돌아왔다. 계단 사용이 금지된 그는 침실과 서재로부터 차단되었다. 거실에 침대가 설치되었고, 루이스가 어느 정도 회복할 때까지 남자 간호사가 육 주 동안 집에서 같이 살았다. 다시 가르치는 건 루이스에게 벅찬 일이었다. 결국 그는 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케임브리지에 사직서를 냈다. 평생 친구인 아서 그리브즈에게 9월에 쓴 편지에서 그는 형의 부재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했다. “형은 나를 완전히 버렸어. 아마도 어디선가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을 “병자”라고 표현했지만, 동시에 “아주 편안하고 쾌활하다”라고도 썼다.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은 외침으로 끝난다. “아서, 오 내 친구야, 다시는 너를 만날 수 없겠구나!”여름이 가을로 바뀌면서 루이스는 이런저런 편지에서 자신을 “사화산이기는 하지만 나름 여전히 활발한 상태”라고 묘사하곤 했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다가 문턱을 넘지 않고 되돌아온 그였다. 그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래봐야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는 슬픔을 느꼈다. 그는 그 경험을 언제가 자신이 두 번 죽어야 했던 원형 순교자 (protomartyr)라고 묘사했던 나사로의 경험과 연결 지었다. 당시 루이스의 서신을 살펴보면, 그는 끊임없이 “명랑하고” “자족한” 상태를 선언하고 있지만, 동시에 나빠진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루이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나약함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악의 세력을 상상했다. 한 악마가 다른 악마에게 이렇게 썼다.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훈련한 대로 거짓말하는 의사, 거짓말하는 간호사, 거짓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모든 인간이 값비싼 요양원에서 죽어간다면, 그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명을 약속하고, 질병으로 인해 모든 죄(indulgence)가 다 사해진다는 믿음을 주입하고, 거기에 행여라도 사제가 진실을 말해서 환자가 자기의 진짜 상태를 알아채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의 일꾼들이 맡은 일을 제대로만 해준다면, 우리 일이 얼마나 편해질까?” 그러나 루이스에게는 그런 얄팍한 속임수가 통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나약함과 죽음을 직면했다.와니는 10월에 돌아왔고, 동생의 삶에 남은 마지막 몇 주를 책임졌다. 종종 친구들이 방문했고, 또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달 어느 시원하고 화창한 날, 친구 조지 세이어가 가을빛으로 물든 너도밤나무를 보여 주겠다며, 루이스를 런던 로드 자락에 있는 비콘 힐로 데리고 갔다. 루이스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올해에 누릴 마지막 정취 속에 빠져든(soak) 거 같아.” ‘soak’는 시골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가며 창조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는 기쁨을 표현할 때 그가 쓰는 단어였다.대기실로서의 집지상 생활의 마지막 몇 주 동안 루이스는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고(“나는 정원 산책보다 더 멀리 나가는 모험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라고 썼다), 편지에 답장을 보내거나 개인 도서관을 다시 방문했다. 10월 29일에는 “내가 과연 다시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썼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조금 전 일리아드를 다시 읽었는데, 이번만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지금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만끽하고 있다.” 다음 주에 그는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과 테니슨의 ‘In Memoriam’을 다시 읽었다.집은 루이스가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의 여행을 준비하며 쉼을 누리는 조용한 피난처이자 대기실이 되었다. 10월 31일에 그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편지를 썼는데, 동정녀 탄생,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 속죄 이론,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질문에 답했다.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이르는 몇 주 동안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나중에 팀 켈러가 아내가 된) 젊은 캐씨 크리스티에게는 일주일에 두 번씩 편지를 보냈다. 마지막 주루이스의 생애 마지막 주는 조용했다. 11월 15일에는 Lamb and Flag(Eagle and Child 길 건너편에 있는 펍)에서 친구들을 만났고, Roger Lancelyn Green은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루이스의 집을 찾았다. 루이스는 Saturday Evening Post에 실린 그의 마지막 에세이가 될 “우리는 행복할 권리가 없다” 원고를 수정하느라 바빴다. 이 글은 무엇보다 ‘성적인 행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변하는 사회를 향한 놀랍도록 예지력 있는 분석이다. 그 주 후반에 방문한 J.R.R. 톨킨과 그의 아들 존은 루이스의 건강 이야기 대신 토마스 말로리(Thomas Malory)가 쓴 ‘아서왕의 죽음’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11월 18일 마지막으로 Lamb and Flag에 간 루이스는 콜린 하디를 만났다. 대부분의 시간을 루이스는 집에 머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형과의 시간을 즐겼다. 와니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바퀴가 완전히 한 바퀴 돌아서 원을 이루었다.” 