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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2010을 넘어서
192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선교의 현주소
by Kirsteen Kim
2024-01-06
로잔에서 서울까지_로잔 글로벌 분석2024 서울 제4차 로잔대회를 준비하며 역사적인 191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이후 100년 동안 모든 대륙에서 거의 100개의 대회와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1] 그 후 10년이 지난 2010년에, 우리는 그간에 우리가 배운 내용과 오늘날 그 내용이 선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우선, 세 차례의 주요한 100주년 행사들을 돌아보고, 둘째로는 에든버러 2010 대회에서 비롯된 주목할 만한 도서 시리즈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이러한 자원이 2020년대의 상처받은 세계에서 선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도움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제안하려고 한다.10년이 지난 2010년에, 우리는 그간에 우리가 배운 내용과 오늘날 그 내용이 선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서로 다르게 기념하다 : ‘가나의 세 자녀’1978년에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의 풀러 신학교에서 교수로 역임했고 그 당시 미국세계선교센터 책임자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그가 20년 전에 ‘결혼’이라고 일컬어온 일을 돌아보았다. 그는 1910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의 계속위원회로 출발한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 같은 뿌리에서 나온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에 합병된 결정이 가나의 아크라에서 이루어졌다고 언급했다. 그것은 IMC와 WCC의 통합이 서구 기관들과 이전에 식민지화된 국가들, 즉 제3세계 교회들 간의 선교를 위한 구조적 연합을 이루도록 의도된 결정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사실상, 이 ‘합병(marriage)’이 상이한 세 ‘자녀들’을 낳았다고 주장했다.[2] 첫 번째 자녀는 WCC 세계 선교와 전도위원회(Commission for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CWME)였다. 두 번째 자녀는 스위스 로잔에서 역사적인 첫 번째 대회를 열었던 로잔운동[3]이었다. 세 번째 ‘가나의 자녀’는 윈터와 다른 미국 선교학자들이 ‘타문화 선교 사역’에 헌신한 선교사들의 결집을 위해 초안을 잡은 ‘부르심’에서 구상되었다.[4]2010년도를 돌아보면서 나는 윈터의 예측이 대체로 성취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에든버러 세계선교대회 100주년을 맞아 윈터가 말한 ‘가나의 세 자녀들’은 각각 대규모 행사를 열었다.에든버러 2010은 WCC의 후원을 받았으므로 에든버러 1910의 제도적 계승자였다. 이 대회는 특히 존 모트(John Mott)가 에든버러 1910의 폐회 연설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 – 현재 ‘세계 기독교’와 유사한 – 과 함께 이룰 교회의 전 세계적인 성장을 언급하면서 ‘확산되는 그리스도(a larger Christ)’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비전을 포착했다.[5]로잔 운동이 2010년 케이프타운[6]에서 개최한 제3차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대회는 세계 복음화에 주목한 에든버러 1910의 비전에 기초하여 제1차 로잔대회에서 제시된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자’는 표어를 해석했다. 이 대회는 위대한 계명(Great Commandment)에 근거하여 지상 대위임령(Great Commission)을 설정함으로써 선교에 대한 이해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했다.[7]도쿄 2010은 윈터[8]에 의해 고안되었는데, 에든버러 1910이 전 세계 미전도 종족에게 다가가려는 타문화 선교사들을 결집하려는 대회임을 강조했다. 이 대회는 현대선교 운동이 다양한 멤버십과 다양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9]윈터는 에드버러 세계선교대회 100주년을 맞아 단일 대회를 희망했지만, 글로벌 선교 네트워크의 다양성을 문제 삼지 않고 그것을 ‘생산적인 결혼’으로 표현했다.[10] 필자는 한 부모 아래 태어난 이런 여러 행사들이 에든버러 1910을 충실하게 회고하면서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나누려는 공동의 열망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세 자녀 모두가 서로에게서 배우고 협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11]레그넘 에든버러 100주년 시리즈: 선교학자를 위한 자료 에든버러 2010 프로젝트는 2005년에 연구 프로젝트와 컨퍼런스로 시작되었다.[12] 그 프로젝트는 WCC가 시작했지만, 가능한 모든 교회가 모이는 모임을 소집하기 위해 WCC가 직접 주관하지는 않았다.[13]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Common Call)’은 가톨릭, 복음주의, 정교회, 오순절, 개신교, 독립 교회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예배 가운데 확인되었다.[14] 그 ‘부르심’은 프로젝트의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레그넘 에든버러 100주년 시리즈 (Regnum Edinburgh Centenary Series, RECS)에서 나온 광범위한 책들의 기초를 형성했다.[15] 에든버러 1910에서 출판된 9권의 책에서 영감을 받은 레그넘 시리즈의 핵심 설계자는 크누드 요르겐센(Knud Jørgensen)이었다. 그는 에든버러 2010 연구 프로젝트를 감독했고 동시에 케이프타운 2010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당시 옥스포드 선교연구센터(Oxford Center for Mission Studies, OCMS)의 학장인 마원석 박사와 부속 출판사인 레그넘과 협력했다.[16] 나는 에든버러 2010 프로젝트팀의 일원으로서 편집팀에 합류했으며, 토니 그레이(Tony Gray)는 레그넘의 제작 편집자였다.2009-2016년에 출판된 이 시리즈는 2018년에 35권의 책과 두 권의 개요서(Compendium)로 구성되었다. 각 권은 상충되지 않는 다양한 관점들을 대표하려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종합적으로, 그것은 21세기 초의 선교적 사고에 대한 광범위한 관점(cross-section)을 제공한다. 이 시리즈의 많은 책들은 에든버러 프로젝트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제2권인 ‘오늘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에든버러 2010 대회에서 모든 대표자들이 소지한 책이다. 이 책은 여러 대륙에서 수년간 일해 온 9개의 연구 그룹들의 보고서와 현재의 선교 주제와 연관된 교회 분열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선교의 기초; 타종교와 기독교 선교; 선교와 포스트모더니티; 선교와 권력; 선교적 참여의 형태; 신학 교육과 형성; 현대의 기독교 공동체; 선교와 일치-교회론과 선교; 그리고 선교적 영성과 참된 제자도. 100 주년 시리즈의 에든버러 2010 대회 책자는 ‘선교적 영성을 갱신하고, 더 많은 반성을 자극하며, 역사상 이 독특한 시점에서 교회의 공동의 행동을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리즈의 다른 책의 기조를 설정한다.[17]이 보고서들은 에든버러 2010의 토론과 ‘공동의 부르심’의 토대를 형성했다. 이후 9개 그룹 모두 시리즈용 책을 제작했으며, 이 주제를 검토하는 다른 그룹들의 작업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타종교 선교’에 관한 두 권의 책이 있다.[18] 또한, 이 시리즈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오순절을 포함한 다양한 고백적 선교 신학에 관한 연구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 한국, 동북부 인도, 중부 유럽과 동유럽 등 세계 여러 지역의 관점에서 본 선교에 관한 책들도 포함한다. 다른 그룹들은 총체적 선교, 글로컬 선교, 디아스포라 선교, 교육 선교 등 다양한 종류의 선교에 대한 책자; 선교와 성경, 어린이, 일치, 형성, 종교자유; 그리고 화해로서 선교, 주변부 선교, 섬김과 창조 세계 돌봄으로서의 선교에 관해 저술했다.‘가나의 세 자녀들’은 각각 에큐메니컬 선교학(35권), 로잔운동(22권), 복음주의 및 전방개척 선교(9권) 시리즈로 대표된다.[19] 이 시리즈는 모두 오늘날 선교와 세계 기독교에 있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매우 소중한 자료다.상처 입은 세상에서의 선교: 2020년과 그 이후2021년의 세계는 10년 전보다 어두운 것처럼 보인다. 식민지 시대의 선교 모델에 대한 강한 비판이 있었지만 에든버러 2010의 분위기는 축제와 다름없었다. 서구 기독교 왕국의 사고방식(Christendom mindset)과는 대조적으로, 이 대회는 전 세계에 걸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와 여러 센터에서 선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세계 기독교에 감사를 표했다. 이러한 비전에 따라 ‘공동의 부르심’은 ‘상호성, 파트너십, 협력, 네트워킹’으로 귀결되는 성령을 통한 전 세계적 상호 연결성을 강하게 표현한다. 세상에 대한 공동의 부르심의 접근은 ‘진정한 대화, 정중한 참여와 겸손한 증언’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민감하게 접근하는 것에 유의하는 한편, 희망적이고 ‘담대한 확신(bold confidence)’이라는 특징을 띤다.에든버러 1910은 대영 제국에 의해 세계화된 세계에서 열렸고, 이런 조건으로 인해 전 세계의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대회에 직접 모일 수 있었다. 하지만 불과 4년 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세계의 여러 지역들이 분열되었다. 그 후, 세계는 전염병에 의해 황폐화되었고, 대공황을 촉발한 보호주의에 의해 분열되었으며, 소위 냉전으로 인한 이념대립이 확립되기 전에 더 큰 규모의 세계적인 전쟁을 초래한 부상하는 민족주의에 의해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20] 냉전 시대에 이은 세계화는 2010년에 동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이 에든버러, 케이프타운, 도쿄에서 모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이 글로벌 연결 시대가 무너지고 있다는 징후들이 나타났다. 대신 민족주의, 보호무역주의, 이동 제한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팬데믹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상처를 드러냈다; 병든 본성과 인간의 고통과 이기심뿐 아니라 부의 뿌리 깊은 불공평,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및 환경의 질도 그렇다. 이런 대부분의 불평등은 인종, 민족 및 위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 구조적이다. 현 상황은 이런 공동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계가 함께 모이기를 요구하지만, 많은 면에서 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세계화를 심화시키며,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조차도 기술 민족주의와 강력한 지도자의 조작에는 취약하다.2010 년은 하나님의 선교에 다 함께 동참하기 위하여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선교를 분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런 대회에서 얻은 자원들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케이프타운 서약(Cape Town Commitment, CTC)’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을 통합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새로운 인류의 종족적 화해’(CTC II-B-1)에서 모델이 되는 길을 설명한다. 정부와 초국가적 비정부 기구들이 세계를 하나로 묶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모든 나라, 민족, 백성과 언어(계 7:9)의 그리스도인들이 협력하는 것이 얼마나 더 중요한지 모른다.[21]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현세와 내세, 육체와 영혼, 가깝고 먼 곳을 아우른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인 요인이나 외적인 요인이 초래한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화해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구축하고, 상처와 불의를 해결하며 함께 나아갈 길을 구성하는 과정이다.[22]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영광과 심판 가운데 오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고, 모든 피조물을 변화시키고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교에 참여하는 일에 모든 사람이 우리와 함께하도록 초대한다.’1. 이 프로젝트 리서치 코디네이터로 있을 때 에든버러 2010 웹사이트www.edinburgh2010.org에 이 내용을 문서화해 정리했다. 2. Ralph D. Winter, ‘Ghana: Preparation for Marriage’,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 67, no. 267 (July 1978): 338-53. 3. 이후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위원회 4. Winter, ‘Ghana’, 351-53. 5. John R. Mott, ‘Closing Address’, in 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 Vol. 9: The History and Records of the Conference (Edinburgh: Oliphant, Anderson, & Ferrier, 1910), 348.6. 편집인 주: See article by Doug Birdsall entitled, ‘A Personal Reflection on Cape Town 2010’ in November 2015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7. 케이프타운 서약, 서론. https://lausanne.org/content/ctcommitment#p2-2.8. 윈터는 2009년 작고했다. 9. 2010 Tokyo Declaration 2010. 10. Winter, ‘Ghana’, 353.11. 나는 기쁘게도 세 회의 모두에 참석할 수 있었다.12. For the background, see Daryl Balia and Kirsteen Kim, ‘Introduction: Experimenting with a Multi-Regional, Cross-Denominational, Poly-Centric Study Process’, in Daryl Balia and Kirsteen Kim, eds., Edinburgh 2010: Witnessing to Christ Today, RECS 2 (Oxford: Regnum, 2010), 1-9.13. 다른 주요 파트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에든버러 대학교였다.14. 에든버러 2010, 공동의 부르심(Common Call), http://edinburgh2010.org/fileadmin/Edinburgh_2010_Common_Call_with_explanation.pdf.15. 종이책 또는 전자책 구입 링크 https://www.regnumbooks.net/collections/edinburgh-centenary. 개인용으로 사용시 무료 PDF 다운로드 링크 https://www.ocms.ac.uk/regnum-centenary-free-downloads/.16. 마 박사는 현재 미국 Oral Roberts 대학의 신학 및 목회학 대학 학장이자 세계 기독교 석좌교수다.17. Kirsteen Kim and Andrew Anderson, ‘Introduction’, in Kirsteen Kim and Andrew Anderson, eds., Edinburgh 2010: Mission Today and Tomorrow, RECS 3 (Oxford: Regnum, 2011), 6.18. Lalsangkima Pachuau and Knud Jørgensen, eds., Witnessing to Christ in a Pluralistic World: Christian Mission among Other Faiths, RECS 7 (Oxford: Regnum, 2011); Marina Ngursangzeli Behera, Interfaith Relations after One Hundred Years: Christian Mission among Other Faiths, RECS 8 (Oxford: Regnum, 2011).19. Kenneth R. Ross, Jooseop Keum, Kyriaki Avtzi, and Roderick R. Hewitt, eds., Ecumenical Missiology: Changing Landscapes and New Conceptions of Mission, RECS 35 (Oxford: Regnum, 2016); Margunn Serigstad Dahle, Lars Dahle, and Knud Jørgensen, eds., The Lausanne Movement: A Range of Perspectives, RECS 22 (Oxford: Regnum, 2014); A. Scott Moreau and Beth Snodderly, Evangelical and Frontier Mission: Perspectives on the Global Progress of the Gospel, RECS 9 (Oxford: Regnum, 2011).20. Bryant L. Myers, Engaging Globalization: The Poor, Christian Mission, and Our Hyperconnected Worl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7); Peter Sedgwick, ‘Globalization’, in Peter Scott and William T. Cavanaugh, The Blackwell Companion to Political Theology (Oxford: Blackwell, 2007), 486-500.21. 편집자 주: See article by Kirsteen Kim entitled, ‘Unlocking Theological Resource Sharing Between North and South’ in November 2017 issue of Lausanne Global Analysis, https://lausanne.org/content/lga/2017-11/unlocking-theological-resource-sharing-north-south.22. See, for example, Al Tizon, Whole and Reconciled: Gospel, Church, and Mission in a Fractured World (Grand Rapids, MI: Baker Academic, 2018). 원제: Beyond Edinburgh 2010출처: lausanne.org
