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풀어내는 성경
by 김상일2020-06-11

“우리가 성경 본문에 접근할 때, 우리는 ‘기존의 이해(pre-understanding)’를 가지고 접근한다. 이는 성경에서 다루는 주제에 대해 이미 수립된 신념이 있는 것이다. 이 신념들은 강하고 깊으며, 많은 경우 암묵적이다. 언어화하거나 공식화하기도 힘들며, 심지어는 스스로 인식하기도 어렵다…”(센터처치, 214쪽)


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 신학하기’를 펼쳐 나가는 뼈대 세우기의 일환으로, 필자는 앞으로 세 번에 걸쳐서 각각 1) 성경, 2) 교리와 전통, 3) 목회 방법론과 프로그램이라는 각각의 주제를 매회 다루고자 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첫 번째로 중간 지대에서 성경을 읽는 일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살필 것이다. 필자는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에서의 성경 읽기를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기에 앞서, 중간 지대에서의 성경 읽기가 아닌 것은 어떤 모습인지를 먼저 살펴 보겠다.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란, 성경이 말하는 세계 안에 성경을 읽는 사람의 삶이 완전히 흡수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굉장히 좋게 들릴 수 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성경 자체의 용어와 성경이 제시하는 나름의 틀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를 잘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나은 해석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삶이 성경에 흡수된 채 거기에만 머무는 데서 시작된다. 성경이 말하는 언약, 심판 같은 개념들, 성경 시대 당시의 문화와 언어, 지리 등에 흠뻑 빠져들어서 능통해지는 것은 성경을 중간 지대에서 읽어내는 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간 지대의 성경 읽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읽기에는 현대인의 질문과 고민, 현대 문화가 가지는 독특성에 대한 고려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좀 더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세계 안에 흠뻑 빠져들어가는 그 작업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성경 안에 완전히 푹 빠져들려면 내가 살아가는 문화, 나에게 익숙한 것들,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나 가치들을 벗어나서 낯선 문화, 익숙하지 않은 것들, 당연하지 않은 전제나 가치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21세기의 첨단 과학과 문화 속에서의 삶을 익숙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고대 문화와 그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힘들고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의 세계로 흠뻑 빠져드는 일은 모든 성경 해석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이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경 읽기는 성경이 말하는 것들이 단지 성경 안에서 어떻게 풀리는지에 관한 읽기며,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는 아니다.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 말하는 성경 읽기는 그와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좀 더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보겠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주제는 적어도 개신교인들의 성경 읽기에서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 성경 본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개신교 종교 개혁 이래로 항상 끊이지 않았고, 최근 들어서는 소위 옛 관점과 새 관점이라는 두 관점 사이의 대결로 치달으면서 논쟁이 격해졌다.


그리고 성경을 성경 당시의 관점으로 읽어내는 데 집중하는 서로 상이한 관점 사이의 이런 논쟁의 방향과 흐름은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일단 이런 논쟁이 성경 본문을 읽어낼 때 주로 보여주는 관심사는 ’지금’이 아니라 ‘그 당시’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칭의론 논쟁의 핵심은 과연 칭의론이 (옛 관점이 말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죄책을 해결하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냐, 아니면 (새 관점이 말하듯이)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배격과 배타성의 문제, 즉 교회론과 선교론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냐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가르침이 현대인의 삶의 정황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는 일에 이런 논쟁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문적 논쟁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를 보여주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이런 논쟁은 거의 호소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학자도 아니고 신학생도 아닌, 단지 일상을 살아가는 데 바쁜 현대인들이 왜 굳이 바울이라는 몇천 년 전의 인물이 말했던 ‘의로움’을 추구하는 길에 대한 얘기에 귀기울여야 하는가. 더군다나 현대 세상 문화는 의로움에는 별 관심이 없어도 괜찮은 문화다.