어머니를 잃은 고통스러운 슬픔을 겪으며 형제들끼리 서로 의지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한 번 더 우리는 작은 방에 함께 있었다.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너무도 뻔한 이야기는 우리의 대화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대신 알 수 없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새 학기가 우리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잭은 용감하고 침착하게 새로운 시작을 직면했다. “형, 나는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했고, 이제는 떠날 준비가 되었어.” 어느 날 저녁 동생이 내게 말했다.11월 21일, 그는 한 어린이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편지를 썼다. 그 아이의 편지를 “놀랍게도 좋은 편지”라고 칭찬함과 동시에 나니아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데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더불어서 재판에서 발견한 오타를 알려주겠다는 데에도 고맙다고 썼다. 11월 22일1963년 11월 22일 금요일은 정해진 루틴 그대로 흘러갔다. 루이스와 형은 아침 식사를 즐겼고, 후원자들에게 몇 통의 편지를 보낸 다음에 매일 나오는 십자말 풀이를 했다.점심 식사 후 루이스가 의자에서 잠이 들었고, 와니는 침대가 더 편할 거라고 말했다. 거실 건너편 “음악실”은 루이스가 더 이상 위층에 올라갈 수 없게 되자 침실로 바뀌었다. 오후 4시, 루이스에게 차를 가져다준 와니의 눈에 루이스는 졸려보였지만, 한편 편안해 보였다. 5시 30분에 와니는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발견한 건 침대 옆에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는 루이스였다. “약 3-4분 후에 루이스가 숨을 거두었다”라고 와니는 썼다.그날 오후 루이스의 사망 소식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 즉 텍사스 달라스에서 발생한 존 F. 케네디의 암살로 인해 가려졌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도 이날 세상을 떠났다. 이 이상한 세 죽음의 합류는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가 쓴, 세 가지 서로 다른 세계관을 대변하는 세 남자가 천국 외곽에서 나누는 가상의 대화를 담은 C. S. 루이스 천국에 가다의 배경이 되었다.죽음을 앞둔 루이스가 남긴 유산1963년 11월 26일, 루이스의 장례식이 그가 가장 자주 참석했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교회 마당에 묻혔다. 십 년 후 와니는 동생 옆에 함께 묻혔다.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이자 이야기꾼 루이스의 마지막 몇 달은 그가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소망, 즉 하나님의 품에 안긴 영생의 약속에 대한 가슴 아픈 그림을 보여 준다. 마치 새벽 출정호의 항해에서 쪽배를 타고 파도 위로 향하는 리피칩이 그랬듯이, 루이스는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 때문에 슬퍼하면서.” 그러는 동시에 “행복에 떨면서.” 그의 시와 산문에 생기를 불어넣은, 위로할 수 없는 그리움의 찌름과 같은 기쁨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조용하게 보낸 생애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는 육체의 고통을 인내와 뛰어난 유머로 이겨냈다. 그는 이 세상이 단지 더 큰 이야기로 이어지는 서막에 불과하며 신성한 사랑의 깊은 마법으로 가득 찬 새롭고 경이로운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 주었다.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원제: The Last Days of C. S. Lewi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신들림의 시간
by 이춘성
2023-12-08
“지름신이 강림하셨다.” 이 말은 홈쇼핑 채널이 새로운 쇼핑 트렌드를 만들었던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유행어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 문장을 충동구매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텔레비전 홈쇼핑 채널에서 물건을 홍보하는 쇼호스트의 화려한 미사여구와 옷이나 음식을 선전하는 모델의 그럴듯한 외모를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전화를 들고 버튼을 누르는 모습이 마치 신들림 현상과 비슷하다는 뜻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이러한 ‘신들림’ 표현은 다양한 영역으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의 영역에서 ‘신들림’ 표현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의미 전환에 성공해서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지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분이 오셨다”와 같은 신들림의 표현은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수식하는 관용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아니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나 마니아라는 표현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러한 현상을 ‘신들림의 세속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세속화란 과거 신성시하였던 표현과 현상, 공간을 인간의 언어와 현상, 공간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세속화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 작년에 유행했던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추앙’ ‘은혜’ ‘구원’ 등의 종교적인 용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낯선 매력을 시청자들에게 풍기면서 히트 친 이유는 배우들의 좋은 연기도 있었겠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이상한 언어들 때문이었습니다. 