창세기 1장은 성삼위 하나님을 계시하는가?
by Scott Swain
2024-01-05
TGC의 성경 읽기(Read the Bible) 운동에 참여하세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일 년 안에 힘을 합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삼위일체가 등장할까? 대답은 확고부동한 “그렇다”이다. 하나님은 어제, 오늘, 그리고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시기에 창세기 1장을 포함하여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 걸쳐서 삼위일체 되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에서 삼위일체의 존재를 확증하는 건 쉽지만, 다양한 구절 속에서 드러나는 삼위일체의 임재 방식을 분별하는 건 훨씬 복잡한 문제이다. 오래전의 그리스도인이라면 창세기 1장에서 특정 구절이 드러내는 것보다 더 과도하게 삼위일체를 찾아내는 과잉 해석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그에 반해서 현대 독자들은 특정 구절이 증명하는 것보다 삼위일체를 훨씬 적게 바라보는 과소 해석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다.구약 속 숨겨진 존재구약성경에 삼위일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큰 질문에서 시작하자. 루터교 신학자 요한 게르하르트(Johann Gerhard)에 따르면, 창세기 1장 속 삼위일체는 “그 시대에 적합한 계시 방식으로” 존재한다. 성경 속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는 이중 경륜에 따라 전개된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구약의 삼위일체 자기 계시)과 예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후(신약의 삼위일체 자기 계시)이다. 이 두 형태의 계시를 가르는 대조는 절대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삼위일체가 구약에는 전혀 없고 오로지 신약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조는 상대적이다. 구약과 신약에는 다 삼위일체가 드러나지만, 임하시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구약에서 삼위일체는 “숨겨져” 있고, 신약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난다.”구약에 숨겨진 삼위일체의 임재는 마치 밭에 감춰진 보물과도 같이(마 13:44; 골 2:2-3) “숨겨진 임재”이다. 그에 반해서 신약에서 삼위일체는 “명백한 임재”를 보여준다.창세기 1장 속 숨겨진 존재 이러한 명확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이제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었다. 삼위일체는 어떻게 창세기 1장에 “그 시대에 적합한 계시의 방식으로” 존재할까?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의 숨겨진 임재에 대한 최소한 세 가지 흔적을 보여준다. 이러한 흔적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계시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필수적인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1. 창세기 1장은 주어-동사 불일치의 여러 사례를 보여준다.창세기 1:1에서 복수명사 “엘로힘”(ESV에서는 “God”)은 단수 동사 “창조하다”와 결합되었다. “태초에 [엘로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 패턴은 창세기 1:27에서도 반복된다. “이에 [엘로힘]이 자기 형상 곧 [엘로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느니라.”이러한 주어-동사 불일치는 저자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 저자가 강조하는 바가 무엇일까?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분의 유일한 대리인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창조는 하늘의 존재들이 구성한 위원회의 회의를 통해서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인도자(사 40:13-14)와 돕는 자(사 44:24; 렘 10:12; 27:5) 없이,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이 점을 강조하면서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 신학의 첫 번째이자 근본적인 구성 요소인 유일신론을 제공한다. 한 분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며, 만물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신다. 유일신교와 별도로 삼위일체 신앙은 다신교의 한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오로지 유일신교의 맥락에서만 삼위일체 신앙이 다신교가 아닌 세 위격을 가진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 2.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포함한다. 앞의 예들은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차지하는 위치를 인식하도록 돕는다. 창세기 1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이 만물을 생산하시고, 형성하시고, 또 채우시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하나님은 창조물이 존재하도록 말씀하신다(창 1:3, 6, 9, 11, 14, 20, 24, 26). 하나님은 다양한 피조물에 이름을 지어 주신다(창 1:5, 8, 10).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축복하신다(창 1:22, 28).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성령은 창조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미완성, 채워지지 않은 세상 위를 어미 새처럼 맴돈다(창 1:2; 신 32:11 참조). 그리고 생명을 주는 그분의 임재를 통해 창조물에게 생명, 활력, 총명, 그리고 충만함을 공급한다(출 31:3; 35:31; 민 24:2).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하나님이 만물을 생산하시고, 형성하시고, 또 채우시는 데 필요한 수단임을 밝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로서 말씀과 성령을 포함시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창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른 누군가의 대리인을 통해서 일하시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분 자신의 능력으로 창조하신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시 33:6-9; 요 1:3; 롬 11:36; 고전 8:6; 골 1:16; 히 1:2).그러나 창세기 1장이 삼위일체 신학에서 “말씀”과 “성령”이라는 이름이 갖는 완전한 의미까지 제대로 드러내는 건 아니다. 이 이름들의 온전한 의미는 오로지 성육신으로 오신 말씀과 오순절에 부어진 성령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자신의 존재 속에 말씀과 성령을 포함시킴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의 또 다른 기본 구성 요소를 마련한다. 성경이 나중에 엘로힘과 그분의 말씀 및 성령 사이의 어떤 구분을 밝히는가 아닌가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말씀과 성령을 한 분 하나님과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말씀과 성령에 대한 어떤 구분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은 언제나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안에서만 이뤄져야 한다. 3. 또 다른 복수형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창세기 1장 속 하나님은 반복해서 복수 명사 “엘로힘”으로 표현된다. 일부 성경 주석가들은 이 복수 명사를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뿜어내는 충만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또 창세기 1:26에 나오는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표현(“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창조 사역이 삼위로 이루어진 한 분 하나님의 역사라는 표시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런 복수형은 삼위일체의 숨겨진 현존을 나타내는 표시인가? 창세기 1:26을 보자. 창세기 1:26에 나오는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호칭은 때때로 왕이 복수형으로 자신을 호칭하는 관용적 표현, 소위 말하는 “군주 일인칭”(royal we)의 예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이 복수형을 하나님이 소집한 천상 회의 속 천사들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욥기 1:6; 2:1). 그러나 이 두 가지 설명 모두 다 가능성이 작다. 첫 번째로 고대 근동에서 로얄 일인칭이라는 관용적 표현이 쓰였다는 증거가 부족하다. 두 번째로 천상 회의 주장은 창세기 1장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중요한 메시지와 모순된다.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하시는데 굳이 합창단 역할이나 맡을 천사들의 도움이 필요할 리가 없다(욥 38:7). 하나님만이 언제나 그분의 유일하고 주권적인 대리인을 통해서 행동하신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요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펼친 자니라”(사 44:24).그러면 창세기 1:26의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지칭의 수수께끼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언젠가 로버트 젠슨(Robert Jenson)이 언급했듯이, 창세기 1:26 속 하나님의 복수형 자기 지칭의 잠재적 대상으로 가능한 유일한 후보는 말씀과 성령이다. 이러한 관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결정적인 결론에 아직 도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의 이중 계시가 주는 어려움을 이해한다면, 구약에서 삼위일체의 계시를 해석할 때 결정적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를 맞는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이유도 또 고민할 이유도 없다. 구약에서 만나는 삼위일체 계시의 수수께끼는 신약의 삼위일체 계시에 의해서 언제나 해결 가능하다. 창세기 1장은 무대를 만든다구약성경에 있는 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흔적은 신약성경에 의해서 완전한 체계로 드러나는 삼위일체 계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구성 요소를 제공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의 주인공, 즉 말씀과 성령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소개한다. 창세기 1장은 성경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 즉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형성되고, 채워지는 세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창세기 1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적 열심(commitment)의 주된 목적,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세기 1장은 성경의 주된 목적, 즉 삼위일체와 그분을 위해 창조되고, 구속되고, 또 완전해진 백성 사이의 연합과 교제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원제: Is the Trinity in Genesis 1?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재고한다
by 이춘성
2024-01-04
“신들림의 시간”에 이어서 읽으면 더 좋습니다. 많은 분이 레이첼 카슨이 1962년에 쓴 침묵의 봄을 아실 것입니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살충제와 제초제로 사용된 DDT로 인한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려, 미국과 전 세계에서 환경 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책입니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되고 5년 뒤인 1967년, 기독교와 교회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중세 유럽의 농업 기술사를 가르치던 린 화이트 주니어가 쓴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짧은 논문을 통해서 현대 환경 파괴와 생태 위기의 기원으로 지목되는 불명예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기독교와 교회가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의 주범이라는 그의 주장은 대부분의 학자들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화이트의 글에 따르면, 기독교가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독교의 자연관이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자연을 대상이나 도구로 여겨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둘째, 인간 중심주의가 문제였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을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구별된 존재로 보았고, 이로 인해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신론을 비판했습니다. 힌두교 같은 동양 종교의 범신론과 달리 기독교는 자연을 신의 일부로 여기지 않아 자연을 함부로 착취했다는 것입니다.놀랍게도 이러한 주장은 당시 반전 운동을 하던 히피들을 포함한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쉽게 수용되었으며, 반전 운동은 환경 운동과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평화주의를 탄생시켰지요. 그리고 이들은 평화의 적으로 기독교와 교회를 지목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1960년대 서양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이 교회를 급격하게 떠나는 ‘탈교회’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당시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은 동양 종교, 특히 인도의 힌두교와 동남아 및 일본의 선불교에 매료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비틀즈와 같은 유명인들은 1968년 인도를 방문해 마하리쉬 요기를 만나서 초월명상법을 배워 돌아왔습니다. 이후에도 서양의 많은 대중 가수들과 배우들이 인도를 찾아 초월명상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동양 종교의 명상을 돕기 위해 동양 음악을 차용한 음악 장르가 탄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뉴에이지 음악입니다.