남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도 잘못이 아니라는 문화적 내러티브가 대세인 시대에 어느 현대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성경 본문을 삶으로 풀어내는 성경 읽기는, 어쩌면 의로움이라는 용어가 가리키는 실재가 현대인의 삶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켈러는 삶으로 풀어내는 성경 읽기의 실례로서 로마서 3장 21-28절을 본문으로 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Justified by Faith)이라는 자신의 설교(2009.3.8)를 통해서 잘 보여준다. 그는 우선 이미 언급한대로 로마서 본문이 제시하는 '의로움 혹은 의롭게 됨(righteousness = to be justified: 켈러에 의하면 해당 본문에서 두 단어는 사실 같은 개념의 단어임)'이라는 단어에 대한 현대 문화의 오해를 걷어 내고자 한다. 그는 현대인 대다수가 의로움이라는 단어를 단지 도덕적이고 훈계적인 단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가리키면서, 이 단어는 결과적으로 현대 문화 안에서 거의 아무런 호소력도, 매력도 없다는 것을 밝힌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성경 본문에 사용된 의로움이라는 단어가 사실 알고 보면 현대인들에게 아주 낯선 단어는 아닐 수 있음을 알려준다. 켈러에 의하면, 해당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완벽한 삶의 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증해 주는 성취나 업적’을 가리킨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증해주는 성취나 업적이란 무엇인가? 켈러는 영화 '불의 전차'에 등장하는 달리기 선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달리기에 엄청난 열심을 보이는 선수였고, 그의 열심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마침내 그에게 왜 그토록 달리기에 열심을 내는지 묻게 된다. 켈러는 그 질문에 대한 그 선수의 대답을 이렇게 인용한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면, 나는 10초 안에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선가—그것이 자신의 직업이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든, 어떤 대의에 대한 헌신이든—발견해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존재다. 켈러는 이런 자기 존재 가치를 확증 받으려는 시도, 그리고 그런 확증을 가능하게 해주는 업적이나 성취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현대인이—아니 사실 모든 사람은—의로워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추가적으로 켈러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로 잘 알려진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 감독의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이런 의로움의 추구가 보편적인 인생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확증한다. 켈러에 의하면, 폴락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번 영화 제작을 마칠 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1년 정도 더 벌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켈러에 의하면, 폴락은 '불의 전차'에 나오는 달리기 선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노력과 성취를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 그렇게 하는가? 켈러는 묻는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직업적 성공으로, 자녀 교육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를 통해서, 또 다른 여러가지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가 존재할 만한 이유를 얻어내고자 하지 않는가. 당장 설교자의 경우를 보자. 왜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설교를 성도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 그토록 민감한가? 왜 설교가 좋았다고 하면 우쭐하게 되고, 설교가 별로였다고 하면 그토록 우울해하는가? (이것은 필자 개인의 경험이기도 하다.) 어쩌면 설교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나 자신의 정체성의 기반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설교를 얼마나 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이 바로 ‘믿음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라고 켈러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업적과 성취를 통해서, 혹은 다른 무언가를 수단으로 삼아서 의로워지고자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 대다수의 삶을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한낱 과거의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삶에서 믿음 아닌 다른 것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다른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구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찾는 삶을 살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설교자가 당장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곧바로 이후부터는 설교에 대한 성도들의 칭찬이나 비판에 귀는 기울이되, 거기에 자신의 존재 가치가 달린 듯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평생 자신의 직업적 성취를 통해서 자기 존재 가치를 확인하던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곧바로 가르침대로 살 수 있게 될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들을 현대인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공명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 파급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진다. 왜냐하면 그런 읽기는 더이상 성경을 종교적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읽기는 결국 교회나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엄청나게 커진다. 성경 읽기는 궁극적으로 인생 읽기가 된다.


중간 지대에서 신학하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성경 읽기는 켈러가 말하는 신학적 비전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우선, 이러한 성경 읽기는 전통과 교리의 가르침을 아무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대신, 현대인의 삶의 정황 속에서 성경을 읽어 냄으로써 전통과 교리가 말하는 바가 현대적 맥락에서 어떤 것인지를 다시 보게 해준다. 더 나아가서 이런 성경 읽기는 목회 방법론과 프로그램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면, 현대인의 지대한 관심사 중 하나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데 있다고 한다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소그룹을 구성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어떻게 그럴까? 성도들이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교회 내 활동을 통해서 얻어내려는 노력을 최대한 지양할 수 있게 해주는 소그룹 구조는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을 교회 리더가 던질 수 있다면, 사역 프로그램이나 목회 방법론을 칭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지 고민할 여지가 생긴다. 이런 고민은 목회가 성공했다는 다른 교회에서 소위 잘 먹힌다는 프로그램을 무작정 가져와서 돌리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직 우리 교회의 상황을 알고, 성도들의 필요를 아는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을 말이나 글로 가르치는 일에서 멈추지 않고, 사역의 구조와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이라는 차원으로 녹여낼 수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설교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단지 듣기만 해서는 변화를 경험할 가능성이 적다. 하지만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 내의 사역 구조와 방법론이 그러한 칭의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게 되고, 또한 자신들이 섬기는 모든 사역 안에서 그런 가르침이 실제로 구조화되고 체화되어 교회의 삶에 녹아드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면, 성도들이 변화를 경험할 여지는 당연히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이며, 그런 신학함에 맞는,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책 ‘센터처치’에서 켈러는 성경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주제들을 세 가지 카테고리로 묶어서 부각시킨다. 그 주제들은 1) 추방과 귀향, 2) 언약과 성취, 그리고 3) 왕국과 도래다(센터처치, 83-88쪽). 이런 각각의 성경 신학적 주제들은 고도의 학문적 연구가 필요한 주제들이다. 하지만 그런 연구 자체에만 만족한다면, 그것은 그저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될 뿐이다. 궁극적으로 성경 읽기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성경을 통해서 삶을 풀어낼 수 있는지여야 한다. 비록 켈러가 이 질문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답을 주기는 하지만, 그가 모든 답을 줄 수는 없다. 결국 독자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의 상황과 필요는 오직 그 현장에서 성경을 읽어 내려고 하는 여러분 스스로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연재에서는 교리와 전통을 가지고 중간 지대에서 신학함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것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김상일

김상일 작가는 UC 버클리(B.A.), 고든콘웰 신학교(M.Div) 졸업 후, 현재 보스턴 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육과 실천 신학으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현재 서평 쓰는 남자 블로그(www.likeellul.com)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으며, 팀 켈러에 관해서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 "좋은 나무" 웹진과 시니어 매일 성경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