드라마 인물들이 일상어가 아닌 종교적인 신성한 언어들을 일상어로 세속화하면서 일상의 영역을 일종의 신성한 영역으로 만드는 묘한 효과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경험은 일상의 지루함, 익숙함을 신선함, 새로움, 설렘 등의 신선한 감정으로 탈바꿈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의 신성화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모든 것이 신성하면, 결국 모든 것이 세속적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정치 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Human Future에서 범신론이 대중적인 인도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인도에서 ‘소’는 신성한 존재이지요. 그러나 인도에서 가뭄과 기근이 들면 제일 먼저 잡아먹는 동물이 바로 ‘소’라는 것입니다. 후쿠야마는 이것이 모든 것의 신성화는 결국 모든 것의 세속화라는 증거라고 주장하지요. 그런 세상은 인간이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할 마지노선의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속화는 신성한 공간과 언어, 현상만이 아닌 신성한 규범을 상대화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림’의 언어의 대중화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세속화 현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또한 ‘신들림’의 세속화와 대중화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이 현상의 시작점을 보면, 탁월한 쇼호스트들과 유명인들이 인터넷과 홈쇼핑 등을 통해 전국 단위로 물건을 팔게 된 2000년대 초반 이후에 극대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그보다 약 20년 정도 앞서 이러한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러한 현상을 상품에 인격이 거주하는 현상, 달리 표현하자면 상품에 판매자나 생산자의 인격을 담아 이 둘을 분리하지 않는 현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분석하였습니다.상품들이 자발적으로, 자생적으로 시장에 가기 위해 걸어가지는 않으므로, 그들의 “보호자들”과 “소유자들”이 이러한 사물들에 거주하는 척한다. 그들의 “의지”가 상품들에 “거주하기”(hausen) 시작한다. 여기서 ‘거주하다’와 ‘신들려 있다’ 사이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파악 불가능하다. 인격은 자신이 사물에 거주함으로써 생산한 객관적인 신들림의 효과 자체에 의해, 말하자면 그 자신이 신들리게 함으로써 인격화된다. 인격(사물의 보호자나 소유자)은 그가 자신의 말과 의지를 마치 거주자들처럼 사물 속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 속에서 생산하는 신들림에 의해, 역으로, 그리고 구성적으로 신들리게 된다. … 이러한 환영 산출적인 또는 몽환적인 과정에 대한 기술은 “종교적 세계”와의 유비 속에서 물신숭배에 대한 담론의 전제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306쪽)신들림이란 사실 서로 존재하는 영역이 다른, 전혀 다른 타자들이 하나로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을 의미합니다. 귀신, 혹은 신은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질적인 것이 하나로 존재한다고 상상해 보면, 이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괴기스럽고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현상일 것입니다. 귀신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존재는 거부할 수 없는 능력이나 매력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귀신 들린 영매나 무당을 찾아다니며 점을 치고 안정을 찾기도 하지요. 이렇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공포가 공존하는 현상이 신들림입니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러한 신들림이 일상화된 것이 물건을 사고파는 경제 활동이라는 통찰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물건과 파는 사람의 인격을 동일시하고, 생산자와 물건을 동일시하는 신들림 표현을 통해 인간과 물건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물건화, 물건의 인격화 그것이 현대 신들림의 중심에 있는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영역으로 확산하여 누군가의 탁월한 능력을 그의 인격과 동일시하며, 추앙하고 신앙처럼 떠받들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추앙받는 존재의 능력이 바닥나면 동시에 그의 인격도 바닥으로 내팽개쳐집니다. 신의 몰락인 것입니다. 인간을 신격화하는 신들림의 표현은 인간을 측정 가능한 물질로 환원시켜 인간의 인격을 파괴합니다. 이것이 앞에서 후쿠야마가 인도과 동양 종교의 범신론을 통해서 분석한 ‘소를 잡아 먹는 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의 세속화는 모든 것의 신성화이며, 달리 말해 모든 것의 신성화는 모든 것의 상대화를 의미합니다. 끝으로 인격과 물건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물질에 자기의 인격을 담는 것이 아니라 신(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때(벧후 1:4), 빛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신성함을 세속화하여 모든 것을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성함을 더 신성하게하고 세속을 세속에 걸맞게 대접하는 것, 또한 인격이 물건이 되는 것에 저항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인간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증진할 수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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