환경 파괴, 전쟁, 핵무기, 과학 기술에 대한 회의,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 평화주의, 반전 운동 등으로 1960년대 서양은 공포와 혼란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기독교는 이 모든 혼란의 주범으로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내부에서는 신론, 창조론, 인간론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일어났고, 일부는 수정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극단적인 실존적 이해와 관계론적 이해가 대두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관계론적 이해는 20세기의 이해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의 참 의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관계성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20세기 실존주의적 인간 이해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이전의 교회와 기독교가 이해해 온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종교개혁 이후 대표적인 두 신앙 고백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은 인간에 대해 현대와는 다른 이해를 제시합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소요리 문답 첫 번째 질문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하이델베르크신앙고백의 6번 답은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원한 복락 속에서 살고,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합니다.20세기 이전의 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관계라는 피상적인 개념으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 하나님을 창조주로 바르게 알고 사랑하며, 그와 함께 살고, 그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관계를 바르게 설정하고 유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감각적인 표현, 즉 관계성이 연결되었는지, 끊어졌는지에 대한 집중보다는, 연결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스럽게 할 때, 따라오는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이것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즉, 터치가 먼저이고, 그 후에 거룩함과 영광이 따른다는 것이지요. 특히 개신교인인 우리가 존귀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교리인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교리는 실존적이고 관계적인 의미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실존적 관계성, 일종의 신비한 종교적 체험이 은혜와 믿음의 증거라는 것이지요. 만약 이러한 터치를 경험했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뒤로 미뤄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신교인들의 실존주의적 신앙의 능력 없고 고민 없는 삶을 보면서, 개혁파 신학자 바빙크는 로마가톨릭보다도 못한 개신교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이러한 한탄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경건함이 거짓된 원칙–즉,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치가 없다고 즉시 단언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멀리해야 한다. 그러한 판단이 정말로 많은 진리를 담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말하기 전에 개신교의 좋은 교리로 말미암은 의로움보다 가톨릭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로움이 훨씬 낫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Refomed Ethics 1, 44) 베드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현상인 이유를 창세기 1장과는 다른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것은 우리의 타락과 구원과 성화, 영화라는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조망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벧후 1:3)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베드로의 미래적 설명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신성한(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고, 그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이어서 이를 위해 성도들이 해야 할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을 꼭 잡았을 때, 어떤 에너지가 전달되어 자동으로 변화되는 만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 자동으로 다른 사람이 되는 공상 영화와도 다릅니다. 베드로의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한 ‘처절한 투쟁’에 가깝습니다. 믿음 안에서 거룩하고 덕스러운 삶을 살고, 옳은 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탐구하며, 지식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도록 절제하고, 절제로 오래 기다리며 인내하며, 인내 속에서도 경건함을 포기하지 않고, 약한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사랑을 더하는 삶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사람의 삶이며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자랑하며, 서로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종말에 자격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불러주시는 칭찬이며, 상급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형상’이란 이름을 인간을 향해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마치 우리를 미리 의롭다고 칭하시는 ‘칭의’의 은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신실함과 사랑 속에서 우리에게 보증해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우리의 가벼운 이해를 재고해야 할 때입니다.
당신 안에서 책이 나오고 싶다고 꿈틀거리지 않는가?
by Trevin Wax
2024-01-03
나는 적지 않은 야심만만한 작가들로부터 자신 안에서 책이 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대체로 그건 한 장(chapter) 정도이다. 그게 아니면 블로그에 올릴 정도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책을 써야 한다고 말할 때도 있다. 누군가가 괜찮은 집필 아이디어를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이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쩌면 그게 당신일 수도 있다. 글쓰기 아이디어 또는 실제 글쓰기에는 뭔가 매력적인 면이 있다. 내 속에 과연 책을 낼 정도로 통찰력 있는 내용이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과연 글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주제로 여러 번 대화를 가졌다. 작가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때로는 출판사 모자를, 또 때로는 작가의 모자를 쓴다. 상황에 따라서 양쪽에 다 참여하기도 하고 또 둘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나는 글을 쓰는 데에 무슨 과정이 필요한지를 알려준다. 그래서 그들의 아이디어가 책으로 가능할지, 아니면 좋은 칼럼이나 에세이, 블로그 게시물로 의미가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돕는다. 쓰기는 읽기에서 시작한다책을 쓰고 출판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시작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새로운 세상은 훌륭한 제안서를 작성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좋은 제안서는 다른 책을 읽는 데에서 시작한다.글쓰기는 읽기에서 시작한다. 글을 잘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의 말이다. “작가의 시간 중 가장 많은 부분은 글을 쓰기 위해 읽는 데 소비된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서 작가라면 도서관의 절반을 뒤집을 것이다.”관심 있는 주제를 충분히 읽고 나면, 책의 개요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안서에 그 내용이 정확하게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책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충분한 콘텐츠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많은 경우에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제안서를 만드는 단계에서 사라진다. 어느 지점에선가 아직 내가 책을 쓸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제안서를 작성하면서 쌓은 경험과 역량은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계속 읽고 계속 고민하라. 플랫폼 질문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책을 쓰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쓰고 싶어 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는 사람, 그러니까 전작이 없는 초보 작가의 책을 집어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특히 요즘 들어서 작가들은 대체로 출판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플랫폼 구축이나 신뢰도 구축 등의 노력을 거쳐야 한다. 좋든 싫든 출판사는 수요가 많은 주제를 다루는 플랫폼을 찾기 마련이다. 이것은 초보 작가에게는 가장 낙담스러운 측면일 수 있지만, 글쓰기의 리듬을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좋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글쓰기 습관을 들이는 데에 도움을 주는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에 작품을 게시하기 시작하면서 소규모 청중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다른 작가와 연결을 맺거나 다른 온라인 플랫폼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당신의 동기가 단지 출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여야 한다. 시작하라: 계속하라열망에 찬 작가 지망생들과 대화할 때, 나는 그들의 글쓰기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무슨 주제를 파고 드는지 알고 싶다. 그들 속에 과연 좋은 책을 낼 아이디어가 있는지 아니면 최소한 기사거리라도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돕고 싶다. 나는 또한 책을 쓰는 데에 필요한 체력도 알려주고 싶다. 작가 지망생이 내게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시작하는 방법이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간단한 생각을 게시하는 방법에 대해 물으면, 나는 다음과 같은 조언으로 대답한다. 시작하기 전 첫 달을 계획하라. 일주일에 세 번 글을 쓰고 싶다면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라. 블로그의 경우 매주 2-3편의 글을 써서 첫 달에 9-12편의 게시물을 만든다. 웹사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게시물을 작성하고 일단 초안을 준비해 놓으라. 다른 사이트의 경우 장기적으로 하고 쓰고 싶은 주제와 관련해서 최소한 15-20편의 글을 준비하라. 그러나 실제로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사람의 수는 한 손에 꼽힐 정도이다. 대부분은 첫 달에 10-12편이 아니라 괜찮은 글 두어 편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싣는 정도이다. 종종 작가들은 큰 프로젝트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블로그를 작성하고 싶어 한다. 아니면 심지어 몇 달 안에 책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1-2 마일 달리기를 시도하기도 전에 마라톤을 뛰겠다는 목표를 세운 초보 주자들처럼 일을 시작한다. 글쓰기도 똑같다. 뛰기 전에 먼저 걸어야 한다. 잘 쓰려면 먼저 못 쓴 글이 쌓여야 한다. 그리고 많이 써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글쓰기의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현실을 직시하자. 대부분의 경우에 글쓰기는 힘든 일이다. 게시물에 별 다른 반응이 없으면 낙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하라.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요점은 청중의 반응이 아니라 훈련 내지 규율이라는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작가로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어떤 습관을 들이는가이다. 요점은 입소문이 퍼지는 것이 아니라(잘못된 글도 그럴 수 있음), 기술을 키우는 것이다. 이는 마라톤 뛰는 것과 같다. 여러 개의 작은 목표를 먼저 달성하지 않고는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더 많이 연습하고 더 나은 기술을 향상시켜야 한다. 노력할수록 더 나은 작가가 될 것이다. 배움을 활용하라아무도 당신에게 글쓰기 속도를 지정할 수는 없다. 글을 빨리 쓰는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항상 더 나은 사람을 찾아서 비교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글쓰기 빈도 또는 길이에서 동일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작가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규격화하지 말라. 어떤 작가는 알렉산더 해밀턴(“왜 항상 시간이 부족한 것처럼 글을 쓰는가?”)과 같은 반면, 또 다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작해야 한두 가지를 기여하는 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꾸준히 글을 씀으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작가가 되기를 갈망하는가? 내 충고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관심 갖고 있는 주제에 관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읽으라. (2) 당신의 글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도 자주 쓰라. (3) 각 장의 개요와 요약, 같은 분야의 다른 책에 대한 소개를 포함하여 완전한 제안서를 만들라. 당신이 발견한 내용이 당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한번 지켜보라. 계속해서 기술을 연마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글쓰기는 학습이다. 멈추면 안 된다. 원제: Is There a Book in You?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남은 권위마저…
by 전재훈
2024-01-02
예전에 독서 모임을 할 때였습니다. 그 모임을 이끌어 주시던 분이 중년의 아주머니셨습니다. 직업이 논술학원 원장님이십니다. 학원을 운영하기 전에는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합니다. 그 원장님께 제가 “학교 교사를 하시다가 학원을 하시니까 무엇이 제일 좋으세요?”하고 여쭤봤습니다. 원장님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시고 대답하셨습니다. “아이들을 가려 받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학교 교사를 할 때는 아이들이 맘에 안 들어도 내보내지 못하고 일 년은 끌어안고 있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힘드셨답니다. 학원을 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학원에서는 실력이 있는 아이들만 모집할 수도 있고, 맘에 안 드는 학생이나 말썽을 피우거나 사고를 치는 학생은 학원에 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어서 너무 좋으시답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야단치고 화내고 하는 일이 많았어요. 아무리 잘 가르치고 싶어도 따라오지 못하는 몇 명 때문에 더 많은 걸 가르칠 수도 없었고요. 그런데 학원을 하니까 쓸데없이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서 너무 좋아요. 마음껏 가르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교사로서 권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맘에 안 들면 내보낼 수 있으니, 아이들에게 제 말이 먹힙니다.” ‘군사부일체’라며, 선생님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을 만큼 선생님에게 권위가 있던 시절이 있었지요. 한 동네에 배운 사람이 별로 많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내 아이를 나보다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은 존경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잘못하면 아버지도 아이의 선생님께 머리를 조아리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아이들은 스승님께 함부로 대들지 못했습니다. 이를 두고 스승의 권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인지 ‘스승의 은혜’를 부르다 보면 자꾸 ‘어버이 은혜’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권위는 학부모들의 학력이 높아지면서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학력의 학부모들이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으니, 아이들도 선생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해서 선생님에게 맞기라도 하면 학부모가 찾아와서 항의하는 시대이니 선생님의 권위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만 갑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들을 체벌하는 것조차 금지되면서부터는 선생님들의 의지도 점점 없어지고 아이들도 선생님 말씀을 따르려고도 하지 않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대’가 된 것입니다.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라도 선생님들의 권위를 세워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점차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온 제도가 상벌 제도입니다. 직접 체벌은 금하고 상점이나 벌점을 주어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점점 전문인으로 육성하여 특정 분야의 권위자가 될 수 있게 하려고도 합니다. 선생님의 최종학력이 점점 높아져 가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목사의 권위도 교사의 권위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목사님의 권위는 선생님의 권위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님보다 더 많이 배웠고 인품도 더 훌륭해 보였지요. 실제로 부모님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을 목사님께 가져가면 척척 해결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작게는 글을 모르는 분들에게 편지를 읽어주거나 읍사무소에 함께 가는 일부터 크게는 아이들 결혼식에서 부모님 장례식까지 목사님께서 척척 해결해 주시니 그 권위는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목회는 권위주의로 할 수 있었지요. 권위주의로 목회하던 시절의 가장 큰 장점을 뽑자면 성도들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기가 수월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교황처럼 ‘우리 목사님의 말씀이 무조건 옳아’ 하던 시절은 이단이 함부로 교인을 미혹해 갈 수 없었지요.그러나 목사의 권위도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학력 수준도 높아졌고 목사님께 말해서 해결될 일도 별로 없어지고 있습니다. 신학교는 점점 대학 갈 실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학교로 인식되어 버렸습니다. 이른바 “비인가 신학교”가 난립하면서 오히려 성도보다 무식하고 무능한 목사들이 많아지고 말았지요. 더불어 일반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목사님들이 많아지면서 목사님에 대한 존경심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클릭이나 터치 한 번으로 더 좋은 설교를 골라서 들을 수 있는 시대이니 우리 목사님의 권위에 순종해야 할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하여 포스트모더니즘도 한몫 거들었지요.목사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문제들은 교인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교회를 옮길 수 있고 그렇게 옮겨간 이들을 다른 교회들이 환영해 주었습니다. 제자훈련과 큐티가 오히려 성도들의 마음에 또 다른 자만심을 심어 주게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와 내 큐티가 다르면 목사님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는 이단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호와증인이 와서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서 유혹하는 말에 홀랑 넘어가고, 제칠일안식교인이 와서 성경을 들이밀며 ‘안식일은 주일이 아니고 토요일이다’라고 말하면 또 홀라당 넘어가 버립니다. 이제는 대놓고 성경공부하자면서 교인들을 빼가는 시대가 되어서 교회마다 ‘신천지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경고문까지 붙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목사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생겨나는 또 다른 폐단은 그 권위를 세워보겠다고 무리수를 두며 거짓 학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미국에 한 달 다녀와서 박사 학위 받았다고 하는 목사님들이 참 많았습니다. 목사 가운인지 박사 가운인지 헷갈리는 정체불명의 가운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영어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박사가 목사 하는 나라라는 오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권위가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받는 대상이 되고 말았지요.또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인 권위를 세워보겠다고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이 난무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성령 집회를 한답시고 안수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술 담배 안 하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이라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죄인 취급하기도 했고요. 심지어는 임파테이션이라는 것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베드로처럼 수건만으로도 병을 고친다고 하고 금가루를 떨어지게 한다고도 하고 아말감을 금니로 바꾼다고 생난리를 쳤습니다. 목사의 권위에 도전하면 나병이 생긴다면서 협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목사님 돈 떼먹고 죽었다는 성도 이야기나 목사님께 대들고 사업이 망했다느니 불치병에 걸렸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목사의 권위를 세워보겠다는 대부분의 시도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최근 교황의 권위를 등에 업은 천주교는 급성장하고 있고 불교도 유명 스님들의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꽤 성장하고 있습니다만, 기독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그룹이 목사 그룹이 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었지요.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기독교는 그야말로 “개독교”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권위논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입성하시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군중의 환영을 받고 입성하신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어 쫓으셨지요. 그리고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 모든 일은 당시 권위를 독점하고 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성전에 들어가 이제는 가르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도대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는지 따져 묻기에 이릅니다. 말하자면, 교사 자격증이 있냐는 것이지요. 당시에는 공인된 랍비만이 성전에서 가르칠 수 있었거든요. 이 권위논쟁은 예수님을 고발할 수 있는 좋은 흉계가 됩니다.예수님은 권위논쟁에서 세례 요한의 권위를 근거로 저들의 흉계를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두 아들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큰아들은 대답만 하고 순종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 하고 나중에 순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권위는 순종과 관계된 것이라는 주장이 가능케 하지요. 즉 하늘로서 받은 권위라도 순종하는 자에게나 그 권위가 통한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권위논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뒤에 두 개의 비유가 더 등장합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의 공통점은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진멸한다는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위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징계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대해 답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마 21:27) 하셨습니다. 뒤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예수님의 권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권위가 어떤 것인지 설명한 것입니다. 즉 권위는 순종을 기반으로 하고 불순종하는 이들에게는 징계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논쟁을 이해하려면 좀 더 넓은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권위논쟁에 앞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이 일어납니다. 마가의 기록을 참조하면 성전에 들어가기 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으사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오다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게 되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마 21:21-22)이 말씀은 기도할 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많이 인용되었습니다. 기도는 믿고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받은 줄로 믿고 미리 헌금을 한다고 해서 ‘선불집사’라는 희한한 단어까지 등장했었지요. 한국 교회이기에 가능한 코미디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성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를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며 성도를 정죄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산 옮기기 기도로 믿음 테스트를 하면 과연 누가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말들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화과나무 저주에서 나오는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는 말씀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성전이 있던 시온산더러 들려 소돔과 고모라처럼 사해 바다에 던져지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거든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신 것처럼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시온산을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심판하실 수 있는 그 시온산에서 재판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저들’ 중에 시온산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던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의 권위로 징벌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손에 죽으시면서 그들을 위한 변호를 하셨습니다. ‘악함’ 때문이 아닌 ‘알지 못함’ 때문이니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위는 하늘로부터 부여된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에 바람과 파도가 순종했고 군대 귀신도 꼼작 못했습니다. 때가 되지 않아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도 그 권위에 순종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놀라운 권세를 가진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권위로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들을 불러 시온산을 불바다로 만드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 권위논쟁을 벌이던 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고 아들마저 죽인 이들을 포도원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저들은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마 21:41)라고 답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권위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악한 농부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왕의 혼인 잔치를 비유로 다시 권위를 설명하십니다. 왕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게 왕은 그의 권위로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마 22:7)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복을 입지 않아도 손발이 묶여서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지게 됩니다. 권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약 저들의 권위논쟁에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이 보내신 권위임을 말씀하셨다면 저들의 결말은 ‘진멸당함’입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스스로 권위 없는 자가 되어 권위 있다는 자들의 손에 붙들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저들이 당해야 할 ‘진멸당함’을 본인이 대신 당하셨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아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앞에 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이 쓰신 거룩한 두 돌판을 깨뜨립니다. 비록 그 일로 다시 40일을 금식하며 십계명을 다시 받아 와야 하는 수고로움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모세가 두 돌판을 깨지 않았다면 우상숭배한 이스라엘은 그 돌판에 쓰인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에 의거해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던 모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온유함이 승하신 분이십니다. 물론 권위도 훨씬 더 크신 분이셨지요. 예수님이 권위논쟁에서 답을 회피하신 이유가 바로 그 권위 앞에 진멸당할 저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권위를 앞세우면 저들은 심판의 대상이지만 사랑을 앞세우면 저들은 ‘변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탈권위의 시대입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보다 친구같은 아버지가 대세입니다. 선생님들도 권위를 찾으려고 하기보다 아이들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는 분이 존경받는 시대입니다. 교황도 예전의 알던 권위를 앞세우기보다 스스로를 낮춰 아기들하고도 눈높이를 맞춤으로써 존경을 받고 있고, 스님들도 절에만 머무르기보다 법륜스님처럼 산에서 내려와 즉문즉설을 하며 민초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권위를 내세우면 시대를 역행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한국 기독교가 권위를 세우려다 도리어 망한 케이스입니다. 권위는 스스로 내려놓기가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에 새로운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어차피 땅에 떨어진 권위입니다. 누더기가 된 권위를 다시 주워 입으려 하지 말고 이참에 예수님을 본받아 조금이라도 남은 권위마저 내려놓고 성도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살 길입니다.
개미가 지혜를 지고 나른다
by 필립 정
2023-12-30
올해 4월경, 광화문에 있는 큰 서점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다. 베스트 셀러를 진열해 놓은 곳에 자기 계발, 인간 관계론, 주식 투자, 토익, 경제 서적들이 뒤덮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인문학 책 진열대에 갔더니 ‘니체의 말’ 번역본과 니체의 다른 책들이 압도적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냥 서점을 나와 벚꽃이 휘날리는 경복궁을 걸으며 한참 생각해 보았다. 자기 계발, 돈과 니체의 책들의 조화가 수상해 이들의 접점을 찾으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았다. 얼마 안 가 뉴 노멀 시대를 살아가며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는 한국 청년들의 마음이 현재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사실 내가 현재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의 문제는 계속 꼬리를 물고 나를 붙잡고 늘어져 과거까지 끌고 간다. 한번 과거의 선택이 잘못되면 현재의 삶이 뒤틀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삶에서 경험된 지식이 충분히 쌓여야만 현재의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고 미래를 보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판단력, 통찰력, 결정 능력을 성경도 세상도 지혜라 부른다. 단지 성경이 말하는 지혜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와 그 출발점이 다르다. 그 출발점이 다르니 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잠언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모든 지식과 지혜가 시작된다고 한다(잠언 1:7). 경외란 하나님을 알아 가며 그의 능력에 탄복하여 존경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을 뜻한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쌓인 놀라운 경험이 지식이고 이에서 생긴 통찰력으로 현안을 해결하며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판단력을 지혜라 부른다. 오늘 소개할 개미 선생님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가 어떤 것인지 좋은 예로 증언해 주고 있다. 개미가 인간의 스승이란다. 흥미롭지 않은가!게으른 자는 누구일까?잠언 기자는 잠언 6:6에서 게으른 자에게 “개미에게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며 나무란다. 그런데 저자는 게으른 자를 지혜가 없는 자라고 단정해 버린다. 왜 그런지 이유가 다음에 나와 있다. 이 게으른 자가 지혜 없는 자의 전형인 인격적 결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개미는 두령도, 감독도 통치자가 없어도 일하는데…(잠언 6:7)” “너는 언제까지 눕고 언제 일어나서 일하러 가겠느냐”(잠언 6:9)라고 한다. 이에 게으른 자의 반응이 매우 반항적이다. “나는 좀 더 자겠다. 졸겠다. 좀 더 누워 있겠다”(잠언 6:10)며 무시해 버린다. 저항, 반항, 분노의 모습이 여실히 그려진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한다”(잠언 1:7)는 말씀이 여기서 떠오른다.굳이 멀리서 이런 게으른 자의 예를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철없던 어린 시절이 그려지지 않는가! “내 인생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마세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외치며 이불을 뒤집어 쓰는 철없던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어느 날 후회를 할 모습이 여실히 그려지는 지혜 없는 자 즉 게으른 자의 전형을 여기서 보여 주고 있다.개미의 지혜개미는 게으른 자가 배워야 할 지혜로운 대상으로 묘사된다. 잠언 6장의 개미의 지혜에 묘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고 세밀해서 두려울 정도다. 하나님을 알면 그에 대한 탄성과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가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왜 개미가 지혜롭다고 할까? 잠언 저자는 개미가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이도 먹을 것을 위해 여름 동안에 예비하여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잠언 6:7, 8)며 개미의 자발적인 미래 대비 능력을 말한다. 그런데 개미의 이 대비 능력은 그냥 말 한마디하고 지나갈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 한마디 뒤에 첩첩이 쌓인 무수한 개미들의 지혜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우선 개미들에게 두령, 감독자, 통치자가 없다는 말씀에 주목해 보자. 사실 이 말씀은 과학적 사실과 맞지 않아 보인다. 분명 개미 사회는 여왕개미가 최정점에 있고 이들의 페르몬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왕개미는 페르몬을 뿌려 다른 암컷들인 일개미들의 생식 활동을 통제하고 혼자 자손 번식 활동을 도맡아 한다. 수명도 여타 개미들보다 10배 정도 길고 몸집도 거대해 생산 활동에 적합하다. 그래서 여왕개미가 사라지면 생산이 멈춰진 개미 사회는 급격히 무너져 버린다. 개미들의 생과 사가 여왕개미의 존재 여부에 따라 결정되니 여왕개미를 최고 권력자라고 보기 쉽다. 그러나 여왕개미를 인간 사회의 왕이나 통치자로 보면 개미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여왕개미는 생산 활동 이외 어떤 힘도 없고 통치할 권력도 갖고 있지 않다. 다른 암컷 일개미들이 콜로니를 벗어나 몰래 알을 낳으려는 것을 저지할 수도 없고 알을 못 낳을 정도로 병이 들거나 노쇠하면 일개미들에게 끌려가 굴 밖으로 버림을 받는 신세로 무력하니 여왕개미는 두령도, 감독자도 통치자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95퍼센트가 넘는 일개미들이 여왕개미가 낳은 알을 돌보고 새끼들을 먹이고 전쟁이 나면 나가서 싸우기도 한다. 혼내거나 책망해도 일하지 않는 고집 세고 저항적인 게으른 자들과는 전혀 다르다.잠언 6장의 기자인 솔로몬은 이 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있다. 솔로몬은 자신이 비록 왕이지만 자신의 힘이나 권력이 게으른 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게으른 자들이 개미 조직의 일 개미들처럼 스스로 움직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사실 개미의 자발적 분업 사회에 대해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20세기 초 중반에 들어서야 진화론적 관점에서 개미들의 사회적 분업의 발달에 관심을 갖고 생식 계급과 비생식 계급으로 나누고 어떻게 이들이 서로의 갈등을 이겨내고 진화해 왔는지 연구하였다. 개미가 만 이천 종이 넘어 어떤 보편적이고 일관된 질서를 찾기가 어렵지만 개미 사회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서로 돕는 역할로 진화해 왔다고 연구 결과를 내었다. 이 진화론적 관점의 연구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솔로몬은 이것을 이미 3천년 전에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왕이지만 권력 없는 여왕 개미처럼 힘으로 눌러 억지로 일하게 만들 수 없음을 알고 개미의 자발성에 눈을 뜨도록 게으른 자들에게 책망과 동기 부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종적인 지시 체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돕는 개미 같은 횡적 조직 체계에 솔로몬이 이미 눈뜨고 있는 것 같다.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솔로몬이 여왕개미의 존재나 특성에 대해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어떤 미물의 조직이라도 통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데, 솔로몬이 개미의 두령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은 개미의 자발적 협력 체계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 분명하다. 솔로몬은 개미의 자발성을 보고 하나님의 창조에 감탄하여 인간 사회도 개미 사회 같아야 한다고 보고 좋은 예를 제시하는 것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왕정 시대에 자기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움직여 일하는 유기적 체제를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왜 일개미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지 알아볼 차례다. 단지 성경대로 자기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일까? 그 이상의 지혜가 숨어 있다. 왜 개미들은 자기의 자식도 아닌 여왕과 그 후손들을 위해 일하고 협력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찰스 다윈도 이 점을 매우 궁금해했다. 대부분 개미의 병사 계급은 나이 많은 일개미이다. 평생 생산 활동에 참여해 보지 못한 늙은 처녀개미가 자기 자식이 아닌 여왕개미와 그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쳐 싸운다. 다른 일개미들도 역할만 다를 뿐 여왕과 그 자손을 위해 먹이를 구하러 다니거나 건축을 하는 등 다양한 일을 몸 바쳐 한다. 다윈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타적인 동물이 소멸하지 않고 매우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솔로몬이 하필이면 다른 동물이 아닌 개미에게 배우라고 한 것은 이런 개미들의 공동체를 위한 이타적 헌신 때문으로 보인다. 개미는 이 이타성을 빼놓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개미의 이타성의 비밀은 유전자 연구가 활성화 된 현대에 들어서야 밝혀졌다. 인간은 남녀 모두 염색체 한 쌍을 갖고 있는 이배체의 동물이다. 개미의 암컷 역시 이배체이다. 그러나 개미의 수컷은 염색체 한 벌만 갖고 있는 반수체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식을 낳으면 형제자매간 유전자의 1/2을 갖고 있지만 개미는 형제자매 간에 유전자의 3/4을 공유한다. 그러니 자기를 더 많이 닮은 형제자매의 번성을 위해 자기들의 생산 활동을 포기하고 자기의 어머니인 여왕과 여왕의 자식이자 일개미들의 형제자매를 위해 일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보다 훨씬 이타적이고 공동체 지향적인 조직 사회를 유지해 나간다. 그래서 동물 학자들은 모두 개미를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동물이라고 인정하고 있다.솔로몬의 개미에게 가서 그의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는 말씀은 이런 개미의 공동체적 특성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게으른 자들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더 눕자”고 저항하며 솔로몬을 무시해 버린다. 이 게으른 자들의 태도는 그들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 결과는 무섭게 나타난다.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언 6:11). 미래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살다가 강도와 적군같이 예고 없이 찾아온 궁핍에 무너져 버리는 인생의 비극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게으른 자들의 선택은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자신들을 기대하고 있는 공동체조차도 무너뜨린다. 솔로몬의 권면의 당사자인 르호보암이 그 좋은 예이다. 솔로몬의 사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과 그를 따르는 참모들은 미래를 설계하고 준비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저 세제를 더 강화하고 부역의 짐을 백성에게 가중시켜 집권층의 이익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반란으로 국가의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사회적 약자와 공동체를 위하며 섬기는 마음이 그들에게 없음을 아시고 하나님은 북쪽의 10지파를 르호보암에게서 빼앗아 가셨다. 솔로몬의 경고가 그의 게으른 자식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게으른 자들은 이렇게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버렸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선택하라우리의 미래는 현재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조금 더 분명히 말하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 좌우된다. 하나님의 통치와 솜씨에 놀라고 경탄하며 두려워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쌓이고 이를 우리의 삶에 하나둘 적용하면 통찰력과 판단력, 실천하는 능력, 즉 지혜가 자라나 우리의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지나치게 염려하여 두려움에 싸이면 맘몬 신앙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 대형 서점에 수없이 진열된 자기 계발 서적, 주식, 코인 투자 안내서, 니체의 책들은 여실히 미래에 대해 열심히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보여 준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는지 내가 사는 이 미국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들의 고군분투 속에서 엄청난 부담감과 염려와 공포에 눌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지나치면 그것들이 우리를 사로잡아 지배해버린다. 이는 신앙과 같다. 마태복음 6:24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긴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말씀하며, 주님이 하나만 선택하라고 지혜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재물에 대한 두려움과 지나친 염려는 하나님을 중히 여기지 않는 불신앙이니 여기서 떠나라는 것이다.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현대인들이 니체에 열광하는 이유를 부정하고 싶지 않다. 신의 부재에 공포를 느끼며 그 부재를 극복하려고 스스로를 신처럼 여기고 스스로에 열광하는 광적인 태도가 아니면 이 불안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하지 않음에서 오는 공허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초인적 자기 극복이 현대의 뉴 노멀 시대를 겪는 공포와 많이 닮았다면 과장일까. 그러나 그 공포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에 압도되면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느끼는 내 존재의 무익함은 니체의 공허와 다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그 지식으로 채워지면 거기에서 오는 통찰력과 판단력의 지혜가 나를 인도하여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문제들은 풀기가 어렵고 답이 없다. 우리의 통제 능력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삶의 고통이 내 능력 위에 있다고 인정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그를 경험하여 얻은 지식만이 세상을 이기는 참 지식이다. 이 지식은 일개미들처럼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때 지혜로 실현된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결단하고 선택을 해야 미래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한번에 건너 뛰려 하지 말고 말씀 한 구절을, 삶의 한 찰나에 적용하면 언젠가 이런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날을 기대하며 꿈꾸기를 원한다.나는 이 글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앞길이 안 보여 절망하는 한국 청년들에게 오해되어 읽히거나 그들에게 잔소리 조의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의 설교 인용 도구로 쓰이지 않기를 바란다. 주를 깊이 의지하고 경험하여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가 충만한 목회자들의 손에 들려 지치고 힘든 한국의 청년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혜의 왕으로 오신 주가 탄생하신 날을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
선교사의 희생이 맺은 열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순천중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
2023-12-29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순천은 미국남장로교회선교부가 호남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선교지부를 세운 곳이다. 또한 이 지역의 선교를 전담한 미국 남장로교회는 북장로교회에 비해서 7년이나 늦게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렇지만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교회의 성장과 함께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은 특별히 큰 지역이었다.1892년 남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의 입국과 함께 호남지역을 담당하게 되었고, 1894년 이눌서(W. D. Reynolds)와 드루(A. D. Drew)가 처음으로 순천을 방문했다. 1898년에는 테이트(Lewis Boyd Tate)가 순회하면서 전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순천의 선교 가능성에 대한 조사와 함께 언젠가는 선교지부를 설치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순회 전도는 지속해 왔다. 그러나 인력이나 재정적인 지원이 동반되어야 했기 때문에 순천은 호남지역에서도 가장 늦은 1913년에야 정식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순천에 앞서서 나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방의 유지를 비롯해서 나주에 선교부가 자리 잡는 것에 반대가 심하여 1904년 광주에 선교부를 설치하면서 유진 벨(Eugene Bell), 오웬(C. C. Dwen) 등이 광주에 주재했고, 그들은 호남선교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렇게 광주에 정주하게 된 선교사들 가운데 오웬 선교사는 특별히 전남 남동부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순천을 중심으로 보성과 광양까지 기회를 만들어 순회하면서 전도를 계속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오웬은 1909년 폐렴으로 갑자기 별세했다. 동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오웬이 별세한 후 목포에 있던 프레스턴(J. F. Preston)이 후임으로 광주 선교부에 합세했고, 그해 신임으로 내한한 코잇(R. T. Coit)이 부임해서 합력하게 되었다. 프레스턴은 부임하여 오웬이 관심을 집중했던 호남 동남부 지역을 순회한 결과 이미 여러 개의 교회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남장로교 선교부에 순천지부 설치를 강력하게 요구함으로써 1913년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이에 유진 벨과 프레스턴은 오웬이 집중했던 순천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부 설치를 위해 힘을 모았고, 부임하여 이 지역에 관심이 있는 프레스턴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매곡동 언덕에 2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곳은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조차 꺼리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아이들의 시신을 항아리에 넣어 버리거나 돌무더기를 만들어 시신을 묻어놓은[風葬] 곳이었다. 한마디로 버려진 땅이고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싫어하는 곳이기에 땅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을 것이다.그렇지만 그러한 비용조차도 조달할 수 있는 능력이 선교부에는 없었다. 따라서 프레스턴, 벨 등 선교사들이 은행 대출을 받아서 마련했다. 그런 와중에 프레스턴이 1911년 안식년을 맞아 귀국하여 선교비 확보와 동역할 수 있는 새로운 선교사를 찾는 일을 했다. 안식년 휴가이지만 사실은 선교를 위한 비용과 인력을 확보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이때 만난 것이 전주 신흥학교 설립을 위해서 거금을 기부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그레이엄(C. E. Graham)이었다. 그를 통해서 같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실업가 왓츠(George Watts)를 소개받았다.그런데 왓츠는 군산에서 사역하고 있던 전킨(William McCleary Junkin) 선교사의 처남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장로였다. 그러니 이미 조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고, 프레스턴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서 선교를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우선 순천선교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기금과 13명 선교사의 생활비를 전부 약속했다. 매년 무려 1만 3천 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큰돈을 선교비로 후원해 줄 것을 약속받고 1912년 8월에 안식년 휴가를 마친 프레스턴은 돌아와서 바로 순천지부 설치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이렇게 해서 매곡동 산자락에 1924년까지 마련한 부지가 2만 6천여 평이나 되는 넓은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비교적 초기부터 순천에는 유치원, 남학교, 여학교, 병원, 기숙사, 남녀성경학교 등 종합적인 선교센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왓츠의 지속적인 헌금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는 매년 약속한 선교비를 보내오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설립과 병원 시설을 확충하기 위해서 8만 달러를 보내주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1920년과 1930년에는 직접 태평양을 건너 순천을 찾아와서 선교 현장을 돌아보면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하지만 그 과정에는 또 하나의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순천선교지부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13년 지부설립을 위해 선발대로 파송된 프레스턴과 코잇 두 가정이 순천에 도착했을 때, 공사가 아직도 진행 중인 사택에서 지내야 했다. 위생 상태는 물론 추운 환경에서 지내야 했는데, 그 과정에 네 살, 두 살 두 아이가 이질에 걸려서 하루 사이에 죽었다. 코잇은 선교부 부지로 매입한 뒷산 골짜기에 아이들을 묻어야 했다. 이 과정을 겪으면서 부인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회복되었다. 그들의 희생 때문에라도 순천 선교를 반드시 완성해야 했던 코잇이었다. 그렇지만 코잇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이다. 그의 가족은 순천 선교의 초석이 되었다. 순천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선교지부가 설치되기 전의 일이다. 순천보다 일찍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것은 전남 동남부 지역의 여천의 장천교회, 벌교의 무만동교회, 광양의 신황리교회가 1905년에 세워졌다. 어찌 보면 이러한 교회에서 순천읍 지역을 전도한 결과로 세워진 것이 지금의 순천중앙교회이다. 순천에 살던 최정희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김억평, 윤병열, 최사중, 김창수 등과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에 강시섭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교인 수가 늘어나자 1907년 북문 밖 양사재라는 서원 건물을 빌려서 짧은 기간 동안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순천중앙교회의 시작이다. 이때 프레스턴 선교사가 이 교회의 당회장으로 돌봤다.1908년 일본군이 순천에 주둔하게 되면서 양사재에서 쫓겨나서 서문 밖(영동)에 있는 5칸짜리 초가를 구입해서 예배를 드렸다. 이때 이미 30여 명의 신자가 회집했다. 그러다가 한일병탄이 있던 1910년 광주에서 파송한 김윤수가 현재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매곡동 144번지에 20평 규모의 T자형 예배당을 마련한 것이 최초로 지은 예배당이다. 하지만 순천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전도에 나섰던 오웬은 이곳에 공동체가 형성되는 초기에 그들을 돌보다가 예배당이 건축되기 전인 1909년 별세하고 말았다.우리나라 교회사에는 일반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많다. 그중에도 일제의 박해가 있을 때 교인이 오히려 더 많이 모이는 현상이다. 순천중앙교회도 그랬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에 시민들은 오히려 교회를 찾아들었다. 이에 교회는 1923년 부지를 더 확보하면서 예배당을 증축해야 했다. 또다시 1935년에는 붉은 벽돌로 130평 규모의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 이 건물은 지역의 명물이 되었고 해방 이후까지 사용되었다.1939년, 즉 일제가 대동아전쟁을 준비하면서 조선반도를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던 그때였다. 마침 그 이전 해에 부임한 박용희 목사가 청년회를 중심으로 성경반을 만들어서 성경공부와 함께 독립운동과 독립정신을 가르쳤다. 이 모임을 간디가 인도에서 인도독립운동을 하면서 사용했던 원탁회로 칭하면서 황두연 장로의 집에서 집회를 이어갔다. 원탁회에서 일본의 황국신민화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했다. 이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연루된 인사들인 박용희 목사, 장소를 제공하고 함께했던 황두연 장로를 비롯해서 배후의 세력으로 손양원 목사 등 순천노회 목회자 15명 전원을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주역인 박용희 목사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42년 광주지방법원에서 3년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6.25사변을 전후해서 순천지역은 특별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격변기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피폐해진 현실은 사람들에게 절망감만 안겨주었다. 정세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1955년 기존의 예배당으로는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70여 평을 증축해야만 했다. 이어지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도시로 일거리를 찾아 모여들던 1983년 모여드는 신자들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면서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해야만 했다. 하지만 건축이 쉽지 않았기에 1985년에야 준공검사를 받았고, 이듬해인 1986년에 봉헌할 수 있었다. 어렵지만 당시로서는 단일 예배당으로 800여 평 규모로 상당히 큰 예배당을 마련했고, 그 예배당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대신에 그 과정에서 1935년에 지었던 정감 어린, 그리고 일제의 수난기와 6.25사변을 겪어낸 예배당은 사라지고 말았다.1992년 미국남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100년을 기념하는 예배를 순천, 순서, 여수노회가 연합으로 순천중앙교회에서 드렸다. 이것은 선교지부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크고, 동시에 순천중앙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할과 위치가 분명함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 후 순천중앙교회는 2007년 4월 15일 창립 100주년기념감사예배를 드리기까지 순천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는 교회로 성장하면서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를 위해 섬기는 일을 감당하고 있다. 순천중앙교회는 특별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인 만큼 기억에 남는 지도자들이 있었다. 특별히 이 교회의 1대 프레스턴 선교사, 3대 담임 목사 이기풍(1920), 7대 담임 목사 박용희(1938), 6.25사변 이후에 임시 당회장으로 활동한 휴 린턴(Hugh Linton) 같은 이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교회와 지역 사람들의 생활과 신앙을 이끌어 주었고, 나라를 세워 가는 역할을 감당했다.예배당 앞에는 특별한 조형물이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서 설치되었다. 독특한 모양의 종탑이라고 할지, 높지 않은 탑신을 가지고 있는 십자가 모양의 조형물은 최초 당회장 프레스턴 선교사, 최초 예배당, 원탁회의 사건 등을 부조로 새겼고, 맨 위에는 교회에서 사용하던 종을 달아 놓은 것으로 교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야고보서의 기도 문법을 배우자
by 최창국
2023-12-28
야고보서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약 5:13-16). 여기서 서로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라는 명령문은 현재시제로, 기도는 교회 공동체의 일상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야고보서 5:16 하반절은 효과적인 기도에 대해 제시한다. 즉, 의인의 기도는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기도에 대한 전체 단락의 핵심이다(존 윌킨슨, 성경과 치유, 374-75). 효과적인 기도는 바로 의인의 진심 어린 믿음의 기도이다. 하지만 모든 믿음의 기도가 효과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니다. 믿음의 기도가 반드시 효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가 치유되기를 전심으로 기도했지만 치유되지 않았다(고후 12:8). 여기서 바울의 기도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을 통한 질병의 제거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동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바울의 관계성 속에서 나오는 질병의 새로운 용도가 곧 치유였다.중요한 것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기도의 효과를 의미하는 현재분사 에네르고우메네(energoumene, 효과적인)에 대한 문법적 또는 해석학적 논쟁이 있다. 분사 에네르고우메네가 수동태 혹은 중간태로 해석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메이어는 이 분사는 수동태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의인의 기도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 안에서 효과가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J. B. Mayer, The Epistle of St. James, 177-79). 반면에 기도의 효과에 대한 중간태(middle voice, 능동태와 수동태 사이의 어법)의 의미는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보다는 기도 자체로써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현대 주석가들이 선호하고 있다(James Adamson, TDNT (1064), vol. 2, 923-38). 기도의 효과에 대한 이 두 해석은 기도는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역사의 경험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영 등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기도의 문법을 수동태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해 성령은 능동적으로 역사하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응답을 받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기도의 문법을 중간태로 이해할 때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은총 또는 창조적 선물이 활성화되도록 하나님의 생명력과 리듬에 참여하는 행위로 이해하게 된다. 잭 레비슨도 기도 실천에서 중간태의 특성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밝힌다.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직접 개입하여 역사하기보다는 출생 때 주어진 하나님의 숨-영(창 2:7)이 넘칠 정도로 채운다(toping up)고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채운다는 것은 없던 것을 갑자기 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마음과 영 등이 온전해진다는 의미라는 것을 구약 과 신약, 그리고 고대 유대 문헌과 그리스-로마 시대의 문헌에 드러난 영(ruach)에 대한 연구를 통해 밝힌다. 따라서 “우리 속의 하나님의 영이 계속 거룩한 영으로 유지되려면 올바른 실천이 반드시 필요하다”(잭 레비슨, 성령과 신앙, 102). 특히 하나님의 숨-영이 이미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기도 방법도 달려져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숨-영이 우리를 자극하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출생 시 주어진 “우리의 영이야말로 일차적인 기도의 동인이고, 하나님과 신자 간의 처소이며, 인간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장소이다. 하나님의 영이 이 기도를 승인할지는 몰라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런 촉발과 영감은 내면에서 나온다”(잭 레비슨, 성령과 신앙, 84).야고보서에서 효과적인 기도의 문법이 수동태의 특성보다는 중간태의 특성이 더 타당하다고 할 때, 현대 교회의 기도 이해에 주는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기도의 중간태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상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다. 기도의 문법은 능동태와 수동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중간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기도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기도하는 사람이 성령의 능동성, 즉 기적과 능력을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인 기도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데 텔로스(telos), 즉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명력을 나누는 데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움직이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이며, 만남과 응답의 리듬이다”(케네스 리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19).유진 피터슨도 기도의 특유한 특성을 그리스어 문법의 중간태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스어 문법책에는 중간태가 ‘행위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체들을 묘사하는 동사 용법을 말한다’고 적혀 있다. 지금 그것을 읽고 있는데, 마치 기도를 설명하는 문서를 보는 느낌이다. ‘행위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체들’이란 표현은 기도에 딱 들어맞는다. 나는 상대의 행위를 통제하지 않는다. 주문이나 의식으로 신을 움직이게 한다는 건 이미 비인격적이고 운명론적인 의지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건 힌두교적인 기도 개념이다. 나는 세상을 지으시고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 시작한 행위에 가담하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결과에 참여한다. 행위를 하지도, 행위에 지배받지도 않았지만 주님이 뜻하신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다”(Eugene Peterson, The Contemplative Paster, 103-04).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참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다. 존재론적 동역자가 아니라 실천적 동역자가 된다. 물론 인간의 욕구가 기도 생활의 가장 원초적인 동기가 된다. 그러나 기도에서 욕구를 위한 차원이 기초적이지만 모든 것은 아니다. 기도의 본질적 목적은 단지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력을 경험하는 데 있다.레오나르도 보프는 그가 어느 날 그를 설레게 했던 한 부인과의 만남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소개한다. 그가 만난 부인은 열다섯 살 된 아들과 함께 도시의 쓰레기 집하장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수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경찰에게 살해당했다. 그 여인은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경직되어 웅크리고 있었고 울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보프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 지경에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그때 그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부드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눈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다보았다. ‘저요?’ ‘어떻게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제 아버지가 아니었던가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제가 그의 손에 있음을 느낄 수 없다면, 그 누구에게 제가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보프는 이 만남을 통해 이렇게 기록하였다. “마르크스는 잘못 생각하였다. 이러한 극단적 상황에서 신앙은 마약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빛을 발하는 해방이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이고 죽음을 넘어서는 삶이다”(Dorothee Solle, The Silent Cry, 294에서 인용). 우리는 여기서 기도는 단지 말이 아니며, 생산품도 아니며, 신비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기도의 이러한 신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통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변화시킨다. 방향이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통치 관계로 만들지만,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만든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사랑이 통치를 무너뜨리고 사랑이 드러남을 알게 되는 바로 이 점에서 기도 또한 작용한다. 그것은 사랑의 한 언어다. 그리고 기도가 사랑의 언어가 아닌 곳에서는 그것을 생략할 수 있다”(Dorothee Solle, The Silent Cry, 296). 여기서 사랑은 ‘나는 너 없이 살 수 없어’라고 말하는 종속성과 같은 것이다. 이 종속성은 서로를 충만하게 하는 종속성이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와 사랑이 넘치는 종속성이다. 기도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중 경청’의 엄중한 교훈
by Trevin Wax
2023-12-27
내 믿음의 영웅 중 한 명인 존 스토트는 “이중 경청”라는 개념을 대중화했다. 그는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형성되고 또한 현대 세계의 현실에 완전히 몰입한” 기독교인의 지성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스토트는 “이중 거부”라는 맥락에서 이중 경청이 필요하다는 프레임을 만들었다.이중 거부첫째,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성경 공부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말씀이 세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둘째, 우리는 세상을 따르기를 거부한다. 그렇기에 주변의 사건과 경향, 또는 이론에 너무 매료되어 이 세상을 말씀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또는 더 나쁘게는 세상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이중 거부가 의미하는 바는 현실도피적 후퇴의 길과 혼합주의적 순응의 길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토트의 비전은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이 옹호하는 “선교적 만남”과 유사하다. 선교와 만남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중요하다. 세상에 순응하는 것은 선교적 접점이 없는 만남이라는 결과를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면 순결이라는 환상에는 이를지 몰라도, 우리가 다가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 이중 경청의 필요성스토트는 이중 경청을 이중 거부가 가진 긍정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우리는 기대와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혼란스럽고 원하지 않는 말씀을 주실 수도 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주변 세계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먼저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그들에게 말씀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고 노력한다. 스토트의 설명이다. 우리는 겸손한 경외심으로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리고 이해하게 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비판적 예민함으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이해하기를 열망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을 믿고 순종한다는 건 아니다. 단지 세상과 공감하고 복음이 세상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발견하기 위해 은혜를 구하겠다고 결심한다. 팀 켈러는 이중 경청에 있어서 최고의 모델이다. 성경에 뿌리를 두고, 청교도에 대한 독서와 더 폭넓은 개혁 전통에 참여하면서 신학적 성찰에 흠뻑 젖었던 이가 켈러이다. 그는 또한 사회 동향에 대해 늘 호기심이 많았으며, 비그리스도인의 문헌과 분석에도 정통했다. 그랬기에 켈러는 현대의 우상 숭배가 성경의 진리와 접촉하도록, 그것도 가슴을 찌르는 방식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켈러를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다. 즉 말씀에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임과 동시에 말씀에 비추어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분석하는 자세이다. 존 웹스터의 중요한 상기이중 경청에 대한 스토트의 제안에 대해 내가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그건 스토트 때문이 아니라 그 표현이 오용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말씀을 듣고 적용하는 방법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먼저 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쉽게 바뀔 수 있다. 스토트의 비전은 말씀에서 시작하여 그 말씀을 세상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다. 그에 반해서 이중 경청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교사가 우선 성경에 깊이 빠졌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세상의 문화를 분석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야 세상이 더 집중해서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 웹스터(John Webster)가 “제자도와 부르심”이라는 강의에서 주는 중요한 교훈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는 사실상 스토트의 말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임무가 항상 세상이 아닌 말씀에서 시작하고 계속해서 말씀을 강조되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실한 교회는 세상의 리듬을 따라가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흥분되고 불안정한 교회는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으며, 안정성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이고 인내심 있는 관심, 그리고 과도한 자극을 피하는 데서 비롯된다. 교회가 주변의 변화하는 문화만큼 유행에 빠지고 흥분한다면, 교회는 참으로 독특한 무엇인가, 즉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 안정된 확고함을 제공하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마치 스토트의 “이중 거부”가 피하려고 하는 또 다른 함정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웹스터가 말한다. 물론 교회는 세상이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질 것이다. 정중하고 진심으로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자기중심적이고 반응이 없는 일종의 긴장증에 빠진 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도피주의자의 후퇴란 있을 수 없다! 웹스터의 요점은 신실한 교회가 세상의 말을 들을 때 “세상이 떠드는 내용에 매료되거나 압도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복음은 우리를 매료시키고 우리를 모든 것으로 채워 준다. 예수에 집중하기웹스터의 말이다. 복음은 언제나 세상을 능가한다. 예수님 자신은 세상보다 더 권위 있고, 합법적이며, 승리적이고 또 흥미롭게 말씀하신다. 교회가 정말로 세상을 사랑한다면, 교회는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적 표현을 듣기 위해 마음을 기울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복음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복음을 잘 듣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을 돕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이것이 바로 이중 경청이 끝없이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말씀을 다 들었으니까 이제는 세상과 소통하면 되겠구나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쉬지 않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 복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말씀을 배워야하고 또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향해서 진리를 드러내는 길이다. 어쩌면 세상은 후기 현대, 포스트모던,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우리가 지금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고백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와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곳에 머물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우리에게 이미 성취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제시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분은 자신에게는 마땅한 권리이자 우리에게는 성취가 되는 순종을 기대하신다. 세상은 변한다. 그러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가볍고 찰나이다. 그러나 말씀은 무겁고 영원하다. 이중 경청이 가능하려면 말씀에 일시적인 우선순위를 두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꾸준히 말씀을 파고 또 파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바라본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에 참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말씀을 가져간다는 의미이다. 원제: A Crucial Reminder for ‘Double Listen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도의 삶
시편 88편 묵상
by 고명환
2023-12-26
1 자식을 잃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으며 그 아픔은 의식이 있는 한 따라다닌다. 재물이나 건강을 잃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실감의 무게 역시 가벼워지지 않는다. 다윗은 많은 자녀를 둔 복을 받은 것과 비례해서 그들로 인해 심한 고통도 겪어야 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핏덩이로부터 장성하여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던 아들에 이르기까지, 분신과도 같았던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 중 아끼던 아들 압살롬의 죽음은 그 어느 자식을 잃어버린 것보다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 같다. 아버지를 제거하고자 천인이 공노할 일을 벌였던 반역자 아들, 압살롬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으로 한동안 슬픔의 나날을 보낸 것을 볼 때, 자식들을 향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분명, 시간을 두고 일어난 아들들의 죽음은 그의 마음에 죽는 날까지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했음에도, 그것이 삶의 방향을 흔들지 못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비극 앞에 심한 자책으로 긴 세월을 소모하지 않았고, 주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완숙한 성도로 살아갔다.욥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졸지에 잃은 충격은 많은 재산을 한꺼번에 잃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컸을 것이 뻔하다. 그 또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특별한 아버지였음을 성경은 들려준다. 행여나 자녀들이 잔치를 벌이고 나면 자식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지었을까 봐 다음 날 아침이면 그들을 생각하며 번제를 드렸다고 한다(욥기 1장). 이렇듯 섬세하게 돌보았던 자녀들이 모두 참변을 당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낙심하고야 말았다. 허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녀들의 죽음이 주님을 향한 믿음을 헐어 놓지는 못하게 했다. 마음의 고통을 표현했을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녀를 비롯한 그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소유가 아님을 고백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 주었다. 상실이 그를 주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젊은 나이에 미국의 뉴 잉글랜드로 이민 온 60대 부부를 알게 되었다. 미국식 아침식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직접 운영하여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안정된 생활을 하는 부부였다. 한때 교회를 다녔지만, 오래전에 신앙생활을 중단했다는 주변 사람의 말을 듣고 식당을 찾아간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물론, 교회로 인도할 목적의 방문이었다. 몇차례 식당을 방문하면서 서로에 대한 경계를 낮출 수 있었고, 마침내 그분들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더 깊은 대화를 하며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호기였다. 부부가 사는 집은 둘이 사용하기엔 큰 전형적인 뉴잉글랜드의 이층집이었다. 집에 들어서자 부부는 집안의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여러 공간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안내한 방은 칠년 전부터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빈방이었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단정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말끔하게 치워진 방의 한켠에는 활짝 웃는 앳된 청년의 사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7년 전에 죽은 아들의 방이라고 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근처 바다로 서핑을 갔던 아들은 사고를 당해 영영 부모의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던 부부는 그가 남긴 모든 것을 고스란히 그 방에 보존한 채 아들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있으면 왜 내 아이를 죽게 해요.”“그분이 진짜라면 아들을 지켜줘야 하지 않아요?”여전히, 분노가 묻어 있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항변에 선뜻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무언가는 말해야 했다. 그래서 만든 대답은 지금 애써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의례적인 대답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바꾸기에는 궁색한 위로의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부부의 심한 실의와 불신은 교회와 하나님을 등지게 몰아갔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가족과 소유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평탄한 길 만을 걷게 해 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지자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다. 안 집사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김미선(가명) 성도의 첫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약물 과복용이 사인이라고 했다. 남동생이 마약 중독으로 떠난 지 채 일년도 안 되었는데 형도 그 길을 가고야 만 것이다. 얼마 전 동생을 묻는 자리에서 관에 손을 얹고 잘 가라고 눈물로 작별 인사를 했던 형이었는데…. 삼십을 코 앞에 둔 펄펄한 청년 둘이 일년을 사이에 두고 마약의 희생양이 된 것도 가슴이 먹먹한 일이었지만, 남은 아들마저 잃은 김미선 성도의 심정을 생각하자 모든 우울한 기운이 한꺼번에 덮쳐 왔다. 이젠 더 이상 해 줄 위로의 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미군을 만나 타국으로 시집온 그녀에게 두 아들은 삶을 지탱해 주는 한 축이었다. 다른 한 축을 담당해 주어야 할 남편은 잦은 외도로 기대지 못할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속 썩이는 남편 때문에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그때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며 살아왔는데, 두 아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녀를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만 같았다. 물론, 소식을 들은 주변의 사람들 역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찌할 수 없어 며칠을 기다린 뒤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분은 모든 방문자를 거절하고 홀로 막막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들려온 소리는 절망 끝에서 나오는 힘 없는 절규였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자꾸 일어나지요?”“또, 왜 꼭 하나님을 잘 믿어 보려고 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그렇다. 남편의 배신 이후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 주님만을 신뢰하며 살겠다고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던 중, 둘째 아들이 떠나는 시련이 닥쳐왔다. 그래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 몸부림으로 지탱해 왔건만, 또다시 찾아온 불행은 그녀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 같았다. “저도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건넨 힘없는 응대였다. 거듭된 시련은 김미선 성도를 주님을 영영 원망하며 멀어지게 할 것만 같았다. 헌데, 감사하게도, 두어 달 지나 김미선 성도는 교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주님 외에 그가 갈 곳은 없었다. 살아야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았던 것이다. 고난의 이유를 알고 싶지만 시간이 흐르면 의문도 아픔도 점차 희석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주님을 따라가기로 다짐했다고 믿고 싶다.내가 교회를 떠난 후 들리는 소식은 희망적이다. 떠났으나 보내지 못한 두 아들의 엄마는 매일 그들이 잠든 무덤을 방문한다고 한다. 아울러, 교회도 착실하게 다녀 새로운 목사님에게서 집사 직분도 받았단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두 아들도 잃고 주님도 잃어버렸다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떨치지 못할 안타까움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성도의 길을 이탈하지 않고 눈물로 가고 있는 것이다. 2시편 88편은 시편 중 가장 어두운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암울한 기운이 무겁게 드리우고 있다. 적어도 고난 가운데 구원을 호소하는 많은 비탄시의 처음, 혹은 중간, 아니면 마지막 부분이 찬양이나 감사로 장식된 것과 달리 이 시의 어느 곳에서나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기도응답에 대한 기대나 밝은 미래에 대한 소망도 그려져 있지 않다. 전편에 걸쳐 짙은 어두움만이 흐른다. 시편 88편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1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2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3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4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5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6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7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8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9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10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11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12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13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4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15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16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17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18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어렸을 때부터 시인을 따라다녔던(15절) 고난은 이제 가까운 친구들마저 떼어 놓았고, 건강마저 앗아가 버렸다(8, 9절). 게다가, 주님은 그를 버렸고 얼굴을 감추셔서 더 이상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 것 같다(14절). 사실 여부를 떠나 여러 절에서 표현했듯, 그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었다. 주께서 그를 칠흑같이 어두운 곳에 던지셨고, 친구와 건강을 앗아 가셨으며, 두려움과 공포를 보내어 떨게 하셨다. 주님께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든 극한의 벼랑에 시인을 놓으신 것이다. 세찬 고난 속에서도 시인은 주님 앞에 자리 잡고 낮이나 밤이나 그분을 바라본다(1절). 무덤과 같은 어두움만이 지배하는 환경에서도 그의 영혼은 주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바꿀 수 없는 형편을 상세히 알리는 한편, 비참한 환경에서 갖는 그의 생각과 감정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부르짖어 구원을 호소한다. 찬양과 감사의 구절로 고조된 음역을 연주하는 듯한 시편의 시들 가운데 왜 절망의 늪에 빠진 영혼이 토해내는 신음과 같은 시가 삽입되었을까? 의도를 알지 못하나, 이런 성도의 삶이 분명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고난의 긴 터널 속에 주님은 성도를 놓아두기도 하시는 것을 보여 준다.그리고 이때, 성도가 취할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가르친다. 비록 낙심과 고통으로 주저앉을 수는 있으나 주님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말 것을 암시한다. 원망과 불평 속에 뒤돌아 가기보다 오히려 부르짖어 기도하는 편을 택하라고 들려주는 것 같다. 이것이 다채로운 시편 가운데 이 시가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아닐까?3성도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은 각각 다르다. 어떤 성도에게도 동일한 길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비교적 순탄한 길로부터 험하고 거친 길에 이르기까지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은 다양하게 디자인되어 있다. 헌데, 그중 고난이 기다리지 않는 성도의 길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재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 아픔을 겪을 수 있고, 육체나 정신적 질환에 시달릴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어떠한 조건의 길이 주어졌건 주님은 성도들이 끝까지 완주하기를 원하신다. 달려갈 길을 다 마치면 상상치 못할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잃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꿋꿋하게 버텨 시련을 이겨내어, 모두 이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광에 이를 수 있을지 찾고 따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인내로 견디어 내야 한다.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는 어떻게 준비된 마음이 열매를 맺는지 들려준다. 이와 함께, 신앙을 포기하는 이유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도에 낙오하는 영혼들에게 시련이나, 세상의 염려, 재물의 유혹,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시련이나 유혹은 신앙의 결실을 맺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온다. 다만 이들은 고난이나 세상의 유혹이 마음에 간직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지 못하도록 인내하며 지켜낸다. 그들이 단지 좋은 마음의 상태를 준비했다고 신앙의 승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은 가르쳐 준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누가복음 8:15). 지키고 인내하는 생활이 성공적인 성도의 삶을 견인하는 중요한 요건임을 알려 준다. 시편 71편의 성도는 88편의 기자처럼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어 왔고 태어날 때부터 주님을 의지했다고 한다(시편 71:5-6). 이제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하고 인생의 서리가 내린 늙고 쇠약한 노인이 되었다(9, 18절). 세월은 흘러 인생을 마감할 시기가 가까웠으나 줄곧 따라다니는 고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4, 10, 11절). 여전히 그를 해치려는 잔인한 자들은 주변을 맴돈다. 한편, 살아오는 동안 고난이 끈질기게 그를 따라왔다면, 그는 변함없이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해 왔다. 주님밖에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5, 14절).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에서 ‘견디다’라는 단어는 여러 번 사용되었다. 성도의 삶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환난을 예언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24:13). 야고보 사도는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견딜 것을 당부한다(야고보서 5:7). 사도 바울도 여러 편지에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라고 성도들을 격려했다. 인생의 거친 길을 헤쳐 나갈 때 개인이 가진 능력만으로 인생의 시련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면, 절대적인 타자가 원하는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적 삶을 실천하는 여타 종교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도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계시는 주님은 성도의 아픔이나 난관에 객관적 방관자가 아니시다. 곁에서 이기도록 격려하고 위로해 주시는 친구이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주님께서 모든 형편을 아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성도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주님은 그와 함께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성도를 떠나시지 않는다. 눈앞이 깜깜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도 주님은 지켜보고 계신다. 혼자인 것 같으나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은 좋으신 분이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사랑의 하나님이다. 자녀의 불행을 결코 바라지 않으시며 더군다나 망하기를 바라는 분이 절대 아니다. 현재의 아픔이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그분의 선한 계획 안에 있고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로마서 8:28)은 분명하다. 주님이 좋으신 분이고 귀한 분으로 마음에 자리 잡는다면 내가 소유한 것을 잃는다 해도 그분을 향한 신뢰에 금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상실감을 갖게 될지 모르나 그분을 떠나지는 않는다. 주님이 삶의 이유이고 목적이고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을 소유한 사람은 주님의 선하심(goodness)을 믿고 현재의 어려움들을 이겨 나갈 것이다. 다윗은 시편 27편에서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선하심을 온전하게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편 27:13, 14).4고난에 굴복해서 얻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소중한 것을 잃고 상실감에 잠긴다고 같은 것을 돌려받지 못한다. 질고 중에 주님을 원망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영혼마저 황폐해질 것이다. 성공을 향해 기도하고 노력해 왔지만 실패만을 거듭해 왔다고 실의에 빠져 주님을 떠난다면, 인생 전체를 실패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고난을 통과했을 때 얻는 유익을 바라보자. 고난은 즐겁지 않으나 고난의 경험은 나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큰 자산이다. 시편 119편의 기자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한다(71절). 사도 바울은 죽음을 선고받은 것 같은 큰 고난을 겪었다고 증언한다. 고난만큼이나 하나님의 위로도 넘쳤고 그 위로로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며 하나님을 찬송한다(고린도후서 1:3-8). 두 아들을 마약으로 잃은 김미선 성도는 그 뒤 같은 슬픔을 겪는 부모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서로 위로하고 마약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에 활동한다고 들었다. 그 성도만큼 자식을 잃고 실의에 빠진 부모의 심정을 잘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테고, 어떻게 그들을 위로할 수 있을지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고난의 경험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같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쓰일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 고난을 주신 이유는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더욱 견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할 경험과 지혜를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신다(잠언 24:16). 신앙은 살아내는 거라고 말들 한다. 성도의 삶은 언제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행형이어야 함을 들려주는 교훈들이다. 잠시 주춤할 수 있으나 또 나아가야 하고, 넘어졌으나 일어나 전진해야 한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로마서 8:18)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 어떤 어려움이라도 딛고 일어나 영광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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